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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31 호
단기 4340. 2. 11 (음력 12.24) / 발행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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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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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누구나 화낼 줄은 안다. 그건 쉬운 일이다. 그러나꼭 화를 내야 할 올바른 대상에게, 올바른 정도껏,올바른 때에, 올바른 목적을 위해, 올바른 방법으로 화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 아리스토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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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二十章 (노자 - 도덕경 : 제2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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絶學無憂, 唯之與阿, 相去幾何, 善之與惡, 相去若何, 人之所畏, 不可不畏, 荒兮其未央哉, 衆人熙熙, 如享太牢, 如春登臺, 我獨泊兮, 其未兆,如孀兒之未孩, 래래兮, 若無所歸, 衆人皆有餘, 而我獨若遺, 我愚人之心也哉, 沌沌兮, 俗人昭昭, 我獨昏昏, 俗人察察, 我獨悶悶, 澹兮其若海, ?兮若無止, 衆人皆有以, 而我獨頑似鄙, 我獨異於人而貴食母.
(위 래래의 래는 현재 사용하지 않는 '게으를 래'입니다.) (? 는 '높이부는 바람 료'입니다. 西風을 말하며 공허함으로 해석됩니다.)
절학무우 유지여야, 상거기하? 선지여오, 상거약하? 인지소외, 불가불외 황혜, 기미앙재! 중인희희, 여향태뢰, 여춘등대 아독박혜, 기미조, 여영아지미해 루루(래래)혜, 약무소귀 중인개유여, 이아독약유 아우인지심야재! 돈돈해! 속인소소, 아독혼혼 속인찰찰, 아독민민 담혜기약해, 료혜약무지 중인개유이, 이아독완사비 아독이어인이귀식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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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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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째 장
직역
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없다. 예와 아니오가 서로 얼마나 갔는가. 선과 악이 서로 간 것이 같은가.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을 나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황량하도다. 그 중심을 못 잡았구나. 뭇사람들이 희희낙낙한 것이 큰 소를 잡아 잔치를 여는 것 같네, 봄에 누각에 오르는 것 같네. 나홀로 담백하구나, 그 아무것도 드러나지 아니함이 어린아이가 아직 웃지 않는 것 같다. 난감하구나, 돌아갈 곳이 없는 것 같네 뭇사람이 남음이 있는데 나홀로 부족한 것 같은가. 내가 어리석어 다른 사람의 그 마음을 알지 못하는가. 혼돈스럽도다. 세간 사람들은 밝은데, 나홀로 어둡구나, 세간 사람들은 잘도 살피는데, 나홀로 답답할 뿐일세. 담담하여 바다와 같고, 거센 바람이 일때는 그칠 줄을 모르네. 뭇 사람들은 모두 쓸모가 있는데, 나 홀로 완고하고 비천하여 쓸모가 없네. 나홀로 뭇사람과 다른 것이 있다면 먹이는 엄마를 귀히 여기는 것이네.
해석
글씨체가 다른 부분은 노자의 상태이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같이 두려워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두려워하는 것을 묻어 두고 있다. 희희낙낙하고 즐거워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저변에는 두려움이 있다. 그것은 생과 사의 문제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애써 외면을 한다. 그리고 잔치를 벌이고 즐긴다. 봄이 가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면서. 노자는 내면으로 들어가고 있다. 어린아이가 아직 웃지 않는 상태. 순수한 상태로 가고 있다. 그것은 매우 힘든 길이다. 그리고 그 길은 돌아갈 곳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왜 그렇게 순박하게 사는가. 이 세상에는 살필 것도 가질 것도 많이 있는데. 보아라 저 빌딩을 가지고 싶지 않은가. 저 금싸라기 땅을 가지고 싶지 않은가. 황금에 대해서는 너무 잘 살핀다. 그리고 나의 땅과 남의 땅에 대한 구분에는 별도 뜨지 않은 밤에도 가능하다. 빛이 없어도 구분 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 정도로 밝다. 그러나 노자는 바다와 같고 바람과 같다. 바람은 머물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는다. 땅에 황금에 빌딩에 머물지 않는다. 그랬기에 돌아갈 곳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멍청해 보인다. 사람들은 돌아갈 집을 마련한다. 노자는 식모를 귀히 여긴다. 옷갓 것을 먹이는 어미. 바로 생명의 근원이자 모든 물이 돌아가는 곳이다. 그곳으로 사람도 돌아간다. 노자는 육체가 돌아갈 집을 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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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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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학문이란 것을 없애 버리면 인간에게 근심은 사라질 것이다. 예! 하고 공손하게 대답하는 것과 응! 하고 교만하게 응대하는 것과는 얼마나 차이가 나는 것일까? 남들이 두려워하는 대상을 나 역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구나. 그러나 나는 세상 사람들과 멀고도 멀어 그 끝을 모르겠노라.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쾌활하게 웃으면서 육식을 즐기듯이 봄날의 동산에 올라 전망을 즐기는 듯하건마는, 나만은 홀로 담담하고 고요하게 있으니 그 욕심이 없는 모습이 마치 웃을 줄도 모르는 갓난아이 같구나. 나른하고 고달퍼서 돌아갈 곳조차 없는 사람 같구나. 세상 사람들은 욕심과 희망에 들떠 있지만 나홀로 만사를 다 상실한 것 같구나. 나의 마음은 어리석은 것일까? 분별도 판단도 못하고 몽롱하기만 하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영악하고 빈틈이 없건만 나홀로 멍청하고 흐리기만 하구나, 세상 사람들은 모두 분별력이 있고 사리에 밝아 영리하건만 나만 홀로 세상 물정에 어두운 것이 우둔하기만 하구나. 바다처럼 출렁대며 흔들리면서 소리치고 지나가는 바람과 같이 그침을 모르겠노라. 세상 사람들은 다 유능하고 쓸모가 있으나 나만 홀로 고집 만세고 촌티가 나는구나. 그러나 나만은 홀로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생명의 본질을 귀하게 여기노라.
주
유: '예'하고 공손하게 대답하는 것. 아: '응'하고 교만하게 대답하는 것. 황혜: 아득하고 멀게. 미앙: 다함이 없는 것, 끝이 없는 것. 앙은 다하다 즉 전과 동일함. 희희: 즐거워하며 웃는 모양, 희희와 같은 뜻임. 태뢰: 나라의 제사에 쓰는 소, 양, 돼지의 재물을 말함. 박혜: 담담하고 조용한 모양. 미조: 기쁨, 슬픔 등의 감정 표현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 해: 아기의 웃음소리. 래래혜: 나른하고 피곤한 모양, 맥이 풀려 있는 모양. 돈돈혜: 변별도 식별력도 없는 멍청한 듯한 모양, 흐리멍덩한 모습. 소소: 사리에 밝은 것, 재능과 식견을 자랑하는 것. 찰찰: 깨끗하고 분명한 것, 빈틈없고 자세한 모양, 잘고 까다로운 것. 민민: 사리에 밝지 못한 어수룩한 모습, 흐릿하고 멍청한 모습, 답답한 모습. 식모: 생명의 근원, 원천이란 뜻임(식모생지본야 왕필의 주석). 모는 도 즉 자연을 상징하고 있음.
해
이 장에서도 노자는 기성 사회의 문화에 대한 비판을 신랄하게 행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반문화선언의 계속이다. 세상 사람들은 갈고 닦는 학문이란 근심과 번민을 가져다 줄 뿐이다. 그것은 선과 악에 대한 시시비비를 따지는 마음, 남보다 앞서려고 하는 경쟁심 등의 욕망을 일으키게 한다. 학문으로 자신을 과대 포장하여 스스로 똑똑한 체 자만하며, 큰 일을 벌이는 자들은 노자의 안목으로 보면 사람의 본성을 그르치는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들인 것이다. 멍청한 듯, 아무것도 안하는 듯이 자연대로 살아가는 것이 도를 체득한 사람의 생활 태도인 것이다. 자연의 대도에 순응하며 배움, 경쟁심 등의 세속적인 집착을 버릴 때 근심과 걱정 등의 인간적 번뇌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 장을 읽고 있으면 진리의 대해 앞에 홀로선 현자의 고독과 초연함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속 인과의 대화를 포기하고 진리와 마주선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노자는 이 장에서 반어와 역설적 표현으로 자신을 멍청하고 우둔하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세속적 지식과 욕망의 겉치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반 사람들의 속물 근성을 개탄하고 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 모든 관념적 허상을 벗어 던지고 생명의 근원인 도를 존중하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가 생명의 근원이란 뜻으로 식모라는 용어를 쓴 점 역시 제 6장의 현빈 등의 표현과 함께 재미있는 착상이다. 그를 페미니스트의 비조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은 것은 이와 같은 그의 독특한 발상법 때문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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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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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석굴암에서 사라져버린 아름다운 오층소탑
1909년 가을의 일이었다. 신라의 고도 경주 일원의 고적을 보러온 일제 고관 일행이 있었다. 2대 통감이 된 소네 아라스케가 초도순시라 하여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경주를 찾은 것이었다. 그들은 불국사로 해서 석굴암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그들이 그들이 돌아간 후 석굴암 안에 있던 아름다운 대리석 오층소탑이 온데간데 없이 증발했다. 소네가 개인적으로 탐을 냈었거나 아니면 어딘가에(저희 황실 같은 데) 선물하기 위해서 일본으로 빼돌린 것이 분명했다. 일본인들조차 그것은 소네가 가져갔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었다. 다음과 같은 증언기록들이 그 사실을 명백히 알려준다. 먼저 경주박물관 초기(1930년 전후)에 촉탁으로 관장을 대리했던 모로가의 증언이다.
"지금 석굴암의 9면관음(11면관음의 잘못) 앞에 남아 있는 대석위에 불사리가 봉납됐었다고 구전되는 소형의 훌륭한 대리석제의 탑이 있었는데 지난 명치 41년 봄(42년 가을의 착오. 1909년)에 존귀한 모 고관이 순시하고 간 후 어디론지 자취를 감추어버린 것은 지금 생각해도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경주의 신라유적에 대하여)에서)
다음은 한국의 미술과 민예의 열렬한 연구가였던 야나기 무네요시의 언급이다.
"목격자의 술회를 빌면 11면관음 앞에 작고 우수한 오층석탑 하나가 안치돼 있었다고 한다. 그것을 소네 통감이 가져갔다고 말하고 있으나 정말인지는 알 수 없다."( (석불사의 조각에 대하여), 1919년)
1925년까지 10여 년간 경주에 살면서 신라의 유적을 조사ㆍ연구한 후 1929년에 (조선 경주의 미술)이란 책을 낸 나카무라도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불타(석굴암 본존상) 뒤의 9면(11면)관음 앞에 자그마하고 우수한 오층석탑이 안치돼 있었는데 언젠가 사라져 지금은 볼 수가 없다. 쓸쓸히 대석만 놓여져 있을 뿐이다. 풍문을 빌리면 모씨의 저택으로 운반되어 갔다는 것이다."
이상의 여러 증언으로 미루어 석굴암의 오층소탑 증발이 소네 통감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음은 명백하다. 1967년의 (석굴암 수리공사 보고서)도 과거의 굴대 오층소탑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소네에 의해 약탈되었다"고 명기하고 있다. 석탑을 약탈당한 후, 석굴암은 탑상을 구비하였던 본래의 모습을 상실하고 불상들만 있는 석굴이 되고 말았다. 이는 오늘날 국보 중의 국보인 석굴암으로서는 커다란 상처이다. 소네는 소위 한국 통감으로서 1년도 채 있지 않았지만 이 땅의 문화유산, 특히 옛 책(고서)들을 대량으로 수집하여 일본 황실에 헌상한 사실로 미루어 석굴암 소탑쯤 예사로 빼돌릴 수 있는 자였다. 그가 일본으로 대량 반출한 한국의 옛 책들도 고려자기 도굴꾼과 같은 패거리였던 또다른 무리의 일본인 무법자들이 곳곳에서 약탈 혹은 협박하여 헐값으로 빼앗은 것들이었다. 이토가 고려자기를 무더기로 실어내 간 짓과 똑같은 수법으로 소네는 한국의 구가와 서원과 사찰에서 갈취한 귀중한 서적들을 무더기로 반출해 갔다. 그 일부는 1965년까지 일본 궁내청 서릉료(서고)에서 '소네 아라스케 헌상본' 이라 하여 은밀히 보관되다가 한일 국교 정상화 후 반환문화재의 일부로 돌아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들어가 있다. 반면 석굴암의 오층소탑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해방 후 국내 관계전문가들이 일본 안의 행선지를 백방으로 탐색해보았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국내 전문가들은 아직도 정보추적을 포기하고 있지는 않다. 그들은 이 아름다운 오층소탑이 일본의 어딘가에서 언젠가는 발견될 것으로 믿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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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철학에 이르는 길 - 강영계
제 6장 말의 뜻
2.말과 생각
신화라든가 전설에 등장하는 식물과 동물 그리고 심지어는 바위까지도 말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식물과 동물 그리고 바위를 인간이 의인화시켰을 때 가능하다. 말이란 대상이나 사태를 생각에 의해서 구성할 때 비로소 의미있는 언어가 된다. 우리들은 인간의 사고와 언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1사고는 대상과 사태를 구성하며 창조하는 힘으로서 대상과 사태에 의미를 부여하고 #2그러므로 사고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구성되는 언어도 대상과 사태를 부차적으로 구성하여 형태화한다. 언어와 사고가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는 다음의 예를 보면 쉽사리 알 수 있다."빵세"라는 불란서 말이 있다. "생각"이라는 우리말은 누구나가 알고 있다. 그러나 불어에 낯선 사람은 "빵세"라는 단어를 무의미한 것으로 보게된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이 단어에 있어서 언어와 사고의 긴밀성이 아직 드러나지 않고 은폐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어에 낯선 사람이 "생각한다"라는 동사를 불어로는 "빵세르"라고 하며 이것의 명사형인 "생각"을 "빵세"라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지금까지 은폐되어 있던 언어와 사고와의 관계는 명백히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어떤 언어이든 사고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자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언어는 말과 글로 이루어지며 말과 글은 우리들이 감각적인 "들음"과 "봄"에 의해서 1차적으로 성립한다. 그러나 동시에 사고가 작용함으로 인하여 말과 글이 의미를 가지게 된다. 사고가 포함되지 않은 말이나 글은 죽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앞에서 "빵세"의 예를 보았는데 이 단어가 전혀 사고를 동반하지 않을 때는 의미를 상실한다. "빵세"라는 단어가 사고를 접할 때 "생각"이라는 의미를 비로소 가진다. 이러한 사실은 내가 가끔 교실에서 학생들과 나누는 대화에서도 발견된다. "김양, 내가 지금 손에 어떤 것을 들고 있네. 자네도 그것을 분명히 보고 있네. 자네는 무엇을 보는가?" "책을 봅니다." "김양, 좋아. 우리들은 누구나가 책을 본다고 말하겠지. 그러나 좀더 생각해보면 책이라고 우리가 말할 때 그것은 '책'이라는 글이나 '책'이라고 말하는 소리일세. 내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책'이라는 글이나 소리나는 말이 아니고 물건이네. 그렇다면 김양, 자네는 무엇을 보는가?" "......" 우리들이 보는 것은 푸른색과 네모난 형태이다. 만일 만져본다면 딱딱하면서도 매끄럽다고 느낄 것이다. 펼쳐보면 인쇄된 글자들이 있다. 우리들의 사고는 이러한 요소들을 종합하여 "나는 지금 책을 보고 있다"고 결정한다. 우리들은 사실 색깔이나 형태를 볼 뿐이고 "책"이라는 개념으로서의 언어는 사고에 의해서 구성된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나 먼저 인간의 사고가 있는 다음에 언어가 구성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언어를 통해서 생각하고 또한 생각에 의해서 언어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언어 자체가 사고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기에 언어와 사고는 순화 관계를 이룬다. 언어와 사고의 순환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은 의미이다. 만일 언어가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은 언어이다. 의미는 동적인 것이다. "저 사람", "이 장미꽃" 등은 의미를 우리들에게 전달한다. 소리로 된 말과 쓰여진 글은 의미 전달의 매개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언어는 대상을 의미화하여 나 안에서 그리고 나와 남 사이에서 의미를 전달함으로써 인간 관계를 성립시키며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 대화란 언어를 통하여 성립하는 의미 전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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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단출하다
본뜻 : 한자어 홀로 단과 날 출에서 나온 말인 듯하다. 글자 그대로 간단하게 나왔다는 뜻이다.
바뀐 뜻 : 식구가 적어 홀가분하거나 옷차림이나 일이 간편하고 간단한 것을 일컫는 말이다. '단촐하다'로 잘못 쓰기 쉽다.
대수롭다
본뜻 : 한자어 '대사롭다'에서 온 것으로, '큰일답다'는 말이다.
바뀐 뜻 : '소중하게 여길 만하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중요하지 않다 시들하다'는 뜻을 가진 '대수롭지 않다'는 말도 널리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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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4. 영주 없는 토지는 없다
영주 없는 토지는 없다
강력한 통일제국을 형성했던 샤를마뉴의 프랑크왕국도 그가 죽고 영토가 그의 아들들에게 분할되면서 사실상 와해되었다. 게다가 9-10세기에 걸쳐 노르만, 이슬람 그리고 마자르족의 침입이 계속 이어짐으로써 혼란과 무질서는 더해 갔다. 분열하는 중앙권력으로는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없었다. 따라서 각 지역마다 독자적인 실력자들이 지역을 스스로 방어해야 했고 일반 민중은 자연히 그러한 유력자들에게 보호를 구해야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서양의 중세 봉건사회가 성립되었다. 정치적으로 볼 때 중세 사회는 지방분권체제였다. 오늘날처럼 중앙권력이 한 국가의 영토 안에 속속들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그런 체제가 아니었다. 물론 중앙에 왕이 있었다. 그러나 왕관과 왕이라는 칭호 그리고 그것이 주는 영예가 전부였다. 사실상 왕이 통치 할 수 있는 영역은 왕령에 한정되었다. 왕은 왕령지에서 나오는 수입만으로 살아갔다. 그래서 "국왕은 스스로 먹고 산다."는 속담이 나올 정도였다. 왕령 이외의 토지는 영주라 불린 유력자의 소유였다. 영주들은 근대적 의미의 대토지소유자 이상을 의미했다. 그들은 자기 영내의 토지에 대한 경제적 권리뿐 아니라 경제 외적 권리, 즉 영내에 거주하는 영민들에 대한 재판권, 조세권 등을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들 나름대로 병력을 거느릴 수도 있었다. 영주들은 저마다 자기 영내에서는 군주나 다름없었다. 영주 중에는 세력을 잃고 몰락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영주 없는 토지는 없다."는 원칙이 중세시대 전체를 지배했다. 서양 중세 시대의 토지제도는 "하늘 아래 왕의 토지가 아닌 것은 없다."는 속담으로 상징되는 중국 당대의 율령제도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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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마음을 열면 세상은 참 아름답습니다 - 안의정
피터 제닝스의 꿈
미국의 TV 앵커맨 중에서 매일 저녁 6시 30분부터 7시까지 30분간 ABC-TV의 ‘월드 뉴스 투나잇’을 진행하는 피터 제닝스처럼 신문과 잡지에 많이 소개된 인물도 없을 것입니다. 프로그램을 능숙하게 처리하면서 제임스 본드처럼 얼굴이 잘생긴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학구적인 외양과는 달리 대학은커녕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시쳇말로 ‘별볼일 없는’ 학력을 가지고도 언론계의 정상에 올라섰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에 관한 기사를 종합해 보면 그의 성공 요인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일을 하는 데 모자라는 학력을 핸디캡이라 염두에 두지 않고 항상 공부하는 자세를 견지한다. 둘째, 자신의 모자라는 점을 감추려 하지 않는다. 따라서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흔히 현실욕을 나타내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혐오감을 갖게 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 그의 솔직 담백성은 부족한 학력을 오히려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셋째, 현재의 위치에 만족하여 안주하기보다는 언론 분야 중에서도 가장 언론적인 일을 하길 원한다. 따라서 승진이나 봉급에는 관심이 없다. 넷째, 사회 생활에 바쁘다는 핑계로 가정에 등한시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가정의 행복임을 잊지 않는다.
피터 제닝스. 그는 캐나다 사람입니다. 학교 공부는 고등학교 1학년을 마지막으로 일찌감치 중단했습니다. 그는 26세의 젊은 나이로 ABC-TV 네트워크를 통해 뉴스를 전 미국에 소개하는 전국망 취재 기자가 되었고,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전국 뉴스망의 단독 앵커맨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2년 후 다시 전국망 취재 기자로 돌아갔다가 해외 특파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1983년에 다시 뉴욕으로 복귀하여 지금까지 저녁 세계 뉴스를 단독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의 나이는 현재 59세. 전문가의 평가나 시청자들의 앙케이트 조사 결과는 그를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언론인으로 주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어린 나이에 직업 전선에 뛰어들게 했고, 그리고 그 후로 승승장구의 성장이 있게 했을까요. 그는 6피트 2인치의 커다란 체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품은 온화하고 겸손합니다. 그의 사무실 책상 위에는 부인이자 작가인 캐티 말톤, 딸 엘리자베스, 아들 크리스토퍼, 그리고 어머니와 같이 찍은 사진이 놓여져 있습니다. 그는 토론토에서 태어나 세인트 로렌스 강이 흐르는 오타와 근교의 작은 마을에서 자랐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조력하는 데에서 기쁨을 찾는 순종형이었고, 두 분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따뜻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아는 게 훨씬 많았으며 해외 여행도 많이 했습니다. 아버지는 캐나다 방송국의 뉴스 담당 아나운서였고, 1973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가족은 낡은 집을 세내어 살았었는데, 집에는 음악가, 신문 기자, 아나운서 등 세계적인 명사들이 수시로 드나들었습니다. 피터는 아버지를 방문하는 손님들을 만나는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아버지와 같은 직업을 가진다면 계속해서 그렇게 재미있는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는 기독교적인 분위기에서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앵글리칸 교파의 학교에서는 평일에 2번, 일요일에는 3번이나 예배를 보았습니다. 부모가 그에게 가르쳐준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용이었습니다. 특히 어머니는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어 그로 하여금 의견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정규 학습을 고등학교 1학년까지만 마치고 그만둔 것에 대해 그는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지 않습니다. “너무나 게으른데다가 공부하기 싫었다”는 것이 중퇴 이유였습니다. 그는 수학 문제를 풀기보다는 운동 시합을 더 좋아했으며, 열아홉 살이 될 때까지 사람들이 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했습니다. 그는 그 때를 회고하면서 아마도 정규 학습에 반발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는 학교를 떠난 후 망설임없이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 3년간 은행에서 출납계원으로 일했습니다. 단조로운 일에 만족할 수 없었던 피터는 그 후 온타리오의 작은 방송국 CFJR로 직장을 옮겼습니다. 일주일에 15달러의 주급을 받아 그중 10달러를 하숙비로 지불하는 쪼들리는 생활이었지만, 그때가 어느 시절보다 행복했다고 합니다. 피터는 다시 오타와에 있는 CJOH-TV로 직장을 바꾸어 공동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보조 앵커가 되었습니다. 이때 그의 자질을 눈여겨 본 ABC-TV가 전국망 취재 기자 자리를 제의했지만 그는 거절했습니다. 그 후 몇 개월이 지난 어느 날, 잠자리에서 일어난 그에게 그때의 거절이 큰 실수였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습니다. 피터는 망설이지 않고 ABC-TV의 회장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밑에서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렇게 해서 26세에 ABC-TV의 전국망 취재 기자가 된 피터에게 덜어진 첫 번째 취재 명령은 흑인들의 인종차별 시위가 극심한 미시시피 주로 내려가 현지 상황을 생생하게 보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젊은 피터는 공포에 떨면서도 인권 운동가들의 뒤꽁무니를 놓치지 않고 열심히 쫓아다녔습니다. 동료 기자들 사이에 “미시시피 주 필라델피아에서 가장 신속하게 움직이는 기자는 바로 피터 제닝스이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쉬지 않고 취재 활동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러자 그의 활동에 앙심을 품은 백인 우월주의 집단 KKK가 그를 추격하며 위협적인 자세를 취했습니다. 피터는 뉴욕 본사 회장에게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화가 난 회장은 즉시 미시시피 주지사에게 전화를 걸어 “만일 우리 기자들을 경호하지 않으면 카메라맨 40명을 데리고 내려가 미시시피 주를 발칵 뒤집어놓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후부터 경찰이 항상 피터를 따랐으며, 잠을 자는 밤중에도 호텔 방문을 지켜 주었습니다. 6개월간 취재 기자로 일한 피터는 ‘피터 제닝스 뉴스’라는 프로그램의 앵커를 맡게 되었습니다. 전국의 시청자를 상대로 하는 카메라 앞에 앉은 피터는 두려움과 어리벙벙한 심정이 교차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프로그램을 시청한 아버지가 대노하여 전화를 걸었습니다. 언론인은 현장에서 발로 뛸 때 참다운 보람이 있는 것이지 앵커나 해서는 안 된다는 꾸지람이었습니다. 3년간 앵커로 일한 피터는 1968년에 전국망 취재 기자로 돌아갔고, 1969년부터 1974년까지는 해외 특파원으로 일했습니다. 그가 주로 체류한 곳은 레바논의 베이루트였습니다. 그는 PLO의 야시로 아라파트 의장과 장시간 인터뷰하여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는 동료 언론인들이 사회 생활에 쫓기느라 가정 교육에 실패하여 자녀들이 비뚤어진 경우를 매우 가슴 아파합니다. 가정이 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녁에는 자녀들과 함께 꼭 시간을 보내고, 주말에는 롱아일랜드에 있는 별장으로 갑니다. 그는 지금 또 다른 기대감에 부풀어 있습니다. 몇 년 후, 아이들이 다 성장하면 앵커를 그만두고 다시 현장의 취재 전선으로 돌아가리라는 꿈입니다. 그곳에는 자신이 알아야 할 것들이 아직 많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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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동성애 그리고 여인들의 삶
유인의 뜻, 칠거지악과 삼불거
조선조의 여성들은 남편의 지위에 따라 외명부의 품계로 승차되었다. 남편이 정승이나 판서의 지위에 오르면 그들의 부인은 정경부인이 된다. 남편이 참판의 서열에 으르면 그 부인은 정경부인으로 봉록되고, 남편의 직급이 참의에 이르면 그 부인은 숙부인이 된다. 이런 법도에 따라 부인들의 지위도 숙인, 영인, 혜인, 공인, 의인, 안인, 단인, 유인으로 예우하였다. 뿐만 아니라, 등과하지도 못하고 벼슬길에 나가 보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난 남편의 위패에는 학생부군이라고 적지만, 그 부인의 경우에는 유인 아무개라고 표시하여 9품으로 예우하였다. 여기에 비한다면 오늘을 사는 여성들은 어떠한가. 남편의 지위에 따른 여성의 호칭은 오직 영부인 하나뿐인 것으로 알지만, 그나마 모든 아내의 호칭에 불과하다. 간혹 사모님이니, 여사니 하는 호칭을 쓰지만 존경의 의미가 희석되었다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현대를 살다가 세상을 떠난 남성들의 위패에 '학생부군'이라고 쓰고, 그의 묘비에 '학생'이라고 새기는 것은 망발이 아닐 수가 없다. 예컨대 대학을 졸업하고, 군에 입대해서는 이등병을 면한 남성들, 더구나 기업체에서 차장, 부장을 지내면서 왕성하게 활동하였고, 혹은 사회단체에서 개혁을 위해 뼈빠지게 일한 남성들일 어찌하여 이미 잊혀지고 없는 '학생부군'으로 취급되어야 하는가. 이는 분명 선조의 명위를 깎아내리는 일일 것인데도 많은 사람들은 그 뜻도 모르면서 제삿날마다 잘못된 호칭을 위패로 적어 놓고 거기에 절을 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여성의 경우라 하여 다를 바가 없다. 현대를 살다가 세상을 떠난 여성들의 위패에 '유인'이라고 적고, 묘비에 또한 '유인'이라고 새기는 것은 할머님이나 어머님의 명예를 깎아내리는 망발이 된다. 그 까닭은 자명하다. 오늘날에는 여성 스스로 남성들에게 버금가는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면서 산다. 그 결과, 장관의 지위에 으르기도 하였고, 국회의원이 되기도 하였으며, 판사, 전문의, 교수, 교장, 교사를 지내기도 하였는데 이분들이 세상을 떠나서 '유인'이 된대서야 말이 되는가. 더구나 '학생부군'으로 죽은 지아비가 없는데 어찌 '유인'이 있으랴. 사실이 이와 같다면 세상을 떠난 남성이나 여성의 위패에는 모두 살아서 활동하던 직위나 존칭을 적고 새겨서 그 영혼들을 기쁘게 해야 할 것이리라. 여성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면서 이러한 사실을 설명하면 반드시 뒤따르는 질문이 있었다. "칠거지악이야말로 남존여비의 극치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지만, 한 가지 일을 반만 알게 되면 이런 우문이 생겨나는 것이다. 꼭 역사에 관한 일만 여기에 해당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칠거지악'이란 지어미를 내치는 일곱 가지 악례를 정한 것으로 그 구체적인 내용은 이렇다.
불순구고, 시부모와의 사이가 나쁘고 무자,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하고 음행, 외간 남자와 통정하고 질투, 투기가 심하고 악질, 몹쓸 병이 있고 구설, 남의 입에 오르내리고 도절, 도둑질을 하면,
이 중에서 한 가지 사유에만 해당되어도 아내는 남편에게 버림받게 된다 하여 '칠거지악'이 남존여비의 전형이자 극치라고 생각하는 것은 금물이다. 설혹 '칠거지악'에 해당되어 내침을 당하게 되었다 할지라도 거기서 구원받을 수 있는 장치가 있었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삼불거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까 내치지 못하는 세 가지 사유가 있었던 것이다.
첫째, 혼인할 때는 가난했지만 그 뒤에 부귀하게 되었으면 내치지 못한다. 이는 여성의 노고와 재산권을 인정하는 항목이다. 다시 말하면 결혼 후에 부귀를 얻었다면 부인의 노고와 내조가 그 원동력임을 명백히 하고 있음이다. 둘째, 부모의 삼년상을 함께 치른 아내는 내치지 못한다. 이 항목은 효행을 강조하고 있다. 옛날은 지금과 달라서 부모의 삼년상을 치르는 것이 여간 큰 고통이 아니었다. 혼백이 모셔진 제청에 하루에 세 번씩 상식을 올려야 하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삭망제를 지내야 한다. 또 소상과 대상도 장례식 못지 않게 번거로웠다. 그 고통을 견디어 내면서 이루어진 효행이 아내의 권리를 보장받게 하였던 것이다. 셋째, 쫓겨나도 갈 곳이 없는 여인은 내치지 못한다. 여기에 이르면 휴머니즘의 경지가 아닐 수 없다. 그야말로 여성의 인권을 보장하고 있음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렇게 본다면 '칠거지악'저질렀다고 하더라도 삼불거에 의해 대부분 구제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결국 '칠거지악'은 경계의 의미에 중점을 두었을 뿐, 그것으로 인해 피해를 본 여성은 극소수에 불과했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조선조의 여성들은 법도와 관행에 억눌려 대단히 조심스러운 삶을 누렸다. 그러므로 그분들의 탁월한 관리능력은 어머니의 책무와 아내의 도리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데서 얻어진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그 여성들의 품에서 수많은 청백리가 탄생되어 백성들로부터 무한한 존경을 받으면서, 또 그들의 의지처가 되어 주었으리라. 언제나 가난했던 조선왕조가 장장 5백년 동안이나 왕권을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조 여인들이 인종을 미덕으로 삼았던 결과임을 간파할 수 없을 것이다.
조선조 여성들은 자신들이 갖추어야 행실을 명예로운 것이라고 여겼다. 그것은 고려조 충렬왕 때의 사람인 노당 추적이 쓴 "명심보감"이 널리 읽혀지면서부터였다. "명심보감"은 이른바 유학에서 일컬어지는 명현들의 어록과 명저에 적힌 핵심을 두루 모아서 편집한 유소년 교육용의 필독서지만, 여성교육에 관한 내용은 마지막장(제20장)인 '부행편'에 '여성의 명예'를 거론하고 있을 뿐이다.
익지서운, 여유사덕지거, 일일부덕, 이일부용, 삼일부언, 사일부공야(이하 본문 생략)
'익지서'에 말하기를 여자에게는 네 가지 덕행의 명예가 있는데, 첫째가 '부덕'이니 덕행이라는 것은 반드시 재주와 명망이 뛰어나야 되는 것이 아니라 분수를 지켜서 몸을 경계하고, 행동거지를 조심하여 부끄러움을 알며 모든 행실이 예절과 법도에 어긋나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고, '부용'이라는 것은 얼굴이 곱고 아름다워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단정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몸을 언제나 깨끗이 하고 복장은 언제나 단정하게 하여 외형상으로 남에게 혐오감을 주어서는 아니되는 것이며, '부언'은 청산유수와 같은 언변을 갖추라는 것이 아니라 함부로 말을 하여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 것이며 할 말과 못 할말을 가려서 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부공'은 여자의 솜씨를 말하는 것이지만, 꼭 손재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부지런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이 네 가지 덕행은 곧 부인의 큰 덕이다. 이를 하면 매우 기쁘고, 이를 힘쓰면 바르게 살아가게 된다. 이에 따라서 잘 실행하면 이것이 곧 부녀자의 범절이 된다. 강태공이 말했다. "부인의 예절이 말이 반드시 작아야 한다." 어진 아내는 남편을 귀하게 만들고, 모진 아내는 남편을 천하게 만든다. 집에 어진 아내가 있으면 남편이 뜻밖의 화를 당하지 않는다. 어진 아내는 온 가족을 화목하게 만들고, 간사한 아내는 온 가족의 화목을 깨트린다. 이 같은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고, 또 아무리 지행하면서 살리라고 다짐하였다고 하더라도 주위의 환경이나 여건이 그렇지가 못하다면 그 뜻이 아무리 커도 성사될 까닭이 없을 것이다. 난설헌 허초희는 명문의 가문에서 태어나 명문가로 출가를 하였지만, 만권 서책에 둘러 싸인 채 허구한 날을 지아비를 기다리며 독수공방을 해야 했다. 그녀의 시가 정한으로 가득한 고독을 달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비단폭을 가위로 결결이 잘라 겨울옷 짓노라면 손끝 시리다. 옥비녀 비껴 들고 등잔가를 저음은 등잔불도 돋울 겸 빠진 나비 구함이라.
'야좌 전문'
조선왕조는 강상과 윤기를 으뜸으로 여기는 도덕사회를 표방하고 있었지만, 어느 일각에서는 형언 할 수 없는 가렴주구와 부패가 저질러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왕실과 사직, 그리고 사대부가의 규범은 애초에 세웠던 이념의 틀을 크게 훼손하지 않았던 것처럼, 조선시대의 여인상도 "내훈"에 강조된 규범이 도처에서 무너지면서 오히려 다채로운 삶이 전개되기도 하였지만, 조선 시대가 도덕사회로 규정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조선조의 보편적인 여성상도 외형적으로는 그 시대상의 규범 안에서 존재 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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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장이 발칸
로마신화에 나오는 불과 대장간의 신. 절름발이인 데다가 별로 잘 생기지도 못했지만 요즘 우리 나라에서도 각광을 받고 있는 제철공업의 원조이다. '발칸' (Vulcan)은 영어명이고 로마어로는 불카누스 (Vulcanus) 희랍 신화에서는 '헤파이스토' (Hephaistos)이다. 영어의 화산(volcano)는 그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 이 신은 화산 밑바닥에 대장간을 차려놓고 있으며 화산의 분화구에서 솟아난 연기는 바로 그의 일터에서 나오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참고로 이태리는 '폼페이 최후의 날'의 베수비우스 화산을 비롯해서 세계 제일의 화산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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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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