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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82 호
4339.12.11 (10.21)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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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나는 사나운 폭풍우에 미쳐 날뛰는 바다를 보았고,조용하고 잔잔한 바다, 그리고 어둡고 침울한 바다도보았다. 그리고 그 모든 변덕 속에서 나 자신을 보았다. / 마틴 벅스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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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제 3부 개화와 항쟁
신여성이 뿌린 이혼 고백서 - 나혜석
나혜석 [羅蕙錫] 1896. 4. 18 경기 수원~1946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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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을 말하는 어느 기록은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김명순(탄실), 김원주(일엽), 나혜석(정월) 세 작가는 동시대에 처해 같은 경향의 시를 읊었으며, 실연의 고배를 마셨으며, 그들의 말기가 한결같이 아름답지 못하였다. 그래서 세상은 그들을 비웃었다. 조소하고 조소당하게 한 사람은 남성이었다. 나혜석. 근대 한국의 여류 서양화가로서 또는 염문으로서 이름이 알려진 나 여사는 너무도 유명하다. 일찍부터 미술의 천분을 타고난 여사는 서울에서 여학교를 나온 뒤 곧 동경으로 건너가 여자 미술 학교에 입학하였다. 미술 학교에 입학한 그는 공부도 열심히 하였지만 연애도 열심히 하여 소문이 자자하였다. 시인이며 여류 화가로서 개화기의 문단과 화단에 숱한 화제를 뿌리고 다녔던 정월 나혜석은 원래 경기도 수원 태생이었다. 1896년 4월 18일, 그녀는 용인과 시흥 군수를 역임한 아버지 나기정의 5남매 중 둘째 딸로 세상에 태어났다. 수원의 나씨 일문은 '나부잣집' 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었고, 나혜석의 증조부는 호조참판을 지낸 명문으로 권세와 재력을 함께 과시하고 있었다. 위로 오빠 홍석과 경석은 모두 개화에 눈뜬 선각자들이었으며, 신교육을 받고 모두 일본에 유학한 개화 청년들이었다. 혜석은 말하자면 이들 두 오빠의 영향으로 일찍 개명되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수원 삼일 여학교를 졸업한 14세의 나혜석은 그해 9월에 서울 진명 여학교에 입학한 재주꾼으로, 학교 성적은 늘 우수했고 그림에 뛰어난 소질을 나타내고 있었다. 나혜석의 영광과 불운은 그녀가 진명을 졸업하고, 경석 오빠의 권유로 동경 여자 미술 전문 학교에 입학하여 서양 미술을 공부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그 때부터였다. 나혜석은 당시 조선의 여자들이 집안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아온 전통적인 인습에 반기를 들고 나왔다. 그녀는 동경 유학생들의 동인지 <학지광> 3호에다 근대적인 여권을 주장하는 글인 "이상적 부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여권주장의 한 방법으로 나혜석은 또 동경에서 여성 유학생들의 단체인 '조선 여자 친목회'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나혜석은 이미 19세의 성숙한 처녀로 성장해 있었고, 그녀의 다정다감하고 적극적인 성격은 동경 게이오 대학 학생 최승구와 가까워 지고 있었다. 나혜석이 주동이 되었던 '조선 여자 친목회'는 1917년부터 동인지 <여자계>를 발간하지만, 이해에 그녀는 사랑하는, 장래에 결혼을 약속한 애인 최승구의 죽음을 맞는다. 최승구는 결핵 환자였는데, 그가 회복하지 못하고 나혜석 곁을 아주 떠나 버린 것이다. 사랑하는 애인의 죽음은 사랑의 죽음이나 다름없었다. 그 충격으로 잠시 살고 싶은 생의 의욕마저 잃어버렸으나 그녀는 강했다. '머지않아 학교를 졸업하면 귀국해서 교단에 서리라. 발랄한 어린 학생들을 마주 대하다 보면 내 아픔도 가셔지겠지.........' 함흥의 영생 중학교와 서울의 정신 여학교 교단이 귀국 후 나혜석의 좌절되기 쉬운 사랑의 아픔을 씻어 주었다. 나혜석의 아픈 상처를 아물게 한 또 나의 계기는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이었다. 그녀는 신여성이었으며 여학교 교사들이었던 신 마실라, 박인덕, 김활란, 황 에스더, 김 마리아 등과 이화 학당 지하실에서 비밀리에 회합을 갖고 거족적인 독립 운동의 봉기에 신여성(지식인)들의 참가를 결의했었다. 그러나 그들의 비밀이 누설되어 신여성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옥중에서 받은 곤욕, 그녀는 그 곤욕과 사랑의 아픔을 맞바꾼 셈이었다. 첫사랑 최승구의 환상이 완전히 가셔지자 나혜석은 김우영과 자주 만나 제 2의 사랑을 전개시켰다. 김우영은 나혜석이 동경 유학 시절부터 열렬하게 접근해 왔던 청년으로서, 뒷날 변호사 개업을 하게 된다.
..... 그해 여름 방학에 나는 동경에서 귀향하였었나이다. 그 때 우리 남형 오빠를 찾아, 또 나를 보러 겸사하여 우리집 사랑에 손님으로 온 이가 씨(김우영)였습니다. 씨는 그 때 상처한지 이미 2년이 되던 때라 매우 고독한 때였습니다....... 씨는 며칠 후 경성(서울)으로 가며 내게 장찰을 보내었습니다. 솔직하고 열정으로 써 있었습니다. 우선 자기 환경과 심신의 고독으로 취처(아내를 맞음)하여야겠고, 그 상대자가 되어 주기를 바란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물론 답하지 아니했습니다.
김우영 쪽이 먼저 적극적이엇고, 처음에 나혜석은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답장을 주지 않았다고 했다. 두 번째 편지가 왔다. 나혜석은 짝말한 답장을 써 보냈다. 김우영은 며칠 뒤 파인애플과 과일을 사 가지고 수원 나혜석의 집을 찾아왔으나, 그녀는 만나 주지 않았다. 그러자 김우영은 고향 동래로 내려가면서 동경으로 들어갈 때 편지해 달라고 했다.
무대는 다시 일본 동경.
어느 날 밤, 돌아갈 때였습니다. 전차 정류장에서 내가 손을 내밀었습니다. 씨는 뜨겁게 악수를 하고 인하여 가까운 수풀로 가자고 하더니 하느님께 감사하다는 기도를 올리었습니다...... 나는 이 열을 받을 때마다 기뻤었습니다. 부지불각중, 그 열속에 녹아 들어가는 감이 생겼나이다.
두 사람의 애정은 실상 동경 유학 시절에 싹텄고, 그 애정은 급기야 결혼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양가 친척들의 권유와 택일을 해서 결혼할 때 나혜석은 이른바 결혼 조건이라는 것을 내세웠다. 첫째,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사랑해 주시오, 둘째,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셋째,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케 하여 주시오.
김우영은 이 모든 조건을 무조건 응낙했다. 결혼. 신혼 여행은 나혜석이 요구하고 결정하였다. "죽은 애인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가요!" "신혼 여행을?" "그래요!" 남편이 된 김우영은 그 요구를 그대로 들어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남편은 첫사랑의 무덤에 비석까지 세워 주어 아내 나혜석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던 것이다. 정월 나혜석의 나이 25세. 그녀는 한국 화단에 새 기록을 남겼다. 첫 개인전은 <경성일보> 내청각에서 열렸다. 이것이 이땅의 여류 화가로서는 처음으로 열리는 유화 개인전이었다. 화가로서의 위치가 굳혀지고, 일본 외무성 관리가 되어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떠나게 된 남편을 따라 나혜석의 마주 생활이 시작되었다. 경성(서울)서 3년간, 안동현에서 6년간, 동래에서 1년간, 구미에서 1년 반 동안 부부 생활을 하는 동안 딸 하나, 아들 셋의 소생 4남매를 얻게 되었습니다. 변호사로 외교관으로, 유람객으로 아들 공부로, 부로, 화가로 처로, 모로, 며느리로 저 생활에서 이 생활로 껑충껑충 뛰는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었고, 하고자 하는 바를 다 해 왔고, 노력한 바가 다 성취되었습니다. 이만하면 행복스러운 생활이라고 한 만하였습니다. 씨의 성격은 어디까지든지 이지를 떠난 감정적이어서 일촌의 앞길을 예상치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나혜석은 달랐다. 사회인으로, 주부로, 사람답게 잘살고 싶었다. 그러한 이상은 잦은 충돌을 가져왔다. 덤으로 부부간의 갈등이 생긴 뒤로는 반드시 아이가 하나씩 생겨났다. 31세. 그녀는 남편 김우영과 함께 꿈에도 그리던 세계 일주 여행을 떠난다. 프랑스 파리에서 머문 8개월. 나혜석은 세계적인 미술의 조류를 직접 체험하게 되었고, 또한 자기 자신의 미술 수련을 위해서도 뛰어다녔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이 파리 체류 8개월간이 나혜석 생애의 비극적 사랑이 될 줄이야. 남편 김우영이 독일에 체류중이고 나혜석 혼자 파리에서 있을 때의 일이었다. 어느 날 숙소에서 요리를 만들고 있는데 최린이 성큼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합쇼?" "아, 어서 오세요. 최 선생님." 나혜석이 만들고 있는 요리도 실상 최린을 대접하려고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최린. 저 분은 얼마나 유명한 분인가. 기미 독립 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 분이 아닌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옥살이를 하고 나온 분. 천도교의 도령, 대도정을 지냈고 장로를 지낸 명사가 아닌가.' 나혜석은 파리에서 최린을 만난게 영광스러웠다. 그와 접근하고 싶었다. 민족 대표로 존경받는 최린과 깊이 사귀고 싶었다. "나는 최 선생님을 사랑해요. 하지만 내 남편과 이혼은 하지 않을 래요." 최린은 나혜석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과연 당신다운 말이오. 나는 당신 말에 만족하오." 나혜석의 생각은 이랬다. '남자나 여자나 다른 사람과 좋아 지내면 반면으로 자기 남편이나 아내와 더 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 ' 최린과 나혜석은 파리의 식당과 극장을 두루 찾아다녔고, 혹은 뱃놀이를 즐기며 불륜의 사랑에 빠졌다. 그 때의 최린과의 사랑을 뒷날 나혜석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나는 결코 남편을 속이고 다른 남자(최린)을 사랑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나이다. 오히려 남편에게 정이 두터워지리라고 믿었사외다. 구미 일반 남녀 부부 사이에 이러한 공공연한 비밀이 있는 것을 보고..... 가장 진보된 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혜석의 진보적인 생각과 행동은 결국 가정의 파탄을 가져오고야 말았다. 남편 김우영은 나혜석에게 이혼을 제의했다. 만일 나혜석이 승낙하지 않으면 간통죄로 고소하겠다고 위협했다. "여보, 우리 이혼합시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별안간에." "단신이 최린에게 편지하지 않았소?" "했어요." "내 평생을 바치겠소, 하고 편지 안했소?" "그렇게는 안했어요." "왜 거짓말을 해? 하여간 이혼해!" 마침내 4남매의 어머니로, 저명한 화가이자 여류 시인 나혜석은 남편에게 이혼을 당하고 말았다. 그녀의 나이 35세 때의 일이다. 나혜석은 이미 시와 소설과 유화를 함께 하는 여류 명사로서 사회적인 지위가 굳혀 있었으나 사회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남성 위주의 사회 제도가 싫었고, 도덕과 법률과 인습이 싫었다. 그녀는 이러한 것들에 도전하면서 그녀의 예술을 살찌워 갔다. 김우영은 곧 다른 여자와 재혼했다. 설마하고 나편이 자기를 다시 찾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던 나혜석으로서는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충격이었다. 그 때의 심정을 나혜석은 이렇게 술회한 적이 있었다.
황망한 사막에 선 외로운 섬이었나이다. 모성애를 고수해 보려고 갖은 애를 썼나이다........ 나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나이다. 죽는 일은 쉽사이다...... 그러나 내 사명에 무엇이 있는 것 같사외다. 없는 길을 찾는 것이 내 힘이요, 없는 희망을 만드는 것이 내 힘이었나이다. 역경에 처한 자의 요령은 노력이외다. 근면이외다. 번민만 하고 있는 동안 타임(시간)은 가고, 그 타임은 절망과 파멸밖에 갖다 주는 것이 었나이다.
우선 나혜석은 당시 가장 권위 있는 일본 정부 주최의 미술가 등 용문인 '제국 미술원 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그간에 그려 두었던 그림을 팔고, 있는 물건을 전당포에 잡혀서 돈을 만든 다음 금강산으로 들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파리에서 그린, 나혜석으로서는 스스로 걸작이라 자부한 작품 '정원'을 제전에 출품했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면, "하룻밤은 입선이 되리라 하여 기뻐서 잠을 못 자고, 하룻밤은 낙선이 되리라 하여 걱정이 되어서 잠을 못 잤다." 그런데 1,224점 출품에 당당히 입선이 되질 않았는가. 나혜석의 기쁨은 하늘에 닿은 것 같았다. 몸이 떨렸다. 신문 기자들이 밤중에 문을 두드리고, 라디오로 방송이 되고, 세상은 온통 나혜석 한를 위해 생겨난 것 같았다. 그러나 자기 몸으로 낳은 4남매를 전 남편에게 빼앗긴 나혜석은 걷잡을 수 없는 적막감 속에 빠져 눈물짓는 때가 많았다.
야밤에 눈을 뜨면 허공의 구석으로부터 일진의 바람이 어디선지 모르게 불어옵니다. 그 때 고적이 가슴 속에 파고 펴지는 것을 깨닫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느끼던 고적은 아픈 것은 있었으나 해될 것은 없었습니다. 지금 느끼는 고적은 독초 가시에 찔리는 자국의 아픔임을 깨달았습니다. 어디로부터 와서 가는지 모르는 가운데서 무엇을 하든지 그 뒤는 고적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허락할까? 한 사람에게도 허락지 말까?' 이성의 사랑은 무섭다. 아! 무서운 것! 적막한 것이 사람입니다.
전 남편 김우영과 이혼하고 3년의 세월이 흐른 뒤 나혜석은 여권 부재의 사회 제도와 남성 위주의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통박하는 글을 <삼천리>지에 기고한다. 이름하여 "이혼 고백서". 2회에 걸친 이 장문의 글은 나혜석의 분노와 저한이 그대로 담겨진 것이었는데, 그 대담하고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의 사회 사간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혼 고백서"를 발표하여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고, 이 땅의 여성 개화사에 일대 사간을 일으켰던 나혜석의 일거수 일투족은 이제 모든 신문과 잡지의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그녀는 저널리스트들의 시선이 자기 몸에서 떠나지 않고 계속 추적해 오자 어디로든 도피해 가고 싶었다. 그녀의 좌절감은 그 이후 더욱 깊어 갔다. 그림도 그려 보고 소설도 써 보았으나 그림이나 글이 그녀의 고독과 좌절감을 매워 주지는 못했다. 실의에 빠진 그녀는 41세 되는 해에, 이미 사랑에 실패하고 삭발 수도승이 되어 수덕사에 내려가 있는 김일엽을 찾아간다. 몸과 마음이 함께 시들어가기 시작한 나혜석은 어디서든 구원을 찾아보려 했으나 허사였다. 수덕사에서 가야산 해인사로 전전하며 방랑 생활을 되풀이하는 그녀의 몸에, 중풍이란 병마가 달려든다. 몸의 부자유, 고독감, 신경 쇠약이 그녀를 비극적인 종말로 이끌고 갔다. 말의 부자유, 육신의 불구, 마음의 고독, 마침내 정신 신경 장애. 그녀는 서울 인왕산 밑 청운 양로원에 수용된다. 48세. 한창 활동할 나이에 양로원이라니........ 50세. 추위가 몰아치는 1946년 연말께, 나혜석은 서울 원효로의 자혜 병원(시립 남부 병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천재 화가란 신분을 숨긴 채 홀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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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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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정치, 경제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이규보의 과거시험대책은 어떠했을까
과거시험으로 가는 길 촛불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절의 강당에는 이따금 한숨소리만 들릴 뿐 모두들 조용한 침묵으로 자기 앞의 종이를 응시하고 있었다. 더운 여름 날씨였지만 산 속 깊은 곳에 있는 절의 강당은 바깥의 따가운 했볕과는 다르게, 시원한 바람이 이따금 스며들었다. 그래도 수십 명이 앉아 있는 데다가 무언가 모를 열기가 이들을 감싸고 있어,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어느덧 땀이 흘러내렸다. 밝은 대낮인데도 절의 강당 앞 쪽에는 붉은 빛의 커다란 양초를 켜놓았고, 방 안으로 파고드는 약한 바람에 촛불의 심지는 껌벅거리면서 점차 짧아져만 갔다. 그에 따라 가끔씩 머리를 들어 촛불이 타들어 가는 것을 힐끔힐끔 훔쳐보던 사람들의 표정도 굳어져 갔다. 어린 나이의 이규보도 강당 한 구석에 않아 있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고 심호흡을 하면서, 머리 속으로는 싯구를 짜내고 있었다. 이윽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미소, 그리고는 하얀 종이 위에 붓이 흐르듯 날아갔다. 아직 초가 반쯤 남아 있을때, 그는 일어나 자신의 답안을 제출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시원한 바람이 그를 감싸안을 때, 가슴 속에도 청량갈이 스치고 지나갔다. 방 안에 남이 있는 나머지 학생들은 그를 바라보면서 내심 부러운 눈치였다. 이윽고 붉은 초가 다 타들어가 촛농만이 남자. 시험관 중 한 사람이 일어나 조그만 종을 쳤다. 답안지들이 걷히고, 모두들 아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웅성거리면서 학생들이 강당에 다시 들어오자 시험관은 결과를 발표하기 위해 일어섰다. 일등은 역시 이규보였다. 모두들 예상했던 일이라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의 머리속에는 관복과 모자를 쓴 이규보의 장래 모습이 떠올랐다. 이윽고 그 자리에서 작은 연회가 벌어졌다. 그러나 시끄럽고 떠들썩한 연회기 아니었다. 나이에 따라 차례로 술잔을 주고 받으며를 화답하는 그런 연회자리였다. 연회는 종일토록 계속되다가 저녁 때에야 끝났다.
위의 장면은 흔히 각촉부시 라고 불리는 일종의 문장 시헙에서 이규보가 일등이 되었던 장면을 그려 본 것이다. 이규보가 살았던 고려 중기에는 사립학교에서 하고라고 하는 일종의 과거시험대비 여름수련회를 산 속에 있는 절에서 가졌다. 이 때 치루어진 각촉부시란 시험은 촛불이 다 타기 전에 글어 지어야 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일명 급히 짓는다고 해서 급작이라고도 했다. 따라서 형식에 맞추어 빠르게 문장 짓는 기술을 익히는 것이 중요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좋은 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관료를 꿈꾸는 이규보의 과거시험준비 이규보(1168- 1241)는 무인정변이 일어나기 두 해 전에 태어나 주로 최씨정권기에 활약한 대표적 문신 관료였다. 우리들에게는 고구려의 건국신화인 (동명왕편)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는 아버지인 이윤수가 호부낭중이라는 중앙 정부기관의 벼슬을 지내기 전까지도 경기도 여주에 기반을 둔 토호집안 출신이었다. 이처럼 고려시대 지방에서 거주하던 토호집안은, 자신의거주지에서 일부는 향리가 되어 그 지역사회를 지배하기도 하고, 또 일부사람들은 서울인 개경에 진출해 중앙관료로 출세하면서 서로 인적인 연관을 지녔다. 이 때 중앙관료로 진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말 할 것도 없이 과거에 합격하는 것이었다 물론 다른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예를 들어 무숙실력을 인정받아 무관으로 진출하는 길도 있었다. 이럴 경우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우거나, 탁월한 무술실력으로 국왕이나 중앙권력자들의 눈에 띄어 발탁되면 더욱 쉽게 출세할 수 있었다. 특히 이규보가 활약했던 시기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았다. 당시 무인정변을 주도한 정중부나 이의민등은 그런 경우의 대표적 사례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문관으 등용문인 과거시험에 합격해 관료가 되는 것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는 가장 확실한 길이었다. 그러기에 부친의 음덕으로 벼슬을 시작한 고의 관료의 자제들마저도 또다시 과거시험을 보았던 것이다. 하물며 중앙정계에 배경이 별로 없는 지방출신은 더욱더 과거시험에 매달릴 수 밖에 없었다. 이규보의 집안도 그런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의 연보에는 이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공(이규보)의 처음 이름은 이저였다. 기유년(1189)사마시를 보려고 할 때, 꿈에 노인들이 검은 베옷을 입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옆 사람이 이르기를 “이들은 28수이다”라고 했다. 공은 깜작놀라 두 번 절하고 물었다. “제가 이번 과거시험에 합격할 수 있겠습니가?” 그러자 한 사람이 옆에 있는 살마을 가리키면서 “저 규성이 알 것이다”고 하였다. 공이 즉시 그에게 나아가 물었으나 그의 대답을 듣기 전에 꿈에 깨였다. 조금 후에 다시 꿈을 꾸었는데, 그 노인이 찾아와, “자네는 꼭 장원할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 이는 천기인 만큼 절대로 누설하지 말아야 한다”하였다. 그래서 이름을 규보로 바꾸고 시험을 치뤘는데, 과연 일등으로 합격하였다. 이처럼 이름을 고칠 정도라면 다시 과거 합격에 대한 바램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성취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11살 때 숙부인 이부가 그를 관청에 데려가 동료들 앞에서 자랑삼아 글짓기를 시킬 만큼 신동이었던 이규보도 과거시험준비를 위해서 14살이 되자 당시의 명문 사립학교인 9재학당에 입학하였다. 해동공자라 불렸던 치충이 세운 이 학교는 100년 이상의 전통을 가지고 많은 문신관료를 배출한 곳이었다. 그래서 고려 후기 유명한 문신인 이제현은 이곳을 ‘위로는 재상집 자제에서 아래로는 지방의 과거응시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9재 학당에 이름을 걸고 성인의 길을 익혔다’고 했으며, 또한 조선시대 문신인 서거정도 “이곳에서 뛰어난 문장가가 많이 배출되어 중국에서도 시서의 나라라고 칭송하였으니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은 모두 최충위 공이다”라고 평가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학교에 입학한다는 것이 곧 과거에 합격하는 지름길 이었으며, 그만큼 자신의 출세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곳 출신의 관료가 정부기관 곳곳에 깔려 있었으며, 이들이 대부분 과거의 고시관이 되었으므로 출제경향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또한 합격한 후에도 곳곳에 있는 선배관료들의 지원을 받아 출세도 쉽게 할 수 있었다. 그만큼 좋은 학교출신이란 것이 명예롭고 중요시 여겨졌으므로, 이 학교출신들은 설립자인 최충의 호를 따서 문헌공의 무리라고 불렸다. 물론 고려시대에는 사립학교 외에 공립학교도 있었다. 수도 개경에는 최고 학부인 국자감과 중등학교인 학당이 있었고, 지방에는 중등교육기관인 향교가 있었다. 그러나 이규보가 입학했을 당시에는 사립학교가 과거시험공부에 보다 유리하였으므로, 당연히 사립학교에는 중앙관료나 명문가의 자제들이 주로 입학하였다.
한편 이규보가 학교에 입학한 후 공부한 교과목은 대부분 유교의 경전이었다. 학교에서는 주로 9가지의 경서와 3가지 역사책을 가르쳤다. 9가지 경서란 <주역>, <상서>, <모시>, <예기>, <주례>, <의례>, <춘추좌씨전>,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등이고, 3가지 역사책은 <사기>, <한서>, <후한서>와 같은 중국역사책을 말한다. 이런 책들을 정해진 해석에 따라 암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예컨대 <주역>은 글자수가 24,107자, <예기>가 99,010자, <춘추좌씨전>은 무려 196,845자나 되니, 머리 좋은 이규보도 암기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외에 시부등과 같은 문장 짓는 수업도 받았다. 경전이나 역사책에 나온 고사성어나 음률 등이 문장을 지을 때 기초가 되었으므로 경전은 중요하였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이류보는 뛰어난 글재주를 자랑했다. 앞에서 보았듯이 여름에 치루어진 수련회인 하과에서 그는 계속 일등만을 했던 것이다.
네 번 재수 끝에 턱걸이 하과에서 계속 일등만 했던 그도 16살 때 처음 치른 시험인 사마시에서 보기좋게 낙방했다. 본고사는커녕 예비시험에서도 합격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18살 때 두번째로 본 사마시에서도 합격하지 못하자, 그는 아버지가 지방관으로 근무하던 수원으로 내려가야만 했다. 그곳에서 절치부심하면서 2년 동안 공부했지만 그는 세 번째 시험에서도 역시 낙방하고 말았다. 1차 시험에서 세번이나 낙방한 일은 천재소년이라 불리던 그의 자존심을 무척이나 상하게 했던 것 같다. 그의 연보에는 이에 대한 변명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즉 “공은 이 4, 5년 동안 술에 쏠려 멋대로 놀면서 마을을 단속하지 않고 오직 시 짓기만 일삼느라고 과거에 대한 글은 조금도 연습하지 않아서 계속 응시 했어도 합격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요즘 재수생의 방황을 엿보는 듯하다. 22살 때 치루어진 사마시에서야 그는 비로소 일등으로 합격할 수 있었다. 학교 입학 이후 관료로 가는 두 번째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과거시험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 관문인 예부시가 남아 있었다. 여기에서는 1차 시험의 합격자 중 33명을 예비관료로 선발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시험은 제술업과 명경업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중에서 제술업을 통과하는 것이 관료로 진출하여 승진하는 데 가장 유리하였다. 제술업의 합격 기준이 주로 문장능력이었으므로 이 같은 이름으로 불린 것이다. 반면에 명경업은 유교경전의 애해 능력을 시험 하였다. 예부시의 이 두 시험은 오늘날의 2차고시와 비슷하며, 흔히 대과라고도 불렸다. 이 밖에 법률지식이나 통역, 천문, 지리학 등에 밝은 사람을 뽑는 기술고시가 있어, 잡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장교를 선발하는 무과시험은 없었던 것이다. 이규보가 응시한 시험이 바로 제술업이었다. 그는 사마시에 통과한 이듬해에 예부시에 합격하기는 했지만 합격 등수는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당시에도 합격 등수가 현직 관료로 보직을 받는 일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낮은 등수에 실망한 그는 합격을 사양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심한 아버지의 꾸지람과 주변에서 전례가 없었던 일이라고 말리는 바람에 그는 자신의 합격통지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좋은 성적을 얻지 못한 이유는 과거시험의 문체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시험에 쓰이는 형식적이고 화려한 문체가 불만이었다. 그로 인해 글짓는 감성과 세상 사는 도를 잘 드러내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훗날 그가 중국 당나라 유학자인 한유가 벌였던 고문체 복귀운동을 고려에서 실천하려 했던 것도 이러한 생각에서 연유하였던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진 이규보가 시험을 올바로 볼 리가 없었다. 그는 과거시험장에서 시험관 중 하나가 그를 부르자, 큰 잔으로 술을 한 잔 마시고는 곧 취해서 휘갈겨 쓴 글을 찢어 버리려 하였다. 옆 삶이 그의 글을 빼앗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는 불합격했을 것이다. 당시 고시관아던 이지명이 그의 싯구를 좋아해서 낮은 등수로나마 합격시켜 주었다. 이처럼 어렵게 과거시험을 통과했다고 해도 곧바로 관직에 등용되는 것도 아니었다. 원래는 합격 후 3, 4년 내에 지방관으로 임용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규보가 살던 무인집권기에는 심지어 30년 가까이 임명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이유는 과거시험이나 정상적인 관료승진절차를 거치지 않고 권력자와의 개인적인 관계로 추천되어 지방관으로 진출하는 사람이 당시에 크게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규보처럼 중앙의 권력자들과 줄이 닿지 않았던 사람들은 임용되기 어려웠다. 이규보 역시 23살에 합격하였지만 정작 관직에 임용된 것은 9년이나 지난 32살 때였다. 그 동안에 그는 천마산에 들어가 백운거사를 자칭하면서 술과 시, 그리고 여행 등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오늘날 되짚어 보는 과거시험의 의미 고려시대 과거시험은 대체적으로 문신관료가 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관문이였다. 그러나 무인집권기와 같은 정치적 격동기에는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다. 이에 대해 이규보처럼 전형적인 문신관료들은 무인들에 의해 비정상적으로 운영되던 정치제도를 가능한 한 정상화시키려고 생학하였다. 이규보가 추구한 방법 중의 하나가 백성들을 올바로 통치할 수 있는 관료를 선발하는 일이었고, 그것은 바로 과거제도의 정상적 운영이었다. 말하자면 행정능력이 있으면서 백성과 국왕을 위해 올바른 관료가 되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선발하는 일이다. 이러한 생각은 이후 고려 후기에 이르면 과거시험제도 자체를 이 목적에 맞도록 개정 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그래도 고려시대 과거시험은 한 개인의 출세를 보장하는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신분상승을 가능케 하는 국가고시가 존재한다. 모든 국민에게 ‘기회균등’이라는 이름으로 주어진 이 시험의 통과를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고생하며 매달리고 있다. 또한 대학입학시험도 고시공부와 사정이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좋은 대학출신이 이 사회에서 쉽게 출세한다는 것이 하나의 상식이 된 지는 오래 전이다. 따라서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초등학교부터, 아니 최근에는 영재교육바람에서 보듯이 아예 갓난아이 때부터 경쟁을 시작한다. 아무도 이런 모습이 바람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자식을 그러한 경쟁의 장으로 몰아 넣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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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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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선생님, 점수 잘못 매기셨습니다
때르르릉, 드디어 시험이 끝났습니다. 오늘 시험은 고등학교 삼학년인 내가 마지막으로 치른 학교 시험이었습니다. 시원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조금 더 잘 볼걸 하는 후회가 있었습니다. 시험이 끝난 일주일 동안은 점수 확인을 해야 했습니다. 내 점수를 직접 듣는 것은 정말 고역이었습니다. 영어 시간, 선생님은 들어오시자마자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의 주관식 문제 점수를 말해 줄테니 각자 매긴 점수와 맞추어 보세요." 나의 가슴은 콩닥콩닥 떨려 왔습니다. '혹시 주관식을 잘못 쓰지는 않았을까? 아니, 한칸씩 밀려 썼으면 어떡하지.....' 친구들의 점수가 들리고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점수는 내가 알고 있는 점수보다 삼 점이 더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점수는 내가 알고 있는 점수보다 삼 점이 더 많은 것이었습니다. 순간 나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왜냐하면 지난번 치른 시험과 내가 매긴 기말 시험 성적을 평균해 보니 일 점 차이로 성적이 '우'에서 '미'로 떨어졌는데 뜻밖에 삼점이 더 나왔으니 내 성적은 '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 뭔가 잘못되었습니다. 나는 답안지를 받아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답안지를 훑어보니 역시 선생님께서 채점을 잘못하셨습니다. 하나를 더 맞게 동그라미를 치신 것이었습니다. '일점, 일점 때문에.....' 나의 마음은 정말 혼란스러웠습니다. 선생님께서 답안지를 거둘 테니 가지고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앞으로 나갔습니다. 다리가 마구 떨렸습니다. 마침내 선생님 앞에 답안지를 올려 놓았습니다. 나는 잠시 답안지를 내려다 보고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것 잘못 매기셨습니다." 이로써 나의 영어성적은 '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하늘을 날 듯이 가벼워졌습니다.
이명애 님/경북 경주군 내남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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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75 - 삶과 세계관의 철학: W. 딜타이(1833-1911) 그때 세계에서는 1858년: 청, 영국, 프랑스와 텐진조약 체결: 영국, 인도 직접 통치 시작 1872년: 영국, 비밀투표 채택
딜타이 [Dilthey, Wilhelm] 1833. 11. 19 나소 비스바덴 근처 비브리히 ~ 1911. 10. 1 오스트리아 - 헝가리 티롤 볼차노 근처 자이스암슐레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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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철학은 철학분야뿐 아니라 사상계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 자신은 어떤 고정된 체계를 형성하지는 못했으나, 그때까지 유행했던 관념적인 철학과 형이상학적 철학에 대한 반기를 들기에 충분했다. 칸트에서 헤겔에 이르는 관념철학이 무슨 필요가 있으며, 유심론이니 유물론이니 하는 형이상학은 우리 삶에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며 우리의 현실과 무관한 공론이 아니냐는 비판은 면치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철학자들이 칸트의 철학을 과학 및 논리적 방향으로 재정리하던가 새로운 철학이 탄생되어야 한다는 뜻을 갖게 되었고, 그것은 자연히 반 헤겔적 성격을 띠게도 되었다. 여기에 니체가 던져준 하나의 철학적 과제는 '삶'의 등단이었다. 우리의 현실적 삶 자체로부터 모든 철학이 재출발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철학적 전환점을 만들어준 사람이 니체였다. 니체는 칸트나 헤겔같이 어떤 체계를 형성해준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철학적 흐름에 커다란 전환점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삶의 철학'의 창시자라는 평을 받아 마땅한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이 삶의 철학을 계승한 사람은 많이 있다. 어떤 이들은 다 합치면 20명은 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사람은 W. 딜타이와 G. 짐벨 같은 철학자였다. 필자가 대학에 다닐 때만해도 이들과 그 후계자들의 저서는 광범위한 독자층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오늘까지 연구의 대상이 되어있는 사람은 빌헬름 딜타이라고 보아 좋은 것이다. 딜타이는 19세기 후반기에서 20세기초반에 걸쳐 크게 활약한 대표적인 철학자의 한 사람이다. 그는 플라톤에서 헤겔에 이르는 형이상학적인 관념론은 더 우리의 관심을 끄는 철학의 과제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이성 중심의 인식론이나 합리적인 사고가 철학의 전부인 듯이 생각하는 것은 뒤떨어진 부분적인 사고에 불과하며, 중요한 것은 모든 학문과 사상과 역사, 문화까지도 포함하는 포괄적인 이해가 중요하며, 그것은 삶의 이해와 해석에서 가능해진다고 보았다. 그때까지의 철학은 그 한 부분에 지나지 못한다. 그러면 그러한 새로운 철학은 어떻게 밝혀질 수 있는가 딜타이는 삶과 세계관의 철학이라고 정의를 내린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으며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세계전체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함인 것이다. 즉, 세계관의 발견인 것이다. 세계속에 숨겨져 있는 수수께끼를 어떻게 풀어 해석하는가 함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세계관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며 또 갖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다가 "네 철학은 무엇인가"고 묻는다 .그것은 너의 세계관은 어떤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과거에는 인생관이나 우주관이라는 개념을 많이 사용했다. 세계관은 이 둘을 종합하면서도 삶의 현실에 관한 물음인 것이다.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불교의 세계관을 갖는 것과 통한다. 셰익스피어의 세계관이라든지 베토벤의 세계관이란 말은 쓰는 것은 그들이 철학자는 아니더라도 세계관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자신들의 철학을 가지고 산 사람들인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철학적 이론이나 논리적인 추리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실과 체험에서 해득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계속해서 많은 것을 체험하며, 요해하며 표현하는 작용을 반복해간다. 그러는 동안에 삶의 내용은 더욱 풍부해지며, 새로운 정신적 유산을 창조해간다. 그것을 우리는 문화라고 부른다. 그러면 이 삶의 기능과 활동을 주관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남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삶 자체의 자기 해석에서 우러나올 뿐이다. 삶은 모든 것을 창조해내는 주체적인 것이다. 사람은 제각기 다른 내용의 삶을 살게 되어 있으며, 각자는 자신의 삶과 세계관을 갖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의미의 철학인 것이다. 오직 철학자들은 그것을 이론적으로 체계화시켜 보며, 예술가들은 상징적으로 표현하게 되며, 종교가들은 교훈적인 내용으로 밝혀줄 뿐이다. 이렇게 되어서 딜타이의 철학은 해석학이라는 하나의 정신과학으로서의 철학의 방법론을 제시해준다. 지금도 많은 철학자들이 해석학이나 해석학적 방법을 연구하면서 뒤따르는 것은 딜타이로부터 받은 영향때문인 것이다. 다른 철학자들도 삶의 철학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는 설명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딜타이를 하나의 모범으로 보는 것은 그에 의하여 세계관으로서의 철학과 해석학이 전개되었고, 많은 후계자들이 그 뒤를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니체나 딜타이 못지않게 영향력이 큰 또 한사람의 삶의 철학자를 얘기한다. 프랑스의 H. 베르그송이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니체나 딜타이와는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삶의 철학을 개척한 사람으로, 그 성격과 내용에는 적지 않은 차이점이 있어 따로 언급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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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
'양말'의 ‘말’은 한자의 '버선 말'자...여기에 '서양 양'이 붙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고 다니는 '양말'이 한자에서 온 말이라고 하면 깜짝 놀라시겠지요.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한자어입니다. 원래 버선을 한자로 '말'이라고 했습니다. '버선 말'자이지요. 그런데 서양에서 이 버선과 비슷한 것이 들어 오니까 버선을 뜻하는 '말'에 '양' 자를 붙여서 '양말'이라고 했습니다. 버선하고 양말이 이렇게 해서 달라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서양에서 들어 왔다고 해서 '양' 자를 붙이거나 '서양'을 붙여 만든 단어들이 꽤나 있습니다. 그 예가 무척 많음에 놀라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 뜻도 잘 모르게 변한 것들도 많습니다. 몇 가지를 예를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1.'양철'(또는 '생철') 양철도 '철'에 '양' 자가 붙어서 된 말입니다. 쇠는 쇠인데, 원래 우리가 쓰던 쇠와는 다른 것이 들어 오니까 '철'에 '양'자만 붙인 것이지요. 더 재미있는 것은 이 '철'에 '서양'이 붙어서 '서양철'이 되고, 이것이 다시 변화되어서 오늘날에는 그냥 '생철'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2. 양동이 국어에 '동이'라고 하는 것은 물긷는 데 쓰이는 질그릇의 하나인데, 서양에서 비슷한 것이 들어 오니까 여기에 '양'자를 붙여 '양동이'라는 단어를 만든 것입니다.
3. 양순대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 말인데, 서양에서 '소시지'가 들어 오니까 '순대'에다가 '양'자를 붙여 '양순대'라고 했는데, 이것을 쓰지 않고 '소시지'라고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되살려 쓰고 싶은 단어입니다. 중국의 우리 동포는 이 '소시지'를 '고기순대'라고 하더군요. 너무 잘 지은 이름이 아닌가요?
4. 양은 양은은 '구리, 아연, 니켈을 합금하여 만든 쇠'인데, 그색깔이 '은'과 유사하니까 '은'에 '양'자를 붙여 '양은'이라고 한 것입니다.
5. 양재기 '양재기'는 원래 '서양 도자기'라는 뜻입니다. 즉 '자기'에 '양'자가 붙어서 '양자기'가 된 것인데, 여기에 '아비'를 '애비'라고 하듯 '이' 모음 역행동화가 이루어져 '양재기'가 된 것입니다.
6. 양회 이 말도 앞의 '양순대'와 같이 거의 쓰이지 않는 말입니다만,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세멘트'를 '양회'라고 했습니다. '회'는 회인데 서양에서 들여 온 회라는 뜻이지요. 이 말도 다시 썼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7. 양행 이 말도 오늘날에는 쓰이지 않는 말이지요. 서양에 다닌다는 뜻으로 '다닐 행'자를 붙인 것인데, 이것이 무역회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유한양행'이라는 회사가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이지요.
이 이외에 '양'자가 붙어서 만든 단어들을 몇 가지 더 들어 보겠습니다. 양복, 양장, 양궁, 양단, 양담배, 양란, 양배추, 양버들, 양식, 양옥, 양장, 양잿물, 양주, 양초, 양코, 양파, 양화점 등.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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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사회/문화/인물 |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6장 예술, 그 광기와 죽음
검은 그림자의 예감 - 에드가 알란 포우 / 보드레르
우울한 생애, 괴기스러운 영혼 - 에드가 알란 포우
내가 포우를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 그의 단편소설인 <검은 고양이>를 통해서였다. 그 괴기스러우면서도 짜릿했던 전율, 소설을 읽고 난 뒤의 느낌이 바로 그대로 에드가 알란 포우의 인상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세기 문단의 귀재 에드가 알란 포우는 미국 보스턴에서 순회 극단의 가난한 배우이던 양친에게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의 풍부한 상상적 기질도 그런 부모한테 물려받은 게 아닐까 하는 추측들도 하고 있다. 몸은 가냘프기 짝이 없었고 성격은 호방불손하며, 사람들과 잘 사귀지 못했다고 한다. 두어살 때 어버이를 잃고 어린 나이에 그는 천애고아가 되었다. 담배장사를 하는 숙부의 집에서 자라기도 했으며, 양부모를 따라 영국에 갔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버지니아대학에 입학을 하였다. 그러나 학업에는 열의가 없었고 노름에 빠져 많은 빚만 지고 귀향을 하게 된다. 사관학교에 들어가서도 심한 도박과 음주때문에 학교를 쫓겨나게 된다. 그 이후 웨스트 포인트에 들어갔으나 역시 퇴교당하고 방랑과 무질서한 생활, 술과 도박으로 밤을 지샜는데 이러한 방종한 생활이 오히려 그의 시에 어떤 독톡한 침통함마저 자아내게 한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19세에 <티므르 및 그 밖의 시>란 처녀시집을 내었을 때 비범함을 인정받았으며 21세 때 제2시집을 출간하였다. 1833년 발티모어의 잡지에 단편소설이 당선되어 이것을 계기로 잡지 편집자가 되었고 계속 단편을 발표하여 문명을 날렸다. 1836년 포우가 스물일곱 살 때였다. 열네 살 난 소녀, 버지니아 크램을 사랑하여 그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둘은 사람하면서도 행복한 날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포우의 음주벽은 갈수록 심해지고 잡지사를 그만 두게 되니 생계가 말이 아니었다. 거기다 불손하고 방종한 그의 성격이 가세하여 일정한 직업, 일정한 주거를 갖지 못하고 이곳 저곳으로 떠돌아 다니기만 했다. 그래도 작품만은 꾸준히 쓰고 있었다. 35세 때 그의 시 중 가장 걸작이라 일컫는 <까마귀>를 발표하여 명성을 얻었고, <브로드웨이 저널>의 편집 및 발행인이 되어 오랜 소망을 이루었으나 재정난으로 곧 문을 닫아야 했다. 1847년에는 헌신적이었던 그의 아내 버지니아가 극심한 가난 속에서 병을 얻어 죽고 만다. 아내에 대한 추억은 그의 작품 <유래카>속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아내를 잃은 뒤 술과 마약 때문에 뇌 손상을 입기도 했으나 문학적 재질은 오히려 빛을 발하고 창작 의욕은 꺼지지 않았다. 이때 <애너벨 리>를 발표하였다. 그때 포우는 자신의 견딜 수 없는 병적상태를 이렇게 쓴 바 있다.
내가 네게 작별을 고할 때 가졌던 슬픔의 고뇌를 너는 봤고, 너는 느꼈다. 그때의 그 우울한 내 표정을 너는 기억할 것이다. 재앙을 예견하는 그 무섭고 끔찍한 표정, 그때 나는 진정으로, 진정으로 느꼈다. 심지어 그때에도 이미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그를 앞서간 그림자에 내가 연류되어 있음을, 아무것도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는 침대로 가서 길고 긴 끔찍한 절망의 밤 내내 울었다. 날이 새자 일어나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쌀쌀하고 맑은 공기를 쐬며 빠른 걸음으로 주변을 산책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악마가 나를 여전히 괴롭혔다. 마침내 나는 아편팅크 7그램 정도를 입수했다 나는 너무 심한 병에 걸려있다. 몸과 마음이 너무 지독하게 병들어 있어 내가 이 무시무시한 흥분을 가라앉히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다.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내 목숨이 끊어지거나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미쳐 버리고 말 것이다.
그는 죽기 1년 전에도 많은 작품을 발표하여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러다가 아내가 죽은 지 2년째가 되는 1849년 어느 가을 날, 심한 음주 탓인가 정신착란을 일으켰다. 정치 브로커들에게 공술을 얻어먹고 술에 취해 볼티모어의 거리에서 쓰러졌다. 행인들에 의해 그는 인근 병원으로 옮겨 졌다. 3일만에야 겨우 정신이 들었다. 머리에 총 한방을 쏘아주면 좋겠다고 그는 말했다. 오, 하느님! 우리가 보는 것이 한낱 꿈속의 꿈입니까? 꿈속의 꿈처럼 보이는 것입니까? 귀찮은 듯 그는 다시 눈을 뜨지 않았다. 에드가 알란 포우의 가문은 불행하고 단명하였다. 문학적 자질이 있었던 그의 형인 윌리엄도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선원생활 중 동료와 싸워 26세에 사망하였고, 누이동생 로자리는 비정상인이어서 워싱톤의 보호소에서 불우한 일생을 마쳤다. 포우는 2살에 어버이를 잃고 양모는 20세에, 양부는 25세에 잃고 만다. 그의 아내 버지니아크램은 38세에, 그리고 포우 자신은 이 세상을 40세에 총총히 떠났다. 그는 바쁘게 떠나면서 작품 쓰는 일 또한 바쁘게 하였으니 <까마귀>나 <종소리>등 주옥 같은 시 이외에도 60여 편의 단편을 더 남겼다. <어셔가의 몰락> <황금충> <검은 고양이> <붉은 죽음의 탈> 등의 작품이 있다. 그는 미를 창조하는 데에다 문학의 목적을 두었고, 시에 있어서는 음악성을 대단히 중시하였다. 그의 시가 갖는 암울한 분위기와 우수 그리고 소설에서는 우울한 분위기와 괴기스런 이야기들을 즐겨 다루었다. 아마도 그것은 작가 자신의 취향과 심적나상을 반영한 것이리라.
내 넋을 금이 갔네 - 보드레르
보드레르는 질병, 가난, 고독 속에서 불행하였으나 그는 위대한 시인이었다. 1821년 파리에서 태어난 그는 여섯 살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35세)마저 다음 해에 서둘러 재혼을 해버리니 어린 마음에는 상처가 깊었다. 열한 살 밖에 안된 그를 의부는 리옹의 기숙사에 집어넣었다. 16세에 벌써 보드레르는 라틴시 콩쿨에서 2등을 하는 재능을 보였으나 18세에는 퇴학처분을 받았고 이미 매독에 걸려 있었다. 사팔뜨기 창녀 사라와 어울리며 방종한 생활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회의를 거쳐 식구들은 그에게 여행을 권했는데 이번에는 보르도 섬에서 쟌느 뒤발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14년 간을 동거와 별거를 되풀이 하며 그녀를 애증과 저주의 대상으로 혹은 사디즘과 매저키즘의 대상으로 하여 그는 이 검은 비너스 를 자신의 시집<악 꽃>에 자주 등장시키곤 했다. 그는 오직 쟌느에게서만 휴식을 얻을 수 있었다고 고백하였는데 아마 흑백 혼혈녀한테서만 마음놓고 상대할 수 있는 어떤 편안함이 그녀에게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남들에게 무익하니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위험하니까 자살한다. 는 유서를 쓰고 쟌느와 함께 카바레에서 자살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 무렵 보드레르는 미술 평론가로 에세이스트로 시인으로 문단에 화려하게 데뷔한다. 34세에 <악의 꽃>을 발표하였고 매독이 재발되던 40세에는 <악의 꽃>의 재판과 43세에 산문시집<파리의 우울>을 발표했다. 그리고 44세에 에드가 알란 포우의 시집 제4권을 간행하였다. 이때부터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나이 45세이던 2월 10일 어제 데생전시회를 보러 갔어요. 그러나 몇 분이 지나자 제가 무엇인가에 주의를 집중하게 될 때에 그렇듯이 어떤 나쁜 징조가 닥쳐올 듯이 느껴졌어요. 침대에 누워서 이런 생각을 자주 했답니다. 이러다가 졸도나 중풍이 닥쳐오면 난 어떡하지? 그로부터 한 달 뒤 성당안에서 내부 장식을 감상하다가 실제로 그는 졸도하였고 중풍이 일어났던 것이다. 우측 팔다리의 반신불수 증세가 나타났다. 보드레르는 어머니에게 최후의 구술 편지를 보냈다. 아! 어머니, 아직 행복해질 시간이 있을까요? 4월 9일 그는 완전히 실어증에 빠졌다. 보드레르의 어머니는 자신의 마비된 다리를 이끌고 아들의 간호를 위해 부뤼셀에 달려왔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인도되어 그렇게도 오고싶어 했던 파리로 돌아왔으나 그곳은 정신과 요양원이었다. 입원을 한 7월 4일부터 그가 죽는 8월 31일까지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침대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마지막 얼마동안은 너무 오래 침대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생긴 상처로 혹독하게 고통을 겪었지요. 그래서 그를 움직여야 할 때는 가끔 아파서 고함을 지르곤 했어요. 그렇지만 임종이 가까워 지면서부터 체념을 하고 무척 온화했었지요. 임종 전의 이틀 낮과 밤은 아주 조용했어요. 그는 두 눈을 뜬 채 잠자는 듯 했지요. 임종의 고통도 없이 아주 조용히 숨을 거두었어요.(생략) 임종을 지켜본 그의 어머니가 아들의 친구 말라시스에게 적어보낸 글월이다. 보드레르는 오전 11시. 어머니의 팔에 안겨 숨을 거두었다. 시우 고티에의 말대로 섬세하고, 예리하며, 독특하고 다정스런 금이 간 영혼 보드레르는 졸도, 중풍, 실어증으로 비참한 46세의 생애를 마감하였다. 너무나도 짧은 우리들의 여름, 그 발랄한 광명이여! 그의 시구를 떠오르게 하는 짧은 생애였다. 그가 몽파르나스 묘지에 묻히던 날은 생드뵈브, 아슬리노, 마네, 뽀올베르렌느 등 60여명의 친구들이 자리를 함께 하였다. 보드레르는 에드가 알란 포우에게 매우 심취해 있었다. 그의 작품들을 번역하면서 어머니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무척 이상한 일, 제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일, 그것은 저 자신의 시와 그 사람(포우)의 시 사이의 내밀한 유사성, 그 불가사의한 일치에 얼마나 충격이 컸던지요. 스물 다섯 살때부터 그는 포우의 모르그가의 살인 , 검은 고양이 를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52년 3월 4일에는 포우의 생애와 작품 이란 글을 써서 발표하였다. 보드레르는 자기의 성격과 반사회적인 생활조건, 취향, 그리고 미학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까지 포우와의 일치를 발견하고는 몹시 흥분했다고 전한다. 그의 친구 아슬리노도 보드레르의 생애 란 글에서 그가 포우의 작품을 접할 때부터 열중과 찬탄을 금치 못했으며 포우의 예술과 사상, 미학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밝혀 두었다.
두 사람의 작품 제목을 비교해 보아도 재미있다. 검은 고양이와 검은 비너스. 어셔가의 몰락과 모르그가의 살인, 죽음의 항해와 파리의 우울. 하나 같이 검고 어둡고 우울한 악의 요소, 살인과 죽음과 몰락뿐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 모두 방종한 생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시작에 있어서만은 특이하게 구두점 하나까지도 완벽함을 추구하는 까다로움을 보였다. 인생을 사십대(40세, 46세)에서 불행하게 끝낸 점도 비슷하지만 시인으로서의 사명감과 자부심, 거기에 상응하는 노력과 긍지도 실로 대단하였으니 그들은 진짜 시인이었다. 지금쯤 지하의 어느 밀실에서 어쩌면 그들은 검은 잔으로 대작을 할지도 모르겠다는 어이없는 생각에 괜스레 나는 혼자 즐거워지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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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36. 좌파, 우파라는 말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현대 정치에서 `좌파`라는 말은 급진파 또는 진보파와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으며 `우파`라는 말은 보수파 등과 마찬가지로 통용되고 있다. 이 좌파, 우파라는 말이 이런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프랑스 혁명을 통해서였다.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을 도화선으로 프랑스 혁명은 불붙기 시작했다. 이 사건이 있기 2개월 전쯤에 소집된 신분제 의회인 삼부회는 스스로를 제헌 의회로 선언하고 새로운 국가 건설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8월 26일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하여 민주주의를 근본으로 삼는 국가 건설의 토대를 마련했다. 하지만 국왕을 폐위시키지는 않았으며 1791년 제정된 헌법에서도 국왕의 지위는 인정되었다. 만약 루이 16세가 이 헌법하에서의 입헌 군주라는 지위에 만족했다면 프랑스 혁명의 진로는 바뀌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절대 군주의 지위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루이 16세에게 입헌군주란 참을 수 없는 허수아비와 같은 자리였다. 그리하여 그는 외국의 도움을 받으려 했으며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의 친정인 오스트리아 황실은 그러한 루이의 요청에 응하려 했다. 루이 16세는 몰래 파리를 탈출하여 오스트리아로 가려 했다. 그러나 1792년 변장을 한 채 가족을 파리를 빠져 나간 루이 16세는 도중에 어느 마을 사람들에게 들켜 파리로 되돌아오고 만다 (바렌느 Varennes 사건). 국왕의 배신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하지만 국왕이 문제가 아니라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의 간섭 전쟁이 프랑스 국민들에게 닥쳤다. 전쟁이 시작되자 준비가 거의 없었던 프랑스 군대는 잇달아 패배했다. 그러나 `조국이 위기에 처했다`는 입법 의회의 선언에 호응하여 전국에서 의용군이 속속 파리로 몰려들었다. 민중들은 반혁명군의 계속되는 승리 뒤에는 내부의 적이 있다고 생각하고 국왕을 체포하려고 마음 먹었다. 1792년 8월 10일 파리의 혁명적 군중과 의용군들은 왕궁으로 쳐들어가 루이 16세와 왕비를 붙잡았고, 의회는 왕권의 정지를 선언했다. 이 사이에 프로이센 군대는 국경을 넘었고 9월 파리에서 200킬로미터 떨어진 발미까지 육박했다. 조국을 지키려는 의용군들은 이 발미 전투(9. 20)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고 승리했다. 그리고 바로 이 날 입법 의회 대신 국민 공회가 소집되었다. 이 국민 공회는 왕권의 폐지를 선언하고 공화정을 선포했다. 당시 국민 공회는 크게 두 파로 갈라져 있었다. 지롱드 파와 쟈코뱅 파가 그것이며 거기에 더해 중간에 유동적인 중도파들이 있었다. 그런데 국민 공회 회의에서 지롱드 파는 오른쪽에 있는 좌석에 앉았고 쟈코뱅 파는 왼쪽에 앉았다. 따라서 그들을 각각 우파, 좌파라고 부르기도 했다. 둘 다 공화주의자들이었으나 지롱드 파는 부유한 부르주아지를 대변했고 지방분권과 경제적 자유주의를 주장했다. 한편 쟈코뱅 파는 부르주아 출신이기는 했지만 소시민층과 민중을 지지 기반으로 삼았으며 강력한 중앙집권을 주장했다. 또한 이들은 복지와 혁명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는 통제경제도 불사해야 한다는 철저한 민주주의자들이었다. 이렇게 정치적 목표를 달리 하는 두 정파는 국왕 처리 문제로 대결로 치달았다. 이 문제에 관해 지롱드 파는 가능하면 국왕을 재판에 회부하지 않으려고 했으며 최소한 사형은 면하게 하려고 했다. 국민 공회는 1792년 12월 11일 국왕에 대한 재판을 시작했다. 모든 의원들이 국왕이 유죄라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사형에 처하는 것을 반대하는 의원들은 적지 않았다. 물론 로베스피에르를 필두로 하는 쟈코뱅 파는 혁명의 안전을 위해 조국과 국민을 배반한 국왕을 처형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1793년 1월 16일 사형이 결정되었다. 표결 결과는 사형 찬성 387표, 반대 334표였다. 1월 21일 루이 16세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왕비도 같은 길을 걸었다. 하지만 그것은 `조그만 섬에 도착하여 타고 온 배를 불지른` 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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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제2장 살아나는 용의 혼
6. 거절당해도 손해볼 것 없다
중국이 가트에 복귀신청을 한 기간은 국제기구 역사상 가장 긴 시간을 끈 경우일 것이다. 중국은 1989년 초 이미 가트 복귀에 필요한 요구사항을 실천하였다. 당시 이 조직에서도 중국을 복귀시키는 데 필요한 최후협정서 준비에 착수하였으나 미국측의 방해로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1948년 초에 중화민국 정부대표는 아주 중요하지만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어떤 문건에 서명해 버렸다. 이 문건이 바로 80년대 말에야 중국의 모든 국민이 알게 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포괄협정(GATT) '이었던 것이다. 이 문건을 기초로 만들어진 가트는 이후 근 반세기 동안의 변화를 거치면서 갈수록 그 중요성이 더해 가고 있다. 80년대에 접어들면서 세계경제는 '지역화'라는 추세로 변모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이미 경제일체화를 달성하여 회원국들 사이의 관세와 출입국에 따르는 각종 제한을 철폐하였고, 심지어는 공통화폐를 발행할 계획까지 세우고있다. 북미에서는 북미자유무역구(NAFTA)가 성립되어 캐나다, 미국, 멕시코 3국간의 무역장벽을 없애고, 3국을 직접 연결하는 도로를 건설하여 인적, 물적 자원이 이 지역 내에서 자유롭게 유통되도록 하였다. 아시아에서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기구(APEC)가 점점 중요한 활약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 조직은 성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회원국 간에 무역자유화문제에서 이견이 있긴 하지만 아시아 지역의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그 중요성이 재인식되어 아르헨티나와 같은 먼 남미의 국가들도 태평양 연안국가임을 자처하며 가입하려 하고 있을 정도이다. 이 3개 조직은 경제력이 가장 막강한 지역으로 회원국 상호 간의 편의를 제공하고 공동체 이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배척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개혁개방을 한 지 10년이 지난 중국은, 한편으로는 호혜의 원칙을 고수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상호 배척하는 세계적 경제구도에 직면하고 있다. 몇 년 전에 일부 학자들은 중국의 개혁개방에 대해 회의적으로 우려한 적이 있었다. 중국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상황은 '아시아의 네 마리용'이 한창 경제발전을 이룩하던 시기와는 다르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당시 국제 경제환경은 수출에 아주 유리하여 미국과 같은 주요 수입국이 수입 물품에 대해 지금처럼 경계하지도 않았고 특정 국가의 수입품에 대해 지금처럼 '반덤핑 조사' 같은 것을 하려 들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이 '네 마리 용'이 겪은 당시의 수출증대 경험을 모방하려해도 결코 순조롭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전문가들의 이러한 우려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선진국이 무역자유화를 부르짖는 것은 경제공동체의 국가 간에 관세상의 특혜를 주자는 것이고 '나와 다른 부류'들로부터 수입되는 상품에 대해서는 '반덤핑' 의 깃대를 마음대로 흔들어보자는 의미가 깔려 있다.
1년 전 중국의 어느 기업이 미국에서 온 반덤핑조사단의 조사를 받자 과감하게 미국 법정에 소송을 제기한 사건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 기업은 승리하였고 원래 응징의 성격을 지녔던 관세율도 대폭 내려 갔다. 이는 중국의 수출기업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에가 자신을 위한 싸움에 성공한 것이어서 국내 언론계가 대대적으로 보도하게 된 것이다. 사실 중국 기업으로 외국의 '반덤핑조사'를 받은 회사는 한두 개가 아니다. 중국 수출상품 중 200여 종류가 외국의 제한적 조치를 받았었다. 1994년 유럽연합이 중국의 신발에 대해 '반덤핑조사'를 하겠다고 선포했었다. 이 신발의 가격은 대략 4억 달러였으며 1천여 국내 기업이 여기에 관련되었다. 1995년 미국은 2억 달러 상당의 중국산 자전거에 대해 같은 조사를 벌이겠다고 선포하였고 이에 관련된 기업은 100 개나 되었다. 이렇게 되자 1995년 중국 정부와 미국은 협상을 하여 중국의 꿀 수출량을 연 1만 9천 톤 이내로 제한하고,이후 매년 미국시장의 수출 증가율을 6퍼센트 이내로 제한하는 데 동의하였다. 어느 국가`할 것 없이 국내공업이 외국으로부터 위험에 처하면 자신의 민족산업을 보호하는 조치를 내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중국 국민경제는 대외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앞으로도 수출증대를 위한 노력을 계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중국은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방직물을 생산하는 나라다. 중국이 전세계인의 옷을 입힌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1993년 중국의 방직물 수출액은 2백70억 달러에 달했으나 88억 달러의 방직원료와 기계를 수입해야만 했다. 2백70억 달러의 방직물 수출을 위해 88억 달러의 대가를 치러야 했던 것이다. 1994년 중국 국민총생산액은 4조3천억 원(元)이었으며 같은 해 수출입 총액은 2천3백67억 닿러였다. 이 둘을 비교해 보면 중국의 국제의존도가 약 4=퍼센트에 이름을 알 수 있다. 1979년 국제의존도는 8퍼센트정도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10년 동안 진행된 중국의 개혁개방정도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도 이제는 전세계의 여러 나라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나타낸다. 중국인들이 살고 있는 이세상에는 유럽연합과 북미자유무역지역 및 자유시장동맹 같은 자유무역 지역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에게 이런 지역의 무역자유를 누릴 인연이 없다. 그러므로 세계 여러 나라들과 자유로운 무역이 가능한 가트에 복귀하는 것만이 국제적 생존공간을 확대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되게 된 것이다. 1986년 7월 11일 중국 정부는 가트에 정식으로 복귀신청서를 제출하였다.신청서를 제출할 때 중국 정부는 3가지 원칙을 밝혔다. 첫째 중국은 복귀하는 것이지 신규로 가입하는 것이 아니다. 복귀와 신 규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1950년 3월의 협정에는 개발도상국에 대한 일련의 우혜정책을 제정하고 있었고 중넌으로서는 이 우헤정책의 혜택을 받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미국의 반대에 부딪혔다. 미국대표는 중국이 복귀하는 데는 경제적인 것과 법률적인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고 하였다. 법률적인 면으로는 협정의 어느 조항에도 탈퇴 후 다시 복귀할 수 있다는 규정이 없고, 중국이 복귀할 경우 하나의 선례를 남기게 된다는 것이다. 경제적인 측면으로서는 중국이 1950년 당시의 우혜조건 혜택을 받고자 하지만 중국은 이제껏 이 조직의 의무를 이행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만일 중국에게 복귀의 기회를 준다면 '의무이행 후 권리를 누린다'는 원칙을 깨는 것이 된다고 하였다. 중국의 두 번째 원칙은 수입관세율을 점차 내린다는 것이다. 복귀의 주요조건은 중국이 수입관세율을 인하한다는 것인데. 미국과 다른 국가들이 요구하는 구체적인 협상조건은 지나치게 과도한 것이었다. 중국의 세 번째 원칙은 개발도상국의 신분으로 복귀한다는 것이다. 중국이 현재 개발도상국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이 문제가 바로 중국과 미국의 가장 격렬한 논점이 되고 있는 것이다. 1995년 3월 미국의 무역협상 대표인 캔트가 '중 미 지적재산권보호협정'을 체결하려 북경에 왔을 때 그는 필자에게 미국인들이 중국을 개발도상국으로 볼 수 없다고 내세우는 이유를 말해 주었다.그가 열거한 4가지 지표는 세계은행 백서에서 나온 것이었다. 먼저 중국의 1994년 국민총생산액은 만 3천억 원으로 이 숫자는 세계 2위인 것이다. 두 번째 지표는 중국의 외화보유액이 이미 세계 5위라는 것이다.세 번째는 중국의 수출 규모가 1994년 1천2백15억 달러에 이르렀으며 이는 세계 10위에 달한다는 것이다. 네 번째는 1인당 국민생산총액이 4천여 달러에 달한다는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계산방법과 다른 '구매력 평가' 법칙에 따른 것이며, 이상과 같은 이유에서 볼 때 미국은 중국을 개발도상국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의 주장이 정확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들은 3가지 예를 들어 중국의 종합적인 국력을 설명하였다. 세계의 어떤 개발도상국도 선진국만이 할 수 있는 위성을 발사한 나라는 없으며, 어떤 개발도상국의 수도도 베이징과 같이 현대화된 곳은 없고, 어떤 개발도상국도 올림픽 개최신청에서 중국보다 높은 점수를 받은 나라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중국은 선진국의 자격으로 신규가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1987년부터 1994년 1=월까지 중국은 모두 40여 개 국가의 대표들과 제네바에서 19차례의 협상을 벌였다,유럽의 기본적인 자세는 미국과 같았다. 이런 협상은 진행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 1994년 8월 대외경제무역부 부장 보좌관인 롱용투(龍永圖)는 제네바에서 제18차 협상에 참여하기 전, 만일 연내에 협상이 마무리되지 않으면 중국은 앞으로 협상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신규가입신청서도 내지 않을 것이라는 최후 결정사항을 공포하였다. 중국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만일 이 기한 내에 협상을 마무리짓지 못하면 1995년 1월 1일부터 가트를 대체하여 조직될 세계무역기구의 창립 회원국이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1994년 12월 가트의 중국관계책임자 길라드의 요청으로 중국대표는 다시 제네바에서 제19차 협상을 열었다. 그러나 19차 협상도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결렬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모두 중국의 기본 이익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쉽게 양보할 수 없는 사항들이었다. 그 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관세인하문제이다. 중국은 고관세 국가로 6만여 종의 수입품에 대해 관세가 부과되고 수입관세는 평균 65퍼씬트 정도였다. 중국은 3년내에 이를 35퍼센트 이내로 내리겠다고 하였다.그러나 일본과 오스트레일리아의 요구는 이보다 더욱 높았다. 둘째, 비관세문제이다. 이는 주로 수입할당제, 수입허가제 등의 수입제한조치를 말하는 것으로 비록 자유무역의 원칙에는 부합되지 않으나 중국이 자국의 민족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이 조치를 단번에 취소할 수 없는 일이다. 중국의 방안은 주요수입품에 대한 제한조치는 계속 유지하되,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4년 내에 취소한다는 것이었다.그러나 미국은 중국이 보류하고자 하는 수입제한조치를 당장 취소하라는 것이다. 셋째, 시장개방문제이다. 미국은 중국에 대해 잠재된 시장이 크고 이윤이 많은 보험, 은행, 유통업 및 여행업 등의 서비스업에 큰 흥미를 가져왔었고 따라서 미국 기업이 이 업종에 진출하는 데 우선권을 줄 것을 요구하였다. 넷째,투자정책문제이다.중국은 공동 투자기업의 생산품에 대해 일정한 국산화 비율을 요구했었다. 예를 들면 싼타나자동차의 국산화율이 현재 90퍼센트 이상이 된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주로 민족산업의 보호육성을 위한 것으로, 이밖에도 공동 투자기업은 외환의 입출이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하며 생산품의 일정비을 이상을 국제시장으로 수출해야 한다는 등의 조건이 있었다. 이와 같은 공동 투자기업에 대한 요구는 개발도상국가에서는 보편적으로 시행하는 것이다. 세계무역기구는 선진국은3년 내에.개발도상국은 5년 내에 이런 조항을 철폐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그러나 미국은 2년 내에 이러한 조항을 철폐하라고 요구하여 중국의 복귀를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다섯째, 선진국 자격으로 복귀할 것인가 아니면 개발도상국 자격으로 복귀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19차 협상도 결국 실패하고 말았으나, 이는 결코 중국이 세계를 향해 스스로의 대문을 걸어잠근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1996년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기구 영수회담이 일본 오사까에서 열렸다. 중국 국가주석 장쩌민은 이 회의에서,중국은 1996년 4월 1일부터 수입관세율을 평균 23퍼센트 수준으로 대폭 인하한다는 내용의 의외의 결정을 선포하였다. 1996년 4월 1일부터 이 결정은 시행되었으며 이와 관련된 상품은 5천여 종에 달했다.
중국이 가트에 복귀하기 위해 걸어온 협상의 길은 험난하고도 멀었다. 중국은 지금까지도 이 협상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 이 협상과정에서 미국은 극도의 모순된 태도를 보여 주었다. 한편으로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에서 더 많은 이익을 얻으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의 경제력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자꾸만 감소하기 때문에 중국의 경제력에 많은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복귀는 의심할 것도 없이 국제시장에서 더 큰 생존공간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미국의 '슈퍼301조'와 같은 일방적인 무역제재조치나 중국에 부여한 최혜국대우 등은 세계무역기구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쉽게 시행하거나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 미국이 내놓을 수 있는 카드는 별로 없다. 그래서 지금 내놓을 수 있는 카드로 최대한의 이익을 얻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중국이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절대로 가볍게 양보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민족의 이익과 관련된 문제 역시 쉽게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무역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며 한 국가가 다른 국가에게 베푸는 은혜도 아니다. 미국도 중국상품에 대해 보복을 가하고 응징성 관세를 징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여전히 거대한 시장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이 모두 미국과 같이 행동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미국의 무역대표 캔트가 중국상품에 대해 고액의 관세를 징수하겠다고 선포한 날, 중국은 겨우 2시간 차이로 이에 필적할 리스트를 발표할 수있었다. 무역이 아무리 자유화한다 해도 국제무역은 주권국가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이다. 1994년 12월 중국의 가트복귀협상이 결렬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프랑스의 빠마통원자력회사가 중국 정부로부터 꽝똥(廣東)따야완(大亞潛) 핵발전소의 제2기 공사를 따내고 있을 때 미국회사의 총수들은 시기심과 실망이 가득찬 심정으로 이를 지켜봐야만 했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미국의 보잉항공사가 아마 가장 확실하게 알 것이다. 중국민항은 과거 10여 년 간 보잉항공사로부터 167대의 비행기를 구입하였다. 보잉항공사측의 계산에 의하면 이후 13년 간 중국 국내 승객수는 매년 22퍼센트 증가할 것이라고 하니 중국은 앞으로 800대의 비행기를 구입해야 한다. 이 시장의 잠재력과 이익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미국 3대 자동차회사 중 크라이슬러자동차만이 현재 베이징에서 공동투자로 지프를 생산하고 있으며 독일의 폴크스바겐과 프랑스의 뿌조 및 씨트로엥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만일 미국이 계속해서 중국의 골치를 아프게 한다면 중국은 미국 회사들에 대해 문을 굳게 닫아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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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녹지 않는 눈사람
꽃샘바람이 부는 이른 봄날 아침, 하늘나라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함박눈이 하늘나라에 사는 모든 흰눈들을 불러 모았다. 첫눈, 봄눈, 싸락눈, 풋눈, 밤눈, 가랑눈, 진눈깨비 등 하늘나라에 사는 눈이란 눈은 모두 함박눈한테 모여들었다. "자 다들 이리로 가까이 오시오." 함박눈이 허옇게 길게 자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잠시 헛기침을 하다가 말을 이었다. "오늘 내가 모두 모이라고 한 것은 황급히 의논할 일이 있기 때문이오, 올 겨울에 우리들이 다들 바빠 땅의 나라에 내려가지 못한 탓으로, 지금 땅의 나라에서는 가뭄이 들어 난리가 났소. 몇십 년만의 겨울 가뭄이라고 하면서 땅의 나라 사람들이 목말라 야단들이오. 이걸 어떡하면 좋을지 다들 좋은 의견이 있으면 한번 말들 해 보시오." 함박눈이 다시 헛기침을 한번하고 말을 마치자 흰눈들은 일단 안심하는 표정들을 지었다. 그들은 하늘나라에 무슨 큰 변고하고 난 줄 알고 속으로 무척 걱정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우리가 땅의 나라를 잊고 지낸 것이 잘못입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다들 땅의 나라로 내려가는 게 좋겠습니다." 해마다 가장 먼저 땅에 다녀오는 일을 큰 자랑거리로 삼고 있는 첫눈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말을 했다. "올해 들어 땅의 나라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고 불만을 터뜨리는 눈들도 많습니다. 더 늦기 전에 땅의 나라에 한번 다녀오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번에는 싸락눈이 온몸을 서걱거리면서 첫눈의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지금 땅의 나라에 한번 다녀오도록 합시다." 흰눈들은 모두 지금 당장이라도 땅의 나라로 내려가자고 입을 모았다. 그러자 함박눈은 흰 수염을 다시 한번 쓰윽 쓰다듬으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땅의 나라에서는 가뭄이 무척 심하다. 하늘나라에 사는 모든 눈들은 지금 당장 땅의 나라로 내려가도록 하라." 이 말을 듣고 가장 기뻐한 눈은 봄눈 형제였다. 연년생으로 태어난 그들 형제는 아직 단 한번도 땅의 나라에 가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땅의 나라에 한번 가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봄눈 형제는 어머니한테 인사를 하자마자 서둘러 땅의 나라를 향해 길을 떠났다. "형, 난 지금 기뻐. 콧노래가 저절로 나와. 땅의 나라는 어떻게 생겼을까? 우리 나라보다 더 넓을까?" "글쎄,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우리 나라보다는 더 작겠지." 봄눈 형제는 서둘러 도착한 곳은 한국이라는 작은 땅의 나라였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한국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가운데 허리 부분이 철조망으로 둘러 처져 있었다. "형 저게 뭐야? 왜 남북으로 저렇게 갈라져 있을까?" 봄눈 형제는 서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강한 회오리바람이 불어와 다정히 손을 잡고 있던 봄눈 형제를 갈라놓았다. "어, 어, 형! 혀엉!" 형의 손을 놓쳐 버린 동생이 바람을 타고 내려앉은 곳은 철조망 위쪽 땅인 북한 땅이었다. 동생의 손을 놓쳐 버린 형이 내린 곳은 철조망 아래쪽 땅인 남한 땅이었다. 봄눈 형제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휴전선이 그어진 남북으로 그만 서로 헤어져 버리고 만 것이다. 한국에 사는 사람들은 눈이 내렸다고 좋아서 다들 야단들이었다. 몇 십년 만의 겨울 가뭄에서 당장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고 더덩실 춤을 추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것은 남한 사람들이나 북한 사람들이나 다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사람들의 그런 마음과는 달리 동생 봄눈은 휴전선 너머 남녘 땅에 내린 형이 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다. 형 봄눈도 휴전선 너머 북녘 땅에 내린 동생이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봄눈 형제들이 서로의 소식을 나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형이 보고 싶어 울다가 잠이 든 동생은 누가 자꾸 툭툭 몸을 건드려 깨어나 보니 아이들이 자기의 몸을 굴려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남녘 땅에 있는 형도 밤새워 동생을 생각하다가 잠이 든 뒤 깨어나 보니 아이들이 자기의 몸을 이리저리 굴리며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애들아, 왜 이래? 왜들 이러는 거야?" "가만 있어. 우리가 널 눈사람으로 만드는 거야." "눈사람이 되면 형을 만날 수 있어?" "그럼, 만날 수 있고 말고." "눈사람이 되면 동생을 만날 수 있어?" "그럼, 만날 수 있고 말고." 봄눈 형제는 남한과 북한의 어린이들에 의해 커다란 눈덩이로 변해 갔다. 그리고 곧 눈사람이 되어 휴전선을 가운데 두고 형은 북쪽을, 동생은 남쪽을 바라보며 서 있게 되었다. 진달래가 피고 산과 들에 봄볕이 완연해도 그들은 그대로 녹지 않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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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라늄의 힘, 453그램의 우라늄은 1,350톤의 석탄이 내는 것과 같은 양의 에너지를 낸다.
지르코니아석은 레이저 기술의 산물로서 다이아몬드와 거의 똑 같다. 어떤 사람의 눈이라도 속일 수 있을 정도이긴 하지만 그 값은 1캐럿에 겨우 12달러밖에 안된다.
바닷물이 짠 이유, 바닷물의 소금기는 수천만 년 동안 땅에서 녹아나와 여과된 소금 때문이다. 강물은 바위의 소금을 씻어서 바다로 옮기는데, 이 침식된 바위들이 짠물의 가장 큰 근원이다. 또 화산석도 바다에 씻겨들어가고 화산의 폭발 자체가 소금을 많이 함유한 ‘젊은 물’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젊은 물’이란 전에는 한 번도 액체상태로 존재해 본 적이 없는 물이다. 이렇게 계속 바다에 소금이 모여들고 바닷물이 계속 증발하므로 너무 짜지는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증발된 수증기는 다시 비가 되어 내리고 또 바위의 소금기를 씻어 바다로 옮겨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다에 있는 소금의 양은 15억년 동안 변하지 않았다. 첫째, 소금은 매우 잘 녹아서 어떤 곳에 몰리지 않는다. 또 바다는 매우 넓고 모든 곳이 연결되어 있어 골고루 퍼져 있다. 둘째, 소금 전자의 일부는 바닷물의 증발과 함께 날아간다. 셋째, 소금은 기체이면서 액체와 같은 물체로 변하여 바닷물 표면 바로 아래의 미립자에 붙는다. 넷째, 많은 양의 소금이 얕은 바닷가에 결정으로 쌓인다. 이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바다에 소금이 쌓이는 데는 워낙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일정한 기간 동안 일정한 소금을 더하거나 덜어도 별 변화가 없다. 다른 광물의 경우는 변화가 심한데 소금은 3.5%로 거의 일정하다.
석유에는 닭 냄새가 난다, 석유는 적어도 수천만 년 전에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할 때 죽은 공룡들의 시체와 기타의 식물들이 섞여서 압축되고 퇴적되었다가 생긴 것이다. 공룡은 닭 종류에 속하는 큰 닭이라 볼 수 있고 고기 맛도 닭고기 맛과 비슷하다고 한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접착제로 석유를 사용한 기록이 성경에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전차 바퀴에 석유를 칠해서 매끄럽게 했다. 고대 중국인들도 석유를 여러가지로 사용할 줄 알았다. 땅을 파고 석유를 두레박으로 길어 올려 석유를 퍼낸 기록이 있다.
다이아몬드 1캐럿(carat)은 205.3밀리그램이다. 다이아몬드는 반 캐럿을 만들기 위해서는 21톤의 흙과 돌을 파내야 한다. 다이아몬드를 자르는 것은 역시 다른 다이아몬드이다. 다이아몬드는 지하 130킬로미터 아래에 묻혀 있다. 다이아몬드는 두 번째로 강한 광물인 코론듐보다 90배나 더 강하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은 1859년 11월 24일 1,250부가 인쇄되었는데 단 하룻만에 다 팔려버리고 말았다. 원래 이름은 ‘자연도태에 의한 종의 기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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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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