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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06 호
단기 4340. 1. 14 (음력 11.26) / 발행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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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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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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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남을 밑으로 끌어내리려면 자기 자신도 불가불 그와 함께 끌어내려야만 한다. 그러니 남을 끌어내림으로써 자기 자신을 끌어올릴 수 있는 기회도 놓치고 만다. / 매리언 앤더슨(미 여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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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경제/경영/성공 |
세계를 움직이는 127대 파워 - 박태견 지음
POWER 012 물류혁명의 견인차: 바 코드
1960년대 중반 미국에서 도, 소매업체와 식료품 제조업체들로 구성된 기호선정위원회라는 자그마한 위원회가 발족했다. 이 위원회는 컴퓨터 거인인 IBM 등과 오랜 협의를 거쳐 마침내 1973년 4월 3일 슈퍼마켓 계산대 앞에 길게 늘어선 장사진과 회계상의 착오를 해결하기 위한 유통업계의 단일 표준부호 제정에 합의했다. 이 합의의 산물이 바로 오늘날 만국 제품코드라 불리며 재고 제로의 경영혁신과 대대적 가격파괴를 가능케한 물류혁명의 견인차 바 코드였다. 이때부터 유통업자들은 상품 표면에 흑백 막대로 표시된 바 코드에서 제조업지명, 상품명, 가격 등을 광학적 독해장치로 읽어냄으로써 계산대앞의 고객 대기시간과 계산착오를 줄이는 동시에, 비로소 전체 물동량을 신속하면서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됐다. 바 코드의 경우 현재는 주로 슈퍼마켓, 백화점, 서점 등에서 매출 정보관리를 위해 사용하고 있으나, 최근에는 신용카드에 응용돼 현금없는 신용사회의 도래를 앞당기고 공장에서도 바 코드 생산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사용범위가 급속히 넓혀지고 있다. 예전에는 바 코드 해석을 위해 주로 핸드 스캐너가 사용됐으나 최근에는 레이저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레이저식은 데이터의 입력이 쉽기 때문에 식료품이나 잡지, 서적, 의료품 등의 가격표시에 많이 사용되고 있다. 업자들은 이를 통해 수시로 전체 매출을 집계해 새로운 생산 및 유통 대책을 세우고 정보당국은 이를 기초로 과세기준을 작성하고 있다. 현대 유통업계의 헤게모니는 누가 바 코드로 대표되는 정보혁명의 산물의 효율적으로 이용하는가에 따라 좌우되고 있다. 그런 대표적 예가 1980년대 말 불붙기 시작해 현재 극성기에 도달한 미국 유통업체의 치열한 헤게모니 쟁탈전이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세계최대 소비시장인 미국의 유통업계는 거대체인망 시어즈와 K마트가 꽉 잡고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말 바 코드를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월마트가 출현하면서 상황은 180도 뒤바뀌었다. 신흥 유통업체인 월마트는 당시 10만에 달하던 중간 도매상들을 제치고 전국 체인망과 본사를 잇는 네트워크를 구축한 뒤 상품의 바코드를 통해 집계한 상품의 인기도, 매출액, 수익성, 운송 흐름 등 최신 정보를 자체 통신위성과 초대형 슈퍼컴퓨터, 통신 네트워크를 통해 전국의 체인 슈퍼마켓에 즉각 서비스했다. 이들은 또 자체 통신위성을 통해 상품을 수송하고 있는 1만 8천 대의 트레일러의 움직임을 추적, 물건이 점포에 도착할 시간까지도 정확히 알려주었다. 월마트는 또 미국 전역에 대형 물류센터를 건립, 상품 운반비 및 재고분을 최소화시킴으로써 실질적으로 제품의 값을 크게 낮추었다. 미국 슈퍼마켓들의 경우 비록 매장은 거대하지만 세계최대 소비시장을 겨냥해 전세계로부터 쉴새없이 몰려드는 신상품으로 인해 매장당 평균 2만 2천여 종의 상품이 진열되고 있을 정도로 항상 진열 공간이 태부족이었다. 이런 와중에 잘 팔리는 상품의 목록 등 각종 데이터와 상품을 값싸게 신속히 제공해줌으로써 유통업계의 수익률을 크게 높여주는 월마트의 출현은 슈퍼마켓업자들을 열광시켰고, 당연히 이들은 속속 시어즈 등 기존의 체인에서 이탈해 월마트 산하로 옮겨왔다. 그 결과 1992년을 분기점으로 월마트는 시어즈와 K마트 등 경쟁사를 제치고 산하에 2,500여 개의 체인을 거느리고 연가 700억 달러의 매출액을 올리는 세계최대 체인망으로 부동의 자리를 굳히게 됐다. 바 코드로 대표되는 정보혁명의 결실을 가장 효율적으로 이용한 월마트는 단지 유통업계의 황제로 군림할 뿐 아니라 기존의 콧대 높던 제조업체들을 정보유통산업의 하청기업으로 전락시키면서 이들의 생명줄까지 쥔 울트라 파워로 급부상하고 있다. 이들은 제조업체들이 고액을 지불하면서까지 얻고 싶어하는 각종 고급 유통정보를 한손에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정보산업의 제조업 지배'라는 대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이처럼 거대한 물류혁명을 촉발시킨 바 코드의 발명가는 현대의 에디슨이라 불리는 제롬 레멀슨(71)이다. 미국 네바다주 출신의 레멀슨은 바 코드를 비롯해 반도체, 전기전자, 자동차 부문에 500여 개나 되는 핵심적 특허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세계의 대형 기계, 전기 메이커들로부터 연간 5억 달러 이상의 막대한 특허권료를 거둬들이고 있다. 초기에는 모토롤라 등 다국적기업들이 레멀슨의 특허권료 지불 요구를 여러 이유를 들어 거절했으나. 전세계적으로 지적재산권 보호가 강화되면서 속속 그의 발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레멀슨은 1993년 한국의 금성사, 삼성전자, 대우전자 등 가전 3사에 대해서도 컴퓨터 이미지 분석(CIA)과 레이저디스크 기술 등 모두 33개 품목의 기술특허권을 주장, 이들로부터 10년간(1986-1995) 수출분에 대한 특허사용료 2,100만 달러를 받아냈다. 현재는 현대전자, 현대자동차, 대우전자 등과도 특허권 협상을 진행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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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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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흥복이의 작은 꿈
유달리 이야기를 잘 꾸며 쓰는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오늘도 창가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다.
"흥복이는 오늘도 글을 쓰고 있구나."
눈이 작은 흥복이는 적다 만 종이를 작은 손으로 가리며 그저 웃을 뿐이다.
"어디 조금만 보면 안 될까?" "아직 다 안 썼어요." "그래 알았다. 다 완성이 되면 선생님도 읽고 싶은데, 읽을 수 있을까?" "네."
의사 표현을 잘 안 하는 흥복이에게 나는 언제나 여기까지만 묻곤 한다. 흥복이도 다 묻지 않는 내가 고마운지 마냥 미소를 띄울 뿐이다. 청소가 끝나고 교실을 빠져 나가는 장난꾸러기 아이들을 나는 흐뭇해하며 바라보고 서 있었다.
"선생님!" "응, 아직 안 갔니?" "예, 그런데요.... 지금 생각하는 꿈이 커서도 꼭 그렇게 꼭 그렇게 될 수 있나요?" "글세, 흥복이 꿈이 뭔데?" "......" "열심히 노력 하면 꼭 되지." "어떻게요?" "열심히 공부하면 의사, 선생님, 과학자,대통령도 될 수 있지." "네에, 안녕히 계세요."
흥복이는 시원한 대답을 얻지 못 했는지 인사를 꾸벅 하고는 교실문을 나섰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의 가정환경을 조사해서 모아두었던 서류철을 꺼내들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흥복이 것은 없었다. 다시 확인하지 않고 그냥 묶어 정리한 것이 실수였다.이튿 날 나는 흥복이를 불러 물었다.
"오늘 흥복이 집을 방문해도될까?" "어머니가 안 계세요." "어디 가셨니?" "네." "그럼 언제 시간이 날까?" "저녁에 오세요." "직장에 나가시니?" "회사말이에요?" "응." "아니오." "그럼 어디서 일하시는지 물어봐도될까?
흥복이는 고개를 숙이며 "시장에요" 라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짐작은 했지만 이야기를 듣고 나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당황스러웠다. 명색이 담임인데 두 달이 넘어서야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것이 부끄러웠다.
"그렇구나. 선생님이 가정환경에대해 써 놓은 종이들을 잃어버려서 물어 본거야."
나는 흥복이의 손을 한 번 잡아주고는 그냥 보냈다. 더 물으면 그 아이에게 상처가 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글짓기를 한다고 했죠." "예." "제목은 꿈 이에요. 자, 시작하세요."
웅크리고 시작하는 아이, 짝과 재잘거리며 쓰기 시작하는 아이들이 나에게는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흥복이는 여전히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자, 다 쓴 사람은 여기에 내고 가요."
넉넉히 시간을 주었는데도 흥복이는 마칠 생각을 않고 있었다.
"흥복아, 다 써서 내일 가져 올래?"
흥복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의 하교 지도를 하고 돌아오는길에 급히 교실에서 나오는 흥복이를 만났다. 그 앤 나에게 꾸벅 인사를 하면서 빙긋 웃고는 복도 끝으로 뛰어가 버렸다. 작은 덩치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교실로 들어왔다. 잘 정리된 책상위에 흥복이가 놓고 간 글이 있었다. 그 동안 숨겨 왔던 그 글이었다. 난 흥복이의 글을 읽고서야 내가 그 아이에게 준 상처를 생각하게 되었다. 언젠가 나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와 '꿈' 에 관해 물어 봤을 때 내가 그 아이의 꿈을 얼마나 짓밟아 놨는지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말이 없는 조그만 아이의 꿈은, 세 살짜리 아들을 안고 가게에서 안고 나오는 것이었다. 단지 그것 뿐이었다. 얼마나 소박한 꿈인가 하지만 아버지가 안 계신 흥복이는 언제나 그것을 꿈꿔 왔던 것이다.
장은경 님/부산시 북구 만덕 3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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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철학에 이르는 길 - 강영계
제1장 철학에 대한 그릇된 생각들
3.철학은 과연 어려운 학문인가
앞에서 우리들은 일상적 지식 또는 우리들의 주변에서 일상적 지식을 대변하는 에세이와 철학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에세이를 쓰는 사람 중 일부는 일상적인 지식 안에 온누리의 진리가 다 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반드시 그렇지 않다고 부인할 수도 없지만 일반적으로 에세이는 순간적이며 부분적인 느낌을 쓴 짤막한 글이다. 에세이가 신선하고 짧아서 산뜻한 맛이 있을지는 몰라도 논리적, 체계적인 학문으로서의 철학과 똑같은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세이를 쓰는 사람 중의 일부 그리고 에세이를 읽는 대다수의 청소년들은 은연중에 철학과 에세이를 동일시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한결같이 철학이란 일상적인 것이며, 어렵고 난해한 단어들로 이루어진 철학 책이란 헛된"짓"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보기에 철학이란 일상적인 지식에 들어 있는 것 이외의 어떤 다른 것일 수 없다. 그러나 소위 철학 책이라고 일컬어지는 책을 펼칠 때 이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되는가? 일상적인 지식이 진리라는 견해를 대변하는 수필가 및 그것을 읽는 청소년들은, 한편으로는 철학이란 일상적인 지식 안에 모두 들어 있는 것으로서 쉬운 것이라고 생각하며 또 한편으로는 그와 정반대로 철학이란 애매모호한 개념들을 복잡하게 얽어놓아서 전문가가 아니면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난해한 내용을 가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에세이를 써온 사람들이 인정하든 또는 인정하지 않든간에 그들이 청소년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청소년들에게 전혀 반대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청소년들은 #1철학은 일상적인 것이다. 그리고 #2철학은 일상적인 것과는 전혀 동떨어진 심오하고도 숭고한 세계의 진리를 난해한 개념들로 다루는 학문이라고 하는 갈등 속에 허덕이고 있는 실정이다. 청소년들은 철학이 달콤한 에세이이기를 갈망하지만 일단 철학 책을 손에 들면 첫마디부터가 이해할 수 없는 글들로 가득 찬 것을 발견하고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상당한 책임이 다름 아닌 에세이에 있다. 현재는 너도나도 에세이를 쓰지만 해방 이후 70년대까지는 주로 대학의 철학 교수 몇 사람이 에세이를 썼으며 그것을 읽는 청소년들은 철학 교수의 글이니까 달콤한 에세이가 바로 철학이겠거니 하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물론 그 중에는 시론에 버금가는 에세이를 쓴 철학 교수도 있지만 청소년들의 정신 세계를 혼란시키는 에세이가 대부분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철학은 과연 어려운 학문인가? 이 물음에 대하여 우리는 그렇다는 답과 아니다는 답을 다같이 할 수 있다.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철학 나름대로의 특수한 개념들을 사용한다. 임어당이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 한 페이지도 읽기 전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덮어버리고 말게 된다고 한 말은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개념을 철학이 사용하는 것을 조롱한 것이다. 읽는 이들이 이 책을 펼쳐나감에 따라서 점차로 접하게 되겠지만 사실 철학은 다른 학문에서 사용하지 않는 특수한 개념들을 사용한다. 철학이 탐구 대상으로 삼는 문제에 따라서, 철학의 방법론에 따라서, 그리고 철학의 분야에 따라서, 철학은 무수하게 많은 특수한 개념들을 사용한다. 상식인이 읽기에 이들 개념은 지나치게 낯선 개념임에 틀림이 없다. 일상인이 보기에 철학적인 개념들이 난해하다고 하는 것은 철학이 나름대로의 특수한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우리들의 구체적인 지나간 삶의 역사와도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지난 날 우리들은 거의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생활을 영위하여 왔다. 반만년의 무궁한 역사와 삼천리 금수강산, 세계에서 가장 두뇌가 우수한 우리들...등 우리는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은 누구인가? 세계가 좁아졌고 이곳과 저곳을 비교할 수 있게 된 지금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의 역사가 상당히 고달픈 역사였다는 것 그리고 삼천리 금수강산이기는 하되 별로 자원이 신통치 않은 땅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인간은 여유가 있을 때 자기 자신을 반성하며 사고하는 힘을 강화시킬 수 있다. 유교나 불교 등은 주로 지도층의 소유물로 정치적인 색채가 강했으며 민중에게는 사상이나 종교로서의 유교나 불교가 아니라 여전히 샤머니즘적인 요소만을 지닌 유교와 불교가 퍼졌다. 소수의 지도층을 제외하고는 먹고살기에 바빴으며 잘 먹을 시기에는 놀기에 바빴다. 누구나가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우리 말은 사유 언어라기 보다는 생활 언어이다. 생각이 아니라 느낌이 풍부한 언어가 우리말이다. 따라서 논리적, 체계적인 사유 언어로 구성된 철학적 개념들이 우리들에게 낯설 뿐만 아니라 난해하게만 여겨지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학문으로서의 유교나 불교를 대할 때 우리들은 매우 친한 것 같으면서도 유교와 불교의 용어들이 난해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19세기 중반 이후 서양학문과 더불어 철학이 소개되었을 때 그것은 특수한 사람들만이 소유하는 학문이었다. 구체적인 일상 생활이 삶의 전부였던 우리들이 극단적으로 추상적이고 논리적이며 체계적인 학문으로서의 철학을 대할 때 그것은 우리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멋과 흥에 젖은 우리들에게 분석적인 논리로 가득 찬 철학이 맞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세계는 정치, 경제, 문화, 종교적으로 점차 가속도로 좁아져갔다. 우리도 우리끼리만 모여 살 수 없고 다른 나라 및 민족과 겨누며 어울려 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우리도 우리의 삶의 전체를 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인간의 역사를 "신화로부터 이성으로의 "전개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화란 유한한 능력을 가진 인간과 무한한 능력을 지닌 신들이 어울려 만드는 종합적, 환상적, 윤리적, 이론적, 신비적인 세계이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의 상태와도 같다. 어린 아이에게는 이 세계가 신비의 세계이며 그 안에서 어린 아이는 희망과절망 그리고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맛보며 아직 자기 자신과 대상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한다. 어린 아이에게는 아직까지 본능적인 것이 우월하다. 그러나 어린 아이는 소년, 청년, 장년으로 성장하지 않을 수 없으며, 자신의 자발적인 노력에 의하여 보다 정신적으로 빨리 성숙할 수 있다. 결국 우리들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역사는 바로 의식의 역사이다. 우리들의 자발적인 의식이 스스로의 내면을 날카롭게 응시하며 자신을 발전적으로 구성해나가기 시작할 때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들과 멀었던 것 그리고 낯설었던 것은 능히 극복하고 소화시킬 수 있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물음을 제기해보자 철학은 과연 어려운 학문인가? 만일 우리들이 철학을 다른 개별 학문과 마찬가지의 학문이라고 하는 전제를 미리 가지고 있다면 이 물음은 그다지 커다란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들이 철학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무엇보다도 가장 큰 편견은 철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 있는 "어떤 지혜"라고 보는 것이다. 만일 살아가는 방식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가장 현명한 길이 있다면 그 길은 삶의 온갖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어떤 지혜"일 것이다. 그러나 철학은 삶의 문제에 대한 그러한 절대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것이 아니며 또한 삶에는 그와 같은 절대적인 해결책도 있을 수 없다. 철학도 수학이나 물리학 또는 정치학과 마찬가지로 학문이다. 삶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철학이라고 생각하는 태도는 철학을 미신과 똑같이 보는 자세이다. 우리의 교육 현실을 살펴볼 때, 적어도 고등학교 과정까지 우리는 거의 대부분의 인문, 사외, 자연 과학을 접한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에 와서야 철학을 고등학교의 선택과목으로 넣자는 견해가 나와서 일부 고등학교에서 실시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학문으로서의 철학을 고등학교 시절에 접하지 못한 사람이 대학에 와서 한 학기 몇 시간 동한 철학을 접하고 더 이상 철학과 신할 수 없을 때, 그 사람은 #1철학은 비현실적이며 #2철학은 실천과는 상관없는 공허한 이론적 개념으로만 구성되어 있고 #3다른 학문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만일 물리학은 쉬운 학문인가? 경제학은 쉬운 학문인가? 이렇게 묻는다면 상당수의 사람들은 물리학이나 경제학은 어려운 학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가끔 몇몇 정치가나 경제인이 연설자리에서 말하는 그러한 철학이 아니다. 어떤 정치인이 "우리 민족에게도 철학이 있어야 한다." 또는 어떤 경제인이 "기업 경영에는 각 기업인의 투철한 경영 철학이 있어야 한다" 라고 주장할 때 그들이 말하는 철학은 학문으로서의 엄밀한 철학이 아니다. 만일 그들이 보다 정확한 용어를 사용한다면 그들은 철학이라는 개념 대신에 "세계관" 또는 "인생관"이라는 말을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 체계적인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아니라 인간이 마땅히 가져야 할 견해이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수학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초보적인 산수와 기하를 습득하고 차례로 난해한 문제로 옮아가게 되면 수학에 대한 학문적인 관심과 안목을 가지게 되며, 수학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철학도 수학의 경우와 전혀 다를 것이 없다. 왜냐하면 수학이나 철학이나 모두 우리들이 매일 반복해서 숨쉬고 살아가는 일상 생활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산수나 기하가 일상 생활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앎이나 가치도 일상 생활을 전혀 무시한다면 의미가 전혀 없다. 물론 앞으로 상세히 이야기되겠지만 인식론을 예로 들어보기로 하자. 인식한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안다는 것이다. 인식론은 철학의 가장 중요한 한 분야이다. 다음과같은 물음을 던진다고 하자 "이 꽃은 장미꽃이다. 당신은 이 장미꽃을 어떻게 아는가?" 인식론이라고 하면 개념이 어려운 것 같으나 위의 물음이 바로 인식론의 핵심을 지적해내는 물음이다. 위의 물음에 대하여 "눈으로 보기 때문에 그것이 장미꽃이라는 것은 안다"고 감각적, 경험적으로 답변했을 때 그렇게 답하면서 우리들은 별다른 의심을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우리들은 만지거나 냄새맡거나 보거나 듣거나 맛을 봄으로써, 곧 오감에 의지하여 사물을 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어서 다음처럼 묻는다고 가정해보기로 하자. "눈으로 보기만 하는 것으로 장미꽃을 알 수 있는가? 개미나 개도 눈이 있으니 이들도 눈으로 보아 장미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이 물음에 접하여 우리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개미나 개에게 장미꽃은 우리들 인간이 생각하는 장미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대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대체로 #1밖에 어떤 대상이 있고 또한 나라는 주관이 있으며 #2나라는 주관은 밖의 대상을 보고 만지면서 동시에 그 대상을 생각하고 #3그리하여결국 그 대상에 명칭을 붙임으로써 앎이 성립한다고 결론 내리게 된다. 밖에 있는 객관 "어떤 것"을 주관인 나는 감각과 사고에 의하여 "장미꽃"이라고 이름 붙인다. 지금까지 장미꽃을 놓고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아는지 일반적인 입장에서 살펴보았다. 만일 우리들이 이처럼 앎의 문제에 있어서 한가지 한가지를 차근하게 살펴간다면 점차로 주관, 객관을 위시하여 직관, 경험, 이성 등의 개념 및 나아가서는 경험론, 합리론 등 인식론에서 흔히 사용하는 낯선 개념들을 소화할 수 있게 되어 드디어는 인식론이 어떤 것이라는 윤곽을 작을 수 있을 것이다. 있음의 원리를 다루는 형이상학, 가치 문제를 다루는 윤리학, 사고와 언어의 질서 및 규칙을 취급하는 논리학, 아름다움의 문제를 다루는 미학 등도 인식론의 경우처럼 한걸음씩 밟아 올라간다면 문제의 범위와 성격을 파악하게 될 것이고 전체적인 안목에서 철학의 본성이 무엇이라는 것을 우리는 확실하고도 분명하게 파악하게 될 것이다. 철학은 과연 어려운 학문인가? 이 물음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처럼 답할 수 있다. 철학은 학문이다. 그러므로 철학도 수학이나 물리학, 정치학 등과 같이 어려울 수도 있고 쉬울 수도 있다. 철학이 다른 학문들과 다른 차이는 다루는 대상에 대한 입장과 방법이 틀리다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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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
'곰보'는 '곪다'의 '곪-'에 접미사 '-보'가 붙어서 된 말
마마에 걸려서 얼굴이 얽은 사람이 있지요? 지금은 천연두가 사라져서 그런 사람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만, 그런 분을 속칭 '곰보'라고 하는데, 이것은 '곪다'의 '곪-'에 접미사 '-보'가 붙어서 된 말입니다. 그래서 그 어원을 잊어 버리고 그냥 '곰보'라고 하고 있습니다. '곪-'의 발음이 '곰'이 되니까요.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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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1. 빛은 오리엔트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왼쪽 뿔 끝에서는 한 민족에 의해 이후 서양 문화의 한 기둥으로 이어진 독특한 문화가 건설되었다. 헤브라이 민족이 바로 그들이다. 셈족 중의 하나인 헤브라이 민족의 역사는 구약성경에 잘 나타난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헤브라이인의 조상 아브라함은 기원전 2100년 초반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도시국가 우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우르는 당시 수메르 문화의 중심지로 달의 신 난나(Nanna)를 섬기는 신전들이 많았다. 거기에서 그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창세기 12:1-2) 그는 아버지 데라와 함께 유프라테스강 상류인 하란으로 이주했다. 하란은 '길'이란 뜻으로 니네베와 바빌로니아는 물론 다마스커스, 두로, 이집트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였다. 아버지 데라가 죽자 아브라함은 팔레스타인으로 내려왔다. 그의 손자 요셉을 필두로 해서 이집트에 정착한 헤브라인들은 나일강 하류 델타지역에 위치한 고센에서 목축을 영위하며 살았다. 그러나 이집트의 왕조가 바뀌고 이민족인 헤브라이인들의 숫자가 불어가는 것을 두려워한 아집트인들의 시기로 헤브라이인의 사회적 지위가 나빠지다가 급기야 노예상태로 전락했다. 헤브라이 민족의 역사는 바로 이집트의 노예상태를 벗어나는 대서 새 전기를 맞는다. 그들은 이집트인의 심한 박해를 받는 노예생활을 하다가 지도자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하는데 구약성경의 두번째 책(출애굽기)가 그것을 잘 설명해 준다. 우리에게는 '십계'라는 영화로 잘 알려져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시나이반도에서 40년 동안 방랑생활을 한 것이다. 모세를 통해 그들에게 십계명이 주어진 것도 바로 이 광야에서였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출애굽기 3:8)에 들어갈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그들이 건설할 사회의 준칙으로써 십계명과 그 외의 율법을 주었다. 가나안 입성의 지도자는 모세가 아니라 여호수아였다. 여호수아와 함께 팔레스타인을 정복한 이스라엘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12지파에 골고루 분배하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그렇게 평안한 것만은 아니었다. 우선 주변 민족과 긴장과 대립이 있었다. 가나안 지역에서 강자였던 블레셋과의 싸움이 계속되었다. 내부적으로도 종교공동체로서 동질적 사회 건설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주변 민족들과의 투쟁, 내부적인 도덕적 종교적 타락, 그리고 선지자들을 통한 여호와의 경고 등이 초기 이스라엘의 역사를 얼룩지게 했다. 사사시대를 거쳐 주변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왕정을 취하면서 한 민족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또 하나의 전기를 이룬다. 초대 왕 사울은 여호와의 율법을 어겨서 선지자들의 비판을 받아 비참하게 죽어갔다. 그를 이어 이스라엘 왕이 된 사람은 다윗이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는 이스라엘의 전성기였다. 이때 이스라엘은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독립국으로서 튼튼히 섰다.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웠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여호와의 약속이 글로 실현된 것 같았다. 그러나 정치적인 강국이 되고 경제적 부국이 되면서 이스라엘은 종교적 동질성을 상실해 갔고 수난의 시대를 맞게 된다. 나라는 남북으로 갈리더니, 결국에 가서는 북쪽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멸망당했고, 남쪽 유대도 얼마 못 가 신바빌로니아의 침입으로 국가가 붕괴되고, 많은 유대인들이 포로가 되어 바빌로니아로 끌려갔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국권을 상실하고, 포로가 되어 이국으로 끌려간 유대인들의 운명을 보면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되새겨 본다. 인간에세는 좋은 환경이 반드시 좋은 결과만을 낳지 않는다는 것을 헤브라이인들은 또다시 보여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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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60. 대공황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1929년 10월 24일(목요일) 아침 뉴욕의 월 가에 있는 주식 시장에서 주가가 사상 유례 없이 폭락하기 시작했다. `암흑의 목요일`이라고 불리는 이 날 `대공황`의 방아쇠가 당겨진 것이다. 그 이전까지 치솟기만 하던 주가가 별안간 폭락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주식을 팔려고 주식 시장으로 쏟아져 나왔지만 이제는 주식을 살 사람이 없었다. 5일 후인 29일 주가는 다시 폭락했고 몇 시간 사이에 주식 시장에 쏟아져 나온 매물이 무려 1,650만 주나 되었다. 하지만 주식 폭락이 대공황의 불을 당긴 것은 사실이지만 주가가 떨어진 것이 공황의 원인은 물론 아니다. 대공황의 원인은 이미 `황금의 20년대`에 내재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을 승리로 이끈 미국은 전후에 경제면에서도 세계 제1의 대국이 되었다. 전쟁시 연합국에 빌려 준 돈으로 말미암아 최대의 채권국이 되었으며 덩달아 뉴욕은 런던을 제치고 국제적인 금융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전쟁 물자로 공급하면서 발전한 중공업은 전후의 번영을 떠받치는 지주였다. 20년대의 번영을 가능하게 한 것은 기술혁신과 산업조직의 변모였다. 1920년 웨스팅 하우스 방송국이 대통령 선거전을 중계함으로써 보급되기 시작한 라디오는 20년대 후반이 되면 전체 가정의 40%가 보유하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의 기술혁신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자동차의 대량 보급이다. 1차대전 전만 하더라도 자동차는 상류 계급의 `비싼 장난감`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을 `자동차 왕` 헨리 포드가 대전 직전부터 대량 생산모델을 개발하여 전후가 되면 자동차는 대중 소비품으로서의 위치를 점할 정도가 되었다. 게다가 자동차는 연관 효과가 큰 제조업이므로 강철, 기계, 유리, 고무, 전기, 석유 산업, 건설업 등의 산업 발전을 선도했다. 이러한 발전에는 산업조직의 변모가 수반되었다. 포드에 의한 대중적인 자동차 생산이 대표적인 예이지만, 규격화된 부품사용과 콘베이어 벨트에 의한 대량 생산이라는 새로운 생산방식이 출현했다. 이와 같은 생산방식에는 거대자본이 필요했기 때문에 기업의 규모는 점점 커져 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강도 높은 작업을 담당하는 노동자들에게 높은 임금을 지불하여 구매력을 증대시킴으로써 대량생산에 할당한 대량 소비를 창출하려고 했다. 이렇듯 20년대의 미국은 미증유의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것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잠재적 모순인 생산과 소비의 불균형이었다. 20년대 중반부터 대공황이 시작된 1929년 사이에 실질 임금은 거의 오르지 않았다. 앞서 말한 포드 자동차 공장의 숙련 노동자의 경우 높은 임금을 받는 편이었지만 전체 산업에서는 소수였고 그나마 노동 생산성 향상에는 밑도는 것이었다. 반면 노동 생산성은 20년대에 걸쳐 평균 43%나 높아졌다. 하지만 독점 기업에 의한 가격통제 때문에 상품 가격은 내리지 않았다. 이러니 소비자의 구매력은 늘 수 없었다. 황금의 20년대의 수혜자는 확실이 일반 대중이 아니라 기업가였던 것이다. 게다가 농민도 이 시기에 과잉 생산 때문에 가격 저하, 부채 증가로 고통받고 있었다. 이러한 형편은 1929년 세계에서 가장 풍요한 이 나라에서 인구의 70%가 당시로서는 최저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연간 2,500달러 이하의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는 사실로 알 수 있다. 대중의 소득 증가의 정체는 생산과 소비의 불균형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반면 소수 상류계급으로의 부의 집중은 더욱 심화되어 최정상 5%가 소득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했다. 게다가 과세율도 낮았으므로 상류층의 저축은 더욱 늘어갔다. 그런데 이렇게 쌓인 돈은 생산적인 투자지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투기로 향했다. 돈을 가진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증권 시장으로 달려 갔다. 이러한 주식 열풍은 당시의 호경기와 맞물려 주가를 천정부지로 치솟게 했다. 하지만 이러한 표면상의 번영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는 막다른 골목을 향해 가고 있었다. 승용차 판매 대수는 1927년의 경우 전년의 80%에 불과했고 주택 건설도 1926년 절정에 달한 이후 1929년까지 35%나 감소했다. 특히 1929년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공업 생산, 가격의 하락은 눈에 띄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아직 주가는 계속 올라갔고 9월 19일 그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절정은 곧 낭떠러지였다. 수많은 투자가들이 파산했고 은행도 예금 인출 요구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부도를 낸 기업이 5,000개가 넘었으며 수만 개의 기업이 파산했다. 이러한 공황은 실업으로 나타났다. 심각한 단계에 들어선 1932년 봄 전체 노동력의 3분의 1이 일자리를 잃었다. 사람들은 굶주렸고 대도시에서는 자선단체의 구호를 받으려는 사람들의 줄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월 가에서 시작된 공황은 대서양을 건너갔다. 1차대전을 지나면서 유럽 경제는 미국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었고 따라서 미국의 공황은 강 건너 불이 아니었던 것이다. 중부 유럽을 시작으로 영국, 가장 늦게 프랑스까지 공황에 휩쓸려 들어갔다. 바야흐로 세계 대공황이 발발한 것이다. 약 4년간 지속된 공황으로 인해 세계적으로 수천만이 넘는 실업자가 생겨났으며 공업생산의 저하, 농산물 가격의 폭락, 무역 감소, 금본위제의 정지가 초래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공황을 타개하려는 각국 정부의 노력은 경제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을 초래하여 자본주의 경제 자체의 모습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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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제4장 생각하고 나서 행동하는 중국 - 꾸칭생(古淸生).자유기고가
13. 적극적으로 저항하자
아시아 사람들은 향후 20년 내에 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최소한으로 약화시킴으로써 아시아문제에 관한 한 미국의 백악관이나 국회에서 명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 국가들과의 협상테이블로 나오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시아와 유럽공동체가 대등한 입장에 설 수 있느냐 없느냐는 아시아 지역 내의 성실한 협력에 달려 있다. 역사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준다. 과거 아시아에서 행해진 개별정치는 서방의 각개격파 전술에 모조리 파괴당하고 마침내 우리 가슴속에는 짙은 '수동성'만 남겨 주었다. 현재 아시아 각국은 경제시장에서 거대한 진보를 했으며,법제도나 민주화 과정에서도 점차적으로 독특한 '아시아 모델'이라는 것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이것은 경제발전에 있어서 아시아가 경제발전 과정에서 서구가 밟았던 극단적인 개인주의, 윤리상실, 폭력범죄 등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해줄 것이다. 현대 산업문명의 발전과정에서 이 아시아식 모델이야말로 세계의 기타 지역을 현대문명으로 진입시키는 데 좋은 본보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서구는 여전히 세계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분야에 있어 기존의 우월적인 입장을 고수하려 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두어야 한다. 특히 금세기 후반기부터 미국은 아시아에서 보호자의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으며 당연히 아시아무대를 떠나려 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미국은 아시아에서 계속 10만 명의 미군과 함대의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지구 전체를 초토화시킬 수 있는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들이 고도로 경계해야 할 일이며, 아시아 국가들이 평화를 생각하기에는 아직 이른 이유이기도 하다. 미래의 세계는 서로 견제하는 세계가 될 것이며, 새로운 냉전국면이 아직 형성되지는 않았지만 견제 세력은 보다 더 다원화될 것이다. 혹자는, 서구는 공동으로 적에게 대처하는 연결고리가 없어져 전략목표 상실시대에 돌입할 것이며, 미국의 세계지도자적 역할도 점차적으로 존재가치가 없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탈 냉전시대는 경제질서와 국가의 역할이 새로이 정립되는 시기가 될 것이며,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아시아의 시대가 될 것이다. 미국에 저항하는 것은 장기적인 경제전략 목표이어야 한다. 세계를 제패하려는 미국의 야심을 하루 아침에 포기하게 하려는 것은 실현되지도 않을 뿐더러 아주 유치한 발상이다. 미국이 지금과 같은 초강대국이 된 비밀 중의 하나는 오랫동안 지속적이고도 전면적으로 인재양성정책을 펴왔다는 것이다. 2차대전중 미국이 얻은 최대의 수확은 무기수출이나 피침략국 자본의 대량유입을 통해 경제를 회생시켰다는 데 있지 않다. 미국의 최대 수확은 인재의 대량 유입에 있다. 미국의 원자폭탄 연구를 예로 들어보자. 나치스로부터 박해를 받아 도망쳐 나온 수많은 유태계 과학자의 유입이 아니었더라면 미국은 아마도 나치스 독일보다 뒤처졌을 것이다. 그 당시 미국은 자본의 집결지일 뿐 아니라 인재의 도피처가 되기도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은 전세계를 범위로 인재획득공세를 펼쳐 전세계의 뛰어난 인재와 예비인재를 얻었다. 이러한 점은 확실히 미국이 서구동맹국보다 뛰어난 점이다. 그러므로 지금 수많은 아시아의 뜻있는 젊은이가 끊임없이 미국으로 건너가 영주권을 얻으려 하는 것은 매우 불안한 현상이다. 이것은 모든 아시아 국가가 중시해야 할 일이다. 인재복귀를 유도하는 것은 아시아 발전에 있어 보다 유리한 여건을 조성하는 중요한 전략이다. 우리는 미국 각 기관에 종사하는 중 .고급 인재중 아시아계가 많은 비율을 점유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사람들이야 말로 우리가 미국에 비축해 둔 진짜 귀한 재원이므로, 우리는 수백만 달러의 대부금이나 투자를 얻기보다는 그들을 귀국시켜 아시아 경제건설에 투입시키는 것이 더욱 의의가 있다. 이것 역시 미국의 계속되는 '세계 제패, 세계 평화보호'라는 명목에 저항하고, 그것을 억제시키는 유효한 수단이다. 왜냐하면 과학 기술의 힘을 얻어야만 비로소 아시아가 진정으로 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단순한 단기 경제발전 전략으로는 결코 우리의 평화와 존엄을 지켜낼 수도, 미국이나 서구세계의 위협을 피할 수도 없다. 그 좋은 예로 일본을 들 수 있다. 일본이 경제대국임은 다시 논할 필요도 없지만, 그 경제적 풍요는 미국의 그늘 아래서 이루어지고 있다. 마치 미국의 부잣집 아이들이 돈은 많지만 독립심과 자존심이 없는 것처럼, 미국의 식민지문화가 일본의 지위를 결정해 주었다. 아시아는 해외에 있는 자국의 인재들을 불러들일 충분한 자신감이 있다. 중국은 이미 그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중국은 해외유학자들이 고국으로 돌아와 활동하도록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하고자 하며, 지금은 막 시작되고 있는 단계이다. 중국계 고급인재들은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고, 보다 젊은 사람들은 지금 미국 각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중이다. 만약 우리가 그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지 않는다면 우리는 거액의 자금으로 키운 최우수인재들을 미국에 그냥 내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재들이 돌아와서 기존의 과학기술력과 협력한다면. 그들은 중국이 장차 경제적, 문화적 강대국이 되는데 촉진제 역할을 할 것이다. 인재 복귀전략은 경제발전을 촉진시키고,동서양의 산업구조를 변화시키고, 경쟁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이런 전략을 실시하려면 반드시 동양문화의 응집력을 고려해야만 한다. 동양문화의 웅집력, 이것은 동양문화가 서양문화와 경쟁할 때 서양문화보다 우세한 부분이다. 어떤 동양인은 떠돌아다니기보다는 조국의 품으로 돌아와 역사적인 중책을 맡기도 한다. 중국의 칭화(淸華)대학이나 베이징대학 강단에는 갈수록 많은 유학파 학자들이 그들의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베이징대학 옆에 있는 중국의 실리콘밸리 쫑관춘(에 있는 수천 개의 벤쳐기업에는 수많은 유학파 학자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다. 미국의 풍요로운 물질적 생활이 국내보다 훨씬 좋기는 하지만 그들은 조국을 위해자신의 해박한 지식을 쓰고 싶어한다. 우리는 유학파 학자들이 국가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을 아시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아시아의 대추세(亞洲大趣勢)}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타이빼이(臺北) 시 남쪽의 신주(新竹)과학원 지역은 대만으로 돌아온 유학파 기술자의 대본영이다. 과학원 지역 내 회사 55개 중 반수 이상이 미국 유학을 다녀온 기술자가 창립한 것이다. 위스콘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관리국장 쉬에샹환(舊香川)의 말을 인용해 보자.
'우리의 맨처음 생각은 그랬죠. 기왕 실리콘밸리에 그렇게 많은 대만 과학자와 엔지니어가 있는 이상 몇 명이 모여 함께 대만으로 돌아와 창업한다면 그들은 분명 대만의 고급 과학기술공업을 세우는 데 보탬이 될 것이라구요. 과거 대만의 계엄령하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미국으로 건너갔죠. 그러나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벌써 중년의 위기감을 느끼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시험삼아 그들을 불러 고급 과학기술회사를 창립하게 했습니다."
중년의 위기감과 미국 회사생활 속에서 발전에 한계를 느낀 것은 오히려 해외 중국인을 뛰어난 기업가로 만들었다, 노벨상을 받은 리웬저(李遠哲)는 1994년 초청에 응하여 대만에서 가장 명성 있는 학술 연구기관인 '중앙연구원'의 원장직을 맡았다. 그는 '60년대에 대다수 젊은이들이 대만에서는 발전할 기회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우수하고 총명한 젊은이들이 저마다 앞다투어 미국으로 건너갔죠'라고 회상한다. 그러나 리웬저 박사는 미국 국적과 편안한 생활을 포기하고 대만으로 돌아왔다. 지금 그는 해외에 있는 지식인들을 대만으로 불러들이기 위해힘쓰고 있는데 그 중에는 아주 우수한 인재들, 예를 들어 하버드대학 고생물학자 장쯔꽝(張直光), 물리학자 프랑크 광(方), 식물학자 양쌍파(楊尙發)등이 있다. 리웬저는 현재 우수한 '인재를 위한 발전기금'을 설립하여 이미 재계로부터 3천만 달러에 가까운 돈을 모금하여 해외에 있는 학자와 과학자들이 대만으로 돌아와 후학양성과 연구작업에 종사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신주(新竹) 과학원 내 150개 회사는 개인소유이긴 하지만 국민과학위원회가 토지와 건물 및 연구자금을 지원해 준다. 이들은 1993년,총매출액이 거의 50억 달러로 전년에 비해 40퍼센트의 성장률을 보였고, 2002년에는 매출액이 5백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예측했다. 여기에는 미국유학을 다녀온 많은 엔지니어가 흘린 땀이 있었다. 과학원 지역 내 회사몇 곳은 대만 과학기술회사 중에서 좋은 선례를 세웠다, 예를 들자면 1980년에 설립된 훤여우 사는 전세계의 탁상용 스캐너 시장의 15퍼센트를 점유하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과거 5년 간 경험이 풍부한 관리인재 및 엔지니어 6백명이 대만으로 돌아와 일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박사학위를 소유한 사람도 많다. '나는 대만에서 수많은 작은 싱가포르의 출현이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쉬에샹환은 말한다. 대만 제2의 과학원 지역은 장차 홍콩과 싱가포르 다음으로 세계 3대 화물운송항구인 까오숭(高雄)시 부근 싱지엔(興建)이 될 전망이다. 쉬에샹환은 제3의 과학원 지역은 대만 중부에 위치할 것이고, 또다른 몇개 의 지역이 2020년 이전에 건립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같이 매력 있는 장려정책의 실시는 젊은 세대들의 입장에서 볼 때 대만, 홍콩 및 싱가포르, 한국 등이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많은 전공발휘의 기회를 제공한다 할 수 있다.
미국에 유학하고 있는 수많은 아시아계 인재가 귀국하는 현상은 세계 적인 과학기술 발전추세 및 과학기술 역량의 분포에 대한 변화와 재편현상을 가져왔다. 1993년 미국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학생 중 반수 이상은 거의 외국인이다. 그들은 졸업 후 대다수가 미국에 계속 머물거나, 실리콘밸리 혹은 AT&T 사의 벨 실험실 같은 첨단과학 연구기관에서 근무한다. 이러한 재능 있는 외국인들은 미국 과학기술사의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비즈니스 위크]는 "갈수록 많아지는 고급 과학기술 인재가 각기 그들의 기술 및 관계망을 가지고 본국으로 귀국하여 능력을 발휘한다면. 그들은 앞으로 그들 국가와 미국 사이의 과학기술상의 수준 차이를 줄일 것이다. 특히 한국을 예로 들자면, 최근 10년 동안 미국 유학파 학자들의 공로를 더욱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차세대 메모리칩 제조회사 경진대회에서, 바로 그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삼성전자가 벌써 일본과 대등한 형세를 펼칠 수 있었다'라고 서술하였다, [비즈니스 위크]에서 지적한 대로 현재 수백 명의 벨 실험실의 동료들이 대만으로 돌아와 대만의 '반도체와 멀티미디어 설비의 수출 경쟁력'을 강화시켰다. [비즈니스 위크]는 홍콩은 전자통신 및 음향기재의 요람으로, 이 두 가지 공업 분야에서 1백여 개 이상의 제조망을 가지고 있다'라고 한다. 그리고 한 예로 왕아룬(포阿倫)이라는 사람을 들었다.왕아룬은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NCR 사의 전임 전기엔지니어였다가, 지금은 매출액 5억 달러가 넘는 기술제어회사를 설립하여 지능형 완구및 무선통신설비를 전문적으로 생산하고 있으며, 이미 세계적인 기업체로 발전시켰다. [비즈니스 위크]는 과학기술 인재들이 본국으로 귀국하여 근무하는 현상을, 다음 세기에 전세계 과학기술력의 중심이 동쪽으로 옮겨가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런 인재들은 아시아 국가가 빠른 시일 내에 서구 선진국가를 따라잡을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과거 수년 동안 과학기술 경쟁시장에서 경쟁자사이의 거리는 이미 단축되었다. 많은 분야에서 아시아의 구미지역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선견지명이 있는 아시아 국가는 이미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미국인 존 나스피터는 '아시아 출신 인재의 귀국 에도 불구하고 서구인재를 초빙할 능력이 있는 세계적 대기업은 좀더 우세할 것이다. 만약아시아가 경제발전과 생활의 질을 동시에 고려할 수 있다면 보다 많은 외국 인재들,특히 서구의 젊은이들은 아시아로 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서구 국가들은 다년간 기술 영역을 주도해 왔고, 어떤 영역에서는 여전히 그 능력을 지속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도와 중국은 경험이 풍부한 수많은 기술인력을 가지고 있어 능히 전세계에 신상품 을 새로운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아마도 21세기 이후에는 우위를 차지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전문서비스의 무게중심은 자연히 서구에서 동방으로 옮겨져 아시아 일대가 번영할 것이다. 존 나스피터는 분명 미국인이다. 그는 서양인의 시각으로 동양을 이해하여 완전히 식민지인을 대하는 듯한 말투를 사용했다. 그의 [아시아의 대추세]는 엄밀하게 말하면동양인을 위해 쓴 것이 아니라, 서구세계의 미래를 우려하는 마음에서 서구세계의 문제와 대책을 서술한 것이다. 그는 실례를 들어 서구세계를 설득하고 경쟁심을 부각시켜 서구세계의 긴박감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그렇지 않다면 서구는 과거의 지위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고찰과 예언 중 우리가 생각해 볼 만한 것들은 많다. 그는 아시아의 이웃나라와 대만을 소개할 때조차도 우리에게 실증적인 경험을 제시했다. 미래의 시대는 석유나 광산. 황금을 쟁탈하는 것보다 인적자원의 쟁탈이 더 중요하다. 아시아 국가들은 식민지화되는 것을 견제하고 미국의 패권을 막으면서 인재쟁탈전략을 세워야 할 것이다. 서구 및 미국의 인재를 보다 많이 끌어들여 아시아를 위해 봉사하게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동방이 세계에 우뚝 설 수 있는 길이다. 요약하자면 동 .서양의 경제 및 문화의 격렬한 경쟁에서 아시아는 보다 넓게 사고함과 동시에 기존의 서구의 기술축적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감을 갖고 방법의 다양화를 추구하여 피동적인 상태를 벗어나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자세를 지파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미의회 내의 어떤 극우적인 인물의 마음과 같다 할지라도 과거처럼 미국과의 단절을 고수할 수는 없다. 미국과의 단절은 미국에 대항하는 방법이 아니라 오히려 미국이 우리를 견제하게 하는 빌미를 만들어줄 뿐이다. 우리가 가장 우선시 해야 할 것은 아시아와 서구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여,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대국이며 평화를 열렬히 사랑하고 다른 국가가 내정간섭하는 것을 불허한다는 사실을 미국이 분명히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은 공통된 이익을 지니고 있다. 미국은 반드시 중국의 이익과 존재를 직시하여 서태평양에서 미국의 군사력을 감축해야 한다. 서태평양 해안의 평화는 미국의 이익에도 부합한다. 미국에 대웅하는 수단도 다양화되어야 한다. 단순하고 경솔한 방법은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미국에 대항하는 것. 이것은 우리의 목적이 아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역시 그렇다. 굳이 비교하자면 우리는 미국보다 더 평화와 자유를 사랑하는 동양인이다. 우리의 저항은 현실의 불평등을 타개하기 위한 것이며, 우리의 최종 목표는 번영되고 부강한 국가와 아름다운 새 생활을 건설하는 것이다. 현재 미국과 서구세계가 개발도상국가에게 시행하는 정책에는 분명히 불평등이 내재되어 있다. 그들의 식민주의에 대한 몽상이 여전히 존재하는 한 그것은 반드시 우리의 현대화 과정에서 장애물이될 것이다. 아마도 대다수의 개발도상국가에게는 미국이 없는 세계가 더 좋을 것이다. 군함과 핵미사일이 없고 문화의 침투나 경제상의 약탈이 없다면 각국 국민들은 평화롭게 살 수 있고 인류문명을 함께 향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가상이다. 미국은 존재할 뿐 아니라 그의 손을 전세계에 뻗쳐 끊임없이 각 지역에 여러 가지 골치아픈 문제거리를 만들고 있다. 그러므로 미국에 대항한다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현실적 의의를 지닌다. 지금까지의 발전추세에서 보면, 모든 것이 미국인 존 나스피터가 말한 것처럼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미래의 모습은 이미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중국이 지난 16년 동안 쌓은 기적 같은 발전속도는 이를 충분히 가능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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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바이올린의 눈물
늦가을 밤이었다. 거리엔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아침부터 내린 가을비는 밤이 되어도 좀처럼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영등포역 지하상가에서 바이올린을 켜고 있던 맹인 악사 김씨는 '선구자'를 막 끝내고 시계를 만져 보았다. 일반인 시계와는 달리 시계 바늘이 밖으로 돌출돼 있는 맹인용 시계는 벌써 밤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김씨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 싶어 바이올린을 케이스 속에 집어넣었다. 바구니에 담긴 백원 짜리 동전 몇 개도 호주머니 속에 챙겨 넣고 낡은 비닐 가방 속에 넣어 둔 휴대용 흰 지팡이를 길게 뽑아 들었다. 그러자 그때 지팡이 끝에 한 남자의 발이 걸렸다. 뜻밖에 그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아저씨, 비가 많이 오는 데 어떻게 가실려구 그러세요?"
술 취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아주 맑은 20 대 청년의 목소리였다. 목소리만으로도 상당히 신뢰가 가는 사람이었다.
"괜찮습니다. 늘 이렇게 다니는 걸요."
김씨는 그 청년에게 감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지하도 출구를 향하여 발을 옮겼다. 그러자 그 청년이 얼른 김씨 앞으로 다가왔다.
"저는 이 상가 건너편 카메라 점에서 일하는 최철호라고 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아저씨의 바이올린 소리를 듣지요. 아저씨의 열렬한 팬이라고나 할까요. 전 음악을 아주 좋아합니다." "아, 예에, 그러세요. 고맙습니다."
김씨는 청년이 자기 팬이라는 말에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집이 어디세요? 버스 타고 다니세요? 제가 차 타는 곳까지 모셔다 드리죠." "아니, 괜찮습니다. 집은 봉천동이지만 늘 다니던 길이라 잘 갈 수 있어요." "그래도 오늘은 비가 많이 와서, 지금도 빗방울이 제법 굵은 걸요."
어느새 청년은 지하도 계단을 오르는 김씨의 팔을 가볍게 잡아 주고 있었다. 김씨는 그런 청년의 호의를 굳이 뿌리치지는 않았다. 아무리 세상이 메말랐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자기 같은 사람이 이 정도나마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은 세상 인심이 그리 나쁘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다. 거리엔 청년의 말대로 정말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다. 청년이 우산을 받쳐 주었으나 얼굴에 와 닿는 빗방울이 제법 굵고 차가왔다. 김씨는 지팡이를 요령껏 내뻗치면서 걸음을 걸었다. 그러나 몇 번이나 행인들과 어깨를 부딪쳤는가 하면, 물웅덩이인 줄도 모르고 발을 내디뎠다.
"그 바이올린 이리 주시죠. 제가 들어 드릴께요."
김씨는 그 청년에게 바이올린을 건네주었다. 가끔 그의 연주 솜씨를 칭찬하는 사람들로부터 이런 친절을 받아왔던터라 그는 별다른 생각 없이 악기를 넘겨주었다. 그런데 김씨가 버스 정류장 앞에 채 이르지 않았을 때였다.
"아무래도 비가 많이 와서 안 되겠어요. 집에다 전화를 해서 차를 오라고 해야겠어요. 제가 자가용으로 집에까지 모셔다 드리죠. 가만 있자. 공중전화가 어디 있나? 아, 저기 있군요. 이리 오세요. 저기 공중전화 있는 데로 잠깐 같이 가시죠."
김씨는 청년을 따라 공중전화가 있는 데로 갔다. 청년이 집으로 전화를 걸기 위해 공중전화 박스 속으로 들어가자, 김씨도 비를 피하기 위해 그 옆에 있는 전화 박스 속으로 들어갔다. 10여 분이 지났다. 그런데 어딘가 전화를 걸던 청년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최 선생! 최 선생!"
김씨는 전화 박스 칸막이를 손으로 두드리며 청년을 불러 보았다. 그러나 청년의 대답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김씨는 '아차!'하는 생각이 들어 얼른 청년이 들어갔던 전화 박스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러나 청년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김씨는 혹시나 무슨 급한 일로 청년이 잠시 자리를 비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대로 전화 박스 앞에서 한 시간을 기다렸다. 그러나 청년은 나타나주지 않았다. 온통 비를 맞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영등포역 앞을 몇 차례나 왔다갔다했으나 한번 바이올린 가지고 가 버린 청년은 끝내 나타나 주지 않았다. 그날,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채 자정이 넘어 봉천동 달동네 셋방으로 돌아온 김씨는 엉엉 소리를 내어 울었다. 같은 맹인인 아내도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잠에 곯아떨어진 세 살 박이 아들만이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그는 이대로 죽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청년을 믿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스러웠다. 복받쳐 오르는 설움에 한번 터진 울음이 그치지 않자, 평소 별로 말이 없던 옆방 주인 남자가 자다가 일어나서 '112신고'를 해주었다. 그러자 새벽 세 시경에 방범대원이 찾아와서 김씨의 진술을 받아 갔다. 세 살 때 백내장을 앓아 시력을 잃어버린 김씨는 서울 맹학교를 졸업한 후, 기타를 치는 떠돌이 유랑 악사로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나이 서른이 넘어 서울에 정착한 후, 녹음기를 틀어 놓고 곡을 외워 가며 혼자 바이올린을 배웠다. 싸구려 하숙집에서 시끄럽다고 야단을 치면 겨울에도 추운 골목에 나가 연습을 하곤 했다. 김씨는 꼬박 2 년 동안 바이올린을 연습한 후에야 거리에 나가 손님들을 불러모을 수가 있었다. 운이 좋은 날이면 1 만 원 이상을 벌 때도 있었다. 4 년 전에는 먹고 싶은 것도 안 먹어 가며 아끼고 아낀 돈으로 체코제 바이올린을 1백만 원이나 주고 샀다. 주로 대중이 좋아하는 가곡이나 클래식 소품, 찬송가 등을 연주했으며, 즐겨 연주하는 곡 중에는 '비목', '아베마리아', 등도 들어 있었다. 바이올린을 잃어버린 후 김씨는 마냥 실의의 나날을 보냈다. 일을 나가고 싶어도 바이올린이 없어 나갈 수가 없었다. 아내는 지하철을 타고 하모니카를 불며 구걸 행각이라도 하자고 했으나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를 찾아온 기자를 붙들고 호소했다.
"잃어버린 저의 바이올린에는 거리의 악사가 흘린 눈물과 한숨이 배어 있습니다. 돈이 필요해서 가져갔다면 돈을 드리겠습니다. 제발 저의 생명인 바이올린만은 돌려주십시오."
신문에는 '거리의 맹인 악사, 바이올린 잃고 한숨만. 데려다 주겠다고 친절 베푼 젊은이, 악기 받아 쥐고는 잠적'이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났다. 그러자 기사가 난 다음 날, 악기 제조 회사 사장 한 사람이 산동네까지 그를 찾아와 바이올린 한 대를 선물로 주고 갔다. 그는 김씨의 손을 꼭 잡고
"이건 제가 젊은 날에 쓰던 독일제 활입니다. 부디 용기를 잃지 마시고 열심히 사십시오" 하는 격려의 말까지 하고 돌아갔다. 김씨는 다시 새생명을 얻은 것 같았다. 그는 그 다음 날부터 당장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영등포역 앞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계속해 나갔다. 그 뒤 2 년이 지난 어느 늦가을 밤이었다.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던 김씨의 발 아래에 조용히 바이올린 한 대를 두고 가는 청년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왜 그 청년이 김씨한테 바이올린을 주고 가는지 몰랐으나 김씨만은 알고 있었다.
"바이올린을 돌려 드립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김씨는 바이올린을 켜다가 그 젊은 청년의 맑은 목소리를 다시 들었다. 그러나 그는 바구니에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을 때처럼 잠깐 허리를 굽혔을 뿐 여전히 바이올린만을 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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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란 권리를 반으로 하고 의무를 두 배로 하는 일이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 하우어'(1788-1860)의 말. 그의 저서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 제2권에 있다. '니체'는 '쇼펜 하우어'를 가리켜 '참다움 인생의 교육자'라고 했는데, 그의 저서에서 받는 진지한 인상과는 달리 꽤 재미나는 점도 있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한 번은 남녀가 모여 즐기기로 있는 파티에 초대를 받아 갔는데 몇 명의 여자가 남자와 여자는 원칙적으로 누가 더 현명하냐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그야 물론 여자지요. 왜냐면 여자는 남자와 결혼을 합니다. 하지만 남자는 여자와 결혼을 하니까요" 하고 대답했다. 즉 여자는 현명하니까 남자와 결혼하지만, 남자는 어리석기 때문에 여자와 결혼을 한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빌면 이름난 철학자가 거의 결혼을 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한다. 악처 '크산티폐'로 골치를 앓은 '소크라테스'를 제외한다면 '플라톤', '제논', '데카르트', '스피노자', '로크', '흄', '라이프니츠', '칸트', 등이 모두 독신으로 지내지 않았느냐는 것.
중세 영국의 봉건영주 '레오프릭'백작은 11세기 경 코멘트리 시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번번이 백성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했다. 마음씨 고운 그의 아내 '고다이바'부인(1040-1080)은 세금을 가볍게 하도록 남편에게 부탁했다. 냉혹한 백작은 듣지 않다가 하도 여러차례 부탁하자 농담 삼아 "당신이 대낮에 알몸으로 말을 타고 거리를 한 바퀴 돌고 오면 세금을 면제해 주지"하고 말했는데 놀랍게도 부인은 그 제의를 받아들여 남편의 말대로 알몸으로 시내를 일주했다. 시민들은 부인의 정에 감격하여 집집마다 창문을 굳게 닫고 부인의 나체를 보지 않기로 했는데, '톰'이란 사나이가 약속을 어기고 문틈으로 기웃거렸다가 그만 벌을 받아 장님이 되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코벤트리 연대기'에도 실려 있는 에피소드로 지금도 그곳에서는 부인의 유덕을 기리는 축제를 지낸다고 한다. 또한 필요 이상 남의 일을 캐기 좋아하는 사람을 '엿보기 좋아하는 톰(Peeping Tom)'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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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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