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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98 호
4339.12.30 (11.11)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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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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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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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낙관적이어서 해로울 것은 없다. 나중에도 얼마든지 울 수 있으니까. / L.S.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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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경제/경영/성공 |
세계를 움직이는 127대 파워 - 박태견 지음
POWER 004 지상 최고의 이미지: 소니
지난 1993년 미국의 전문 컨설팅회사가 전세계의 6천 개 유명 브랜드를 상대로 고객만족도 등 이미지 파워를 조사한 결과, 1위를 차지한 기업이 바로 일본의 소니SONY였다. 1994년 일본의 경제전문 주간지 "다이아몬드"가 일본인들을 상대로 실시한 가장 존경한 기업인과 이미지가 좋은 기업에 대한 여론조사에서도 1991년 이래 모리다 아키오 소니회장(73)과 소니사가 4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이밖에 일본 내 1,110개사를 대항으로 한 "니케이신문" 여론조사에서 21세기까지 비약적으로 성공할 기업으로 소니가 3년 연속 1위를 차지했고, 취업전문지 "리쿠르트"가 대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기업인기도 조사에서도 3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이처럼 소니는 일본 국내뿐 아니라, 전세계 어느 지역에서나 최고의 이미지를 확보하고있다. 오늘날의 이같은 소니가 있기까지에는 모리다 아키오 회장의 기여가 절대적이었다. 세일즈맨 출신답게 모리다 회장은 해외진출만이 소니와 일본의 살 길이라고 판단해 일본기업 중 가장 먼저 맹렬하게 다국적기업화를 추진했다. 그 결과, 오늘날 소니는 일본 이외 전세계15개국에 40개의 생산거점과 8개의 연구개발거점을 확보하여 1993년 한 해에만 362억 5천만 달러(29조 원)의 매출을 올리는 세계적 다국적기업이 됐다. 현재 소니의 모든 회의에서는 국제어인 영어만 사용하고 있는데, 전체 12만 명의 종업원 중 55p가 외국인이고 전체매상의 75p를 해외시장에서 올리고 있을 정도로 소니의 국제화는 이미 오래전 완성됐다. 소니는 또 엔지니어를 중시하는 모리다 회장의 신념에 따라 신입회원 선발 때 출신대학을 묻지 않고 입사 후 자신의 희망대로 부서를 옮겨다닐 수 있는 자율배치제도를 실시하는 등 선진적 인사제도를 도입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소니는 가전부품에 관한 한 품질과 에프터서비스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특히 오디오, 비디오 부문에서는 단연 세계 최정상이다. 1979년 생산을 시작한 워크 맨은 단일품목으로는 세계최초로 1992년 말 1억대 판매고를 돌파하는 세기적 금자탑을 세웠고 1968년부터 생산을 시작한 소니 컬러 TV도 현재까지 6천만 대 이상 판매했다. 그러나 소니의 진짜 파워는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에 숨겨져있다. 모리다 회장은 한국, 중국, 대만 등 개도국의 맹추격으로 급속히 부가가치가 낮아지고 있는 단순 하드웨어 제조업에서 벗어나 고부가가치 첨단정보산업으로 진출하기 위해 1989년 11월 미국할리우드의 간판인 콜롬비아 영화사(현재 소니 픽처스 엔터테인먼트)를 48억 달러에 사들여 전세계를 놀라게 만들었다. 이로써 소니사는 '아라비아의 로렌스' '워터 프론트'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드라큐라' '울프'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같은 세기적 흥행작을 비롯해 할리우드 최대의 필름도서관, 220개의 영화관, 그리고 2만 3천벌의 TV프로를 소유하게 됐다. 모리다는 이 여세를 놀아 다국적 음반제작 및 판매회사인 소니 뮤직을 만들었다. 마이클 잭슨,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머라이어 캐리, 신디 로퍼 등 전세계의 내노라하는 300여 명의 유명 가수를 전속으로 거느리고 있는 소니 뮤직은 창립 4년여 만인 1993년에 44억 8천만달러의 매출을 기록, 전세계 음반시장의 2할 가까이를 장악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는 이밖에 세계최대 전자오락왕국인 닌텐도 타도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저가품 소니 게임기를 무기로 전자오락게임 시장에 뛰어드는 등 차세대 멀티미디어시대에 대비한 다중 포석에 총력을 쏟고 있다.
모리다 회장은 1993년 갑자기 졸도해 병석에 눕기 전, 자신의 후계자격인 사장직에 도쿄 예술대를 졸업한 뒤 독일에 유학 가서 바리톤가수로 활동하던 예술가 출신의 오가 노리오를 파격적으로 임명했다. 이에 대해 세간에서는 멀티미디어시대를 대비한 '과연 모리다다운' 일대 도박이라고 입을 모았다. 할리우드 진출과 오가 영입이라는 양대 승부수는 지금 와서 모리다가 당초 기대했던 것 이상의 성과를 올리고 있다. 한 예로, 1993년도 전미국 영화 흥행수입 중 20p가 프랜시스 코플라, 스티븐 스필버그 같은 최고의 감독을 총동원해 '드라큐라' '후크' '프리티 리그' 등의 최고 흥행작을 양산한 소니사에게 돌아가 흥행수입 순위에서 소니는 2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또 1993년도 아카데미 수상 후보로 오른 84개 작품 중 소니사 작품이 자그마치 30개를 차지, 전세계7대 영화 메이저 중 단연 1위를 차지했다. 1994년 들어 다소 경영이 악화되기는 했으나 소니의 파워를 무시하는 이들은 없다. 할리우드 내에서의 소니 파워는 아카데미상조차 좌지우지할 정도로 비대해졌다. 1993년 아카데미 수상식에서 의상상은 '드라큐라'에서 의상을 맡은 일본의 여성 디자이너인 이시오카 에이코에게 돌아갔다. 이 영화에서 중세의상을 훌륭하게 재현해냈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하지만 이 상은 처음부터 철저하게 소니의 각본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었다. 소니는 이 영화 제작 계약시 코플라 감독에게 이시오카를 고용할 것을 요구하는 등 치밀한 작업 끝에 마침내 이시오카와 일본에 아카데미상 수상의 영예를 안겨준 것이다. "이시오카가 아카데미상을 받는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우리는 그만한 투자를 했기 때문이다." 수상식 전날 오가 노리노 소니사장이 보도진에게 한 말이다. 이미지 창출의 마술사 소니다운 오만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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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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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군고구마 아저씨
저녁에 아버지가 군고구마를 사 오셨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군고구마를 쪼개어 보슬보슬한 노란 속살을 한 입 베어 먹다가 문득 예전에 시장 입구에서 군고마 장사를 하시던 한 아저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저씨와의 인연은 내가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엄마와 함께 시장에 갔다가 복잡한 시장통에서 그만 엄마 손을 놓치고 말았다. 울며불며 사람들 틈을 헤집고 다니는데 저만치 장작을 패는 아저씨가 눈에 들어왔다. 매서운 바람에 귀와 볼이 빨갛게 얼어붙은 나는 연기가 피어 오르는 그곳은 왠지 따뜻할 것 같다는 생각에 그리로 다가갔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내 얼굴을 보더니 아저씨가 웃으며 말했다.
"엄마를 잃어버렸나 보구나. 여기에 있거라. 여기 가만 있으면 엄마가 오실게다."
그리고 아저씨는 흰 연기가 펄펄 피어 오르는 군고구마를 후후 불어 내 손에 쥐어 주셨다. 마침내 엄마가 날 찾아오셨는데 엄마의 얼굴에도 눈물자국이 나 있었다. 그때 난 고구마통 옆에 쭈그리고 앉아 얼굴이 온통 까매진 것도 모르고 군고구마를 호호 불어 가며 맛있게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마음이 놓이기도 하셨는지 엄마는 군고구마 아저씨를 바라보며 호호 하고 웃으셨다. 옆에 서 있던 아저씨도 따라 웃으셨는데 두 분의 미소가 얼마나 밝았는지 모른다. 그 후 나는 짐으로 돌아갈 때면 늘 군고구마 아저씨를 찾아갔다. 아저씨는 내가 올 시간이면 군고구마를 알맞게 식혀 놓으셨다. 어쩌다 돈이 없어 그냥 지나치려 해도 아저씬 여지없이 내 이름을부르셨다.
"은이야, 오늘은 군고구마 안 먹니?"
그 고마운 군고구마 아저씨는 이제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그 달짝지근한 고구마 맛만이 혀 끝에 남아 있을 뿐.....
김정은 님/부산시 금정구 구서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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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96 - 미국의 대표적인 철학: W. 제임스의 (프래그머티즘)(1907) 그때 세계에서는 1906년: 인도국민회파대회, 보이코트, 스와데시, 스와라지, 민족교육4결 체택 1907년: 뉴질랜드, 영제국내의 자치령이 됨
이러한 과정을 밟는 동안에 미국적인 미국의 철학이 탄생되었다. 그것을 우리는 실용주의 철학이라고 부른다. 물론 미국은 영국과 영어권의 전통을 계승해왔다. 자연히 경험주의가 깔리게 되었고, 그 위에 공리주의 철학이 뒤따르게 된다. 그러나 미국 속의 영국인들, 이른바 엥글로 아메리칸 들은 미국의 사회적 변화와 발전에 걸맞은 철학을 창조해내었다. 그 실용주의 정신이 오늘의 미국을 만들었고, 미국의 발전이 실용주를 탄생시켜준 것이다. 오늘의 미국인들은 실용주의 찰학을 그렇게 떠들지 않는다. 1930년대에 등단해서 약 40년 동안 미국의 정신계를 지배한 것이 실용주의 철학이었으나, 최근에는 또 다른 분석철학에 열을 올리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철학으로서의 프래그머티즘은 우연한 계기에 탄생되었다. 그러나 그 정신이 가장 미국적이었고 미국의 발전과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에 지금은 문제삼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찰스 S. 퍼스(Charles Sanders Peirce, 1839--1914)라는 학자 가 있었다. 그는 생물학 등을 연구한, 주목받지 못하던 학자였다. 그가 말년에 (기회, 사랑 그리고 논리)라는 저서를 남겼다. 여러가지 논술을 모은 것이다. 그중 논리 부분에 (어떻게 우리의 관념들을 명백하게 만들수 있는가?"How to make our ideas clear?)" 라는 논문이 들어 있다. 이 글에서 퍼스는 후에 실용주의적 인식론에 해당하는 연구와 원리를 제시해주었다. 실용성 내지 실용주의적 어원은 옛날로 소급해 올라간다. 그러나 그 의미가 미국적이 되기는 이때가 처음 이었다. 퍼스는 현실에 입각한 논리를 추구해가다가, 그 개념의 경험성, 현실성, 실용적 가치에로 발전시켜나간 것이다. 이러한 퍼스의 제안에 대해 가장 미국적인 철학적 해답을 내린 사람이 대표적 하버드 인으로 꼽히는 윌리암 제임스(W.James,1842-1910)였다. 한때 사람들은 우리 세대에 세 위대한 철학자가 있었는데, 그 한 사람은 독일의딜타이. 다른 사람은 프랑스의 베르그송 그리고 또 한사람은 미국의 W.네임스라고 말했다. 제임스는 그만큼 영향력이 큰,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은 철학자였다. 제임스는 본래 화학, 해부학 등을 공부한 의학자로 출발했다. 일찍 그런 분야를 끝낸 제임스는 후에 심리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면서도 심리학 연구와 강의도 오래 계속한 편이다. 47세 때 철학과의 정교수가 되면서 성숙된 실용주의 철학사상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는 관념주의 철학이나 형이상학적 과제들은 무의미한 공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베척했다. 현실에 입각한 경험의 영역에서 철학의 과제를 찾아야 한다. 주지주의적 합리적 사고는 학문의 지극히 제약된 부문에 그칠뿐, 우리는 삶을 바꿀 수도 없으며, 현실적 실재를 파악하는 데는 일원론이나 유심론, 유물론 같은 사고는 망상이며 불필요한 것이다. 진정한 철학은 현실의 대지에 발을 붙이지 않은 전통적 형이상학을 배제하고, 우리는 삶과 생활을 이끄며 개혁할수 있는 지식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면 그 표준은 어디 있는가? 열매 많은 것이 곧 진리라는 현실적 가치판단을 내려야 한다. 우리들의 현실은 다양하면서도 유동적인 실재에 속한다. 그것을 합리적인 사고나 논리적 명제로 해명한다는 실재에 속한다. 그것을 합리적인 사고나 논리적 명제로 해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가 자신의 철학을 전통적인 경험주의에 비해 근본적 경험론이라고 부른 것은, 인식이 경험주의보다는 개념적 파악의 부분성을 넘어선 구체적이며 어떻게 유용하며 현실과의 타당성이 있는 진리를 유도해내는가에 있었던 것이다. 진리는 논리적인 이론체계가 아니다. 무엇이 더 값있는 것이며 우리 삶에 도움을 주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종이조각에 지나지 않는 공수표나 지폐가 아니다. 현금으로 바꿀수 있으며 금이 보장되어 있는 물건을 살 수 있는 태환권이어야 한다. 그의 대표작의(실용주의)에는 '사고의 낡은 방법들을 위한 새로운 이름'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과거의 모든 철학을 새로운 위상에서 정립하고 싶었던 것이다. 생활에서 현금 구실을 할 수 있는 지식이 진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밤에도 제임스의 업적은 많았다. 그의 (종교적 경험의 여러 양상)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보였고, (진리의 의미)에 있어서도 실용주의적 이론을 명백히 해주고 있다. 지금은 하버드 대학에 가면 '제임스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그의 업적이 하버드와 더불어 빛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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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
'무좀'의 '좀'은 벌레이름...'좀도둑'의 '좀'은 '조금'의 준말
아마 무좀에 한번쯤 걸리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주로 발가락 사이에 잘게 물이 잡히는 부스럼이지요. 혹시 이 말을 외래어로 아시고 계신 분은 안 계신지요? '좀'의 뜻은 아시지요? '좀'은 벌레 이름입니다. 보통은 '좀벌레'라고 하는 것인데, 나무, 곡식, 옷, 종이 따위를 쏘는 벌레의 하나입니다. 저는 아직도 고서 속에 생기는 이 좀벌레를 없애기 위해 '좀약'(나프타린)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좀'의 '무'는 무엇일까요? 앞의 '보조개'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물좀'이 '니다. '좀'은 '좀이 쑤신다'처럼 참고 기다리지 못하거나 가만히 있지 못하고 앉았다 섰다 하는 사람을 비유할 때 쓰이지요. 그만큼 '좀'이 몸을 쑤시면, 가려워서 견디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좀도둑'의 '좀'은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좀(쫌)스럽다, 좀(쫌)팽이' 좀(쫌)상스럽다, 좀(쫌)생원'의 '좀'으로, '조금'의 준말로 쓰이는 것입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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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사회/문화/인물 |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8장 화려항 명성, 처참한 최후
장군의 죽음 - 군웅신이 된 최영 / 남이 / 장보고/ 임경업
모든 사람들은 잘 죽고 싶어한다. 천수를 누린다음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원없이 눈을 감는 고종명의 그런 죽음을 원한다. 그런데 역사는 출중한 사람, 비범한 사람에게는 그런 죽음을 허용하지 않고 비범한 죽음을 잇따르게 하였다. 그래서 걸출한 영웅들이 비명에 희생되는 예를 찾아보기는 힘들지 않다. 이순신과 계백은 훌륭히 전사했다. 그들은 이미 죽을 장소를 스스로 택해 남이 하기 어려운 자신만의 죽음을 이룩했던 것이다. 황산벌 싸움터에 나가기 전 날, 계백은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직접 칼로 목을 베었다. 패배는 자명한 일, 따라서 적군의 노예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가족의 목을 베고 자신도 죽기를 다해 싸웠다. 나당 연합군 10만 명과 백제의 5천 결사대와의 싸움이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서 신라군을 네 차례나 무찔렀지만 중과부족이었다. 내 여기서 죽기를 한하고 싸우리라. 다짐하던 충무공도 노량해전에서 가슴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장군다운 죽음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그렇지 못한 죽음이 있다. 영예로운 전사가 아닌, 모함으로 비명에 간 장군들의 죽음. 더구나 그들은 죽어서 무녀들의 섬김을 받는, 무속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고려의 명장 최영은 어릴때부터 얼굴에 위엄이 있고 기골이 장대했으며 용맹 또한 뛰어났다. 고려는 원나라를 90여 년 동안이나 섬겨오고 있었다. 최영은 원나라에 속해 있던 압록강 서쪽의 8참을 수복하고, 오예포에 침입한 왜구의 배 4백여척을 격파하였다. 왜구토벌에 큰 공을 세우고 여러 난을 평정하였다. 그래서 재상직인 영삼사사가 되고 곧 문하시중에 올랐다. 1376년 우왕 2년, 홍산(부여군) 대첩에 참가한 그는 입술에 화살이 꽂혔건만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고 적장을 쏜 뒤에 피가 흐르는 그 화살을 뽑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왜구는 머리가 하얀 백수 최만호를 제일 두려워하였다. 그 뒤 명나라가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겠다고 나서자 최영은 요동정벌을 주장하였다. 그는 8도 도통사가 되고 19세 아래이던 이성계와 조민수를 좌우군 도통사로 삼아 평양까지 출정하였다. 위화도에서 그 좌우군이 회군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우왕은 곧 최영에게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뿐만아니라 붙잡아오는 사람에게는 상과 작위를 주겠다는 포고문도 발표했다. 우왕의 뜻을 안 이성계와 조민수는 사생결단으로 대항했다. 대세는 회군병력엠 기울어져 있었다. 게다가 궁성병력은 약세였고 병사들은 이성계의 위세에 눌려 전의는 상실되었다. 최영 역시 그와같은 대세를 읽고 있었으므로 병사들을 우왕이 있는 화원을 철수시켰다. 그러나 회군병력은 곧 화원을 둘러싸고 항복을 요구해오며 안으로 쳐들어왔다. 최영은 곽총보 등 몇 장수에 의해 포박되었다. 그는 유배길에 오르게 되며 우왕은 폐위되고 요동정벌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귀양길에 오른 최영은 고향인 고봉현(고양)에 머물러 있다가 다시 합포(마산)로 이배되었다. 그 뒤 충주로 이배되었다가 1388년이 다 저물어가는 12월 어느 날, 73세의 고령에 이른 최영은 형장으로 끌려나갔다. 그의 얼굴은 조금도 흐트러진 기색이 없었고, 말과 태도도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내 한 몸 죽는 건 두렵지 않다. 오직 고려 사직의 존망이 염려 될 뿐이다. 과연 그는 기울어가는 고려왕조의 마지막 기둥이었다.
남이 장군은 태종 방원의 외손답게 기걸이 호협하여 벌써 17세의 나이에 무과에 장원급제하였다. 당시 좌의정이던 권람의 사위가 되었고, 27세에 병조판서를 역임하여 이조 역사상 최연소 장관이 되었다. 그는 뛰어난 용맹으로 이시애의 난을 토벌하고 서쪽으로 건주위를 칠 적에 선봉으로 나가 큰 공을 세웠다. 이때 승리를 거두고 회군할 때 그가 지은 시는 널리 알려진 바 그대로이다.
백두산 높은 봉을 칼을 갈아 다 없애고 (백두산석마도진) 두만강 깊은 물은 말을 먹여 다 없애니 (두만강수음마무) 남아 20세에 나라 평정 못하면 (남아이십말평국) 그 누가 대장부라 일컬으리오. (후세수칭대장부)
1468년 예종이 즉위한 지 얼마 안되어 그는 대궐 안에서 숙직을 하였다. 그날 밤 혜성이 나타났다. 이를 보고 남이가 동료와 더불어 이야기하기를 이것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펴려는 형상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평소 그의 승진을 질투하고 있던 유자광이 엿듣고 있다가 남이가 모반한다. 는 무고를 꾸며 옥사가 일어난다. 남아이십말평국 이 말득국 으로 둔갑되어 고해졌다. 간신 유자광의 모함으로 아깝게 그가 주살되니 나이 겨우 28세였다. 남이가 귀신을 내쫓음으로써 다 죽어가던 낭자가 살아났다는 등 남이와 관련된 설화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그의 위용은 귀신을 내쫓을 수 있다고 하는 믿음에서 지금도 남이는 장군신으로 무속인의 추앙을 받고 있다. 서울 용문동과 사근동에 그의 사당이 있어 지금도 주기적으로 제가 올려지고 있다. 용문동의 경우는 4, 7, 10월의 초하룻날에 치제하고, 매 3년마다 4월 1일에는 대규모의 제를 거행하고 있다.
신라 어부의 아들로 태어난 장보고는 어려서부터 활을 잘 쏘아 궁복이라고 불리웠다. 그는 장군이 되고 싶어했으나 신분이 미천하여 뜻을 이룰 수 없자 당나라 서주로 건너갔다. 그곳 무술대회에서 장원으로 뽑혔고, 당나라 황제의 군관벼슬을 받는다. 무령군 소장의 벼슬에 올랐으나 어느 날 등주에서 신라인이 해적에게 붙잡혀 노예로 팔리는 사실을 목격하고는 벼슬도 버리고 고국으로 돌아온다. 왕께 이러한 사실을 아뢰고 군사 1만명을 허락을 받아 해상 교통의 중심지인 완도에 진을 쳤다. 항만시설을 갖추자 왕은 청해진(완도) 대사로 그를 임명하였다. 해적과 왜구를 일시에 소탕하고 해상권을 손에 쥐니 그의 이름이 높아졌다. 그 후 장보고는 김우징과 반란을 일으켜 민애왕을 죽이고 김우징을 왕위에 오르게 하니 그가 바로 신무왕이다. 신무왕은 청해진에서 군사를 얻을 때, 장보고에게 이런 약속을 했다. 이 일이 성공하기만 하면 장군의 딸을 내 며느리로 삼겠다 그러나 즉위한 그해에 신무왕은 바로 죽고 말았다. 그의 아들이 대를 이어 문성왕이 되었다. 장보고는 문성왕에 의해 장군이 되었다. 문성왕에게는 이미 왕비 박씨가 있었다. 이 문제를 놓고 의논할 때, 장보고의 권력을 시기하던 대신들은 반대하며 이렇게 말했다. 근본도 모르는 천한 섬놈의 딸 이라고. 이것을 전해들은 장보고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급할 때는 쫓아와서 통사정을 하고 원하지도 않은 약속까지 먼저 해놓고 이제와서 딴소리를 하다니 썩어빠진 놈들! 홧김에 내뱉은 그의 욕설이 그대로 궁안으로 들어갔다. 조정에서는 더럭 겁을 냈다. 막강한 군력을 쥔 그가 홧김에 쳐들어오지나 않을까 해서. 그의 옛부하이던 염장이 자청해서 나섰다. 왕은 염장에게 일이 성사되면 청해진의 자치권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장보고의 휘하로 달려가 거짓말로 비위를 맞추었다. 장군의 은혜를 배신하고 이제 와서 욕이나 하는 왕족이니 귀족이니 하는 족속들이 역겨워 도망쳐 왔는데, 이제부터는 장군의 수족이 되어 죽을 때까지 한마음으로 모시겠다고 하며 거짓 충성을 그에게 맹세했다. 그날밤 그들은 어울려 술을 마셨다. 장보고가 술에 대취하여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게 되자 염장은 칼을 뽑아 그의 가슴을 힘껏 내리찔렀다. 841년 11월이었다. 애통한 것은 한 개인의 손실만이 아니라, 해상제패의 꿈이 꺽여, 그 후 잦은 외침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고 하는 점이다.
임경업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2년 뒤, 신립장군이 저사한 충주 탄금대가 있는 달천 강가에서 태어났다. 스물 다섯 살이 되던 광해군 10년, 그는 무과에 합격하였고, 이괄의 난 을 평정했다. 인조는 친명정책을 펴다가 청나라의 무력에 굴복하고 형제의 의를 맺어야 하는 수모를 겪는다. 좌영장으로 있던 임경업은 급히 강화도로 달려갔으나 이미 조선이 화의를 제의하여 전쟁이 끝난 뒤였다. 그는 분해하였다. 나에게 정병 4만명만 준다면 내 반드시 오랑캐를 섬멸하고 압록강 물에 칼을 씻고 돌아올 것인데. 그 뒤 정승 김육에게 신임받아 청천강 북쪽 변경을 지키는 방어사에 임명되었다. 청나라에 투항한 장수들을 명나라가 토벌할 때, 구원병으로 보내 많은 공을 세우자 명나라는 그에게 총병관이라는 직책을 주었으며 그의이름은 명나라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청태종은 트집을 잡아 2차 조선공격에 나섰다. 백마성을 지키던 임경업은 수천 개의 허수아비 인형을 성 주위에 세워 청군을 따 돌렸다. 또 청나라가 명군을 치기 위해 조선군사를 동원하라고 강요하자 차출된 임경업이 꾀를 내어 유언비어를 퍼뜨리자 조선군사는 전쟁을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이번에는 청나라가 명나라의 금주를 공격하기 위해 또 구원병을 요청해왔다. 임경업이 그 임무를 맡아서, 파도가 높다는 핑계로 출전을 지연시켰고 명나라 군대와 싸울 때도 화살촉을 빼고 쏘도록 했으며, 대포에는 흙포를 넣어 발사하도록 하였다. 명나라 군대도 먼 거리에서만 화살을 쏘아 닿지 않게 하였다. 이러한 진의가 탄로나자 임경업은 청나라로 붙잡혀가게 된다. 이때 정승 심기원이 돈과 중옷과 칼을 주었는데 압송되어 가던 중 그는 금교역에서 달아나 머리를 깎고 승복으로 갈아 입고 화암사로 가서 숨었다. 거리에 화상이 나붙고 포졸들이 추격하자 그는 명나라로 피신할 것을 결심한다. 조정은 청나라의 등상에 못이겨 임경업의 부인을 대신 청나라로 보냈다. 심양의 감옥에 갇힌 그녀는 끝내 스스로 자결하고 만다. 임경업은 우여곡절 끝에 명나라 북경에 도착했다. 몇 달 뒤 청나라의 공격으로 명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임경업은 그때 장군 마등홍 휘하에 있었는데 그자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였다. 내가 그냥 청나라에 항복한다면 자칫 죽을지도 모르지. 지금 청나라에 큰 죄를 짓고 도망친 임경업이란 작자를 잡아 바치면 아마 크게 환영을 받을 거야. 결국 임경업은 청나라의 손에 넘겨져 북경의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이때 조선에서는 임경업을 도망가도록 도와 주었던 심기원이 역적으로 몰리고 있었다. 그의 정적은 김자점. 임경업도 서울로 압송되었다. 김자점 일당에게 극심한 문초를 받고 끝내는 처형되었다. 임경업은 최후의 순간까지 눈을 부릅뜨고 이렇게 외쳤다. 천하의 일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는데 어찌 나를 죽이려 하는가? 오늘 나를 죽이면 내일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그의 나이 53살이었다. 임경업 장군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슬펏하지 않는 백성이 없을 정도였다. 왕도 이 소식을 듣고 몹시 슬퍼하였다. 임경업이 죽었구나, 그러나 내가 너를 죽이려 한 것은 아니었다. 숙종은 그의 고향 충주에 충렬사를 지어 그를 기리도록 하였다.
최영 장군은 산신으로 모셔지게 되었는데, 장군사당은 임진강 건너 개성 덕물산에 잇다. 특히 <산신거리> <산마누라거리>에서 최영 장군의 신을 모신다. 덕물산 기슭은 서울 이북 경기도, 황해도 뭇고의 본거지이다. 산꼭대기에 최영 장군을 신장으로 모신 장군당이 있어 이태 걸러 음력 3월이면 도당굿이 열렸다. 그의 말대로 무덤에는 풀이 나지 않았는데 덕물산 신당에서도 사나운 비바람을 일으키며 때때로 괴이한 일들이 일어났다고 한다. 굿판이 끝나면 잔치가 벌어지곤 했는데 진미로 꼽는 돼지비계를 뜯는다. 성계육 이라 부르며 이성계의 살점을 씹듯이 콱콱 씹었다고 한다. 무속의 신은 한을 품은 존재로서, 그들의 한이 살아있는 사람에게 재앙을 갖다주기 때문에 우선 그 한을 풀어 재앙을 물리치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복을 빌었으니 즉 해원과 기복적 의례가 굿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큰 힘을 행사하던 권능을 지닌 원령이라야 살아있는 사람에게 화복을 줄 수 있는 존재라고 믿는 것이다. 원혼이 된 혼련들만이 카리스마적인 강력한 힘을 행사할 수 있기에 그 원혼을 위무해주고, 안주시켜 줌으로써 그쪽에서도 보답으로 이쪽을 수호해 준다고 믿는 공감대 의식의 착상이라고나 할까. 장군령은 무녀의 수호신으로, 무장의 영은 군웅이라고 해서 그 소속과 기능에 따라 상산별군웅, 사살군웅, 사신군웅 등 군웅대신으로 호칭된다. 영웅숭배주의는 무속에서 특히 강조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차피 무속의례의 본질은 영웅숭배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진다. 특이한 것은 계백이나 이순신 같은 훌륭한 장군은 다만 존경의 대상이 될 뿐이지, 신앙화되기는 어렵다고 한 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공포감을 수반하지 않기 때문이니 무속의 대상이 되려면 공포감을 극대화시킨 원혼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고 일본에서도 원혼이 큰 인물에 대하여 공포감을 갖고 이를 신으로 떠받들며, 중국에서는 아들 관평과 함께 손권에 의해 참살된 관우도 장군신으로 모시고 있다. 낙양에서 조조가 죽기 직전에 관우의 잘린 목이 당도했는데 사람들은 관우의 원령이 내린 재앙 이라고 말했다. 조조가 병사한 나이는 66세였고, 관우의 목이 떨어진 것은 그의 나이 58세였다. 산천초목, 어디에라도 대고 비손을 해야 마음을 놓던 우리네의 정서 탓인가. 인천에서 생활하는 무속인들은 맥아더장군까지도 마을신으로 떠받들고 있다는 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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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52. 알파벳을 문자로 사용하는 베트남
수천 년에 걸친 중국과의 투쟁, 그리고 프랑스, 미국과의 대결로 독립 자주성에 관한 한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베트남 인들이 자신들의 문자를 갖지 못하고 서양의 알파벳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의외다. 현재 베트남에서는 문자로 `꾸옥 으(국어)`라는 알파벳을 사용하고 있다. 1600년경 프랑스 선교사 로드가 베트남 말을 로마자화한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베트남도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한자만이 유일한 표현 수단이었다. 그러다가 8세기경 신라의 이두와 같은 원리로, 베트남 발음을 한자로 표기하는 자남이라는 문자가 발명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사용하기 불편했고 지식인들이 천시하는 바람에 널리 보급되지 못했다. 17세기에 로드가 `꾸옥 으`를 만든 후에도 한참 동안 한자의 위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러나 19세기 말 베트남을 완전히 식민지화한 프랑스는 베트남 지배의 최대 장애물인 유교 정신을 파괴하기 위해 `꾸옥 으`의 사용을 적극 추진해 나갔다. 학교를 세우고 `꾸옥 으`로 된 신문을 간행했다. 그러나 베트남 인들은 `꾸옥 으`를 사용하는 것은 프랑스 식민통치에 조력하는 행위라 하여 이를 거부했다. 특히 관료, 지식층 등 구지배계급은 한문, 자남으로 프랑스에 저항하는 논설이나 문학 작품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왕조와 유교 이념의 보위였다. 그러나 1905년 노일전쟁을 전후해 근대 민족주의자들은 민중의 교육을 위해서는 쉬운 `꾸옥 으`가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꾸옥 으`로 수업을 진행하는 신식학교를 세우고 근대 교육을 전개해 나갔다. 즉 전통과 프랑스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프랑스 인이 만들어 준 문자를 사용한 것이다. 이리하여 19세기 말부터 확산되기 시작한 `꾸옥 으`는 20세기에 들어 전국으로 보급되었고 1930년대에는 지식층에서도 수용하기 시작했다. 한문으로 된 전통시는 퇴조하고 `꾸옥 으`로 된 에세이, 소설, 신문 기사 등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그 후 1961년 한 조사에 따르면 `꾸옥 으`의 해독률은 85%에 이를 정도로 베트남에 파고들었다. 이래서 한때는 한자 문화가 창성하던 베트남은 현재 자기 이름도 한자로 못 쓸 정도로 `꾸옥 으`가 공용 문자로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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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제4장 생각하고 나서 행동하는 중국 - 꾸칭생(古淸生).자유기고가
5. 합법적인 클린턴과 합법적으로 보이는 클린턴
입만 열면 법'을 앞세우는 나라가 미국이다. 물론 법은 현대사회를 유지시키는 기본 틀이지만, 미국의 법은 필요에 따라 아주 교묘하게 정도를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 미국의 '대만관계법'이 그 좋은 예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이며 대만은 중국 영토의 일부분이다. 이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며 '중 .미 합동성명'에도 기재되어 있다.그러나 백악관은 따로 '대만관계법'을 만들어 중국에 대한 외교정책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이중작전, 그것도 고의적인 이중작전이다. 어떤 합법정부와 외교관계를 수립하고서.그 정부와 대치하고 있는 정부 내의 한 지역과 또다른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법리학적으로도 성립되지 않을 뿐 아니라, 도의적으로 보더라도 군자가 할 짓은 못된다. 미국도 분명히 법을 만들기는 만든다. 예를 들어 백인 경찰이 흑인을 구타하고서도 무죄로 석방되었다고 치자. 당연히 세계여론은 인권과 인종차별문제를 들어 도의적으로 흑인을 지지하면서 미국 정부가 자행한 인권침해 행위에 대해 비난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해 미국이 탱크를 몰고 파나마에 들어가 그 나라 국가원수를 체포해서 미국의 법정에 세웠을때와 똑같이 방식으로 미국을 대할 나라는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미국내에서 발생한 문제는 전적으로 스스로의 이해에 따라서만 처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다른 나라가 이것을 빌미로 탱크를 몰고 백악관으로 쳐들어가 클린턴이나 페리를 체포한다면 얼마나 신바람나는 일이겠는가. 하지만 백악관이 이 일로 당신을 '자유, 민주, 인권'을 위해 싸운 민주투사로 찬양할까? 나아가서는 당신을 노벨평화상 수상대상자로 노벨평화상위월회에 추천하겠는가?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럴 리 만무하다. 미국은 당신에게 샴페인을 터트려 주지 않을 것이며, 그대신 당신의 머리 위에 원자탄을 터트려 줄 것이다. 도대체 미국이 무슨 특권으로 다른 나라는 할 수도 없는 그런,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을 할 수 있는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란.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 수단, 북한. 쿠바 등의 나라는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무뢰한 국가'이며. 그들은 상식 밖의 일만 저지르기 때문에 골치 아픈 존재들이라고 생각한다.그렇다면 미국의 '대만관계법'과 같은 법도 중국을 골치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미국은 도대체 '대만관계법'과 같은 법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는가? 이것은 아마도 풍부한 경험과 뛰어난 자질을 가진 미국관계 전문가들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을 '무뢰한 국가'로 볼 수 있을 것인가? 이점에 대해서 는 잠시 논평을 유보해 두자. 하지만 미국이 자행하는 어떠한 짓거리도 상식적으로는 그러한 혐의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만은 말해 두기로하자.
대만 당국은 독립을 모색하고 있으며 심지어 거액의 달러를 들여 유엔의석을 사려 하고 있다. 이것은 동남아에서 수년 동안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던 백악관으로 하여금 하늘이 내린 기회라고 생각하게 했다. 백악관은 한 편으로는 리떵후이에게 추파를 던져. 그가 미국 본토를 방문하도록 함으로써 대만의 사기를 높여 주었다.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대만관계법'을 거울삼아 동남아에서 다시 세력을 떨치려는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 중국군이 동지나해에서의 군사훈련을 통해 대만 당국에게 독립기도를 경고했을 때, 백악관은 '대만관계법'을 빙자하여 대만해협에 그들의 항공모함을 급파했던 것이다. 미국과 대만과의 관계는 도대체 어떤 것인가? 거대한 미국이 왜 타국의 일개 지역에 불과한 곳, 더구나 영문도 모를 관계유지를 위해 애쓰는지에 대해서는 백악관의 고위 정책입안자들도 적절한 답변을 못하고 있다. 예컨대 중국이 미국의 일개 주에 불과한 플로리다를 보호하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킨다면 백악관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분명히 황당해 할 것이다. 왜냐하면 플로리다 주는 미국땅이고 캘리포니아도 미국땅이므로, 중국인들이 가서 그들을 보호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이다. 미국이 그들의 군함을 대만해협으로 몰고 오는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이며 국제법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끝까지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티베트문제를 빌미로 중국의 경제발전을 방해하는 그 어떤 행위도 헛된 것이 될 것이다. 미국은 이미 타락했으며 앞으로 더욱 타락할 것이다. 미국은 더이상 독립을 위해 싸우는 국가가 아니며, 국가통일을 신성한 것으로 보는 나라도 아닐 뿐더러, 파시스트를 반대하고 침략을 반대하는 나라는 더더욱 아니다. 다만 패권주의의 욕망이 극도로 팽창한 나머지 부패하여 자신도 모를 정도로 변질된 나라라고 말할 수 있다. 그외에도 미국의 고질적인 병은 망명자와 범죄자들을 끌어들이기 좋아하는 점이다. 반역자나 형사범은 무조건 백악관 앞에서 자기 나라에 대한 반정부시위를 하도록 부추길 뿐만 아니라 마치 그들을 귀빈처럼 모시는나라가 미국이다. 그리하여 미국은 이로 인해 다른 나라를 성토하는 빌미를 얻게 되는 것이며. 패권주의의 욕망을 채울 수 있는 기회도 얻게 되는 것이다, 미국은 헛짓거리만 일삼으며. 미래에 대한 방향감각조차 없는 비열하고도 가련한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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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친구를 사랑한 개
저는 에스키모의 개입니다. 북극의 에스키모인들과 함께 사는 개이지요. 에스키모인들은 원래의 교통 수단으로 흰곰의 가죽으로 만든 눈썰매를 이용하는데. 그 눈썰매를 제가 끕니다. 가슴과 등허리에 씌운 가죽끈을 마치 한국 여성의 코고무신처럼 생긴 썰매에다 길게 연결하여 신나게 북극의 얼음판 위를 달립니다. 물론 저 혼자 끄는 게 아니지요. 썰매가 작고 탄 사람이 한두 명일 땐 두세 마리가 끌지만 보통 10여 마리가 함께 끕니다. 북극의 태양 아래 길게 그림자를 이루며 빙원을 달리는 우리 모습은 일대 장관이랍니다. 그런데 어느 해부터인가 저는 병이 들었답니다. 이제는 기운이 없어 조금만 달려도 숨이 차고 마냥 주저앉고 싶어진답니다. 그 누구보다도 가슴근육이 발달하고, 그 누구보다도 빨리 달려 주인의 사랑을 독차지했으나 이제는 나이가 든 탓이지요. 한번은 빙하 지역에서 툰드라 지역으로 이동할 때였습니다. 주인은 줄을 짧게 해서 저를 썰매 가까이에다 두고 달리게 했습니다. 썰매가 달리는 속도가 늦거나 친구들이 조금이라도 지치는 기색이 있으면 채찍을 들어 사정없이 저의 등줄기를 후려쳤습니다. 저는 비명을 내지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고통에 찬 저의 비명 소리에 친구들은 젖 먹던 힘까지 내어 힘껏 달렸습니다. 제가 비명을 내지를 때마다 친구들은 채찍이 자기들의 등줄기에 떨어질까 봐 겁이 나 더욱더 열심히 달렸습니다. 예전에 저도 그랬습니다. 병약해 죽어도 아깝지 않은 친구가 있으면 주인은 꼭 그 친구를 썰매 가까이에 두고 가죽 채찍으로 후려쳤습니다. 그러면 저는 그 친구의 비명 소리에 놀라 정신없이 빙원을 달렸습니다. 자칫 잘못 그 채찍이 제 등줄기 위에 떨어질까 봐 얼마나 가슴 졸이면서 달렸는지 모릅니다. 그 처절한 비명 소리가 우리들을 힘껏 달리게 하는 셈이지요. 주인은 바로 그 점을 노렸습니다. 저는 이제 제게 곧 죽음이 다가왔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 동안 주인의 채찍을 맞으며 빙원을 달리다가 죽어간 친구들을 수없이 많이 봐 왔으니까요. 달리다가 쓰러지면 주인은 우리를 그대로 빙원에 버렸습니다. 흰곰의 먹이가 되어도 아무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지난날이 후회스러웠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친구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동안 주인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곰곰 생각했습니다. 친구들은 위해 내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마지막으로 친구들을 위해 살아 볼 수 있을까. 그러자 곧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맞아. 이젠 더 이상 비명 소리를 내지 말자. 주인이 후려치는 채찍이 아무리 고통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더 이상 고통에 찬 신음 소리를 내지 말자. 그러면 친구들을 그 폭력의 두려움에서 건져낼 수 있을 거야. 내 비명 소리를 듣고 떠는 친구들을 그 공포로부터 구할 수 있을 거야. 나의 고통은 나 하나로 족한 거야. 그래서 저는 정말 울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아무리 채찍을 후려쳐도 결코 비명 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북극의 차가운 빙판 위에 쓰러져 저 혼자 버려질 때까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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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는 이스라엘의 여리고 시이다. 고고학자들은 이 도시가 생긴 때를 약 8000년 전이라고 보고 있는데 그 뒤 파괴되었다. 그 다음으로 오래된 도시는 터키의 가지안텝, 그 다음은 예루살렘이다.
볼리비아의 라파즈 시는 해발 3,658미터 위에 건설된 도시이기 때문에 그 정도의 높이에서는 불이 잘 붙지 않는다.
연필 판매고가 올라가면 경기가 좋아진 것이고 아스피린 판매가 증가될 때는 경제 전망이 어두운 상태라고 한다.
1924년에는 포드 자동차의 가격이 265달러였다. 1992년 현재에는 15,000달러 정도이다.
1992년 미국의 외채는 4,000,000,000,000달러에 이른다. 그러나 1948년 한 해 동안 외국에 원조해 준 돈이 46,746,000,000달러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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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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