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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20 호
단기 4340. 1. 29 (음력 12.11) / 발행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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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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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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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너무 열렬한 사람은 언제나 남들에게는 성가신 존재. / 올번 구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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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九章 (노자 - 도덕경 : 제9장) |
持而盈之, 不如其已, 취而銳之, 不可長保, 金玉滿堂, 莫之能守, 富貴而驕, 自遺其咎, 功遂身退, 天之道.
지이영지 불여기이 취이절지 불가장보 금옥만당 막지능수 부귀이교 자유기구 공수신퇴 천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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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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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째 장
직역
지니고서 그것을 채우는 것은 그것을 그치는 것만 같지 못하다. 갈아 그것을 날카롭게 하는 것은 오래 보존 할 수 없다. 금과 옥이 집에 가득하면 그것을 능히 지킬 수 없다. 돈이 많고 높다고 교만하면 스스로 그 허물을 남길 뿐이다. 공이 이루어지면 몸은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이다.
해석
구십 구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백원을 채우기 위해서 일원을 구하는 것은 어떤가. 백원을 채우면 만족할 수 있는가. 그는 이제 이 백원에 만족하지 않는다. 다시 이백원을 가지기 위해서 노력한다. 욕망은 끝이 없다.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것이 욕망이다. 이 욕망의 노예가 되지 말아라. 칼을 갈아 본 적이 있는가. 아주 날이 잘 선 칼은 곧 무뎌진다.
금과 옥을 집안에 가득히 쌓아 보아라. 그럼 천하의 도둑들이 그 집에 들것이다. 그리고 그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그는 집을 떠나지 못한다. 이제는 금은 보화가 그 사람을 구속하게 되는 것이다. 돈과 지위가 많고 높음은 상대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내면을 살찌우지 못한다. 오히려 공허하게 만들 경우가 많다.
천지는 만물을 만들었지만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공을 이루고 자신이 이루었다고 집착을 하면 그는 영원히 그 공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내가 다리를 만드는데 공헌을 했다. 그래서 그 다리 앞에서 내가 만들었다고 자랑을 해보아라. 그에게 무슨 득이 있고,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나라면 다른 다리를 만들겠다. 공을 세우기 위해서 일을 하지 말고, 일을 하기 위해서 일을 하라. 일을 하다가 공을 이루었으면 그것에 집착하지 마라. 집착을 하게 되면 그 일에 매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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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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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이미 가지고 있는데도 계속해서 채우는 것은 그만둠과 같지 못하고 이미 날이 선 무기를 또다시 예리하게 만들면 오래 보존하기 어려울 것이다. 재물이 집에 지나치게 많으면 이것을 지킬 수 없고 부귀하여 교만하게 되면 자기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게 된다. 공을 이루고 나면 그 공을 이룬 자는 제때에 물러나야 하는 것이 하늘의 법칙이다.]
주
지이영지: 이미 가지고 있는 데도 계속해서 채우는 것을 말함. 취이예지: 취의 본래의 의미는 추측하다, 계량하다임. 본문에서는 무기 등을 두드리고 벼려서 날카롭게 한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음.
해
노자는 이 장에서 과욕과 겸손한 처세술을 강조하고 있다. 가득 찬 물 컵에 또다시 물을 붓는다면 흘러 넘칠 것이다. 칼날도 너무 날카롭게 갈아 두면 그것은 곧 손상되고 말 것이다. 재물도 지나치게 많으면 오히려 지키기 어려울 것이다. 부귀하여 교만해지면 그것은 화를 불러들이는 길이다. 공을 이루고 나면 그것을 이룬 자는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법칙인 것이다. 물러나야 할 때에 미련을 갖고 자리에 연연하다가 패가 망신한 인물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달도 차면 기울고 위로 치닫는 용은 뉘우침이 있게 되는 것이다. '만물을 성함이 지나면 곧 사멸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욕망에 한계를 두고 좀 부족한 듯한 시점에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고 노자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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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경제/경영/성공 |
세계를 움직이는 127대 파워 - 박태견 지음
POWER 025 통합유럽의 금융센터: 분데스방크 중앙협의회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위치한 분데스방크 중앙협의회(centural council of the Bundesbank)는 단순한 독일연방의 중앙은행 센터가 아니다. 말 그대로 사실상의 유럽중앙은행으로서 유럽 각국의 통화정책과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유럽의 경제대통령으로 불리는 분데스방크 은행장직은 30여 년간 장기집권하면서 경제대국 독일 건설에 지대한 공헌을 해온 '쇠고집' 헬무트 슐레진거의 뒤를 이어 1993년 9월부터 한스 티트마이어가 그 뒤를 잇고 있다. 분데스방크는 특히 국내 정치권력의 입김을 일체 배제할 뿐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독일 국익을 최우선시하는 자율적 통화정책을 집행하기로 세계정치가들 사이에 악명높다. 한 예로 1994년 7월 달러당 엔화 환율을 '마의 100대'선 이하로 붕괴시킨 미국의 가공스런 엔고공세를 틈타 전세계 환투기 자본이 국제금융계를 붕괴 일보직전까지 몰고 가자, 미국과 일본이 분데스방크측에 달러화 매입과 독일 금리인하 등을 강요했음에도 "금리인하는 통독 후유증에 시달리는 독일경제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이유로 끝내 이를 거절하기도 했다. 1992년 영국의 유럽통화기금(EMI) 이탈로 초래된 유럽통화 위기 때도 흔들림없이 독일국익 수호노선을 관철해 끝내 영국을 무릎꿇게 만들기도 했다. 마르크화는 이미 유럽에서 달러화를 제치고 기축통화 역할을 단단히 하고 있다. 이미 흑해에서 아랄 해, 우랄 산맥에서 알프스까지 '마르크경제권'이 들어선 게 현실이다. 1991년 소련 붕괴 후 일본 및 독일의 우익들이 "앞으로 우랄 산맥의 동쪽은 엔 블럭, 서쪽은 마르크 블럭이 될 것"이라고 호언했을 정도로 유럽 내에서 마르크 경제권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은 엄청나다. 분데스방크는 독일통일을 위해 구 소련측에 700억 달러 상당의 천문학적 마르크화를 지원해 러시아 등의 생명선을 단단히 거머쥔 데 이어 체코, 헝가리 등에서도 여태껏 투자된 전체 외자 중 5할 이상을 마르크화가 장악함으로써 사실상 동부 및 중부 유럽의 경제 헤게모니를 장악한 상태이다. 벌써 발트 3국 등 동유럽에서는 마르크화가 자국 통화와 함께 국내 통화로서 사용될 정도로 마르크 블럭은 완성 직전의 단계에 와 있다. 그러나 분데스방크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차제에 마르크화를 서부유럽, 즉 유럽연합(EU)의 통일화폐로 만들려는 야심찬 작업도 착착진행중이다. 분데스방크는 수년에 걸친 유럽 각국과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마침내 지난 1993년 미래 통합유럽 중앙은행의 전신격인 유럽통화기금 본부를, 분데스방크 본점이 위치한 프랑크푸르트로 유치하는 데 성공함에 따라 그 첫걸음을 성공적으로 내디뎠다. 당시 금융전문가들을 이로써 "분데스방크가 유럽중앙은행이 되고, 마르크화가 유럽통화가 되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가 됐다."라고 평했다. 한편 몇 해 전 한국을 방문했던 헬무트 슐레진거 전 분데스방크 총재는 국내 금융인들에게 "한국의 경제가 계속 견고히 성장, 선진국에 진입하려면 중앙은행의 정치적 독립이 최우선 선결과제"라는 귀중한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정치권력의 이해관계로부터 독립된 중앙은행, 이것이 바로 오늘날 경제대국 독일을 가능케 하고 독일 통일도 가능케 한 원동력이었다"는 그의 고백을 겸허히 수용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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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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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기름 장사와 명궁
송나라에 진요자라는 명궁이 있었다. 그는 활을 어찌나 잘 쏘는지 나라안팎에 그와 겨룰 만한 궁사가 없었다. 어느 날 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모아 놓고 활을 쏘고 있었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기름 파는 노인이 그 모습을 지켜 보았다. 노인은 진요자가 화살 열 개 가운데 아홉개를 명중시키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요자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노인에게 물었다.
"노인장, 제 궁술의 비결이 뭔지 궁금하십니까?"
그러자 노인은 별 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뭐 무슨 특별한 비결이 있겠습니까? 활이 당신 손에 푹 익은 것 같군요."
노인의 말에 진요자는 기분이 나빠졌다.
"아니 제 솜씨를 어찌 그렇게 가볍게 평가하십니까? 이건 하루 이틀에 배울 수 있는 궁술이 아닙니다."
노인은 웃으며 말했다.
"아, 화내지 마시오. 내가 참기름 장사를 오래 하다보니 조금 이치를 아는 것 뿐이라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진요자가 묻자 노인은 호리박처럼 생긴 참기름 병을 꺼내 땅 위에 놓더니 엽전으로 그 주둥이를 막았다. 그리고 참기름을 국자로 떠서 병 속에 흘려 넣었다. 그런데 노인의 키높이에서 흘려보낸 참기름이 엽전의 조그만 구멍 속으로 정확하게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진요자가 살펴보니 엽전에는 참기름이 한 방울도 묻지 않았다. 진요자는 노인의 솜씨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노인이 말했다.
"아아, 놀라지 마시오. 나도 뭐 별다른 비결이 있는게 아니니까. 다만 손에 푹 익었을 뿐이라오."
그 말을 들은 진요자는 노인에게 깊이 머리 숙여 절을 했다. 이후 진요자는 활을 쏘는데 있어 결코 자만하지 않았다.
인간관계를 열어주는 108가지 따뜻한 이야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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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철학에 이르는 길 - 강영계
제 4장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아는가
3.직관적인 앎
앎의 문제에 대하여 극단적으로 의심하는 사람은 감각을 근거로 하여 앎을 성립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와는 정반대로 사물을 직접적으로 알 수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러한 사람들을 일컬어 직관론자라고 부른다. 직관적으로 대상을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1인간의 일반적인 인식 능력인 감각적감상이나 또는 정신이 그릇된 것을 우리들에게 제공해준다고 믿거나 #2감성이나 이성은 불완전한 앎을 가져다주고 오직 직관만이 참다운 앎을 가져준다고 생각한다. 물론 직관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쓰여지고 있다. #1일상적으로 막연한 의미에서는 다소 미신적인 뜻으로 직관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너는 직관력이 탁월해. 그저께 네가 이틀 후에 나에게 작은 불행이 닥치리라고 말했었지? 사실 오늘 아침 나는 대문을 나서다가 문턱에 걸려 넘어져서 엄지 발가락이 삐고 말았어." 이예에서 그리고 이와 비슷한 예에서 우리들은 "그냔 알아맞힌다" 또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저 환히 알고 있다" 라는 뜻에서 직관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내가 아는 어떤 동양 철학의 노대가가 가끔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벽을 대하고 앉아서 며칠을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자니 어느 순간엔가 세상만사의 이치가 환히 빛나는 것이었어." 이 말 역시 근거는 모르지만 그저 모든 것을 환하게 안다는 의미에서 직관이라는 용어를 암암리에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종류의 직관은 근거가 없는 것이요, 한 개인이 자신의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을 과시해보고자하는 미신적인 요소가 다분한 직관이다. #2인간에게만 유일한 감각의 성질이라는 의미에서 직관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 이 경우 직관은 항상 직관 형식과 결부되어 있다. 감성 형식은 곧 직관 형식이다. 직관형식은 시간과 공간이다. 이 입장에서는 시간이나 공간을 인간의 외부에 있는 어떤 것으로 보지 않고 우리들 인간이 사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감성의 틀로 본다. 강이나 내에서 물고기를 잡을 때 우리들은 그물을 사용한다. 그물은 물고기를 걸리게 하는 틀이다. 시간과 공간도 마치 이 그물과 같은 틀로서 사물이 일단 틀에 걸려서 앎의 시초가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우리들은 흔히 공간과 시간을 참으로 우리들의 밖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공간과 시간은 아무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창밖에 있는 저 나무가 공간인가? 멀리 보이는 저 산이나 저수지가 공간인가? 인간의 감각적 성질에는 불변하는 틀로서 공간과 시간이 있는 지 모른다. 그리하여 저 나무는 이 나무보다 크다든지 또는 기차는 자전거보다 빠르다고 우리들이 생각하게 될 것이다. #3세 번째로 우리들은 인간의 가장 높은 능력으로서 직관을 생각할 수 있다. 감성이나 오성 또는 이성은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놓으면서 사물을 부분적으로만 파악한다. 단계적으로 완전함을 부여하자면 감성보다는 오성이 그리고 오성보다는 이성이 한층 더 완전하다. 감성은 부분적.피상적으로 사물을 아는 데 비하여 오성 및 이성에 이를수록 점차로 사물을 전체적.내면적으로 알게 된다. 그리하여 어떤 삶들은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능력을 직관이라고 본다. 이들에 의하면 직관은 이성을 초월하여 따라서 이성보다 더, 한결 더 완전한 인식 능력이다. 이러한 직관은 사물 자체를 알며 사물과 인간이 일치할 수 있게 해준다. 기독교 신비주의의 전통에서는 하느님을 "본다"고 말한다. 여기에서의 "봄"은 감각적인 눈으로 보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들이 "본다"고 말할 때 그 "봄"은 사물을 전체적.내면적으로 안다는 것으로서 그것은 사물과의 공감을 말한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읽으면서 우리들은 시의 형식을 논하고 물체를 분석하여 또한 시인의 시적 감각을 논할 수 있다. 그러나 <진달래꽃> 전체를 구절귀절공감할 때 김소월의 이 시를 참답게 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김중업이 그린 소를 바라보면서 김중업의 미술 세계를 이야기할 경우 김중업의 심리 상태가 어떻다든지 그림 속의 소가 젖소냐 아니면 육우냐를 논할 수 있다. 그러나 소그림 자체를 전체적으로 공감할 때 비로소 김중업의 그림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제주도에 관한 사진이나 책자를 보고 제주도를 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주도에 직접 가서 체험하고 공감할 때 어떤 다른 수단을 이용한 것보다도 제주도를 참다웁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직관적인 입장에서는 경험적인 감각이라든가 또는 감성적 직관을 피상적인 것으로 취급하게 되므로, 사물을 직접 아는 직관에 의해서만 사물을 참다웁게 전체적.내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경험적 감각과 감성적 직관이 부분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신비적인 직관도 부분적이지 않는가 하는 물음이 생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그와 같은 직관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그와 같은 직접적인 직관을 가진 인간이란 개미나 벌과 같다고 본다. 우리들은 하나의 세계 속에서 여러 가지 수없이 많은 현상이 전개되고 있음을 잘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언제나 전체인 하나와 무수히 많은 부분들이 필연적인 상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인다. 오직 전체만이 있다거나 아니면 부분들만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한낱 독단론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음식의 맛을 보면 곰탕은 곰탕대로 비빔밥은 비빔밥대로 한 맛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 맛은 여러 가지 부분적인 맛들이 모여서 이루어진다. 앎의 문제고 마찬가지일 것이다. 감성이나 오성 또는 이성이나 직관 어느 한 부분만 절대적으로 다운 앎을 성립시켜준다는 주장은 독단론을 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러한 주장은 전체를 무시하고 부분에 불과한 자기 자신만을 고집하지 때문이다. 참다운 앎이란 결국 전체적인 연관과 맥락 속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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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겻불
본뜻 : 쌀겨나 보릿겨처럼 곡식의 겨를 태우는 불을 가리키는 말인데, 겨를 태우는 불은 뭉근하게 타오르기 때문에 불기운이 신통치가 않다.
바뀐 뜻 : '겻불'을 불쬐는 사람 곁에서 쬐는 '곁불'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 말의 실제 뜻은 겨를 태우는 뭉근하고 힘없는 불을 가리키는 말로서, 신통치 않거나 시원치 않은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보기글"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안 쬔다 -추울 땐 겻불이라도 어딘데 그걸 마다해? 그깟 체면이 뭔데 거기에 목숨을 거냐?
괴발개발(개발새발)
본뜻 : 흔히 제멋대로 모양 없이 써 놓은 글씨를 '글씨가 개발새발이다', '개발쇠발 썼구나'라고들 한다. 글씨 모양이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흡사 글자를 모르는 개나 새, 혹은 소가 쓴 것과 같다고 해서 그렇게 말하게 된 것 같다 그러나 '개발새발'이나 '개발쇠발'은 모두 사투리이고 본딧말은 '괴발개발'이다.
바뀐 뜻 : 글씨를 되는대로 마구 갈겨 써 놓은 모양을 말한다.
"보기글" -글씨가 이게 뭐냐! 완전히 괴발개발이구나 -어른한테 보내는 편지글을 그렇게 괴발개발 써 보내는 것은 크나큰 결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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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3.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분할하여 통치하라
그리스인들은 추상적인 원리를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재능이 있어 철학, 문학, 역사 등을 발전시켰던 반면 지중해 세계를 정복한 로마인들은 대제국을 통치하는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해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로마법이라는 법률의 체계, 원로원이라는 지혜 있는 유력자들의 독창적인 업적이었다. 후대의 사람들은 자주 이 로마인들의 방식을 모방했다. 그 중에서도 로마제국의 통치방식은 서양인들의 모범이 되었다. 로마제국의 영토는 광대했다. 전성기의 로마제국은 잉글랜드 북부에서 유프라테스강까지, 흑해에서 대서양 연안까지 뻗어 있었다. 그 영토는 미국의 반 이상이었는데 오늘날에는 20개 이상의 국민국가들로 나뉘어져 있다. 지중해는 로마제국의 내해였다. 그 인구는 서기 1세기에 대략 5천만에서 6천만 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는 당시 세계 인구의 1/5 내지 1/6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 거대한 로마제국은 약 6백 년 가량 존속했다. 로마제국은 중국의 제국들과 함께 인류가 이룩한 가장 위대한 정치적 업적 중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그렇다면 대제국 통치의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로마인들은 티베르강에서 남북으로 팽창해 가는 과정에서 이탈리아반도내에 거주하는 이웃 부족들을 로마 편으로 흡수하는 외교정책을 폈다. 이탈리아인들에게 로마의 정치에 참여하게 할 수는 없었지만 라틴 시민권을 주어 자치를 허용하고 동맹시로 대우했다. 반면에 이탈리아반도 밖의 영토가 로마에 편입되었을 때에는 속주로 삼았다. 동맹시와 속주들은 개별적으로 로마와 조약을 맺었고, 조금이라도 반란의 기미가 보이면 로마 군대가 출동해 진압했다. 동맹시와 속주들은 로마제국내의 다른 지역들과 조약을 맺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고립하여 저항하는 꼴이 되었고, 결국 진압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로마의 지배에 충실히 따르면 그 속주의 지위를 격상시켰다. 넓은 영토를 여러 지역으로 나누고 등급을 매겨 서로 경쟁시키고 연합을 못 하게 한 전략, 즉 "분할하여 통치하라."는 것이 바로 제국 통치의 비밀이었다. 근대에 와서 대영제국을 위시한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들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식민지를 건설할 때 이 전략을 모방했다. 특히 영국인들은 종족간의 분열을 조장함으로써 거대한 인도를 통치했다. 물론 로마인들의 이러한 제국 통치 방식도 영원하지는 못했다. 광대한 제국의 곳곳에 주둔한 로마 군대 자체가 제국의 질서를 해치는 요인이 되었다. 북방에 있던 게르만족의 등장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로마제국 질서가 5,6백 년이나 지속되었다는 것을 로마인들의 통치술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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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지식/생활/건강 |
전통주
멜론주
제철은 6∼8월이지만 수입되는 멜론을 생각한다면 일년 내낸 구할 수 있는 과일이기도 하다.잘 숙성되어 달콤한 향기가 풍기는 것으로 술을 담근다.
재료 멜론 600g, 레몬 1개, 설탕 200g, 소주 900cc
담그기
1. 멜론은 껍질을 벗기고 적당한 크기로 잘라 씨를 긁어낸다. 2. 레몬은 껍질을 벗겨서 자른다. 3. 용기에 멜론과 레몬 과육, 설탕을 담고 소주를 부어 밀봉한다. 4. 3개월 정도 지나면 건지를 건지고, 술은 거즈에 걸러 서늘한 곳에 보관한다.
탄산수와 시럽, 레몬을 넣어 얼음을 뛰우면 식전에 가볍게 마시면 좋다. 식후에는 약간 진한 맛을 즐기기 위해서 그대로 마신다.
신진대사, 강장, 정신 안정, 건위정장에 효과가 있어 피부미용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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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사회/문화 |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5 캄캄한 서양 반짝이는 동양
8. 하늘은 그대로 있으니 군자는 스스로 노력하라
문학 이외의 글을 쓰는 것은 내겐 처음인데, 이 글을 쓰기로 마음 먹은 것은 1993년 가을, 2000년 제 27회 올림픽 개최지선정 표결결과 때문이었다. 중국은 올림픽을 개최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날 밤. 나는 매우 강렬하게 중국인으로서의 비애를 느꼈다. 베이징 상공의 기류는 굳어 있었다. 잠 못 들고 있는 수많은 집의 불빛은 여전히 민족영혼의 창문을 밝히고 있었다. 나는 이때 또 하나의 신성한 불꽃이 더욱 환하게 타오르는 것을 보았다. 어느 누구도 그 불꽃은 꺼트릴 수 없는 것이었다. 오천 년의 찬란한 문명이 만리장성의 봉화대에서 더욱 장엄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중국인은 올림픽위원회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어떤 서구 국가가 스포츠기자재를 이용하여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중국항목'을 평가절하한 비열한 속셈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올림픽정신은 배반당했고 베이징으로서는 세계와 광범위하게 교류할 기회를 압살당했다. 스포츠를 정치화하려는 유희는 추악할 뿐이다. 나는 마침내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양이 중국의 경제제재에 대해 품고있는 생각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어디에 투표할 것인지는 알고 있지만 되돌아오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고 있다. 중국인.더욱 젊어진 중국의 지식인세대-그 중엔 서구의 민주에 대해 환상을 품고 있는 지식인도 포함된다-의 어깨는 거세게 밀려 버렸다, 이제 반격은 정당하다. 개혁개방의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선택한 길과 목표는 우리 스스로 싸워서 실현시켜야만 한다. 환상을 버리고 공부방에서 뛰쳐 나오자. 현실은 도피할 수 없다. 현실은 늘 그랬듯이 더욱 빠른 발걸음을 요구하고 있다. 나는 내가 중국인이라는 사실이 대단히 자랑스럽다. 이러한 자만심은 어떠한 투표결과에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예의지국으로서의 전롱을 가진 중국인의 인내와 관용이 무례한 대우를 받았을 때는, 목이 잘리고 사지가 찢어지는 한이 있어도 우리의 의지는 오히려 견고해질 것이다. 아편전쟁 이래 정의의 힘이 중국을 지켜 준 것이다. 나는 나의 개인적인 운명파 사건 및 고통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나는 또 중화민족의 역사 속에서 나를 더욱 분발시키는 것들을 배웠다. 56개 민족운명공동체인 중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베이징에서 일하고 생활하고 있다. 백양나무의 찬란한 잎들이 가지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깊은 감동을 받곤 한다. '하늘은 제대로 돌아가고 있으니, 군자는 쉬지 말고 강해져야 한다' 역경의말과, 고대 희랍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여전히 우리의 모든 것을 대변해 주고 있다. 냉전의 구름은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았다.미국은 또 새로운 냉전을 위한 신호를 보내고 있다. 미국과 그 추종자 외에는 그 누구도 이 신호가 세계의 앞날을 밝게 비출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4월 23일 또 한 차례 중국을 겨냥한 음모가 좌절되었다. 유럽국가연맹과 미국이 넉살좋게 내놓은 '중국인권상황결의초안'은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어버렸다. 제네바에서 들려 온 소식은 정의와 공리가 강권정치의 음모를 이겼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 미국은 인권을 정치도구로 삼으면 어느 곳에서나 잘 먹혀들 것이라고 여기고 있으며 또 계속 써먹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편집광적인 방식은 단지 자기 자신의 이익만 축낼 뿐이다. 호전적인 미국에 대해서는 첫째, 충고를 하고 둘째, 곁에서 늘 지켜 보고 있어야 한다. 침묵과 자제는 미국의 판단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내가 좋아하는 비유를 들어 글을 마칠까 한다. '우리는 사자가 조련사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조련사도 이 점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사자는 결코 이 사실을 모른다. 만약 사자가 이것을 알게 되었는데도 조련사가 여전히 자기의 역할에만 빠져 있다면,그 결과는 어찌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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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정도전의 줄 서기와 문민 독재
대마도 정벌
한국과 일본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대한 해협을 현해탄이라 하지만 그 폭이 넓지 않아서 양국의 정치인들은 곧잘 일의대수라는 말로 두 나라가 가까운 사이임을 강조하곤 한다. 그 현해탄의 한가운데에 대마도라는 두 개의 섬이 위치해 있다. 대마도와 한국과의 관계는 멀리 삼국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해적 떼나 다름이 없는 왜구의 소굴이었기 때문이다. 대마도는 땅이 척박하여 생산물이 귀했다. 그러므로 대마도의 주민들은 한반도의 서해안을 노략질해야만 목숨을 부지 할 수가 있었다. 따라서 신라 시대는 물론이요, 고려시대의 위정자들은 왜구의 퇴치에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왜구들은 내륙 깊숙이까지 들어와서 분탕질을 일삼았다. 인명의 손상은 말할 것도 없었고 심하면 한 마을이 쑥밭이 되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조선왕조를 창업한 태조 이성계는 고려 시대에 있어 왜구를 소탕하는 명장이었다. 왜구들은 이성계란 이름만 들어도 싸우기는 고사하고 도주하기에 바빴다. 그런 이성계가 임금의 자리에 올랐으니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그냥 둘 까닭이 없었다. 태조 5년 12월 3일. 마침내 태조 이성계는 대마도의 정벌을 명했다. 이일을 왕조실록은 '병자동정'이라 적었으나 이성계는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태조 이성계의 내심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태종 이방원은 재위 18년 만에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고 지신은 상왕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병권만은 손아귀에 쥐고 있었다. 얼핏 보아 국방의 중요성만은 자신이 관장해야겠다는 뜻이겠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대마도 정벌이라는 부왕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서 였다. 세종 1년 5월 14일 . 태종 이방원은 드디어 대마도의 정벌을 명한다. 원정군의 총사령관 격인 삼군도 체찰사에는 명장 이종무를 제수했다. 원정군의 규모만도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크고 작은 병선이 227척, 병력은 1만7천285명이었다. 면밀하게 수립된 작전 계획에 따라 선단과 병력은 거제도의 견내량에 집결하였다. 6월 17일. 병사들을 태운 선단은 대마도를 향해 출진하였으나 폭풍우를 만나 거제도로 다시 돌아오고야 만다. 사령관 이종무는 날이 개기를 하늘에 빌고 또 빌었으나 비바람은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이틀 후인 6월 19일. 폭풍우는 씻은 듯 갰다. 사시에 이르러 이종무는 선단과 병사들을 정비하고 다시 거제도를 떠났다 . 이때의 대마도 정벌을 '을해동정'이라고도 하고, '을해동왜역'이라고도 한다. 이종무는 정탐상륙을 위해 우선 10척의 배를 대마도 연안으로 접근시켰다. 그런데 뜻밖의 사태가 일어났다. 대마도의 도민들이 조선단을 보자 손을 흔들면서 달려나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섬을 나갔던 왜구들이 돌아오는 것으로 착각을 했던 것이었다. "아이들과 부녀자는 살상하지 말라!" 절제사 박실이 소리치자 대마도의 도민들은 그제서야 혼비백산하여 도주하기에 바빴다. 이렇게 대마도는 쉽게 조선의 원정군에게 점령되었다. 뒤늦게서야 이 같은 소식에 접한 대마도 도주 도도웅와는 반격을 명했으나 이마 때가 늦었다. 조선 원정군은 이때 왜구의 배 129척 중에서 쓸 만한 것 20여척만 남기고 모두 불살랐고, 저들의 가옥1천 939동을 불태웠으며, 목을 친 왜구의 수 114명, 생포 21명의 전과를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도주 도도웅와는 패잔병들을 거느리고 게릴라전으로 대응해 왔다. 비록 산발적인 전투였으나 박실의 장졸 180여 명이 전사하는 엄청난 패전도 있었다. 그리고 7월 1일. 대마도 도주 도도웅와는 이종무의 앞에 끓어 엎드려 항복을 했다. 비로소 대마도는 완전하게 소탕, 정벌된 것이었다. 도주의 항복을 받은 이종무는 병사와 선단을 이끌고 거제도로 개선하나 그날이 7월 3일이었다. 뜻을 이룬 태종 이방원은 병조 판서 조말생을 불러 대마도가 조선의 땅임을 분명히 하는 서찰을 적어 대마도 도주에게 전하게 하였다.
대마도는 경상도의 계림에 속해 있으니, 본디 우리 나라 땅이라는 것이 문적에 실려 있음을 상고해 볼 수 있다. 다만 그 땅이 심히 작고 또 바다 가운데 있어서 왕래함이 막혀 백성들이 쓰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중략) 내가 대통을 이은 이래로 부왕의 뜻을 이어 저들을 측은한 마음으로 사랑할 것이니라. 이제 대마도란 섬에도 역시 하늘에서 내린 윤리와 도덕의 성품이 있을 것이니 어찌 시세를 알고 의리에 통하여 깨닫는 사람이 없겠는가. 대마도 도주 도도웅와는 그 자신(새로이 자신의 길을 깨우쳐 나감)할 길을 열어 멸망의 화를 면하게 하고 나의 생민을 사랑하는 뜻에 맞도록 하라.
자마그치 576년 전에 쓰여진 이 글을 읽으면서 허허로운 심정에 빠지는 연유가 무엇인가. 지금의 일본이 심심하면 독도를 저희들 멋대로 지은 다케시마라고 부르면서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서는 것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불현듯 이 글을 읽어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일 것이다. 태종 이방원은 대마도가 경상도 계림에 속해 있음을 여러 문적을 통해 상고할 수가 있기에 거기에서 사는 백성들도 조선의 백성으로 사랑할 것이라고 유시했다. 역사를 읽으면서는 가정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지만, 대마도를 완전히 정벌하고 도주 도도웅와의 항복을 받았으면서도 주둔 병력 한 사람 남기지 않고 그야말로 완전 철병하는 이종무 장군의 마음씀이 답답하기도 하고, 대범하기도 하여 절로 웃어 보는 것도 역사를 읽는 즐거움이겠지만, 그때 대마도에 병력을 주둔하게 하고 성군 세종의 성은을 내리게 하였다면 어찌 되었을지를 상상해 보는 것도 또한 역사를 읽는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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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자신을 알라
희랍의 중앙부 코린토만을 깊숙히 들어간 곳에 미루라 항구가 있다. 그 항구의 북쪽 언덕을 올라가면 높이 솟은 파루나소스 산기슭에 아폴론의 신역으로 이름난 델포이가 있다. 옛날에는 희랍 전역으로부터 이곳을 찾아오는 공물의 행렬이 그치지 않았으며 신전에 이르는 길 양옆에는 뭇나라에서 바쳐온 공물을 간수하는 보고가 즐비했다. '희랍 주유기'에 의하면 그 신전 입구에는 인생에 대한 금언이 새겨져 있었는데 바로 '너 자신을 알라'와 '매사에 도를 지나치지 말라'의 두 글귀였다고 한다. 고대 철학자의 전기를 쓴 '디오게네스 라엘티오스'의 '타레스전'에 의하면, 별을 쫓다가 시궁창에 빠졌다는 이 철인은 '무엇이 가장 어려운가'하는 질문에 대해서 '나 자신을 아는 일'이라 대답했다고 한다. 한편 '매사에 도를 지나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아테네의 입법자 '솔로'의 말이라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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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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