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 84 호
4339.12.13 (10.23) : Music Off = Esc
-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용량제한으로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나가 보이지 않습니다. 않보이시는 분은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
[발행지원본보기]
|
|
편지 |
|
|
문학소식 |
|
|
글터 → 명언 / 격언 |
나는 여성이 어리석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전능하신 하느님이 남자와 어울리게 만드셨기 때문에./ 조지 엘리어트 (영소설가)
|
|
글터 →사회/문화/인물 |
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제 3부 개화와 항쟁
열일곱 살에 떨어진 구국의 별 - 유관순
유관순 [柳寬順] 1902∼1920.
- 이화학당 시절의 유관순(윗줄 가장 오른쪽) -
|
별은 떨어졌다. 그녀의 나이 17세였다. 관순은 구국의 별이었다. 계속된 일제의 악행, 꺾일 줄 모르는 애국심, 모진 고문과 굶주림으로 관순은 영양 실조가 되어 있었다. 1920년 10월 12일, 별은 하늘이 아니라 감옥에서 떨어졌다. 관순이 죽은 지 이틀이 지났다. 관순의 모교인 이화 학당 당장 미스 프라이와 미스 월터 선생은 일본인 형무소 소장을 만나 관순의 시신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시, 시신........? 가, 가만히 계시오." 형무소장은 웬일인지 쩔쩔매었다. 두 사람은 거듭 재촉했다. 그 다음날에도 또 형무소로 찾아가서 끈질기게 재촉했다. "보시오, 소장. 만일 관순의 시신을 내주지 않으면 이 사실을 내외에 알리겠소!" "뭐라구?" "이 사실을 미국에 보고하여 세계의 여론을 일으키겠단 말이오!" "가, 가만 계시오......." 일본인 소장은 한참 만에 조건을 내세우고 시신을 돌려주겠다고 했다. 첫째, 시신에 관한 사실을 세상에 알리지 아니할 것. 둘째, 장례는 극히 소수인으로써 조용히 지낼 것......... 석유 궤짝에 낳은 유관순의 시신은 해가 진 뒤 월터 선생에게 인도되었다. 학교로 돌아온 월터 선생이 시신이 든 궤짝을 열었을 때 선생님은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물러섰다. 관순의 시신은 머리, 몸체 할 것 없이 어느 한 곳 성한 곳이 없었다. "오, 불쌍한 관순........" 선생들은 시신을 부여안고 마침내 통곡해 버렸다.
유관순은 1903년 음력 3월 15일, 충청남도 천안군 목천면 지령리에서 유증권의 4남매 중 들째 딸로 태어났다. 관순은 어려서부터 성격이 다른 여자 아이들에 비하여 적극적이었고 감수성이 강했다. 그리고 또 봉사 정신이 강했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끝까지 제 의견을 굽히지 않고 관철시켰다. 관순은 또 장난이 심했고, 달리기에는 늘 첫째를 양보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유관순은 반일 사상이 투철했다. 어느 날 관순은 자기 아버지 어머니가 낯선 일본인에게 수모를 당하는 것을 보았다. 관순의 아버지는 동지들과 힘을 합하여 홍호 학교를 세원 그 고을 유지였다. 지령리에 학교를 세우느라 장터의 고리 대금업자 고마다에게 원금 300냥의 빚을 지고 있었는데 정한 기일에 이자를 갚지 못하여 원금의 열 곱인 3,000냥의 빛으로 늘어나 있었다. "야 이 늙은이야....... 왜 남의 돈을 빌려가서 갚지도 않고 이자도 안 주는 거야, 앙?" 일본인 고리 대금업자 고마다는 매일같이 찾아와서 갖은 욕설과 행패를 늘어놓았다. 땅문서고 집문서고 모두 고마다에게 잡혀 있었으나, 원금을 갚지 못한 유증권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느 해 겨울날 관순의 아버지는 가까스로 원금 300냥을 마련하여 가지고 문서를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마다는 제 집 근처의 일인들을 불러 와서 또다시 행패를 부렸다. "이 유가를 우물에 거꾸로 처박자...." "그럽시다, 우헤헤헷." 그자들은 거꾸로 처박힌 유씨에게 물을 끼얹고 매질을 했다. 그날의 사형벌로 관순의 아버지는 때때로 신열이 나고 중태로 앓아 눕는 일이 많았다. 그 때부터 유관순은 일본인에 대한 복수심에 불탔다. 가난한 집안이라 여학교에 진학하고 싶어도 그 꿈을 이룰 수가 없었는데 아버지의 연줄로 관순은 열네 살 나던 해 봄 이화 학당에 진학할 수 있었다. 교비생으로 이화학당 3학년에 입학한 관순은 서울에 올라와 프라이 당장에게 소개되었다. 이미 사촌 언니 유예도가 이화 학당에 다니고 있었으므로 이화 학당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새로운 학문과새 지식의 흡수욕이 강했던 관순은 이화에 편입학되자마자 기숙사에 들어갔다. "관순아, 넌 나하고 이 방을 쓰는 거야." 사촌 언니 에더는 이층 기숙사에 넓은 방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언니하고 단 들이서만 쓰는 거야?" "아니, 모두 여덟 명이 있게 돼." 에더는 그 방에 있는 학생들에게 관순을 소개했다. 모두들 관순을 반겼다. 학교 생활은 즐거웠다. 기숙사에서 한 방에 있는 서명학과는 반도 같았다. 서명학은 학교 교육에 익숙지 못한 관순에게 친절을 아끼지 않았다. 서명학 외에도 주현숙, 김분옥, 김회자, 유점선과 친하게 지냈다. 관순은 쾌활한 학생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개방적이었다. 줄넘기는 관순을 따라갈 학생이 없었다. 기숙사 식대는 한달에 6원씩이었다. 대개 학생들은 교비생으로 기숙사에 수용되어 있었다. 관순은 고학하는 학생의 만두를 매일 팔아 주리만큼 동정심이 강했다. 또 한번은 기숙사생 가운데 식비를 내지 못하는 학생이 있었다. 관순은 자기 앞으로 돌아오는 밥을 그 학생에게 먹이고 자기는 굶었다. 그리고 그학생을 위해 열심히 기도만을 올렸던 것이다. 그 당시 세계는 민족 자결주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 일본의 식민지로 온갖 박해를 받아 오던 우리 나라도 온 민족의 힘을 모아 3.1운동을 일으켰다. 1919년 3월 3일 고종 황제의 인산을 앞두고 전국 각 고을에서는 흰 옷을 입은 백성들이 줄을 이어 서울로 몰려들었다. 민족 대표 33인은 그 시기를 놓치지 않고 이용하기로 했다. 1919년 3월 1일 정오, 종로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 선언서가 낭독되고, 학생을 선두로 한 만세 시위가 온 장안을 휩쓸었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빼앗긴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학생들은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거리에 나온 시민들도 합세하여 만세를 불렀다. 만세 소리는 흡사 노도와 같이 거리거리를 누볐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일본 관헌은 이들 민족의 함성을 제지하기 위하여 총칼을 들고 날뛰었다. 3.1운동 당시 유관순은 고등과 2년을 눈앞에 둔 16세의 꽃 같은 학생이었다. 이화 학당 학생들은 그날 일제히 만세 운동에 가담하려고 운동장에 모였다. 그러자 프라이 학당장은 학생들을 제지하고 나섰다. "여러분! 내가 당장으로 있는 동안은 여러분을 일본 사람한테 끌려가게 할 수도 없고, 고생시킬 수도 없습니다. 나를 밟고 넘어갈테면 가시오!" 학당장은 이처럼 필사적으로 말렸다. 그 바람에 학생 전체가 교문 밖으로 나가려던 계획이 변경되어 30여 명밖에 참가하지 못하였다. 만세 운동 바로 전날 관순은 고등과 1년생 6명과 함께 시위 운동 특별 결사대를 조직했었다. 결사대 6명은 상급생들을 따라 학교 뒷담을 넘어서 만세 대열에 합세했다. 3월 5일 학생들만의 시위 운동에도 참가하여 관순은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우리 나라를 통치하고 있던 조선 총독부에서는 성난 파도처럼 일어나는 만세 운동을 막기 위해 3월 10일 임시 휴교령을 내렸다. 관순을 비롯한 이화 학당의 기숙사 학생들은 모두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다. 유관순은 3.1운동의 민족적 울분을 가슴 깊이 지니고 사촌 언니 에더와 함께 고향 지령리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내가 할 일이란 무엇인가? 일제의 압박을 그냥 받고만 있는 고향 사람들에게 항일 정신을 불어 넣어야 하다.' 유관순은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서울에서 있었던 만세 운동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관순의 설득력 있는 웅변으로 마을 사람들은 일제에 대한 적개심을 키웠다. 그리하여 관순은 아우내 장날인 음력 3월 1일을 기하여 시골에서의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유관순과 에더 언니는 천안 고을뿐 아니라 인접해 있는 여기, 청주, 진천 등지로 찾아다니며 독립 만세 시위 운동을 벌일 것을 종용하였다. 마침내 계획된 거사의 날은 왔다. 아우내 장터엔 아침부터 수천 명의 군중이 하얗게 모여들었다. 관순과 에더 언니는 비밀리에 만든 태극기를 구중들에게 나누어 주고, 관순이 짤막한 연설을 마치자 독립 선언식이 거행되었다. 먼저 조인원(조병옥 박사 아버지)의 선언서 낭독이 있었고 선창이 있었다.
병천의 진명 학교 교사 김구응이 선두에 서서 농기에 단 커다란 태극기를 휘둘렀다. 뒤따라 수천의 군중들은 손에 쥔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일본 관헌이 달려나와 시위 군중을 향해 총을 쏘고 칼을 내리쳤다. 하나오카란 자가 칼을 휘두르는 바람에 청년 김상헌이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 "만세! 대한 독립 만세!" 늙은 조인원이 군중의 선두에 서서 만세를 부르자 일본 관헌은 조옹을 향하여 총을 쏘았다. 조옹 역시 배를 움켜쥐고 쓰러졌다. 그뒤를 이어 희생자는 늘어갔다. 일본 관헌은 계속 무차별 사격을 가해 왔다. 천안읍에서 일본군 수비대가 지원하기 위해 합세하자 아우내 장터는 피로 물들어 갔다. "이놈이...... 왜 우리를 쏘느냐., 왜 죄없는 대한 백성을 쏘느냐!" 항변하는 김구응의 가슴에 총알이 날아들었다. 쓰러진 김구응의 머리가 일본 헌병의 칼에 박살이 났다. 김구응의 늙은 어머니 채씨가 달려들어 아들의 죽음을 항변했다. 왜놈 헌병은 아들을 찌른 칼로 그 어머니를 또 찔렀다. 관순의 아버지 유증권이, "너희놈들은 부모도 없느냐....... 왜 죄없는 백성들을 죽이느냐......."하고 대들자 이번에는 유증권을 향해 칼을 내리쳤다. "여보!" 쓰러진 남편을 부축하려던 관순의 어머니 등에도 왜놈 헌병의 칼이 사정없이 내리찍혔다.. 관순의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즉사를 하고 말았다. 관순의 아버지는 중상을 입고 집으로 옮겨져서 치료를 받다가 이틀 뒤에 세상을 떠났다. 그날 유관순은 일본 관헌의 무차별 발포로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만세를 선동한 주모자를 대라. 주모자가 누구냐?" 일본 관헌은 관순을 심문하였다. "주모자는 나다. 내가 주모자란 말이다!" "뭣이! 바른대로 말 못할까!" 고문이 시작되었다. 심한 고문에도 관순은 굽히지 않고 끝까지 자기가 주모자라고 버티었다. 실상 만세 운동의 주모자는 그녀였으니까........ "칙쇼! 만세 운동에 관계한 자가 누구인지 그걸 대라. 순순히 대기만 하면 너는 석방이다." 그들은 관순에게 회유책을 썼다. 그러나 그런 꼬임에 넘어갈 관순이 아니었다. "사정없이...... 이 악독한 계집아이를 사정없이 내리쳐라!" 야만스런 고문이 거듭되었다. 관순은 천안 헌병대를 거쳐 공주 재판소로 이동되었다. 또다시 검사국에서의 고문. 검사국에서 감옥으로. 관순은 곧 재판을 받았다. 3년형. 경성 복심원에 공소. 법정에서 관순은 걸상으로 검사를 내리쳤다. 그 바람에 7년형으로 가형. 서대문 감옥으로 이감된 관순은 감옥 안에서도 계속 만세를 불렀다. 만세 뒤엔 으레 고문이 뒤따랐다. 일본인들은 고문을 하다 못해 관순이 먹는 밥에 쇳가루와 모래를 집어 넣었다. 계속된 관순의 만세와 고문, 고문, 고문! 관순은 그 고문을 이기다 못해 1920년 10월 12일 아직 인생의 꽃을 피워 보지도 못한 17세에 어린 나이로 한많은 일생을 끝마쳤다.
|
|
|
글터 → 국사/세계사
|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정치, 경제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고려인들이 선망하던 최고의 직업 ‘관료’의 삶의 모습 - 이혜옥
나는 시골에서 쓸쓸히 지내니 세파의 곤궁함을 어찌 견디리 목 내밀고 한번 나가고 싶으니 부디 도와 주시면 얼마나 좋겠소 (이규보)
고려인들이 꿈꾸던 최고의 직업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앞의 이규보의 노래에서 보듯이 바로 관료가 되는 것이었다. 관료는 당대 최고의 신분층이며, 관직에 오른다는 것은 곧 경제적으로 생활이 보장된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고려와 같은 신분제 사회에서는 지배층인 그들에게는 부와 권력, 그리고 명예가 뒤따르게 마련이었다. 서긍의 <고려도경>을 보면 “고려에서는 사민가운데 선비를 가장 귀하게 여긴다”하였는데 여기서 선비란 곧 관료층을 의미한다. 당시 관료는 중앙, 지방의 현임으로 녹을 받는 관원이 3천여 명이고 실직이 없는 관원으로서 녹은 없이 토지만 받는 사람이 1만 4천여 명이라 하였으니, 당시에는 1만7천여 명의 관료층이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지배층으로서 누리던 특권과 그것이 반영된 일상적인 삶의 모습은 어떠하였을까.
색깔로 차별한다 우리 나라 모든 신하들의 관복은 이미 풍토에 알맞게 만들어서 상하을 구별하였으니 이는 변경할 수 없는 것이다. - 공민왕
당시 관료들에게도 소위 유니폼이란 것이 있었다. 유니폼의 상징성은 ‘색’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곧 관직의 차등을 뜻한다. 고려초기에는 관복을 자주색, 붉은색, 진홍색, 녹색의 4단계로 구분하여 차별성을 분명히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착용하는 모자와 허리띠에도 모두 정해진 재료와 색깔이 있었다. 이규보의 시에 ‘옷의 무늬로 귀천이 나뉘니 세상에선 이 일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든가. ‘옛날 푸른 적삼 입었을 땐 사람들이 쳐다보지도 않더니 이제 붉은 옷 입으니 뭇사람 다투어 따르네’라 한 것에서도 당시 색에 부여된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이후 관복은 점차 실용성을 중시하여 검은 옷으로서의 통일을 이루지만, 모자와 허리띠 등의 규정에는 여전히 차별이 남아 있었다. 당시 의복은 일반적으로 삼베와 모시로 만들었다. 면화는 아직 재배되지 않았고 견직물은 값이 비쌌다. 일부 고급 기술을 가진 장인들이 극히 섬세하고 수준 높은 직물을 만들기는 하였지만 대부분 왕실과 귀족들이 쓰거나 조공품으로 이용되었다. 고급 견직, 모직, 면직물류는 염색기술이 미흡하여 거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비단 한 필은 은 10냥이나 되었고, 부인들이 외출시 썼던 너울도 은 한 근과 맞먹을 정도였으니 가난한 사람들은 감히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최자가 “불면 날 듯, 연기인가 안개인가. 희디 흰빛, 눈인가 서리인가. 청, 홍, 주, 녹으로 물들여 비단을 만들어 공경사년들이 입어 끌제, 바스락 바스락 떨치며 반짝이네”라고 노래 하였던 것도 단지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황이 이러하였으니 의복의 색은 단지 시각적 효과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차별을 의미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관료라 해서 항상 고급 직물의 옷만 입었던 것은 아니었다. 집에서는 이들도 흰모시옷을 입었다. 그래서 평상시에는 왕가의 처, 첩과 귀인으로부터 일반 아낙네에 이르기까지 모두 의복의 구별이 없고, 다만 베의 곱고 거친 것으로 구분을 하였다고 한다.
좋은 벼슬과 많은 녹 안개인 양 구름인 양 반공중에 노니니 좋은 벼슬 많은 녹이 날 잡지 못하리 고려의 관료들도 일단 출근해서 업무를 보고 퇴근시간이 되면 집으로 돌아간다. 주로 사시에 출근해서 유시에 퇴근한느 것이 규정으로 지금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관직종사에 뒤따르는 수입의 형태는 크게 달랐다. 당시 관작은 9품으로 차등화되어 있었고 관료들은 각각 등급에 따라 규정된 전시과와 녹봉을 받았다. 전시과는 근무의 대가로 토지를 분급받는 것이며 녹봉은 현물인 미곡으로 받았다. <고려사>에 의하면 ‘전시과’는 문무백관에게 등급에 따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전지와 땔나무를 베어 낼 수 있는 시지를 주는 것으로 이 전과 시를 합한 것이다. 이 제도는 976년에 처음 제정된 이래 목종 때에 정비되고 다시 문종 때에 완비되었다. 초기에는 인품과 공로에 따라 지급한다는 원칙을 세웠지만. 목종 때부터는 관직의 등급만으로 분급한 데서 제도적 변화상을 살필 수 있다. 관직별로 18과로 나뉘어 지급된 것을 굳이 비교하자면 지금 공무원 제도가 9급으로 나뉘어 차등적인 보수로 지급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실제 수입은 얼마나 되었을까. 문종 때의 전시과 규정에 따르면 제1과에 속하는 문하시중, 중서령, 상서령 등의 최고위재상들은 전지 100결, 시지 50결에 비하면 아주 적지만, 당시 호구당 실제 경작지가 1결에도 미치지 못하던 실정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 ‘토지를 받는다’는 것은 실제로 소유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전시과는 토지 자체를 ‘주는’것이 아니라 계권 또는 문계라는 증빙문서를 통하여 그 토지에서 나오는 수확량의 일부를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대체로 제1과의 경우 토지의 비옥도에 딸라 200석에서 400석 정도의 수입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시지에서는 주로 땔감을 채취하였지만 개간하여 경작지로 이용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에 짭잘한 수입도 기대할 수 있었다. 전시과는 관료가 사망하면 국가에 반납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실제로는 유족의 생계유지라는 명목으로 세습되었다. 따라서 전시과는 관료들의 근무수당으로서의 성격에 그치지 않고 그들 가족의 지속적 경제기반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또 하나의 공식적 수입원인 녹봉도 문종 때에 완비되었는데 400석을 받는 1과부터 10석을 받는 47과까지 세분하였다. 녹봉은 정월7일과 7월7일, 일년에 두 번 받았다. 관료들의 녹패를 팔기도 하였다. 녹봉은 주로 쌀, 보리 등의 곡물로 지급하였으나, 베나 비단 등을 주기도 하였다. 관료들이 받는 녹봉과 전시과에서 얻어지는 수입은 대략 비슷한 양이었다고 추정되는데, 다만 차이가 있다면 전시과는 원칙적으로 평생을 보장하는 데 반하여 녹봉은 현직자에게만 보장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밖에도 관료들은 공로에 대한 포상 등을 이유로 보너스를 받거나 고위관료에 한해 공음전이라는 특혜적 성격의 토지를 지급 받았다. 그 외에도 그들은 권력을 이용해서 남의 토지를 빼앗기도 하였으며 고리대나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그들은 신분과 사회적 지위를 충분히 유지할 수 있었다.
많을수록 좋은 것 몇가지- 노비, 여자, 부 가지런히 늘어서 수많은 집들 멀리서 바라보니 옥두 높은 곳에 비단 장막 걷혀 있네 필시 잔치 벌렸으니 붉은 비단 찬란하리 멀리 바람따라 이련한 풍악소리 기녀들은 소매 걷어 팔목을 드러내고 애교 띤 얼굴로 술잔을 드리며 살풋 눈을 흘기니 사람들은 해가 져도 흩어질 줄 모르네
일반적으로 고려시대 가족은 5인 정도로 구성되는 소가족 형태가 주였다. 그러나 그 당시 관료들의 생활에는 노비와 여자가 항상 따라다녔다. 토지와 함께 관료의 주요한 경제기반은 노비였다. 목종 때 경주 사람 융대는 양민 500여명을 사노비로 만들어 궁인 김씨와 고위 관료 김락 등에게 뇌물로 주었으며 종친, 대갓집 중에는 100여 구이상의 노비를 소유한 사례도 있었다. 모든 노비가 한 집안 내에서 존재임에는 틀림없었다. 실제로 노비는 주인집과 떨어져서 그의 땅을 경작하는 외거 노비가 대부분이었으나, 함께 거처하면서 잡일에 종사하는 노비들도 다수 존재하였다. 가난한 시절의 이규보의 집에도 몇 명의 노비가 있었다고 하며, 김부식의 형인 김부일이 구차하게 지내던 시절에 채마밭을 갖고 있었는데 여기서 노비들이 과일이나 채소류를 가꾸었다고 한다. 당시 부잣집에서는 여름날 큰 자리를 깔아 놓고 여종들이 곁에 늘어서서 수건과 정병을 들고 시중하였으며 부인들이 나들이할 때에는 종자2, 3명이 따르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한다. 당시 고위 관료들은 양민을 억지로 노비로 삼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도 전하는데 어떤 양민이 강제로 종이 되어 관에 고소를 하자, 관리 김서와 그 동료들이 그의 원통한 사연을 알면서도 권력가의 세도를 겁내어 권력가에게 유리하게 판단을 내렸다. 그러자 꿈에 하늘에서 날카로운 칼이 내려와 그들을 모조리 내리 찍었다. 이튿날 실제로 김서는 등창이 나서 죽었고 그로부터 한달을 넘기지 않고 그 동료들 역시 다 죽었다고 한다. 여기서 권력의 횡포에 대한 양민들의 사무친 원한을 느낄 수 있다. 한편 칼이 모든 것을 지배했던 무인집권기에는 일상적 의미의 노비보다는 전투적 의미에서 자신에게 충성할 인물이 필요해졌다. 사병화된 가노들을 비롯하여 자발적으로 권세가에 뛰어들었던 문객들이 세력가로 모여들게 된 것이다. 그들은 말 그대로 권력가의 문에 모여들어서 혼돈의 시대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충성의 대가로는 물질적 보상이나 관직을 받았는 그 주군의 세력 비호하에 불법적인 일을 자행하는 일도 많았다. 경대승 집권기에는 그이 문객이 양가 자제를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경대승이 비호하여 처벌받지 않고 풀려난 일도 있었다. <고려도경>에 의하면 당시 부유층들은 서너 명의 부인을 두고 조금만 성격이 맞지 않아도 쉽게 이혼을 한다고 하였다. 당시에 일부다처제가 풍미했던 것으로는 볼 수 없으나 세력이 있는 집안에서는 충분히 여러 여자를 거느릴 수 있었으며 사랑하는 기녀을 두기도 하였던 것이다.
문집들을 보면 지바으로 부임된 관리들과 관기 사이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간간히 전하고 있다. 재주와 미모가 뛰어난 기생이 남쪽 지방에 있었는데 그 기생에게 정을 주었던 군수가 임기를 마치고돌아가게 되자 크게 취하여 “내가 이곳을 떠나면 다른 놈이 널 차지하겠지”하고는 바로 촛불로 그녀의 양볼을 지져버렸다. 임춘에게도 이러한 슬픈 일화가 있다. 그가 벼슬에 싫증이 나서 성산군에 가서 묵을 때의 일이다. 그 이름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군수가 기생 하나 보내어 모시게 했으나 밤에 도망쳐 버려, 이에 상심한 임춘이 원망하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시대를 풍자하는 양날의 칼, 푸른 기와집과 비 새는 초가집 백성들을 긁어 먹고 윗사람에겐 아첨하는 풍속이 오래니 온 나라에 즐펀히 속임수만 따르도다 후한 벼슬 높은 지위는 그리워할지라도 청천백일이야 속이기 어렵도다.
관료들은 관직과 가문의 성쇠 또는 개인적인 능력에 따라 부를 누릴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관료들의 경제 기반은 국가에서 보장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가문의 성쇠 또는 능력에 따라 그들의 생활은 천차만별이었다. 대대로 고위관직을 누려왔던 자들은 많은 재산을 모아서 사치스런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들은 평소 거처하는 집 이외에도 별업이라는 별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외에 엄청난 규모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무인집권기 권력자인 최충헌 집안은 호사가 극에 달해 누각이 새가 날아 다니는 길을 끊을 만큼 높고 해와 달을 가리울 만큼 컸다고 한다. 이 같은 사치는 최고위 권력자층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공경들의 저택이 10리에 뻗치니 커다란 누각은 춤추는 듯 서늘한 마루, 따스한 방이 즐비하게 갖춰 있어 금벽이 휘황하고 단청이 늘어섰네. 비단으로 기둥 싸고 오색 양탄자로 땅을 깔고 온작 진기한 나무와 이름난 화초들 봄의 꽃과 여름의 열매, 푸른 숲에 붉은 송이 그윽한 향내 서늘한 그늘이 한껏 곱게 아양을 떠네.
최자는 이렇게 사치풍조를 노래했으며, 이규보도 일천집 여기 저기 푸른 기와가 즐비하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치의 뒤에는 반다시 빈곤이 도사리고 있기 마련이다. 벼슬을 잃거나 가문이 한미한거나 혹은 청백한 성품의 소유자인 경우에는 관료라도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하였다. 벼슬을 잃은 이규보는 이렇게 노래한다.
이 땅에 재상이 몇 명이나 되는가. 나 또한 외람되이 재상했던 몸이로세. 나만이 청렴하고 남들은 그렇지 않은 것 아니련만 아찌타 가난 걱정 홀로 면치 못하는고.
공정하고 검소하기로 이름난 설문경의 경우를 보자. 그가 병이 들어, 채홍철이 진찰을 하러 안채에 들어갔더니, 다 낡은 베 이불에 누워 있는 광경이 마치 중이 거처하는 방 같았다. 채홍철이 탄복하여 말하기를 “나와 비교하면 흙벌레와 황학 같구나”라고 하였다. 또한 학사 팽조적은 책을 탐독하는 버릇이 있어 두어 개 서까래에 띠로 지붕을 이은 초라한 집에서 사방에서 비바람이 들이치고 땔나무와 지을 쌀이 없어도 항상 태연하고 침착했다고 한다. 한편 임춘의 가문은 건국 때부터 공이 있어 국가로부터 토지를 하사받은 적이 있었고 대대로 문장가와 관료를 배출하였다. 임춘 자신도 문장으로서는 당대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이었지만, 한 번도 벼슬을 하지 못하고 일생을 가난하게 살면서 비극적인 생을 마감하였던 것이다. 그가 쓴 편지 가운데 이러한 구절이 있다.
고향을 떠나서 오랫동안 강남에서 입에 풀칠을 했습니다. 아침에 저녁거리를 걱정할 만큼 구차스럽고 가난하니 고을에서 비웃고 친구들은 모두 등을 돌리고 절교합니다. 운명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나는 장차 누구에게 의지해야 합니까?
임춘의 편지는 가세가 기울고 관직을 얻지 못하면 비록 관료의 집안이라도 비참한 처지를 면치 못함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관직을 지낸다손 치더라도 가문이 든든하지 못하고 이재에 밝지 못하면 역시 가난을 면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시대에 자린고비의 원조랄 수 있는 지씨성을 가진 인물의 이야기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는 충렬왕대의 재상인데 이상한 행동을 하면서가지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였다. 설날과 한식날마다 묘지에 사람을 보내어 장례에 쓰는 돈 모양의 종이인 지전을 주워 오게 하여 다시 종이로 만들어 썼고, 또 버린 짚신을 주워서 거름으로 땅에 묻고 동과라는 수박 비슷한 채소를 심어서 많은 이익을 얻기도 하였다. 게다가 남의 제삿날에 부조로 쌀 1말만가지고 가면서 하인은 10명이나 데리고가 포식시키고, 돌아올 때면 언제나 반쯤 와서 하인들에게 수저를 하나씩 거두었다. 하루는 모두 수저를 내놓는데 하인하나가 우물쭈물하며 내놓지 않아 그까닥을 물으니 수저를 얻지 못하고 바리때를 얻었다 하였다. 그러자 지씨가 웃으며 “내가 욕심내던 것이 사발이었다.”고 하였다. 그는 단지 자린고비의 원조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시대가 풍자하는 양날의 칼, 사치와 빈곤 속에서 배어 나온 시대적 반향을 담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거리에 늘어선 푸른 기와집들을 상상해 보라. 무수한 시간이 흘렀건만 아직도 푸른 기와으이 빛이 바래지 않은 것은 인간의 욕망이 쉬지 않고 달리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기와집 뒤편 개미굴 같은 초가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노래한다. 차마 이대로 죽어 한데 길에 버려지길 기다릴 순 없어 마을을 비우고 산에 올라 도톨밤을 집는다네 그 말이 처량하고 절실도 하구나 듣고 나니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아라 그대 보지 않았나 고관집 먹는 것이 하루에 만전어치 맛난 음식이 솥마다 가득가득 별처럼 널려 있네 하인들도 술 취하여 비단 요에 토하고 말은 배불러 금마판에서 소리치네
|
|
|
글터 → 삶속의 글
|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 사람들 사이에 피어나는 작은 들꽃들
반장님예, 보내 주이소 "판수야! 오늘 잔업이다." 갑작스런 반장님의 말에 저는 반사적으로 '어 안되는데.....'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저녁엔 중요한 수업이 있어서 꼭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필이면 오늘따라 한 분이 결근을 해서 그일을 대신하고있었는데 잔업까지 걸려 학원을 못가게 되다니.... 그렇다고 일손도 부족한데 먼저 간다고 말할 수도 없어 마냥 애만 태웠습니다. 군 제대 후 돈보다는 전문지식을 얻어야 겠다는 생각에 스물 다섯 나이에 입시학원에 등록했습니다. 그 동안 잘 견뎌왔다고 생각했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나약해지면서 외로움과 답답함이 밀려왔습니다. 저녁 식사 후 잔업 준비를 하고 있는데, 아주머니 한 분이 제 사정을 아시고는 "을은 내가 하면 돼, 김군은 빨리 학원 가라. 배우는게 더 중요하지. 내가 할 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침 같이 일하시는 분들도 내 얘기를 전해 듣고서 반장님에게 부탁했습니다. "반장님예, 김군 보내이소. 우리가 조금씩 거들면 되니까 학원에 송부하게 보내이소." 평소엔 자신들의 일만으로도 벅차고 힘들어 했지만 이번에는 서로 맡겠다고 야단들이었습니다. 특히 쌀쌀맞던 정양이란 아가씨마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반장님예, 지가 하믄 됩니더. 보내 주이소." 순간 코끝이 찡해졌습니다. 다음 날, 힘들게 일했을 그분들의 모습은 정말 건강해 보였습니다.
김판수 님/경남 양산군 상북면
|
|
|
글터 → 철학 |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77 - 독일실존철학의 대표자: 하이데거(1889-1976년) 그때 세계에서는 1893년: 퀴리부부, 라듐발견 1928년: 영국의회, 평등선거법 의결
하이데거 [Heidegger, Martin] 1889. 9. 26 독일 슈바르츠발트 메스키르히~1976. 5. 26 메스키르히.
|
독일에서 니체의 철학과 사상이 고비를 넘기게 되었을 때 키에르케고르의 저서들이 번역되어 널리 읽히기 시작했다. 독일철학계는 이 새로운 사상에 접하면서 새로운 활력소를 열기에 이르렀다.철학계는 물론 신학계에서도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독일의 대표적인 신학자 카를 바르트는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받아 그의 유명한 저작 "로마서"를 저술했다. 그 책이 신학계에 그렇게 큰 파문을 일으킬 줄은 저자 자신도 미처 몰랐을 정도였다 . 새벽에 나가 종각 아래로 드리워져 있는 줄을 잡아당긴 것뿐인데, 그 종소리에 온 신학계가 놀라 깨어날 줄은 자신도 몰랐다는 그의 표현은 참으로 적절한 것이라 하겠다. 바르트와 그의 신학이 얼마나 큰 영향을 남겼냐는 우리모두가 잘 알고 있다 .우리 신학계에서도 바르트의 후계자들이 지나치게 많을 정도로 배출되었다. 보수적이며 전통적인 신학의 주류를 형성해준 셈이다. 그 당시에는 세 신학자가 포진하고 있었다. K. 바르트, P. 틸리히, R. 니부어 등을 말한다. 불트만까지 합치면 네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바르트와 불트만은 유럽에서 활약하고 있었으며, 틸리히와 니부어는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바르트를 전통적인 신학자로 본다면 틸리히는 철학적 신학자로 구별해 좋을 것이며, 미부어는 실천적인 사회신학자로 분류될 수도 있을 것이다. 틸리히도 키에르케고르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독일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신학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당시, 즉 20세기 중반기에는 철학계보다도 신학자들의 역할이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고 말할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의 영향력 탓이었다. 그러나 다시 철학의 이야기로 되돌아가야 하겠다. 제 1차 세계대전과 제 2차 세계대전이 유럽과 세계에 남겨준 영향은 대단히 큰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와 사상가들을 비참과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삶의 가치가 무엇이며, 역사에는 과연 희망이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질문은 철학계에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제 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제 2차 세계대전 후까지 서구철학계에 큰 파문이 일게 되었다. 우리는 그것을 실존주의 철학 또는 실존사상과 문학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한 때는 그 여파가 서구사회는 물론 우리주변에까지 적지 않은 관심을 끌었다. 필자가 54년부터 연세대학교 철학과 강의를 시작할 무렵에는 실존철학이 마치 철학의 주류이거나 전부인 것같이 여겨지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 처음 제창자를 니체와 키에르케고르라고 불렀다. 그들은 인간의 문제를 최대의 과제로 삼았고 자아의 세계내에서의 운명을 숨김없이 물었기 때문이다. 니체는 그 해결을 운명에와 영구회귀의 그리스 정신에서 얻으려 했고,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 신앙에서 해결지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으로 그치고 말았다면 우리는 실존철학자들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그들의 후계자들에게 있었고, 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이 동조해주었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의 시대적 조류를 만들게 된 것이다. 오히려 철학자들보다는 작가들의 활약이 더 보편적 경향을 띠고 나타났다고 하겠다. 아마 그 처음 철학자는 "존재와 시간"의 저자인 M. 하이데거라고 보아서 좋을 것이다. 1927년 그의 저서가 발표되면서 그 영향력은 대단한 것임이 드러났다. 필자도 젊어서 그 책을 대하면서 어느 정도는 흥분에 가까운 기대를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친구 한 사람은 "바로 이런 철학이 필요했었다"고 말했다. 거기에는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었던 철학이라는 뜻도 있었으나, 이것이 우리 시대가 갈망하는 철학이었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래 전에 한 서울대학 교수는 "아마 우리 졸업생들 중에 하이데거에 관한 학위논문을 쓴 사람이 전체의 3분의 1 또는 그 이상을 될 것이다."라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하이데거가 유행했다는 뜻도 되나, 그만큼 어려운 전문성도 갖추고 있다는 증거도 될 것이다. 서울대학의 박종홍교수는 유럽여행의 가장 큰 목적중의 하나는 하이데거 방문에 있다고 얘기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대단히 난해한 내용이다. 충분히 이해하기에는 유럽의 철학사를 알아야 하고, 또 그 핵심적인 과제에 접할 수 있어야 한다 .하이데거를 앍으면 마치 신의 존재를 빼놓은 키에르케고르를 읽는 것 같은 인상을 받기도 한다. 최근 작고한 서울대학의 김석목 교수도 하이데거는 신이 없는 신학 책을 읽는 것같은 인상을 풍긴다고 얘기하곤 했다. 아마 그의 철학은 그리스의 존재론에서 시작해서 기독교적인 인간관과 20세기에 사는 인간들이 안고 있는 가장 근원적인 과제를 해명해준 철학이었다고 보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처음 그를 대할 때 느낀 인상이 일단은 그러했었다.
78 - 철학자의 국적: 언어권과 방법론에 의한 철학 그때 세계에서는 1935년: 중국 장개석,국민경제건설운동제창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그렇다고 해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 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값진 철학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주어진 내용을 어떤 방법론에 의해서 새로운 철학으로 구성하는가에 따라 그 내용이 새로운 철학체계로 형성되는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그 방법론을 제시해준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먼저 소개한 딜타이였다. 딜타이의 '해석학'이 새로운 철학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 또한 학설은 독일보다도 오스트리아학파에 속하는 E. 후설의 현상학적 방법이었다. 우리는 어떤 사상가나 철학자의 국적을 따지는 경향이 있다. 또 그럴수 밖에 없다. 그러나 서구에 있어서는 국적보다도 어떤 언어권에 속하는가 함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네덜란드 같은 나라에도 훌륭한 철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의 저서는 영어, 불어, 독일어 중 어느 한나라의 말로 번역되지 않으며 세계무대로 등단하지 못한다. 키에르케고르와 같이 특출한 사상가의 저서는 독일어를 통해 세계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나, 네덜란드, 벨기에의 학자들은 직접 영어, 불어등으로 저술을 한다. 그래서 자기나라사람들과 세계여러나라의 독자를 갖도록 한다 .이런 문제는 오래지 않아 우리의 문제로 번질 가능성이 없지 않다. 예전에 김은국씨가 쓴 "순교자"라는 소설이 미국 및 영어권세계에서 큰 관심을 모았던 적이 있었다. 후에 우리말로도 번역되어 읽히고 있다. 그 책이 한국어로 씌어진 뒤에 영어로 번역되었을 대 그렇게 많은 국제적 독자를 가질 수 있었을까함은 의문스럽다. 따라서 그 작품은 영문학에 속하는 것이지, 국문학에 속하는 작품으로는 보려고 하지는 않는다. 철학에 있어서도 그렇다. 솔직히 말해서 서양철학은 독일어,불어, 영어문화권 어느 하나에 속할 수 있을 때 세계적인 철학으로 인정을 받기 쉽다. 일본에도 몇 철학자들은 국제적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몇 권의 저서가 독일어로 씌어졌다면 우리도 그 분야의 연구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일본문화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우리는 깊은 관심을 갖지 않는다. 필자의 친구 교수 한 사람은 미국대학에서 연구비를 받아가지고 일본의 니시다철학을 연구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미국철학계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의 한 철학자가 인도철학이나 중국철학에 관한 좋은 저서를 남겼다면 미국에서도 관심을 갖고 번역하고 읽히게 될 것이다. 우리 한국철학이 놓여진 위상에도 이와 비슷한 문제들이 제기될 수 있음을 미리 짐작해두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무엇때문에 이런 문제를 제기해보는가? E.후설은 오스트리아학파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의 선배로서는 볼차노, 브렌타노 등의 쟁쟁한 철학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E.후설은 빈 대학에서 많은 독일제자들을 가르쳤고, 그 자신도 후에는 독일의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은 독일어 문화권에 속하기 때문에 우리는 국적을 별로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같은 스위스이지만 제네바대학과 그 지역은 프랑스 언어권에 속하기 때문에 프랑스문화권에 속한다. 스위스의 바젤대학은 독일의 한 대학과 마찬가지로 대우받는다. 많은 독일의 철학자나 신학자들이 바젤대학에서 강의를 했으나, 우리는 야스퍼스나 K.바르트 같은 교수를 스위스의 학자이기보다는 독일의 학자로 치부한다. 국적보다는 언어문화권을 중하게 보기 때문이다. 먼저 얘기로 돌아가자. 하이데거에게 영향을 준 E.후설을 오스트리아 학파의 중심인물이었으나, 많은 독일의 철학도들이 그의 강의실에 모여들었다 .하이데거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후설은 수학과 논리학을 연구했다. 수학에서 논리학에의 길을 택했다. 그 위에 '현상학'이라는 새로운 철학적 인식론을 제창했다. 그의 학설은 대단히 어렵기 때문에 여기에 소개하기는 적당하지 못할 것 같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최근, 즉 현재에 이르러서는 후설에 관한 연구가 하이데거를 비롯한 어느 실존철학자들보다도 더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의 철학의 내용때문이 아니다. 그의 특출한 철학의 방법론에 기인하는 것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철학에는 두 흐름이 있었는데, 그 하나는 현상학이며 다른 하나의 언어분석의 철학이라고 생각되어지는 정도다. 우리나라에도 철학회들 가운데 현상학 연구회가 꾸준히 계속되어오고 있다. 철학의 내용보다도 방법론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라고 하겠다. 동양철학이나 한국의 철학에는(일본의 철학도 포함해서) 이런 방법론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 하나의 약점이다. 외국의 교수들은 방법론을 강의하나, 아직은 우리는 내용을 설명하고 있을 정도에 지나지 않는 철학적 사고의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79 - '삶은 죽음에 대한 선택과 결단':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1927년) 그때 세계에서는 1926년: 나석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던짐 1927년: 린드버그, 대서양무착륙비행에 성공
옛날부터 철학의 주체는 존재였다. 그리고 오랫동안 존재는 자연세계를 가리켜왔다. 중세기에 와서는 신이 존재의 중심과제로 떠올라왔다. 신과 무관한 존재는 논의될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 근세가 되었고, 근세에 와서 자연은 자연과학의 대상으로 바뀌었고 신은 철학적 과제밖으로 밀려나갔다 자연히 최근에 와서는 존재는 삶의 세계로 환원되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 삶의 세계의 중심과 열쇠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철학의 주제는 인간적 삶의 현실로 자리를 바꿀 수밖에 없어진 것이다. 그렇게 되어서 존재는 인간적 삶이 바탕이 되며 그것을 어떻게 밝혀주는가 함이 중요해진다. 하이데거가 문제삼은 존재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 및 삶의 현실은 사회적 공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시간 및 역사적 차원도 불가피해진다. 그 삶의 역사성-그것이 곧 시간인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새로운 철학을 포함하는 하이데거의 주제는 "존재와 시간"으로 대표될 수밖에 없어진다. 이러한 철학을 전개시키기 위해서는 과거의 개념을 가지고서는 충분히 해명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자신의 개념을 만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어졌다. 즉, 지금까지 사용되지 않았던 새로운 용어들이 등단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이데거의 철학은 난해한 철학으로 통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지금까지의 철학과 실존철학 사이에는 어떤 구별이 있는가? 자연은 알려지고 철학적 탐구의 대상은 되나 자체는 존재로서의 자각을 갖지 못한다. 식물이나 동물도 그렇다. 자기자신은 깨닫거나 자각하지는 못한다. 단,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면서 존재를 자각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인간 일반이 아닌 자아로서의 인간이 자기자각을 하는 존재이다. 각존이라는 개념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철학은 스스로의 존재를 밝히는 자아의 실존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면 자아는 어떤 존재인가? 주어진 세계속에 내던져진 존재이다. 목적이나 뜻이 있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나를 둘러싸고 있는 존재하는 세계에 항상 어떤 관심을 갖지 않을수가 없다. 그 관심의 하나가 불안이다. 그리스에 널리 알려진 신화가 하나 있다. '근심, 불안'이라고 하는 신이 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들었다. 그 조각을 가지고 영혼을 취급하는 신에게 자기에게 생명의 기운을 좀 불어넣어달라고 부탁했다. 그 생명의 영혼을 얻은 조각은 사람이 되었다.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된 것이다. 처음에 인간의 재료를 빌려준 신이 보니까 자기가 갖고 싶은 생각이 들어, 내가 재료를 주었으니까 그 인간을 갖고 싶다고 말했다. 그 얘기를 들은 영혼을 빌려준 신이 그럴바에는 내가 생명을 주었으니까 가질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근심, 불안이라는 신은 내가 노력해서 사람이 되었으니까 내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세 사람은 싸움을 하다가 제우스신에게 가 재판을 받기로 했다. 사정을 다 듣고 난 최고의 신은 이렇게 판결을 내렸다. "이 사람이 다음에 죽거든 재료를 빌려준 흙의 신은 그 신체를 도로 찾아 가져라. 또 영혼을 빌려준 신 너는 그 영혼을 도로 찾아 가져라. 그러나 이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근심,불안 신인 네가 데리고 살아라"는 판결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인간은 죽으면 육체와 영혼은 각기 나뉘어져 각기 제자리를 찾아가나,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은 불안이라고 하는 신과 살게 되었다는 얘기다. 바로 하이데가가 지적하는 인간적 삶의 실상은 이러한 존재론적 불안한 것이다. 아무리 인간이 양심적 결단을 내리고 스스로의 존재를 영원한 것으로 만들고 싶으나 그것은 헛된 노력이다. 죽음이 앞으로 다가올 때는 모든 존재에의 노력은 허무해지고 만다. 이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선택과 결단, 이런 노력을 끝없이 계속해가는 것이 인간적 삶의 모습이다. 이런 선택과 결단은 누구도 회피하거나 무관할 수 없는 삶의 실상인 것이다. 그러한 물음과 선택에 임하면서 궁극적인 결단을 내리는 것이 곧 철학적 과제이며, 그것은 자기 스스로가 해결지어야 할 단독자의 책임인 것이다. 그리고 그 노력은 존재하는 것들이 참존재로 돌아가려고 하는 존재에의 의지와 용기에 속하는 것이다. 이 밖의 모든 문제들은 부수적인 것이며, 인간적 존재의 본연적 실상을 외면한 문제들이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어떤 해결을 주기보다도 문제를 제시해줌에 큰 뜻이 있으며, 그는 그 해명의 암시를 제공해주는 것이 철학의 과제라고 보았다. 이러한 존재에 대한 인간적 물음. 삶의 궁극적인 해명을 물려받은 후계자들이 제각기의 해석과 철학적 모색을 거듭하게 되면서 실존철학은 그 비중을 더하게 되었다.
|
|
|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
'옛날 옛적 고리짝에'는 '옛날 옛적 고려 적에'의 뜻
오늘날의 어린이들은 쉽게 책과 접할 수 있어서 많은 동화책을 읽을 수 있었지만, 연세가 좀 드신 분들은 어린 시절에 그런 동화책 대신 우리의 전래 동화나 신화, 전설, 민담을 할아버지 할머니께 듣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 할머니나 할어버지의 옛날 이야기는 으례 이렇게 시작되곤 하였지요.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에 어떤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옛날 옛적 고리짝에 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도 아마 '옛날 옛적 고리짝에'의 '고리짝'의 뜻을 알고 말씀하신 분은 거의 없으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냥 입에서 귀로 전래되어 와서 그냥 말씀하신 것일 뿐이지요.
'고리짝'이 '고려 적'(고려 때)이 오랜 동안 구전되어 오면서 그 뜻을 잃어버린 단어임을 아셨더라면, '옛날 옛적 고려 적에'로 말씀하셨겠지요. 옛날 이야기는 먼저, 지난 시기에 일어난 이야기임을 듣는 사람에게 알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조선 시대에는 그 이전의 시대, 즉 '고려 시대'를 언급해야 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남아 있는 많은 고소설의 대부분이 '조선 숙종대왕 즉위 초에' 등으로 시작하는 것을 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조선 시대에는 '옛날 옛적 고려 적에'로 시작된 것인데, 이것이 오늘날 '옛날 옛적 고리짝에'로 변화된 것이지요.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
|
글터 → 사회/문화/인물 |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6장 예술, 그 광기와 죽음
잊혀진 여자 - 까미유 끌로델 / 나혜석
죽어서야 나올 수 있었던 몽드베르그의 문 - 까미유 끌로델
천부적 재능과 눈부시게 빛나는 외모를 겸비한 여자. 황금분할로 표현되는 몸매, 대담함, 꾸밈없는 솔직함, 오만함, 예술에 대한 광기에 가까운 정열, 흙에 대한 본능, 이 모두를 소유한 까미유 끌로델은 로댕을 한때 미치도록 사랑했다. 로댕과의 사랑과 고뇌, 스캔들로 인해 그녀는 서서히 그러나 아주 쉽게 죽음의 병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녀가 로댕을 잃었을 때, 사실 그녀는 모든 것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까미유 끌로델은 1864년 프랑스의 동부, 빌르뇌부에서 태어났다. 19살 때 파리오 이사를 와 보자르 미술학교의 조각반에 입학하여 로댕과 만나게 된다. 로댕은 최초의 이 여제자에게 사랑을 느꼈다. 24살의 나이 차이 따위는 문제가 되질 않았다. 그들은 끌로빠이엥에 집을 얻어 거기에서 사랑을 나누고 작업을 같이 하였다. 그러나 폭풍이 몰아치던 추운 겨울 밤, 로댕의 부인이 찾아와 난장판이 벌어졌다. 그날 이후, 까미유의 신경은 위태로워졌고, 로댕은 일주일이 넘도록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한편 까미유는 집에서도 쫓겨났다. 가족에게 버림받고 어머니한테도 쫓겨난 까미유. 두 번째 충격은 로댕의 아이를 유산한 일이다. 로댕은 차츰 그녀를 멀리하기 시작했고 다른 여인들과 관계를 가지기 시작했다. 스물여덟 살의 한창 나이에 견디기 어려운 고통 속에서 까미유는 한때 끌로드 드뷔시와도 어울렸다. 로댕의 아이를 잃고 난 까미유는 사람이 달라져 있었다. 매일 밤, 환락가를 찾아 파리 시내를 전전했다. 스스로 파멸의 늪으로 빠져 들어간 것이다. 한밤중 까미유는 자신의 작품, 끌로또 를 바닥에 내던지며 소란을 피웠다. 이웃에서는 미친여자 취급을 해 버렸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녀는 작품 제작을 꾸준히 하였다. 수다스런 여인들 화가 잔느의 초상 등은 그녀의 명성을 빛내 주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자료 구입과 생계에 한없는 절망을 느껴야만 했다. 1905년 11월 14일, 모델을 서려고 찾아온 아슬렝은 공포에 질려있는 까미유를 발견하게 된다. 간밤에 두 사람이 나의 집 덧문을 부수려고 했어요. 난 그들의 얼굴을 보았어요, 그들은 로댕의 이탈리아인 모델들이예요. 그는 그들에게 나를 죽이라고 지시했어요. 내가 그에게 문제가 되기 때문이죠. 그는 나를 없애 버리려 해요.
그리고 까미유는 기절해 버렸다. 까미유의 정신착란 증세가 점점 심해지자 가족들은 그를 정신병원에 보내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너무 지나치다! 내가 항의하지 못하도록 종신형을 언도하다니! 이 모든 게 악마 같은 로댕의 머리에서 나온 거야. 그는 한 가지 생각밖에 가지고 있지 않아. 내가 예술가로서 크게 명성을 떨쳐 자기보다 더 위대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거지. 자기가 죽은 후에라도 나는 불행해야 한다는 것이지. 그는 완전히 성공했어. 내가 불행해졌으니까. 나는 이 노예생활이 지겨워.
정신병원에서 까미유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까미유는 병원에서도 로댕과 그 주변 사람들이 자기를 독살하지 않을까 하는 피해망상증에 시달렸다. 심지어 병원 음식까지 거부한 그녀는 껍질을 벗기지 않은 계란과 감자만을 특히 많이 먹었다. 거기에는 쉽게 독을 넣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병명은 추적망상 . 항간에서는 로댕이 까미유의 주제를 훔쳤다 는 평가와 함께 무수한 소문이 나돌았다.
1913년 3월 10일, 밖에는 구급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두 마리의 말이 채찍 및에서 울고 있었다. 철책 그리고 마차의 요동, 흔들리는 마차를 타고 그녀는 몽드베르그 정신병원으로 끌려갔다. 철컥 문밖으로 자물쇠가 채워졌다. 49세에 들어간 것이 79세에 죽어서야 그 문을 빠져 나올 수 있었으니, 한번 들어간 것이 30년, 로댕과 만나 공동작업을 하던 지옥의 문 또한 왠지 우연한 것이 아닐거라는 생각조차 들었다. 문. 그 안팎의 금은 누가 그었던 것일까. 썰렁한 병실에서 그녀가 임종하던 1943년 10월 19일. 까미유는 물론 철저히 혼자였다. 마침 1933년 10월은 까미유의 서거 50주년이 되는 해여서 그것을 기념하는 까미유 끌로델과 로댕전 이 서울에서 있었다. 도록에서만 보던 것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는데, 과연 두 사람의 작품은 너무 많이 닮아 있었다. 아무리 같은 수원지에서 퍼올린 물이라곤 하지만 오른손을 어깨에 대고 있는 까미유의 밀단을 진 소녀와 로댕의 작품 가라테아 는 소녀들의 모습이 너무나 똑같았다. 그 외에도 로댕의 영원한 우상 과 까미유의 소외된 사람 ,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과 까미유의 생각하는 남자 등은 작품의 내용이나 분위기가 지나치게 유사한 구석이 많았다. 까미유 끌로델이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댕의 그늘에 가리워져 있던 끌로델 작품의 재평가와 함께 그의 해석도 달라져야 한다는 가슴 두근거림이 일어났다. 로댕의 제자로서, 조수로서, 작품의 모델로서, 연인으로 지냈던 까미유 말고, 조각가 까미유에 대한 진정한 재평가가 다시 이루어지길 바란다. 사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로댕 밖에는 들어있지 않았다. 애증이 빚어낸 무서운 파국이었다.
나혜석 부러진 날개
펄 펄 날던 저 제비. 참혹한 사람의 손에 두 죽지, 두 날개 모두 상하였네. 다시 살아나려고 발버둥치고 허덕이다 끝끝내 못 이기고 그만 축 늘어졌네. (하략)
그의 자작시처럼 나혜석은 제비가 비상하듯 창공을 마음껏 날아 올랐던 때가 있었다. 총명과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권문세가의 맏딸로서 그녀는 많은 사람들의 선망을 받기도 했다. 진명여고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동경미술학교로 유학을 떠날 만큼 집안은 유복하였다. 나혜석은 일본에서 그림 재주가 출중한 연하의 미소년, 최승구를 사랑하였는데 그가 요절하자 비통과 허무에 싸여있었다. 스물 두 살 때의 일이다. 정신여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거기서 김마리아, 박인덕과 어울려 독립운동에 가담, 3 1운동 시위 때 체포되었으나 젊은 변호사 김우영의 자진 변론으로 구출된다. 본인의 말대로 김우영은 생명의 은인 이기도 했다. 10년 연상이고 전실의 애들도 있었으나 두 사람은 곧 결합하여 안정된 가정을 꾸렸다. 나혜석은 창작에 몰두하여, 결혼 일 년만에 개인전을 갖게 된다. 1921년 당시 서양화 개인전은 처음이었던 만큼 대성황을 이루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남편의 재정적 뒷받침이 컸다. 풍경화 70점은 모두 매진되었다. 선전 1회에서 6회까지, 9회에서 11회까지 출품하여 특선과 입선을 거듭하였으며 27년 6회때는 봄의 오후 가 무감사 입선, 2회 때는 관전평을 신문에 쓰기도 했다. 문필로 이름을 얻기도 했으며 이당 김은호 등과 어울려 <고려 미술회>에서 중진 멤버로 활약을 하였다. 조선인으로 최초의 외교관이 된 남편을 따라 나혜석은 만주로 가게된다. 넓은 견문과 이국적 풍경은 모두 그의 그림에 보탬이 되었다. 나혜석은 만주에 거류하는 한국 사람들을 보호하고 협조하는 데도 빠지지 않았다. 안동부인회를 조직하여 독립 투사들을 돕고 무기를 반입하는데 외교관 부인이라는 신분의 특권을 이용하여 거들어주다가 남편의 관직이 위태로울뻔 한 적도 있었다. 무사히 귀국하였으며 그녀의 꿈이라던 구라파 여행이 이루어졌다. 파리여행은 사실상 그들 부부의 행복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혜석은 거기서 자유연애의 개방된 생활 풍속을 목도하게 된다. 더구나 그녀는 활달하고 대범한 성품인지라 남편의 질투도 개의치 않고 잠시 나그네끼리의 연정을 엮기도 했다. 상대방은 최린이었다. 남편은 보수적인 기독교인이었다. 기쁜 여행의 끝은 싸늘한 가정불화로 바뀌어 귀국하자마자 김우영은 이혼을 선언했다. 어린 4남매를 집에 남겨놓고 나혜석은 떨어지지 않는 발길로 집을 나와야만 되었다. 신문은 나혜석의 간통사건을 대서특필하였다. 최고의 세도가 최린,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 일류지식인 김우영. 신문은 특종기사에 피치를 올렸다. 천도교 교령이며 중추원 참의이던 최린은 동아일보에 압력을 가하는 한편, 신문을 압수하는 권력을 행사하였고 김우영은 씁쓸한 고배를 마시고 낙향해버렸다. 남편과의 이혼, 최린의 배신. 나혜석은 최린과 불꽃튀는 설전을 벌였으나 상처만 받고 소득은 없었다. 스캔들과 이혼의 파문은 그녀의 인기를 급속히 저하시켜버렸다. 사회는 그를 냉대하고 친지들조차도 냉담하게 굴었다. 사면초가의 고립감 속에서 고군분투하였으나 사회의 비정을 감당해내기는 어려웠다. 왕성한 의욕과 재기는 꺾이고, 경제적 궁핍은 날이 갈수록 목을 조여왔다. 생계가 막막했다. 그의 <자작시>처럼 다시 살아나려고 발버둥치고 허덕여 보았으나 끝끝내 못 이기고 그만 축 늘어지고 만 셈 이었다. 그는 <내가 걸어온 길>에서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밝혔다. 전당포 출입을 하게 되고, 그 건강은 쾌활 씩씩하던 것이 거의 마비까지 이르렀고, 그 정신은 총명하고 천재라던 것이 천치바보가 되고 말았다. 너무나 순식간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한때는 중이 되려고 수덕사 길일엽 스님을 찾아간 적도 있었다. 만년에는 정신착란 증세까지 나타났고 사지가 뒤틀리며 경련이 일어났다. 절과 무료 요양원을 전전하면서 비참한 13년을 이어 나갔다. 흡사 산송장처럼 넋을 놓고 다녔다고 하는데 일설에 의하면 눈 내리는 길가에서 최북이 그랬던 것처럼 12월 한파에 얼어 죽었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당시 관보에 실린 사망자 광고를 보면 본적, 주소 미상인 바, 시립 자제원에서 병사한 것으로 취보자인 용산구청장이 밝혀놓고 있었다. 유언도 알 수 없고 기일도 물론 알 수 없고, 무덤까지도 없다고 한다. 그때의 나이는 54세였다. 죽음은 자신의 행업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까미유 끌로델과 나혜석. 재능과 미모를 겸비한 그리고도 정열적이며 담대한 성격, 오만함. 그럼에도 남자에게 버림받은 상처와 사회의 조소, 냉대 그 스캔들 때문에 그들의 아까운 재능과 운명은 잠식되어 들어갔다. 연상의 남자와 행복한 20대를 보내고, 똑같이 불우한 40대를 보내다가 1940년대를 맞이하여 둘은 죽고 말았다. 환호의 갈채는 여름날의 무지개보다 짧고, 아름다운 이 여류 화가들은 망각의 늪에 빠진 채 사람들로부터 서서히 잊혀져 갔던 것이다. 죽은 여자보다 더 불쌍한 것은 잊혀진 여자 라던 마리 로랑상의 시구가 하필 이 대목에서 생각났다.
|
|
|
글터 → 국사/세계사 |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38. 게릴라의 원조는 스페인
1804년 5월 나폴레옹은 프랑스 황제에 즉위했다. 그러나 그의 야심은 프랑스 황제에서 그치지 않았다. 전 유럽을 정치적으로 통일해 지배하는 것을 꿈꾼 그는 정복을 통해 영토를 확장해 갔고 그 영토에 프랑스 혁명의 이념과 공화국 제도를 실시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런 나폴레옹의 계획에 방해가 되는 국가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영국이었다. 하지만 1805년 10월 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이 지휘하는 영국해군에 크게 패한 바 있는 나폴레옹은 직접 침공을 피하고 대신 1806년 대륙 봉쇄령(베를린 칙령)을 내렸다. 이는 유럽 대륙과 영국의 통상을 금지하는 것으로 영국의 경제에 타격을 줌과 동시에 프랑스의 시장을 확대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대륙 봉쇄령은 생각했던 만큼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영국의 경제력은 나폴레옹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강했고 게다가 영국 상품이 대륙으로 밀수입되었다. 하지만 해군력이 약한 나폴레옹으로서는 바다에서 이 밀수를 막을 도리가 없었다. 이 밀수 통로는 영국의 동맹국인 포르투갈의 리스본이었다. 이에 나폴레옹은 포르투갈을 점령하려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스페인을 통과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1807년 포르투갈 점령 계획을 세우고 스페인에 포르투갈을 분할하자고 제안했다. 그 결과 포르투갈이 점령되기는 했지만 스페인도 실질적으로 프랑스의 지배하에 놓인 꼴이 되었다. 1808년 나폴레옹은 마드리드를 점령했는데 이에 저항하는 마드리드 민중이 5월 2일 프랑스 군을 공격하여 상당수의 프랑스 군이 살해되자 프랑스 군은 보복을 감행했다. 무기를 소지한 채 체포된 스페인 인은 군사 재판후 처형되었다. 8명 이상의 집회는 모두 금지되었다. 프랑스 인이 살해된 경우 그 사건이 발생한 마을은 완전히 불타 버렸다. 5월 3일 마드리드 곳곳에서 많은 스페인 인이 처형되었다. 이 사건에 대한 고발과 분노를 화폭에 담은 것이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이다. 이 사건 직후 나폴레옹은 스페인 국왕을 퇴위시키고 자신의 형을 스페인 왕에 앉혔다. 이 사실이 전국에 전해지자 민중 봉기가 확산되었다. 저항이 거세었기 때문에 프랑스 군은 일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해 말 30만의 대군을 이끌고 재차 침입한 나폴레옹은 거의 스페인 전역을 정복했다. 그러나 이 정복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다. 프랑스 군은 게릴라전 때문에 골치를 앓았다. 게릴라(guerrilla)라는 말은 소규모 전쟁을 의미하는데 당시 민중의 전투를 표현하기 위해 쓰였다. 프랑스 군은 처음 경험하는 전투에 당황했다. 정규전과 다르게 언제 어디서 스페인 게릴라 부대가 출몰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프랑스 군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스페인 게릴라 부대들은 영국군과 함께 1811년에서 13년 사이에 프랑스 군을 내몰았다. 나폴레옹은 이 스페인에서의 전쟁을 두고 “스페인의 궤양이 나를 괴롭힌다”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이 말처럼 스페인 민중의 저항은 나폴레옹 몰락의 제1보였다.
|
|
|
글터 → 사회/문화/인물 |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제2장 살아나는 용의 혼
7. 중국은 굴복하지 않는다
2) 남의 목을 조르면 자기도 힘들다
만일 중국이 세계무역기구의 협상에서 완전히 철수해 버린다면 어떤 상황이 연출될까? 중국은 절대적으로 대외무역의 발전이 필요하다. 무역종사자들은 온갖지혜를 다 짜내어 세계에 중국상품을 내다팔아야 한다. 중국의 경제는 10년 동안의 개방과정을 거치는 사이 이제 세계와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중국이 세계를 필요로 하는 만큼 이 세계 역시 중국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얼마 전 중국 고위층 인사가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의 상황이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때 프랑스의 에어버스항공기회사 사장이 중국의 주문서를 받아들었을 때 얼마나 신이 났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불경기로 이 회사는 근 2년 동안 정말 어렵게 버티고 있었다. 1995년에는 이익은커녕 1억9천5백만 달러의 손실을 보고 있었다. 중국의 주문서는 많은 프랑스인들에게 생명줄을 던져 준 것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보잉항공사는 10년 간 줄곧 중국에 독점적으로 항공기를 공급하여 중국 항공기시장의 70퍼센트 이상을 독점했었다. 미국인으로서는 중국이 보잉항공기를 구입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미국이 무역제재라는 몽둥이를 제 편한 대로 흔들어도 피해 나갈 길이 있다는 것을 실제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세계무역기구는 미국의 사주 아래 중국의 가입을 거절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과 다른 국가의 무역까지도 완전히 저지할 수는 없다. 중국시장은 공평한 거래를 원하는 국가에게는 언제든지 열려 있지만 중국의 경제발전에 장애를 주는 나라에게는 그 문을 닫아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중국이 참가하지 않은 세계무역기구가 세계적인 조직이라고 불릴 수 있는지 회의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인은 중국의 가입을 거부할 수 있겠지만 중국 역시 완전히 자유롭게 스스로의 원칙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 10여 억 달러의 항공기 구입자금은 중국인이 피와 땀으로 벌어들인 돈이다. 이처럼 귀중한 돈을 중국의 경제발전에 방해만 하는 나라를 위해쓸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프랑스는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4년 전 눈 앞의 이익에 급급하여 '하나의 중국' 정책을 어기고 대만에 60대의 '미라쥬' 전투기를 팔았다. 프랑스는 이때 중국이 꽝쩌우(光州)에 있는 그들의 영사관을 폐쇄시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이후 몇 년 동안 프랑스는 중국의 신임을 얻지 못했고 따라서 중국시장으로부터 주문을 받을 수도 없었다. 중국과 같이 빠른 발전을 하는 시장에서 몇 년 동안 소외되었을 때, 프랑스는 막대한 손해를 입기에 충분하였다. 대만은 매년 수백만 달러를 써가면서 미국 의회의 외유단체를 초청하였다. 이것은 당연히 미의회 결정에 어떤 영향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중국은 이런 돈을 쓸 필요가 없다. 중국이 거액의 주문서를 미국 회사에 주느냐 마느냐가 이미 미국 기업에계 인사에게는 엄청난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아직도 10년 전의 진부한 사상에 얽매여 잘난 체하는 미의회 의원들은 대기업 사장의 호소를 묵살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의 보잉항공사는 줄곧 이렇게 해 왔었다. 중국의 항공시장은 이후 10년 간 대략 8백대의 민형 비행기를 구입하게 된다. 이 거액의 주문서가 누구에게 돌아갈지, 또 중국이 어느 회사와 손잡고 자동차회사를 세우게 될지에 대해서 미국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3) 지금 필요한 것은 미래를 위한 민족주의
아주 깊은 안목을 가진 프랑스 학술원의 어느 원사(阮士)는 자신이 편찬한 [중국이 깨어나는 때]란 책에서 '중국의 12억 인구가 다같이 깨어나게 되면 세계는 변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실 중국은 이미 깨어났다. 이런 상황하에서 미국이 어떤 식으로 중국에 압력을 가하든 말든 중국은 지금 정말로 깨어나기 시작했다. 21세기의 여명이 밝아오는 이때, 경제적으로 부단한 발전을 하고 군사적으로 강성하며 정치적으로 굳은 신념을 지닌 대국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1995년이 저물어가던 당시 베이징에는 시청 당국이 신규자동차등록세를 인상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이렇게 되자 베이징의 자동차 매매 시장에는 돈을 싸들고 차를 보러오는 시민들로 가득 찼다. 어느 직장의 수위아저씨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차창에 온갖 장식물을 단 소형차가 빈터에 가득히 주차되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물론 이들 차는 모두 자가용 승용차이다. 금년 설날에 필자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전화로 새해인사를 하였다.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한 친구는 아주 흥분한 목소리로 그들 부부가 여행단을 따라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으로 해외여행을 떠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쌍하이 시의 한 여행사 책임자는 동남아 단체여행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릴 줄은 몰랐다고 하였다. 몇 년 전만 해도 에어컨이 달린 전세버스를 타고 백화점으로 몰려드는 외국인들의 모습을 중국인들은 호기심과 부러움이 섞인 눈빛으로 보곤하였다. 그 시절에는 우리와 다른 복장을 하프 카메라를 멘 외국사람들이 아주 신기하게 느껴졌으나 지금은 외국으로 나가는 중국인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 전에 필자는 중국의 대학에 재직한 적이 있는 한 미국 교수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베이징에 나타난 '자동차 열풍'을 말하게 되었다. 이 미국인은 감개무량한 목소리로 이것은 그가 중국에 있었을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사실 우리들도 그 당시에는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어떤 이는. 19세기는 중국이 굴욕을 느낀 시대이며 20세기는 중국인이어려움을 겪는 시기라고 하였다.그러면 21세기는 어떠할까? 어떤 이는, 19세기는 영국인의 시대이고 20세기는 미국인의 시대라고 한다.그러면 21세기는 누구의 시대가 될까? 어떤 이는, 21세기는 중국이 다시 휘황찬란한 곳으로 발돋움하는 시기이며, 21세기는 중국인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한다.지금과 같은 사회 변화가 계속되기만 한다면 다음 세대의 중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번영한 나라에서 살 수 있다. 문제는 그렇게 되기 위해 중국인이 앞으로 반드시 거쳐야 할 어려운 시기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려 있다. 역사 발전이 모든 민족에게 주는 기회는 평등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중국은 진정한 의미의 대국이 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많이 가지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경제력과 국민의 강한 의지력이다. 중국의 거리를 걷노라면 자신없어하는 중국인의 모습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베이징의 한 입체교차로 옆에 우뚝 솟아있는 거대한 부동산 광고에는 '아시아 선수촌의 이웃, 중국의 롱아일랜드'라고 쓰여 있다. 쌍하이는 (浦東)지구 개발에 힘을 쏟으면서 쌍하이를 아시아의 금융중심으로 만들기 위해 금융발전구를 건설할 계획이었다. 이 계획 자체로도 이미 충분히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 있었는데도 구태여 '동방의 맨하탄'이라고 선전하고 있다.또한 각종 금융기관을 쌍하이 와이탄(外繼)에 재입주시켜 이곳을 쌍하이의 금융센터로 발전시킬 계획을 하고는 이곳을 구태여 '쌍하이의 월스트리트'로 불리게 하고 있다. 막대한 자기 비용을들인 중앙TV 고량주 광고방송에는 'OC주(酒), 중국인의 OO' 라는 프랑스 술에 대한 문구를 집어넣고 있다. 어떤 상황이든지 외국의 색채를 띠게 되면 더 고귀해진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지금의 중국사회가 안고 있는 기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는 담배를 파는 할머니조차 외국담배 상표가 새겨진 파라솔을 펴 놓고 있으면 더 많은 손님이 몰리는 것처럼 여기고 있는 듯하다. 이런 국민의식의 결여에 대해 중국인들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미국과 인접한 캐나다는 비록 미국과 동일한 언어를 쓰고 있지만 캐나다인들은 자신의 민족문화 보호에 각별히 신경 쓰고 있다. 캐나다 정부는 캐나다 방송국이 미국가요를 내보내면 그 책임자는 반드시 연주자와 음반제작회사에 저작료를 내도록 규정하고 있다. 술집이나 식당에서 미국음악을 내보내도 역시 저작료를 내야 한다. 정부는 이 돈으로 재단을 설립하여 캐나다의 연주자와 음반제작회사를 지원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있는 내 친구의 경험에 의하면, 프랑스인에게 무심코 영어로 말하면 그 사람은 모르는 체하기 십상이라고 한다. 또 프랑스 방송국의 60퍼센트는 완전한 유럽 프로그램을 방송하도록 규정되어 있는데 이는 미국문화의 침투를 막고자 하는 것이다. 프랑스인은 우루과이라운드협상 때 영화관련상품의 논쟁에서 자신들의 의견을 끝까지 고수하였다. 이 협상에서 프랑스는 영화를 일반 협상항목에 넣는 것에 반대하고 영상관련상품을 '문화공업'이라고 불렀다.그들이 이렇게 하는 의도는 미국의 할리우드영화가 자국의 시장을 잠식하는 것을 막자는 데 있었다. 프랑스의 이런 주장은 유럽 다른 나라들의 호웅을 얻게 되었고 유럽연합은 성명을 발표하여 우루과이라운드협상에서 '현재와 미래'에 유럽의 영상공업에 대해 '특별대우'를 하라고 요구하였다, 통계숫자로도 이 분야에서 미국의 쇼비니슴을 들여다볼 수 있다. 1992년 미국이 유럽에 수출한 영화상품은 30억 달러에 달하나 유럽이 미국에 수출한 액수는 겨우 2억8천만 달러에 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충분히 돈을 벌지 못했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으며 유럽 각국이 양보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미국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싱가포르의 전 총리 리꽝야오(는 자기 국민들에게 반드시 중국어를 배워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싱가포르인들이 영어를 아무리 잘한다 해도 서양인들은 결코 싱가포르사람을 영국인이나 미국인으로 보지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민족이건 자기의 언어가 있어야 다른 민족의 존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미국에서 태어나 중국말을 못하는 중국인들을 ' A B c '라고 부른다. 그들의 외모는 중국인이나 영어만 할 줄 알고 사고방식 역시 미국식이다. 그러나 미국의 백인들의 눈에는 여전히 '중국인'일 뿐이고 화교사회에서는 그들을 '미국인'으로 치부해 버린다.백인에게는 백인의 사회가 있고 화교에게는 화교의 사회가 있으나 그들은 어느 사회에도 속할수 없는 처지인 것이다. 민족 개개인이 민족적 포부를 가지고 민족부흥에 노력할 때 그 민족에게는 비로소 밝은 미래가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에 사는 어떤 종류의 개미는 강물이 그들의 길을 막게 되면 서로 협력해 큰 무리를 이룬 다음 강을 건넌다고 한다. 이때 익사하는 불행한 개미도 있으나, 결국 이 개미들은 강 건너편의 언덕에 도달한다. 하나의 민족이 살아가는 길에 시련이 있을 때 필요한 것은 이와 같은 헌신적 정신일 것이다.
|
|
|
글터 → 명상/지혜/처세 |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어떤 6.25
1951 년 5월 17일. 중공군이 북한을 도와 대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사상 국군이 최대로 괴멸되는 순간이었다. 장병들은 험준한 산악 지대를 걸어 후퇴의 행군을 계속했다. 적의 포격이 비오는 듯했고, 도처에 매복 공격이 있었다. 대열에서 이탈된 낙오자들은 포로가 되거나 총 맞아 죽거나 동사했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몇 날 며칠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고산 준령을 넘어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이미 지휘 계통은 무너진 지 오래였다. 병사들은 모두 자기 체력만 믿고 달아났다. 개중에는 낮엔 중공군 포로가 되었다가 야간에 탈출하여 간신히 목숨을 건진 이도 있었다. 참모장 숙소를 돌보고 있던 한 아주머니도 후퇴하는 참모장 일행을 따라 급히 들에 아기를 들쳐업고 후방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그런데 어른 가슴팍까지 물에 잠기는 깊은 계곡을 건널 때였다. 갑자기 적의 총격이 계곡의 향해 집중되었다. 사방에서 총소리가 들리고 앞에서 사람들이 픽픽 쓰러졌다. 병사들은 허겁지겁 계곡을 건너뛰었다. 오직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한참 정신없이 뛰다 보니 앞에 그 아주머니가 가고 있었다. 그런데 아주머니의 들에 아기는 없고 빈 포대기만 업혀 있었다. "아주머니, 아기는 어떻게 했어요?" 한 병사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제서야 아주머니는 혼절하듯 다시 계곡을 향해 뛰었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은 뒤였다. 이미 계곡으로 떠내려간 아기를 찾을 수는 없었다.
|
|
|
글터 → 이글저글 |
다람쥐는 수백만 그루의 나무를 키운다. 다람쥐는 자기가 땅 속에 숨겨 놓은 나무열매를 잘 찾아내지 못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나무가 자라나게 되는 것이다.
토마토는 과실이 아니고 채소이며, 오이는 채소가 아니라 과실이다. 감자는 뿌리가 아니고 줄기이며 대(竹)는 나무가 아니라 풀이다. 또 바나나는 나무가 아니라 풀이고 땅콩은 건과가 아니라 콩의 일종이다. 양파도 채소가 아니라 백합의 일종이다.
90%가 넘는 꽃들이 불쾌한 냄새를 가지고 있거나 냄새가 전혀없다.
파인애플은 사과도 아니고 pine도 아니며 딸기 종류이다.
활동사진(moving pictures)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림의 연속이다.
은어(silver fish)는 생선이 아니라 곤충이다.
|
|
|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