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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34 호
단기 4340. 2. 14 (음력 12.27)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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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기능장려 수기작품 현상공모 안내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는 범 국민적 참여를 통하여 기능장려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를 확산시키고 기술인의 성공적인 삶을 발굴, 기술인의 긍지와 자부심 고취 및 청소년들이 기술습득 의욕을 갖도록 하는데 기여하고자 기능장려 수기작품을 현상 공모한다고 하니,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가. 접수기간 : 2007. 3. 2(금) ~ 3. 30(금) 나. 응모자격 : 제한없음 다. 공모주제 - 기술인의 긍지와 자부심 및 장인정신을 고취할 수 있는 내용 - 기술인으로서의 성공적이고 감동적인 삶을 그린 사실적 내용 - 기능봉사활동 등 기술인으로서 타의 모범이 되고 귀감이 되는 내용 - 기술인에 대한 인식을 개선, 제고할 수 있는 내용 - 기타 기능존중 풍토조성에 도움이 되는 내용 라. 응모방법 : 200자 원고지 50-60매(A4 10매 이내) 마. 접수 및 문의처 : 한국산업인력공단 기능진흥팀(전화 02-3271-93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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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누구에게나 청춘이 지나가 버렸다고 느끼게 되는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후, 실제로는 그것이 훨씬 뒤의 일이었음을 깨닫는다. / 미니언 먹로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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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二十三章 (노자 - 도덕경 : 제2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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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言自然, 故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 孰爲此者, 天地, 天地尙不能久, 而況於人乎, 故從事於道者, 道者同於道, 德者同於德, 失者同於失, 同於道者, 道亦樂得之, 同於德者, 德亦樂得之,同於失者, 失亦樂得之, 信不足焉, 有不信焉.
희언자연, 고표풍부종조, 취우불종일.숙위차자? 천지! 천지상불능구, 이황어인호.고종사어도자, 도자동어도, 덕자동어덕, 실자동어실. 동어도자,도역락득지, 동어덕자, 덕역락득지, 동어실자, 실역락득지.신부족언, 유불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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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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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셋째 장
직역
자연은 말이 없다. 그러므로 회오리바람은 아침을 마칠 수 없고, 소나기는 하루를 마칠 수 없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 하늘과 땅이다. 하늘과 땅도 이렇게 오래갈 수 없는데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야? 그러므로 도를 따라 섬기는 자는 알아야 한다. 도를 구하는 자는 도와 같아지고, 덕을 구하는 자는 덕과 같아지고, 잃음을 구하는 자는 잃음과 같아진다. 길과 같아지는 자는 길 또한 그를 즐거이 얻으리. 덕과 같아지는 자는 덕 또한 그를 즐거이 얻으리. 잃음과 같아지는 자는 잃음 또한 그를 즐거이 얻으리. 믿음이 부족한 곳에는 불신이 있다.
해석
자연은 만물을 키운다. 그러나 내가 키운다고 말하지 않는다. 경작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내가 저 작물들을 키웠다고, 과연 그러한가 사람은 작물이 자라나는데 도움을 줄뿐이다. 그것을 키우는 것은 땅과 하늘이다. 그러나 내가 키웠다고 말하지 않는다.
회오리바람과 소나기는 하늘과 땅이 爲한 것이다. 그러나 하루를 가지 못한다. 하늘과 땅이 행한 것도 하루를 가지 못하는데 사람이 행한 것은 얼마나 가겠는가. 우리는 우리가 행한 것이 영구 불변하리라 생각을 한다. 로마제국을 세운 자들도 그렇게 생각을 했을 것이다. 삼풍백화점을 세운 사람도 그것이 무너지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이룬 업적은 영구 불변하리라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인간은 지구의 45억년의 삶에 극히 일부분을 점유하고 있을 뿐이다. 수억년동안 지구를 지배했던 공룡이 지금은 석유가 되어 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이 얼마나 갈 것인가.
도를 구하는 자는 도와 같아진다. 아름다운 말이다. 왜 도를 구하는 자에게 도가 내려오지 않는다고 했을까. 구도자는 도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그 속에서 그는 도와 동일시된다. 그러나 도를 자신에게 맞추려는 자는 도가 자신과 같아진다. 그때 변하는 것은 도이다. 그 자신이 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도가 그 자신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변화는 없다. 도를 구하여 얻으려면 자신이 도가 되어야 한다. 자신을 뜯어고치지 않는 자는 결코 도에 다가갈 수 없다.
쉽게 풀어 보자. 영어를 공부한다. 그럼 내가 영어의 발음에 맞추어야 하는가 영어의 발음을 나에게 맞추어야 하는가. 그럼 도를 구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맹세는 어디서 오는가. 불신에서 온다. 사랑의 약속은 어디서 오는가. 불신에서 온다. 언어에 의한 계약은 불신에서 오는 것이다. 자연은 말이 없다. 진정한 믿음은 자연처럼 말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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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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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들으려고 해도들을 수 없고 말은 자연의 무언의 말이다. 그러므로 회오리바람은 아침 동안 계속 물지 못하고 소나기도 온종일 내리지 못한다. 회오리바람을 불게 하고 소나기를 내리게 하는 것은 누구의 조화인가? 그것은 천지가 하는 일이다. 하물며 인간이 자연의 순리에 어긋나는 일을 어찌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도에 따라 행위 하는 이는 도에 동화되고 덕에 따라 행위 하는 이는 덕과 일치되고 실덕에 따라 행위 하는 이는 실덕과 하나가 된다. 도와 동화되면 도 또한 그를 얻은 것을 좋아할 것이며 실덕과 하나가 되면 실덕 또한 그를 얻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나에게 믿음이 부족하다면 남도 나를 믿지 아니 할 것이다.
주
희언: 들을 수 없는 소리, 들을 수 없는 말, 즉 도를 의미함. 표풍: 회오리바람. 취우: 소낙비, 소나기. 종조: 날이 밝은 뒤 아침까지의 시간, 새벽부터 아침까지. 고종사어도자: '도에 좇아 도의 가르침대로 하는 이는 무위를 으뜸으로 하며, 말하지 않음을 근본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왕필의 주) 이황: 하물며 실: 잘못, 과실, 실덕. 실자동어실: 실덕에 따라 행위 하는 이는 실력과 하나가 된다.
해
도에서 나오는 말은 들으려고 해도 도무지 들을 수가 없다. 도는 말을 하지 않아도 모든 진리를 저절로 알려주고 있다. 자연이란 저절로 그렇게 된다. 스스로 그러하다는 뜻이다. 도는 바로 자연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소나기, 회오리바람 등은 자연현상의 일종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현상도 변덕스럽거나 난폭한 것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잔인하거나 난폭한 일을 오래 행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사람은 각자의 수양 정도에 따라 도에 동화되기도 하고 실덕에 동화되기도 한다. 사람은 도의 무언의 가르침과 진실을 배워야 한다. 대체로 사람의 모든 주장은 이해관계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진실성과는 거리가 먼 궤변인 경우도 적지 않다. 맹약을 저버리고 식언을 예사로 하는 것도 인간의 자기본위 이기심 때문일 것이다. 자연의 도는 믿음성을 저버리는 일이 없다. 밤과 낮의 바뀜, 춘하추동의 교체는 태초이래 단 한 번의 어김도 없이 행하여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의 도리는 우리에게 깊은 신뢰감을 주고 있다. 우리가 믿음으로 상대를 대해 주지 않는다면 저쪽 역시 우리를 믿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장에서 노자는 사람이 부자연스런 행위를 그만두고 도를 체득하여 인생과 세계에 대한 근원적인 진리를 배워야 한다는 점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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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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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불법반출되어 돌아오지 않는 석물들
다른 모든 분야에서도 그랬지만 조선총독부는 일본인들이 이 땅에서 불법적으로 약탈하고 혹은 협박과 돈으로 매수해서 일본으로 실어 간 문화재에 대해서는 종류와 수량을 불문하고 기정사실로 삼아 뒤를 묻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소유권을 보호해주었다. 그러면서 불국사와 석굴암 같은 파괴가 심한 일부 중요한 고적을 대대적인 전시효과를 노려 보수하는 척 함으로써 병 주고 약 주고 하는 식의 이중의 기만적인 침략정책을 수행했다. 총독부의 특례적인 반환 노력과 일부 양식 있는 일본인 학자의 협력으로 일본에서 되돌아온 것은 일제 36년을 통해 앞에서 소개한 '경천사 십층 석탑'(국보 제86호)과 '불국사 사리탑'(보물 제61호)뿐이었다. 이흥직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그것은 "일본인들이 불법으로 가져간 대소 무수의 석물에 비하면 구우의 일모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결국 총독부는 일단 저들의 본토로 실어 간 문화재에 대해선 그 경위를 일절 추궁한 일이 없었던 것이다. 세키노의 증언기록을 빌리면 불국사 사리탑의 경우, 개성에 있던 일본인이 도쿄로 불법반출한 후 요릿집 정원에서 자랑스레 공개되어 잡지에 사진과 해설까지 실렸다는 것이니 그런 사례가 당시 일본 안에서 얼마나 많았을까. 다행이 그때의 사리탑은 20년 후의 소유자에 의해 기적적으로 반환이 되었지만 오늘날 석굴암과 불국사의 다보탑을 병신으로 만들고 있는 소탑과 감불과 돌사자상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다. 그 한스러움을 이홍직 교수는 작고하기 전에 또 이렇게 쓰고 있다.
"석굴암의 소탑과 감불의 행방을 추궁하여 그것을 원상복귀할 것을 전 국민의 염원으로 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어찌 석굴암에서 없어진 것뿐이랴. 일제 때 일본인들이 약탈하고 불법 반출해 간 무수한 한국문화재의 대다수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강을 건너고 있는 것이다. 현재 일본 안의 여러 미술관과 개인 컬렉션에서 한일합방 전후 혹은 그 이후에 이 땅에서 반출해 간 부지기수의 각종 문화재의 일부가 목격 또는 확인되고 있지만 이미 반환을 강력히 요구할 수 있게 돼 있지가 않다. 일본정부를 상대로 한 과거의 불법적인 반출문화재 반환 요구와 제한된 실현은 1965년의 반환목록으로 일단 끝나 있다. 그렇다고 아직도 무수하게 일본에 남아 있는 것들이 오늘날 한국인의 눈에 자연스럽게 보여질 수는 도저히 없는 일이다. 개성지역에서의 도굴품으로서 현재 일본의 중요문화재(보물급)로 지정돼 있는 '고려청자음각정병' 의 소장처인 도쿄의 네즈미술관 입구와 정원에는 물을 것도 없이 일제 때 이 땅에서 불법반출해 간 석물들-고려시대의 우아한 '팔각원당형부도' 를 비롯하여 같은 고려유물인 방형탑과 귀부, 조선시대의 석등과 문무석인, 석양, 동불, 동종 등-이 버젓이 놓여 있어 오늘날 그곳을 찾는 한국인의 심회를 불쾌하게 하고 있다. 약 10년 전에 그곳을 방문했던 한 국내 전문가가 미술과 책임자에게 그것들을 소장하게 된 유래를 물었더니, "일제시대에 고물상에서 구입했다" 고만 말할 뿐, 아무런 기록자료도 없었다고 한다. 물론 그것들이 반출당한 국내의 원위치나 절터, 그리고 탑비명 같은 것도 전혀 알 수 없었다. 이러한 불법반출 석물들은 네즈미술관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발견되고 있다. 도쿄의 '오구라집고관' 에는 율리사터에서 실어간 팔각석탑이 있고, 오사카미술관은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사리탑과 비석, 그외 고려시대 것으로 믿어지는 좌불을 갖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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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철학에 이르는 길 - 강영계
제 7장 자연적 아름다움과 예술적 아름다움
1.자연과 예술
우리들은 진리를 알고 선을 행하며 아름다움을 느낀다. 학문과 종교와 예술은 인간의 정신적인 삶을 구성하는 세 가지 세계이다. 여기에서 정신적인 삶이라고 하는 말은 일상적인 삶과 대립되는 개념이다. 삶은 하나의 전체적인 것이다. 전체적인 삶은 반복적인 것과 비반복적인 것으로 구분된다, 욕망의 본능에 따라서 매일 매일을 살아갈 때 그러한 삶은 반복적이며 일상적이다. 우리들이 살아가고있는 대부분의 삶은 일상적인 것에 물들어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도 우리들은 변하지 않는 앎을 추구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학문의 세계를 구성한다. 또한 우리들은 세계의 근원으로서의 절대자에 대한 신앙을 가지려고 한다. 이때 종교의 세계가 성립한다. 그런가 하면 우리들은 아름다움을 느끼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 경우 예술의 세계가 성립한다. 그렇다면 예술적인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하여 아름다움이 무엇인가 밝혀져야 할 것이고 다음으로 예술이 무엇인가가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둘에다 둘을 보태면 넷이다. 이것을 우리는 선하다고도 하지 않으며 아름답다고 하지도 않는다. 어떤 장관이 길거리의 거지를 똑같은 인격을 가진 인격체로 대하며 대화를 나눈다고 하자. 이것을 우리는 참다웁다고 하지 않으며 아름답다고 하지도 않는다. 이와 같은 행동은 선한 행동에 속한다. 그러나 호수 가에 희고, 붉고 또한 노란 색의 장미꽃이 활짝 피었다고 하자. 또한 아늑한 실내에 모짜르트의 피아노 소나타가 울려 퍼지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이 경우 우리들은 분명히 "아름다운 장미꽃"이니 또는 "아름다운 음악"이니 하고 느끼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이란 대상이 어떤 성격을 가지는가에 따라서 여러 가지 다른 조화된 느낌을 가지게 된다. 예컨대 내가 어떤 여인과 마주앉아서 대화를 한다고 가정해보자. 이 여인은 전형적인 한국 미인의 용모를 가지고 있으며 게다가 교양이 넘치고 천박한 맛은 전혀 찾을 수가 없다. 나는 이 여인을 "우아한 여인"으로 느낀다. 이러한 경우의 아름다움은 우아미라 불리운다. 다음으로 숭고미를 이야기할 수 있다. 추사의 어떤 붓글씨 앞에 서서 이 붓글씨가 인간이 썼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경지를 보여준다고 하자. 이때 나는 숭고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다음으로 비장미를 들 수 있다. 고대 희랍의 비극이나 세익스피어의 비극에서 우리들은 비장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또한 풍자극이나 코메디 안에서 우리들은 해학미를 느낀다. 익살과 풍자가 비난과 욕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삶의 상황에 조화를 가져다줄 때 우리들은 해학미를 느낀다. 다음으로 추미를 꼽을 수 있다, 보통 아름다움과 추함은 반대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로나 추함이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며 추함이 아름다움으로 승화될 때 우리는 추미를 느끼게 된다. 노트르담의 꼽추를 예로 들어보자. 꼽추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에스메랄다를 사랑한다. 소설의 머리에서 우리는 꼽추의 일그러진 얼굴과 흉칙한 모습에서 아름다움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추함만을 본다. 그러나 소설이 진행되는 사이에 꼽추의 한결같은 사랑과 에스메랄다의 무관심에 점차로 우리는 관심을 바꾸며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비장미까지 느끼고 드디어는 꼽추를 더 이상 추하게 보지 않고 그에게 추미를 느낀다. 조화로운 느낌은 이처럼 대상의 성질 및 그 성질에 우리에게 어떻게 관계하느냐에 따라서 가지각색의 아름다움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아름다움은 크게 나눌 때 자연적 아름다움과 예술적 아름다움으로 구분된다. 자연이라는 말은 "스스로 그러함"의 뜻을 지닌다. 스스로 그러한 것의 아름다움이 바로 자연미이다. 그렇다면 자연미는 예술미와 대립되는 개념이다. 자연 대상으로부터 우리는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기 마련이다. 설악산, 한려수도, 홍도 등의 경치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구름, 꽃, 나무 등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이처럼 우리가 자연 대상으로부터 느끼는 아름다움은 자연미이다. 그러나 자연미와는 달리 인간의 의식이 현실적으로 자연을 변형시켜서 구성한 대상으로부터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이러한 아름다움은 예술미라고일컬어진다. 인간은 세계를 조화롭게 구성하며 그처럼 구성된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기 마련이다. 인간이 세계를 조화롭게 구성하는 방식을 예술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여기에서 다시 예술을 보다 쉽게 파악하기 위하여 내가 수업 시간에 학생과 나누는 대화를 인용해보기로하자.
"우리는 인간의 의식 세계를 학문과 종교와 예술로 구분할 수 있는데 우선 예술을 놓고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그러면 어떤 사람을 예술가라고 할 수 있는지, 자, 송군, 이야기해보게." "사회에서 인정하는 사람을 예술가라고 합니다." "좋은 답이네. 예술가라고 하면 구체적으로 시인, 소설가, 음악가, 화가 등등으로 나눌 수 있네. 특정한 사회단체, 곧 소설가 협회와 같은 곳에서 나를 전혀 인정해 주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나를 멋대로 소설가라고 하지 못하며 남들도 나를 소설가라고 불러주지 않네. 그렇다면 여기 어떤 한국 시인이 있다고 생각해보세. 이 사람이 한국에서 시를 쓰며 시인으로 인정받다가 어떤 일로 해서 프랑스로 이민 가서 산다고 해보세. 이 사람은 프랑스 말은 전혀 못하는 사람일세. 프랑스에서 이 사람을 시인이라고 인정할까?" "한국 시인이라고는 인정하지만 프랑스 시인이라고는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좋은 답일세. 그러면 예술가는 반드시 사회가 인정해주어야만 예술가일 수 있을까?" "......"
사실 모든 문제가 근원적인 물음에 도달하면 답을 찾기 힘들게 된다. 우리는 두 가지 차원에서 예술가를 이야기할 수 있다. #1좁은 의미에서 특정 사회가 인정하는 예술가가 있으며 #2넓은 의미에서 모든 인간을 예술가라 볼 수 있다. 김소월이나 서정주를 들먹일 때 그리고 김홍도며 김중업을 화가라 부를 때 이들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예술가들이다. 그러나 보다 더 근원적인 의미에서의 예술가는 누구인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술가는 인간들 각자이다. 어린아이는 흥이 나면 노래를 읊조리고 노인도 마찬가지이다. 소년은 애타는 감정으로 그리움과 사모의 정을 편지에 담아서 등교 길에 한번 본 소녀에게 부친다. 그것은 이미 한 편의 시이다. 국민학교 1학년 꼬마는 아파트의 좁은 방 흰 벽에다 넓은 바다와 산과 구름을 제멋대로 그린다. 그것은 이미 한 폭의 그림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예술가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대상을 조화롭게 구성하며 그렇게 구성함으로써 아름다움을 느끼고 또한 아름다움을 누리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아름다움을 창조하며 구성한다. 피아니스트의 예를 들어보자. 어떤 피아니스트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한다. 그의 연주 시간은 30분이 걸렸다. 그러나 30분의 연주 시간이라는 제한된 시간 안에서 피아니스트는 순간과 영원을 동시에 연주한다. 30분의 정해진 시간 속에서 피아니스트는 자신의 혼을 다하여 한 인간의 길고 짧은 삶을 연주하며 나아가서 끝을 알 수 없는 자연이 긴 세월을 연주한다. 피아니스트는 시간을 구성하며 시간을 창조한다. 그러면 화가는 어떤가? 어떤 화가가 유리창 만한 화폭에 산과 바다를 그렸다고 하자. 이 화가는 정해진 공간을 무한으로 구성하며 창조한다. 이렇게 볼 때 예술이란 인간이 그곳에 아름다움을 창조하며 구성하는 세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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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돌팔이
본뜻 : 돌팔이라는 말이 생기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어설픈 기술을 파는 사람이란 뜻에서 '돌다'와 '팔다'가 결합된 것이라는 설과 '돌다'라는 동사와 무당이 섬기는 바리데기 공주를 가리키는 '바리'가 합쳐져서 된 '돌바리무당'이 어원이라는 설도 있다. 그 중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는 돌바리(돌아다니는 무당) 어원 설이 아닐까 한다. 돌바리는 일면 돌무당이라고도 하는데 그는 집집을 방문해서 치료를 겸한 간단한 기도를 하고 점을 쳐준다. 그렇게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돌바리는 각양각색의 사람을 만나고 갖가지 사건을 겪는 통에 나름대로 여러 가지 잡다한 지식을 가지게 된다. 주로 환자나 우환이 있는 집에 불려 다니던 돌바리는 그 와중에서 얻은 지식으로 웬만한 환자를 보기도 하고 간단한 처방도 내린다. 그러는 중에 환자를 잘못 다뤄 큰 피해를 끼치는 일도 종종 벌어지곤 했다. 이 때문에 이들을 서툰 기술을 가지고 이리저리 다니면서 지식이나 기술을 파는 자들로 여기게 된 것이다. 이처럼 한 곳에 터를 잡지 못하고 이곳 저곳으로 떠돌아 다니면서 무업을 하는 선무당을 '돌바리' '돌무당'이라 불렀다. 그것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돌팔이로 변한 것이다.
바뀐 뜻 :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면서 설익고 변변찮은 기술이나 학식, 또는 물건을 파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되바라지다
본뜻 : 물건의 모양이 툭 비어져나와 깊고 아늑한 맛이 없는 형태를 가리킨다
바뀐 뜻 : 너그럽지 않고 포용성이 적으며, 행동이나 하는 짓이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야무지고 똑똑한 체 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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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4. 영주 없는 토지는 없다
아담이 밭을 갈고 하와가 옷감을 짤 때 그 누가 영주였는가?
중세 봉건사회는 14세기에 총체적인 위기를 맞는다. 특히 14세기 중엽 전유럽을 강타한 흑사병은 유럽 인구를 14세기 초의 1/3~1/2로 격감시켜서 봉건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농촌은 일손 부족에 시달렸고, 농지가 버려지거나 아예 마을 전체가 폐촌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변화에 영주와 농민 모두가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영주들은 노동력의 부족을 메우기 위하여 서서히 진행되던 농노해방을 중단하고 부역을 강화하려 했다. 왕의 관리들은 임금을 동결하기 위해 '노동조례'를 제정하기도 했다. 더욱이 백년전쟁의 전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1381년 의회가 신설한 인두세는 농민들에게는 과중한 것이었다. 1381년에 영국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은 이러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농민들의 분노가 터진 사건이었다. 농민반란의 지도자는 와트 타일러였지만 농민들에게 반란을 고무시킨 것은 켄트의 수도사 존 볼(John Ball)이었다. 원래 성직자였던 볼은 심금을 울리는 연설로 유명했다. 당시는 인쇄매체가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연설이 최고였다. 볼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성경의 내용을 가지고 농민들을 고무했다. 창세기에는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화와의 생애가 간단히 언급되어 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서 아담은 땀을 흘리면서 밭을 갈아야 하고, 하와는 해산의 고통을 당해야 한다고 선언되었다. 모든 사람은 똑같이 이러한 형벌을 받아야 했다. 이러한 이야기로써 볼이 내세운 구호는 "아담이 밭을 갈고 하와가 옷감을 짤 때 그 누가 영주였는가?"였다. 영주는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근면하게 일했다. 자기가 필요한 것은 자기가 만들었다. 스스로 밭을 갈아서 씨 뿌리고 자기 먹을 곡식을 스스로 거두었다. 자기 옷도 스스로 만들어 입었다. 그런데 영주들은 어떤 자들인가? 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서 생산물을 빼앗고 각종 부담을 강요한다. 인간사회의 모든 불행의 원천은 바로 영주들이다. 농민들은 영주들의 몫까지 생산하기 위하여 땀을 흘려야 한다. 그러면서도 영주들은 끊임없이 농민들에게 무엇인가를 더 요구한다. 영주들이야말로 사악한 악마이다. 그들이 없어져야 모든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 감동적인 볼의 설표의 요지였다. 볼의 설교는 억압당하던 농민들에게는 복음, 즉 기쁜 소식이었다. 영주의 권위를 자명한 것으로 인정해 온 농민들에게 이제 그들의 존재는 신의 질서에 어긋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그것을 무너뜨리는 것은 신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불의 설교에 감동한 '경작하는 사람, 실 짜는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인근 영주들의 저택을 공격했다. 그들의 무기라야 고작 방망이 정도였고, 극소수가 활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의 힘이 뭉칠 때 엄청난 파괴력이 있었다. 런던시에서 임금동결령 때문에 의회에 불만이던 가난한 시민들이 농민반란군에게 협조적이었기 때문에 농민군대는 런던까지 입성할 수 있었다. 농민군은 왕에게 농노제를 폐지하고 지대를 내려줄 것을 요구했다. 런던은 공포의 도가니가 되고, 젊은 국왕 리처드 2세는 반란 농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농민들의 요구는 한 마디로 인신과 토지의 자유, 즉 봉건적 예속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그러나 왕의 시종들에 의해 와트 타일러가 살해되고 런던시의 지배층이 민병대를 조직해 공격하고, 지방의 영주들이 병력을 거느리고 도착하자, 반란농민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지방에서의 반란도 영주들의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영국의 농민반란은 실패했지만 영주들의 시대가 점차 사라져 가는 한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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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마음을 열면 세상은 참 아름답습니다 - 안의정
참새와 죄수
로버트 스트라우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살인범으로 캔자스 주의 한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성질이 포악한데다가 무뚝뚝하고 사교성도 없었던 그는 동료 죄수들과 자주 싸움을 벌여 교도관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어머니가 집에서 2천 마일이나 떨어진 교도소로 면회를 왔으나 교도관이 핑계를 대면서 자신을 만나지 못하도록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로버트는 식사 도중에 그 교도관과 다툼을 벌이다, 곤봉으로 머리를 치려는 그를 흉기로 찔러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 일로 교수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사형수가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은 어머니는 백악관으로, 토머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부인을 찾아가 사형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눈물로 사정했습니다. 어머니의 정성으로 결국 로버트는 교수형을 받기 수일전에 가까스로 무기형으로 감형될 수 있었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죽을 때까지 독방에서 살아야 하는 그에게 인생의 의미가 있을 리 없었습니다. 자살도 여러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를 생각하면 죽을 수가 없었습니다. 일단은 살아보기로 마음을 정하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하루 15분간의 운동 시간을 감방에서 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를 맞으며 운동장에서 산책을 하다가 기운이 없어 울지도 못하는 참새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가여운 생각에 감방으로 데려와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바퀴벌레를 잡아서 먹이는 등의 지극한 간호 끝에 참새는 건강을 회복하여 날아가고, 그에게는 대신 카나리아 한 쌍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로버트는 모든 정성을 다해 그 카나리아를 번식시켜 다른 감방에서도 새를 키우게 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새들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질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내기 위해 교도소에 비치된 관련 서적들을 밤새워 읽고, 어머니에게 부탁하여 각종 약품을 들여보내도록 했습니다. 피눈물 나는 실험을 계속한 끝에 마침내 그는 그 질병의 정체와 치료법이 무엇인지를 밝혀냈습니다. 그는 세계적인 학술지에 논문이 게재되는 영광을 누렸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가 박사 학위는커녕 초등학교 3학년을 겨우 끝낸 무식쟁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의 인간 승리는 (캔자스 시티 스타)라는 일간지에 크게 실리면서 비로소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신문기사를 보고 면회 온 여인과 결혼하는 행운도 얻었습니다. 그는 차후에 책을 써서 세계적인 새 전문가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지만, 무기형만은 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감방 안에서 하는 일 없이 그저 세월만 보냈다면 세계적인 조류 학자로서의 로버트 스트라우드는 없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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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시인 연산군과 내시들의 얘기
환관 김처선
연산군의 치세는 난정의 연속이었다. 강상과 윤기를 소중히 하였던 유교국가의 신하들이 임금의 잠자리 시중을 들어야 할 기생들을 공개적으로 뽑아들이는 일에 나서면서도 부끄러워하질 않았고, 임금은 궐안 경회루의 연못에 꽃배를 띄우고 그 기생들을 희롱하며 풍악을 즐겼으며, 그것도 모자라서 수많은 민가를 헐고 사냥터를 만들기까지 하였다. 역사는 난정의 연속이었던 연산조에 두 사람의 충절이 있었다고 적었다. 한 사람은 대사헌 홍귀달이요, 다른 한사람은 놀랍게도 환관 김처선이었다. 내시 김처선의 사람됨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연려실기술"에 적힌 그에 관한 기록을 상고하지 않을 수 가 없다.
김처선은 관직이 정2품이었다. 연산주가 어둡고 음란하였으므로 김처선이 매양 정성을 다하여 간하니, 연산군은 노여움을 속에 쌓아 두고 겉으로 나타내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자신이 궁중에서 처용의 노릇을 하여 음란함이 한이 없을 때 김처선은 집안 사람에게 '오늘 나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하고 궁으로 들어가서 거리낌없이 말하기를 '늙은 놈이 네 임금을 섬겼고 경서와 사서에 대강은 통하지만 고금에 상감님이 하는 것과 같은 이는 없었습니다' 하였다. 이에 연산주가 성을 참지 못하여 활을 당겨 쏘아서 갈빗대에 맞히자, 김처선은 '조정의 대신들도 죽음을 아끼겠습니까. 다만 상감께서 오래도록 임금 노릇을 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하였다. 연산주는 화살 하나를 더 쏘아 맞혀서 공을 땅바닥에 넘어지게 하고 그 다리를 끊고서, 일어나라 하였다. 이에 김처선은 임금을 쳐다보면서 '상감님은 다리가 부러져도 다닐 수가 있습니까' 하자, 또 그 혀를 끊고 몸소 그 배를 잘라 창자를 끄집어 내었는데, 죽을 때까지 간함을 그치지 아니하였다. 마침내 연산주는 그 시체를 범에게 주고 조정과 민간의 처자를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김처선을 죽인 다음에 있었던 일들이 비교적 소상하게 적혀 있다. 우선 모든 백성들의 이름이나, 처가 사용되는 용어에서 '처' 자는 다른 글자로 바꾸게 했으며, 김처선의 양자 이공신을 주살하였으며, 김처선 부모의 무덤을 뭉개고 석물을 치우라 하였고, 김처선과 이공신의 처는 내사복시의 종으로 삼아 평생 동안 말을 먹이는 일에 종사하게 하였다. 위의 두 기록을 읽노라면 몇 가지 재미있는 일을 발견하게 된다. 내시도 경서와 사서에 통달한 사람이 있었고, 따라서 대감이라고 불리우는 2품직에 오를 수가 있으며, 성불구자인 내시에게도 처, 첩이 있으며, 성이 다른 양자를 들여서 후계자를 삼고 있다면 족보도 있었을 것이며, 게다가 부모의 무덤을 호화롭게 꾸밀 만큼의 재력이 있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흥미로운가. 그렇다면 내시의 실상에 대하여 좀더 소상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내시의 조건
내시가 일종의 신체장애자임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그들이 장애자임은 확실하지만, 어디가 얼마만큼의 장애인가 하는 문제는 왕왕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첫째는, 성기인 남근과 고환 자체가 없다는 설과 둘째는, 남근은 있으나, 고환만이 없어서(혹은 거세 하여서) 오직 생식기능만이 없다는 설이다. 전자의 경우라면 성행위가 불가능할 것이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성행위는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생식 기능만 없다는 것이 된다. 어찌 되었거나 소위 고자라고 불리우는 장애자가 내시의 개념이 되겠지만, 여기에도 선천적인 고자냐 아니면 궁형과 같은 형벌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고자냐 하는 것이 논란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이상의 상태, 즉 남근은 있으나 고환이 없다와 남근과 고환이 모두 없다는 두 종류의 장애자 중에서, 혹은 태어날 때부터 고자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장애자 중에서 어느 경우가 내시에 합당할 것인가를 따진다면 논란의 여지가 얼마든지 있겠지만, 모두 내시의 요건을 갖추었다는 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선천적인 고자, 다시 말하여 고자로 태어나는 것은 남근이나 고환을 거세하는 것으로 생식 기능을 제거하게 된 연유나 배경에 대해서는 옛기록을 상고해 볼 수가 있다. 인위적으로 고환을 잘라내어 고자를 만드는 것(거세하는 일)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절 궁전에서 노래를 부르는 소년합창단이 있었는데, 소프라노 파트에 있는 소년들이 변성기를 맞으면서 목소리가 탁해졌던 탓에 좋은 화음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잘 훈련된 화음을 더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 변성기가 오기 전에 소프라노 파트의 소년들의 고환을 거세하기 시작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환을 제거하면 호르몬 작용이 큰 변화를 일으키면서 수염이 나질 않고 목소리가 맑아진다는 의학적인 뒷받침까지 설명되어 있으니까, 일단은 신빙성이 있는 기록일 것임에 분명하다. 둘째는, 궁형이라는 형벌로 성적인 기능을 제거하여 임금의 여자들인 비빈들의 시중을 들게 하거나 감시하게 한 경우이다. 내시는 아니지만 비빈들의 거처를 출입할 수 있었던 사마천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셋째는, 스스로 고자가 되기를 자청하여 남근과 고환을 잘라내고 내시가 되는 경우일 것이다. 여기에도 그에 합당한 여건이 마련되어 있었음에 유의 할 필요가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고려왕조의 초기까지는 내시가 고위관직을 겸직할 수 있었으므로 인위적으로 생식 기능을 제거한 예가 있었을 것이지만 그 구체적인 기록은 찾기가 어렵다. 그러나 중국과 같은 큰 나라에서는 내시의 지위가 상서(조선 시대의 판서와 같음)의 자리에도 오를 수 있었기에 선천적인 고자만으로 그 수요를 충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남성을 상징하는 신체의 일부를 훼손해서라도 내시가 되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정이 이와 같다면 남근과 고환을 제거하는 시술이 은밀히 성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록은 남근과 고환을 제거하는 시술과정을 세밀하게 적어 놓지는 않았으나 남근과 고환을 제거하고 나서 요도에 밀대롱을 꽂고 재를 뿌린다. 상처가 아물고 밀대롱으로 오줌이 흘러 나오면 시술은 성공한 것'이라고 적혀 있다. 이 과정은 오늘날 돼지를 거세하는 방법과 조금도 다르지가 않다. 시술은 성공하였다고 하더라도 절단된 부분은 어찌하는가. 더러는 찾아가기도 하고 더러는 시술한 곳에 맡겨 놓았다고 하는데,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보관하였다는 기록은 없어도 보관의 필요성에 대한 해답은 분명하다. 전통적인 동양사상에,
신체불모수지부모 불감훼상효지시야
라는 것이 있으니, 몸이며 머리칼은 물론이고 피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부모님이 물려주신 것이니, 감히 훼손할 수 없음이 효도의 시작이라는 뜻이고 보면 잘라 낸 남근이나 고환이 없고서는 죽어서도 관속에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고위관직에 오른 내시나 부를 누리게 된 고자들은 잘라 낸 부분을 비싼 값으로 다시 사들여야 했던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인위적으로 남근이나 고환을 제거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심산 유곡에서 사는 화전민들이나, 극도로 빈한하여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운 사람들이 갓 태어난 사내아이의 남근을 제거해 주는 것으로 가난에서 해방(내시라도 할 수가 있다면) 되기를 기원하는 풍조가 그것이다. 이런 경우, 갓난 아기의 남근에 명주실을 감아 놓으면 발육이 부진하다가 어느 시기에 이르면 떨어져 나가게 된다. 또 다른 경우는 고위관직에 있는 내시들이 후계자를 위하여 양자를 들이고 거세를 하는 경우이다. 김처선의 양자가 성이 다른 이공신이며, 그의 행적이 "조선왕조실록"에 등재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를 입증할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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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공기는 자유롭게 한다
서울에서는 공기의 오염이 큰 사회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시골에서는 서울에 올라오면 곧 살 길이 마련되기라도 하는 듯 공기 맑은 시골에서 혼탁한 서울로 뛰어든다. 그러나 중세 유럽에 있어서는 도시가 농노에게 있어 문자 그대로 자기의 땅이었다. 유럽에서 도시가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13세기 경의 일이었는데 처음 봉건 영주들은 도시의 성립이 그들에게 이롭다고 생각하여 이를 보호했다. 그러나 점차 도시 상인의 길드(조합)와 영주 사이의 이해가 대립되자 도시는 영주에게 돈을 주고 자치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장원의 영주 아래 있던 농노들은 이동의 자유가 없었지만 도시로 도망쳐서 일정기간(보통 1년하고 1일) 영주에게 들키지 않으면 자유로운 시민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로해서 '도시의 공기는 (사람들) 자유롭게 만든다'는 속담이 생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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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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