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 102 호
단기 4340. 1. 3 (음력 11.15) / 발행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용량제한으로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나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럴 경우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발행지 원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발행지원본보기]
|
|
편지 |
|
|
문학소식 |
|
|
글터 → 명언 / 격언 |
남몰래 하는 선행은 땅 속을 흐르며 대지를 푸르게가꾸어 주는 지하수 줄기와 같은 것. / 토머스 칼라일
|
|
글터 → 경제/경영/성공 |
세계를 움직이는 127대 파워 - 박태견 지음
POWER 008 중남미 전파황제: TV 글로보 전세계 TV방송계에서 미국의 ABC, NBC, CBS 3대방송 다음으로 많은 시청자를 확보하고 있는 세계 4위의 방송국은 의외로 남아메리카 브라질의 최대 TV, 라디오 민간방송국인 TV 글로보Globo이다. 골든아워의 시청률이 자그마치 7할을 넘으며 확보된 시청자 숫자만 3,200만 명에 달하고 있다. 단막극이나 연속 멜로드라마. 게임프로 등 오락프로의 제작 능력이 대단해 그 프로그램들은 해마다 영어로 더빙돼 프랑스 MIP TV 견본시장 등을 거쳐 미국 및 유럽, 아시아 등 전세계 TV방송국으로 배포되고 있다. 방송전문가들은 "오늘날 TV 글로보가 세계적 오락 프로덕션이 되기까지에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브라질의 군부독재의 공헌이지대하다"고 말한다. 수십여 년간에 걸친 가혹한 군사독재와 검열때문에 정치성이 강한 뉴스, 시사프로 제작에 제약이 많자, 방송인들이 그 대신 오락프로그램 제작에 집중한 결과 오늘날 이 분야에서는 세계최고 수준의 오락성을 확보하게 됐다는 분석이다. 일본을 위시한 아시아 여러 나라의 TV 프로듀서들이 수시로 TV 글로보 프로덕션을 찾아 오락프로그램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어갈 정도록 TV 글로보의 오락성은 전세계적으로 명성이 높다. 그럼에도 세계 방송인들은 좀처럼 TV 글로보에 대해 언론의 권위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글로보가 가진 자들의 편에만 서려 한다는 이유에서이다. 현재 브라질은 경제활동 인구의 10p 이상이 완전실업 상태에 놓여 있고, 전국민의 40p 이상이 절대극빈 생활로 고통받고 있다. 그럼에도 TV 글로보는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보수 기득권층의 목소리만을 대변할 뿐이다. 특히 글로보는 1989년 대통령선서나 1994년 대통령 선거 등 주요 정치행사가 있을 때마다 공공연히 여권 후보의 선거운동에 앞장서 야당과 다수 지식인의 비판대상이 되고 있다. 시청율과 방송의 권위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으며, 유사시 미래의 미디어는 이런 기형적 괴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게 다름아닌 TV 글로보이다.
|
|
|
글터 → 삶속의 글
|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할머니의 한 표 행사
선거를 이틀 앞둔 날이었다. 쪽진 하얀머리가 누부신 할머니 한분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민원실을 찾아오셨다. 주민등록증을 재발급받기 위해 먼길을 오신 것이었다. 그런데 면사무소에 가면 다 알아서 처리해 준다는 이웃 사람의 말만 믿고 사진을 빠뜨리고 그냥 오셨다.
"할머니, 사진이 없으면 주민등록증을 만들 수가 없어요."
내 말에 할머니는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셨다.
"꼭 투표를 해야 하는데, 이 일을 어쩌나...."
여러 가지 일로 짬을 내기 힘들었지만, 결국 나는 할머니를 모시고 사진관을 찾아나섰다. 사진관에서 할머니의 증명사진을 찍고, 한 삼십여 분을 기다리자 사진이 나왔다. 할머니는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어 둔 만 원을 꺼내 사진 값을 지불하셨다. 그리고는 남은 돈 사천 원을 내 손에 꼭 쥐어 주시며 말씀하셨다.
"처자, 고마워. 덕분에 투표를 할 수 있게 됐어. 이 늙은이에게 하두 고맙게 해 줘서 주는 거니까 작은 정성이나마 받아 주구려."
깜짝 놀란 나는 할머니의 호의에 감사했지만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 차례 사양으로 할머니는 겨우 그 돈을 호주머니에 넣으셨고, 푸근한 미소를 띄우며 다시 말씀하셨다.
"처자, 고마워. 꼭 좋은 데 시집가게나."
그날 밤 나는 한 표의 행사를 너무도 소중하게 여기시는 할머니의 마음에 나 자신의 행동들을 뒤돌아보게 되었다.
박금실 님/경북 영덕군 축산면
|
|
|
글터 → 철학 |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100 - 철학은 권하고 싶은 학문인가?: 철학의 위상 그때 세계에서는 1991년: 러시아, 독립국가동동체 결성 1993년: EC 12개국 통합조약 발표
지금까지의 글을 읽은 이들은 철학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은 가질수 있는지 몰라도, 스스로 철학을 전공하겠다든지 앞으로도 철학을 계속하거나 새로이 공부를 시작하겠다는 생각을 할수 있을지 궁금하다. 옛날 같으면 철학은 학문중의 학문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다른 어떤 학문보다도 철학적이라고 생각했었다. 최근까지도 서구의 전통이 있는 대학에서는 교양과목에서 철학과 역사는 필수적인 것으로 인정되어왔다. 그들은 고전을 소중히 여겼고, 고전의 대부분은 철학과 역사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전통적인 철학보다는 논리적 사고를 필요성이 더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는가 하면,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사회학이나 사회에 대한 철학적 이해가 순수한 철학보다도 더 각광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그렇다. 차라리 세계적인 학자가 되려면 서양 학문보다는 한국학을 해야 된다. 그 문야에서는 한국에서 제일이면 세계저인 우위를 쉽게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학이 아니리면 동양철학을 택하는 편이 더 보람이 생긴다. 우리는 정신사와 한국철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면 서양철학은 항상 남의 것을 배우면서 뒤따라야 하며, 그 무대에서 업적을 인정받으려면 한국무대가 아닌 서구무대에서 경쟁적으로 학문에 성공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이미 그것은 우리의 한국철학이 아니고 한국인이 세계적인 화가가 되는 것은 쉬우나, 한국인이 세계적인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되었을 때에는 이미 한국철학이 아닌 서양철학의 한 부분을 책임맡게 되는 것이다. 일본 철학계는 우리보다 훨씬 앞선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주목 할 만한 동양, 인도 철학자들은 배출하고 있어도. 서양에서 인정 하는 세계적인 철학자는 나오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이것은 한국 철학자들의 고민이기도 하다. 아직도 한국 철학이나 중국 및 동양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보다는 서양철학을 공부하는 학생 및 학자들이 더 많다. 그러나 한결같은 고민에 빠진다. 남의 것을 열심히 연구하는 동안에 세월은 다 지나가, 돌이켜보면 남는 것은 서양철학을 소개하는 데 그치고 만다. 일본 철학계에는 헤겔 연구가들이 많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 심지어는 번역 문구 하나를 가지고 토론이 벌어지곤 한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헤겔이라는 독속에 빠져 헤어나오지를 못한다. 결국은 헤겔을 소개하는 것으로 그치는 셈이다. 우수한 철학들은 현상학이나 해석학의 벙법론을 터득하며 분석철학에서 그 업적을 쌓아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적 학문과 우리 현실에 어떤 적응력을 갖고 임하며 학문적 결실을 맺게 해 주는가 함에는 의문이 생긴다. 그래서 학문적 자부심과 자긍심을 잃는 경우도 있다. 가장 앞선 교수들은 서양철학의 방법론을 갖고 한국철학을 재조명하며 한국철학을 새로운 위상에서 밝혀보려는 노력에까지 나간다. 서울대학의 박종홍 교수같은 이가 그 길을 택했다. 그러나 너무 부담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그 실질적인 결과에는 이르지 못한 셈이다. 또 서양철학에서 보낸 세월이 너무 길었던 것도 사실이다. 또 어떤 이들은 한국적 현실과 우리의 문제를 서양철학적인 방법으로 해명해서 좀더 새로운 해석과 결론이 주어질까를 탐색해 보기도 한다. 윤리, 종교, 문화 같은 우리의 문제를 우리의 전통과 방법에서 해명해보는 길이 아니라, 서구적인 방법론에 의해 재조명해보려는 의도이다. 주로 그런 사람들은 우리의 문제와 서구적인 논리를 접목시키는 작업을 하게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서양철학 전공자들은 애도 썼고 고생도 했으나, 남기는 바가 너무 적었다는 후회를 남긴다. 그래서 후배들에게는 한국철학이나 동양철학을 권고해보기도 한다. 그러나 거기에도 문제가 있다. 처음부터 한국철학이나 동양철학에 들어가게 되면 아는 것은 풍부해지고 재료는 많이 찾으나, 방법론의 빈곤을 느끼기 때문에 많이 읽고 알았다지만 학문다운 학문적 체계가 빈곤한 지식의 나열이나 시대적이 분류에 그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서양철학 공부는 필요한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중요하면서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직 우리 철학계는 계몽기간이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은 숨은 노력, 즉 씨를 뿌려 가꾸는 단계는 필수적이며, 우리는 그 임무를 기꺼이 담당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
|
|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
'여자무당' -> '임금의 선생님' -> '스승'으로 의미 변화
'스승'의 어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무격'이란 한자어가 있지요. '무'는 '여자무당'을, '격'은 '남자무당'을 말합니다.그런데 옛 문헌을 보면 '무'를 '스승 무' '격'을 '화랑이 격'이라 되어 있습니다. 결국 '스승'이란 '여자무당'을 말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자무당'은 고대사회의 모계사회에서 대단한 지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인디안 영화나 아프리카 영화를 보면 추장보다도 더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은 제사장입니다. 추장은 제사장에게 모든 것을 상의하지요. 결국 '스승'은 임금의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의 선생님을 한자어로는 '사부'라고 하는데, '사'자도 '스승 사', '부' 자도 '스승 부'입니다. 결코 '선생 사, 선생 부'라고 하지 않습니다. '여자무당'이 '임금의 선생님'으로 그 의미가 변화하였고, 이것이 오늘날 일반화되어 '스승'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스승'이 '무당'을 가리킨다고 하니까 맞는 말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몸이 아파서 강의실에 들어 가기 싫다가도 강의실에만 들어가면, 마치 무당이 신명이 난 것처럼 신명이 나서 떠들거든요.
'남자무당'인 '화랑이 격'은 오늘날 '화냥 년'이라는 못된 욕을 할 때 사용하는 말로 변화했습니다. 이 '화랑이 격'의 '화랑'은 신라시대의 '화랑'과 같은 것으로 보입니다. '남자 무당'도 고대사회에서는 중요한 귀족 중의 하나였습니다. 신라 향가인 '처용가'에 나오는 '처용'도 '화랑'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남자무당은 여자무당에 비해 그 위세가 약합니다. 오늘날의 무당의 세계도 일처다부제가 보이기도 할 정도이니까요. 처용이 아내가 다른 남자와 동침하는 것을 보고 물러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도 알고 보면 쉽게 이해가 가는 대목이지요. 그래서 남자무당은 이 여자무당, 저 여자무당을 찾아 다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행실이 좋지 않은 사람을 '화냥이'라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남자에게 쓰이던 것이 여자에게 사용된 것이지요.
간혹 '화냥'을 '환향', 즉 '고향으로 돌아오다'라는 는 의미로 해석해서, 청나라에 끌려 갔던 여인들이 몸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 왔다고 해서 붙인 이름인 것처럼 알고 있는 분도 있으나, 그것은 민간인들이 만들어낸 어원입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
|
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1. 빛은 오리엔트에서
빛은 오리엔트에서 인류가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원시 생활을 벗어나 문명의 단계로 들어선 것은 오리엔트 지역에서였다. 오리엔트란 오늘날의 중동지방, 다시 말하면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 유역과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을 가리킨다. 이곳은 중국의 황하 유역, 인도의 인더스강 유역과 함께 인류 역사상 농경이 처음 시작된 곳중 하나이다. 주로 관개에 의한 대규모 농업에 알맞은 곳이었다. 여기에서 농경의 발전과 더불어 최초로 도시가 나타났고 도시의 발달과 함께 처음으로 국가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농업의 성패가 관개 치수에 좌우된 이 지역에서는 이 문제를 관장하는 국왕의 권력이 강화되게 마련이었다. 따라서 국왕은 '신의 아들' 또는 '신의 대리자'로서 절대적인 권력을 갖게 되었다. 여기에 왕을 정점으로 피라미드 사회구조를 가진 이른바 '오리엔트적 전제정치'의 모델이 형성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와 같은 오리엔트 문명이 싹튼 것은 기원전 3000년경이었다. 이는 최초의 서양 문명인 그리스의 고전 문화보다 2000년 이상 앞선 것이다. 그리스 로마인들은 이 오리엔트 문명에서 많은 것을 이어 받아 그들의 문명을 발전시켰다. 고대 로마인들이 '문명의 빛은 오리엔트에서' 비추기 시작했다고 말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
|
|
글터 → 세계사 |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56. 레닌은 왜 독일과 불평등조약을 체결했나?
1차대전은 1918년 11월 독일의 항복으로 끝났다. 하지만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낳은 이 최초의 세계 대전은 유럽의 동부 전선에서는 이미 끝나 있었다. 1918년 3월 신생 소비에트는 독일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고 강화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조약의 내용은 소비에트로서는 매우 가혹하고 굴욕적인 것이었다. 강화의 조건으로 상당 부분의 영토와 배상금을 독일에 제공해야 했던 것이다. 소비에트는 왜 이런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던가? 러시아의 2월 혁명(신력으로는 3개 혁명)은 “빵을 달라”라는 요구로 시작되었다. 1917년 2월 23일 국제 여성의 날 페트로그라드의 여성들이 “빵을 달라!”,“우리 아이가 굶주린다!”라고 외치며 거리 행진을 했다. 여기에 공장에서 일손을 놓은 노동자들이 합세하여 사태는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위대의 주장도 “빵을 달라”에서 “차리즘 타도”, “전쟁 중지”, “평화와 자유”로 확대되었다.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시위를 진압하려 했지만 반대로 사병들은 혁명의 편으로 돌아섰다. 시위가 일어난 지 9일 만에 차르 니콜라이 2세는 퇴위할 수밖에 없었다. 300년이나 이어져 온 로마노프 왕조가 썩은 나무 쓰러지듯 일순간에 넘어져 버린 것이다. 2월 혁명은 3년이 넘게 진행된 엄청난 희생을 강요받은 국민의 분노가 끝내 폭발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밑바닥에 깔린 것은 전제적인 러시아 사회 자체에 대한 불만과 저항이었다. 1861년 알렉산더 2세에 의해 농노 해방이 실시되었지만 철저하지 못한 상태로 끝났고 도리어 정치적인 면에서는 더 후퇴하기까지 했다. 1890년대에 들어 러시아에서도 공업이 발전하게 되어, 한편으로는 부르주아지가 대두하고 자유주의가 확산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공장 노동자의 증가에 따른 노동 운동의 발전과 혁명적인 사조들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하지만 차르의 전제 정치에는 변함이 없었고 자유주의와 혁명 운동에 대한 탄압만 점점 심해졌다. 그리하여 1차대전이 일어나자 러시아는 국내에서 고조된 혁명 운동을 잠재우기 위해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가했다. 러시아는 엄청난 인원을 동원하여 무기도 부족한 상태에서 동부 전선에 대군을 투입했다. 그 때문에 농촌에서는 노동력을 빼앗겨 식량 생산이 반감되었고 식량난이 일반화되었다. 게다가 전쟁은 시작부터 패배를 거듭했으며 교착된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물적, 인적 자원이 소모되었다. 그리하여 전쟁이 장기화되자 국내의 사회 불안이 급속히 증대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어난 2월 혁명은 급속히 전국으로 파급되어 각 지역에서 노동자, 병사의 대의 기관인 소비에트가 성립되었고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는 자유주의자를 중심으로 한 의회 다수파에 의해 임시 정부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임시 정부는 평화와 새로운 정치 체제에 대한 민중의 열망을 외면하고 질서의 회복과 전쟁 속행을 당면 임무로 삼았다. 임시 정부는 정치범의 사면,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선언했지만 토지 개혁이나 정치 체제의 변화 등은 일정에 올리지도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불안전한 상황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 해 10월 25일 (신력 11월 7일)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당(이후 소련 공산당)은 무장 봉기를 일으켜 임시 정부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권을 수립했다. 레닌은 2월 혁명이 발발하자 망명지 스위스에서 귀국하여 “전쟁 즉시 중단,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하에 볼셰비키 당을 지도했다. 그는 당시 민중의 여망이 평화에 있다는 것을 간파했고 소비에트라는 민중의 조직을 기반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수립된 신생 소비에트 국가의 당면 과제는 전쟁의 중단과 평화의 회복이었다. 평화는 전쟁에 지친 민중이 바라는 바이기도 했지만 새로 탄생한 사회주의 국가가 새로운 사회 체제의 기초를 닦는 데도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소비에트는 레닌이 기초한 `평화에 관한 포고`를 발표하면서 영토 할양과 배상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즉각 전쟁을 중단하자고 전쟁 당사국에게 제안했다. 그런데 영국과 프랑스는 이 제의를 단호히 거절하고 대신 소비에트가 계속 전쟁에 참여하기를 주장했다. 그들로서는 동부 전선에서 독일 군대를 견제하는 소비에트의 존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독일과의 전쟁에서 신생 사회주의 정권이 약화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의 반대에 부딪친 레닌은 독일과 단독 강화를 맺을 결심을 했다. 이 강화 회담 제의에 독일이 의외로 동의했다. 독일로서는 소비에트와 강화함으로써 두 개의 전선에서 벗어나 서부 전선에 전력을 총동원할 수 있고 소비에트에 굴욕적인 조건을 제시함으로써 이익을 볼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2개월 가량의 회담을 거쳐 독일은 1918년 2월 최후 통첩을 보냈다. 그 내용은 강화의 조건으로 러시아의 영토 15만 평방 킬로의 할양, 30억 루블의 배상금을 제시했다. 이 조약에 서명한다는 것은 정말로 굴욕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레닌은 서명할 것을 주장했다. 레닌은 러시아가 3년 넘게 전쟁을 수행하면서 경제가 심하게 피폐해졌고 또 지친 민중이 평화를 열망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했다. 게다가 사실 당시 러시아 군대로서는 더 이상 싸울 형편이 못 되었다. 식량, 장비 등이 형편없이 부족했고 무엇보다 병사들이 지쳐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독일과 전쟁을 계속한다면 그것은 새로 탄생한 소비에트 정권의 파멸을 가져올 것이었다. 필요한 것은 숨 돌릴 기회였다. 그러므로 적이 아무리 가혹한 조건을 제시하더라도 강화는 절실히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당 중앙위원들은 레닌의 주장에 반대했고 회담 대표인 트로츠키는 회담을 거부하고 철수했다. 그리하여 독일 정부는 군사 행동을 재개했다. 독일군은 전면적인 공격으로 소비에트 군대의 방어선을 삽시간에 돌파했다. 독일군이 진격해 들어와 수도 패트로그라드가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다. 이에 레닌은 <사회주의 조국은 위기에 처해 있다!>라는 글을 발표하여 민중의 투쟁을 호소했다. 그리하여 새로운 군대 이른바 적군이 대오를 갖추고 반격에 나서 수도가 방위되었다. 그제서야 독일군은 다시 소비에트에 강화를 요구했다. 여전히 당 내부에서는 강화 조건을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결국 소비에트의 장래를 위해 무슨 일이 있어도 조약을 성사시켜야 한다는 레닌의 주장이 채택되어 독일과 강화 조약을 맺기로 했다. 1918년 3월 15일 소비에트 대표 대회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조약을 승인했다. 이 조약의 체결로 소비에트는 정권을 공고히 하고 국민 경제를 회생시킬 시간을 벌 수 있게 되었다.
|
|
|
글터 → 사회/문화 |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제4장 생각하고 나서 행동하는 중국 - 꾸칭생(古淸生).자유기고가
9. 미국은 대만에 얼마나 더 받아먹을까
대만 정부의 독립의지가 표면화되면 될수록 대만이 미국으로부터 허용받는 그 무엇도 많아진다. 그렇지만 미국인들이 대만을 위해 얼마나 많은 대가를 지불할 것인가? 이 점에 대해서는 대만 당국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대만이 자신의 보물을 미국인들에게 맡기는 것은 큰 착오가 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미국인들이 자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맹방도 아주 쉽게 버린다는 것은 역사가 잘 말해 주고 있다. 만약에 중국 정부가 미국에게 어떤 거래를 하자는 수작을 건다면 대만은 1949년 장지에쓰와 같은 운명에 다시 처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우리들이 미국으로 하여금 우리의 존엄을 해칠 기회를 제공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미국은 이런 날을 기다리고 있지만, 이것은 단지 미국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미국이 대만을 위해 열심히 뛰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대만이 계산착오를 하여 독립을 추구해서는 결코 안 된다. 대만은 대만에서의 미국의 이익이 중국에서보다 크기 때문에 정세가 긴장되면 자기네들을 지지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대만이 이런 판단을 내린 것은 미국의 정치, 군사적 이익에 그 기준이 있다. 왜냐하면 대만이 있음으로 해서 미국이 중국의 국제적인 활동을 견제할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히 대만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대만의 존재가 미국이 중국 내정에 간섭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 준 것은 사실이지만, 견제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분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상 중국의 현대화 과정은 미국으로 하여금 이 동방거인(중국)을 직시하도록 해 주었다. 미국이 대만, 티베트 및 기타 문제에 있어서 중국을 간섭하는 것은 미국이 더이상 새로운 이슈를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다. 반대로 중국의 발전은 아시아에서 미국의 패권을 점차 억제하게 될 것이다. 미국은 그들이 아시아에서 패권을 실행하는 데 중국이 최대의 위협이된다고 보고 있다. 미국은 일본, 한국, 대만, 필리핀등 태평양 연안국에 군사기지를 건설해 놓고 있는데, 그들의 구상은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반달형 포위망을 구축해 동남아를 통제하려는 데 있다. 미국은 국제법과 중 .미 합동성명의 원칙을 지키지 않고 계속 대만에 무기를 수출하고 있다. 어쨌든 대만은 스스로 미국의 히든카드를 자처함으로써 영원히 주권을 잃게 되었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대만 당국은 현재의 경제력으로 독립을 하려는 아주 유치한 발상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정말 '눈 가리고 아응' 하는 식이다. 대만은 중국의 영토이다. 이것은 세계가 알고 미국도 인정한 사항이다. 12억의 중국 인민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대만 당국은 인민과 조국을 배반하는 것이다. 대만독립주의자이며 민진당 대통령후보인(舊明敏)의 낙선은 대만 국민들이 조국분열을 원치 않으며 분열은 민심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잘나타내 주고 있다. 미국 권력중심부의 대만 지지세력도 중국의 분열을 원치 않는다는 태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일국양체제는 아주 좋은 형태이며 중국인은 자신의 입장에 서서 외부의 간섭을 받을 필요가 전혀 없다. 미국의 보호를 원하는 것은 마치 맹수를 방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미국의 정치, 경제, 문화와 군사적인 간섭에 대해 동남아 각국들도 심기가 편한 것은 아니다. 대만은 미국을 끌어들임으로써 국지적 충돌과 동요를 야기시키고 있다. 이것은 아시아 지역국가들과 대만과의 관계에도 똑같이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서구 식민통치를 갓 벗어난 아시아 국가들 치고 어느 누가 과거 식민지시대로 돌아가기를 원하겠는가? 사실상 동서양의 경제적 차이를 야기시킨 가장 중요한 역사적 요인은 식민주의 통치였다. 서양이 동양에서 저지른 범죄는 동양 각국의 국민들이 깊이 체험한 바 있으며, 동양 각국이 경제발전을 이룩한 시기도 식민통치를 벗어난 이후부터이다. 동양 각국은 역사의 아픔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며, 대만 국민들도 일본 제국주의 때의 상처를 잊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다. 아시아 국민들은 충돌과 혼란을 바라지 않기에 서구의 군사적 침투열기가 달아오르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 앞으로의 세계형세로 볼 때 대만은 미국에 너무 많은 희망을 걸어서는 안 되며 자신이 빠져 나갈 길을 마련해 두어야 한다. 대만의 어떤 인사들은 미국과 매년 유지되고 있는 2백억 달러의 수출입액과 미국 은행에 예치되어 있는 약 4백50억 달러를 제시하면서, 미국의 대만에 대한 무역이익은 증대하며 대륙과의 무역통상보다 크다고 여기고 있는데 이것은 짧은 생각이다. 개혁개방과 시장경제의 발전에 따라 중국시장의 잠재능력은 대만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 최근 대륙시장의 수요만 하더라도 수천억 달러의 가능성을 갖추고 있다. 중국은 이미 세계 각국과 점차적으로 우호적인 무역관계를 수립해 가고 있으며, 이에 이익지상주의자인 미국도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대만은 경제무역에서 기대치를 너무 높게 잡아서는 안 된다. 중국과 미국의 이런 힘겨루기에서 대만은 미국의 카드로 이용되어 미국에 많은 이점을 안겨 주었지만, 앞으로도 늘 그럴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현재 중국의 발전속도로 본다면, 21세기에는 중국이 미국의 정당치 못한 행위를 제어할 수 있는 충분한 국제적 영향력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대만 독립주의자들도 이 점을 직시해야 한다. 반대로 대만이 통일의 길을 견지하여 적극적인 대화를 전개하여 일국양체제를 실행한다면, 한 뿌리인 중국인과 거대한 중국시장은 대만경제를 고도로 발전시켜 아주 귀중한 자원을 얻게 해 줄 것이다. 홍콩을 통한 현재의 무역으로만 보더라도 대만이 얻는 이익은 적지 않으므로 대만의 민간 상공업계도 자신들의 앞길을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이다. 곧 다가올 21세기에 미국은 대만을 위해 얼마나 더 지출할까? 미국은 중국에 대한 내정간섭을 통하여 국제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을 결코 얻지못하고 있다. 오히려 미국의 행위는 날이 갈수록 많은 국가들로 하여금 우려와 불만을 느끼게 하고 있다. 그들은 아주 당당하거나 떳떳하지도 못하며, 그들의 간섭은 국지적인 충돌과 정세의 불안만 가져을 뿐이다. 이것은 미국 자신을 포함하여 어느 누구에게도 이익이 되지 못한다. 이점에서 군사력이 아무리 강대하더라도 최후의 승리를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관건이 되는 것은 미국이 중국에서 얻을 수 있는 외교적실리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해협정책에 있어서 미국은 소위'모호전략'을 쓰고 있는데, 이것이 문제를 충분히 설명해 주고 있다. 겅리치, 돌 등과 같은 사람이 중국의 군사훈련에 대해 분노를 표시하고 있지만, 그들의 분노 속에는 다분히 그런 전략이 섞여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1996년은 미국의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이다. 대통령 선거 직전에 큰소리 치며 대중의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것은 미국 대통령선거의 전통이다. 클린턴은 지난번 부시와의 경선에서 부시가 중국에 대해 나약하며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고 비난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후의 협상과정에서는 양보가 더 많아졌다. 미국이란 국가는 대통령 선거기간 중 내뱉은 공약은 20퍼센트 정도로 삭감해서 들어야 하며,그것이 다소 논의의 여지가 있는 것이라면 더욱 깎아 들어야 한다. 만약 당신이 이런 시기에 그들의 공약과 여러 전략들을 정말이라고 믿는다면 당신은 분명히 그들의 말에 현혹당한 것이 될 것이다. 미국인들의 게임규칙은 우리와는 아주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들의 게임규칙은 유동적이며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 이런 게임에는 빠져들지 않는 것이 최선책이다. 또한 미국은 세계를 갖고 장난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그리하여 다만 제 나라 국민들이나 더이상 협심증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을것이다.
|
|
|
글터 → 명상/지혜/처세 |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댓잎 뱀장어의 삶
그는 어릴 때부터 남을 탓하기를 좋아했다. 잘 되는 일은 자기 탓이고 못 되는 일은 조상 탓이라더니 그는 무슨 일이든 잘못 되는 일이 있으면 꼭 다른 데에다 그 원인을 돌렸다. 처음 대한 입학시험에 떨어졌을 때에는 집안이 가난해서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그 흔한 과외 한번 제대로 못해 봤기 때문에 재수생이 되었다고 가난한 부모를 원망했다. 대학에 들어가서 첫사랑에 실패했을 때에도 가난이 원수라고 생각했다. 시골 농투성이의 장남이라는 사실을 알고 여자가 자기를 떠나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후 대학을 졸업하고 어느 중소기업에 취직했을 때에도, 맞벌이할 수 있는 아내를 얻지 못했을 때에도, 승진에서 번번이 누락되었을 때에도, 아이들이 지지리도 공부를 못할 때에도, 친구의 빚 보증을 섰다가 결국 아파트까지 날려 버렸을 때에도, 그 모든 원인을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데에다 두었다. 그는 갈수록 고향과 부모 형제를 싫어했으며, 자신의 환경과 처지를 한탄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불행한 일들만 연달아 일어났다. 아내가 자궁암으로 일찍이 세상을 떠났으며, 재혼한 여자마저도 남의 자식을 키우는 일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라면서 그를 떠났다. 그후 그는 세상에 자기만큼 불행한 사내는 없다고 생각하고 허구한 날 술로 세월을 보냈다. 마치 인생을 포기한 사람 같았다. 그런 어느 날, 그는 우연히 텔레비전을 통해 민물고기에 관한 다큐멘터리 한 편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어린 뱀장어에 관한 것이었다. 그때 그는 어린 뱀장어에 관해 설명하는 어느 어류학자의 말을 듣고 자신을 크게 뉘우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아무리 불우한 환경에 처해 있다고 해도 그 환경이나 처지를 탓한 것이 못 됩니다. 이 어린 뱀장어를 한번 보십시오. 심해에서 갓 태어난 이 어린 뱀장어는 태어나자마자 부모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산란을 마치면 어미 뱀장어가 곧 죽어 버리기 때문에, 어린 뱀장어만 살아서 난류를 따라 대륙 연안으로 2, 3 년에 걸쳐 긴 여행을 떠납니다. 이때 어린 뱀장어는 백색의 반투명체로, 물의 중압에 눌려 모양이 댓잎과 같아지기 때문에 이를 댓잎 뱀장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댓잎 뱀장어는 깊은 바닷속에서 태어난 자신의 환경을 결코 탓하지 않습니다. 그 못 견딜 괴로움 참아 내면서 스스로 자신의 삶을 찾아 나갑니다. 온갖 고통을 다 견디고 차차 강어귀로 찾아 들면서 몸이 볼록해지고 본격적인 뱀장어가 됩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어린 댓잎 뱀장어처럼 꾸준히 스스로의 삶을 찾아 전진하는 데에서 삶은 꽃피고 본격적인 인간이 될 것입니다.
|
|
|
글터 → 이글저글 |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
운동회나 약광고 따위의 캐치 프레이즈로 곧잘 쓰이는 이 글귀는 희랍의 시인 '유베나리스'의 글귀에서 유래된 것. '유베나리스'는 그의 '풍자시'에서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그것의 허무함을 읊고 있다. 권세를 자랑하던 '티베리우스'의 충신 '세이야누스', 웅변가 '키케로', 명장 '한니발' 등의 종말이 얼마나 비참했던가를 지적하고 또 용모의 아름다움은 도움을 받기 보다 해를 가져오는 수가 더 많다고 한다. 그러므로 가장 바람직한 것은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라는 것. 또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들인다'는 것이 아니라 그 두가지를 아울러 갖추도록 노력하기를 '유베나리스'는 권하고 있다.
|
|
|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 그림을 클릭하시면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