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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81 호
4339.12.10 (10.20)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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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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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제52회 현대문학상 수상자로 소설가 이승우(47), 시인 최정례(51), 문학평론가 복도훈(33)씨가 선정됐다.현대문학사는 소설부문에 이씨의 단편소설 ‘전기수 이야기’, 시부문에 최씨의 시 ‘그녀의 입술은 따스하고 당신의 것은 차거든’ 외 4편 그리고 평론부문에 복씨의 ‘축생, 시체, 자동인형:2000년대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 등장한 캐릭터와 신인류학’이 각각 수상작으로 결정됐다고 4일 발표했다. 시상식은 2007년 3월 열릴 예정이고, 상금은각 부문별로 1000만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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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나는 매일 저녁 모든 근심걱정을 하느님께 넘겨 드린다. 어차피 하느님은 밤에도 안 주무실 테니까. /메리 C.크라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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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사회/문화/인물 |
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제 3부 개화와 항쟁
사형 선고받은 여자 폭탄범 - 안경신
꽝! 새로 지은 청사의 바깥 벽과 유리창이 박살이 났다. 이어 또 한 개의 폭탄이 평양 경찰서에 던져졌다. 불발. 1920년 8월 3일, 평안남도 경찰부 새 건물에 던져진 폭탄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대체 이 폭탄은 누가 던졌을까. 안경신. 그녀가 바로 이 폭탄 투척 사건의 주인공이다. 일제가 여자 폭탄범이라고 혀를 내두르던 안경신은 그 출생이나 사생활이나 만년의 생애가 미궁 속에 묻혀 있는 채 그녀의 활약성 중 극히 일부분만이 기록에 남아 여걸의 편린을 짚어 보게 한다. 안경신은 평안남도 순천 태생이라기도 하고, 본적을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에 둔 예수교 신자라기도 하지만, 그녀가 일본 관헌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때의 주소는 평안남도 대동군 금제면이었고, 1921년 현재 34세라는 기록이 있고 보면, 3.1 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 안경신의 나이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 25∼26세가 아니라 32세가 아니었나 짐작된다. 안경신은 일찍이 평양 여자 고등 보통 학교 기예과를 졸업하고 결혼 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녀는 어떤 사유로 곧 홀몸이 된다. 안경신은 그녀의 고독한 나날과 팔자를 원망하면서 교회 일에 매달린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설움에다 자기 한 몸의 불행이 겹쳐서 그녀는 교회를 찾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일본을 미워하는 감정이 남달랐던 그녀는 일제와 싸우려고 벌써부터 내심 칼을 갈고 있었는데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 10월, 평양의 서문동에서 마침내 행동을 개시할 수 있었다. 서문동 거리는 군중으로 들끓었다. 안경신을 군중 속에 뛰어들어 선동 연설을 하였다. 그녀가 일제의 폭정과 무수한 백성들이 무참하게 살해된 사실을 폭로하면서 만세를 부르자 흥분한 군중들이 이에 합세, 만세를 불렀다. 이 사건으로 안경신은 20일 동안 경찰서에서 구류를 살았다. 경찰서에서 풀려나자 일제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 굳어졌다. 그무렵 평안남북도를 중심으로 예수교의 여자 신도들이 주축이 되어 대한 애국 부인회의 지부를 결성하고 있었다. 안경신은 애국 부인회 강서 지회의 재무직을 맡았다.
그 이듬해 초여름의 일이었다. 애국 부인회 증산 지회에서 상해 임시 정부 연락원에게 자금을 전달한 것이 탐지되어 애국 부인회 연합 본부와 각 지회의 간부들이 일본 경찰에 쫒기게 되었다. 그 무렵 안경신은 홀몸이 된 지 13년 만에 이성과의 교제를 갖게 된다. 그녀의 상대는 장사꾼을 가장한 독립 운동가 김행일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상해에 거주하다가 마침 평양에 나와 있었다. 일본 관헌의 눈길을 피해 그들 두 사람은 밀회를 가졌다. "난 상해에 거주하는 동안 처자를 잃었소. 지금 홀몸인 내가 안 여사에게 구혼을 해도 욕이 되지 않는다면 내게로 와 주오, 서로 부부의 연을 맺어 봅시다." 김행일의 구혼에 소년 과수가 되어 오늘날까지 13년 동안 혼자 살아온 안경신의 가슴은 떨렸다. 안경신과 김행일은 장차 부부가 될 것을 약속하고 깊은 인연을 맺었다. "검거의 손이 그대에게 뻗쳐 오기 전에 이곳을 떠납시다." 김행일은 상해로 떠날 것을 권해 왔다. 이미 부부가 된 것이나 다름없는 두 사람은 행동을 함께 하여 국경을 넘어 만주로 갔다. 안경신은 그 곳에서 대한 청년단 연합회에 가입했다. 안병찬이 이끄는 단체에서 그녀는 많은 동지들을 알게 되었다. 만주 관전현 쓰양거우에서 광복군 총영의 총영장 오동전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만주와 상해의 독립 운동가들은 그 무렵 미국 의원단의 도양 시찰을 계기로 식민지 백성의 설움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한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미국 의원단이 조선을 통과할 때 일대 거사를 일으켜 한국이 얼마나 간절하게 독립을 열망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만주를 거쳐 상해에 닿은 안경신은 김행일과의 결혼 약속이 산산조각나는 바람에 한동안 실의 에 빠져 버린다. 김행일의 말로는 자기는 상해에서 처와 자식들을 잃어 혼잣몸이라고 하였으나,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본처와 자식들이 엄연히 살아 있는 것을 보고 안경신은 낙심하여 돌아왔다. 김행일이 머물고 있는 상해에 더 눌러 있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이미 그녀의 몸은 홀몸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 속에는 핏덩이가 자라고 있었다. 재혼의 꿈에 부풀어 있던 안경신이 결혼을 약속한 사람의 속임수로 가슴 아파하고 있을 때 그 아픔을 이기는 길은 무슨 일에든 몸을 던져 몰입하는 일이었다. 광복군 총영의 오동진 영장은 마침 국내외에 산재해 있는 일본기관 파괴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문일민, 김영철, 박태열을 폭탄 대장으로 하고, 장덕진을 비롯한 네 사람과 안경신 등 일행 5명에게 국내로 들어가 행동을 개시할 것을 명령했다. 무장 독립 단원들은 권총과 폭탄을 몸에 숨겨 가지고 길을 나섰다. 문일민은 평안도를 맡고, 박태열은 황해도를, 그리고 김영철은 서울에서 일을 터뜨릴 계획이었는데, 일본 관헌에게 발각되지 않으려고 그들은 모두 변복을 하고 길을 나섰던 것이다. 박은 왜놈의 차림새를 하였고, 문은 노동자로 변장한 뒤 장덕진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국내로 숨어들었다. 당시 안경신의 몸에는 폭탄 심지가 숨겨져 있었다. 일행의 고초는 말이 아니었다. 행인의 눈을 피해 밤낮을 숨어서 산길을 타고 다니기란 그렇게 수월한 노릇이 아니었다. 게다가 안경신은 일행 중에서 홀로 여자였고, 몸이 무서운 임부였다. 갖은 고초 끝에 안주까지 왔을 때 그들 무장 독립단은 안경신에게, "여기서부터는 왜놈 순사들의 수가 늘어날 게요. 우린 그자들을 만나면 싸워야 하니까 안 동지는 먼저 가시오."하고 먼저 가기를 권했다. 거기까지 오는 데에도 남자들이 심지어 안경신의 옷보따리까지 들어다 준 걸 생각하면 행동을 함께하는 것도 도리이겠으나, 자기가 끼어 있어서 일본 순사와 싸우는 데 지장이 된다면 또한 먼저 그 곳을 떠나오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안경신은 마침내 그들과 헤어져서 먼저 안주를 떠났다. 날이 저물자 그녀는 어파 정거장 부근에서 하룻밤을 자고, 그 이튿날 평양 보퉁문 밖에까지 오니까 비가 쏟아졌다. 비는 사정없이 퍼부었다. 보통개 개울물이 쏟아지는 폭우에 불어나서 도무지 건너갈 수가 없었다. 안경신은 하는 수 없이 그 곳에서 하룻밤을 밝히고 이튿날 평양 보통개 물이 빠지기를 기다려서 평양으로 들어왔다. 그 사이 안주의 무장 독립단은 예상대로 일본 순사와 맞닥뜨렸다. 미야모토 경부라는 자가 순사 한 명을 데리고 검문을 하고 있었다. 어찌나 철저하게 검색을 하는지 무기를 품에 지니고 있었던 독립 단원들은 당장 해치우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 때였다. 미야모토 경부는 다시금 무장 독립단에게 접근해 왔다. 일행 중의 한 사람은 때를 놓치지 않고 권총을 뽑아 경부와 순사를 쏘아 넘어뜨렸다. 그 바람에 폭탄 한 개는 잘못하여 가까운 연못 속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감시망을 피해 평양 시내로 잠입한 무장 독립 단원 중 문일민은 숭현 여학교 석탄광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는 그 곳에서 이틀동안 은신하여 지하실 유리창에 비치는 햇볕으로 비에 젖은 폭탄심지를 말렸다. 마침 방학 기간이라 폭탄 심지를 말리는 문일민의 거동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었다. 이틀 동안 숭현 여학교 석탄광 속에 숨어 있을 때 소녀 권기옥은 참외를 사서 나르기도 하였고, 냉면 등 음식을 사서 나르기도 하였다. 8박 3일, 마침내 그들의 거사날은 저물었다. 장덕진, 문일민 등은 김예진, 김용구, 이춘성 등의 안내를 받아 평안남도 경찰부 신축 청사에 폭탄을 던졌다. 이 거사로 경찰부의 벽과 유리창이 박살나고 경관 2명이 폭사하는 등 일제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안경신은 평안남도 경찰부 청사에 폭탄이 터질 때 법수머리 근처에서 참외를 사 먹고 있었다. 그녀는 그날 밤을 참외밭 원두막에서 새우고 미리 약속한 대로 이튿날 새벽 기자능으로 향했다. 그 곳에서 안경신은 박태열을 만나 몸에 지니고 있던 폭탄심지를 건네주었다. 박태열과 안경신은 그 폭탄을 가지고 평양 경찰서로 갔다. 그러나 그들이 던진 폭탄은 터지지 않았다. 그들은 일경의 눈길을 피해 평양 시내를 벗어났다. 대동군 추을 미면 이천리 김웅봉의 집으로 숨어든 그들은 숭실 중학교 학생 김효록이 날라다 주는 밥을 먹으면서 멀리 탈출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일본 관헌들은 평안남도 경찰부 건물과 평양 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독립 단원을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김웅봉의 집에서도 오래 있지를 못하고 제각기 흩어져 있기로 하였다. 안경신은 남자 동지들과 헤어져 평양과 대동군 일원을 전전하다가 멀리 함흥으로, 원산으로 건너뛰기도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그녀는 이이를 낳았다. 1921년 3월, 계속 안경신의 뒤를 추적하던 대동 경찰서원에 의하여 그녀는 체포되었다. 안경신은 젖먹이 어린 아기와 함께 경찰서의 썰렁한 마룻바닥에서 고문을 당해야 했고, 급기야 그녀는 평양 법원에 송치되어 재판을 받은 결과 한국 여자로 최초로 사형 언도를 받았다. 안경신은 곧 복심 법원에 불복, 공소를 하였다. 때마침 상해 임시 정부로 무사히 건너간 문일민은 안경신의 사형 선고 소식을 듣고 '폭탄을 던진 사람은 여기 있다'는 내용의 행동 경로를 적어 평양 지방 법원으로 송달해 오기도 하였다. 안경신이 사형 언도를 받게 된 데에는 어제가 그녀 일행에게 밥을 날라다 준 적이 있는 숭실 중학교 학생 김효록의 증언이 치명적이었다. 평양 경찰서에 폭탄을 던졌을 때 여자가 끼었느냐, 끼지 않았느냐가 그녀를 죽이고 살리게 되었는데, 밥을 나르며 들은 얘기로는 안경신이 경찰서 폭파 사건 때 가담한 것으로 증언하여 결국 사형이 구형되었던 것이다. 김효록의 할아버지는 자기 손자가 1심에서 안경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것이 마음에 걸려 손자를 데리고 당시 평양의 주요 인물이던 조만식을 찾아갔다. 김효록의 증언이 안경신의 생사를 결정짓게 되었다고 판단한 노인은 조만식의 조언을 듣고 싶었다. 사건의 전후를 설명한 노인은, "고당 선생, 이 사건에 관련된 남자들은 모두 몸을 피하고, 여자 한 사람만 남아서 사형을 구형받고 복심 법원에 상고중인데, 어떻게 해야 그 안경신 여사를 살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조만식이 말했다. "다음 공판에 댁의 손자가 다시 증언을 하게 되었더라 이런 말이오?" "예, 효록이의 말 한마디가 안 여사의 목숨을 죽이고 살리게 되었으니 어찌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조만식은 선뜻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너는 법정에 가서 이렇게 증언해라." "어떻게요?" "그 때 일을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여자 목소리는 안 났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증언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평양 경찰서에 폭탄을 던졌을 때 '여자 목소리가 났다'는 증언이 사형선고를 받게 된 핵심이었다면 '여자 목소리는 나지 않았다'는 증언으로 안경신의 운명은 바뀌어직도 몰랐다. 이 증언 내용은 김효록이 사건 현장에 있다가 들은 얘기가 아니라 무장 독립 단원들이 대동군 추을미면 이천리로 피신해 왔을 때 밥을 나르면서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은 것이 골자였다.
1921년 11월 18일 오전 11시. 평양 복심 법원 2호 법정. 안경신은 다시금 보채는 아기를 달래며 증언을 듣고 있다. "증인은 작년 8월 초에 이천리 김응봉의 집에서 안경신에게 밥을 가져다 먹인 일이 있는가?" 김효록은 초연한 태도로 말했다. "저는 그 때 방학 중이어서 저하고 가까운 김창린 등 두 사람이와서 김응봉의 집에 온 사람들이 집에서 10여 보 떨어진 버드나무 아래에 있으니까 밥을 겨져다 주라고 하기에 그렇게 해 준 일이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증인 심문은 급기야, "사건 현장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느냐?"하고 핵심으로 들어갔다. 글자 김효록은 지난번의 진술을 뒤엎고, "사건 현장에서 여자의 목소리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하고 말했다. 담당 검사는 화를 벌컥 냈다. "야! 너는 지난번 재판 때는 여자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해놓고 이제 와서 위증을 하다니! 위증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 하고 호통을 쳤다. 검사는 김효록을 노려보았다. 이 학생이 틀림없이 누구의 지시를 받은 것 같아 유도 심문을 해보기로 했다. "좋다, 증인은 평시에 누구를 존경하느냐?" 그러나 숭실 중학 4년생이던 김효록도 만만치는 않았다. "저는 시골 학생이 되어서 그런 건 잘 모릅니다."하고 딴청을 부렸다. 김효록의 거짓 증언으로 안경신은 사건의 공소 유지가 매우 어렵게 되어 감형 선고를 받을 수 있었다. 그녀는 공판에서 징역 10년 언도에 미결 구류 180일을 통산했다. 그러나 김효록은 위증으로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던 것이다. 조만식의 기지가 안경신을 죽음에서 살려내고 그 대신 죄없는 애국 학생이 감옥살이를 하게 된 셈이었다. 감옥살이를 마치고 나온 소년 김효록은 그의 할아버지와 함께 고당 조만식 선생댁을 찾아갔다. 조만식은 소년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너, 참 잘했구나. 사람 하나를 살려내였으니 참으로 기특하구나. 단지 죄없는 너를 감옥살이 시킨 내가 몹쓸 사람이 되었구나, 용서해 다오." 조만식의 사과의 말에 마침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숙연해졌다. 김효록은 뒷날 학업을 닦아 고려 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어린 아기와 함께 옥살이를 시작한 안경신은 만감이 서린 가운데 어두운 시절을 눈물과 한숨으로 메워 나갔다. 초혼에 실패한 안경신이 13년간 독수공방을 지키다 재혼의 꿈에 부풀어 사귀었던 남자는 그녀에게 아기 하나를 남겨 두고 떠나갔다. 일본의 식민지로 모든 것을 빼앗겨야 했던 시절에 그녀 자신도 조국의 운명처럼 모든 것을 빼앗기며 살아야 했다. 안경신은 감옥에서 나온 뒤 그녀의 이름을 초야에 묻고 숨어 살기로 하였다.
1920년대 초반, '여자 폭탄범'이란 너울을 쓰고 사회의 이목을 한몸에 받았던 안경신의 말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어느 가난한 농부에게 몸을 맡겨 살아가고 있다는 소문만이 간간이 들려올 뿐이었다. 1962년 3.1절 날 안경신에게 정부가 주는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으나 그 훈장을 받을 사람도, 받아서 전할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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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정치, 경제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원나라의 마지막 황후가 고려 여인이었다는데 - 이익주(명지대 강사)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 중국에서는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가 쇠퇴하고 명나라가 중원의 패권을 잡는 대변동이 일어났다. 오랫동안 몽고족의 지배를 받아왔던 한족 농민들의 봉기가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며, 원나라 조정에서는 황제 자리를 둘러싼 권력투쟁이 거듭되고, 권신과 환관들이 발호하는 등 왕조의 말기적 현상이 두루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의 한 가운데에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순제)의 황후였던 고려 여인 기씨- 기황후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원나라에 공녀로 들어갔다가 순제의 눈에 들어 황후의 지위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순제의 다른 황후들과 벌였던 암투는 우리 ‘왕비열전’을 능가하는 궁중 비사였다. 결국 그녀가 낳은 아들이 황태자가 되었는데, 만일에 원나라가 망하지 않고 순조롭게 황위가 계승되었다면 고려의 피가 섞인 황제가 출현하였을 것이다. 고려 여인이 원나라의 황후가 되고, 그 아들이 황제가 되는 것이 과연 고려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그보다 먼저, 그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것이 우리 역사에 끼친 영향은 무엇일까? 이러한 의문들을 풀기 위해서는 고려와 원나라의관계가 어떠했는가 하는 문제부터 차근차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려와 원나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나? 13세기에 고려는 몽고족의 침략에 맞서 30년이 넘도록 치열하게 싸웠다.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했던 몽고족과 그토록 오랫동안 싸운 나라는 없었다. 이것만으로도 항전의 주체가 되었던 고려 민중의 투쟁담은 역사 속에 길이 남을 것이다. 항쟁의 결과, 고려는 몽고에서 요구하는 강화의 조건을 대폭 완화시켜 강화를 성립시킬 수 있었다. 강화교섭을 위해 몽고에 간 태자가 쿠빌라이(뒤의 원 세조)를 만났을 때, 쿠빌라이는 “고려는 만리나 되는 큰 나라이다. 당나라 태종이 친히 공격했어도 굴복시키지 못했는데, 지금 그 태자가 내게 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쿠빌라이가 고려를, 고구려를 계승한 강국으로 인식하였던 것은 끈질긴 고려의 항전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때 쿠빌라이는 동생 아릭부게와 황제 자리를 다투고 있었으므로 고려 태자가 자신에게 찾아 온 것을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였음직하다. 결국 쿠빌라이가 황제가 되었고, 태자가 쿠빌라이 쪽을 선택한 것은 결과적으로 중요한 고비에서 외교적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고려는 이러한 분위기에서 진행된 외교교섭에서 실리를 얻을 수 있었다. 고려는 몽고와의 이 첫 교섭에서 전통적인 풍속, 즉 ‘토풍’을 고치라고 강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고, 이로써 중국과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고려의 문화뿐 아니라 독자적인 국가체제의 존속을 인정받은 것으로, 이를 근거로 ‘고려’라는 국가와 왕실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 몽고에서 볼 때 고려는 엄연한 하나의 외국이었고, 고려와 몽고의 관계는 외교관계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몽고족이 이 때까지 정복한 지역을 모두 자기 연토로 편입시켰던 것과 비교할 때 아주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강화에 반대하는 무신정권을 붕괴시키는 과정에서 몽고의 군사력이 개입하였고, 이에 따라 고려의 자주성은 커다란 시련을 겪게 되었다. 몽고의 군대와 다루가치가 고려에 상주하고 내정에 간섭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충렬왕이 즉위하였는데, 그는 쿠빌라이의 딸과 결혼하여 원 황실의 부마가 되어 있었다. 이 점은 이후 두 나라의 외교 과정에서 큰 효력을 발휘하였다. 유목민족의 전통을 가지고 있던 원나라에서는 국가의 중대사를 쿠릴타이라고 하는 회의에서 결정하였는데, 부마도 왕자들과 나란히 참석할 수 있었다. 이같이 부마의 지위가 왕자와 동등하였으므로, 충렬왕은 이러한 지위를 활용하여 원나라의 간섭을 줄이기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 할 수 있었다. 충렬왕은 직접 원나라에 가서 쿠빌라이를 만나 담판을 벌였고, 그 결과 원나라의 다루가치와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후 고려에는 원나라의 관리나 군대가 주둔하지 않게 되었다. 또 호구 조사를 고려에서 독자적으로 시행하기로 합의하였다. 호구 조사는 일차적으로 세금을 거두기 위한 것이므로, 이 합의를 통해 고려의 백성들은 원나라에 세금을 바치지 않게 되었다. 물론 원나라가 고려에 대한 지배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어서 필요할 때마다 사신을 보내 내정에 간섭하였다. 그러나 원나라에서 필요할 때마다 사신을 보내 내정에 간섭하였다. 그러나 원나라에서 이런 정도의 느슨한 지배방식을 택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려 국왕에 대한 책봉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래 책봉이란, 중국 왕조와 주변 국가 간의 사대관계에서 조공의 반대급부로 주어지던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 나라의 왕위 문제에 직접 간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왕위 계승을 추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원나라에서는 책봉의 기회를 이용하여 고려의 왕위 계승에 개입하였고, 이 때문에 국왕이 갑자기 바뀌거나, 아버지와 아들이 왕위를 두고 다투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 즉, 원나라에서는 책봉권을 이용하여 고려 국왕을 조종할 수 있었고, 그를 통해 고려의 정치에 간섭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고려는 당시 몽고족이 지배하던 세계질서 속에서는 드물게 독자적인 국가체제를 유지하였지만, 대신 원나라의 간섭을 강하게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자주와 사대라는 기준으로 볼 때 분명히 이중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이중성을 어떻게 수용할 것이가 하는 문제가 중요한 고민 꺼리였을 것이다.
자주와 사대가 종이 한 장 차이? 당시 고려 사람들이 자신이 살고 있던 시대를 어떻게 인식하였는가를 보여주는 자료는 많지 않지만,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일연(1206- 1289)의 <삼국유사>와 이승휴(1224- 1300)의 <제왕운기>가 모두 충렬왕 때 쓰여진 역사책들이다. 이 두책은 무엇보다도 단군신화를 처음 기록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것은 단군으로부터 시작된 우리 역사의 유구함을 강조하고, 또 삼국통일이 이루어진 지 무려 600년이 지난 뒤까지도 각 지방에 남아 있던 고구려. 백제. 신라 계승의식을 극복하여 민족의 일체성을 확인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 몽고와의 전쟁을 전후하여 신라부흥운동, 고구려부흥운동, 백제부흥운동이 각각 일어났던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특히 <제왕운기>의 우리 역사에 대한 서술은 “요동에 별천지가 있으니 중국 왕조와 뚜렷히 구분된다”는 말로 시작된다. 중국과 구분되는 딴 세상이란 곧 우리의 독자적인 혈연 및 문화공동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 때 새삼스레 이 점을 강조한 것은 원나라와의 관계에서 ‘토풍’으로 표현되는 독자적인 문화와 국가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점을 부각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이들보다 한세대 뒷 사람인 이곡(1298- 1351)이 자기 시대를 말하면서 “오늘날 천하에 임금과 신하가 있고 백성과 사직이 있는 곳은 우리 삼한뿐이다”라고 한 것도 원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질서 속에서 고려가 국가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것에 자부심의 표현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몽고족이 세계를 지배하는 현실은 그 자체로서 인정하고 있었다. <제왕운기>에서는 원나라를 중국의 정통 왕조로 인정하면서, “토지는 광대하고 인민은 많으니, 개벽한 이래로 이런 나라 처음이네”라고 노래하여 융성함을 극찬하였다. 또 충렬왕이 쿠빌라이의 부마가 되고, 그 아들인 쿠빌라이의 외손자가 세자가 됨으로써 고려의 왕업이 빛나게 되었다고 찬양하였다. 따라서 원의 간섭 역시 부정할 수 없었는데, 그것은 종족에 관계없이 중원을 차지한 나라가 곧 중화이고, 그에 대해 사대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로써 합리화되었다.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전통에 대하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민족의 간섭을 인정하는 이중적인 가치관이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은고려가 국가체제를 유지하면서 원의 정치적 간섭을 강하게 받던 현실을 뛰어넘지 못하고, 그 현실과 타협하는 한 불가피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원에서 고려의 노비법을 고치려 한다던가, 고려를 원의 한 행성으로 만들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반대하면서도,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여 그 곳에서 관직에 오른 것을 평생의 자랑으로 여기는 이중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사람들의 그러한 태도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우리가 원간섭기를 생각하면서 반원과 친원, 또는 자주와 사대라는 술어를 사용할 때, 그것들은 모두 제한적인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제왕운기>에 보이는 이승휴의 역사인식은 단군신화를 수록하고‘요동의 별천지’를 강조한 데서 보듯이 자주적이지만, 동시에 사대의 논리를 들어 원의 간섭을 현실로서 인정한다는 점에서 그의 ‘자주’는 제한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당시 현실에서 자주와 사대, 반원과 친원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았던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원의 정치적 간섭을 현실로서 인정하는 것이 대체적인 분위기였지만, 고려가 독자적인 국가체제와 문화전통을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이 시기에 단군신화가 기록된 것은 몽고족이 지배하는 세계질서 속에서나마 독자적인 국가체제를 지탱해가려는 노력의 결과였다. 반면, 원나라의 간섭에 빌붙어 개인적인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의 책동은 궁극적인 고려의 국가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데 이르렀다. 이러한 사람들을‘친원파’또는 ‘부원배’라고 부를 수 있을것이다. 두가지 생각은 모두 원의 간섭을 현실적으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종이 한 장의 작은 차이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 차이가 현실 정치에 있어서는 고려왕조를 지킬 것인가, 아니면 고려왕조를 없애고 원의 영토로 편입될 것인가 하는 대단히 중대한 문제로 발산되어 나타났다. 좀 더 적극적으로 원의 간섭을 부정하고 자주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은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지만, 그러지 못한 것이 그 시대의 한계였다.
원에 기대어 출세하려는 자들 고려에서 부원배가 출현한 것은 몽고와 전쟁을 할 때부터였다. 몽고족의 침략을 맞아 고려의 군민들은 치열한 항쟁을 벌였지만, 여느 전쟁과 마찬가지로 이 때에도 외적에게 항복하여 그 앞잡이 노릇을 한 반역자들이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홍복원(1206∼1258)으로, 그는 일찍이 몽고가 고려를 처음 침략해왔을 때 항복한 뒤로 몽고군을 안내하며 고려 침략을 도왔다. 이 공으로 몽고에서 관직에 임명되었으며, 이로부터 아들 홍다구와 손자인 홍중희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고려 조정에 반역행위를 자행하였다. 그밖에도 전쟁 중에 항복했던 사람들이 원나라의 위세를 업고 폐해를 일으키는 일이 많이 있었다. 예를 들어 몽고에 있으면서 고려의 어느 지역에서 어떤 특산물이 많이 생산된다 하고는 고려에 파견되어 토색질을 일삼거나, 이것을 빌미로 고려에서 관직을 얻기도 하였다. 몽고에서 배운 몽고어 실력을 앞세워 통역관으로서 두 나라 사이를 오가며 사실대로 전달하지 않고 자기 욕심을 채움으로써 국익을 훼손하는 경우도 있었다. 시간이 흐르수록 두 나라 사이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원나라에 연고를 갖고 그것을 이용하여 자기 이익을 확대하려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한 예로 공녀라고 해서 원나라에 처녀를 보냈는데, 그 때문에 딸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사람들로 소란이 일어났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거꾸로 자기 딸을 원나라의 실력자와 혼인시켜 그 덕을 보려는 사람들로 있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원의 요구에 따라 환관도 많이 보냈는데, 그것이 출세의 한 방편이 됨으로써 원나라에 환관으로 들어가기 위해 자기 스스로 거세하는 사람들 조차 있었다. 특히 충숙와 이후로는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면서 정쟁에 패배한 사람들이 원나라로 도망해 들어가 부원배로 변신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들은 원나라에 있으면서 고려를 원의 영토에 편입시키려는 책동을 벌였다. 이처럼 원간섭기에는 환관이나 공녀의 친족들과, 정쟁에서 패하여 원으로 도망한 사람들이 주로 부원배가 되었다. 이들은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고려의 정치질서를 문란케 하고, 더 나아가서는 고려의 국가체제 자체를 없애려고까지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원배들의 도움을 받아 고려의 기씨 여인이 원나라의 황후가 될 수 있었다.
원나라 기황후는 고려의 공녀 기황후는 행주를 본관으로 하는 기자오의 막내 딸로 태어나 원나라에 공녀로 보내졌다. 1333년(충숙왕 후4)경에 원나라 황궁의 궁녀가 되었고, 1339년 아들 아유시리다라를 낳은 뒤 이듬해 제2 황후에 봉해졌다. 그녀는 먼저 가 있던 고려인 환관들의 주선으로 궁녀가 되었고, 황후가 된 뒤에도 고용보,박불화 등 고려인 환관들이 그 주변에서 활약하였다. 기황후와 고려인 환관들은 원나라에서 막강한 정치세력을 이루었다. 기씨가 제2황후에 봉해진 바로 그 해에 자정원이라는 황후의 부속관청이 설치되었는데, 여기에는 고려인 환관 뿐아니라 원나라의 고의 관리들도 포함되어 ‘자정원다’이라 불리는 당파를 형성하였다. 당시 이들의 위세는 대단한 것이어서 관리들의 인사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당시 원나라의 재상이 이들과 가까이 하였다가 “권세에 아부한다.”는 비난을 들을 정도였다. 1353년(공민왕 2)에 기황후의 아들이 황태자에 책봉되자 자정원의 세력도 더욱 강해졌고, 그로부터 몇 해 뒤에는 황제로 하여금 황태자에게 양위하도록 압력을 사한 일도 있었다. 기황후의 득세에 대하여 원나라 말, 명나라 초에 살았던 권형은 <경신회사>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색다른 설명을 하고 있다. 기황후가 고려의 미인을 많이 데리고 있으면서 대신 중에 권력이 잇는 사람들에게 보냈는데, 당시 원나라 서울의 고관들과 귀인들은 반드시 고려 여자를 얻은 뒤에야 (명가)라고 하였다. 고려 여자들은 상냥하고 애교가 넘치며 섬기기를 잘하여 이들이 이르면 대부분 사랑을 빼앗았다. 수제 이후로 궁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태반이 고려 여자였으므로 의복과 신발, 보자, 물건 등이 모두 고려의 것을 따르게 되었다. 말하자면 기황후가 원나라의 실력자들을 상대로 미인계를 썼다는 것인데, 이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 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기황후가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지위와 권세를 유지했던 것만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기황후의 존재는 고려의 정치에도 당연히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무엇보다도 고려에 있던 기황후의 일족들이 권세를 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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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전교회장 수원이
새 학기가 시작되어 처음 수원이를 보았을 때, 그 친구는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그의 못난 얼굴을 친절하고 믿음직스러운 인상으로 바꿔 놓았다는 것은 훨씬 나중에야 알았다. 수원이에게는 말하는 도중 자꾸만 입맛을 쩝쩝 다시는 습관이 있었다. 어느 날 선생님은 종업식 날에 떡 파티를 하겠다고 말씀하시면서 수원이가 짝궁과 얘기하는 모습을 보시고 "저 녀석은 벌써 입맛을 다신다." 며 면박을 주셔서 우리 모두는 배를 움켜쥐며 웃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수원이는 말할 때 유난히 침이 많이 튀는 것을 방지하려고 자주 입맛을 다시다 그리 되었다고 한다. 가을 소풍 때였다. 선생님께서 "사진 찍을때는 입을 벌리고 크게 웃어라"고 하셨다. 그런데 나중에 나온 사진을 보니 수원이 혼자만 입을 크게 볼리고 웃고 있는 것이었다. 입 안에 먼지 들어가겠다고 놀리자 수원인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그의 웃음이 인기를 끌었던지 수원이는 그 해 전교회장에 당선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내 오락실 앞에서 우연히 수원이를 만났는데 두명의 친구가 수원이의 두 팔을 잡아 당기고 있었고 수원이는 얼굴이 붉어져서는 낑낑대며 버티고 있었다. 뛰어가 무슨 일인가 물었더니 수원이는 도움을 청하듯 말했다. "나는 전교 회장이다. 내가 오락실에 가면 전교생이 다 간단 말이다. 제발 뇌 줘!" 하는 수 없이 나는 수원이의 허리를 붙잡아 못 가게 도와 줄 수밖에 없었다. 졸업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수원이가 전화를 해왔다. 그는 자못 진지한 말투로 고민을 털어 놓았다. "나 요즘 감정이 너무 메말라 걱정이다. 졸업식 땐 꼭 눈물을 흘려야 할 텐데....." 그의 소박한 소망을 듣는 순간 졸업식 날 그의 모습을 금방 상상할 수 있었다. 너무 울어 퉁퉁 붉어진 눈을 한 그를......
김효열 님/부산시 부산진구 부암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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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72, 73, 74 : 키에르케고르(1813-1855년)
키에르케고르 [Kierkegaard, Soren Aabye] 1813. 5. 5 코펜하겐~1855. 11. 11 코펜하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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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불안'과 '절망'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1813-1855년) 그때 세계에서는 1840년: 영국리빙스턴, 아프리카탐험 시작 1851년: 청, 태평천국의 난
옛날부터 덴마크는 독일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으면서도 독립된 사상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은 오래 전부터 조용한 북국의 문화를 대표하고 있는 도시였다. 그곳 시청 부근의 한 부유한 가정에 쇠렌 키에르케고르라는 소년이 자라고 있었다.그는 특유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밖으로는 대단히 명랑해 보이면서도 속으로는 깊은 우수를 어려서부터 지니고 있었다. 생각은 어른같으면서도 느낌과 행동은 때로는 어린이 같은 면을 보이기도 했었다. 이처럼 비범한 재능을 가진 키에르케고르는 코펜하겐 대학에 진학,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라는 제목의 논문을 제출하고 계속 철학적 사색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당시의 유럽사상계가 모두 그러했듯이 철학과 신학은 같은 연구과제로 되어있었다. 특히 그의 가정은 열성적인 신앙을 이어오는 편이었다. 신앙과 상반되는 것은 언제나 죄의식과 통하고 있었다. 키에르케고르의 아버지는 어려서 친척집에 머슴살이를 하면서 가난과 신세를 원망스레 여겼다. 그래서 한번은 양을 치기 위해 들에 나갔다가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며 하느님께 원망 돌리는 저주를 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뒤 부친은 많은 재산을 모으고 무역업에 종사하여 당대 드물게 보는 부를 누리게 되었다. 그래서 신을 저주한 자신이 부를 지니게 된 것은 신의 보복에 의한 두려운 은총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부친의 첫 아내는 소생이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두번째 부인은 그 집에 가정부로 있던 인척여성이었는데, 결혼하고 10개월이 지나기 전에 키에르케고르의 큰 형 피터를 낳게 된다. 후에 피터는 목사가 된다. 그런데 키에르케고르에게는 어머니가 결혼 전에 임신을 했다는 사실이 씻을 수 없는 종교적 죄책감과 우울함을 더해준다.전 부인이 죽고 최소한 1년 후에 해산을 해야 하는 관례에서 온 죄의식이었다. 거기에다 더 큰 불행이 가정적으로 일어났다. 키에르케고르는 모두 7남매였는데 큰 아들 피터와 키에르케고르를 제외한 5남매가 모두 요절하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이 사실은 줄곧 키에르케고르의 부친으로 하여금 신의 버림을 받은 때문이라고 생각케 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은 죄인이라는 우울함을 벗어날 길이 없었다. 키에르케고르도 자라면서 이 사실을 알게 되고 자기와 가정은 신의 사랑에서 밀려난 죄인의 가정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수가 없었다. 부친과 아들 모두가 이 죄의식에 깊이 빠져 서로의 관계가 다정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아들은 부친이 용서받기 어려운 범죄에 연루되었다는 의식을 벗어나지 못해 심지어는 부친과 불화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다.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인간적 고뇌를 씻기 위해 사교생활에 나서기도 했고, 문화활동 등을 하다가 레기네 올센이라는 소녀를 만난다. 그때 소녀는 어렸기 때문에 3년이 지나야 결혼연령이 허락되는 14살이었다 물론 키에르케고르는 30세가 넘어 있었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그 소녀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녀가 법적 결혼연령이 되는 때를 맞추어 프로포즈를 하게 된다. 양가의 허락이 내리고 약혼이 성사되었다 .그러나 불행은 이전부터 도사리고 있었다. 키에르케고르는 약혼을 맺은 날 일기에, 나는 돌이킬 수 없는 큰 과오를 범한 것이 아닌가 하는 후회를 남기고 있다. 그것은 사랑하고 결혼하는 모든 사람의 길을 자기도 택하기는 했으나 내가 어떻게 한 여인을 사랑하고 조용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겠는가 하는 번뇌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부친이 걸어온 것 같은 죄의 길을 좇는 것이 아닌가 싶은 불안도 뒤따르게 된 것이다. 인간적으로는 애정의 욕구와 잠재적인 거부감으로 망설이던 키에르케고르는 일년 후에 일방적으로 파혼을 선포해버렸다. 이른바 '레기네 사건'이다. 레기네는 제발 나를 떠나지 말아달라고 호소했고, 양가의 모두가 만류했는데도 불구하고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의 결정을 돌이킬 수 없었고, 그 결과 극도의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결국은 그 마음의 상처를 잊고 싶어 일생동안 단 한번 국외로 나가 베를린대학에서 셸링의 강의에 참석해보기도 했다. 코펜하겐으로 되돌아온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의 심정을 스스로 풀어보면서 그 뜻을 레기네에게 전달하고 싶어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큰 책을 저술해 내놓는다. 왜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야 했는가를 해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책은 다른 사람의 명의로 출간되었으나 레기네는 어렴풋이 그 뜻을 짐작했을 것 같다. 후에 사람들은 그 책에서 심미적인 예술성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윤리적인 의무를 따를 것인가를 묻는 인간학 및 심리학적인 큰 암시를 받고 있다. 그리고 그 큰 저서가 결국은 그의 철학적 사색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얼마 후에 키에르케고르는 레기네와의 애정이 회복되고 남들이 다 걷는 결혼의 가능성을 모색해본다. 레기네는 아직도 자신을 원망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는 심증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심리상태를 찾아낸 것이 "반복"이라는 저서가 되었다.
73 '하느님 앞에 선 단독자': 키에르케고르의 사상 그때 세계에서는 1853년: 영국 나이팅게일, 크리미아 전쟁에서 활약. 1856년: 유럽, 파리강화회의(크리미아전쟁 종결)개최
결국 두 사람의 애정은 맺어지지 못하고 끝난다. 이미 키에르케고르는 한창 사회적으로 활약할 장년기를 맞았다. 자기 자신도 이제는 정신적으로 지쳐 있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레기네는 20세를 넘기면서 가정교사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평생 레기네에 대한 사랑을 잊지 못한다. 생애의 모든 문제를 레기네와 연결지어야 하는 운명을 피하지 못한다. 임종을 앞두었을 때도 자기는 레기네를 참으로 사랑했었고 사랑했기 때문에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하곤 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어떤 심리적인 병을 동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본다면 키에르케고르만큼 좁은 정신적 생활을 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결국은 부친과 레기네와의 인간관계가 전부였고, 그의 사상도 이 두사람과 더불어 맺어진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을 말하는 사람은 그를 두고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명제를 일생동안 추구해나간 인물이었다고 칭한다. 모든 사상과 문제는 자기와의 싸움이었고, 자아해결이 곧 그의 세계관의 해결이었다. 그 해답을 그는 기독교에서 얻는다. 자아를 하느님 앞의 단독자로 세우며 그때 얻을 수 있는 결론은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니체는 기독교에서 출발했으나, 그리스 정신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운명에 대한 사랑을 호소했고, 동양철학의 핵심인 영구회귀의 세계관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그리스철학으로 출발했으나, 결국은 기독교 정신으로 귀착되는 반대의 길을 택했다. 그래서 철저한 유신론자가 되었는가 하면 인간은 구원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종착점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두 사람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질적으로는 완전히 대조적인 세계사의 방향을 택했던 것이다. 그렇다. 두 사람은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두 사람 다 드물게 보는 천재들이었다. 보통 사람들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색력과 문장력을 갖추고 있었다. 누가 더 훌륭한 문장력을 갖추고 있는가? 성격과 방향은 달랐으나, 같은 길에서는 누구의 추종도 허락지 않을 정도였다.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나 "선악의 피안"에 못지 않은 간결하고도 힘찬 문장으로 된 저작이다. 두 사람은 모두가 단명했다. 키에르케고르는 40세가 넘었을 때 길가에서 쓰러져 병원에 옮겨진 후 세상을 떠났다. 니체도 정신병자로서 살았던 11년을 감하면 오래 활동한 편이 못된다. 두 사람은 당시의 환경속에서 정열과 생명을 걸고 투쟁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오래 살 여건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결국은 정신의 이상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니체도 결혼이나 가정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자신을 초인의 위치까지 끌어올리고 싶었을 정도였다. 자기자신에게서 초인을 찾아야 했던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는 키에르케고르도 자신을 완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찾고 싶었던 것이다. 평범한 한 가정의 가장으로 머물 수가 없었다. 그 당시에는 사회주의 사상이 강하게 부각되던 때였다. 개인보다는 사회가 우위에 있고, 인간문제는 사회문제로부터 해결되어야 한다는 풍조가 강했다. 그 대표자는 마르크스였다. 그러나 이 두사람은 개인과 자아에 모든 문제와 관심을 집중시킨 사람이었다. 누구보다도 사회주의에 대해 개인주의를 확고히 지킨 사람들이었다. 후일에 이들을 계기로 실존주의가 발전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카를 야스퍼스도 그의 "이성과 실존" 첫머리에서, 그들이 살아 있을 때는 관심과 기대를 모으지 않았으나 오늘에 이르러 세계 사상계에 가장 큰 영향을 남긴 두 사람이 있는데, 바로 니체와 키에르케고르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두 사람은 다 세속적이며 범속적인 것을 배격했다. 예외자, 파괴자, 현실계에서 버림받은 사람으로 취급을 받아야 했다. 지금도 사람들은 키에르케고르 연구에 있어서는 그의 일기문이 크게 비중을 차지한다고 본다. 모든 사상과 학문의 열쇠가 일기 속에서 찾아지기 때문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역사상 가장 강인하게 자아의 문제를 연구한 사람이다. 자아를 통해 세계를 해명해보였다. 그렇다면 니체는 인간과 개인을 가장 심각하게 연구해 보여준 사상가라고 보아야 하겠다. 세계에서 기독교를 가장 강렬하게 비판하고 반대한 사람은 니체이다. 그는 예수 이외에는 크리스찬은 없었다고 말한다. 이에 비하면 기독교를 가장 높이 평가하며 참다운 신앙을 호소해 준 사람은 키에르케고르였다. 지금은 누구나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기독교 사상가는 키에르케고르였다고 인정하고 있다. 그의 인간관이 하이데거를 통해 실존철학이 되었고, 그의 신관이 K. 바르트를 거쳐 오늘의 변증신학을 만들었다고 보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74 '절망...죽음에 이르는 병':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1849년) 그때 세계에서는 1852년: 김정희, "금석과안록" 1857년: 유럽과 미국의 경제공황
니체도 그러했으나 키에르케고르도 행복한 생애를 보낸 사람은 못되었다. 고독과 우울의 세월을 살았다. 오히려 그 고독과 우울 때문에 많은 정신적 유산을 남겼을 것이다. 그렇게 사는 것이 창조력을 갖춘 정신인들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후에는 부친과의 정신적 양해와 화합이 이루어졌다. 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키에르케고르가 신앙생활과 세속적인 생활을 체험하는 동안 부친에 대한 죄의식적 거리감을 해소시킨 것 같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했을 때 여인을 힐난하던 군중들이 다 자리를 떠난 것 같이, 죄의 공감대를 느낀 아들은 아버지를 용납할 수 있었고, 두 사람은 하느님앞에서 서로 용서하고 화해에 이를 수 있었다. 키에르케고르는 오히려 고마운 마음을 갖고 아버지와 사별할 수가 있었다. 레기네와의 애정문제도 더 이상 정신적 고통이 되지는 않았다. 정신적인 사랑과 그녀의 행복을 비는 마음이 자연스러운 안정기를 가져다 주었다. 이런 일들이 정리되면서 키에르케고르는 역사에 남을 두 저서를 내놓았다. "불안의 개념"과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둘 다 인간학적인 신앙의 문제를 취급한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만큼 심리학과 인간학을 조화있게 처리해준 사람은 유례가 없을 것이다. 그는 심리학을 전공했거나 인간학을 철학적으로 연구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종교와 신앙문제를 취급하다 보니 그런 문제의 해결을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앙에 대립되는, 즉 신앙의 결핍에 따르는 심리상태는 불안이며, 인간적인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과제를 예리하게 논리적으로 전개시켰다. 해결에는 하나의 방법이 있을 뿐이다. 즉, 신앙인 것이다. 이런 작업을 끝낸 키에르케고르는 자기자신이 이미 늙었다고 생각했다. 정신적 피로에 지칠 정도로 시달렸던 것이다. 조용한 여생을 시골에서 목회일로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해적"이라는 풍자잡지에 키에르케고르를 비난, 풍자하는 기사가 실려지기 시작했고, 이에 자극을 받은 키에르케고르는 계속 반박하는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그 집필의 대상과 내용은 다양한 분야에 걸친 것이었다. 그리고 생명력을 잃은 당시의 기독교계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은 가하기 시작했다 .몇 권의 기독교 변증에 관한 저서도 나왔다 .그 일이 지나치게 격렬했을지 모른다. 정신적 충격을 강하게 받은 키에르케고르는 그 일련의 작업과 더불어 자신의 정신활동의 많은 부분이 소모되었음을 깨닫고 있었다. 더 오래 살아남는다는 것이 어려우며, 무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하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어느날 산책 도중에 졸도해 쓰러졌을 때 그는 아직 죽음이 오지는 않는다고 믿었고,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두번째 졸도했을 때는 자기 생명의 마지막을 예감했던 것 같다. 병원에 가기를 원했고, 당분간 조용한 휴식을 취하면서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친구가 많을 수 없었다. 오히려 방관자와 비난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그 한 사람은 그의 큰 형 목사 피터였다. 형은 마치 키에르케고르를 당시 전통적인 교회에 대한 이단자같이 취급했다. 일설에 의하면 키에르케고르의 무덤에는 키에르케고르의 시신이 없었다는 것이다 .형이 키에르케고르의 시신을 옮겨 없애버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의 임종을 앞둔 짧은 기간은 성자와 같이 조용하고 회혈까지 엿보게 하는 성스러운 모습이었다고 전해진다. 피터 목사의 아들인 조카는 아버지보다도 삼촌을 더 따랐고 가까운 친구와 같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고 한다. 시골 목사 한 사람은 부담감 없이 키에르케고르 옆에 있었고, 키에르케고르는 때때로 자기가 레기네를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술회하곤 했다. 키에르케고르는 니체보다도 이른 시대에 활약했다. 그러나 덴마크는 독일사회와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살아있는 동안에는 키에르케고르는 독일을 통한 세계적인 사상가나 철학자로서는 알려질 수가 없었다. 오히려 독일과 유럽에서 니체의 전성기가 지나간 1905년을 계기로 키에르케고르의 저작들이 독일어로 번역되어 읽히기 시작했고, 그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 되었다. 20세기 전반기는 독일은 물론, 전 세계가 키에르케고르에 대한 관심을 모으게 되었고, 그 연구는 상상을 넘는 단계로 번지기 시작했다. 라우리라는 덴마크 계통의 중국 선교사가 일본인들이 키에르케고르 연구에 열중하고 있는 것을 보고 미국에 소개해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전 세계의 기독교 사상계가 새로이 키에르케고르연구에 열중하게 되었다. 필자도 대학에 다닐 때 키에르케고르를 접했고, 그 때 받았던 깊은 감명은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잇다. 일본에는 오래 전부터 키에르케고르 연구회가 결성되어 활약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키에르케고르 협회가 생겼을 정도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니체보다도 더 사랑받는 사상가로 남게 되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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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
'양치질'은 양지(버드나무 가지)에 접미사 '질'이 붙은 것
여러분은 매일 아침 저녁으로 '양치질'을 하시지요? 이 '양치질'의 어원을 아시나요? 언뜻 보아서 한자어인 줄은 짐작하시겠지요? 그러나 혹시 '양치질'의 '양치'를 '양치'(기를양, 이 치)나 '양치'(어질 양, 이 치)로 알고 계시지는 않은지요? (간혹'양치질'의 '치'를 '치'( 이 치)로 써 놓은 사전도 보입니다만, 이 사전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양치질'의'양치'는 엉뚱하게도 '양지질' 즉 '양지'(버드나무가지)에 접미사인 '질'이 붙어서 이루어진 단어라고 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러나 실제로 그렇습니다. 고려 시대의 문헌(예컨대{계림유사})에도 '양지'(버들 양, 가지 지)로 나타나고 그 이후의 한글 문헌에서도 '양지질'로 나타나고 있으니까요.
'양지' 즉 '버드나무 가지'로 '이'를 청소하는 것이 옛날에 '이'를 청소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오늘날 '이쑤시개'를 쓰듯이, 소독이 된다고 하는 버드나무 가지를 잘게 잘라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청소하는 것을 '양지질'이라고 했던 것인데, 이에 대한 어원의식이 점차로 희박해져 가면서 이것을 '이'의 한자인 '치'에 연결시켜서 '양치'로 해석하여 '양치질'로 변한것입니다. 19세기에 와서 이러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이 '양지'는 일본으로 넘어가서 일본음인 '요지'로 변했습니다.
'이쑤시개'를 일본어로 '요지'라고 하지 않던가요? 아직도 우리나라 사람들 중 '이쑤시개'를 '요지'라고 하는 분들이 있지 않던가요? '양지질'이 비록 '이쑤시개'와 같은 의미로부 터 나온 것이지만, 양지질'과 '이쑤시개'는 원래 다른 뜻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두 단어 모두가 오늘날의 뜻과 동일한 것이지요. '양지질'에 쓰는 치약으로 는 보통 '소금'이나 '초'를 사용하여 왔습니다. 이렇게 '양지질'이 '양치질'로 변화하는 현상을 언어학에서는 보통 '민간어원설'이라고 합니다. 즉 민간에서 어원을 마음대로 해석해서 원래의 단어를 해석하거나, 그 해석된 대로 그 단어를 고쳐 나가곤 합니다. 이렇게 민간에서 잘못 해석한 단어는 무척 많습니다. 여러 분들이 잘 아시는 '행주치마'가 그렇지요. 원래 '행주'는 '삼' 등으로 된 것으로서 물기를 잘 빨아들이는 천을 일컫는 단어인데, 이것을 권율 장군의 '행주산성' 대첩과 연관시켜서, 부녀자들이 '치마'로 돌을 날랐기 때문에 그 치마를 '행주치마'라고 한다는 설이 있지만, 그것은 민간에서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부엌에서 그릇 을 닦는데 사용하는 걸레인 '행주'는 어떻게 해석할까요? 걸레의 하나인 '행주'와 '행주치마'의 '행주'는 같은 단어입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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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사회/문화/인물 |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6장 예술, 그 광기와 죽음 예술가와 정신병 - 광기, 과연 예술의 근원인가 - 모파상 / 슈만 / 휠덜린 / 뭉크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몰아 넣었는가?
예술은 그들 생의 전부이며, 생의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 예술가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영혼에 불을 지피고 자신의 감성에서 뽑아낼 수 있는 한 선율을 뽑아내고는, 애처롭게 지상에 엎어지고 마는 것이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처럼 그들은 잠든 영혼을 고양시키기 위해, 때로는 깊게 내재된 자신의 영성을 고무시키기 위해 악마와도 기꺼이 손을 잡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약과 알코올 중독, 매독과 정신착란은 순서대로 오면서 치뤄내지 않으면 안되는 대가였던 것이다. 로트렉가 에드가 알란 포우, 보드레르는 전형적인 이 코스를 전부 밟았다. 이 세상에서 어떤 병을 알코올 중독과 비교할 수 있으리. 에드가 알란 포우의 말이다. 무소르크스기, 로트렉, 유티릴로도 알코올 중독으로 쓰러졌다. 모파상, 니체, 스메타나는 매독으로 인한 환청과 환시에 시달리며 정신병원으로 가야 했고, 니체는 그로 인해 실명의 고통을 감수해야 했고 스메타나는 나의 조국 을 완성한 뒤 양쪽 귀가 들리지 않았다. 나부 마야 를 그린 스페인 화가 고야도 매독으로 청각을 잃었다. 화가가 눈을 잃고 시인이 말을 잃고 음악가가 귀가 멀다니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끝없는 자살 시도 - 모파상 모파상은 프랑스 노르망디의 해안, 미로메닐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작품들은 노르망디의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게 많았다. 인간의 애욕을 주로 다룬 그의 작품은 심리묘사가 뛰어나다는 게 정평인데 그 역시 절륜의 정력가로 상당한 여성편력자였다. 한 여자와는 한번 만을 고수한 그는 독신이었다. 팔난봉꾼이었던 아버지의 기질을 이어 받았는지 어려서부터 놀기 좋아하고 자유분방한 탓으로 13세 때 신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그의 문학 수업은 어머니 로올이 플로베르와 친분이 있어 연결된 플로베르의 엄격한 가르침에 힘입은 바 크다. 그는 플로베르에게서 배운 냉엄한 객관적인 태도와 세밀한 관찰로, 온갖 계층의 소시민들을 그려 나갔다. 딱딱한 사상을 세우거나, 지나친 기교를 부리거나 하지 않고 순수하게 사실성을 지켜나갔다. 단편 <떼리에 관> <달빛> 장편으로는 <여자의 일생> <베라미> <죽음처럼 강하게>등이 있다. 모파상은 1883년에 쇼펜하우어의 학설에 끌려 살아가는 두려움을 호소하고 심한 정신적 고독에 사로잡혔다. 특히 35세 때부터 신경장애를 나타내는 한편, 편두통, 현기증에 시달려 눈동자가 퍼지기도 하였다. 그는 코카인, 몰핀, 대마초 등 마약을 닥치는 대로 복용하였다. 40세부터는 증상이 심해져 불면증에 시달렸다. 잠이 안 오자 집 주인에게 빵 공장에서 야간작업을 하는 소리가 시끄러워 잠이 안 온다고 일을 못하도록 말려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그 빵 공장은 몇 십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런가 하면 집안에 개가 요란하게 짖자 자기 원고 소리가 시끄러워 개가 잠을 이루지 못한다며 부드러운 종이를 일부러 구해서 펜 소리가 안 나게 글을 써 나갔다. 어떤 때는 거미가 습격한다고 여름철인데도 창문을 꼭 닫았으며 자기 몸속에 보석이 들어있다 하여 화장실 출입을 며칠 동안이나 하지 않은 때도 있었다. 이러한 신경 계통의 비정상적 증상은 난잡한 여성관계로 인한 성병에서 기인한다는 기록이 있다. 1893년, 모파상은 니스에서 새해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그 이튿날, 권총을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하인이 총알을 빼두었기에 무사할 수 있었다. 그는 다시 면도칼을 들어 자신의 목을 긋고는 거울 앞에서 무표정하게 웃어보였다. 하인이 달려오고 의사가 붕대를 감아 목에서 흐르는 피를 멈추게 하였다. 혹시 그가 좋아하는 요트를 보면 좀 나을까 해서 의사는 바다로 내려가게 허락해 주었다. 그러나 그는 바다와 요트 밸아미호 를 보고도 입술만 움직일 뿐, 말을 하지 못했다. 결국 정신병원으로 옮겨져 1893년, 43세의 나이로 영면할 때까지그의 정신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홀로 맞은 임종 - 슈만 독일의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은 라이프찌히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나 작곡에 전념하여 낭만적인 곡을 많이 발표했다. 슈만은 다섯 남매 중의 막내인데 그의 부친은 그가 태어나던 해에 신경질환을 앓게 되어 평생 지병으로 고생하다가 53세에 사망하였다. 모친은 우울증에 걸려 있었고, 슈만의 누이 에밀리는 19세에 자살, 나머지 세 형제들도 모두 병사하고 만다. 슈만의 일곱 자녀들도 대부분 폐결핵이나 류머티스성 질환으로 사망했다. 이러한 슈만가의 정신이상은 그의 부친에게서 소질이 유전된 것이 아닐까 하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는 15세 때, 부친과 누이를 잃고 잇달아 형수와 형의 죽음을 당한 후 폐쇄적인 성격으로 변한다. 17세 때 슈만은 자신이 정신이상이 될 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을 일기 속에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격렬한 충혈, 형용하기 어려운 불안감, 숨막힘, 순간적인 의식상실 등의 쉴세없이 번갈아 일어났다. 그의 과도한 자기분석과 지나치게 복잡한 정신, 높은 교양, 심오한 사상 등이 오히려 창작에 방해가 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왜냐하면 그의 음악은 갈수록 질이 저하되어 1850년 이후의 작품은 아예 창작목록에서 빼는 게 낫다는 비평의 소리가 들릴 정도였으니까. 그는 1953년 7월 결국 신경졸도로 쓰러지고 말았다. 이 사람은 불치의 뇌질환에 걸려 이미 절망적 상태입니다. 음악가의 질병을 연구한 케르너 박사는 슈만의 증세를 정신분열증의 유형을 지니고 있는 전형적인 동맥경화성 정신병 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아내는 그때, 슈만이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일기에 써 놓았다. 밤중에 우리가 잠자리에 든 지 얼마 안되어 남편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사들이 자기에게 들려 주는 노래라고 하면서 오선지에 멜로디를 써 내려갔다. 그런 다음 다시 자리에 눕더니 밤새도록 줄곧 천장만 노려보면서 헛소리를 해댔다. 아침이 되자, 그는 천사들이 악마로 변하여 자신을 지옥으로 던져 버리겠다고 한다며 몸서리쳐지는 노래를 불렀다. 그는 신경발작을 일으켜, 악마들이 마치 호랑이와 하이에나처럼 자기에게 덤벼들어 날카로운 발톱으로 움켜쥔다면서 고통스런 비명을 질러냈다. 두 명의 의사가 와서 가까스로 그를 진정시켰다. 1854년, 병상에 누워 있던 슈만은 비가 내리는 날, 홀연히 집을 뛰쳐나가 라인강가로 나왔다. 다리지기가 통행료를 요구하자 목에 감았던 머플러를 풀어주고는 다리 중간쯤에서 강물에 몸을 던졌다. 강을 오르내리던 증기선이 마침 이를 목격하고 목숨을 건져 주었다. 슈만은 그 후 엔데니히 정신병원으로 가게 된다. 우울증이 너무 심해서 가족의 면회도 금지된 상태였다. 1856년 7월 23일, 엔데니히로부터 슈만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통지가 있었다. 클라라가 영국 연주에서 돌아온 지 보름쯤 되었을 때이다. 클라라는 브람스와 함께 갔다. 거의 2년 만에 남편을 만났다. 클라라를 겨우 알아보는 것 같았으나 나의 -나는 알고 있어 라고만 했을 뿐, 슈만은 죽기 전 몇 달 동안은 발음이 분명치 못했다. 7월 28일엔 심한 정신경련이 종일토록 계속되었다. 클라라와 브람스는 벽의 작은 창문을 통해 그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슈만은 수주일 동안 음식을 거부해왔으나 클라라가 주는 포도주와 약간의 젤리만은 받아들였다. 7월 29일, 화요일 오후 4시, 그토록 힘든 인고의 굴레에서 슈만은 벗어날 수 있었다. 엔데니히 정신병원에 들어온 지 2년 만이었다. 최후의 시간은 아주 조용했다고 한다. 46세. 그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었다. 물론 임종의 순간에는 곁에 아무도 없었다. 30분 가량 지나서 클라라가 달려왔을 뿐이었다. 미망인의 나이는 그때 37세였다.
하늘의 포로가 된 휠덜린 독일의 서정시인 휠덜린은 네카르 강변의 목가적인 작은 마을 라우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수도원의 교사였다. 두 살 때 사별하고, 모친의 재혼에 따른 의부와도 9세 때 사별하는 비운 속에서 성장하였다. 14세의 이 다정다감한 소년은 그 후 10년 동안이나 수도원에 갇혀 엄격한 규칙생활을 체험하게 된다. 열한 살 때 보드레르가 기숙사에서 내 넋은 벌써 금이 갔네 라고 썼듯이 휠덜린은 종은 바람만 불어도 제 몸을 울려 소리를 낸다 고 하였다. 후리후리한 키에 반듯한 이마를 가진 준수한 용모의 휠덜린은 30세가 되어도 여전히 초라한 신학자에다 남의 집에서 기식하며 어머니가 부쳐준 조끼, 손수건, 양말 등에 고마워해야 했다.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시를 쓰려면 사제의 임무직을 겸해서는 안된다는 게 평소 그의 신념이었다. 한편 예술을 희생한다면 또 신이 부여한 본래의 임무에 대해 죄를 짓는 일이라며 그는 괴로워하였다. 얼마 살지도 않았는데, 나의 황혼은 벌써 차가운 숨을 내쉬는 구나(하략)
휠델린은 목사를 그만두고 궁핍함 속에서 글을 쓰며, 가정교사로 스위스와 프랑스 등지를 전전했다. 그러나 이것도 짧은 기간에 불과했다. 육신을 지탱하는 내적인 힘이 약해지면 약해질수록 광기는 점점 그의 신경으로부터 전광처럼 분출했다. 언제인가 그가 시인 마티존의 집을 방문했는데 얼굴은 시체마냥 창백하고 피골이 상접했으며, 마치 거지와 같았다. 귀신같은 몰골에 놀라 뒤로 물러나니 희미한 소리로 휠덜린 입니다 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는 튀빙겐의 어느 정신병원으로 끌려갔다. 1년 후, 망령의 몰골로 다시 나타나 튀빙겐의 거리를 쏘다녔다. 어느 목수가 자기 집에 데려가 기거하게 하였다. 그가 뱀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이 나돌았다. 정신착란을 일으켜 하늘의 포로 가 된 이 시인은 36년간이란 세월을 어둠 속에서 음울하게 살아야 했다. 머리는 백발이 다되었고 우아함도 이미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이 시인을 알아보는 사람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아무도 없었다. 그가 73세로 몸을 뉘이고 숨을 거두었을 때, 누더기를 입은 수공업자들이 죽은 시인을 묘지로 운반해 갔다. 그의 수 많은 원고는 물론 아무렇게나 취급되어졌다. 독일어는 그의 시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정점에 도달해 있다. 그런 찬사는 그가 가고 난 뒤의 일로, 그와는 이미 상관이 없었다.
여성 공포증, 그리고 독신남 - 뭉크 나의 가정은 병과 죽음의 가정이었다. 확실히 나는 이 불행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질병, 발광 그리고 죽음은 나의 요람을 지키는 천사들이었다. 그들은 내 일생동안 줄곧 따라다녔다. 나는 일찍부터 삶이 가지는 비참하고 위험스러운 점을 알게 되었으며, 또 지옥에 죄의 자식들을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벌에 대해서도 배웠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군의였으며 오슬로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었다. 그가 5세때 어머니는 폐결핵을 세상을 떠났고, 한 살 위이던 누나 소피에도 폐병으로 14세에 요절, 여기다 어린 시절, 그런 일을 여러 번 겪었기 때문에 뭉크의 죽음을 응시하는 눈은 점점 내향적으로 되었다. 그는 죽음을 자기 자신 속에 숨어었는 것으로 의식하였으며, 그래서인지 작품에서는 유난히 죽음에 관한 소재가 많았다. 죽은 사람을 누인 베드 여러 장 그린 병든 아이 , 병실에서의 죽음, 저승에서 자화상 등 죽음을 응시하는 눈이 밑바닥에 깊게 깔려 있음을 느끼게 한다. 유채화나 판화에서 자주 그리던 병든 아이는 그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누이의 영상이었던 것 같다. 뭉크의 아버지는 원래 성격이 편벽되고 이상성이 그 기질에 숨어 있었다. 스무 살 아래이던 아내를 잃게 되자 그는 때로는 미친 사람처럼 아이들을 때리기도 하고 이상하게 굴었다. 끝내 독신이던 뭉크도 여자들이 부드럽게 대하면 대할수록, 어떤 일종의 공포감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여인들이란 영원히 남자를 잡아먹으며 살고 있는 일종의 흡혈귀 로 생각했다. 한 여인과 살고 있는 남자는 어딘가 모르게 죽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뭉크는 80세의 긴 인생을 혼자서 보냈다. 이러한 삶에 대한 내향적인 태도에서도 뭉크의 노이로제적인 성격을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내가 뭉크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1960년, 꺄뮤의 <시지프스의 신화>라는 책 표지에서였다. 그것은 뭉크의 절규 였는데 오슬로의 국립미술관에서 그 원화를 대할 기회가 내게도 주어졌었다. 그림 앞에 서니 어떤 괴기감이 정말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것만 같았다.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무엇에 놀란 듯 몸을 뒤틀면서 큰 소리를 지르며 사람 같지 않은 형체가 불쑥 다가오는데 그때 유혼 이란 낱말이 떠올랐다. 뭉크는 절규 를 그리고 나서 이렇게 일기에 썼다.
어느 날 저녁 때 나는 길을 걷고 있었다. 한쪽에 도시가 퍼져있고, 피요르드가 내 앞에 있었다. 나는 지칠대로 지쳐 기분이 좋지 않았다. 멈추어 서서 피요르드를 둘러보았다. 해는 서산에 지고-구름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피처럼, 나는 자연을 뚫고 들려오는 절규 같은 것을 느겼다. 나는 절규를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이 그림을 그렸다. 구름을 진짜 피처럼 그렸다. 색채가 절규했다.
뭉크는 정신장애를 일으켜 자주 피해망상증에 시달렸다. 45세 무렵이었다. 여성으로부터 쫓기며 시달림 당하는 느낌을 가졌고, 친구 누군가가 자신을 해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의심에 빠지곤 했다. 어디에 있어도 안주할 수 없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술을 마셔야 하는 생활이 되풀이 되었다. 1907년, 독일에서 아홉 달 가까이 정신과 치료를 받고 발트해 연안의 한 마을에서 휴양을 취해야 했다. 이듬해에는 코펜하겐에 있는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그 후 오슬로의 피요르드 호숫가에 집을 마련하여 그곳에서 풍경화를 많이 그렸다. 그의 그림의 모티브는 역시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예술가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광기에 시달리면서도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때로는 창작의 원동력을 얻어내고 예술을 위해서는 또한 기꺼이 소진되었던 것이다. 그 중에는 제일 긴 망각의 늪에 갇혔던 사람도 있었다. 까미유끌로델과 휠덜린 그리고 러시아의 춤꾼 니진스카가 그들이다. 30년이 넘는 세월 뒤에야 그들은 비로소 철창에서 부터 해방될 수 있었으니까. 핏빛으로 그려 낸 뭉크의 절규! 이러한 것들이 그들의 생존이었으며, 한편 예술이 아니었던가 싶다. 죽음 직전에 뿜어내는 마지막 광휘를, 그들의 선혈을 보는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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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35. 미국인들은 홍차를 마시지 않는다.
미국 사람들은 홍차를 마시지 않고 커피를 마신다. 그리고 미국의 상점에서 홍차를 주문하면 의아한 눈길로 쳐다본다. 반대로 영국인은 하루 평균 여섯 잔의 홍차를 마신다고 한다. 주로 영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인 미국인들의 관습이 이토록 다른 것은 왜일까? 이것은 미국의 독립 혁명의 와중에서 생긴 관습이다. 17세기 이래 종교적, 정치적 자유를 원하는 청교도와 사업으로 한몫 잡으려는 사람들이 영국에서 북아메리카의 동부 해안으로 이주했다. 이리하여 18세기에는 13개 지역에 식민지가 건설되었다. 영국은 식민지마다 총독을 임명했으나 실제로 간섭하는 일은 없었다. 식민지는 각기 의회를 가지고 자치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18세기 중엽 이후 영국의 정책이 바뀌었다. 재정난을 해결하고자 식민지에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는 등 중상주의 정책을 강화했던 것이다. 이에 식민지인의 불만은 점차 높아져 갔다. 모든 문서에 인지를 붙이도록 한 인지법(1765)은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버지니아 의회가 인지법 반대 결의안을 가결했다. 대표가 참가하지 않은 영국 의회로부터의 과세는 부당하며 식민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단정한 이 결의안은 식민지를 가로질러 모든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대표 없이 과세 없다.” 이것이 반대 운동의 표어로 자리 잡았다. 영국 의회는 다음해 인지법을 폐지했지만 본국이 식민지에 과세할 권한이 없다는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해에 각종 수입품에 세금을 부과했지만 불매 운동이 일어나 1770년 이것마저 폐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차에 대한 세금은 남겨 두었는데 이것은 본국의 과세권의 상징적 표현이었다. 반대로 식민지의 입장에서 보면 차에 대한 세금은 억압의 상징이었다. 게다가 1773년 영국 정부는 차의 판매 독점권을 동인도 회사에 넘겨 주었다. 식민지인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다. 1773년 12월 16일 밤 보스톤 항에 정박한 세 척의 동인도 회사 배에 인디언으로 가장한 50명의 사람들이 몰래 올라갔다. 이들은 차가 든 300개 이상의 상자를 바다에 던져 버렸다. 이것이 이른바 보스톤 차 사건이다. 본국에 대한 분노가 차에 대한 분노로 폭발한 것이다. 이 사건이 미국인들이 차를 마시지 않고 대신 커피를 즐기게 된 역사적 뿌리이다.
이후 본국과 식민지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식민지 대표들은 1774년 9월 대륙 회의를 필라델피아에서 열었다. 식민지인의 자치와 권리를 지키겠다는 점에서 56명의 대표들의 생각은 일치했다. 만약 본국 정부의 정책이 완화되었다면 전쟁으로까지 발전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국의 입장은 강경했고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최초의 무력 충돌은 이듬해 4월에 발생했다. 독립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보스톤 서쪽 콩코드에 있는 무기고를 파괴하기 위해 출동한 영국군과 식민지 민병대가 일전을 벌였다. 6월 제2회 대륙 회의는 워싱톤을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이듬해인 1776년 7월 4일 대륙 회의는 <독립 선언서>를 공포했다. 주로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기초한 독립 선언은 그 앞 부분에서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생명 자유 행복을 추구하는 천부의 권리를 가지며, 정부는 피치자의 동의에 의하여 이러한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수립된 것이고, 따라서 정부가 그러한 목적을 파괴하는 경우 이를 폐지하고 새로운 정부를 세울 권리가 있다고 했다.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원칙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는 이 문서는 이후 프랑스 혁명의 <인권 선언>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독립 전쟁이 시작되자 식민지인들은 독립을 원하는 애국파와 영국을 지지하는 충성파로 갈라졌다. 하지만 식민지인의 다수는 애국파를 지지했다. 초기에 불리했던 식민지군은 1777년 사리토가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를 계기로 국제 정세도 식민지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프랑스가 식민지편에 가담했고 러시아를 비롯한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무장 중립을 선언했다. 고립된 영국은 요크타운 전투에서 크게 패했고 1783년 파리 조약으로 13개 식민지의 독립을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써 민주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하는 신생 미합중국이 탄생했으며 <독립 선언서>를 공포한 7월 4일은 독립 기념일이 되었다.
미국 독립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던 보스톤 차 사건은 커피를 마시는 미국인의 일상 생활에 깊게 새겨져 있다. 오늘날 보스톤 항구에는 당시의 배를 재현한 배가 정박해 있으며 관광객은 돈을 내고 차 상자를 바다에 던지기도 한다. 차이가 있다면 차 상자 안이 비어 있으며 나중에 그물로 건져 올린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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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제2장 살아나는 용의 혼
5. 덩달아 중국제재에 나선 일본
일본은 비록 지리적으로는 아시아에 속하지만 정치개념으로 보면 서구 국가의 동맹이다. 특히 주의할 것은, 중국을 제재하려는 미국의 움직임에 일본이 의식적으로 끼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94~95년에 걸쳐 중국이 두 차례의 핵실험을 하자 일본에서는 중국이 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으니 대중국원조를 중단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졌고, 어떤 정치가는 대중국차관까지도 완전 동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인이 공공연하게 군사적으로 중국을 위협하고 있다면, 일본은 경제적으로 중국을 제재한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은 과연 핵실험을 할 권리가 없는 것일까? 프랑스, 중국. 영국, 미. 러시아 등 5개국이 핵실험 전면금지조약에 아직 서명도 안 한 상태이고, 중국 정부는 일단 이 조약이 발효되면 핵실험을 즉각 중단하겠다고 선포한 바 있다. 그러므로 중국의 핵실험은 법률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다. 미국이 1천8백 회 이상 핵실험을 한 데 비해 중국은 겨우 44회를 했을 뿐이며. 중국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도 미국의 1.2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은 1964년 10월에 첫 번째 원자탄을 터트린 이후 핵무기를 먼저 사용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밝혔으나, 미국은 지금까지 이와 유사한 약속을 한 적이 없다. 한국전쟁중 미국은 중국에게 핵무기를 사용하겠다고 여러 차례 협박하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중국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목적은 핵의 독점을 막고 외세의 침략을 방어하려는 것으로 정당한 행위인 것이다. 중국 총리 리펑(李鵬)은 1995년, 일본의 중 .일 경제협회의 방문단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일본 군국주의 침략자들은 중국에 큰 손실을 안겨주었다. 이는 일본이 중국에 제공하는 차관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막대한 것이었다. 중국의 핵실험에 지나치게 민감한 반웅을 보여 경제적으로 중국에 압력을 가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솔직하게 말한 적이 있다. 이는 틀리지 않은 말이다. 과거에 일본은 중국을 침략하여 최소 1천억 달러 이상의 손해를 입혔다. 일본은 대중국원조나 차관을 동결하는 수법으로 중국을 제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발상이다. 중국은 아직 현대화의 길을 모색하는 과정에 있으므로 외부의 원조가 필요한 처지이다. 그러나 소련이 기술인력을 철수할 때도, 미국이 중국에 대해 경제봉쇄를 시행할 때도 중국은 절대 고개를 숙인 적은 없었다. 일본이 원조를 동결하는 방법으로 중국을 위협하려 하는 것은 일본이 중국의 경제발전을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제거리도 아닌 핵실험을 들고 나와 중국제재의 대열에 끼어든 것이다. 또 중국 핵실험문제로 논쟁을 벌이는 한편, 일본 국내언론은 중국 동해의 조어도(釣魚島) 주권문제를 들고 나와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심지어는 이 문제에 대해 미국이 간섭해 줄 것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대만 북단에 위치한 조어도는 줄곧 대만의 부속도서로 여겨져 왔으며 역사적으로도 중국의 영토였다. 갑오전쟁 이후 대만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 이 섬도 자연히 일본에게 뺏기게 되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대만은 중국에 되돌려졌고 조어도는 너무 작고 사람이 살 수도 없는 섬이어서 그 귀속권문제를 중 . 일 어느 나라도 문제 삼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70년대에 이르러 섬 부근에서 석유가 탐사되자 비로소 주권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유엔의 아시아 및 원동경제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조어도 주변해역의 석유 매장량은 대략 44억 배럴에 이른다고 한다.자원이 빈약한 일본으로서는 탐을 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중 . 일 국교수립 이후 일본은 이 섬이 일본에 속한 것임을 분명히 해 줄 것을 중국에 여러 차례요구하였다. 중 . 일 외교 정상화를 위해 중국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기도 하고 공동개발과 같은 제의를 하기도 하였다. 이는 대국의 아량을 보여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우리의 영토를 나눠줄 생각은 없다. 우리는 이 작은 섬에 연연해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섬은 작지만 국가의 주권은 작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친구가 베이징 거리에서 이상한 현상 하나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거리를 가득 메운 일본의 '크라운 "브루버드 "두크'와 같은 자동차들이 미국에 있는 동류의 일본차보다 품질면에서 뒤떨어진다는 사실이었다. 이 차들의 엔진이나 기어박스는 같다 할지라도 다른 부문에서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고 한다. 이 유학생의 일본제 니산자동차는 미국에서 11년을 달린 차였으나 차체의 도장상태는 여전히 사람 의 그림자가 비칠 정도로 좋았다고 한다.그러나 중국에 있는 일본의 '브루버드'는 이런 차가 한 대도 없었다.그는 이런 현상은 보존상의 문제가 아니고 품질의 문제라고 생각하였다. 1984년부터 일본자동차의 연료시스템은 전자분사장치를 장착하였으나 80년대말 중국에 수입된 '브루버드'는 여전히 기화기를 사용하였다. 그는 니산자동차회사의 중역과 이런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펄쩍 뛰었다 한다. 하지만 그 유학생이 구체적인 사례를 들자 중역은 난감해 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학생은 매우 분개하여 '일본인은 일류상품은 구미에 수출하고 이류상품은 자신들이 쓰고 삼류상품을 중국인에게 팔고 있다'고 했었다. 1년 전에 베이징의 {중화공상시보}는 이 유학생의 견해를 증명해 주는 보도를 실은 적이 있다. 한 회사원이 혼자 자동차를 몰고 가다가 벽에 부딪히는 사고가 일어났다. 운전자가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이 차의 문제점이 드러났다. 핸들에 부착된 에어백이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은 것이다. 이 회사원은 혼다의 베이징사무소를 찾아갔으나 일본측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최소한의 성의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에어백이 펴지지 않은 것은 자동차가 충돌할 당시 일정한 속도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변명하였다. 그러나 자동차전문가에 따르면 이런 논리는 성립될 수 없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자동차가 벽에 구멍을 낼 정도로 부딪혔다면 당시 속도는 상당히 빨랐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는 것이다, 만약 미국에서 이런상황이 벌어진다면 일본 자동차회사는 차주를 위해 수리기간 동안 동료의 자동차를 무상으로 임대해 준다는 것이다. 이 보도가 있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의 한 독자가 {중화공상시보}에 편지를 보냈다.그는 일본 컬러Tv 한 대를 구입하였으나 얼마 안돼 화면이 컴컴해져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곳에 호소하였으나 아직까지 아무런 응답이 없다는 것이다. 현재 중국의 거리에는 비싸게 수입한 일본차가 달리고 있으며, 웬만한 중국 가정이면 일본제 가전제품이 적어도 한 대 이상은 있다. 고급간부들은 어떻게 해서든 일본차로 바꾸려 한다. 어떤 사람이 '50년 전 일본은 군사적으로 중국을 쳐부수었지만, 50년 후인 지금은 경제적으로 중국을 쳐부수고 있다'라고 분노한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다. 세계적인 무역개방 속에 품질이 더 낫다고 생각하여 일본차를 사는 것에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경우도 있다. 중국 기자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아주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서울의 거리를 달리고 있는 차들은 대부분이 한국산 자동차였고 외제차는 거의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다. 한국인이 국산차를 선호하는 것은 결코 정부의 강요 때문만이 아니라, 국민들의 애국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미국이 한국의 자동차시장을 개척하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지금까지 매년 2천여 대 정도 밖에 팔리지 않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은 한국차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미국으로 이민을 간 후에도 미국차를 사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생산한 차를 세계 각국에 파는 일본에 대해 좀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미국은 일본의 자동차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일본과 자동차 무역협상을 벌이고 있으나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하자. 무역제재를 가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리하여 겨우 기본적인 타협을 보게 되었고 일본은 많든 적든 양보를 하였다. 그러나 미국 자동차회사의 대일본 연간 판매량은 1만 대를 넘지 못하는 수준이다. 국산품 사용을 주장하는 것이 민족주의로 간주된 적은 아직까지 없었다. 하물며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진정하게 하나된 세상도 아니므로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특히 중국은 이제 막 자동차공업을 일으키려는 힘겨운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이에 국민 개개인의 관심과 보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중국대표가 제네바에서 우리의 초보적 단계에 있는 민족공업을 보호하기 위해 침이 마르도록 외치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근로자들이 피땀 흘려 번 외화로 자동차나 기타 제품을 수입 해 오면서 몇 푼의 관세를 거둔다 한들 이것이 우리 민족공업에 무슨 보 탬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닉슨은 그가 저술한 책에서 일본 상인에 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 적이 있다. '그들은 경제개발원조와 투자 및 기술이전으로 다른 나라가 발전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중국 기업들은 여러 번 손해를 본 후에야 일본 기업과 합작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일본에서 기계를 구입하면 생산을 위해서 또 원료를 수입하여야 한다. 그들이 말하는 합작이란 것에 중요한 기술의 이전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런 관점에서 일본인들은 결코 진실한 적이 없다. 드골은 그를 방문한 일본 수상에게 '반도체 외판원'이라고 꼬집어 말한 적이 있는데 이는 정말 일본인의 본성을 잘 지적한 것 같다. 일본인들은 중국에 얼마나 많은 자동차와 Tv를 팔 것인가에 관심이 있을 뿐 기술을 이전할 생각은 아예 없었다. 합작은 쌍방이 모두 원하고 서로에게 이익이 있어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일본은 합작의 파트너로서 적합하지 않다. 중국은 모든 중국인의 것이다. 일본차를 타고 일본 전자제품 쓰는 것을 즐거움으로 생각한다면 중국인은 결코 위대한 민족이 될 수 없다. 중국인 스스로가 자국 기업을 보호하지 않고 외국 상품을 선호한다면 위대한 국가가 되고자 하는 중국의 꿈은 영원히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다. 중국의 민족기업이 외국의 힘에 의해 무너져 버린다면 중국인들은 무엇으로 일본산 자동차와 전자제품을 살 수 있겠는가? 일본은 경제뿐만 아니라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중국제재의 행렬에 끼어들고 있다. 일본자위대는. 계급장을 붙인 제복차림이 23만 명이고 평복의 사무원과 기술관이 2만 5천 명이나 된다. 그 중 육상자위대는 13개 연대에 모두 15만 명의 군인과 1천2백 대의 탱크를 보유하고 있다. 군인의 수는 영국을 훨씬 능가하고 탱크 수량도 영국과 프랑스를 능가하고 있다.해상자위대는 160대의 군함을 가지고 있어 그 규모면에서는 영국과 이탈리아를 능가하는 세계 3위의 수준이고, 항공자위대는 512대의 작전용 비행기가 있어 영국이나 이탈리아의 수준과 비슷하다. 또 군비는 N A T o 의 표준에 따라 계산한다면 미국 다음으로. 세계 2위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일본의 자위대는 전세계에서 몇 안 되는 군사대국이다'고 밝힌 바 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일본을 점령한 맥아더는 요시다 수상에게 서신을 보내 혼란한 일본사회의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 7만 5천 명의 경찰예비군을 창설하라고 명령하였다. 같은 해 8월에 경찰예비군이 창설되었고 일본은 이때부터 군비증강의 발걸음을 내디볐던 것이다. 해상경비대를 창설한 지 2년이 지난 1952년, 일본은 방위청을 신설하고 육상과 해상무장부대를 육상자위대와 해상자위대로 개명하는 동시에 항공자위대를 신설하였다. 이때부터 일본의 육 .해 .공 삼군의 틀이 황립되었으며 이후 끊임없는 발전을 거듭하였다. 자위대의 창설은 미국이 일본의 전범들에 대해 더이상 그 죄를 묻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 아시아에서 미국세력을 확장하려는 전략적 목적에서 나온 것이다. 한국전쟁 때 일본은 미국의 병참기지가 되어버렸고 얼마 후 미국은 일본과 '미 .일 안전조약'을 체결하여 법의 형식으로 일본을 미국의 세계전략체계 내에 포함시켰다. 1987년 당시 일본 수상인 나카소네는, 1976년 확정한 군비지출계획을 파기하기에 이르렀고 이후 일본의 군비지출은 계속 증가하였다. 1991년일본의 군비는 343억이었고 1995년에는 더욱 증가하여 472억 달러에 이르게 되었다. 군비가 급속도로 증가함에 따라 군사장비 역시 현대화되었다.군사증비의 교체기간은 이미 미국을 앞질렀다.일본 육상자위대는 최신형 89식자동소총을 영관급 이하 장병에게 지급하였고, 1995년 말에는 24대의 미국산 패트리어트 지대공미사일을 배치하였다. 육상자위대가 보유하고 있는 최신예 화생방차량은 현재 미국에서조차 만들지 못하는 것들이다. 해상자위대는 현재 최신형 일반 동력잠卞함을 16대나 보유하고 있다.중국과 가장 가까운 나가사키(長峰) 현의 사세보(佐世保)에는 세계에서 가장 진보된 구축함을 정박해 놓고 있으며 앞으로 3대를 더 배치할 계획이다. 일본의 구축함은 규모면에서 아시아 최대일 뿐 아니라 수뢰제거능력 역시 최강이다. 대잠수함작전능력 역시 미국과 러시아 다음이다. 항공자위대는 현재 160대의 F16전투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그 보유대수는 미국의 다음이다.게다가 차세대전투기 FS 기종을 미국과 공동으로 연구 제작하고 있으며 1998년에는 130기를 배치할 예정이다. 일본은 현재 100 대의 대잠卞함순찰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전국 28개 항공감시소에 자동경보시스템을 설치하고 있다, '포츠담 선언'의 규정에 의하면 일본의 방위영역은 일본 본토 4개 섬으로 국한되어 있었으나. 80년대 이후 소리 소문 없이 그들의 방위영역을 태평양 가운데의 괌과 바시해협 주변까지 확장하였다. 이는 실질적으로 일본이 준수해야 할 방위원칙이 변화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1992년9월부터 일본은 '국제사회에 공헌하기 위해 "유엔평화유지군에 협조하기 위해'라는 구실하에 11차례에 걸쳐 자위대를 해외로 파견하였다.해외파병을 금지한 일본헌법의 조항은 이미 폐기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경제 및 군사면에서 일본은 대국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근래 '군사력을 이용한 국제사회에서의 책임'을 계속 강조하고 있으며 유엔안보리의 상임이사국이 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일본은 군사력 증강을 위해 갖가지 구실을 붙이고 있다. 즉 한반도 및 남사군도와 일본 북방의 영토문제 등과 같이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산적해 있기 때문에 이의 해결을 위해서는 일본의 군사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논리이다. 일본은 미국이 내세우고 있는 '중국위협론'까지도 군비확충의 구실로 삼으려 하고 있다. 1989년 일본 수상부(首相府)는 1차 여론조사를 실시하여 '중교은 군사대국'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1991년부터 일본의 방위 백서에서는 중국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1995년 일본방 위 백서는 '중국의 해상 활동범위 확장에 대해'주의할 필요가 있음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일본 방위청 방위국장 아키야마(秋山昌廣)는 '자위대의 질을높여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도록' 하여야 한다고 했다. 일본은 미국과 공동으로 작전지역의 미사일방어계획을 연구하는 등의 구체적 행동을 보이고 있다. 그들이 선택한 4개의 방안 중 3개 방안의 목표가 중국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 방위청은 이를 위해 미사일 방위연구실을 신설하였으며. 이 연구실은 '먼저 중국 미사일의 위협 요인을 분석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일본의 전 방위청장 미야다케(宮竹理勝美)는 냉전시대 자위대의 훈련은 소련을 가상의 적으로 하여 이루어졌던 것을 인정한 바가 있다. 그러나 지금 일본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져, 현재 방위심의관을 맡고 있는 오모리(大森敬治)는 '일본은 냉전 후의 주변 환경에 대한 상세한 분석을 통해 자위대의 군사력을 재배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즉각 서부에 우선 배치하자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일본이 세계에서 제일 진보된 구축함을 중국과 가장 가까운 사세보에 배치한 것과 그들의 미사일방어 계획등으로 보면,중국은 분명히 일본의 '가상 적국'이 되어 있다. 중국은 이러한 일본에게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는 태도를 견지하면서 러시아 및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과 긴밀한 협조를 통해 대웅함으로써 일본 군사력의 위협을 막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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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어머니의 마음
깊은 숲 속에 커다란 호수가 하나 있었고, 그 호수에 큰 뱀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 호수에 외로운 청년 한 사람이 와서 쓸쓸하게 서 있다가 돌아갔다. 뱀은 그 청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내가 만약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저 불쌍한 청년을 위로해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청년은 호숫가에 자주 찾아왔다. 늘 골똘한 생각에 잠겨 오랫동안 호숫가를 거닐다가 돌아갔다. 뱀은 갈수록 청년에게 마음이 끌렸다. 어떻게 하면 청년의 아내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밤을 새웠다. 하루는 뱀이 호수를 지키는 신을 찾아갔다. "저는 저 외로운 청년의 아내가 되고 싶습니다. 부디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 신은 뱀을 아름다운 여자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한 가지 단서를 붙였다. "이제 저 청년을 따라가서 그의 아내가 되어라. 그러나 네가 아기를 낳으면 다시 뱀이 되어 호수로 돌아와야 한다." 뱀은 청년과 깊은 사람을 나누었다. 꿈 같은 세월이 흘러 지나갔다. 뱀은 마침내 아기를 낳게 되었다. 이제 다시 본디의 뱀이 되어 호수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뱀은 눈물을 흘리며 청년에게 자초지종을 다 고백했다. 그리고 자기의 아름다운 한쪽 눈을 뽑아 아기의 장난감으로 남기고 다시 호수로 돌아갔다. 청년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열심히 아기를 보살폈다. 아기의 손엔 늘 어머니의 눈을 쥐어 주었다. 이상하게도 그 눈알을 가지고 놀면 아기가 탈없이 잘 자랐다. 그런데 한번은 아기가 그 소중한 어머니의 눈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청년은 하는 수 없이 아기를 안고 호숫가로 가 뱀을 불렀다. 그러자 뱀이 나타나 나머지 하나 남은 눈알을 마저 뽑아 주면서 말했다. "저는 이제 앞 못보는 장님입니다. 부디 잃어버리지 마시고 소중히 간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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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 하나로 적어도 48킬로미터 길이의 선을 그을 수 있고 50,000단어 이상 쓸수 있지만, 연필의 평균 수명은 1/10밖에 안된다.
바닷물 속에는 5,250,000,000,000톤의 광물이 있다.
체온에도 녹는 금속 칼륨(galium)은 30℃에 녹는 희귀한 금속이다. 손에 쥐고 있으면 곧 녹는다.
알루미늄, 비행기 날개를 만드는 데 쓰이는 알루미늄은 1평방인치가 40,823킬로그램의 무게를 견딜 수 있다. 또 알루미늄은 하도 가늘게 뽑아낼 수 있어서 680그램으로 지구를 한 바퀴 이을 수 있을 정도이다.
다이아몬드가 실제로 형성되는 곳은 땅속 깊이 130킬로미터 아래에서이다. 그러나 화산이 폭발할 때 함께 땅 위로 올라와 있기 때문에 발견하기 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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