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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93 호
4339.12.23 (11.04)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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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세계를 움직이는 127대 파워 - 박태견 지음' 의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1994년에 출판되었지만 지금 읽혀도 손색이 없고 저자의 정보수집능력, 고민 등을 볼 수 있습니다. 미래학자, 경제, 사회학자들의 고민 그리고 향후 방향을 제시했던 미래도서입니다. 같이 읽어봤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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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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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나의 관심은 주로 미래에 있다. 여생을 거기서 보낼 것이니. / 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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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경제/경영/성공 |
세계를 움직이는 127대 파워 - 박태견 지음
책을 열며
1980년대 말 냉전 이데올로기가 표류를 시작한 바로 그 시점, 대체이데올로기로서 급속히 일반의 주목을 끌기 시작한 것이 다름아닌 미래학이다. 앨빈 토플러 등 미국 경영, 경제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무수히 쏟아놓은 미래학 서적은, 그후 1990년대 탈냉전과 정보혁명의 융단폭격 아래 국내는 물론, 지구촌 전체적으로 변혁과 새 패러다임의 필요성이 절박해지면서 더욱 폭발적으로 읽혔다. "근육과 자본의 시대는 가고 두뇌의 시대가 왔다"는 '지력사회'출현, 제조업의 몰락과 정보산업의 폭발로 압축 가능한 제3차 산업혁명의 초고속진행, 초국가자본의 전일적 지구촌 지배와 이에 대항한 초국가 시민 파워의 빅뱅, 권력의 새 중추가 될 엘리트 지식노동자군의 집단이기주의 표출, 계급갈등 종언 등 미래학자들이 그리는 21세기상은 어지러울 정도로 현란하고 급박했다. 특히 이들 미래학서들은 종전의 사회과학서 들과는 달리, 지구촌 곳곳의 살아 꿈틀대는 풍성한 실례들을 자유자재로 인용하며 논거를 펼쳐서, 읽는 이들을 주눅들게 만들었다. 필자도 마찬가지 경험을 했다. 그러나 웬만큼 미래학서 들을 훑고 정보홍수의 위압감에서 벗어나면서 몇 가지 의문이 생겨났다. 그 한계도 부분적으로 읽히기 시작했다. 미국 경영학자들이 그리고 있는 미래상은 과연 가치 중립적이며 보편적인가. 정말 계급갈등은 소멸되고 엘리트 두뇌집단이 자본과 노동자군 위에 군림하게 될까. '제3의 물결'로 불리는 세기말의 초정보혁명은 과연 인류의 빈곤과 갈등, 대립을 해소하는 기폭제가 될 것인가. 또 그들이 자신의 논거로 인용하는 자료들을 과연 믿을만한 것들인가. 만에 하나, 자의적으로 이용한 부분은 없는가. '지금 이곳'의 우리 시각에서 전면 재검토해 봐야 할 의문들이었다. 그런데 정작 이같은 의문들을 풀려고 하자, 무엇보다 크게 부딪쳤던 한계가 정보의 절대부족이었다. 과연 지금 지구촌 곳곳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이 진행중인가. 권력이동이 급속히 진행될 격동의 21세기에 지구촌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구체적 주역'들은 누구일까. 미래학자들은 자신의 논법을 증명하기 위해 무수한 정보들을 자유자재로 인용한다. 그러나 그들이 책에서 소개하는 정보는 편린에 불과하여, 총체성을 발견하기 힘들다. 목이 말랐다. 그러던 중 1994년 초 한 낭보에 접했다. 프랑스의 리베라시옹, 미국의 크리스찬 사어언스 모니터, 일본의 요미우리신문 등 전세계의 30대 주요 신문과 잡지사가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국제언론 신디케이트인 월드 미디어 네트워크World Media Network가 공동 프로젝트로 탈냉전 지구촌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각 분야의 대표적 조직과 인물 127개를 '월드파워센터'로 선정, 명단을 발표한 것이다. 미래의 지구촌 주역을 가려내기 위한 범지구적 지적 탐구의 시작이었다. 1970년대에 학자 중심의 로마 클럽 등이 행하던 범지구적 과제를 정보수집력과 동물적 후각이 한층 발달한 언론이 떠맡고 나선 것이다. 현재 파리에 본부를 두고 있는 월드 미디어 네트워크에 가입한 언론사는모드 30개사이다. 이들은 모두 정치권력과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객관적 보도와 불편부당한 가치평가를 추구하는 정통언론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기존의 대다수 국제언론 모임이 발행인, 편집인들의 친목모임적 성격이 강하거나 제1세계 언론 중심인데 반해, 이 네트워크는 제1세계 언론뿐 아니라 제3세계와 구동구권 언론들까지 골고루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해 지구촌 언론의 공통 관심사와 인류의 보편과제를 공동 취재한다는 실천적 성격이 강하다.
세기적 대작업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필자는 그후 수소문 끝에 외국의 한 라인을 통해 이들이 선정한 '127대 월드 파워센터'의 명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이상의 자료 입수는 불가능했다. 이때부터 국내외 자료 수집과 직접 취재, 각계 전문가들의 도움을 바탕으로 한 기나긴 정보사냥이 시작되었다. 초기의 취재 목적은 어디까지나 필자의 공부와 기사 작성을 위한 기초공사였다. 그러나 취재를 하면서 21세기를 재단하는 월드 미디어 네트워크의 독특한 시각과 국내에 실상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21세기 주역들의 움직임을 소개하면 '정보 빈곤'에 시달리는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내놓게 된 책은 바로 반년여에 걸친 이같은 정보사냥의 1차 결실이다. 취재를 진행할수록 새삼 놀란 사실은 127대 파워센터의 가공할 파워와, 이들을 10개 파워집단으로 묶어낸 월드 미디어 네트워크의 탁월한 안목이었다. 이들은 지존의 서방 중심적 미래학서 들이 간과한 지구촌 곳곳에 숨겨져 있는 미래파워들을 정확히 집어냈다. 또 현재 아무리 외형이 거대하다 할지라도 미래를 선도할 파워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판단되는 세력은 과감히 명단에서 배제했다. 미국과 일본, 유럽의 내노라 하는 울트라 제조업체들이 거의 이 명단에 끼이지 못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들은 또 기존의 미래학자들이 주로 기업 연구에 치중해온 반면, 국제시민파워와 원리주의 세력, 신 군사파워, 심지어는 국제범죄단까지도 향후 지구촌을 움직여 나갈 핵심변수로 설정함으로써 말 그대로 지구촌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균형 잡힌 시각을 제공하고 있었다. 탈고하고 나니 정말 몇 년만에 제대로 '큰 공부'를 했다는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뒤적일수록 부족한 게 많다. 127대 파워 가운데 팔레스타인 자치협정 체결로 해체된 런던그룹 같은 경우는 굳이 소개할 필요가 없어 제외했고, 조사내용이 빈약한 몇몇 항목도 제외했다. 소살리토(미국), 미래공동체전망소위원회(벨기에), 아스트리드(영국), 이브라임 루고바(구 유고), 존 라울스(미국), 마리오 베타티(프랑스), 페트초라 수도원(러시아), 에디르 마세도(브라질) 등이 제외된 항목이다. 전적으로 필자의 과문 탓이다. 그럼에도 언제까지 원고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어 작업내용을 공개하기로 마음먹었다. 부족하나마 이 정도 정보와 시각이라도 필요로 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이다. 미래학은 관념학이 아닌 현실학이어야 한다. '창조적 혼란'과 '파괴적 혼란' 사이의 절대기로에 선 우리에게 이 책이 올곧은 좌표설정의 디딤돌이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일천구백구십사년 십일월 박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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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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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 사람들 사이에 피어나는 작은 들꽃들
아저씨의 빵집은 수리중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 어귀에 어느 날 조그만 빵집이 새로 생겼습니다 그 앞을 지나노라면 고소한 빵 굽는 냄새가 입안 가득 군침을 돌게 했습니다. 진열장엔 여러 가지 종류의 빵들로 가득했습니다. 윤기가 반지르르 흐르는 초콜릿빵, 길고 재미있게 생긴 막대 빵, 그리고 얼기설기 얽힌 곰보빵까지...... 동네 꼬마들은 유리창에 다닥다닥 붙어 빵의 개수를 헤아리기도 했습니다. 퇴근 길에 빵집에 들러 빵들을 구경하며 빵을 고르는 것에 어느 새 재미를 붙였습니다. 어린 동생들도 늘 저녁 시간 무렵이면 나를 기다렸습니다.그 빵집은 곧 동네에서 인기 최고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막내 녀석이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크림빵을 마다하는 것이었습니다.
"누나, 나 이 빵 안먹어. 이 빵 만드는 아저씨 얼굴이 이상하대."
느닷없는 동생의 말에 영문을 몰랐습니다. 동생은 그 빵집 주인 아저씨의 얼굴이 괴물같기 때문에 빵을 안먹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문은 온 동네에 퍼졌고 그 빵집엔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졌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 집에서 고소한 빵을 맛있게 사 먹었습니다.
"얼굴이 무슨 상관이람, 맛만 좋으면 됐지."
그리고 동생들을 꾸짖었습니다. 사람은 얼굴이 아니라 마음씨와 솜씨로 봐야 한다고 말입니다. 다음날 어김없이 빵집에 들렀습니다.
"아주머니 안 계세요?" 나는 등을 보이고 서 있는 한 남자에게 물었습니다. "예 잠깐 나가셨습니다.." 머뭇거리듯 말하는 그 남자의 얼굴은 화상으로 온통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이런, 이 아저씨가 주인인가봐!' 몹시 당황한 나는 그냥 빵집문을 나섰습니다 나도 차츰 빵집을 찾는 횟수가 줄어들었고, 동생들 보기가 민망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아침 교회를 다녀오다 보니 그 빵집은 문이 닫힌 채 '수리중'이라고 쓰여진 작은 종이가 붙어 있었습니다. '수리중?' 뭘 수리한다는 말인가. 아저씨 얼굴을 수리중인 걸까? 그런데 정말 수리할 것은 우리 마음이 아닐까? 그날 이후 나는 그 빵집의 빵을 더 이상 맛보지 못했습니다.
박진구 님/경기도 부천시 삼곡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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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91 - 사회학의 방법론 정립: M.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 (1905년) 그때 세계에서는 1901년: 제1회 노벨상(뢴트겐 등) 시상 1903년: 미국, 라이트 형제 비행기 발명 1904년: 러, 일 전쟁 발발
막시밀리안 베버 혹은 막스 베버 (Maximilian Weber, 1864년 4월 21일 - 1920년 6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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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J.S. 밀은 철학자였다. 철학사를 서술하는 사람은 누구도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오귀스트 콩트는 철학자이면서 사회학자였다. 철학사에서는 중심인물로 취급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 소개하는 막스 베버는 철학자이기 보다는 사회학자로 꼽히는 사람이다. 독일에서 대표적인 사회철학자를 찾는다면 K. 마르크스를 거론해야 하겠으나, 마르크스는 다른 장에서 취급한 바 있다. 그러나 베버의 위치는 상당히 중요하며 어떤 철학자들보다도 관심과 존경의 대상이 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사상가의 한 사람으로 거론해보는 것이다. K. 야스퍼스도 베버가 작고했다는 소식에 접하고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더 큰 학문적 업적을 기대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한 가지 얘기해두고 싶은 것은, 우리 나라 학계와 사상계는 철학자가 따로 있고, 신학자가 별도로 있는가 하면, 역사학자도 별개의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으로 취급하기 좋아한다. 그것은 마치 논과 밭을 구분지어놓고 여기는 내밭, 저기는 그 사람의 논으로 보는 것이 보통 이나, 서구사회에서는 큰 농장을 만들어놓고 이쪽에는 밀과 보리를 심고 저쪽에는 콩과 옥수수를 재배한다는 식과 같이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좁은 의미의 철학자들만을 철학의 영역에서 취급하나, 저들은 영향력이 큰 "철학적인 분야"의 학자들을 더불어 연구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런 위상에서 본다면 M. 베버의 역할은 대단히 큰 것이었다. 내가 잘 아는 선배친구 한우근 서울대 교수는 철학을 연구하려고 생각했다가 능력의 한계가 나타나지 않을까를 근심했다는 것이다. 그때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읽고 역사로 전공 방향을 바꾸었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 책을 읽는 사람은 사회, 역사, 철학의 모든 분야에서 깊은 의의를 깨닫게 될것이다. 50년대에 하버드의 탤컷 파슨스라는 사회학자가 이 책을 영어로 번역한 뒤부터 미국에서는 본격적인 사회학의 시대가 열렸다고 학자들은 얘기하고 있다. 대단히 주목할 만한 저작이었다. 서울대학 사학과의 중진 교수들이 대학원에 있을 때 제일 먼저 윤독한 책이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었다고 사학과 친구들로부터전해듣기도 했다. 베버는 사회학의 방법론을 정립시켜준 학자였고, 그 방법에 따라 저술한 것이 이 책이었다. 콩트와 같이 철학자이며 주관적인 이론을 앞세운 것도 아니며, 밀과 같이 전통적인 철학을 계승, 발전시킨 것도 아니다. 치밀하게 과학적인 재료와 분석력을 갖고, 왜 프로테스탄트 사회가 카톨릭 사회보다 경제적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그것이 성공적인 자본주의 정신을 탄생시켰는가를 다각도로 고찰해주고 있다. 한때는 마르크스에 도취되어 베버를 멀리한 느낌이 있으나, 앞으로는 한 번쯤은 읽어야 할 고전적인 책이라고 누구나 인정하고있다. 사회철학과 사회과학을 나누어 본다면 베버는 그 둘을 포함한 중간의 사회학자였다고 보아 좋을 것 같다. 우리는 여기에 그 방법과 내용을 소개할 필요는 느끼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연구방향과 자세이며, 어떤 주장이나 방향을 강요하거나 제시함이 없이, 독자들의 사고와 사색을 넓게 수용하면서 안내해주는 책이라는 점이다. 특히 거기에는 프로테스탄트의 신앙과 근로정신의 문제, 재물과 재산에 대한 기독교적 가치관, 삶의 다양성 속에서 평가되어야 할 경제관과 이념 등이 타당성 있게 함축되어 있다. 만일 동양의 학자들이 어째서 유교 전통사회가 불교 전통사회보다 경제적으로 우위를 차지해왔으며, 같은 불교라고 해도 대승불교 사회가 소승불교 사회보다 경제적으로 앞서 있는가를 고찰 하려한다면 베버의 이 방법론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연구는 부분적인 경제학보다 더깊은 배후의 과제로 떠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도 때떄로 경제학과는 문외한이면서 기업인들에게 "자본주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 같은 강연을 할 때에는 베버로부터 얻은 암시가 중요했음을 느끼곤 한다. 만일 "열심히 일해서 소득을 올리되, 그것은 나와 가정을 위한 소유가 아니라 이웃과 사회를 위해 기여하는 것이다."는 정신이 확립된다면, 자본주의는 가장 우수하고 앞선 경제체제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해도 크게 잘못되지는 않을 것이다. 베버는 그런 점에서 암시와 이상을 보여주는 사상가였다고 보아 좋을 것 같 다. 여기에 또 하나의 사회사상가로 취급해보는 이유가 뜻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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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
'메리야스'(내의)는 어디에서 나온 말일까요?
날씨가 추워졌습니다. 이제는 내의를 입어야 할 때가 되었지요? 우리가 흔히 '내의'를 '메리야스'라고 하지요. 이것은 본래 '내의'의 상표 이름이었습니다. 스웨덴에서 온 medias(한 켤레의 양말이란 뜻)란 상표가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는 '내의'란 뜻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습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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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사회/문화/인물 |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7장 떠도는 자의 노래
실명의 화가 - 박수근 / 도미에
박수근 [朴壽根] 1914∼1965. 서양화가. - 사진은 창신동 집에서 (195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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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화가 도미에와 1960년대를 살고 간 우리의 토속적 민중화가 박수근은 가난의 어려움을 딛고 독학으로 그림공부를 하여 최상의 예술경지를 이룩해 낸 입지론적 인물들이다. 만년에는 불행하게도 두 사람 다 시력장애를 일으켜 실명하는 고통을 당하였다.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난 박수근은 아버지의 광산사업 실패로 양구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을 일찌감치 포기해야만 하였다. 그대신 혼자서 산과 들로 쏘다니며 연필 스케치와 수채화 훈련을 쌓았다. 열세 살이되던 해 밀레의 만종을 원색 도판으로 처음 본 박수근은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하느님 저도 이 다음에 커서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 주옵소서. 반 고흐도 밀레로부터 자신의 그림을 출발하였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박수근도 밀레로부터 출발하였던 것이다. 그의 예술은 가난한 서민들의 성실한 삶을 일관되게 주제로 삼고 있다. 그의 작품 <골목> <풍경> <절구> <판자짐> <노상> 등은 쓸쓸한 여운을 끌며 토속적인 분위기를 전해 준다. 절구를 찧거나 맷돌질을 하거나 어린 아이를 업고있는 시골 아낙네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다. 인물의 무표정한 단순화와 대담한 생략, 그리고 직선의 기하학적 비율로 구성되는 평면의 특질, 거기에 얽은 마마자국처럼 모래흙이 뒤범벅이 된 것 같은 한국적 질감의 마띠에르. 놀라운 그의 이러한 미술세계는 누구에게도 배운 바 없이 혼자서 독창적으로 발전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평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는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슬하에서 자랐다. 틈만 있으면 그는 땅 위에 담벽 위에 그림을 그렸으며, 그림 연필 대신 뽕나무를 잘라 태워서 목탄을 만들어 썼다. 가난 속에서 밥짓기, 나무하기 그리고 동생들을 돌보면서 신문과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미술관계 자료를 꼼꼼히 읽고 기사를 나름대로 스크랩하며 전시회, 미술평론 등 미술정보를 통해 자신의 예술에 대한 안목을 혼자 키워 나갔다. 열아홉 살이 된 이 시골 독학생의 그림 <봄이 오다>가 놀랍게도 조선미술전 서양화부에 입선되었다. 어린애를 업고 절구질하는 <일하는 여인>이 두 번째 입선. 제16회에서 22회까지 해마다 입선되었고 1953년에는 <집>이 특선, 59년에는 추천작가가 되었다. 프랑스의 도미에는 마르세이유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루소의 사상을 신봉하는 무명의 혁명적 시인이었다. 아버지의 실패로 그는 학업 대신에 변호사 사무실에서 급사생활로 가족의 생계를 떠맡아야 했다. 소년시절을 그는 법률사무소에서 지낸 탓인지 그의 그림에는 법정, 변호사 등의 체험을 작품화한 것이 많았다. 시민의 권리를 옹호한다는 미명하에 온갖 죄악을 저지르는 법률가들을 그는 사악한 위선자로 표현했으며 돈키호테와 산쵸판사, 노래하는 삐에로, 천대받으며 굶주리고 있는 어릿광대, 곡예사들을 즐겨 다루었다. 박수근이 생계를 위해 미 8군 피엑스에서 초상화를 그렸듯이 그는 발자크의 소설에 삽화와 만화그림을 그려 넣었다. 가난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그림 그리는 일이 전부인 것처럼 보였다. 그림에 몰두, 스승 없이 독학으로 혼자 수련을 쌓아 나갔다.
도미에 [Daumier, Honore-Victorin] 1808. 2. 20/26 프랑스 마르세유~1879. 2. 11 발몽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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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에는 드라크르와에게서 내가 당신 이상으로 존경하고 칭찬한 화가는 없었습니다. 라는 편지를 받았다. 가끔 미술 평론을 쓰던 보드레르에게도 그의 유화는 일찍이 인정을 받은 바 있었다. 예리한 필치로 풍자화를 많이 그렸다. 64세 무렵부터는 시력 장애로 점차 눈이 보이지 않았다. 친구 코로(풍경화가)의 도움에도 그이 만년 생활은 극도의 궁핍과 실명속에서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71세로 사망하기까지의 7년 동안은 암울 그 자체였다고 한다. 박수근도 가난과 여러 가지 내면적 고독을 이기려고 거듭된 과음을 하여 신장과 간을 다치고 그로 인해 왼쪽 눈의 백내장을 앓으면서도 진작 치료하지 못했다. 사물의 대상을 마치 촛종이를 통해서 보는 것 같다 고 했다. 눈의 안압이 높아 심한 고통을 겪다가 악화된 후에야 수술을 받았다. 재수술 과정에서 시신경이 끊어져 눈을 아주 못보게 되고 말았다. 49세였다. 그 후 오른쪽 한 눈으로만 그림을 그렸다. 게다가 간을 몹시 앓으면서도 제작생활을 감행하여 제13회 국전에 <할아버지와 손자>라는 작품을 출품하게 된다. 1965년 간경화와 응혈증을 일으켜 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한 달 뒤 퇴원하여 집에 돌아 온 5월 6일의 새벽 1시였다.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 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며 그는 51세를 일기로 우리들 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아내 김복순은 이렇게 회고했다. 하루는 저녁에 들어오더니 내가 오늘 버스 안에서 보니까 광주리장수 아주머니들도 다 털속치마를 입었던데 당신만 안입었어. 하며 마음에 걸려 하셨다. 마지막 운명하는 날도 내 걱정을 하며 당신 속치마 라고 하였다. 외출했다가 돌아올 대 먼 발치에서 우리집 용마루만 보아도 어떻게 사랑스러운지 모르겠다. 고 한 박수근의 말을 그의 딸 인숙은 회고했다. 항상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예술을 위해 가정이나 생활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꾸준히 창작에 몰두하여 해마다 거르지 않고 작품을 제출하는 성실성을 보였다. 통 말이 없어 누가 물으면 아! 그래 그렇게 하지. 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한쪽 눈만으로 그림을 그린 화가가 박수근 말고 또 있다. 호생관 최북, 그림을 얻지 못한 어느 귀인이 그를 협박하자 최북은 대노하여 남이 나를 손대기 전에 내가 나를 손대야 하겠다. 고 하며 제 눈 하나를 찔러서 외눈이 되어버렸다. 조선조 말기 오원 장승업은 고종 임금의 설득에 하룻밤에 꼬박 새워 말 떼를 그렸다. 그러나 그 달리는 말에 생동하는 기운이 없다고 하면서 그도 스스로 제 눈 하나를 찌르고는 방랑의 길에 올랐다. 화가의 눈은 혹사가 아니면 이렇게 수난을 당했다. 고갱도 만년에 시력을 잃었으며, <수련>의 연작으로 유명한 모네도 시력을 잃게 되어 늘 검은 안경을 쓰고 다녔다. 양쪽 눈이 백내장으로 거의 실명하다시피 되었다. 드가에 관하여 뽀올발레리는 이렇게 썼다. 눈을 너무 많이 써서 시력을 잃자, 그의 정신은 방심상태와 절망상태 사이를 왔다갔다 했고 광태의 되풀이가 늘었다. 난 죽음만 생각하고 있어 라는 그의 말. 나이가 들어 그토록 재능있는 사람이 황폐해 가는 것보다 더 슬픈 것은 없다. 여성 혐오자로서 발레리나를 즐겨 다룬 드가는 70세에 거의 장님에 가까운 눈으로 파스텔을 칠한 <발레장면>을 마지막으로 그렸다. 이 그림을 그린 지 13년이 지나 83세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시력의 악화로 유화제작을 진작 포기했으니 그때의 나이는 56세였다. 화가가 눈이 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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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47 수에즈 운하가 영국의 소유가 되었던 속사정
수에즈 운하는 아프리카 동북부의 아시아 접경 지대에 있으며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세 대륙의 중요한 통로 구실을 하고 있다.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함으로써 거의 전 세계를 연결하고 있는 이 운하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다른 말이 필요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이 수에즈 운하가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 과정은 너무나 간단했다. “삽시다.” 디즈레일리 수상의 이 한마디가 이후의 역사를 바꾸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수에즈 운하는 원래 프랑스 사람인 레셉스에 의해 1869년 완공되었다. 완공된 이후에는 프랑스 투자가들과 이집트 왕의 공동 소유가 되었다. 그러자 수에즈 운하 건설에 냉담한 반응을 보냈던 영국은 다급해졌다. 이 운하의 개통으로 인도로 가는 길이 희망봉을 돌아가는 것에 비해 절반으로 줄어들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운하는 `인도에 이르는 생명선`으로서 영국의 상업적 이익에 매우 긴요한 것이 되었다. 개통 이래 이 운하를 가장 많이 이용한 것도, 이 운하에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인 것도 영국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영국은 운하의 주식을 살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기회가 왔다. 이집트의 왕이 자기 지분을 팔려고 내놓았던 것이다. 파리에서 공부한 적이 있던 당시 이집트 왕 이스마일은 이집트를 개화시키려고 열심이었다. 그는 행정, 법률 등을 정비하고 철도, 전신, 운하 등의 건설에 열중했다. 또한 수도 카이로를 비롯한 도시를 서구풍으로 정비했고 군사적 팽창도 꾀했다. 하지만 이러한 사업에는 돈이 많이 필요했고 그것은 주로 유럽의 은행가로부터의 부채로 충당했다. 부채는 늘어났고 세금을 올려 걷어도 이자 갚기에도 모자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재정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이스마일은 1875년 수에즈 운하의 자기 소유 주식 17만 6,602주를 시장에 내놓고 프랑스에 매입 의사를 타진했다. 그런데 당시 프랑스로서도 이 주식을 살 형편이 못 되었다. 1870년 프랑스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해 50억 프랑의 배상금을 물어야 하는 지경에 빠졌고 이러한 사정은 1875년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1875년 11월 14일 일요일 저녁 영국 수상 디즈레일리는 유태인 재벌 로스차일드의 저택에서 집주인인 라이오넬 로스차일드와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집사가 전보를 가져왔다. 이집트 왕이 수에즈 운하의 주식을 팔겠다는 내용이었다. 가격은 400만 파운드.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드디어 수상이 로스차일드에게 말했다. "삽시다.” 다음날인 월요일 디즈레일리는 각료 회의를 열고 각료 전원의 위임을 받았다. 그런데 의회가 휴회중이었기 때문에 예산을 사용할 수 없었다 시간이 없었다. 디즈레일리는 로스차일드에게 돈을 빌리기로 했다. 수상은 빅토리아 여왕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It is yours, Madame(여왕 폐하, 그것은 폐하의 것입니다).“ 이틀 후 이집트 왕 소유의 수에즈 운하 주식이 영국 정부의 소유로 넘어갔다는 것이 신문에 보도되었다. 이후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이집트의 재정에 깊이 관여했다. 하지만 곧 이집트내에서 민족주의 감정이 고조되어 1882년 무력 저항이 발생했다. 영국은 재빨리 무력을 동원한 `일시적 점령`을 감행했다. 하지만 이 일시적 점령은 장기화되어 2차대전 이후까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수에즈 운하는 1956년 나세르 대통령의 국유화 조치에 의해 이집트 소유로 돌아오기까지 영국의 지배 아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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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제3장 시들어 가는 미국, 일어서는 중국
8. 발언을 준비하는 '침묵 속의 다수
닉슨은 '침묵하고 있는 다수'라는 한 마디로 정치 발전을 결정하는 내재적 동력이 무엇인가를 시사해 주었다. 유명인사가 벌이는 정치적 작태는 상당수가 매스컴을 장식하기 위한일종의 쇼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반전운동과 히피족이 그 시대 미국의사회적 분위기를 대표하는 상징물이었다는 점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한참 인기 있는 인사나 유행하는 것들로 인해 진상을 바르게 파악하지 못하는 수가 있다. 마치 내가 당시 절찬리에 상연중이던(포레스트 검프}라는 미국영화를 보고, 혹은 당시 유행하던 {바람 속에 나부끼는 답안}이나 {샌프란시스코} 같은 노래를 반복해 들으면서 오랫동안 무언가를 착각하고 있었던 것도 같은 이치였다. 이 시기에 클린턴은 반전운동에 참가했었다. 그런데 왜 그는 그의 활약 상을 애써 부인하고 있으며, 그가 대마초를 피운 것도 그때의 시대상에 비추어보면 우연이었을텐데 채 또 미국 국민의 이해를 극구 구하는 것일까? 미국이 만든 '국지전'은 여전히 벌어지고 있고, 캄보디아는 지금도 화약연기로 자욱하며, 해안선에서는 예전과 다름없이 계속해서 수색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것이 미국의 기본적인 역사이고 지금의 모습이 아닐까? 그러므로 학생들의 시위나 알라바마에서 일어난 암살사건 등이 신문의 전면을 장식한다고 해서 이러한 것들이 미국의 현실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국인들이 전파를 통해 이러한 뉴스를 전세계에 알리려고 애를 쓰고 있는 데는 자신들의 생명력을 과시하려는 저의가 숨어있는 것 같다. 나는 텐진(天津)에서 생산되는 미국 상표의 콜라를 마시는데 이 콜라는 순전히 미국 이외의 지역에만 팔도록 되어있는 상품이다. 이 콜라는 질릴 만큼 진한 설탕맛이 나지만 미국인들이 마시는 미국 국내용 콜라의 당도는 이렇게 높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또 미국이 우리에게 수출하는 담배에는 자신들이 피우는 담배보다 니코틴이 더 많이 함유되어 있다고 한다. 자아, 이제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의 이러한 착각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겠다. 내 나이 서른이 넘자 나도 '침묵하는 다수'에 가입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만 내 자신이 그다지 조용하지 않다는 것이 그들과 다를 뿐이었다. 나는 방송국의 일로 {미국의 소리} 방송과 업무상 관계를 가진 적이 있었다. 그쪽 사람들은 아주 진지하고 성실했으며, 보내온 자료를 보고는 그들의 재력이 매우 막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나는 그들의 성의와 선심을 매우 고맙게 생각했었다. 나는 그들이 힘을 쓰는 중견세력은 아니었지만 나와 같은 '침묵하는' 중년세대라고 믿으며, 지금까지도 그들이 우리에게 베푼 성의와 업무상의 도움은 아주 유익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여기에서 {미국의 소리}가 중국어는 물론이고 타밀어, 우즈베크어 등의 언어로 끊임없이 아시아 전역에 퍼져 나가지만 뉴스에서 록음악에 이르는 모든 프로그램이 진정으로 우리 아시아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적은 없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또 전세계를 향해 모종의 변화를 힘껏 부추기면서도 다른 한쪽에서 일어나고 있는 심각한 변화에 대해서는 눈을 돌린 적이 없었다. 세계적인 다수가 변화를 원할 때 미국은 말없이 조용하게 있었지만, 지금 이들은 이미 그때처럼 조용하게 침묵만을 지키는 '다수'가 아니다, '침묵하는 다수'라는 개념 혹은 사고방식은 먼저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오랫동안 우리는 정치인들은 천박한 방법을 능수능갈하게 즐겨 쓴다고 생각해 왔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던 이런 천박한 방식이란 밀실정치, 유명인사들의 국가 대사에 대한 살롱회담, 국가의 은밀한 소식을 전해 주는 권위 있는 창구가 따로 있다는 것등이었다. 정치에 관한 이런 얄팍한 견해는 천여 년 동안 이어져 내려 온 정치에 대한 특이한 열정-이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오랫동안 받아왔던 정치적 압력 때문에 생긴 것이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뉴스시간에 보도되는 정치권 소식을 의심하고 있으며, 이에 대해 큰 불만을 가지고 있다. 솔직히 말해 나도 그렇다. 그래도 뉴스에는 국가 발전에 대한 기본적인 소식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대중매체로 전해지는 모든 소식이 어느 정도는 진실하고 무게가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사실 국가 발전이나 사회 기풍의 변화 같은 것은 아주 평범한 뉴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무엇 때문에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는 평범한 사건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미국의 소리} 방송에서 진리를 찾으려고 하는가?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미국의 도덕관과 자유사상을 맹목적으로 숭배하게 하는가? 그들은 저 멀리 떨어져 살면서도. 인공위성 한두 개를 띄워 중국의 후미진 산골에서 흉기를 들고 싸웠던 사건을 흠쳐 보고. 정치국 회의의 모든 발언 기록을 감시하는 척하며, 우리를 약소국으로 취급한다. 그들의 사설은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있을 법한 모든 사건에 대해 제멋대로 지껄이며. 다른 나라의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끼치려고 한다. 냉전 이후 {미국의 소리}는 미국의 마음에 들지 않는 나라에 대해서는 제멋대로 편집된 내용을 방송했다. 우리는 이런 식의 사실왜곡과 그 나라 기자들이 장난처럼 써대는 기사에 이골이 난 지도 오래 되었다. 미국의 매스컴 업계가 호황을 누리고 있고, 방송기법이 그렇게 발달하게 된 배후에는 무엇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반드시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다. 중국의 어느 소설가가 '소설이란 무엇인가? 소설의 언어는 '성경'의 언어와 같다. 소설가는 하느님처럼 말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말이 기억난다. 미국의 방송관계자들은 적어도 중국에 관계된 보도를 할 때는 이런 '성경식' 표현법을 쓰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들의 방송이나 신문기사를 접할 때. 감정적으로나 이성적으로 나쁜 인상을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예를 들어 만약 어떤 사건이 10개의 화면으로 이루어진다고 할 때,미국인은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몇 가지 화면을 편집해서 방송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 10개의 화면 중 그들에게 가장 유리하고 대중에게 가장 인상적일 것 같은 두세 컷을 수차례 계속 중복해서 내보낸다. 그들에게 이롭지 못하다고 판단되는 화면은 가차없이 잘라버리는 것이다. 미국의 신문은 정말 예술작품처럼 훌륭하고 아름답게 편집되어 있다. 그렇지만 나에게 누가 미국신문 볼래?"라고 묻는다면. 미안하지만 그 대답은 'NO, Bye Bye'일 것이다. 특히 미국인이 국제적인 중대한 사건을 여러 차례 왜곡해서 보도하는 것을 본 뒤부터 나는 내 생각이 옳다고 굳게 믿게 되었다. 미국이 이렇듯 사건을 왜곡하는 데에는 모종의 계략이 숨어있는 것이다. 동화 속의 피리부는 소년처럼. 미래에 세계 각국의 지도자가 될 이들을 성 밖으로 유인해 내어 그들에게 쉽게 접근하려는 것이 미국의 음모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방송에 도취되어 스스로 흡족해 하고 있을 때. 세계의 '침묵하던 다수'가 손을 들어 발언하려 하고 있다. 중국은 고립된 발언자가 되어본 적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중국 자체의 존재가 바로 다수인 것이다. 70년대 미국은 중국을 가리켜 '야심은 세계 제일이지만, 그 자신은 3등 국가'라고 비웃었다. 당시 정계의 주요 인물이 중국과 접촉을 할 때, 중국을 동정하고 중국인을 가엾게 여긴 것은 바로 이런 생각 때문이었다. 닉슨은 자질구레한 일에까지 온통 신경을 쓰는 인물이다. 그는 이리저리 둘러대어 이전에 상처받은 적이 있는 쩌우인라이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쩌우인라이가 받은 상처는 이런 것이다. 20년 전 제네바의 어느 빌딩에서 고개를 바짝 쳐들고 다가오는 미국무장관 둘리스에게 쩌우인라이가 악수를 청했다. 둘리스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No!'라고 말하고는 그 자리를 훌쩍 떠나버렸다. 닉슨과 쩌우인라이의 악수는 전후 역사상 가장 큰 세계적인 사건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닉슨이 쩌우인라이에게 황급히 악수를 청하게 된 것은 완전히 그들의 오판 때문이었다. 이 오판으로 인해 그 당시에는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은 것들이 중국과 미국의 상봉이 시작되던 그때부터 엇갈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중국이 날로 부강해 지는 지금에 와서야 미국은 그때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깨닫기 시작했지만, 이미 바람은 불고 파도는 일렁이고 있는 셈이다. 어떤 사람은 중국의 대외원조정책의 변화에서 중국이 국제적으로 행사하는 영향력을 점차 상실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근래의 중국 외교정책은 중국과 상대국 국민에게 큰 공감을 얻어내었다. 중국은 지금 강대국으로서의 외교능력을 함양하기 위한 공덕을 쌓고 있는 중이다. 세계의 모든 해방운동은 예외없이 중국사상의 밝은 햇살 아래서 빛을 보고 있으며 세계의 모든 평화적인 발전은 하나도 빠짐없이 중국의 은혜를 입고 있다. 중국의 인민외교만이 강대국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숭고한 도덕적 풍모와 정의구현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아메리카합중국은 이미 죄악이 쌓일대로 쌓여 전세계로부터 끊임없는 대가를 치르고 있으며, 앞으로는 자신이 지은 모든 죄과를 깨끗이 청산해야 할 시기가 반드시 올 것이다. 미국 국력으로 세계를 마음대로 휘둘렀던 시대의 상징물인 유럽석탄철강공동체, 중앙조약기구( C E N T o), 중앙아메리카농산물회사 등은 지금 더욱 번창한 것도 있지만, 혁명으로 완전히 와해된 것도 있다. 의미심장한 변화가 있는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과거 국제회의장에서 미국의 행위를 비난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미국대표는 항상 오만하게 일어서서 턱을 치켜 들고. 미국에 복종하던 유럽과 제3세계국가 대표들을 이끌고 조직폭력배 두목처럼 퇴장해 버렸었다. 하지만 지금은 미국이 아무리 턱을 높이 쳐들어도 그의 뒤를 따라나갈 나라는 거의 없다. 지난 몇 세기 동안 미국이 도덕적인 타락으로 쌓은 업보에 대해서는 더이상 예언성 발언을 할 필요는 없겠으며, 이에 반해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침묵의 다수'가 의욕적으로 발언하는 성숙한 세계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 그만이다 이 세계는 위대한 중국의 외교시야를 무한히 넓혀 주고 있다. 전체주의 전통으로 인해 미국의 압박을 곱절로 받은 대국, 즉 러시아. 독일. 일본 같은 나라들이 권토중래하기 위해, 중국에게 국제무대에서의 충분한 발언권을 제공하였다. 세계대전 이후 혁명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중소국가, 즉 월남. 쿠바, 남아프리카공화국, 팔레스타인 같은 나라들은 제3세계의 민의를 대표하여 선의와 진솔한 열정으로 중국에 희망을 걸고 있다. 세계의 주요 국가 및 국가 연맹들과 친밀한 교우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을 따져 볼 때, 중국은 미국에 비해 국제적으로 대단히 유리한 위치에 있다. 중국은 세계의 희망이 될 것이다. 20세기 말 현재, 과거 토인비가 했던 예언은 더이상 예언에 그치지 않는다. 다시 그 내용을 명확히 살펴보자.
현재 중국의 경제발전은 70년대 일본의 발전과 무척 유사하다.게 다가 그 속도는 일본보다 빠르다. 중국은 다행히도 멕시코처럼 샛길 로 빠지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중국의 고위지도층에 있는 인물들이 이 위대한 책임을 완수할 수 있는 소질을 이미 다 갖추고 있다는 점 이다. 나라가 발전하고 있는데도 보고도 못 본 척하며 무어라고 떠들어 대는 사람들의 입을 막아야 한다. 과거에는 이런 사람들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 지금은 세상을 가지고 노는 것에 모든 의미를 부여하 고 있고, 과거에 세상을 가지고 놀던 선각자들이 출세하여 국제적인 목소리를 내게 되었다. 중국은 내부적으로 이미 정의가 살아움직이 고 오랫동안 쌓은 공력으로 그 기운이 단전에 모두 몰려 있다, 중국 의 ' 침묵하는 다수'는 자유진영의 번화한 모습을 본 뒤부터 개인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으며, 국가발전의 위대한 기초를 건설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우리 노동의 성과를 재평가할 때가 왔다. 우리 노동의 성과에 대한 가치를 정확히 계산함으로써 우리나라의 가치를 정확히 가늠할 때가왔다. 우리 주위에 보편적으로 흐르고 있는 원한의 정서를 깨끗이 없애고. 미래의 중국을 예찬해야 한다. 물의 흐름에 역행하는 발걸음을 막고, 고통을 겪은 후의 원숙하고 맑은 정신으로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불공평, 어리석음, 미친짓거리, 속임수를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위에서 말한 모든 것과 우리의 앞날을 비추는 환한 불빛은. 똑같이 우리 중국민족의 감정을 풍요롭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화민족에게 강인하고 끈질긴 심지를 북돋아주어 아름다운 21세기로 나아갈 수 있게 하자. 21세기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세계무대에서 활동하면서 '하나가 전부이다[라는 이치가 차츰 현실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중국의 외침은 장차 다수의 목소리가 되고, 중국의 사상과 중국의 경영능력은 전세계에 깊은 영향을 끼쳐 인류의 미래를 이끌어갈 유일한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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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천국의 문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다. 문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 여부를 심사 받기 위해서였다. 봄눈이 내린 그날도 남자 세 사람이 문 앞에서 심사를 받고 있었다. 심사 위원장은 성베드로였다.
"자, 맨 앞에 있는 사람부터 차례대로 오시오."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베드로가 소리치자 맨 앞줄에 서 있던 사내가 베드로 앞으로 썩 나섰다. 그는 검은 양복을 입고 있었으며, 오른손에는 금박을 한 '성경 전서'가 들려 있었다. 표정은 어찌나 근엄해 보이는지 심사를 맡은 성 베드로가 오히려 더 초라해 보였다.
"자넨 무슨 일을 했나?" 베드로가 다짜고짜 사내의 직업부터 물었다. "저는 장로교 목사였습니다. 25 년간이나 주를 찬미하고 불쌍한 우리 인간들의 영혼을 구하는 설교를 해 왔습니다." "으음." 베드로가 한참 동안 신음 소리를 내다가 입을 다시 열었다. "자신의 영혼은 구했는가?" "제 영혼은 지금 천국의 문 앞에 와 있습니다. 할렐루야!" 사내가 넙죽 땅에 엎드려 베드로의 발에 입을 맞추었다. "어어, 이게 무슨 짓인가? 자, 저리 가 있게. 그 다음 사람 들어오시오." 베드로가 목사를 한쪽 편으로 몰아세운 뒤 다음 사람을 불렀다. 이번에는 흰 가운을 입은 사내가 다소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베드로 앞으로 나섰다. "자넨 그게 무슨 옷인가?" "의사들이 입는 가운입니다." "자넨 병원에서 일을 했는가?" "네, 지난 25 년 동안 내과 의사로서 죽어 가는 많은 생명을 구했습니다." "으음." 베드로는 한참 동안 말없이 의사를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자네의 생명은 구했는가?" "구하지 못했습니다. 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분은 바로 당신입니다. 저는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병마의 고통에서 시달리며 죽어 가는 많은 생명들을 구해야 합니다. 저를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사내가 흰 가운을 벗어 땅에 펼치고는 넙죽 베드로에게 절을 올렸다. 그리고는 베드로의 손등에 입을 쩍 맞추었다. "어허, 이게 무슨 짓인가? 저기 저 목사 옆에 가서 서 있게. 그리고 다음 사람 들어오게." 세 번째 사내는 허름한 작업복을 입은 평범한 사내였다. 그는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 성 베드로의 구레나룻에 하얀 눈송이가 내려앉았다가 사라지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자네 무슨 일을 했는가?" 베드로는 앞의 두 사람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저는 시내버스 운전삽니다. 25 년 동안 아무 사고 없이 차를 몰았습니다. 명색이 무사고 25 년의 모범 운전삽니다." "오호, 그래?" 베드로가 감탄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내는 자기 자랑을 너무 노골적으로 했다 싶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허리를 굽혀 베드로에게 절을 하지 않고 손등에 키스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천국의 문 앞에 서서 오직 심사 결과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으음. 으음." 베드로는 몇 번이나 짧은 신음 소리를 토해 내었다. 한참 동안이나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기도 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리저리 문 앞을 거닐기도 하였다. 세 사람의 마음은 초조했다. 눈앞에 지옥의 불길이 어른거렸다. 그때 베드로가 환히 웃은 얼굴로 세 사람을 보고 말했다. "버스 운전사, 자네만 이리로 오게." "네에?" "빨리 들어오게!" 베드로는 버스 운전사에게 천국의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그러자 나머지 두 사내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베드로에게 항의했다. "아니, 버스 운전사는 들어가는데 우리는 왜 못 들어가는 겁니까? 도대체 이런 불공평한 처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수많은 영혼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저는 죽어 가는 수많은 생명들을 구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건 자네들이 평생 동안 한 일보다 저 운전사가 더 많은 인명을 구했기 때문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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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중국 남성들은 긴 여행을 떠나거나 또는 전쟁터에 나갈 경우, 아내의 대음순을 실로 꿰매어 놓았다고 한다. 이는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처방이었음이 분명한 듯하다.
‘Testimony’라는 단어는 testicle(고환)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다. 고대 유태인들이나 로마인들은 오른손으로 고환을 잡은 채 서로 서약하거나 맹세를 하거나, 법정의 증언을 했다고 한다. 고대 일본에서는 두 사람이 서약할 때 서로 고환을 잡은 채 소변을 보았다고 한다.
현대 한국인들은 1년에 적어도 2,000시간을, 일본인들은 2,200시간을, 미국인들은 1,900시간을 일한다고 한다. 그러나 고대 로마인들은 1년에 겨우 1,600시간밖에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고 전해진다.
고대 로마인이나 그리스인은 나이를 계산하는 방법이 매우 특이했다. 남자는 태어난 날부터 한 살로 계산했고 여자는 결혼한 날부터 계산했다. 그러므로 결혼 10주년을 맞이해도 여자의 나이는 겨우 열 살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한 첫 해에 아들을 낳는 여자는 자신의 아들과 나이를 똑같이 먹어 가게 되었던 셈이다. 즉 여자에게는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 생애 최초의 날이 되었던 셈이다.
총각세는 스웨덴같이 복지사회를 이룬 나라에서 지금도 시행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결혼 적령기를 넘긴 노총각에게 특별히 세금을 부과했다. 만약에 30세가 넘도록 미혼으로 남아 있으면 선거권도 박탈 당했으며 누드촌에 들어가는 것도 금지당했다.
2백만년의 화려한 잠에서 깨어나, 1942년 여름 요하네스버그의 대학교수 다아트 박사는 아프리카 타웅그스에 있는 석회암 채석장에서 2백만년 전에 살았던 인간으로 보이는 ‘타웅그스의 아이’의 뼈를 발견하였다. 6 - 7세로 보이는 이 아이는 그로부터 2백만년이란 긴 잠에서 깨어나게 된 것이다. 과연 인간은 2백만년 전에도 존재했을까? 다아트 박사가 발견한 ‘타웅그스의 아이’는 과연 인간이었을까? 이러한 의문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수수께끼이다. 케냐에서 발견된 뼈와 머리뼈는 280만년 전에 살았던 인간의 것으로, 남아프리카 동굴에서 발견된 뼈들은 약 BC10만년 전 인간의 것으로 드러났다. 최근 탄자이아에서 발견된 턱과 이는 약 375만년 전에 살았던 인간의 것으로 보고되었다.
인간이 발견한 가장 오래된 화석은 6억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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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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