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 89 호
4339.12.19 (10.29) : Music Off = Esc
-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용량제한으로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나가 보이지 않습니다. 않보이시는 분은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
[발행지원본보기]
|
|
편지 |
|
|
문학소식 |
|
|
글터 → 명언 / 격언 |
나는 통계숫자로 모든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진실만 빼놓고는. / G.C.
|
|
글터 →사회/문화/인물 |
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제 6부 독부와 현부
피로 물들인 궁중 비사 - 장희빈
장희빈은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여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녀는 미인이고 음모와 모략이 뛰어났던 독부였다. 후궁의 몸엣 왕후의 지위로 뛰어올랐던 장희빈은 '장다리 노래'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철이다
부귀 영화를 한 몸에 받고 살아가던 시절 장희빈의 영화가 얼마남지 않았을 줄 알지만 이 노래는 그 당시 세태를 그대로 반영시킨 노래였다. 조선 시대 숙종 때, 왕의 나이 서른이나 되었을까 말까........ 전 왕후인 인경 왕후 김씨의 몸에서도 후사가 없었고, 계비인 인현 왕후 민씨의 몸에서도 웬일인지 6년 동안 왕자 탄생의 소식이 없어 왕은 매우 초조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왕후 민씨는 후궁 간택을 서둘러 미인 장씨를 천거하여 장씨가 뽑히게 되니 숙종은 얼굴이 빼어나게 예쁜 장씨에게 아주 빠져 버리게끔 되었다. 장씨는 얼굴만 예쁠 뿐이었지 부덕은 전혀 없는 천민이었다. 궁인 시절 전 왕후 인경 왕후 김씨와 왕에게 방자한 말로 헐뜯었다고하여 사친의 집으로 쫒겨나 있다가 8년 만에 민비의 추천으로 다시 입궁한 장씨는 숙종을 완전히 침전의 노예로 사로잡았다. 궁인 시절부터 숙종은 장씨를 사랑하였었고, 민비가 왕의 뜻을 알고 후궁으로 뽑아 들이게 하였어도 장씨는 민비에 대한 고마움은커녕 민비를 제쳐놓고 왕의 총애를 차지하려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고 있었다. 원래 장씨는 조사석의 집 침모의 딸로 천민 출신이지만 오랜 궁인 생활과 권력에 대한 남다른 집념으로 그녀의 세력을 굳혀 나갔다. 전날에 살던 응향각의 주인이 된 장씨는 2년 만에 태기가 있었다. 곧 장씨에게 소의 직첩이 내려졌다. 장씨가 축출당했을 때 그녀를 도와주던 동평군 이항과 조사석이 차츰 장소의의 후광을 입고 득세하는 기미가 보였다. 마침내 장소의는 왕자가 대체 몇 년 만에 탄생한 것인가. 장소의는 왕은 움직여 백일 남짓한 이 왕자를 세자로 책봉하였다. 소의 장씨는 희빈이 되었다. 희빈은 정 2품. 장희빈이란 높은 대우로 그녀는 거처를 영휘당으로 옮겼다. 그녀의 위치는 굳건해졌다. 왕자를 낳았고 왕자가 세자로 책봉되었으니 이제는 민 왕후를 몰아내고 제가 그 자리에 안는 일만 남았다. 숙종 10년 4월 23일은 민 왕후의 생일이었다. 그날 왕은 민 왕후에게 온 생일 선물을 서인들의 것이라 하여 모두 땅에다 묻고 불태워 버렸다. 왕후는 이 사실을 알고 왕에게 항변하고 나섰다. 숙종은 이 사건을 계기로 민 왕후를 사가로 내몰고 대신 장희빈을 왕후로 삼았다. 이때부터 의금부에서는 연일 죄인을 다스리는 매질과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민 왕후를 따르던 많은 대신들이 죽어 나가거나 멀리 귀양을 가는 등 비극적인 사태가 속출되었다. 왕은 서인들이 조정 안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조처하고 끝내는 남인들의 천하가 되어 정권은 그들 손으로 넘어갔다. 장 왕후는 중전이 되자 궁중 안의 후비를 모두 제거하고 자기 혼자 왕을 독점해 버렸다. 장비의 아버지 장현은 하루아침에 옥산 부원군이 되고, 어머니 윤씨는 파평부 부인에 봉해졌다. 시정 무뢰배로 평판이 좋지 않았던 장비의 오빠 장희재는 또 어영대장이란 권력을 손에 쥐었다. 장비 일가의 부귀 영화는 임금의 그것에 맞먹었다. 장안에는 어느새 장비를 미워하고 쫓겨난 민비를 동정하는 노래가 나돌았다.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철이다
미나리는 민비를, 그리고 장다리는 장비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발없는 이 노래는 급기야 장비의 구에까지 흘러 들어갔다. "민비를...... 그년을 살려 두었다가는 내가 화를 입을지도 몰라." 고민하던 장비는 민비에게 사약을 내리라 조르게 되었다. 그러나 왕은 장비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왕은 자기 스스로가 내쫓은 민비가 이따금 생각이 나서 밤중에 대궐 안팎을 순행하는 버릇이 생겼다. 어늘 날 밤 왕은 무수리들이 거처하는 곳까지 나아갔다가 여인의 슬픈 곡성을 들었다. '이 밤중에 누가 죽었나.......?' 왕은 촛불이 일렁이는 곳까지 가 보았다. '아니.......' 음식을 마련해 놓고 그 앞에서 울고 있는 이 여인은 누군가. "저, 전하........" 왕을 발견한 무수리는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너는 누구이며, 왜 울고 있는 게냐?" "예. 쇤네는 무수리 최가이옵고 오늘이 폐출된 민비마마 생신이라 그분의 성덕을 기려 이렇듯 상을 차려 놓고 있었나이다. 죽을 죄를 저지를 계집을 죽여 주소서." 무수리 최씨는 아까보다 더 슬픈 목청으로 울어대었다. 왕은 눈을 지그시 감고 폐출된 민비를 생각해 보았다. 일개 무수리에게도 존경을 받던 민비와 지금의 장비는 천양지판이었다. 무수리 최씨의 심정이 고맙고, 또 쫓겨난 민비가 그리워서 왕은 그 밤을 무수리 최씨 방에서 잤다. 얼마 안 가서 무수리 최씨는 잉태를 하였다. 왕은 그 뒤로도 몇차례인가 무수리 최씨의 처소에서 밤을 지새웠다. 왕의 사랑이 장비 곁을 떠나 무수리 최씨에게 기울어 갔다. "뭐야? 마마께서 무수리년을 총애한다구?" 장비는 소식을 듣고 길길이 뛰었다. "게다가 무수리 최가년 몸에 태기가 있다 하옵니다, 마마." "마, 맙소사........ 나입도 아닌 종년 무수리에게........ 오, 끔찍도 해라!" 장비는 더 참지 못하고 무수리 처소로 갔다. "저년 옷을 발가벗겨라!" 무수리 최씨는 장비에 의해 발가벗겨지고 그 위에 매질이 가해졌다. 무수리 최씨의 터진 살갗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매우, 매우 쳐라!" "상감마마 납시옵니다." "뭐라구?" 마침 그 때 왕의 거동이 있었다. "저 독을 어서......... 무수리 몸 위에 뒤집어씌워라!" 장비는 독을 무수리 위에 씌우라 명했다. 그러나 눈치 빠른 왕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장비의 옷에도 피가 묻어 있었다. "독을 벗겨라." 왕의 분부였다. 독이 벗겨지자 발가벗은 무수리가 상처 투성이인 채로 나왔다. "아니........." 왕은 장비의 표독스런 행동을 목격하고 만 것이다. "세자 때문에......... 세자 때문에......... " 왕은 장비가 낳은 세자 때문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 일을 덮어 두었다. 그 대신 무수리 최씨에게 소원이란 직첩을 내려 함부로 푸대접을 못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장비도 최소원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오라버님. 그년을 아주 죽여 버리시지요." 장비는 어영대장 장희재에게 독살을 지시했다. "잘 알았소." 어영대장은 그 길로 최소원의 처소로 나아가 독약이 든 음식을 바치게 하였다. 하지만 그 일은 실패로 끝났다. 숙종은 더 참을 수가 없었다. "당장 장비의 직첩을 거두고 어영대장을 잡아 의금부에 가두어라!" 장비는 중전의 지위를 차지한 지 6년 만에 또다시 쫓겨나고 어영대장 장희재는 재산을 몰수당했다. 왕은 최소원에게 숙빈이란 직첩을 내리고 사가로 물러나 있던 민비를 다시 불러들였다. 장비에서 희빈으로 떨어져 물러난 장희빈은 그래도 민비에 대한 미움을 거두지 않았다. 마침 민비는 몸이 쇠약하여 입맛을 잃고 있었는데, 옛날의 상전인 민비의 시중을 최숙빈이 맡아서 들고 있었다. 최숙빈은 게젓을 구하여 민비의 수라상에 올렸다. 그런데 민비는 게젓을 먹고 급사를 한 것이다. 왕은 아무래도 민비의 갑작스런 죽음이 의문일 수밖에 없었다. 게젓을 들인 경로를 추적해 보니 장희빈의 오라비 장희재가 하인을 시켜 게젓 속에 꿀을 넣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장희빈의 분부를 받은 장희재가 그 꿀 속에 독약을 넣었음이 밝혀졌나이다." "아바마마, 소자의 소청을 들어주소서." 어린 세자는 생모에게 내려진 극형 소식을 듣고 숙종 앞에 꿇어 엎드려 울부짖었다. "세자는 이번 중전의 치독 사건에 참견하지 말아라." "쓸데없는 소리. 물러가 있거라." 부왕이 눈 하나 까딱하지 않자 세자는 조정 대신들을 붙잡고 통사정을 하였다. "대감마마! 제발 어마마마를 살려 주소서, 예? 살려주소서, 마마!" 어린 세자의 간절한 청을 듣고 울먹이지 않는 대신이 없었다. 그러나 숙종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사약을 받은 장희빈은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세자를......... 내 아들을 한번 만나봐야겠다. 냉큼 데리고 오너라!" 장희빈은 흡사 광인 같았다. 하인이 대궐 안으로 들어가 이 사실을 알리자 숙종은 세자에게 생모와의 면담을 허락했다. "어마마마!" 생모를 보자 세자는 그 어깨에 매달려 울부짖었다. "어마마마! 어마마마!" 그러나 장희빈은 아들을 대하자 그녀의 본성이 드러났다. 장희빈도 세자의 아랫도리를 휘어잡고 힘껏 잡아당겼다. "아야야......." 세자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울지도 못했다. "너 죽고 나 죽으면 그만이다.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네 아비 핏줄을 받을 필요가 없다." 세자는 곧 까무러쳐 버렸다. 세자를 불구로 만들어 버린 장희빈은 그제서야 사약을 마시고 눈을 감았다. 모략과 음모로 일관해 온 독부 장희빈은 그렇게 최후를 마친 것이다.
|
|
|
글터 → 국사/세계사
|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정치, 경제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사원의 농지경영과 상업활동 - 이병희 (목포대 교수)
사원은 승려들이 수행하며 생활하는 공간이자, 신자들이 찾는 장소이다. 불교의 종교행사도 이곳에서 주로 열린다. 사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경제력이 필요하다. 이것은 주로 사원의 건물을 보수하거나 증축하는 데, 종교행사를 치루는 데, 승려들을 부양하는 데, 그리고 사회사업을 수행하는 데 사용되었다. 현재 사원이나 승려는 대부분 생산활동에 직접 종사하지 않고 종교활동에 필요한 경비를 외부로부터 조달한다. 이러한 경비는 주로 신자의 시주, 입장료. 임대료의 수입, 기타 불교행사 때의 수입 등으로 조성된다. 그런데 사원이 경제기반을 마련하는 방법이나 운영하는 형태는 시대에 따라 커다란 차이가 있다. 불교가 사회적으로 큰 구실을 하고 정치세력의 지원을 받았던 고려시대에도, 사원은 상당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든든한 경제적 뒷받침이 있었기에 사원의 승려는 생산활동에 직접 종사하지 않고, 종교생활에 몰두할 수 있었으며 사회적인 영향력을 크게 행사할 수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농업이 주요 생산업이고 경제의 핵심을 이루었기 때문에, 사원의 가장 중요한 경제기반은 농지경영이었다. 사원을 이를 통해 농민을 지배하였으며, 획득한 부를 기초로 상업활동이나 고리대에 종사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사원의 대토지 경영 사원의 농지는 시납, 개간, 매득 그리고 국가의 사급 등 다양한 계기에 의해 형성되었다. 고려는 불교사회로 국왕이나 귀족 및 일반 농민들은 불교을 신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토지를 사원에 시납하는 일은 흔하였다. 그런데 토지를 시납할 수 있는 층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왕실이나 중앙의 고관, 지방의 토호가 중심이었다. 농지를 소규모 소유하거나 혹은 소유하지 못한 농민들이 토지를 시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사원은 또한 매득이나 개간에 의해서도 농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사원은 인력이나 재력 양면에서 우월하며, 소를 소유하고 있는 예가 많았기 때문에 소농민보다 개간을 통해 농지를 확대하는데 유리하였다. 이와 달리 사원은 때때로 권세가 사이에 성행하고 있던 토지의 탈점, 겸병을 통해서도 농지를 확대하였다. 그리고 국가 내지 국왕의 토지 사급을 통해서도 사찰은 농지를 마련하고 확대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이렇게 마련한 사원의 농지는 그 규모가 상당하였지만, 일정한 지역 특히 사원 주위에 집중되어 있지는 않았다. 금강산에 위치한 장안사의 경우, 성종 때에 1,050결의 토지가 지급되었는데, 전라도, 양광도, 서해도 일원에 분포하고 있었다. 고종 때 송광사의 토지는 전남 일원에 산재하고 있었다. 대개의 경우 사원의 농지는 이처럼 여러 지역에 분산되어 있었다. 그러나 장생표가 설치된 경우는 예외적으로 토지가 집중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지배의 내용에 있어서도 상이하였다. 곧 사원은 장생표내의 농지만이 아니라 산림농민에 대해 배타적인 지배를 할 수 있었다. 그러한 예를 통도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통도사에는 국가의 허락을 받아 12개의 장생표가 세워져 있었는데, 장생표 내에는 공사의 다른 토지가 없었으며, 표내의 농지 산림 농민은 통도사의 지배를 받았다. 사원은 농업생산에 필요한 것들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경작농민에게 그것을 대여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현화사, 왕륜사, 석방사는 소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소는 사원전의 경작에 사역되었을 것이다. 또한 종자를 대여하여 농민의 영농을 돕기도 하였다. 사원전을 경작하는 농민은 양인농민. 노비. 하급승려. 등 다양하였다. 사원전을 경작하는 핵심적인 부류는 양인농민이었다. 사원 노비는 사원 소속의 토지를 경작하는 수도 있었지만, 그것이 주임무는 아니었다. 송광사의 경우 농지는 240여 결인데 반해 노비는 17명에 불과하여, 그들이 모두 경작할 수는 없었다. 사원노비는 주로 음식을 준비하고 땔나무를 마련하며, 사원의 유지를 위한 여러 가지 잡역에도 동원되었다. 그리고 수공업품을 만들기도 하였다. 사원에 소속된 하급승려가 사원전을 경작하기도 하였다. 그 예는 문종 때에 피역을 꾀하여 사문이 된 자가 경축을 업으로 하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고려초 이래 역을 피해 승려가 된 자들이 대개 하급승려로서 사원전을 경작하기도 하였다. 고려 전기에 수원 승도, 재가화상이라 불리는 자들도 이러한 하급승려의 한 부류였다. 재가화상의 모습을<고려도경>은 다음고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들은 가사를 입지 않고 계율을 지키지 않으며 흰 모시의 좁은 옷에 검정색 깁으로 허리를 묶고 맨발로 다니는데 간혹 신발을 신은 자도 있다. 거차할 집을 자신이 만들며 아내를 얻고 자식을 기른다. 그들은 관청에서 기물을 져 나르고, 도로를 쓸고, 도랑을 내고, 성과 집을 수축하는 일들에 모두 종사한다. 또한 변경에 경보가 있으면 단결해서 나가는데 비록 달리는 데 익숙하지는 않으나 자못 씩씩하고 용감하다. 후기에 가면서 토지제도의 문란, 농민의 동요로 출가하는 자도 더욱 늘어갔다. 고려말 조선 초기에 승려가 10만을 상회한다거나 민의 10분의3에 이른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산업과 유통망을 관장하는 사원 사원은 다량의 물품 구매자임과 동시에 판매자이기도 하였다. 사원은 건축시의 자재, 불구제작을 위한 재료, 불교행사에 필요한 물품, 승려들의 생필품 가운데 상당한 양을 구매하여 조달하였다. 그리고 사원이 생산한 잉여물품, 가공품을 판매하였다. 사원이 이렇게 상업활동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불교의 교리와도 연관이 있다. 불교는 성립할 당시부터 상업활동이나 대부 행위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었다. 불교가 인도에서 성립할 당시부터 또 중국에 들어온 후에도, 사원은 그러한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불교의 교리 자체가 상업활동이나 고리대에 참여하는 것을 죄악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원이 교역활동을 통해 판매하고 있는 품목은 다양하였다. 그중 파와 마늘을 판매한 것이 주목된다. 파나 마늘은 승려가 가까이 해서는 안되는 작물인데도 재배하고 나아가 판매까지 하고 있어 자주 문제시 되었다. 파나 마늘보다는 곡물이 일반적인 교역물이었을 것이다. 사원은 농지경영을 통해 지대나 지세로 곡물을 확보하였는데 소비되고 남는 것은 직접 팔거나 가공하여 판매하였다. 곡물이 가공되어 판매된 사례로 술을 들 수 있다. 현종 때 경기도 양주의 장의사, 삼천사, 청연사 등의 승려들이 금령을 어기고 양조한 쌀이 360여 석에 이르러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사원은 수공업제품의 생산에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원은 불상이나 불구의 제작을 위해 목공과 금속가공 기술자를 다수 거느리고 있었다. 전영보는 제석원의 노비로서 금박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충렬왕 때의 어떤 비구니는 직조기술이 뛰어난 여자노비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유리기와를 훌륭하게 구워 만드는 육연이라는 승려도 있었다. 이들이 생산한 물품은 자체 소비하고 남을 경우 판매하였을 것이다. 때로는 판매를 겨냥하고 생산하는 수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사원이 판매해서 잉여를 축적할 수 있는 또 다른 계기는 염분이었다. 소금은 생필품이기 때문에 이것을 판매하여 부를 증대할 수 있었다. 그 밖에 사원은 기름과 벌꿀을 생산 판매하기도 하였다. 사원은 이처럼 물품을 판매하는 것만 아니라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기도 하였다. 정혜사에서는 쌀이 떨어져가자 구입을 논의하였고, 흥왕사에서는 흥교원을 중수하면서 재목을 구입하였다. 그 밖에도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는 일은 흔히 있었다. 이처럼 사원은 잉여생산물의 판매와 필요한 물품의 구매를 통해서 상업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었다. 또한 사원은 교역의 중요한 장소였다. 불교행사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들었으며, 상호간에 자연스럽게 교역이 이루어졌다. 예컨대 전주의 보광사 낙성회 때 모인 대중이 3천 명에 달하는데 그 행사가 50일간 지속하였다. 이 때에 모인 사람 사이에 교역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개경의 팔관회 행사에는 외국 상인까지 참여해서 물품을 거래하였다. 지방 사찰이 개경의 거래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금강산 장안사가 개경에 점포를 가지고 있으면서 이 곳을 통해 수취한 물품이나 교역에서 확보한 물품을 처분하거나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였다. 사원은 공물납부와 관련해서도 상행위를 하였다. 대납이 그것이다. 이는 국가 권력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또한 사원은 중국에서 경전이나 단청 원료를 구입하기 위해서 국제교역에 종사하였다. 교역에는 원거리수송도 있었는데 이 때에는 말이 필요하였다. 사원이 말을 가지고 있거나 승려가 말을 타고 다니는 사례가 많이 보인다. 우리 나라는 산이 많고 도로가 좁기 때문에 수레는 적합하지 않았다. 또 운송수단으로는 소보다 말이 적합하여 널리 활용되었다. 말에 짐을 싣는 방식은 두 개의 용기를 말등 좌우에 걸쳐 놓고 그 속에 물건을 넣는 것이었다.
휴게소 역할의 원 운영 승려들은 원거리 교역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대개 하루만에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없어서 숙박을 해야 했다. 이에 사원이나 승려들은 원이라는 독특한 숙박시설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원은 사람의 통행이 많지만 거주지역과는 떨어져 있어 맹수가 나타나거나 도적이 출몰하기 쉬운 곳에 세웠다. 원을 활용하여 피곤한 사람은 쉬어가고, 자야 할 사람은 자고, 비를 피하고 그늘을 얻고, 도둑의 근심을 덜고 짐승의 해를 없앨 수 있었다. 원에서는 숙박은 물론 음식과 우마의 꼴을 제공하였다. 불교계는 원을 관장함으로써 고려사회의 유통망을 장악하고 있었다. 원을 중심으로 한 고려의 유통망은 조선 건국 후 국가가 장악하였다.
사원이 하는 대부활동 사원의 농지경영을 통해 확보한 잉여물이 양식이나 종자로 농민에게 대부되기도 하였다. 당시 농민은 부족한 양식과 종자를 빌리곤 하였다. 농민이 홍수. 가뭄. 병충해 등으로 흉년이 들었을 때, 의창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사원의 미곡을 빌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 경우 빈민구제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사원의 미곡대부에는 또 다른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사원은 대부행위를 통해서 농민들에게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원에서 운영하는 고리대의 규모는 상당하여서, 보통 수백에서 수천 석에 달했는데, 송광사는 만여 석을 11개 말사를 통해 운영하였다. 최우의 아들 만종과 만전은 승려로서 무려 50여 만석이나 되는 고리대를 운영하였다. 이러한 고리대는 보라는 이름으로 설치. 운영되었다. 보는 존본취식, 즉 본전은 두고 이자만 가지고 특정 용도에 사용하기 위한 기금이었다. 불법을 배우는 것을 돕기 위한 광학보, 종의 유지를 위한 금종보, 그리고 부모의 제사비용을 위한 부모기일보 등 다양한 명목의 보가 있었다. 법정 이자율은 연간 3:1로 쌀 15두에 5두, 포 15필에 5필이었다. 그런데 사원과 농민 사이에는 경제적 예속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속인이 운영하는 고리대보다 고율이 되는 수도 있었으며, 강제성마저 띠어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기도 하였다. 예컨대 명종 때 어떤 승려는 질이 나쁜 종이와 포를 강제로 백성에게 떠맡겨 이익을 챙겼다고 한다. 만종과 만전도 50여 만석을 대여한 후 재촉하는 바람에, 백성들이 남은 곡식이 없어 국가에 조세를 바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고리대를 통해서 사찰이나 승려가 백성의 잉여물을 철저히 흡수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양인농민의 고리대를 갚지 못해 이자가 계속 늘어갈 경우, 토지나 노비를 팔아 변제하거나 처자를 팔아서 해결하였다. 심한 경우에는 도망가거나 노비가 되었다. 송광사 주지인 진각국사 혜심은 지나친 고리대 행위로 인해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한 자가 된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그는 고리대 자체를 죄악시하지는 않았다. 다만 탈법적인 고율의 고리대를 문제삼았을 뿐이었다.
경제력에 바탕한 사회적 영향력 사찰은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조형미가 뛰어난 불상과 불탑을 조성하였고, 화려한 불화를 남길 수 있었다. 또한 승려들은 생산활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종교적 수행에 몰두할 수 있었다. 사원과 승려는 백성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과 자위조직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외침이 있을 때 크게 활약할 수 있었다. 거란 침입을 막는 데 승려들의 활약이 컸고, 여진정벌시에는 별무반의 항마군으로 참전하였다. 또 몽고와의 항쟁 때는 승려 출신 김윤후가 몽고 장수를 사살하기도 하였다. 역사상 이런 사례는 허다하다. 그러나 모든 사찰의 경제기반이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규모가 작고 낮은 신분출신의 승려가 거차하는 사찰은 사정이 달랐다. 이들은 생계를 위해 직조와 농경에 종사하였으며, 직접 상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처자를 거느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불교계는 상당한 재력을 소유한 사원이나 그 소속 승려가 주도하고 있었다. 이처럼 고려시대 사원은 상당한 경제력을 가지고,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사원의 경제력은 크게 축소되었고, 승려의 지위나 사회적 영향력도 크게 위축되었다.
|
|
|
글터 → 삶속의 글
|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 사람들 사이에 피어나는 작은 들꽃들
거울 속의 쌍둥이 송아지
내가 아홉 살이 되던 해였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우리집 형편은 대부분의 시골 농가가 그렇듯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쪼들리는 살림살이에도 불구하고 큰맘먹고 어린 암소를 한 마리 사 오셨다. 그 암소는 온 식구들의 기대한 관심속에 원래 있던 황소 한 마리와 사이좋게 어울리며 무럭무럭 잘자랐다. 아버지는 소에게 행여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늘 노심초사하셨지만, 아무 탈없이 쑥쑥 잘 자란 암소는 어느덧 새끼를 갖게 되었다. 송아지가 태어나던 날, 우리 집 식구들은 모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눈, 코, 입 모두가 똑같은 암수 쌍둥이 송아지가 태어났던 것이다. 어미 소가 지긋한 눈빛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송아지는 머리를 부딪히며 싸우는가 하면 코를 마주대고 다정한 모습으로 잠들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집에 갑자기 목돈이 들어갈 일이 생겼다. 아버지는 이른 아침부터 서운함을 애써 감추시며 우시장에 나갈 준비를 하셨다. 발육 상태가 더 좋은 수송아지를 먼저 내다 팔기로 작정하고 외양간에서 송아지를 꺼내려는데 술렁거리는 분위기로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챈 쌍둥이 송아지가 애닯게 울기 시작했다. 곁에 있던 어미 소도 마치 사람처럼 눈물을 줄줄 흘렸다. 평소 무뚝뚝한 아버지께서도 송아지를 팔고 돌아오시는 길에 펑펑 울고 마셨단다. 혼자 남겨진 송아지는 어미소곁에서만 맴돌뿐 외양간에서 한발짝도 나오려 하지 않았다. 정말 가여웠다. 얼마 후, 겨우 마당으로 나온 송아지는 마루 옆에 걸려있는 큰 거울에서 우연히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처음엔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더니 나중에는 거울에 제 볼을 갖다대며 부비는 것이었다. 인정 많은 우리 할머니께서는 이 모습을 보시고 거울을 송아지가 잘 보이는 마당쪽에 옮겨 달아 주시면서 눈물을 글썽이셨다.
장흥진 님/경기도 광명시 소하2동
|
|
|
글터 → 철학 |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86 - 가치철학을 체계화한 책: W. 빈델반트의 "철학개론"(1914년) 그때 세계에서는 1914년: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 (사라예보 사건): 오스트리아, 세르비아에 선전포고 (제1차 세계대전 시작)
빈델반트 (Wilhelm Windelband 1848∼1915)
|
한때 신 칸트학파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19세기 후반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독일에서 들을 수 있었던 철학의 한 흐름이었다. 헤겔이 죽은 뒤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헤겔의 철학에 붙잡혀 있을 때, 사상계의 한쪽에서 헤겔보다는 칸트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헤겔의 형이상학보다는 칸트의 인식론이 타당하며, 허망한 변증법적 이론보다는 이성적 비판이 발전해야 하며, 철학의 정밀성과 보편타당을 되찾아야 한다는 철학게의 요청이자 운동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삶의 철학과 대조적인 신 칸트학파의 철학이 주목을 끌었고, 그 대표적인 흐름의 하나가 독일 서남학파에 속하는 가치철학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삶의 철학이냐 가치철학이냐 하는 문제는 선택이 필요한 것으로 느껴졌을 정도였다. 이러한 신 칸트학파의 가치철학 계열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이 W. 빈델반트(W. Windelband. 1848--1915)다. 우리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의 철학설이나 인식론보다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힌 그의 "철학개론(Einleitung in die Philosophie)"에 관한 소개다.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 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평양에서 중학교 2학년에 다닐 때였다. 숭실대학의 총장을 지낸 바 있는 김성락 박사가 우리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사람에게는 정, 의 의 기능이 있는데,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진, 선, 미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때 나는 그 얘기를 듣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역시 박사가 되면 저런 것까지 다 아는구나하고 생각했었다. 중학교 상급반 때, 바로 그것이 가치관을 얘기하는 상식에 속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도 이화여자대학의 배지를 보면 학교설립 연대와 마크가 있고 진, 선 미라고 씌어진 내용을 보게 된다. 역시 크게 세계적으로 유행되고 있던 세 가지 개념을 딴 것이다. 이런 가치철학의 상식적인 체계를 가장 먼저 철학체계로 정착 시켜준 사람이 빈델반트였다. 그의 철학개론은 네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론철학에 속하는 부분은 인식과 진리에 해당하는 것이고, 다음은 실천철학에 속하는 것으로 윤리학과 선의 가치를 취급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미의 가치를 추구하는 예술철학의 문제가 들어가 있다. 그리고 끝으로 이 모든 가치를 종합하고 초월시킨 인격적 가치로서의 성의 가치, 즉 종교철학의 문제로 완결되어 있다. 우리는 이 제목들만 보더라도, 그가 칸트의 철학을 계승한 학자이며 그 철학적 순서와 내용이 그대로 칸트의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체계와 분류는 다분히 심리학적 방향과 일치되는 것 같아도, 가치철학자들은 어디까지나 칸트의 비판적 방법과 가치의 규범적 타당성을 추구해나갔다. 그리고 이런 탐구는 자연히 문화전반에 걸친 철학적 해석을 가능케 해주었다. 빈델반트가 철학사와 역사철학적 연구에 뜻을 모았던 이유도 짐작이 간다. 그러나 그의 "철학개론"이 세계적으로 많이 읽혔다는 점에서 그를 소개했을 뿐, 체계적인 철학적 업적은 다른 철학자들에게서 더 비중 있게 나타나고 있다. 그중에서 우리 나라에 많이 소개된 철학자의 한 사람은 에른스트 카시러(E.Cassirer, 1874--1945)라고 보아 좋겠다. 그는 신 칸트학파의 뒤를 계승하면서도 삶의 철학자들의 학설에도 무관하지 않았다. 그래서 요해의 인식론적 의미를 도입했고, 상징주의 철학을 발전시켜 새로운 현대철학의 영역을 개척해주었다. 우리는 그의 저서 중에서 "인간론"을 번역해 읽고 있으며, 거기서 많은 철학적 암시를 받고 있다. 여담에 속하지만, 성경을 앍는 사람들은 유명한 바울의 글에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셋은 항상 있어야 하나,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을 알고 있다. 생각해보면 바울도 위대한 철학자였다. 그는 아는 것, 즉 지가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게될 때 진리가 되는 것이며, 의욕이 있으면 그 대샹이 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희망했을 때 비로소 선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름다움은 사랑이 창조하는 것이지, 감정이 그대로 미를 이끌어내는 것은 못된다. 그렇게 본다면 바울은 우리들보다도 더 깊은 철학적 사색을 전개시킨 것 같기도 하다. 아마 바울의 뜻을 연장시킨다면 성스러운 것은 인간적 가치관으로 기대되는 바이기는 해도, 신과 그 신의 사랑에서만 가능하다고 피력할지 모른다. 어쨌든 필자는 이 가치철학이 얼마나 그 당시에 일반화되어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 뜻을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는가를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은 빈델반트 이전에도 있었고, 오늘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전달된 것이지만, 일단은 교양인으로서 이해해두는 것이 좋겠다는 뜻에서 언급해본 것이다.
|
|
|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
'우물'은 '움물'에서 나온 말. 곧 '움'에서 나오는 '물'
요즈음이야 참 좋은 세상이지요.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쏟아져 나오니까요. 옛날에야 어디 그런 일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나요? 모두 동네 우물에 가서 물을 동이에 이고 오거나 할 수 밖에 없었으니까요. 더군다나 남자가 물을 길어 오는 것은 금물이어서 여자분들이 꽤나 고생을 했었습니다.
'우물'은 어떻게 생겨난 말일까요? '우물'의 '물'은 알겠는데, '우'가 무슨 뜻인지 모르시겠지요? 그런데 그것은 '우'가 아니라 '움'입니다. 그러니까 '움물'이 '우물'이 된 것입니다. '움'에서 나오는 '물'이란 뜻입니다. 지금도 '우물'을 '움물'이라고 하는 방언도 있습니다. 지금도 '움'이란 말은 많이 쓰이는 단어입니다. '움'을 파고 김치독을 묻거나, 움에다가 천으로 가려 집을 만들면 '움막집'이 됩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
|
글터 → 사회/문화/인물 |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7장 떠도는 자의 노래
자신의 죽음을 죽을 수 있게 하소서 - 라이나 마리아 릴케
릴케 [Rilke, Rainer Maria] 본명은 René Maria Rilke. 1875. 12. 4 프라하~1926. 12. 29 스위스 발몽.
|
침묵을 동반한 어둠이 점점 에워싸면 나는 그 속에 가라앉고 말아서 끝내는 겁먹은 새처럼 되고 만다. 어딘가에 나를 겨냥하는 시선이 있는 것만 같아 긴장으로 숨이 조여올 때, 릴케의 시 한 구절을 나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세상 어디에선가, 까닭도 없이 누군가 이 밤에 죽어가고 있는데 그것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 <마음 무거울 때>의 일절
하나의 섬뜩한 경종이 아닐 수 없다. 라이나 마리아 릴케만큼 죽음을 깊이 천착한 시인도 드물 것 같다. 그는 31세에 비가를 썼고, 47세에 죽음을 감지하면서 <말테의 수기>를 썼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모두 이곳으로 오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여기에서 모두 죽어가는 것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말테의 수기>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그는 거기에서 임신한 여인의 태 속에 이미 죽음이 싹트고 있다 는 무서운 경고를 내린다. <드노의 비가>에서는 성숙한 인간은 무르익은 과일이 나무에서 덜어지듯 죽음에 대한 원한은 없다. 그러니 완전한 죽음을 끌어안고, 깊은 잠에 드는 것뿐이다 라고 말한다. 인간 존재의 중심에는 죽음이 본질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죽음은 인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으며, 인간 삶의 핵심이며 진주처럼 인생을 빛나게 하는 것 역시 죽음이라는 설명이다. <비가>의 핵심은 역시 죽음이었던 것이다. 47세에 릴케는 <비가>를 완성하고 <비가>에 와서 비로소 죽음을 긍정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드노의 비가>를 읽고 자기와 같은 사상을 릴케는 시로 표현했다 고 말했다. 그는 한때 발레리의 시 <바닷가의 무덤>을 읽고 심취하여 그의 작품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불어로 시를 짓는 등, 한창 그의 의욕이 고조되었을 때 하필 지병이던 폐병이 악화되고 만다. 그래서 발몽요양소를 떠나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죽었다. 장미 가시에 찔려. 시인이란 다른 일로 죽지 않는 것. 이것은 프랑스의 여류시인 알리에뜨 오드라가 쓴 <릴케의 죽음>이란 시의 마지막 부분이다. 릴케는 여자친구를 위해 장미를 꺾다가 가시에 찔린 것이 화농되어 목숨을 잃고 말았다. 51세였다. 그는 폐결핵의 치료를 위해 3년 전(48세)부터 스위스의 발몽 요양소에 와 있었던 것이다. 그가 죽은 것은 1926년 12월 29일이었다. 장례식을 하던 날은 각처에서 달려온 친구들로 자리가 가득 메워졌으며, 바흐의 바이올린 독주가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장식하였다. 묘지는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비탈진 언덕에 있었다. 릴케는 죽기 보름 전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나는 지금 끝없는 고통에 걸려 있다. 잘 알려지지도 않은 혈액병(백혈병)이 전신에 퍼지고 잇다. 고통이 무엇인지 잘 모르던 나는 고통에의 순종을 배우고 있다. 백 번 저항을 하면서 억지로 순종을 배우면서 나도 모르게 깜짝깜짝 놀라고 있다. 릴케는 자신이 그렇게 빨리 죽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죽기 하루 전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는데 새벽에 눈을 한번 크게 뜨고 머리를 조금 드는 듯하더니 이내 푹 쓰러지고 말았다. 새벽 5시, 밖에는 흰눈으로 덮인 알프스의 산령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의 죽음은 죽음과 위대가 하나의 말인 것처럼 혼연일치한 엄숙한 죽음이었다 고 기록되어지고 있다.
주여. 저마다 자신의 죽음을 죽을 수 있게 하소서.
그의 <시도 시집>에 들어 있는 시 한 구절이 화두로 남는다. 자신의 죽음을 죽을 수 있게 하소서!
|
|
|
글터 → 국사/세계사 |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43. 최초의 박람회였던 1851년 런던 박람회
1851년 5월1일 대도시 런던은 이른 아침부터 활기에 넘쳤다. 이 날은 근대적 의미에서 최초의 박람회인 런던 박람회가 하이드 파크에 마련된 전시장에서 열리는 날이었다. 온갖 계층의 영국인이 새로운 문명에 대한 호기심과 진보에 대한 확신을 가슴에 간직한 채 박람회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철제 구조물과 유리로만 만들어져 수정궁이라고 불린 전시장에서 개최된 박람회는 `세계의 공장`으로서의 영국의 탄생을 알리는 요람이었다. `모든 나라의 공업 제품`을 한 자리에 진열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지만 사실 영국의 공업 제품을 전시하는 자리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전시장의 절반이나 차지한 영국 전시품을 대표했던 것은 각종 원료와 미래를 엿보게 해주었던 각종의 최신기계들이었다. 특히 기관차,선박용 엔진, 수압식 인쇄기, 동력직기, 공작기계 등은 영국 공업의 이름을 빛낸 제품들이었다. 박람회의 광경이 이렇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나라들도 산업 혁명을 맞이하고는 있었으나 충분히 진전된 나라는 영국뿐이었다. 이렇게 영국을 세계 제 1의 공업국으로 올려 놓은 역사적 과정이 18세기 후반에 시작된 산업혁명이었다. 기계발명과 기술의 혁신으로 전례없는 생산력의 발전을 가져온 산업혁명은 면직물업에서 시작되었다. 면직물 공업을 구상하는 두 개의 공정인 직포가 서로 개량과 발명을 자극하여 급속히 기계화를 진전시켰다. 1733년 존 케이가 만든 자동 베틀, 1760년대에 만들어진 다추 방적기(일명 제니 방적기), 아크라이트의 수력 방적기, 크롬프턴의 뮬(mule) 방적기(1779), 카트라이트의 역직기(1784) 등이 당시 발명되거나 개량된 대표적인 기계들이었다. 이 면직물 공업의 기계화는 다른 산업의 기계화를 자극함과 동시에 증기 기관의 개량에 의한 동력 혁명도 초래했다. 이와 함께 제철업, 석탄기업, 기계공업이 발달하여 생산 구조도 급속하게 변화했다. 산업의 발전은 원료의 수입과 제품의 운반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철도가 부설되고 증기선도 발명되었다. 특히 철도는 낡은 봉건제에서 서로 폐쇄되어 있던 지역 사회를 통합하고 자본주의 경제의 동맥이 되어 산업 혁명의 발걸음을 한층 빠르게 했다. 이리하여 영국 각지에 대공장이 모여 도시가 생겨났고 인구도 그에 따라 집중되었다. 공장은 검은 연기를 끊임없이 내뿜었고 기계가 돌아가는 우렁찬 소리가 도시를 뒤흔들었다. 영국은 철과 석탄의 시대를 맞이했다. 이러한 산업혁명을 통한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 즉 철과, 석탄과 증기, 기계와 엔진, 철도와 기선과 전신선의 시대의 도래는 사람들의 마음에 인간의 무한한 능력과 진보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런던 박람회의 테마가 `진보`였던 것은 정확하게 시대의 정신을 반영하는 것이엇다. 일찍이 인간이 주위 세계에 대한 자신의 승리를 이토록 의식한 시대는 없었다. 하지만 대가 없는 이득은 없다. 산업혁명을 통해 현대 사회를 맞이했지만, 아니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도 같이 생겨났다. 공장제도의 발전과 함께 소수의 부르주아지가 사회의 새로운 지배층으로 성장했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임금을 받고 일하는 노동자로 전락했다. 이윤추구가 초고의 목적으로 설정된 사회의 도래 속에서 노동자들의 생활은 비참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낮은 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고 평균수명도 매우 짧아졌다. 또한 임금을 낮출 수 있다는 이유로 여성과 아동 들이 공장으로 내몰렸으며 작업환경은 매우 위험했다. 급속하게 팽창한 도시도 새로운 문제의 원천이었다. 도시는 위생시설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고 주거 환경도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또한 경제적으로 후진 지역은 대량 생산에 의한 공업 제품의 침투로 전통적인 산업의 파멸을 맛보았다. 영국제 면직물의 대량 유입으로 인도 면직물업이 몰락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후진 지역은 전통적인 산업의 몰락뿐만 아니라 공업국의 원료 공급지라는 현대적인 의미의 식민지로 전략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한편 당시 `진보`를 의미했던 자연에 대한 지배는 사실상 자연을 무자비하게 파괴한 것이었음을 드러났다. 특히 석탄 (나중에는 석유)이라는 화석 연료의 대량 사용과 공업 폐기물은 자연 환경을 파괴시킨 주요한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렇듯 런던 박람회에서 표명되었던 `진보`는 분명 인간의 생활을 향상시켰지만 현대 사회가 있는 문제를 고스란히 배태하기도 했으며 그 진보에 대한 확신은 1차대전이라는 인류의 파멸적인 경험을 거치면서 도리어 회의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
|
|
글터 → 사회/문화/인물 |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제3장 시들어 가는 미국, 일어서는 중국
4. 시들어 가는 미국, 일어서는 중국
미국을 '서쪽 하늘로 꺼져 가는 태양'과 같이 몰락해 가는 민족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최근 미국이 국제적 사건의 해결을 위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마다 눈에 콩깍지가 꾄 것처럼 허둥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홍보전문가와 컴퓨터 천재의 지배를 받는 백악관이 지구촌의 모든 일에 대해 일으키는 반흥은 이미 미국이라는 대국이 보여 주어야 할 지혜와 태도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미국의 지도자들은 제퍼슨으로부터 케네디까지의 연설집에 있는 말을 베껴서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외교적 언사로만 세계적 중대사를 해결하려 들기 때문에 백악관의 분위기는 날이 갈수록 위선적 색채를 띠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작은 나라나 개발도상국가의 지도자들은 미국의 지도자들보다 월등히 탁월한 인물들이다. 포드 이래로 미국의 지도자들과 그 고문들의 슬기와 능력이 점점 시들어가는 현상은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미국인에게 투지와 소질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레이건과 부시는 노전사()의 용기나마 가지고 있었다하더라도, 민주당을 통해 정치무대에 들어선 다음 세대의 지도자들에게서는 추호의 결단력이나 어떤 용기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소, 반중, 반공 시기에는 그런대로 국민적인 경각심이라도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이러한 경각심조차도 안일과 풍요에 밀려나버렸다. 그리고 지금은 원대한 계획도 없이 소동만 벌이게 될 정치적 선택을 하는 경향이 있다. 페로가 말했듯이 미국 국민은 어쨌든 기획의 대상물이고 기획의 수단은 상업적 판촉과 선전일 따름이다. 미국에서 환기 넘치는 정치사조는 이미 사라졌고 오직 신기한 것에서의 자극만이 개혁정신으로 오인되어 갈채를 받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미국인은 독립적 사고능력과 소질을 잃어버린 듯 19~20세기에 번창한 문학과 사상도 미국인에게는 이미 과거지사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인의 청소년문제에 대한 지나친 무관심과 관용은 결국 정치와 사상은 물론이고 문화 전반에 걸쳐 유치함을 면치 못하게 하였는데 이 점은 곧 침착한 중국인에게 미국은 개방적이라는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미국 역사에 대한 지식은 미국의 대학생보다 중국 고등학생이 월등히 많으며 기타 미국에 대한 이해 또한 미국청년보다 중국청년이 앞선다고 나는 감히 단언할 수 있다. 청년기의 성숙과 진보 및 발전의 단계에서 볼 때 이러한 지식의 우월을 하찬은 것으로 치부해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미국청년의 타락상인 마약이나 무절제한 섹스, 지나친 전자오락 등의 뒤안길에는 이미 인류문명으로부터 버림받을 조짐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미래에 미국의 지도자가 될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며 뿐만 아니라 지금의 여론도 이렇게 타락한 사람들의 사유로부터 조성되고 있다는 점은 날이 갈수록 명확해지고 있다. 미국청년들과 얼마간의 교제를 해보면 미국인이 떠드는 '개방'이니 '민주'니 하는 것들 속에 실제로는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인상을 받는 것은 결코 소국적 근성으로 타인을 멸시하는 부정적심리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미국인과 교제를 하면 할수록 미국인의 순진한 개성이 우리에게 조금은 색다르고 신기하다고 느껴질 뿐 진정으로 하나의 민족을 발전시킬 만한 것은 별로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또 미국인이 경극(京劇)을 하거나 {물의 고향 강남[ 이라는 춤을 추는 것을 넓은 아량으로 보아주며 이로써 두 문화의 현저한 차이점에 쾌감을 느끼곤 하지만, 사실 깊게 관찰해 보면 이들의 행동은 어떤 면으로도 참고할 만한 가치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조국에 대한 역사의식이나 깊은 사상도 없고 고난을 겪어보지도 않은 민족이 어떻게 세계의 미래를 선도할 수 있단 말인가? 인류의 미래를 밝힐 광명의 횟불이 '컴퓨터 천재'라고 불리는 아이들의 손아귀에 장악될 수 있단 말인가?
최근 미국의 어느 신문보도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많은 미국 성인들은 자기가 문맹이라는 사실을 평생 속이고 살며 어느 날 그의 자식들이 존경하던 아버지가 문맹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크게 놀란다는 것이다. 이런 기이한 사실은 우리의 의문점을 해결하는 데 얼마간의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예를 들어 요즘 국내의 젊은 여성들이 돈많은 사람을 추종하는 복잡한 심리상태에 대해 나는 여러 차례 다른 사람들과 토론을 벌여 본 적이 있다. 이런 현상 속에 '공리제일주의'라는 것 외에 '진실제일주의'라는 동기도 있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결론은 있다는 것이다. 남자의 기품은 여성을 유인하는 매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매력은 돈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다. '돈만 있으면 남성다운 기질은 자연히 나타난다'는 말은 세태를 풍자하는 말 외에 분명 인류의 진정한 심리상태에 부합되는 말일 것이다. 비천한 출신이거나 아무리 못생긴 사람이라도 일단 돈만 있으면 자신감과 오만함을 보이는데. 이는 곧 부유한 집 자식들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쉽게 감상에 젖는 젊은 여성들의 마음에 미묘한 반응을 일으키게 하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비유로 우리는 맹목적으로 미국적 개성을 추종하는 치명적오류를 해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인이 천진하고 단순하게 보이는 까닭은 우리에게 그들의 큰 시장이 있기 때문이며, 이것은 미국 물질문명의 배경에 깔린 미흑의 안개로 위장되어 있는 것이다. 미국인의 천진함과 단순함을 미국문명과 성과와 관계있는 것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사실 미국인의 초라하고 볼품없는 모습은 그들 문명의 부산물이며 복지정책으로 제공된, 우유로 길들여진심각한 타성일 따름이다. 미국식의 광고는 우리에게 그들의 문명에 대한 착각을 일으키기에 족한 것이다. 미국의 젊은이들은 큰 권력을 믿고 부패를 일삼는 따위의 행동으로 대국적 위치는 이미 장사지내고 말았으며, 지금은 단지 고약한 취미와 권문세가의 애교에 불과한 기풍밖에 가진 것이 없다. 미국의 어느 청년이 중국에서 영어를 가르치게 되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가는 중국은 지옥과 같은 국가이고 중국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공항에 나와 대성통곡하였다는 것이다. 아들은 일 년 후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중국은 그런 나라가 아니었다고 설명하였으나 어머니는 아들의 말을 믿지 않고 다시는 중국에 못 가게 했다는 것이다. 이런 예에서 보편적으로 미국인의 가슴에 자리잡고 있는 쇄국적이고 배타적인 심성을 엿볼 수 있다. 문제는 이런 견식 없는 대중들이 세계사를 좌지우지하려는 초강대국 미국 민의 기초라는 것이다.
미국의 정보기구는 전세계에서 가장 막강하다고 들었다. 대통령, 당의장, 총리. 정당의 사무총장, 원수, 정무위원, 장관 등 수백 명이 넘는 외국 정계의 요인들이 정적에게 몰려 축출될 때 '중앙정보국 간첩'으로 지목되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다. 미국은 역사적으로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인사나 친미세력들을 끊임없이 지원하고 있으나 사상으로 세계의 어떤 민족도 지배한 적은 없다. 설사 어떤 민족이 가난하고 힘이 약해 미국에게 지배를 당하더라도 미국적 가치에 머리를 숙이는 일은 절대 없었다. 미국보다 문명이 앞선 유럽이 비록 마설계획의 혜택을 받고 있을 때도 유럽은 그들의 우수한 철학, 정치, 경제상의 확고한 자존심을 지켰었다. 나라를 독립시키고 민족을 해방시키며 인민들은 혁명을 하여야 한다는 이 규율은 미국이 가장 번영하던 20세기에는 강렬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러한 사상적 매력을 가지고 국제적인 업무를 처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며 먼로주의로부터 이후 역대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국정수행상에 보여준 각양각색의 '주의'라는 것들이 국제적 대세에 어떠한 구속력도 가지지 못하였다. 또한 인류를 계도하고 상호 협조하게 하는 사상 중 어느 것 하나도 아메리카합중국에서 이루어진 것은 없다. 전후세계의 균형에 비교적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는 유엔에서의 미국 역할 역시 악역배우와 같이 자제력을 잃어 세계를 이끌어가는 데 있어서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도덕성마저도 잃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는 각양각색의 사회단체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70년대 말 떵샤오핑(이 미국을 방문하였을 때 중국의 정치적 지도자 짱춘챠오(張春橋)를 정신지도자로 받들고 있던 정치단체들이 가두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미국인들을 겉에서만 보면 사상이 풍부하고 활달하기 때문에 자칫 그들의 문명에 높은 점수를 주게 되지만 그들의 문명사조는 단 한 번도 세계적 문명의 대열에는 끼어들지 못하였다. 전세계의 여성운동, 노동운동, 문화혁명, 청년논단 등은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내재적 규율에 의해 진행 된 것일 뿐이다. 미국문화의 폭발현상은 갈수록 방대한 규모로 환력이 넘치고 시대의 역작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한두 명의 선두주자가 수십 년 간 왁자지껄하게 유행을 이끌어가고 있어, 기이하고 에로틱한 기교가 예술 발전의 최대지표가 되고 있다. 기술주의의 발전과 사상성의 급격한 퇴조는 이미 대중예술 감상의 보편적 범좨가 되고 있다. 미국인에게는 축적된 경륜이 부족하여 세계를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할뿐 아니라 자신을 정확하게 조명할 능력조차도 가지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안목에는 제3세계의 정치지도자들은 모두 만화경 속의 폭군일 뿐이며 미국문명 영향권 밖의 문명에 대해서는 더욱 강력하게 그들 문명의 수입을 강요하고 있다. 싱가포르에서 죄를 지은 어느 미국인에게 가죽채찍으로 때리는 태형을 가하자 모든 미국 국민은 가슴을 졸였다. 그들은 이러한 상처를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야단법석 호들갑을 떨었던 것이다. 그들은 미국인도 채찍으로 맞을 수 있다는 심리적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였던 것이다. 조그만 고통조차도 참아내지 못하는 나약하고도 연약한 미국인에게서 채찍에 맞아 울부짖는 소리가 터져 나온 것이고, 이것이 장래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미국인의 모습인 것이다. 미국인의 군중심리에는 배타적이고 쇄국적인 징조가 이미 현저히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몰락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다가올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군중심리에 나타나는 배타적이고도 쇄국적인 현상은 미국이 국제적인 사안을 다루는 데 있어서 정상을 벗어난 크나큰 오류를 범하게 만들 것이다.
지금도 미국의 세력범위 내에서 부패정권은 출현하고 있다. 아이티에서 뒤발리에 일가족의 치욕적인 통치는 미국의 비호하에 50년 간 지속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인민혁명은 모두 미국이 실패한 정책에 대한 반격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동유럽에서 좌파계열의 세력들이 승리를 거두고 있는 것은 미국의 짧은 생각에서 비롯된 국제전략에 대한 최대의 징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와는 달리 오늘날 전세계에서 반미를 외치는 소리는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용감한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전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미감정은 이제 정신적인 무장에 물질적인 무기까지 가세되고 있다. 나는 이러한 외침 속에 전해지는 '미국, 너는 무엇에 기대어 세계의 중심 노릇을 하려고 하느냐? 너는 이제 틀려먹었다'라는 소리를 분명하게 듣고 있다. 이제 국민들은 미국에 대하여 순수한 도의적 반항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바로잡고자 하는 일종의 숙정운동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20세기 후반에 지구상에 나타나는 역사적 의의가 가장 깊은. 심각한 변화인 것이다. 미국에 대해 가장 자신있고 과감하게 'No'라고 외치는 국가는 일본일 것이다. 전후 일본인의 미 . 일 관계의 전면적인 재조정 작업은 실제로는 패전의식을 일소하는 과정이었다. 미야자와(전 수상이 미국 노동자의 자질에 대해 회의를 표시한 사실은 일본인의 주체의식에 대한 각성을 증명해 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것으로부터 계시를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일찍이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진 적이 있다. 민족주의인 것은 예외없이 비열한 근성에서 출발한 것인가? 80년대 우리들이 대학캠퍼스에서 생활할 때 우리의 사고는 가장 자유분방한 시기였고 따라서 우리들은 말이나 글로 사정없이 우리 국민의 저열한 근성을 성토하였다.우리에게 전해 내려오는 종법관념(宗法觀念)으로부터 사회풍속에 이르기까지, 문학관으로부터 우리가 가진 부족한 경쟁의식에 이르기까지 무차별적으로 비평을 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우리에게는 현실적 책임이 없었기 때문에 비평은 어디까지나 비평으로 끝나고 말았다. 우리는 너무 쉽게 판단하는 세계관을 가졌기 때문에 일본을 가벼운 존재로 보는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일본의 세 번째 부흥은 맥아더 장군의 군사력과 군용물자가 가져다 준 것으로 알고 있고, 또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에 대한 혐오스러운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물욕에 대한 충동과 진리를 찾고자하는 길을 일본에서 찾는 대신 아메리카로 옴겻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본민족의 문명을 다시 한 번 돌이켜 보면 우리를 강탄하게하는 역사 발전의 인과관계가 내재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학자들이 대만, 홍콩. 싱가포르와 동남아의 중국인이 이루어낸 신흥공업지역을 대중화(大中華) 경제문화권에 편입시키고 있음을 보고. 우리는 일본의 대화개신(大化改新), 명치유신(明治維新), 전후부흥(戰後부興)의 3대 혁신이 형태적으로 볼 때는 오히려 중화민족의 찬란한 문명의 계승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일본의 경제적 풍요로움 속에는 유가(儒家)의 혈통이 농후하게 배어있다. 일본의 건축, 정원, 다도(茶道), 검도, 우아하고 정감어린 예절 등은 중국 본토보다 더욱 중국의 고풍이 짙게 깔려 있다. 민감한 일본인은 그들의 민족문화가 중국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고 확신하고 그들의 문명을 '동양문명'이라는 명칭으로 중화문명과는 다른 선상에 두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러나 일본 국민에게서 나타나는 풍채와 자질구레한 재능에서는 대국과는 견줄 수 없는 촌티를 풍긴다. 일본사학자들이 어떤 식으로 그들의 상고 천황의 세계표(世系표)를 위조하든또 대화(大和)민족의 신화를 창작하느라 어떤 고심을 하든 우리에게 보이는 일본 민족문화의 그 내재적 핵심은 여전히 공자와 맹자의 도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공자는 '나의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뗏목을 타고 해외로 나가겠다[道不行, 承浮浮 於 海]'고 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공자의 이 말씀에서 허를찌르는 따가운 맛을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문명의 핵심을 보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형상과 직감적인 요소에 너무나 많은 시간을 낭비하였다. 우리의 응지를 펼칠 실마리를 '대중화 경제문화권'이라는 천재적 발상이 보여 주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대해 큰 기대를 걸고 있다. 국제 정치 환경의 변화에 따라 ' 대중화 경제문화권'은 시험수준의 검토단계에서 성숙한 이론으로 발전하고 더 나아가 정치적 이념이나 부정할 수없는 현실이 될 것이다. 과거에 우리는 '말하기 쉽고 협상하기 좋은 상대'였고 지나치게 공손한 태도를 취해 왔다. 이러한 모습은 반드시 고쳐져야 할 것이고 지금이 바로 이러한 작태를 고칠 수 있는 좋은 시기이다. 우리에게 있는 대국적인 미를 바탕으로 우리는 몸과 마음을 모두 바쳐 우리의 강산을 개조하여야 한다. 그리고 인민의 웅지와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 피어난 초연한 풍모로부터 우리들이 세계 속으로 달려 나갈 힘을 축적해야 할 것이다.
|
|
|
글터 → 명상/지혜/처세 |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시인 이경록
경주 시내에서 불국행 버스를 타고 가다가 불국사 종점 조금 못 미처 '우정의 동산' 앞에 내리면 그 작은 동산 길가엔 젊은 시인의 시비 하나가 외롭게 서 있다. 이 시비는 '77 년 4월, 스물 아홉의 젊은 나이에 백혈병으로 작고한 이경록 시인의 시비다. 경주를 찾고 불국사를 찾는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그러한 시비가 있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아직은 그를 기억하고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간간이 그를 찾아올 뿐이다.
이경록 시인이 죽음의 언저리를 헤매던 겨울밤, 그는 의사들로부터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몇몇 친구들은 흑성동 성모 병원 가까운 어느 소주 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고, 또 몇 명의 친구들은 그의 곁에 있었다. 점점 밤이 깊어지고 자정이 넘었을 때 갑자기 그의 숨결이 가팔랐다. 동쪽으로 창이 나 그의 병실로 급히 의사와 간호사가 다녀갔다. 곧 이어 수녀 몇 분이 들이닥쳤다. 수녀들은 그에게 종부성사를 주기 위해 손에 작은 성수병을 들고 있었다. "이경록 씨, 이제 하느님 곁에 가시는 거예요. 하느님 곁에 가시려면 영세를 받아야만 해요. 받으시겠죠?" 수녀들은 그에게 종부성사를 받기를 권했다. 천주교인이 아니었던 그로서는 뜻밖의 권고였다. 그러나 그는 그 권고를 받아들였다. 의식이 희미한 가운데에서도 머리를 끄덕이며 성사를 받겠다는 표시를 했다. "그러면 이름을 요셉이라고 하세요. 영세를 받으려면 영세명이 있어야 해요." 수녀 한 분이 그에게 요셉이라는 영세명을 정해 주었다. 그러자 그는 머리를 흔들며 종부성사 받기를 거부했다. 말 한 마디조차 할 수 없는 절대 절명의 순간에 "내가 시인인데, 이경록이라는 이름으로 하늘나라에 가야 시인인 줄 알지, 요셉이라고 하면 아무도 내가 시인인지 모른다."는 뜻의 말을 띄엄띄엄 토해 놓았다. 그러면서 손바닥에다가 수녀들이 자기의 말뜻을 잘 못 알아들었을까 봐 '시인'이라고 손가락 글씨를 써 보였다. 수녀들은 그의 뜻을 금방 알아차리고 큰 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요셉이라고 해도 하늘나라에서는 시인인 줄 다 알아요. 요셉이라 한다고 해서 이경록이라는 이름이 없어지는 건 아니에요." 그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종부성사를 받겠다는 표시를 했다. 곧 이어 그에게 성수가 뿌려지고 종부성사를 위한 수녀들의 기도가 시작되었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잠이 든 것 같았다. 그날 밤, 종부성사를 받고도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다들 한없이 기뻐했다. 그는 곧 퇴원을 하고 대학 졸업식에도 참석했다. 연작시 '겨울 바다'를 쓰기 위해 아내와 함께 부산 해운대도 다녀왔다. 그러나 그는 다시 병원에 입원을 하고, 결국은 이 세상과 작별을 고하고 말았다. '빈혈'이라는 마지막 한 편의 시를 남긴 채.
밤이 되면 내 몸에서 피가 빠져나갑니다. 피는 어디로 가나, 피는 공중으로 흘러서 하늘로 갑니다. 하늘나라, 피가 가는 그곳은 언제나 내 죽음의 집입니다. 피가 빠진 몸은 홀로 꿈을 꾸다가 차게 굳어서 흑연이 됩니다. 별이 된 몸. 별의 꿈, 별이 눈물을 흘립니다. 내 피는 하늘에서 별이 됩니다.
|
|
|
글터 → 이글저글 |
소련에는 서로 다른 170종(種)의 민족이 있다.
인도인들은 영화광이다. 미국 헐리우드에서 150개의 영화가 제작될 때 인도에서는 매년 1,000개의 영화가 제작된다.
비행기를 타고 알래스카 주를 지날 때 창문으로 큰 사슴을 내다보는 것은 위법이다. 알래스카 주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우루과이에서는 싸움으로 혹 누군가 죽는다 해도 국가 기관에 헌혈을 한다는 약속만 있다면 그 싸움은 합법이 된다.
빙하는 본래 얼음이 아니라 눈으로 되어 있다. 눈이 그 무게 때문에 짓눌려 얼음덩어리가 된 것이다.
방글라데시인은 70%가 문맹이다.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70세인데 반해 이들은 45세밖에 되지 않고, 그 전에 대부분의 유아와 산모들이 죽는다. 아이가 태어나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살아남을 가능성은 5%밖에 안되고, 위생시설이 제대로 없어 아직도 콜레라, 폐병, 나병 등이 만연한다. 인구의 20%만이 의사의 진료를 받은 적이 있다.
지상의 낙원 하와이는 Kauai, Oahu, Molokai, Maui, Big Hawaii 등의 섬들을 통틀어 부르는 이름이다. 지리학자들에 의하면 하와이 섬들도 북서쪽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고 한다.
킬리만자로는 탄자니아 북쪽 케냐 가까운 곳에 있으며 정상인 'Kibo'높이는 5,896미터로 60미터 깊이의 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다. 헤밍웨이의 단편소설 ‘킬리만자로의 눈’에 잘 설명되어 있다.
성 패트릭이 아일랜드 섬에서 모든 뱀을 쫓아냈다는 말은 분명히 전설이다. 그러나 이 섬에는 실제로 뱀이 없다. 이렇게 본래부터 뱀이 없는 섬들로는 크레이트, 뉴질랜드, 말타, 아이슬랜드, 하와이 등이 있다.
이슬람교도 여성들은 80%가 문맹이다.
|
|
|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