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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90 호
4339.12.20 (11.01)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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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현명한 외면보다는 열정적인 실책을 더 좋아한다. / 아나톨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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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정치, 경제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고려시대 권력형 비리의 결정판 ‘영흥방 토지탈점 사건’ - 한정수
우왕 때의 최대 토지탈점 의혹? 우왕 14년 정월 초하루, 고려 조정을 발칵 뒤집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순군 상만호 염흥방의 급보에 따르면 밀직사의 고위관료였던 조반이 반란을 일으켜 개경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즉시 조정에서는 조반의 체포명령을 내렸다. 도대체 백주에서 토지를 마련하여 농장을 가꾸며 나름대로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던 조반이 왜 이렇게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먼길을 달려 개경으로 들어오려 하였을까? 정말로 그는 역모를 꾀하기 위하여 고작 5, 6명 정도의 인원을 데리고 들어왔을까?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의문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조반이 염흥방의 가노인 이광과의 토지 분쟁 끝에 그를 죽이고 이를 해명하려고 개경에 급히 입성하는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염흥방은 그러한 사실을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그의 가노들이 저지른 토지탈점으로 자신의 위치가 흔들릴 것을 두려워 한 나머지 지위를 이용하여 오히려 조반에게 역모를 꾸몄다는 죄목을 뒤집어 씌웠던 것이다. 사실 가노들을 이용하여 토지를 빼앗는 일은 당시 권세가의 토지집적 수단이었고, 이를 수행한 가노들 및 그들에게 줄이 닿는 이들은 주인의 세력을 믿고 전직 고위관료나 현직 지방관조차 무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 바로 ‘조반 역모 사건’이었다. 특히 이 사건이 문제가 된 것은 바로 조반이 밀직사라는 고위 관료출신이었고 그것을 빼앗다가 조반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광은 염흥방의 가노라는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사건에 은폐되어 있는 역사적 진실은 무엇인가.
염흥방이 조반의 토지를 빼앗은 까닭은? 염흥방은 본래 곡성부원군 염제신의 아들로 명문대가의 촉망받는 인재였다. 공민왕 때 과거에 장원급제하였고 학식이 뛰어나 문집인 <동정집>을 남기기도 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정3품의 밀직사 좌대언까지 순탄하게 승진하였다. 그 동안 그는 국학의 재원확보를 성공적으로 이루었고 우왕 때는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면서 외교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그 뒤 그는 밀직제학까지 승진하였다. 그렇지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정치인지라 자신의 능력과 집안의 후광을 갖고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었다. 우왕 2년(1376) 순탄하게 승진을 거듭해왔던 그도 한 차례 정치적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당시 간관인 이첨과 전백영이 권력을 장악하고 정사를 마음대로 하던 이인임과 지윤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 적이 있었는데 염흥방이 연루되어 이인임을 모해한 혐의로 귀양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 염흥방은 가문의 위세로 풀려날 수 있었지만 여기서 그는 심경의 변화를 겪은 듯하다. 아무리 자신이 청렴결백하고 강직하여도 자신의 의지대로 관료생활을 할 수 없으며, 또 그렇게 살아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라곤 귀양살이라 몹시 억울하다고 생각하였다. 곧 귀양에서 풀려난 그는 임견미, 이인임 등과 어울리면서 뇌물 수뢰와 청탁, 권력형 부정축재 등 관리로서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자행하였고 이제 그런 그를 막을 사람은 없었다. 악행에 대한 도덕적 각성이 무뎌지면 아무리 부정한 일을 한들 그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마련이고 또 그렇게 행하기가 십상이다. 이러한 행적은 치명적인 정치적 결함이 되었다. 이로 인해 결국 아버지인 염제신이 세웠던 모든 공로를 무너뜨리고 가문의 문을 닫게 만들었으니, 최상의 위치에서 최악의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차츰 썩은 권력의 냄새에 취한 염흥방은 경쟁하듯 재화를 축적해 나갔다. 모든 상황은 그를 더욱 부추기는 듯하였다. 해바라기성 관료와 뇌물로 얻고자 문 앞에 줄 선 사람들, 유죄를 무죄로 바꾸기 위해 청탁하는 이들이 권력의 맛을 더욱 달콤하게 하였다.가령 평소에 유능한 관리라는 칭찬을 받았던 배원룡이 염흥방에게 아부하여 계림부윤이 되어서 백성의 재물을 긁어 모으고 심지어 쇠스랑까지 실어 고향으로 가져갔다. 그래서 고을 사람들이 ‘철문어부윤’이라고 불렀다. 문어와 쇠스랑의 형상이 비슷해서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염흥방의 이러한 행태는 비단 그 자신만에 그치지 않았다.그의 가노들이 더 위세를 부렸다. 염흥방과 그의 동모형인 최렴의 가노들이 부평에 거주하면서 주인들의 세력을 믿고 횡포를 부리자, 부사 주언방이 아전과 병정을 시켜 그들을 잡게 하였다. 그런데 오히려 가노들이 주민 40여 명을 데리고 아전을 구타하여 거의 죽게 만들었다. 이에 주언방이 직접 징집 영장을 가지고 그 장소에 가자 도리어 가노들이 주언방마저 구타하고 데려간 두 명의 하인까지 마구 때려 이빨을 부러뜨리는 사건을 일으켰다. 물론 뒤에 이사실이 도당에 보고되자 우왕이 관리를 파견해서 그들을 체포하여 모두 목을 베어 죽였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왕이 직접 나서야 했던 것을 보아도 당시 권세가의 힘이 어느 정도인가 알 수 있게 해 준다. 대부분의 권세가도 이와 마찬가지였다.약간의 권력이라도 있고 또 권력가에 줄을 댈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으로 다른 이들을 핍박하거나 속여서 재산을 늘려 갔다. 그래서 개경과 경기의 땅 중에 그들의 토지가 아닌 것이 없었다.이렇게 되자 열흘의 저축도 없게 될 정도로 국고가 바닥이 났다. 염흥방은 나날이 늘어가는 권력과 재화에 심취해 이성적으로 판단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가 배운 모든 경전에서는 이러한 못된 행위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었건만 그는 이 모든 것을 까막득히 잊었다. 그는 언젠가 이부형 이성림과 함께 고향 집에 갔다온 적이 있었는데 그를 따르는 자들이 길을 메웠다. 이 때 어떤 사람들이 연극으로 세상 풍자하고 있었는데, 내용은 극악한 권세가의 가노들이 백성들을 약탈하고 조세를 수취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보고 이성림은 부끄러워 했는데 염흥방은 깨닫지 못하고 그저 좋다고 보기만 하였다. 자신을 풍자하고 있음을 알고 부끄러워 해야 하건만 그는 약에 중독된 듯 그저 즐거워 웃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염흥방 무리의 몰락 권력의 정점에 선 염흥방이지만 그것의 천년 만년 지속될 수는 없었다. 이제 그의 영화는 막을 내릴 때가 되었다. 우왕 14년이 되자 염흥방과 임견미, 이인임 등이 모두 처형당하거나 실각한 것이다. 여기서 조반사건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왕 13년 무렵 염흥방의 가노 이광이 전 밀직부사 조반이 소유한 백주의 전토를 강탈하자, 조반은 그래도 전일에 안면이 있던 염흥방에게 돌려줄 것을 청하게 되었다. 염흥방은 일단 가노가 저지른 일이고 또 조반과의 안면도 있어 그 땅을 반환해 주었다. 그렇지만 주인의 권력을 믿고 주인보다 더한 세력을 부리고 있던 가노 이광은 다시 그 땅을 강탈하고 조반을 능욕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조반은 차마 가노인 이광과 시비를 가리기에는 체면이 서지 않았다. 자신은 정 3품의 밀직제학의 지위에까지 올랐었는데 도대체가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토지도 자신이 그 동안 모은 봉록과 이래저래 저축한 돈으로 마련한 것이었다. 어찌보면 당시의 관인들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그도 관향에 조그만한 농장을 마련하여 근거지로 삼으려 하였던 것이다. 조반은 할 수 없이 이광을 방문하고 사리를 들어 그 반환을 간곡히 청하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이광은 거만을 부리면서 더욱 포학하게 굴었고 이는 결국 참화를 불러왔다. 자신의 입장과 지위가 있는 만큼 조반도 분노를 참지 못하여 수십 명의 기병을 인솔하고 포위한 후 이광을 죽이고 그 집을 불질렀다. 홧김에 했지만 일이 벌어진 후 그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상대는 최고의 권력가인 염흥방이 아닌가. 그는 곧바로 염흥방에게 그 사유를 말하려고 말을 달려 서울로 향했다. 하지만 이미 그 소식과 함께 조반이 기병들과 함께 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염흥방은 크게 노하여 조반이 반역을 도모한다고 무고하여 그를 체포케 하였다. 반역을 도모하였다는 것은 가장 큰 죄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에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 때 심문을 맡은 이들은 소송 대상자인 염흥방과 임견미의 족당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하니 그 심문 결과야 보나마나였다. 이 때 조반의 다음과 같은 진술에서 당시 있었던 부정과 부패, 그리고 그 가노들의 횡포가 잘 나타나고 있어 우리의 관심을 끈다.
6~7명의 탐욕스런 재상들이 가노를 사방으로 보내어 타인의 땅을 강탈하고 백성을 잔인하게 짓밟고 있으니 이것은 대적이다. 내가 이번에 이광을 죽인 것은 오직 나라에 도움을 주고 백성의 도적을 제거하였을 뿐이다. 그런데 내가 반역을 도모하였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염흥방은 그의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참혹한 고문을 가하였지만 조반은 입이 찢기는 형을 당하여도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조반의 억울한 옥사에 대한 전말을 들어 그 사정을 알고 있던 우왕은 곧 염흥방 무리에 대한 조사를 거쳐 최영과 더불어 그 처리를 논의하게 되었다. 더구나 그 동안 그들은 가노를 시켜 수정목(물푸레나무)으로 토지소유자들을 고문하여 그 토지를 강탈하는 일도 있었다. 사람들이 이를 ‘수정목 공문’이라 부르며 조롱하였다. 마침내 우왕은 국가의 군사력을 잡고 있던 최영을 통해 이들을 처벌하고자 염흥방을 순군에 가두고 곧 임견미 등을 체포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임견미는 왕명을 거부하고 도당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함께 반란을 도모하였다. 그렇지만 이미 군사들이 모든 통로를 차단한 뒤였다. 드디어 정권의 향방이 바뀌는 전환점이 마련되었다. 염흥방 무리와 그 처자, 가노들을 처벌하거나 사형에 처하였고, 재산과 각지에 흩어져 있던 농장들을 모두 나라에 귀속시켰다. 이로써 정국은 일단락되었다. 이에 대해 <고려사>에서는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렇게 정권을 마음대로 처리하고 매관 매직하면서 다른 사람의 토지를 빼앗으니 온 산과 들이 이었으며, 다른 사람의 노비를 강탈하니 천백이나 되는 무리가 그러하였다. 심지어는 능침과 궁고, 주현과 전역의 토지에 이르기까지 그들에 의해 점거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또 주인을 배반한 노비들과 부역을 기피한 백성들이 모여드는 것이 연못이나 늪과 같았는데 안렴사와 수령들이 감히 징발하지 못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백성들은 흩어져 도적이 되었고 공사의 재물이 고갈되니 중외에서 이를 갈았다. 최영과 태조(이성계)가 그 소행을 분하게 여겨 한 마음으로 협력하여 우왕을 도와 그들을 제거하니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면서 도로에 나와 노래하면 춤을 추었다.
고려말 토지개혁의 방향 우왕 14년에 벌어진 조반 옥사 사건은 결국 염흥방의 토지탈점과 이를 은폐하려는 기도 때문에 발생하였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하여 당시 집권층들의 부와 권력의 축적 수단이 이러한 문어발식의 토지의 탈점이라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바로 권력형 비리의 한 형태로 보여지는 것이며,이 형태가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라는 점이다.<고려사>에서는 이를 “근년에 이르러서는 겸병이 더욱 심하여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들이 주를 넘고 군을 포괄하면서 산천을 경계로 삼고 모두 가리켜 조업지전이라고 하고는 서로 훔치고 빼앗으니 1무의 주인이 5,6명을 넘으며 한해의 조세가 수확의 8,9에 이르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탈점의 구체적인 방법은 사급전의 사칭, 불법적 탈점, 정상가격을 무시한 강압적인 매매, 권력가에 대한 토지의 기탁, 토지문서의 허위기재 등을 통한 점유, 지방 수령 및 아전들과 결탁하거나 자신들의 가노를 동원하여 전토를 빼앗는 경우 등 매우 다양하였다. 이를 통하여 산천을 경계로 삼을 정도의 농장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이는 모두 권세가의 강력한 전치권력을 이용한 것이다. 따라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치권의 도덕적 각성과 철저한 사정 및 처벌이 요구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올바른 토지제도를 수립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이전에도 토지제도를 개혁하려는 노력은 있었다. 몽고와의 전쟁 이후 불법적인 토지소유에 대한 처벌 등이 추진되었고, 공민왕 때도 신돈을 등용하여 전민변정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만일 이 개혁이 온전하게 추진되어 토지제도의 개혁이 완벽하게 이루어졌다면 문제는 해결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시점에서 염흥방 같은 권세가의 힘이 서서히 대두하여 개혁의 물줄기를 바꾸고, 더 나아가 토지탈점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결국 권력을 매개로 행해진 불법적인 사전과 농장의 확대는 바로 고려식 권력형 비리의 결정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고려도 국가체제를 유지할 수 없었다. 조반사건을 전후하여 사전 개혁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권력형 비리의 주역들은 몰락하고 개혁세력들이 득세하였다. 이들의 주도하에 과전법이 수립되면서, 고려왕조는 망하고 마침내 새로운 왕조가 탄생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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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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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 사람들 사이에 피어나는 작은 들꽃들
혹시 내 걱정할까봐
점심 시간이 될 무렵이었다. 약간 흥분된 모습의 활머니 한 분이 세무과를 찾아오셔서 말씀하셨다.
"어제서야 세금 고지서를 받았어요. 그런데 납부 기한이 며칠밖에 남지 않은 데다가 세금이 너무 많이 나와서 납부기간까지 돈을 준비할 수 없어요. 다음달 초순쯤 할아버지 품팔이 대금을 받는데, 그때까지만 기한을 늦춰 주세요."
딱한 사정이었지만 법으로는 할머니를 도울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드렸다.
"할머니, 고지서를 두고 가시면 제가 대신 세금을 내겠습니다. 그러니 할아버지가 돈을 받아오시면 그때 돈을 가지고 오세요."
그러자 할머니는 공무원이 무슨 돈이 있느냐며 그냥 집으로 돌아가셨다. 며칠 후 납기일이 되자, 사무실은 민원인들로 시골장터같이 복잡해졌다. 그때였다.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저번에 오셨던 그 할머니가 서 계셨다. '세금을 준비하지 못해서 오셨나 보다'라고 짐작하고 있는 나에게 할머니가 반색을 하며 말씀하셨다.
"아저씨, 세금은 방금 내고 오는 길이에요. 그때 아저씨가 친절하게 대해 줘서 어떻게든 아저씨를 힘들게 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돈을 빌려 세금을 내고 혹시나 내 걱정을 하고 있을까 봐 알려 드릴려고......"
그날 나는 무엇보다 값진 마음의 따뜻함을 선물로 받았다.
김경한 님/경북 구미시 송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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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87 - 철학적 인간학의 선구자: 막스 셸러의 "인간과 역사"(1929년) 그때 세계에서는 1929년: 인도국민회의, 자치결성: 뉴욕, 주가 대폭락(세계공항 시작): 영국 플레밍, 페니실린 발견
셸러 [Scheler, Max] 1874. 8. 22 독일 뮌헨~1928. 5. 19 프랑크푸르트암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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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서점에 가면 '철학적 인간학'에 관한 저서들과 논문이 자주 눈에 뜨인다. 오래 전에는 그런 제목들이 별로 없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어디서나 인간학의 문제가 비중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그런 문제의 선구자가 막스 셸러(M.Scheler, 1874-1924)였다. 그는 한때 철학계에 비중 크게 등단했던 후설의 현상학을 따랐다. 그리고는 인간적 체험의 현상학적 분석방법에 의거, 윤리학, 종교철학, 사회철학 분야에 업적을 남겼다. 그의 가치론적 인격주의의 윤리관은 지금도 많은 후계자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는 카톨릭 개통의 철학자였다. 그래서 "인간에 있어서 영원한 것"은 그의 대표적인 종교철학 저서로 널리 읽히고 있다. 그러나 그의 독창적인 업적은 말년에 펴낸 인간학에 관한 집중적인 연구였다. "우주에 있어서의 인간의 위상"은 그의 저명한 저작이었고, 사후에 발표된 "인간과 역사"는 참으로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끄는 책이 되었다. 이러한 셸러의 업적이 문화유형학과 연계되면서 세계적으로 인간에 관한 연구, 특히 철학적 인간학의 연구가 보편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우리는 그의 널리 알려진 "인간과 역사"에서 그의 대표적인 인간관을 소개하기로 하자. 그는 역사적으로 살폈을 때 인간은 다섯 가지의 유형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후반부의 두 가지 인간관은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못한다. 셸러가 지나치게 시대적인 사상에 비중을 두었던 것 같다. 그 하나는 당시 크게 유행하던 초인으로서의 인간관이다. 니체의 초인정신이 널리 소개되면서 앞으로는 그 인간관이 계속 비중 크게 다루어질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일시적인 사상이 수세기에 걸친 인간관과 비교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생물학의 발달과 더불어 인간을 생물학적 견지에서 보았을 때, 덜 발달된 동물의 일종일 수도 있고 기형적으로 대뇌만이 발달된 병적 인간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생물학적으로 보았을 때 그런 판단과 비판을 내릴 수는 있으나, 그런 인간관은 오래 정설로 남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을 제외한 인간관은 긴 역사를 통해 타당성을 갖는 인간관이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 주장과 학설에 공감하고 있다.
그 첫째는 기독교 전통을 계승하는 종교적 인간관이다. 이 종교적 인간관은 구약과 신약을 중심삼는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맺어지는 것이다. 인간은 종교적으로 말하면 타락한 인간이며, 본성적으로 보면 죄와 악에의 경향성과 퇴락성을 내포하고 있다. 비록 교회가 그 뜻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구원을 받아야 할 존재이며, 인간의 본성은 자연과의 관계에서 해결지을 수 없는 역사성과 종말론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인간이 종교적인 타락과 죄악성을 안고 있는 한 계속될 수 있는 인간관이다. 두번째 셸리가 지적하는 인간관은 사고하는 인간이다. 라틴어로 호모 사피엔스(Home spiens)라는 말로 통용되고 있다. 그리스 인들의 전통에 따르는 인간관이다. 인간은 자연적 조건과 더불어 신적인 조건인 이성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것이 곧 사고할 수 있는 인간이다. 이성은 자연에는 없는, 신적 동인을 갖는 인간의 주체다. 세계를 합리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성은 동물적인 충동과 감성을 넘어 이상적인 내용들을 구현하는 정신의 위력과 이념의 창출력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이성적인 가능성은 역사, 민족, 신분을 넘어 불변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하는 인간은 서양사상과 철학의 주류를 만들어왔고 종교적인 전통과 공존해왔다. 세번째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이다. 호모 파베르(Homofaber)라는 말로 통한다. 이 인간은 과학과 기계, 기술에 연결되는 실증주의적이며 매커니즘을 동반하는 인간관인 것이다. 이성보다는 육체적인 기능을 배척하지 않으며, 어떤 때 도구는 신체의 연장적 기능을 돕는다. 이때 말하는 도구는 물체적인 도구뿐 아니라 모든 기호까지도 포함하며, 우리가 개념과 사상을 전달하는 언어도 귀중한 도구의 하나가 된다. 그리고 신체 및 인간적 충동이 그 맡바탕을 만들고 있다. 생식과 번영, 성장과 권력, 생명유지와 영양(경제)적 충동은 인간적 삶의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아직도 M. 셸리의 이 세 가지 인간관은 우리 사상계의 대표적인 인간관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인간학의 문제가 대두되는 곳에서는 언제나 셸러의 업적이 전해지는 실정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철학자의 모든 철학 내용이 그대로 후세에 전달되는 것은 아니나, 창의적이며 선도적인 역사적 업적은 남게 된다는 교훈을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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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
'원숭이'를 '잔나비'라고 하는 까닭을 아셔요?
우리네 동양 사람들은 천간을 따져서 나이를 무슨 띠로 말하곤 합니다. 사람의 난 해를 지지(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의 속성으로 상징하여 말하는 것이지요. 지지 중에 '신'자가 붙은 해(예컨대 '갑신'년)에 태어난 사람을 '원숭이띠'라고 하지만, 이것은 요즈음 젊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고, 옛날 노인들은 '잔나비 띠'라고하셨습니다. 왜 원숭이를 '잔나비'라고 했을까요?
우리 말에 옛날에는(17세기까지도) '원숭이'라는 단어가 없었습니다. 18세기에 와서 한자어인 '원성이'(원숭이 원, 원숭이 성)가 생겨났고 '성'의 음이 '승'으로 변하여('어'가'으'로 발음되는 경우는 많지요. '어른'도 '으른'이라고 하지 않나요?) '원승이'가 되고 이것이 또 변하여서 오늘날'원숭이'가 된 것입니다.
원숭이의 고유어는 '납'이었습니다. 그래서 원숭이를 뜻하는 한자 '원'의 새김도 '납 원'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재다'(동작이 날쌔고 재빠르다)의 형용사형 '잰'이 붙어서 '잰나비'가 되고 이것이 음운변화를 겪어서 '잔나비'가 된 것입니다. 원숭이가 재빠르긴 재빠르지요(여기의 '재빠르다'도 '재다'와 '빠르다'가 합쳐진 말이군요). 아직도 방언에서는 원숭이를 '잰나비'라고도 하지요.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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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사회/문화/인물 |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7장 떠도는 자의 노래
다른 또 하나의 방에서 존재한 영혼 - 이상 / 카프카
이상 [李箱] 1910∼1937. 시인·소설가. 본명은 김해경(金海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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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1910년, 서울 통의동에 있는 할아버지댁에서 태어났다. 사랑채와 행랑채가 달린 건평 150평 정도의 커다란 기와집이었다. 그는 두 살 때 벌써 정신적 충격인 유년기의 정서불안을 겪게 된다. 큰아버지댁에 아들이 없었으므로 양자로 입적된 그는 분가하는 부모를 따라 나설 수 없었다. 핏기 없이 얼굴이 하얀 이 소년은 옷을 버리는 일도 없이 방안에서 그림 장난이나 하며 혼자 놀았다. 이러한 성향이 후일 작품에 영향을 미친다. 두 살 때부터 벌써 <천자문>을 놓고 지 자를 외며 가리켰고, 하루 동안에 한글을 깨쳤다고 한다. 너무나도 조숙한 그리고 자신의 말대로 박제된 천재였던 것이다. 1929년 경성공고를 졸업하고 큰아버지의 알선으로 조선 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취직이 되었다.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하게 된 것은 1930년 조선지에 첫 장편소설 12월 12일 이 연재되면서부터였다. 몸이 좋지 않아 직장 생활을 그만 두고 황해도 배천으로 요양을 떠났는데 거기서 생애에 결정적 영향을 준 금홍이란 기생을 만나게 된다. 요양 생활은 폐결핵을 더욱 심화시키는 자학의 상태로까지 몰고 갔다. 건강만 더 나빠져서 그는 서울로 돌아오게 된다. 그는 10대조의 고성 이었던 통인동 집을 처분하여 종로에 다방 제비 를 차렸다. 금홍을 마담으로 앉혀놓고 다방 뒷방에서 아예 그녀와 살림을 차렸다. 이태준, 김기림, 박태원 등의 문인들이 출입했다.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오감도 를 발표하여 문단과 독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기도 했다. 두 번째 각혈을 하게 되면서 가정을 꾸려야겠다는 자의식이 발동해 1936년 여름, 친구의 여동생 변동림과 돈암동 흥천사에서 혼인을 하게 된다. 비록 가정을 꾸렸지만 궁핍한 생활은 여전했고, 몸은 극도로 허약해지고 있었다. 답답한 현실에서 그는 도약을 위한 탈출을 시도할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차가운 궃은 비가 축축히 내리는 플랫폼에서 결혼한지 반 년도 못된 신부와 동생, 그리고 몇 사람의 친구가 쓸쓸히 지켜보는 가운데 헙수룩한 가방을 들고 그는 기차에 오른다. 그렇게 고국을 떠난 것이 그에게는 마지막이 되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6개월 뒤, 화장된 그의 몸은 유해로 돌아오게 된다. 고국땅 미아리 공동묘지에 와서 묻혔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비참하기 그지 없었다고 한다. 괴이한 사람으로 몰려 낯선 땅 니시간다 유치장 안에 갇혀 추운 겨울을 보내야 했을 때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1937년 3월 중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는 바람에 보석으로 풀려 나오게 되었다. 그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폐병 3기의 상태였다. 도쿄에 있는 친지들이 대학부속 병원에 서둘러 입원을 시켰는데 의사는 어쩌면 젊은 사람을 이렇게까지 되도록 버려 두었을가? 폐가 형체도 없다니 하면서 혀를 차더라는 것이다. 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가 달려갔다. 평소에 그를 알고 지내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이상은 레몬을 사달라고 하였다. 몇몇 친구가 주머니를 털어 레몬을 사가지고 왔다. 그는 새옷으로 갈아입고 손에 쥔 레몬의 향기를 맡으며 주위를 둘러본 후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 그는 종생기 에 이렇게 자신의 묘비명을 썼다. 묘지명이다. 일세의 귀재 이상은 그 통생의 대장 종생기 일편을 남기고 서력 기원 후 1937년 정축 3월 3일 미시 여기 백일 아래서 그 파란만장(?)의 생애를 끝막고 문득 졸하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졸한 날은 한 달이 조금 지난 그해 4월 17일 새벽 4시였다. 그의 대표시 오감도 에 나오는 막다른 골목 그리고 죽기 1년 전에 쓴 날개 에서 보여지는 자폐된 공간, 장짓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내와 완전하게 격리된 하나의 다른 방 에서 혼자 생명의 소진을 겪고 있는 한 남자에게 우리는 자연히 주목하게 된다. 카프카의 작품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리 샴사도 철저하게 격리된 방에 갇혀 혼자 죽어가지 않았던가. 세상과의 단절, 홀로 있음에 힘든 존재였음을 각각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잇는 것이다.
카프카 [Kafka, Franz] 1883. 7. 3 프라하~1924. 6. 3 빈 근처 키를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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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된 한 마리의 벌레 - 카프카
카프카의 대표작 <변신>의 주인공은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간절히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보니 자신이 흉칙한 벌레로(발이 많이 달린 돈벌레 비슷한 것) 변신해 있었다. 의식은 완전히 인간 그대로인데 자신의 말은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수치심에 방문을 안으로 잠그고 그는 숨어 버렸다. 흉측한 그의 모습을 본 가족들도 그를 나오지 못하도록 가두어 버렸다. 그래도 밥만은 제때 누이 동생이 날라다 주었다. 어느 날 손님들 앞에서 누이가 바이올린을 연주했을 때 그 소리에 이끌려 그레고리 샴사는 응접실로 나갔다. 가족들에게 호되게 나무람을 듣고 자기 방을 쫓겨 돌아온 그는 낙심에 빠져 어두운 방에서 까딱도 않고 앉아 있더니, 새벽녘에 혼자 숨이 끊어졌다.
<변신>의 줄거리다. 주인공은 그 동안 가족들을 충실히 부양해 왔다. 그럼에도 가족들에게 버림 받아 밀폐된 세계에 혼자 갇히고 만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밀려난 국외자, 가족관계나 부부의 연대의식을 그들은 오히려 부정하고 일탈함으로써 자유롭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절망 앞에서 스스로 눈을 감아 버리고마는 그레고리 샴사. 날고싶다고 외치는 이상의 절규, 오히려 자유롭지 못한 현실 앞에서 자유롭고 싶어하는 두 작가의 자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폐병이 무거워졌을 때 모든 것에서 해방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고 카프카는 말했다. 두 사람은 부유한 가문에 태어났으나 생활력이 없어 빈한한 삶을 살았고, 심한 폐병과 싸워가며 우울하고 심각한 작품들을 써낸 특이한 작가들이었다. 그리고 신경과민한 폐결핵환자들이었다. 카프카도 잠시 정부기관(노동자 재해보험국에 봉직한 일이 있었는데 폐병 때문에 그만 두고 요양 생활을 하다가 결국 요양소에서 죽고 말았다. 증세가 너무도 악화되어 아편으로 고통을 줄여가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1924년 6월 3일, 빈에 있는 한 요양소였다. 엄격한 아버지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점이 그를 달팽이처럼 내면 지향적인 인간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41세로 생을 마감하면서 미친 듯이 자신의 원고를 찢고 불태우려하면서 이렇게 외쳤다. 내가 한 사람의 작가였다는 흔적을 모조리 없애 버려야지. 그는 체코의 프라하에서 유태인으로 태어났다. <변신> <심판> <성> <아메리카> 등 주로 인간 존재의 부조리에 대한 작품들을 남겼다.
프로스트처럼 혁혁한 심리학자이며 조이스처럼 무의식의 영역에 깊이 파고 들어간 탐험가 라는 에드읜 뮤어의 평도 있었다. 작가들의 생애를 들추어 보면서, 그들의 적지않은 죽음이 폐병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죽을 때, 얼굴에 닿는 비의 감촉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다고 한 미국의 캐더린 맨스필드. 젊은 나이에 로마에서 객사한 시인 존 키츠, 이상, 김소월, 가난하지만 멋쟁이였던 채만식. 눈을 뜨고 죽은 나운규, 결핵의 악화로 연희전문을 중퇴하고 29살에 죽은 김유정. 죽음과 싸우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더블린 요양소에서 죽은 존 엠 싱그. 에밀리 브론테, 조지 오웰, 두보, 카프카, 릴케, 막심 고리끼, 도스토예프스키, 안톤 체호프, 비용, 까뮤, 유진오닐, 일본의 이시가와다꾸보구, 아꾸다가와류노쓰께, 호리다쓰오, 다자이오사무 등이 모두 폐병을 앓았다. 폐병환자에게 있어 성 행위는 흔히들 자살 행위와도 같다고 말해진다. 그럼에도 이 병에 걸리면 오히려 성적 욕구가 더욱 배가 된다고 한다. 고사 직전의 소나무가 솔방울을 많이 매다는 것처럼 생명의 위기감이 조여올 때 더욱 안타깝게 매달리고 싶어지는 성에 대한 욕구, 보존본능 때문에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일까? 정신적인 자신의 눈높이를 향하여 고양되어 있는 정신, 이런 것 때문에 작가들은 죽어도 좋아 하는 식으로 소진되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극도의 체력소모와 영양실조, 무절제한 사생활로 이어지는 음주와 흡연, 불건강한 생활습관, 산고로 인한 노심초사. 그들의 육신은 매미 날개처럼 바싹 마른 껍데기로 남게 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때에는 이 병에 안주해 버림으로써 세상을 외면하려고 한 그들의 도피의식까지도 포함된 경우가 있다. 무엇보다도 폐는 가슴에 슬픔이 많은 사람이 걸리는 병 이라는 말을 나는 주목하고 싶었다. 이 폐병이야말로 예술 지상주의적인 작가에게 있어 예술적 충동을 주는 아주 어울리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말하기도 했다.
나른한 권태와 미열, 그리고 퇴폐와 우수를 동반한, 마치 바다에 떨어지는 저녁 노을과도 같이 핏빛으로 잦아드는 죽음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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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44. 링컨은 노예제 페지론자였나?
미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사람은 링컨일 것이다. 켄터키의 가난한 오두막집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신세계 미국의 대통령 자리에 오른 인물, 흑인 노예를 해방시킨 사람, `인민의, 인민을 우한, 인민에 의한 정부`라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천명한 민주주의자.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강렬하게 남아 있는 그의 이미지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는 노예제 폐지론자였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그러나 그는 노예를 해방시켰다. 1848년경 미국은 대서양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가진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영토팽창과 서부 개척에 따라 이전부터 있어 왔던 남부와 북부의 지역적 차이와 대립이 더 심해져 갔다. 그리고 남북의 대립은 영토의 확대에 따라 새로운 주가 생길 때 그것이 노예주가 되느냐 자유주가 되느냐 하는 문제로 격화되었다. 땅이 넓고 기름진 남부는 식민지 시대부터 대규모 농장이 발달했고 여기에 흑인 노예가 이용되었다. 남부는 이 대농장에서 면화 등을 재배하여 영국에 수출하고 생활 필수품을 수입했기 때문에 자유무역을 추구했다. 이에 비해 북부는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하여 공업이 발달했다. 자본주의적 공업의 발달은 자연히 많은 수의 임금 노동자를 필요로 했으며, 이는 남부의 노예제도와는 대립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북부의 자본자들은 영국의 값싼 공산품이 들어올 경우 자신들의 상품의 경쟁력이 떨어질 것을 우려하여 보호 무역을 요구했으며 산업 발전을 위해 중앙집권적 체제를 주장했다. 더구나 영국의 면방직 공업의 발전은 미국 남부의 면화를 더 많이 필요로 했고 이에 따라 남부 농장주들의 노예에 대한 수요도 더욱 늘어갔다. 1850년 노예 수는 남부 인구의 35%에 이르렀다. 하지만 노예제 확대는 당시의 세계사적 추세에는 역행하는 것이었다. 서인도 제도에서 영국은 1833년에, 프랑스는 1848년에 노예제를 폐지했다. 또한 당시 출판된 스토우 부인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노예 문제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노예의 국외나 북부로의 탈출이 늘어났고 흑인 노예의 해방을 주장하는 백인들도 많아졌다. 미국은 노예제를 중심으로 하여 서서히 분열되어 갔다. 전쟁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지만 그것을 막을 힘은 없는 듯이 보였다.
사태는 1859년 존 브라운(John Brown)의 공격 사건을 계기로 더욱 악화되었다. 존 브라운이라는 사람이 18명의 지지자를 이끌고 연방군의 한 무기고를 습격하고 흑인들에게 봉기할 것을 호소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사형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감리교를 비롯하여 모든 교파가 남북으로 분열되었고 정당들과 연방 의회조차도 노예제 문제를 놓고 분열되었다. 이러한 분열과 위기속에서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사람이 에이브레햄 링컨이었다. 원래 노예제를 인정하는 켄터키에서 태어난 링컨은 노예제페지론자는 아니었다. 비록 노예들에 대해 동정적인 태도를 가지고는 있었지만 그의 염원은 노예제 문제를 놓고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는 남과 북이라는 `두 개의 미국`을 통일하는 문제에 종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태의 발전에 따라 노예제 문제는 전면에 나설 것이었다. 1860년 11월 링컨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런데 링컨의 당선은 남북의 대립을 더욱 심화시켰다. 남부인들은 링컨을 지지한 표의 99%가 자유주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주목했던 것이다. 이미 남부에서는 링컨이 당선되면 연방을 탈퇴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져 있었다. 사우스케롤라이나를 선두로 하여 7개 주가 연방을 탈퇴하여 1861년2월 남부 연합을 결성했다. 링컨이 `나는 남부의 노예제도를 간섭할 의도는 없다... 합중국 정부는 여러분을 공격하지 않는다. 여러분이 먼저 공격하지 않는 한 무력 충돌은 있을 수 없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이러한 애매한 태도는 벌써 효력을 잃은 지 오래였다. 결국 1861년 4월 12일 섬터(Sumter) 요새에 대한 남부의 공격으로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몇 개 주가 더 가담하여 남부 연합은 11개 주가 되었다. 이 전쟁은 4년간 계속되었는데 초기에는 남군이 우세했다. 하지만 북부는 경제력과 인구에서 우세했고 노예제 반대라는 명분에서도 유리했다. 전쟁이 시작되었어도 노예 문제에 대한 링컨의 태도는 여전히 모호한 것이었다.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장군들이 점령 지역에서 노예제를 즉각 폐지하자고 건의했을 때에도 그는 반대했다. 그러다가 1862년 7월이 되어서야 노예 해방령을 선포했다. 그것은 노예제 폐지라는 명분의 실행이라는 측면도 있지만 전쟁의 효과적인 수행이라는 측면이 컸다. 즉 남부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뉴올리언즈와 같이 북군이 미리 점령하고 있던 지역의 노예나 남부 경계주의 노예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또 반란을 일으킨 주라 할지라도 90일 안에 다시 연방에 돌아오면 노예제의 존속은 그대로 인정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러한 링컨의 온건하고 보수적인 태도에 대해 의회의 공화당 급진파와 흑인들은 불만을 가졌다. 1865년 4월 남부 연합의 수도 리치먼트가 함락됨으로써 4년에 걸친 전쟁은 끝났다. 승리를 거둔 링컨은 남부를 관대하게 대했다. 그의 목적은 연방의 단결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암살 이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존슨은 링컨보다 더 관대한 정책을 실시했고 따라서 흑인에게 유리한 법률에 대해서는 거부권을 행사했다. 1863년 1월 1일은 미국의 흑인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날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 날은 시작에 불과할 뿐이었다. 흑인들은 자유를 얻었지만 정치적, 경제적으로 여전히 약자였다. 북부로 이주한 흑인들은 공장에서 일해야 했고 남부에 남은 흑인들은 다시 옛 주인들 밑에서 임금 노동자로 일해야 했다. 더구나 공공시설 이용에서 흑인에 대한 차별을 금하는 1875년의 공민권법은 1883년의 대법원 판결에 의해 무효화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던 백인들은 KKK단 등의 테러 조직을 조직하여 흑인들을 박해했다.
이렇듯 링컨은 개인적으로 비록 노예들의 처지에 대해 동정적이었지만 철저하게 연방의 존립을 위해 행동했고 이러한 그의 행동은 자본주의 발전이라는 북부의 이해 관계를 정확하게 반영한 것이었다. 하지만 과정이야 어쨌든 흑인 노예들은 남북 전쟁을 통해 `해방`되었다. 물론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은 요원한 것이었고 미국의 흑인 문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사회문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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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제3장 시들어 가는 미국, 일어서는 중국
5. 지해의 창을 열어라
달라이 라마가 쓴 책 [개안(開眼) 은 티베트의 지하에서 활동하는 분열주의자들에게 비밀리에 널리 유포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학식이 높은 학자조차도 명료하게 이해하지 못할 정도의 심오한 내용과 사상을 담고있다고 한다. 여기에서 나는 티베트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겠다. 한번은 나와 방송국 동료가 미국친구와 함께 논쟁을 벌인 적이 있는데, 너무나 황당하여 [개안]이라는 책에다 가르침을 청해 지혜의 눈을 떠야 할 것 같다. 이 논쟁은 총칭의 한 식당에서 벌어졌다. '국사(國事)를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금기에 대해 젊은이들은 연연해 하지 않는 법이다.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티베트문제는 미국이 먼저 어렵게 만든 것이라는 서두를 꺼냈다. 그러자 그는 발끈하며 '너희 군대는 당연히 티베트에서 철수해야 해. 그리고 티베트 백성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장래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돼'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 그에게 네가 무슨 근거로 그렇게 예기하는 거야? 본래 티베트는 우리 일이니까 우리는 네가 조금도 끼어들지 못하게 할 수도 있어. 하지만 오늘은 내가 너에게 특별히 마음대로 말하도록 허락해 주겠다. 하지만 내가 먼저 너에게 알려줄게 있다 내가 너에게 고증학과 역사 변천에 대해 얘기해 줄 수는없고, 또 얘기한다 해도 너는 알아듣지도 못해- 나는 라마교 수장의 친척에서부터 농민이나 천민에 이르기까지 많고 다양한 티베트친구가 있어. 각 계층의 친구를 두루 가지고 있는 셈이지. 그들은 각종 이익집단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어. 그들이 나에게 가져다주는 소식은 네가 미국의 각 언론망을 통해서 얻은 소식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어. 티베트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중국의 식민지가 된 적이 없어. 티베트 스스로가 원하여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고 중국의 지도와 통치를 원했고 군대의 주둔까지 받아들인 시간은 너희 조상들이 북미대륙을 정복한 시간보다 훨씬 더 오래 되었어. 역사나 현실은 모두 티베트가 중국임을 긍정하고 있단 말야'라고 말했다. 내 친구도 그에게 '너희가 텍사스와 뉴멕시코를 빼앗은 수단은 떳떳하지 못했고 극단적인 것이었어. 그런데도 너희 미국은 왜 군대를 주둔시켜서 멕시코사람들이 자기들의 장래를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도록 하지?'라고 했다. 그러자 이 양코배기는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뒤집었는데 거기에는, 텍사스 주는 나중에 얻어온 첩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이 미국아이는 어깨를 들썩이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아니야, 아니야. 텍사스에는 모두 미국인이 살지만티베트인과 너희들은 다른 민족이야. 달라이 라마가 얼마 전 노벨평화상을 받았는데 그는 티베트인을 대표해서 중국이 티베트인의 인권을 존중해 주기를 바란다는 말을 했다는 사실을 너희들도 알고 있잖아'라고 말했다. 우리는 참을성을 발휘하면서 그에게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티베트의 정신지도자는 달라이 라마 한 사람에 국한된 것이 아니며. 더구나 '달라이 라마'라는 말도 몽고어에서 파생된 '중앙에서 책봉한 종교의 영수'라는 뜻이야. 티베트인들이 달라이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야. 그러나 유목민들의 막사 안에 종종 달라이와 마오쩌똥 주석님의 사진을 함께 모시기도 하는 것을 너도 봤잖아. 그리고 또 티베트에는 달라이 라마만 있는 것이 아니고 판첸 라마도 있어. 우리도 인권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많아. 하지만 달라이의 선전기구가 민주개혁 이전의 티베트사회를 목가풍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사실과 완전히 달라. 서구의 많은 영화제작자들은 티베트의 가혹한 형벌 장면을 촬영했었는데 그 잔학성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야. 티베트의 종법사회(宗法社會)는 일찍이 흉악하고 잔인한 귀족계층에서 유지되었는데 티베트의 인구가 감소된 것은 이때의 흉악한 노예제도와 관계가 깊어. 달라이가 '인권'을 요구하고 있지만 그것은 서구사회의 지지를 얻으려는 선동책략에 불과할 뿐이야.'-한 미국인이 각성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그에게 이렇게 많은 설명을 한 바보 같은 행동에 대해 지금까지 깊이 후회하고 있다-. 그는 중얼중얼하며 서양식 임기응변의 옹색함과, 문제를 단순화시키는 전형적인 방법으로 얄팍한 비유를 끌어대면서 나의 예봉을 피해 나갔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집에서 자기 마누라를 구타하는데.......'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당신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데..... '예를 들면.......' 내가 바보가 아닌 이상 앞으로는 이와 같이 고등학생식으로 마구 생트집을 잡는 녀석과 논쟁에 빠지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중국인은 부차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말하기 좋아하지만, 중요한 사실에 직면했을 때는 태도가 간결하고 심각해진다. 나는 미국 여론이 이 정도까지의 허위로 사실을 오도하고 있는 데 대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중국의 중앙정부가 티베트 인민들에게 원조를 하고 있다는 중대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그들의 지역경제에 대한 무식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인들은 우리가 해마다 대량의 재물을 티베트로부터 약탈해 간다고 냉소적으로 말한다. 그때마다 우리 중국인은 모두 온순하기만 한 통역자와싸움이라면 질색을 하는 소녀까지 포함하여 분노에 몸을 떤다. 나는 분노를 억제하고 티베트는 낙후된 지역이기 때문에 중앙정부의 재정 수혈은 대단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중국 정부의 돈이 티베트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완강하게 부인하면서 '아니야, 중국은 티베트를 이용한 관광업으로 해마다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어'라고 억지를 부렸다. 나는 '너를 상대하는 내가 바보다'라고 말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폭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이번의 티베트문제에 대한 논쟁은 하나의 코미디로 결말이 나고 말았다. 음악 프로그램의 사회자인 쩌우판(周汎)이 노동자계급 특유의 위엄있는 자태로 일어나 쉴새없이 재잘거리는 미국인에게 입 닥쳐! 네가 여기에서 평화 운운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어! 이 양코배기 제국주의자야!'라고 일갈하였다. 미국인은 즉시 익살스런 투항자세를 지어보였고 우리는 모두 큰소리로 웃어넘겼다. 지혜의 원천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나는 성현을 볼 때마다 많은 곤혹감을 느끼고 있다. 이런 곤혹스러움은 내 자신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온 지구에 넘쳐 흐르는 거짓된 뉴스를 대면하고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출가자는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 14세인 텐진의 '망명정부'가 외부세계 앞에서 모든 티베트 뉴스의 권위있는 보도센터인 것처럼 위장하고 있음을 대할 때, 우리들은 참을 수 없이 궁금한 것이 있다. 성현으로서 지혜를 전달하면서 그는 왜 자식 같은 백성들이 진정한 지혜의 원천을 접할 수 있는 길을 막아버리는가? 또 그가 정치투쟁을 벌이고 있을 때 그의 지혜는 왜 세속의 더러운 기교로 타락하는가? 티베트는 신비의 땅이며 성스럽고 숭고한 설산이 있는 곳이다. 내가 티베트사람보다 더 티베트를 잘 이해하는 것처럼 가장하고 있을 수는 없으나 양원의 까마귀떼 같은 국회의원들이 떠들어대는 앞에서나 미국인에게는 다음과 같은 경고가 반드시 필요할 것 같다. 한 민족의 지혜는 그 나라가 강대국이라 하여 향상되는 것이 아니며, 한 민족의 발언권도 그 나라의 세력이나 경제력이 강하다고 반드시 권위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이는 개개인의 사람에게 나타나는 규율과도 같은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미국인을 보면 그들은 방자하기 이를 데 없으며 남에게 깊은 혐오감을 주면서도 뻔뻔스럽기 그지없다. 이런 점은 민족 전체의 품격에 영향을 미쳐 세계 각국 각 민족이 관련된 국제적 사안을 처리할 때는 그들의 결핍된 교양이 그대로 드러난다. 민족 스스로 가지고 있었던 내재기능의 변화에 대한 경계심의 결핍으로 그들의 의식 심층이 분별없이 본분을 잃고 스스로 제일인 줄 아는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심리를 갖게 된 것이다. 어느 한 민족이 오랫동안 다른 민족을 보살펴 주었고 또 어떤 때는 이런 보살핌이 매우 극진하였다하더라도 때로는 도움 받은 민족이 존경하지는 않는 경우도 있다.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남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어 그것이 효과를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존경심을 유발시키지 못하는 경우와 같다고 할 수 있는데 미국이라는 나라가 하는 짓이 바로이와 같다.
일찍이 300 년 전 드골은 미국의 패권이 유럽을 압살하고 있다고 하였다. 미국은 유럽인들 스스로 자기의 일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하지 않아 유럽과 동방의 나라들이 화해를 하지 못하도록 방해한 셈이라면서, 결론적으로 미국은 모든 방면에 걸쳐 나타나는 장애물이다'라고 지적햇었다. 미국은 다른 나라에 원조를 할 때면 항상 그 반대급부적 보상이 눈앞에 나타나기를 바라는 소인배적 작태를 그대로 드러내 보인다. 다른 대국들과는 달리 그들의 대외원조에는 고상한 인격적 색채가 조금도 보이지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경제, 군사, 문화, 교육에 걸친 물질적 원조나 자원봉사를 제공받게 되는 나라의 정치인과 지식인들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원조에 대해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경계심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나는 세계 각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미국에 대한 저항과 투쟁을 보면서, 한때는 미국 코쟁이들은 대단히 억울할 것이라고 느꼈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자세히 생각해 보자. 가령 루즈벨트 같은 위대한 지도자가 미국을 이끌어가고 있는 시대라면 정계로부터 민중에 이르는 모든 미국인이 다른 국가의 수십억 국민들에게 깊이 축적된 역량에 대해 과연 어떤 모습으로 깊이 생각하고 행동하였을까? 우리는 미국인이 예수가 되어 세계를 광명으로 인도해 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미국인에게는 갖은 고난을 거친 위대한 민족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연민의 정서가 결핍돼 있기 때문에, 식자층으로부터 보통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누구도 다른 민족의 마음속 깊이 파고들 수가 없는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미국은 세계를 영도할 자질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기술주의의 미국은 대포와 폭격기를 들이대며 협박하기를 좋아하고. 물질주의의 미국은 코 앞의 당근으로 다른 민족을 유인하여 자기 식의 울타리 안에서 춤추도록 하는 것을 즐긴다. 지금은 미국의 이런 매력이 쇠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쁨에 겨워 과거의 잠꼬대를 반복하고 있다. 이런 잠꼬대를 지금까지는 대포와 폭격기 그리고 당근을 대가로 삼아 판매했던 것이다. 다리가 백 개 달린 지네 같은 미국이 아직은 그들의 체면을 유지하고 있지만 사상적 배경이 빈약하기 때문에 다른 대국들이나 곧 대국이 되려는 나라가 전세계에 외치는 소리를 막아낼 방법은 없을 것이다. 나는 우리 아버지 세대가 가진 불굴의 정신을 극단적인 형식으로 재현한 이란혁명을 경이의 눈으로 보았고. 엄숙한 인생을 마침으로써 우리 중국청년들에게 스스로 각성하고 경계심을 가지도록 만들어주었던 성전(聖戰)의 희생자들을 존경하는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우리는 지금까지 일본인이 단지 도덕적 이유만으로 원시적인 분노를 일으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오키나와 주민들은 미군의 소녀추행사건으로 일치 단결하여 미 군사기지에 충격을 주었다. 미 제국주의의 역사적 죄업에 대한 필연적인 웅보가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역사의 인과응보가 태평을 구가하는 미국인들에게는 아직 강림하지 않았지만, 오키나와사태로부터 가장 먼저 교훈을 얻어야 할 사람은 우리들이다. 수 십 년 전 미국인이 베이징에서 沈崇이라는 여대생을 강간한 사건으로 대학생 시위가 일어나고 나아가 중국사회 변천에 심각한 후유증을 남기게 된 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은 일본인처럼 그렇게 안락하지도 않고,또 2차대전 종전으로 얻은 이점도 일본이 얻을 수 있었던 것의 만 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런 것보다는 현재 우리가 국가의 기본권마저 위협받고 있는 상황인데도, 고난을 겪고 있는 다른 민족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경계심마저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심히 우려하게 된다.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대만사태를 보는 우리의 심정은 하나의 시험 무대가 될 것이다. 미국 국회에 민의를 대표한답시고 몰려든 까마귀 때 의원들은 '군사적 대만보호'의 보따리를 펼치고 있다.우리가 예상했던 그대로 50~60년대의 대치상황을 재연하는 것처럼 제7함대가 대만해협으로 들어와 순찰하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수억이나 되는 중국 청년들이, 만일 모든 상황이 막바지에 이른다면 용감하게 떨치고 일어나 미국놈들에게 '너희들이 감히'라고 소리칠 말할 뱃심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내 마음속에는 黃尊憲 이 흑기군을 찬양할 때 전쟁의 북소리와같이 고동치던 시(時)가 메아리첫다 . 중국은 열정적인 문학감정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며, 시나 술 같은 영상이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다고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사회가치가 심각하게 변화함에 따라 실용성과 물질문명의 효용성이 우리들의 사유영역을 크게 잠식하였다. 그 결과로 영웅주의적인 태도로 위협에 대웅하기보다는 비교적 현실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짙다. 과연 어떠한 태도가 '현실적인 태도'일까?국가 기반을 이루는 최소한의 요소들이 우리에게 최대의 현실이 될 수 없는 것이라면 다른 무엇을 '현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모두 대만문제가 미국과 무력충돌의 초점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심지어 무력사용으로 인해 온 나라가 후유증을 앍게 되었다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까지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쭐대며 위세를 떠는 미국의 면전에다 우리의 깊고 넓은 역사감각으로 고귀한 분노를 일으킬 것이다. 그때가 되면 우리도 맨발에 쑥대머리를 하고 피투성이의 몸으로 미국식 화살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반드시 이긴다는 것은 추호도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 될 것이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나는 중국대륙에다 골프장을 만든 대만의 어느 사장에게 만일 대만에서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대만독립에 대해 묻는다면 독립에 찬성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는 35퍼센트를 넘지 않을것이라고 대답했다. 기타의 다른 자료를 보더라도 대만독립에 찬성하는 여론은 40퍼센트 수준이 가장 높았다. 30퍼센트가 되었건 40퍼센트가 되었건 간에 이런 여론의 기초자료는 대만 사회현실의 확실한 반영인 것이다. 대만 국민들은 비교적 독특한 정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국 전통과 다른 소동이 일부의 국민에게 나타나면 이런 현상을 가리켜 혹자는 '항로를 잃었다[迷航]'라고 한다. 사실 이런 종류의 항로를 잃는 것은 중화인 민공화국의 국가 의지가 필요해서 잠시 도발한 것이라고도 하며, 혹자는 좀 우아하게 표현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의 확고한 집단민의가 필요해서 잠시 부결한 것이라고도 말한다. 국가에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바로 이런 일이 국가에서 해야 할 것들이 아닌가? 국가의 신성한 위엄과 명망이 단순히 황제의 뒤에 있는 선비들의 자비로움에 의해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슬픈 일이든 기쁜 일이든 국가는 우리에게 이 일은 바로 이렇게 결정됐다고 확고한 태도를 보여 주어야 한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대만은 틀림없이 종속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고 다른 어떤 견해도 있을 수 없다. 리후이탕(李惠棠)이 국제올림픽위원회의 회의장에서 축출당했을 때 그는 미국이 힘 을 쓰면 쓸수록 더 망치게 된다고 말했었다. 미국의 항공모함이 대만해협으로 항해해 왔을 때 실질적으로 괴로움을 받은 쪽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니고 대만이었을 것이다. 대만은 돌연 고립되어 피폐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대만은 겉으로는 '쳐 봐라, 상관없다'라고 말했겠지만 내심으로는 '나는 견딜 수 없이 괴롭다'라고 하였을 것이다. 적어도 대만문제로 우리는 미국과 마음속으로 싸은 일차접전이 있었으며, 이는 양국 국민들 사이에 벌어진 의지상의 충돌이었다. 더욱이 이는 중국 국민들의 가장 기본적인 도덕관에 대한 시험이었다. 천만 보 물러나서 우리의 경우를 가정해 보자. 하느님도 힘이 도덕을 이긴다는 것을 인정한 현실이 되어 정말 전쟁을 치러야만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면,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전쟁에서 당한 것과 가튼 치욕을 겪게 될 것이 뻔한데도 우리는 과연 이를 받아들일 의지가 있는 것일까? 이런 가정은 현실적으로 의의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과 당신의 부인이 공원을 거닌다고 치자. 폭력배들이 나타나 칼로 협박하며 재물을 뺏는 것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고 하자. 그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당신에게 꺼지라고 하면서 당신 부인을 숲속으로 끌고 가려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당신은 반항해 봤자 형편없이 얻어터질 것이란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반항하게 될 것이고 결국은 피투성이가 될 것이다. 보통 인간으로서 이러한 경우에 지혜롭게 대처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유혈이 효과 있는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피를 보게 되면, 폭력배들에게 음탕한 마음이 사라지게 할 수도 있을 것이고, 부인에게 위기를 모면할 용기를 불어넣을 수도 있을 것이며 혹은 자기를 지켜야 한다는 비장한 각오 때문에 수치심을 버리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피를 흘리게 되면 이후 폭력배들에게 복수하려 들 것이기 때문에 이미 폭력배들에게 압박을 가하게 된 셈이다. 네팔의 전 국왕인 마헨드라도 '희생할 뜨거운 피는 우리들에게도 있다"라고 말한 적이있다. 돈키호테식으로 전투를 묘사한 것은 절대 해학적인 의미로 인류를 비추는 것은 아니다. 20세기의 제반상황이 증명하듯 정의는 항상 강권을 이길 수 있으며, 고양된 정신적 이념은 역사의 보답을 반드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이 방면의 도덕적 용기가 절대적으로 결핍된 나라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대만의 일부 세력들이 항로를 이탈할 때 정정당당하고도 강력하게 이를 바로 잡아줌과 동시에 고개를 돌려 칼날 같은 눈초리로 미국을 째려 보며 큰 소리로 혼을 내 주어야 할 것이다. '네가 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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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가장 위대한 예술
그는 '인생'이라는 말을 참으로 우습게 여기는 예술가였다. 그는 책을 읽다가도 인생이라는 낱말이 나오면 공연히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책의 내용이나 저자와는 아무 상관없이 그 책을 마냥 진부하고 유치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말았다. 누구하고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인생이 어쩌고' 하는 말을 꺼내면 그만 그 말을 꺼낸 사람을 유치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이라고 단정했다. 그만큼 그는 인생이라는 말을 뭔가 저속하고 감상적이고 간질간질한 저질 유행가 가사처럼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가능한 한 그 말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굳이 그 말을 쓰지 않으면 안 될 경우라도 있으면 '삶'이라는 말을 대신 썼다. 인생이나 삶이나 크게 다른 말이 아니었으나 그래도 삶이라는 말이 보다 더 고상하고 진지하다고 생각했다. 삶이라는 말속에는 그대로 그가 알 수 없는 위대한 그 무엇이 숨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는 늘 예술과 인생을 분리해서 생각했다. 예술은 인생의 우위에 있는 것이며, 인생은 예술에 수반되는 것쯤으로 생각했다. 나이 마흔이 넘도록 인생을 항상 예술의 하위개념에 두었다. 그러나 그도 결국 고통과 눈물의 세월 앞에, 인생이라는 말이 주는 무게와 감동 앞에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게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예술이란 인생의 한 보잘것없는, 티끌보다 더 작디작은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것은 어느 일요일, 텅 빈 집 뜨락에 내리는 햇살 속에서 혼자 부스럭거리며 인도의 성자 간디 옹의 말씀 한 마디를 읽고 난 뒤였다. 인생은 모든 예술보다 위대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완벽에 가까운 인생을 영위하는 인간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예술가다. 그 까닭은 숭고한 인생이라는 확실한 토대와 틀 없이는 예술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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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 말(馬)이 많다. 하지만 대만에는 말이 전혀 없고 전시용으로 타이베이 동물원에 단 두 마리가 있을 뿐이다.
바하바의 파라다이스 섬에 있는 그랜드호텔 펜트하우스의 하룻밤 숙박료는 자그만치 10,000달러나 된다.
일요일(Sunday)이라는 소련어는 ‘부활’의 뜻을 가진 resurrechon 이다.
오스트레일리아에는 국가(國歌)가 없다. 따라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다 해도 국가가 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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