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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09 호
단기 4340. 1. 17 (음력 11.29) / 발행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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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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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현대문학 신인추천 모집공고
1 . 장르
■ 소설 : 단편(200자 원고지) 70매 안팎 2편 중편(200자 원고지) 200매 이상 1편 장편(200자 원고지) 1000매 이상 1편 ■ 시 : 10편 ■ 평론 : (200자 원고지) 70매 안팎 1편
2 . 추천방법
■ 응모된 작품의 심사는 본지에서 위촉한 심사위원이 담당함 ■ 추천된 작품은 기성문인과 동등한 대우로 본지에 게재하며, 추천된 장편소설의 경우 단행본으로 출간함 ■ 추천은 1회로 완료됨
3 . 기 타
■ 응모작품 마감은 매년 3월 31일 1회에 한함(마감일자 소인 유효) ■ 응모작품은 반드시 본지 편집부에 접수시켜야 함 ■ 응모원고에 대해서는 반환의 책임을 지지 않음 ■ 우편물 겉봉투에 <신인추천작품 응모작>임을 적고, 작품 앞에 별지를 붙여 반드시 성명과 전화번호를 명기하여야 함(작품에는 성명과 연락처를 기재하지 말 것) ■ 발표는 6월호 본지에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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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은 자기가 앞으로 지나가야 할 다리를 파괴하는 사람. / 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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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움직이는 127대 파워 - 박태견 지음
POWER 014 마이너스의 손: 조지 소로스
신만이 그 흐름을 아는 곳이라 불리는 한 세계가 있다. 케인즈 등 고금의 석학들이 내세운 빼어난 경제이론들이 도통 먹혀들지 않고, 한순간 삐꺽하면 전세계 경제가 삽시간에 금융공황에 휩싸일 정도의 천문학적 거금이 겁없이 국경을 넘나드는 세기말적 투기장인 국제외환시장이 바로 그곳이다. 외환전문가들은 현재 뉴욕, 런던, 도쿄 등 3대 외환시장을 위시한 전세계 외환시장에서 하루 평균 1조 3천억 달러(1,040조 원)의 돈이 숨가쁘게 거래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복마전 같은 이 투기판에서 살아 있는 신으로 추앙받는 한 인물이 있다. '마이너스의 손' '중앙은행 킬러' '유태금융 마피아'라 불리고 있는 미국 최대 투자신탁회사 퀀텀 펀드의 조지 소로스George Soros 회장이 바로 그이다. 서방에서는 장바구니 주식투자를 하는 주부라 할지라도 월스트리트의 검은 황제인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다. 모든 경제관련 언론매체들이 그의 행적을 24시간 추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투자가들은 소로스가 투자한 주식이나 채권, 외화라면 아무리 그것이 위태위태한 상황에 놓여 있는 물건이라도 앞다투어 사들인다. 소로스를 뒤따라 투자를 하면 손해 보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소로스의 판단과 정보에 대한 서방 금융계의 신뢰는 절대적이다. 뉴욕의 기업정보지 "파이낸셜 월드"는 얼마전 1993년도 월 스트리트 100대 고소득자 명단을 발표했다. 전세계 펀드 매니저들의 연가 최종성적표라 할 수 있는 이 리스트에서 올해도 랭킹 1위를 차지한 이는 역시 소로스였다. 이 발표에 따르면 그가 1993년도 한 해 동안 벌어들인 돈은 자그마치 11억 달러(8,800억 원)나 됐다. 소로스 혼자서 벌어들인 이 수입은 같은 해 유엔 가입국 중 하위 빈국 42개국의 국내총생산(GNP) 전체를 합친 수치보다도 큰 액수였다. 소로스 파워가얼마나 대단한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문제의 소로스는 1930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헝가리에서 보낸 그는 히틀러의 유태인 박해와 연이은 공산화를 피해 1947년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 비즈니스 스쿨에 진학, 반전체주의 철학가로 유명한 당대 석학 칼 포터 교수 밑에서 수학했다. 그가 월 스트리트에 진출한 것은 1956년의 일이다.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로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그때부터 만 17년 동안 월 스트리트에서 허드렛일부터 배우면서 펀드 매니저 경력을 충실히 쌓아갔다. 이제 홀로서기를 할 때라고 판단한 소로스는 1969년 퀀텀이라는 투자신탁회사를 세웠다. 마침내 소로스 신화가 시작된 것이다. 퀀텀은 창립 첫해부터 가공할 급성장을 거듭해서, 지난 19년간 퀀텀이 자사에 돈을 맡긴 투자가들에게 매해 나눠준 평균수익률은 자그마치 35p나 됐다. 국제외환 위기가 심화된 1992, 1993년도에는 잇따라 60p가 넘는 경이적 수익률을 올려, 이 분야의 최고기록을 갱신하기까지 했다. 발족 당시 400만 달러에 불과하던 자본금도 지금은 2만 1,500달러를 호가할 정도로 됐다. 은행금리가 아무리 높아도 한 자리 숫자를 넘지 않는 서방에서는 전무후무한 급신장이 아닐 수 없다. 소로스는 현재 이처럼 비대해진 퀀텀의 전체주식중 3분의 1을 소유하고 있다. 1981년 초 영국의 권위 있는 투자전문지 "국제 투자가"는 소로스를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머니 매니저'로 선정, 그의 빼어난 투자역량을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10여 년 뒤인 1992년 영국인들은 소로스에 대한 평가를 달리했다. 그해 9월 영국중앙은행은 유럽통화기금(ERM) 으로부터의 파운드화 전격 탈퇴를 선언했다. ERM 잔류시 파운드화가 독일의 마르크화 등에 비해 형편없이 낮게 평가돼상당한 국익 손실이 불가피하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세좋게 ERM을 이탈했던 영국은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0월에 백기를 들고 무조건 복귀해야 했다. 소로스의 농간 때문이었다. 소로스는 파운드화의 ERM 이탈로 빚어진 유럽통화 위기가 결국 영국의 패배로 끝날 것으로 일찌감치 판단했다. 이때부터 그는 끌어들일 수 있는 자본을 총동원해, '파운드 팔자'와 '마르크 사자'주문을 연신 내면서 파운드화 폭락을 주도해 났다. 이 기간중 그가 직접 동원한 자본은 자그마치 100억 달러를 넘었으며, 그는 불과 한 달 동안의 환투기를 통해 간단히 10억 달러 이상을 챙긴 것으로 후일 드러났다. 그가 벌어들인 돈은 다름아닌 영국 중앙은행 금고에 차곡히 쌓여 있던 알토란 같은 영국의 국부였다. 이 사건 후 영국인들이 소로스를 '파운드화를 망가뜨린 악마'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는 또 1993년 이후에는 미국의 엔고 공세에 편승해 일본주식시장의 보험주 등을 집중매입해 경이적인 이익을 챙기기도 했다. 그는 이어 금융산업이 낙후한 한국증권시장에도 뛰어들어 1994년 상반기에만 3억달러의 주식을 사들인 것으로 알려져 국내 금융계를 바짝 긴장시키고 있기도 하다.
앞의 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제 소로스의 주요 관심사는 더이상 주식도 채권도 곡물도 아닌 환투기가 됐다. 이것만큼 큰 이문이 남는 돈장사가 따로 없기 때문이다. 실제 세계금융계는 2차대전 후 40여 년간 세계경제가 절대군주로 군림해온 미국이 채무국으로 전락한 1985년을 분기점으로 일대 아노미 상태에 빠져들었다. 소련과의 무한대 군비확장경쟁으로 골병이 든 미국은 1985년 들어 채무국으로 전락한 이외에도 거의 모든 제조업 부문에서 일본에게 추월당했다. 이에 미국은 고르바초프가 집권한 소련과 서둘러 냉전을 끝내고 일본에대해서는 플라자합의라는 엔고공세를 전개함으로써 주도권을 되찾으려 했다. 그러나 한번 기울기 시작한 경제는 쉽게 회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이에 과거 40여년간 국제기축통화 역할을 단단히 해오던 달러화에 대한 국제사회의 불안감이 확산되면서 지구규모의 국제통화위기로 확대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같은 범지구적 통화혼란을 능구렁이 같은 소로스가 놓칠 리 없다. 투기꾼에게는 남의 위기가 바로 더없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소로스는 거래금의 몇 퍼센트에 불과한 위탁증거금으로 몇 십배의 거래를 행하는 선물거래나 일정기간 뒤 통화를 지정한 가격으로 매매하는 옵션 등의 금융파생상품을 개발해내는가 하면, 이들 금융파생상품을 교묘히 조합해 투자자금의 위험도를 헤지 펀드(유한책임 투자신탁) 같은 기발한 투기방식을 잇달라 개발해내고 있다. 현재 전세계 금융계는 700-800종의 헤지 펀드 거래가 통용되는데,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을 소로스의 퀀텀그룹이 개발했다. 그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 (SEC)가 헤지펀드는 너무 위험하다고 제약을 가하자, 곧 헤지 펀드에 대해 아무런 제약도 없는 네달란드에 새 매장을 차려 전세계를 상대로 한 환투기를 계속하는 등 최근의 글로텔리제이션 (지구촌화)을 최대한 활용해 교묘히 법망을 피하여 부단히 부를 축적해 나가고 있다. 한동안 소로스를 국제통화위기의 제 1 주범으로 규정하고 그를 법망으로 옭아매려던 각국 정부도 근래 들어서는 이를 포기하고, 도리어 그와 가능한 한 깊은 관계를 맺으려고 온갖 추파를 던지기 시작했다. 소로스의 막강한 정보 수집력과 날카로운 판단력, 그리고 전세계적인 정치경제적 영양력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서방선진 7개국(G7)의 모임인 'G7 평의회'는 몇 해 전부터 G7과는 무관한 소로스를 정식멤버로 추대해 해마다 그를 회의에 참석시키기 시작했다. 독일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와 미국중앙은행인 연방준비이사회(FRB)의 최고층들도 핫라인을 통해 소로스와 깊은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박사학위를 주기로 인색하기로 소문난 미국의 MIT대학도 최근 그에게 경제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이밖에 새로 시장경쟁를 도입한 까닭에 심한 자금란을 겪고 있는 동유럽 국가들도 그와 줄을 잇기 위해 동분서주 하고 있는데, 현재 소로스는 알바니아에서 러시아에 이르는 동구권의 18개 재단에 3억 달러 이상을 희사하면서 향후 또하나의 거대한 투자대상으로 떠오르는 '처녀지 개척'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소로스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투기꾼이라는 세간의 비난에 대해 극히 냉소적이다. 현대경제를 모르는 무지렁이들이나 하는 잠꼬대라는 식이다. 실제로 소로스는 얼마전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MIT대학에 제출한 논문에서 현대 자본주의를 '기존의 모든 경제이론이 파기된 불가측정의 시대'로 규정한 뒤, 고전적 의미에서의 투자와투기간의 구분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그는 과거에는 엔화가 상세를 보이면 이를 확보하기 위해 많은 돈이 모여들고, 그러면 어느 적정선이 지난 뒤 수요공급 법칙에 따라 엔화는 자동적으로 약세로 돌아섰다고 말한다. 그러나 요즘 들어서는 돈이 몰릴수록 엔화는 실력 이상의 초강세로 폭등을 거듭해 도저히 앞날의 흐름을 예측할 수 없게 됐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그는 이런 예측불허의 시대에는 멍청히 않아 있다가는 판판이 깨지기 십상이라며, 자신처럼 끊임없이 변화에 대응할 때에만 생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소로스다운 논법이다. 이같은 논법이 만들어지기까지에는 그의 체험이 큰 힘이 됐다. 펀드매니저에게는 단지 동물적 감각만 요구되는 게 아니다. 고급정보 수집력과 정확한 판단력도 빼놓을 수 없는 필수요건이다. 이를 입증해주는 대표적 예가 소로스의 지난 1987년 실패담이다. 블랙 프라이데이로 불리는 당시 월스트리트의 주가 대폭락으로 소로스는 자그마치 7억 달러의 천문학적 손실을 입었다. 미국중앙정보국(CIA) 못지않은 정보수집력을 갖고 있다고 알려진 소로스는 당연히 이런 사태가 발생하기 전 조만간 주가가 대폭락하리라는 사실을 정확히 예견했었다. 그러나 그 폭락이 미국이 아닌 일본에서 먼저 시작될 것으로 잘못 짚는 바람에 생애 최대의 참담한 실패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때 구겨진 체면을 1992년 유럽통화위기를 정확히 예측해, 며칠 만에 10억 달러를 벌어들임으로써 간신히 만회할 수 있었다.
펀드 매니저들은 외환시장의 흐름은 신만이 안다고 말한다. 이론이 사라진 국제외환시장에서 24시간 격돌하는 펀드 매니저. 이들은 어쩌면 신이 되고 싶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면에서는 이미 이들은 신의 경지에 올라섰다. 소로스가 보여주듯, 한 개인이 지구상의 못사는 나라 42개국이 연간 생산해내는 부가가치의 총합과 같은 수준인 11억 달러를 한 해 동안에 간단히 벌어들이는 단계에 올라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소로스로 대표되는 이들 국제적 펀드 매니저들이 치부하는 방식이다. 이들은 전쟁와중에 무수한 민초들의 희생 위에 치부하는 죽음의 상인들과 같은 치부방식을 즐기고 있다. 앨빈 토플러 같은 미래학자는 정보시대에는 두뇌가 곧 자본이라 말한다. 그러나 만에 하나 두뇌가 곧 자본이라는 이런 주장이 소로스류의 치부행위에 정당성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면, 이런 주장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두뇌노동이든 근육노동이든 정당한 (노동)이 제값을 받는 세상만이 진정 건강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소로스류가 활개치는 현재의 세계경제는 크게 병든 사회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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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찬희, 상희, 그리고 동섭이
나는 아파트 단지 내 상가에서 서점을 열고 각종 신앙도서와 아동도서를 팔고 있다가. 얼마전 이웃 동네 꼬마 찬희와 상하가 우리 가게의 문 앞에서 비죽 고개를 내밀었다. 들어오라고 손짓하니 그 아이들은 낯선 남자아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선생님,애가 진짜 도둑놈이에요!” 라로 말하는 것이었다. 언뜻 며칠전 찬희가 “우리 동네에 자전거 훔치는 도둑놈이 있어요” 라고 한 말이 생각났다. 나는 찬희에게 눈을 찡긋 감아 보였다. '사돈 남말 하는 게 아니야' 하는 의미로…찬희,상하와 만난 것은 그 애들이 아파트 단지 내에 세워 둔 자전거를 몰래 훔치다 발각되면서부터이다. 두 아이 모두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다. 찬희는 엄마가 가출하고 아빠와 형 이렇게 셋이서 살고 있었고,상하는 여섯 시구가 단칸방에서 올망졸망 살고 있었다. 찬희와 상하는 타이르는 내얘기를 듣고 반성하는 기미를 보이더니 다시는 그 같은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 나는 꼬마 도둑에게 이름을 물었다.
“이동섭!” 나는 동섭이의 두 손을 맞잡고 마음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하나님!동섭이가 그 동안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모두 용서해 주세요.' 한동안 동섭이의 손을 잡고 있자니 동섭이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선생님,동섭이도 반성문 쓰게 해야지요!”
찬희의 말에 쓰고 싶으면 쓰라고 말했다. 잠시 후 저희들끼리 무얼 하나 들여다보니 동섭이는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고 옆에서 찬희가 열심히 그 말을 받아 적고 있었다. 초등학교 사학년이면서도 동섭이는 글을 몰랐던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동섭이 부모님은 직장일이 너무 바빠 아들이 글을 모르는 것도, 도둑질을 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반성문 한 장을 써 가지고 아이들이 쪼르르 달려왔다. 아직도 동섭이 눈에 눈물 자국이 있었다. 나는 동섭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찬희야, 상하야, 이젠 동섭이를 소개할 때 '제 친구 동섭이에요'라고 말하려므나” 찬희와 상하가 내게 진짜 도둑을 데려온 이유를 그제서야 알 것 같았다.
이계옥 님/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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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철학에 이르는 길 - 강영계
제 2장 철학이란 무엇인가
2.기초학으로서의 철학
예전에는 철학을 만학의 왕이라고도 불렀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철학은 더이상 만학의 왕이 아니며 또한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사실 공자나 맹자만 해도 고렇고 우리 나라의 퇴계나 율곡을 보아도 세상만사에 대한 이론을 훤하게 꿰뚫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양에서도 플라톤, 소크라테스, 토마스 아퀴나스, 칸트, 헤겔 등은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에게는 철학이 여전히 만학의 왕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점차로 역사의 수레 바퀴가 굴러가서 근대 및 현대에 접어들면 사회가 분화되면서 학문도 분화되는 운명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서양이나 동양이나 이론적인 학문이라고 하면 적어도 근대 초기까지는 철학밖에 없었다. 특히 서양을 두고볼 때 근대 중반 이후 철학에서 정치학, 경제학, 법학, 교육학, 심리학, 언어학 등이 차례로 갈라져 나오게 되었다. 그렇다면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철학을 어떻게 이해하여야만 하는가? 어떤 극단적인 사람은 더 이상 철학이라는 학문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철학에서 대부분의 개별 학문들이 갈라져 나왔으므로 종래의 철학과 같은 학문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은 이제 철학은 개념의 뜻과 사용을 명확하게 해주는 일 밖에 다른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비록 철학으로부터 여러 가지 개별 학문들이 갈라져 나가서 철학은 개별 학문들에 그 자리를 내어주어야 하는 운명이긴 할지라도 이전이나 지금이나 철학이 학문으로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철학은 기초학이기 때문이다. 만일 가장 기본적인 학문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무엇이라고 답할 수 있을까? 자연 고학을 하는 사람들은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보다 자연과학이 정확한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물리학은 대상을 1cm또는 1g등 정확하게 측정한다. 그러나 "1cm나 1g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을 때 과연 무엇이며 어디에 그것들이 있다고 대답할 수 있을까? 구리막대 1cm가 있다고 할 때 1cm는 구리막대에 있는 것인가? 구리막대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구리 이외에는 다른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구리막대 1cm라고 이야기한다. 학문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학문은 수학일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수학이 가장 분명하며 정확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2+2=4라는 수식이 불변한다고 믿는다. 그러면 수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을 경우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우리는 1cm나 1g 또는 수란 우리들의 생각이 구성해낸 대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미 철학의 입장에 우리들이 서 있기 때문이다. 철학은 우선대상(그것이 내면적인 사고이든 외부적인 대상이든 또는 어떤 환경이나 상황이든 간에)의 원인 내지는 근거를 묻는다. 그것도 궁극적인 원인을 묻기 때문에 철학을 기초학이라고 하는 것이다. 철학이 기초학일 수 있는 예를 하나 들어보기로 하자. 수학에서는 1+1=2라고 한다. 1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에 관해서 수학은 답하지 않는다. 철학에서는, 특히 논리학적 탐구에서는 1을 존재자들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로 보며 또한 전체의 통일을 하나로 보기도 한다. 철학은 이처럼 수의 근원을 제시함으로써 수학이 성립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근원을 해명하여 주며 따라서 수학은 명확한 근거 위에서 전개될 수 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철학은 수학뿐만 아니라 개별 학문들 일반의 근거를 밝혀주기 때문에 기초학이다. 다시 말하면 철학은 이론적 사고의 성립 근거를 밝히며 제시한다. 우리들은 철학적 사색이 풍부한 곳에서 핀 문화가 매우 오래가며 또한 계속해서 발전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고대에는 거의 엇비슷한 차원의 철학적 사색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서양은 끊임없이 철학적 사색을 발전시키고 확장시켰음에 비하여 동양에서는 철학적 사색의 단절 내지는 정체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철학적 사색의 바탕이 확고한 민족과 국가는 그들의 의식을 명확히 하여 문화와 문명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음에 비하여 철학적 사색이 미약한 민족과 국가는 오랫동안 방황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기초학으로서의 철학적 토대가 견고할 때 개별 학문들의 발전이 기대될 수 있으며 그러한 토대가 빈약한 곳에서는 여타의 개별적인 성격을 가진다. 개별 학문, 예컨대 수학, 물리학, 역사학, 심리학, 정치학, 경제학 등등이 발전한 곳에서만 철학의 토대가 견고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철학의 토대가 굳은 곳이라야만 개별 과학들이 발전할 수 있다. 그렇지만 개별 학문들 자체의 기초가 견고하여야만 개별 학문들이 발전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볼 때 역시 철학적 토대가 학문 일반들의 기초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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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
'성냥'은 원래 한자어...'석뉴황'이 음운변화를 겪은 것
불을 켜는데 썼던 '성냥'은 마치 고유어인 것처럼 보이지만, 원래는 한자어였습니다. 즉 '셕뉴황'이 음운변화를 겪어서 '성냥'이 된 것입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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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2. 너 자신을 알라
당신은 같은 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그리스 철학자 대부분은 변하지 않는 것을 진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을 가치있게 생각하였고 그것을 추구했다. 파르메니데스는 변화란 있을 수 없고, 존재만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감성의 증거들을 불신하였고, 무엇이든지 한번 있었던 것은 완전하고 영원하다고 주장했다. 파르메니데스에게 겉에 드러난 변화는 환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인간 생활이나 자연을 둘러보면서 시시각각 생성 변화하는 모습에 주목하고, 변화를 오히려 더 보편적인 것으로 보려는 사람이 있었다.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 BC 544?-484?)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강물을 예로 들어 말했다. 강가에 서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라. 강 모양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흐르는 물은 계속해서 새로워진다. 여기에서 "당신은 같은 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 나왔다.
그는 변화, 즉 일종의 계속적인 흐름만이 오히려 실재라고 말했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화한다. 그는 변화 속에서 논리적 통일성을 보았고, 합리적 질서의 원리를 로고스라고 불렀다. 그는 만물의 생성변화에서 세계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고, 특히 불을 만물의 시작으로 보았다. 모든 것은 불의 변성이다. 그는 불이 열을 잃어 흙이 되는 것을 내려가는 길이라 하였고, 그 반대를 올라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두 길은 양의 힘에 의하여 움직이기 때문에 항상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변화는 어떻게 오는가? 헤라클레이토스에 따르면 세계의 모든 것은 두 가지 반대물로 이루어졌다. 밝음과 어둠, 선과 악, 흰 것과 검은 것, 이 반대의 경향이 바로 변화를 일으킨다. 이들은 서로 투쟁한다. 그러나 그 대립과 투쟁은 무질서하지 않고 오히려 전체적인 균형을 이룬다.
이러한 정, 반, 합의 사고방식은 나중에 헤겔에게 영향을 미쳤다. 누군가가 지어낸 말일지도 모르나 헤라클레이토스의 채무자 중의 한 사람이 그의 말을 이용하여 그를 골탕먹인 일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돈을 빌린 사람이나 빌려 준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결코 같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빌린 돈을 되돌려 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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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63. 장개석은 왜 패했는가 ?
흔히 장개석과 모택동의 싸움을 2000년 전에 있었던 항우-유방의 싸움과 비교 하곤 한다. 유방은 일개 농민의 아들로 병사 한 명 창 한 자루도 없는 맨손이었다. 그는 주변의 친구, 동지 들에게는 신의로, 백성에게는 관대함으로 급속히 인심을 얻어 갔다. 이에 비해 항우는 초나라라고 하는 강대국의 최고 귀족 집안의 자제로, 유방이 몸을 일으켰을 때는 이미 초패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압도적인 세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병사를 혹독하게 다루었고 지나친 자신감에 빠져 있었다. 결국 항우는 유방의 군사가 사면에 불러 대는 초나라 노래를 들으며 회한에 찬 최후를 맞게 된다. 중국에서 국민 혁명이 시작된 이래 장개석과 모택동, 국민당과 공산당의 세력은 항우와 유방에 비유될 정도로 차이가 났다. 장개석은 북벌 전쟁을 통해 군벌을 타도하고 통일 정권을 수립한 국민당의 당권, 군권 등을 한몸에 장악하고 있었고 대외적으로나 대내적으로 가히 유일한 중국의 지배자였다. 장개석이 1927년 상해에서 피비린내 나는 공산당 숙청(4.12쿠데타)을 자행했음에도 그가 곧 이어 국민당 최초의 통일 정권인 남경 정권을 수립했을때 민중의 지지는 열광적이었다. 오랜 통치에 지친 사람들은 국민당의 통일 정권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사실 장개석이 집권한 1927년부터 일본군이 침입한 1937년까지 남경 정부의 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과 그 성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1928년 최초의 국립은행이 설립되고 이금제(한 지역을 통과할 때마다 부과되는 내지 관세)가 폐지되어 국내 시장의 통일이 진전되었다. 또 1931년부터 34년까지는 세계 공황의 여파와 일본의 만주 침략으로 시달리고 있는 농촌을 구제하기 위해 농촌건설을 전개, 공산당의 소비에트에 맞대응했다. 이를 바탕으로 1930년대 중반에는 전국경제위원회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공업화를 추진했다. 1935년에는 종전의 냥을 원으로 바꾸는 화폐 개혁을 단행하고 아편 전쟁 당시 빼앗겼던 관세 자주권을 열강으로부터 되찾음으로써 중국 민족의 숙원을 풀었다. 정치척으로도 잔여 군벌들을 아우르고 공산당을 오지인 연안으로까지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자신감에 찬 장개석 정권은 손문의 국가건설 단계인 군정-훈정-헌정 중 최종단계인 헌정 실시를 약속하고 1935년 헌법을 기초했다. 사람들은 바야흐로 국민당 정부가 반제반봉건의 노선으로 매진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10년 후인 1947년 공산군과 내전을 벌이고 있는 국민당은 이미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들은 몰라볼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고 내전을 시작한 지 3년도 안 되어 대륙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장개석은 왜 패했는가? 우선, 장개석의 독재적 성향이다. 그는 북벌 과정에서 노동자, 농민을 동원하기 위해 당내 이들을 위한 조직을 설치하고 지원했다. 그러나 북벌이 끝나고 자신이 통일 정권의 지배자가 되자 이 조직들을 폐지하고 민중운동을 폭력으로 탄압했다. 학생이나 지식인의 움직임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들이 손문의 유지와 장개석의 약속대로 헌정의 실시, 의회 소집을 요구하자 장개석은 헌법 초안을 만든다는 구실로 시간을 끌었고 점차 원성을 사기 시작했다. 당내 좌파가 끊임없이 독재 체제의 완화를 촉구했지만 장개석은 정치란 엘리트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소수의 군부 인사와 당료들의 의견만을 들었다. 이에 따라 국민당은 대중의 힘을 동원하는 데 실패하고 그가 버린 대중은 공산당 쪽으로 향해 갔다. 이 점에서 모택동과는 극명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이 때문에 국민당은 초창기의 혁명성과 활력을 잃고 부패하고 노쇠하기 시작 했다. 둘째, 남경 정부의 도약기에 엄습한 일본의 침략은 치명적이었다. 전쟁의 첫해에 국부군은 그 때까지 10년 동안 이룩한 인원과 장비의 대부분을 파괴당했다. 그 후로 국부군의 질은 형편없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국민당 정권이 피난 간 서부의 오지인 중경은 당시로서는 거의 외국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낯선 곳이었고 낙후한 지역이었다. 서부 중국은 전국 전력의 4%만을 생산했고 공장수의 6%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거의 농업에 종사했는데 이들은 낯선 국민당 사람들에게 비협조적이었다. 중경에 있을 때 국민당 정부의 수입은 63%나 감소했다. 정부의 적자 재정에서 비롯된 인플레는 7개월 동안 251%나 물가가 오를 정도였다. 이 같은 위기 상황에서 학생과 지식인 들은 장개석에 대해 전민 항전, 즉 노동자, 농민, 학생 들의 정치 활동을 탄압하지 말고 이들 대중의 에너지를 분출시키는 것만이 대일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방안으로서 장개석이 약속했으나 실행하지 않고 있던 의회의 개설을 촉구했다. 요컨대 정권의 민주화만이 전쟁 능력을 제고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여론의 지지를 받은 이 주장에 대해 장개석은 전쟁은 정부와 군대가 한다며 코웃음을 쳤다. 반면 공산당은 이들의 주장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많은 지식인과 학생, 사회 저명인사들이 국민당의 독선에 염증을 느끼고 공산당 쪽에 가까워져 갔다. 게다가 장개석은 이들이 빨갱이라며 탄압하여 결과적으로 공산당을 도와 주었다. 1945년 소련의 만주 진공도 장개석 패배의 큰 원인이었다. 소련은 국민당 정부가 만주에서 군사적, 행정적인 힘을 확보하는 것을 저지시키려고 만주의 공업시설들을 떼어 갔다. 그리고 이곳에 공산군의 근거지를 마련해 주었다. 풍부한 식량과 일본인이 남겨 놓은 공업시설을 갖고 있는 만주를 장개석이 확보했다면 그리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국민당 약체화의 또 다른 원인은 중앙 정권에 대한 지방 세력의 저항을 들 수 있다. 1940년대 말까지 군벌 세력은 완전히 소탕되지 않았고 중앙정부는 마을단위까지 행정력이 미치지 못했다. 거듭되는 패전과 살인적인 인플레로 위기에 직면한 장개석 정권은 1948년 통화 개혁을 단행한다. 장개석의 아들이자 후일 자유중국의 총통이 되는 장경국이 주도한 이 개혁은 법폐라는 옛돈을 금원권이라는 새 돈으로 300만 대 1의 비율로 바꾸고 동시에 모든 물가와 임금을 동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통화 개혁은 70일 만에 실패로 돌아가고 국민당 정부는 붕괴의 길로 치닫게 되었다.
절망한 장개석은 1948년 1월 이렇게 내뱉었다. “솔직히 말해 중국에서나 외국에서나 오늘날의 국민당처럼 노후하고 퇴폐한 혁명 정당이란 있어 본 일이 없다. 얼이 빠져 있고 기율이 없으며 더 나아가 옳고 그른 기준도 없다. 이 따위 당은 오래 전에 부서져 쓸어 버려야 했다.” 그러나 당의 기율을 세우고 옳고 그른 기준을 바로 하라는 수많은 충고자들을 감옥에 처넣은 것은 장개석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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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제4장 생각하고 나서 행동하는 중국 - 꾸칭생(古淸生).자유기고가
16. 서양이 보는 '봉건중국', 중국이 보는 '서양중국'
우리는 늘, 미국이 역사가 짧아 1백 년 정도만 된 물건이라도 유물이나 골동품으로 삼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런 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말할 자격이 있다. 그들의 박물관에 있는 그들의 물건은 확실히 역사가 짧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그들을 무시하고 난 후에 우리의 가슴은 오히려 착잡해 지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의 박물관에 우리에게서 빼앗아간 많은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미국은 역사가 짧으며 유럽도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역사를 비교해 본다면 중국은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그러나 그런 역사도 한번 지나가고 나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누가 뭐라든 중국의 역사는 5천 년의 문명사이니, 이런 상식적인 것은 이제 그만 중학교 교과서에나 실어두면 충분하지 구태여 입에 오르내리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역사는 과거를 대표하지만 우리는 현재와 미래에서 생활하고 있다. 과거를 중시하고 현재를 경시하는 것은 세계가 중국을 이해하는 데 그렇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미국을 말하자면-사실상 우리가 말하는 미국이란 대체로 백악관과 국회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그들은 중국을 어떻게 간섭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지 미국인들이 중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고려하지 않는다. 미국 국민들은 중국을 잘 알고 있지 못하며 그들이 아는 방법도 대부분은 백악관과 국회의 선전이나 또는 방송매체의 보도를 통해서이다. 이 때문에 미국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중국은 실제와 아주 다른 것일 수 있으며, 여기에는 우리가 자신을 제대로 홍보하지 못한 탓도 있다. 오래된 국가는 사람들에게 부족이나 추장 같은 것을 쉽게 떠올리게 한다. 중국의 올림픽 개최지 신청에 관한 홍보영상에서 우리들이 왜 그런 낡은 성을 두드러지게 선전해야 하는지를 알 수가 없다. 좀더 냉정하게 말한다면 현대와는 너무 동떨어진 느낌을 주더라는 것이다. 여행에 대한 소개라면 당연히 좋은 홍보이지만, 한 국가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데는 걸맞지 않았다. 내가 난츠즈(에 살 때의 일이다. 내가 살던 쓰허웬)에는 마침 길쪽으로 난 창이 하나 있었는데, 왕푸징(에서 텐안먼으로 통하는 길에 면해 있어 적잖은 외국인들이 이곳을 지나다녔다. 이들은 대부분이 유럽이나 미국사람들이었는데, 늘 내 방 창문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러나 아시아인들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것은 서양인들이 베이징에 대해 잘 모르거나 쓰허웬에 대해 신비감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들의 이런 행동이 무척 신경쓰였다. 이곳에 무슨 볼거리가 있는가? 이것은 정상적인 생활에 대한 방해이며 인권침해가 아닌가?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나도 점점 그에 둔감해졌다. 결국 이것은 우리의 홍보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외국인들이 우리를 어느 정도 알게 되면 호기심은 줄어들 것이다. 이는 아시아인들이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솔직히 말해 내 친구가 내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아프리카의 촌락을 이야기한다면. 나도 곧바로 화전경작을 연상하게 될 것이고 가부장제의 추장이나 국왕을 연상하게 될 것이며 법이나 민주화와는 거리가 먼 봉건제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포탈라(布達拉) 궁을 보게 될 때는 자연히 종교를 연상하게 될 것이며, 만리장성과 자금성을 볼 때는 당연히 과거의 세월, 즉 이미 지나가고 없는 세월을 연상하게 될 것이다. 이 때문에 현대건축물의 문 앞에 놓인 봉건시대의 상징인 두 마리의 돌사자 조각을 보게 될 때는 황당한 느낌을 받게 된다.
오늘날에는 과거의 만리장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 맞는 현대화된 상징과 현대화된 분위기가 있어야 한다. 싼샤댐이 하나의 상징이 될 수도 있지만, 싼샤댐이 아주 고전적으로 건설될지는 현재로서 알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건축에 있어서 복고풍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우리의 선조들은 시대마다 그들의 건축양식이 있었으며, 모두 그 당시의 양식으로 건축물을 설계했던 것이다. 베이징에도 당연히 현대화된 건물들이 이미 하늘로 치솟아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옛것을 추구하려는 마음이 더욱 드러나는 것 같다. 작년에 내가 남방으로 내려간 적이 있었는데, 베이징에 와보지 않은 친구가 나에게 '너는 진정한 베이징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 말의 뜻은 다름 아닌, '청대 황족의 후손을 보았는가?' 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중국인들이 고대의 나라에 살고 있다고 오해하는 서구인들은 차치하고라도, 중국인들도 여전히 스스로 그런 봉건시대 황족의 후애를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베이징사람과 가짜 베이징사람 사이에 무슨 구별이 있단 말인가? 나는 그런 구별을 찾아낼 수가 없다. 실제로 청나라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도 양복을 입지 않았는가? 나는 일찍이 미국인과 중 .미 문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 미국인의 중국어는 나보다 더 정확했다.그는 당신 나라는 오래된 나라이며 당신네들은 전통을 너무 존중한다 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예사스런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나의 기분은 얼굴색이 누렇게 뜬 여인이 '당신은 옛날에 정말 아름다웠소'라고 하는 다른사람의 칭찬을 받았을 때 혹은 갓 말을 배운 어린애에게 '할아버지'라고 불렸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들은 모두 젊은이인데 왜 만나자마자 다른 사람으로부터 오래되었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단 말인가? 과거의 중국은 과거의 중국이고 현재의 중국은 현재의 중국. 즉 현대적 법과 민주제도를 지닌 인민공화국이다. 우리는 변발을 하고 아편을 피며 긴 장삼을 입는 만주족 청나라의 신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우리의 이미지를 세울 때는 '젊은중국'이라는 쪽으로하는 것이 좋으며, 고궁과 같은 곳은 여행홍보용으로 족한 것이지 오늘날의 이미지 홍보용으로 삼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만약 미국 국민들이 정말로 중국인의 현재 상황을 이해하고 있다면 그들은 백악관에 의해서 쉽게 조종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유럽인들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우리들의 공업화가 시간적으로 좀 늦기는 했지만, 우리들은 현대에 살면서 현대인의 의식과 관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만약 우리가 낡음과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칼자루를 쥐어주는 격이 된다. 사실상 우리들은 아주 젊다. 중화인민공화국으로 계산해 본다면 겨우 40여 년밖에 되지 않은 혈기와 활력이 넘치는 국가이고 따라서 앞으로는 현대과학과 문명으로 더욱 층만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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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가장 아름다운 꽃
남편이 죽었다. 교통사고로. 결혼한 지 1 년도 채 되지 않아 사랑하는 남편이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새벽에 경부고속도로에서 대형 트럭이 남편의 차를 들이받아 버렸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정신이 없는 가운데 장례를 치렀다. 많은 사람들이 위로의 말을 건네면 남편의 죽음을 기정 사실화했으나 인정할 수가 없었다. 이번 여름휴가 때 첫아들을 안고 고향의 바닷가를 찾자고 하던 말만 떠올랐다. 나는 임신 중이었다. 도대체 하느님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 원망스러웠다. 가난했지만 착한 마음으로 열심히 살려고 하던 남편이었다. 다니던 성당에도 발길을 끊었다. 그리고 고통 가운데 해산을 했다. 남편이 바라던 대로 아들이었다. 나는 아들을 안고 남편의 고향을 찾았다. 동해가 보이는 산자락에 남편을 잠들어 있었다. 나는 포대기를 열어 남편이 잠든 무덤을 아기에게 보여주었다. 파도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남편을 일찍 데려간 하느님이 다시 원망스러웠다. 아들을 얻은 기쁨보다 남편을 잃은 슬픔이 더욱 컸다.
"오늘이 일요일인데 왜 성당에 가지 않느냐?"
산에서 내려오자 시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정이 넘치는, 햇살같이 따스한 음성이었다.
"나가기 싫어서요, 아버님." "왜?" "그이를 일찍 데려간 하느님이 원망스러워요." "이렇게 어여쁜 아들을 줬는데도?" "그래도 그래요."
그러자 시아버지가 마당 앞 꽃밭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꽃밭에는 장미와 달리아, 채송화와 도라지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여기에서 꺾고 싶은 꽃을 하나 꺾어 보거라."
시아버지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는 가장 아름답게 핀 장미꽃 한 송이를 꺾었다. 그러자 시아버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것 봐라. 내 그럴 줄 알았다. 우리가 정원의 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꺾어 꽃병에 꽂듯이 하느님도 가장 아름다운 인간을 먼저 꺾어 천국을 장식한다. 애야, 이제는 너무 슬퍼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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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채찍으로 읽는 역사, 길잡이로 읽는 역사.
간디의 말
역사를 잘못 읽으면 자긍심을 손상하게 되는 것처럼, 역사를 왜곡하고 훼손하면 국민의 정서를 해치게 된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스스로 그런 환경을 만들고, 그런 여건에서 살면서도 수치심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 한 집안에는 그 집안 나름의 가통이라는 것이 전래되고 있다. 비근한 예로 30대에 백발이 성성해진다든가, 소주 한잔도 입에 대지 못하는 등의 특징을 '집안의 내력'이라고 말한다면 누구도 그것을 트집잡거나 나무라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를 존중해 온 우리 민족의 정서가 가문의 내력을 함부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김동인의 단편소설 "발가락이 닮았다."에서 우리의 국민적인 정서를 재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집안의 핏줄에 흐르는 가통을 가문의 내력이라고 하듯, 국가나 민족의 가슴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내력을 역사라고 한다. 나라의 역사든지 가문의 내력이든지 간에 역사에는 반드시 영광스러운 부분과 수치스러운 부분이 공존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자랑스러운 부분과 수치스러운 부분 은 똑같은 무게의 사료적 가치를 지녔다는 사실에 특히 유념해야 한다. 우리가 접하는 역사에서 수치스런 부분이 자주 반복되는 것은 그 수치스러운 부분을 숨기거나 미화하려고 하는 파렴치에서 시작된다는 사실도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비하될 수도, 거부될 수도 없는 것이며, 또 그것이 긍정적이든지 부정적이든지 똑같은 사료, 혹은 결과로 평가되어지는 것이다.
역사에서 배울 것이 없으면, 버릴 것을 배우라!
라는 경구가 옷깃을 여미게 하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우리의 현대사는 절대 권력자의 때묻고 구겨진 곳을 가리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고 훼손한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쿠데타나 유신을 찬양하는 문장이 구국이라는 이름으로 교과서에 등재되기도 하였고, 정변이 정당화되어 교과서에 오르는 일도 있었다. 이와 같이 터무니 없고 경박하기까지 한 역사 왜곡이나 국민정서의 훼손은 언제나 절대 권력으로부터 추진되었고, 놀랍게도 역사를 바로 인식해야 할 지식인들과 후학들에게 모범을 모여 주어야 할 학자들이 거기에 동조했다는 사실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인도의 양심이며 인도 독립의 아버지로 추앙 받고 있는 마하트마 간디의 말에서도 역사가 얼마나 준엄한 것인가를 찾아볼 수 있다. 역사를 보면, 폭군이나 살인광의 위정자도 있었다. 한때는 그들이 무적으로 보이지만 결국은 멸망하였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대사를 이끌었던 수많은 위정자들은 이 같은 역사 인식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을까. 자신들이 겪어야 할 비극적인 종말을 정말 모르고 있었다면 위정자로서의 자질을 의심받아야 할 무지의 소치일 것이고, 알고 있으면서도 민초들을 핍박하면서까지 권력을 장악하거나 연장을 기도하였다면 '신의 보복'을 받아 마땅한 행태를 저지른 것이 된다. 역사의 왜곡도 서슴지 않았던 사이비 지식인들에게는 불행하게도 자신들의 패덕을 미화하기를 강요한 권력의 주체가 무적일 것이라고 믿겠지만, 결국은 멸망했다는 간디의 명언을 실감하면서 자신들이 역사를 왜곡하면서까지 찬양했던 정권이 무너지는 것을 몸소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쓴 글이 교과서에서 삭제되는 수모도 겪었을 것이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수모는 또다시 역사에 소상하게 기록되어 앞으로 더 많은 세월 동안 자신과 후손들에게 악몽으로 밀어닥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면 그보다 더 큰 불행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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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 러시
1848년 1월, 미국 켈리포니아 사클라멘트의 한 노동자가 세라 네바다에서 사금을 발견했다. 그 뉴스가 전해지자 미국 내에서는 물론 세계 각지로부터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이 미국 서부로 쇄도했다. 더욱이 금광은 켈리포니아뿐만 아니라 콜로라도, 아이다호, 몬타나, 사우스 다고타 등 각지에서 잇달아 발견되어 골드 러시로 들끓었다. 이와 함께 캘리포니아의 인구는 십만을 돌파했고, 일개 한촌에 불과하던 샌프란시스코도 일약 인구 2만의 도시가 되었다. 금에 눈 먼 인간의 욕망은 갖가지 희비극을 연출했으며 오늘날까지 서부극에서 곧잘 다루는 주제가 되고 있다. 1960년대 후반기에는 또 다른 뜻의 골드러시가 세계를 휩쓸었다. 즉 국제통화인 파운드화가 동요를 거듭하다가 67년에 평가절하를 단행하자 금값이 급등, 세계 도처의 금시장이 문을 닫고 금의 이중가격제를 채택하는 등 소동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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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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