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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96 호
4339.12.27 (11.08)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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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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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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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나이란 성숙해지기 위해서 치르는 비싼 대가. /톰 스토파드(현대 영국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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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경제/경영/성공 |
세계를 움직이는 127대 파워 - 박태견 지음
POWER 002 독일의 숨겨진 소프트 파워: 베르델스만
대문호 괴테와 악성 베토벤을 낳은 나라. 그러나 20세기 들어서는 제조업 강국으로만 명성이 높을뿐 정보, 미디어 산업에 관한 한은 유럽의 후진국이라는 비아냥을 들어온 나라가 다름아닌 독일이다. 하지만 전통은 하루아침에 쌓아지는게 아니듯, 하루아침에 사그라지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독일의 자랑 베르텔스만Bertelesmann이 이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다. 독일의 최대 미디어그룹인 베르텔스만은 독일 민간방송 창립5년 만에 유럽의 기라성 같은 미디어그룹들을 모두 제치고 매출액 1위를 기록하는 신화를 창출했다. 1993년도 총매출액만 109억5,700만 달러(8조8천억 원)를 기록해 루퍼트 머독의 뉴스 코퍼레이션이나 타임 미러 같은 쟁쟁한 경쟁자들을 멀찌감치 제치고 (포춘)지가 선정한 1994년도 전세계 500대 기업 중 순수미디어분야에서 랭킹1위를 차지했다. 1993년도 순이익은 2억8,900만 달러에 달했으며, 현재 전체 계열사에 4만 8,000여 명이 종사하고 있다. 베르텔스만은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자그마한 중견출판사에 불과했다. 베르텔스만의 창업주는 라인하스트 몬Reinhard Mohn. 1929년에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39년 히틀러에 의해 전선으로 끌려나간 그는 1949년 미군의 포로가 돼 북아프리카와 미국의 캔자스주 등지에서 1946년까지 포로생활을 하는 비운을 겸해야만 했다. 히틀러로 인해 대학진학도 못하고 청춘을 전장에서 썩혀야 했던 그는 당연히 나치즘을 크게 혐오하고 그 대신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에 크게 매료됐다. 특히 그는 포로생활 기간 중 자신에게 읽을거리를 꾸준히 공급해준 미군의 서적 통신판매조직 '이달의 책 클럽' 제도에 홀딱 빠져 출판을 자신의 천직으로 정했다. 독일로 귀국한 직후인 1947년 그는 귀터슬로라는 소도시에서 가업인 성서출판사를 물려받아 베르텔스만을 출범시켰다. 이때부터 자신이 미국에서 보고 배운 서적 통신판매기법 등 선진적 기법을 최대한 활용하고 출판 외에 잡지, 레코드 등의 분야로 영역을 넓히며 꾸준히 사세를 확장해 나갔다. 이같은 토대 구축에 이어 그는 1981년 베르텔스만 그룹을 발족시켰으며, 마침내 1986년 오랜 준비작업 끝에 독일 방송사상 최초로 방송위성을 이용한 민간방송을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1986년 위성통신을 이용한 'RTL 플러스'의 첫 TV방송을 시작한 이래 베르텔스만은, ARD같은 기존의 공영방송 내용에 식상해 있던 시청자들의 폭발적 인기를 끌어 창립 5년 만인 1991년에 이르러서는 독일 전체 3천만 가구의 3분의 2를 시청자로 확보하는 기적 같은 성공을 거두었다. 베르텔스만은 현재 독일 내에 RTL, RTL2, 폭스, 프레미에레 유선TV등 4대 채널을 운영하는 외에 전세계 20여 개 국에 각종 미디어매체를 보유하는 거대 공룡그룹이 됐다. 방송내용은 주로 스포츠, 오락, 특집 기회물에 치중하고 있으나 때때로 비판적인 시사, 정치 프로그램을 방영해 정가를 바짝 긴장시키기도 한다. 수입은 공영방송과는 달리 전적으로 광고비에 의존하고 있으며, 창업주 몬의 뜻에 따라 선진적 종업원 경영참여제를 도입하고 기업의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작업을 다각적으로 진행하고 있어 독일국민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고있다. 몬은 1991년부터 현역에서 물러나 베르텔스만 재단의 이사장으로서 측면 지원사격만 하고 있다. 한편 베르텔스만은 방송에만 국한하지 않고 음반과 출판등 미디어산업 전반으로 속속 사업영역을 넓혀가, "오락 분야에 관한 한 감히 우리와 맞설 상대가 없다."고 큰소리쳐온 미국의 절대야성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 RCA / 아리올라, 아리스타ARISTA 등의 레코드사를 보유하고 있는 베르텔스만 뮤직 그룹의 경우 1992년도에 전속가수인 휘트니 휴스턴과 케니지를 각각 '빌보드차트' 1, 2위에 랭크시키면서 24억 4천만 달러의 놀라운 매출을 기록했다. 휘트니 휴스턴의 빅히트앨범 '보디가드'는 영화의 빅 히트와 맞물리면서 2천만 장이나 팔려나가 음반판매사상 최고기록을 갱신 했다. 또 베르텔스만의 계열 출판사인 미국의 밴텀 더블데이 델 그룹은 세계 최고 베스트셀러 소설가인 존 그리샴, 넌픽션작가인 빌 모이어스 등을 전속작가로 거느리면서 1992년 한 해 동안에만 6억 4천만 달러인 경이적 매출을 기록, 미국 전체 출판사 중 랭킹 2위를 차지했다. 이해에 발표된 존 그리샴의 "의뢰인"은 2,200만 부나 팔려 출판사상 단기간에 가장 많이 팔린 기록을 세웠고 최근에는 영화로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빌 모이어스 역시 넌픽션 부문 랭킹 1위를 차지했다. 이밖에 베르텔스만그룹은 스페인의 레코드사 플라사 이하네스 등 스페인, 브라질, 미국 등 20여개 국에 레코드사와 라디오방송사, 출판사 등을 소유하고 있다. 베르텔스만은 최근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미디어사업을 통해 취득한 최고급 정보를 무기삼아, 국제금융계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미국의무디스 투자서비스에 버금가는 세계적 권위의 신용평가기관을 독일에 건설한다는 야심찬 계획도 추진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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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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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명의사의 명약
저희 어머니는 건강이 좋지 않아 곰국이나 한약을 자주 드시는 편입니다. 이곳저곳 여러 한의원에 갔었지만 그때는 가까운 읍내에 있는 인제 한의원에 어머니를 모시고 가서 약을 지었습니다. 한의원에 가면, 한의사 선생님은 자신의 실력을 과시라도 하듯 금방 진맥을 끝마친 뒤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방전을 쓱쓱 휘갈겨 써 내려갑니다. 그리고 대기실에 잠깐 기다리다가 처방대로 지어준 약을 받아오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한의원은 여느 한의원과 달랐습니다. 한의사 선생님께서는 아주 세세하게 진맥을 하고 어머니의 병세를 듣고, 그것을 종이에 쓰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손목을 잡고 쓸으시며 너무도 자상하게 진료를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에 나는 '좋은 약 효과의 삼분의 일 정도는 그런 친절한 진료에 의해 좌우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료를 받고 난 며칠 뒤 아침에 한의원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약은 잘 잡숫고 계십니까? 배가 아프거나 이상이 있지는 않으셨는지요." 한의사 선생님은 어머니가 한의원을 다녀간 뒤의 병의 차도를 요모조모 물으셨습니다. 아침 청소를 하다말고 나는 참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약사나 의사선생님의 관심어린 대화와 환자를 사랑하는 마음은 약하고 아픈이게게는 명약 못지 않은 좋은 효과를 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머니도 그분 전화를 받은 후 약에 대한 믿음이 더 깊어지셨는지 몸도 한결 가벼워진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김옥자 님/경남 양산군 양산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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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94 - 분석철학의 탄생: G.E.무어와 L. 비트겐슈타인(1873-1958년) 그때 세계에서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1943년: 모스크바에서 미, 영, 소 3국 외상회의 열림
지금은 인문 계통의 철학이 영국에서는 옥스퍼드 대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언어분석을 이끌어온 초창기의 철학자들은 자연과학의 선도역할을 해온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일어났다. 러셀이 그러했는가 하면, G. E. 무어와 비트겐슈타인도 케임브리지의 교수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다 같이 과학적 지식의 뒷받침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확실성 있는 철학이론을 전개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무어(G.E. Moore, 1873-1958)는 과거부터 전통적으로 받아 들여온 철학을 배제하고 새로운 철학의 필요를 느꼈다. 새로운 실제론을 택한 셈이나, 그의 중요한 업적은 철학의 새로운 영역을 지식을 형성하고 있는 언어문제에서 취급하자는 관점이였다. 언어의 잘못과 불필요한 조작 때문에 우리의 지식이 바른 길을 잃고 지적인 낭비에 빠지는 일이 너무 심했다. 경험의 영역만큼의 지식이 있고, 그 지식은 언어적 점증을 거쳐 정확하고 새로운 관념을 창출해낼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그 방법을 제시해주었다는 점보다는 (윤리학 원론(Principia Ethica))에서 실제로 검증해 보여주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문교부의 도움을 얻어 처음 번역해 내놓은 철학책이 바로 이 (윤리학 원론)이었다. 연세대의 정석해 교수가 그 책임을 맡았었다. 그는 이 책에서 '선 이란 무었인가?'를 취급하면서 과거부터 통례적으로 취급해온 관념들을 구분, 분석, 정리하여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갔고, 그 방법으로는 언어적 분석을 적응시켰다. 그래서 그런 방법이 점차 전 철학계로 번지면서 오늘의 영국적인 분석철학을 창출해 내놓은 것이다 미국의 철학자들이 같은 언어를 분석함에 있어서도 논리적 실증주의를 택해 언어의 과학화와 논리적 재구성을 강조했으나, 영국의 철학자 들은 일상언어의 정리와 분석을 통해 명료성을 찿게 되었는데, 이는 무어와 갇은 철학자들의 영향이다. 영국인들은 분석철학이란 언어의 교통정리를 하는 일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우리의 관념과 지식이 사회를 이끌어가며 정당한 표현과 지적 위상을 갗추기 위해서는 생각의 표상인 언어의 정리로 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상식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으며, 철학을 목적삼기 보다는 철학을 생활과의 일치에서 삶을 이끌어올리는 동반자로 취급하는 영국적 성격을 연 학문의 길이었다. 사실 무어가 그 책에서 지적해준 몇 가지 원리와 내용은 상당히 많은 학자들이 그대로 수용해주고 있다. 한때 우리들이 영국에 가 철학강의에 참여하면 대 부분의 철학자들이 언어분석을 중심으로 학술적 토론을 전개시켜가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이에 비하면 비트겐슈타인은 좀더 다른 철학적 방향을 택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출생으로 영국철학자가 된 사람이다. 러셀과 같은 철학 방향을 택했으나, 러셀이 자연 과학적 이론을 철학적 논리주의로 전개시킨 데 비해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그 자체를 연구하는 것이 진정한 철학으로 가는 길이라고 믿었다. 그는 처음에 미국에 있는 철학자들과 같이 논리실증주의를 택했으나, 마침내는 언어의 분석이 철학의 과제라고 자신의 철학적 길을 정리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본다면 비트겐슈타인은 영국과 미국의 철학적 교량을 놓은 공로자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에 와서는 영국학자들보다도 미국의 철학자 들이 더 큰 관심을 비트겐슈타인에게 쏟고 있는 까닭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분석철학은 수많은 철학자들을 탄생시켰다. 지금 우리 나라에서 영미철학을 강의하고 있는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이들의 후계자들로부터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상당히 어려운 문제는 남아있다. 서양어의 철학적 정리나 분석은 그들에 의해 가능할 수 있으나, 그 방법을 어떻게 동양적이며 한국적인 언어분석에 적용시키는가 함이다. 또 언어분석 그 자체로 철학의 임무를 다 했다고는 볼수없다는 철학 본래의 요구와 기대는 여전히 남겨진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들이다. 과학성을 가진 언어는 쉽게 정리, 분석, 검증될수 있으나, 실천철학의 분야는 언어보다도 행위나 삶 자체가 앞서는 경우가 있으며, 종교적인 신비주의나 예술적인 영역의 문제들은 소외시켜도 되는가 함이 문제로 남는다. 언어의 실재, 언어와 형이상학의 문제는 새로운 과제로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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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
'숨바꼭질'의 '숨'은 '숨 쉬다'의 '숨'...'숨 + 바꿈 + 질'
어렸을 때 숨바꼭질을 해 보지 않으신 분은 없으시겠지요? 술레가 있어서 사람이 숨으면 그 사람을 찾는 놀이지요. 그런데, 이 '숨바꼭질'은 원래 그런 놀이가 아니었었습니다. 이 '숨바꼭질'은 '숨 + 바꿈 + 질'에서 나왔습니다. 이때의 '숨'은 '숨다'의 '숨-'이 아니라 '숨 쉬다'의 '숨'입니다. 숨 쉬는 것을 바꾸는 일이니까 소위 자맥질을 말합니다. 물 속에 들어가서 어린이들이 물 속으로 숨고, 다시 숨을 쉬기 위하여 물 위로 올라오곤 하는 놀이지요. 만약에 '숨다'에서 '숨'이 나왔으면 동사 어간에 명사가 붙는 경우가 국어에는 맞지 않습니다.
'비행기'를 '날틀'이라 해서 웃음을 산 일이 있는데, 이것도 '날다'의 어간에 '틀'이라는 명사를 붙여서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 국어의 구조에 맞지 않아서, 그 의도는 좋았지만, 사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도 남쪽의 방언에 '숨바꿈쟁이' 등이 남아 있습니다. 곧 잠수부를 말합니다. 말은 이렇게 그 뜻이 변합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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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사회/문화/인물 |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8장 화려항 명성, 처참한 최후
권력의 줄다리기 - 클레오파트라 / 명성황후 민비
독사에게 맡긴 육체 - 클레오파트라 고대 이집트의 아름다운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를 다스리고 있던 포토레미 오레테스의 둘째 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딸과 아들의 2인 정치를 유언하였고, 당시 궁정 풍습에 따라 오누이를 결혼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중신들의 음모로 클레오파트라는 시리아로 추방당하여 그곳의 여왕이 되었다. 클레오파트라는 포토레미의 군대와 대결하여 장기전에 들어갔고, 로마를 대표한 카이사르가 이를 중재하러 왔다. 그녀의 미모에 사로잡힌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린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클레오파트라를 왕위에 앉힌다. 카이사르는 이집트를 로마의 속국으로 만들 수도 있었건만, 여왕의 포로가 된 채 자신의 임무를 소홀히 하였다. 카이사르는 그녀와의 결혼을 허락해 줄 것과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하여금 이집트의 왕위를 계승하도록 해달라는 법률통과 요청서를 원로원에 제출한다. 그러나 로마 원로원은 그를 배척하였다. 카이사르가 죽자 클레오파트라는 아들 싸시리온과 함께 이집트로 되돌아온다. 카이사르가 죽은 로마에서는 안토니우스와 카이사르의 양아들인 옥타비아누스가 심한 세력다툼을 하게 되었다. 이때 안토니우스는 황금의 나라 이집트를 손에 넣어보려는 야심을 갖고 클레오파트라를 타르소스로 불러낸다. 기쁜 마음으로 아름답게 치장하고 달려간 여왕에게도 다른 속셈이 있었다. 그의 힘을 빌어 불안한 이집트 왕위를 지켜보겠다는 야심이었다. 아름다운 용모, 뛰어난 말솜씨에 매혹된 안토니우스 역시 그녀의 포로가 되어 즐거운 나날만을 보낸다. 그들 둘 사이에는 쌍둥이가 태어났다. 이들에게 시리아와 알메니아, 메디아와 팔시안스 왕국 등을 지배하게 하였다. 로마 사람들은 로마땅을 이집트 사람에게 맡기는 것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고, 로마에 있는 부인(옥타비아누스의 여동생)과는 이혼한 상태였다. 옥타비아누스가 드디어 안토니우스를 원로원에 반역자로 고발하고 클레오파트라에게 도전한다. 클레오파트라는 스스로 함대를 이끌고 그리스의 북쪽 바다인 악티움에서 로마군과 맞섰으나 이집트 군대는 싸워보지도 않고 모두 달아나 버렸다. 대패였다. 사기 충천한 옥타비아누스의 로마 군대가 알렉산드리아를 공격해오자 궁지에 몰린 안토니우스는 독약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클레오파트라는 미리 만들어 놓았던 자신의 무덤 속에 들어가 숨어 버렸다. 약 기운이 전신에 퍼져 죽어가는 안토니우스는 이 무덤의 창문을 열고 뛰어 들어와 클레오파트라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클레오파트라는 무덤 안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음식도 거절하고 약도 거절한 채. 그러나 그녀가 죽으면 아들도 몰살시키겠다는 옥타비아누스의 협박에 잠시 죽음을 단념하려고도 하였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의 전리품으로 로마에 끌려간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다시 자살을 결심하게 된다. 클레오파트라는 시종들에게 독사가 든 상자를 가져오게 한다. 여왕은 눈을 지긋이 감고 상자의 뚜껑 밑으로 팔을 집어 넣었다. 혈관 속에 독이 퍼지자 여왕은 그대로 엎어졌다. 기원전 30년 8월 그믐날이었다. 그녀는 안토니우스의 무덤 옆에 나란히 묻혔다. 39세의 나이였다. 안토니우스는 유언장에 내가 죽으면 클레오파트라의 곁에 묻어 달라 고 미리 써두었다고 한다.
명성황후의 두 토막난 시신 민비는 여흥부원군 민치록의 딸로 어린 나이에(8세) 부모를 잃고 일찍이 혈혈단신이 되었다. 외척 세도정치에 질린 흥선대원군은 민씨의 배경이 미흡하다는 점을 장점으로 꼽아 그녀를 왕비로 간택하니, 그가 조선왕조 제26대 고종의 비 명성황후이다. 열두 살이던 아들 명복을 왕위에 등극시키고,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흥선대원군은 섭정의 대권을 휘두른다. 여러 가지의 개혁정책으로 사회는 점차 제모습을 찾아가는 듯했지만 경복궁의 무리한 중건과 쇄국정책으로 인한 천주교의 박해 등 그는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다. 이에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수완이 능란한 왕비 민씨는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 대원군을 축출하는 작업을 추진한다. 민씨와 대원군의 사이가 벌어진 직접적인 원인은, 궁녀 이씨의 소생인 완화군을 대원군이 편애하여 세자로 책립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최익현의 대원군 탄핵 상소를 민비가 교묘히 이끌어 내며 창덕궁의 대원군 전용 출입문을 폐쇄해 버렸다. 대원군은 양주에 물러앉아 정계복귀의 꿈과 증오심을 함께 키운다. 이때부터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며느리 민비와의 정적 관계는 팽팽한 권력의 줄다리기로 치닿는다. 대원군이 실각하자 민씨척족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한 민비는 고종을 움직여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는 등 일련의 개화시책을 추진한다. 이 개화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던 위 정척사파와 대원군의 세력이 임오군란을 일으켜 그녀를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재빨리 궁중을 탈출한 민비는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에 피신하면서 비밀리에 고종과 접촉하여 청나라에 군사를 요청했다. 그녀의 요청으로 출동한 청국군은 대원군을 납치하여 청나라로 끌고 가 버렸다. 그 후 민비는 친청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 때문에 개화파의 불만이 높아져 갑신정변이 일어나게 되고 일시적으로 개화당이 정권(김옥균의 3일 천하)을 장악했지만 청국군의 도움으로 민비는 다시 정권을 되찾는다. 동학교도 등 농민의 봉기로 정국이 어수선하던 무렵, 일본은 갑오경장에 관여하면서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그녀의 세력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일본의 야심을 간파한 민비는 친러시아 정책을 쓰면서 일본에 노골적으로 대항했다. 이에 일본 공사 미우라는 대원군에게 민비 암살에 대한 밀서를 보낸다. 대원군은 반대하지 않았다. 민비를 진작부터 죽여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측은 대원군을 다시 섭정으로 옹립하고 향후 3년이 지나면 대원군의 손자인 준용을 군주로 삼겠다는 약조까지 해왔기 때문이다. 미우라가 잡은 거사 날짜는 1895년 8월 21일이었다. 그날 새벽 3시, 일본 군대와 다른 구경꾼들까지 합세한 폭도들은 대원군을 옹립하고 대궐로 쳐들어갔다. 밤중에 급습을 당한 군졸들은 싸움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무참하게 죽어갔다. 폭도들은 고종 임금과 민비가 자고 있는 건청궁으로 몰려갔다. 죽음을 각오하고 맞선 궁내대신 이경직은 결국 일본의 총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민비는 사태의 위급함을 보고받고 즉시 복장부터 갈아입었다. 평범한 궁녀의 차림을 하고 도망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민비를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던 폭도들 앞에 누군가 이 분이 중전마마예요 라고 소리쳤다. 그 여자는 궁중 출입이 잦은 일본 여자였다. 폭도들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민비에게로 달려들었다. 총탄이 튀고 칼날이 번쩍였다. 총탄이 날아 심장을 꿰뚫고 칼이 번쩍이며 몸둥이를 동강내고 말았다. 30여 년 동안 국모로서 또 한때는 조선의 전권을 쥐고 호령하던 중전의 어체였다. 그년의 옷을 벗겨라. 누군가 소리치자 중전은 알몸이 되었다(일설에 의하면 고종의 육체를 사로잡은 요부라하여 민비의 하문에 칼날을 꽂아 차마 볼 수 없도록 찢어놓았다고 함). 일본인드은 죽은 민비의 시신을 이불에 둘둘 말아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버렸다. 이 만행을 우리는 을미사변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44세에 죽은 민비는 24년이 지나서야 겨우 남편인 고종의 곁에 묻힐 수 있었다.
클로오파트라와 민비는 39세와 44세의 한창 나이로 비명에 갔다. 이 여인들은 자신의 왕좌를 굳건히 지키기 위해 외부의 세력을 끊임없이 끌어들였다. 동생과 대결한 클레오파트라, 시아버지와 맞선 며느리 민비는 집안 싸움에 외부의 세력을 개입시켜 결국은 대세를 그르치고만 권력지향적인 여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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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50. 여론정치의 천재 강유위의 싱거운 종말
1897년 10월 20일. 독일이 산동성의 교주만을 무력 점령하자 중국 조야는 벌컥 뒤집혔다. 열강의 중국 분할이 임박했다는 위기감이 사대부층을 전율하게 만들었다. 이에 12월에는 러시아 함대가 여순과 대련을 점령했다. 이에 강유위는 상해에서 북경으로 급히 상경, 위기에 대처할 정부개혁을 촉구하는 정치활동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이미 몇 해 전 과거 시험장에서 수험생 700명을 선동해 반정부 시위를 주도한 적이 있는 그의 출현은 북경 정부와 지식인들 모두에게 주목의 대상이었다. 당시 궁중은 40년째 서태후 중심의 수구파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황제인 광서제는 힘을 쓰지 못했다. 아무런 권력 기반이 없던 강유위는 이 외로운 황제야말로 자신의 유일한 권력기반이 될 수 있다고 판단, 황제에게 집요하게 접근해 갔다. 그가 사용한 방법은 주로 상소, 신문, 학회, 출판 등 여론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강유위는 스스로 수차에 걸쳐 제도개혁을 촉구하는 상소를 올렸을뿐 아니라 정부 안에 친구 언관들을 시켜 상소문을 올리게 했다. 정부의 대신들은 그의 상소가 황제에게 끼칠 영향을 우려하여 황제에게는 몇 달이 지난 후에 전달되도록 하는 등 집요한 방해 공작을 계속했다. 강유위는 자신의 상서 내용은 즉각 신문을 통해 발표해 이를 본 많은 지식인뿐 아니라 정부 관리까지도 그의 개혁노선에 끌어들였다. 또 <일본변정고>, <이대피득변정기> 등의 책을 출판해 일본 명치유신과 러시아 피터 대제의 개혁 실상을 선전했다. 특히 <일본변정고>는 황제 광서제가 항상 옆구리에 끼고 다닐 정도로 애독해 후일 광서제 - 강유위 권력 형성의 매개 역할을 했다. 이런 공작을 통해 강유위가 목표로 한 것은 황제와 단독 회담 기회를 얻어 내는 것이었다. 자신의 여론공작이 특히 사대부를 비롯한 지식인들 사이에서 먹혀 들고 있음을 확인한 강유위는 보국회를 만들어 그들을 조직했다. 그리고 이것이 훗날 서양식 의회가 될 것임을 주장했다. 보국회가 열렬한 호응을 받아 전국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서태후 일파는 이를 해산시켜 버렸다. 1898년 4월 서태후의 수족으로 실권을 행사하던 공친왕이 죽자 정세는 강유위에게 유리하게 전개됐다. 이 틈을 이용하여 서태후로부터 권력 탈취를 노리던 광서제는 파격적으로 강유위를 궁중으로 불러 단독 회담을 했다. 강유위는 오랜 소원이 이뤄진 것이다. 강유위는 이 자리에서 `제도국`을 설치해 개혁을 추진하되 그 구성은 신분에 얽매이지 말고 개혁파 인사를 등용할 것과 영국, 일본과 연대해 러시아에 맞설 것 등을 주장했다. 광서제에 대한 그의 첫인상은 그가 생각보다 현명하다는 것이었다. 이후 황제와 강유위는 수구파 관료를 무더기로 경질시키고 개혁을 국시로 공포하는 등 주도권을 잡아 나갔다. 그러나 개혁의 핵심이라 할 제도국의 창설은 서태후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쳤다. 동의를 구하려고 이화원으로 서태후를 찾아간 광서제는 오히려 패위의 위협을 당했다. 이에 개혁파는 원새개로 하여금 황제 직속군을 창설하게 하고 서태후를 제거할 쿠테타를 계획한다. 마침 8월 5일에는 `개명 일본의 영웅` 이토 히로부미가 북경을 방문해 황제를 알현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북경 정가는 개혁파 쪽으로 대세가 기우는 듯했다. 그러나 믿었던 원세개는 거병 계획을 서태후측에 밀고해 버린다. 이에 서태후파는 8월 4일 황제를 연금시키고 이튿날 이토 히로부미와의 회견도 서태후의 간섭하에 이뤄졌다. 이토가 돌아가자마자 서태후 일파는 역쿠테타를 감행, 강유위 체포령이 내리고 정부내 강유위에게 동정적이었던 관리들은 파면 또는 처형했다. 이 와중에서 강유위의 동생 강광인이 처형되고 강유위와 양계초는 북경을 탈출, 일본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일본의 명치유신을 본받아 강한 중국을 건설하려 했던 강유위는 그 힘의 원천을 황제에게서 찾았다. 그가 신문을 만들고 사대부 조직을 만든 것도 이것을 권력의 기반으로 삼으려 한 것이 아니라 황제에게 접근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는 새 시대에는 대중조직과 군사력이 힘의 원천이 될 것임을 간과했다. 따라서 수구파가 광서제와 그를 격리시키고 군사력을 동원하자 강유위의 백일천하는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는 재기하지 못하고 신해혁명 후에도 황제복위운동을 꾀하는 초라한 모습으로 전락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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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제4장 생각하고 나서 행동하는 중국 - 꾸칭생(古淸生).자유기고가
3. 대우를 바라지도 않으며, 해 주지도 않겠다
2차대전 이후 나타난 ' 미국'이라는 새 귀족은 새롭고 기이한 것만 좋아하고 게임의 규칙도 지킬 줄 모른다는 점은 많은 사실을 통해 증명되었다. 미국에는 전통문화에 대한 가치관이 없다. 히피, 펑크와 극단적인 개인주의가 그나마 별 볼일 없는 미국사상의 조류를 이루고 있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미국은 축구시합을 하기 전에 벌써 골문 넓힐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정말로 이렇게 된다면 전통적인 축구경기의 묘미는 미국인에 의해 반감될 것이다. 클린스만, 마테우스, 바조, 산체스 등과 같은 훌륭한 축구선수의 기술도 더 이상 발휘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넓어진 골문은 미국의 삼류 축구선수를 '골 넣는 기계'로 만들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의 권위를 무너트린다. 미국의 상업무역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미국의 최혜국 대우는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 중 가장 근본적인 것은 미국의 패권욕을 채워준다는 것이다. 1980년부터 중국에 무역최혜국 대우를 해준 이후 미국은 그것을 이용해 중국의 내정을 간섭하지 않은 적이 하루도 없었으며, 이것은 아주 왜곡되고 치욕적인 일이었다. 먼저 미국은 전세계의 국가를 1,2, 3등으로 나누었다.부유하면서도 미국의 말을 받아들이는 나라는 1등 국가이며, 2등은 미국과 친근하면서 다른 국가나 지역을 견제할 수 있는 나라, 등은 독립과 존엄을 유지하면서 미국에 복종하지 않는 나라이다. 이등 국가에 대해서 미국은 ' 무역최혜국' 이란 조항을 이용해 상대국에게 각종 밀수품을 반입한다. 중국의 경우를 예로 들면 미 상하 양원은 1년에 한 번 있는 무역최혜국 대우에 대한 토론회에서 미국식의 민주, 인권조항을 함부로 적용시켜 중국으로 하여금 대만과 (西藏)을 포기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런 주권침해 또는 내정간섭과 같은 행위간 무역최혜국 대우란 빌미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중국은 미국이 무역최혜국 대우를 취소하더라도 더 많은 무역 교역국이 있기 때문에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한 중국의 국민들 역시 독립국가 고유의 영토주권 권한까지 포기하면서 미국의 달러를 얻으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미국인들이 잘 알아두어야 할 점이다. 우리가 미국으로부터 최혜국 대우를 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이는 우리가 미국의 경제제재를 받았던 과거에도 우리 경제는 결코 정체되지 않았던 예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의 대미 수출이 감소되면 달러 수입이 줄어들게 되고, 수출품을 생산하는 기업이 위축되어 취업기회도 어느 정도 줄어들게 되겠지만, 이것은 중국이 극복해야 하며 또 극복할 수 있는 한시적인 난관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는 미국의 사정도 중국과 마찬가지이다. 중국의 대미 수출품을 분석해 보면 전적으로 우리만 불리해지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중국이 현재 미국시장에 수출하고 있는 상품의 대부분은 원자재 위주의 농업과 수공업 제품이거나 생산과정에서 환경을 파괴하는 농공업 제품들이다. 자원을 유지하고 환경을 보호한다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면 이러한 제품의 대미 수출감소가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반대로 미국 기업들은 중국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호기를 잃어버리게되고 그들의 맹방이나 경쟁국들이 중국에서 이에 상응하는 이익을 챙기게 될 것이다. 그들은 중국시장을 획득한 후 이를 발판으로 중국의 주변국으로 무역을 확대해 나가 점차 전아시아시장의 점유율이 대거 상승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미국의 기업들은 큰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도 중국시장에서 미국의 경쟁력은 상대국들, 특히 일본보다 뒤떨어지고 있다. 전자제품, 자동차, 공업 플랜트 등에서 일본과 독일은 이미 미국을 앞서나가고 있다. 통신분야에 있어서도 애릭슨과 모토롤라가 반반씩 나누어 차지하고 있다. 중국에서 비교적 경쟁력이 우위에 있는 IBM, 마이크로소프트, AST, 맥도날드,코카콜라등과 같은 회사의 앞날도 결코 밝지만은 않다, 미국이 중국에 대해 계속적인 적대정책을 쓴다면 중국인들이 미국 제품을 안사게 되는 것은 민족감정이나 이해타산을 떠난 자연스러운 행동이고, 특히 중국인에게는 이런 특성이 강하다. 미국은 중국의 문화와 가치관을 이해해야 한다. 설령중국 정부가 미국인들을 관대하게 대하더라도, 중국민들에게는 적의를 가진 타국가의 상품은 사지 않는 오랜 전통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백악관이 주시해야 할 것은, 현 상황에서 항공모함과 핵탄두를 사용한다 할지라도 전지구를 독점하겠다는 몽상은 실현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무역협정의 권위는 더욱 떨어지고. 현명하게 처리하지 못하면 스스로 난처한 입장에 빠지게 될 것이다. 백악관이 다른 나라를 상대로 허장성세를 부리고, 간섭하고, 마음대로 비난하고 있을 때 미국 기업들은 그들이 힘 들여 개척해 놓은 중국시장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 하고 있다. 미국의 기업과 국민들이 백악관의 자의적인 행동과 허영심을 견제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받는 상처는 아주 클뿐만 아니라 치명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인들은 늘 자기편집증을 지녀 왔으며. 백악관 역시 국민들로 하여금 다른 나라를 업신여기게끔 선동해 왔다. 유권자의 표를 얻기 위해 사실을 과장하고 왜곡하여 타국민들의 이익을 해치면 결국 자국민들의 이익도 해치는 결과를 가져 온다. 같은 게임은 세 번 이상 반복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을 백악관은 알아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관중들은 모두 퇴장할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선 무역최혜국 대우라는 낡은 수법도 예외가 아니다. 닉슨의 [평화를 넘어서]는 그가 미국민에게 남긴 '정책유서'라고볼수있다. 경험이 풍부한 이 미국 대통령은 임종을 맞이하게 되면서 아마도 시야가 더욱 넓어진 것 같다.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무역최혜국 대우로 더이상 중국을 곤란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앞으로 20~30년 후에는 중국인들이 미국에 최혜국 대우를 해 줄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 논쟁을 벌일지도 모르는 일이다'라고. 나는 인과응보라는 말을 믿는다. 화해가 되지 않을 때는 내가 오히려 중국민들에게 '원한을 기억하라'고 부르짖을 날이 올 것이라고 확신한다. 지도자의 자리를 유지하는 방식은 먼저 분쟁의 소지를 만들어 놓은 다음 조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가장 졸렬한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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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고슴도치의 첫사랑
밝은 대낮에 산책하기를 좋아하는 고슴도치가 있었다. 고슴도치들은 야행성이라서 주로 낮에는 나무뿌리 밑의 구멍이나 바위틈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슬슬 돌아다니는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친구들이 다 잠든 낮이면 혼자 일어나 숲 속을 산책했다. 그리고 친구들이 기지개를 켜고 슬슬 활동을 시작하는 밤이면 혼자 잠을 잤다. 친구들은 그런 그를 비웃었다.
"너 네 자신을 좀 알아야 해. 넌 고슴도치야. 고슴도치는 고슴도치답게 살아야 하는 거여." "아냐, 난 밤은 싫어. 맑은 바람이 불고 햇님이 있고, 햇살이 눈부신 밝은 대낮이 좋아." "밤에는 달빛이 있어. 별도 빛나고." "아냐. 난 어둠침침한 밤은 정말 싫어."
그는 친구들의 말에는 조금도 귀기울이지 않고 해만 뜨면 일어나 숲 속을 산책했다. 그런 어느 날 아침이었다. 아마 유난히 햇살이 눈부시게 빛난 탓이었을 것이다. 아침마다 산책길에서 늘 만나곤 하던 다람쥐였으나 고슴도치는 그날 따라 다람쥐를 보자 왠지 가슴이 뛰었다. 재빨리 나무 위로 기어오르다가 잠깐 멈추어 선 다람쥐의 그 초롱초롱한 눈빛에 온몸이 다 녹아 버리는 것 같았다.
"다람쥐야, 어떻게 하면 나무 위로 올라갈 수가 있니? 좀 가르쳐 줄 수 없겠니?" "그건 가르쳐 줄 수 없는 일이야. 자기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하는 일이야."
다람쥐는 고슴도치를 쳐다보며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고슴도치는 다람쥐한테 가까이 가고 싶어 나무 위로 오르려고 애를 썼으나 번번이 나가떨어지기만 할뿐이었다. 그날 밤, 고슴도치는 잠이 오지 않았다. 말없이 쳐다보던 다람쥐의 맑고 까만 눈동자와 나뭇가지처럼 탐스러운 다람쥐의 꼬리가 계속 떠올랐다. 고슴도치는 아침마다 더 일찍 숲으로 나가 다람쥐를 만났다. 숲은 언제나 아침 이슬에 젖어 있었고, 다람쥐는 언제나 아침 햇살에 빛나는 나뭇잎처럼 반짝거렸다. 고슴도치는 그런 다람쥐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러다가 물안개가 고요히 피어오르는 어느 날, 고슴도치는 다람쥐에게 말했다.
"난 이 말을 결코 안하려고 했지만, 다람쥐야. 난 너를 사랑해."
그러자 다람쥐가 재빨리 나무 아래로 내려오면서 말했다.
"나도 널 사랑해" "정말" "그럼."
다람쥐는 기다렸다는 듯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고슴도치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고슴도치는 힘껏 다람쥐를 껴안았다. 아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갑자기 다람쥐가 비명을 내질렀다.
"아야. 아야! 이거 놔, 이거 놓으란 말이야!."
고슴도치는 깜짝 놀라 팔의 힘을 풀었다. 다람쥐가 얼른 고슴도치의 품속을 빠져나가면서 소리쳤다.
"넌 웬 가시가 그렇게 많니? 따가워 죽을 뻔했어." "우린 원래 그래. 다들 가시 털이 나 있어." "가시가 있으면 난 싫어. 난 널 사랑하지 않을 거야. 네 몸에 가시가 있는 줄은 정말 몰랐어." "그러지마. 내가 누굴 사랑해 본 건 네가 처음이야." "싫어, 몸에 가시가 있는 한 난 널 사랑하지 않을 거야. 난 널 안을 수도, 안길 수도 없어."
고슴도치는 정신이 멍해졌다. 사랑을 얻게 된 순간에 갑자기 사랑을 잃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굴 사랑한다는 것은 지금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는 것" 이라는 말이 집안에 뱅뱅 돌았으나 그런 말은 하지도 못하고 멍하니 다람쥐만 쳐다보았다. 그러자 다람쥐는 다시 나무 위로 올라가 버리고 말았다. "가시를 없애지 않는 한 날 만날 생각도 하지 마"라는 말만 남긴 채. 그 뒤, 고슴도치는 다람쥐를 만날 수 없었다. 다람쥐는 고슴도치가 나타나기만 하면 어디론가 멀리 도망가 버리고 말았다. 고슴도치는 다람쥐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랑에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알게 된 고슴도치는 허구 한날 눈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곰곰 생각했다. 내가 다람쥐를 사랑하는 한 어쩔 수 없어. 내 몸의 가시 털을 없애는 수밖에. 다람쥐는 나를 사랑하면서도 내 몸에 난 가시 털 때문에 날 멀리하고 있는 것뿐이야. 내 몸에 가시가 없다면 우린 지금쯤 서로 뜨겁게 사랑하고 있을 거야. 내 몸에 가시가 없다면 우린 지금쯤 서로 뜨겁게 사랑하고 있을 거야. 난 다람쥐를 위해 내 몸의 가시를 없애지 않으면 안 돼. 고슴도치는 그날부터 가시 털을 없애기 위해 바위에 몸을 비비기 시작했다. 한 번씩 몸을 비빌 때마다 온몸에 피가 흐르고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고슴도치는 참고 또 참았다. 친구들이 와서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말렸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바위 하나를 벌겋게 피로 다 물들이면서 결국 온몸의 가시 털을 없앴다.
"미안해. 내가 너에게 너무 무리한 것을 요구했구나"
다람쥐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가시를 없애고 찾아온 고슴도치를 안아 주면서 말했다.
"아니야. 난 괜찮아. 난 이대로 행복해."
다람쥐의 품에 안긴 고슴도치는 정말 행복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싶었다. 그러나 고슴도치의 행복은 잠깐이었다. 다람쥐를 짝사랑하는 들쥐가 나타나 고슴도치를 공격해 왔다. 몸에 가시가 없어진 고슴도치로서는 들쥐의 공격을 막을 재간이 없었다. 고슴도치는 사랑하는 다람쥐를 들쥐에게 빼앗기고 만 것이다. 고슴도치는 슬피 울었다. 몇 날 며칠 숲 속에는 고슴도치의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고슴도치의 몸 속에 다시 가시 털이 조금씩 자라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정작 고슴도치 그 자신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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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과 신발, 황영조 선수는 1992년 제25회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지막 날인 8월 10일 새벽 남자 마라톤 경기에서 2시간 23초로 1위로 골임함으로써 대망의 금메달을 따냈다. 그가 선두를 달리던 일본 마라톤의 자존심, 다니구치를 따돌린 이유중에 하나는 경기 도중에 다니구치 선수의 신발의 끈이 풀어졌기 때문이다. 한편 황영조 선수가 신은 신발은 코오롱 그룹이 특별히 제작한 100,000,000원짜리 였다고 한다... 코오롱 상사의 신발개발 연구원 30여명은 이 신발을 만들기 위해 올림픽이 열리기 얼마 전에 선수들의 발모양을 본뜨고 소재 개발에 착수, 선수들이 달릴 때 발생하는 열과 땀을 흡수하는 냉각섬유를 수입해 신발 겉창을 만들고 밑창은 마이크로셀이라는 특수 스펀지를 개발해 냈다. 하지만 55킬로그램, 168센티미터인 황선수의 신체 조건을 고려, 복원력과 경도(단단함)가 탁월한 소재를 만드는게 가장 큰 문제였다. 마침내 지난해 7월 미국 신발 메이커 Nike사의 독점소재인 에바로이 스펀지를 자체개발 ‘마라톤화’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이 마라톤화는 일반 운동화 무게 400그램의 3분의 1밖에 되지않는 140그램이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 캐나다의 벤 존슨은 미국긔 칼 루이스를 이기고 100미터 달리기에서 9초 83초의 벽을 깼다. 그러나 놀랍게도 약물을 복용한 흔적이 발견되어 그 모든 승리와 영예를 잃었다.
만리장성, 지구를 벗어나서 약 289,674미터 지점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만리장성뿐이다.
루브르나 베르사이유 성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에 들어오기 전에 볼일을 미리 보도록 되어 있었다. 정원에 늘어서 있던 수많은 조각들은 소변을 보는 데 적합한 곳으로 사용되었다.
세계를 움직이는 집 백안관은 1800년에 지어졌다. 원래는 ‘대통령의 집(persident's House)’이라 불렀지만 1812년 영국인에 의해 불에 그을려 시커먼 벽에 흰 페인트 칠을 한 뒤부터 ‘백악관(White House)’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공식적으로 호칭되기는 루즈벨트 대통령 때부터였다. 프랑스 건축가 피에르 찰스가 설계했고 132개의 방이 있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만 빼고 2대 존 아담스부터 역대 미국 대통령 모두가 이 곳에서 거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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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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