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 87 호
4339.12.17 (10.27) : Music Off = Esc
-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용량제한으로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나가 보이지 않습니다. 않보이시는 분은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
[발행지원본보기]
|
|
편지 |
|
|
문학소식 |
|
|
글터 → 명언 / 격언 |
나는 절대로 미래를 생각하는 일이 없다. 미래는너무도 빨리 닥쳐오기 때문에. / 앨버트 아인슈타인
|
|
글터 →사회/문화/인물 |
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제 5부 왕권과 여권
형제 왕 섬긴 애욕의 부나비 - 우왕후
초여름의 나른한 잠에서 깨어난 우 왕후는 버릇처럼 옆자리에 누워 있는 왕의 허리를 더듬었다. 17년 동안 왕을 섬겨 왔지만 왠일인지 우 왕후는 아직 대를 이을 사자 하나 얻지 못하고 있는 터여서 기회 있을 때마다 왕자의 잉태를 기대하고 있었다. "마마......." 팔을 뻗어 왕이 허리를 조심스럽게 더듬어 나가던 우 왕후는 무엇인가 섬쩍지근한 기분이 들어 재빨리 팔을 거두어들였다. "아니, 그럴 리가!" 우 왕후는 침상에서 냉큼 몸을 일으켜 불을 밝혔다. 그리고는 왕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마마, 마마!" 왕은 대답이 없었다. 우 왕후는 무서움을 누르고 왕의 상체를 흔들어 본다. 끄덕도 않는다. 맥을 짚어 본다. 맥박이 뛰지 않는다. "아........" 왕은 죽은 것이다. 거시 197년 초여름, 재위 19년 만에 고구려 제 9대 고국천왕은 그렇게 죽어 버렸다. 우 왕후는 왕의 죽음 앞에서 슬픔에 눈물짓기보다 변함없는 국가의 권병과 새로운 애욕의 상대를 먼저 생각해 보았다. '내 손아귀에서 권세가 떠나서는 안 된다. 왕자 하나도 낳아 보지 못한 이 얾은 육신이 대궐 밖으로 밀려나 살 수는 없으니.' 우 왕후는 17년 전 2월에 왕후가 되어 대궐 안으로 들어오던 때가 바로 엊그제 일처럼 떠올랐다.
제나부 우소의 딸을 당시 열다섯. 꽃다운 낭자의 자색은 이미 근동에 파다하게 알려져 있었다. 우소의 딸은 밤마다 꿈을 꾸었다. 젊은 새 왕이 자기를 말 위에 태우고 거대한 왕궁으로 들어가는 그런 꿈이었다. 언젠가는 또 사냥 길에 나선 젊은 왕에게 발각되어 황공하게 몸을 바치는 그런 꿈도 꾸었다. 그런 꿈을 꾼 이튿날 아침에 우 낭자는 아버지를 잡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아버지, 새 임금은 사냥을 즐기시나요?" "그래. 새 임금은 키가 아홉 척이나 되고, 커다란 쇠가마솥을 한손으로 번쩍번쩍 들어올릴 만큼 힘도 장사란다." 새 임금 남무는 신대왕 백고의 둘째 왕자였으나 신대왕이 승하하자 첫째 왕자 발기가 못나고 어리석다는 이유를 들어 나랏사람들이 새 왕에 남무를 추대하게 되었다고들 한다. "아버지, 새 임금은 또 모든 일을 처리할 때 백성의 말을 잘 듣고 이를 잘 판단하며 관용과 용맹을 함께 갖춘 어른이라 들었는데 사실이온지요?" 아버지 우소는 딸이 말끝마다 새 임금의 자표며 용맹을 들고 나오는 것이 은근히 걱정이 되어 짜증을 내었다. "네가 새 임금에게 정을 두고 있는 모양이다만 안될 소리다. 마마께서는 너같은 미천한 처녀에게 눈을 돌리시지두 않을 터이니까." 우 낭자는 그러나 아버지에게 엉뚱한 부탁을 하였다. "아버지, 새 임금을 한번만 만나 뵙게 해 주세요." "만나서 어쩌겠다는 거냐?" "새 임금님을 뵙기만 하면 임금님의 마음을 소녀 쪽으로 돌아서게 하겠나이다." "허, 네가 새 임금의 마음을 사로잡겠다구?" 어려서부터 용모가 빼어나게 어여쁜 딸이기는 하였다. 어디 용모뿐이랴. 지모와 정략이 출중한 딸이었으니, 딸의 요구대로 왕을 한번 만나게만 해 준다면 그야 무슨 귀걸이 날는지 모를 일이었다. 우소는 고국천왕은 남무가 사냥나오는 날을 미리 알아내어 딸에게 일러주고 결과를 기다렸다. 새 임금 고국천왕은 사냥의 명수였다. 우소 부녀의 소원대로 고국천왕은 며칠 뒤 사냥길에 올랐다. 우소 부녀는 사냥길에서 왕을 꾀어내기로 한 것이다. 고국천왕은 우 낭자가 얽어 놓은 지혜의 덫에 한발 한발 다가서고 있었다. 깊고 깊은 산 속이었다. 우 낭자는 멧돼지를 쓰러뜨려 놓고 혼자 기다렸다. 희끗희끗한 눈발이 우 낭자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고국천왕의 일행이 산 속에서 낭자와 화살에 맞은 멧돼지를 발견하기는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 맷돼지는 낭자가 잡았는가?" "그러하옵니다, 마마." 9척 장신의 늠름한 젊은 왕은 멧돼지와 낭자를 번갈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참으로 아름답고 재기에 넘쳐 보이는 낭자였다. 고국천왕은 주위를 돌아보고 분부했다. "저 낭자와 멧돼지를 수레에 태우고 궁으로 돌아가자." 왕의 힘으로써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날 밤 왕은 열다섯 살 난 우소의 딸을 침전으로 불러들여 하룻밤의 인연을 맺었다. 이튿날 중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왕은 이렇게 알렸다. "과인은 제나무 우소의 딸을 비로 맞으리로다." 서기 180년, 고국천왕 즉위 2년 음력 2월의 일이었다. 어린 우 왕후는 고국천왕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면서 국가의 권병을 잡아 나가기 시작했다. 왕후의 친척들을 하나둘 궁궐 안으로 불러들여 자리를 잡게 하고, 그들의 자제들도 아울러 권세를 잡게 하였다. 자연히 왕후의 친척들은 권세를 믿고 교만해지는가 하면, 사치를 일삼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자녀를 약탈하여 노비로 삼고 전택을 함부로 빼앗아 나라 안 사람들을 통분시켰다. 고국천왕은 뒤늦게 이 같은 사실을 알고 몸을 떨었다. "괘씸한 것들 같으니라구! 당장 국법을 어기는 자들을 잡아 주살토록 하라." 그러나 왕의 명령을 받은 군사들이 우 왕후의 친척들을 잡으러 가자 그들은 먼저 그 낌새를 알고 오히려 모반을 서둘렀다. 일이 다급하게 된 고국천왕은 급히 병사를 징집, 이를 토평하고 영을 내렸다. "근자에 관직을 은총으로서 주고 벼슬을 바로 올리지 아니한 까닭으로 그 독이 백성에게 미쳐 우리 왕실을 동요시키니, 이는 과인의 밝지 못한 탓이라. 너희들은 4부로 하여금 현양한 사람이 있으면 그를 천거하라." 고구려 4부에서는 즉시 동부의 안유를 천거했다. 왕이 안유를 불러 국정을 맡기려 하자 그는 손을 저어 사양했다. "마마, 미신은 용렬하여 대정에 참여하기 부족하옵니다." "그러면 그대말고 대정에 참여할 숨은 사람이 있단 말이오?" "그렇사옵니다, 전하." "그 사람이 누군지 말해 보오." "얘, 마마. 그는 바로 좌물촌에 사는 을파소란 사람이온데, 이 사람은 일찍이 유리왕 때의 대신 을소의 손으로서 성품이 강건하고 매사를 생각해서 헤아리는 능력이 깊고 뛰어난데, 세상에서 쓰지 안혹 있으므로 지금은 다만 밭갈이에 힘쓰며 자급하고 있사오니 대왕 전하께오서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오면 을파소를 불러서 쓰도록 함이 어떨가 하나이다." 왕은 사자를 파견하여 을파소를 불러들였다. 처음에 낮은 벼슬로 을파소를 쓰려 하였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신은 우둔하여 감히 엄명을 당하지 못하겠사오니 원컨데 현량한 사람을 뽑아 고관을 주어 대업을 이룩하소서." 고국천왕은 내심 '아, 이사람이 벼슬이 낮아서 응하지 않는구나.' 판단이 되어 곧 국상(국무총리)을 제수하여 정사를 맡아 보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 역사상 가장 우수한 재상 중의 한사람인 을파소가 고국천왕 대에 탄생하게 되 셈이었다. 이는 또한 우 왕후가 그의 친척들을 궁 안으로 끌어들어 결과에서 빚어진 일이니 말하자면 전화위복이 된 꼴이었다. 어떻든 을파소가 정사를 맡자 우 왕후는 권세의 최고 지위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우 왕후의 시들 줄 모르는 권세력을 미리 방바라도 하겠다는 듯이 왕은 때 맞춰 이런 하교를 내렸다. "빈부와 귀천이 없이 국상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는 이를 멸족 할 것이니라." 친척으로서 세력을 잡고 있던 자들은 모두 국상 을파소의 눈 밖에 나 떨려나 버렸다. 우 왕후는 이제 죽지 잃은 새 꼴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주저앉을 우 왕후가 아니었다. 그녀는 권세 대신 더 큰 욕망을 이뤄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왕자를 낳자. 그래서 내가 장차 태후가 되는 게야." 우 왕후는 기회 있을 때마다 왕을 보채어 침전으로 들고는 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 봐도 우 왕후에게는 태기가 없었고, 근간에 왕은 잠자리에서 기원이 쇠하여 자주 경련을 일으키곤 하였다. 이러다가 길사라도 하면 어쩌나 하여 겁이 나기도 했으나, 우 왕후는 왕자를 보고 싶은 욕망에 왕의 몸이 쇠해 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잠이 든 왕을 흔들어 깨운 뒤 욕심대로 교접을 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왕의 죽음. 그러다가 닥친 왕의 죽음을 앞에 놓고 우 왕후는 발상하지 않았다. '왕의 죽음을 숨기자. 왕의 후사가 없으니 내 마음에 드는 남자로 차기 왕을 삼고 그를 사로 잡아야 한다.' 우 왕후는 왕의 시신위에 이불을 뒤집어씌워 놓고 대궐 밖으로 나왔다. '먼저 왕의 형 발기를 찾아가 의논해 보자.' 밤중에 변복을 하고 나타난 우 왕후에게 발기는 꾸짖기부터 했다. "밤이 깊은데 어인 나들이시오?" "왕의 후사를 상의해 볼까 하고 왔소." 발기는 왕이 승하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언성을 높였다. "이 밤중에 할 일이 그리도 없어서 왕의 후사를 의논하러 왔단 말이오?" "그렇소, 그대가 왕의 형제 중에 장자이니 차기 왕위는 그대가 잇는 게 마땅하오." "뭐요? 하늘의 역수는 돌아가는 바가 따로 있는데 어찌 이를 가벼이 의논하겠소. 황차 부인이 야행을 하는 것이 한나라의 황후로서 어찌 예라 하리오!"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우 왕후는 돌아서서 그길로 발기의 동생 연우의 집으로 갔다. 발기에게 자기의 뜻을 거부당했다는 부끄러움과 연우라면 자기 소원을 들어 줄 것이라는 벅찬 기대를 안고 우 왕후는 마침내 연우와 맞닥뜨렸다. 의관은 정제하고 나온 연우는, "이 밤중에 어인 행차십니까?"하고 정중히 맞는다. "저, 실은.........." "아, 아, 밖에서 이러시지 마시고 방안으로 듭시오. 혹 아랫것들이 보면 흉이 될까 저어됩니다." 연우는 우 와후의 옷소매를 잡을 듯이 다가서서 연신 허리를 굽신거린다. 우 왕후는 주저하지 안혹 연우의 뒤를 따라 방안으로 들어갔다. 연우는 귀한 손을 맞아 손수 음식을 차려 내놓고 들기를 권하는 것이었다. 우 왕후는 그제서야 마음이 놓였다. "아주버니, 들어 보시구려." "예, 말씀하시옵소서, 중전마마." "대왕께서 승하하셨소!" 연우는 미리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는지 별로 놀라워하질 않는다. 사이를 두지 않고 우 왕후는 발기의 불손을 나무라기 시작했다. "아주버님! 대오께오서는 사자가 없으시니 마땅히 대왕의 바로 위의 형인 발기가 어른이 되어 뒤를 이어야 할 것이 아니오?" "그, 그렇습지요, 마마." "그러한데도 발기는 나에게 이심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오만무례하게 대하니 이를 어찌했으면 좋겠소? 마땅히 아주버니가 차기 보위를 결정해 주오." 연우는 가슴이 떨렸다. 우 왕후는 지금 자기가 왕이 되어 줄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연우는 예를 더하여 칼을 들고 고기를 썰었다. 귀한 자리를 들고 온 형수에게 고기라도 대접하고 싶었다. 너무 서둘른 탓일까, 연우는 잘못하여 손가락을 베고 말았다. 우 왕후는 재빨리 치마끈을 끌러 그 상한 손가락을 싸매 주었다. 상한 손가락을 형수 앞으로 내미는 연우나 그 손가락을 치마끈으로 메어주는 우 왕후의 손은 하나같이 와들와들 떨렸다. "아주버니, 보위에 오르십시오. 대와의 유언이라고 청하고 밝은 날 위에 오르면 아무도 흠을 잡으려는 자가 없을게요." "보위에.....제가..........." "주저하지 마시오, 아주버니. 새 왕이 되셔서 이 몸을 보살펴 주시면 이 몸 또한 아주버님을 하늘같이 모시겠소." 더 주저할 것이 없었다. 연우는 우 왕후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우 왕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사이 밤은 무척 깊어 있었다. "밤이 깊어서 무슨 뜻밖의 일이 일어날까 두려우니 그대는 나를 궁까지 바래다 주시오." "물론입지요, 마마." 연우는 우 왕후를 뒤따르게 하고 궁으로 향했다. 우 왕후는 연우의 곁으로 바짝 다가서서 그의 손을 잡고 궁안으로 드러갔다. 다음날 우 왕후는 거짓으로 선왕의 유명이라 꾸며 군신으로 하여금 연우를 즉위시켜 왕으로 삼았다. 그러자 과연 예상대로 발기가 크게 노하여 군사를 이끌고 와서 궁성을 포위하며 꾸짓고 나왔다. "연우야 이놈....... 형이 죽었으면 다음 아우에게 왕위를 맡기는 것이 예의인데 네 놈은 차례를 기다리지 낳고 건너뛰어 왕위를 빼앗았으니 큰 죄를 저질렀다. 빨리 나와라, 이놈! 만일 궁 안에서 걸어 나오지 않으면 네 처자에게까지 죽음이 미칠 것이니라." 그러나 연우는 궁성 문을 굳게 다독 사흘 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 바람에 궁성 밖에 있던 연우의 처자는 발기의 군사에게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백성들은 포악한 발기보다 연우 편이었다. 발기는 백성들의 호응을 받지 못하고 그의 처자를 이끌고 요동으로 달아나 태수 공손도를 잡고 지원을 요청했다. 일이 그렇게 돌아가자 연우도 끝의 동생 계수를 시켜 형 발기를 치도록 명했다. 싸움은 계수의 승리로 끝이 났다. 발기의 시체를 거두어 왕례로써 장사를 지내 준 연우는 발기의 반란으로 죽은 아내, 왕후의 자리를 메워야 했다. 그러나 산상왕 연우는 우 왕후의 몸에서 왕자를 얻지 못하자 궁성 밖에 나가 사냥하는 재미와 골 깊은 사천에 나가 기도하는 일로 소일하다시피 했다. 산상왕 7년 봄, 왕은 꿈을 꾸었다. 하늘은 꿈속에서 그렇게 알려왔다. "내 너의 소후로 하여금 생남하게 하여 근심이 없도록 하리로다." 왕은 깨어나 군신들에게, "꿈에 하늘에서 순순히 이 같은 말을 해왔으되 과인에게 소후가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국상 을파소는 오래 전부터 우 왕후의 지나친 욕망과 형제를 섬겨 온 부정한 정절을 못마땅해하던 참이라, "하늘의 명함은 가히 헤아릴 수 없사오니 대왕께서는 조금만 이를 기다리소서."하고 은근히 소후를 맞으라 권하고 나왔다.
산상왕 12년 겨울, 사냥길에서 왕은 멧돼지를 만난 추적하게 되었다. 종자들이 멧돼지를 쫓아 주통촌에 이르렀으나 잡지를 못하고 갈팡대는 사이에 엉뚱하게도 나이 스물쯤 되어 보이는 낭자가 쉽사리 잡아 놓지를 않는가. 왕은 이 말을 듣고 낭자의 집을 미행하여 그 용맹스런 낭자와 하룻밤 인연을 맺는다. 후녀라 일컫는 이 낭자는 왕의 품을 파고들면서, "대왕의 명령이라 피하지 못하겠사오나 만약 아이가 있게 되면 버리지 마옵소서."하고 다짐을 받고서야 받아들였다. 우 왕후는 왕이 주통촌의 후녀와 정을 통한 것을 알고 질투심으로 피가 끓었다. 그녀는 몰래 군사를 보내어 후녀를 죽이려 했지만 후녀는 이 소문을 알고 급히 남복으로 바꿔 입고 몸을 피했다. 마침녀 후녀는 왕자를 낳았다. 왕은 들에서 돼지를 만나 인연이 되어 아이를 낳았다. 하여 '교체'라는 이름을 지어 불렀다. 후녀를 소후로 봉한 왕은 이제 늙은 우 왕후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우 왕후의 심사는 날이 갈수록 사나워져서 어린 태자를 해하려 했으나 그 때마다 하늘을 교체 태자편이어서 번번이 실패로 끝나곤 했다.
서기 227년 초여름에 산상왕 연우가 죽고 교체가 왕위에 올랐다. 교체는 우 왕후를 높여 태후로 모셨다. 늙고 쇠잔해진 우 태후는 새임금 동천왕의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만년을 살아갔으나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부끄러운 과거가 가슴을 울릴 뿐이었다. 동천왕 8년 가을에 우 태후는 마침내 과욕과 부정의 일생을 마쳤는데, "내가 좋은 행실을 못하고 살았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가 국양(고국천왕)을 뵈리오. 내 죄로 볼진대 거리에다 시신을 버려도 마땅하겠네만 기왕지사 지하에 들어가 눕게 될 몸 산상왕 곁에 묻어 주오."하고 유언하기를 잊지 않았다. 그러나 산상왕은 아들 동천왕의 꿈에 나타나서 우 왕후와 함께 눕기를 거부했다. 하는 수 없이 동천왕은 산상왕과 우 왕후 묘소 사이에다 일곱 겹의 소나무를 심어 막아 주었다. 부정과 과욕의 생애는 이처럼 죽어서도 생전의 두 남편과 헤어져 살게 된 셈이니, 살이 있었을 때 우 왕후는 아마 두 남편으로부터 도타운 정을 받지 못한 여인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
|
|
글터 → 국사/세계사
|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정치, 경제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뭍길따라 뱃길따라 열리는 고려의 교통로 - 이인재(연세대 국학연구원 계약연구원)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당산철료의 통행이 금지되었을 때, 사람들은 단순히 길이 끊겼다고만 생각하지 않았다. 강 건너 있던 직장을 몇 배의 시간을 투자하여 돌아가야 했고, 주변에서 장사하는 사람들도 손님을 부르는 방식이 달라졌다. 대가를 지불하고서야 길이 지역과 지역을 연결시켜 줄 뿐만 아니라 산업과 산업, 생활과 생활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을 우리는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서 길이 한 국가의 생명을 이어주고 핏줄고 같다는 것이다. 고려시대의 교통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산업사회와는 그 역할이 다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 국가경영에서 교통로의 의미가 처지게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전국을 잇는 스물 두 개의 뭍길 <고려사>를 보면 당시 전국에는 525개의 역이 있고, 이 역들은 22역도로 묶여 있었다. 역도는 지금의 국도를 연상하면 된다. 그런데 22역도 가운데 8개는 수도인 개경 북쪽에 있고, 그 남쪽에 14개가 있었다. 우선 개경에서 황해도 방면으로 나가는 길은 서해안을 따라 배천- 연안- 해주를 거치는 산예도가 있고, 내륙으로는 금천을 지나 평산- 신계- 곡산에 이르는 금교도가 있다. 그리고 지금 철원- 금화- 평강- 회양을 잇는 도원도가 있다. 이 길로 쭉 가면 철령을 지나 금강산이나 원산까지 갈 수 있다. 개경에서 서경(평양)길은 금교도와 절령도이다. 그교도의 평산에서 서흥을 지나 자비령을 넘다 보면 평양 남쪽인 절령도와 만나게 된다. 절령도는 황주와 봉산, 재령과 수안을 거쳐 평양까지 가는 길이다. 연안지역으로 태뻗은 산예도에서 황주를 지나 평양에 이르는 길이 공식적으로 채택되지 않은 이유는 아마 개경에서 직접 배를 타고 평양에 갈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평양을 중심으로 상방으로 뻗어 나가는 여러 길이 홍교도이다. 홍교도의 한 방면은 평양에서 서남방향으로 강서를 지나 용강에 이르는 길이고, 다른 한 방면은 숙천- 안주- 박천에 이르는 길이다. 이 길을 연이어 당시 국경지대인 의주방면을 중심으로 뻗은 길을 홍화도라 하고, 평북 내륙지방으로 이어진 길을 운중도라 한다. 홍화도는 안북도호부가 있던 안주 북쪽 지역인 선천-철산-의주까지 이어지는 길이 중심이 되고, 운중도는 안주 동쪽인 영변- 개천- 맹산등지를 잇는 길을 말한다. 이 지역의 여러 역들을 매우 세밀하게 파악한 것은 국방상의 이유였을 것이다. 개경과 원산지역을 잇는 도원도와 연결되었을 것이 삭방도이다. 삭방도는 지금의 함남지역과 강원도 북부지역을 이어 주는데, 그역시 국방상 필요에 따라 국가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삭방도 밑으로 강원도 동해안을 끼고 명주도가 있다. 명주도는 강릉을 중심으로 연곡-양양으로 이어지는 길과 남쪽으로는 옥계- 삼척으로 해서 울진으로 연결될 수 있는 길로 짜여져 있다. 다음 개경 남쪽으로 뻗은 길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개경과 남경(서울)을 잇는 청교도이다. 청교도는 개경의 청교역에서 출발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개경- 파주- 서울에 이르는 길을 중심으로 서울과 부평, 인천 및 고양과 양주 주변을 잇는 길을 통칭한다. 이 길을 따라 가평- 춘천- 인제로 이어지는 길이 춘주도이고, 이천- 원주- 제천- 단양을 지나 영주- 안동으로 이어지는 길이 평구도이며, 과천- 용인- 죽산- 음성- 괴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광주도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반도 내륙지역은 모두 지금의 서울을 중심으로 길이 뻗어 있었다. 그 아래로는 충주청주도와 전주공주도와 승주나주도 등 3개의 길이 내륙지방과 연결되어 있었다. 충주청주도는 지금의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가는 수원- 청주- 연기길과 온양- 예산- 해미- 공주- 부여길을 모두 포괄하며, 전주공주도는 전주- 여산- 공주 길과 고부-태인-정읍 길로 짜여져 있다. 승주나주도는 고창- 영광- 함평- 영암- 해남길과 담양- 광주- 나주- 화순길로 구성되어 있다. 남해안 지역에는 전라도쪽에 남원도, 경상도쪽에 산남도가 있으며, 동남해안을 끼고 금주도가 있다. 남원도는 지리산쪽의 임실- 남원- 구례- 운봉길과 남해안쪽의 순천- 낙안- 보성- 장흥길이 있는데, 장흥길로 해서 승주나주도와 연결할 수 있었다. 산남도는 전주-진안- 진주로 이어지는 길이 있어 전공주도와 연결되며, 거창- 합천- 고성길로 해서 금주도와 연결된다. 금주도는 김해를 중심으로 창원-밀양-청도-현풍을 잇고, 밀양에서 양산-동래- 울산- 언양으로 이어진다. 경상도 내륙지역에는 경상도와 상주도, 경주도가 있다. 경산도는 성주- 김천- 횡간으로 해서 옥천- 보은에 이르는 길이고, 상주도는 문경- 예천- 안동길과 선산- 군위로 이어지는 길이다. 경주도는 경주를 중심으로 영천- 대구- 경산에 이르는 길과 동해안을 끼고 영덕- 평해로 이어지는 길이다. 경산도는 충주청주도로 이어지고, 상주도는 광주도와 연결되며, 경주도는 명주도와 연결된다. 이상이 개경을 중심으로 전국을 거미줄처럼 짜 놓은 22개의 뭍길이다. 자동차를 타고 국도를 달려 본 사람이면, 지금도 그 때의 교통로를 이용하고 있음을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전국의 70퍼센트가 산악지대인 우리 나라에서는 길을 낼 수 있는 지형 조건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별로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뭍길의 관리와 이용 요즈음은 건설교통부에서 도로를 건설하고 관리하지만 고려시대에는 병부에서 관할하였다. 병부 아래에 있는 공역서라는 관청에서 각 지방에 보내는 문서가 제대로 격식을 갖추었는지, 사신들이 지방에 갈 때 역에서 사용하는 말의 수가 규정대로 지켜지고 있는지를 감독하였다. 이 일을 담당하는 관리가 관역사이다. 그러면 고려국가가 어떠한 목적과 필요성에 따라 525개의 역과 22개의 역도를 관리해 나갔는지 살펴보자. 개경 북쪽에서 북계를 관통하는 6개의 뭍길 121개 역 가운데 53퍼센트에 달하는 64개 역과 개경 동쪽에서 동계의 남북을 관통하는 3개 물길 91개 역 가운데 57퍼센트에 이르는 52개 역, 그리고 개경남쪽에서 서울을 지나 춘천, 제천 방면 2개의 뭍길 54개 역 가운데 33퍼센트에 해당하는 18개 역을 6등급으로 나누어 특별히 관리하였다. 이 가운데 춘추도와 평구도에 소속된 역을 제외하면 크게 북계방면과 동계 방면에 해당되는 9개의 뭍길 212역 가운데 55퍼센트에 달하는 116개의 역이 특별관리된 셈이다. 이를 22역도제와 별도로 6과체계라고 한다. 과에 따라 1과역은 75명의 역정이 있었으며, 2과역은 60명, 3과역은 45명, 4과역은 35명, 5과역은 12명, 6과역은 7명을 두도록 하였다. 역정은 경제력이 있는 사람인 정호로 충당하였는데, 부족할 경우에는 일반농민인 백정이라도 충당할 수 있었다. 역에 필요한 인원은 반드시 채워 좋아야 했기 때문이다. 22뭍길에 소속된 역 가운데 6과체계로 편성된 역을 보면, 1과역은 개경과 서경을 잇는 역들이고, 2과 역은 북계방면, 3과역은 동계방면의 역이다. 이들 6과체계는 개경과 서경 간을 연락하고, 군사. 행정적으로 중요한 지역을 묶기 위한 도로망이었다. 역에는 역장과 역리, 역정이 있었다. 역장은 역에 관한 모든 일을 책임졌다. 역리는 문서를 전달하고, 필요한 말을 뽑아 내고 인원을 충원하였다. 역정은 직접 문서를 들고 뛰거나 사신들의 심부름을 하였다. 역의 운영명목으로 공해전 명목의 토지, 용지 조달을 위한 지위전, 역장을 위한 장전, 말 사육을 위한 마위전을 지급하였다. 사신이나 문서를 보낼 때, 각 역은 자기 역에 도착한 사람이나 문서를 다음 역으로 보내는 일을 하였다. 사신의 지위에 따라 역에서 조달하는 말의 수가 달랐는데, 2품 이상의 재추면 10마리, 3품관원이나 안렴사는 7마리 등이었다. 이들은 각 역에서 말을 쓸 수 있다는 문서를 받아 그 말을 사용하여 다음 역까지 가는 방법으로 목적지에 도달하였다. 중앙 관청의 공문서는 먼저 상서성에 보고한 후 각 지방에 보냈다. 공문서는 보통 가죽주머니에 넣어 역졸이 릴레이하는 식으로 역에서 역으로 전송하였다. 급한 문서인 경우에는 가죽주머니에 방울을 달아 보낸다. 아주 급하면 방울 3개를 다는데, 격이 떨어지면 2개 혹은 1개를 달았다. 그러나 역졸이 천천히 달릴 수도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규제도 마련해 놓았다. 예를 들면 2월부터 7월까지는 방울 3개 달린 문서를 가진 역졸은 하루에 6개의 역을 지나야 하고, 2개 달린 문서는 5개의 역, 1개 달린 문서는 4개 역을 달려야 했다. 그러나 8월부터 정월까지는 각각 1개 역씩 줄여서 달리도록 하였다. 이렇게 문서를 들고 뛰는 사람들이 요즈음 마라톤을 했다면 메달 몇 개씩은 땄을 것이다. 이로 보면 오늘날 역전마라톤의 기원은 무척 오래 된 셈이다. 그런데 각 역에서는 주어진 일만 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힘든 일은 사신이나 승려가 부당한 요구를 하는 경우이다. 승려가 관역에 머물면서 영접이나 음식대접이 소홀하다고 해서 역리나 역정을 매질하거나, 사신의 노비가 주인을 빙자하여 공적으로 사용해야 할 말을 함부로 타고 돌아 다니기도 하였다. 혹은 개인적인 이익을 취하려고 특산물을 사다 파는 데 이용하기도 하였다.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 하는 일은 그 때나 지금이나 매우 피곤하다.
뱃길 하나로 묶어진 13곳의 창고 각 지역에서 생산된 곡식은 조창에 모아 배로 운반하였다. 뭍에서 가까운 곳으로 곡식을 옮길 때에는 지게나 달구지를 이용하였고, 소 등에 기르마를 올려 운반하기도 하였다. 그 중 가장 많이 실을 수 있는 달구지는 보통 벼 15에서 20가마니를 나를 수 있었다. 그런데 개경과 같이 먼 거리일 경우에는 배를 이용하여 대량으로 운반하였다. 전국 각지에는 13곳의 조창이 있었다. 충청도에는 아산의 하양창과 서산의 영풍창이 있고, 전북에는 부안의 안흥창과 임피의 진성창이 있다. 전남에는 조창이 네 개가 있는데, 나주의 해릉창과 영광의 부용창, 영암의 장흥창과 승주의 해룡창이 있다. 경남에는 사천의 통양창과 창원의 석두창이 있다. 이 외에 남한강을 따라 충주의 덕흥창이 있고, 원주에 흥원창이 있고, 황해도 장연에 안란창이 있었다. 조창에는 역과 마찬가지로 독자적인 영역과 주민이 있었다. 이들이 조세로 거두어 들인 쌀을 보관하고 조운하였다. 이 일을 총책임을 지며 감독하는 이를 판관이라고 하였다. 판관 밑에는 색전이라는 향리가 있었는데, 실제로 조세 등을 거두고 개경의 창고로 옮기는 일을 맡았다. 이들 이외에 조창에는 뱃사람과 잡일꾼도 있었다. 배로 곡식을 나를 때에는 난파와 약탈을 방지하기 위하여 선단을 짜서 운반하였고, 한 배에 실을 수 있는 곡식량도 정해 놓았다. 충주나 원주에서 출발하여 한강을 따라 운반할 때에는 각각 배 21척과 20척으로 선단을 짜서 운반하되, 곡식 200가마니를 실을 수 있는 밑이 평평한 평저선을 이용하였다. 연해안을 따라 곡식을 옮길 때에는 큰 배 6소(배를 세는 단위)로 선단을 구성하되 곡식 1천석을 실을 수 있는 초마선을 이용하였다. 운반비는 곡식량과 출발 지역에 따라 책정하였다. 즉 개경까지의 수송 거리와 난이도에 따라 달랐는데, 개경에서 가장 먼 남해안 지역에서 쌀 5석에서 6석의 운반비는 쌀 1석이었다. 전남 서해안 지역에서 옮길 때에는 쌀 8석에서 9석의 운반비가 쌀 1석이었다. 결국 개경에 가까울수록 운반비가 싸져서 13석에서 15석, 20석에서 21석의 운반비가 쌀 1석의 운반비가 쌀 1석으로 매겨졌지만, 그것도 적은 것은 아니었다. 곡식을 옮기는 기간에 대한 규정도 있었다. 개경과 가까운 조창에서는 2월까지 거두어 보내도록 했는데 늦어도 4월까지 도착해야 하고, 먼곳이라도 5월까지 도착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제때에 출발하더라도 바람이 순조롭지 못하거나 풍랑을 만났을 때에는 사고 정도를 감안하여 조세를 받지 않기도 하였다. 이 기준은 키잡이 3명과 잡부 5명이 미곡과 함께 침몰할 때이다. 이 경우 조세를 다시 거두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늦게 출발하였거나 동원된 키잡이나 잡부의 3분의 1만이 빠져 죽은 경우에는 해당 고을의 수령이나 담당 아전, 키잡이, 잡부에게 분담시켰다. 키잡이나 잡부의 처지에서는 그 부담을 지는 것보다 물에 빠져 죽는 것이 더 나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거짓으로 배가 침몰했다고 하여 곡식을 국가나 해당 주인에게 바치지 않는 일도 많았다. 그래서 문종 때에는 키잡이나 잡부들이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되었다거나 파괴되었다고 거짓 보고한 후 자기들끼리 나누어 가진 자들에게, 모두 곡물을 내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린 적도 있다.
뭍길과 뱃길로 엮인 국가의 동맥 22뭍길과 뱃길은 중앙과 지방을 묶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중앙에서 각종 공문서를 보낼 때도 길을 통하여 전달하였고, 조세를 거둘 때도 길을 통해야 하였다. 임금이나 관리가 이 길을 따라 지방을 여행하였고, 군사나 상인도 이 길을 이용하였다. 길 가는 도중에 잠을 자거나 물건도 쌓아 놓을 공간도 필요하였다. 미곡 따위를 실은 조운선은 대부분 연안 항로를 따라 운항하였고, 내륙지방의 경우는 남한강 등을 이용하였다. 육지가 바라다보이는 근접 연안을 따라 항해했지만 조난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고려 중기에 충청도 서산 안흥량에 운하를 파려고 했던 것은 해난을 방지하려는 노력의 하나였다. 계속 개척하고 보수하는 가운데 우리의 교통로는 국가 동맥으로서 발전하여 왔다.
|
|
|
글터 → 삶속의 글
|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 사람들 사이에 피어나는 작은 들꽃들
빛나는 거스름돈 오랜만에 극장을 찾았다. 시간이 좀 남아 여기저기를 어슬렁거리다가 매점에서 과자 한 봉지를 사들고 일찌감치 극장안으로 들어섰다. 내 좌석은 중간 자리였다. 좌석표를 들고 자리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우왕좌왕 오가고 그 사람들 틈에서 간신히 내 자리를 찾아 앉았다. 화면에 무수한 광고들이 휙휙 지나갔고 나는 과자를 오물거리며 멍하게 광고들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영화시간이 다 되었는지 어느새 좌석은 꽉 매워지고 극장안은 한츤 더 어두워진 느낌이었다. 그때 극장 앞문이 열리더니 한 아주머니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아주머니는 한참을 두리번 거리다가 맨 앞자리부터 한칸 한칸 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훑어보는 것이었다. 아마 자리를 찾는 관객이겠거니 했는데 아주머니는 사람들에게 종종 말을 건네기도 하면서 차츰차츰 뒤쪽으로 움직이셨다. 내가 앉은 중간 좌석 근처에서 아주머니는 허리를 펴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셨다. 그때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웃으면서 물으셨다. "아까 매점에서 과자를 사 간 아가씨 아닌가?" 그때서야 그 아주머니가 매점 주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주머니는 "어여 이것 받아"하시며 손을 뻗어 동전을 내미셨다. "아까 과자 사고 거스름돈을 덜 주었어." 돈을 받고 나니 아주머니는 벌써 극장안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잠시 후 영화가 시작되었다. 손을 펴 보니 오백원짜리 동전이 반짝 빛나고 있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나는 오백 원짜리 동전을 꼭 쥐고 있었다.
양성혜 님/서울시 강동구 길동
|
|
|
글터 → 철학 |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83 -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 사상: 서구사상의 두 뿌리 그때 세계에서는 1933년: 독일, 아인슈타인, 토마스 만, 츠바이크 등 망명. 1937년: 북경에 중화민국 임시정부 수립
모든 사상이 다 그러하듯이 철학도 사상적 과제를 지니고 있는 한 시대성과 유행성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 같다. 특히 실존철학이 그러했다. 지금은 4,50년 전에 비해 크게 문제삼지 않아도 되는 그 시대의 유산으로 자취를 감추어가고 있다. 그런데 실존사상과 철학이 그렇게 큰 영향력을 행사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뒤따르고 있었다. 그 하나는 실존의 문제가 깊은 인간 및 인간학적 과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철학이외의 분야, 특히 문학에서 실존주의 작가들이 한 시대에 끼친 영향이 대단했다는 사실이다 고대정신속에도 인간실존의 뜻은 어디에나 나타나고 있다. 인도의 옛날 사상인 우파니샤드 사상에도 항상 드러나고 있다. 종교는 언제나 인간적 실존과 연결되어온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스의 대표적인 비극작가인 소포클레스의 작품을 읽는 사람은 깊은 인간적 실존의 음성을 항상 듣게 된다. 어떤 이들은 셰익스피어의 비극속에서 같은 뜻을 얻기도 한다. 파스칼의 "팡세"를 읽는 사람은 여러 곳에서 같은 고백을 발견한다. 아마 도스토예프스키를 애독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누구보다도 인간실존을 취급한 작가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평범한 주인공들을 통해 인간의 내면적 절규를 듣게 하는 것이 그의 작품들이다. 우리는 사르트르가 철학자이면서 대표적인 작가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사르트르와 논쟁을 벌였던 A.카뮈의 작품세계가 같은 내용을 잘 알려주고 있다. 카뮈의 "이방인"을 읽은 사람이나 같은 노벨수상작인 라게르크비스트의 "바라바"를 읽은 사람은 그 주인공들을 통해 우리 자신이 내뿜는 삶의 절규를 공감했을 것이다. 그 점에서는 김은국의 "순교자"고 깊은 암시를 전해주는 작품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때 세계적으로 파문을 일으켰던 실존사상은 많은 철학자와 더 많은 예술가들을 남겨주고 역사의 무대에서 자취를 감춘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인간의 문제였기에 연구한 것이 있으며, 격변하는 역사였기에 우리에게 같은 물음을 안겨준 철학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철학이 주로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났고, 그 영향이 일본을 비롯한 동양사회에 큰 의미를 남겨주었으나, 영국, 미국을 비롯한 영어문화권에서는 그렇게 큰 반응을 얻지 못했다는 점이다.거기에는 전통의 차이도 있었으나, 독일과 프랑스가 같은 역사적인 비극을 영국과 미국은 가볍게 넘겼다는데도 의미는 있었을 것 같다. 그리고 모든 학문과 사상을 상식과 교양으로 처리하는 영어문화권에서는 그렇게 심각한 생의 문제를 대중들이 외면해온 것 같기도 하다. 그러면 이러한 기간에 그들은 어떤 철학을 계승, 발전시켜왔는가? 그것은 다른 장에서 새로이 취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는 큰 구별을 하지 않은 데로 서양철학 또는 서구사상을 포괄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같은 서양사상이라고 해도 전통적인 공통성이 있는가 하면 사회적인 차이점도 대단하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전통적인 공통성은 크게 보았을 때 두 가지이다. 그리스의 철학과 기독교 정신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대표되는 그리스철학은 고대사상은 물론 중세기에도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으며, 어떤 면에서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전통은 이어지고 있다. 플라톤을 얘기하지 않은 대표적인 철학자는 없으며 아리스토텔레스를 제쳐놓고 논리학, 예술론, 형이상학, 윤리학, 정치학 등을 강의하는 철학자는 없을 정도로 그들의 영향은 큰 것이다. 기독교 정신도 그렇다. 기독교가 일찍 로마로 전파된 뒤부터 오늘까지 서양사상과 철학의 근거에는 언제나 기독교적인 유산이 자리잡고 있다. 만일 인도사상을 연구하면서 불교의 정신을 배제한다든지, 동양의 사상을 취급하면서 유교의 정신을 제외한다면 그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그보다도 더 강하게 서양정신과 사상에 영향을 미친 것이 기독교정신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서양철학은 연구하면서 기독교를 모르는 경우가 자주 있다. 둘 다 연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우리의 능력을 초월하는 부담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모르면서 서양철학을 연구하며, 서양철학은 이해하지 못하면서 기독교신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이 우리주변에 많이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보면 무지스러운 일이다. 서양사람들이 본다면 그런 학문적 연구는 불가능하다고 평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우리는 열심히 하이데거를 연구한다고 자부하지만, 그리스철학과 기독교를 연구한 바가 없다면, 그것은 나무의 뿌리와 밑동은 남겨두고 가지와 잎사귀만을 취급하는 지엽적 학문과 사상의 처지를 면키 어려워진다. 기독교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버리기 위해서라도 기독교정신을 알아야 철학적 고찰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
|
|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
'호치키스'는 기관총을 발명한 미국 발명가 이름
종이의 묶음을 하나로 묶기 위하여 사용하는 기계를 '호치키스'라고 하지요? 문방용구로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미국의 발명가 Hotchkiss가 발명한 기관총(Hotchkiss gun)을 말하던 것이었는데, 소위 지철기(Stapler)의 상표가 되면서 우리나라에서 '호치키스'라는이름으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
|
글터 → 사회/문화/인물 |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7장 떠도는 자의 노래 끝없는 표랑 - 김삿갓 / 두보
김병연 [金炳淵] 동의어 : 김삿갓, 김립 1807(순조 7)∼1863(철종 14)
|
두보 [杜甫, Tu Fu] 712 허난 성[河南省] 궁 현[鞏縣]~ 770 후난 성[湖南省].
|
떠도는 자의 노래 김삿갓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그 삿갓의 주인공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술을 잘 마시고 우스갯소리를 좋아하며 시를 잘 짓고 취하면 왕왕 대성통곡을 한다. 평생에 과거를 보지 않았다니 괴상한 사람이다(생략). 이것은 황오라는 사람의 말이고 또 어떤 사람은 요즘 바보 같기도 하고, 미친 것 같기도 한 시인이 한 사람 있다. 허름한 옷에 떨어진 신발, 세수조차 않는다. 서울과 영동 사이를 가끔 내왕하는데 기발한 시를 짓고, 특히 과체 시는 더욱 정묘하여 사람들은 그가 오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오면 음식을 대접하고, 잠을 재우며 어려운 운과 제목으로 시를 짓게 하니, 그는 서슴없이 지어 이름을 날리고 있다. 성만 말하고 이름은 말하지 않아, 삿갓을 쓰고 있기 때문에 김삿갓이라 부른다(생략).
그의 이름은 김병연이며 호는 난고이다. 1807년(순조 7년) 3월 13일 안동 김씨 김안근의 둘째로 태어났다. 남달리 총명하고 재주가 많았던 소년 김병연은 어느 날 관아에서 주최하는 백일장에 나가 장원의 영예를 차지한다. 그러나 그가 백일장에서 매도하던 김익순은 바로 자신의 조부였다. 병여의 다섯 살 나던 해,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는데 그들은 가산, 박천, 곽산, 정주를 휩쓸고 선천으로 육박해 왔다. 그때 선천부사이던 김익순은 술에 만취한 채 그들에게 결박을 당하고 순순히 항복까지 하고 말았다. 역적에게 항복하고 협력했다는 죄목으로 김익순은 이듬 해 사형이 된다. 그리고 그의 일족에게는 폐가 처분이 내려졌다. 언제 멸문지화를 당하게 될지 모르는 불안한 운명이었다. 김익순의 종복이 병하와 병연 형제를 몰래 황해도 곡산땅에 데리고 들어가 숨어서 공부를 시켰다. 이러한 내용을 그가 알 리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조상의 일을 아들에게 모르게 하려고 멀리 강원도 영월땅으로 이사를 했던 것이다. 김익순의 죄상을 낱낱이 탄핵하고 그 비겁함을 얼마나 통쾌하게 매도했던가. 그런데 그 사람이 자신의 할아버지라니. 그는 불효를 스스로 단죄하면서 하늘을 볼 수 없다는 죄의식으로 삿갓을 눌러 쓴 채 집을 떠났다. 스물 두 살 때의 일이었다. 그렇게 집을 나간 것이 전 생애로 이어지게 된다. 36년간을 행운 유수같이 떠돌았다. 정처없이 떠돌면서 후하고 박한 세상의 인심을 골고루 맛보았다. 괘씸한 사람을 만나면 해괴망측한 시를 지어서 야유와 조소를 보내기도 했다.
해마다 섣달 보름 밤은 (연연납월십오야) 그대의 집, 제삿날임을 잘 알고 있노라 (군자제사내자지) 젯상에 올린 것은 칼을 잘 쓴 음식이요 (제존등물용도질) 헌관과 집사들은 모두 엎드려 아뢰네 (헌관집사개고알)
무심코 읽어보면 제사 지내는 광경에 불과한, 칠자사행으로 되어 있는 이 시의 마지막 석 자씩을 떼어보면 괴상망측한 욕설이 된다. 읽어보면 한시로서 손색없고 발음으론 욕이 되니 대단한 실력의 소유자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긴 가슴에 맺힌 울분을 이렇게라도 풀어내야 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아들 익균이가 집으로 모셔 가려고 찾아올 적마다 그는 아들을 따돌렸다. 세 번째 전라도 익산군 여산까지 찾아왔다. 함께 길을 가다가 뒤를 보겠다면서 삿갓을 벗어놓고 수수밭으로 들어갔다. 익균은 길가에 서서 기다렸으나 그는 안개처럼 사라져 버렸으니 그게 부자의 마지막 상봉인 셈이다. 병든 몸을 이끌고 강진에 도착한 것은 그가 55세 되는 해의 섣달 그름 무렵이었다. 우국지사의 소개로 안복경진사 댁에서 그해 겨울을 나고 나무에 봄이 온 것을 느끼자 다시 방랑길에 올랐다. 나는 워낙 방랑생활을 끝없이 계속하다가 언젠가는 길가에 쓰러져 죽을 운명을 타고 난 사람이오. 그러니 붙잡지 말아 주시오. 봄을 따라 북상하면서 가지산에 있는 보림사와 용천사도 구경하고 마음이 내키면 화순, 동복에 있다는 적벽강도 한번 둘러볼 생각이라오. 안진사가 써 준 편지를 들고는 길을 떠났다. 걸어보니 몸이 많이 쇠약해 있었다. 보름이 걸려 가까스로 보림사에 도착하였다.
술잔을 비로 삼아, 시름을 쓸어내고 달을 낚시로 삼아, 시를 낚아오면서 보림사, 용천사 두루 구경하고 나니 내 마음 욕심없어 스님과 다름없네.
동복에 도착해서 찾아간 신석우도 물론 그를 환대해 주었다. 김삿갓은 소동파의 적벽부 를 떠올리며 적벽강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신석우도 동행을 자청하였지만 그는 혼자서 조그만 배에 올랐다. 청풍은 서래하고 수파는 불흥 이라는 적벽부의 시구를 읊조려 본다. 시원한 강바람에 상쾌함을 느끼며 배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 본다. 저 멀리에 하얀 구름, 저기가 바로 선경이 아니런가. 일엽편주로 망망대해에 떠 잇고 보니 그는 이것으로 다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을 위해 남의 문전을 기웃거릴 필요도, 잠자리를 구해 헤맬 필요가 더 이상 있을 것 같지를 않았다. 마침내 그는 눈꺼풀조차 뜰 기력마저 없어졌다. 전국을 편답하며 시를 짓고 때론 대성통곡했다는 천재시인 김삿갓은 이렇게 하여 전라도땅 동복 적벽강 배안에서 혼자 귀천했다. 시인다운 죽음이었다. 향년 56세, 철종 14년(1863년) 3월 29일의 일이었다. 남다른 지혜와 문재가 있음에도 질곡된 운명으로 인해 겪어야 했던 그 비색한 통한이 어떠하였으랴.
돌아가기도 머물기도 어려운 나그네여. (귀혜적역난저역난) 얼마나 길가에서 외롭게 방황했던고. (기일방황중로방)
그 형벌 같은 세월을 용케도 자살하지 않고, 형기를 잘 마친 자의 성실함같은 인고의 아픔이 느껴지는 논고평생시 의 그 끝 구절을 나는 지금도 아끼고 있다.
추운겨울 선상에서의 죽음 - 두보
두보는 당 현종 선천원년(712년) 하남성 공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를 낳은 지 얼마 안되어 죽었다. 배다른 형제들과 함께 고모 밑에서 자랐다. 그는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시는 우리 가문의 일, 시로서 으뜸이었다 고 자랑할 정도로 그이 조상인 유학자 두예와 두심언은 탁월한 시인이었다. 그는 남을 감탄시키지 못하면 죽어도 편치 못하겠다. (인불경사불휴)라고 말하면서 시의 한 자 한 구절에 최선을 다했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당나라 최전성기에서 안사의 난을 계기로 전환기를 맞는, 모순과 부조리와 전란과 기아가 들끓는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에서 곤궁과 기아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아픔과 현실을 그는 가장 절실하게 시로써 대변하였다. 한마디로 그는 민중 시인이었다. 그의 작품 <자경부봉선현영양>이나 <북정>이란 시에도 그것이 잘 나타나 있다.
귀족들의 대문 안에는 술과 고기가 넘치고 썩어 냄새가 날 지경인데 길에는 굶주려 얼어 죽은 시체가 널려 있다(67행-68행). 오래 전부터 늙은 아내를 타향에 살게 했고, 또 열 식구들과도 풍설을 격하여 지냈다(81행-82행). 내 집의 문을 들어서니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린 자식이 굶어서 죽었다는 것이다(85-86). 생업이 없는 사람들의 처지를 나는 묵묵히 생각해 왔고, 한편으로는 멀리 변경에 나가 있는 병졸들의 입장도 염려했다(96행-98행).
그러나 두보는 젊어서부터 과거에 낙방만 했다. 40세에 겨우 집현전대제라는 변변찮은 말직이 그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그 또한 극심한 가난과 폐병 때문에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44세에 하서현위에 임명되나 부임하지 않았고, 정처없는 유랑의 길을 떠난다. 젊어서부터 시작된 그의 여행벽은 김삿갓처럼 죽는 순간까지도 계속되었다. 그는 20세부터 30세까지 오, 월, 제, 조 지방을 두루 돌아다녔다. 30세에 낙양으로 돌아와 양이의 딸과 결혼하고서 잠시 안정하였다. 46세이던 그에게 좌습유라는 간관 종8품의 극히 낮은 직위가 주어졌다. 이때에도 재상인 방관을 변호하다가 곤욕만 치르게 되고 안사의 난 때는 반란군에게 잡혀 심한 고초를 겪기도 했다. 48세에 화주로 쫓겨난 두보는 그 후 10년 동안 각지로 떠돌며 심한 궁핍과 병고에 시달렸다. 학질과 폐환의 지병 이외에도 그는 중풍 때문에 오른손이 마비되었고 당뇨의 합병증으로 귀가 먹고 눈이 잘 보이지 않았다. 엄부라는 사람의 추천으로 절도참모 검교공부원 외낭이 되었으나 폐병과 중풍으로 공무를 감당할 수가 없게 되자 그는 사퇴하였고, 배를 타고 양자강을 따라 내려가 보았다. 가주, 융주, 유주, 충주를 지나 운안까지 왔다. 이곳에서 신병이 더욱 나빠졌다. 늦봄에는 기주로 향했다. 기주는 사천성 삼협의 하나인 구당협 부근에 있다. 약 2년 간을 이곳에 있으면서 추흥 8수 외에 빛나는 430수의 시를 더 지었다. 두보 전 생애의 작품 중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시가 2년 동안 이곳에서 씌어졌다. 가족들과 함께 방랑의 길에 또 나선다. 두보는 호북 공안을 출발하여 악양으로 향했다. 낡아빠진 배 안에서의 추위는 실로 감당키 어려웠다. 긴 뱃길 끝에 그들은 동정호 나루에 도착하였다. 아들 종무의 부축을 받으며 두보는 악양루에 올랐다. 눈이 펄펄 쏟아지는 동정호를 바라보며 악양루에 올라 라는 명시를 이때에 탄생시킨 것이다. 늙고 병든 나에게는 단지 배 한 척밖에 의지할 곳 없다. 관문 북쪽에서는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았는데, 난간에 기대니 눈물만 쏟아지는구나. 천지는 온통 새하얀데 두보는 차가운 배 바닥으로 돌아와 다시 몸을 뉘었다. 1년 반의 세월을 이렇게 떠돌았던 것이다. 악양을 떠나 장사를 거쳐 형양에 이르렀으나 친구이던 형양자사는 이미 죽고 없으니 다시 뱃머리를 돌려야 했다. 이렇게 안주할 곳이 없어 두보는 가솔을 이끌고 형양으로 가다가 중도에서는 큰 비를 만난다. 상강을 벗어나지 못하고 오르락 내리락하는 배에서 그는 덜덜 떨고 있었다. 누더기 옷을 걸친 채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거기에서 눈을 감았다. 대력 5년(770), 그의 나이는 59세였다. <신당서> 두보전에 보면 뇌양에서 현령이 보낸 술과 고기를 먹고 그날 밤에 죽었다고 하니, 그것은 이승에서의 마지막 양식을 대접 받았던 것이다. 장자는 이미 죽었고, 차남이던 종무는 당시 열여덟 살 안팎이었다. 장사도 못 지낸 그의 관은 악양 산 속에 방치되었다가 그가 죽은 지 43년이 지나 손자 사업에 의해 고향 수양산 기슭으로 옮겨져 본장을 치르게 되었으니 두보가 죽은 지 43년 만의 일이었다.
|
|
|
글터 → 국사/세계사 |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41. 9표차로 발발한 아편 전쟁
1840년 3월 19일 영국 하원. 중국 정부가 아편을 선적한 영국 선박에 식량과 음료제공을 거부한 사태를 두고 격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즉각 전쟁 개시를 주장하는 쪽과 평화적 해결을 주장하는 쪽이 맞서 다음달 10일 표결에 들어가기까지 토론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됐다. 자본가 집단의 모임인 인도 중국협회의 강력한 압력을 받은 정부와 상원의 웰링턴 공작등은 파병동의안을 가결시키기 위해 하원을 집요하게 설득하고 있었다. 이때 당시 30세에 불과한 자유당의 글래드스톤이 연단에 올라 좌중을 쏘아보며 연설을 시작했다.
“중국 영토에 체제하고 있으면서 그 법률에 복종하지 않는 외국인에 대해 중국이 식량과 음료 공급을 거절한 것이 어째서 중국의 죄가 되는지 본인은 잘 모르겠습니다. 정부는 이 전쟁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이 작전 행동이 어느 정도까지 확대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어떠한 판단도 내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신을 가지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즉, 그 기원과 원인을 놓고 볼때 이것만큼 부정한 전쟁, 이것만큼 영국을 불명예로 빠뜨리게 될 전쟁을 나는 이제껏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광동에 나부끼는 영국기를 볼 때마다 벅찬 감격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정의의 상징이고 압제에 대한 반항, 공정한 경제 행동을 격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고귀하신 귀족 파머스턴경(당시 외상, 아편전쟁의 주동자)의 후원 아래 우리 국기가 부끄러운 밀무역을 보호하기 위하여 중국 연안에서 나부끼고 있습니다. 위풍당당한 영국국기를 볼 때마다 느꼈던 벅찬 감동을 앞으로 다시는 느낄수 없게 될 것을 생각하면 전율스러울 따름입니다.”
의사당 밖에서도 전쟁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평화협회 등 여러 시민단체들이 무력에 의한 해결을 반대했고 맑스도 <뉴욕 데일리 트리뷴>지를 통해 “아편 무역에 비하면 노예 무역은 그래도 인정이 남아 있다”며 영국 정부를 비판했다. 그러나 외상 파머스턴은 “아편은 술보다 해독이 덜하다”고 강변하면서 “중국인의 도덕심을 회복시켜 주기 위해서라도 군대를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워털루 전쟁의 영웅 웰링턴 공작은“50년 공직 생활에서 영국 국기가 광동에서 당한 것과 같은 모욕을 본 일이 없다”며 중국 응징을 열렬히 지지, 의회의 여론에 큰 영향을 주었다. 결국 온 세계의 주시 속에 4월 10일 실시된 표결에서 파병안은 불과 9표차로 통과되었다. 전 동양인의 운명을 뒤바꿔 놓은 아편 전쟁은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시작된 것이다. 영국 정부가 이 같은 강한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명분없는 전쟁을 감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해답은 바로 당시 중,영간의 무역 상태에서 찾을 수 있다. 1689년 영국이 중국 차를 처음으로 구입해 간 이후로는 차는 중국의 최대 수출품이 되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상류 계층뿐 아니라 노동자까지도 차를 즐겨 마시는 풍속이 확산되어 중국에서 수입하는 상품의 90%를 차가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18세기 말이 되면 차의 평균 수입량은 영국이 중국에 수출하던 3대 상품(모직물,금속,면화)의 수출량과 맞먹었다. 영국 정부는 높은 관세로 차의 수입을 줄이려 했으나 오히려 밀무역만 초래하여 1784년 경감법을 관세를 대폭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1820년대가 되면 중국 차 총생산량의 70~80%가 영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에 비해 영국이 크게 기대했던 상품인 모직물은 중국 시장을 휘어잡지 못하고 있었다. 모직물은 중국인에게는 아직 사치품에 속했기 때문이다. 또한 부유한 사람들도 실크와 털옷을 더 선호했다. 더욱이 중국이 외국에 개항하고 있던 광동은 중국의 남부 지역으로 날씨가 춥지 않았으므로 모직물의 판매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영국은 인도 면화를 새 상품으로 개발하여 모직물의 부진을 만회하려고 했다. 그러나 인도 면화도 1817~19년을 차의 수출액을 휠씬 밑돌았다. 이처럼 영국은 중국과의 무역에서 항상 적자를 면치 못했는데 이에 따라 결제수단이었던 은이 대량으로 중국으로 흘러 들어가는 사태가 벌어졌고 영국의 자본가들은 이를 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들이 인도 면화 대신 새로 개발한 `상품`이 바로 아편이었던 것이다. 인도,중국협회를 비롯한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적자를 훌륭해 해소해 주고 있는 아편이 중국 관리에 의해 소각되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리 없었다. 더 나아가 이들은 이 기회에 아예 중국의 개항장을 북부의 추운 지역으로 확대해 모직물을 팔아 먹을 속샘도 키우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영국 정부는 이에 앞장 섰다. |
|
|
글터 → 사회/문화/인물 |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제3장 시들어 가는 미국, 일어서는 중국
2. 친 미 라는 젼염병의 감염경로
우리들이 친미감정의 회오리에 휘말리게 되는 단계는 정서적 감응으로부터 실리적 체득에 이르는 과정을 거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팔레스타인 학생대표단과 가졌던 좌담회에서 나는 시의(時意)와도 같은 충격을받았다. 이러한 충격이 진실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를 완전히 신봉할 수는 없을 것이다. 10년 간의 신념이 10분 만에 무너진다면 10분 간의 신념은 1초 안에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리펑(李鵬) 총리는 8년 전 어느 외국기자의 질문에 재미있게 대답한적이 있다. 외국기자가 질문한 내용은, 당시의 정치국 간부들 대부분이 소련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중국의 외교가 친소적 경향에 빠질 가능성이 많지 않느냐는 것이었다.이에 대해 리펑은 '50~60년대에는 소련이나 동구로 유학을 갈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배경이 있었을 뿐이기에 기자의 추측은 이치에 닷 지 않는다. 질문한 기자의 논리대로 라면 현재 수많은 중국학온이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장차 중국의 정치지도자는 모두 친미파가 된다는 말과 같지 않느냐?'라고 하여 한바탕 웃음을 자아낸 일이 있다. 리펑 총리의 말은 아주 명확한 것으로 대국의 정치인으로서 가져야 할 확고한 신념을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그는 현재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많은 학생들이 장차 학업을 마치고 돌아오게 되면 미래에 중국의 지도자층을 구성하는 중요한 인적자원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밝혔다고 보아진다. 나는 기자가 말한 현상에 대해서는 조금도 우려하지 않기 때문에 내 아내가 미국으로 떠난다고 해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지식이 많고 견문이 넓으며 진리가 무엇인지 가려낼 수 있는 사람이 국가의 동량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므로 이에대해서는 조금도 우려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피해 나갈 틈도 없이 무차별적인 공세를 펴고 있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우리들의 마음속에 심어놓은 열병에 대해서는 해야 할 말이 있다는 것이다.
먼저 [讀者)라고 하는 잡지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이 잡지는 원래 따루(大陸)출판사에서 [두저원짜이(讀者文摘)라는 이름으로 출판하고 있었으나 [두저원짜이]는 미국의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중국어판 책명과 같았다. 이로 인해 지적재산권문제가 발생하여 [두저]로 바꾸게 된것이다. 나는 중국의 [두저]를 미국의 [두저원짜이]와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두저]의 편집 방향이나 추구하는 바,성향에 대해서 소상히 알고 있다. [두저]가 견지하는 태도에 대해 90년대 초 친구들과 함께 토론을 벌인 적이 있는데 그때 내린 결론은, [두저]는 실질적으로 '작은'소자산계급의 정신적 낙원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특별히 '작은'이라는 말을 덧붙이게 된 것은 의식형태의 칼로 사람을 치자는 것이 아니고,서구 세계에서의 '자산계급'이란 말이 사회학적 의미에서는 비판적 개념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두저]와 친미라는 심리적 전염병의 상호관계는. 그렇고 그런 지식 수준이면서도 현상에 대해불안해 하고 있는 소인배들의 허영심을 최대한 만족시켜줌으로써 소자산 계급들로 하여금 별 볼일 없는 철리(哲理) 내지는 미학을 통하여 지식수준이 상숭된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하여 현실도피의 쾌감을 맛보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 장에서 언급하였던 {초원의 집}이라는 미국 드라마에서 당시 내가 가장 감명깊었던 것은 대강 아래와 같은 국회의 연설이었다.
옛날 우리집에 의사 한 분이 계셨는데 사람들은 그를 '닥터 짱'이라고 불렀습니다. 닥터 짱은 늘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감기를 치료받고는 찐빵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편두통을 치료받고는 파 한 다발을 가져다주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때는 아무 것도 가져다주지 못했지만 마을 사람들 모두가 너무 가난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닥터 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닥터 짱은 '닥터짱 위층에 있음'이라는 액자를 문 앞에 걸어놓았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아무 때나 닥터 짱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날씨를 예측하지 못하듯 닥터 짱도 병들 때가 있었고 끝내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를 지내던 날 마을 사람들은 돈을 거두어 닥터 짱의 묘에 묘비를 세우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정말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닥터 짱의 문 앞에 걸어두었던 액자를 무덤의 꼭대기에 꽂아두었습니다. 그 뒤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닥터 짱 위층에 있음'이라는 글귀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대통령이 서거하였습니다. 그가 생전에 애써왔던 국제연맹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에게 '우드로우 윌슨 위층에 있음'이라는 묘비명을 써줄 것입니다. [두저]에 실리는 글들도 이와 닮아 심오하면서도 통속적이고, 정열적이면서도 자제력을 잃지 않고 있으며, 달콤하면서도 즙이 흘러내리지는 않으며. 산뜻한 맛이 나면서도 목구멍을 자극하지는 않는다. 할리우드에서 갈쩌우(蘭州)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의 도덕관, 십자군의 명예, 칼럼작가의 심미적 취향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독자들에게 미혹의 꿈을 실어 새로운 세대의 {초원의 집}을 길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가식에 찬 언론의 분위기는 미국 정치계나 사교계에 충만되어있어 장중한 성명(聲名)은 모두 시적(時的)이고 진실이 가득찬 듯이 기가 막히게 다듬어진 산문으로 발표되어 인간의 마음을 뒤흔든다. 이런 언어조작으로, 답답하고 지루한 팔고문(八理文)에 200여 년 동안 길들여진 중국 국민을 우롱하고 있는 것이다. '위층'에 사는 우드로우 윌슨은 이런 방법으로 전세계의 병을 치료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의연하게 중국의 이익을 희생시키고 칭따오(靑島)를 일본에 할양하였으며,그가 말하는 '국제연맹의 이상'도 사실은 유럽의 모든 나라가 윌슨이 함부로 날뛰는 꼴을 그냥 두고 보지 않았기 때문에 실현되지 않았을 뿐이다. 이와 같이 흥정과 이재에 밝은 윌슨과 '위층에 있는 닥터 짱'이 어떤 자연스러운 수사적 연관성이 있단 말인가? 망상에 사로잡힌 우리들의 마음은 미국의 정서에 쉽게 감동받고. 우리의 뱃속은 즉석음식을 배불리 먹어 생긴 트림으로 부글거리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흥미진진하게 미국식 염세적 고통에 탐닉하여 그들의 직설적인 솔직함과 순진함을 모방하느라 우리의 몸에 배어있던 함축적이고도 질박한 것과 의미심장한 간난신고()는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나는 취업한 지 2년이 되던 해에 해묵은 편지들을 정리하다가 대학에 다닐 때 내가 우리집으로 보냈던 엽서 몇 장을 발견하였는데 지금 그 내용을 보면 구토가 날 만큼 역겹고 엽서에 나타난 소위 '민주정신'이란 것이 나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었다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저는 난징(南京)에서 까오여우(高郵)양쩌우(楊洲) 쩐장(鎭江)을 거쳐 지금 돌아왔습니다. 한동안 편지를 쓰지 않아 화가 나셨을 것 같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형식적인 것들이 좀 부족했다 하더라도 저는 아버지 어머니를 영원히 사랑한다는 점은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는 쌍하이 런민(人民) 방송국 FM프로그램에서 미국 텍사스 주의 주가(州歌)인 {고향의 푸른 초원}이란 음악을 두 번이나 들었는데 따뜻한 감정이 저의 가슴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저의 장래를 위해 입당하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후로는 다시 하지 마십시오. 저는 아버지와 같이 당원생활을 하고 싶지도 않고 또 아버지와 서로 동지라고 부르는 것도 싫습니다.
이 편지는 내가 22살 때 쓴 것으로 지금 다시 들여다보니 불경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심지어는 좀 모자라는 사람이 쓴 듯한 느낌이 들 정도여서 이 편지를 대하는 순간 머리에 떠오르는 첫 번째 생각은, 그 당시에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아무렇게나 내갈겨 쓴 천박한 내용이 부모의 마음에 상처를 남겼을 것이고 또 내가 형편없는 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깊은 사상도 없으면서 심각한 척하고 억지로 꾸민 시건방이 나의 대학생활 전부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 주는 편지였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대학 졸업 후 취업하고 결혼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나에게 아메리카합중국의 영향이 경감되기는커녕 갈수록 깊어만 가는데 이는 나의 생활 반경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내 주위에는 아주 긴 안목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 이들 중 적어도 20명 이상이 미국으로 떠나버 렸다. 나는 이에 대해 놀람과 동시에 시기를 하였다, 사람들은 미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왔다. 미국사회에 대한 나의 인식은 이미 감성수준에서 이성수준에 이른 것으로 믿는다. 미국은 사회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법질서가 잘 지켜지고 있어 국가 전체가 질서있게 돌아가고 있다. 미국은 개인주의사회이기 때문에 사람의 권익이 극도로 존중되고 있다. 이민 온 사람이나 나와 같은 외국인에게도 미국인들은 아주 우호적으로 대해 주는데 이같이 사람과 사람 사이가 가까워 중국에서처럼 신적 존재의 인간도 나타날 수가 없다.미국에서는 지위의 높낮이도 중국처럼 그렇게 심하지 않아 미국은 정신적인 천당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사유재산제도가 극도로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정치가이든 평민이든 재벌이든 가난뱅이든 재산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지금은 공부를 하면서 일을 하고 있지만 지도교수를 비롯한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해 비난하거나 지나친 요구를 하지않는데도 주위환경의 영향을 받아 내 스스로 분발하는 힘을 가지게 된다. 가끔은 이런 지나친 스트레스를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도 있는데 이것이 바로 적자생존의 치열한 경쟁인 것이다.' '미국인은 현재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여 적극적으로 오늘을 즐긴다. 미국은 고도화된 사회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일을 한 후에는 목숨을 걸고 휴가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만약 패배주의자의 심정으로 친미감정을 비방한다면 나는 진실하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우리는 국가관념이 성숙하지 못한 현상을 비판하거나 개인주의적 충동을 억제할 수는 있지만 절대로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순수한 행위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처럼 긴 역사와 문화 그리고 무게 있고 풍요로운 문학적 정서를 가진 대국이 미국인의 선전을 위한 쇼윈도가 되는 것은 절대로 참을 수 없다. 이것은 극단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나 위선자적 진부한 감정이 아니라 십수 년 간 우리들에게 누적된 감정이 범람하여 나온 결과이다. 과거 중국이 움직일 수도 없는 곤경에 처하여 간절하게 서양의 것을 배우고자 하였을 때도 오늘과 같지는 않았었다.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학술계로부터 일반 국민의 감정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존엄성을 잊어버렸으며 심지어는 모든 민족의 상상력까지도 아메리카에 의해 견제당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쉬쯔모(徐志柰)가 하느님 아들의 '오만한 얼굴'을 묘사할 때 보였던 두려움을 기억하고 있고, 장지에쓰가 스틸웰(.. )사건 후 어느 집회에서 아주 격앙된 목소리로 '망할 놈들 모두 제국주의자였다'라고 일갈한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심지어 미국인의 매사에 거침없는 행동까지도 나와 같은 중국인들의 공포에 질려 불안해 하는 모습으로 길들여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때가 있다. 왜냐하면 아메리카는 확실히 축적된 문화가 없는 민족이고 그들은 개발도상국 국민의 겸허한 태도를 경멸하는 심리를 가지고 있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멸의 눈초리는 클린턴 대통령에 이르러 더욱 두드러지기 시작하였다. 미국이 외교나 국제문제의 처리에서 보여 주는 이러한 경멸심리에 대해서는 이후에 자세히 논급할 예정이다. 그러나 균형감각을 잃은 선진대국 숭배사상은 역경에 처한 인류의 약점이 아닐 수 없다. 예를 들면 어느 나라의 외무장관은 좋은 교육을 받았고 과거 한때는 세계를 주름잡던 나라를 대표하는 지위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퇴임하자마자 유엔의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자국이나 같은 민족의 이익보다는 미국의 이익을 위해 미국인보다 더한 행동을 하였다. 그는 나약하고도 치욕적인 행동을 보여 조국의 국민들은 그를 목 매달아 죽여야 한다고 외치기까지 하였다. 외국에서는 선택의 여지없이 한 가지만 선택하도록 하는 방법을 '홉슨식 선택'이라고 한다. 이는 미국의 홉슨이란 상인이 말을 팔 때. 말을 매장으로 내보낼 때 문 앞에 가장 가까이 서있는 말만 선택할 수 있다는 조건을 붙여 고객이 선택할 여지가 없도록 한 데서 비롯된 말이라고 한다. 미국은 우리가 그 동안 쌓아온 외교경험을, 세계 조류에 역행하는 민족주의라고 몰아붙여 열등감을 갖게 한 뒤에 미국가치로 대표되는 세계주의적인 것만이 현대인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강요한다. 우리가 친미의 정서에 휩싸여 있을 때 홉슨식 선택이 살금살금 다가와 우리의 체내와 주위에 잠복하고 있는 가운데, 우리는 비자와 미국의 원조와 사상을 새로 수립하는 마술 계획의 진군을 찬양하는 데 가장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전파자가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나는 다음 장에서 노예가 된 후에도 좋아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말하고자 한다.
|
|
|
글터 → 명상/지혜/처세 |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그녀의 보석
그녀는 아들 셋을 두고도 늘그막에 자녀들과 따로 살게 되었다. 어릴 때는 그토록 착하고 효성스럽기 짝이 없던 아들들이 이제는 며느리한테 꼭 쥐여 분가 할 것을 주장하자 건강이 허락될 때까지 서로 따로 사는 게 편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식들은 처음에는 1주일이 멀다 하고 우르르 손자들을 데리고 찾아왔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그녀를 찾는 일이 줄어들었다. 이제는 손자들이 보고 싶어 잠깐 들르라는 전화를 해도 바쁘다는 핑계를 대는 일이 잦았다. 그러자 그녀는 노년의 외로움이라도 달래려는 듯 보석이나 장신구 따위의 패물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그녀의 남편은 그런 그녀를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돈 달라는 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그런 값비싼 보석들을 사 모으는 데에야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집안에 무슨 일이 있어 며느리들이 다 모이면 으레 그 패물들을 며느리들이 보는 앞에 꺼내 놓고 손질을 하곤 했다. 자호박이니 비취니 루비니 하는 따위의 보석들을 호호 입김까지 불어가며 닦기도 하고 몸에 한번 걸쳐 보기도 했다. 그러자 며느리들의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그녀를 찾는 회수도 잦아졌을 뿐만 아니라 서로 돈을 각출해서 보약을 지어 오는 일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며느리들에게 이런저런 작은 패물들을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크게 특별한 일도 없이 갑자기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 누구보다도 며느리들이 슬피 울었다. 문상 온 사람들이 '이 집엔 다들 효부를 두었다'는 말들을 하고 돌아갔다. 그녀의 남편은 장례를 치르고 나서 이것저것 아내의 유품을 정리했다. 결국 아내가 사 모은 패물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는 생전 아내가 자기 분신처럼 아끼던 물건들을 며느리들이 잘 간직해 주기를 바랐으나 어떻게 나누어주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패물의 종류와 값이 다 달라 세 며느리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주기 어려웠다. 세 며느리 또한 서로 비싼 물건을 갖고 싶어하는 눈치여서 선뜻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세 며느리를 불러 앉혀 놓고 말했다. "내가 이것 갖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며느리인 너희들에게 주고 싶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나누면 좋을지 모르겠구나. 너희들 셋이서 잘 의논해서 정해 보아라." 며느리들이 곧 의논을 하고 돌아왔다. 큰며느리가 며느리들을 대표해서 입을 열었다. "재물을 몽땅 팔아서, 그걸 현금으로 똑같이 셋으로 나누어주세요." "허허, 그게 진정으로 하는 말이냐?" "네." 그것은 그가 가장 바라지 않았던 결론이었다. '고얀 것들. 시에미 패물을 그저 돈으로밖에 안 보는구나'하는 생각에 마음이 언짢았다. 그렇지만 그는 시아버지로서 며느리들에게 한 말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그는 그 길로 보석상을 찾았다. 중년의 보석상 주인이 이리저리 아내의 패물들을 살펴보더니 잔뜩 이맛살을 찌푸렸다. "할아버지, 이거 어디에서 사신 겁니까?" "내가 산 게 아니네, 죽은 내 마누라가 산 걸세." "할아버지, 이 물건들은 모두 다 가짭니다. 저는 혹시 할아버지가 속아서 사셨나 했습니다." 순간, 그는 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울컥 어떤 서러움 같은 것이 치솟아 올랐다. 죽은 아내가 왜 그토록 패물을 사 모았는지 그제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
|
|
글터 → 이글저글 |
무지개는 하루 중 아침과 늦은 오후에만 보인다. 그것은 무지개를 만드는 현상이 태양이 40°각도에 있거나 혹은 지평선보다 낮게 떠 있을 때만 생기기 때문이다.
구름은 밤보다 낮에 더 높이 난다.
영국 관상대는 1953년 6월 2일이 1년중 가장 맑은 날이 될 것이라고 예보했다. 그래서 그 날 엘리자베스 여왕의 대관식이 열렸는데 실제로는 비가 내렸다.
우박은 겨울에는 내리지 않고 여름에만 내린다. 즉 우박은 번개가 일어나야만 생기는 것으로 겨울에는 번개가 발생할만한 조건이 없고, 또 기온이 빙점 이하로 내려가버리면 우박이 생길 수 없다. 따라서 우박은 일반적으로 여름에만 내리게 되는 것이다.
공룡의 멸종 이유, 공룡은 1억 3천 6백만년 전에 나타났다가 6천 5백만년 전에 갑자기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공룡이 사라진 바로 그 때 목성 궤도에 흩어져 있던 소행성들이 지구에 날아와 부딪친 흔적이 있는데, 세계 각 곳의 바위들에서 소행성에만 있는 이리듐(iridium)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지구와 소행성들의 충돌은 아마 지구 위의 거의 모든 생물을 멸종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여름이 없는 해, 1816년은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정복하려다 실패한지 4년이 되는 해로서 그 해 여름 톰보로 화산이 폭발하여 그 먼지가 온 세계를 뒤덮었다. 그래서 태양의 빛이 땅에 닿지 않아 세계의 기후가 바뀌어졌다. 비가 내리지 않고 눈이 내렸으며 곡물은 모두 제대로 되지 않았다. 미국, 헝가리, 이탈리아에는 붉은 눈이 내리기도 했다.
번개는 여자보다 남자를 칠 가능성이 6배나 더 높다고 한다. 번개는 여자보다 남자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남자라면 번개에 맞을 가능성이 2,000,000분의 1이지만 여자라면 12,000,000분의 1밖에 안된다.
비에는 비타민 B12가 들어 있다.
|
|
|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