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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99 호
4339.12.31 (11.12)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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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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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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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날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사람이 기어가라는 말에따르지는 않을 것이다. / 헬렌 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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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경제/경영/성공 |
세계를 움직이는 127대 파워 - 박태견 지음
POWER 005 글로벌 뉴스 왕국: CNN
평소 성격이 급하고 변덕스러운 테드 터너(56)가 지난 1980년 6월1일 전재산 1억 달러를 탁탁 털어넣어 미국 애틀란타에서 세계방송사상 최초로 24시간 위성뉴스 유선방송 CNN(Cable News Nstwork)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이 방송은 세계방송계의 비웃음거리에 불과했다. ABC, NBC, CBS 등 기존의 미국 3대 공중파 방송에 비해 방송베테랑들의 숫자가 턱없이 부족하고 급료도 낮았으며, 방송장비 역시 기자들이 보내온 화면을 간신히 짜집기할 편집기 24대와 송수신 안테나 7개가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뉴스 전문반송은 절대 성공할 수 없다는 기존 방송계의 고정관념도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당시 미국 방송인들은 CNN을 'Chicken Noodle Network(닭고기 국수집)'이라고 조롱하며 테드 터너의 파산을 확신했다. 그러나 일반대중의 마음속에 잠재해 있던 강한 정보욕과 지성에 승부수를 던진 CNN은 방송 시작5년 후에 흑자로 돌아서는 폭발적 급성장을 했다. CNN은 특히 1986년 1월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공중에서 폭발하는 충격적인 장면을 생중계로 독점보도한 것을 시작으로, 1989년 중국 천안문광장의 민주화운동과 베를린 장벽 붕괴, 1991년 초 걸프전 당시 미국의 이라크 공습, 잇따른 소련군부의 쿠데타와 옐친의 탱크 위 항거 장면, 1993년 옐친의 러시아의회 포격장면, 1994년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의 평양방문 등 생중계 특종을 잇따라 보도함으로써 미국 3대 방송을 위협하는 세계적 미디어로 초고속성장을 거듭했다. 금세기 최대의 방송신화인 CNN신화가 완성된 것이다. 생생하면서도 신속한 현장보도로 CNN의 존재가치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식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다. 1991년 1월 걸프전 때 조지 부시 당시 미국대통령은 "CIA(중앙정보국)보다 CNN에서 얻는 정보가 더 많았다"고 토로했으며, 쿠바의 카스트로 국가평의회의장은 터너 회장과 만난자리에서 자신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CNN을 보는 열렬한 팬이라고 말했다. 1989년 12월 미국의 파나마 침공 당시에는 소련 외무부가 공식 외교통로가 아닌 CNN 모스크바 지사를 찾아가 CNN 모스크바 지사를 찾아가 CNN 카메라 앞에서 미국에 대한 비난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또 1991년 미국의 바그다드 폭격 당시 사담 후세인 이라크대통령은 CNN만 바그다드에 남아 그 참상을 촬영토록 허용했고, 1994년 카터의 방북 당시에도 북한의 김일성주석은 CNN에게만 동행취재를 허용했다. 현재 미국 국내 및 전세계에 29개 지국을 운영할 정도로 덩치가 커진 CNN의 정보수집력 또한 웬만한 국가의 중앙정보기관을 능가할 정도로 신속정확하다. 한 예로 CNN은 북한당국이 1994년 7월8일 정오 김일성주석의 사망소식을 발표하기 30분 전에 이미 이 사실을 알고 긴급 비상취재에 돌입했다. 당시 한국의 국가안전기획부가 북한방송 발표를 듣고서야 비로소 이 사실을 알았다는 점과 비교하면 CNN의 취재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미국 내 뉴스를 주로 다루는 CNN, 국제뉴스 중심의 CNN 인터내셔널 등 시청자층을 특화한 4개의 뉴스 전문채널을 가동중인 CNN은 1993년 말 현재 연간 1억 5,000만 달러를 벌어들이고 있다. 방송 시작 첫해에 170만 명에 불과하던 유료가입자 숫자도 지금은 전세계 95개국의 7,500만 가구에 달할 정도로 그 덩치가 커졌다. 또 전세계적으로 지명도도 크게 높아져 애틀란타에 위치한 CNN 본사는 매년 5만여 명의 전세계 관광객이 입장료를 내고 들어와 뉴스제작 현장을 지켜보는 유명관광지가 됐다. 현재 전세계 29개 지국간에 자체 컴퓨터 네트워크를 구축할 정도로 최첨단 장비로 무장하고 있는 CNN은 1995년부터 전세계 상공에 띄워 올릴 15개의 자체 방송위성을 이용해 한층 촘촘한 전파 지구촌을 구축할 계획이다. 얼마전 세계적 배우이자 환경운동가인 제인 폰디와 결혼해 세계 호사가들의 관심을 모으기도 한 터너 회장은 그 자신이 진보적 평화운동가 겸 환경보호운동가로도 명성이 높다. 그는 현재 자신의 방송망을 통해 수많은 생태보호 프로그램을 방영중이며, 1980년대 말에는 동서냉전 해소를 위해 미국정부의 눈총을 무릅쓰고 모스크바에서 친선경기를 개최하는 등 나름대로 지구촌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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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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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텅빈 기차역에서 울고 있는 소녀
나는 조그만 간이역을 지나칠 때마다 십육년 전 그날을 떠올린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일학년 꼬마였다. 당시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자주 이사를 가야 했던 탓에, 그때마다 학교를 옮겨야 했다. 그렇지만 나는 전학하지 않고 경기도 연천에서 대광리에 있는 학교에 가기 위해 매일 기차를 탔다. 집에 돌아오는 시간은 매일 같아서 어머니는 늘 역으로 마중을 나오셨다. 그런데 하루는 학교에서 친구랑 놀다 늑장을 부리는 바람에 기차를 놓치고 말았다. 한번 기차를 놓치면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던 때였다. 집에 연락할 방법도 없었기 때문에 그 텅빈 플랫폼에서 난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울고 서 있는데 역장 아저씨가 다가오시더니 다음 기차를 타고 가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역에서 걱정하며 기다리실 엄마와 다음 기차가 올 때까지 혼자 기다려야 한다는 막막함에 난 계속 울먹였다. 아저씨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시다 잠깐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누군가를 부르셨다. 잠시 뒤 내 눈앞에 시커먼 열차 한 대가 섰다. 그 기차는 무연탄을 실어 나르는 화물 열차였는데, 연천 역에서 서지 않고 곧장 달리는 모습을 종종 본일이 있다. 역장 아저씨는 한 아저씨에게 사정을 얘기하시며 나를 데려다 주라고 말씀하셨다. 그날 나는 얼굴에 잔뜩 석탄가루를 묻히고 울지 말라며 역장아저씨가 준 껌 몇 개를 꼭 쥔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내 기억 속엔 항상 그분들에 대한 고마움이 잊혀지지 않는다. 어린 나에게 그런 수고를 해 주신 역장 아저씨와 두 기관사 아저씨, 지금도 내 고향 연천의 작은 역에서 먼 기적 소리를 내며 달리고 계실까.
김미애 님/부산시 남구 용호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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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97 '인간의 본질은 행위에 있다': 프래그머티즘의 대성자 J.듀이(1858-1952) 그때 세계에서는 1918년: 윌슨, 14개조 강령을 발표(민족자결주의포함): 제1차 세계대전 끝남 1919년: 한국, 임시정부 발족: 독일노동당(나치)결성
퍼스가 프레그머티즘의 논리적 과제를 제시한 사람이며, W.제임스가 그 기초를 놓아 준 철학자였다면, 실용주의 철학을 가장 미국적인 사상으로 발전시켜준 철학자는 존 듀이였다고 보아 좋겠다. 그는 90세까지 왕성하게 철학적 업적을 쌓아올렸다고 보아 좋겠고. 그의 학설은 그가 생존해 있는 동안 가장 광범위한 영향을 아메리카에 남겨주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서구의 철학자 중에서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아들인 사람은 듀이였다고 보아도 잘못이 아닐것이다. 그의 새로운 교육이론은 미국을 통해 한국 교육계까지 영향을 남겨주었다. 사실 최근까지 우리는 교육의 철학적 이론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해방 후에도 일본의 사범학교 출신 인물들이 우리 교육계를 장악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해방과 더불어 새 교육이라는 명목밑에 수용하게 된 교육이론이 듀이의 실용주위 교육 사상이었던 것이다. 서울대 총장을 지낸 장이욱, 이화여대 총장을 계속 맡아왔던 김활란, 교육계의 원로인 오천석 등이 모두 직접 듀이의 강의에 참여했고, 그 영향을 전수해준 사람들이다. 물론 듀이의 철학 자체는 늦게 전달되었다고 해도 미국의 실용주의적 전통과 사상적 영향을 크게 우리 사회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철학의 문제를 그 핵심에서 취급하는 사람들은 듀이의 철학을 도구주의라고 부른다. 많은 과거의 철학자들은 지식은 진리이기를 바라며 진리로서의 지식은 그 지체가 목적인 듯이 생각했다. 그리고 그 찾아진 진리로서의 학문과 삶의 목표이거나 목적인 듯이 여겼다. 또 진리를 따라 행동하며 진리에 의거해서 삶을 이끌어가야 한다고 쉽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듀이는 그런 전통을 완전히 바꾸어놓은 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행위에 있다. 알기보다도 행하는 것이 숨김없는 삶의 본성이다. 행동에서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묻는다. 그 물음은 과거의 행동이 아니고, 미래를 개척해가기 위한 행동이며 앞을 열어가기 위한 행동인 것이다. 그 행동을 돕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묻는 사고하게 되는 것이다. 그 사고가 정리되고 쌓여 지식이 되고, 그 지식은 행동의 필요성 여하에 의해 비중이 달라진다. 이렇게 본다면 지식에서 지식으로 이어지는 길을 택했던 것은 잘못이고, 행동에서 행동으로 이어지는 삶의 과정에서 행동을 돕기 위한 지식이 필요해지는 것이다. 지식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수단과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행동을 통해 삶의 폭을 넓히게 되면 지식은 능동적이고 효율적인 삶에 보탬이 되는 수단과 방편인 것이다. 아마 이런 철학은 과거에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이론이다. 로고스보다는 파토스를 앞세우며, 지식과 사고는 의지의 소산과 수단이라는 쇼펜하우어나 니체의 철학은 있었어도, 지식이 행위의 도구라는 학설은 거의 나타난 적이 없었다. 이렇게 행위를 위한 지식이라면, 그 지식은 의도하고 소망했던 목적에 접근할 있고 도움이 될때 그 가치를 인정받으며, 행위 를 돕지 못하면 행위의 목표와 어긋나는 지식은 그 유효성과 타당성을 인장받지 못한다. 그가 "우리의 지식은 도구다. 모든 도구가 그러하듯이 그 가치는 도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작용의 능력, 즉 사용된 결과에 있어서 나타나는 유효성이 있는 것이다" 고 말하는 뜻을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다. 이러한 철학은 막연했던 경험주의를 과학적 실험주의로 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는 것이며, 개인의 행위가 사회적인 행위 및 삶과 연결되면서 자연히 프래그머티즘의 교육 및 사회적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이다. 그의 (인간 본성과 행위) 는 우리 주변에서도 읽히고 있었다. 사회심리학적 면에서 인간의 사고외 행위의 관계를 분석한 내용의 책이다. (탐구의 이론) 도 실험주의적 논리학의 정식화 를 성공시킨 내용이다. 가치론을 행동의 이론으로 과학적 해석을 시도한 (평가의 이론)도 주목할 만한 저서들이다. 이러한 성격의 철학이 유럽 철학의 전통성을 고수하는 철학에 비교한다면 얼마나 미국적인 행동주의를 강화시켰을 것인가 짐작 할 수가 있다. 누구나 미국을 가리켜 변화가 빠르면서 발전이 앞서는 사회라고 말하는 것도 이러한 철학의 원리에서 나온 것이며, 미국의 정치, 경제, 심지어는 과학과 기술은 물론, 기계주의 분명을 앞당기는 데도 이런 행동주의 원칙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듀이와 그의 후계자들을 끝으로 순수한 미국적 철학은 일단 끝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이제부터의 미국철학은 미국적 것과 동시에 영미적인 것이며, 다시 나아가 세계적인 철학과의 관련이 깊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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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
'결혼하다'와 '혼인하다'는 본래 다른 뜻이었습니다
오늘날 '결혼하다'와 '혼인하다'는 동일한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즉 marriage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결혼하다'와 '혼인하다'는 다른 뜻이었습니다. 즉 '혼인하다'는 오늘날 쓰이고 있는 것과 같은 의미였지만, '결혼하다'는 다른 뜻이었습니다.
'철수가 복동이와 결혼하였다'란 말을 쓸 수 있었습니다. 이 문장의 의미는 '철수'의 자손과 '복동'의 자손이 '혼인'할 것을 결정하였다는 뜻이었습니다. 따라서 남자와 남자, 그리고 여자와 여자끼리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어에서는 '결혼하다'가 오늘날 남녀 혼인의 뜻으로 쓰이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 국어에 들어 온 것입니다. 그래서 예식장에 '결혼예식장'과 '혼인예식장'이란 명칭이 다 보이지요?
'혼인하다'란 뜻은 '혼'은 '신부집'을 말하고 `인'은 신랑집을 말한 데에 기인합니다. 옛날에 혼인을 할 때에는 신랑이 '혼' 즉 신부집으로 먼저 가서 예식을 올립니다. 즉 '장가'(장인의 집)를 가지요. 그리고 사흘 뒤에 신부를 데리고 '인'(즉 신랑집)으로 옵니다. 즉 신부는 '시집'을 가지요. 그래서 '장가가고 시집간다'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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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사회/문화/인물 |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8장 화려항 명성, 처참한 최후
부왕에게 살해 당한 슬픈 영혼 - 소현세자 / 사도세자
소현세자 왕위가 보장되고 있던 소현세자와 사도세자는 피우지 못하고 저 버린 꽃망울처럼 그렇게 세상을 떠나야 했다. 다름아닌 부왕의 손에 의해서. 그들은 왜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해야 했으며 조선의 임금, 인조와 영조는 왜 아들을 죽여야 했던가?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죽음이다. 소현이 인조의 맏아들로 세자에 책봉된 것은 열세 살. 당시 조선은 대명 사대주의의 길을 걸으며 공공연히 명나라를 후원하였고 후금과의 전쟁에서 패퇴한 명나라 장수와 군사들을 보호함으로써 후금을 자극하였다. 후금은 여진족 누루하치를 추장으로 하여 1610년에 일어난 나라이다. 광해군 때는 중립 외교노선을 취하므로 위험한 전란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그가 폐출되고 인조가 집권하자 그는 대북파 인사들의 숙청을 단행하고 곧바로 친명배금 정책을 실시하였다. 3년 뒤 후금은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해 정묘호란을 일으켰다. 국호를 청으로 바꾼 뒤 또 그들은 군사 12만을 이끌고 쳐들어와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인조는 남한산성에 갇힌 지 45일 만에 항복하고 나와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었다.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청나라와의 군신관계를 맺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게 된다. 인조는 이처럼 굴욕과 고통으로 24년간을 왕위에 있었다. 한편 인질로 잡혀온 소현세자는 8년 동안 심양에 머무르면서 단순한 인질이 아닌 외교관의 소임을 도맡아 청이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하면 담판을 짓거나 막기도 했다. 때문에 청은 조선과의 문제를 소현세자와 해결하려 들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조선의 왕권이 둘로 나누어지는 양상을 가져오게 했다. 게다가 인조의 총비 조소용은 세자빈과 사이가 좋지 않아 세자를 백방으로 모함하였으며, 김자점은 사돈간인 조소용과 결탁하여 그가 잠도역위(왕위쟁탈)을 꾀한다는 모함으로 부자간을 이간시켰다. 소현세자는 그곳에서 왕족들과 친교를 맺으면서 양국간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노력하며 청군을 따라 북경에 들어가 70여 일을 머물면서 천문대를 찾아보는 등 역법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독일인 신부 아담 샬과 사귀면서 서양문물에 대해 눈을 뜨고 천문 수학 천주교 서적과 여지구 천주상 등을 선물로 받아들고 1645년 그는 귀국하게 된다. 그러나 인조는 소현세자가 철저한 친청주의자가 되어 돌아왔다고 박대하면서 그가 가져온 서양문물조차 쳐다보지 않았다. 이는 국가의 문화적 전기를 마련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실기한 것으로 역사는 평가하고 있다. 세자는 부왕 앞에서 서양의 책과 기계를 보여드렸다. 인조는 심하게 분개하면서 별안간 벼루를 들어 아들의 얼굴을 내리쳤다. 에잇 못난 놈! 군부가 차마 못 당할 치욕을 보고 천추에 씻지 못할 국치를 입었거늘, 그따위 벼루를 소청하였으며 되놈의 간특한 수단에 속아 은덕까지 느꼈다니, 그따위 썩어빠진 기상으로 장차 어찌 일국의 왕이 되며 애비의 사무치는 원수를 갚겠느냐. 에잇, 쓸게 빠진 자식! 외마디 소리와 함께 세자는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마에서 선혈이 흘렀다. 이 일이 있은 뒤 소현세자는 가슴앓이를 하다가 그만 드러눕게 되었고 어의는 학질이라는 진단을 내려 세 차례 침을 놓았다는데 그는 갑자기 시체로 변했다. 귀국 후 두 달 만의 일이었고 병석에 누운 지는 사흘 만이었다. 나이는 서른세 살이었다. 세자의 염습에 참여한 그의 이모부 이세완은 말한다. 시체는 온몸이 새까맣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 검은 천으로 죽은 세자의 얼굴 반을 덮어서 옆에서 모시던 사람도 알아보지 못했다. 낯빛은 중독된 사람과 같았다. 대사헌 김광현이 의관 이형익의 실책을 국문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인조는 도리어 그를 좌천시켜 버리고 이형익을 옹호했다. 이형익은 조소용의 외가와 관련된 인물로 3개월 전에 특채된 의관이었다. 인조는 세자의 사인을 규명하려 하지 않고 관례적인 책임도 지우지 않은 가운데 입회인을 제한하여 입관을 서둘렀다. 뿐만 아니라 장례식도 평민의 장례에 준하도록 하고 기일을 단축시켜 초상을 치루게 했다. 홍제동에 묘지를 쓰자는 신하들의 중론도 무시한 채 멀리 고양의 효릉 뒤쪽으로 쓰게 했다. 인조는 며느리 세자빈마저 후원 별장으로 유폐시켰다가 결국 사약을 내려 죽이고 소현세자의 두 아들은 제주도로 멀리 귀양을 보내 죽게 하였다. 소현세자의 가족과 주변세력의 완전제거로 보아 인조의 이같은 일련의 행동은 독살설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봉림대군의 반청주의는 인조를 흡족하게 하였다. 때문에 큰 아들은 죽고 차남인 봉림대군에게 왕위가 돌아가니 그가 조선 제17대 왕 효종이다. 반청이냐 친청이냐 그것이 문제였다.
당쟁에 희생된 사도세자 사도란 부왕 영조가 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며 아들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의 시호이다. 아무튼 사도세자는 아버지 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1726년 세자는 휘령전에 나가 엎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즉시 스스로 자진하여라. 영조의 추상 같은 명령과 한쪽에서는 이것을 만류하는 신하들의 제지가 있었다. 이마를 마루에 부딪쳐 절하는 고두 끝에 세자의 이마에서는 선혈이 흘렀다. 그때 열한 살이던 세손(정조)이 들어와 통곡하며 아뢰었다. 신에게 죄를 주십시오. 영조는 세손에게 나가라고 소리쳤다. 세자에게 칼을 내주며 어서 자결하라고 재촉했다. 만류하던 동궁전 신하들도 모조리 쫓겨났다. 세자는 다시 용서를 빌었으나 영조는 큰 뒤주를 세자 앞에 내놓고 즉시 들어가라고 명령했다. 한참 지난 후 할 수 없이 뒤주 속으로 들어가자 영조는 친히 뒤주문을 닫고 자물쇠를 채웠다. 그리고 다시 큰 널판을 대고 새끼줄로 꽁꽁 묶었다. 푹푹 찌는 여름날이었다. 숨이 막혔다. 뒤주 안은 풀로 가득차 있었다. 5월 21일, 세자는 갇힌지 일주일 만에 그 안에서 굶어죽고 말았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정조는 즉위 하자마자 사도세자의 참변사건 을 재조사하기에 이른다. 이때 다시 기록된 <사도세자행장>의 기록을 보면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과 내용이 일치하지 않은 점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정조는 즉위한 지 6개월 만에 외조부 홍봉한을 이 사건에 관련된 죄인으로 탄핵하고, 유배하였다. 이로써 홍씨 가문은 풍지박산을 당한다. 세자가 갇혀 죽게 된 뒤주를 영조에게 권한 사람이 바로 홍봉한 즉 외조부라는 것이다. 이에 혜경궁 홍씨는 뒤주를 처음 생각해 내신 분은 어디까지나 영조폐하시다 라고 하면서 영조에게 죄를 돌리고 친정의 가문을 위해 변호하는 내용으로 일관되게 쓰고 있다. <한중록>은 사도세자가 죽은 지 40여 년이나 지나 칠십 넘은 혜경궁 홍씨에 의해 쓰여진 글이다. 홍씨는 외도하는 남편을 미워하며 일일이 친정에 고자질을 했다고 한다. 세자가 억울하게 죽은 뒤 조정은 두 파로 나뉘어졌는데 사도세자의 편을 드는 쪽은 시파였고, 반대하는 쪽은 벽파였다. 벽파의 수령은 바로 홍봉한이었고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 세자를 왕위에 오르게 해서는 절대로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를 정신병자로 까지 몰아붙였던 것이다. 당시 사도세자는 심한 화증을 앓고 있다고 알려졌는데 그것도 벽파, 즉 노론파들이 몰래 약을 먹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영조의 어머니는 궁녀의 하인이던 최씨로 단 한번 숙종의 은총을 입어 아들을 낳았다. 하므로 영조는 언제나 자신의 출신 배경에 대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점을 가지고 소론이던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켜 영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또 영조는 왕세자 시절 소론에게 핍박을 많이 당했다. 즉위하여 탕평책을 쓰긴 했지만 소론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자연히 노론이 권력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사도세자는 이러한 노론의 독점 현상에 극히 비판적이었고 나아가 부당하게 여기고 있었다. 소론을 위시하여 반대세력들은 이미 사도세자를 중심으로 결집하고 있었다. 세자가 그대로 왕위에 오를 경우 노론의 지위는 크게 흔들릴 게 틀림없었다. 그러므로 노론의 입장에서는 사도세자를 반드시 제거해야 했던 것이다. 형조판서이자 노론의 두령급인 윤급이 청지기이던 나경언을 시켜 세자의 난행과 비행을 과장하여 상소문을 올리게 했다. 홍봉한은 차마 자기 손으로 사위를 고발할 수 없어 수하에 있던 이해중을 시켜 고발하도록 하였다. 영의정이었던 김상로는 또 이렇게 말했다. 왕세자는 창덕궁에서 늙은 개만 보아도 때려 죽인다고 합니다. 또 나라가 바로 되려면 늙은이부터 죽여야 한다 고 하고 있다 하옵니다. 한편 그는 영조의 총애를 받던 총희 문숙원을 시켜 영조에게 세자의 악담을 하게끔 부추겼다. 문숙원의 동생으로서 출세의 길에 올라 있던 문성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어전에서 세자를 헐뜯었다. 사도세자는 세 살 때 <효경>을 외웠고, 일곱 살 때 <동몽선습>을 독파했으며 서예를 좋아해서 수시로 문자를 쓰고 시를 지어 대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0세 때 이미 소론측이 주도한 바 있는 신임사옥을 비판했다. 1749년 영조가 병이 들자 세자가 서정을 대리하였는데 이때 그를 싫어하던 노론들과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이 세자를 무고했다. 그럴 때마다 성격이 과격하고 조급하던 영조는 수시로 세자를 불러 꾸짖었다. 이로 인해 정신질환 증세를 보였는데 이것을 이유로 세자를 죽일 것까지는 없었다. 그는 부자지간의 이간과 불신. 그것을 부추긴 노론과 소론의 사이에서 정권을 독점하기 위한 당쟁의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불운한 시대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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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53. 신해 혁명에서 과장된 손문의 역할
중국이 서양 열강의 침략으로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던 1895년, 손문은 중국 혁명파의 첫 봉기인 광주 봉기를 일으킨다. 그러나 실패하고 손문은 목에 현상금을 단 채 미국을 거쳐 영국으로 간다. 이때 런던주재 청국공사관이 그를 납치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영국 정부가 강력히 항의함으로써 곧 풀려나지만 이 사건은 중국 국내에 센세이션널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개혁파의 기관지라 할 시무보를 비롯, 주요 신문과 잡지 등이 이를 대서특필했고 손문 자신이 납치 경위를 밝힌 <런던에서의 납치(Kidnapped in London)>는 런던에서 발간된 그 다음해에 벌써 상해에 유통되고 있을 정도였다. 이 사건으로 일개 봉기주의자요, 망명 정객에 불과했던 손문은 졸지에 전 중국과 온 세계에 반청 활동의 최고 지도자로 잘못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손문의 역할이 과대평가된 만큼 신해 혁명의 의의도 과장되어 왔다. 신해혁명은 2000년 동안 계속되어 왔던 전제 군주제를 타도했다는 점 이외에는 완전히 실패한 혁명이다. 정권은 1년도 안 돼 수구 세력에게 되돌려졌고 원세개의 황제부활 시도까지 허용하고 말았다. 더구나 이후 새로이 국민당과 공산당에 의한 국민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혁명은 청조보다 더 타락하고 반동적인 군벌들에 의해 유린되었다. 그럼에도 손문은 현재 중국 공산당, 국민당을 가릴 것 없이 전 중국인의 추앙의 대상이다. 일찍이 1894년 하와이에서 흥중회를 결성, 반청 폭동을 주도하고 신해 혁명을 성공시키고 중국 국민당을 창당하여, 국민 혁명의 불길을 댕긴 그의 화려한 투쟁 경력을 살펴보면 이는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실 신해 혁명에서 손문의 역할과 비중은 알려진 것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며 신해 혁명의 주도권은 오히려 다른 세력에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신해 혁명은 청나라의 신임을 받는 장군이었던 원세개에게 정권을 가져다 주었고 결국 군벌들의 추악한 싸움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19세기 말부터 신해 혁명을 추진한 주요 정치 세력은 손문이 이끄는 혁명파와 강유위, 양계초 등이 이끄는 향신층(지주, 관리, 지식인)을 주축으로 하는 개혁파의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들은 청조에 대항한다는 점에선 같았으나 정치적 입장의 차이로 연대보다는 대립하는 때가 더 많았다. 개혁파는 주로 지방지주와 상인, 개명 관료, 광범한 예비 관료(거인, 생원)들의 이익을 대변했고 청조 자체를 타도하는 데는 반대하고 입헌 군주제의 실시를 목표로 했다. 그들이 활동하던 1890년대 중반으로부터 불과 20년 전 일어났던 일본의 명치유신은 이들의 모델이었다. 이들은 당시 서태후의 기세에 허수아비 노릇을 면치 못하던 황제 광서제에게 접근하는 한편 지방의회라 할 수 있는 자의국을 설치, 세력의 거점으로 삼았다. 이들의 무기는 출판물 등을 통해 여론을 장악할 수 있다는 것과 학연, 지연 등으로 얽혀 전국적인 연계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이었다. 또 이들과 동문수학했던 친구들이 관직에 널리 포진하고 있었던 것도 활동을 유리하게 만들었다. 개혁파는 1898년 강유위를 중심으로 북경에서 여론 공작을 벌여 서태후를 궁중에 연금시키고 광서제를 포섭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이것이 유명한 무술정변이다.
당시 북경을 방문한 `개명 일본의 영웅` 이토 히로부미(당시 근대화를 추진하던 동양의 혁명가들은 대부분 그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었다)의 존재가 개혁파의 집권에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가 귀국하자마자 서태후는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개혁파 지도자들을 체포, 처형했다. 100일만에 개혁파는 축출되고 강유위, 양계초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한편 손문 등의 혁명파는 입헌군주제를 반대하고 오랑캐(청조는 만주족이 세운 나라)를 몰아낼 것을 주장하여 한족의 민족 감정을 자극했다. 이들은 즉각적인 무장봉기로 청조를 타도하고 민주공화정을 수립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노선을 뒷받침할 군사력과 자금력이 없었던 혁명파는 수백 년동안 농촌에 존재해 온 회당(유랑농민 등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산전 집단)을 선동하여 무모한 봉기를 반복했으나 청조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희생만 내고 말았다. 무장봉기와 무술정변에서 각각 실패한 혁명파와 개혁파 세력은 일본에 모여 치열한 노선싸움을 전개했다. 혁명파는 도쿄에 있는 중국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세력을 회복했다. 손문의 홍중회, 황홍의 화흥회, 장병린의 광복회 등으로 분열돼 있던 혁명파는 1905년 동맹회를 구성하고 청조의 타도를 추진했다. 그러나 이들은 곧 분열하고 말았다. 개혁파, 혁명파의 망명객들이 도쿄에서 혁명의 방향을 놓고 입씨름을 벌이고 있을 때 전열을 가다듬은 국내 개혁파들은 외국에 뺏긴 이권회수운동, 미국상품 불매운동, 철도국유화 반대운동 등 치열한 대중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지방에서 관할하던 철도를 국유화해 외국에 이권을 넘겨 주려는 청조에 대항한 철도국유화 반대운동은 대규모 대중운동으로 발전했다. 이 운동은 마침내 신해 혁명의 기폭제가 된 무창봉기(1911. 10. 10)로 이어졌다. 손문은 동맹회의 분열로 국내에서 영향력을 상실했고 무창봉기가 발발할 때까지 주로 구미 지역에서 자금조달이나 외교적 노력에만 관계하고 있었다. 따라서 무창봉기가 났을 때 그가 크게 놀랐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무창봉기 후 개혁파는 혁명군 정부를 수립하고 청조의 장군인 여원홍을 대원수로 추대, 주도권을 장악했다. 이 때 손문은 미국에 있었다. 혁명 발발 한달 보름 만에야 귀국한 손문은 높은 지명도 때문에 임시 대총통에 선출되긴 했다. 그러나 공화국의 국기로 그가 주장한 청천백일기 대신 개혁파가 내세운 오색기가 채택될 정도로 신정부의 주도권은 개혁파의 수중에 있었다. 손문은 청조 붕괴 후 그 군사력을 거느리고 북경에 응거하고 있던 원세개를 토벌할 것을 주장했으나 본래 원세개와 한뿌리인 개혁파는 협상에 의한 해결을 고집했다. 마침내 손문은 취임 두 달여 만에 원세개에게 대총통직을 물려 주고 쓸쓸히 상해로 떠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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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제4장 생각하고 나서 행동하는 중국 - 꾸칭생(古淸生).자유기고가
6. 미국은 토마오크미사일 맛을 보라
미국은 자신이 직접 만들어낸 토마호크미사일의 맛을 보게 될까? 어느날 갑자기 토마호크미사일이 백악관 뜰에 떨어져 오하이오 주에서의 대폭발보다 더 엄청난 폭발이 발생한다면. 이 폭발은 미국의 여야를 뒤흔들어 놓게 될 것이고, 그들은 즉각 미사일 창고의 토마호크미사일을 철저히 점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조사가 완결될 때까지도 그들은 여전히 아주 당혹스러울 것이다. 왜냐하면 창고의 토마호크미사일은 한 개도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뒤늦게 토마호크미사일의 매매 명세표를 조사하게되어서야 그들은 원래 그것이 스스로가 팔아넘긴 토마호크미사일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범인을 밝혀 내고 이에 격분하여 응징의 반격을 개시할 때쯤이면 그들의 미사일은 오히려 상대방의 패트리어트미사일의 공격을 받기에 이른다. 반격도 실패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과연 [아라비안나이트]에나 나을 법한 허황된 이야기일까? 그렇지 않다. 상당히 가능성 있는 일이다. 만약 미국이 계속해서 무절제하고 또 무원칙적으로 무기를 수출한다면 말이다. 미국이 무기를 수출해 온 것은 오래된 일이다. 무기수출은 다른 어떤상품의 수출보다 그 이윤이 높기 때문이다. 이러한 높은 이윤으로 미국은 다른 어떤 나라도 넘보지 못할 무기산업을 발전시켜 왔기에 '세계 제1의군사대국'이라는 위치도 지켜 올 수가 있었다. 비록 클린턴 정부가 특별히 '미국은 다른 나라 정부에 대해 무기수출을 자제할 것이다'라는 골자의 정책을 '대통령령 제34호' 에 문건화시켜 놓았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극우주의자들의 뜻대로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런 '자제'라는 것도 단지 지면상의 거론일 뿐, 백악관은 이를 실제 행동으로 옮기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클린턴 정부는 무기수출을 조건으로 차관을 제공하는 프로젝트의 입법을 지지하고 있으며, 아울러 상무장관 브라운등 행정부의 고위 당국자들을 무기, 장비 박람회에 내보내고 있다. 그들은 국회가 '미국의 무기는 국가의 규칙에 따라야 한다'고 제정하는 것에 반대한다. 클린턴 정부는 그들의 무기상들이 무엇인가를 하기 바라며 심지어 자신의 임기 내에 '국방산업의 기초강화'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고있다. 이 때문에 미국이 토마호크미사일의 공격을 받을 것이라는 예측은 여전히 유효하다. 미국이 전쟁무기를 질레트 면도기나 코카콜라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팔아치우는 한 군사공격의 어두운 그림자는 길제 드리워져있을 것이다. 사실이 그대로 증명해 준다. 미국은 무기수출 방면에서 안전에 대한 어떠한 고려도 하지 않았고. 그들의 군수산업은 오히려 지역분쟁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미군들 역시 전화의 열기를 느껴야 했다. 아니, 미군들은 이러한 열기에 상당히 영향을 받았다. 1990년부터 미국무성은 다섯 차례에 걸쳐 그들의 병사를 분쟁지역에 보냈다. 미국무성이 대외에 공포한 명분은 자신들이 그 지역에 가서 분쟁을 가라앉히고 평화를 회복시키겠다는 것이다. 이유는 그럴싸하다. 그들은 계속해서 파나마, 이라크. 소말리아, 보스니아 등지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후일 미국무성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적대국의 병사들은 미국이 끼어든 분쟁마다 이미 그 전부터 미국무성이 제공한 무기 및 군사기술에 관한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미국무성이 제공한 무기및 군사기술에 관한 훈련이 또 그들 자신과 맞부딪친 것이다. 과연 이것이 사리사욕이 없는 국제주의 정신의 발로일까? 아니면 스스로 끌어들인 고초일까? 결국 최후의 피해자는 전쟁이나 분쟁이 발생한 지역의 무고한 사람들이다. 그들만 극심한 전화와 고초를 겪고 집과 고향 심지어 생명까지도 잃고 마는 것이다. 그들은 결코 미국의 일개 통신사 기자가 워싱턴 본사에 전황을 타전하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미국의 미사일 성능만이 최고다'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까마귀떼처럼 온 하늘을 뻑뻑히 뒤덮은 미전투기를 보며 아마켓돈을 떠올리고 서둘러 하느님께 기도할 지도 모른다. 어서 빨리 이 전쟁의 악마들을 거두어 달라고, 그리고 우리의 평안한 날들이 돌아와서 우리의 아이들이 전쟁의 폐허 속에서 먹을 것도 없이 상처받는 일이 없도록 해 달라고 말이다. '미국국가안전전략'에는 백악관과 국방성이 합작으로 만들어낸 그럴 듯한 명분 하나가 담겨 있다. 이것은 그들이 무절제하게 무기를 팔아 지역분쟁에 계속해서 개입하게 되는 데 대해 자국민에게 하는 일종의 변명이다. 즉 '민주국가의 확대'라는 명분이 그것이다.이는 아주 교묘해서 미국의 야당도 '아니다'라고 말하기 위해선 아주 신중을 기해야 한다.민간단체라도 그렇다. 만약 그가 향후 백악관에 입성할 꿈을 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다'라고 말한다면.그는 앞으로 최소한의 기회조차 잃어버리게 될 지 모른다. 백악관과 국무성 당국자들에게 있어 세계의 지역분쟁에 뛰어들지 않는다는 것은 곧 미국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된 지 이미 오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무성의 주인이 모두, 예컨대 공화당의 돌 의원처럼 그렇게 둔하지는 않다.국무장관 페리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의 구성국가와 전 바르샤바조약 연맹국들을 포함한 수많은 국가들이 지금 현재 국제시장에 무기를 팔고 있다. 이 때문에 미군도 준비를 해야 하고 광범위한 각종 무기류에 대응해야 한다. 그 중에는 이전에 미국이 생산한 무기들도 있다.' 페리는 아주 날카로운 사람이다. 최소한 그는 미국이 어디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는지 파악했으며, 세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조금은 기뻐할 수가 있다. 페리 장관의 발언은 미국의 전략연구가 한층 더 깊어졌음을 증명하고, 미국무성의 방위목표를 확실히 밝혔으며, 나아가 돌 의원과 같은 자들이 세계각지에서 그들의 적대자를 찾는 식의 헛수고는 줄이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미국무성은 결국 그들의 적이 누구인지를 확정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조금은 불편하고 어눌하게 말을 꺼낸 것은. 사실 그 적이 바로 그들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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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나는 네가 되고 싶다
소록도는 아름다운 섬이다. 그러나 소록도를 그냥 단순히 아름다운 섬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소록도의 겉만 살펴본 넋두리에 불과하다. 우리 나라 고홍반도 최남단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사슴의 섬' 소록도는 사실 겉으로만 보아도 아름다운 섬임에도 틀림이 없다. 오솔길을 따라 섬 전체를 한바퀴 휘돌아 보면, 소나무 숲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바다는 보는 이의 마음을 한없이 맑고 시원하게 해준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와 끊임없이 반짝이는 햇살 너머로 무슨 산 그림자처럼 안개에 싸여 아련하게 떠오르는 남해의 작은 섬들은 아름답다 못해 하느님이 그린 그림 같다. 그러나 소록도가 아름다운 것은 그런 자연경관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소록도에 사는 사람들 때문이다, 소록도 국립 병원에서 일하는 젊은 간호사들, 나환자들을 위해 젊음의 순수함과 아름다움을 한껏 꽃피우고 있는 바로 그 간호사들 때문이다. 두 손 모두 손가락이 없는 몽당손에다 고무줄을 친친 잠아 겨우 숟가락을 끼워 밥을 먹는 남자, 손가락은 남아 있으되 갈고리 손이 된 중년 여인, 이미 코와 눈썹이 문드러진 할머니, 끝내는 눈마저 멀어 버린 할아버지들을 부모 형제처럼 돌보고 있는 간호사들이 없다면 소록도는 결코 아름다운 섬이 아니다. 소록도의 간호사들은 '한바람회'를 만들어 스스로 환자들의 머리를 감겨 주고, 이발도 해주고, 손톱과 발톱도 깎아 준다. 결린 근육도 마시지 해 주고, 몸의 군살도 긁어내주고, 각 병사 지대를 나누어 맡아 빨래와 부엌 살림도 돌본다. 나병이 분명히 치료될 수 있는 병인 줄 몰랐던 시절의 간호사들은 환자와 직접적인 피부 접촉을 피하기 위해 손에는 고무장갑을 끼고 입에는 마스크를 하고, 머리엔 모자까지 쓰고 신발을 신은 채 환자 방에 들어갔다. 그러나 지금의 간호사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어느 환자와 마찬가지로 아무 거리낌없이 맨손으로 환자를 돌본다. 소록도병원에 의사들이 지원해서 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러나 자원하는 간호사들의 이력서는 항상 넘친다. "다른 병원에 가면 봉급도 많고, 소록도에 있었다고 하면 혼인발도 안 선다"는데 그들이 굳이 지원해서 소록도병원에서 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분명 그들의 마음이 아름답기 때문에 것이다. 그런 아름다운 간호사들이 있는 한 소록도는 진정 아름다운 섬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사는 도시에도 이런 아름다운 섬이 있다면 그 얼마나 행복할까. 소록도병원 피부과 병동 간호사실 문 앞에 이런 글이 적힌 글이 적힌 종이 한 장이 붙어 있다.
너를 위하여 나는 무엇이 될까 너의 등불이 되어 너의 별이 되어 달이 되어 너의 마스코트처럼 네가 마주보는 거울처럼 나는 네가 되고 싶다 우린 서로 지켜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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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한 잔 하실까요? 16세기와 17세기경 터키에서는 이 말이 매우 위험했다. 커피를 마시다 발각되면 사형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0,000쌍의 부부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그들의 로맨스가 싹트기 시작한 것은 바로 “커피 한 잔 하실까요?”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커피 한 잔 하실까요?”는 곧 “결혼해 주시겠어요?”가 되지 않을까?
누드촌 이야기, 미국 로스앤젤레스 어느 해변에는 누드촌이 있어서 완전 나체로만 들어갈 수 있다. 프랑스 남쪽 포트 내츄어 해변에는 모든 사람들이 물건을 사거나, 영화관에 가거나, 나이트글럽에 갈 때나, 언제나 나체로 나다니는 마을이 있다.
잉카의 문명, 남미 중앙 안데스 지방 - 지금의 페루와 볼리비아 - 에서 15세기부터 16세기 초부터 번성했던 고대제국 잉카의 문명은 농업, 건축, 천문학 등 모든 점에서 놀랍도록 발달해 있었다. 무엇보다 뛰어난 점은 고아와 과부, 병자를 정부에서 특별히 보호한 제도로서, 따라서 거지가 없었다. 노동자들은 50세면 은퇴하고 노후에는 정부 연금으로 편안히 지낼 수 있었다. 또 유럽의 의사들이 겨우 거머리로 처방을 내리고 있을 때 잉카의 의사들은 이미 뇌수술을 시술하고 있을 정도였다.
인도에서는 직장에서 일할 때나 길거리를 다닐 때, 잠옷(pajamas)을 입고 있다 해도 에티켓에 벗어 나지 않는다.
혼자 사는 남자보다는 결혼한 여자가 더 행복하고, 결혼한 여자보다는 혼자 사는 여자가 더 행복하며, 혼자 사는 여자보다는 결혼한 남자가 더 행복하다고 한다.
에스키모인들은 자기 집을 방문하는 남자 손님에게 그 날 밤을 위한 최고의 대우로 아내를 제공하는 습관이 있었다. 또 실생활의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내를 서로 교환하며 사는 풍습도 있었는데 히말라야 산악인들도 그러한 이상한 습관에 젖어 있었다.
베개, 고대 이집트인들은 돌배게를 베고 잠을 잤다. 조선시대의 우리 선조들은 나무 베개를 베고 잠을 잤다. 강남 사람들은 오리털 베개를 베고 수면제를 먹고 잠을 잔다.
티벳인, 몽고인 등은 커피에 소금을 넣어 마시는 습성을 가졌다.
정신분석과 의사들이 자살할 확률은 일반 사람보다 6배 더 높다.
미국의 장래, 학생들이 학교에서 학업을 연마하기보다도 살아서 귀가하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할 정도로 학교내 총기 폭력이 심각하며, 이같은 교내 범죄는 도심 지역뿐 아니라 교외나 농촌지역을 가리지 않고 미 전역으로 확산되는 추세에 있다고 LA타임스가 보도했다. 이 신문은 휴스턴에서는 15세된 여학생이 자신을 모욕한, 같은 풋볼선수 남학생을 많은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을 쏴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학교에 매일 총을 갖고 등교하는 학생이 90,000명이나 될 정도로 학교내 총기 폭력이 심각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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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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