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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01 호
단기 4340. 1. 2 (음력 11.14) / 발행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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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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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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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남들이 당신 칭찬을 하게 하라. 당신이 제 자랑을하는 것보다 두 배나 널리 퍼질 테니까. / 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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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경제/경영/성공 |
세계를 움직이는 127대 파워 - 박태견 지음
POWER 007 지구촌 영상축제: MIP TV
해마다 5월 세계적 휴양도시 프랑스 칸에서는 할리우드의 유명스타 등 전세계 영화인이 한자리에 모여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칸영화제를 개최해, 전세계 영화팬들과 영화인들을 들뜨게 한다. 칸은 그러나 영화도시로만 유명한 게 아니다. 영화제에 앞서 매년 4월 칸에서는 또하나의 장대한 지구촌 영상축제가 열린다. 세계최대 TV프로그램 견물시장인 MIP TV 축제가 그것이다. 세계최대 규모와 최고권위를 자랑하는 MIP TV 축제에는 해마다 전 세계 주요 방송사와 독립프로덕션에서 제작된 수천여 점의 오락, 뉴스, 다큐멘타리, 교육 TV 프로그램이 빠짐없이 전시돼, 부산한 거래 끝에 각국 박송사 및 케이블 TV사로 팔려나가곤 한다. 이 자리는 단순한 거래장소가 아니다. 이 자리에 모여든 수만여 방송인들이 두눈을 부릅뜨고 세계 TV업계의 최신 흐름을 체크해 가는 치열한 첩보전쟁터이며, 다채널 멀티미디어, 대화형 TV, 글로벌 위성방송 등 첨단시대에 방송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는 방송인들의 진지한 세미나장이기도 하다. 실제로 1994년 4월 MIP 축제 때부터 주최측은 멀티미디어시대를 주제로 한 전시장 MILIA를 별도로 개장, 방송인들의 뜨거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영상제국임을 자처하면서도 자국 TV 프로를 팔려면 유럽으로 건너가야만 하는 미국이 최근 자국 내에서 필라델피아 견본축제 등을 열어 TV 견본시장의 주도권을 빼앗아 오려고 애를 쓰고 있으나 아직은 MIP의 적수가 못 된다는 게 방송계의 중론이다. 제1회 MIP TV는 전세계적으로 TV시대가 활짝 문을 연 1963년 4월, 리드 미뎀 협회Reed Midem Organization의 노력으로 개막됐다. 그 후 20여 년간 매년 봄에만 한 차례씩 개최되던 중, 1980년대 들어 세계 주요방송사가 프로그램이 지루하고 천편일률적이라는 시청자들의 비판을 수용해 프로그램 개편을 봄과 가을 두 차례씩 하기 시작함에 따라 1984년부터는 봄 축제와는 별도로 해마다 10월에 MIPCOM이라는 견본축제를 또 한 차례 개최하고 있다. 1980년 말 지구촌을 강타한 탈냉전과 정보혁명의 여파로 글로벌시대가 본격 도래하자, TV 프로 제작도 더이상 자국시장만 바라보고 할 수 없게 됐다. 미국 방송사의 경우 자체제작한 드라마 수입의 25p 이상을 수출로 벌어들이고 있다. 유럽방송사들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수출용 프로제작에 열을 올리고 있다. 현재 구미 방송사들은 드라마 제작 초반부터 철저한 해외 판매전략에 기초해M / E 분리 제작(대사와 음악, 음향 분리제작) 방식을 택하고 있으며, 해마다 MIP TV를 위시한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TV 견본시장에 빠짐없이 참여해 외국 방송사측에 집요한 판촉활동을 펴고 있다. 이같은 노력의 결과 드라마 한 편당 미국의 수출가는 최소한 편당 5천-1만 달러 선으로 한국 수출가의 10배 이상을 넘고 있다. 다른 아시아국가들도 우리와 엇비슷한 상황이어서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출범에 따라 영상 및 방송, 전파시장이 전면 개방되면 이런 역조는 더욱 심해질 전망이다. 노회한 MIP측이 이같은 흐름을 놓칠 리 만무하다. 리드 미뎀 협회는 아시아 소비시장이 장차 최고의 황금시장이 될 것이라는 판단 아래, 1994년 11월 홍콩에서 3주간에 걸쳐 MIP-ASIA 견본시장을 개최한 것을 신호탄으로 대대적인 대아시아 판촉공세에 나섰다. 이런 파상공세가 계속된다면 멀지 않은 시점에, 서울에서도 MIP 축제를 보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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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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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요구르트 한 병에 담긴 마음
내가 고등학교 일학년때의 일이다. 나는 학교에 늦지않게 등교하기 위해 아침 일찍 버스를 탔다. 그때는 고등학생들이 많은 시간인데, 이상하게도 초등학생 정도 돼 보이는 한 꼬마가 항상 나와 같이 버스에 오르는 것이었다. 초등학교까지는 십 분밖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일찍 갈 필요가 없을 텐데 말이다. 그 꼬마는 아침마다 날 보면 방긋 웃곤했다. 난 아이들을 좋아하는 편인데 왠지 그 아이는 싫었다. 부스스한 머리, 지저분한 손, 옷, 가방....... 이런 것들이 나의 얼굴을 찡그리게 만들었다. 어떤 날에는 차에 사람들이 많아서 그 꼬마가 내 옆에 서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얼른 피해 버리곤 했다. 그 꼬마가 무안해할 정도로.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 날도 버스 정류장에서 그 꼬마를 만났다. 꼬마가 내게 요구르트 한 병을 내밀었다. 나는 받고 싶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 같아 얼른 받아서 도시락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는 학교에 도착해서 그 요구르트 옆 친구에게 주어 버렸다. 그렇게 시간이 지난 어느 겨울날이었다. 그 꼬마가 며칠이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걱정이 되고, 신경이 쓰이는 것 이었다. 버스를 몇 대나 그냥 보내며 기다려 봤지만 역시 오지 않았다. 며칠 후 그 꼬마가 여윈 얼굴로 다시 나타났다. 나는 얼른 그 꼬마에게 가서 물어 보았다.
"왜 그 동안 일찍 나오지 않았니? 아팠니?" "응, 감기."
꼬마는 내가 먼저 말을 건넨 것이 너무 좋았는지 베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제서야 나는 그 아이에게 악수를 청하고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나를 더욱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 꼬마는 외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데, 교통사고로 가족을 다 잃었다는 것이다. 교통사고로 죽은 친누나가 나와 닮아서 잠도 뿌리치고 날 보기 위해 등교했던 것이다.
"진수야! 이 누나가 앞으로는 친누나 못지않게 정말 잘해 줄게! 정말 미안해."
정선미 님/울산시 울주군 범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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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99 - 앞으로의 철학은 어떻게 될 것인가?: 현대의 철학적 과제들 그때 세계에서는 1982년: 남북문제 타결을 위한 제1회 뉴델리 회의 1990년: 독일통일
옛날 그리스에는 두 갈래의 철학사상이 있었다. 그 하나는 자연세계에서 존재의 원리를 찾으려는 자연적 실제론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 마지막 사람이 기계론적 원자론을 제창한 데모크리토스였다. 다른 하나는 관념론적인 이념을 추구해가는 정신적 이론을 탐구하는 방향이었다. 그 대표적인 철학자는 플라톤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훌륭한 철학자가 나타나 이 둘을 종합하여 새로운 철학을 만들어주었다. 그래서 세계는 헬레니즘 정신을 이어받아 하나의 정신적 문화권을 만들수 있었다. 2천3백년 전쯤의일이다. 긴 셰월이 흐른 뒤 세계는 또 한번 분열과 대립의 두 철학사조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스 전통을 이어받은 고대사상과 새로 탄생된 기독교의 정신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성을 따르며 철학적인 전통을 이어가려는 스토아 철학자들 같은 이가 그 전자를 택해왔다. 이에 비하면 새로운 신앙과 철학을 가지고 등단한 기독교는 신과 신앙의 길을 개척해나갔다. 오리게네스같은 성직자로 있으면서고 이성적 신앙을 강조해 교회로부터 배척을 받는 처지에 몰리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아우구스티우스 같은 위대한 철학자가 나타나 이 두 흐름을 종합해서 새로운 총합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철학체제를 만들어주었다. 역사가들은 온갖 고대적인 것을 묶어 새로운 중세기를 정신적으로 건설해주었다고 평하고 있다. 1천5백년쯤 지난 때였다. 이렇게 이어져온 철학은 르네상스를 계기로 다시 분열되어 근대사회로 무대를 바꾸게 된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문제들이 제기되다가 마침내는 대륙적인 합리주의와 영국적인 경험주의 철학으로 이분되는 결과가 되었다. 데카르트에서 라이프니츠로 이어지는 대륙철학과, 홉스에서 D.흄으로 계승되는 영국철학으로 압축되어떤 것이다. 그러나 칸트에서 헤겔에 이어지는 독일철학자들이 나타나 이 대립되었던 철학을 하나의 방향으로 종합, 발전시킨 결과를 가져왔다. 다행스런운 일이었다. 약2백년쯤의 일이다. 독일 관념론,특히 헤겔 이후에는 다시 철학게의 다양한 분열이 일어났다. 우리가 소개한 헤겔 좌, 우파가 생겼고, 칸트에게로 되돌어가야 한다는 신 칸트학파도 탄생되었다. 거기에 가치철학 그와 더불어 일어난 삶의 철학이 탄생되었고,현상학과 실존철학, 그와 더불어 일어난 삶의 철학이 탄생되었고, 현상학과 실존철학의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대륙계통의 철학이 그런 과정을 밟아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영미계통에서는 공리주의, 실증주의를 거쳐 논리실증주의와 분석철학으로 전개되어 오늘에 이른 셈이다. 이 여러 갈래의 철학들이 마침내 두 가지 개통으로 정착되었다면,또 한번 둘을 통합한 새로운 철학의 탄생이 가능해질 수 있을까 함이 오늘 우리들의 문제로 남는다.또 한번의 세계적인 철학이 기대되는 시기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M. 하이데거는 자신이 그 책임을 감당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으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적인 결과는 그렇게 나타나지 않는다. N.화이트헤드도 그런 기대를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현대는 그 뜻을 수용하지 않고 있다. 앞으로는 어떤 개인이 종합적인 세계철학을 개척, 체계화해주는 일은 일어나기 어려울것 같다. 헤겔 때에만 해도 그것은 가능 했었다. 학문의 성격도 통합되어 있었던 시기였고, 개인의 능력이 철학계 전체를 감당할 수 있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무었인가? 어떻게 대륙적인 것과 영미적인 철학의 공통된 과제와 통일된 문제를 바견, 처리 할 수 있는가 함에 초점이 모여지는 것 같다. 인식론의 방향은 달라도 지식학의공통점은 있다든지 근본문제에는 공통성이 있을 것이 아니냐는 식의 사고인 것이다. 최근에는 오히려 그런 방향을 기대하면서 모색해보는 단계가 아닌가 싶은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도 여전히 어려운 문제가 남아있다. 현대는 옛날과 같이 철학이 학문 중의 학문이라든지, 모든 학문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지도력을 갖춘 학문이라든지, 모든 학문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지도력을 갖춘 학문이라고는 사회가 인정해주지 않는다. 과학의 분열만큼이나 철학의분열도 불가피한 시대적 상황이 된 것이다. 심지어는 철학은 우리 사회에 어떤 도움을 주고 있는가, 아니면 덜 중요한 구시대의 유산을 전해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받고 있는 현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철학도들의 고민이 아닐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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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
'시냇물'은 '실'+'내'+'물'이 합쳐서 생긴 말
'시냇물'의 의미를 모르는 분은 없지만, 그 어원을 아는 분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본래 '시냇물'은 '실'+ '내' + '물'이 합쳐서 생긴 말입니다. '실'은 '곡(골 곡)'의 뜻입니다. 아직도 고유지명에 '실'이 쓰이고 있습니다. '밤실' 등 무척 많습니다. 결국 골짜기란 뜻입니다. 거기다가 '내'는 '천(내 천)'의 뜻이고요. 그런데 이 '내’도 원래는 '나리'였었습니다. 그런데 모음 사이에서 이런 단어가 또 있지요. '세'(인간 세)를 '누리'라고 하지요. 그런데 오늘날에는 '뉘'로 쓰고 있습니다. 결국 '시냇물'은 '골짜기를 흐르는 냇물'이란 뜻입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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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인물 |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8장 화려항 명성, 처참한 최후
뇌가 온전치 못했던 전범자 - 무솔리니 / 히틀러
히틀러의 영웅인 무솔리니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독일의 히틀러는 파시즘적 독재자의 대표적 인물이며, 전범으로서의 콤비였다. 어려서부터 고집이 세고 영웅주의적 기질이 강한 무솔리니는 초등학교 때 아이들을 칼로 찔로 두 번이나 퇴학을 당했다. 고향에서 교사생활을 하다가 문란한 사생활이 들통나는 바람에 스위스로 건너간 뒤에는 10여 년간 방랑생활을 했다. 그곳에서 사회주의자로 변신하여 파업을 선동하는 등 사회활동을 벌이다가 추방당하자 프랑스로 도망가서 혁명적 쌍디카리스트들과 어울렸다. 그러나 프랑스 생활도 오래 가지 못했다. 마르세이유 파업을 선동했다는 죄로 추방되어 이탈리아로 다시 돌아와야만 했던 것이다. 그 뒤, 오스트리아에 입국해서 사회주의 신문의 편집인이 되었는데, 필화 사건을 세 차례나 일으켜 추방당해 또 다시 이탈리아로 되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주간신문 계급투쟁 을 창간하는 한편, 이탈리아 사회당의 선전활동에 종사하여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마침내 사회당 집행위원 및 당 기관지 아반티 의 편집장이 되었다. 아반티 란 전위라는 뜻이다. 그 동안 옛 제자 리체라와 동거하다가 이를 반대한 그녀의 부모를 권총으로 위협하는 해프닝을 벌이면서 결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다. 그리고 몇 차례의 투옥을 당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처음에는 참전을 반대했다가 몇 달 뒤 열렬한 참전론자로 변신했으나, 사회당에서 제명되고 만다. 이탈리아가 연합군에 가맹하자 그는 또 의용병으로 참전했다가 부상을 당한다. 대전 후, 제대 군인과 반사회주의적 분자를 규합하여 1백 50명의 단원으로 파시스트 단체를 조직하고 1921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40여 의석을 확보하여 의회 주도권을 잡는다. 서른아홉 살 때였다. 그해 10월, 50만 당원과 30만 의용병을 이끌고 로마진군 이라는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한 뒤, 수상을 비롯하여 국무, 국방장관 등 요직을 독차지하면서 파시스트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명령하는 자는 오직 나뿐이다 라고 할 만큼의 권력을 독점했다.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 이 있기까지 히틀러는 무솔리니를 몰랐다. 로마 진군 사건 후 그는 무솔리니에게 반했고 일방적인 친근감을 갖게 되었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의 일부를 옮겨 본다.
요즈음 나는 알프스 남쪽의 위대한 인물에게 매료되어 있다. 민족에 대한 그의 뜨거운 열정은 내부의 적을 용인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그들을 절멸시키고자 하는 단호함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이러한 초기의 감동 은 그의 일생 내내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히틀러는 뮌헨에 있었던 자신의 집무실에 무솔리니의 흉상을 모셔놓고 있었다. 나치스 돌격대의 갈색 셔츠는 검은 셔츠의 모방이었으며, 팔을 뻗어 치켜드는 나치스 인사법 역시 원산지는 이탈리아였다. 그 후 나치스의 국호에는 이런 것이 추가되었다. 독일의 무솔리니는 히틀러다! 그만큼 그가 닮고 싶어한 사람이 무솔리니였다. 1934년 6월, 히틀러는 독일정부 수반의 자격으로 이탈리아를 방문했다. 그러나 그를 맞은 무솔리니의 손길은 차가웠다. 중립국 오스트리아를 둘러싼 정치적 현안이 문제가 된 탓이기도 했으나 근본적인 것은 무솔리니에게 히틀러는 하잘 것 없는 존재로 여겨졌던 탓이다. 사실 독일은 패전국으로서 항복시에 약속한 전쟁 배상금조차 제때에 지불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상이라는 작자는 자신에게 홀딱 반한 오스트리아 변방 출신의 촌놈이라고 하니, 무솔리니가 히틀러를 융숭하게 대접할 이유는 당시로서는 없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탈리아가 고립되고 경제가 어려워지자 무솔리니에게 물자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그를 아주 요령 있게 다룰 줄 알았다. 히틀러는 무솔리니에게 독일의 잠재력을 은근히 과시했다. 그리고 은연중에 유럽을 둘이서 갈라 먹자고 꼬드겼다. 그 당시 무솔리니의 심경을 묘사한 좋은 자료가 있다. 무솔리니 밑에서 외무장관을 지냈던 그의 사위 치아노라는 사람이 일기에 적은 내용이다.
무솔리니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히틀러가 전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히틀러가 혼자서 전쟁을 이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그것은 그가 도저히 용인 못할 상황이었다.
아마도 무솔리니의 머릿속에서 히틀러는 여전히 촌놈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연이은 이탈리아군의 패전은 독일에게 부담만 안겨주는 꼴이 되었다. 북아프리카에서의 참패 이후 무솔리니는 가진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히틀러의 지원 없이는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알려진대로 소련이 연합군측에 가담하면서 전쟁은 보다 가파르게 진행되었고,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참패 이후 동맹군의 패배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두 독재자의 관계에도 많은 변화가 왔다. 둘이 만나면 히틀러 혼자 떠들었다. 자신의 약화된 위치를 잘 아는 무솔리니는 듣고만 있었다. 당시 목격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때로 무솔리니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 무렵부터 무솔리니의 고질이었던 위장병이 도졌다. 그는 바짝 말라갔고 걷기조차 힘든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1943년 7월 10일, 연합군은 이탈리아 남부의 시칠리아 섬에 상륙했다. 이탈리아군은 거의 저항하지 않았다. 1943년 7월 25일, 무솔리니는 실각했고, 왕을 알현한 직후 그는 체포되었다. 무솔리니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 후 어디론가 실려갔다. 그 소식을 들은 히틀러의 반응은 나는 무솔리니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위치가 확인되는 즉시 낙하산 부대를 보내야겠다. 히틀러는 그 약속을 지켰다. 1943년 9월 12일, 무솔리니는 크랜 사쏘에서 극적으로 구출되었다. 구출된 다음 그는 살로 공화국의 수반이 되었다. 무솔리니는 히틀러에게 치사했다. 그에게 힘을 주고 있는 것은 오직 히틀러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겉으로만 우정을 가장하고 속으로는 그를 신뢰하고 있지 않았다. 1945년 4월 초에 이르자 소련, 영국, 미국 등의 연합국 군대가 북부 이탈리아에 최후 공격을 전개했다. 무솔리니도 최후 반격을 개시했다. 그리고 그는 파시즘이 탄생한 밀라노로 향했다. 추종자들은 벌써 몇 명 남지 않았고 끝까지 함께 한 사람은 정부 클라라 페치타뿐이었다. 독일군 복장으로 위장하고 스위스로 망명하려다가 이들은 돈고에서 빨치산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들이 총살당한 것은 1945년 4월 28일, 오후였다. 무솔리니와 클라라 페치타의 시체는 그 다음 날 밀라노 광장 한복판에 거꾸러 매달려졌다. 이틀 뒤 히틀러도 자살해 버림으로써 마침내 유럽에서의 전쟁은 종결되었다. 1939년 당시 56세로 기력이 최고조에 오른 무솔리니는 노출광적인 히스테리의 특징을 거침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카니발의 시저같이 베니스의 광장과 로마를 행진했다. 군복을 입고, 머리를 빡빡깎고, 턱을 내밀고 노기를 띤 눈을 굴리면서 도전적인 자세를 취한 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게 했다. 스위스와 네덜란드의 의사들은 알고 있었다. 그의 병명은 신경매독이었다. 매독은 으뜸가는 환각성 뇌병이라고 한다. 무솔리니와 히틀러, 두 사람의 정신은 이미 온전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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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55. 배반당한 민족 자결주의
1919년 3월 1일 경성의 집집마다 이른 아침부터 독립 선언서, 독립 신문 등이 배포되었고 시내 곳곳에는 전단이 뿌려졌다. 오후가 되자 파고다 공원으로 중학교 이상의 학생들이 점차 모여들기 시작했으며 시민들도 합세했다. 집회 연단 위로는 꿈에도 그리던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으며 학생 대표가 <독립 선언서>를 낭독했다. <독립 선언서> 낭독이 끝나는 것을 신호로 “대한 독립 만세”의 함성이 퍼져 나갔다. 일제의 무단 통치 10년의 쇠사슬을 끊어 내려는 조선 민중의 염원이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삼일운동은 5월 말까지 전국으로 퍼져 나가 천여 회의 시위 행진에 200만 명 이상이 참가했다. 비록 이 운동이 군대와 경찰의 총칼을 동원한 일제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지만 조선 민중이 살아 있음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일제도 이른바 문화 정치라는 좀더 유화적인 통치 방식으로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삼일운동은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에 영향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 1918년 1월, 전후 처리의 원칙으로 천명된 윌슨의 `14개조`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민족 자결주의의 실제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제국주의 국가들간의 전쟁이자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세계 대전이었던 제1차 세계 대전은 전쟁으로 인한 엄청난 피해 못지않게 국제 질서의 변동을 가져왔다. 패전국인 독일의 몰락은 말할 것도 없고 영국조차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대신 그 자리를 미국이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대전중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은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탄생시켰다. 그런데 이렇게 탄생한 소련은 기존의 제국주의 국제 질서를 부정하고 사회주의 혁명과 식민지 민족의 해방을 주장했다. 이러한 전쟁의 승리와 패배, 러시아 혁명으로 인한 국제 질서의 변동은 자연히 약소 민족의 독립 의지를 고양시켰다. 이러한 변화의 목전에서 새로운 전후 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원칙으로 천명된 것이 윌슨의 `14개조`이다. 이것은 1918년 1월 8일 미국 의회에서 발표되었는데, `비밀 외교의 폐지`, `공해의 자유`, `민족 자결주의`, `무병합무배상`등의 원칙과 함께 국제 평화를 유지할 기구로 국제 연맹의 결성을 주창하고 있다. 이 14개조는 전쟁중에 수립된 소련의 평화 공세와 민족 자결 원칙에 대항하고 연합국의 동요와 전쟁에 수립된 소련의 평화 공세와 민족 자결 원칙에 대항하고 연합국의 동요와 전쟁에 대한 협력을 끌어내기 위해 급하게 발표된 것이었다. 하지만 전쟁에 지친 전 세계의 민중과 독립을 염원하는 약소 민족들은 윌슨의 주장에서 평화와 독립에 대한 한 줄기 희망을 보았고 그것을 열렬히 환영했다. 하지만 이 희망은 좌절과 배신감으로 바뀌었다. 이 `14개조`의 시험대는 파리 강화 회의였다. 독일의 항복(1918. 11)으로 끝난 전쟁의 뒷수습과 평화를 위해 1919년 1월 18일 27개 전승국이라 하더라도 약소국은 본회의에서 제외되었으며 또 실제로 회의를 주도한 것은 미, 영, 불 3국 대표인 윌슨, 로이드 조지, 클레망소였다. 이 파리 강화 회의의 주된 의제는 러시아 혁명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신생 소련을 봉쇄하는 것이었으며 패전국 독일에 전쟁의 책임을 지우는 것이었다. 미국이 연합국 승리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과 14개조 발표로 인한 윌슨의 국제적 인기로 인해 당연하게도 파리 강화 회의를 이끌었던 것은 윌슨이었다. 하지만 그의 고매한 이상주의적인 원칙은 현실이라는 거대한 장벽에 부딪치게 되었다. 먼저 비밀 외교의 폐지는 영국을 필두로하여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 연합국이 대전중에 맺은 영토나 세력 범위 분할에 관한 비밀 조약과는 대립되는 것이었다. 또 무병합 무배상 원칙도 독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을 받아 내고 영토마저 빼앗으려는 영국, 특히 프랑스의 의도와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 세계 약소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을 불러일으켰던 민족 자결주의도 동유럽과 발칸 반도 등 이전에 패전국의 영토였던 곳에서만 적용되었고 그것도 열강의 이해 관계에따라 왜곡되어 적용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완전히 해체되어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로 나뉘어졌고 연합국에 참가했던 세르비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등을 합병했다. 터키 제국도 붕괴하여 이전의 광대한 영토를 잃어버리고 현재의 모습으로 축소되었다. 반면 패전국의 해외 식민지는 위임 통치제라는 기만적인 방식으로 처리되었다. 이 위임 통치제는 명목상으로는 식민지 주민을 교육하여 궁극적으로 민주주의적인 자치 정부의 수립과 독립을 달성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했지만, 실상은 승전국들이 패전국의 식민지를 나누어 가진 것에 불과했다. 이 방식에 따라 독일의 동아프리카 식민지는 영국에, 서남아프리카는 남아연방에, 카메룬과 토고란드는 각각 영국과 프랑스에 귀속되었다. 태평양에 있는 독일 식민지들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일본에 맡겨졌으며 중동의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타인은 영국에, 시리아와 레바논은 프랑스에 귀속되었다. 더구나 강화 회의 조약에는 승전국이었던 중국의 경우, 이전에 독일이 강점했던 산동 반도 및 그곳의 철도, 지하 자원, 해전 전선 등을 일본의 소유로 한다는 결정까지 들어 있었다. 이것은 중국 민중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으며 민중의 분노는 5,4운동으로 불타올랐다. 이렇듯 아시아, 아프리카의 피억압 민족들이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에 걸었던 기대는 완전히 배신당했다. 사실 윌슨의 이상주의적 외교 원칙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해 관계라는 현실의 벽을 뚫기에는 너무나 추상적이고 철저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후 식민지 민중들이 새로운 질서의 국가인 소련으로 눈을 돌린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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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제4장 생각하고 나서 행동하는 중국 - 꾸칭생(古淸生).자유기고가
8. 필요하다면 제2의 사담 훗셰인을 만들 수 있다
권투선수인 타이슨이 감옥에서 이슬람교에 귀의했다는 뉴스 따위는 세계를 그다지 놀라게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타이슨은 모두가 알고 있듯이 다소 행실이 불량하기 때문이다. 더 솔직히 말하면, 이 아이가 더욱세상을 놀라게 할 일을 벌였다 하더라도 우리는 뜻밖의 일이라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저 그의 시합이나 관람하며 그의 매서운 펀치가 상대선수의 머리통을 날리는 것을 즐길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국가적인 차원일 때는 다르다. 미국은 중동에서 힘을 키워가며 점차 이슬람 국가의 맹주로서의 역할을 계속해 나가려고 한다. 타이슨의 주먹이 우리를 놀라게는 하지만 그보다 더한 근심과 걱정을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걸프전에서 미국이 서구연합국과 아랍국가들을 거느리고 미사일을 퍼부으며 사담을 공격하는 장면을 보았다면, 우리는 결코이 장난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이미 예전에 울렸던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전에 미국이 월남전을 포기했을 때 카터 대통령은 이스라엘과 이집트를 캠프 데이비드까지 불러 평화합의서에 서명하게 하고 미군을 시나이사막에 진주하게 했다. 캠프 데이비드에 있는 동안 아랍국가들은 아직 미국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은 이집트가 배반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그들의 원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이스라엘의 배후에는 미국이 있었다. 10월전쟁 및 기타 모든 모슬렘 진영과이스라엘 간의 전쟁은 모두 미국이 선진군사무기로써 이스라엘을 지원했다. 반면 모슬렘 진영의 무기는 기본적으로 구소련에서부터 들여온 것이다. 모슬렘과 이스라엘 사이의 모든 전쟁은 전적으로 미 .소 양국의 무기실험장과 시합장이었던 것이다. 시간은 점점 흘렀다. 1980년 이란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후 카터는 '어떤 외부세력이든 페르시아만 지역의 통제권을 얻으려는 기도를 한다면 모두 미국의 국익에 대한 침범으로 간주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하고 이어 중동에 긴급파견단을 보냈다. 레이건 대통령은 백악관에 들어온 후 이 긴급파견단을 미국중앙사령부 휘하에 배속하여 중동지역에서 미국의 군사역량을 유럽과 동아시아에 주둔한 군사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아쉬운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 후에야 비로소 미국이 군대를 중동에 파견했다고 알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미국은 이때에 비로소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며. 사담은 단지 기회만 제공한 것이다. 미국의 중동주의는 캠프 데이비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땅콩농장 출신의 카터가 뿌린씨앗은 부시 때에 와서야 결실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중동에서 둘도 없는 친구가 이스라엘임을 잊지 않았다.걸프전 기간중 이스라엘은 사담의 스커드미사일 공습을 수차례 받았다. 격분한 이스라엘은 반격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분노는 미국에 의해 사그러들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분노가 미국인 자신들이 고심해서 짜놓은 국면을 망칠까 겁이 났다.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의 F-16전투기에 방공식별기를 제공하지 않았으며, 아울러 이스라엘 전투기가출격한다면 연합군으로부터 발사된 미사일에 피격당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이스라엘은 하는 수 없이 화를 삭이며 관전만 하게 되었다. 걸프전 이후 페르시아만 일대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증가되었 다. 이슬람 전사들을 분노하게 한 것은 미국이 이 틈에 사우디아라비아 및 그 주위 부족국가들의 상비군사력을 확충시켰으며, 페르시아만 일대 에 미해군 제5함대를 주둔시켰다는 점이었다. 세계에서 중동은 미국이 군사배치를 계속해서 강화시키고 있는 보기 드문 지역이다. 사실 이는 조금 우스꽝스러운 결합이었다. 모슬렘세계의 정치이념과 인문정신은 미국과 현저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백악관은 일직이 독재정치에 대해 일격을 가하면서도 공포주의를 불러일으켰다. 미국도 모슬렘의 진정한 친구는 아니다. 미국의 미사일이 이스라엘 상공에서 발사되어 그들의 영토에 떨어진 일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뜻밖에 동맹을 맺었으며 미국은 아랍국가를 영도하는 새로운 길에 들어섰다.
미국은 쉬지 않고 중동동맹국과 이스라엘을 주물렀다. 미국은 양쪽에 대해 호의적 관계를 유지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외에 미국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두 국가는 바로 이라크와 이란이다. 이 두 나라는 원래 서로 적대국이었지만 이제는 함께 미국에 대항한다. 미국이 중동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정말 알 수가 없다. 최근 미국은 적대국 이란을 거쳐 관계 이슬람단체에 무기를 넘겼다. 미국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은 나라다. '박애, 공정' 따위를 표방하는 배후에 대단히 큰 야심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19세기 이후 '3대 제국'의 단계를 거쳤다. 첫번째로 미국은 식민통치에서 막 탈피한 신흥국가에 대한 통제를 거쳐 점점 자신의 영향력을 전지구로 확산시켜 나갔다. 아메리칸 제1제국은 1898년 유럽 .미국의 전쟁 이후에 형성되었다. 당시 미국은 쿠바,푸에르토리코, 필리핀,카리브해를 강탈하였다. 이 제1제국은 2차대전 이후까지 계속되었다. 1945년부터 1989년까지의 아메리칸 제2제국은 서구와 아시아의 소위 최전선국가를 중심으로 삼았다. 현재 미국은 냉전 이후, 이전에 그들과 적대관계에 있던 세력권 내에서 종주권을 확보했다. 소련의 해체는 미국의 군사패권지역을 동구와 이전에는 중립이었던 남슬라브로까지 확산시켰다. 미국은 중동문제에 더 깊이 개입하게 되었다. 미국은 의외로 중동 사막지대에서의 세력범위를 확정지었다. 어떻게 이 왕권 독재국가의 실권자들이나 국왕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는가? 모슬렘 형제들 속에서 어떻게 그의 조로아스터교의 흔적을 씻을 수 있었을까? 백악관은 이곳에서 한판 도박을 벌이려 하고 있다. 앞으로의 미국은, 중동지역에서도 월남에서와 같은 결말을 볼 것인가? 미국은 과연 진정으로 모슬렘에 귀의하여 이곳에는 결코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옮겨다놓지않을 것인가? 만약 필요하다면 그들은 중동지역에서 또다른 사담 후세인을 만들어 내지는 않을까? 미국의 중동문제 개입은 진정 그들이 말하는 지역균형을 실현하기 위해서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대답은 사실 '패권'이라는 두 글자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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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사과 세 개의 축복
눈이 내린 날 저녁이었다. 발목까지 푹 빠질 정도로 내린 함박눈에 어둠조차 환히 밝게 느껴지는 그런 날이었다. 그녀는 퇴근길에 집에서 기다릴 아이들을 생각하고 평소 단골로 다니던 한 과일 가게로 들어갔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새해가 되었으나 아이들에게 뭐 하나 제대로 사준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서 오세요."
늙스그레한 주인 남자가 그녀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녀는 이것저것 생각할 것도 없이 사과 3천 원어치를 달라고 했다. 그러자 주인이 말했다.
"아예 한 상자 들여놓으시지요. 상자로 먹으면 2천 원 정도 싸게 먹힙니다."
그녀는 망설였다. 무작정 사과 한 상자를 들여놓았다가 가난한 가계에 혹시 금이 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그때 20대 청년 한 사람이 가게문을 열고 들어왔다.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는지 청년의 머리에 눈송이가 몇 개 앉아 있었다.
"아저씨, 아까 여기서 사과 몇 세 개를 사 가지고 갔는데, 가다가 미끄러져서 사과가 으깨져 버렸어요. 어떻게, 죄송스럽지만, 좀 바꿔 주셨으면 합니다. 실은 오늘이 어머니 제삿날이라 제상에 놓으려고 사과를 샀는데, 이렇게 되고 말았거든요. 다시 천 원어치를 사면 좋겠지만, 제 처지가 그럴 형편이 못 돼서, 아저씨, 어떻게 좀 안 될까요?"
청년은 몹시 겸연쩍어 하면서 주인이 꼭 좀 그렇게 해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눈빛이었다. 그러나 평소에 마음이 퍽 좋아 보이던 주인 남자는 의외로 청년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내가 뭐, 집 팔아가면서 장사하는 줄 알아? 그런 사과를 남한테 어떻게 팔란 말이오?" "저도 잘 압니다. 제상에 놓을 게 아니고 그냥 제가 먹을 거라면 굳이 이런 부탁을 드리지도 않습니다. 좀 힘드시더라도 다시 한번 생각해 주세요." "허허, 이 사람, 내가 남 좋은 일 시키려고 이 나이에 이 고생하는 줄 아시오?"
청년은 낭패한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으깨어진 사과를 든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때 그녀가 선뜻 입을 열었다.
"아저씨, 내가 사과 한 상자 살께요. 그 상자에서 가장 좋은 걸로 세 개를 골라 저 청년에게 주세요. 우린 아이들과 먹을 거니까 조금 상처난 부분이 있어도 괜찮아요."
그녀는 처음 마음먹은 것과는 달리 가장 때깔 좋은 부사 한 상자를 샀다. 주인 남자가 그녀 말대로 가장 잘 생긴 부사 세 개를 꺼내 청년에게 주고, 청년이 갖고 있던 으깨어진 사과를 상자 속에 넣었다. 그러자 청년이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감격한 어조로 말했다.
"아주머니, 정말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은혜는 무슨, 학생도 복 많이 받아요." "네, 고맙습니다."
청년은 다시 한번 허리 굽혀 인사를 하고 가게문을 나섰다. 그녀는 어두운 골목 끝으로 급히 사라지는 청년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지금까지 그처럼 진실된 축복의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자기가 그 청년한테 해준 것을 돈으로 따지면 몇백 원도 되지 않지만, 그 청년은 자기에게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중요한 것을 주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저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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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 아틀라스
'제우스'신이 거인신 '타이탄'족을 멸하고 전세계의 통치권을 장악했을 때 거인신의 하나인 '아틀라스'로 하여금 하늘을 버티고 있게 했다. 하늘은 무게가 없을 것 같아 보이지만, 물리학에서도 배우듯이 대기의 압력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어서 '아틀라스'는 있는 힘을 다하여 버티고 있다. 때로는 하늘 대신 지구 전체를 버틴다고 생각하여 지구를 '아틀라스'라고 하게 되었다.
한편 '아틀라스'가 있는 곳은 이 세상 서쪽 끝의 바닷가라고 했는데, 차츰 서쪽의 지리가 밝혀짐에 따라 '아프리카' 서북단에 솟아 있는 '아틀라스'산맥을 그 거인의 상징으로 보고 그렇게 이름짓기도 했다. 다시 그 산 바깥 쪽의 바다 즉 대서양은 '아틀라스'의 바다라하여 '아틀란틱 오션'이라 부르게 되었다.
'타이탄'신은 이 세상이 처음 시작될 때 하늘 '우라노스'와 땅 '가이나' 사이에서 태어난 원시신인데, 그들의 우두머리 '크로노스'는 아버지 '우라노스'를 몰아내고 세계의 지배권을 장악하지만 후에 그의 아들 '제우스'에게 쫓겨나고 만다.
'아틀라스', '타이탄'은 미국의 대륙간 탄도탄의 이름으로도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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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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