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첫쪽 ♧……………독서편지 T기본글꼴 기본글꼴✔ 나눔고딕✔ 맑은고딕✔ 돋움✔ ✔ 뷰어로 보기 2006.12.01 19:57 【독서편지】: 제 74 호 風磬 조회 수 8,218 추천 수 15 댓글 0 게시물 주소복사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독서편지】: 제 74 호4339.12.01 (10.11)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용량제한으로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 않보이시는 분은 저의 블로그 또는 아래의 링크를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문학소식 글터 → 명언 / 격언 꿈을 단단히 붙들어라. 꿈을 놓치면 인생은 날개가부러져 날지 못하는 새. / 랭스턴 휴즈 (미 흑인시인) 글터 →사회/문화/인물 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2부 사랑은 용광로처럼 돌아올 기약 없는 가실이만을 기다린 -설씨녀 - 설씨녀(薛氏女)생몰년 미상. 신라 진평왕대에 살았던 열녀. 경주의 율리(栗里)출신. 성씨로 보아 육두품출신으로 보이나 집안은 매우 한미하였다. 굳은 정조와 방정한 품행으로 《삼국사기》에 입전(立傳)되었다. 진평왕 때에 그 아버지가 늙은 몸으로 국경을 지키는 일에 징발되었다. 아버지가 늙었고, 대신할 사람도 없으므로 그는 매우 고심하게 되었다.그런데 평소부터 설씨녀를 흠모해왔던 사량부(沙梁部)출신 소년 가실(嘉實)이 이 소문을 듣고 역을 대신해주겠다고 자청하였다. 이를 고맙게 생각한 아버지는 두 사람을 혼인시키기로 하였다. 두 사람은 역이 끝난 뒤 혼인하기로 하고, 거울을 절반씩 나누어 신표(信標)로 삼고 헤어졌다. 그런데 전쟁이 계속되어 군사들을 교대시키지 않아 6년이 되도록 가실은 돌아오지 못했다. 기다리다 지친 설씨녀의 아버지는 약속한 3년이 지났으니 다른 사람과 혼인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설씨녀는 약속을 어길 수 없다고 하여 반대하였다. 아버지는 드디어 그녀 몰래 마을사람과 혼인을 약속하였다. 혼례일이 되어 아버지가 신랑을 맞아들였으나 그녀는 거절하고 도망하려 하였다. 그런데 바로 이때에 가실이 돌아왔다. 야위고 남루하여 아무도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자, 가실은 신표인 깨어진 거울을 내놓아 자신이 가실임을 알렸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혼인을 하여 일생을 해로하게 되었다. 설씨녀의 이같이 굿굿한 행동은 한국여인들의 의연한 기품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이같은 이야기는 몇 안 되는 고대인들의 연담으로도 흥미를 주지만, 그 속에는 고대사회의 실상을 전하는 바가 있어서 더욱 주목된다.백과사전 中 - 고도를 찾아나서는 나그네들은 으레 그 도시가 형성되던 때의 성터를 찾게 마련이다. 성터가 없는 고도는 별다른 역사가 없다. 옛날의 성은 견고했다. 오늘날에 와서 성은 고고학적 가치로만 따져지기가 일쑤여서 관광객의 발길이 잠시 멈춰서는 자리로밖에 환영받지 못하고 있으나 성을 쌓던 당시의 사정은 그렇지가 않았다. 신라 제 26대 진평왕 때다. 왕은 나면서부터 기이한 용모를 가졌고 신체가 장대하며, 의지와 식견이 심원하고 명철하다 하여 백성들의 기대가 컸다. 왕은 왕좌에 즉위(서기 579년)하자마자 왕비 마야 부인을 대동하고 부지런히 내을신궁에 나아가 제사를 지냈다. 왕의 즉위 3년에는 처음으로 위화부를 설치하여 이재 등용에 힘썼으며, 5년 정월에는 선부서를 설치하여 바다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어디 위화부나 선부서 뿐이랴. 왕의 즉위 6년에는 조부를 두어 공부의 일을 맡아 보게 하였고, 승부를 두어 차승의 일을 맡아 보게 하였던 것이다. 왕의 즉위 13년에는 남산성(경주)을 축조하였는데 성의 주위가 자그마치 2,854보라고 하던가....... 왕성의 축조는 태평 성대를 구가하는 한가로운 작업이 아니였다. 서라벌에 도읍을 정하여 신라가 그 역사의 씨를 뿌리고 가꿔 온 뒤부터 내성(궁성)과 외성을 처음 쌓은 왕은 박혁거세로부터 시작되지만, 진평대왕에 축조한 성에다 비기면 모두 하잘 것 없는 것들이었다. 박혁거세 21년에 왕궁을 세우고 성을 쌓아 금성이라고 불렀던 것을 시초로 파사왕 22년에는 또다시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아 월성이라 했지만 그 둘레는 기껏 1,023보에 지나지 않았었다. 새로 쌓은 월성 북쪽에 만월성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둘레도 1,830보에 지나지 못한 것을 상기해 보면, 진평왕이 서기 591년에 축조한 남산성은 내성으로서는 최대 규모의 것이었다. 진평왕은 남산성을 쌓기 전에 추상 같은 어명으로 다짐하였다. "만약 남산성이 완공된 뒤 3년 안에 이 성이 무너지는 날이면 너희들의 목을 베리라." 1935년 경주 남산성터에서 발견된 '남산 신성비'는 진평왕의 그 같은 어명을 뒷받침해 주고 있는 좋은 기념비였다. 남산 신성비에는 서기 591년 왕명을 받고 성을 축조하던 관계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름뿐이 아니고 그들의 출생지와 벼슬 이름까지 기록된 것을 보면 남산성에 대한 진평왕의 집념은 알만하다 하겠다. 성에 대한 왕의 집념은 거의 운명적인 것이었다. 오늘날의 경주 인왕동 ->탑동 ->배반동 ->남산동 ->배동로 이어지는 2,954보의 궁성. 남산성을 쌓고도 왕은 두 다리를 뻗고 편히 잠들 수가 없었다. 서쪽에서는 백제의 노략질이 계속되었고, 북쪽에서는 강대국 고구려가 잠시도 침략의 마수를 거두려 하지 않았다. 이 상태로 나간다면 언제 서라벌이 적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게 될지 몰랐다. 왕은 불안했다. 2년의 세월이 불안 속에서 흘러갔다. 동해로부터 왜구의 침입이 왕의 잠을 앗아갔다. 안되겠다. 왕은 또다시 명하였다. "명활산성을 개축하여 왜구의 침략을 막아라." 진평왕 15년 7월에 명활산성 개축 공사를 시작했는데 주위가 3,000보, 때를 같이하여 서형산에 성을 쌓으니 주위가 2,000보였다. 동서남북에 견고한 석성을 새로 축조.개축하고 수나라 황제로부터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이라는 굴욕적인 이름을 제수한 뒤부터 왕은 비로소 발을 뻗고 잠들수가 있었다. 그러나 사방 팔방으로 성을 쌓고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쳐도 액운은 쉽사리 물러나질 않았다. 진평왕 24년 여름. 찌는 듯한 8월이다. 이윽고 백제가 군사를 일으켜 아막성을 향해 쳐들어왔다. 왕은 곧 백제 군사를 물리치기는 했으나 귀산과 같은 당대의 명장군을 잃어야 했고, 백제 군사의 내습이 있던 그 다음해 8월에는 고구려 군사가 북한산성으로 쳐들어오자 친히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나가 이를 막아내기도 했다. 진평왕 25년(서기 603년) 8월, 고구려가 북한산성(서울 북방)으로 쳐들어왔을 때 왕은 병부를 통하여 온 나라에 총동원령을 내렸다. 동원령의 골자인즉 한 집안에서 장정 한 사람씩을 뽑아 내라는 것이었다. 젊은이들은 그러지 않아도 도성의 축성 공사로 나라 안이 뒤숭숭하던 때라 총동원령이 내자마자 변방의 방비를 맡기 위하여 병부로 몰려들었다. 이 무렵 서라벌 율리에 사는 늙은 설씨도 동원령을 받았다. 그는 변방의 수자리(국경을 지키는 일)로 떠나라는 명을 받고 어명을 어길 수 없어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하나 늙고 병들어 쇠약한 설씨는 멀리 북방의 국경 지내는켜녕 자기 마을의 좀도둑을 지키기에도 힘에 겨울 지경이었다. 슬하에 아들이 없던 설 노인, 자식이라고는 다만 올해 열여섯난 딸 하나가 가사를 돌보고 있을 뿐이었던 설 노인에게 수자리로 떠나라는 명령은 일종의 형벌이었다. 수자리로 떠나는 날이 하루하루 앞당겨 오자 설 노인은 고민 끝에 몸져 눕게 되었다. 그 때부터 늙은 설 노인의 딸은 눈물이 마를날이 없었다. 마을에서는 노인의 딸을 효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때 사량부에 사는 소년 가실이 효녀의 집 문밖에 나타났다. 소년 가실은 비록 그의 집이 가난하고 누추하였으나 뜻이 곧은 남자였다. 가실은 웬일인지 설 노인의 딸이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는 가실이 설 노인의 딸 효녀(편의상 이렇게밖에 부를 수 없다)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효녀의 아름다운 용모로 인해서였다. 효녀의 아름다움은 그의 가난에도 불구하고 이웃 젊은이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효녀는 이웃 젊은이들의 사랑에 귀를 기울일 수가 없는 몸이었다. 사랑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에는 그녀의 가난이 너무 절박했던 것이다. 하나 소녀의 사랑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가실은 알고 있었다. 가실은 효녀를 짝사랑 나머지 그녀의 사랑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기 위하여 그녀의 노예가 되기로 결심했다. '효녀, 나는 네 종이 되고 싶구나. 사랑의 세계에서 노예는 굴욕이 아니잖는가.' 가실이 효녀를 그녀의 집 문 밖에서 만난 것은 효녀의 아버지 설 노인이 종군(수자리)으로 떠나기 이틀 전의 일이었다. "효녀, 나는 효녀를 돕고 싶소." 첫마디를 꺼내는 가실의 말소리가 소녀의 귀에 그럴싸하게 들려서 그런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효녀........" "무슨 말씀이신지 찾아온 연유를 어서 말씀하세요." 그러나 효녀는 가실의 내방이 전혀 뜻밖이라는 듯 겁먹은 두 눈을 들어 가실의 행실을 찬찬히 살피는 것이었다. 가실은 그러한 소녀의 겁먹은 두 눈이 더없이 귀엽기만 했다. "무슨 말슴이신지 어서........" "아버님이 편찮으시다지요........" 헛 인사가 아니라 진정 가실은 설 노인의 안위가 염려스러웠다. "아버님이....... 네, 중태랄 것은 없어도 기동이 여의치 못하시답니다." 그러면서도 효녀는 문득 집쪽을 건너다 보았다. 그러는 그녀의 커다란 두 눈에 금방 이슬이 맺히는 것이었다. 가실은 더 주저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효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방울져 땅 위에 떨어지기 전에 나는 말하리라, 찾아온 사유를.' 그런데 이 무슨 마음의 변한인가. 가실의 입에서는 쉽사리 그 사유가 말이 되어 나오지를 않았다. 효녀가 얼마 뒤에, "저를 찾으신 연유를......"하고 재촉했을 때 비로소 그는 효녀의 두 눈방울에 멎어 있던 시선을 거두고 말을 꺼냈다. "나, 가실은 효녀를 위하여 무슨 일이건 기꺼이 해드리고 싶으니 나에게 일을 맡겨 주시오. 내 비록 가난하고 쓰잘 나위 없는 위인이지만 일찍부터 스스로의 지기로서 살아온 사람, 원컨데 불초의 몸이나 엄부군의 행역을 대신하게 해 주시오." 효녀는 울면서 가실의 청을 받아들였다. "가실이! 우리 아버님을 위하여 행역 종군을 대신하겠다 하니 이에서 더 고마울 데가 어디 있겠습니까. 내 곧 이 기쁜 소식을 아버님께 여쭙겠으니함께 들어가 보시어요." "그렇잖아도 병석에 계신 그대 아버님을 뵙고 인사 여쭈려던 참인데 잘 되었군여, 들어가십시다." 두 사람은 설 노인이 누워 있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가실은 그 자리에서 좁전에 효녀한테 들려준 이야기를 반복했다. 노인은 늙은 안면에 경련을 일으키면서 가실의 손을 끌어다 자신의 가슴 위에 얹는다. "가실이...... 가실이! 그대는 늙은 몸이 수자리로 떠나는 것을 대신하여 떠나겠다 하니 기쁘고 송구스러운 마음 이기지 못하겠구나. 그대의 소원이라면 내 기꺼이 은혜를 갚을 생각이네." "은혜를 받자고 이 길을 택한 것은 아니옵니다." 가실은 노인의 뜻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노인은, "만약 공이 어리석다고 버리지 않는다면 내 어린 딸을 아내로 맞아 줌이 어떠한가?" 하고 가실의 눈치를 살폈다. 가실은 노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꿈만 같았다. 평시에 흠모하던 설 노인의 딸을 아내로 맞아 달라니 호박이 덩굴째 굴러 들어온 기분이 아마 이렇겠거니 했다. 노인이 다시 말한다. "공이 부족한 내 어린 딸을 아내로 맞아 주지 않는다면 나는 그대에게 베풀 그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네. 그대의 뜻이 그렇다면 무엇으로 내 은혜를 갚을꼬......" 가실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닙니다, 노인장. 노인장의 딸을 제 아내로 주신다면 감히 바라지 못할 일인 줄은 아나 기꺼이 맞이하겠습니다. 노인은 그제서야 가실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고 안심했는지 이번에는 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네 뜻은 어떠하냐?" "아버님이 정하신 일인데 소녀가 어찌 거역하겠습니까?" 효녀는 첫마디에 쾌히 응하는 것이었다. 그날 밤, 마침 중천에 떠 있는 달이 서라벌 넓은 장안을 밝혀 주고 있었는데 가실은 미래의 아내 효녀를 데리고 달밝은 냇가로 밤놀이를 떠났다. "내일 모레면 전방 수자리로 떠나야 할 몸, 간략하나마 혼례를 치르고 떠나고 싶으니 허락해 주오." 가실은 효녀에게 그런 주문을 했다. 그러나 효녀는 달빛 아래서 밝게 웃어 보이고 고개를 젓는다. "원래 혼인이란 인륜 대사이므로 서둘러서 아무렇게나 치를 일이 못됩니다. 내 이미 그대에게 마음을 허락했는데 두 마음을 품을 리 있겠습니까?" "그래두....." "아니됩니다, 가실이. 그대가 변방으로 떠나 부정한 말로 설혹 어찌된다 하여도 나는 그대의 아내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일생을 혼자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니 가실이......." 효녀의 마음이 그렇게 정해져 있다면 가실은 더 걱정할 것이 없었다. 효녀의 다음 말을 더 들어 보지 않더라도 이미 효녀는 가실의 아내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산다지 않는가. "원컨데 가실이, 그대는 방어하는 곳으로 떠났다가 이 다음에 수자리를 교대하고 돌아오거든 따로 날을 잡아서 혼례를 치릅시다. 어떻습니까, 내 뜻이?" 가실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과연 내 아내다운 말이오." 두 사람은 달빛 속에서 얼싸안고 헤어지는 아쉬움을 달래었다. 가실이 북한산성 수자리로 떠나는 날 효녀는 품속에서 작은 손거울을 꺼내어 둘로 나누었다. 효녀는 깨어진 거울 반쪽을 자기가 갖고 나머지 반쪽을 가실에게 건네면서 말했다. "이는 헤어지는 신표로 드리는 것이니 뒷날에 가실이 수자리에서 돌아오는 날 두 조각을 합쳐 다시 하나로 만들겠습니다." 가실이도 효녀에게 말 한 필을 맡기면서, "이는 천하의 양마로 뒷날에 반드시 쓸데가 있을 것이오. 어차피 내가 전지로 떠난 다음에는 이 말을 기를 사람이 없으니 바라건대 그대가 이 말을 맡아 길러 주시오."하고 작별한 다음 곧 북으로 가는 종군 대열에 합류하였다. 그날부터 설 노인의 딸 효녀는 기다림에 마음 졸이는 여자의 그리움을 배우기 시작했다. 효녀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기다림의 연속이었고, 메아리 없는 그리움의 반추일 수밖에 없었다. 효녀는 가실의 그리운 얼굴이 떠오르면 문득 동강난 거울을 꺼내어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앉아 있기가 일이었다. 깨어진 거울 한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거울 속에 가실의 얼굴도 나타났고, 먼 북한산성의 수자리 근처의 솔바람 소리도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러한 기다림의 세월도 형벌처럼 지루한 것이었으며, 형벌과도 같은 그리움의 언저리에 여자의 지친 한숨 소리가 나직하게 방안을 울려 놓기도 하였다. 일년의 세월이, 그야말로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흘렀다. 2년의 세월이 바람처럼, 3년의 세월이 번개같이 흘러갔다. 진평왕 25년(서기 603년) 8월에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북한산성으로 쳐들어온 때부터 신라의 젊은이들은 다른 어느 변방에서보다 북쪽 고구려 국경 지대에서 더 많아 죽어 갔다. 가실이 북한산성 수자리로 떠난 지 5년. 진평왕 30년, 고구려가 번번이 변방을 침범해 오자 마음 약한 왕은 수나라 군사를 청해서 고구려를 칠 것을 결심하고 원광 법사에게 걸사표를 지어 보내도록 명했다. 원광은, "자기가 살기 위하여 남을 멸망시키는 것은 사문의 할 행실이 아니옵니다. 하오나 신이 대왕의 땅에 살고 대왕의 수초를 먹으면서 어찌 감히 어명을 좇자 어나하오리까."하고 곧 걸사표를 지어 수나라에 보냈다. 그러나 수나라에서는 원병을커녕 걸사표에 대한 회답도 오지 않았다. 이윽고 6년. 가실이 북한산성으로 떠난 지 6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효녀의 아버지 설 노인은, "처음에 가실은 3년을 기약하고 떠났는데 3년의 곱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니 더 기다릴 수 없구나. 마땅한 곳이 나섰으니 그 곳으로 시집가는 게 어떠냐?" "아버님께서는 6년 전에 소녀가 어떤 까닭으로 가실과 약혼하게 되었는지 벌써 잊으셨습니까?" 딸의 커다란 두 눈에서는 참으려 해도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렸다. "소녀는 가실이와 헤어질 때 깨어진 거울을 서로 나누어 가졌습니다. 가실은 거울의 신표를 밎고 6년의 세월을 전지에서 보내면서도 지루하다거나 고되다고 생각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내 나이 아흔이 내일 모레라, 너 또한 과년한 여자로서 혼처가 나타나지 않을까 염려되니 아비가 정해 주는 사람하고 혼례를 치르자." 설 노인의 마음은 요지부동이었다. "아버님!" "글쎄 내 말대로 다른 데로 시집을 가라니까. 가실이는 벌써 죽은 몸이야." "아버님! 소녀는 6년의 세월 속에서 하루도 가실이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적의 청끝이 코 끝에 보이는 그러한 국경 지대에서 손에서 무기를 놓은 사이도 없이 늘 호랑이 입 앞에 가까이 서 있는 것 같아 마음 놓을 수가 없는데, 그 신의를 저버리고 가실이와 언약을 잊어 버리면 어찌 인정이라 하겠습니까? 소녀는 결단코 아버님 말씀에 순종치 못하겠습니다." 효녀의 결심이 바뀔 낌해가 보이지 않자 설 노인은 강제로라도 딸을 시집 보내기로 결심하고, 딸 몰래 마을 젊은이와 정혼을 하고 잔칫날까지 받아 두었다. 가실의 약혼자 효녀는 더 망설일 수가 없었다. 가실이를 기다린 6년의 세월이 허망하게 무너져내리는 아픔, 이 아픔은 분명 그래움 이었고 사랑이었다. 가실이 처음으로 접근해 오던 때를 그녀는 생각했다. 가실의 용기가 없었던들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가 없었을 것이다. 효녀는 결심했다. 가실이 그녀를 찾아와 아버지의 행역을 대신하겠다던 용기는 이제 그녀 스스로가 실천에 옮겨야 할 단계라고 단정한 것이다. 그녀는 마구간으로 갔다. 가실이 남겨 놓고 간 말 앞에서 그녀는 가실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길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렇다. 이 말을 타고 북방으로 가리라...... 북방 국경 지대에 가서 가실을 만나자.' 그 때였다. 형색이 걸인처럼 볼품없고 깡마른 사람이 효녀의 집앞에서 고개를 빼고 기웃거리는 게 보였다. 차림새로 보면 영락없는 걸인이었다. 해골처럼 삐쩍 마른 형상이 더욱 그랬다. "설 노인...... 효녀." 걸인은 중얼거리면서 효녀를 찾았고, 설노인 찾았다. 설 노인과 딸이 밖으로 나왔으나 첫눈에 그 걸인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나, 가실이외다!" 가실이. 걸인은 스스로 가실이라고 말했으나 아무도 그의 말을 믿는 사람이 없었다. 가실은 깨어진 거울을 품속에서 꺼내어 효녀에게 주었다. '깨어진 거울....... 이별의 정표로서 둘이 나누어 가진 깨어진 거울........' 효녀는 가실의 거울을 받아들고 자기가 6년 동안 품에 지녀 온 거울을 꺼내어 맞춰 본다. 두 조각의 거울은 신기하게 들어맞았다. "가실이, 으, 으흐흐......." 효녀의 입에서는 통곡과도 같은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고, 두 눈에서는 쉴새없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가실이, 돌아왔구려. 여보!" 효녀는 그 걸인처럼 변모한 가실의 품에 안겨서 언제까지고 솟아나오는 눈물을 거둘 생각도 않는 것이었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정치, 경제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삼별초는 무엇을 위해 싸웠나 - 이익주(천안공전교수) 삼별초는 어떠한 존재인가. 몽고의 침략에 맞서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 끝까지 싸우다 장렬한 최후를 마친 호국의 화신인가? 하지만 이렇게 단순 명쾌한 설명이 혹 과장되거나, 조작된 신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번쯤 해 볼 필요는 없을까? 실제로 삼별초가 대몽항쟁을 벌였던 1270년대를 중심으로 앞뒤 시기의 역사적 흐름을 살펴보면 이러한 의문을 좀처럼 지우기가 어렵다. 그 앞뒤의 상황이란 어떠한 것이었을까? 민중을 억압하기 위해 ‘야별초’를 조직하다 삼별초란 좌별초와 우별초, 신의군 등 세 개의 별초군을 합쳐 부르는 이름이다. 그것이 설치된 것은 대략 1220년대의 어느 때이며, 당시는 최씨무인정권의 두 번째 집권자 최우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 사정을 <고려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최우가 나라 안에 도적이 많으므로 용사들을 모아 매일 밤 순찰하면서 폭도들을 막게 하고, 이를 야별초라 하였다. 뒤에 도적이 전국에서 일어나자 야별초를 각 지방에 보내 막도록 했는데, 그에 따라 야별초 군사가 많아졌으므로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었다. 또한 몽고에서 도망해 온 사람들을 모아 부대를 만들고 신의군이라 하였다. 이것이 삼별초이다. 여기서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삼별초의 모체가 되는 야별초가 나라 안의 도적을 막기 위해 조직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뒤 몽고와 전쟁이 시작되자 여기에 신의군을 합쳐 삼별초로 만들고 전투에 투입하였다. 따라서 삼별초의 성격을 밝히기에 앞서 야별초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도적과, 도적을 막기 위한 경찰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있었다. 하지만 도적의 성격은 시대에 따라 달랐고, 여기에 ‘도적의 사회사’ 가 있다. 최우가 야별초를 두어 막으려 했던 도적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이들을 막기 위해 따로 군대를 설치했을 정도라면 당시 도적의 기세가 대단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때 특별 군대를 만들어야 할 만큼 도적이 많아진 이유는 무엇일까? 무인정변 이후 지배층의 수탈이 더욱 심해지고, 한편으로는 집권자들이 권력쟁탈전에 급급한 나머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이완되자 백성들이 그 틈을 이용하여 항쟁하였다. 망이. 망소이나 김사미. 효심 등은 지배층의 수탈에 대항하여 봉기하였고, 여기에는 그 지역 주민들의 열렬한 호응이 있었다. 그러나 1196년(명종 26) 에 최충헌이 집권하여 항쟁을 강력하게 진압하자 이전처럼 군현을 단위로 하는 대규모 항쟁을 벌이지 못하고 수십 명 또는 수백 명씩 모여 활동하는 수준으로 규모가 작아졌다. 이러한 사람들을 도적, 산적, 화적 등으로 부를 수 있을 텐데, 당시 사료에는 초적이란 이름으로 많이 등장한다. 최우가 야별초를 만들어 진압하려 했던 것도 바로 이들이었다. 즉, 야별초가 상대했던 도적이란 그저 남의 물건이나 훔치는 좀도둑이 아니라 지배층의 불법적인 수탈에 저항하던 백성들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삼별초의 모체가 된 야별초의 반민중적 성격이 있다. 더욱이 삼별초는 무인정권의 핵심적인 군사력이었다. 최우가 야별초를 조직한 뒤로는 거의 집권자의 사병처럼 이용되어 백성들의 항쟁뿐 아니라 정적을 제거하는 데에도 동원되었다. 그 대가로 이들은 녹봉도 다른 군인들보다 더 많이 받고 권력자로부터 보너스도 두둑하게 지급받았으며, 진급에서도 특혜를 누렸다. 몽고와 전쟁이 시작되자 항몽전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이들의 본래 역할은 최씨정권을 안팎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는 일이었다. 현대 한국사회를 조금이라도 의식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이라면, 국가 안보와 정권안보를 구별해야 한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하리라 믿는다. 최씨정권, 대몽항전을 정권유지에 이용하다 1231년(고종 18) 몽고의 공격이 시작되자 고려는 총력을 기울여 맞섰다. 전반적인 열세 속에서도 구주(평북 구성), 자주(평남 순천)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충주에서는 성을 지킴으로써 몽고군이 더 이상 남하하는 것을 막는 데 성공하였다. 특히 이 때에는 경기도 일대에서 활약하던 초적들조차 자원하여 몽고와의 전투에 참전하였다. 이처럼 몽고의 1차 침입에 대한 고려의 대응은 말 그대로 총력적이었다. 몽고군이 일단 돌아간 뒤 고려에서는 항전과 강화의 두 가지 주장이 제기되었다. 최우를 중심으로 한 무인정권은 항전을 주장했고, 문신관료들은 대부분 강화를 희망하였다. 당시 최씨정권의 항전론은 정권 유지책으로서의 성격이 강하였다. 즉, 최우는 몽고와 강화를 하면 자신의 권력이 위협받게 되리란 점을 경계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몽고와의 전쟁 상태를 이용하여 정권을 더욱 안정시킬 수 있다는 정치적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최씨정권은 전쟁 상태를 적절히 이용하여 장기간 지속될 수 있었다. 항쟁론과 강화론의 대립은 일단 강화도로 천도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표출되었다. 그러나 천도와 그를 통한 항전은 최씨정권의 유지와 직결되는 문제였고, 따라서 강화를 전제로 천도에 반대하는 주장이 받아들여지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하였다. 결국 최우가 다수의 반대를 억누르고 천도를 결행함으로써 이제 대몽항쟁은 고려의 국시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천도는 지배층 안에서조차 의견수렴을 거치지 않은 채 최씨정권이 독단적으로 결정한 것이었다. 더욱이 백성들에게는 이 천도가 국왕과 소수 권력자들의 안전만을 지키려는 일종의 배신 행위로 받아들여져 항전에 대한 공감대는 처음부터 매우 취약한 편이었다. 국왕과 정부가 강화도로 들어갈 때 일반 백성들에 대해서는 몽고군을 피해 가까운 섬이나 산성으로 들어가라는 것 말고는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따라서 몽고군의 말발굽에 짓밟힐 처지에 놓인 백성들은 각지에서 생존을 위한 싸움을 힘겹게 벌여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백성들은 끈질기게 항전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고려는 수십 년 동안 몽고와 싸움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피해 또한 대단히 클 수밖에 없었다. 1254년의 경우, 한 해 동안 몽고군에 잡혀간 사람이 무려 206,800여 명이고, 살륙당한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았다. 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전쟁에 지친 사람들이 항재의 대열에서 이탈하여 몽고에 투항하는 사태가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현상은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드는 1253년 이후 점차 많아졌다. 더욱이 강화도의 정부는 육지에 남아 있는 백성들로부터 각종 세금을 평상시와 같이 거두어들였다. 단적인 예로 1256년에는 정부의 무자비한 수탈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몽고군이 이르는 것을 오히려 반겼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몽고, 정부, 민중의 삼각 대립 한동안 뜸했던 백성들의 항쟁도 다시 나타났다. 전쟁 중이던 1236년 경에 전라도 일대에서 초적 이연년 형제가 백제부흥을 내세워 봉기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특히 이것은 몽고군이 전라도 지역에 침입했다 돌아간 직후에 발생하였는데, 전란으로 정부의 통치력이 이완된 틈을 이용하여 일어난 것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고려 정부, 몽고 침략자, 그리고 고려의 일반 백성들이 꼭지점 하나씩을 차지하는 삼각형의 대립 관계를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의 피해가 커지고 백성들이 등을 돌리는 상황에서 강화론이 차츰 힘을 얻기 시작하였다. 문신관료들이 주도한 이 흐름은 일찍이 강화 천도에 반대하면서 큰 나라에 사대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로 조심스럽게 표현된 적이 있었지만, 최우의 항전 의사가 워낙 강경하여 받아들여질 여지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된 지 20여 년이 지나자 문신관료들은 전쟁의 피해를 명분으로 강화론을 적극 주장하였다. 마침 이 무렵에는 항전을 고집하던 최씨정권이 내부의 분열로 약해져 있었고, 여기에 더하여 몽고에서도 요구 조건을 누그러뜨려 결과적으로 강화론자들의 입지가 더욱 넓어졌다. 강화론이 현실적인 정책으로서 설득력을 더해가고, 반대로 최씨정권이 내분으로 약화되어 강화론을 억누를 수 없게 되었을 때, 최씨정권의 몰락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결국 강화론자를 대표하던 문신 유경이 정변을 일으켜 최씨정권을 무너뜨리고 곧바로 강화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정변에 동원된 군대는 최씨정권 말기에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김준이 지휘하는 삼별초였고, 이들은 강화에 반대하였다. 이처럼 강화 이후 고려에는 강화파 문신들과 무인정권의 잔여세력이 공존하고 있었으나, 강화의 대세 속에서 항전을 주장하던 무인정권의 입지는 불안하였다. 더욱이 몽고에 파견되어 친히 강화 교섭을 벌였던 태자가 왕위에 올라 친몽고 정책을 추진하면서 무인정권과 갈등을 빚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인정권 내부에서는 국왕 원종을 폐위하고 몽고와 다시 항쟁하자는 주장이 일어났고, 무인정권 안에서도 강경파였던 임연이 삼별초를 동원하여 김준을 제거하고 이어 국왕마저 폐위한 뒤 재항전의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몽고가 군대를 보내 시위하면서 원종을 복위시키라고 요구하자 곧 굴복하고 말았다. 임연의 원종 폐위는 강화 이후 궁지에 몰리던 무인정권이 감행한 정치적 모험이었다. 한편, 몽고의 도움으로 왕위를 되찾은 원종은 개경 환도를 서두르는 등 친몽고적인 성향을 노골적으로 띠어 갔고, 급기야는 직접 몽고에 가서 무인정권을 종식시키기 위한 군대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원종이 몽고 군사를 이끌고 귀국하여 강화도의 무인정권에게 개경으로 나오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강화도에서 이에 호응하는 정변이 일어나 무인정권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1270년의 일이다. 또 하나의 고려 정부, 삼별초는 무엇을 위해 싸웠나 무인정권의 붕괴는 1170년 무인정변으로 탄생한 하나의 정치체제가 꼭 100년 만에 종식되었음을 뜻하였다. 동시에 그것은 앞으로 외세의 간섭이 전개되리란 것을 알리는 서막이기도 하였다. 그 간섭은 100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전환점에 이러한 변화를 거부하는 움직임으로서 삼별초의 대몽항쟁이 자리잡고 있다. 무인정권이 붕괴되자 무인정권의 주력 부대였던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이에 국왕과 강화파로 구성된 정부는 삼별초를 없애고 명단을 압수하였는데, 이것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어 삼별초의 난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들은 배중손을 중심으로 모여서 새 왕을 세우고 관리를 임명하는 등 개경으로 돌아간 고려 정부와 대립하는 또 하나의 정부를 세웠다. 이어 강화도 안의 재물과 곡식, 사람을 휩쓸어 배에 싣고 진도로 ‘천도’하였는데, 이때 천여 척의 배가 꼬리를 물고 내려 갔다고 한다. 진도에 자리잡은 삼별초 정부는 이듬해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겼고, 그곳에서 1273년까지 고려. 몽고 연합군을 상대로 싸움을 계속하였다. 그 동안 삼별초는 진도와 제주도를 중심으로 남해도 거제도와 마산, 김해, 동래 등 남해안 일대를 장악하였을 뿐 아니라 내륙 깊숙이 나주와 전주, 심지어는 인천 근방까지 진출하여 위력을 떨쳤다. 이 때문에 전라도와 경상도의 조세를 실은 조운선이 삼별초의 수중에 떨어지는 등 개경정부가 막대한 타격을 입었고, 몽고에서도 고려에 이어 일본을 공략하려던 계획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삼별초가 단기간에 세력을 확장하고 여러 해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삼별초의 병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반 백성들의 광범한 지지와 호응이 있었기에 삼별초가 또 하나의 고려정부로 존재하면서 몽고 및 몽고와 결탁한 개경 정부와 계속 항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삼별초가 봉기하자 몇 달 뒤에 경상도 밀양 사람들이 삼별초에 호응하여 개경정부에 반대하는 항쟁을 벌였다. 이 때문에 전라도와 경상도의 조세를 실은 조운선이 삼별초의 수중에 떨어지는 등 개경정부가 막대한 타격을 입었고, 몽고에서도 고려에 이어 일본을 공략하려던 계획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삼별초가 단기간에 세력을 확장하고 여러 해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삼별초의 병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반 백성들의 광범한 지지와 호응이 있었기에 삼별초가 또 하나의 고려정부로 존재하면서 몽고 및 몽고와 결탁한 개경 정부와 계속 항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삼별초가 봉기하자 몇 달 뒤에 경상도 밀양 사람들이 삼별초에 호응하여 개경정부에 반대하는 항쟁을 벌였다. 이와 거의 동시에 개경에서는 관청 노비들이 들고 일어나 몽고에서 파견한 다루가치와 관리들을 죽이고 진도로 들어가 삼별초에 가세하려던 사건이 일어났다. 곧이어 경기도 화성군의 대부도 사람들이 개경 관청 노비들의 봉기 소식을 듣고 섬 안의 몽고군을 죽이고 합세하려다 실패한 일이 있었다. 실제로는 이와 같은 사례들이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기록에 의하면 삼별초의 세력이 왕성해지자 각 지방 사람들이 항복하고 진도에 가서 삼별초가 세운 왕을 진짜 국왕으로 섬겼다고 한다. 사실 당시 삼별초에게 일반 백성들의 호응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진도로 내려가면서 용손, 즉 용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는 고려 왕실이 12대째로 끝나고 남쪽으로 내려가 황제의 서울을 세우리라는 참언을 퍼뜨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삼별초가 민심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만한 강제력이나 시간적 여유가 없던 상황에서 그처럼 백성들이 삼별초를 지지한 것은 자발적인 의사에 따른 것이었다 할 수 있다. 백성들의 입장에서 볼 때 무인정권의 붕괴와 강화파의 승리는 지배층 내부의 권력투쟁일 따름이었고, 몽고와의 강화는 새로운 권력층과 침략자의 결탁이었다. 따라서 전쟁 중에 몽고 침략 및 지배층의 과중한 수탈에 맞서 싸워 왔던 이들로서는 이제 몽고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쳐오고 또 지배층의 수탈이 더욱 심해질 것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다시금 항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전쟁중에 그려졌던 삼각형의 대립 관계가 이제 고려정부. 몽고 연합 세력과 반몽고 세력의 대립이라는 구도로 단순화된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그것이 마침 삼별초의 항쟁 대상과 일치함으로써 그에 호응하는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렇다면 1270년부터 1273년까지 진행된 삼별초의 항전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성격의 항쟁이 섞여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지배층 내부의 정쟁에서 패배한 무인정권의 잔존세력이 일으킨 정치적 반란이고, 다른 하나는 12세기 말 민란의 전통과 대몽항쟁의 전통을 계승한 백성들의 항쟁이다. 이 가운데 역사적으로 의미를 갖는 것은 물론 위의 것이며, 그 의미는 외세의 침략과 그에 결탁한 지배층에 반대하는 백성들의 저항이 폭발적으로 일어난 데서 찾을 수 있다. 사실이 이러하였기 때문에 고려와 몽고 연합군에 의한 제주도 함락은 삼별초뿐 아니라 각지에서 일어난 백성들의 항쟁이 진압된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12세기부터 이어져 내려온 백성들의 항쟁이 외세에 의해 좌절되었음을 뜻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삼별초는 무엇을 위해 싸운 것인가. 삼별초는 무인정권의 무력 기반이었고, 권력 내부의 정쟁에서 무인정권이 패배하자 그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따라서 그 해답은, 삼별초가 떠받들고 있었던 무인정권을 회복하고, 가깝게는 눈앞에 닥친 정치적 보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싸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인정권을 붕괴시킨 세력이 몽고와 결탁했기 때문에 삼별초의 반란이 대몽항쟁의 연장으로 비치기도 하지만, 그것이 무인정권의 앞잡이였던 삼별초의 전력이나 권력 투쟁에서 파생된 정변을 정당화시켜 주지는 못한다. 역사의 심판대에 오른‘삼별초’ 삼별초의 항쟁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다르게 내려져 왔다. 이것이 처음 부각된 것은 1930년대의 일이었다. 당시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던 현실에서 삼별초의 대외항쟁은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 널리 알려질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5.16 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은 결핍된 정통성을 만회할 목적으로 민족 주체성의 확립이란 구호를 내걸었고, 그러한 환경 속에서 삼별초의 대몽항쟁이 다시 한 번 주목받게 되었다. 더욱이 여기에는 고려의 무인정권을 민족적이고 진취적인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군사정권의 상징을 조작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었다. 그러나 외세와 싸웠다는 것만으로 ‘민족적’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무인정권에 기생하며 각종 특혜를 받고 백성들의 항쟁을 억압하는 역할을 했던 군사 조직이 무인정권 붕괴 이후 갑자기 ‘민족적’인 군대로 탈바꿈할 수 있는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최씨정권의 항전론이 국가안보를 위한 것이었는가 아니면 정권유지를 위한 것이었나를 구분했던 것처럼, 삼별초의 항쟁 역시 항쟁의 목적과 동기를 가지고 엄정하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민족이나 민족주의는 21세기를 바라보며‘세계화’를 외치는 오늘에도 유용한 개념이다. 그러나 민중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한 채 민족만을 앞세우다 보면 전체주의나 국수주의 같은 극우의 논리로 빠져들 위험이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삼별초의 예에서 보듯이 반민중적인 존재는 절대로 민족적일 수 없다. 독재자가 표방하는 민족주의 진정한 민족주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가스실에서 만난 친구 작년 겨울 나는 군인이 되었다. 매서운 추위속에서 군대라는 생소한 조직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혼자라는 외로움과 낯선 사람과 지내야 한다는 두려움에 나는 더욱 움츠러들었다. 곧 신병훈련이 시작되었다. 이리 뛰고, 저리 달리고 구르며 나는 조금씩 단련되어 갔다. 그러던 중 어느순간 난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훈련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이었다. 그날은 화생방 교육이 있는 날이었다. 화생방 교육이란 가스를 틀어 놓은 방에 들어가 몇분간 견디는 훈련이었다. 말로만 듣던 가스실에 들어가 직접 체험을 해 보는 것이었지만 학교 다닐 때 수없이 최루가스 냄새를 맡아 본 나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가스실에 들어서자 숨이 턱 막혀왔다.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가슴 속에 불이 붙는 느낌이었고 눈물 콧물이 쉴새없이 흘러내렸다. 문득 지옥이 이런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온 후에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집을 떠난 외로움과 고통으로 나는 더 큰 소리로 울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서 있었다. 그때 누군가 "이거 써"하며 휴지 몇 장을 내밀었다. 기스실에 함께 들어간 이름모를 동료였다. 그 전우는 자기 눈물, 콧물 닦아 내기도 모자란 휴지를 떼어 내게 나눠 주었다. 얼마나 고마웠는지..... 낯선 곳에서 처음 보는 나에게 따뜻함을 전해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 전우를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황득규 님/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64 - '...세계는 정신이다. 그리고 변증적으로 발전한다': 헤겔(1770-1831년) 그때 세계에서는 1804년: 무굴제국, 영국의 보호국이 됨 1825년: 영국,세계 최초의 철도 개통(스톡턴-달링턴) 헤겔 [Hegel, Georg Wilhelm Friedrich] 1770. 8. 27 슈투트가르트~1831. 11. 14 베를린. 튀빙겐의 대학의 세 사람 가운데 가장 늦게 등단한 사람은 나이가 많은 헤겔이었다. 그는 대학을 끝내면서 독일지역에 머물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못해 스위스 베른에 있는 법률가의 집 가정교사로 갔다. 그 곳에 머무는 동안 헤겔은 대학에 있을 때부터 관심이 깊었던 종교문제에 열중했다. 칸트의 종교철학을 읽고 크게 느낀 바 있는 헤겔은 전통적인 신학사상을 이성적이며 도덕적인 방향으로 재정리함으로써 정신계의 어떤 변화가 와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만일 우리 나라의 어떤 학자가 조선왕조 때 유교의 전통을 바꾸어 새로운 정신계를 개척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큰 업적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헤겔은 그러면서 법 및 국제법에 관한 연구도 병행시키고 있었다. 자기보다 연소한 셸링이 대학으로 진출했고 휠덜린이 프랑크푸르트에 정착했는데, 자신만이 독일 밖으로 밀려나온 것 같은 열등의식과 우울함을 느낀 헤겔은 휠덜린에게 독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라도 열어주기를 부탁했다. 그래서 프랑크푸르트로 옮겨 가정교사 일을 보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7년의 세월이 흘렀다. 피히테도 연구해야 했고 동창이었던 셸링의 저서도 꾸준히 공부하면서 점차로 신학보다는 철학에의 길을 되찾기 시작했다. 부친이 세상을 떠나면서 약간의 유산도 상속받을 수 있게 되면서 헤겔은 본격적으로 철학을 위한 정열을 불태울수 있게 되었다. 이 때 헤겔은 섬광과 같은 철학의 한 주제를 깨닫게 되었다. 그가 남겨놓은 메모에는 '...세계는 정신이다. 그리고 변증적으로 발전한다'는 명제가 기록되어 있었다. 이 짤막한 문구는 무한히 크고 많은 뜻을 내포하는 것이다. 칸트가 이성의 철학을 제창했고, 피히테는 그것을 자아의 철학으로 발전시켰다. 셸링은 거기에 자연을 포함시켜 동일성의 철학을 성취시켜 놓았다. 동일성 안에는 이성과 자아는 물론, 자연까지도 포함된 동일성이다. 그러면 그 동일성은 무엇인가? 헤겔은 그것을 정신(Geist)라고 규정지은 것이다. 그러면 그 정신은 어떤 본질을 갖는가? 변증적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셸링이 동일성과 계시의 철학으로 규정한 것을 정신의 변증법으로 대치해놓은 것이다.이렇게 큰 계기를 넘긴 헤겔은 예나 대학에 가 있는 셸링에게 도움을 청했다. 당신의 철학을 뒤따라 공부하다가 어느 정도 자신을 얻어 철학으로 방향을 굳히기로 했으니까 후계자로서 좀 이끌어달라는 청이다. 그 때 셸링은 예나에서 외로운 위치에 있었고, 지나치게 많은 철학교수들이 모여 있는 데서 자신의 뒤를 따를 수 있는 헤겔이 온다는 것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래서 헤겔은 30세를 넘기면서 겨우 시간강사의 자리를 얻어 오래 그리던 대학강단에 서게 된 것이다. 처음의 얼마 동안은 셸링과 공동집필을 하는 연구지를 발간하게 되었는데, 그 대부분은 셸링이 주제와 방향을 잡아주고 헤겔은 집필해서 완성시키는 후배로서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근면과 정열을 겸비한 헤겔은 꾸준히 자신의 철학을 연찬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체계화된 저서가 유명한 "정신현상학"이다. 이 책은 세부분 3권으로 되어 있다. 첫권을 내놓았으나 반응이 없었다. 출판사에서는 더 진행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헤겔은 서둘렀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진격해오는데 인세를 받아야 재정적 곤궁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원고를 끝내고 나니 프랑스 군대가 사열을 받고 있었다. 헤겔이 후일에 말 위에 앉아 있는 세계정신을 보았다고 말한 것이 그 장면이었던 것이다. 헤겔이 "정신현상학"의 서문과 첫부분을 셸링에게 증정하고 격려의 뜻을 받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을 읽은 셸링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거기에는 자시의 철학을 보잘것없는 낡은 것으로 밀쳐버리고 헤겔 자신이 새로운 결정적인 철학을 완결했다는 우월감과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셸링은 마침내 예냐 대학을 떠나게 되었고 그후부터는 헤겔을 라이벌이 아닌 적대심에 가까운 기분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셸링은 죽을 때까지 헤겔에 대한 적대감정을 눅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헤겔은 그런 셸링의 기분을 눈치채지 못하고 살았다. 그런 점에 있어서는 몹시도 둔감한 성품이었다. 얼마 후 헤겔도 예나를 떠나게 되었다. 하숙집 주부와의 불륜의 사랑에 빠져 아들을 얻게 되고, 마침내는 전쟁 도중에 생활고까지 겪으면서 당분간은 교수직이 아닌 다른 직업을 택해야 했다. 17,8세기의 철학자들은 가정을 가지지 않은 이들이 많았으나, 이 삼총사는 모두가 여성문제로 고난을 겪는 스스로의 운명을 만들었던 것이다. 헤겔도 그때 얻은 아들때문에 오래 정신적 고통과 가정적 시련을 겪어야 하는 불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다방의 '레지'는 영어의 'register'에서 온 말 다방에 '레지'가 있지요. 이 '레지'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영어의 lady 가 국어에서 '레지'가 되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영어의 register에서 온 말이지요. 일본에서는 다방에 소위 카운터에서 요금을 '계산하는' 사람이 주로 여자가 했었는데, 이 '레지스터'를 줄여 '레지'라 했습니다. 이 말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그대로 사용된 것입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5장 죽음보다는 철저한 삶을 서양 철학자의 적극적인 삶 동양의 철학가들은 안심입명을 한 탓인지 모두 죽음 앞에서 담담하였다. 그들은 대부분은 정좌한 채 영면에 들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공자와 맹자는 세 살 때 아버지를 잃었으며, 송대의 공자라고 칭했던 주렴계와 장횡거도 어린 시절에 고아가 되었다. 퇴계와 우암까지도 전부 과부의 손에 양육되었다. 주렴계는 56세, 장횡거는 50세, 정명도는 53세, 서화담은 58세로 모두 아까운 50대에 죽고 말았다. 육상산은 54세, 그의 심학을 전수 받은 왕수인은 57세에 폐질환으로 죽었다. 최소한 70은 넘겨 살아야 학문이 원숙하고 자기의 무엇이 나올 수 있지 않겠느냐고 김충렬 교수는 말했지만 그러나 어찌하랴. 토정 선생의 말씀대로 인명은 하늘에 있는 법 인 것을. 그러나 동양의 철학자와는 달리 서양 철학자들은 오래 살았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소식을 생활화하였고 엄격한 섭생법을 잘 지켰기 때문에 볼테르는 84세를 살았다. 실제로 볼테르는 워낙 약골이어서 모두들 오래 못살 것이라고 했었다. 30년도 살기 어렵다고 한 칸트는 80세의 장수를 누렸다. 야스퍼스는 어릴 때부터 협심증과 천식의 불치병을 갖고도 스피노자의 조심 을 좌우명으로 삼았기 때문인지 86세까지 살았다. 조산아로 태어난 홉스나 뉴턴 같은 이도 규칙적인 생활로 자기절제를 잘한 탓에 각각 91세, 84를 넘겼다. 1년도 넘기기 어렵다고 한 데카르트는 허약 체질로 54세까지 살았다. 서양 철학자들의 경우 동양 철학자들에 비해 독신자가 많았으며 훨씬 장수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이들이 대부분 80-90세까지 살았다. 탈레스, 헤라클레이토스, 플라톤, 뉴턴, 존로크, 아담스미스, 벤담, 키에르케고르, 칸트, 니체, 라이프니츠, 데카르트, 쇼펜하우어, 스피노자 등은 독신이었으며, 결혼한 철학자는 희극에 속한다 고 말한 이는 니체였다. 철학자답게 마음의 평정을 중시한 것은 모두 동서양이 같았다. 제자를 위해 마지막까지 수업을 계속한 점도 공통된 모습들이었다. 그러나 고요하게 앉아 죽음을 초탈하는 동양의 도학자나 선사들의 마지막 모습이 정적이라고 한다면 서양 철학자들의 경우는 동적이며, 훨씬 적극적임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생을 긍정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생에 대한 찬사 또한 아끼지 않았다. 에피쿠로스는 72세가 되자 자신의 종말을 예감하였다. 그는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노예들을 풀어주며 친구 미도메데스에게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나는 생에 있어서 행복한 나날을 체험하고 동시에 그것을 마칠 때에 즈음하여 당신에게 이 편지를 써둔다. 오줌이 나오지 않는 괴로움이 자주 엄습하고, 이 고통보다 더 지독한 것은 없을 정도의 설사로 고통받고 있다. 그러나 나의 정신속에는 내가 쟁취할 수 있는 모든 인식을 상기시키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지병인 요도염 때문에 욕탕 속에 들어 앉아 온수욕을 하며 포도주를 마시다가 그대로 숨을 거뒀다. 그러나 이렇긋 정신은 기쁨으로 충만되어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나보다 즐겁고 착한 생애를 지낸 인간이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고 자신에 대해 만족해 하며 죽었다. 20대에 일찍 부모를 잃고 떠돌이로 살면서 나중에는 귀까지 먹었건만 존 로크는 자신의 비문에 이렇게 썼다. 길가는 나그네여, 잠시 그대들의 발을 멈추어라. 여기 존 로크가 누워 있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든지 묻는 이가 있으면 그는 자기 운명에 만족하고 산 사람이라고 대답해 주어라. 노예로 태어난 현자 에픽테토스는 그의 주인에게 고문을 받다가 다리가 부러졌을 때에도 주인님 그렇게 비틀면 부러진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마치 뜰 안의 나뭇가지가 부러진 일 이상으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영 외에는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았다. 가진 것은 없고 절름발이였지만 그는 자기를 가진 것으로 행복할 수 있었다. 소유는 인간을 노예화하고, 존재는 인간을 자유화한다고 믿었다. 비록 노예였으나 그의 80여생은 이러한 평정속에서 생을 즐겁게 보낼 수가 있었다. 파스칼은 병의 고통을 통해서 오관의 쾌락을 끊을 수 있으며, 정욕도 끊을 수 있으나 병은 오히려 환영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언제나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고 있던 칸트는 기쁨에 넘치는 얼굴로 죽는 순간 야! 참 좋다 는 말을 남겼다. 독일의 플라톤이라고 지칭한 슈라이에르마허는 70세가 되어 임종이 가까워지자 부인에게 말했다. 지금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방황하고 있지만 내 속에서는 천국을 즐기고 있소. 이처럼 생을 적극적으로 살고 죽음을 긍정적으로 수용하였던 것이다. 네 살 때 시를 짓고, 작곡을 즐긴 천재 소년 니체. 그는 어려서부터 두통에 시달리고 눈병과 매독으로 고통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삶과 운명을 끝까지 사랑한 놀라운 사람이었다. 그를 실존철학자라 부르며 생의 철학자 라고 부르는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으리라, 비참한 경우를 당하더라도 굴하지 않고 현재의 삶 을 대단히 소중하게 생각하였다. 니체의 후계자로 실존주의 작가인 카뮈는 인간의 운명을 시지프시적 비극에 비유하였다. 시지프스는 산꼭대기에 올려놓은 바위가 아래로 굴러 떨어지면 다시 올려놓아야 하는 벌을 받은 신이다. 영원토록 반복되는 이 고통 속에서도 그는 그런 노력이 허사라는 사실에 대해 아무런 불만조차도 갖지 않았다. 카뮈는 오히려 그러한 순간이 바로 행복하다 고 선언했다. 인생의 행복이란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정 그 자체이듯이 살아 있음의 생 을 강조하려고 했던 것이리라. 참된 철학자는 결코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철학자의 지혜는 죽음에 대한 명상이 아니라, 삶에 대한 명상이다 라고 말한 이는 스피노자였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보다 현실적이며 긍정적이었다. 그래서 행동 반경의 보폭도 크고, 사회에 참여의식도 높았다. 임금이 벼슬자리를 내주며 불러도 쉽사리 응하지 않았던 동양의 도학자들에 비해 서양 철학자들의 사회진출은 매우 진취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결혼을 네 번씩이나 하고 영국 최고 문화 훈장과 노벨 문학상을 탄 러셀은 싸움이 터질 때마다 케네디, 흐루시초프, 주은래 등에게 전쟁방지를 촉구하는 편지를 부지런히 보냈다. 98세까지 살면서 그는 러셀국제전범법정 을 창설하여 명예회장이 되기도 했다. 에딘버러대학의 총장이 된 카알라일, 프라이브르쿠대학의 총장이 된 하이데거, 하이델베르그대학 총장이 된 야스퍼스, 미국교육연맹 총재가 된 존 듀이, 베를린 대학의 총장이 된 헤겔, 프라하대학의 총장인 슈라이에르마허, 칸트는 두 번씩이나 모교의 총장직을 맡았다. 노벨 문학상을 거절한 사르트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베르그송,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슈바이처, 모교의 총장이 된 아담스미스 등. 존 로크, 야스퍼스, 프로이드, 슈바이처, 칼 융 등은 의사였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28. 독일 농민을 배신한 루터의 종교 개혁 역사상의 급격한 변화는 대개 실제 상태와 있어야 할 상태 사이의 간격이 매우 넓을 때 나타나며, 이러한 모순을 종결 짓는 움직임에 불을 붙이는 것이 바로 그 변화의 지도자이다. 중세의 기독교 세계를 분열시키고 근대로 한 걸음 더 다가서게 만든 종교 개혁도 마찬가지였다. 종교 개혁의 도화선이 된 루터는 처음에는 교황청에 직접적으로 대립하겠다는 생각을 갖지 않았지만 사태의 전개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함으로써 종교 개혁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또한 종교 개혁의 와중에서 일어난 반봉건적 농민 전쟁에 대한 루터의 태도는 종교 개혁의 방향을 결정 짓는 역할을 했다. 종교 개혁이 일어나게 된 뿌리는 중세 말 유럽 사회의 전반적인 변화와 맞물려 있다. 봉건제 사회였던 중세는 강력한 중앙 권력이 없이 지방의 유력자(즉 봉건 영주)가 자기 영토에서 입법, 사법, 행정 등 모든 권한을 행사하던 지방분권 체제였다. 이렇게 조각조각 나뉘어져 있던 유럽을 하나로 묶는 힘은 바로 카톨릭 교회였다.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카톨릭 교회는 세속 권력이 분산되어 있는 상황을 이용하면서 자신의 보편적인 교리를 무기로 전체 유럽을 정신적으로 정치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권을 중심으로 하여 중앙집권 국가가 등장하기 시작하자 보편적인 기독교 정신을 내세우던 교회는 그 기반을 상실하게 되었다.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려는 왕은 자기 영토 안에서 교황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 교회에 도전하게 되었고 이에 교황권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카톨릭 교회 자체의 부패도 한몫 했다. 성적자의 타락은 누구의 눈에도 명백한 것이었다. 성직자가 공공연히 매매되기도 했다. 또한 재물에 눈이 멀어 교회 근처에 술집 등 유흥업소를 운영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 종교 개혁은 독일에서 먼저 시작되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독일은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어서 종교 세력이 매우 강한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은 교황청의 좋은 착취 대상이었고 교황청의 젓소라고까지 불렀다. 이러한 상황은 친교황적인 독일 황제 칼 5세(Karl 5, 1519~56) 때 더욱 강화되었다. 그는 전 유럽을 기독교 왕국으로 통일하겠다는 시대착오적 꿈을 꾸고 있던 인물이었고 따라서 로마의 교황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독일의 영방 군주들은 자신들의 독립성이 침해될까 두려워 칼 5세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거기에 교황청으로 흘러들어 가는 돈에 커다란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엄청난 교회 재산을 호시탐탐 노리던 군주들이라 황제의 친교황정책에 반항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후진 지역이었던 독일의 상인과 제조업자들도 교황청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독일 경제를 지배하던 것은 남부 독일의 광산주이자 대금융업자였던 푸거(Fugger)가문이었는데 이 가문은 칼 5세를 후원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금융 대부를 통해 교황청과도 밀착하고 있었다. 이런 푸거 가문에 대한 상인, 제조업자들의 반감은 곧바로 교황청에 대한 불만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이었다. 거기에 농민들도 교회의 착취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리하여 교황, 황제, 대금융업자에 맞서는 제후, 도시상인과 제조업자, 농민이라는 광범위한 세력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어 갔다. 이런 상황에 불을 붙인 것이 루터였다. 작센 지방에서 태어나 법률을 공부하던 루터는 21세에 갑자기 법률 공부를 그만두고 수도사가 되었다. 그 이유는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고 한다. 수도사가 된 루터에게 가장 중대한 문제는 구원에 관한 문제였다. 고민 끝에 루터는 해답을 얻었는데 그것은 신에 대한 신앙과 신의 자비로운 은총에 의해서만 인간은 구제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후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 교수가 되어 자신의 새로운 신학을 전개시키고 있던 루터에게 닥친 중대한 문제가 면죄부 판매 문제였다. 이 면죄부는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지만 중세 말 이후 남용되기 시작하여 교회의 재정적 필요를 충당하는 방편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이에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95개조의 반박문`을 발표했다. 처음에 교회는 이를 중요시하지 않았으나, 그 반박문이 독일어로 번역되고 (원문은 라틴 어) 인쇄술 덕분에 독일 전역에 보급되어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자 사태는 달라졌다. 그리하여 1519년 루터는 교회의 입장을 대변하는 신학 교수 에크(Johann Eck)와 라이프치히에서 공개 토론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에 루터는 자신의 견해가 카톨릭의 교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유능한 신학 교수 에크의 추궁을 받자 정통 교리로써는 자신의 입장을 방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결국 결단을 강요받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신념을 버릴 것인가, 교회를 떠나 이단의 낙인을 받을 것인가? 기로에 선 루터는 교회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는 다시 한번 `참된 신앙이란 오직 성경에 의거한 믿음`이란 자신의 신념을 재확인하면서 이러한 신앙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서는 제후들의 도움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루터는 1520년 <독일 민족의 그리스도 귀족에게 고함> 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독일 귀족들에게 독일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교회의 재산을 몰수할 것을 권고했다. 1521년 루터는 교회로부터 파문당했다. 그리고 황제 칼 5세도 그를 법의 보호 밖에 있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루터는 연방 군주들의 도움으로 은신하면서 라틴 어 성경을 번역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신앙의 근거를 성경에서 찾은 그로서는 모든 이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독일어로 번역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 무렵에 이르러 루터의 종교 개혁은 전국적인 사회 운동으로까지 발전했다. 교회의 압박과 제후의 압제에 고통받고 있던 농민들은 루터의 `신 앞에서의 평등`에 자극되어 대규모 농민 반란을 일으켰다. 독일 농민들은 종교 개혁이라는 갑작스런 사태에서 비롯된 지배자들의 분열과 체제의 혼란을 틈타 자신들의 권리를 자각하고 요구했던 것이다. 1524년 6월 슈바르츠발트 지방의 슈튤링엔에서 발생한 농민 봉기는 순식간에 라인란트트, 슈바벤, 프랑켄, 튀빙엔 등의 남부 독일 일대로 확산되어 갔다. 이 농민들의 봉기는 규모가 매우 컸을 뿐만 아니라 단순한 폭동의 수준을 넘어서 조직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독일 농민 전쟁(1524~25)이라고 한다. 농민들이 내건 요구는 지역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대표적인 것이 슈바벤의 농민들이 내건 `12개조`였으며 그것의 핵심적인 내용은 농노제의 폐지와 10분의 1세 등 교회 수탈을 없애는 것이었다. 농민군 지도자 가운데는 루터의 영향을 받은 젊은 성직자들이 많았는데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토마스 뮌저(Thomas Munzer)였다. 그는 루터의 주장을 종교적인 면에 한정하지 않고 정치,사회적으로 확대시켜 강력한 반봉건 투쟁의 목표를 내걸었으며 일종의 평등한 공산사회 건설을 주장했다. 처음에 루터는 농민들의 무력을 사용한 반란에는 반대하면서도 그들의 요구에 대해서는 동정을 보였다. 그러나 곧 앞서 말한 뮌저와 같은 이들의 지도하에 빈농이 반란의 중심이 되어 기존 질서의 파괴(농노제의 폐지)와 재산의 공유 등을 요구하면서 교회와 수도원을 약탈하는 등 폭력적인 투쟁을 벌이자 루터는 농민들을 비난하고 제후들에게 미친 개를 잡듯이 때려 잡으라고 권고했다. 농민의 아들임을 자랑하던 루터는 농민 전쟁에 대해 냉소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적대적이었다. 루터에게 뮌저와 같은 인물과 폭력적인 반란은 그의 종교 개혁을 파멸시키려는 악마의 소행으로 보였으며 기존 권위와 권력에 대한 복종이 기독교인의 의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각지의 제후들은 이러한 루터의 주장에 힘입어 농민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했다. 이런 루터의 주장과 태도를 보면 그는 영주, 제후, 기사등 지배계급과 한편을 이루고 있었으며 그들의 힘을 빌려 자신의 종교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루터에 대한 농민의 기대는 무너졌고 영방 군주들의 반격으로 농민군은 처참하게 패배했다. 루터의 이러한 태도는 매우 중요한 결과를 가져와 종교 개혁을 기존의 정치 세력에 의존하게 만들었다. 농민 전쟁 이후 루터의 종교 개혁은 제후들의 지원하에 계속되었고 그 대립 양상은 루터 파의 제후 대 교황과 황제의 싸움으로 나타났고 이후 신구 제후간의 투쟁인 슈말칼덴 전쟁(1546~47)을 겪게 된다. 이 투쟁은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종교 화의로 일단락되는데, 거기서 천명된 원칙은 `영역을 지배하는 자가 종교를 지배한다`라는 것이었다. 즉 제후는 자신의 영내의 신앙을 결정할 권리를 가지고 카톨릭과 루터 파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자유를 얻었던 것이다. 따라서 신앙과 개인적 자유는 인정되지 않았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9. 불타는 헐리우드 5) 할리우드영화 수입에 대한 중국 영화인들의 책임 작년에 수입된 할리우드영화 10편은 중국에서 크게 흥행하였다. 이런 와중에 중국영화는 관객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중국 영화인들은 부족한 투자나 영화 제작체제의 미비 등과 같은 객관적이고도 명확한 이유를 들어 이런 현상을 설명할 수도 있겠으나 아직 신문이나 잡지에서 중국 영화인 자신에 대해 철저히 분석한 글을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들도 어쩌면 마음속으로는 더욱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 객관적 원인이 있겠으나 필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에서 분노하고 있다, 첫째. 영화발행체제문제이다. 중국 영화인들은 아직 영화시장과 진정한 접목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인이 그토록 혐오하는 미국인에게 따귀를 한 대 얻어 맞은 꼴로 영화시장을 빼앗겨 버렸다. 그들은 중국시장에 진출하자마자 많은 돈을 챙겨 가버렸다. 그들이 찍은 영화가 훌륭하기만 하면 팔아먹을 시장은 걱정이 없었던 것이다. 둘째, 투자문제이다. 할리우드에서는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여 영화를 만드는데 중국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나에게 그들과 같은 거대한 자금을 준다면 나도 저들과 같이 좋은 영화를 찍을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은 자괴감과 책임회피를 위한 푸념 섞인 호기에 불과할 것이다. 이는 마치 어떤 거지가 '나에게도 그런 기회가 있었다면 재벌이 될 수 있었다'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할리우드에서는 거대한 자금으로 영화를 만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큰 돈을 들이지 않고도 좋은 영화를 만들고 흥행에 성공한 영화도 많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라이온 킹}은 3천4백만 달러를 들여 1억 달러가 넘는 흥행수입을 올렸다. 미국에서 3천4백만 달러 정도는 그다지 큰 투자라고 할 수 없다. 또 고작 9백만 달러를 들인 {데스페라도} 역시 1억달러를 넘는 수입을 올렸다. 제68회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받은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는 겨우 4백만 달러를 투입해 만든 영화였다. 중요한 것은 지금과 같은 우리의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영화를 만들 수있는가 하는 점이다. 개방 이후 중국의 영화인들은 지금까지 없었던 좋은 기회를 맞이 하였다. 그들의 노력으로 중국영화 역시 한발 한발 세계를 향해 진출하고 있다. 이것은 정말 기뻐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이런 즐거움 속에 중국인들은 다소의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중국영화는 왜 항상 과거만 그려내고 있는 것일까? 이는 중국 감독들이 애써 외국인의 구미에 맞추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단언하기도 어렵고, 과거를 해부하는 것이 지금의 중국을 크게 계도하지 못한다고 잘라 말하기도 어렵다. 나아가 중국의 영화제작자들이 변화는 중국인의 심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고 말하기는 더더욱 어려울 것같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중국 영화인들은 누런 흙과 다 해어진 옷을 아름다운 영상으로 찍어내는 방법만은 잘 알고 있으며 이에 상웅하여 중국문화 속의 찌꺼기들은 더욱 추악하고 심지어는 사악하게까지 그려진다는 것이다. 중국 영화인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우리는 일찍이 이러하였고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일 뿐. 우리는 지금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이 없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중국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할리우드영화는 폭력적이든 비폭력적이든, 훌륭하든 조잡하든 간에 모두 현재 미국인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제공하고 있다고는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실제로야 어쨌든 미국정신 속에 배어 있는 용감하고 투쟁적인 개인 영웅?주의를 불러일으키려 하고 있고, 혹은 생활방식이나 생존환경 심지어는 극단적 퇴폐경향까지도 일깨우려 하고 있기는 하다. 이것이 바로 중국영화와의 차이점일 것이다. 중국 영화인들도 이에 대해 백 배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부족하다. 중국영화 중에 현재의 시점과 가장 가까운 때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바로 장원)의 {햇빛 찬란한 날}이다. 이 영화는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을 배경으로 한다. 할리우드의 대작 10편이 중국인들을 다시 영화관으로 끌어들였다면, 중국인들은 지금 현실적이고 감동적인 국산영화들을 기다리고 있다. 만약 10편의 대작이 다시 수입되어 국민들이 역시 이 영화들만 본다면, 이는 국민들이 할리우드영화만을 좋아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국산영화 중 볼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 된다. 안일하게 과거의 동굴 속에 틀어박혀 무슨 새로운 보물이라도 끄집어 내려 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에서 얻어지는 것이 새로운 것일 수도 없고 그저 낡은 것을 새롭게 보는 것뿐이다. 옛것에 연연하는 것은 쉽게 노쇠하게 만들 뿐이다. 과거에만 얽매여 있고자 하는 것은 병폐이다. 10편의 대작들이 중국 영화시장을 침범했다고 원망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사실 겨우 10편일 뿐 아직 마구 쏟아져 들어온 것은 아니지 않은가? 단지 국민의 시각을 자극하고 충격을 줬을 뿐 아직 그들의 사상까지 침투해 들어오지는 않았다. 중국 영화인들도 중국문화의 우수한 면을 이용해 지금 중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만들어 관객을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중국의 생각을 국민에게 전달하고 국민들 스스로가 비교하고 생각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중국 영화인들은 중국문화를 널리 알리고 문화말살에 대비해야 하는 또다른 측면의 가장 중요한 책임을 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미국 의회를 존경하는 중국원숭이의 보고 . 존경하는 의원 여러분. 일찍이 중국원숭이에 불과했던 저에게 발언할 기회를 주신 여러분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솟구치는 기쁨과 행운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실험의 결과로 저는 이미 모든 체모를-실은 모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아직 은밀한 장소에는 몇 개 남아 있거든요-없애고 여러분과 똑같은 하얀 피부를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저의 따라지 근성이 자꾸 나타나는 걸 보니-이것은 제가 나중에서야 조금씩 깨닫게 된 것이지요.지금은 아주 부끄럽게 생각합니다-완전히 없애 버리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이것은 시간이 좀 필요한 것이지만 저는 최대한 이 시간을 줄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께서는 관련기구에 더 많은 비용을 내셔서 저를 철저하게 백인으로 바꾸는 실험이 더욱 빨리 진행될 수 있게 해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가장 좋은 것은 일본돈인 엔화를 내는 것이겠지요. 엔화가 좋다고 하는 것은, 저는 아직 이해를 못했습니다만, 어느 날 실험실의 클린턴 선생이-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가 그곳의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집에 몰래 전화를 걸어서 엔화를 잘 보관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엔화가 달러보다 낫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중국돈인 인민폐를 주지는 마십시오. 비록 앞으로는 엔화보다 더 나아질 날이 있더라도 저는 그저 제 음식과 약물을 중국돈으로 사기가 싫기 때문입니다. 시작부터 돈 얘기를 꺼내는 것이 속물같아 보이시겠지요.하지만 용서하십시오. 저는 저의 동료들보다 더 힘들게 귀하들의 사고방식을 배웠습니다. 저는 특히 귀하들의 홍미거리가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데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로 저에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바로 오늘과 같은 성대한 회의가 그 한 예입니다. 일찍이-'일찍'이란 말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중국의 원숭이였던 놈이 이 나라에 올 수 있었던 것은 제가 그곳에서 박해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혹은 앞으로 저도 잘 알 수 없는 꼬종의-솔직히 말하면 제가 현재 배우고 있는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박해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당시 우리는 숲속의 과일을 언제 따 먹을 것인가에 대해 내일 의논하기로 했었습니다. 그런데 몇몇 동료들이 몰래 먼저 그 과일을 먹어 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회의를 열어 그들을 비판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무리는 갈수록 커지고 과일은 자꾸만 줄어드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논하였습니다. 저는 분명 좀 많은 의견을 내놓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아주 명망있는 한 어른의 질책을 받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당시 저는 아주 멍청했었던 것 같습니다. 하루종일 숲에서 마음대로 기어오르고 내리며 조금도 가공되지 않은 자연의 과일을 실컷 따먹을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깡마르고 키가 큰 뱀대가리가 저를 상자에 넣어 며칠 동안을 어디론가 옮긴 후 귀하들의 나라에 도착할 수 있게 해준 데 대해서는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대로 말해 처음 얼마 동안은 적응하기 힘들었습니다. 대화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둘째 문제였습니다. 저는 조상으로부터 홀로 고독을 참는 성격을 물려 받았기 때문이지요. 이런 천성은 몇만 년을 거쳐 오며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몇만 년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고통을 참으며 공부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몇만 년은 백인이 배를 타고 여러분들이 발 딛고 서 있는 이 땅에 도착한 시간보다 훨씬 긴 시간이 라고 합니다. 원숭이의 근성 중 하나는 움직이길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우매한 저는 우리 속에 저를 가둬 두는 것이 저를 해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아주 위축되었지요. 철창에 구멍을 뚫어보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행동의 결과가 비록 아무 소용없는 것이긴 해도 저에게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히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인간 나라의 자유란 무수한 울타리로 이루어진 것이고 울타리 사이사이로 바깥의 넓은 세계를 환히 내다볼 수 있으나, 그 너비는 나를 도망치지 못하게 하면서도 그렇다고 완전한 절망 속에 빠지게 하지도 않는. 아주 절묘한 치수로 되어 있다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매일 저는 울타리 사이의 틈으로 밖을 바라보면서 간혹 손과 발을 뻗어 바깥의 자유를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차츰차츰 발을 밖으로 내미는 것도 귀찮아지고 작은 공간도 크게 느켜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에게 주어진 작은 공간에 만족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자유에 대한 관심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혹은 우리 속에 멍청하게 갇혀 있는 것 자체가 바로 제가 이해하고 얻을 수 있는 자유였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이런 공간에 멍청하게 있는 것이 저에게는 매우 안전하겠지요. 또한 다른 어떤 것도 이곳에는 들어올 수 없으니 피차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저는 음식을 다른 놈들에게 빼앗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먹을 것이 생기면 품에 안고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빼앗길까봐 쩔쩔 매는 원숭이의 습관도 저에게는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담하게 먹을 것을 그냥 두고 즐기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음식에 대해 몇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처음에는 음식이 목구멍에 넘어가질 않았으나 지금처럼 한 입에 삼켜 버릴 수 있게 되기까지는 고난에 찬 훈련과정이 필요했습니다. 저의 무지한 미각 때문에 처음에는 강력한 저항을 했습니다 너무 저항을 하니까 며칠 동안 아무도 음식을 가져다주지 않았습니다. 우둔한 근성이 단번에 고쳐질 수는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두 번째 음식을 가지고 왔을 때도 저는 여전히 거절했습니다. 기억이 잘 나질 않습니다만 네 번째인가 여섯 번째쯤 되어서야 조금 넘길 수 있었습니다. 허약해진 몸이 저의 미각을 완전히 없애 버렸던 것이지요. 결국 저는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기쁜 일이었습니다. 제가 이 음식들을 한 입에 넣고 그 맛을 음미할 수 있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저의 애당초 우둔한 저항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더욱 불가사의하게 느껴진 것은 이런 음식들이 제가 떠나온 마을을 포함한 모든 지역으로부터 전면적인 거절을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떠나온 그곳에서는 과일나무를 빨리 자라게 하는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이 사실은 직접 과일을 먹기보다는 과즙을 즐기시는 여러분들을 무척 놀라게 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여러분들께서는 과수가 성장하는 데 필요한 원묘공급을 중지하도록 결정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곳의 과수들은 여전히 잘 자라고 있으며 점점 더 무성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여러분들이 계속해서 그들의 과실을 따가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들의-제가 '우리들'이라고 한 데 대해용서하십시오. 비록 저는 아직 완전한 사람, 특히 백인이 되지는 않았지만 제 마음 속으로는 저 자신을 여러분의 일원에 넣고 있습니다-과즙을 생산하는 기계의 연료가격이 다른 지역 사람들에 의해 올라갔습니다. 정말로 여러분을 화나게 하는 일입니다. 인류는 정말 원류 보다 위대하더군요. 여러분의 친구들은 참으로 많더군요. 하룻밤 새에 그들을 모조리 포위해 버렸습니다, 그곳은 어떤 것도 자라지 않는 곳이니 그들을 굶길 수도 있겠고 또 어떨 때는 좀 강경한 조치를 취할 수도 있겠지요. 심지어는. 뭐라고 할까요, 제가 아직까지 여러분들의 말을 완전히 배우지 못해서 적당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제가 과거에 머물렀던 그곳의 표현으로 하자면 패도를 부린다고 할까요. 그렇다 하더라도 뭐 별 것 있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실 과즙이 없는데 그 고통을 어찌 참으시겠습니까? 듣자하니 그곳에서는 배가 고파 말도 할 수 없을 지경이라고 합니다. 요리조리 잘 요리하고 계속 굶겨 그들이 저와 같이 변해 버리는지 두고 보시지요. 제가 사소한 일로 여러분들의 귀를 소란스럽게 한 것 같은데 용서하십시오. 말을 다시 돌리겠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 있다 보니 저는 확실히 형편없는 게으름뱅이가 되어 심지어 생각하는 것조차 어렵게 되었습니다, 사람들도 저를 이렇게 되도록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변하게 됨으로써 오늘과 같은 성대한 회의에 참석하게 된 것은 피터 우라고 불리는 동지의 덕택입니다.피터 우가 실험실에 와 검사를 받을 때 우리는 서로 알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도 내가 있었던 그런 우리 속에 갇혀 본 적이 있더군요. 그는 현재 어느 곡마단에서 요리조리 요령을 피우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곡예를 아주 좋아한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어투는 내가 아주 부러워할 만큼 자신에 차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피터 우를 남미원숭이와 교배시켰는데 그의 새끼가 생식능력이 없어 검사하려 온 것이었습니다. 불량잡교에 해당하는 것이었지요. 이곳에는 이런 문제가 아주 많다고 하더군요. 그는 내가 부러워할 만한 어투로 '너는 배워서 좀 총명해져야 해. 그렇지 않으면 너는 영원히 원숭이로 남을 뿐이야. 그것도 중국원숭이로'라고 훈계하듯 말하였습니다. 그의 말은 나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나는 아주 오랫동안 어떻게 하면 원숭이를, 특히 중국원숭이를 면해 볼까 하고 깊이깊이 생각 했습니다. 나에게 이 문제는 정말 어렵고도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무지에서 오는 장애요소들을 극복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간단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 하나를 끝내 알아내었습니다. 그것은 먼저 원숭이처럼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원숭이가 어떤 모습인가 하는 것이 또 문제가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물도 없고 동료도 없었습니다. 저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미워하기 시작 하였고 스스로 원숭이가 되었던 무지함을 미워하기 시작했습니다. 문제가 해결된 것은 완전히 우연이었습니다. 백방으로 생각해도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털을 힘껏 쥐어뜯어 보았더니 한가닥 한가닥 빠지기 시작하더군요. 이것은 실험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주의를 끌게 되었고 그들은 저를 에워싸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털이 빠진 부분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하얀 피부가 드러나 보였습니다. 저를 둘러싼 사람들의 피부와 너무나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제 가슴 속은 상상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저는 죽을 힘을 다해 마구 털을 잡아당겼습니다. 그러나 빠지지 않는 곳도 있었습니다. 마구 뽑던 중에 불현듯 '그래, 나도 사람이 될 수 있어'라는 생각이 저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들께서도 상상하실 수 있겠습니다만, 저는 사람으로 변신하기 위한 기나긴 과정을 밟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 저는 그저 사람의 행동거지를 모방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지혜나 지식이 사람이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껴져 자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저의 이런 우려는 별 것 아님을 느꼈습니다. 이 나라 인간들의 사물에 대한 판별력이 그렇게 심오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의 사물에 대한 견해는 제각각 다르고 이런 견해도 일순간에 바뀌어 버리기도 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저는 각자가 좋을 대로 놀아나는 것이 가장 좋은 원칙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것쯤은 원숭이에게는 누워 떡먹기로 쉬운 것이고 하늘이 내려 준 기회였지요. 그러나 이 시점에서 제 몸의 변화는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습니다, 그들은 저를 더욱 넓은 공간에 놓아두고 연구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입니다. 몇 년 간 무리를 떠나 혼자 지내온 제가 한 마리 원숭이로 돌아가 살아갈 수 있을지 혹은 동료들이 지금의 저를 받아들일지 연구하는 것입니다. 이 결정은 저를 미칠 듯이 기쁘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억눌려 왔던 것들을 해 보았습니다. 목청껏 소리를 질러대기도 했고 이를 악물고 다른 동료들을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그들이 먹는 음식에 똥을 던져 넣기도 했습니다. 여럿이 보는 앞에서 서아시아원숭이와 사랑을 하다가도 동아시아원숭이의 유혹에 넘어가는 척 해보기도 했습니다. 내 것을 챙기지 못하게 하는 그런 바보들을 실컷 때리기도 하였습니다. 나를 가장화나게 했던 것은 바로 그 동아시아원숭이입니다. 자기가 먼저 나를 유혹해 놓고서는 나에게 손도 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매번 내가 화를 낼 때마다 애교를 떨어 감싸주길 바라면서 몰래 음식을 흠쳐 나에게 주곤 하였지요. 몇 번 그런 일이 있은 후 저는 그가 훔쳐 왔다는 음식이 바로 제것이었음을 알았지만 그녀를 보호해야 한다는 마음 때문에 그녀를 용서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마구 놀아난 결과 저의 행위가 점점 사람의 그것과 닮아 간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저의 이런 행위 자체가 기본적으로는 사람의 행위였는지도 모르지요. 설사 제가 철창을 사이에 두고 사람들과 지낸 것이긴 하지만 인류사회로부터 귀로 듣고 눈으로 본 좋은 습성과 인류사회로부터 배운 우월감으로 저는 눈 앞에 보이는 우매하고 더러운 동료들을 경멸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갖가지 교묘한 수완도 다 배우게 되었습니다. 만일 어느 원숭이 무리가 나에게 불리할 것 같은 데도 직접 대항하기가 어려우면 선동하거나 적절하게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등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여 그들을 분열시켰습니다. 그런 다음 만만한 원숭이 하나를 골라 실컷 때려주어 일벌백계의 효과를 얻는 것입니다. 저에게 선동딩한 무리들이 서로 치고 박기 시작하면 저는 또 어쩔 수 없이 해결사 노릇 을 하게 됩니다. 물론 진짜 해결사 노릇을 하는 것은 아니고 적당히 주물러 이전과 같이 서로 잘 지낼 수 없도록 작은 모순을 남겨두는 것이지요. 사실 그 늙어빠진 원숭이 왕도 제가 갈아치울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 냥 두었지요. 그 늙은 왕은 내 말을 아주 잘 들어 주었기 때문에 그냥 두는 것이 오히려 일을 하기 좋았거든요. 만약 그가 내 말을 잘 듣지 않았더라면 좋은 식사를 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어쨌든 저는 원숭이 무리에 던져지게 되어 알게 모르게 지도자의 능력을 기르게 되었고 인류와 한 발자국 더 닮아가게 된 것입니다. 저의 탁월한 행동때문에 저는 영광스럽게도 다른 실험에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들 인류사회에서 볼 때 어떤 결함이 있는 사람들, 예를 들면 선천적으로 말을 못하는 사람. 하루종일 '나는 이번 선거에 출마할거야, 나는 출마해야 해'라고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과 함께 별난 곳에서 매일 똑같은 음식만 먹으면서 다른 사람의 명령에 따라 각종 기기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것입니다. 이즈음 제가 가장 싫어했던 것은 사람들이 툭 하면 솔잎 같이 생긴 뾰족한 물건으로 제 피부를 찔러 몸 속의 액체를 빼 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저를 무척 놀라게 하였습니다. 또 어떤 때는 번쩍번쩍 빛나는 물건으로 내 눈을 비추기도 하여 잠시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만든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인간이 되기 위해 꾹 참았습니다. 결국 저의 인내는 헛되지 않아 몸에 붙어 있던 마지막 털 하나가 빠졌을 때 저는 너무 기뻐 목이 터져라고 소리질렀습니다.저는 '나는 이번 선거에 출마할거야,나는 출마해야 해'라고 소리질렀습니다. 비록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몰랐지만 있는 힘을 다해 목청껏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여기 온 이유입니다. 여러분, 제 마음 속에 요동치는 생각들을 여러분은 아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과거의 세월들 을 되돌아 봅니다. 모든 것이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떠오릅니다. 인간으로 변하기까지는 길고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면 매우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제 피부가 개같이 재수없는 검은 색이나 황색이 아니고 뽀얀 색인 것을 엄청난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아! 정말 행운입니다. 너무 흥분되어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끝으로 저의 억제할 수 없는 흥분과 여러분에 대한 최고의 경의를 다음 물음으로 대신할까 합니다. 여러분들도 저와 같은 과정을 거쳐 변해온 것인지 저에게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플린턴을 존경하면서.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잘려진 바지 날씨가 제법 쌀쌀해지기 시작한 늦가을 밤. 아파트 공사장에서 일하는 이씨는 그날 일을 끝내고 함바집에 들러 밤늦게까지 막걸리를 한 잔 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노점상에서 작업복 바지를 하나 샀다. 낮에 공사장에서 바짓가랑이가 못에 걸려 길게 찢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내일 일할 생각은 안하고 왜 이렇게 늦었어요?" 대문을 열어준 이씨의 아내가 피곤해 죽겠다는 듯이 손으로 입을 가리는 것조차 잊은 채 하품을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서울로 파출부 일을 나가는 그녀는 밤 10시만 넘으면 쏟아지는 잠을 잘 이기지 못했다. 이씨는 그때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노모에게 인사를 하고 얼른 바지를 아내에게 내주었다. "여보, 나 오늘 작업복 바지가 찢어져서 새 바지를 하나 사 왔어. 내일 입고 갈 수 있도록 바짓단 좀 줄여 주지 그래." 그러자 이씨 아내의 목소리가 커졌다. "아휴,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바짓단을 줄여 달라고 그래요? 우선 잠이나 좀 자요. 정말 피곤해 죽겠단 말이에요. 내일 다른 걸 입고 가면 되잖아요." "아, 참 그래, 그러지." 이씨는 아내가 몹시 피곤해 하는 것 같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도 피곤을 이기지 못해 씻는 둥 마는 둥 하고는 곧 곯아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씨의 아내는 잠을 자지 않고 남편이 사 온 바지를 집어들었다. 솜에 물이 배듯 온몸에 잠이 쏟아졌으나 아무래도 남편이 내일 새 바지를 입고 가는 게 좋겠다 싶어 애써 바짓단을 줄여 놓았다. 그 뒤 새벽 1시 무렵이었다. 노처녀인 이씨의 동생이 그때까지 잠을 자지 않고 있다가 살짝 마루로 나와 오빠의 바짓단을 줄여 놓고는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또 새벽 5시, 이씨의 노모가 일어나 살그머니 아들의 바짓단을 줄여 놓고는 산에 약수를 뜨러 나갔다. 그날 아침, 이씨의 아내가 이씨한테 그 작업복 바지를 내놓았다. "오늘 이 바지 입고 가세요. 어젯밤 당신이 곯아떨어지고 난 뒤에 내가 바짓단을 줄여 놓았단 말이에요." "야아! 역시 당신이야." 이씨는 어머니라도 볼세라 재빨리 아내의 뺨에 살짝 키스를 했다. 그리고 바짓가랑이 속으로 얼른 다리를 집어넣었다. 그 바지는 이씨의 복숭아뼈 위에까지 바짓단이 성큼 올라와 있었다. 글터 → 이글저글 비가 오면 나비는 풀잎이나 나뭇잎 사이에 숨어서 피한다. 빗방울이 떨어져도 굴러 떨어져서 몸 속으로 흡수되지 않게 되어 있다. 하지만 폭우가 몰아치면 살아남기 어렵다.나비는 체온이 27℃ 이상일 때만 날 수 있기 때문에 낮에 날아 다닌다. 하지만 나방은 밤에 날아 다닌다.우주선이 지구의 중력에서 벗어나려면 1초에 11킬로미터, 한 시간에 39,600킬로미터의 속도로 날아야 한다.여름이 겨울보다 더운 이유는 태양이 지구와 더 가깝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태양은 여름보다도 겨울에 지구와 4,800,000킬로미터 더 접근해 있다.해왕성에서는 켤코 생일을 맞을 수 없다. 그 곳의 1년은 지구의 165년과 같기 때문이다.명왕성의 온도는 영하 300℃이다. 그 곳은 지구에서 하도 멀어서 우리가 하루에 1,600,000킬로미터를 달린다 해도 10년이 걸려야만 도착할 수 있다.46억년 전에는 달과 지구의 거리가 현재의 반 정도인 217,000킬로미터밖에 되지 않았다.화성에는 태양계에서 가장 큰 화산 올림푸스가 있는데, 밑변 지름이 480킬로미터, 높이가 21,000미터이다.금성은 공전하는 방향으로 자전하지 않는 유일한 혹성이고 온도는 450℃가 넘는다.지구는 1초에 29킬로미터 속도로 여행하면서 태양을 한 바퀴 도는데 1년이 걸리고, 태양은 1초에 240킬로미터 속도로 은하계를 도는데 225,000,000년이 걸린다.1862년 미국의 천문학자 앨번 클라크가 망원경으로 처음 발견한 아주 작은 난쟁이 별 시리우스B에서는 성냥 한 갑의 무게가 50톤이나 나간다.별은 자기 스스로 열과 빛을 발하고, 혹성은 별보다 작고 딱딱한 고체로서 빛과 열을 내지 못한다.지구는 총알보다 8배 빠른 107,000킬로미터 속도로 태양을 한 바퀴 도는데 365일 6시간 9분 9.54초 걸린다. 지구가 1년 동안 달리는 거리는 958,000,000킬로미터나 된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15 추천 0 비추천 목록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댓글 쓰기 에디터 선택하기 ✔ 텍스트 모드 ✔ 에디터 모드 ?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독서편지 List Zine Gallery FirstThumb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글쓴이 조회 수 1388 사평역에서 - 곽재구 2006.09.07 風磬 37,794 1387 400년 전의 사부곡 2006.09.07 風磬 19,391 1386 접촉사고 2006.09.10 風磬 21,269 1385 어느 강사의 교훈 2006.09.10 風磬 23,375 1384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음악 2006.09.10 風磬 20,950 1383 요리사와 딸 2006.09.10 風磬 23,005 1382 나만의 최선 2006.09.12 風磬 18,492 1381 슬픈기도 2006.09.14 風磬 22,604 1380 엄마의 수첩 2006.09.16 風磬 22,750 1379 【독서편지】: 제 10 호 2006.09.16 風磬 18,173 1378 【독서편지】: 제 11 호 2006.09.17 風磬 17,758 1377 【독서편지】: 제 12 호 2006.09.18 風磬 21,916 1376 【독서편지】: 제 13 호 2006.09.20 風磬 16,446 1375 【독서편지】: 제 14 호 2006.09.21 風磬 17,451 1374 【독서편지】: 제 15 호 2006.09.22 風磬 15,815 1373 【독서편지】: 제 16 호 2006.09.23 風磬 15,532 1372 【독서편지】: 제 17 호 2006.09.25 風磬 14,373 1371 【독서편지】: 제 18 호 2006.09.26 風磬 15,453 1370 【독서편지】: 제 19 호 2006.09.27 風磬 11,026 1369 【독서편지】: 제 20 호 2006.09.28 風磬 14,384 1368 【독서편지】: 제 21 호 2006.09.29 風磬 10,005 1367 【독서편지】: 제 22 호 2006.09.30 風磬 8,838 목록 Search 검색 제목+내용제목내용댓글닉네임태그 전체검색 제목+내용+댓글 확장 변수 쓰기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64 Next / 64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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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남산성이 완공된 뒤 3년 안에 이 성이 무너지는 날이면 너희들의 목을 베리라." 1935년 경주 남산성터에서 발견된 '남산 신성비'는 진평왕의 그 같은 어명을 뒷받침해 주고 있는 좋은 기념비였다. 남산 신성비에는 서기 591년 왕명을 받고 성을 축조하던 관계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름뿐이 아니고 그들의 출생지와 벼슬 이름까지 기록된 것을 보면 남산성에 대한 진평왕의 집념은 알만하다 하겠다. 성에 대한 왕의 집념은 거의 운명적인 것이었다. 오늘날의 경주 인왕동 ->탑동 ->배반동 ->남산동 ->배동로 이어지는 2,954보의 궁성. 남산성을 쌓고도 왕은 두 다리를 뻗고 편히 잠들 수가 없었다. 서쪽에서는 백제의 노략질이 계속되었고, 북쪽에서는 강대국 고구려가 잠시도 침략의 마수를 거두려 하지 않았다. 이 상태로 나간다면 언제 서라벌이 적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게 될지 몰랐다. 왕은 불안했다. 2년의 세월이 불안 속에서 흘러갔다. 동해로부터 왜구의 침입이 왕의 잠을 앗아갔다. 안되겠다. 왕은 또다시 명하였다. "명활산성을 개축하여 왜구의 침략을 막아라." 진평왕 15년 7월에 명활산성 개축 공사를 시작했는데 주위가 3,000보, 때를 같이하여 서형산에 성을 쌓으니 주위가 2,000보였다. 동서남북에 견고한 석성을 새로 축조.개축하고 수나라 황제로부터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이라는 굴욕적인 이름을 제수한 뒤부터 왕은 비로소 발을 뻗고 잠들수가 있었다. 그러나 사방 팔방으로 성을 쌓고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쳐도 액운은 쉽사리 물러나질 않았다. 진평왕 24년 여름. 찌는 듯한 8월이다. 이윽고 백제가 군사를 일으켜 아막성을 향해 쳐들어왔다. 왕은 곧 백제 군사를 물리치기는 했으나 귀산과 같은 당대의 명장군을 잃어야 했고, 백제 군사의 내습이 있던 그 다음해 8월에는 고구려 군사가 북한산성으로 쳐들어오자 친히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나가 이를 막아내기도 했다. 진평왕 25년(서기 603년) 8월, 고구려가 북한산성(서울 북방)으로 쳐들어왔을 때 왕은 병부를 통하여 온 나라에 총동원령을 내렸다. 동원령의 골자인즉 한 집안에서 장정 한 사람씩을 뽑아 내라는 것이었다. 젊은이들은 그러지 않아도 도성의 축성 공사로 나라 안이 뒤숭숭하던 때라 총동원령이 내자마자 변방의 방비를 맡기 위하여 병부로 몰려들었다. 이 무렵 서라벌 율리에 사는 늙은 설씨도 동원령을 받았다. 그는 변방의 수자리(국경을 지키는 일)로 떠나라는 명을 받고 어명을 어길 수 없어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하나 늙고 병들어 쇠약한 설씨는 멀리 북방의 국경 지내는켜녕 자기 마을의 좀도둑을 지키기에도 힘에 겨울 지경이었다. 슬하에 아들이 없던 설 노인, 자식이라고는 다만 올해 열여섯난 딸 하나가 가사를 돌보고 있을 뿐이었던 설 노인에게 수자리로 떠나라는 명령은 일종의 형벌이었다. 수자리로 떠나는 날이 하루하루 앞당겨 오자 설 노인은 고민 끝에 몸져 눕게 되었다. 그 때부터 늙은 설 노인의 딸은 눈물이 마를날이 없었다. 마을에서는 노인의 딸을 효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때 사량부에 사는 소년 가실이 효녀의 집 문밖에 나타났다. 소년 가실은 비록 그의 집이 가난하고 누추하였으나 뜻이 곧은 남자였다. 가실은 웬일인지 설 노인의 딸이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는 가실이 설 노인의 딸 효녀(편의상 이렇게밖에 부를 수 없다)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효녀의 아름다운 용모로 인해서였다. 효녀의 아름다움은 그의 가난에도 불구하고 이웃 젊은이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효녀는 이웃 젊은이들의 사랑에 귀를 기울일 수가 없는 몸이었다. 사랑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에는 그녀의 가난이 너무 절박했던 것이다. 하나 소녀의 사랑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가실은 알고 있었다. 가실은 효녀를 짝사랑 나머지 그녀의 사랑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기 위하여 그녀의 노예가 되기로 결심했다. '효녀, 나는 네 종이 되고 싶구나. 사랑의 세계에서 노예는 굴욕이 아니잖는가.' 가실이 효녀를 그녀의 집 문 밖에서 만난 것은 효녀의 아버지 설 노인이 종군(수자리)으로 떠나기 이틀 전의 일이었다. "효녀, 나는 효녀를 돕고 싶소." 첫마디를 꺼내는 가실의 말소리가 소녀의 귀에 그럴싸하게 들려서 그런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효녀........" "무슨 말씀이신지 찾아온 연유를 어서 말씀하세요." 그러나 효녀는 가실의 내방이 전혀 뜻밖이라는 듯 겁먹은 두 눈을 들어 가실의 행실을 찬찬히 살피는 것이었다. 가실은 그러한 소녀의 겁먹은 두 눈이 더없이 귀엽기만 했다. "무슨 말슴이신지 어서........" "아버님이 편찮으시다지요........" 헛 인사가 아니라 진정 가실은 설 노인의 안위가 염려스러웠다. "아버님이....... 네, 중태랄 것은 없어도 기동이 여의치 못하시답니다." 그러면서도 효녀는 문득 집쪽을 건너다 보았다. 그러는 그녀의 커다란 두 눈에 금방 이슬이 맺히는 것이었다. 가실은 더 주저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효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방울져 땅 위에 떨어지기 전에 나는 말하리라, 찾아온 사유를.' 그런데 이 무슨 마음의 변한인가. 가실의 입에서는 쉽사리 그 사유가 말이 되어 나오지를 않았다. 효녀가 얼마 뒤에, "저를 찾으신 연유를......"하고 재촉했을 때 비로소 그는 효녀의 두 눈방울에 멎어 있던 시선을 거두고 말을 꺼냈다. "나, 가실은 효녀를 위하여 무슨 일이건 기꺼이 해드리고 싶으니 나에게 일을 맡겨 주시오. 내 비록 가난하고 쓰잘 나위 없는 위인이지만 일찍부터 스스로의 지기로서 살아온 사람, 원컨데 불초의 몸이나 엄부군의 행역을 대신하게 해 주시오." 효녀는 울면서 가실의 청을 받아들였다. "가실이! 우리 아버님을 위하여 행역 종군을 대신하겠다 하니 이에서 더 고마울 데가 어디 있겠습니까. 내 곧 이 기쁜 소식을 아버님께 여쭙겠으니함께 들어가 보시어요." "그렇잖아도 병석에 계신 그대 아버님을 뵙고 인사 여쭈려던 참인데 잘 되었군여, 들어가십시다." 두 사람은 설 노인이 누워 있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가실은 그 자리에서 좁전에 효녀한테 들려준 이야기를 반복했다. 노인은 늙은 안면에 경련을 일으키면서 가실의 손을 끌어다 자신의 가슴 위에 얹는다. "가실이...... 가실이! 그대는 늙은 몸이 수자리로 떠나는 것을 대신하여 떠나겠다 하니 기쁘고 송구스러운 마음 이기지 못하겠구나. 그대의 소원이라면 내 기꺼이 은혜를 갚을 생각이네." "은혜를 받자고 이 길을 택한 것은 아니옵니다." 가실은 노인의 뜻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노인은, "만약 공이 어리석다고 버리지 않는다면 내 어린 딸을 아내로 맞아 줌이 어떠한가?" 하고 가실의 눈치를 살폈다. 가실은 노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꿈만 같았다. 평시에 흠모하던 설 노인의 딸을 아내로 맞아 달라니 호박이 덩굴째 굴러 들어온 기분이 아마 이렇겠거니 했다. 노인이 다시 말한다. "공이 부족한 내 어린 딸을 아내로 맞아 주지 않는다면 나는 그대에게 베풀 그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네. 그대의 뜻이 그렇다면 무엇으로 내 은혜를 갚을꼬......" 가실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닙니다, 노인장. 노인장의 딸을 제 아내로 주신다면 감히 바라지 못할 일인 줄은 아나 기꺼이 맞이하겠습니다. 노인은 그제서야 가실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고 안심했는지 이번에는 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네 뜻은 어떠하냐?" "아버님이 정하신 일인데 소녀가 어찌 거역하겠습니까?" 효녀는 첫마디에 쾌히 응하는 것이었다. 그날 밤, 마침 중천에 떠 있는 달이 서라벌 넓은 장안을 밝혀 주고 있었는데 가실은 미래의 아내 효녀를 데리고 달밝은 냇가로 밤놀이를 떠났다. "내일 모레면 전방 수자리로 떠나야 할 몸, 간략하나마 혼례를 치르고 떠나고 싶으니 허락해 주오." 가실은 효녀에게 그런 주문을 했다. 그러나 효녀는 달빛 아래서 밝게 웃어 보이고 고개를 젓는다. "원래 혼인이란 인륜 대사이므로 서둘러서 아무렇게나 치를 일이 못됩니다. 내 이미 그대에게 마음을 허락했는데 두 마음을 품을 리 있겠습니까?" "그래두....." "아니됩니다, 가실이. 그대가 변방으로 떠나 부정한 말로 설혹 어찌된다 하여도 나는 그대의 아내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일생을 혼자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니 가실이......." 효녀의 마음이 그렇게 정해져 있다면 가실은 더 걱정할 것이 없었다. 효녀의 다음 말을 더 들어 보지 않더라도 이미 효녀는 가실의 아내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산다지 않는가. "원컨데 가실이, 그대는 방어하는 곳으로 떠났다가 이 다음에 수자리를 교대하고 돌아오거든 따로 날을 잡아서 혼례를 치릅시다. 어떻습니까, 내 뜻이?" 가실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과연 내 아내다운 말이오." 두 사람은 달빛 속에서 얼싸안고 헤어지는 아쉬움을 달래었다. 가실이 북한산성 수자리로 떠나는 날 효녀는 품속에서 작은 손거울을 꺼내어 둘로 나누었다. 효녀는 깨어진 거울 반쪽을 자기가 갖고 나머지 반쪽을 가실에게 건네면서 말했다. "이는 헤어지는 신표로 드리는 것이니 뒷날에 가실이 수자리에서 돌아오는 날 두 조각을 합쳐 다시 하나로 만들겠습니다." 가실이도 효녀에게 말 한 필을 맡기면서, "이는 천하의 양마로 뒷날에 반드시 쓸데가 있을 것이오. 어차피 내가 전지로 떠난 다음에는 이 말을 기를 사람이 없으니 바라건대 그대가 이 말을 맡아 길러 주시오."하고 작별한 다음 곧 북으로 가는 종군 대열에 합류하였다. 그날부터 설 노인의 딸 효녀는 기다림에 마음 졸이는 여자의 그리움을 배우기 시작했다. 효녀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기다림의 연속이었고, 메아리 없는 그리움의 반추일 수밖에 없었다. 효녀는 가실의 그리운 얼굴이 떠오르면 문득 동강난 거울을 꺼내어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앉아 있기가 일이었다. 깨어진 거울 한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거울 속에 가실의 얼굴도 나타났고, 먼 북한산성의 수자리 근처의 솔바람 소리도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러한 기다림의 세월도 형벌처럼 지루한 것이었으며, 형벌과도 같은 그리움의 언저리에 여자의 지친 한숨 소리가 나직하게 방안을 울려 놓기도 하였다. 일년의 세월이, 그야말로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흘렀다. 2년의 세월이 바람처럼, 3년의 세월이 번개같이 흘러갔다. 진평왕 25년(서기 603년) 8월에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북한산성으로 쳐들어온 때부터 신라의 젊은이들은 다른 어느 변방에서보다 북쪽 고구려 국경 지대에서 더 많아 죽어 갔다. 가실이 북한산성 수자리로 떠난 지 5년. 진평왕 30년, 고구려가 번번이 변방을 침범해 오자 마음 약한 왕은 수나라 군사를 청해서 고구려를 칠 것을 결심하고 원광 법사에게 걸사표를 지어 보내도록 명했다. 원광은, "자기가 살기 위하여 남을 멸망시키는 것은 사문의 할 행실이 아니옵니다. 하오나 신이 대왕의 땅에 살고 대왕의 수초를 먹으면서 어찌 감히 어명을 좇자 어나하오리까."하고 곧 걸사표를 지어 수나라에 보냈다. 그러나 수나라에서는 원병을커녕 걸사표에 대한 회답도 오지 않았다. 이윽고 6년. 가실이 북한산성으로 떠난 지 6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효녀의 아버지 설 노인은, "처음에 가실은 3년을 기약하고 떠났는데 3년의 곱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니 더 기다릴 수 없구나. 마땅한 곳이 나섰으니 그 곳으로 시집가는 게 어떠냐?" "아버님께서는 6년 전에 소녀가 어떤 까닭으로 가실과 약혼하게 되었는지 벌써 잊으셨습니까?" 딸의 커다란 두 눈에서는 참으려 해도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렸다. "소녀는 가실이와 헤어질 때 깨어진 거울을 서로 나누어 가졌습니다. 가실은 거울의 신표를 밎고 6년의 세월을 전지에서 보내면서도 지루하다거나 고되다고 생각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내 나이 아흔이 내일 모레라, 너 또한 과년한 여자로서 혼처가 나타나지 않을까 염려되니 아비가 정해 주는 사람하고 혼례를 치르자." 설 노인의 마음은 요지부동이었다. "아버님!" "글쎄 내 말대로 다른 데로 시집을 가라니까. 가실이는 벌써 죽은 몸이야." "아버님! 소녀는 6년의 세월 속에서 하루도 가실이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적의 청끝이 코 끝에 보이는 그러한 국경 지대에서 손에서 무기를 놓은 사이도 없이 늘 호랑이 입 앞에 가까이 서 있는 것 같아 마음 놓을 수가 없는데, 그 신의를 저버리고 가실이와 언약을 잊어 버리면 어찌 인정이라 하겠습니까? 소녀는 결단코 아버님 말씀에 순종치 못하겠습니다." 효녀의 결심이 바뀔 낌해가 보이지 않자 설 노인은 강제로라도 딸을 시집 보내기로 결심하고, 딸 몰래 마을 젊은이와 정혼을 하고 잔칫날까지 받아 두었다. 가실의 약혼자 효녀는 더 망설일 수가 없었다. 가실이를 기다린 6년의 세월이 허망하게 무너져내리는 아픔, 이 아픔은 분명 그래움 이었고 사랑이었다. 가실이 처음으로 접근해 오던 때를 그녀는 생각했다. 가실의 용기가 없었던들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가 없었을 것이다. 효녀는 결심했다. 가실이 그녀를 찾아와 아버지의 행역을 대신하겠다던 용기는 이제 그녀 스스로가 실천에 옮겨야 할 단계라고 단정한 것이다. 그녀는 마구간으로 갔다. 가실이 남겨 놓고 간 말 앞에서 그녀는 가실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길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렇다. 이 말을 타고 북방으로 가리라...... 북방 국경 지대에 가서 가실을 만나자.' 그 때였다. 형색이 걸인처럼 볼품없고 깡마른 사람이 효녀의 집앞에서 고개를 빼고 기웃거리는 게 보였다. 차림새로 보면 영락없는 걸인이었다. 해골처럼 삐쩍 마른 형상이 더욱 그랬다. "설 노인...... 효녀." 걸인은 중얼거리면서 효녀를 찾았고, 설노인 찾았다. 설 노인과 딸이 밖으로 나왔으나 첫눈에 그 걸인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나, 가실이외다!" 가실이. 걸인은 스스로 가실이라고 말했으나 아무도 그의 말을 믿는 사람이 없었다. 가실은 깨어진 거울을 품속에서 꺼내어 효녀에게 주었다. '깨어진 거울....... 이별의 정표로서 둘이 나누어 가진 깨어진 거울........' 효녀는 가실의 거울을 받아들고 자기가 6년 동안 품에 지녀 온 거울을 꺼내어 맞춰 본다. 두 조각의 거울은 신기하게 들어맞았다. "가실이, 으, 으흐흐......." 효녀의 입에서는 통곡과도 같은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고, 두 눈에서는 쉴새없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가실이, 돌아왔구려. 여보!" 효녀는 그 걸인처럼 변모한 가실의 품에 안겨서 언제까지고 솟아나오는 눈물을 거둘 생각도 않는 것이었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정치, 경제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삼별초는 무엇을 위해 싸웠나 - 이익주(천안공전교수) 삼별초는 어떠한 존재인가. 몽고의 침략에 맞서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 끝까지 싸우다 장렬한 최후를 마친 호국의 화신인가? 하지만 이렇게 단순 명쾌한 설명이 혹 과장되거나, 조작된 신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번쯤 해 볼 필요는 없을까? 실제로 삼별초가 대몽항쟁을 벌였던 1270년대를 중심으로 앞뒤 시기의 역사적 흐름을 살펴보면 이러한 의문을 좀처럼 지우기가 어렵다. 그 앞뒤의 상황이란 어떠한 것이었을까? 민중을 억압하기 위해 ‘야별초’를 조직하다 삼별초란 좌별초와 우별초, 신의군 등 세 개의 별초군을 합쳐 부르는 이름이다. 그것이 설치된 것은 대략 1220년대의 어느 때이며, 당시는 최씨무인정권의 두 번째 집권자 최우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 사정을 <고려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최우가 나라 안에 도적이 많으므로 용사들을 모아 매일 밤 순찰하면서 폭도들을 막게 하고, 이를 야별초라 하였다. 뒤에 도적이 전국에서 일어나자 야별초를 각 지방에 보내 막도록 했는데, 그에 따라 야별초 군사가 많아졌으므로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었다. 또한 몽고에서 도망해 온 사람들을 모아 부대를 만들고 신의군이라 하였다. 이것이 삼별초이다. 여기서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삼별초의 모체가 되는 야별초가 나라 안의 도적을 막기 위해 조직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뒤 몽고와 전쟁이 시작되자 여기에 신의군을 합쳐 삼별초로 만들고 전투에 투입하였다. 따라서 삼별초의 성격을 밝히기에 앞서 야별초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도적과, 도적을 막기 위한 경찰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있었다. 하지만 도적의 성격은 시대에 따라 달랐고, 여기에 ‘도적의 사회사’ 가 있다. 최우가 야별초를 두어 막으려 했던 도적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이들을 막기 위해 따로 군대를 설치했을 정도라면 당시 도적의 기세가 대단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때 특별 군대를 만들어야 할 만큼 도적이 많아진 이유는 무엇일까? 무인정변 이후 지배층의 수탈이 더욱 심해지고, 한편으로는 집권자들이 권력쟁탈전에 급급한 나머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이완되자 백성들이 그 틈을 이용하여 항쟁하였다. 망이. 망소이나 김사미. 효심 등은 지배층의 수탈에 대항하여 봉기하였고, 여기에는 그 지역 주민들의 열렬한 호응이 있었다. 그러나 1196년(명종 26) 에 최충헌이 집권하여 항쟁을 강력하게 진압하자 이전처럼 군현을 단위로 하는 대규모 항쟁을 벌이지 못하고 수십 명 또는 수백 명씩 모여 활동하는 수준으로 규모가 작아졌다. 이러한 사람들을 도적, 산적, 화적 등으로 부를 수 있을 텐데, 당시 사료에는 초적이란 이름으로 많이 등장한다. 최우가 야별초를 만들어 진압하려 했던 것도 바로 이들이었다. 즉, 야별초가 상대했던 도적이란 그저 남의 물건이나 훔치는 좀도둑이 아니라 지배층의 불법적인 수탈에 저항하던 백성들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삼별초의 모체가 된 야별초의 반민중적 성격이 있다. 더욱이 삼별초는 무인정권의 핵심적인 군사력이었다. 최우가 야별초를 조직한 뒤로는 거의 집권자의 사병처럼 이용되어 백성들의 항쟁뿐 아니라 정적을 제거하는 데에도 동원되었다. 그 대가로 이들은 녹봉도 다른 군인들보다 더 많이 받고 권력자로부터 보너스도 두둑하게 지급받았으며, 진급에서도 특혜를 누렸다. 몽고와 전쟁이 시작되자 항몽전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이들의 본래 역할은 최씨정권을 안팎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는 일이었다. 현대 한국사회를 조금이라도 의식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이라면, 국가 안보와 정권안보를 구별해야 한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하리라 믿는다. 최씨정권, 대몽항전을 정권유지에 이용하다 1231년(고종 18) 몽고의 공격이 시작되자 고려는 총력을 기울여 맞섰다. 전반적인 열세 속에서도 구주(평북 구성), 자주(평남 순천)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충주에서는 성을 지킴으로써 몽고군이 더 이상 남하하는 것을 막는 데 성공하였다. 특히 이 때에는 경기도 일대에서 활약하던 초적들조차 자원하여 몽고와의 전투에 참전하였다. 이처럼 몽고의 1차 침입에 대한 고려의 대응은 말 그대로 총력적이었다. 몽고군이 일단 돌아간 뒤 고려에서는 항전과 강화의 두 가지 주장이 제기되었다. 최우를 중심으로 한 무인정권은 항전을 주장했고, 문신관료들은 대부분 강화를 희망하였다. 당시 최씨정권의 항전론은 정권 유지책으로서의 성격이 강하였다. 즉, 최우는 몽고와 강화를 하면 자신의 권력이 위협받게 되리란 점을 경계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몽고와의 전쟁 상태를 이용하여 정권을 더욱 안정시킬 수 있다는 정치적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최씨정권은 전쟁 상태를 적절히 이용하여 장기간 지속될 수 있었다. 항쟁론과 강화론의 대립은 일단 강화도로 천도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표출되었다. 그러나 천도와 그를 통한 항전은 최씨정권의 유지와 직결되는 문제였고, 따라서 강화를 전제로 천도에 반대하는 주장이 받아들여지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하였다. 결국 최우가 다수의 반대를 억누르고 천도를 결행함으로써 이제 대몽항쟁은 고려의 국시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천도는 지배층 안에서조차 의견수렴을 거치지 않은 채 최씨정권이 독단적으로 결정한 것이었다. 더욱이 백성들에게는 이 천도가 국왕과 소수 권력자들의 안전만을 지키려는 일종의 배신 행위로 받아들여져 항전에 대한 공감대는 처음부터 매우 취약한 편이었다. 국왕과 정부가 강화도로 들어갈 때 일반 백성들에 대해서는 몽고군을 피해 가까운 섬이나 산성으로 들어가라는 것 말고는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따라서 몽고군의 말발굽에 짓밟힐 처지에 놓인 백성들은 각지에서 생존을 위한 싸움을 힘겹게 벌여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백성들은 끈질기게 항전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고려는 수십 년 동안 몽고와 싸움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피해 또한 대단히 클 수밖에 없었다. 1254년의 경우, 한 해 동안 몽고군에 잡혀간 사람이 무려 206,800여 명이고, 살륙당한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았다. 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전쟁에 지친 사람들이 항재의 대열에서 이탈하여 몽고에 투항하는 사태가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현상은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드는 1253년 이후 점차 많아졌다. 더욱이 강화도의 정부는 육지에 남아 있는 백성들로부터 각종 세금을 평상시와 같이 거두어들였다. 단적인 예로 1256년에는 정부의 무자비한 수탈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몽고군이 이르는 것을 오히려 반겼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몽고, 정부, 민중의 삼각 대립 한동안 뜸했던 백성들의 항쟁도 다시 나타났다. 전쟁 중이던 1236년 경에 전라도 일대에서 초적 이연년 형제가 백제부흥을 내세워 봉기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특히 이것은 몽고군이 전라도 지역에 침입했다 돌아간 직후에 발생하였는데, 전란으로 정부의 통치력이 이완된 틈을 이용하여 일어난 것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고려 정부, 몽고 침략자, 그리고 고려의 일반 백성들이 꼭지점 하나씩을 차지하는 삼각형의 대립 관계를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의 피해가 커지고 백성들이 등을 돌리는 상황에서 강화론이 차츰 힘을 얻기 시작하였다. 문신관료들이 주도한 이 흐름은 일찍이 강화 천도에 반대하면서 큰 나라에 사대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로 조심스럽게 표현된 적이 있었지만, 최우의 항전 의사가 워낙 강경하여 받아들여질 여지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된 지 20여 년이 지나자 문신관료들은 전쟁의 피해를 명분으로 강화론을 적극 주장하였다. 마침 이 무렵에는 항전을 고집하던 최씨정권이 내부의 분열로 약해져 있었고, 여기에 더하여 몽고에서도 요구 조건을 누그러뜨려 결과적으로 강화론자들의 입지가 더욱 넓어졌다. 강화론이 현실적인 정책으로서 설득력을 더해가고, 반대로 최씨정권이 내분으로 약화되어 강화론을 억누를 수 없게 되었을 때, 최씨정권의 몰락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결국 강화론자를 대표하던 문신 유경이 정변을 일으켜 최씨정권을 무너뜨리고 곧바로 강화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정변에 동원된 군대는 최씨정권 말기에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김준이 지휘하는 삼별초였고, 이들은 강화에 반대하였다. 이처럼 강화 이후 고려에는 강화파 문신들과 무인정권의 잔여세력이 공존하고 있었으나, 강화의 대세 속에서 항전을 주장하던 무인정권의 입지는 불안하였다. 더욱이 몽고에 파견되어 친히 강화 교섭을 벌였던 태자가 왕위에 올라 친몽고 정책을 추진하면서 무인정권과 갈등을 빚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인정권 내부에서는 국왕 원종을 폐위하고 몽고와 다시 항쟁하자는 주장이 일어났고, 무인정권 안에서도 강경파였던 임연이 삼별초를 동원하여 김준을 제거하고 이어 국왕마저 폐위한 뒤 재항전의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몽고가 군대를 보내 시위하면서 원종을 복위시키라고 요구하자 곧 굴복하고 말았다. 임연의 원종 폐위는 강화 이후 궁지에 몰리던 무인정권이 감행한 정치적 모험이었다. 한편, 몽고의 도움으로 왕위를 되찾은 원종은 개경 환도를 서두르는 등 친몽고적인 성향을 노골적으로 띠어 갔고, 급기야는 직접 몽고에 가서 무인정권을 종식시키기 위한 군대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원종이 몽고 군사를 이끌고 귀국하여 강화도의 무인정권에게 개경으로 나오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강화도에서 이에 호응하는 정변이 일어나 무인정권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1270년의 일이다. 또 하나의 고려 정부, 삼별초는 무엇을 위해 싸웠나 무인정권의 붕괴는 1170년 무인정변으로 탄생한 하나의 정치체제가 꼭 100년 만에 종식되었음을 뜻하였다. 동시에 그것은 앞으로 외세의 간섭이 전개되리란 것을 알리는 서막이기도 하였다. 그 간섭은 100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전환점에 이러한 변화를 거부하는 움직임으로서 삼별초의 대몽항쟁이 자리잡고 있다. 무인정권이 붕괴되자 무인정권의 주력 부대였던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이에 국왕과 강화파로 구성된 정부는 삼별초를 없애고 명단을 압수하였는데, 이것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어 삼별초의 난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들은 배중손을 중심으로 모여서 새 왕을 세우고 관리를 임명하는 등 개경으로 돌아간 고려 정부와 대립하는 또 하나의 정부를 세웠다. 이어 강화도 안의 재물과 곡식, 사람을 휩쓸어 배에 싣고 진도로 ‘천도’하였는데, 이때 천여 척의 배가 꼬리를 물고 내려 갔다고 한다. 진도에 자리잡은 삼별초 정부는 이듬해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겼고, 그곳에서 1273년까지 고려. 몽고 연합군을 상대로 싸움을 계속하였다. 그 동안 삼별초는 진도와 제주도를 중심으로 남해도 거제도와 마산, 김해, 동래 등 남해안 일대를 장악하였을 뿐 아니라 내륙 깊숙이 나주와 전주, 심지어는 인천 근방까지 진출하여 위력을 떨쳤다. 이 때문에 전라도와 경상도의 조세를 실은 조운선이 삼별초의 수중에 떨어지는 등 개경정부가 막대한 타격을 입었고, 몽고에서도 고려에 이어 일본을 공략하려던 계획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삼별초가 단기간에 세력을 확장하고 여러 해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삼별초의 병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반 백성들의 광범한 지지와 호응이 있었기에 삼별초가 또 하나의 고려정부로 존재하면서 몽고 및 몽고와 결탁한 개경 정부와 계속 항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삼별초가 봉기하자 몇 달 뒤에 경상도 밀양 사람들이 삼별초에 호응하여 개경정부에 반대하는 항쟁을 벌였다. 이 때문에 전라도와 경상도의 조세를 실은 조운선이 삼별초의 수중에 떨어지는 등 개경정부가 막대한 타격을 입었고, 몽고에서도 고려에 이어 일본을 공략하려던 계획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삼별초가 단기간에 세력을 확장하고 여러 해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삼별초의 병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반 백성들의 광범한 지지와 호응이 있었기에 삼별초가 또 하나의 고려정부로 존재하면서 몽고 및 몽고와 결탁한 개경 정부와 계속 항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삼별초가 봉기하자 몇 달 뒤에 경상도 밀양 사람들이 삼별초에 호응하여 개경정부에 반대하는 항쟁을 벌였다. 이와 거의 동시에 개경에서는 관청 노비들이 들고 일어나 몽고에서 파견한 다루가치와 관리들을 죽이고 진도로 들어가 삼별초에 가세하려던 사건이 일어났다. 곧이어 경기도 화성군의 대부도 사람들이 개경 관청 노비들의 봉기 소식을 듣고 섬 안의 몽고군을 죽이고 합세하려다 실패한 일이 있었다. 실제로는 이와 같은 사례들이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기록에 의하면 삼별초의 세력이 왕성해지자 각 지방 사람들이 항복하고 진도에 가서 삼별초가 세운 왕을 진짜 국왕으로 섬겼다고 한다. 사실 당시 삼별초에게 일반 백성들의 호응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진도로 내려가면서 용손, 즉 용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는 고려 왕실이 12대째로 끝나고 남쪽으로 내려가 황제의 서울을 세우리라는 참언을 퍼뜨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삼별초가 민심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만한 강제력이나 시간적 여유가 없던 상황에서 그처럼 백성들이 삼별초를 지지한 것은 자발적인 의사에 따른 것이었다 할 수 있다. 백성들의 입장에서 볼 때 무인정권의 붕괴와 강화파의 승리는 지배층 내부의 권력투쟁일 따름이었고, 몽고와의 강화는 새로운 권력층과 침략자의 결탁이었다. 따라서 전쟁 중에 몽고 침략 및 지배층의 과중한 수탈에 맞서 싸워 왔던 이들로서는 이제 몽고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쳐오고 또 지배층의 수탈이 더욱 심해질 것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다시금 항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전쟁중에 그려졌던 삼각형의 대립 관계가 이제 고려정부. 몽고 연합 세력과 반몽고 세력의 대립이라는 구도로 단순화된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그것이 마침 삼별초의 항쟁 대상과 일치함으로써 그에 호응하는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렇다면 1270년부터 1273년까지 진행된 삼별초의 항전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성격의 항쟁이 섞여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지배층 내부의 정쟁에서 패배한 무인정권의 잔존세력이 일으킨 정치적 반란이고, 다른 하나는 12세기 말 민란의 전통과 대몽항쟁의 전통을 계승한 백성들의 항쟁이다. 이 가운데 역사적으로 의미를 갖는 것은 물론 위의 것이며, 그 의미는 외세의 침략과 그에 결탁한 지배층에 반대하는 백성들의 저항이 폭발적으로 일어난 데서 찾을 수 있다. 사실이 이러하였기 때문에 고려와 몽고 연합군에 의한 제주도 함락은 삼별초뿐 아니라 각지에서 일어난 백성들의 항쟁이 진압된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12세기부터 이어져 내려온 백성들의 항쟁이 외세에 의해 좌절되었음을 뜻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삼별초는 무엇을 위해 싸운 것인가. 삼별초는 무인정권의 무력 기반이었고, 권력 내부의 정쟁에서 무인정권이 패배하자 그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따라서 그 해답은, 삼별초가 떠받들고 있었던 무인정권을 회복하고, 가깝게는 눈앞에 닥친 정치적 보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싸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인정권을 붕괴시킨 세력이 몽고와 결탁했기 때문에 삼별초의 반란이 대몽항쟁의 연장으로 비치기도 하지만, 그것이 무인정권의 앞잡이였던 삼별초의 전력이나 권력 투쟁에서 파생된 정변을 정당화시켜 주지는 못한다. 역사의 심판대에 오른‘삼별초’ 삼별초의 항쟁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다르게 내려져 왔다. 이것이 처음 부각된 것은 1930년대의 일이었다. 당시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던 현실에서 삼별초의 대외항쟁은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 널리 알려질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5.16 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은 결핍된 정통성을 만회할 목적으로 민족 주체성의 확립이란 구호를 내걸었고, 그러한 환경 속에서 삼별초의 대몽항쟁이 다시 한 번 주목받게 되었다. 더욱이 여기에는 고려의 무인정권을 민족적이고 진취적인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군사정권의 상징을 조작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었다. 그러나 외세와 싸웠다는 것만으로 ‘민족적’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무인정권에 기생하며 각종 특혜를 받고 백성들의 항쟁을 억압하는 역할을 했던 군사 조직이 무인정권 붕괴 이후 갑자기 ‘민족적’인 군대로 탈바꿈할 수 있는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최씨정권의 항전론이 국가안보를 위한 것이었는가 아니면 정권유지를 위한 것이었나를 구분했던 것처럼, 삼별초의 항쟁 역시 항쟁의 목적과 동기를 가지고 엄정하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민족이나 민족주의는 21세기를 바라보며‘세계화’를 외치는 오늘에도 유용한 개념이다. 그러나 민중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한 채 민족만을 앞세우다 보면 전체주의나 국수주의 같은 극우의 논리로 빠져들 위험이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삼별초의 예에서 보듯이 반민중적인 존재는 절대로 민족적일 수 없다. 독재자가 표방하는 민족주의 진정한 민족주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가스실에서 만난 친구 작년 겨울 나는 군인이 되었다. 매서운 추위속에서 군대라는 생소한 조직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혼자라는 외로움과 낯선 사람과 지내야 한다는 두려움에 나는 더욱 움츠러들었다. 곧 신병훈련이 시작되었다. 이리 뛰고, 저리 달리고 구르며 나는 조금씩 단련되어 갔다. 그러던 중 어느순간 난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훈련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이었다. 그날은 화생방 교육이 있는 날이었다. 화생방 교육이란 가스를 틀어 놓은 방에 들어가 몇분간 견디는 훈련이었다. 말로만 듣던 가스실에 들어가 직접 체험을 해 보는 것이었지만 학교 다닐 때 수없이 최루가스 냄새를 맡아 본 나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가스실에 들어서자 숨이 턱 막혀왔다.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가슴 속에 불이 붙는 느낌이었고 눈물 콧물이 쉴새없이 흘러내렸다. 문득 지옥이 이런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온 후에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집을 떠난 외로움과 고통으로 나는 더 큰 소리로 울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서 있었다. 그때 누군가 "이거 써"하며 휴지 몇 장을 내밀었다. 기스실에 함께 들어간 이름모를 동료였다. 그 전우는 자기 눈물, 콧물 닦아 내기도 모자란 휴지를 떼어 내게 나눠 주었다. 얼마나 고마웠는지..... 낯선 곳에서 처음 보는 나에게 따뜻함을 전해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 전우를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황득규 님/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64 - '...세계는 정신이다. 그리고 변증적으로 발전한다': 헤겔(1770-1831년) 그때 세계에서는 1804년: 무굴제국, 영국의 보호국이 됨 1825년: 영국,세계 최초의 철도 개통(스톡턴-달링턴) 헤겔 [Hegel, Georg Wilhelm Friedrich] 1770. 8. 27 슈투트가르트~1831. 11. 14 베를린. 튀빙겐의 대학의 세 사람 가운데 가장 늦게 등단한 사람은 나이가 많은 헤겔이었다. 그는 대학을 끝내면서 독일지역에 머물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못해 스위스 베른에 있는 법률가의 집 가정교사로 갔다. 그 곳에 머무는 동안 헤겔은 대학에 있을 때부터 관심이 깊었던 종교문제에 열중했다. 칸트의 종교철학을 읽고 크게 느낀 바 있는 헤겔은 전통적인 신학사상을 이성적이며 도덕적인 방향으로 재정리함으로써 정신계의 어떤 변화가 와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만일 우리 나라의 어떤 학자가 조선왕조 때 유교의 전통을 바꾸어 새로운 정신계를 개척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큰 업적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헤겔은 그러면서 법 및 국제법에 관한 연구도 병행시키고 있었다. 자기보다 연소한 셸링이 대학으로 진출했고 휠덜린이 프랑크푸르트에 정착했는데, 자신만이 독일 밖으로 밀려나온 것 같은 열등의식과 우울함을 느낀 헤겔은 휠덜린에게 독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라도 열어주기를 부탁했다. 그래서 프랑크푸르트로 옮겨 가정교사 일을 보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7년의 세월이 흘렀다. 피히테도 연구해야 했고 동창이었던 셸링의 저서도 꾸준히 공부하면서 점차로 신학보다는 철학에의 길을 되찾기 시작했다. 부친이 세상을 떠나면서 약간의 유산도 상속받을 수 있게 되면서 헤겔은 본격적으로 철학을 위한 정열을 불태울수 있게 되었다. 이 때 헤겔은 섬광과 같은 철학의 한 주제를 깨닫게 되었다. 그가 남겨놓은 메모에는 '...세계는 정신이다. 그리고 변증적으로 발전한다'는 명제가 기록되어 있었다. 이 짤막한 문구는 무한히 크고 많은 뜻을 내포하는 것이다. 칸트가 이성의 철학을 제창했고, 피히테는 그것을 자아의 철학으로 발전시켰다. 셸링은 거기에 자연을 포함시켜 동일성의 철학을 성취시켜 놓았다. 동일성 안에는 이성과 자아는 물론, 자연까지도 포함된 동일성이다. 그러면 그 동일성은 무엇인가? 헤겔은 그것을 정신(Geist)라고 규정지은 것이다. 그러면 그 정신은 어떤 본질을 갖는가? 변증적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셸링이 동일성과 계시의 철학으로 규정한 것을 정신의 변증법으로 대치해놓은 것이다.이렇게 큰 계기를 넘긴 헤겔은 예나 대학에 가 있는 셸링에게 도움을 청했다. 당신의 철학을 뒤따라 공부하다가 어느 정도 자신을 얻어 철학으로 방향을 굳히기로 했으니까 후계자로서 좀 이끌어달라는 청이다. 그 때 셸링은 예나에서 외로운 위치에 있었고, 지나치게 많은 철학교수들이 모여 있는 데서 자신의 뒤를 따를 수 있는 헤겔이 온다는 것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래서 헤겔은 30세를 넘기면서 겨우 시간강사의 자리를 얻어 오래 그리던 대학강단에 서게 된 것이다. 처음의 얼마 동안은 셸링과 공동집필을 하는 연구지를 발간하게 되었는데, 그 대부분은 셸링이 주제와 방향을 잡아주고 헤겔은 집필해서 완성시키는 후배로서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근면과 정열을 겸비한 헤겔은 꾸준히 자신의 철학을 연찬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체계화된 저서가 유명한 "정신현상학"이다. 이 책은 세부분 3권으로 되어 있다. 첫권을 내놓았으나 반응이 없었다. 출판사에서는 더 진행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헤겔은 서둘렀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진격해오는데 인세를 받아야 재정적 곤궁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원고를 끝내고 나니 프랑스 군대가 사열을 받고 있었다. 헤겔이 후일에 말 위에 앉아 있는 세계정신을 보았다고 말한 것이 그 장면이었던 것이다. 헤겔이 "정신현상학"의 서문과 첫부분을 셸링에게 증정하고 격려의 뜻을 받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을 읽은 셸링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거기에는 자시의 철학을 보잘것없는 낡은 것으로 밀쳐버리고 헤겔 자신이 새로운 결정적인 철학을 완결했다는 우월감과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셸링은 마침내 예냐 대학을 떠나게 되었고 그후부터는 헤겔을 라이벌이 아닌 적대심에 가까운 기분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셸링은 죽을 때까지 헤겔에 대한 적대감정을 눅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헤겔은 그런 셸링의 기분을 눈치채지 못하고 살았다. 그런 점에 있어서는 몹시도 둔감한 성품이었다. 얼마 후 헤겔도 예나를 떠나게 되었다. 하숙집 주부와의 불륜의 사랑에 빠져 아들을 얻게 되고, 마침내는 전쟁 도중에 생활고까지 겪으면서 당분간은 교수직이 아닌 다른 직업을 택해야 했다. 17,8세기의 철학자들은 가정을 가지지 않은 이들이 많았으나, 이 삼총사는 모두가 여성문제로 고난을 겪는 스스로의 운명을 만들었던 것이다. 헤겔도 그때 얻은 아들때문에 오래 정신적 고통과 가정적 시련을 겪어야 하는 불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다방의 '레지'는 영어의 'register'에서 온 말 다방에 '레지'가 있지요. 이 '레지'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영어의 lady 가 국어에서 '레지'가 되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영어의 register에서 온 말이지요. 일본에서는 다방에 소위 카운터에서 요금을 '계산하는' 사람이 주로 여자가 했었는데, 이 '레지스터'를 줄여 '레지'라 했습니다. 이 말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그대로 사용된 것입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5장 죽음보다는 철저한 삶을 서양 철학자의 적극적인 삶 동양의 철학가들은 안심입명을 한 탓인지 모두 죽음 앞에서 담담하였다. 그들은 대부분은 정좌한 채 영면에 들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공자와 맹자는 세 살 때 아버지를 잃었으며, 송대의 공자라고 칭했던 주렴계와 장횡거도 어린 시절에 고아가 되었다. 퇴계와 우암까지도 전부 과부의 손에 양육되었다. 주렴계는 56세, 장횡거는 50세, 정명도는 53세, 서화담은 58세로 모두 아까운 50대에 죽고 말았다. 육상산은 54세, 그의 심학을 전수 받은 왕수인은 57세에 폐질환으로 죽었다. 최소한 70은 넘겨 살아야 학문이 원숙하고 자기의 무엇이 나올 수 있지 않겠느냐고 김충렬 교수는 말했지만 그러나 어찌하랴. 토정 선생의 말씀대로 인명은 하늘에 있는 법 인 것을. 그러나 동양의 철학자와는 달리 서양 철학자들은 오래 살았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소식을 생활화하였고 엄격한 섭생법을 잘 지켰기 때문에 볼테르는 84세를 살았다. 실제로 볼테르는 워낙 약골이어서 모두들 오래 못살 것이라고 했었다. 30년도 살기 어렵다고 한 칸트는 80세의 장수를 누렸다. 야스퍼스는 어릴 때부터 협심증과 천식의 불치병을 갖고도 스피노자의 조심 을 좌우명으로 삼았기 때문인지 86세까지 살았다. 조산아로 태어난 홉스나 뉴턴 같은 이도 규칙적인 생활로 자기절제를 잘한 탓에 각각 91세, 84를 넘겼다. 1년도 넘기기 어렵다고 한 데카르트는 허약 체질로 54세까지 살았다. 서양 철학자들의 경우 동양 철학자들에 비해 독신자가 많았으며 훨씬 장수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이들이 대부분 80-90세까지 살았다. 탈레스, 헤라클레이토스, 플라톤, 뉴턴, 존로크, 아담스미스, 벤담, 키에르케고르, 칸트, 니체, 라이프니츠, 데카르트, 쇼펜하우어, 스피노자 등은 독신이었으며, 결혼한 철학자는 희극에 속한다 고 말한 이는 니체였다. 철학자답게 마음의 평정을 중시한 것은 모두 동서양이 같았다. 제자를 위해 마지막까지 수업을 계속한 점도 공통된 모습들이었다. 그러나 고요하게 앉아 죽음을 초탈하는 동양의 도학자나 선사들의 마지막 모습이 정적이라고 한다면 서양 철학자들의 경우는 동적이며, 훨씬 적극적임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생을 긍정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생에 대한 찬사 또한 아끼지 않았다. 에피쿠로스는 72세가 되자 자신의 종말을 예감하였다. 그는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노예들을 풀어주며 친구 미도메데스에게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나는 생에 있어서 행복한 나날을 체험하고 동시에 그것을 마칠 때에 즈음하여 당신에게 이 편지를 써둔다. 오줌이 나오지 않는 괴로움이 자주 엄습하고, 이 고통보다 더 지독한 것은 없을 정도의 설사로 고통받고 있다. 그러나 나의 정신속에는 내가 쟁취할 수 있는 모든 인식을 상기시키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지병인 요도염 때문에 욕탕 속에 들어 앉아 온수욕을 하며 포도주를 마시다가 그대로 숨을 거뒀다. 그러나 이렇긋 정신은 기쁨으로 충만되어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나보다 즐겁고 착한 생애를 지낸 인간이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고 자신에 대해 만족해 하며 죽었다. 20대에 일찍 부모를 잃고 떠돌이로 살면서 나중에는 귀까지 먹었건만 존 로크는 자신의 비문에 이렇게 썼다. 길가는 나그네여, 잠시 그대들의 발을 멈추어라. 여기 존 로크가 누워 있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든지 묻는 이가 있으면 그는 자기 운명에 만족하고 산 사람이라고 대답해 주어라. 노예로 태어난 현자 에픽테토스는 그의 주인에게 고문을 받다가 다리가 부러졌을 때에도 주인님 그렇게 비틀면 부러진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마치 뜰 안의 나뭇가지가 부러진 일 이상으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영 외에는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았다. 가진 것은 없고 절름발이였지만 그는 자기를 가진 것으로 행복할 수 있었다. 소유는 인간을 노예화하고, 존재는 인간을 자유화한다고 믿었다. 비록 노예였으나 그의 80여생은 이러한 평정속에서 생을 즐겁게 보낼 수가 있었다. 파스칼은 병의 고통을 통해서 오관의 쾌락을 끊을 수 있으며, 정욕도 끊을 수 있으나 병은 오히려 환영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언제나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고 있던 칸트는 기쁨에 넘치는 얼굴로 죽는 순간 야! 참 좋다 는 말을 남겼다. 독일의 플라톤이라고 지칭한 슈라이에르마허는 70세가 되어 임종이 가까워지자 부인에게 말했다. 지금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방황하고 있지만 내 속에서는 천국을 즐기고 있소. 이처럼 생을 적극적으로 살고 죽음을 긍정적으로 수용하였던 것이다. 네 살 때 시를 짓고, 작곡을 즐긴 천재 소년 니체. 그는 어려서부터 두통에 시달리고 눈병과 매독으로 고통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삶과 운명을 끝까지 사랑한 놀라운 사람이었다. 그를 실존철학자라 부르며 생의 철학자 라고 부르는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으리라, 비참한 경우를 당하더라도 굴하지 않고 현재의 삶 을 대단히 소중하게 생각하였다. 니체의 후계자로 실존주의 작가인 카뮈는 인간의 운명을 시지프시적 비극에 비유하였다. 시지프스는 산꼭대기에 올려놓은 바위가 아래로 굴러 떨어지면 다시 올려놓아야 하는 벌을 받은 신이다. 영원토록 반복되는 이 고통 속에서도 그는 그런 노력이 허사라는 사실에 대해 아무런 불만조차도 갖지 않았다. 카뮈는 오히려 그러한 순간이 바로 행복하다 고 선언했다. 인생의 행복이란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정 그 자체이듯이 살아 있음의 생 을 강조하려고 했던 것이리라. 참된 철학자는 결코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철학자의 지혜는 죽음에 대한 명상이 아니라, 삶에 대한 명상이다 라고 말한 이는 스피노자였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보다 현실적이며 긍정적이었다. 그래서 행동 반경의 보폭도 크고, 사회에 참여의식도 높았다. 임금이 벼슬자리를 내주며 불러도 쉽사리 응하지 않았던 동양의 도학자들에 비해 서양 철학자들의 사회진출은 매우 진취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결혼을 네 번씩이나 하고 영국 최고 문화 훈장과 노벨 문학상을 탄 러셀은 싸움이 터질 때마다 케네디, 흐루시초프, 주은래 등에게 전쟁방지를 촉구하는 편지를 부지런히 보냈다. 98세까지 살면서 그는 러셀국제전범법정 을 창설하여 명예회장이 되기도 했다. 에딘버러대학의 총장이 된 카알라일, 프라이브르쿠대학의 총장이 된 하이데거, 하이델베르그대학 총장이 된 야스퍼스, 미국교육연맹 총재가 된 존 듀이, 베를린 대학의 총장이 된 헤겔, 프라하대학의 총장인 슈라이에르마허, 칸트는 두 번씩이나 모교의 총장직을 맡았다. 노벨 문학상을 거절한 사르트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베르그송,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슈바이처, 모교의 총장이 된 아담스미스 등. 존 로크, 야스퍼스, 프로이드, 슈바이처, 칼 융 등은 의사였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28. 독일 농민을 배신한 루터의 종교 개혁 역사상의 급격한 변화는 대개 실제 상태와 있어야 할 상태 사이의 간격이 매우 넓을 때 나타나며, 이러한 모순을 종결 짓는 움직임에 불을 붙이는 것이 바로 그 변화의 지도자이다. 중세의 기독교 세계를 분열시키고 근대로 한 걸음 더 다가서게 만든 종교 개혁도 마찬가지였다. 종교 개혁의 도화선이 된 루터는 처음에는 교황청에 직접적으로 대립하겠다는 생각을 갖지 않았지만 사태의 전개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함으로써 종교 개혁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또한 종교 개혁의 와중에서 일어난 반봉건적 농민 전쟁에 대한 루터의 태도는 종교 개혁의 방향을 결정 짓는 역할을 했다. 종교 개혁이 일어나게 된 뿌리는 중세 말 유럽 사회의 전반적인 변화와 맞물려 있다. 봉건제 사회였던 중세는 강력한 중앙 권력이 없이 지방의 유력자(즉 봉건 영주)가 자기 영토에서 입법, 사법, 행정 등 모든 권한을 행사하던 지방분권 체제였다. 이렇게 조각조각 나뉘어져 있던 유럽을 하나로 묶는 힘은 바로 카톨릭 교회였다.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카톨릭 교회는 세속 권력이 분산되어 있는 상황을 이용하면서 자신의 보편적인 교리를 무기로 전체 유럽을 정신적으로 정치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권을 중심으로 하여 중앙집권 국가가 등장하기 시작하자 보편적인 기독교 정신을 내세우던 교회는 그 기반을 상실하게 되었다.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려는 왕은 자기 영토 안에서 교황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 교회에 도전하게 되었고 이에 교황권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카톨릭 교회 자체의 부패도 한몫 했다. 성적자의 타락은 누구의 눈에도 명백한 것이었다. 성직자가 공공연히 매매되기도 했다. 또한 재물에 눈이 멀어 교회 근처에 술집 등 유흥업소를 운영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 종교 개혁은 독일에서 먼저 시작되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독일은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어서 종교 세력이 매우 강한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은 교황청의 좋은 착취 대상이었고 교황청의 젓소라고까지 불렀다. 이러한 상황은 친교황적인 독일 황제 칼 5세(Karl 5, 1519~56) 때 더욱 강화되었다. 그는 전 유럽을 기독교 왕국으로 통일하겠다는 시대착오적 꿈을 꾸고 있던 인물이었고 따라서 로마의 교황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독일의 영방 군주들은 자신들의 독립성이 침해될까 두려워 칼 5세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거기에 교황청으로 흘러들어 가는 돈에 커다란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엄청난 교회 재산을 호시탐탐 노리던 군주들이라 황제의 친교황정책에 반항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후진 지역이었던 독일의 상인과 제조업자들도 교황청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독일 경제를 지배하던 것은 남부 독일의 광산주이자 대금융업자였던 푸거(Fugger)가문이었는데 이 가문은 칼 5세를 후원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금융 대부를 통해 교황청과도 밀착하고 있었다. 이런 푸거 가문에 대한 상인, 제조업자들의 반감은 곧바로 교황청에 대한 불만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이었다. 거기에 농민들도 교회의 착취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리하여 교황, 황제, 대금융업자에 맞서는 제후, 도시상인과 제조업자, 농민이라는 광범위한 세력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어 갔다. 이런 상황에 불을 붙인 것이 루터였다. 작센 지방에서 태어나 법률을 공부하던 루터는 21세에 갑자기 법률 공부를 그만두고 수도사가 되었다. 그 이유는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고 한다. 수도사가 된 루터에게 가장 중대한 문제는 구원에 관한 문제였다. 고민 끝에 루터는 해답을 얻었는데 그것은 신에 대한 신앙과 신의 자비로운 은총에 의해서만 인간은 구제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후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 교수가 되어 자신의 새로운 신학을 전개시키고 있던 루터에게 닥친 중대한 문제가 면죄부 판매 문제였다. 이 면죄부는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지만 중세 말 이후 남용되기 시작하여 교회의 재정적 필요를 충당하는 방편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이에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95개조의 반박문`을 발표했다. 처음에 교회는 이를 중요시하지 않았으나, 그 반박문이 독일어로 번역되고 (원문은 라틴 어) 인쇄술 덕분에 독일 전역에 보급되어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자 사태는 달라졌다. 그리하여 1519년 루터는 교회의 입장을 대변하는 신학 교수 에크(Johann Eck)와 라이프치히에서 공개 토론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에 루터는 자신의 견해가 카톨릭의 교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유능한 신학 교수 에크의 추궁을 받자 정통 교리로써는 자신의 입장을 방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결국 결단을 강요받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신념을 버릴 것인가, 교회를 떠나 이단의 낙인을 받을 것인가? 기로에 선 루터는 교회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는 다시 한번 `참된 신앙이란 오직 성경에 의거한 믿음`이란 자신의 신념을 재확인하면서 이러한 신앙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서는 제후들의 도움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루터는 1520년 <독일 민족의 그리스도 귀족에게 고함> 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독일 귀족들에게 독일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교회의 재산을 몰수할 것을 권고했다. 1521년 루터는 교회로부터 파문당했다. 그리고 황제 칼 5세도 그를 법의 보호 밖에 있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루터는 연방 군주들의 도움으로 은신하면서 라틴 어 성경을 번역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신앙의 근거를 성경에서 찾은 그로서는 모든 이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독일어로 번역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 무렵에 이르러 루터의 종교 개혁은 전국적인 사회 운동으로까지 발전했다. 교회의 압박과 제후의 압제에 고통받고 있던 농민들은 루터의 `신 앞에서의 평등`에 자극되어 대규모 농민 반란을 일으켰다. 독일 농민들은 종교 개혁이라는 갑작스런 사태에서 비롯된 지배자들의 분열과 체제의 혼란을 틈타 자신들의 권리를 자각하고 요구했던 것이다. 1524년 6월 슈바르츠발트 지방의 슈튤링엔에서 발생한 농민 봉기는 순식간에 라인란트트, 슈바벤, 프랑켄, 튀빙엔 등의 남부 독일 일대로 확산되어 갔다. 이 농민들의 봉기는 규모가 매우 컸을 뿐만 아니라 단순한 폭동의 수준을 넘어서 조직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독일 농민 전쟁(1524~25)이라고 한다. 농민들이 내건 요구는 지역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대표적인 것이 슈바벤의 농민들이 내건 `12개조`였으며 그것의 핵심적인 내용은 농노제의 폐지와 10분의 1세 등 교회 수탈을 없애는 것이었다. 농민군 지도자 가운데는 루터의 영향을 받은 젊은 성직자들이 많았는데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토마스 뮌저(Thomas Munzer)였다. 그는 루터의 주장을 종교적인 면에 한정하지 않고 정치,사회적으로 확대시켜 강력한 반봉건 투쟁의 목표를 내걸었으며 일종의 평등한 공산사회 건설을 주장했다. 처음에 루터는 농민들의 무력을 사용한 반란에는 반대하면서도 그들의 요구에 대해서는 동정을 보였다. 그러나 곧 앞서 말한 뮌저와 같은 이들의 지도하에 빈농이 반란의 중심이 되어 기존 질서의 파괴(농노제의 폐지)와 재산의 공유 등을 요구하면서 교회와 수도원을 약탈하는 등 폭력적인 투쟁을 벌이자 루터는 농민들을 비난하고 제후들에게 미친 개를 잡듯이 때려 잡으라고 권고했다. 농민의 아들임을 자랑하던 루터는 농민 전쟁에 대해 냉소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적대적이었다. 루터에게 뮌저와 같은 인물과 폭력적인 반란은 그의 종교 개혁을 파멸시키려는 악마의 소행으로 보였으며 기존 권위와 권력에 대한 복종이 기독교인의 의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각지의 제후들은 이러한 루터의 주장에 힘입어 농민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했다. 이런 루터의 주장과 태도를 보면 그는 영주, 제후, 기사등 지배계급과 한편을 이루고 있었으며 그들의 힘을 빌려 자신의 종교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루터에 대한 농민의 기대는 무너졌고 영방 군주들의 반격으로 농민군은 처참하게 패배했다. 루터의 이러한 태도는 매우 중요한 결과를 가져와 종교 개혁을 기존의 정치 세력에 의존하게 만들었다. 농민 전쟁 이후 루터의 종교 개혁은 제후들의 지원하에 계속되었고 그 대립 양상은 루터 파의 제후 대 교황과 황제의 싸움으로 나타났고 이후 신구 제후간의 투쟁인 슈말칼덴 전쟁(1546~47)을 겪게 된다. 이 투쟁은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종교 화의로 일단락되는데, 거기서 천명된 원칙은 `영역을 지배하는 자가 종교를 지배한다`라는 것이었다. 즉 제후는 자신의 영내의 신앙을 결정할 권리를 가지고 카톨릭과 루터 파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자유를 얻었던 것이다. 따라서 신앙과 개인적 자유는 인정되지 않았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9. 불타는 헐리우드 5) 할리우드영화 수입에 대한 중국 영화인들의 책임 작년에 수입된 할리우드영화 10편은 중국에서 크게 흥행하였다. 이런 와중에 중국영화는 관객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중국 영화인들은 부족한 투자나 영화 제작체제의 미비 등과 같은 객관적이고도 명확한 이유를 들어 이런 현상을 설명할 수도 있겠으나 아직 신문이나 잡지에서 중국 영화인 자신에 대해 철저히 분석한 글을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들도 어쩌면 마음속으로는 더욱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 객관적 원인이 있겠으나 필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에서 분노하고 있다, 첫째. 영화발행체제문제이다. 중국 영화인들은 아직 영화시장과 진정한 접목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인이 그토록 혐오하는 미국인에게 따귀를 한 대 얻어 맞은 꼴로 영화시장을 빼앗겨 버렸다. 그들은 중국시장에 진출하자마자 많은 돈을 챙겨 가버렸다. 그들이 찍은 영화가 훌륭하기만 하면 팔아먹을 시장은 걱정이 없었던 것이다. 둘째, 투자문제이다. 할리우드에서는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여 영화를 만드는데 중국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나에게 그들과 같은 거대한 자금을 준다면 나도 저들과 같이 좋은 영화를 찍을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은 자괴감과 책임회피를 위한 푸념 섞인 호기에 불과할 것이다. 이는 마치 어떤 거지가 '나에게도 그런 기회가 있었다면 재벌이 될 수 있었다'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할리우드에서는 거대한 자금으로 영화를 만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큰 돈을 들이지 않고도 좋은 영화를 만들고 흥행에 성공한 영화도 많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라이온 킹}은 3천4백만 달러를 들여 1억 달러가 넘는 흥행수입을 올렸다. 미국에서 3천4백만 달러 정도는 그다지 큰 투자라고 할 수 없다. 또 고작 9백만 달러를 들인 {데스페라도} 역시 1억달러를 넘는 수입을 올렸다. 제68회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받은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는 겨우 4백만 달러를 투입해 만든 영화였다. 중요한 것은 지금과 같은 우리의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영화를 만들 수있는가 하는 점이다. 개방 이후 중국의 영화인들은 지금까지 없었던 좋은 기회를 맞이 하였다. 그들의 노력으로 중국영화 역시 한발 한발 세계를 향해 진출하고 있다. 이것은 정말 기뻐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이런 즐거움 속에 중국인들은 다소의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중국영화는 왜 항상 과거만 그려내고 있는 것일까? 이는 중국 감독들이 애써 외국인의 구미에 맞추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단언하기도 어렵고, 과거를 해부하는 것이 지금의 중국을 크게 계도하지 못한다고 잘라 말하기도 어렵다. 나아가 중국의 영화제작자들이 변화는 중국인의 심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고 말하기는 더더욱 어려울 것같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중국 영화인들은 누런 흙과 다 해어진 옷을 아름다운 영상으로 찍어내는 방법만은 잘 알고 있으며 이에 상웅하여 중국문화 속의 찌꺼기들은 더욱 추악하고 심지어는 사악하게까지 그려진다는 것이다. 중국 영화인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우리는 일찍이 이러하였고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일 뿐. 우리는 지금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이 없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중국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할리우드영화는 폭력적이든 비폭력적이든, 훌륭하든 조잡하든 간에 모두 현재 미국인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제공하고 있다고는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실제로야 어쨌든 미국정신 속에 배어 있는 용감하고 투쟁적인 개인 영웅?주의를 불러일으키려 하고 있고, 혹은 생활방식이나 생존환경 심지어는 극단적 퇴폐경향까지도 일깨우려 하고 있기는 하다. 이것이 바로 중국영화와의 차이점일 것이다. 중국 영화인들도 이에 대해 백 배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부족하다. 중국영화 중에 현재의 시점과 가장 가까운 때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바로 장원)의 {햇빛 찬란한 날}이다. 이 영화는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을 배경으로 한다. 할리우드의 대작 10편이 중국인들을 다시 영화관으로 끌어들였다면, 중국인들은 지금 현실적이고 감동적인 국산영화들을 기다리고 있다. 만약 10편의 대작이 다시 수입되어 국민들이 역시 이 영화들만 본다면, 이는 국민들이 할리우드영화만을 좋아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국산영화 중 볼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 된다. 안일하게 과거의 동굴 속에 틀어박혀 무슨 새로운 보물이라도 끄집어 내려 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에서 얻어지는 것이 새로운 것일 수도 없고 그저 낡은 것을 새롭게 보는 것뿐이다. 옛것에 연연하는 것은 쉽게 노쇠하게 만들 뿐이다. 과거에만 얽매여 있고자 하는 것은 병폐이다. 10편의 대작들이 중국 영화시장을 침범했다고 원망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사실 겨우 10편일 뿐 아직 마구 쏟아져 들어온 것은 아니지 않은가? 단지 국민의 시각을 자극하고 충격을 줬을 뿐 아직 그들의 사상까지 침투해 들어오지는 않았다. 중국 영화인들도 중국문화의 우수한 면을 이용해 지금 중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만들어 관객을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중국의 생각을 국민에게 전달하고 국민들 스스로가 비교하고 생각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중국 영화인들은 중국문화를 널리 알리고 문화말살에 대비해야 하는 또다른 측면의 가장 중요한 책임을 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미국 의회를 존경하는 중국원숭이의 보고 . 존경하는 의원 여러분. 일찍이 중국원숭이에 불과했던 저에게 발언할 기회를 주신 여러분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솟구치는 기쁨과 행운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실험의 결과로 저는 이미 모든 체모를-실은 모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아직 은밀한 장소에는 몇 개 남아 있거든요-없애고 여러분과 똑같은 하얀 피부를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저의 따라지 근성이 자꾸 나타나는 걸 보니-이것은 제가 나중에서야 조금씩 깨닫게 된 것이지요.지금은 아주 부끄럽게 생각합니다-완전히 없애 버리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이것은 시간이 좀 필요한 것이지만 저는 최대한 이 시간을 줄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께서는 관련기구에 더 많은 비용을 내셔서 저를 철저하게 백인으로 바꾸는 실험이 더욱 빨리 진행될 수 있게 해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가장 좋은 것은 일본돈인 엔화를 내는 것이겠지요. 엔화가 좋다고 하는 것은, 저는 아직 이해를 못했습니다만, 어느 날 실험실의 클린턴 선생이-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가 그곳의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집에 몰래 전화를 걸어서 엔화를 잘 보관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엔화가 달러보다 낫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중국돈인 인민폐를 주지는 마십시오. 비록 앞으로는 엔화보다 더 나아질 날이 있더라도 저는 그저 제 음식과 약물을 중국돈으로 사기가 싫기 때문입니다. 시작부터 돈 얘기를 꺼내는 것이 속물같아 보이시겠지요.하지만 용서하십시오. 저는 저의 동료들보다 더 힘들게 귀하들의 사고방식을 배웠습니다. 저는 특히 귀하들의 홍미거리가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데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로 저에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바로 오늘과 같은 성대한 회의가 그 한 예입니다. 일찍이-'일찍'이란 말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중국의 원숭이였던 놈이 이 나라에 올 수 있었던 것은 제가 그곳에서 박해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혹은 앞으로 저도 잘 알 수 없는 꼬종의-솔직히 말하면 제가 현재 배우고 있는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박해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당시 우리는 숲속의 과일을 언제 따 먹을 것인가에 대해 내일 의논하기로 했었습니다. 그런데 몇몇 동료들이 몰래 먼저 그 과일을 먹어 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회의를 열어 그들을 비판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무리는 갈수록 커지고 과일은 자꾸만 줄어드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논하였습니다. 저는 분명 좀 많은 의견을 내놓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아주 명망있는 한 어른의 질책을 받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당시 저는 아주 멍청했었던 것 같습니다. 하루종일 숲에서 마음대로 기어오르고 내리며 조금도 가공되지 않은 자연의 과일을 실컷 따먹을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깡마르고 키가 큰 뱀대가리가 저를 상자에 넣어 며칠 동안을 어디론가 옮긴 후 귀하들의 나라에 도착할 수 있게 해준 데 대해서는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대로 말해 처음 얼마 동안은 적응하기 힘들었습니다. 대화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둘째 문제였습니다. 저는 조상으로부터 홀로 고독을 참는 성격을 물려 받았기 때문이지요. 이런 천성은 몇만 년을 거쳐 오며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몇만 년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고통을 참으며 공부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몇만 년은 백인이 배를 타고 여러분들이 발 딛고 서 있는 이 땅에 도착한 시간보다 훨씬 긴 시간이 라고 합니다. 원숭이의 근성 중 하나는 움직이길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우매한 저는 우리 속에 저를 가둬 두는 것이 저를 해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아주 위축되었지요. 철창에 구멍을 뚫어보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행동의 결과가 비록 아무 소용없는 것이긴 해도 저에게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히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인간 나라의 자유란 무수한 울타리로 이루어진 것이고 울타리 사이사이로 바깥의 넓은 세계를 환히 내다볼 수 있으나, 그 너비는 나를 도망치지 못하게 하면서도 그렇다고 완전한 절망 속에 빠지게 하지도 않는. 아주 절묘한 치수로 되어 있다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매일 저는 울타리 사이의 틈으로 밖을 바라보면서 간혹 손과 발을 뻗어 바깥의 자유를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차츰차츰 발을 밖으로 내미는 것도 귀찮아지고 작은 공간도 크게 느켜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에게 주어진 작은 공간에 만족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자유에 대한 관심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혹은 우리 속에 멍청하게 갇혀 있는 것 자체가 바로 제가 이해하고 얻을 수 있는 자유였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이런 공간에 멍청하게 있는 것이 저에게는 매우 안전하겠지요. 또한 다른 어떤 것도 이곳에는 들어올 수 없으니 피차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저는 음식을 다른 놈들에게 빼앗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먹을 것이 생기면 품에 안고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빼앗길까봐 쩔쩔 매는 원숭이의 습관도 저에게는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담하게 먹을 것을 그냥 두고 즐기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음식에 대해 몇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처음에는 음식이 목구멍에 넘어가질 않았으나 지금처럼 한 입에 삼켜 버릴 수 있게 되기까지는 고난에 찬 훈련과정이 필요했습니다. 저의 무지한 미각 때문에 처음에는 강력한 저항을 했습니다 너무 저항을 하니까 며칠 동안 아무도 음식을 가져다주지 않았습니다. 우둔한 근성이 단번에 고쳐질 수는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두 번째 음식을 가지고 왔을 때도 저는 여전히 거절했습니다. 기억이 잘 나질 않습니다만 네 번째인가 여섯 번째쯤 되어서야 조금 넘길 수 있었습니다. 허약해진 몸이 저의 미각을 완전히 없애 버렸던 것이지요. 결국 저는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기쁜 일이었습니다. 제가 이 음식들을 한 입에 넣고 그 맛을 음미할 수 있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저의 애당초 우둔한 저항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더욱 불가사의하게 느껴진 것은 이런 음식들이 제가 떠나온 마을을 포함한 모든 지역으로부터 전면적인 거절을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떠나온 그곳에서는 과일나무를 빨리 자라게 하는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이 사실은 직접 과일을 먹기보다는 과즙을 즐기시는 여러분들을 무척 놀라게 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여러분들께서는 과수가 성장하는 데 필요한 원묘공급을 중지하도록 결정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곳의 과수들은 여전히 잘 자라고 있으며 점점 더 무성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여러분들이 계속해서 그들의 과실을 따가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들의-제가 '우리들'이라고 한 데 대해용서하십시오. 비록 저는 아직 완전한 사람, 특히 백인이 되지는 않았지만 제 마음 속으로는 저 자신을 여러분의 일원에 넣고 있습니다-과즙을 생산하는 기계의 연료가격이 다른 지역 사람들에 의해 올라갔습니다. 정말로 여러분을 화나게 하는 일입니다. 인류는 정말 원류 보다 위대하더군요. 여러분의 친구들은 참으로 많더군요. 하룻밤 새에 그들을 모조리 포위해 버렸습니다, 그곳은 어떤 것도 자라지 않는 곳이니 그들을 굶길 수도 있겠고 또 어떨 때는 좀 강경한 조치를 취할 수도 있겠지요. 심지어는. 뭐라고 할까요, 제가 아직까지 여러분들의 말을 완전히 배우지 못해서 적당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제가 과거에 머물렀던 그곳의 표현으로 하자면 패도를 부린다고 할까요. 그렇다 하더라도 뭐 별 것 있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실 과즙이 없는데 그 고통을 어찌 참으시겠습니까? 듣자하니 그곳에서는 배가 고파 말도 할 수 없을 지경이라고 합니다. 요리조리 잘 요리하고 계속 굶겨 그들이 저와 같이 변해 버리는지 두고 보시지요. 제가 사소한 일로 여러분들의 귀를 소란스럽게 한 것 같은데 용서하십시오. 말을 다시 돌리겠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 있다 보니 저는 확실히 형편없는 게으름뱅이가 되어 심지어 생각하는 것조차 어렵게 되었습니다, 사람들도 저를 이렇게 되도록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변하게 됨으로써 오늘과 같은 성대한 회의에 참석하게 된 것은 피터 우라고 불리는 동지의 덕택입니다.피터 우가 실험실에 와 검사를 받을 때 우리는 서로 알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도 내가 있었던 그런 우리 속에 갇혀 본 적이 있더군요. 그는 현재 어느 곡마단에서 요리조리 요령을 피우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곡예를 아주 좋아한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어투는 내가 아주 부러워할 만큼 자신에 차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피터 우를 남미원숭이와 교배시켰는데 그의 새끼가 생식능력이 없어 검사하려 온 것이었습니다. 불량잡교에 해당하는 것이었지요. 이곳에는 이런 문제가 아주 많다고 하더군요. 그는 내가 부러워할 만한 어투로 '너는 배워서 좀 총명해져야 해. 그렇지 않으면 너는 영원히 원숭이로 남을 뿐이야. 그것도 중국원숭이로'라고 훈계하듯 말하였습니다. 그의 말은 나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나는 아주 오랫동안 어떻게 하면 원숭이를, 특히 중국원숭이를 면해 볼까 하고 깊이깊이 생각 했습니다. 나에게 이 문제는 정말 어렵고도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무지에서 오는 장애요소들을 극복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간단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 하나를 끝내 알아내었습니다. 그것은 먼저 원숭이처럼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원숭이가 어떤 모습인가 하는 것이 또 문제가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물도 없고 동료도 없었습니다. 저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미워하기 시작 하였고 스스로 원숭이가 되었던 무지함을 미워하기 시작했습니다. 문제가 해결된 것은 완전히 우연이었습니다. 백방으로 생각해도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털을 힘껏 쥐어뜯어 보았더니 한가닥 한가닥 빠지기 시작하더군요. 이것은 실험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주의를 끌게 되었고 그들은 저를 에워싸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털이 빠진 부분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하얀 피부가 드러나 보였습니다. 저를 둘러싼 사람들의 피부와 너무나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제 가슴 속은 상상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저는 죽을 힘을 다해 마구 털을 잡아당겼습니다. 그러나 빠지지 않는 곳도 있었습니다. 마구 뽑던 중에 불현듯 '그래, 나도 사람이 될 수 있어'라는 생각이 저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들께서도 상상하실 수 있겠습니다만, 저는 사람으로 변신하기 위한 기나긴 과정을 밟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 저는 그저 사람의 행동거지를 모방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지혜나 지식이 사람이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껴져 자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저의 이런 우려는 별 것 아님을 느꼈습니다. 이 나라 인간들의 사물에 대한 판별력이 그렇게 심오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의 사물에 대한 견해는 제각각 다르고 이런 견해도 일순간에 바뀌어 버리기도 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저는 각자가 좋을 대로 놀아나는 것이 가장 좋은 원칙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것쯤은 원숭이에게는 누워 떡먹기로 쉬운 것이고 하늘이 내려 준 기회였지요. 그러나 이 시점에서 제 몸의 변화는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습니다, 그들은 저를 더욱 넓은 공간에 놓아두고 연구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입니다. 몇 년 간 무리를 떠나 혼자 지내온 제가 한 마리 원숭이로 돌아가 살아갈 수 있을지 혹은 동료들이 지금의 저를 받아들일지 연구하는 것입니다. 이 결정은 저를 미칠 듯이 기쁘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억눌려 왔던 것들을 해 보았습니다. 목청껏 소리를 질러대기도 했고 이를 악물고 다른 동료들을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그들이 먹는 음식에 똥을 던져 넣기도 했습니다. 여럿이 보는 앞에서 서아시아원숭이와 사랑을 하다가도 동아시아원숭이의 유혹에 넘어가는 척 해보기도 했습니다. 내 것을 챙기지 못하게 하는 그런 바보들을 실컷 때리기도 하였습니다. 나를 가장화나게 했던 것은 바로 그 동아시아원숭이입니다. 자기가 먼저 나를 유혹해 놓고서는 나에게 손도 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매번 내가 화를 낼 때마다 애교를 떨어 감싸주길 바라면서 몰래 음식을 흠쳐 나에게 주곤 하였지요. 몇 번 그런 일이 있은 후 저는 그가 훔쳐 왔다는 음식이 바로 제것이었음을 알았지만 그녀를 보호해야 한다는 마음 때문에 그녀를 용서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마구 놀아난 결과 저의 행위가 점점 사람의 그것과 닮아 간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저의 이런 행위 자체가 기본적으로는 사람의 행위였는지도 모르지요. 설사 제가 철창을 사이에 두고 사람들과 지낸 것이긴 하지만 인류사회로부터 귀로 듣고 눈으로 본 좋은 습성과 인류사회로부터 배운 우월감으로 저는 눈 앞에 보이는 우매하고 더러운 동료들을 경멸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갖가지 교묘한 수완도 다 배우게 되었습니다. 만일 어느 원숭이 무리가 나에게 불리할 것 같은 데도 직접 대항하기가 어려우면 선동하거나 적절하게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등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여 그들을 분열시켰습니다. 그런 다음 만만한 원숭이 하나를 골라 실컷 때려주어 일벌백계의 효과를 얻는 것입니다. 저에게 선동딩한 무리들이 서로 치고 박기 시작하면 저는 또 어쩔 수 없이 해결사 노릇 을 하게 됩니다. 물론 진짜 해결사 노릇을 하는 것은 아니고 적당히 주물러 이전과 같이 서로 잘 지낼 수 없도록 작은 모순을 남겨두는 것이지요. 사실 그 늙어빠진 원숭이 왕도 제가 갈아치울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 냥 두었지요. 그 늙은 왕은 내 말을 아주 잘 들어 주었기 때문에 그냥 두는 것이 오히려 일을 하기 좋았거든요. 만약 그가 내 말을 잘 듣지 않았더라면 좋은 식사를 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어쨌든 저는 원숭이 무리에 던져지게 되어 알게 모르게 지도자의 능력을 기르게 되었고 인류와 한 발자국 더 닮아가게 된 것입니다. 저의 탁월한 행동때문에 저는 영광스럽게도 다른 실험에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들 인류사회에서 볼 때 어떤 결함이 있는 사람들, 예를 들면 선천적으로 말을 못하는 사람. 하루종일 '나는 이번 선거에 출마할거야, 나는 출마해야 해'라고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과 함께 별난 곳에서 매일 똑같은 음식만 먹으면서 다른 사람의 명령에 따라 각종 기기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것입니다. 이즈음 제가 가장 싫어했던 것은 사람들이 툭 하면 솔잎 같이 생긴 뾰족한 물건으로 제 피부를 찔러 몸 속의 액체를 빼 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저를 무척 놀라게 하였습니다. 또 어떤 때는 번쩍번쩍 빛나는 물건으로 내 눈을 비추기도 하여 잠시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만든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인간이 되기 위해 꾹 참았습니다. 결국 저의 인내는 헛되지 않아 몸에 붙어 있던 마지막 털 하나가 빠졌을 때 저는 너무 기뻐 목이 터져라고 소리질렀습니다.저는 '나는 이번 선거에 출마할거야,나는 출마해야 해'라고 소리질렀습니다. 비록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몰랐지만 있는 힘을 다해 목청껏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여기 온 이유입니다. 여러분, 제 마음 속에 요동치는 생각들을 여러분은 아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과거의 세월들 을 되돌아 봅니다. 모든 것이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떠오릅니다. 인간으로 변하기까지는 길고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면 매우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제 피부가 개같이 재수없는 검은 색이나 황색이 아니고 뽀얀 색인 것을 엄청난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아! 정말 행운입니다. 너무 흥분되어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끝으로 저의 억제할 수 없는 흥분과 여러분에 대한 최고의 경의를 다음 물음으로 대신할까 합니다. 여러분들도 저와 같은 과정을 거쳐 변해온 것인지 저에게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플린턴을 존경하면서.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잘려진 바지 날씨가 제법 쌀쌀해지기 시작한 늦가을 밤. 아파트 공사장에서 일하는 이씨는 그날 일을 끝내고 함바집에 들러 밤늦게까지 막걸리를 한 잔 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노점상에서 작업복 바지를 하나 샀다. 낮에 공사장에서 바짓가랑이가 못에 걸려 길게 찢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내일 일할 생각은 안하고 왜 이렇게 늦었어요?" 대문을 열어준 이씨의 아내가 피곤해 죽겠다는 듯이 손으로 입을 가리는 것조차 잊은 채 하품을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서울로 파출부 일을 나가는 그녀는 밤 10시만 넘으면 쏟아지는 잠을 잘 이기지 못했다. 이씨는 그때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노모에게 인사를 하고 얼른 바지를 아내에게 내주었다. "여보, 나 오늘 작업복 바지가 찢어져서 새 바지를 하나 사 왔어. 내일 입고 갈 수 있도록 바짓단 좀 줄여 주지 그래." 그러자 이씨 아내의 목소리가 커졌다. "아휴,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바짓단을 줄여 달라고 그래요? 우선 잠이나 좀 자요. 정말 피곤해 죽겠단 말이에요. 내일 다른 걸 입고 가면 되잖아요." "아, 참 그래, 그러지." 이씨는 아내가 몹시 피곤해 하는 것 같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도 피곤을 이기지 못해 씻는 둥 마는 둥 하고는 곧 곯아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씨의 아내는 잠을 자지 않고 남편이 사 온 바지를 집어들었다. 솜에 물이 배듯 온몸에 잠이 쏟아졌으나 아무래도 남편이 내일 새 바지를 입고 가는 게 좋겠다 싶어 애써 바짓단을 줄여 놓았다. 그 뒤 새벽 1시 무렵이었다. 노처녀인 이씨의 동생이 그때까지 잠을 자지 않고 있다가 살짝 마루로 나와 오빠의 바짓단을 줄여 놓고는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또 새벽 5시, 이씨의 노모가 일어나 살그머니 아들의 바짓단을 줄여 놓고는 산에 약수를 뜨러 나갔다. 그날 아침, 이씨의 아내가 이씨한테 그 작업복 바지를 내놓았다. "오늘 이 바지 입고 가세요. 어젯밤 당신이 곯아떨어지고 난 뒤에 내가 바짓단을 줄여 놓았단 말이에요." "야아! 역시 당신이야." 이씨는 어머니라도 볼세라 재빨리 아내의 뺨에 살짝 키스를 했다. 그리고 바짓가랑이 속으로 얼른 다리를 집어넣었다. 그 바지는 이씨의 복숭아뼈 위에까지 바짓단이 성큼 올라와 있었다. 글터 → 이글저글 비가 오면 나비는 풀잎이나 나뭇잎 사이에 숨어서 피한다. 빗방울이 떨어져도 굴러 떨어져서 몸 속으로 흡수되지 않게 되어 있다. 하지만 폭우가 몰아치면 살아남기 어렵다.나비는 체온이 27℃ 이상일 때만 날 수 있기 때문에 낮에 날아 다닌다. 하지만 나방은 밤에 날아 다닌다.우주선이 지구의 중력에서 벗어나려면 1초에 11킬로미터, 한 시간에 39,600킬로미터의 속도로 날아야 한다.여름이 겨울보다 더운 이유는 태양이 지구와 더 가깝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태양은 여름보다도 겨울에 지구와 4,800,000킬로미터 더 접근해 있다.해왕성에서는 켤코 생일을 맞을 수 없다. 그 곳의 1년은 지구의 165년과 같기 때문이다.명왕성의 온도는 영하 300℃이다. 그 곳은 지구에서 하도 멀어서 우리가 하루에 1,600,000킬로미터를 달린다 해도 10년이 걸려야만 도착할 수 있다.46억년 전에는 달과 지구의 거리가 현재의 반 정도인 217,000킬로미터밖에 되지 않았다.화성에는 태양계에서 가장 큰 화산 올림푸스가 있는데, 밑변 지름이 480킬로미터, 높이가 21,000미터이다.금성은 공전하는 방향으로 자전하지 않는 유일한 혹성이고 온도는 450℃가 넘는다.지구는 1초에 29킬로미터 속도로 여행하면서 태양을 한 바퀴 도는데 1년이 걸리고, 태양은 1초에 240킬로미터 속도로 은하계를 도는데 225,000,000년이 걸린다.1862년 미국의 천문학자 앨번 클라크가 망원경으로 처음 발견한 아주 작은 난쟁이 별 시리우스B에서는 성냥 한 갑의 무게가 50톤이나 나간다.별은 자기 스스로 열과 빛을 발하고, 혹성은 별보다 작고 딱딱한 고체로서 빛과 열을 내지 못한다.지구는 총알보다 8배 빠른 107,000킬로미터 속도로 태양을 한 바퀴 도는데 365일 6시간 9분 9.54초 걸린다. 지구가 1년 동안 달리는 거리는 958,000,000킬로미터나 된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