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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07 호
단기 4340. 1. 15 (음력 11.27) / 발행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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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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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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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남을 시궁창에 붙잡아 두려면 자기도 시궁창 속에있어야 한다. / 부커 T. 워싱턴 (미 흑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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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경제/경영/성공 |
세계를 움직이는 127대 파워 - 박태견 지음
POWER 013 인간을 닮아가는 기계: 미래형 컴퓨터
전문가들은 조만간 출현할 대표적 미래형 컴퓨터로 사람의 말로 작동되는 음성 인지 컴퓨터, 입고 다니는 바디탑 컴퓨터, 키보드가 아닌 펜으로 명령하는 펜 컴퓨터 등을 꼽고 있다. 전세계 컴퓨터업계는 전문지식 없이도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조작이 간단하고 자그마하면서도 가벼운 컴퓨터 개발에 전력을 다하고 있으며, 이미 상당한 연구성과가 축적된 상태이다. 현재 미국과 일본이 선두경합을 벌이고 있는 음성 인지 컴퓨터는 사용자가 컴퓨터를 향해 말만 하면 컴퓨터가 자동으로 말을 글자로 바꿔 작동되는 시스템으로, 이미 미국의 스핑크스 바이브로스는 1천 단어를 인식하는 시스템을, 일본의 아트 및 NEC는 각각 1천 자와 1,800여 자를 인식하는 시스템을 각각 개발해놓은 상태이다. 일본 NEC가 선두를 달리고 있는 바디탑 컴퓨터는 어깨나 허리, 손목에 장착할 수 있는 웨어러블(입는) 컴퓨터로, 1차로 1995년 실용화를 목표로 개발중이다. 현재 개발을 눈앞에 둔 바디탑은 전체무게가 1kg 미만인 응급 의료진 또는 구급요원의 휴대용 컴퓨터로 알려지고 있다. 이밖에 키보드 대신 전자펜으로 명령어를 입력하는 컴퓨터는 이미 부분적으로 실용화돼 일상생활에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1994년 10월 서울에서 아시아태평양 신경망학회(APNNA) 주최로 열린 94 신경회로망 국제학술대회에서는 140억 개의 신경세포로 이뤄진 사람 뇌의 정보처리원리를 모방한 신경망Neuro 컴퓨터도 선보였다. 사람의 두뇌처럼 직접 보고 듣고 생각하며, 스스로 학습해 정보를 처리하는 능력을 갖춘 이 신경망 컴퓨터가 완성되면 정보처리 속도가 대폭 빨라질 뿐 아니라, 흘려쓴 필기체같이 모호한 자료도 정확히 처리하고 일부 기능이 손상돼도 나머지 기능은 장애를 받지 않게 되는 등 종전의 컴퓨터 성능에 일대 혁명이 일어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또 컴퓨터가 주식투자를 대행하고 사회현상을 분석하는 시대도 도래할 전망이다. 이밖에 최근 들어서는 일본, 미국 등 서방국가가 공동으로 박테리아 크기의 생물체 분자소자에 의해 구성, 작동되는 바이오 컴퓨터(생물컴퓨터) 연구개발에 착수하는 등 종전의 상식을 뛰어넘는 최첨단 연구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시청각, 후각기능까지 갖출 것으로 예상되는 이 바이오 컴퓨터가 개발된다면, 단지 컴퓨터 혁명에 멈추지 않고 사이보그(인조인간) 제작까지도 현실화되는 거대한 파급효과를 끼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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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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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김밥 먹고 줄행랑
작년 12월 말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어언 칠 년 동안 사귀어온 친구들과 어울리던 날이었다. 일차로 어울리던 날이었다. 일차로 호프집에서 술을 마신 뒤 이차로 포장마차에 가서 한잔 더 하기로 하였다. 이런 저런 이야기에 시간은 깊어 갔고 점점 배가 고파왔다. 그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오뎅 국통 옆에 가지런히 누워 있는 김밥이 눈에 띄었다. 주인 아주머니는 옆 포장마차에 수다를 떨러 가셨는지 계시지 않았다. 돈도 넉넉지 못한 상황에서 일단 먹고 보자는 결론이 내려졌다. 사등분을 해서 한 조각씩 입에 넣었다. 그런데 나중에 돌아오신 아주머니는 아무런 눈치를 채지 못 하시는 것이었다. 뱃속에서는 김밥 밥알이 꿈틀거리는데 겉으로는 태연한 척 가장하려니 기분이 영 안 좋았다. 술자리를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아주머니는 그 새 또 자리를 비우셨다. 내가 조금 기다리자고 하니 녀석들이 "그냥 갈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결국 동의하고 말았다. 한 사람씩 나서면서도 찜찜한 기분은 떨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일이 벌어진 아상 최선을 다해 줄행랑쳤다. 비록 장난기가 발동하여 그런 행동을 하긴 했지만 주인 아주머니의 속상해하시는 모습이 눈에 선해 마음이 영 편치가 않았다. 다음날 새벽, 같은 시간에 나는 다시 그 포장마차를 찾아갔다. 아주머니는 나를 알아보셨다.
"혹시 어제...." "예, 맞습니다. 아주머니 기다리다 안 오시길래 시간이 너무 늦어 그냥 돌아갔습니다. 장사하시면서 그렇게 자리를 오래 비우시면 어떡합니까. 얼마였죠?"
능청스럽게 술값을 지불하고 돌아서는 내 모습이 우습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대견하게 느껴졌다. 포장마차 주변에 흐르는 유동천의 풍경이 왠지 아름답게 보였다.
서길원 님/경북 경산시 하양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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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철학에 이르는 길 - 강영계
제1장 철학에 대한 그릇된 생각들
4.철학함과 철학사
철학에 대한 또 한가지 그릇된 생각은 철학을 철학사와 똑같이 보는 것이다. 에세이를 철학이라고 본다든가 점치는 것을 철학이라고 여기는 것은 일상인들이 갖기 쉬운 편견이지만, 철학을 철학사와 같이 생각하는 경향은 직접 철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나 심지어는 철학을 가르치는 사람들까지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다. 이는 마치 잡다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소위 만물 박사를 철학자라고 부르는 것과도 같다. 우리들은 빈번하게 주변에서 철학 공부하다가 미쳤다든가 철학하는 사람은 하늘만 쳐가보고 걷는다든가 또는 철학과에 다니는 학생이 겨울에는 맨발에 고무신을 신고 다니며 여름에는 겨울 코트를 입고 다닌다 등과 같은 말을 많이 들어왔다. 그러한 표현들은 우연히 생긴 것이므로 전자 공학하는 사람도 여름에 털코트를 입고 다닌 수 있으며 수학하는 사람도 겨울에 맨발로 고무신을 신고 다닌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표현들을 뒤집어보면 우리들이 지금까지 철학을 철학답게 발전시키고 활용하지 못한 것을 비난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철학을 삶에 전적으로 무익하고 무용한 것으로 결정해 버린다면 그러한 자세는 학문의 기초를 부정하고 단지 수단으로서의 학문만을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 것이다. 사실 철학의 생동하는 힘은 "철학함"이다. 철학이라는 개념의 참다운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철학함"이외의 다른 어느 것에서도 찾을 수 없다. 철학을 "철학함"이라는 동적인 차원에서 바라보지 못하고 어떤 대상이나 사태에 대하여 정지된 완벽한 지식을 철학이라고 생각할 때 철학을 철학사와 똑같이 여기는 그릇된 생각을 가지게 된다. 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철학사도 철학의 일부는 되지만 철학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식자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지나간 그리고 동시에 새로운) 철학사 자체가 그들의 철학이다." 대학의 철학 개론 시간에 들어가면 고대 희랍의 자연 철학자가 누구이며 언제 살았고 어떤 문제를 제기했으며 다음의 어떤 철학자로 그 문제가 이어진다는 강의를 듣게 된다. 이 경우 만일 강의를 듣는 학생 가운데서 "왜 그런 이야기를 합니까?"라고질문할 때 정직하게 문제 의식을 가지고 바르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된지 의심스럽다. 플라톤의 작품이 어떤 것들이고 그의 철학 이론이 어떠어떠하다고 설명하는 것이 전혀 무의미한 일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그것도 역시 과거에 플라톤이라는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한 번 음미해본다는 뜻에서는 우리의 관심을 끌 수 있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플라톤이 몇 년에 태어나서 언제 죽었고 그의 작품들이 어떤 것들이며 그의 철학 사상은 무엇무엇이라고 암기하려고 드는 경향에 빠지기 쉽다. 그리하여 특정한 철학자에 관한 아니면 몇몇 철학적 흐름에 관한 지식을 암기하여 그것을 가지고 철학한다는 자신감을 가지기 쉽다. 일반적으로철학사를 철학과 동일시하는 사람들은 플라톤으로부터 사르트르나 마르쿠제에 이르기까지의 방대한 지식을 흡수하여 마치 자신이 상당한 수준의 철학을 소유하고 있다고 꿈꿀 수 있다. 그러나 대체로 그러한 지식은 정확한 지식도 못되며 또한 2차적이므로 근거도 빈약하기 마련이다.
철학함이란 의식의 자기 반성이라는 힘을 뜻한다. 그러므로 철학함은 하나의 대상을 문제로 삼고 그것을 부분과 전체로 분석하고 종합하며 그 대상과 나의 관계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묻는다. 철학사를 그저 나열하거나 암기하는 것은 자기 반성을 결여할 뿐만 아니라 심할 경우에는 자기 반성을 배제하려는 경향까지 가지게 된다. 왜냐하면 철학사에 의존할 경우 의식의 자발성은 점차로 사라져가고 수동적인 의식만이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철학사를 철학과 동일시하는 사람은 "헤겔에 의하면 아름다움이란...","주자에 의하면 자연이란..." 등과 같이 자기 의식의 본질적인 활동으로서의 철학함을 무시한 채로 이미 폐쇄되고 정지하여 있는 사고의 범위를 무한히 맴돌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함이란 주관과 객관을 구분하면서 동시에 통일시키는 의식의 자기 반성이다. 따라서 인간은 철학함에 의하여 주관으로서의 나와 객관으로서의 대상을 확립시키며 나아가서 양자의 관계를 구성하고 세계에 의미를 부여한다. 철학함은 따라서 인간의 창조적이며 구성적인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철학사란 철학함을 위하여 재료가 되고 동기를 부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철학함과 동일하지 않다. 철학사를 철학과 동일시하는 것은 문학사를 문학 또는 정치학사를 정치학과 똑같이 보는 경우와 전혀 다를 것이 없다. 어쩐 개인으로서의 철학자에 대한 이론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든 아니면 특정한 시대의 철학 이론을 연구하든간에 철학사로서의 철학사, 다시 말해서 암기용으로서의 철학사가 아니라 구체적, 전체적, 현실적인 철학함으로 융화시킬 때 단순한 철학사는 참다운 철학함으로 전환할 것이며 그리하여 철학의 한 분야로 의미와 타당성을 소유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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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
애국가 가사 중의 '남산'은 '앞산'이란 의미
애국가 중의 또 한 가지 '남산'의 의미를 모르는 분이 무척 많습니다. 어느 고장을 가나 '남산'은 있습니다. 서울의 남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제가 살고 있는 천안에도 남산은 있습니다. 이 '남산'은 '남쪽에 있는 산'으로 알고 계신 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남'은 한자로 지금은 '남쪽'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원래 '남'은 '앞 남'이었습니다. 즉 '남산'은 '앞산'이란 의미입니다. '앞에 있는 산'이 곧 '남산'입니다. 그리고 '북'은 '뒤 북'이었었습니다. 그래서 '북망산'에 간다는 것은 '뒷산'의 묘지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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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1. 빛은 오리엔트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 낮았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나일강을 선물로 받아서 찬란한 고대문명을 이룩한 이집트인들, 거대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는 여전히 우리에게 고대 이집트인들의 기강을 보여 주는 듯하다. 고대 이집트의 역사가 나일강에서 시작했다면 그 마지막은 클레오파트라로 끝맺어야 할 것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코' 이야기로 다시 한번 그녀를 역사적 인물로 부각시킨 사람은 파스칼(B. Pascal, 1623-1662)이다. 파스칼의 '팡세(Pensees)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인생의 허무함을 알고자 하는 자는 연애의 원인과 결과를 알아 보면 된다. 연애의 원인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며, 더욱이 연애의 결과는 놀랄 만한 것이다. 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은-사소한 것이지만, 지구를, 황제들을, 그리고 온 세계를 좌우한다. 만일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 낮았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면 한 여자의 코가 어떻게 세계사에 그처럼 큰 영향을 줄 수 있었는지를 그녀가 살던 당대로 거슬러 올라가 알아보자.
클레오파트라(Cleopatra, BC 69-30)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여왕이었다. 그녀는 친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부부간이었고, 공동 왕이었다. 그런데 궁전 안의 대립으로 오누이간에 싸움이 벌어져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아에 쫓겨나 있었다. 이집트로 도망온 폼페이우스를 잡기 위해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에 왔을 때 이집트의 국내 정세는 이러했다. 어느 날 카이사르에게 멋진 양탄자가 전달되었는데 그 안에서 클레오파트라가 나왔다. 그녀는 카이사르의 힘을 빌어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지성과 교양을 갖춘 이 여인은 곧 카이사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하여 카이사르는 생명의 위험을 걸고서 그녀를 위하여 그 이듬해까지 알렉산드리아 시가전을 벌인 끝에 클레오파트라를 왕위에 복귀시킬 수 있었다. 이 시가전에서 당시 헬레니즘 세계 최대의 도서관이 불타 버린 사건은 유명하다. 카이사르는 또한 키프로스섬을 정벌해서 이집트의 소유가 되게 했다. 카이사르가 시리아로 진군한 후에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아들을 낳았다. 사람들은 이 아들을 '카이사리온'이라고 불렀다. 기원전 46년에 카이사르의 초청으로 클레오파트라는 그에게서 낳은 아들과 공동 왕인 자기 남편과 함께 로마에 왔다. 그러나 기원전 44년에 카이사르가 원로원에서 살해당하자 클레오파트라는 재빨리 이집트로 돌아왔다. 카이사르 사후 로마의 정세가 불투명할 때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의 명장 안토니우스를 자기 편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기원전 41년에 타르수스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 두 사람의 운명적인 만남이 있었다. 두 사람은 그해 겨울을 알렉산드리아에서 함께 보냈는데 안토니우스가 출발하고 나서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쌍둥이 아이를 낳았다. 기원전 37년에 안토니우스는 그녀를 안티오크로 불러서 영원한 정치적 인적 동맹을 맺었다. 안토니우스는 그녀가 데리고 온 쌍둥이가 친자임을 확인했고, 알렉산더 헬리오스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세번째 아이가 기원전 36년에 태어났는데 그의 이름은 포톨레마이오스 필라델푸스라고 불렸다. 안토니우스는 기레나이카를 포함하여 구 프톨레마이오스 제국의 영토를 클레오파트라에게 넘겨 주었다. 따라서 로마의 패권이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양자의 대결로 압축되었을 때 그녀가 이집트의 풍부한 물자로써 안토니우스를 후원한 것은 당연했다.
이집트의 위세는 다시 빛나는 듯했다. 그리하여 레스폰트에서 인더스강까지 알렉산더가 정복했던 모든 영토가 적어도 명목적으로는 클레오파트라와 그의 자식들-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에게서 태어난-에게 귀속되었다.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에게서 난 카이사리온은 이집트와 키프로스의 통치자로서 뿐만 아니라 '왕중의 왕'이라 불렸다. 안토니우스에게서 태어난 삼남매 중에 알렉산더 헬리오스는 유프라테스 동방의 군주,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푸스느 유프라테스 서쪽의 군주가 되었고,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는 키레나이카의 여왕이 되었다. 사실 이 광대한 영토가 완전히 중앙의 통제하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안에는 정복되지 않았거나 보호왕들 또는 안토니우스의 부하들에 의해 통치된 지역도 많았다. 이러한 정세는 지중해 세계의 통합을 노리는 옥타비아누스에게는 크나큰 위협이자 방해였다. 특히 카이사르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에 대해서 카이사리온은 친자이기 때문에 친자로서의 법적 권리를 주장했고, 옥타비아누스를 찬탈자라고 공격했기 때문에 옥타비아누스가 클레오파트라에게 상당한 적개심을 품게 된 것은 당연했다. 옥타비아누스가 장악한 로마군은 기원전 32년에 클레오파트라의 이집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른다. 악티움 해전은 로마공화국과 옥타비아누스에게는 승리의 월계관을,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에게는 죽음을 가져다 주었다. 안토니우스의 자살 이후 옥타비아누스의 개선식의 제물이 될 것을 두려워한 클레오파트라도 그의 뒤를 따라서 자살했다(기원전 30년 8월). 그녀는 아름다웠기보다는 매력적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파스칼이 그녀의 코로써 그녀의 미를 대표하려 했던 것은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 태생이 아니라 마케도니나의 프톨레마이오스 왕가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리스 풍의 미인이 그러했듯이 높은 코를 가졌던 것이다. 그 외에도 그녀는 교육을 잘 받았기 때문에 이집트어 외에 여러 외국어에 능통했다. 그녀의 이미지가 로마의 선전과 그 이후 구전에 의해 왜곡되었지만 사실 이집트인들에게는 인기가 좋았다. 그녀는 국민들의 물질적 생활을 잘 돌보았고, 종교적 신앙을 이해했으며, 따라서 국민들의 애정을 받은 여왕이었다. 그녀는 결코 성적으로 방종한 여자는 아니었다. 그녀가 관계를 맺은 남자는 단 두명,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였다. 성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했다고만 볼 수도 없다. 이집트를 위해서, 그리고 이집트의 여왕인 그녀 자신을 위해서 그녀가 야망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고, 이것이 바로 당시 옥타비아누스와 로마인에게 거슬린 점이었다. 그녀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로마인들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 사실이나 그녀가 그들에게 애정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어쨌든 그녀의 자살로 이집트의 고대사는 막을 내리고 이집트는 이제 로마의 한 속주로 전락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옥타비아누스의 개인재산이 되었다. 이집트의 영광이 사라지고 로마의 세계가 열린 것이다. 그녀가 안토니우스가 아니라 옥타비아누스를 택했다면 아마 파스칼의 말대로 세계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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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61. 신무기 실험대에 오른 게르니카의 비극
20세기 미술의 거장 피카소의 그림 가운데 `게르니카`라는 제목이 붙은 것이 있다. 게르티카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작은 마을이다. 그런데 1937년 4월 26일 독일 공군의 폭격으로 이 마을은 쑥밭이 되었다. 마을 사람들을 향해 사격 연습하듯 기관총 세례와 폭탄을 퍼부었고 여기에는 아이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약 3시간의 폭격으로 1,654명이 죽고 889명이 다쳤다. 피카소의 <케르니카>는 독일군의 폭격에 대한 분노이자 고발이었다. 1930년대 유럽은 새로운 전쟁을 향해 한발 한발 다가가고 있었다. 이탈리아, 독일에서 파시스트가 정권을 잡고 군비 확장에 힘을 쓰면서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이렇게 점점 커 가는 파시스트 세력과 그것을 저지하려는 세력의 대립 상황은 스페인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군주제 국가였던 스페인이 공화제로 바뀐 것은 1931년의 일이었다. 하지만 주민 세 명 중 한 명이 문맹이고 토지 소유자의 겨우 2%가 경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더구나 카톨릭 교회가 넓은 토지를 비롯하여 스페인 국가 재산의 거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 교회 세력은 자신들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했다. 공화당과 사회당의 연립으로 구성된 공화국 정부는 교회를 약화시키는 정책을 실시하고 보통선거의 도입, 군대 개혁, 토지 개혁 등을 추진했다. 이에 대해 지주, 자본가, 성직자, 장교 등 전통적인 지배 계층은 위기감을 느꼈으며 그 결과 독일 나치의 영향을 받은 극우 정당인 팔랑게 당이 결성되었다. 1933년 총선거에서는 독일에서의 나치의 정권 획득에 고무된 듯 우익의 진출이 두드러졌고 내각에도 참여할 정도가 되었다. 이에 대해 마드리드와 북부 공업지역의 노동자들은 총파업으로 저항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공화국을 지키려는 사람들로 하여금 점점 더 단결의 필요성을 느끼게 했다. 그리하여 1936년 1월 공화당 좌파, 사회당, 공산당 등으로 인민 전선이 결성되었고 이어 열린 2월의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우파는 이에 반란으로 답했다. 그 해 7월 식민지 모로코에 있던 프랑코 장군 (Francis Franco, 1892-1975)이 반란의 신호탄을 쏘았고 이에 본국의 반동 세력이 호응했던 것이다. 스페인은 인민 전선에 의한 민주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피비린내 나는 내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내전의 초기에는 공화파가 불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러한 형세를 뒤바꾼 것은 이탈리아와 독일의 군사 개입이었다. 영국은 6만이 넘는 병력과 대량의 무기, 자금을 반란군에게 지원했고 공군과 해군을 동원한 직접 군사 행동도 서슴치 않았다. 이에 대해 프랑스와 영국은 불간섭 정책으로 파시스트 세력의 도발을 묵인했고 오직 소련만이 병력과 무기를 보내 공화국을 지원했다. 하지만 국가 차원의 지원보다 더 감동적이었던 것은 전 세계 지식인, 노동자의 참전이었다. 반파쇼 정열에 불타는 전 세계의 양심적인 사람들이 스페인의 갓 피어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스페인으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모인 사람들이 약 3,4만이었으며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공화국을 지원하기 위한 모금에 참가했다.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앙드레 말로의 <희망>,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 등은 이 반파시즘 전쟁에 참가한 체험을 문학 작품으로 승화시킨 것들이다. 게르니카의 비극은 이러한 스페인 내전의 와중에서 벌어졌다. 바스크는 스페인에 속하기는 했지만 스페인 사람들과는 언어도 문화도 달랐다. 따라서 그들은 이전부터 스페인에 자치를 요구했다. 1936년 10월 인민 전선 정부는 바스크의 자치를 지지하고 자치 정부를 승인하는 방침을 밝혔다. 그리하여 그 후 바스크에서는 프랑코의 반란군에 반대하고 인민 전선 정부를 지지하는 움직임이 강했다. 프랑코는 바스크를 공격하여 북부 지방을 먼저 장악하려 했다. 여기에 신무기를 실험할 장소를 물색하고 있던 독일 공군 총사령관 괴링(Hermann Goring)의 생각이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괴링은 히틀러가 프랑코의 반란군은 지원하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스페인 내전을 독일 신무기 실험장으로 이용하려고 마음 먹고 있던 차였다. 그리하여 1937년 4월 26일 독일의 최신형 폭격기, 신무기들이 이 고요한 마을을 폭격했는데 여기에는 각종 폭탄, 소이탄, 심지어 어뢰까지 투하되었다. 게르니카의 비극이 벌어진 약 2년 후인 1939년 3월 말 끈질기게 버티던 마드리드가 프랑코 군대에 함락되었다. 마침내 내전이 반란군의 승리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스페인 내전은 2차대전의 예행연습에 불과했다. 마드리드가 함락된 해 9월 독일군의 전격적인 폴란드 침공으로 세계는 새로운 전쟁으로 휩쓸려 들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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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제4장 생각하고 나서 행동하는 중국 - 꾸칭생(古淸生).자유기고가
14. 보잉 777기는 절대로 안 탄다
미래의 하늘을 비행하게 될 보잉항공기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천사와 같은 자유와 평안함이 결코 아니다. 보잉사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비행기제조업체이다. 중국의 하늘에서도 보잉사 계열의 비행기가 주요 여객기가 될 것이다. 현재 보잉사 비행기의 선진성과 안정성은 마치 공인받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보잉사가 최근에 선보인 최신 기종. '보잉 777'기는 오히려 사람들의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 1993년 6월부터 보잉사의 최신형 대형 비행기인 보잉 777은 매일 워싱턴과 런던 사이를 비행하기 시작했다. 이 비행기의 제작, 설계에는 무려 40억 달러를 썼는데,설계는 완전히 컴퓨터로 한 것이었다.미국 최대의 비행기제조업체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기술과 상업상의 승리였다. 1996년 1월, 말레이시아항공사가 제시한 최신형 비행기 15대를 포함한 항공기 구입주문서는 항공업계 대다수가 예상하듯이, 보잉사가 일약 경쟁업계의 선두로 나설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러나 보잉 777기의 이렇게 밝은 전망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비즈니스 위크]는 4개월 간의 조사를 통해 지난 2년여에 걸쳐 보잉 777기에 안전상의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는 설계상의 문제점이 잠재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연방항공국의 관리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여 왔음을 밝혀 냈다, [비즈니스 위크]는 연방항공국의 내부문서 수십 부를 열람하고,직접 보잉 777기의 합격심사에 참석했던 사람을 포함한 연방항공국의 수많은 중견급 엔지니어들 및 안전검사요원들과 장시간의 인터뷰를 성사시켰다. 이 사람들 중 대다수는 회사의 보복조치를 피하고자 인터뷰에 익명을 요구했다. 그들은 연방항공국 관리들이 보잉 777기에 대해 충분한 실험을 했는지의 여부는 아직도 의문스럽다고 밝혔다. 연방항공국의 엔진전문가들은 엔진의 나선형 프로펠러에 균열이 생기게 되면 보잉 777기는 아마도 심한 떨림 현상을 보일 것이라고 지적하며, '이것은 안정성문제 이므로 보잉777기는 조만간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라고 하였다. 보잉 777기의 설계상 문제에 대하여 보잉사는 [비즈니스 위크]의 보도에 정식으로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보잉사는 서면을 통해 '역사상 어느 비행기도 보잉 777기처럼 철저한 시험을 거친 적은 없다'라고 주장했다. 연방항공국의 간부 역시 강력하게 이 비행기를 변호했다. 연방항공국 합격증 발부처 주임 토마스 막스빈은 만약 자신이 보잉 777기에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즉시 합격증 발부를 취소했을 것이나, 이 비행기는 이미 규정상 갖추어야 할 모든 조건에 부합했다고 설명했다. 그의 말대로 사실이 그렇다면 분명 좋은 일이기는 하나, 소식통에 의하면 중국의 항공사 몇 군데에서도 보잉 777기를 구매하려고 하자 이러한 상황을 알고 있는 몇몇 관리들이 반대했다고 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렇다. 연방항공국의 간부급 관리들이 1995년 4월 19일 보잉 777기의 합격증을 발부할 때 보잉사의 계획에 맞추기 위해 사내 엔지니어들이 제기한 안전상의 문제점들을 무시하고 합격증을 발부했으며, 이에 도의적 책임을 느낀 몇 사람이 항공국에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또한 그들은, 연방항공국이 설계상 나타날 수 있는 결함에 대해 충분한 실험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보잉 777기에 합격증을 발부한 것은 대중의 안전을 보장함과 아울러 미국 항공산업의 발전을 촉진시켜야 한다는 연방항공국 내규가 빚어낸 결과라고 했다. 이에 대해 연방항공국 자체조사단 역시 연방항공국은 비행기 제조업자들에게 비행안전성을 확보하도록 규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런 질책을 항공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토마스 막스빈은 재빨리 이러한 논쟁 자체를 부인하며, 비행기제조업체가 아무리 합격증을 약속일보다 빨리 받으려고 해도 연방항공국은 결코 업체의 일정에 따라 일을 진행시킨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막스빈의 이런 말은 충분히 의심의 여지가 있다. 연방항공국이 비행기제조업체들과의 밀접한 관계로 인해 받은 비판이 과거에도 많았기 때문이다. 과거에 공표된 연방총회계심사국의 연방항공국주관 합격증 발부에 관한 보고서에서 심사위원들은 연방항공국이 감독분야에서 너무나 나약하다고 지적했다. 일반적인 과정으로 보면 연방항공국은 신형비행기 설계의 마지막 단계에서 제조업자들과 친밀하게 협조해야만 하고, 시험비행을 통하여 연방항공국의 조례에 부합되는지의 여부를 검사한 후에 모든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이 있어야만 신형비행기의 합격을 비준할 수 있다. 그러나 연방총회계심사국은 연방항공국이 대부분의 합격증 발급시험과정조차도 제조업자 자체의 엔지니어에게 의뢰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칼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연방총회계심사국에서 설계상의 결함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한 상황에서조차도 연방항공국은 신형비행기의 합격증을 비준했다. 뒤늦게 연방항공국이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시도했을 때는 비행기제조업체가 이미 비행기들을 팔아치운 뒤였다. '신형항공기는 반드시 시간에 맞춰 인도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클레임을 당할 것이다.' 이것은 경제문제로서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단지 중국의 항공사들이 이미 혹은 앞으로 보잉 777기를 사지 않을까라는 우려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앞서 나간다는 비행기제조업체가 어째서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연방항공국의 관리가 기업의 이익을 우선시해서 합격증을 발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비행기들은 많은 사람들이 탑승한다. 여기에서 생명존중, 안전권리 여부의 문제가 확연히 드러나는데. 미국 의회는 이 점을 생각해 보았는지모르겠다. 물론 책임은 항공국에 있다. 왜냐하면 합격증이 없다면 어떠한 비행기도 출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보잉 777기의 안전성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는데, 이는 보잉 777기의 큰 제트엔진 나선형 프로펠러의 크기와 무게에 의해 야기된 것이다. 보잉 777기는 2대의 엔진을 사용하도록 설계되었는데, 이것이 보잉 747기와 같은 원거리비행기가 4 개의 엔진을 사용한 것과 태거점이다. 이로 인해 그 나선형 프로펠러 날개는 더욱 커졌고 무게 역시 더 무거워진 것이다. 보잉 777기의 체적이 크고, 중량 또한 보잉 747의 2배가 넘기 때문에 대다수의 연방항공국 엔지니어와 검사원들은 이를 우려했다. 만약 비행중에 이 거대한 나선형 프로펠러 날개 중 하나가 부러져 버린다면 비행기는 아마도 대단히 불안정하고 커다란 진동이 생길 것이다.이러한 종류의 파손은 여러 차레 발생한 적이 있다. 1990년 이후부터 24개 항공사가 나선형 프로펠러 파손으로 인한 사고가 있었다고 보고했다. 비록 추락사고는 없었으나,안전전문가들은 보잉 777기의 나선형 프로펠러의 크기가 커지고 무게가 가중된 점이 진동을 더욱더 심각하게 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전문가들은 경고하기를 보잉 777기 자체의 떨림은 아주 심각해질 것이며 이것이 조종사로 하여금 비행계기를 정확히 볼수 없는 지경에까지 몰고 갈지도 모르는데, 이는 추락의 위험을 가중시킬 것이라고 했다. 사실 1993년 11월 태국 태평양항공사의 717 여객기는 태평양 상공을 비행하던 중 나선형 프로펠러 날개가 부러져 크나큰 진동이 생김으로써 결국 조종사가 바다 위에 불시착을 고려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기도 했었다. 연방항공국 관련인사의 폭로에 의하면 보잉사는 국부적인 실험을 통해 일단 나선형 프로펠러의 한쪽 날개가 부러지면 보잉 777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만 알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문적인 조항이 요구하는 명확한 수치근거도 없는 상황에서 연방항공국은 합격증 발급시한 며칠 전에 그만 한 걸음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보잉사에 보다 많은 상세한 시험을 요구해 온 10여 년 간의 노력을 한순간에 포기하고 합격증을 내준 것이다. 그렇다면 보잉 777기에 설계상의 결함이 존재할 가능성을 명확히 알고도 계속 그것을 생산하도록 해야 하는 것일까 ? 여기에서 가장 유력한 판단의 근거가 되는 것은 이윤의 논리이다. 보잉 777기 시리즈는 보잉사 가 전세계 시장에서 우위를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해 노력한 핵심상품이다. 보잉 777기 내에는 3 백 개의 좌석이 있는데, 그것은 유럽의 에어 버스사가 생산한 A-S0o과 A-S30 및 맥 더글라스사가 생산한 MD-11 대형 여객기와 서로 우열을 다툰다. 앞으로 20년 후에는 세계적으로 이러한 대형여객기에 대한 수요량이 3천여 대가 될 것으로 보는데, 보잉 사는 자사의 보잉 777기 수요량이 수년 내에 급증할 것으로 관망하고 있으며. 2000년에 이르면 보잉 777기의 연매출액이 1백20억 달러가 될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현재 보잉사는 이미 보잉 777기를 2백45대나 팔았다. 일부 항공사들은 보잉 777기가 엔진에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보잉 747과 비교했을 때 연료 비용이 20퍼센트나 싸고 실을 수 있는 화물과 여객이 더 많다는 사실은 문제점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기기에 충분하다. 보잉 777기 자체에 발생한 여러가지 문제들은 확실히 우리들로 하여금 우려와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 그렇지만 더욱 우리를 놀라게 하는 일은 미국 연방항공국의 비행기 엔진관리에 대한 조례가 50년대에 제정된 것이고, 당시의 나선형 프로펠러 날개는 더욱 작았다는 것이다. 보잉사의 비행기가 사실상 전세계의 여객기가 되었다는 것을 감안해 보면, 우리는 미국 연방항공국에 사람의 생명과 관계된 것에 대해 그렇게 합격증서를 발급해도 되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외국인으로서 나의 유일한 선택은 하나뿐이다. 다시는 보잉777기를 타지 않는 것,절대로 다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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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바다로 날아간 까치
내 고향은 바닷가 솔숲이다. 우리들은 대대로 이 솔숲에서 살아왔다. 사람들이 방풍림이라고 부르는 이 솔숲을 나는 참으로 사랑한다. 아마 우리 까치들 중에서 나만큼 이 솔숲을 사랑하는 까치도 드물 것이다. 나는 아침마다 해 뜨는 바다를 바라보며 천천히 한 바퀴 솔숲을 휘돌 때가 가장 행복하다. 나의 집은 2백여 년도 넘는 세월 동안 절벽 바위틈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소나무 위에 있다. 파도가 심하게 치면 바닷물이 곧 튀길 듯하다. 바람이 세차게 불면 날아갈 염려가 있다고 다들 송림 한가운데가 집을 지었으나, 나만은 고개만 내밀면 곧바로 바다가 보이는 곳에다 집을 지었다. 몇 해 전 여름이던가. 폭풍에 집이 날아가 버리자 부모 형제와 다정한 친구들이 이제는 송림 한가운데에다 집을 지으라고 야단이었으나, 나는 그들의 염려와 권유를 적당히 무시했다. 집은 언제나 바다가 잘 보이는 곳에다 지어야 한다는 내 고집을 버리지 않았다. 그렇다. 둥지에 편안히 쉬고 있을 때에도 나는 언제나 바다를 바라볼 수 있기를 원했다. 공연히 외롭다고 느껴질 때, 왠지 쓸쓸하고 마음이 스산할 때 가만히 둥지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일을 내 행복의 으뜸으로 삼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나의 그런 행복은 깨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느 날 문득 내가 바다로 날아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저 수평선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수평선 너머에도 바다가 있을까. 어머니는 왜 우리가 바다로 날아가면 안 된다고 하늘 것일까. 나는 늘 그러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한번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자 예전처럼 행복한 마음으로 바다를 바라볼 수 없었다. 힘차고 멋진 날개를 지니고 있는 내가 막연히 바다를 바라보고만 있다는 사실이 답답했다. 아무리 바다를 바라보아도 수평선 이외에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나는 바다를 향해 날아가고 싶었다. 바다 한가운데에도 내가 집을 짓고 살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정말 그곳을 향해 날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바다를 향해 날아가서는 안 된다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내 뜻대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어느 날 몇 번 망설이다가 어머니를 찾아갔다.
"어머니, 저도 한번 바다로 날아가 보고 싶습니다." "네가 지금,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내가 입이 닳도록 그렇게 얘길 해도 아직도 못 알아들었단 말이냐? 우리가 바다로 날아간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일이야. 우린 갈매기가 아니야. 우리는 바다를 여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 바다는 우리에겐 죽음 뿐이야. 아침에 해가 뜰 때를 조심해야 돼. 아침해는 그 아름다운 빛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거야. 그 유혹에 못 이겨 바다로 날아갔다가 그만 영영 돌아오지 못한 네 형제들을 나는 알고 있어."
어머니는 놀라 펄쩍 뛰는 소리를 내었다. 나는 어머니의 말씀이 백 번 지당하신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어 온몸에 기운이 쑥 빠졌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바다가 정말 나를 유혹하는 걸까. 나는 날이 갈수록 바다를 향해 날아가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아침에 해가 뜰 때마다 눈부신 햇살에 몸살을 앓았다. 오직 바다를 향해 날아가는 것만이 소원이었다. 바다를 그리워해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던 어머니의 말씀을 결코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으나, 이제 바다로 날아가 죽음을 맞이한다고 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나는 결국 바다를 향해 날아가고 말았다. 찬란한 아침해가 내 마음을 못 견디게 만들던 그날, 나는 기어이 바다를 향해 날개를 펼쳤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죽음을 각오하고, 아침놀이 붉게 타오르는 바다를 향해 날았다. 바다는 끝이 없었다. 얼마간 날아가면 그 끝이 보일 줄 알았으나 그렇지 않았다. 날아도 날아도 수평선뿐이었다. 바다가 끝없이 수평선으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웠다. 해는 어느새 바다 위로 떠올라 내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내가 살던 솔숲이 멀리 조그맣게 한 점 점처럼 보이더니 이내 사라졌다. 나는 더럭 겁이 났다. 정말 어머니 말씀을 들을 걸하고 금방 후회가 되었다. 내 옆에서 갈매기들이 줄곧 나를 보고 히죽거렸다.
"까치가 바다로 날아가다니! 저런 병신도 다 있나? 자기가 우리처럼 날 수 있을 줄 알아? 분수를 알아야지, 분수를. 재는 얼마 안 있어 곧 죽을 거야! 저것 좀 봐, 저 축 처진 꽁질 좀 봐. 날개에도 벌써 힘이 빠졌는걸!"
정말 나는 날개에 힘이 없었다. 힘을 주면 줄수록 날개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마음을 단단히 고쳐먹었다. 죽어도 좋다. 바다는 내가 그 얼마나 날아오고 싶었던 곳이냐. 날아갈 수 있는 데까지 날아가자.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내 가슴에, 내 두 눈에 바다를 모두 담았다. 얼마나 바다 위를 날고 있었을까. 이젠 나를 놀리던 갈매기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아침 햇살만이 내 온몸을 따스하게 감싸주고 있었다. 햇살에 반짝거리는 푸른 바다의 물결을 황홀했다.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히 가 볼 수 없을 것만 같던 바다를, 오직 망연히 바라보고만 있던 바다를 내가 직접 날고 있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그러나 나는 점점 지쳐 가기 시작했다. 이제 곧 돌아가지 않으면 죽음이 내게 다가올 것 같아 한순간 공포감이 엄습해 왔다. 그러나 솔숲으로 다시 돌아가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때였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힘이 없었다. 이제 곧 완전히 지쳐 버릴 것이 분명했다. 나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어쩔 수 없이 다가올 죽음을 생각했다. 우리에게 바다는 오직 죽음뿐이라는 어머니의 말씀은 거짓이 아니었다. 죽음이란 어머니의 품속에 고요히 안기는 것과 같은 것일까. 나는 발아래 넘실대는 푸른 바다의 물결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서서히 그 물결 위로 내려앉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내 눈에 한 점 점처럼 뭔가 육지 같은 게 보였다. 아, 그것은 섬이었다. 아아, 바다에는 섬이 있었다. 나는 바다에 섬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나는 그 섬을 향하여 힘껏 날아갔다. 나는 그 섬의 솔숲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다시 고향 마을을 향하여 힘차게 날았다. 바다에 섬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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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채찍으로 읽는 역사, 길잡이로 읽는 역사.
* 나라에 정도가 서 있을 때 녹을 받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나라에 정도가 서 있지 않을 때 녹을 받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공자)
조선 왕조가 우리에게 남겨 준 가장 자랑스러운 문화 유산을 한가지만 예로 들라고 하면 나는 서슴지 않고 '조선왕조실록'을 택한다. 그 이유는 너무도 자명하다. 한 왕조가 5백년 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왕실과 조정에서 일어났던 크고 작은 일들은 말할 나위도 없고 천재지변으로 인한 재해, 풍속, 지리 등 후세에 전할 만한 모든 사안들을 하루도 빠짐없이 편년체의 일기로 기록하여 남겼다는 것은 세계사적인 관점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왕조가 그 엄청난 분량(1866권 887책)에 달하는 "조선왕조실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역사를 존중하는 우리 민족 특유의 선비 정신(역사 인식)이 실행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일이지만.,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규범이 지켜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첫째, 사관으로 지명된 30여 명의 젊은 관원들이 금력과 권력에 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가령 정승들이나 판서들이 자신의 비행이 사초에 적혔다는 사실을 알면, 해당 사관들을 찾아가서 금력으로 자신의 비위 사실을 지우거나 고쳐 써주기를 간청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권력으로 협박하였다. 그러나 직급이 낮은 사관들이 결단코 이에 응하지 않았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관들은 자신들이 적은 사초를 목숨보다 소중하게 지킴으로써 후세의 사람들을 경계하려 하였다. 그 소임의 실행은 상부와의 갈등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연산군 4년에 있었던 '무오사화'가 바로 그것이다. 관원군 이극돈이 김일손의 사초에 자신의 허물이 적혀 있음을 알고 그를 탄핵함으로써 빚어진 일대참사로 수많은 사림들의 희생이 따랐다. 여기서 우리는 사초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사관들의 역사 인식을 읽을 수가 있을 것이다. 둘째, "조선왕조실록"은 "태조강헌대왕실록", "정종실록", "태종공정대왕실록", 등과 같이 각 왕조별로 다시 세분된다. 그러므로 죽은 다음에 착수되었던 까닭으로 임금의 비정을 낱낱이 적어서 남길 수가 있었다.
임금이 사냥을 가면서 사관은 따라오지 못하게 하였다. 혹은, 적군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은 손톱 밑에 낀 가시와 같은 것이나, 임금이 여인의 치마폭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심장에 든 병과 같아서 고치기 어렵습니다. 와 같은 기록이 가감 없이 실록에 등재되기에 임금은 사관을 싫어 하였고, 사관은 그 싫어하는 임금의 모습까지를 가차없이 기록하는 것으로 자신들에게 주어진 소임을 다했던 것이다. 임금이 승하하면, 새 임금은 '춘추관'에 명하여 '실록'의 편찬을 서두르게 한다. 춘추관은 '실록청'으로 개편되어 운영되고, 사관들은 비로소 자신들이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겼던 사초를 제출하게 된다. 새롭게 임명된, 직급이 높은 사관들은 같은 날짜로 된 많은 사초 가운데서 가장 공정하게 기록된(최대공약수) 사초를 엄격히 선별하여, 이를 '제1초'로 삼는다. 다시 그것을 정밀하게 검토. 선별하여 '재초'라 하고, 또 그것을 실록청의 당상들이 엄정히 선별하여 '삼초'로 삼는다. 이같이 엄격한 과정을 거치면서 채택된 '삼초'는 실록청의 관원중에서도 문장과 필치에 능한 사람들에 의해 통일된 문장으로 정리되어 인쇄의 과정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러한 선별 과정에서 채택되지 않은 나머지 사초들은 물에 불려서 먹물을 없앤다. 이를 '세초'라고 하는데 그것은 쓸모없이 된 사초로 인해 불미한 일이 생길 수 있는 분쟁의 여지를 아예 없애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아무리 엄정하게 선별된 사초에 의해 완성된 "왕조실록"이라고 할지라도 잘못된 기록이 발견된다면 수정을 해야 마땅하다. 그 수정의 과정 또한 엄정하고 신중하였다. '실록'의 수정을 자주 하면 특정 정파의 이권을 수용할 가능성이 있기에 조정의 최고 기관인 의정부에서 상당 기간 동안 점검과 토론에 임하게 되고, 이는 또 새롭게 임명된 사관들의 감시를 받게 된다. 이렇게 하여 수정할 사초가 마련되면 임금의 재가를 얻어 수정 작업을 진행하지만, 참으로 놀라운 것은 먼저 쓰여진 기록을 찢거나 지워 없애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주서(붉은글씨)로 수정을 했다. 다시 말하면, 오늘 불가피한 사정으로 '실록'을 고쳐 쓰게 되었으나, 원본의 기록은 이러했다는 것을 남겨 주기 위해 그 옆에 붉는 글씨로 수정된 부분을 적어 넣었던 것이다. 또 수정될 부분이 아주 많아서 거의 전부를 새롭게 고쳐 쓰거나 별권으로 간행할 경우에는 반드시 "개수실록"이라는 제명을 명시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선현들이 사실을 얼마나 중요시했는지, 또 역사에 대한 외경심이 어느 경지에 있었는지를 알게 된다.
셋째, 어떠한 경우에도 임금은 "왕조실록"을 열람할 수가 없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절대 권력에 의해 역사가 왜곡되고 훼손되는 것을 근본적으로 방지하려는 제도적인 장치가 아닐 수 없다. 임금이 선대의 "왕조실록"을 읽어 보고 싶어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대개는 부왕에 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세종대왕도 부왕의 실록을 열람해 보고 싶어했다. 그 까닭은 이러하였다. 부왕 태종(이방원)은 아버님 이성계를 도와 조선왕조의 창업을 이끌어 낸 역성혁명의 제2인자였으므로 누구보다도 혁명의 완성을 소망하게 된다. 혁명의 완성을 위한 계책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어서 먼저 정적을 제거하고, 그 다음에는 부정부패를 척결한다는 구실로 살아 있는 반대 세력들의 재산을 강탈하며, 이로 인한 민심의 동요를 줄이기 위해서는 화려한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것으로써 집권의 시나리오로 삼는다. 태종 이방원은 다음 시대의 태평성대(혁명의 완성)를 뇌리에 그리면서 장자인 양녕대군을 세자의 자리에서 쫓아내고, 후사가 된 세종에게 방해가 될 세력을 지목하고 그들을 제거할 궁리를 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처남이자 세종의 외숙들인 민무구, 민무질 등 4형제들에게 원지유배를 명하였다가 그것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마침내 사사케 하였다. 또 세종 임금의 장인이자 자신의 사돈인 심온에게 자진(스스로 자결하는 것)을 명하면서, 외척이 성하면 나라가 망한다. 라는 통치이념을 세우기도 하였다.
사정이 이와 같았고 보면 세종 임금이 부왕의 실록을 열람하고자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고도 남는다. 그리하여 세종 임금은 신하들을 불러 놓고 부왕의 실록을 열람하게 해줄 것을 간청하면서 어떠한 경우에도 '실록의 내용을 고치지 않겠다'라고 확약까지 하였지만, 신하들은 이를 용납하질 않았다.
신 등은 전하의 하교(고치지 않겠다는.)를 믿고 있지만, 전하께서 실록을 열람하셨다는 사실을 전하의 실록에 적어야 하는 까닭으로, 후일에 이르러 다른 임금이 전하께서 실록을 열람하셨다는 기록을 보고, 그때에 이르러 실록을 고치는 경우도 있을 것이므로 전하께서는 실록을 열람하실 수가 없사옵니다.
조선 시대의 임금은 오늘날과 같이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도 아니며, 또 임기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닌 그야말로 종신토록 보위를 차지하는 절대 권력자인데도 불구하고 이 같은 규범이 지켜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다시 한 번 놀라게 되는 것이다.
넷째, "조선왕조실록"을 보존하여 후대에 전하려고 한 노심 초사를 간과 할 수가 없다. 선별된 사초가 통일된 문장으로 정리되고, 인쇄가 끝나면 전국 각지의 사고로 보내진다. 이를테면 강원도 오대산, 평안도 묘향산, 강화의 정족산 등에 사고를 두고 승병들로 하여금 철통같이 경비하게 하였다. 사고를 산간벽지에 두었던 것은 사람의 왕래가 적어서 화재의 염려가 없고, 아무리 큰 전화가 있어도 어느 한 곳은 무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 36년', '6.25'라는 미증유의 전란을 겪으면서도 우리는 물론 북한까지도 "조선왕조실록"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가 있었으며, 지금은 남북한 공히 국역본까지 간직할 수가 있게 되질 않았는가. 이 엄연한 역사 인식을 외면하고, 사이비 역사 인식으로 무장된 오늘날의 정치집단과 지식인들의 실상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한심하다는 생각을 넘어서서 장차의 일이 참으로 걱정스러워진다. 제 나라의 역사를 훼손하면서까지 권력을 연장하고, 제나라의 역사를 비하하는 것으로 지식인의 대열에 설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면 그것은 수치스럽고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이 관찬사료라 하여 믿을 바가 못 된다고 비방하며, 심지어 민초들의 삶을 적지 않았다 하여 가치가 없는 기록으로 매도하는 얼뱅이 부류들이 스스로 민중을 대변한다는 착각에 빠지거나, 때로는 대학의 교단을 어지럽히기도 하였지만, 그 모두가 "조선왕조실록"을 읽어 보지 않은 데서 기인된 것이라면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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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디우스의 매듭
'알렉산더'대왕은 페르시아를 짓밟고 동진해 가다가 기원전 343년 소아시아 서해안 프리지아의 고도 고르디움을 함락시켰다. '알렉산더'대왕이 그곳의 신전을 찾아갔더니 신전 앞에 수레가 하나 있는데 수레의 손잡이는 신전 기둥에 단단히 매어져 있었고 매듭은 어찌나 복잡하게 얽혔는지 아무도 풀지를 못했다. 그 매듭은 옛날 현자로 이름 높던 '고르디우스'왕이 맨 것으로 "이 매듭을 푼 자는 세계의 왕이 될 것이다" 하는 신탁이 전해지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유럽과 아시아대륙에 걸치는 대제국의 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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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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