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에 이르는 길 - 강영계
제 2장 철학이란 무엇인가
4.개별 학문과 철학
오늘날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학문을 인문 과학, 자영 과학, 사회 과학의 세 분야로 구분한다. 인문 과학의 영역에는 역사학, 신학, 문학, 언어학, 교육학 등이 속하고 사회 과학의 분야에는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 법학 등이 속하며 자연 과학에는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이 속한다. 기타의 수많은 개별 학문들은 대체로 이 세 가지 학문의 커다란 범주에 들어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학문이 지니는 성격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므로 반드시 모든 학문들이 이들 세 가지 학문의 커다란 범주에 속한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공학과 같은 종합 과학이 오늘날에는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예로 건축 공학을 들어보기로 하자. 어느 학교에 도서관을 건축할 경우 단순히 기계적으로 설계도를 그리고 설계도에 따라서 기계적으로, 곧 자연 과학적으로 뜯어 맞추면 도서관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학교의 예산이 허락하는 한에서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어야 할 것이고 도서관이 학생들에게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닐 것인지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선행하여야 하며 설계도와 아울러 실제의 건물의 미적인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건축 공학은 인문 과학이나 자연과학 또는 사회과학 어느 한 범주에만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굳이 말한다면 공학과 같은 학문은 응용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여기에서는 개별 학문과 철학과의 관계를 살피기 위하여 우선 학문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발생하고 또한 어떻게 구분되는지를 음미해보기로 하자. 왜냐하면 학문의 성격과 발생 및 구분을 알아야만 개별 학문의 특징을 논할 수 있으며 따라서 개별 학문과 철학의 관계도 해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흔히 현대를 소외의 시대나 인간성 상실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것은 기계적인 물질 문명과 다양한 집단적 사고인 이데올로기에 의하여 인간이 인간다운 가치를 잃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인 것이다. 인간성 상실은 특히 기계 문명의 발달에 의한 분업 현상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현대 기계 문명 사회는 학교나 공장이나 회사에서나 고도로 전문화된 사람을 요구한다. 그것은 마치 시계가 정밀한 부속품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 현상을 지닌다. 인간은 자발적인 사고에 의하여 더 이상 자신의 독창적인 삶과 주변 세계를 구성하며 창조할 수 없게 되었다. 정교한 분업화의 현상은 삶의 곳곳에서 거의 절대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학문도 예외는 아니다. 학문의 원래 목표는 인간의 삶의 문제를 밝히며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지만 오늘날 무수하게 분화된 학문들은 삶을 해명하기는커녕 오히려 삶을 혼란시키며 동시에 은폐시키는 경향마저 지니고 있다. 예컨대 생물학의 경우 유전학을 전공하는 사람은 인간을 유전의 차원에서만 바라보고, 생태학을 하는 사람은 인간을 생태학의 입장에서만 보며, 세포학을 하는 사람은 오직 자신의 입장에서만 인간을 고찰하려고 한다. 인간을 전체적, 본질적으로 해명하고 파악하여야 할 학문이 오늘날에는 수없이 많은 특수한 분야들로분화하고 증가하여 인간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기는커녕 오히려 인간을 부분적으로 그리고 고립시키는 방향에서 연구하려는 그릇된 경향을 지니게 되었다. 이데올로기가 헛된 집단적 주장이라고 할 때 현대의 학문 역시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이유가 다름 아닌 그러한 그릇된 경향을 지닌 학문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들이 개별 학문이라고 일컫는 학문들이 어떻게 발생했으며 특징들이 어떤 것인지를 고찰해보는 일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나간 날과 오늘날의 학문의 형태를 고찰하여 문제점을 찾아내고 해결하기 위해서는 학문의 시초 및 성격에 관한 탐구가 필연적으로 수행되지 않으면 안된다. 먼저 자연 과학을 살펴볼 때 자연 과학의 역사는 길게 잡아도 3백 년밖에 되지 않는다. 화학의 시초는 17세기 보일의 <회의적인 화학자>나 18세기말 라보아지에르 또는 1808년 달톤의 법칙으로 볼 수 있다. 물리학의 시초는 일반적으로 1687년 뉴튼의 <원리>로 알려지고 있다. 이미 기원전 250년 아르키메데스가 비중에 관한 물리 법칙을 발견하기는 했으나 그것은 참다운 학문적인 의미에서의 물리학의 시초라고 보기 어렵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기원전 4세기에 윤리학, 정치학, 자연학, 심리학 등 여러 가지 개별 학문에 관하여 저술 활동을 함으로써 오늘날의 개별 학문의 기초를 마련해주었다고 말할 수 있기는 해도 그가 언급한 그러한 학문들은 철학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으로서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개별 학문은 아니었다. 우리들은 학문의 시발점을 수학, 물리학, 화학 등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학문의 시발점은 인간의 삶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신화이다. 역사의 과정이 신화로부터 이성으로 전개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학문의 전개 과정 역시 신화로부터 이성으로의 이행이다. 학문의 시발점인 신화는 아직 논리적, 체계적으로 질서 지워진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것이다. 우리들은 삶의 역사적인 발전 과정을 인정하기 때문에 인간의 최초의 삶에 대한 상징인 신화가 오늘날의 학문처럼 명확하게 세분되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화는 이론적, 윤리적, 신비적 실천적인 복잡한 성격을 소유한 것이었다. 단군 신화라든가 박혁거세 신화 등에서 우리들은 우리의 조상들이 직접적, 구체적인 삶으로부터 추상적인 생각을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네 주상들은 자신을 확인하기 위하여 자신의 근원을 알려고 하였으며 그러한 요구로부터 단군이라는 하나의 상징을 그리고 또한 박혁거세라는 상징을 구성한 것이다. 그들은 논리적, 체계적인 생각의 실마리를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환웅이 곰과 어울려 자손을 퍼뜨리게 되고 커다란 알에서 박혁거세가 나오게 되는 상징이 등장한다. 그러나 신화는 아직도 직접적, 구체적인 자연과 인간의 생각, 곧 인간의 추상 작용이 혼합되어 있는 상태이다. 신화 세계에서는 여인이 꽃으로 되기도 하고 신과 인간이 합쳐서 이루어진 인물이 있기도 하며 영원히 죽지 않는 새도 있다. 신화 속의 추상적인 요소가 점차로 발전하는 것은 인간이 논리적 단순성에 대한 강력한 요구를 본래부터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논리적 단순성에 대한 인간의 요구는 알고자 하는 대상에 관한 부분적이며 피상적인 파악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전체적, 포괄적인 이해와 해명을 목적으로 삼는다. 예컨대 눈 내린 겨울에 지리산으로 여행을 떠난다고 하자. 지리산에 몇 차례 직접 갔다왔거나 아니면 몇십 년을 지리산에서 살지 않은 사람이라면 지리산의 형태와 기후 둥에 관하여 아무런 지식도 가질 수 없다. 이 경우 우리들은 지리산 등산에 경험이 많은 사람의 말을 듣기도 하며 지리산 일대의 지도를 참고로 삼기도 한다. 곧 지리산에 대한 상징을 가지려고 한다. 지리산 지도는 만일 그 지도가 정확하다면 지도를 참고하지 않고 실제로 지리산을 한두 차례 등산한 사람의 체험보다 훨씬 더 정확한 정보를 지리산에 대하여 제공해줄 것이다. 왜냐하면 지도는 구체적인 지리산을 논리적 단순성으로 표현해주기 때문이다. 사고는 추상 작용을 가지며 추상 작용은 다름 아닌 논리적 단순성을 동반한다. 자동차를 바라보면서 우리들은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10대의 자동차 또는 3대의 자동차라고 논리적으로 단순화시키면서 바라본다.
신화는 아직 일상적인 경험세계를 바탕으로 삼지만 학문은 일상경험의 한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질서의 원리"와 "새로운 지성적 해석의 형식"을 요구하며 그러한 원리와 형식을 소유한다. 인간의 지성적인 활동의 명확한 시초는 적어도 고대 희랍의 피타고라스 학파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자기들의 포괄적이며 종합적인 요구의 대상을 논리적으로 단순화시켰으니 그것은 바로 수개념이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수를 모든 것을 있게끔 해주는 가장 보편적인 요소로 보았으며 따라서 수를 영구 불변하는 참다운 존재로 여겼다. 이 학파에서는 아름다움을 8, 그리고 안정을 3으로 보았다. 여덟 음정으로 된 음악이나 팔등신의 미인이 가장 아름답고 삼각형이 가장 안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8이 아름다움 자체이고 3이 안정 자체라고 하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다. 8이나 3은 결국 논리적 단순성을 요구하는 인간의 추상적 사고에서 나온 결과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과 마찬가지로 학문은 논리적 단순성을 요구하는 인간의 사고 활동에 의하여 성립한다. 학문의 본질은 보편성, 필연성 그리고 객관성에 있으며 논리적 단순성을 요구하는 사고 활동은 바로 보편성과 필연성 및 객관성을 지향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논리적 단순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은 수이다. 고대 세계의 사람들이 생각할 때 수는 기본적으로 전체적이며 포괄적인 질서를부여하는 것이었다. 독일어의 학문을 뜻하는 비쎈샤프트(Wissenschaft)라는 말은 앎(Wissen)이라는 단어에서 성립하며 이 "앎"의 어원은 비데오(video)라는 라틴 말인데 비데오의 뜻은 "내가 본다"는 것이다. 또한 영어의 학문을 지시하는 싸이언스(science)라는 말의 어원은 스키오(scio)로 이 말의 뜻은 "내가 안다"는 것이다. 비데오나 스키오는 희랍 말 에피스테메(episteme)와 동일한 내용을 가진다. 에피스테메는 지식 또는 인식이라는 뜻으로 이 말의 원래 의미는 "고정과 안정"이다. 고정과 안정은 다름 아닌 보편성, 필연성 및 객관성을 뜻한다. 학문이 인간 사고의 지식에 의하여 세계의 체계적 질서를 구성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정신적 내지는 물질적인 대상들을 질서있게 발견하는 것으로서 인간의 문화적 업적 가운데서 예술 및 종교와 아울러 가장 고귀하며 특징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학이든 생물학이든 사회학이든 법학이든 모든 개별 학문은 특정한 대상을 논리적으로 단순하게 만들어서 체계적으로 정리한다. 왜냐하면 논리적 단순성에 의하여 대상의 전체성을 용이하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별 학문은 특정한 분야만을 연구하며 학문이 성립할 수 있는 근거라든가 학문의 방법 등을 묻지는 않는다. 앞에서 나는 학문의 역사적 배경 및 학문의 성격을 살펴보았는데 그와 같은 작업 역시 개별 학문이 할 일이 아니고 철학이 해명하여야 할 임무에 속한다. 예컨대 생물학은 생물의 형태, 구조, 발달 과정 등을 연구하며 결코 정치라든가 신화 같은 것을 연구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여기에 비하여 철학은 #1개별 학문의 성립 근거를 제시하며 #2나아가서는 개별 학문의 방법론을 제공하고 #3삶의 가치를 해명함으로써 개별 학문의 방향을 제시하여 준다. 예컨대 핵물리학자는 발전용 핵원자로를 발명하거나 수소탄 또는 원자탄을 발명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어떻게 사용되어야 할 것인지에 관한 가치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은 핵물리학이 할 일이 아니다. 핵물리학에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는 것은 과학 철학일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을 미루어볼 때 개별 학문의 분류와 방법론을 다루는 것은 철학의 할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화학에서 정치학이나 교육학 등이 어떻게 무슨 방법에 따라서 구분되며 그 학문들의 특징이 어떤 것인지를 다룬다고 한다면 화학은 독자적인 개별 학문이기를 그치게 된다. 그러면 이제 철학적인 입장에서 개별 학문들이 어떠한 방법에 의해서 구분되는지를 비교적 상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과거에 행하여졌던 학문의 분류 방법 중에서 모든 개별 학문을 실증주의적인 방법론을 근거로 하여 분류하려고 했던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콩트이다. 이 세계의 근원을 물질로 보거나 또는 앎의 근거를 오직 감각적인 경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학문이란 관찰, 실험, 검증을 토대로 성립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한 입증은 실증주의의 입장이다. 그러나 신칸트 학파는 역사적인 방법론을 근거로 하여 자연 과학과 문화 과학을 양립시키려고 하였다. 현대에도 여전히 모든 학문을 실증주의적으로 보려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신칸트 학파처럼 학문을 자연 과학과 정신 과학으로 양립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자연 과학과 문화 과학의 특징 및 방법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자연과 문화가 무엇을 뜻하며 어떠한 방법론적 차이에 의해서 서로 구분되는지를 살펴야 한다. 다음에서 나는 실증주의를 대표하는 콩트와 신칸트 학파에 속하는 리케르트를 중심으로 그들의 학문에 관한 이론을 살핌으로써 문제에 접근해보려고 한다. 콩트는 인간의 사고 활동, 곧 의식의 발전 단계를 3단계로 구분한다. 그 3단계는 신학적 상태, 형이상학적 상태 및 과학적 상태이다. 신학적 상태는 환상적인 상태이고 형이상학적 상태는 추상적 상태이며 과학적 상태는 실증적 상태이다. 철학적인 방법론의 관점에서 볼 때 이들 각 단계 내지는 상태에 적용되는 것은 신학적 방법, 형이상학적 방법 및 실증적 방법이다. 신학적 단계는 고대로부터 13세기에 이르기까지의 무단적 상태로 신부와 무사들이 지배한 시기이다. 형이상학적 단계는 14세기로부터 18세기에 이르는 법치적 상태로서 철학자와 법률가가 이 단계를 지배하였다. 실증적 단계는 프랑스 혁명 이후의 시기로 과학자와 산업가가 지배하는 사업적 상태이다. 콩트가 이렇게 인간의식의 단계를 3가지로 구분한 의도는 프랑스 혁명 이후 사회의 무정부 상태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목적 의식과 사회의 활동을 지배하는 역사적 발전 법칙을 밝히려는 것이었다. 콩트는 인간 의식의 3가지 발전 단계 가운데서 학문이 성립하는 것은 마지막 실증적 단계라고 한다. 그는 현대의 논리 실증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실증적 체계, 곧 객관적인 자연 과학적 방법에 의해서만 비로소 사회 활동을 지배하는 보편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에 의하면 보편적, 필연적 법칙은 관찰, 분석, 검증이 가능한 자연 과학의 방법에 의해서만 성립할 수 있으며 그러기에 모든 학문은 자연 과학적인 토대를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 콩트도 학문의 특징이 보편성에 있다고 보므로 그는 "현상은 단순하면 단순할수록 더욱더 일반적이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복잡한 것보다는 단순한 것이 실증적인 자연 과학 체계의 기초가 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콩트는 실증적 단계에서 성립하는 개별 학문을 수학,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및 사회학으로 나눈다. 그는 생물학에 심리학을 포함시킨다. 그가 학문을 이처럼 분류한 것은 현상의 복잡성이 점차로 증가하는 것과 아울러 정확성이 점차로 점차로 감소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서 분류했기 때문이며, 이와 같은 분류의 순서는 각각의 개별학문이 실증적 단계에 도달하는 역사적 과정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면 콩트는 어떠한 방법론을 근거로 하여 이들 개별 학문들을 분류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수학은 양의 학문이거나 또는 양의 척도를 목적으로 하는 학문이다. 수학의 특징은 분석이다. 수학 중에서 기하학과 역학의 현상은 모든 학문들에 있어서 가장 일반적이고 단순하며 또한 가장 추상적이고 독립적이므로 모든 다른 학문들의 기초가 된다. 수학 바로 다음에 오는 학문은 천문학이다. 천문학의 특징은 관찰이다. 이렇게 보면 천문학은 수학을 자신 안에 포함하며 따라서 수학의 방법인 분석도 이미 포함한다. 천문학 다음의 학문은 물리학으로 물리학의 방법적 특징은 실험이고 이 실험의 내용은 분석과 경험이다. 물리학은 이미 수학과 천문학을 기초로 하여 성립한다. 물리학 다음의 학문은 화학이며 화학의 방법론적 특징은 비교와 검증이다. 유기체를 연구하는 생물학은 유기체의 자연사와 병리학을 포함하며 방법론적 특징은 해부와 분류이다. 콩트에게 있어서 실증적 단계의 가장 윗부분을 차지하는 학문은 사회학이다. 그는 사회학을 사회 정학과 사회 동학으로 나눈다. 사회정학은 사회의 질서를 탐구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사회의 형태 및 구조를 연구하며 그 통일적 권위는 정신적 힘인 학문과 현실적 힘인 산업에 있다. 사회 동학은 사회의 발전 과정을 탐구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사회의 역사적 발전을 논하며 그 근거를 인간 의식의 발전 단계에 두고 있다. 콩트가 사회의 발전 단계를 신학적, 형이상학적, 실증적 상태로 나누는 태도는 바로 사회 동학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들이 콩트를 사회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이러한 실증철학적인 바탕에서 모든 다른 개별 학문들을 포괄하며 가장 복잡한 인간 사회를 다루는 학문을 사회학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사회학은 어디까지나 철학이고 오늘날의 사회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콩트가 학문을 분류한 근거는 실증적인 것이다. 비록 사회학의 단계에 있어서 사회학을 사회 정학과 사회 동학으로 구분하여 사회의 형태와 구조 그리고 인간의식의 발전 단계를 논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는 어디까지나 실증적인, 곧 자연과학적인 방법으로 모든 개별 학문을 위시하여 사회학을 논하고 있다. 수학,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사회학 등의 단계들에 있어서 뒤따르는 단계는 앞의 단계를 포함한다. 앞에서 말한 대로 천문학은 수학이 없으면 성립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물리학은 천문학이 없으면 성립하지 못한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콩트에게 있어서 학문의 체계는 어디까지나 실증적인 역사 발전 법칙을 기반으로하여 이루어지며 또한 필연적으로 인과적이며 실증적이다. 이것은 그가 개별 학문전체에 걸쳐서 법칙 정립적 방법을 적용시키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법칙정립적이라는 말은 자연 과학적인 인과 법칙을 성립시킨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인간이 대하는 대상은 콩트가 주장하는 것처럼 반드시 실증적인 차원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은 그와는 정반대로 자연 과학적인 경험적 방법에 의해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오히려 정신적인 이해와 체험에 의해서만 알려지는 측면이 엄연히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한 되의 물이 몇 kg이고 한 개의 구리 막대가 몇 cm인가를 경험적으로 측정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곡의 음악, 한 편의 시를 자연 과학적으로 몇 kg 나간다든가 몇 m가 된다고 측정하고 실험할 수는 없다. 또한 신의 존재라든가 자유 등을 실험과 관찰에 의하여 측정할 수도 없다. 현대 심리학자 중에는 사랑, 불안, 기쁨 등의 정서를 측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분노했을 때는 맥박이 빠르고 혈압이 높으며 호흡이 빠르다든가, 기쁠 때는 그와는 반대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분노나 기쁨의 정서는 물리적인 현상 - 곧 맥박과 호흡이 빠르고 혈압이 높거나 그 반대의 - 일 뿐 다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정서라든가 기타 여러 가지 인간의 기능을 그처럼 물리적으로만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주장한다면 이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물질과 물질들의 작용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닐 것이고 따라서 인간의 자유라든가 이상을 헛된 것일 터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접하는 대상들 중에는 일반화시키는 방법, 곧 자연 과학적인 방법에 의해서 파악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개성화시키는 방법, 곧 이해의 방법에 의해서 비로소 파악 가능한 것도 있으므로 모든 개별 학문을 단지 실증적인 자연 과학의 방법에 의해서 분류하는 것은 편파적인 작업임을 면할 길이 없다. 콩트는 전적으로 실증적인 자연 과학적 방법을 전체 개별 학문의 분류에 적용했지만 문화라는 정신적 현상은 오히려 예술, 철학, 종교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정신적, 역사적인 대상이지 결코 인과 법칙에 절대적으로 묶여 있는 실증적인 자연과학의 대상은 아니다. 이제 콩트와는 견해를 달리하는 리케르트의 입장을 살펴보기로 하자. 리케르트는 학문을 자연 과학과 문화 과학으로 나누며 자연이라는 개념은 그 특수성과 개성에 있어서 일회적인 것으로 이 개념은 인과 법칙을 근거로 하는 자연 개념과 대립된다. 자연의 인과 법칙은 일정하며 반복한다. 물리 실험에서 1cm의 구리 막대는 특정한 변화가 가하여지지 않는 한에 있어서는 언제나 1cm의 구리 막대이다. 그러나 역사에 있어서 예컨대 6.25라든가 8.15와 같은 사건은 단 한번만 일어나는 사건이고 한없이 반복하는 사건이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리케르트는 학문을 분류하는 데 있어서 그 대상이 일회적인 것에 관계하느냐 아니면 반복적인 인과 법칙에 관계하느냐에 따라서 학문을 문화 과학과 자연 과학으로 나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일회적인 것에 관계하는 역사 과학, 곧 문화 과학을 이해의 관점에서 고찰한다. 이해란 오직 인과 법칙만을 다루는 경험적 지각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서 이해의 대상은 비감각적인 의미 및 의미 형상이다. 예컨대 세종 대왕이 이룩한 업적이라든가 박정희 대통령이 행한 일을 우리들은 자연 과학적으로 측정할 수가 없고 오로지 그들의 업적이 지니는 의미를 판단할 뿐이다. 이해의 대상은 실증적이며 지각적인 대상과는 원칙적으로 다른 서술 방법을 학문에 요구하게 된다. 리케르트에 의하면 학문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으니, 그 한 가지는 역사나 문화와 같이 의미와 의의가 있어서 이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이해하는 대상이 있는가 하면, 이와는 정반대로 자연과 같이 의미 및 의의와는 상관없이 비이해적인 채로 남아 단지 감각적인 지각 대상만 되는 것이 있다. 그리하여 리케르트는 자연 과학의 특징을 인과율에 있다고 보며 여기에 비하여 문화 과학의 특징은 가치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만일 우리들이 인간의 정신은 자연으로부터 점진적으로 발전 과정을 거쳐 성립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지지한다면, 콩트의 실증적 입장이나 리케르트의 관념적 입장 모두는 편파적인 것이 되어 결국 전체성으로서의 세계를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결과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콩트가 모든 학문을 실증적으로 분류하는 데 비하여 모든 학문을 정신에 근거하여 구분하려는 경향도 있다. 실증적인 방법은 결국 앎의 문제에 있어서 감각 경험을 주제로 삼으며 물질을 존재의 근원으로 삼는다. 그러나 "스스로 정신으로서 발전하는 것을 아는 정신이 학문"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입장은 세계의 근원을 정신으로 보며 따라서 학문의 기초를 정신으로 보는 것이다. 모든 학문을 실증적인 입장에서 고찰하는 것도 가능하며 또한 모든 학문을 정신의 관점에서 고찰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현실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전체성을 전제로 하여 우리들이 어떠한 정당한 관점을 택하는가가 핵심적인 문제이다. 리케르트는 문화를 일반적으로 승인된 가치나 그 가치에 의하여 구성된 의미 형상이 부착되어 있는 실재적 대상의 총체로 보아서 감성적 지각 대상인 자연과 논리적으로 구분한다. 이와 같은 구분이 형식적, 논리적인 구별에 지나지 않으며 결코 실질적인 구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리케르트 자신도 암시하고 있다. 자연과학은 대상을 법칙화하며 문화과학은 개성화하는 데 특징이 있지만 그 대상은 어디까지나 전체적인 현실이다. 그러므로 모든 현실은, 즉 자연적 현실과 정신적현실은 한편으로는 법칙화되어 자연으로 해석 가능한 측면을 소유하고 또 한편으로는 개성화되어 가치 관계적으로 해석 가능한 측면도 소유한다. 그러나 학문을 형식적, 논리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학문의 대상 및 그 대상을 다루는 학문의 방법에 의한 것으로서 역사 개념에 의해서 성립되는 문화는 법칙적인 자연에 대립되며 가치와 의미를 지닌 것으로 누구에게든지 일회적이며 개별적이다. 따라서 문화라는 개면은, 마치 현실로서의 자연 개념이 인과 법칙적인 원리를 자연 과학에 제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적인 개념 구성을 위하여 현실로부터 본질적인 것, 곧 개성적인 것을 선택하는 원리를 문화 과학에 제공하여 준다. 이러한 리케르트의 학문에 대한 자세는 콩트와 대립되는 것으로서 오늘날까지도 유럽 철학의 학문론에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학문을 삶의 전체성에 관한 탐구라고 볼 때 자연 과학과 문화 과학을 절대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라는 물음이 당연히 제기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연 과학의 대상인 자연도 인과 법칙과 아울러 인간의 이해를 요구하며 역사나 정신이라는 문화 과학의 대상도 이해와 아울러 특정한 법칙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짤막하게 이미 말한 것처럼 현대의 개별 학문들 전체에 있어서는 리케르트가 학문을 두 가지로 구분하는 것이 정당성을 가지지 못한다. 리케르트는 자연과 문화를 대립시켜서 자연 과학과 문화 과학을 상호 대립되는 것으로 보고 있지만, 그가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자연 과학의 영역에는 역사적인 방법이 침투하여 있고 문화 과학의 영역에도 자연 과학적인 방법이 침투하여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자연 과학과 문화 과학을 절대적으로 서로 다른 것으로 분리시키기는 어려운 일이다. 예컨대 고고학이 자연 과학에 속하지만 어떤 사람은 고고학에 신학적인 이론을 결합시킨다. 일반적으로 교육학을 문화 과학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하지만 현대 교육학은 자연 과학적인 통계 이론을 필수적으로 포함한다. 그러므로 집단적인 성격을 띤 학문들, 말하자면 정치학, 법학, 경제학, 민속학, 교육학 및 언어학 등에서는 문화 과학적 및 자연 과학적인 방법뿐만 아니라 사회 과학적인 방법도 동시에 적용되고 있기 때문에 이들 개별 학문을 자연 과학이나 문화 과학 또는 사회 과학의 어느 한 영역에만 종속시키는 일이 무의미하게까지 생각된다.
19세기 초반의 실증주의적인 학문의 방법론은 콩트에 의해서 대변되며 이와 같은 관점은 리케르트를 비롯한 신칸트 학파의 여러 철학자들에 의해서 반박을 당하게 되었다. 그들은 학문을 현실에 연관시켜서 자연 과학과 문화 과학으로 양립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은 학문을 일반적으로 자연 과학, 문화 과학 그리고 사회 과학으로 구분한다. 자연 과학은 몰가치적인 지각 대상으로서의 자연에 관계하고 문화 과학은 의미와 의의를 소유한 가치적 역사에 관계한다면 정치학, 법학, 경제학 등과 같은 사회 과학은 과연 어떠한 현실에 관계하는가? 물론 오늘날에도 역사적, 사회적인 현실을 대상으로 삼는 학문의 전체를 정신 과학이라고 부른다든가 사회학은 심리학에 의하여 성립하는 것으로서 정신 과학의 철학이라고 부름으로써 여전히 학문을 자연 과학과 정신 과학으로 구분하는 경향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이 자연과 역사 및 이들 두 가지의 복합 개념인 사회로 구분되고 있는 것이 현대의 특징이다. 사회라는 개념은 자연과 역사의 복합 개념이며 보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하나의 집단 개념이다. 사회적 사실들은 매우 복잡다단한 모습을 띠고 있다. 만일 사회적 사실들이 자연적인 사실들처럼 단순하다면 우리들이 당면하고 있는 구체적인 정치, 경제적 문제들에대한 해결책도 쉽사리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사회적 현실이 자연적 대상과 똑같다면 우리들은 빠른 시일 안에 아무런 어려움도 없이 참다운 민주주의를 현실화시킬 수 있을 터이고 또한 경제적인 자립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사회적 사실들은 반복하지 않으며 #2그것들은 직접적으로 관찰되지 않으며 #3사회적 사실들은 언제나 변화하므로 균일성이 없고 #4어떤 한 시기에 있어서 특정한 사회적 사실들의 원인을 가려내기가 지극히 어렵다. 그러므로 사회적 상황을 살펴볼 경우 대단위 집단에 속하는 개인의 행위는 소단위 집단에 속하는 개인의 행위와 언제나 동일하지 않다. 예컨대 정치가가 정치 집단에서는 커다란 인물의 역할을 할지 모르지만 가정적으로는 전혀 바람직하지 못한 인간상을 가질 수 있다. 비슷한 예로 어떤 장관이 자기가 맡은 부처에서는 훌륭한 직무를 수행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부인과 자식들을 돌보지 않고 후배들을 착취하며 이용할 수 있다. 이와는 정반대로 어떤 대학 교수가 대학에서는 무능하다고 인정되지만 인간 관계에 있어서는 모범되는 행위를 할 수도 있다. 이렇게 볼 때 자연 과학에서 일반적으로 실증적인 결정론의 방법이 가져올 수 있는 결과가 사회 과학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실증적인 물리적 법칙들은 오늘날 상대적으로 작은 수의 변수를 포함하는 단순한 분석적 함수로서 표현되지만 사회 과학은 물리학과 같이 동일하게 반복하는 요소들을 표현하는 데 관심을 가지지 않으며 또한 개인적인 심리 사실의 법칙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사회 과학은 복합적인 양식 상호간의 관계에 대한 법칙에 관계한다고 볼 수 있다. 인구 밀도의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인구 밀도 집중의 결과를 관찰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우리들은 인구 밀도에 관하여 다음처럼 물을 수 있다. 빈곤은 높은 인구 증가율의 원인인가 아니면 결과인가? 사실 우리는 가난한 국가에 인구가 많은 것을 관찰할 수 있다. 다음으로 여성 해방 운동의 예를 들어보자. 여성들이 경제적 기회를 얻게 되어서 여성 해방 운동이 일어났는가 아니면 여성 해방 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에 여성들이 이전보다 더 경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가? 이 두 가지 경우에는 어떤 특정한 인과 관계가 성립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인과 관계는 개별적 사건 사이의 관계나 개별적 사건들의 집합이 아니라 사건들의 집단에 관한 다양한 양식들 사이의 관계이다. 말하자면 사회적인 인과 관계에 있어서 그 원인이 되는 것은 결과가 나타나게 되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와 함께 지속하며 또한 결과에 의하여 변화한다. 예컨대 교육 체제를 살펴볼 경우 교육 체제는사람들의 교제를 결과로 가져오며 동시에 사람들의 교제는 교육 체제를 변화시킨다. 여기에서 교육 체제는 단순한 시간적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교제라고 일컬어지는 사건 양식과 동시에 존재하는 사건 양식이다. 이렇게 보면 사회적 사실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전개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사회적 사실들은 변증법적으로 전개된다. 일반적으로 사회 과학의 특징을 이상과 같이 본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사회 과학을 역사적인 방법으로 다루려는 태도가 대립하고 있는 것이 현대의 실정이거니와, 전체적인 삶은 인간의 사회적인 행동에 있어서 개성화된 삶의 역사에 의해서 단절되지 않고 표현된다고 보는 견해는 사회 과학을 논함에 있어서 전통적인 문화 과학 내지는 정신 과학의 방법론을 여전히 채택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에 대립하여 영, 미에서는 사회 과학을 실증적, 경험적으로 연구하고자 하는 것이 오늘날의 현저한 추세이다. 즉 사회 과학에 계량적인 통계와 정확한 사례의 관찰 및 컴퓨터에 의한 자료 처리 등을 도입하는 것은 사회 과학을 실증적으로 연구하려는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사회 현상을 이론적, 기술적, 정책적인 문제 등으로 나누어 사회의 사실에 관한 문제들을 실증적, 경험적으로 해결하는 것을근본으로 삼아서 다른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오늘날 사회 과학의방법론에 있어서 지배적인 경향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모든 학문을 실증적으로 연구하려고 하는 콩트의 시도는 편파적이며, 따라서 콩트가 실증적 방법론에 입각하여 개별 학문들을 분류하는 것 역시 정당성을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동시에 우리는 역사적 방법론을 토대로 하여 학문을 지적하였다. 동시에 우리는 역사적 방법론을 토대로하여 학문을 자연 과학과 문화 과학으로 양립시키는 태도도 역시 사회 현상에 관한 독특한 학문의 성격과 방법론에 전체적인 관심을 적절히 기울이지 못하는 결함을 지닌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오늘날의 개별 학문에 있어서 지배적인 경향은 말할 필요도 없이 실증주의이다. 문화 과학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는 철학에 있어서까지도 검증 원리를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는, 예컨대 언어를 검증 원리에 의하여 해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정신과학의 입장에서 학문의 성격과 방법론을 논하는 측에서는 똑같은 언어를 이해와 표현과 해석의 지평으로 생각하며 또한 인간이 세계를 체험할 수 있는 매개체로 본다. 학문은 전적으로 실증적인 대상에만 관계한다고 말할 수도 없으며 또한 리케르트가 구분한 것처럼 역사와 자연이라는 서로 대립된 대상에만 관계되는 것도 아니다. 학문의 대상인 현실은 자연과 역사와 사회로 구분된다. 이와 같은 대상들이 실제적으로는 복합적인 현실로 등장하여 행동 과학이나 응용 과학이 나타난다. 그런데 논리적.형식적으로 학문의 대상을 구분하는 것이 방법론적으로 필요하다면 앞의 세 대상을 구분할 수 있으며 그에 따라서 자연 과학, 문화 과학, 사회 과학으로 오늘날의 학문을 정당하게 구분할 수 있다. 자연 및 역사와 더불어 사회적 사실도 이제는 하나의 학문의 대상으로서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소유한다. 지금까지 나는 개별 학문을 일반적으로 다루면서 그 분류와 방법을 철학적으로 살펴보았다. 철학도 문화 과학(또는 인문 과학)에 속하는 개별 학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철학을 기초학이라고 전제할 경우 철학과 구분하기 위하여 편의상 철학 이외의 학문을 개별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개별 학문들은 각각의 고유한 대상을 가진다. 그러나 철학은 고유한 대상보다는 개별 학문의 대상들에 대한 보편성을 묻는다. 그리하여 개별 학문에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학문의 방법론 역시 철학적인 탐구이며 이것은 개별 학문의 역할 및 방향을 제시해 준다. 학문의 본질에 관한 연구와 아울러 학문의 분류에 관한 방법론적인 탐구는 이미 존재하는 학문 방법론에 관한 충분한 검토가 뒤따라야 하며 동시에 철학의 전체적인 측면에서, 곧 인식론, 윤리학, 형이상학 및 미학 등의 종합적인 차원에서 고찰되어야한 할 성질의 것이다. 또한 그것은 인간 활동의 여러 다른 정신적인 영역들, 다시 말해서 예술.종교 등과 밀접한 연관성을 맺으면서 그 실마리를 찾을 때 기대되는 결과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학문의 본질은 결국 지혜로서의 진리를 탐구하는 데 있으며 진리를 탐구하는 방법에 있어서 학문이 여러 가지 개별 학문들의 형태로 구분된다는 사실은 우리가 분명히 주의하여야 할 점이다. 실상 삶의 형식은 학문이며 학문의 내용을 삶이다. 그러므로 철학과 기타 개별 학문들의 근원은 삶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철학의 형식은 개별 학문이며 개별 학문의 내용을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기에 정치학이 삶의 내용을 음미할 때 정치 철학의 모습을 소유하며 철학 역시 개별적인 정치적 사실에 자신을 제한시킬 때 정치학으로 개별화되는 것이다. 철학이 개별 학문의 성립 근거를 제시해주는 기초학의 역할을 가지며 또한 개별 학문에 방향을 제시해준다고 할지라도 철학과 개별 학문이 상호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서로 순환 관계에 있다는 사실에 우리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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