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첫쪽 ♧……………독서편지 T기본글꼴 기본글꼴✔ 나눔고딕✔ 맑은고딕✔ 돋움✔ ✔ 뷰어로 보기 2006.12.08 01:33 【독서편지】: 제 79 호 風磬 조회 수 7,478 추천 수 22 댓글 0 게시물 주소복사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독서편지】: 제 79 호4339.12.08 (10.18)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용량제한으로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나가 보이지 않습니다.않보이시는 분은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문학소식 제1회 비룡소 블루픽션 상 작품 모집 글터 → 명언 / 격언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당신의 존재를 위해서뿐만아니라 당신과 함께 있는 나의 존재를 위해서도. /로이 크로프트 글터 →사회/문화/인물 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제 3부 개화와 항쟁 소설 <상록수>의 여주인공 - 최용신(1909-1935)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모델이 되었던 여성 농촌 운동가 최용신은 멸사봉공의 한 표상으로 이 땅의 여성사에 기념비적인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1909년 8월 함경남도 원산의 두남리에서 태어난 용신은 최창희의 5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원산의 명사십리 어귀, 포플러 숲이 울창한 두남리에서 그녀는 한 폭 그림 속의 꿈많은 소녀처럼 유년 시절을 보내었지만 집안 사림이 기울 대로 기울어서 어려움이 많았다. 할아버지대만 하여도 용신의 집안 형편은 넉넉한 편이었다. 할아버지는 기울어 가는 국운을 바로잡기 위하여 사재를 털어 덕원에다 학교를 세우고후학을 길러 내었다. 그러나 일제의 간섭과 경영의 어려움은 급기야 학교 문을 닫게 하였고, 그 여파로 아버지대에 이르러서는 끼니를 잇기조차 힘들었다. 용신은 집에서 10여 리나 떨어진 학교를 점심 도시락도 없이 걸어서 다녀야 했다. 명사십리와 해당화로 에워싸인 아름다운 고장에서 소녀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본다거나 부푼 꿈을 펼쳐 본다기보다 의식주의 어려움을 안고 오로지 학교 공부에 매달려야만 하였다. 용신은 그런 가운데서도 학교 안의 도서관 일을 보아 주고 학비를 마련할 수 있었고, 마침내 1928년 봄에 누씨 여자 고등 보통 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학교 성적 가운데서 성경은 매학기마다 만점이었다. 용신의 꿈은 누씨 학교 시절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다. 담임 선생이 졸업 후의 희망을 물어볼 때마다 "농촌 계몽에 일생을 바치겠다"는 것이 그녀의 확고한 대답이었다. 누씨 학교를 거쳐 용신은 서울에 있는 감리교 협성 여자 신학교에 입학한다. 신학교의 황애덕 선생은 농촌 사업장을 개척하기 위한 실습지를 황해도 수안에다 마련했다. 용신은 김노득과 함께 장한 뜻을 품고 황해도로 내려갔다. 그 길은 용신이 농촌에 첫발을 옮겨 놓은 신념의 길이었고 봉사의 길이었으나, 결과는 그녀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무지한 농민들은 학교 교육을 받은 기독교 신자의 조건 없는 봉사를 선뜻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첫 무대에서 고배를 마신 최용신은 탈진된 상태로 서울에 돌아왔다. 그녀가 두 번째로 택한 무대는 경상북도 포항이었다. 비록 단기간이기는 하였으나 포항 옥마동에서 농민을 상대로 한 실습 계목은 성공적이었다. 용신은 차츰 자신을 얻어 갔다. 1931년 10월, 용신이 YWCA 농촌부 사업지로 경기도 수원 샘골로 파견되었을 때 그녀의 가슴은 전에 없이 뛰었다. 샘골은 가난했지만 오래 전부터 기독교가 들어와 있다는 점이 그녀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는지도 몰랐다. 가을날의 샘골은 모든 농작물이 여물어 있듯 풍성하게만 보였다. 수인선 일리 역에서 차를 내려 수원 쪽으로 철도를 끼고 한 5리쯤 되돌아가면 조그마한 동산 아래 20호 남짓한 마을이 나타나는데 이 가난한 마을이 용신이 찾아간 봉사의 땅이었다. 샘골 주위로는 구룡동, 오목동, 이동, 각골 등 올망졸망한 마을이 둘러싸고 있었는데, 샘골은 그 중에서도 가장 빈한한 마을이었다. 한 가지 색다르게 보이는 게 있다면 오래 전부터 기독교가 들어와서 예배당이 하나 서 있는 것이 이채로웠다. 이 샘골 예배당은 감리 교회 미국 선교사 밀러 목사의 담당 구역이었는데, 학교에 들어가지 못한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순회 강사를 시켜 교육을 시켜 본 결과 성적이 매우 양호했으므로, YWCA에서 농촌부 사업부로 결정을 본 것이었다. 용신은 샘골에 닿자마자 이곳에다 자기의 온 정열을 쏟아 넣으리라 다잡아먹었다. 비록 협성 여자 신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서울을 떠나온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그도 잠시, 샘골에 닿은 이튿날부터 활동을 개시하였다. 용신의 대상은 물론 농민들이었으나, 먼저 그녀는 샘골의 자연 형태와 민심을 살폈고, 농민들의 생화 형편이며 인근 마을 유지들의 움직임도 함께 살폈다. 유지들을 찾아가 앞으로 자기가 해 나갈 계획을 설명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다. 용신이 유지들을 잡고 자기 계획에 찬동해 줄 것을 요청했을 때 유지들은 대개 그녀의 이야기를 귀밖으로 들었다. 그런 가운데서 용신은 항상 민죽의 장래를 염려하고 있는 염석주를 만나게 된 것을 무엇보다도 기쁘게 생각했다. 용신은 염석주 한 사람한테서 격려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농촌 계몽의 보람을 느꼈다. 1931년 10월 11일은 용신이 샘골 예배당을 빌려 아동의 초보 교육을 실시한 날이었다. 처음에는 한글과 산술, 성경, 노래 등을 가르쳤고, 얼마 뒤에는 도화와 습자, 수예 등을 가르쳤다. 용신은 자신이 생겼다. 늘어나는 아이들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없어서 오전반.오후반.야간반 3부로 나누어 가르쳐야 했을 때 그녀는 자기의 헌신이 결실을 보게 되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야간반에는 마을의 머슴과 나이든 총각들을 비롯하여 아낙네와 노파들까지 한 반이 도어 용신의 가르침을 받았다. 실상 그들은 처음에 구경 반 비웃음 반으로 모여든 사람이었는데, 그 비웃음과 구경꾼의 자세는 시일이 지나면서 진지한 자세로 바뀌어져 갔다. 용신이 미신 타파를 들고 나오거나 생활 개선을 주장할 때면 새파랗게 젊은 처녀가 무엇을 알겠느냐는 표정들이었고, 조상 대대로 구습에 젖어 살아왔어도 아무 탈이 없었다는 투로 소극적이었으나, 이러한 변화는 열정과 농촌을 개화시키려는 집요한 신념으로 이루어진 셈이었다. 원래 농민이란 배운 것이 없는 무식꾼이지만 그들이 지니고 있는 마음은 착한 법이어서 완고할 때는 완고하더라도 무너질 때는 또 쉽게 무너지고는 했다. 그리고 그들은 감동할 줄 아는 선량한 사람들이었다. 최용신의 조건 없는 봉사 정신과 소박하고 성실한 노력에 그들은 끝내 감동하고 말았다. 이제 최용신은 구경거리로서의 계몽꾼이 아니었다. 시일이 지날수록 그녀는 마을에서 필요 불가결의 존재로 부각되어 갔다. 용신은 상냥한 처녀였다. 그런가 하면 그녀는 함부로 범하기 어려운 엄격한 일면이 있었다. 대민 관계에 있어서도 그처럼 부드러운 여성은 없을 정도였으나 웬걸, 그 부드러운 성품 속에는 칼날처럼 예리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마을 의 모든 힘은 용신의 주위로 집결되었다. 세력이 있는 사람들은 용신이 농민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데 시샘을 하였으나 결국에 가서는 용신의 봉사 정신을 이해하고 그녀에게 굴복해 왔다. 사심 없이 일하는 용신이 그들 세력 있는 자들의 적수일 수는 없었고, 그 지방의 개화를 위해 헌신하는 용신에게 끝내는 협력하고 동조하였다. 이듬해 1932년 5월, 용신은 강습소 창설 인가를 받았다. 그녀가 가르치는 학동의 수가 수용 인원보다 60여 명이나 초과하여 결국 새학원을 지어야겠다는 결심을 갖게 되었다. 한가위를 맞는 농촌은 풍성하기만 했다. 용신은 한가위 날을 기해 '어린이 놀이 학부형 위로회'를 열었다. 농민들은 하루의 일손을 놓고 샘골로 모여들었다. 아이들은 독창, 합창, 무용, 연극, 연설 등 순서대로 어른들 앞에서 자기들의 기량을 한껏 발휘했다. 어른들은 재주가 없어 보이던 자기 아들 딸들이 춤을 추고 노래하고 연설하는 모습을 보며 '배움'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누구든지 배우면 저렇게 할 수 있다'는 교훈. 그 같은 깨달음을 주기 위하여 용신은 한가위의 놀이를 마련했던 것이다. 그날의 위로회는 밤이 늦어서야 끝이 났다. 최용신은 그날 아이들의 재롱 순서를 마치고 학부형들 앞에 나와 이렇게 설파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제는 진흙 속에 파묻힌 옥과 같습니다. 두뇌와 재질이 세계 어느 나라 어린이들보다 결코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일찍부터 배우고 가르치지 못한 탓으로 지금 우리 겨레가 남다른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제의 앞날의 행복을 열어 줄 사람은 여러분 자신이올시다. 요즘에도 60여 명의 어린이가 달려온 것을 수용할 수가 없어 되돌려 보내면서 전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제는 학원의 인가도 나왔으므로 여러분이 힘만 합하면 불가능한 일은 아닌고로 배움의 터전을 세워 주어야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이 샘골에다 자기의 뼈를 묻겠다는 결심을 털어놓았다. 그 고장 태생이 아닌 처녀의 몸이(비록 정혼한자리는 있는 몸이 라지만) 마을의 번영과 2세 교육을 위해 몸을 바치겠다는 데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날 밤으로 천곡 학원 건축을 의한 발기회가 구성되었다. 제일 먼저 부인 저축 계원들이 기금을 내겠다고 나섰다. "우리가 푼푼이 모은 돈 300원을 모두 천곡 학원 짓는 데 기부하겠어요." 용신은 반가운 정성을 절반만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부인들의 사업 발전을 위하여 저축금의 절반인 150원을 따로 남겨 두기로 한 것이다. 이튿날부터 발기인들의 활동이 개시되었다.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학원을세우는 기금을 모으기란 그렇게 수월한 편이 아니었다. 가까스로 150원 정도의 기금이 모아져서 결국 300원의 기금을 가지고 용신은 일을 벌이기로 하였다. 기금을 마련하기 시작한 지 닷새 만인 8월 20일부터 샘골 뒷동산 솔밭에서는 학원의 기초 공사가 시작되었다. 지경을 다지는 마을 사람들의 구령 소지가 마을 밖으로 멀리멀리 메아리쳐 갔다. 부인제들도, 어린이들도, 마을의 남정네와 노인들도 모두 한 마음 한 덩어리가 되어 밤이 깊은 줄고 모르고 작업에 매달렸다. 장정들은 가을 곡식을 거 뒤 들이기에 여념이 없었으나, 밤이 되면 어김없이 작업장으로 나와서 기둥도 세우고 지붕을 덮는 등 공사의 진척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다. 이듬해인 1933년 1월 15일, 마침내 용신과 샘골 주민들의 땀의 결정체인 천곡 학원 낙성식을 갖게 되었을 때 이웃 마을에서는 아침 일찍부터 새 학원의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 주민들이 몰려들었다. 어린이들의 춤과 노래로 자축연이 베풀어지고 학원을 완성하는데 짊어진 빚이 즉석에서 거출되었다. 학원은 용신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샘골 주민의 것이 되어 사랑스런 어린이들의 교육을 맡아 갈 것이었다. 용신은 학원의 완성과 함께 샘골의 여왕으로 떠받들어졌다. 그녀의 말에는 귄위가 섰고, 누구나 신임했다. 마을 주민들은 자기 집에서 색다른 음식을 마련하여도 용신을 불렀고, 어려울 때나 궂은 일이 있을 때에도 용신을 찾게끔 되었다. 농사에 필요한 것은 소를 기르는 일이었으나, 소를 기르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을 기르는 일이라는 것을 주민들은 깨달았다. 용신은 새로 지은 학원에서 110여 명의 학생들과 고락을 함께하였다. 이제는 주민들이 그녀를 우러러보고 자식들의 장래를 맡겼으나, 그녀는 결코 자만하지 않았다. 용신은 학교 뒷산에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쳤다. 수원 고농에서 과실 나무 묘목을 구해다가 그 재배를 권장하기도 하였다. 아이들과 함께 뿌린 깨밭에서 김을 매다 그녀는 내리쬐는 폭양을 이기지 못해 쓰러지기도 하였다. 깨를 판 돈으로 회를 사다가 용신은 손수 떨어진 학교 벽을 바르기도 했다. 마을의 공동답에 들어가 모를 심다가 거머리떼에게 물리는 일은 이제 예사였다. 용신의 헌신적인 봉사로 학원은 번창해 갔다. 그러나 110여 명의 학생은 학원의 규모에 비하여 너무 많은 숫자였다. 당국은 이를 묵인하지 않았다. 학원이 좁고 설비가 부족하니 60명 이상은 받지 말라는 게 당국의 지시였다. 교사와 아이들은 서로 붙들고 통곡했다. 50명의 아이들은 부득이 학원을 떠나야 할 형편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오전, 오후반을 가르친 뒤 가정을 순회하며 학습 지도를 해야 했다. 그 같은 고난의 연속은 비단 샘골에서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용신에게는 일찍부터 원산 두남리 고향에서 정혼한 김학준이란 약혼자가 있었는데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약혼자한테서는 소식이 끊겨 버리고, 설상가상으로 아버지의 병환과 오빠의 이혼 문제가 계속 샘골의 용신에게 날아들었다. 신앙과 신념으로 결합된 약혼자. "흙으로 돌아가자!"는 동지애로 결합된 약혼자로부터 소식이 끊기자 그녀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1934년 새봄이 돌아왔다. 용신은 농촌 운동을 위하여 새로운 지식과 구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일본의 고베 여자 신학교 사회 사업과에 학적을 두게 되었다. 그러나 용신의 일본행은 그녀에게 불행을 안겨준 계기가 되었다. 용신은 일본에서 각기병에 걸리고 말았다. 다리가 붓고 전신이 마비되는 등 중태였다. 귀국을 서두른 용신은 원산으로 내려가 병 치료를 계속했다. 용신이 샘골을 떠난 사이 학원에서는 교사의 이동이 잦았고, 주민들은 한결같이 용신의 귀향을 바랐다. "들어 누워 있어도 좋으니 샘골로 오라."는 성화 같은 재촉에 못이겨 용신은 샘골로 돌아왔다. 쇠약해질 대로 쇠약한 용신이었으나 그녀가 샘골에 다시 돌아오자 마을은 생기가 돌았다. 학원을 지원하던 YWCA 원조가 절반으로 삭감되었으나 그녀는 꺾이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아끼지 않고 일을 했다. 급기야 과로는 용신을 쓰러뜨리고야 말았다. 장에 이상이 있어 수원 도립 병원에 입원했으나 용신은 두 번이나 수술을 받고도 회복하지 못했다. 1935년 1월 23일 오전 0시 20분이 그녀의 임종 시간이었다. 용신의 유해는 그녀의 유언대로 학교가 잘 보이는 샘골 뒷산 언덕에 안장되었다. 그녀는 죽어서도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아이들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용신은 이 세상에 태어난 지 27년 만에 샘골의 양지 바른 언덕에 눕게 되었지만, 그녀는 죽어서 영원히 산 상록의 나무가 돈 것이었다. 1962년 4월2일. 그해는 최용신이 스물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27년이 되는 해였다. 용신의 정신이 스며 있는 샘골에서는 그녀를 위한 첫 추도식이 열였다. 그 자리에는 수원 고등 농립 학교 시절에 용신의 농초 계몽 사업을 후원하던 유달영 교수, 옛날의 약혼자이던 김학준 교수 부처, 심훈의 원작 소설 <상록수>를 영화화한 신상옥 감독, 채영신 역의 최은희 등 많은 인사가 참석하여 용신의 명복을 빌었다. 용신의 넋을 위로하는 아름다운이야기는 그에 그치지 않는다. 김학준의 아내 길금복은 해마다 세모가 되면 제물을 차려 가지고 와서용신의 묘소를 찾았다고 하며, 용신의 유지를 받들어 남편은 천곡 고등 농민 학교의 재단 이사장을 , 그리고 아내는 재단 이사로 활동했다고 한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정치, 경제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세계제국 몽고와 맞선 고려 민중의 힘 - 심재석(한국외국어대 강사) 역사를 보는 눈, 현재를 보는 눈 고려는 승패가 달리 결정났더라면 민족의 운명이 크게 위태로웠을 외침들을 물리치며 500여 년을 지속하였다. 양규의분전, 강감찬의 귀주대첩 등과 같이 나라의 운명을 가름한 중요한 전투들을 오늘날 우리는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공로를 전투 지휘관에게 돌려버리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들의 뛰어난 자질과 업적은 칭송받아 마땅하지만, 영웅들이 성공한 이면에는 결의에 찬 백성들이 있었음을 지나치게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추운 겨울날 삼베 옷에 맨손으로 병장기를 잡고 적진에 뛰어들던 평민 군사의 모습을 연상하지 못한 채 지휘관에 대한 찬양에만 여념이 없다면, 그는 역사의 반쪽만을 이해하며, 나아가 현실도 반쪽 밖에 보지 못한다는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군사정권 시절 장군이나 성군을 떠들썩하게 재조명하고 현창상업을 대대적으로 벌인 것도, 따지고 보면, 과거에 대한 반쪽짜리 시각을 은연 중에 현재에 적용시키려는 불순한 의도가 게재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지배층이 쓴 역사책에는 지배층의 역할이 크게 부각되는 사건이 주로 수록되었고, 이로부터 독자는 위인에 대한 강한 인상을 갖게 된다는 점을 이용하여, 독재를 합리화하고 독재자를 미화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책에서는 지배층이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 일반 백성만의 힘으로 국난을 극복한 전투들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전투들은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전투들은 수록되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지배층 스스로 자신들의 낯을 깎아내릴 승리를 기록했다는 점에서- 무엇인가 대단히 의미심장한 사건이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러한 기록들은 대개 몽고 침략기에 집중되어 있다. 몽고의 1차 침입 몽고족은 고려에서 최시 정권이 안정기에 접어들던 시기에 흥기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초원에서 약탈을 일삼던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접촉하는 모든 민족에게도 그대로 적용했다. 그들은 대다수의 농경민족이 취하고 있던 중간의 길- 적당한 군림과 복종- 에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다. 몽고족의 공격에 직면하여 택할 수 있는 것은 저항 아니면 무조건 항복뿐이었다. 항복하면 그들의 노예가 되어 상상하기 힘든 부담을 져야 했고, 견디다 못해 저항하면 모든 주민은 학살당하고 도시와 마을은 불태워졌다. 바그다드에서는 하루 사이에 수십만 명이 살육당했고, 러시아의 귀족들은 모고군의 승전 기념 술자리 밑에 깔려 질식해 갔다.서하, 금, 호라즘제국, 러시아의 공국들, 압바스 왕조, 대리국, 동진, 남송 등 많은 나라가 지도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들이 농경민의 생활방식을 이해하기 전까지 그들의 공격에 대항하여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동방의 작은 나라 ‘고려’는 끝내 독립을 유지하였고 오히려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가 먼저 망해 버렸다. 1231년(고종18)몽고는 고려에 대한 1차 침략을 개시하였다. 이때 이들은 고려에서 저고여를 살해했다는 것을 침략의 구실로 삼았다. 저고여는 공물을 거둬가기 위해 몇 년 전 몽고에서 파견한 사신이었다. 몽고는 고려와 관계를 맺은 이래 과중한 물품을 끊임없이 요구하였다. 그것은 고려측으로서는 요나라나 금나라에 했던 것과 같은 의례적인 조공이 아니라 견디기 힘든 수탈이었다. 사신 한 떼가 가면 곧바로 또 한 떼가 오고, 뒤에 온 자는 먼저 가지고 간 물품 중 나쁜 것을 왕 앞에 던지면서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저고여도 이렇게 행패를 부리던 사신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이 자가 공물을 받아 가던 도중 압록강 부근에서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조사하러 나왔던 몽고인들은 고려 복장을 한 군사들이 쏘아대는 화살에 쫓겨 도망하고 말았다. 이에 몽고에서는 고려와 관계를 끊고 급기야 침략을 감행하게 된 것이다. 저고여를 고려에서 죽였는지 아니면 고려를 모함하려는 다른 세력이 죽였는지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역사의 수수께끼이다. 물론 고려에서는 금나라 장수가 한 짓이라고 강변했지만. 고려 백성의 적극적인 저항 고려에서는 몽고의 침략에 대하여 정면으로 맞서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고려의 중앙군이 몽고군을 물리치기 위하여 북상할 때, 몽고군은 서북지방의 여러 성들을 공격, 함락시키고 있었다. 함락되면 닭이나 돼지의 소리도 들을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도륙당하였다. 철주(평북 철산)에서 벌어진 전투는 당시 서북지역이 겪어야 했던 고콩을 잘 대변해준다. 철주는 압록강을 넘어 남하하는 적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요로에 자리하고 있었다. 몽고군은 이 성을 공격하기에 앞서 ‘문대’라는 사로잡은 장교를 시켜 “진짜 몽고병이 왔으니 항복하라”고 외치게 했다. 그러나 문대는 “가짜 몽고병이니 항복하지 말라”고 외치고 죽임을 당했다. 문대를 죽인 몽고병은 철주성에 맹공을 퍼부었고 공방전은 보름동안 계속되었다.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게 되자 성을 지키던 관리 이세화는 부녀자와 어린아이를 창고에 넣고 불을 질렀으며, 자신은 장정들과 함께 자결하였다. 성이 무너지면 부녀자는 욕을 당하고 아이들과 함께 끌려가 노예가 되며, 저항한 장병들 모두 처참하게 살육당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중앙에서 파견한 대군이 도착하기 전에 서북의 여러 성들은 거의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몇몇 성들은 끝내 항복하거나 함락되지 않았다. 이 가운데 지휘관 박서를 중심으로 단결한 주민들이 끝내 성을 지킨 구주(평안북도 구성) 전투가 가장 유명하다. 몽고군은 큰 돌을 날리는 포차를 만들어 성을 파괴하였고, 소가죽을 씌운 큰 수레에 병사를 태워 성밑에 접근시킨 다음 성벽에 구멍을 뚫었으며, 심지어는 마른 풀에 사람 기름을 적셔 두텁게 쌓아놓고 불을 지르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성에서도 포차를 만들어 반격하고, 구멍에 쇳물을 녹여 부어 수레를 태워 버렸으며, 물에 갠 진흙을 던져 불을 끄는 등 치열한 방어전을 펼쳤다. 결국 몽고군은 구주를 그대로 둔 채 남하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3군으로 편제한 고려의 대군은 황주(황해도 황주)에서 몽고군과 첫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기병을 주축으로 한 몽고군 선봉이 기습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놀란 고려군은 일시 무너질 뻔하였으나 몇몇 장군들의 분전으로 겨우 몽고군을 격퇴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 마산(경기도 파주)의 초적[산골에서 물푼을 터는 도적]으로 종군한 두 사람이 몽고병을 쏘니 대로 엎어졌다. 관군이 이긴 기세를 타 쳐서 패주시켰다’고 하여 실제로는 지배층의 부패에 항거하다 국난을 맞아 정부에 협력하게 된 초적 출신 병사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황주에서 적의 선봉을 격퇴한 후 중앙군은 북상을 계속하여 안북부(평안남도 안주)에서 몽고 주력부대와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전투의 결과는 고려측의 완전한 패배였다. 고려군의 태반이 살상당하였다. 이 싸움은 고려 중앙군이 몽고병과 접전한 마지막 전투가 되었다. 고려 정부에서는 몽고의 힘에 놀라 화친을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친 교섭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몽고군은 남하를 계속하여 충주성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전토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당시 충주의 주민은 지배층인 양반별초와 피지배층인 노군 잡류들에게 혐의를 씌워 죽이려 하였다. 이에 노군 잡류부대는 “ 몽고군이 오자 다 달아나 숨어버리고 성은 지키지도 않더니, 이제는 몽고군이 약탈해 간 것까지 우리게게 죄를 돌려 죽이고자 하는가?” 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역사는 승리와 반란이 동시에 부각되는 쪽으로 서술되고 말았다. 할 말 없는 지배층이 권위를 회복하고자 큰 공로를 세운 피지배층을 몰아붙인 안타까운 사례이다. 몽고의 2차 침입 충주성 전투를 마지막으로 화의가 성립되어 몽고군은 철수하였다. 그러나 화의의 결과는 고려의 주권을 크게 침해할 뿐만아니라 최씨 정권에게도 큰 타격을 주는 것이었다. 몽고에서는 점령한 지역과 개경에 다루가치를 두어 내정을 간섭하게 했다. 또한 국내에서 몽고의 간섭이 심화될수록 최씨 정권의 입지는 점점 더 위험해 질 것이었다. 이에 따라 최우는 대다수 관료들의 반대 속에 다루가치를 모두 죽이고 수도를 강화로 옮겨 몽고에 대항할 것을 결정하였다. 몽고에 대한 전쟁이 재개된 것이다. 당시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30여 년에 걸친 긴 싸움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강화천도와 대몽항쟁은 정권 유지 차원에서 결정된 것이었기에 사실상 백성들을 몽고병의 말발굽 아래 아무 대책 없이 노출시킨 것과 다름 없었다. 강화천도 이후 기나긴 대몽항쟁 기간동안 중앙에서 출동한 대군이 몽고군과 정면대결을 벌인 적은 한번도 없었다. 정예병은 담나 좁은 강화도에서 권력층의 안일한 삶을 보호할 뿐이었다. 중앙에서 백성들에게 한 일이란 기껏해야 정든 삶의 터전을 버리고 산성이나 해도로 들어가도록 독려 혹은 위협한 것 뿐이었다. 백성들은 몽고군의 침략에 맞서 스스로 살 길을 찾아야 했다. 이렇듯 어려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꿋꿋하고 치열하게 맞서 싸웠다. 이 시기에 백성들의 힘으로 몽고병을 격퇴한 기록은 단편적이나마 자주 발견된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처인성 전투가 있다. 처인성 전투 눈발이 몹시나 휘몰아쳤을 1232년 12월 16일, 몽공장군 살리타이는 용인땅 아골리 처인성에서 맥없이 꺼꾸러져 이국땅의 외로운 혼이 되었다. 그는 몽고의 고려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왔다가 용인의 처인성에서 피살되었다. “ 태종 4년 8월, 다시 살리타이를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정벌케 했는데, 왕경 남쪽에 이르러 처인성을 공격하던 중 유시에 맞아 죽었다”"몽고의 원수 살리타이가 성을 공격하자 김윤후가 이를 사살하였다”. 이상은 <원사>와 <고려사>의 기록이다. 그러면 처인성은 어떤 곳일까? 몽고군의 침입을 격쾨하고 그 장수를 죽였으니만큼 험한 지형, 돌로 쌓은 튼튼한 성벽, 높은 망루등과 같은 난공불락의 조건을 갖추지 않았을까? 실상은 이와 정반대이다. 성은 경기도 용인시 남사면 아곡 2리에 있다. 이 성은 둘레가 650여 보 밖에 되지 않는 조그마한 토성으로 총면적 5,820평에 불과한 작은 동산 모습을 하고 있다. 지금은 흙으로 메워져 잡목들만이 어지럽게 서 있을 뿐, 이곳이 ‘ 경기도 기념물 44호’라는 사실은 인근의 주민들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다. 이 조그마한 성에서 세계역사상 크게 기록될 만한 사건이 지금부터 760년 전에 발생하였다. 세계를 제패하던 몽고군의 고려정벌군 총사령관 살리타이가 이 곳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 것이다. 1232년 10월 살리타이를 사령관으로 한 몽고군의 제2차 원정군은 강화도 정부를 비켜지나 지금의 서울인 남경을 노략하면서 큰 저항없이 광주에 이르렀다. 이 때 몽고군은 특정 지역을 목표로 공략에 나섰던 것이 아니라, 육지를 무제한 노략하여 고려정부가 스스로 백기를 들게 하려는 작전을 구사하였다. 몽고의 주력군이 광주에 이르는 동안 그들의 별동부대는 대구까지 내려가 부인사에 소장되어 있던 초조대장경을 불태웠다. 남경을 수비하는 중요한 요충인 광주에 살리타이가 휘하병력을 이끌고 도착한 것은 1232년 11월 중순이었다. 그는 쉽게 광주성을 공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부사 이세화를 중심으로 주민들이 일장산성(지금의 남한산성)에 응거하여 강력히 저항하자 공략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살리타이는 말머리를 돌려 수주(경기도 수원)에 속했던 처인부곡을 지나 충주로 남하하고자 했다. 이 길목의 한편에 흙으로 쌓아 올린 처인성이 초라하게 서 있었고, 그 안에는 인근 부곡에 사는 주민들이 대피하고 있었다. 일반 주민의 힘으로 살리타이를 사살하다 처인부곡민들은 몽고군의 말머리가 자기네 고장으로 향하자 가까운 처인성에 들어갔다고 짐작된다. 이렇게 들어온 사람들 중에는 백원현에서 온 승려 김윤후도 있었다. 대덕이나 선사등과 같이 지배층 출신이 거의 독점하는 승계를 띠지 않고 다만 ‘ 승려’라고 표기된 것을 볼 때, 그는 일반 백성 신분의 승려였던 것 같다. 그리고 <고려사>에는 그가 처인성에 피난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그는 피난을 한 것이 아니라 전투를 위하여 처인성에 포진한 것으로 해석해야 마땅하다. 피난하려는 승려가 몽고군이 이동하는 길목으로 찾아들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광주성 공략에 실패한 살리타이는 준마에 높이 올라 남하를 시작하였다. 그의 눈에 비친 처인성은 그야말로 싸울 만한 그리고 점령할 만한 가치도 없어 보였으리라. 다만, 지나치는 길목 그 한 귀퉁이 조그마한 토성에서 감히 자신에게 대항하는 ‘ 애교의 화살’을 둔 채 남진하는 것은 그의 체면이 허락하지 않았으리라. 살리타이는 처인성의 맞은편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구릉에서, 가볍게 치고 남하를 계속할 요량으로, 휘하 군사들에게 시급히 함락시킬 것을 재촉하고 있었다. 이 때 처인성 안에서는 주민들 모두가 필사적으로 대항하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여기서 구심점으로 활약한 사람이 바로 승려 김윤후였다. 그를 중심으로 단결한 주민들은 몽고군의 공격에 대해 응사하기 시작하였고, 필사적인 전투가 한창일 때 맞은편 언덕위에서 부하들을 독려하고 있던 살리타이가 느닷없이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처인성에서 날아온 화살에 맞은 것이다. 사령관이 어이없게도 쓰러져 버둥거리자 몽고의 기마부대는 더 이상 싸울 수가 없었다. 총사령관이 죽을 경우 전투를 중단하는 것이 몽고의 관습이었다. 그들은 살리타이의 싸늘한 시체를 거두어 황급히 퇴각하고 말았다. 살리타이의 뒤를 이어 몽고군을 지휘한 테케는 강화도정부와 몇 가지 가벼운 조약을 맺어 체면을 세운 뒤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처인성의 승리는 몽고의 침략기간 중 고려가 세운 가장 큰 전승이었다. 정규군이 아닌 주민들이 자위적으로 항전하여 대륙을 헤집고 다니던 몽장 살리타이를 죽이고 나라를 구했다는 점에서 크게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전쟁이 남긴 울림 이후로도 오랜 기간 전쟁이 계속되었다. 산성과 해도로 들어간 백성들은 결국 피로와 굶주림에 지쳐 더 이상 항전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몽고족도 어느덧 농경민족의 삶을 이해하고 그전처럼 약탈과 살육을 즐기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시일이 지날수록 요구조건을 대폭 낮추어 제시하였다. 최씨정권은 정권유지를 위해 전쟁을 계속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이러다가 지배층 전체가 망할 것이라는 위기의식 속에서 최씨정권이 무너지고 태자가 직접몽고에 가서 화친을 요청함으로써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때 고려가 몽고로부터 승인받은 조건은 실로 파격적인 것이었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물론, 예로부터의 관습과 제도 또한 그대로 유지할 것을 허락받으며, 국력이 회복될 동안은 강화도에서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배려까지 있었다. 이 때 태자[뒷날의 원종]와 쿠빌라이[원 세조]간에 합의된 사항들은 ‘세조구제’라 하여 중요한 협정으로 취급되었고, 이후 원의 간섭으로 고려의 독립이 위협받을 때마다 이를 방어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고려는 많은 나라가 멸망하는 속에서도 끝내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려가 몽고제국체제하에서 이러한 지위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고려 백성들의 장기간에 걸친 피어린 항쟁의 결과였다. 백성들은 지배층 출신의 훌륭한 장수가 지휘할 때 물론 그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몽고병을 격퇴했거니와, 지배층이 도망했을 때조차 스스로 단결하여 성을 고수했던 것이다. 초적출신 병사들의 대활약, 양반과 지휘관이 모두 도망한 성을 노군 잡류들이 끝내 지킨 충주성 전투, 아예 지배층의 지휘를 받지 않고 부곡민 스스로 단결하여 침략군 총사령관을 죽인 처인성 전투, 백성들의 이러한 항쟁이 고려가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일개 지휘관이 모든 것을 다 했고, 그 인물이 없었더라면 우리 민족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을 것이라는 ‘ 누구의 무슨 대첩’식의 역사이해는 그릇된 것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일반 백성을 국난 극복의 궁극적이고 능동적인 주체로 보는 역사인식은 현재를 올바로 보고 더욱 나은 사회로 만드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영원한 비밀 초등학교 6학년, 어느 겨울의 일이다. 쉬는 시간에 운동장으로 나와서 몇몇의 친구들과 양지 쪽에 옹기종기 모여 떠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소변이 마려웠다. 화장실은 너무 멀고 날씨도 추워 움직이기 싫었던 나는 슬그머니 빠져나와 탱자나무 울타리에 실례를 했다. 누가 볼세라 얼른 일을 마치고 왁자지껄 떠드는 친구들 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잠시 후 학교에서 제일 무서운 체육 선생님이 상기된 얼굴로 헐레벌떡 우리를 향해 뛰어오셨다. 선생님은 내옆에 서 있던 친구의 멱살을 움켜잡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녀석아, 어디다가 오줌을 싸느냐! 거기가화장실이더냐." 친구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얼른 내 눈치픞 살피면서 말했다. "선생님 무슨 일이세요. 제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누구냐. 이 두 눈으로 보았는데 거짓말을 하다니." 그 순간 선생님의 손이 하늘로 올라가더니 '철썩'하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화가 난 선생님이 기어이 친구의 뺨을 때리고 만 것이었다. 친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선생님, 제가 그랬습니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슬며시 눈을 떠보니 친구의 양볼에는 벌겋게 손자국이 나 있었다. 그때 수업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그 친구의 볼만큼이나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사쥐고 교실로 뛰어들어가면서 나는 뒤따라오는 친구를 자꾸만 뒤돌아보았다. 이 사건을 이십 년 이상 가슴속에 묻어 두었다. 그 친구와는 계속 만나 왔으나 한번도 그 일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친구를 만날 때마다 내 마음은 너무나 불편하고 미안했다. 그러던 어느날 마음을 다져먹고 친구에게 사과를 했다. 그런데 친구는 그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겠다며 손을 저었다. 그날 밤 홀가분한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가던 나는 불현 듯 이십여 년 전 선생님에게 멱살을 잡힌 그 친구의 눈빛이 떠올랐다. 그 순간 친구는 그 때의 일을 누구보다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진성수 님/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69 - '세계는 나의 표상': 쇼펜하우어(1788-1860년) 그때 세계에서는 1837년: 미국, 최초의 공황발생 1840년: 청, 아편전쟁시작 쇼펜하우어 [Schopenhauer, Arthur] 1788.2.22 프로이센 단치히(지금의 폴란드 그다인스크) ~1860. 9. 21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쇼펜하우어는 자기자신을 천재라고 믿고 있었다. 그는 천재는 수학을 싫어한다는 말도 했다. 니체도 천재였다. 니체는 수학을 제외한 모든 학과목에서 우수했다고 한다. 그 대신 쇼펜하우어는 광기도 심했던 사람이다.그의 부친의 가문에는 몇 사람의 정신이상자가 있었고 죽기 전의 부친도 그런 요소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의 부친과 모친은 나이의 차이도 심했고 성격도 서로 크게 달랐다. 인생관에서도 일치점이 없었는가 하면, 체구가 장대하고 우울한 성격의 부친에 비해 모친은 왜소했고, 언제나 명랑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어쨌든 이런 점들이 쇼펜하우어의 성격적 불균형과 조화로운 정상성을 상실한 생애를 갖게 했는지 모른다. 모친과의 심한 불화도 성격의 차이였던 것 같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철학에서 모든 소유와 명예같은 것은 무가치한 것으로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자기자신은 심한 명예욕에 빠져 있었다. 말년에는 자기 저서가 많은 독자를 가지며 대학 강단에서 자기 철학이 강의된다는 기사들을 보면서 그것들을 뽑아모아 자랑삼기도 했다. 자기 거실양쪽 벽에는 칸트와 괴테의 사진이 걸려 있고 많은 개들의 사진도 있었다. 애견의 이름은 아트만이라는 인도철학의 용어를 붙여주기도 했다. 잉글랜드라는 한 식당에서 주로 식사를 했고 다른 곳에서 식사를 할 때는 음식물에 해로운 물질이 들어가 있는지 않은지 의심하는 습관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글을 읽으면 왜 개를 칭찬하고 있는지 족히 수긍이 간다. 물론 그의 철학적 업적은 여러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오직 대학강단에서 그의 철학을 달갑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칸트를 제외한 당대의 철학자들을 경시하거나 비판한 장면들이 심하기 때문이며, 특히 헤겔에 대해서 그러했다. 헤겔의 명성에 대한 질투가 그를 적대시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었다.그는 어떤 철학적 이론을 갖고 염세주의를 제창했는가? 그 당시의 철학자들은 세계와 존재를 어떤 절대적 실체로부터 해명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헤겔이 정신을 말했고 포이어바흐나 마르크스가 유물론을 제창했듯이, 어떤 이들은 다원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존재세계의 실체는 의지라고 생각했다. 물질세계를 좌우하는 힘 및 역학도 의지작용과 통하는 것으로 보았고, 생명체를 유지하는 것은 생명의지로 보았다. 이 생명의지에 의해 식물들이 나비와 바람을 타고 화분을 옮겨 번식하기도 하며, 심지어 어떤 식물은 동물을 잡아먹기도 한다. 동물들은 자기번식의 강한 욕망으로 생을 유지해간다. 어떤 수놈은 단 한 번의 교미를 위해 태어난다. 그래서 종족을 보존, 유지해간다. 인간의 본질이 되는 것도 살아남으려는 본능의지의 발로라고 본다. 특히 성욕은 종족유지의 기본본능이며 여성들은 남성들보다도 종족유지의 본능이 더 강하다고 본다. 사람들은 지성이나 이성이 인간의 본질이 되는 듯이 착각하고 있으나, 지성은 본능의지의 심부름을 하는데 불과하다. 인간은 생명의 위기상태에 빠지면 지성의 힘이 아닌 본능의 직각을 얻어 생명을 보존한다. 이러한 의지는 맹목적이며 살아남기 위한 의욕으로 지배된다. 사람이 후손이 없을 때 느끼는 고독은 생명의 단절을 의미하는 존재단절의 고독감이다. 이렇게 맹목적인 의지를 그대로 방치해 두면 약자는 강자의 지배를 받으며 모든 생명체는 강자의 희생의 제물이 될 뿐이다. 자연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그 속을 살펴보면 살생과 살육이 계속되는 싸움과 정복의 연속이다. 자비와 사랑 같은 것은 인간이성이 만들어 놓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광산의 굴 속에 갇혀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배고픔을 이기고 살아남기 위해 동료들을 식량의 대상으로 삼는다. 어떤 조류는 어미새까지 다 잡아먹은 뒤에야 둥지에서 날아 나온다.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삼갈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존하고 있는 세계는 최악의 세계이며, 이보다 더 나쁘고 악한 세계는 있을 수 없다고 본다.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상의 길이며, 이왕 태어난 바에는 이 저주스러운 비참한 현실을 깨닫고 자살하는 것도 무방하다고 본다. 우리에게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세계에는 희망도 없으며, 암흑을 극복할 가능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진로는 악의 축적일 뿐이며, 사회적 삶은 역사악을 더해갈 뿐이다. 이성과 진리, 예술 등을 논하는 것은 이러한 비극적 운명을 잠시 잊게 해주는 마취제에 지나지 못한다. 고통과 비참은 어디에나 있으며 긍정적인 희망은 허망한 꿈일뿐이다. 신의 존재는 헛된 환상에 불과하며 종교적 인식 같은 것은 자기기만일 뿐이다. 개인의 죽음은 이 세계악의 운명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작은 파도가 큰 조류에 스며들 듯이 개인의 비참은 인류 전체의 비참에 스며들 뿐이다.모든 세계는 저주받은 존재에 지나지 못한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처녀들께서는 부끄럼 타지 말고 '총각김치'를 드셔요 국어에서는 남녀를 나타내는 말이 무척 다양하게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혼인할 나이가 된 성인 남녀를 지칭할 때에는 '처녀' '총각'이란 한자어를 사용합니다. 그 중에서 '처녀'는 그 단어 속에 '여'가 들어 있어서 그 뜻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지만, 아마도 '총각'은 그 어원을 전혀 짐작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한자인 '총'은 지금은 '다 총' 등으로 '모두'라는 뜻을 나타내고 있지만, 원래는 '꿰맬 총', '상투짤 총' 등으로 쓰이던 것입니다. '각'은 물론 '뿔 각'이고요. 중국에서나 우리나라에서 아이들이 머리를 양쪽으로 갈라 뿔 모양으로 동여맨 머리를 '총각'이라고 했었습니다. 이런 머리를 한 사람은 대개가 장가가기 전의 남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머리를 한 사람을 '총각'이라고 한 것이지요. 옛날에는 어린 소년들에게도 '총각!'하고 불렀습니다. 이것을 마치 어린 소년을 높여서 부르는 것처럼 생각한 분은 안계신지요? 여기에서 '더벅머리 총각'이라는 말도 생겼지요. 어떤 사람은 '떡거머리 총각'이라는 말도 쓰는데, 이때의 '떡거머리'가 무엇을 나타내는 말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느 사전에도 '떡거머리'란 단어는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에 연유해서 생긴 단어가 또 있습니다. 그것은 '총각김치'란 말입니다. '총각김치'는 여러분들이 잘 아시듯, 손가락 굵기만한 어린 무우를 무우청째로 여러 얌념에 버무려 담은 김치를 말하는데, 그 어린 무우가 마치 '총각'의 머리와 같은 모습을 닮아서 생긴 단어입니다. 그런데 처녀들은 그 '총각김치'란 단어 자체나 또는 실제의 김치를 기피하곤 했었습니다. 그 총각김치가 마치 총각의 생식기를 형상하는 것에서 생긴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런 것이 절대 아니니, 처녀들은 이제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총각김치를 드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5장 죽음보다는 철저한 삶을 최후에 우리 모두는 죽는다 - 소동파 소동파 [蘇東坡, Ssu Tungp'o] 1036. 12. 19~1101. 7. 28. 소동파는 북송때 사람으로, 왕안석과 불합하고 그의 신법에 반대한 탓으로 여러차례의 귀향을 가게 되었다. 십여 년에 걸친 그의 유배생활이 겨우 죽기 두 달 전에야 해금된다. 1100년, 철종이 죽고 신종황후가 섭정을 하면서 그해 4월 원우대신들의 사면이 있었다. 동파에게 마음대로 거주해도 좋다는 허가가 내려졌다. 그는 1101년 1월에 대유령을 넘었다. 태후가 서거하였다는 소식을 듣는다. 또 한 차례의 정풍이 예상되었다.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한 동파는 아들들과 함께 호반지역의 농장에 가서 살 참이었다. 의진에서 아들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동파는 강위의 배안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여름이 닥쳤고 그의 몸은 극도로 쇠잔해갔다. 아메바성 이질에 걸린 것이다. 근 한 달 동안이나 병상에 누워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7월 15일 병세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고열이 심하고 잇몸에서는 피가 났다. 자신의 증상을 분석해 본 결과 열독으로 발병된 것, 즉 전염병으로 진단되었다. 내버려두는 수밖에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여기면서 동파는 전세웅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장자에 의할 것 같으면 나라를 통치하는 데에는 별 도리가 따로 없고, 그저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최상책이라 했습니다. 보내 주신 인삼, 맥문동과 복령을 함께 달여 목을 축이고 있는데 만약 이것을 복용하고도 별 효염을 못보면, 이는 하늘의 뜻이지 내 탓이 아닙니다. 그러나 동파는 약을 복용하지 않고 있었다. 7월 18일 세 아들을 모아놓고 몇 가지 유언을 한다. 악한 짓을 하지 않았으니 지옥으로 가지 않을 게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묘지명은 아우인 자유가 쓰도록 하고 웅산 기슭에 아내와 합장하라. 항주의 옛친구 유림장로가 줄곧 그의 곁에 있었다. 26일, 그는 마지막 시 한 수를 짓고 장로와 더불어 이승과 저승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불가의 염불을 좀 외워보라고 권했다. 동파는 빙긋이 웃더니 <고승전>을 읽어 보았는데 그들도 최후에는 모두 죽었다 고 말했다. 7월 28일, 그는 급격하고 몸이 쇠잔해졌고 호흡도 차츰 가빠졌다. 관습대로 가족들은 코 끝에 솜을 올려놔 그의 호흡을 살폈다. 온 가족이 방안에 모여 있었다. 장로는 그의 곁에 가까이 다가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 순간 내세에 대해 생각해 보시오. 동파도 천천히 속삭였다. 서천이 있다 하더라도 애써 그곳에 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장로가 다시 말했다. 특히 이 순간엔 시도해 봐야 합니다. 억지로 애쓰는 것은 오히려 잘못입니다. 그의 마지막 대답이었다. 도달해 보아야 별 것 아닐세 여산은 여전히 안개로 덥이고 절강은 여전히 파도가 치네. 그의 오도시대로 도달해 보아야 달라진 것은 없고 여산은 여산, 절강은 절강일 뿐, 세계는 여전히 현상계 그대로였다. <고승전>을 읽었는데 그들도 결국엔 다들 죽었다는군!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가 모두 죽는다는 사실을 나직하게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33. 수염에 세금을 매긴 황제 러시아에 절대주의를 확립하여 러시아를 강력한 국가로 만들었던 이가 17세기의 표트르대제이다. 15세기 말 이반 3세 때 러시아는 몽고의 지배에서 벗어났고 이후 이반 4세에 이르러 근대적인 국가와 사회의 기본 골격을 갖추었다. 그런데 그것은 농노제를 바탕으로 하는 황제(챠르)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전제 국가였다. 이반 4세는 비밀 경찰을 만들고 황제에 반항하는 귀족들을 억압하는 한편, 자신에게 충실한 신흥 귀족층을 키우는 방식으로 황제권을 강화해 갔다. 또한 농민의 이동의 자유를 박탈하고 농노제를 강화했다. 이반 4세 이후에는 황제권 계승의 혼란에다 귀족들간의 갈등, 스테카라진의 반란 등 농민들의 반항으로 국가가 한때 혼란에 빠졌다. 그러다가 1613년 로마노프 왕조가 들어섬으로써 어느 정도 질서가 회복되어 러시아는 안정적인 발전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하지만 이전 세기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17세기의 러시아는 국민의 대다수가 문맹이고 아시아적 성격이 강한 후진 국가였다. 또한 유럽 세계와도 별로 접촉이 없어서 유럽과 직접 거래하는 곳은 백해의 아르한겔리스크뿐이었다. 이 때 황제에 오른 사람이 표트르 대제이다(1682). 표트르의 전 황제 표드르(Fedor)는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전 황제 알렉세이(Alexei)의 두번째 왕비의 소생인 열 살의 표트르가 황제로 옹립되었던 것이다. 그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이복 누이인 소피아가 친위대의 도움으로 섭정을 폈다. 그러다가 1689년 표트르는 소피아를 수녀원에 가두고 실권을 장악했다. 키가 크고 총명했으며 호기심이 강한 청년이었던 표트르는 전쟁 놀이를 즐겼고 형식적인 것을 싫어해서 궁정이나 교회의 의식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또 손재주도 뛰어나서 자신의 의자나 식기를 손수 만들었고 외과와 치과의 진료 기술도 어느 정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전문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측근들은 그가 수술 도구를 가지고 나타나는 일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표트르는 뒤떨어진 러시아를 발전시키기 위해 유럽의 기술을 도입하고자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했고 자신도 하사관으로 신분을 감추고 사절단의 일원으로 유럽 여행을 떠났다. 유럽 여행 도중 그는 네덜란드와 영국의 조선소에서 직공으로 일하는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러시아로 돌아온 표트르는 서구화를 통한 러시아의 근대화에 착수했다. 우선 그는 생활과 풍습을 서구화했다. 신하들은 몰론 자신의 긴 수염도 깍고 동양식의 거추장스러운 옷을 서구식으로 바꾸었다. 그런데 이런 조치를 강제로 시행해 수염을 자르지 않는 자에게는 `수염세`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귀족 부인들은 가슴이 깊게 파인 옷을 입고 무도회에 나와 술을 마시게 했다. 또한 그는 젊은이들을 유럽으로 유학 보내고 유럽인을 초빙하여 유럽의 문화와 시술의 도입에 힘썼다. 표트르는 러시아의 근대화와 더불어 `서방으로의 창구`를 확보하기 위해 발트해로의 진출을 꾀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시 발트 해를 지배하고 있던 스웨덴을 꺽어야만했다. 표트르는 덴마크, 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스웨덴과 전쟁을 시작했다. 이른바 `북방전쟁`(1700~21)이 시작된 것이다. 1700년 11월 나바르 강 전투에서 패하는 등 초기의 전세는 불리 했지만 후퇴해서 군비를 강화하고 군대를 정비한 러시아는 1709년 폴타바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전세를 뒤집었다. 이 북방 전쟁의 승리를 통해 러시아는 에스토니아 등 `서방으로의 창구`를 얻었다. 표트르는 북방 전쟁중에 중앙과 지방의 행정, 관료기구도 재편하여 원로원을 창설하고 지방에는 지사를 파견했다. 또한 징병 제도를 마련하고 각군 사관학교도 세웠다. 그렇지만 지속되는 전쟁과 개혁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표트르는 모든 것에 세금을 부과했고 새로운 세원 마련을 위해 종래의 호구세 대신 인두세를 신설했다. 그는 또한 중상주의 정책으로 러시아의 산업을 발전시키고자 하여 보호 관세로 수입을 억제하고 면세 등 각종 특권을 제조업자에게 부여했다. 이러한 표트르의 서구화, 근대화 정책과 팽창 정책으로 말미암아 러시아는 후진성을 벗어나 비로소 유럽의 일원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제(the Great)'라고 불리게 된 표트르 1세는 북방 전쟁중 새로 건설해 수도로 삼은 페테르스부르크(`표트르의 도시`라는 뜻)와 함께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제2장 살아나는 용의 혼 3. 모든 중국인을 간첩으로 몰아붙인 방송 1988년 헬러윈데이인 10월 31일, 미국 CBS 방송은 한 화성인이 미국동북부를 침략하였다는 가상적 내용을 아주 생생한 화면으로 방송한 적이 있다. 이는 본래 공상과학소설을 각색한 프로그램이었는데 방송국 아나운서의 뛰어난 능력 때문이었는지 순식간에 어처구니 없는 일이 미국내에서 발생하게 되었다. 평상시 썰렁한 분위기였던 교회들도 방송이 나간 후 울부짖는 사람들로 가득차게 되었다. 자신의 죄를 참회하면서 화성인들이 쳐들어 오기 전에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디로 도망가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며 몰고 나온 차들이 동서부 각 주의 도로를 가득 메울 정도로 전국이 삽시간에 일대 혼란에 빠졌다. 이 일이 발생한 후 프린스톤대학의 조사에 의하면 대략 170만의 미국인이 그 내용을 사실로 믿고 도망가려 했다고 한다. CBS는 이와 같은 역사의 교훈을 망각하고 2년 전에 다시 한 차례 파란을 일으켰다. 1994년 3월 19일 저녁 황금시간대에 이 방송국은 유명한 미국 국적의 화교 여자 아나운서인 땅위화(宗銃華)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프로그램이 시작되자 정확한 영어발음을 구사하는 그녀가 단도직입적으로 주제를 설명하였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미국 최대의 간첩망과 관련된 소식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시청하시면 도대체 누가 이 간첩망을 조종하며 어떻게 운영하는지에 대해 알게될 것입니다.' 그녀의 해설에 이어 등장한 화면은 미국 화교들이 일하는 갖가지 장면이었다. 그녀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소위 간첩이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레인코트를 입은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그들은 지금 여러분 곁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엄밀한 조사를 거쳐 본 방송국에서는 중국이 미국에 어떻게 첩보요원들을 침투시키고 있는지 밝혀 내었습니다. 지금도 매일 중국인들이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들어오고 있으며,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 아주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의 어떤 사람은 틀림없는 간첩입니다.' 그러더니 그녀는 초대손님으로 나온 [중국첩보공작]의 작가 니콜라스 디미야더스와 놀랄 만한 내용의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였다. ' 디미야더스 선생께서는 미국무성의 정보기관에서 일을 한 적이있 고 얼마 전 [중국첩보공작]이란 책을 출판하여 미국 정부와 기업 들이 당면한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 바 있습니다. 디미야더스 .저의 의견은 이렇습니다. 현재 서구의 어떤 정부든지 모두 중국의 간첩침투에 대해 적절하게 대웅할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중국의 첩보활동이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상황과는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은 베이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중국학생 혹은 과학자가 미 국 방문을 신청할 때 중국 안전부서의 요원들이 그들과 만난다고 합니다. 디미야더스 선생의 발언에 의하면, 이때 안전부서의 요원 들은 방미 희망자에게 국내의 가족들을 인질로 잡는다는 사실과 미국에 가 숨어지내면 누군가가 자연스럽게 그들과 연락할 것이라 고 알려 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잠복기는 정확히 알 수 없 으며 심지어는 미국에 잠복한 후 몇 년 뒤에 정말 누군가가 나타나 그들을 찾는다고 합니다.디미야더스 :맞습니다. '물 밑의 고기[沈底魚]', 이 말은 중국 정보기관 의 전문용어로서 이들은 마치 바다 밑 깊은 곳에서 잠자는 물고기 와 비슷하다 하여 서구 정보계에서는 '휴면정보원(休眠情報員)'이 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해저에 숨어 아무 일도 하지 않나요?디미야더스 :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때를 기다리는 것 뿐입니다. :(화면을 가리키며) 보십시오. 이 남자가 방금 말했던 '휴면정보원' 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외형상 전혀 다른 점이 없지요. 그러나 그들이 일단 미국사회에 침투하면 점차적으로 사회의 일부분이 되 어 우리들은 그들을 발견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우리 사회에 끼친 피해가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조차도 알 수가 없 습니다.디미야더스 :문제의 심각성은 이런 정보원들이 결코 소수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제가 조사한 바로는 이렇게 합법적인 경로로 미국에 들어온 중국인들 8명 중 1명 꼴은 잠복하고 있는 간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중계실에서 그 둘은 서로 말을 주고 받으며 중국 정보요원의 형상을 하나하나 만들어나갔다. 이 방송은 저녁 황금시간대에 나갔기 때문에 최 소한 1천2백만 명의 미국 시청자들이 보았을 것으로 추산된다. 의심할 것도 없이 디미야더스의 [중국첩보공작]의 출판과 CBS의 보도 특집으로 미국사회에 살고 있는 화교들 중 상당수가 간첩일 것이라는 쟁론을 일으켰고, 수많은 화교들의 생활에 아주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미국에 들어오는 중국인 8명 중 1명이 간첩이라는 설은 많은 미국 기업들이 화교를 고용할 때 간첩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중국 유학생들이 취업하는 데도 나쁜 영향을 끼켰고 취업중이던 화교들은 보이지 않는 차별을 받게 되었다. 이런 의심 때문에 미국 기업들은 중국인의 고용을 감소시키거나 아예 없애기도 하였다, 방송을 본 후 두려움에 가득차게 된 미국의 집주인들은 중국인들이 집을 빌리려 하면 '간첩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한답시고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미국은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이민자들로 구성된 국가이다. 60년대 흑인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민권운동을 이끌면서 미국사회에서 인종차별제도가 표면적으로는 없어졌다. 그러나 제도적으로 없어졌다고 해서 피부색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관습이 이 나라에서 완전히 없어졌다고 할 수는 없다. 백인들의 유색인종에 대한 멸시는 60년대처럼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지금도 사회 곳곳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전과 다른 점은. 백인들이 다른 인종을 멸시할 때 직접 그 본색을 드러내지 않고 대표적 상징성을 가진 유색인종을 이용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하면 인종차별이 표면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으면서 보이지 않게 멸시의 효과를 누리는 것이다. 쑴위화가 바로 이런 예에 해당할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녀가 미국 3대 방송국 저녁뉴스의 유명한 앵커가 되기까지는 각고의 노력을 다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화교사회와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하는 성향이 있었다. 현재 미국에 거주하는 미국 국적 화교 첸엔니()는, 화교단체에서 쑴위화를 위해 마련한 시상식에 그녀가 나타나지 않아 안타까웠었다고 기술한 적이 있다. 또 쑴씨는 매번 중국인에 대해 언급할 때마디'그들 중국인은......'이라고 말해 자신은 황색인종이 아니란 듯한 태도를 보이곤 하였다. 모든 사람은 다 각자의 가치관이 있고 이는 남이 강요할 수 없는 것이지만, 문제는 이런 방법으로 자신의 동포들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미국이라는 곳은 자기의 혈통과도 단절할 수 있고, 자신의 어머니에게도 매정한 분노를 일으킬 수 있으며. 공리 앞에서는 사람이 지켜야 할 중요한 도의마저 저버릴 수도 있는 그런 사회인지도 모른다. 쑴씨가 도대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의 방송으로 인해 미국사회에 화교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고 하여 그녀가 열렬한 환영을 받을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녀에게는 환영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중국대사관은 그녀가 영원히 중국땅을 밟지 못하게 비자를 발급해 주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몇 년 동안 미국 각지의 텔레비전이나 신문은 화교들이 미국에서 간첩활동을 한다는 보도를 자주 하였다. 심지어 중국이 미국에서 자행하고 있는 간첩활동의 규모는 구소련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라고 보도한 적도 있다. 미국과 같은 고도의 산업사회에서는 언론 종사자들이 조작된 보도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버릇이 있으므로 화교사회 역시 이런 보도에 대해 반박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예사롭게 넘길 문제가 아니었다. 특히 8명의 중국인 중 1명이 간첩이라는 말은 재미 화교사회에 심각한 문제들을 낳게 하였다. 지금까지는 너그럽게 보아오던 화교들도 이번만은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화교들은 한목소리로 방송국에 항의하고 시카고에 총본부를 둔 재미 화교기술자 및 과학자협회에서 다음과 같은 항의서한을 보냈다. 몇사람의 근거 없는 추측에 의해 보도를 해서는 안 된다. 특히 미국에 살고있는 모든 중국인은 간첩환동을 하며, 설사 지금은 하지 않는다하더라도 몇 년 뒤에는 활동하게 될 것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그런 보도는 절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끝으로 이 협회는 방송국이 공개사과를 할 것과 이를 거절할 경우 법적인 대응을 하겠다고 밝혔다. 화교사회의 이런 첫 반응에 대해 CBs 와 땅위화는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지 않았다. 화교들의 이번 행동도 예전과 같이 결국 흐지부지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어느 화교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아주 담담한 목소리로 '미안하다'는 한 마디를 했을 뿐이었다. 이와 같은 그녀의 반응에 대해 화교들은 분노했다. 화교사회의 강력한 항의는 몇 개월 동안 계속되었고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CBS와 쑴위화도 사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CBS 총재는 '우리는 미국에 단기 혹은 장기 거주하는 중국인들 대부분이 법을 준수하는 학생이거나 방문학자임을 인정합니다, 만일 본 방송국의 프로그램이 이 점에 대해 소홀히 한 점이 있었다면 사과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화교단체에 보내 왔다. 또 그는 편지에서 10월 22일 저녁 뉴스시간에 정정보도를 하도록 최대의 노력을 하겠다고 밝혔다. 10월 22일 밤, 쑴위화는 생중계실에서 성명을 발표하였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매년 합법적으로 미국에 오는 중국학생과 방문 학자 및 이민자들이 모두 중국 정보기관의 고용인들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만일 저희들이 시청자들에게 이런 잘못된 인상을 심어 주었다면 이는 실로 유감스런 일입니다.' 비록 이 성명에 CBS가 직접 잘못했다고 시인한 것은 나타나지 않지만, 이 방송국이 지금까지 자기들의 방송은 매우 정확하다고 자인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방송내용에 대해 결코 사과를 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면, 이 방송국은 시청률에 의존해 생존할 수밖에 없는 매스컴일지라도 어떤 결정을 내릴 때는 사회적 반응을 고려해야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중국인들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미국인들이 이전처럼 제멋대로 하도록 놓아두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 주었고. 화교단체들도 전에 없이 일치단결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또한 소수민족인 화교들이 미국사회에서 모함을 받았을 때, 일치단결하여 대처하지 않으면 유린당하고 짓밟힐 수도 있다는 점을 일깨워주었다. 화교들이 이처럼 단결할 수 있었던 또다른 중요한 이유는 중국의 국력이 나날이 강성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중국대륙의 국민들은 자신의 동포가 다시는 모욕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자기의 동포가 다시는 변질되지 않게 하기 위해, 또 미래의 1세 혹은 2세들이 당당하게 같은 인종 혹은 다른 인종들 사이에서 그들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있도록 하기 위해서도 모두 책임감을 가지고 매진하여야 할 것이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낙타의 모성애 세 사람의 상인이 낙타를 타고 사막을 가고 있었다. 그들이 집을 떠나 사막을 걷기 시작한 지는 이미 두 달째였다. 그들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넉넉하게 준비했던 물과 음식조차 바닥난 지 오래였다. 그들은 갈수록 갈증과 허기를 견디지 못하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늘 다니던 길이었건만 어디가 어디인지 방향조차 제대로 잡지 못했다. 가도 가도 모래언덕만 나올 뿐 길을 잃은 지도 이미 오래였다. 그들은 차차 절망 속으로 빠져들었다. 머지않아 죽음이 찾아올 것이라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들이 살 수 있는 길은 오아시스를 찾는 길뿐이었다. 물이 있는 곳을 발견하지 못하면 곧 죽음뿐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아시스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오아시스가 보여 겨우 달려가 보니 한낱 신기루 현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들 중 가장 나이 어린 셋째 대상이 낙타의 등에 앉은 채로 정신을 잃었다. 이어 곧 나머지 두 사람도 정신을 잃었다. 태양 빛은 여전히 뜨거웠다. 그들은 그렇게 낙타 등에 실린 채 뜨거운 사막의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러나 신은 그들의 편이었다. 신은 그들을 그대로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이 낙타 등에 실려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낙타로 하여금 그들을 물가로 인도해 주었다. 그들은 곧 원기를 회복했다. 그러나 신은 완전히 그들을 돕지는 않았다. 셋째 대상이 하룻밤 열에 들떠 앓다가 그만 죽고 만 것이다. 나머지 두 대상은 눈물을 흘리며 그를 사막의 모래 속에 묻었다. "이제 동생의 무덤을 찾을 길이 없겠군요." 둘째 대상이 눈물을 흘리며 더욱 슬퍼했다. 그러자 첫째 대상이 말했다 "그렇다면 낙타 새끼를 죽여 동생과 같이 묻고 떠나자." "낙타가 우리를 살렸는데, 어떻게 그 새끼를 죽일 수 있단 말입니까?" 둘째 대상은 첫째 대상의 제의를 반대했다. 그러나 첫째 대상은 둘째 대상의 말을 묵살하고 낙타 새끼를 죽였다. 어미 낙타 보는 앞에서 낙타 새끼를 죽여 셋째 대상과 함께 묻었다. 그리고 멀리 사막의 언덕을 바라보며 말했다. "낙타는 자기 새끼가 죽어 사막에 묻히면 오래도록 그 장소를 기억한다. 우리 대상들 가운데 누가 죽어 사막에 묻을 때는 낙타 새끼를 죽여 함께 묻는다. 나중에 어미 낙타를 데려오면 그 무덤을 쉽게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낙타는 자기 새끼에 대한 애정이 강하다." 글터 → 이글저글 수증기는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식을 때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한 시간에 평균 90킬로미터를 달리는 차는 한 시간에 80킬로미터를 달리는 차보다 연료를 1/3만큼 덜 소모한다.유리는 고체라고 할 만큼 딱딱하지만 실제로는 액체이다. 만약 유리를 한 모양으로 세워 놓으면 그것을 형성하고 있는 미립자들이 흘러서 떨어질 것이다.공기도 무게가 있다, 960킬로미터 높이에 1평방인치 넓이의 공기를 달아보면 무게가 6.8킬로그램으로 갓난 아기의 2배나 된다.믿기 어려운 이야기,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어떤 물질의 질량은 속도에 따라 증가한다. 비과학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어떤 물질이 속도를 더 내면 크기가 더 커진다는 뜻이다. 이 과정이 실험실에서 실제로 증명되었는데 여러 번의 실험에서 어떤 물질이 빛의 86% 속도를 갖게 될 때 그 무게가 2배로 증가하였다. 이 이론은 어떤 물질이 적당한 속도만 얻는다면 이 우주 자체만큼의 무게도 가질 수 있다는 믿을 수 없는 개념을 정당하게 만든다.더운 물을 갑자기 유리컵에 부었을 때, 두꺼운 컵이 얇은 컵보다 더 잘 깨진다.불이 붙는다고 반드시 연기가 나는 것은 아니다. 연기는 불이 잘 타고 있지 않음을 뜻한다. 따라서 완전히 잘 타는 불은 거의 연기가 나지 않는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22 추천 0 비추천 목록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댓글 쓰기 에디터 선택하기 ✔ 텍스트 모드 ✔ 에디터 모드 ?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독서편지 List Zine Gallery FirstThumb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글쓴이 조회 수 1388 사평역에서 - 곽재구 2006.09.07 風磬 37,758 1387 400년 전의 사부곡 2006.09.07 風磬 19,317 1386 접촉사고 2006.09.10 風磬 21,259 1385 어느 강사의 교훈 2006.09.10 風磬 23,331 1384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음악 2006.09.10 風磬 20,921 1383 요리사와 딸 2006.09.10 風磬 22,991 1382 나만의 최선 2006.09.12 風磬 18,469 1381 슬픈기도 2006.09.14 風磬 22,552 1380 엄마의 수첩 2006.09.16 風磬 22,689 1379 【독서편지】: 제 10 호 2006.09.16 風磬 18,145 1378 【독서편지】: 제 11 호 2006.09.17 風磬 17,724 1377 【독서편지】: 제 12 호 2006.09.18 風磬 21,864 1376 【독서편지】: 제 13 호 2006.09.20 風磬 16,413 1375 【독서편지】: 제 14 호 2006.09.21 風磬 17,425 1374 【독서편지】: 제 15 호 2006.09.22 風磬 15,793 1373 【독서편지】: 제 16 호 2006.09.23 風磬 15,467 1372 【독서편지】: 제 17 호 2006.09.25 風磬 14,365 1371 【독서편지】: 제 18 호 2006.09.26 風磬 15,399 1370 【독서편지】: 제 19 호 2006.09.27 風磬 10,998 1369 【독서편지】: 제 20 호 2006.09.28 風磬 14,354 1368 【독서편지】: 제 21 호 2006.09.29 風磬 9,982 1367 【독서편지】: 제 22 호 2006.09.30 風磬 8,815 목록 Search 검색 제목+내용제목내용댓글닉네임태그 전체검색 제목+내용+댓글 확장 변수 쓰기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64 Next / 64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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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배우면 저렇게 할 수 있다'는 교훈. 그 같은 깨달음을 주기 위하여 용신은 한가위의 놀이를 마련했던 것이다. 그날의 위로회는 밤이 늦어서야 끝이 났다. 최용신은 그날 아이들의 재롱 순서를 마치고 학부형들 앞에 나와 이렇게 설파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제는 진흙 속에 파묻힌 옥과 같습니다. 두뇌와 재질이 세계 어느 나라 어린이들보다 결코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일찍부터 배우고 가르치지 못한 탓으로 지금 우리 겨레가 남다른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제의 앞날의 행복을 열어 줄 사람은 여러분 자신이올시다. 요즘에도 60여 명의 어린이가 달려온 것을 수용할 수가 없어 되돌려 보내면서 전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제는 학원의 인가도 나왔으므로 여러분이 힘만 합하면 불가능한 일은 아닌고로 배움의 터전을 세워 주어야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이 샘골에다 자기의 뼈를 묻겠다는 결심을 털어놓았다. 그 고장 태생이 아닌 처녀의 몸이(비록 정혼한자리는 있는 몸이 라지만) 마을의 번영과 2세 교육을 위해 몸을 바치겠다는 데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날 밤으로 천곡 학원 건축을 의한 발기회가 구성되었다. 제일 먼저 부인 저축 계원들이 기금을 내겠다고 나섰다. "우리가 푼푼이 모은 돈 300원을 모두 천곡 학원 짓는 데 기부하겠어요." 용신은 반가운 정성을 절반만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부인들의 사업 발전을 위하여 저축금의 절반인 150원을 따로 남겨 두기로 한 것이다. 이튿날부터 발기인들의 활동이 개시되었다.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학원을세우는 기금을 모으기란 그렇게 수월한 편이 아니었다. 가까스로 150원 정도의 기금이 모아져서 결국 300원의 기금을 가지고 용신은 일을 벌이기로 하였다. 기금을 마련하기 시작한 지 닷새 만인 8월 20일부터 샘골 뒷동산 솔밭에서는 학원의 기초 공사가 시작되었다. 지경을 다지는 마을 사람들의 구령 소지가 마을 밖으로 멀리멀리 메아리쳐 갔다. 부인제들도, 어린이들도, 마을의 남정네와 노인들도 모두 한 마음 한 덩어리가 되어 밤이 깊은 줄고 모르고 작업에 매달렸다. 장정들은 가을 곡식을 거 뒤 들이기에 여념이 없었으나, 밤이 되면 어김없이 작업장으로 나와서 기둥도 세우고 지붕을 덮는 등 공사의 진척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다. 이듬해인 1933년 1월 15일, 마침내 용신과 샘골 주민들의 땀의 결정체인 천곡 학원 낙성식을 갖게 되었을 때 이웃 마을에서는 아침 일찍부터 새 학원의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 주민들이 몰려들었다. 어린이들의 춤과 노래로 자축연이 베풀어지고 학원을 완성하는데 짊어진 빚이 즉석에서 거출되었다. 학원은 용신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샘골 주민의 것이 되어 사랑스런 어린이들의 교육을 맡아 갈 것이었다. 용신은 학원의 완성과 함께 샘골의 여왕으로 떠받들어졌다. 그녀의 말에는 귄위가 섰고, 누구나 신임했다. 마을 주민들은 자기 집에서 색다른 음식을 마련하여도 용신을 불렀고, 어려울 때나 궂은 일이 있을 때에도 용신을 찾게끔 되었다. 농사에 필요한 것은 소를 기르는 일이었으나, 소를 기르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을 기르는 일이라는 것을 주민들은 깨달았다. 용신은 새로 지은 학원에서 110여 명의 학생들과 고락을 함께하였다. 이제는 주민들이 그녀를 우러러보고 자식들의 장래를 맡겼으나, 그녀는 결코 자만하지 않았다. 용신은 학교 뒷산에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쳤다. 수원 고농에서 과실 나무 묘목을 구해다가 그 재배를 권장하기도 하였다. 아이들과 함께 뿌린 깨밭에서 김을 매다 그녀는 내리쬐는 폭양을 이기지 못해 쓰러지기도 하였다. 깨를 판 돈으로 회를 사다가 용신은 손수 떨어진 학교 벽을 바르기도 했다. 마을의 공동답에 들어가 모를 심다가 거머리떼에게 물리는 일은 이제 예사였다. 용신의 헌신적인 봉사로 학원은 번창해 갔다. 그러나 110여 명의 학생은 학원의 규모에 비하여 너무 많은 숫자였다. 당국은 이를 묵인하지 않았다. 학원이 좁고 설비가 부족하니 60명 이상은 받지 말라는 게 당국의 지시였다. 교사와 아이들은 서로 붙들고 통곡했다. 50명의 아이들은 부득이 학원을 떠나야 할 형편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오전, 오후반을 가르친 뒤 가정을 순회하며 학습 지도를 해야 했다. 그 같은 고난의 연속은 비단 샘골에서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용신에게는 일찍부터 원산 두남리 고향에서 정혼한 김학준이란 약혼자가 있었는데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약혼자한테서는 소식이 끊겨 버리고, 설상가상으로 아버지의 병환과 오빠의 이혼 문제가 계속 샘골의 용신에게 날아들었다. 신앙과 신념으로 결합된 약혼자. "흙으로 돌아가자!"는 동지애로 결합된 약혼자로부터 소식이 끊기자 그녀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1934년 새봄이 돌아왔다. 용신은 농촌 운동을 위하여 새로운 지식과 구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일본의 고베 여자 신학교 사회 사업과에 학적을 두게 되었다. 그러나 용신의 일본행은 그녀에게 불행을 안겨준 계기가 되었다. 용신은 일본에서 각기병에 걸리고 말았다. 다리가 붓고 전신이 마비되는 등 중태였다. 귀국을 서두른 용신은 원산으로 내려가 병 치료를 계속했다. 용신이 샘골을 떠난 사이 학원에서는 교사의 이동이 잦았고, 주민들은 한결같이 용신의 귀향을 바랐다. "들어 누워 있어도 좋으니 샘골로 오라."는 성화 같은 재촉에 못이겨 용신은 샘골로 돌아왔다. 쇠약해질 대로 쇠약한 용신이었으나 그녀가 샘골에 다시 돌아오자 마을은 생기가 돌았다. 학원을 지원하던 YWCA 원조가 절반으로 삭감되었으나 그녀는 꺾이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아끼지 않고 일을 했다. 급기야 과로는 용신을 쓰러뜨리고야 말았다. 장에 이상이 있어 수원 도립 병원에 입원했으나 용신은 두 번이나 수술을 받고도 회복하지 못했다. 1935년 1월 23일 오전 0시 20분이 그녀의 임종 시간이었다. 용신의 유해는 그녀의 유언대로 학교가 잘 보이는 샘골 뒷산 언덕에 안장되었다. 그녀는 죽어서도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아이들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용신은 이 세상에 태어난 지 27년 만에 샘골의 양지 바른 언덕에 눕게 되었지만, 그녀는 죽어서 영원히 산 상록의 나무가 돈 것이었다. 1962년 4월2일. 그해는 최용신이 스물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27년이 되는 해였다. 용신의 정신이 스며 있는 샘골에서는 그녀를 위한 첫 추도식이 열였다. 그 자리에는 수원 고등 농립 학교 시절에 용신의 농초 계몽 사업을 후원하던 유달영 교수, 옛날의 약혼자이던 김학준 교수 부처, 심훈의 원작 소설 <상록수>를 영화화한 신상옥 감독, 채영신 역의 최은희 등 많은 인사가 참석하여 용신의 명복을 빌었다. 용신의 넋을 위로하는 아름다운이야기는 그에 그치지 않는다. 김학준의 아내 길금복은 해마다 세모가 되면 제물을 차려 가지고 와서용신의 묘소를 찾았다고 하며, 용신의 유지를 받들어 남편은 천곡 고등 농민 학교의 재단 이사장을 , 그리고 아내는 재단 이사로 활동했다고 한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정치, 경제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세계제국 몽고와 맞선 고려 민중의 힘 - 심재석(한국외국어대 강사) 역사를 보는 눈, 현재를 보는 눈 고려는 승패가 달리 결정났더라면 민족의 운명이 크게 위태로웠을 외침들을 물리치며 500여 년을 지속하였다. 양규의분전, 강감찬의 귀주대첩 등과 같이 나라의 운명을 가름한 중요한 전투들을 오늘날 우리는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공로를 전투 지휘관에게 돌려버리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들의 뛰어난 자질과 업적은 칭송받아 마땅하지만, 영웅들이 성공한 이면에는 결의에 찬 백성들이 있었음을 지나치게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추운 겨울날 삼베 옷에 맨손으로 병장기를 잡고 적진에 뛰어들던 평민 군사의 모습을 연상하지 못한 채 지휘관에 대한 찬양에만 여념이 없다면, 그는 역사의 반쪽만을 이해하며, 나아가 현실도 반쪽 밖에 보지 못한다는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군사정권 시절 장군이나 성군을 떠들썩하게 재조명하고 현창상업을 대대적으로 벌인 것도, 따지고 보면, 과거에 대한 반쪽짜리 시각을 은연 중에 현재에 적용시키려는 불순한 의도가 게재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지배층이 쓴 역사책에는 지배층의 역할이 크게 부각되는 사건이 주로 수록되었고, 이로부터 독자는 위인에 대한 강한 인상을 갖게 된다는 점을 이용하여, 독재를 합리화하고 독재자를 미화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책에서는 지배층이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 일반 백성만의 힘으로 국난을 극복한 전투들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전투들은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전투들은 수록되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지배층 스스로 자신들의 낯을 깎아내릴 승리를 기록했다는 점에서- 무엇인가 대단히 의미심장한 사건이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러한 기록들은 대개 몽고 침략기에 집중되어 있다. 몽고의 1차 침입 몽고족은 고려에서 최시 정권이 안정기에 접어들던 시기에 흥기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초원에서 약탈을 일삼던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접촉하는 모든 민족에게도 그대로 적용했다. 그들은 대다수의 농경민족이 취하고 있던 중간의 길- 적당한 군림과 복종- 에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다. 몽고족의 공격에 직면하여 택할 수 있는 것은 저항 아니면 무조건 항복뿐이었다. 항복하면 그들의 노예가 되어 상상하기 힘든 부담을 져야 했고, 견디다 못해 저항하면 모든 주민은 학살당하고 도시와 마을은 불태워졌다. 바그다드에서는 하루 사이에 수십만 명이 살육당했고, 러시아의 귀족들은 모고군의 승전 기념 술자리 밑에 깔려 질식해 갔다.서하, 금, 호라즘제국, 러시아의 공국들, 압바스 왕조, 대리국, 동진, 남송 등 많은 나라가 지도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들이 농경민의 생활방식을 이해하기 전까지 그들의 공격에 대항하여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동방의 작은 나라 ‘고려’는 끝내 독립을 유지하였고 오히려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가 먼저 망해 버렸다. 1231년(고종18)몽고는 고려에 대한 1차 침략을 개시하였다. 이때 이들은 고려에서 저고여를 살해했다는 것을 침략의 구실로 삼았다. 저고여는 공물을 거둬가기 위해 몇 년 전 몽고에서 파견한 사신이었다. 몽고는 고려와 관계를 맺은 이래 과중한 물품을 끊임없이 요구하였다. 그것은 고려측으로서는 요나라나 금나라에 했던 것과 같은 의례적인 조공이 아니라 견디기 힘든 수탈이었다. 사신 한 떼가 가면 곧바로 또 한 떼가 오고, 뒤에 온 자는 먼저 가지고 간 물품 중 나쁜 것을 왕 앞에 던지면서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저고여도 이렇게 행패를 부리던 사신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이 자가 공물을 받아 가던 도중 압록강 부근에서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조사하러 나왔던 몽고인들은 고려 복장을 한 군사들이 쏘아대는 화살에 쫓겨 도망하고 말았다. 이에 몽고에서는 고려와 관계를 끊고 급기야 침략을 감행하게 된 것이다. 저고여를 고려에서 죽였는지 아니면 고려를 모함하려는 다른 세력이 죽였는지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역사의 수수께끼이다. 물론 고려에서는 금나라 장수가 한 짓이라고 강변했지만. 고려 백성의 적극적인 저항 고려에서는 몽고의 침략에 대하여 정면으로 맞서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고려의 중앙군이 몽고군을 물리치기 위하여 북상할 때, 몽고군은 서북지방의 여러 성들을 공격, 함락시키고 있었다. 함락되면 닭이나 돼지의 소리도 들을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도륙당하였다. 철주(평북 철산)에서 벌어진 전투는 당시 서북지역이 겪어야 했던 고콩을 잘 대변해준다. 철주는 압록강을 넘어 남하하는 적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요로에 자리하고 있었다. 몽고군은 이 성을 공격하기에 앞서 ‘문대’라는 사로잡은 장교를 시켜 “진짜 몽고병이 왔으니 항복하라”고 외치게 했다. 그러나 문대는 “가짜 몽고병이니 항복하지 말라”고 외치고 죽임을 당했다. 문대를 죽인 몽고병은 철주성에 맹공을 퍼부었고 공방전은 보름동안 계속되었다.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게 되자 성을 지키던 관리 이세화는 부녀자와 어린아이를 창고에 넣고 불을 질렀으며, 자신은 장정들과 함께 자결하였다. 성이 무너지면 부녀자는 욕을 당하고 아이들과 함께 끌려가 노예가 되며, 저항한 장병들 모두 처참하게 살육당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중앙에서 파견한 대군이 도착하기 전에 서북의 여러 성들은 거의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몇몇 성들은 끝내 항복하거나 함락되지 않았다. 이 가운데 지휘관 박서를 중심으로 단결한 주민들이 끝내 성을 지킨 구주(평안북도 구성) 전투가 가장 유명하다. 몽고군은 큰 돌을 날리는 포차를 만들어 성을 파괴하였고, 소가죽을 씌운 큰 수레에 병사를 태워 성밑에 접근시킨 다음 성벽에 구멍을 뚫었으며, 심지어는 마른 풀에 사람 기름을 적셔 두텁게 쌓아놓고 불을 지르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성에서도 포차를 만들어 반격하고, 구멍에 쇳물을 녹여 부어 수레를 태워 버렸으며, 물에 갠 진흙을 던져 불을 끄는 등 치열한 방어전을 펼쳤다. 결국 몽고군은 구주를 그대로 둔 채 남하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3군으로 편제한 고려의 대군은 황주(황해도 황주)에서 몽고군과 첫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기병을 주축으로 한 몽고군 선봉이 기습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놀란 고려군은 일시 무너질 뻔하였으나 몇몇 장군들의 분전으로 겨우 몽고군을 격퇴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 마산(경기도 파주)의 초적[산골에서 물푼을 터는 도적]으로 종군한 두 사람이 몽고병을 쏘니 대로 엎어졌다. 관군이 이긴 기세를 타 쳐서 패주시켰다’고 하여 실제로는 지배층의 부패에 항거하다 국난을 맞아 정부에 협력하게 된 초적 출신 병사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황주에서 적의 선봉을 격퇴한 후 중앙군은 북상을 계속하여 안북부(평안남도 안주)에서 몽고 주력부대와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전투의 결과는 고려측의 완전한 패배였다. 고려군의 태반이 살상당하였다. 이 싸움은 고려 중앙군이 몽고병과 접전한 마지막 전투가 되었다. 고려 정부에서는 몽고의 힘에 놀라 화친을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친 교섭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몽고군은 남하를 계속하여 충주성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전토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당시 충주의 주민은 지배층인 양반별초와 피지배층인 노군 잡류들에게 혐의를 씌워 죽이려 하였다. 이에 노군 잡류부대는 “ 몽고군이 오자 다 달아나 숨어버리고 성은 지키지도 않더니, 이제는 몽고군이 약탈해 간 것까지 우리게게 죄를 돌려 죽이고자 하는가?” 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역사는 승리와 반란이 동시에 부각되는 쪽으로 서술되고 말았다. 할 말 없는 지배층이 권위를 회복하고자 큰 공로를 세운 피지배층을 몰아붙인 안타까운 사례이다. 몽고의 2차 침입 충주성 전투를 마지막으로 화의가 성립되어 몽고군은 철수하였다. 그러나 화의의 결과는 고려의 주권을 크게 침해할 뿐만아니라 최씨 정권에게도 큰 타격을 주는 것이었다. 몽고에서는 점령한 지역과 개경에 다루가치를 두어 내정을 간섭하게 했다. 또한 국내에서 몽고의 간섭이 심화될수록 최씨 정권의 입지는 점점 더 위험해 질 것이었다. 이에 따라 최우는 대다수 관료들의 반대 속에 다루가치를 모두 죽이고 수도를 강화로 옮겨 몽고에 대항할 것을 결정하였다. 몽고에 대한 전쟁이 재개된 것이다. 당시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30여 년에 걸친 긴 싸움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강화천도와 대몽항쟁은 정권 유지 차원에서 결정된 것이었기에 사실상 백성들을 몽고병의 말발굽 아래 아무 대책 없이 노출시킨 것과 다름 없었다. 강화천도 이후 기나긴 대몽항쟁 기간동안 중앙에서 출동한 대군이 몽고군과 정면대결을 벌인 적은 한번도 없었다. 정예병은 담나 좁은 강화도에서 권력층의 안일한 삶을 보호할 뿐이었다. 중앙에서 백성들에게 한 일이란 기껏해야 정든 삶의 터전을 버리고 산성이나 해도로 들어가도록 독려 혹은 위협한 것 뿐이었다. 백성들은 몽고군의 침략에 맞서 스스로 살 길을 찾아야 했다. 이렇듯 어려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꿋꿋하고 치열하게 맞서 싸웠다. 이 시기에 백성들의 힘으로 몽고병을 격퇴한 기록은 단편적이나마 자주 발견된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처인성 전투가 있다. 처인성 전투 눈발이 몹시나 휘몰아쳤을 1232년 12월 16일, 몽공장군 살리타이는 용인땅 아골리 처인성에서 맥없이 꺼꾸러져 이국땅의 외로운 혼이 되었다. 그는 몽고의 고려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왔다가 용인의 처인성에서 피살되었다. “ 태종 4년 8월, 다시 살리타이를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정벌케 했는데, 왕경 남쪽에 이르러 처인성을 공격하던 중 유시에 맞아 죽었다”"몽고의 원수 살리타이가 성을 공격하자 김윤후가 이를 사살하였다”. 이상은 <원사>와 <고려사>의 기록이다. 그러면 처인성은 어떤 곳일까? 몽고군의 침입을 격쾨하고 그 장수를 죽였으니만큼 험한 지형, 돌로 쌓은 튼튼한 성벽, 높은 망루등과 같은 난공불락의 조건을 갖추지 않았을까? 실상은 이와 정반대이다. 성은 경기도 용인시 남사면 아곡 2리에 있다. 이 성은 둘레가 650여 보 밖에 되지 않는 조그마한 토성으로 총면적 5,820평에 불과한 작은 동산 모습을 하고 있다. 지금은 흙으로 메워져 잡목들만이 어지럽게 서 있을 뿐, 이곳이 ‘ 경기도 기념물 44호’라는 사실은 인근의 주민들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다. 이 조그마한 성에서 세계역사상 크게 기록될 만한 사건이 지금부터 760년 전에 발생하였다. 세계를 제패하던 몽고군의 고려정벌군 총사령관 살리타이가 이 곳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 것이다. 1232년 10월 살리타이를 사령관으로 한 몽고군의 제2차 원정군은 강화도 정부를 비켜지나 지금의 서울인 남경을 노략하면서 큰 저항없이 광주에 이르렀다. 이 때 몽고군은 특정 지역을 목표로 공략에 나섰던 것이 아니라, 육지를 무제한 노략하여 고려정부가 스스로 백기를 들게 하려는 작전을 구사하였다. 몽고의 주력군이 광주에 이르는 동안 그들의 별동부대는 대구까지 내려가 부인사에 소장되어 있던 초조대장경을 불태웠다. 남경을 수비하는 중요한 요충인 광주에 살리타이가 휘하병력을 이끌고 도착한 것은 1232년 11월 중순이었다. 그는 쉽게 광주성을 공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부사 이세화를 중심으로 주민들이 일장산성(지금의 남한산성)에 응거하여 강력히 저항하자 공략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살리타이는 말머리를 돌려 수주(경기도 수원)에 속했던 처인부곡을 지나 충주로 남하하고자 했다. 이 길목의 한편에 흙으로 쌓아 올린 처인성이 초라하게 서 있었고, 그 안에는 인근 부곡에 사는 주민들이 대피하고 있었다. 일반 주민의 힘으로 살리타이를 사살하다 처인부곡민들은 몽고군의 말머리가 자기네 고장으로 향하자 가까운 처인성에 들어갔다고 짐작된다. 이렇게 들어온 사람들 중에는 백원현에서 온 승려 김윤후도 있었다. 대덕이나 선사등과 같이 지배층 출신이 거의 독점하는 승계를 띠지 않고 다만 ‘ 승려’라고 표기된 것을 볼 때, 그는 일반 백성 신분의 승려였던 것 같다. 그리고 <고려사>에는 그가 처인성에 피난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그는 피난을 한 것이 아니라 전투를 위하여 처인성에 포진한 것으로 해석해야 마땅하다. 피난하려는 승려가 몽고군이 이동하는 길목으로 찾아들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광주성 공략에 실패한 살리타이는 준마에 높이 올라 남하를 시작하였다. 그의 눈에 비친 처인성은 그야말로 싸울 만한 그리고 점령할 만한 가치도 없어 보였으리라. 다만, 지나치는 길목 그 한 귀퉁이 조그마한 토성에서 감히 자신에게 대항하는 ‘ 애교의 화살’을 둔 채 남진하는 것은 그의 체면이 허락하지 않았으리라. 살리타이는 처인성의 맞은편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구릉에서, 가볍게 치고 남하를 계속할 요량으로, 휘하 군사들에게 시급히 함락시킬 것을 재촉하고 있었다. 이 때 처인성 안에서는 주민들 모두가 필사적으로 대항하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여기서 구심점으로 활약한 사람이 바로 승려 김윤후였다. 그를 중심으로 단결한 주민들은 몽고군의 공격에 대해 응사하기 시작하였고, 필사적인 전투가 한창일 때 맞은편 언덕위에서 부하들을 독려하고 있던 살리타이가 느닷없이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처인성에서 날아온 화살에 맞은 것이다. 사령관이 어이없게도 쓰러져 버둥거리자 몽고의 기마부대는 더 이상 싸울 수가 없었다. 총사령관이 죽을 경우 전투를 중단하는 것이 몽고의 관습이었다. 그들은 살리타이의 싸늘한 시체를 거두어 황급히 퇴각하고 말았다. 살리타이의 뒤를 이어 몽고군을 지휘한 테케는 강화도정부와 몇 가지 가벼운 조약을 맺어 체면을 세운 뒤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처인성의 승리는 몽고의 침략기간 중 고려가 세운 가장 큰 전승이었다. 정규군이 아닌 주민들이 자위적으로 항전하여 대륙을 헤집고 다니던 몽장 살리타이를 죽이고 나라를 구했다는 점에서 크게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전쟁이 남긴 울림 이후로도 오랜 기간 전쟁이 계속되었다. 산성과 해도로 들어간 백성들은 결국 피로와 굶주림에 지쳐 더 이상 항전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몽고족도 어느덧 농경민족의 삶을 이해하고 그전처럼 약탈과 살육을 즐기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시일이 지날수록 요구조건을 대폭 낮추어 제시하였다. 최씨정권은 정권유지를 위해 전쟁을 계속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이러다가 지배층 전체가 망할 것이라는 위기의식 속에서 최씨정권이 무너지고 태자가 직접몽고에 가서 화친을 요청함으로써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때 고려가 몽고로부터 승인받은 조건은 실로 파격적인 것이었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물론, 예로부터의 관습과 제도 또한 그대로 유지할 것을 허락받으며, 국력이 회복될 동안은 강화도에서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배려까지 있었다. 이 때 태자[뒷날의 원종]와 쿠빌라이[원 세조]간에 합의된 사항들은 ‘세조구제’라 하여 중요한 협정으로 취급되었고, 이후 원의 간섭으로 고려의 독립이 위협받을 때마다 이를 방어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고려는 많은 나라가 멸망하는 속에서도 끝내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려가 몽고제국체제하에서 이러한 지위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고려 백성들의 장기간에 걸친 피어린 항쟁의 결과였다. 백성들은 지배층 출신의 훌륭한 장수가 지휘할 때 물론 그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몽고병을 격퇴했거니와, 지배층이 도망했을 때조차 스스로 단결하여 성을 고수했던 것이다. 초적출신 병사들의 대활약, 양반과 지휘관이 모두 도망한 성을 노군 잡류들이 끝내 지킨 충주성 전투, 아예 지배층의 지휘를 받지 않고 부곡민 스스로 단결하여 침략군 총사령관을 죽인 처인성 전투, 백성들의 이러한 항쟁이 고려가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일개 지휘관이 모든 것을 다 했고, 그 인물이 없었더라면 우리 민족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을 것이라는 ‘ 누구의 무슨 대첩’식의 역사이해는 그릇된 것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일반 백성을 국난 극복의 궁극적이고 능동적인 주체로 보는 역사인식은 현재를 올바로 보고 더욱 나은 사회로 만드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영원한 비밀 초등학교 6학년, 어느 겨울의 일이다. 쉬는 시간에 운동장으로 나와서 몇몇의 친구들과 양지 쪽에 옹기종기 모여 떠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소변이 마려웠다. 화장실은 너무 멀고 날씨도 추워 움직이기 싫었던 나는 슬그머니 빠져나와 탱자나무 울타리에 실례를 했다. 누가 볼세라 얼른 일을 마치고 왁자지껄 떠드는 친구들 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잠시 후 학교에서 제일 무서운 체육 선생님이 상기된 얼굴로 헐레벌떡 우리를 향해 뛰어오셨다. 선생님은 내옆에 서 있던 친구의 멱살을 움켜잡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녀석아, 어디다가 오줌을 싸느냐! 거기가화장실이더냐." 친구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얼른 내 눈치픞 살피면서 말했다. "선생님 무슨 일이세요. 제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누구냐. 이 두 눈으로 보았는데 거짓말을 하다니." 그 순간 선생님의 손이 하늘로 올라가더니 '철썩'하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화가 난 선생님이 기어이 친구의 뺨을 때리고 만 것이었다. 친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선생님, 제가 그랬습니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슬며시 눈을 떠보니 친구의 양볼에는 벌겋게 손자국이 나 있었다. 그때 수업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그 친구의 볼만큼이나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사쥐고 교실로 뛰어들어가면서 나는 뒤따라오는 친구를 자꾸만 뒤돌아보았다. 이 사건을 이십 년 이상 가슴속에 묻어 두었다. 그 친구와는 계속 만나 왔으나 한번도 그 일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친구를 만날 때마다 내 마음은 너무나 불편하고 미안했다. 그러던 어느날 마음을 다져먹고 친구에게 사과를 했다. 그런데 친구는 그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겠다며 손을 저었다. 그날 밤 홀가분한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가던 나는 불현 듯 이십여 년 전 선생님에게 멱살을 잡힌 그 친구의 눈빛이 떠올랐다. 그 순간 친구는 그 때의 일을 누구보다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진성수 님/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69 - '세계는 나의 표상': 쇼펜하우어(1788-1860년) 그때 세계에서는 1837년: 미국, 최초의 공황발생 1840년: 청, 아편전쟁시작 쇼펜하우어 [Schopenhauer, Arthur] 1788.2.22 프로이센 단치히(지금의 폴란드 그다인스크) ~1860. 9. 21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쇼펜하우어는 자기자신을 천재라고 믿고 있었다. 그는 천재는 수학을 싫어한다는 말도 했다. 니체도 천재였다. 니체는 수학을 제외한 모든 학과목에서 우수했다고 한다. 그 대신 쇼펜하우어는 광기도 심했던 사람이다.그의 부친의 가문에는 몇 사람의 정신이상자가 있었고 죽기 전의 부친도 그런 요소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의 부친과 모친은 나이의 차이도 심했고 성격도 서로 크게 달랐다. 인생관에서도 일치점이 없었는가 하면, 체구가 장대하고 우울한 성격의 부친에 비해 모친은 왜소했고, 언제나 명랑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어쨌든 이런 점들이 쇼펜하우어의 성격적 불균형과 조화로운 정상성을 상실한 생애를 갖게 했는지 모른다. 모친과의 심한 불화도 성격의 차이였던 것 같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철학에서 모든 소유와 명예같은 것은 무가치한 것으로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자기자신은 심한 명예욕에 빠져 있었다. 말년에는 자기 저서가 많은 독자를 가지며 대학 강단에서 자기 철학이 강의된다는 기사들을 보면서 그것들을 뽑아모아 자랑삼기도 했다. 자기 거실양쪽 벽에는 칸트와 괴테의 사진이 걸려 있고 많은 개들의 사진도 있었다. 애견의 이름은 아트만이라는 인도철학의 용어를 붙여주기도 했다. 잉글랜드라는 한 식당에서 주로 식사를 했고 다른 곳에서 식사를 할 때는 음식물에 해로운 물질이 들어가 있는지 않은지 의심하는 습관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글을 읽으면 왜 개를 칭찬하고 있는지 족히 수긍이 간다. 물론 그의 철학적 업적은 여러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오직 대학강단에서 그의 철학을 달갑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칸트를 제외한 당대의 철학자들을 경시하거나 비판한 장면들이 심하기 때문이며, 특히 헤겔에 대해서 그러했다. 헤겔의 명성에 대한 질투가 그를 적대시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었다.그는 어떤 철학적 이론을 갖고 염세주의를 제창했는가? 그 당시의 철학자들은 세계와 존재를 어떤 절대적 실체로부터 해명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헤겔이 정신을 말했고 포이어바흐나 마르크스가 유물론을 제창했듯이, 어떤 이들은 다원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존재세계의 실체는 의지라고 생각했다. 물질세계를 좌우하는 힘 및 역학도 의지작용과 통하는 것으로 보았고, 생명체를 유지하는 것은 생명의지로 보았다. 이 생명의지에 의해 식물들이 나비와 바람을 타고 화분을 옮겨 번식하기도 하며, 심지어 어떤 식물은 동물을 잡아먹기도 한다. 동물들은 자기번식의 강한 욕망으로 생을 유지해간다. 어떤 수놈은 단 한 번의 교미를 위해 태어난다. 그래서 종족을 보존, 유지해간다. 인간의 본질이 되는 것도 살아남으려는 본능의지의 발로라고 본다. 특히 성욕은 종족유지의 기본본능이며 여성들은 남성들보다도 종족유지의 본능이 더 강하다고 본다. 사람들은 지성이나 이성이 인간의 본질이 되는 듯이 착각하고 있으나, 지성은 본능의지의 심부름을 하는데 불과하다. 인간은 생명의 위기상태에 빠지면 지성의 힘이 아닌 본능의 직각을 얻어 생명을 보존한다. 이러한 의지는 맹목적이며 살아남기 위한 의욕으로 지배된다. 사람이 후손이 없을 때 느끼는 고독은 생명의 단절을 의미하는 존재단절의 고독감이다. 이렇게 맹목적인 의지를 그대로 방치해 두면 약자는 강자의 지배를 받으며 모든 생명체는 강자의 희생의 제물이 될 뿐이다. 자연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그 속을 살펴보면 살생과 살육이 계속되는 싸움과 정복의 연속이다. 자비와 사랑 같은 것은 인간이성이 만들어 놓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광산의 굴 속에 갇혀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배고픔을 이기고 살아남기 위해 동료들을 식량의 대상으로 삼는다. 어떤 조류는 어미새까지 다 잡아먹은 뒤에야 둥지에서 날아 나온다.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삼갈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존하고 있는 세계는 최악의 세계이며, 이보다 더 나쁘고 악한 세계는 있을 수 없다고 본다.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상의 길이며, 이왕 태어난 바에는 이 저주스러운 비참한 현실을 깨닫고 자살하는 것도 무방하다고 본다. 우리에게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세계에는 희망도 없으며, 암흑을 극복할 가능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진로는 악의 축적일 뿐이며, 사회적 삶은 역사악을 더해갈 뿐이다. 이성과 진리, 예술 등을 논하는 것은 이러한 비극적 운명을 잠시 잊게 해주는 마취제에 지나지 못한다. 고통과 비참은 어디에나 있으며 긍정적인 희망은 허망한 꿈일뿐이다. 신의 존재는 헛된 환상에 불과하며 종교적 인식 같은 것은 자기기만일 뿐이다. 개인의 죽음은 이 세계악의 운명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작은 파도가 큰 조류에 스며들 듯이 개인의 비참은 인류 전체의 비참에 스며들 뿐이다.모든 세계는 저주받은 존재에 지나지 못한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처녀들께서는 부끄럼 타지 말고 '총각김치'를 드셔요 국어에서는 남녀를 나타내는 말이 무척 다양하게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혼인할 나이가 된 성인 남녀를 지칭할 때에는 '처녀' '총각'이란 한자어를 사용합니다. 그 중에서 '처녀'는 그 단어 속에 '여'가 들어 있어서 그 뜻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지만, 아마도 '총각'은 그 어원을 전혀 짐작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한자인 '총'은 지금은 '다 총' 등으로 '모두'라는 뜻을 나타내고 있지만, 원래는 '꿰맬 총', '상투짤 총' 등으로 쓰이던 것입니다. '각'은 물론 '뿔 각'이고요. 중국에서나 우리나라에서 아이들이 머리를 양쪽으로 갈라 뿔 모양으로 동여맨 머리를 '총각'이라고 했었습니다. 이런 머리를 한 사람은 대개가 장가가기 전의 남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머리를 한 사람을 '총각'이라고 한 것이지요. 옛날에는 어린 소년들에게도 '총각!'하고 불렀습니다. 이것을 마치 어린 소년을 높여서 부르는 것처럼 생각한 분은 안계신지요? 여기에서 '더벅머리 총각'이라는 말도 생겼지요. 어떤 사람은 '떡거머리 총각'이라는 말도 쓰는데, 이때의 '떡거머리'가 무엇을 나타내는 말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느 사전에도 '떡거머리'란 단어는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에 연유해서 생긴 단어가 또 있습니다. 그것은 '총각김치'란 말입니다. '총각김치'는 여러분들이 잘 아시듯, 손가락 굵기만한 어린 무우를 무우청째로 여러 얌념에 버무려 담은 김치를 말하는데, 그 어린 무우가 마치 '총각'의 머리와 같은 모습을 닮아서 생긴 단어입니다. 그런데 처녀들은 그 '총각김치'란 단어 자체나 또는 실제의 김치를 기피하곤 했었습니다. 그 총각김치가 마치 총각의 생식기를 형상하는 것에서 생긴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런 것이 절대 아니니, 처녀들은 이제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총각김치를 드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5장 죽음보다는 철저한 삶을 최후에 우리 모두는 죽는다 - 소동파 소동파 [蘇東坡, Ssu Tungp'o] 1036. 12. 19~1101. 7. 28. 소동파는 북송때 사람으로, 왕안석과 불합하고 그의 신법에 반대한 탓으로 여러차례의 귀향을 가게 되었다. 십여 년에 걸친 그의 유배생활이 겨우 죽기 두 달 전에야 해금된다. 1100년, 철종이 죽고 신종황후가 섭정을 하면서 그해 4월 원우대신들의 사면이 있었다. 동파에게 마음대로 거주해도 좋다는 허가가 내려졌다. 그는 1101년 1월에 대유령을 넘었다. 태후가 서거하였다는 소식을 듣는다. 또 한 차례의 정풍이 예상되었다.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한 동파는 아들들과 함께 호반지역의 농장에 가서 살 참이었다. 의진에서 아들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동파는 강위의 배안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여름이 닥쳤고 그의 몸은 극도로 쇠잔해갔다. 아메바성 이질에 걸린 것이다. 근 한 달 동안이나 병상에 누워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7월 15일 병세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고열이 심하고 잇몸에서는 피가 났다. 자신의 증상을 분석해 본 결과 열독으로 발병된 것, 즉 전염병으로 진단되었다. 내버려두는 수밖에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여기면서 동파는 전세웅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장자에 의할 것 같으면 나라를 통치하는 데에는 별 도리가 따로 없고, 그저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최상책이라 했습니다. 보내 주신 인삼, 맥문동과 복령을 함께 달여 목을 축이고 있는데 만약 이것을 복용하고도 별 효염을 못보면, 이는 하늘의 뜻이지 내 탓이 아닙니다. 그러나 동파는 약을 복용하지 않고 있었다. 7월 18일 세 아들을 모아놓고 몇 가지 유언을 한다. 악한 짓을 하지 않았으니 지옥으로 가지 않을 게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묘지명은 아우인 자유가 쓰도록 하고 웅산 기슭에 아내와 합장하라. 항주의 옛친구 유림장로가 줄곧 그의 곁에 있었다. 26일, 그는 마지막 시 한 수를 짓고 장로와 더불어 이승과 저승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불가의 염불을 좀 외워보라고 권했다. 동파는 빙긋이 웃더니 <고승전>을 읽어 보았는데 그들도 최후에는 모두 죽었다 고 말했다. 7월 28일, 그는 급격하고 몸이 쇠잔해졌고 호흡도 차츰 가빠졌다. 관습대로 가족들은 코 끝에 솜을 올려놔 그의 호흡을 살폈다. 온 가족이 방안에 모여 있었다. 장로는 그의 곁에 가까이 다가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 순간 내세에 대해 생각해 보시오. 동파도 천천히 속삭였다. 서천이 있다 하더라도 애써 그곳에 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장로가 다시 말했다. 특히 이 순간엔 시도해 봐야 합니다. 억지로 애쓰는 것은 오히려 잘못입니다. 그의 마지막 대답이었다. 도달해 보아야 별 것 아닐세 여산은 여전히 안개로 덥이고 절강은 여전히 파도가 치네. 그의 오도시대로 도달해 보아야 달라진 것은 없고 여산은 여산, 절강은 절강일 뿐, 세계는 여전히 현상계 그대로였다. <고승전>을 읽었는데 그들도 결국엔 다들 죽었다는군!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가 모두 죽는다는 사실을 나직하게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33. 수염에 세금을 매긴 황제 러시아에 절대주의를 확립하여 러시아를 강력한 국가로 만들었던 이가 17세기의 표트르대제이다. 15세기 말 이반 3세 때 러시아는 몽고의 지배에서 벗어났고 이후 이반 4세에 이르러 근대적인 국가와 사회의 기본 골격을 갖추었다. 그런데 그것은 농노제를 바탕으로 하는 황제(챠르)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전제 국가였다. 이반 4세는 비밀 경찰을 만들고 황제에 반항하는 귀족들을 억압하는 한편, 자신에게 충실한 신흥 귀족층을 키우는 방식으로 황제권을 강화해 갔다. 또한 농민의 이동의 자유를 박탈하고 농노제를 강화했다. 이반 4세 이후에는 황제권 계승의 혼란에다 귀족들간의 갈등, 스테카라진의 반란 등 농민들의 반항으로 국가가 한때 혼란에 빠졌다. 그러다가 1613년 로마노프 왕조가 들어섬으로써 어느 정도 질서가 회복되어 러시아는 안정적인 발전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하지만 이전 세기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17세기의 러시아는 국민의 대다수가 문맹이고 아시아적 성격이 강한 후진 국가였다. 또한 유럽 세계와도 별로 접촉이 없어서 유럽과 직접 거래하는 곳은 백해의 아르한겔리스크뿐이었다. 이 때 황제에 오른 사람이 표트르 대제이다(1682). 표트르의 전 황제 표드르(Fedor)는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전 황제 알렉세이(Alexei)의 두번째 왕비의 소생인 열 살의 표트르가 황제로 옹립되었던 것이다. 그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이복 누이인 소피아가 친위대의 도움으로 섭정을 폈다. 그러다가 1689년 표트르는 소피아를 수녀원에 가두고 실권을 장악했다. 키가 크고 총명했으며 호기심이 강한 청년이었던 표트르는 전쟁 놀이를 즐겼고 형식적인 것을 싫어해서 궁정이나 교회의 의식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또 손재주도 뛰어나서 자신의 의자나 식기를 손수 만들었고 외과와 치과의 진료 기술도 어느 정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전문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측근들은 그가 수술 도구를 가지고 나타나는 일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표트르는 뒤떨어진 러시아를 발전시키기 위해 유럽의 기술을 도입하고자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했고 자신도 하사관으로 신분을 감추고 사절단의 일원으로 유럽 여행을 떠났다. 유럽 여행 도중 그는 네덜란드와 영국의 조선소에서 직공으로 일하는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러시아로 돌아온 표트르는 서구화를 통한 러시아의 근대화에 착수했다. 우선 그는 생활과 풍습을 서구화했다. 신하들은 몰론 자신의 긴 수염도 깍고 동양식의 거추장스러운 옷을 서구식으로 바꾸었다. 그런데 이런 조치를 강제로 시행해 수염을 자르지 않는 자에게는 `수염세`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귀족 부인들은 가슴이 깊게 파인 옷을 입고 무도회에 나와 술을 마시게 했다. 또한 그는 젊은이들을 유럽으로 유학 보내고 유럽인을 초빙하여 유럽의 문화와 시술의 도입에 힘썼다. 표트르는 러시아의 근대화와 더불어 `서방으로의 창구`를 확보하기 위해 발트해로의 진출을 꾀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시 발트 해를 지배하고 있던 스웨덴을 꺽어야만했다. 표트르는 덴마크, 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스웨덴과 전쟁을 시작했다. 이른바 `북방전쟁`(1700~21)이 시작된 것이다. 1700년 11월 나바르 강 전투에서 패하는 등 초기의 전세는 불리 했지만 후퇴해서 군비를 강화하고 군대를 정비한 러시아는 1709년 폴타바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전세를 뒤집었다. 이 북방 전쟁의 승리를 통해 러시아는 에스토니아 등 `서방으로의 창구`를 얻었다. 표트르는 북방 전쟁중에 중앙과 지방의 행정, 관료기구도 재편하여 원로원을 창설하고 지방에는 지사를 파견했다. 또한 징병 제도를 마련하고 각군 사관학교도 세웠다. 그렇지만 지속되는 전쟁과 개혁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표트르는 모든 것에 세금을 부과했고 새로운 세원 마련을 위해 종래의 호구세 대신 인두세를 신설했다. 그는 또한 중상주의 정책으로 러시아의 산업을 발전시키고자 하여 보호 관세로 수입을 억제하고 면세 등 각종 특권을 제조업자에게 부여했다. 이러한 표트르의 서구화, 근대화 정책과 팽창 정책으로 말미암아 러시아는 후진성을 벗어나 비로소 유럽의 일원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제(the Great)'라고 불리게 된 표트르 1세는 북방 전쟁중 새로 건설해 수도로 삼은 페테르스부르크(`표트르의 도시`라는 뜻)와 함께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제2장 살아나는 용의 혼 3. 모든 중국인을 간첩으로 몰아붙인 방송 1988년 헬러윈데이인 10월 31일, 미국 CBS 방송은 한 화성인이 미국동북부를 침략하였다는 가상적 내용을 아주 생생한 화면으로 방송한 적이 있다. 이는 본래 공상과학소설을 각색한 프로그램이었는데 방송국 아나운서의 뛰어난 능력 때문이었는지 순식간에 어처구니 없는 일이 미국내에서 발생하게 되었다. 평상시 썰렁한 분위기였던 교회들도 방송이 나간 후 울부짖는 사람들로 가득차게 되었다. 자신의 죄를 참회하면서 화성인들이 쳐들어 오기 전에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디로 도망가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며 몰고 나온 차들이 동서부 각 주의 도로를 가득 메울 정도로 전국이 삽시간에 일대 혼란에 빠졌다. 이 일이 발생한 후 프린스톤대학의 조사에 의하면 대략 170만의 미국인이 그 내용을 사실로 믿고 도망가려 했다고 한다. CBS는 이와 같은 역사의 교훈을 망각하고 2년 전에 다시 한 차례 파란을 일으켰다. 1994년 3월 19일 저녁 황금시간대에 이 방송국은 유명한 미국 국적의 화교 여자 아나운서인 땅위화(宗銃華)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프로그램이 시작되자 정확한 영어발음을 구사하는 그녀가 단도직입적으로 주제를 설명하였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미국 최대의 간첩망과 관련된 소식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시청하시면 도대체 누가 이 간첩망을 조종하며 어떻게 운영하는지에 대해 알게될 것입니다.' 그녀의 해설에 이어 등장한 화면은 미국 화교들이 일하는 갖가지 장면이었다. 그녀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소위 간첩이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레인코트를 입은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그들은 지금 여러분 곁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엄밀한 조사를 거쳐 본 방송국에서는 중국이 미국에 어떻게 첩보요원들을 침투시키고 있는지 밝혀 내었습니다. 지금도 매일 중국인들이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들어오고 있으며,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 아주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의 어떤 사람은 틀림없는 간첩입니다.' 그러더니 그녀는 초대손님으로 나온 [중국첩보공작]의 작가 니콜라스 디미야더스와 놀랄 만한 내용의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였다. ' 디미야더스 선생께서는 미국무성의 정보기관에서 일을 한 적이있 고 얼마 전 [중국첩보공작]이란 책을 출판하여 미국 정부와 기업 들이 당면한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 바 있습니다. 디미야더스 .저의 의견은 이렇습니다. 현재 서구의 어떤 정부든지 모두 중국의 간첩침투에 대해 적절하게 대웅할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중국의 첩보활동이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상황과는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은 베이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중국학생 혹은 과학자가 미 국 방문을 신청할 때 중국 안전부서의 요원들이 그들과 만난다고 합니다. 디미야더스 선생의 발언에 의하면, 이때 안전부서의 요원 들은 방미 희망자에게 국내의 가족들을 인질로 잡는다는 사실과 미국에 가 숨어지내면 누군가가 자연스럽게 그들과 연락할 것이라 고 알려 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잠복기는 정확히 알 수 없 으며 심지어는 미국에 잠복한 후 몇 년 뒤에 정말 누군가가 나타나 그들을 찾는다고 합니다.디미야더스 :맞습니다. '물 밑의 고기[沈底魚]', 이 말은 중국 정보기관 의 전문용어로서 이들은 마치 바다 밑 깊은 곳에서 잠자는 물고기 와 비슷하다 하여 서구 정보계에서는 '휴면정보원(休眠情報員)'이 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해저에 숨어 아무 일도 하지 않나요?디미야더스 :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때를 기다리는 것 뿐입니다. :(화면을 가리키며) 보십시오. 이 남자가 방금 말했던 '휴면정보원' 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외형상 전혀 다른 점이 없지요. 그러나 그들이 일단 미국사회에 침투하면 점차적으로 사회의 일부분이 되 어 우리들은 그들을 발견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우리 사회에 끼친 피해가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조차도 알 수가 없 습니다.디미야더스 :문제의 심각성은 이런 정보원들이 결코 소수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제가 조사한 바로는 이렇게 합법적인 경로로 미국에 들어온 중국인들 8명 중 1명 꼴은 잠복하고 있는 간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중계실에서 그 둘은 서로 말을 주고 받으며 중국 정보요원의 형상을 하나하나 만들어나갔다. 이 방송은 저녁 황금시간대에 나갔기 때문에 최 소한 1천2백만 명의 미국 시청자들이 보았을 것으로 추산된다. 의심할 것도 없이 디미야더스의 [중국첩보공작]의 출판과 CBS의 보도 특집으로 미국사회에 살고 있는 화교들 중 상당수가 간첩일 것이라는 쟁론을 일으켰고, 수많은 화교들의 생활에 아주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미국에 들어오는 중국인 8명 중 1명이 간첩이라는 설은 많은 미국 기업들이 화교를 고용할 때 간첩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중국 유학생들이 취업하는 데도 나쁜 영향을 끼켰고 취업중이던 화교들은 보이지 않는 차별을 받게 되었다. 이런 의심 때문에 미국 기업들은 중국인의 고용을 감소시키거나 아예 없애기도 하였다, 방송을 본 후 두려움에 가득차게 된 미국의 집주인들은 중국인들이 집을 빌리려 하면 '간첩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한답시고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미국은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이민자들로 구성된 국가이다. 60년대 흑인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민권운동을 이끌면서 미국사회에서 인종차별제도가 표면적으로는 없어졌다. 그러나 제도적으로 없어졌다고 해서 피부색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관습이 이 나라에서 완전히 없어졌다고 할 수는 없다. 백인들의 유색인종에 대한 멸시는 60년대처럼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지금도 사회 곳곳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전과 다른 점은. 백인들이 다른 인종을 멸시할 때 직접 그 본색을 드러내지 않고 대표적 상징성을 가진 유색인종을 이용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하면 인종차별이 표면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으면서 보이지 않게 멸시의 효과를 누리는 것이다. 쑴위화가 바로 이런 예에 해당할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녀가 미국 3대 방송국 저녁뉴스의 유명한 앵커가 되기까지는 각고의 노력을 다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화교사회와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하는 성향이 있었다. 현재 미국에 거주하는 미국 국적 화교 첸엔니()는, 화교단체에서 쑴위화를 위해 마련한 시상식에 그녀가 나타나지 않아 안타까웠었다고 기술한 적이 있다. 또 쑴씨는 매번 중국인에 대해 언급할 때마디'그들 중국인은......'이라고 말해 자신은 황색인종이 아니란 듯한 태도를 보이곤 하였다. 모든 사람은 다 각자의 가치관이 있고 이는 남이 강요할 수 없는 것이지만, 문제는 이런 방법으로 자신의 동포들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미국이라는 곳은 자기의 혈통과도 단절할 수 있고, 자신의 어머니에게도 매정한 분노를 일으킬 수 있으며. 공리 앞에서는 사람이 지켜야 할 중요한 도의마저 저버릴 수도 있는 그런 사회인지도 모른다. 쑴씨가 도대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의 방송으로 인해 미국사회에 화교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고 하여 그녀가 열렬한 환영을 받을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녀에게는 환영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중국대사관은 그녀가 영원히 중국땅을 밟지 못하게 비자를 발급해 주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몇 년 동안 미국 각지의 텔레비전이나 신문은 화교들이 미국에서 간첩활동을 한다는 보도를 자주 하였다. 심지어 중국이 미국에서 자행하고 있는 간첩활동의 규모는 구소련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라고 보도한 적도 있다. 미국과 같은 고도의 산업사회에서는 언론 종사자들이 조작된 보도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버릇이 있으므로 화교사회 역시 이런 보도에 대해 반박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예사롭게 넘길 문제가 아니었다. 특히 8명의 중국인 중 1명이 간첩이라는 말은 재미 화교사회에 심각한 문제들을 낳게 하였다. 지금까지는 너그럽게 보아오던 화교들도 이번만은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화교들은 한목소리로 방송국에 항의하고 시카고에 총본부를 둔 재미 화교기술자 및 과학자협회에서 다음과 같은 항의서한을 보냈다. 몇사람의 근거 없는 추측에 의해 보도를 해서는 안 된다. 특히 미국에 살고있는 모든 중국인은 간첩환동을 하며, 설사 지금은 하지 않는다하더라도 몇 년 뒤에는 활동하게 될 것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그런 보도는 절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끝으로 이 협회는 방송국이 공개사과를 할 것과 이를 거절할 경우 법적인 대응을 하겠다고 밝혔다. 화교사회의 이런 첫 반응에 대해 CBs 와 땅위화는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지 않았다. 화교들의 이번 행동도 예전과 같이 결국 흐지부지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어느 화교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아주 담담한 목소리로 '미안하다'는 한 마디를 했을 뿐이었다. 이와 같은 그녀의 반응에 대해 화교들은 분노했다. 화교사회의 강력한 항의는 몇 개월 동안 계속되었고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CBS와 쑴위화도 사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CBS 총재는 '우리는 미국에 단기 혹은 장기 거주하는 중국인들 대부분이 법을 준수하는 학생이거나 방문학자임을 인정합니다, 만일 본 방송국의 프로그램이 이 점에 대해 소홀히 한 점이 있었다면 사과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화교단체에 보내 왔다. 또 그는 편지에서 10월 22일 저녁 뉴스시간에 정정보도를 하도록 최대의 노력을 하겠다고 밝혔다. 10월 22일 밤, 쑴위화는 생중계실에서 성명을 발표하였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매년 합법적으로 미국에 오는 중국학생과 방문 학자 및 이민자들이 모두 중국 정보기관의 고용인들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만일 저희들이 시청자들에게 이런 잘못된 인상을 심어 주었다면 이는 실로 유감스런 일입니다.' 비록 이 성명에 CBS가 직접 잘못했다고 시인한 것은 나타나지 않지만, 이 방송국이 지금까지 자기들의 방송은 매우 정확하다고 자인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방송내용에 대해 결코 사과를 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면, 이 방송국은 시청률에 의존해 생존할 수밖에 없는 매스컴일지라도 어떤 결정을 내릴 때는 사회적 반응을 고려해야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중국인들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미국인들이 이전처럼 제멋대로 하도록 놓아두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 주었고. 화교단체들도 전에 없이 일치단결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또한 소수민족인 화교들이 미국사회에서 모함을 받았을 때, 일치단결하여 대처하지 않으면 유린당하고 짓밟힐 수도 있다는 점을 일깨워주었다. 화교들이 이처럼 단결할 수 있었던 또다른 중요한 이유는 중국의 국력이 나날이 강성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중국대륙의 국민들은 자신의 동포가 다시는 모욕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자기의 동포가 다시는 변질되지 않게 하기 위해, 또 미래의 1세 혹은 2세들이 당당하게 같은 인종 혹은 다른 인종들 사이에서 그들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있도록 하기 위해서도 모두 책임감을 가지고 매진하여야 할 것이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낙타의 모성애 세 사람의 상인이 낙타를 타고 사막을 가고 있었다. 그들이 집을 떠나 사막을 걷기 시작한 지는 이미 두 달째였다. 그들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넉넉하게 준비했던 물과 음식조차 바닥난 지 오래였다. 그들은 갈수록 갈증과 허기를 견디지 못하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늘 다니던 길이었건만 어디가 어디인지 방향조차 제대로 잡지 못했다. 가도 가도 모래언덕만 나올 뿐 길을 잃은 지도 이미 오래였다. 그들은 차차 절망 속으로 빠져들었다. 머지않아 죽음이 찾아올 것이라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들이 살 수 있는 길은 오아시스를 찾는 길뿐이었다. 물이 있는 곳을 발견하지 못하면 곧 죽음뿐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아시스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오아시스가 보여 겨우 달려가 보니 한낱 신기루 현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들 중 가장 나이 어린 셋째 대상이 낙타의 등에 앉은 채로 정신을 잃었다. 이어 곧 나머지 두 사람도 정신을 잃었다. 태양 빛은 여전히 뜨거웠다. 그들은 그렇게 낙타 등에 실린 채 뜨거운 사막의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러나 신은 그들의 편이었다. 신은 그들을 그대로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이 낙타 등에 실려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낙타로 하여금 그들을 물가로 인도해 주었다. 그들은 곧 원기를 회복했다. 그러나 신은 완전히 그들을 돕지는 않았다. 셋째 대상이 하룻밤 열에 들떠 앓다가 그만 죽고 만 것이다. 나머지 두 대상은 눈물을 흘리며 그를 사막의 모래 속에 묻었다. "이제 동생의 무덤을 찾을 길이 없겠군요." 둘째 대상이 눈물을 흘리며 더욱 슬퍼했다. 그러자 첫째 대상이 말했다 "그렇다면 낙타 새끼를 죽여 동생과 같이 묻고 떠나자." "낙타가 우리를 살렸는데, 어떻게 그 새끼를 죽일 수 있단 말입니까?" 둘째 대상은 첫째 대상의 제의를 반대했다. 그러나 첫째 대상은 둘째 대상의 말을 묵살하고 낙타 새끼를 죽였다. 어미 낙타 보는 앞에서 낙타 새끼를 죽여 셋째 대상과 함께 묻었다. 그리고 멀리 사막의 언덕을 바라보며 말했다. "낙타는 자기 새끼가 죽어 사막에 묻히면 오래도록 그 장소를 기억한다. 우리 대상들 가운데 누가 죽어 사막에 묻을 때는 낙타 새끼를 죽여 함께 묻는다. 나중에 어미 낙타를 데려오면 그 무덤을 쉽게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낙타는 자기 새끼에 대한 애정이 강하다." 글터 → 이글저글 수증기는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식을 때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한 시간에 평균 90킬로미터를 달리는 차는 한 시간에 80킬로미터를 달리는 차보다 연료를 1/3만큼 덜 소모한다.유리는 고체라고 할 만큼 딱딱하지만 실제로는 액체이다. 만약 유리를 한 모양으로 세워 놓으면 그것을 형성하고 있는 미립자들이 흘러서 떨어질 것이다.공기도 무게가 있다, 960킬로미터 높이에 1평방인치 넓이의 공기를 달아보면 무게가 6.8킬로그램으로 갓난 아기의 2배나 된다.믿기 어려운 이야기,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어떤 물질의 질량은 속도에 따라 증가한다. 비과학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어떤 물질이 속도를 더 내면 크기가 더 커진다는 뜻이다. 이 과정이 실험실에서 실제로 증명되었는데 여러 번의 실험에서 어떤 물질이 빛의 86% 속도를 갖게 될 때 그 무게가 2배로 증가하였다. 이 이론은 어떤 물질이 적당한 속도만 얻는다면 이 우주 자체만큼의 무게도 가질 수 있다는 믿을 수 없는 개념을 정당하게 만든다.더운 물을 갑자기 유리컵에 부었을 때, 두꺼운 컵이 얇은 컵보다 더 잘 깨진다.불이 붙는다고 반드시 연기가 나는 것은 아니다. 연기는 불이 잘 타고 있지 않음을 뜻한다. 따라서 완전히 잘 타는 불은 거의 연기가 나지 않는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