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첫쪽 ♧……………독서편지 T기본글꼴 기본글꼴✔ 나눔고딕✔ 맑은고딕✔ 돋움✔ ✔ 뷰어로 보기 2006.11.21 14:13 【독서편지】: 제 66 호 風磬 조회 수 10,183 추천 수 15 댓글 0 게시물 주소복사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독서편지】: 제 66 호4339.11.21 (10.01)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용량제한으로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 않보이시는 분은 저의 블로그 또는 아래의 링크를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문학소식 글터 → 명언 / 격언 기억이란 우리 모두가 지니고 다니는 일기장. /M.H. / 마크 트웨인 글터 → 수필 내잠 속에 비내리는데 - 이외수 방생 전날 낚시춘추 로부터 전화를 받고 나는 저으기 흥분했었다. 혹시 낚시라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려는 것이나 아닐까 하는 기대감에서 였다. 그러나 아니었다. 내게 주어진 임무는 소양호를 다니며 그 풍경을 글로 묘사하는 일이었다. 낚시춘추 에서는 이미 내 낚시 실력이 형편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경력이라야 3년 정도. 조사 소리를 들으려면 한참 공부를 더 해야 되는 솜씨였다. 낚시를 배우려면 무엇부터 해야 하느냐고 동석한 낚시광들께 여쭈어 보면 당신은 우선 밥하는 것부터 배우시오, 라고 말할 정도니 기초가 전혀 안 되어 있다는 뜻이리라. 낚시대를 한번 휘두르면 아직도 뒤에 있는 나무를 낚거나 떡밥이 채목표 지점에 가기도 전에 떨어져 버리거나 바지 가랭이를 꿰어 나 자신을 낚기 일쑤이니 도대체 어느 세월에 고기를 낚겠는가. 하지만 나도 낚시를 좋아해서 틈만 나면 기를 쓰고 낚시를 떠나곤 한다. 내가 사는 춘천은 앉으면 조사의 자리, 일어서면 월척이라는 말도 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소양호는 유명하다. 요즘은 향어가 그 우람한 모습으로 수면을 뒤채면서 자주 끌려 나와주는 바람에 꾼들 사이에는 쉬쉬하면서도 벌써 소문이 다 나버렸고, 소양호를 찾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다. 나는 약간 서운하지만 낚시춘추의 주문대로 낚시 도구 대신 필기 도구를 지참하고 배를 탔다. 화창한 날씨였다. 하늘에는 청량한 햇빛에 잘 세척되어진 구름들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바람도 불지 않았다. 그러나 덥지도 않았다. 사방이 온통 산과 물뿐이니 더울 턱이 없었다. 공기가 하도 맑아서 숨을 한번씩 들이쉴 때마다 혈관 속이 다 투명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배가 선착장을 떠난 지 채 5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문명의 흔적은 아무데서도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삼림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는 산들이 호수 속에 허리를 담근 채 여기저기 솟아 있었다. 마치 원시 시대로 되돌아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갑자기 부끄러움을 느꼈다. 도시에서 내가 먹고 살기 위해 발버둥치면서 살아온 일들이 모두 부끄럽고 치사하게 생각되어졌던 것이다. 배를 타고 한참을 가다 보니까 조사 한분이 낚시대를 펴놓고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저건 외지 사람이다,라고 나는 판단했다. 모두 네 대의 낚시대를 펴놓았는데 우산살형으로 펴놓았던 것이다. 춘천 사람이라면 그렇게 펴놓지는 않는다. 거의가 다 젓가락형으로 나란히 펴놓는다. 우산살처럼 펴놓으면 찌가 지그재그로 위치하게 되지요. 그래서 잘못하면 두 칸 대 찌에 입질이 왔는데 두 칸 반대를 잡아채는 수가 있습니다. 젓가락 형으로 나란히 펴놓으면 대수에 따라 차례로 찌가 위치하기 때문에 그런 실수는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낚시란 참으로 오묘하다. 물속에 물고기가 지천으로 헤엄쳐 다니는데도 조건이 조금만 맞지 않으면 절대로 물려 주지 않는다. 어느 과학자가 연구한 바에 의하면 물고기의 지능지수는 0.4이고 기억력은 3초밖에 안된다고 한다. 그런데도 지능지수 100이 넘고 기억력이 몇십 년으로 계산되어 지는 인간이 빈번이 당하는 것을 보면 지능지수나 기억력만으로는 안되는 모양이다. 어떤 사람들은 떡밥이나 원자탄을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만들어서 매답니다. 초보자죠. 사람도 돌을 먹으라고 해보세요.먹겠습니까? 안 먹는다. 돌을 먹어서 무슨 보람이 있으랴. 물고기도 마찬가집니다. 그런데도 돌덩어리처럼 딱딱하게 매답니다. 건져 보면 그대로 매달려 있을 때도 있습니다. 혹시 떨어져 버리고 안보이면 고기가 따먹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입질이 없으면 고기만 욕합니다. 남의 살을 상하게 하려면 자기 살이 그 만큼 상해야 합니다. 즉, 그만큼 피땀을 흘려야 한다는 얘기죠. 질퍽질퍽하게 반죽을 해서 낚시 바늘에 매달고 사뿐히 목표지점에 던지는 거 하루이틀에 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아는 어느 조사님의 얘기다. 나는 잠시 후 호림수산이라는 향어 양식장 부근에다 배를 댔다. 두 명의 조사님들이 낚시질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내려서 보니 장애물이 심한데 포인트를 잡은 걸 보니 보통 낚시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망을 들여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자태도 늠름해 보이는 향어들이 어망 속에서 푸드득 거리고 있었다. 어린애 팔뚝만한 누치도 몇 마리 보였다. 이 일대는 모두가 포인트인 모양이었다. 맞은편 섬에도 좌우측 섬에도 받침대를 놓았던 흔적들이 역력해 보였다. 평일날이니까 한가해 보이지 휴일이었다면 아마 앉을 데가 마땅치 않을 정도로 어지간한 자리는 다 차지했을 거라는 게 호림수산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얘기였다. 그런 낚시대 전시장 같은 데서 무슨 낚시가 될까, 그래서 춘천 사람 들은 이렇게 말한다. 밑밥은 토요일, 일요일에 서울 양반들이 다 뿌리 주고 다음날 물고기는 우리가 잡지요. 굳이 남이 앉은 자리 근처에 앉고 싶은 것은 거기가 포인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겠는데 그건 소양호를 모르는 사람들의 얘기다. 아직도 미개척지는 얼마든지 남아 있다. 동양 최대의 로크필드식 다목적댐에 의해서 생겨난 인공댐호이므로 그 면적이 엄청난 것도 동양 최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도를 펴놓고 들여다보시라. 봉의산이 바라다보이는 춘성군에서 내설악이 바라다보이는 인제군에 이르기까지 소양호의 물길이 이어져있다. 아무리 극성스러운 낚시꾼이 많이 모인다 해도 그 방대한 지역에 일일이 다 낚시대를 드리워 보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물고기를 잡기 위한 목적으로만 낚시를 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물고기를 잡는 것만을 목적으로 해서 낚시질을 한다고 치자. 잘 잡혀주면 다행스럽겠지만 하루종일 피라미 한 마리조차도 들지 않을 때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겠는가. 신경질만 나고 부아만 치밀어 오를 것이다. 더욱 스트레스만 쌓일 것이다. 특히 소양호 부근에는 정확한 학명은 모르지만 흔히 배불뚝이라고 부르는 물고기가 있는데 이 놈은 피라미보다도 한결 작은 놈으로서 입질이 간사하기 짝이 없다. 때로는 붕어처럼 노숙하게 찌를 밀어 올리기도 하고 때로는 피라미처럼 오도방정을 떨기도 하고 하여튼 온갖 물고기들의 흉내를 다 내어서 입질을 하는데 배를 꿰어 나오는 수는 있어도 입을 꿰어 나오는 수는 드물 정도로 사람을 우롱하는 데 천재적인 물고기다. 춘천에서 오래 낚시를 공부한 분들은 이 놈이 물려 나오면 자리를 옮긴다. 세력권을 형성하는 물고기로서 이 놈들이 떼거리로 몰려 있는 곳에는 다른 어종들이 거의 얼씬도 안하는 것이다. 입질은 오는데 갖은 기교를 다 동원해 보아도 물리지 않으면 절로 낚시꾼의 인격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래서 낚시꾼은 물고기로부터 매운탕거리를 제공받는 것이 아니라 인격 도야의 기회를 제공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더러 낚시터에 가면 배가 터져 죽은 치어들을 볼 수 있는데 아마도 치어들일수록 낚시꾼들한테 헛손질을 자주 하도록 만든 관계로 어쩌다 걸려 나오면 그 원한을 갚아 버린 흔적이리라. 하지만 그건 낚시를 도라고 생각하는 조사가 할 짓이 아니다. 본디 인간은 자연에서 그 육신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자연에서 살아가는 것들을 먹고 그 육신을 성숙시켜 왔다. 그래서 인간은 죽고 나면 다시 자연에서 살아가는 것들에게 그 육신을 되돌려 준다. 땅에 묻혀 거름이 되기도 하고 곤충이나 물고기들의 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과 영혼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정신과 영혼은 선할 수 밖에 없다. 다만 그것을 망각한 사람들에 의해서 생겨난 여러가지 환경과 조건에 의하여 우리는 변모되어졌을 뿐이다. 낚시는 우리에게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왔음을 알게 해준다. 우리가 자연 속에 몸을 담기만 하면 마음이 유쾌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연이 한없이 그리워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자연 속에 앉아서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되찾아야 한다. 따라서 낚시대를 드리운 바로 그 자리가 도를 보는 자리가 된다. 도를 볼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도에 가까이 접근하려는 자리 정도는 되어야 한다. 굳이 물고기를 잡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면 차라리 원양어선을 타는 것이 좋으리라. 소양호는 산 뒤에 물이 있고 물 뒤에 산이 있다. 산 속에 물이 있고 물 속에 산이 있다. 그 속에 앉으면 어찌 물고기 몇 마리에 연연해 하랴. 보이는 모든 것을 낚으면 그만이다. 그리하여 돌아가는 길에는 세파에 찌들은 자기 자신을 자연 속에 방생한모습을 보면 그만이다. 나는 질마재라는 이름의 만에다 배를 정박시켰다. 산 중턱에 조그만움막이 보였다. 마치 중국 무술 영화에서 주인공이 사부님을 만나 권법을 익히는 장소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 소룡도 없고 성룡도 없었다. 다만 후덕하고 소박한 내외와 할머니 한 분이 살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점심을 먹었다. 마치 향어가 한 마리 생포되어 있길래 그걸로 회와 매운탕을 해서 맛있게 먹었다. 돌아오는 길에 배 위에서 잠깐 잠이 들었다. 소롯이 오는 낮잠, 행복하고 편안한 낮잠이었다. 잠을 깨니 역시 사방이 높고높은 산이요, 깊고깊은 물뿐이었다. 나무들이 짙푸르게 우거져 있고 그 속에 움막이라도 지어 놓고 살면 종신토록 사람들에게 발견되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물길도 마찬가지였다. 골짜기마다 물이 차 있었기 때문에 모두가 물길이었다. 익숙한 사람이 아니면 이쯤에서 배 한척을 준다 해도 도저히 나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곳곳에 받침대를 설치했던 흔적이 눈에 띄었다. 더러 낚시대를 드리우고 무와 공의 자리에 앉아 있는 듯이 보이는 조사님들도 눈에 띄었다. 이따금 끌어내는 낚시대 끝에서 싱싱한 은비늘이 번쩍거리고 있는 광경도 눈에 띄었다. 몇 마리의 백로들이 한가롭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두보가 말했던가. 강물이 푸르니 새 더욱 희어 보인다고. 과연 그렇게 보였다. 백로는 암록색 호수 위에서 눈이 부실 정도로 희어 보였다. 오향리라는 곳에 이르러 배를 정박하고 산사람 하나를 우연히 만났다. 연전에 사냥에 관한 글을 기고하기도 한 낚시춘추 의 독자인데 산중에다 토목 초가삼간을 지어 놓고 살고 있었다. 얼마 전에 직장을 때려 치워버리고 산과 물이 좋아 오향리로 들어왔단다. 역시 후덕하고 소박해보이는 분이었다. 나는 거기서 커피 한 잔을 얻어 마셨다. 그는 되도록이면 오향리만은 낚시꾼들이 몰려오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는데 아마도 도를 모르는 낚시꾼들이 자연의 아름다움에 떡밥칠을 하는 것이 싫다는 뜻이리라. 나는 또 한번 낚시를 하는 것이 고기를 잡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배에 올랐다. 이제부터는 돌아가는 길이었다. 흑염소 몇 마리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다람쥐 섬을 지나 추곡에서 잠시 정박하고 소주 한 잔을 마셨다. 물빛이 더욱 맑아 보였다. 소양호. 아직도 회를 먹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인공댐호. 나는 소주 한 잔을 걸치고 문득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저 문명의 악다구니로부터 방생당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나같이 도가 부족한 사람은 매사 무엇을 낚는답시고 낚시대를 드리워 보지만, 항시 낚이는 쪽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나 자신이 나를 방생할 수 있을 때까지 나는 낚시를 그만둘 수 없으리라는 생각도 했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공경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더냐 - 신안식(건국 대 강사) - 2/2 노비해방의 기치를 든 만적의 야망 노비 만적은 이러한 시대 흐름 속에서 항쟁을 도모하였다. 만적은 노비신분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공경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기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양인이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권력을 잡겠다는 것이었다. 만적이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무인정변 이후 대대적인 문신 살육, 잦은 권력쟁탈로 인한 집권 무인세력의 빈번한 교체, 향촌사회의 지속적인 저항 등 격변했던 사회적 상황에 따른 기존권위의 상실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최충헌의 정변과 그 이후 정변을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더욱더 그러한 모순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 중에서 집권 무인세력 중의 한 사람이었던 이의민의 신분문제가 관심을 끈다. 이의민은 무인정변 때 행동대원으로 활약하여 크게 출세했던 인물이다. 그 과정에서 견제를 받기도 하였지만, 그의 신분이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유독 <고려사> 열전에서는 그의 신분이 노비로 되어 있다. 그의 아버지 이선은 소금과 체를 파는 일을 생업으로 하였고, 어머니는 경상북도 영일에 있었던 옥령사의 노비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의민은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천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천인이면서도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은 키가 8척이고 완력이 남보다 특출하다는 것과 무술을 좋아했던 의종이 배려해서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 이의민의 신분이 노비였는지 아니면 최충헌이 꾸며낸 사실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노비신분으로 집권자가 되었다면 최충헌이 정변을 합리화하는 데 매우 유용하게 이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적의 구호에서도 보듯이 이의민의 출세는 이 시기의 노비들에게는 새로운 희망이었다. 노비의 아들이 권력의 최고 정점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는 사실은 노비들에게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채찍 밑에서 뼈가 으스러지도록 부림을 당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최씨정권은 60여 년 동안이나 유지되었지만, 최충헌정권 초기는 아직 권력이 안정되지 못한 상태였다. 무인정권 안에서도 권력쟁탈은 계속되었고 다른 세력의 도전으로 인하여 언제 권력을 잃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권력쟁탈의 성패는 집권자 한 명의 영욕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 자의든 타의든 그를 따랐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좌우하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서 권력자들의 노비들은 유사시에는 사병이 되기도 하였다. 명종 때 무인정권에서 벌어졌던 여러 번의 정변에서는 국가 공병이 동원되어 성공한 경우도 있었지만 권력자들의 노비들도 실제로 행동대원으로 동원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노비들은 처참한 죽음을 당할 수 있다는 공포를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결국 만적 등의 항쟁은 노비라는 신분 때문에 오는 당연한 불만 외에도, 최충헌이 권력을 장악해 가는 과정에서 오는 죽음의 공포와 육체적 수탈에서 비롯되는 분노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한편 만적의 항쟁에서는 그에 참여한 노비의 숫자가 상당히 많았고, 모의단계에서 노비들을 체계적으로 조직하려고 했던 사실이 주목된다. 만적은 동조하는 자들에게 누런 빛깔의 종이에 ‘정’자의 표식을 주었는데, 준비된 종이가 수천 장에 달하였다고 한다. 거사 당일의 행동방법에 대해서도 만적은, 흥국사에 모여 일제히 북을 치고 소리치면서 대궐의 뜰로 몰려가면 환관들과 관노들이 반드시 호응할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대궐의 환관들이 호응할 것이라는 장담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환관은 궁중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세세하게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합세할 것이라는 것은 항쟁세력을 결집시키는 데에 매우 고무적인 말이었을 것이다. 관노들은 주로 대궐이나 관청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국가의 공공기관을 장악하거나 관리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 유리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만적 자신과 다른 노비들은 최충헌과 자신들의 주인을 살해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러한 계획은 수도 개경의 모든 정치기구를 장악하고 권력가들을 단숨에 제거하여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고자 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들로 미루어 보아 만적의 지도력이 출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항쟁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정변을 일으키기로 약속한 날에 모인 사람이 수백 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적은 인원으로는 정변을 성공시킬 수 없다고 염려하여 거사 날을 다시 잡아 일을 뒤로 미룬 것이 일차적인 화근이었다. 만적은 “신중하지 못하면 성공하지 못하니 절대로 누설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사고는 내부에서 생겼다. 율학박사 한충유의 노비인 순정이라는 자가 주인에게 모의 사실을 고발하였다. 한충유는 이를 다시 최충헌에게 알렸다. 최청헌은 만적을 비롯하여 100여 명의 노비들을 잡아 강물에 빠뜨려 죽였다. 그 나머지 동조한 수많은 노비들을 모두 죽일 수 없었기 때문에 불문에 부쳤다고 한다. 반면 한충유는 합문지후로 승진되었고, 고발자 순정에게는 백금 80냥을 주고 노비에서 해방되는 상이 주어졌다. 재평가되어야 할 노비항쟁 지난 역사 속에서 고통받은 자들에 대한 평가는 어떠하였는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혁명에 성공한 자들은 그에 따른 영광스러운 권력과 부귀를 얻을 수 있었고 역사의 창조자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그에 반해 그들에게 도전하는 자들에게는 ‘반란’이라는 이름 아래 그 실상을 왜곡한 경우도 빈번하였다. 그 속에서 사라져 간 선구자와 추종자들은 역사의 흐름 밖에서 잊혀진 망령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세사회의 모순과 압박을 단숨에 뛰어 넘으려고 했던 많은 이들의 외침은 역사의 흐름 속에 면면히 살아 있었다. 우리들은 역사 속에서 만적을 생각할 때 노비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과감하게 뛰어넘으려 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한다. 왕에서부터 가장 아래까지 사람의 높고 낮음이 분명하고, 그것이 진리이던 시대에 미천한 지위의 한낱 노비가 신분제를 근본적으로 부정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고려왕조 500년 동안 우리는 만적 외에 그러한 인물을 찾아볼 수 없다. 아마도 조선시대의 임꺽정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한다. 만적의 항쟁은 그들이 지향한 이상이 원대하고, 세력의 조직화에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저항보다도 격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실패하였지만 성패를 떠나 신분제 사회를 철폐하려 했던 노력은 높이 평가하여야 마땅할 것이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 그리움을 참으면 별이 된다. -- 보물 찾기 후의 변화 작년 초가을, 내가 근무하는 학원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성깔이 있어 보이는 일곱 살짜리 꼬마가 학원에 새로 들어왔는데, 첫날부터 스케치북에 검은 색 크레파스를 신경질적으로 죽죽 그어댔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아이의 집으로 전화를 했더니, 최근에 재혼했다는 아이의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우리 애가 새아빠에게 적응을 못해 신경불안 증세를 보이고 있어요. 각별히 관심을 써 주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대했지만 그 애는 좀처럼 마음의 문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책상 위에 놓아 두었던 만년필이 없어졌다. 이상하다고 여기면서도 그냥 넘겨 버렸는데 그 뒤로 아이들의 물건이 종종 없어졌다. 새로 온 그 아이들 의심하는 아이들을 나무라면서도 이제껏 이런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나도 자꾸만 그 아이들을 의심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 애의 가방을 들여다본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가방 속에는 내 만년필을 비롯해 아이들의 샤프와 지우개가 수북했다.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아이들에게 지금까지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서 주인에게 둘려주자고 제안했다. 아이들은 마치 보물찾기라도 하는 듯 수선을 피오며 연필도 주워 오고 지우개도 들고 왔다. 그 애도 불쑥 만년필을 내멸며 책상속에서 찾았다고 했다. "고마워. 넌 똑똑하니까 잃어버린 물건도 참 잘 찾는구나." 나는 그렇게 칭찬하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주우면 반드시 주인을 찾아 주어야 한단다. 잃어버린 친구들이 얼마나 속상해하겠니? 남의 물건이 마음에 들더라도 참고, 욕심 내지 않는 어린이가 이 다음에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거야." 고개를 떨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애는 차즘 친구들과 어울리며 명랑해져 갔다. 그리고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수심이 가득하던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모든 일에 긍정적인 방응을 보였다. 놀라운 변화였다. 그 애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좋은 아빠를 만나 너무 행복해요." 그 애가 앞으로도 순수하고 구김살 없이 성장하길 바란다. 임안순 님/경남 창녕군 창녕읍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56 - 경험론의 마지막 완성자: 데이비드 흄(1711-1776) 그 때 세계에서는 1747년: 미국, 보스턴 폭동 1749년: 미국,프랭클린 피뢰침 발명 데이비드 흄 - David Hume 섀프츠베리 가문에서 교육적으로 봉사한 J. 로크의 영향을 받은 섀프츠베리 3세(Lord Shaftebury, 1671-1713)는 로크의 영향을 받아, 학문적 규모와 영역은 작았으나 도덕철학과 미학분야에서 독특한 철학사상을 전개시켰다. 영국인들은 그 당시 그를 대표적인 도덕철학자라고 인정하고 있다. 그는 철학, 윤리학, 미학 등에서 뚜렷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도덕적인 선과 예술적인 미는 일치되는 것이며, 선하기에 아름답고, 아름다움은 선과 통하는 삶의 정서성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도덕적인 선이 이성적인 가치판단에서 탄생되는 것으로 보고 있으나, 사실 선은 감정과 의지의 뿌리에서 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정서적이며 감정과 의지의 일면을 도외시하는 것은 인간성의 중요한 부분을 경시하는 결과가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도덕판단은 취미판단이며, 취미판단은 예술적인 미의 판단과도 합치되는 것이다. 비로소 인간에 있어서의 감정적 요소를 소중히 여기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그리고 도덕적인 판단은 합리적인 사고나 지성적 추리가 아니라, 언제나 직각적인 것이다. 이 직각적 판단은 예술계에 있어서는 언제나 상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를 도덕적 감성철학의 선구자였다고 평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가 있다. 그는 귀족적인 생활에서 고귀한 철학이론을 전개시켜 주었다. 그의 인품과 학문의 일치성을 충분히 엿보게 해 주는 고아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고전의 인문적 교양을 높이 보며 예술적 식견을 갖추고 있었다. 모든 사람의 개성을 존중히 여겨 생의 질을 다양하게 계발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로크의 철학을 새로이 발전시켜 경험주의의 마지막 주자에게 연결지어준 철학자로, 성직에 머물고 있으면서 새로운 철학을 개척해준 조지 버클리(G. Berkeley, 1685-1753)를 잠시 엿보는 것이 영국철학의 정상적인 과정일 것 같다. 버클리는 전체적인 입장에서 토머스 홉스의 유물론적 철학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성직자인 그로서 볼 때는 편중된 철학이며 거부반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모든 지식과 인식이 감각을 통해 외물, 즉 자연적 사물에서만 주어진다면, 그것은 자연과학과 통할 수는 있어도 진정한 철학으로는 미흡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의 학문적 배경과 성장이 그러했던 것이다. 진정한 철학은 밖에 있는 사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관념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철학은 근본적으로 주관적 관념론의 성격을 갖는 것이라고 보았다. 철학적 지식의 대부분, 특히 성직자로서 문제삼을 수 있는 철학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인식은 감각을 통하더라도 주관적 성격을 가지며, 결국은 물적 실체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적 구성을 통해 철학적 사고가 수립된다고 보았다. 정신은 지각내용으로서의 관념을 보존하며 능력을 갖춘다고 생각했다. 로크는 아직도 물적 실체의 실제성을 고려하고 있으나, 그것은 감각의 결합으로 돌리며 오히려 심리학의 과제로 삼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았다. 우리는 흔히 존재라고 부르는 것은 지각에서 얻어진 것이며, 그 지각표상은 우리의 의식기능, 즉 심리작용에서 밝혀져야 한다는 방향전환을 시도했던 것이다.이러한 버클리의 철학이 로크에서 흄으로 안내하는 변화의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버클리는 잠시 미국 프로바던스에 와서 기거한 일이 있었다. 지금도 부라운 대학 부근에 가면 그가 묵었던 집이 남아 있다. 그리 오래 전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고, 더불어 영국인들이 자신의 전통을 소중히 보존하고 있음에 경의를 표하게도 된다. 사람들은 만일 버클리 같은 철학자가 가운데 끼지 않았다면, 경험론의 마지막 완성자이면서 적지 않은 문제를 남겨준 D. 흄이 탄생되었을까 하고 묻는 이가 있다. 그만큼 흄은 로크의 뒤를 계승하면서 버클리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본질적으로는 로크의 계승자였으나 버클리의 방향시정이 적지 않은 보탬이 되었다. 그리고 몇십 년의 세월이지만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철학적 사상의 변천과 발전은 더욱 급속도로 진행되기도 하는 법이다. 버클리는 그 자신이 성직자였던 만큼 그 배후에는 철학의 정신적이며 관념적인 면이 잠재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요소들은 그대로 계승되어갈 성질의 철학이 아니었다 .흄은 버클리를 거쳐 다시 로크의 문제를 새로운 철학으로 발전시켜나간다. 그리고 버클리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흄의 철학을 두고 다시 하늘을 날으려는 뜻을 버리고 땅에 내려앉은 성격의 철학이 되었다고 불만을 갖기도 했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참꽃'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진달래꽃 '참꽃'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진달래꽃을 말하고, '개꽃'은 사람이 먹을 수 없는 '철쭉꽃'을 말합니다. 앞에서 말한 '먹을 수 있는 꽃'과 '먹을 수 없는 꽃'은 진달래를 말씀드리면서 드린 말씀입니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3장 죽음과의 악수 - 3족을 멸문당한 충절 - 성삼문 성삼문 필적 성삼문은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자는 근보, 호는 매죽헌이다. 도총관이던 승의 아들로 홍주 노은동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막 낳으려고 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 하고 세 번 묻는 소리가 나서 삼문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1438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경연관이 되어 세종을 항상 가까이 모시면서 집현전 학사 정인지, 박팽년, 신숙주 등과 훈민정음 반포에 기여하였다. 문종이 죽고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세조)은 어린 단종을 내쫓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예방승지였던 성삼문은 국새를 안고 크게 통곡을 하였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뜻을 규합하여 이듬 해에 단종의 복위를 꾀하였다. 명나라 사신의 송별 연회장에서 운검을 쥐게 된 아버지(승)와 무인 유응부가 세조를 죽이기로 하고, 한명회, 정인지 등의 일파를 제거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연회날, 세조가 갑자기 자리가 협소하니 운검을 그만두라 는 지시를 내린다(운검이란 임금곁에서 큰칼을 들고 경호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그때 유응부를 계획대로 실행하자고 우겼고 삼문은 훗날을 기다리자고 말하였다. 그러는 사이, 모의에 가담했던 김질이 겁을 먹고 밀고하는 바람에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그들은 모두 체포되기에 이른다. 노기 등등한 세조의 심문이 이어졌다. 형틀에 매어진 그에게 갖은 극형이 가해졌다. 쇠가 식었구나, 다시 달구어 오너라. 나으리의 형벌이 과연 참혹하구나. 성삼문은 세조 옆에 앉아 있는 신숙주를 보며 또 호령했다. 전에 너와 함께 집현전에 있을 때 영릉(세종)께서 원손(단종)을 안으시고 뜰을 거니시며 과인이 죽은 후에 너희들은 모름지기 이 아이를 생각하라 하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생생한데 너는 어찌 잊었느냐. 너의 의리를 저버리는 악함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이야 정녕 내 몰랐구나! 무색해진 신숙주를 세조는 전각 뒤로 피하게 하였다. 세조는 유응부를 문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응부도 연회날 내가 창으로써 나으리를 물리치고 옛 임금을 복원케 하려 했는데,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제 간사한 무리의 밀고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만 나으리는 나를 빨리 죽이시오. 하고 말하였다. 극도로 노한 세조는 무사를 시켜 유응부의 살을 깎으며 고문을 가하였다. 광연전에서 나으리를 죽이지 못한 것이 못내 한이다 라고 하면서 같이 잡혀간 성삼문 등 문신을 복 크게 꾸짖는다. 옛부터 서생들과는 도모하지 말랬더니, 내 말만 듣고 그때 칼을 썼더라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오! 유응부는 분개하였다. 이개, 하위지도 단근질로 거의 다 죽게 될 무렵 마침내 처형을 당했고 이개의 두 아들도 죽었다. 경회루에 빠져 죽으려 했던 박팽년도 노량진에서 형을 받아 죽었다. 성균관에서 귀가한 유성원은 사당에 나가 절한 뒤 자결하고 말았다. 성삼문은 단근질로 거의 다 탄 몸을 이끌고 형장 새남터로 끌러나가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북소리 이 목숨을 재촉하는데 돌아보니 지는 해 서산을 넘네. 황천길 주막집도 없을 것이니 오늘 밤 뉘 집 찾아 쉬어 볼까나. 대여섯 살밖에 안된 딸이 울부짖으며 행렬의 뒤를 따라오니 아버지 삼문은 뒤를 돌아다보며 말한다. 사내아이는 다 죽어도 너만은 죽지 않으리라. 그의 부친도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극형을 당했고, 삼빙, 삼고, 삼성 등 세 아우와 그의 네 아들 맹첨, 맹년, 맹종과 갓난아기 까지도 모두 죽음을 당했다. 당시 성삼문의 나의 불과 37세였다. 가족들도 참사를 면하지 못했으므로 누구 하나 그들의 흐트러진 시신을 거둘 수 없었다. 또 관의 눈이 무섭고 법이 지엄하여 일반 사람들은 감히 엄두도 못낼 일이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사람의 눈을 피해가며 그들의 시체를 몸소 거둬 가지고 한강 너머의 노량진에 묻은 사람이 있다. 그는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이었다. 오늘의 사육신 묘 란 표지가 나붙은 자리가 바로 그 장소이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20. 마스터피스(걸작품)의 어원 걸작품 또는 명작을 영어로 마스터피스(masterpiece)라고 한다. 그런데 이 마스터피스의 유래는 중세 길드까지 거슬러올라간다. 길드의 존재가 처음으로 부각된 것은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한 11세기와 12세기로, 또한 이 때는 중세 도시가 성립하던 시기였다. 근거리 교역이나, 요즘식으로 말하면 국제 무역이라고 할 수 있는 원격지 무역에 종사하던 상인들은 봉건 영주가 거주하는 성 주변이나 교통이 편리한 지역에 정착했다. 또 상인들은 자신의 거주지를 스스로의 힘으로 지키기 위해 무장도 하고 성벽도 쌓기 시작했다. 이후 점차 활동의 규모가 커지자 상인들은 길드라는 조합을 만들었다. 이는 공동의 이익과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조직이었는데 자연 재해나 해적으로 인한 상업상의 손실을 보상해 주고 조합원이 죽었을 때는 그 가족의 생활을 책임지기도 했다. 현대와는 다르게 치안 상태가 불투명했던 당시에 서로 돕기 위한 길드야말로 상인들의 생존과 번영을 보장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상인 조합은 중세 도시의 자유와 자치권 획득에도 앞장 섰다. 상인과 더불어 중세 도시 주민의 핵심을 이루고 있던 사람들이 수공업자였다. 수공업자 조합은 상인 조합보다 늦게 만들어졌는데 동일 업종마다 조직되었기 때문에 동업 조합이라고도 한다. 이 동업 조합의 목적은 동업자간의 경쟁을 배제하고 또 다른 도시의 동일 업종 수공업자와의 경쟁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동업 조합은 생산에 대한 독점권은 물론 생산과 판매도 엄격하게 통제했다. 이러한 수공업자 조합의 성격은 개인의 창의성과 자유 경쟁을 완전히 배제한 것이었는데 당시와 같이 공업 생산력이 미약한 단계에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수공업자 조합에는 독립된 작업장과 가게를 가진 장인(master)이 가입했는데, 그는 한두 명의 직인(journeyman)과 또 같은 수의 도제(apprentice)를 두었다. 장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수련공격인 도제가 되어 장인과 함께 생활하면서 일을 배운다. 도제는 한 사람의 독립된 인격체가 아니라 장인의 피보호자였기 때문에 보수는 고사하고 장인의 집안 일까지 도맡아 했다. 그의 유일한 희망은 빨리 기술을 배워 직인이 되고 궁극적으로 한 사람의 독립적인 장인이 되는 것이었다. 평균 7년 정도 장인 밑에서 수업을 마치면 직인이 되는데 이 때부터 장인으로부터 급료를 받으면서 본격적인 기술 연마를 하게 된다. 또한 직종에 따라 견문을 넓히기 위해 각지를 돌아다니는 관행도 생겼다. 직인 생활을 마치고 장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기술을 증명할 작품을 조합에 제출하여 인정을 받아야 했다. 바로 이 작품을 마스터피스라고 한다. 즉 장인의 작품이라는 뜻이다. 이 말이 이후 걸작 또는 명작이라는 뜻으로 변형되어 쓰이게 된 것이다. 14세기까지는 5,6년 정도의 직인 생활을 거치면 장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15,6세기가 되면 상황이 달라지는데 동업자의 수가 늘어나면 경쟁이 치열해질 것을 우려한 장인들이 동업 조합원의 정원을 제한한 것이다. 이로써 장인이 되는 길은 매우 어려워졌고 직인들의 불만은 높아 갔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직인들은 따로 직인 조합을 결성했고 16세기 말이 되면 오늘날의 노동 조합의 파업과 유사한 분규가 적지 않게 발생했다. 여기에다가 엄청난 부를 축적한 대상인들이 도시의 지배권을 장악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장인들의 불만도 높아졌다. 이렇게 동업 조합의 정식 회원인 장인의 작품을 가리키던 마스터피스라는 말은 근대 사회로 넘어가면서 길드의 폐지와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공장제 대량 생산의 대두로 그 본래의 뜻에서 벗어나 걸작품을 뜻하는 한정된 의미로 사용되게 되었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6. '일개 여편네'가 떠들 일이 아닌 인구문제 부록 :한자녀 낳기운동이 모두를 살린다 - 요스키 나가이(中K要介, 일본) 내가 베이징에서 근무할 때 해외청년협력단에 참여한 간호사 한 분이 베이징에 온 지 얼마 안 돼 나를 찾아 온 적이 있다, 그녀는 지방 병원에서의 단기근무를 자원하여 베이징을 떠나기에 앞서 작별인사를 하려 왔었다. 1개월 후 그녀가 다시 나에게 왔을 때는 맥이 완전히 빠져 있었다. 내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녀는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문화충격을 받았어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베이징에서 기차를 몇 번씩 갈아타고 어느 농촌의 병원에 도착했다. 그녀가 빠른 걸음으로 병원에 들어가려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병원문 앞에 쌓인 쓰레기더미에 눈길이 갔다. 그 쓰레기더미 속에는 갓난아기의 시체가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 광경을 보고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중국은 교통사고 사망자의 시체를 현장부근에 며칠 동안 그대로 방치한다고 한다. 완전히 '물건' 취급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을 일본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중국에는 과연 인권이란 것이 없는 것일까? 중국의 인권을 논할 때 중국 인구를 잊어서는 안 된다. 중국의 인구가세계 인구의 6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나서 중국의 인권문제를 논할 수는 없다. 12억 인구를 가진 나라가 통일된 후, 그들에게 주택을 제공하고 배를 채워주는 일은 상상을 초월한 정치적 능력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전체 국민을 배불리 먹일 수 있는 체제를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중국의 인구는 매년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20세기 말에는 원래 예측했던 12억을 훨씬 넘어 13억 이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배제 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인구팽창에 대해 중국은 긴급한 조치를 취해야만 했고,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한자녀낳기정책이다. 미국을 위시한 서구 국가들은 앞다투어 중국의 이러한 정책을 비난하고 있다. 천주교를 신봉하는 나라가 종교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이와 같은 행위는 천륜을 거역하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행위가 될 것이다. 중국의 어느 지방에서는 노동력이 되지 않는 여자아이를 출산할 경우 호적에 올리지 않거나 아이를 내다버리는 참혹한 일이 간혹 발생하고 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일어나는 구미 각국의 비난이 반드시 옳다고 할 수는 없다. 중국에는 중국만의 상황이 있다. 만일 인구 억제정책이 실패한다면 국가가 붕괴위기에 처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곧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모든 사람이 희생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중국은 인구 억제정책을 강력 시행하여 시급히 현대화를 이루고 빈곤에서 탈피해야 하는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다. 덧붙여 삶과 죽음에 대한 견해의 차이도 들 수 있을 것이다.중국인의 관점에서 보면 사체는 그저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그러므로 사체를 확인할 사람이 올 때까지 방치하거나 영아를 버리는 일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 속에는 가치관의 차이가 숨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며 이러한 일로 중국이 인권을 무시하는 나라라고 간단히 단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순한 양과 풀밭 맞대기가 하면 싸움을 하는 젊은 부부가 있었다. 남편은 아내가 늘 순한 양처럼 고분고분하기를 원한 반면, 아내는 남편이 늘 푸른 풀밭처럼 넓고 아늑하기를 원했다. "여보, 제발 순한 양이 좀 돼 봐요." "그럼 당신이 먼저 풀밭이 돼 보세요. 당신이 풀밭이라면 나는 순한 양이 될 수 있어요." "나는 이미 늘 풀밭이야." "나도 늘 순한 양이에요." 그들은 이런 식으로 늘 상대방의 원하는 것이 먼저 되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서로 상대방이 자기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당신도 이젠 나를 좀 사랑해 봐. 사랑을 받으려고만 들지 말고 먼저 사랑할 줄도 좀 알란 말이야." "그런 당신은?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당신이야말로 나를 좀 사랑해 봐요." "허허 참. 난 당신을 사랑해. 우리가 지금까지 이렇게 살고 있는 것도 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야." "하하, 당신도 참, 그건 바로 내가 할 소리예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나마 이렇게 이혼까지 가지 않고 살고 있는 거예요." "여보, 이젠 그런 쓸데없는 말장난을 그만하고, 정말 나를 좀 사랑해 봐. 부탁이야. 사랑을 얻으려면 먼저 사랑을 해야 해. 사랑을 받기만을 원하면 결국 사랑을 잃게 돼. 주지 않으면 얻을 수가 없어." "여보, 나도 정말 부탁이에요. 당신이 나를 사랑하면 그 사랑이 모두 다 당신한테 돌아가는 거예요." 그들의 이런 식의 싸움은 늘 되풀이되었다. 서로 상대방에게 싸움의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고 서로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러자 싸움의 양태가 갈수록 격렬해졌다. 남편이 고함을 치고 욕을 하면 아내도 소리를 지르고 욕을 했다. 남편이 화를 참지 못하고 물건을 내던지면서 아내도 화를 참지 못하고 물건을 내던졌다. 자연히 그들은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갔다. 하루는 그들 사이에 하나의 협상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도중에 누가 "순한 양!" 하고 소리치거나 "풀밭!"하고 소리치면 일단 입을 다물고 더 이상 싸우지 않는다는 협상이었다. 그들은 이 협상을 잘 지켜졌다. 정신없이 한창 싸우다가도 남편이 먼저 "순한 양!"하고 소리치면 아내도 "풀밭!"하고 소리치고는 싸움을 중단했다. 그러나 일단 싸움이 중단되기는 했으나 싸움의 회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그리고 남편이 바라는 대로 '순한 양'과 같은 아내가 되기는커녕 '성난 양'과 같은 아내가 되어 갔으며, 아내가 바라는 대로 '풀밭' 같은 남편이 되기는커녕 '폐허'와 같은 남편이 되어 갔다. 그런데 그들 부부가 사는 아파트 202 동에도 그들과 똑같이 "순한 양!", "풀밭!" 하고 소리치며 싸우는 부부가 있었다. 그런데 그들 부부와는 달리 그렇게 소리치면 칠수록 그들은 정말 '순한 양'과 '풀밭'이 되어 갔다. 갈수록 싸움의 회수도 줄어들고 부부 사이의 금실도 좋아졌다. 그들은 202 동에 사는 부부가 부러웠다. 그래서 한번은 202 동에 사는 부부한테 가서 물었다. "참 이상하군요. 우리 부부도 당신들처럼 싸움을 하다가 '순한 양!', '풀밭!' 하고 소리치는데, 부부 사이가 좋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지기만 합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그렇지 않군요.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러자 202 동에 사는 부부가 빙긋 웃음을 주고받으면서 말했다. "아, 그건, 우리가 상대방에게 무엇이 되라고 소치 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무엇이 되라고 소리치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은 남편이 자기 자신에게 '풀밭'이라고 소리치고, 아내가 자기 자신에게 '순한 양'이라고 소리칩니다.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이지요." 글터 → 이글저글 남서부 사막에 사는 날씬한 채찍꼬리 도마뱀에게는 수컷이 없다. 암컷이 암컷을 낳고, 또 암컷이 암컷을 낳아 번식한다.코알라는 유우칼리 나무 위에서 그 잎만 먹고 물은 전혀 마시지 않는다. 원주민어로 코알라는 ‘no water’의 뜻이다. 새끼를 낳으면 6개월 동안을 캥거류처럼 앞에 달린 주머니 속에 넣어 키우고 그 뒤에는 업고 다닌다.사슴은 쓸개가 없다.나그네쥐의 가족계획, 나그네쥐(lemming)들은 4년마다 한 번씩 수백만 마리가 줄을 지어 노르웨이의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는다. 그렇게 하여 지나치게 늘어난 종족의 수를 줄여 식량의 부족을 막고 안전하게 종족을 유지한다.우리가 사는 집에는 ‘인간 가족들’만 사는게 아니다. 쥐, 두꺼비, 노래기, 박쥐, 딱정벌레, 좀벌레, 무당벌레, 밀가루 벌레, 진딧물, 청파리, 장수말벌, 빈대좀, 책좀, 바퀴벌레, 지네, 생쥐, 밀벌레, 모기, 거미, 참새, 달팽이, 지렁이, 쥐며느리, 팔태충... 등이 같이 산다. 우리는 결코 고독하지 않다.암탉은 수탉 없이도 알을 낳을 수 있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15 추천 0 비추천 목록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댓글 쓰기 에디터 선택하기 ✔ 텍스트 모드 ✔ 에디터 모드 ?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독서편지 List Zine Gallery FirstThumb 제1388호 - 2024.11.08. 금요일(음력 : 10.08.) Date2024.11.08 風文 Views409 Read More 제1387호 - 2024.11.06. 수요일(음력 :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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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66 호4339.11.21 (10.01)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용량제한으로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 않보이시는 분은 저의 블로그 또는 아래의 링크를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문학소식 글터 → 명언 / 격언 기억이란 우리 모두가 지니고 다니는 일기장. /M.H. / 마크 트웨인 글터 → 수필 내잠 속에 비내리는데 - 이외수 방생 전날 낚시춘추 로부터 전화를 받고 나는 저으기 흥분했었다. 혹시 낚시라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려는 것이나 아닐까 하는 기대감에서 였다. 그러나 아니었다. 내게 주어진 임무는 소양호를 다니며 그 풍경을 글로 묘사하는 일이었다. 낚시춘추 에서는 이미 내 낚시 실력이 형편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경력이라야 3년 정도. 조사 소리를 들으려면 한참 공부를 더 해야 되는 솜씨였다. 낚시를 배우려면 무엇부터 해야 하느냐고 동석한 낚시광들께 여쭈어 보면 당신은 우선 밥하는 것부터 배우시오, 라고 말할 정도니 기초가 전혀 안 되어 있다는 뜻이리라. 낚시대를 한번 휘두르면 아직도 뒤에 있는 나무를 낚거나 떡밥이 채목표 지점에 가기도 전에 떨어져 버리거나 바지 가랭이를 꿰어 나 자신을 낚기 일쑤이니 도대체 어느 세월에 고기를 낚겠는가. 하지만 나도 낚시를 좋아해서 틈만 나면 기를 쓰고 낚시를 떠나곤 한다. 내가 사는 춘천은 앉으면 조사의 자리, 일어서면 월척이라는 말도 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소양호는 유명하다. 요즘은 향어가 그 우람한 모습으로 수면을 뒤채면서 자주 끌려 나와주는 바람에 꾼들 사이에는 쉬쉬하면서도 벌써 소문이 다 나버렸고, 소양호를 찾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다. 나는 약간 서운하지만 낚시춘추의 주문대로 낚시 도구 대신 필기 도구를 지참하고 배를 탔다. 화창한 날씨였다. 하늘에는 청량한 햇빛에 잘 세척되어진 구름들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바람도 불지 않았다. 그러나 덥지도 않았다. 사방이 온통 산과 물뿐이니 더울 턱이 없었다. 공기가 하도 맑아서 숨을 한번씩 들이쉴 때마다 혈관 속이 다 투명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배가 선착장을 떠난 지 채 5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문명의 흔적은 아무데서도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삼림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는 산들이 호수 속에 허리를 담근 채 여기저기 솟아 있었다. 마치 원시 시대로 되돌아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갑자기 부끄러움을 느꼈다. 도시에서 내가 먹고 살기 위해 발버둥치면서 살아온 일들이 모두 부끄럽고 치사하게 생각되어졌던 것이다. 배를 타고 한참을 가다 보니까 조사 한분이 낚시대를 펴놓고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저건 외지 사람이다,라고 나는 판단했다. 모두 네 대의 낚시대를 펴놓았는데 우산살형으로 펴놓았던 것이다. 춘천 사람이라면 그렇게 펴놓지는 않는다. 거의가 다 젓가락형으로 나란히 펴놓는다. 우산살처럼 펴놓으면 찌가 지그재그로 위치하게 되지요. 그래서 잘못하면 두 칸 대 찌에 입질이 왔는데 두 칸 반대를 잡아채는 수가 있습니다. 젓가락 형으로 나란히 펴놓으면 대수에 따라 차례로 찌가 위치하기 때문에 그런 실수는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낚시란 참으로 오묘하다. 물속에 물고기가 지천으로 헤엄쳐 다니는데도 조건이 조금만 맞지 않으면 절대로 물려 주지 않는다. 어느 과학자가 연구한 바에 의하면 물고기의 지능지수는 0.4이고 기억력은 3초밖에 안된다고 한다. 그런데도 지능지수 100이 넘고 기억력이 몇십 년으로 계산되어 지는 인간이 빈번이 당하는 것을 보면 지능지수나 기억력만으로는 안되는 모양이다. 어떤 사람들은 떡밥이나 원자탄을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만들어서 매답니다. 초보자죠. 사람도 돌을 먹으라고 해보세요.먹겠습니까? 안 먹는다. 돌을 먹어서 무슨 보람이 있으랴. 물고기도 마찬가집니다. 그런데도 돌덩어리처럼 딱딱하게 매답니다. 건져 보면 그대로 매달려 있을 때도 있습니다. 혹시 떨어져 버리고 안보이면 고기가 따먹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입질이 없으면 고기만 욕합니다. 남의 살을 상하게 하려면 자기 살이 그 만큼 상해야 합니다. 즉, 그만큼 피땀을 흘려야 한다는 얘기죠. 질퍽질퍽하게 반죽을 해서 낚시 바늘에 매달고 사뿐히 목표지점에 던지는 거 하루이틀에 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아는 어느 조사님의 얘기다. 나는 잠시 후 호림수산이라는 향어 양식장 부근에다 배를 댔다. 두 명의 조사님들이 낚시질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내려서 보니 장애물이 심한데 포인트를 잡은 걸 보니 보통 낚시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망을 들여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자태도 늠름해 보이는 향어들이 어망 속에서 푸드득 거리고 있었다. 어린애 팔뚝만한 누치도 몇 마리 보였다. 이 일대는 모두가 포인트인 모양이었다. 맞은편 섬에도 좌우측 섬에도 받침대를 놓았던 흔적들이 역력해 보였다. 평일날이니까 한가해 보이지 휴일이었다면 아마 앉을 데가 마땅치 않을 정도로 어지간한 자리는 다 차지했을 거라는 게 호림수산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얘기였다. 그런 낚시대 전시장 같은 데서 무슨 낚시가 될까, 그래서 춘천 사람 들은 이렇게 말한다. 밑밥은 토요일, 일요일에 서울 양반들이 다 뿌리 주고 다음날 물고기는 우리가 잡지요. 굳이 남이 앉은 자리 근처에 앉고 싶은 것은 거기가 포인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겠는데 그건 소양호를 모르는 사람들의 얘기다. 아직도 미개척지는 얼마든지 남아 있다. 동양 최대의 로크필드식 다목적댐에 의해서 생겨난 인공댐호이므로 그 면적이 엄청난 것도 동양 최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도를 펴놓고 들여다보시라. 봉의산이 바라다보이는 춘성군에서 내설악이 바라다보이는 인제군에 이르기까지 소양호의 물길이 이어져있다. 아무리 극성스러운 낚시꾼이 많이 모인다 해도 그 방대한 지역에 일일이 다 낚시대를 드리워 보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물고기를 잡기 위한 목적으로만 낚시를 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물고기를 잡는 것만을 목적으로 해서 낚시질을 한다고 치자. 잘 잡혀주면 다행스럽겠지만 하루종일 피라미 한 마리조차도 들지 않을 때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겠는가. 신경질만 나고 부아만 치밀어 오를 것이다. 더욱 스트레스만 쌓일 것이다. 특히 소양호 부근에는 정확한 학명은 모르지만 흔히 배불뚝이라고 부르는 물고기가 있는데 이 놈은 피라미보다도 한결 작은 놈으로서 입질이 간사하기 짝이 없다. 때로는 붕어처럼 노숙하게 찌를 밀어 올리기도 하고 때로는 피라미처럼 오도방정을 떨기도 하고 하여튼 온갖 물고기들의 흉내를 다 내어서 입질을 하는데 배를 꿰어 나오는 수는 있어도 입을 꿰어 나오는 수는 드물 정도로 사람을 우롱하는 데 천재적인 물고기다. 춘천에서 오래 낚시를 공부한 분들은 이 놈이 물려 나오면 자리를 옮긴다. 세력권을 형성하는 물고기로서 이 놈들이 떼거리로 몰려 있는 곳에는 다른 어종들이 거의 얼씬도 안하는 것이다. 입질은 오는데 갖은 기교를 다 동원해 보아도 물리지 않으면 절로 낚시꾼의 인격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래서 낚시꾼은 물고기로부터 매운탕거리를 제공받는 것이 아니라 인격 도야의 기회를 제공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더러 낚시터에 가면 배가 터져 죽은 치어들을 볼 수 있는데 아마도 치어들일수록 낚시꾼들한테 헛손질을 자주 하도록 만든 관계로 어쩌다 걸려 나오면 그 원한을 갚아 버린 흔적이리라. 하지만 그건 낚시를 도라고 생각하는 조사가 할 짓이 아니다. 본디 인간은 자연에서 그 육신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자연에서 살아가는 것들을 먹고 그 육신을 성숙시켜 왔다. 그래서 인간은 죽고 나면 다시 자연에서 살아가는 것들에게 그 육신을 되돌려 준다. 땅에 묻혀 거름이 되기도 하고 곤충이나 물고기들의 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과 영혼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정신과 영혼은 선할 수 밖에 없다. 다만 그것을 망각한 사람들에 의해서 생겨난 여러가지 환경과 조건에 의하여 우리는 변모되어졌을 뿐이다. 낚시는 우리에게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왔음을 알게 해준다. 우리가 자연 속에 몸을 담기만 하면 마음이 유쾌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연이 한없이 그리워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자연 속에 앉아서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되찾아야 한다. 따라서 낚시대를 드리운 바로 그 자리가 도를 보는 자리가 된다. 도를 볼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도에 가까이 접근하려는 자리 정도는 되어야 한다. 굳이 물고기를 잡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면 차라리 원양어선을 타는 것이 좋으리라. 소양호는 산 뒤에 물이 있고 물 뒤에 산이 있다. 산 속에 물이 있고 물 속에 산이 있다. 그 속에 앉으면 어찌 물고기 몇 마리에 연연해 하랴. 보이는 모든 것을 낚으면 그만이다. 그리하여 돌아가는 길에는 세파에 찌들은 자기 자신을 자연 속에 방생한모습을 보면 그만이다. 나는 질마재라는 이름의 만에다 배를 정박시켰다. 산 중턱에 조그만움막이 보였다. 마치 중국 무술 영화에서 주인공이 사부님을 만나 권법을 익히는 장소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 소룡도 없고 성룡도 없었다. 다만 후덕하고 소박한 내외와 할머니 한 분이 살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점심을 먹었다. 마치 향어가 한 마리 생포되어 있길래 그걸로 회와 매운탕을 해서 맛있게 먹었다. 돌아오는 길에 배 위에서 잠깐 잠이 들었다. 소롯이 오는 낮잠, 행복하고 편안한 낮잠이었다. 잠을 깨니 역시 사방이 높고높은 산이요, 깊고깊은 물뿐이었다. 나무들이 짙푸르게 우거져 있고 그 속에 움막이라도 지어 놓고 살면 종신토록 사람들에게 발견되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물길도 마찬가지였다. 골짜기마다 물이 차 있었기 때문에 모두가 물길이었다. 익숙한 사람이 아니면 이쯤에서 배 한척을 준다 해도 도저히 나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곳곳에 받침대를 설치했던 흔적이 눈에 띄었다. 더러 낚시대를 드리우고 무와 공의 자리에 앉아 있는 듯이 보이는 조사님들도 눈에 띄었다. 이따금 끌어내는 낚시대 끝에서 싱싱한 은비늘이 번쩍거리고 있는 광경도 눈에 띄었다. 몇 마리의 백로들이 한가롭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두보가 말했던가. 강물이 푸르니 새 더욱 희어 보인다고. 과연 그렇게 보였다. 백로는 암록색 호수 위에서 눈이 부실 정도로 희어 보였다. 오향리라는 곳에 이르러 배를 정박하고 산사람 하나를 우연히 만났다. 연전에 사냥에 관한 글을 기고하기도 한 낚시춘추 의 독자인데 산중에다 토목 초가삼간을 지어 놓고 살고 있었다. 얼마 전에 직장을 때려 치워버리고 산과 물이 좋아 오향리로 들어왔단다. 역시 후덕하고 소박해보이는 분이었다. 나는 거기서 커피 한 잔을 얻어 마셨다. 그는 되도록이면 오향리만은 낚시꾼들이 몰려오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는데 아마도 도를 모르는 낚시꾼들이 자연의 아름다움에 떡밥칠을 하는 것이 싫다는 뜻이리라. 나는 또 한번 낚시를 하는 것이 고기를 잡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배에 올랐다. 이제부터는 돌아가는 길이었다. 흑염소 몇 마리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다람쥐 섬을 지나 추곡에서 잠시 정박하고 소주 한 잔을 마셨다. 물빛이 더욱 맑아 보였다. 소양호. 아직도 회를 먹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인공댐호. 나는 소주 한 잔을 걸치고 문득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저 문명의 악다구니로부터 방생당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나같이 도가 부족한 사람은 매사 무엇을 낚는답시고 낚시대를 드리워 보지만, 항시 낚이는 쪽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나 자신이 나를 방생할 수 있을 때까지 나는 낚시를 그만둘 수 없으리라는 생각도 했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공경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더냐 - 신안식(건국 대 강사) - 2/2 노비해방의 기치를 든 만적의 야망 노비 만적은 이러한 시대 흐름 속에서 항쟁을 도모하였다. 만적은 노비신분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공경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기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양인이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권력을 잡겠다는 것이었다. 만적이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무인정변 이후 대대적인 문신 살육, 잦은 권력쟁탈로 인한 집권 무인세력의 빈번한 교체, 향촌사회의 지속적인 저항 등 격변했던 사회적 상황에 따른 기존권위의 상실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최충헌의 정변과 그 이후 정변을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더욱더 그러한 모순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 중에서 집권 무인세력 중의 한 사람이었던 이의민의 신분문제가 관심을 끈다. 이의민은 무인정변 때 행동대원으로 활약하여 크게 출세했던 인물이다. 그 과정에서 견제를 받기도 하였지만, 그의 신분이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유독 <고려사> 열전에서는 그의 신분이 노비로 되어 있다. 그의 아버지 이선은 소금과 체를 파는 일을 생업으로 하였고, 어머니는 경상북도 영일에 있었던 옥령사의 노비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의민은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천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천인이면서도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은 키가 8척이고 완력이 남보다 특출하다는 것과 무술을 좋아했던 의종이 배려해서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 이의민의 신분이 노비였는지 아니면 최충헌이 꾸며낸 사실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노비신분으로 집권자가 되었다면 최충헌이 정변을 합리화하는 데 매우 유용하게 이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적의 구호에서도 보듯이 이의민의 출세는 이 시기의 노비들에게는 새로운 희망이었다. 노비의 아들이 권력의 최고 정점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는 사실은 노비들에게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채찍 밑에서 뼈가 으스러지도록 부림을 당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최씨정권은 60여 년 동안이나 유지되었지만, 최충헌정권 초기는 아직 권력이 안정되지 못한 상태였다. 무인정권 안에서도 권력쟁탈은 계속되었고 다른 세력의 도전으로 인하여 언제 권력을 잃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권력쟁탈의 성패는 집권자 한 명의 영욕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 자의든 타의든 그를 따랐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좌우하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서 권력자들의 노비들은 유사시에는 사병이 되기도 하였다. 명종 때 무인정권에서 벌어졌던 여러 번의 정변에서는 국가 공병이 동원되어 성공한 경우도 있었지만 권력자들의 노비들도 실제로 행동대원으로 동원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노비들은 처참한 죽음을 당할 수 있다는 공포를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결국 만적 등의 항쟁은 노비라는 신분 때문에 오는 당연한 불만 외에도, 최충헌이 권력을 장악해 가는 과정에서 오는 죽음의 공포와 육체적 수탈에서 비롯되는 분노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한편 만적의 항쟁에서는 그에 참여한 노비의 숫자가 상당히 많았고, 모의단계에서 노비들을 체계적으로 조직하려고 했던 사실이 주목된다. 만적은 동조하는 자들에게 누런 빛깔의 종이에 ‘정’자의 표식을 주었는데, 준비된 종이가 수천 장에 달하였다고 한다. 거사 당일의 행동방법에 대해서도 만적은, 흥국사에 모여 일제히 북을 치고 소리치면서 대궐의 뜰로 몰려가면 환관들과 관노들이 반드시 호응할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대궐의 환관들이 호응할 것이라는 장담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환관은 궁중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세세하게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합세할 것이라는 것은 항쟁세력을 결집시키는 데에 매우 고무적인 말이었을 것이다. 관노들은 주로 대궐이나 관청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국가의 공공기관을 장악하거나 관리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 유리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만적 자신과 다른 노비들은 최충헌과 자신들의 주인을 살해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러한 계획은 수도 개경의 모든 정치기구를 장악하고 권력가들을 단숨에 제거하여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고자 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들로 미루어 보아 만적의 지도력이 출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항쟁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정변을 일으키기로 약속한 날에 모인 사람이 수백 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적은 인원으로는 정변을 성공시킬 수 없다고 염려하여 거사 날을 다시 잡아 일을 뒤로 미룬 것이 일차적인 화근이었다. 만적은 “신중하지 못하면 성공하지 못하니 절대로 누설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사고는 내부에서 생겼다. 율학박사 한충유의 노비인 순정이라는 자가 주인에게 모의 사실을 고발하였다. 한충유는 이를 다시 최충헌에게 알렸다. 최청헌은 만적을 비롯하여 100여 명의 노비들을 잡아 강물에 빠뜨려 죽였다. 그 나머지 동조한 수많은 노비들을 모두 죽일 수 없었기 때문에 불문에 부쳤다고 한다. 반면 한충유는 합문지후로 승진되었고, 고발자 순정에게는 백금 80냥을 주고 노비에서 해방되는 상이 주어졌다. 재평가되어야 할 노비항쟁 지난 역사 속에서 고통받은 자들에 대한 평가는 어떠하였는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혁명에 성공한 자들은 그에 따른 영광스러운 권력과 부귀를 얻을 수 있었고 역사의 창조자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그에 반해 그들에게 도전하는 자들에게는 ‘반란’이라는 이름 아래 그 실상을 왜곡한 경우도 빈번하였다. 그 속에서 사라져 간 선구자와 추종자들은 역사의 흐름 밖에서 잊혀진 망령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세사회의 모순과 압박을 단숨에 뛰어 넘으려고 했던 많은 이들의 외침은 역사의 흐름 속에 면면히 살아 있었다. 우리들은 역사 속에서 만적을 생각할 때 노비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과감하게 뛰어넘으려 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한다. 왕에서부터 가장 아래까지 사람의 높고 낮음이 분명하고, 그것이 진리이던 시대에 미천한 지위의 한낱 노비가 신분제를 근본적으로 부정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고려왕조 500년 동안 우리는 만적 외에 그러한 인물을 찾아볼 수 없다. 아마도 조선시대의 임꺽정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한다. 만적의 항쟁은 그들이 지향한 이상이 원대하고, 세력의 조직화에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저항보다도 격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실패하였지만 성패를 떠나 신분제 사회를 철폐하려 했던 노력은 높이 평가하여야 마땅할 것이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 그리움을 참으면 별이 된다. -- 보물 찾기 후의 변화 작년 초가을, 내가 근무하는 학원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성깔이 있어 보이는 일곱 살짜리 꼬마가 학원에 새로 들어왔는데, 첫날부터 스케치북에 검은 색 크레파스를 신경질적으로 죽죽 그어댔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아이의 집으로 전화를 했더니, 최근에 재혼했다는 아이의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우리 애가 새아빠에게 적응을 못해 신경불안 증세를 보이고 있어요. 각별히 관심을 써 주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대했지만 그 애는 좀처럼 마음의 문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책상 위에 놓아 두었던 만년필이 없어졌다. 이상하다고 여기면서도 그냥 넘겨 버렸는데 그 뒤로 아이들의 물건이 종종 없어졌다. 새로 온 그 아이들 의심하는 아이들을 나무라면서도 이제껏 이런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나도 자꾸만 그 아이들을 의심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 애의 가방을 들여다본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가방 속에는 내 만년필을 비롯해 아이들의 샤프와 지우개가 수북했다.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아이들에게 지금까지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서 주인에게 둘려주자고 제안했다. 아이들은 마치 보물찾기라도 하는 듯 수선을 피오며 연필도 주워 오고 지우개도 들고 왔다. 그 애도 불쑥 만년필을 내멸며 책상속에서 찾았다고 했다. "고마워. 넌 똑똑하니까 잃어버린 물건도 참 잘 찾는구나." 나는 그렇게 칭찬하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주우면 반드시 주인을 찾아 주어야 한단다. 잃어버린 친구들이 얼마나 속상해하겠니? 남의 물건이 마음에 들더라도 참고, 욕심 내지 않는 어린이가 이 다음에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거야." 고개를 떨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애는 차즘 친구들과 어울리며 명랑해져 갔다. 그리고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수심이 가득하던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모든 일에 긍정적인 방응을 보였다. 놀라운 변화였다. 그 애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좋은 아빠를 만나 너무 행복해요." 그 애가 앞으로도 순수하고 구김살 없이 성장하길 바란다. 임안순 님/경남 창녕군 창녕읍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56 - 경험론의 마지막 완성자: 데이비드 흄(1711-1776) 그 때 세계에서는 1747년: 미국, 보스턴 폭동 1749년: 미국,프랭클린 피뢰침 발명 데이비드 흄 - David Hume 섀프츠베리 가문에서 교육적으로 봉사한 J. 로크의 영향을 받은 섀프츠베리 3세(Lord Shaftebury, 1671-1713)는 로크의 영향을 받아, 학문적 규모와 영역은 작았으나 도덕철학과 미학분야에서 독특한 철학사상을 전개시켰다. 영국인들은 그 당시 그를 대표적인 도덕철학자라고 인정하고 있다. 그는 철학, 윤리학, 미학 등에서 뚜렷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도덕적인 선과 예술적인 미는 일치되는 것이며, 선하기에 아름답고, 아름다움은 선과 통하는 삶의 정서성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도덕적인 선이 이성적인 가치판단에서 탄생되는 것으로 보고 있으나, 사실 선은 감정과 의지의 뿌리에서 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정서적이며 감정과 의지의 일면을 도외시하는 것은 인간성의 중요한 부분을 경시하는 결과가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도덕판단은 취미판단이며, 취미판단은 예술적인 미의 판단과도 합치되는 것이다. 비로소 인간에 있어서의 감정적 요소를 소중히 여기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그리고 도덕적인 판단은 합리적인 사고나 지성적 추리가 아니라, 언제나 직각적인 것이다. 이 직각적 판단은 예술계에 있어서는 언제나 상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를 도덕적 감성철학의 선구자였다고 평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가 있다. 그는 귀족적인 생활에서 고귀한 철학이론을 전개시켜 주었다. 그의 인품과 학문의 일치성을 충분히 엿보게 해 주는 고아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고전의 인문적 교양을 높이 보며 예술적 식견을 갖추고 있었다. 모든 사람의 개성을 존중히 여겨 생의 질을 다양하게 계발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로크의 철학을 새로이 발전시켜 경험주의의 마지막 주자에게 연결지어준 철학자로, 성직에 머물고 있으면서 새로운 철학을 개척해준 조지 버클리(G. Berkeley, 1685-1753)를 잠시 엿보는 것이 영국철학의 정상적인 과정일 것 같다. 버클리는 전체적인 입장에서 토머스 홉스의 유물론적 철학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성직자인 그로서 볼 때는 편중된 철학이며 거부반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모든 지식과 인식이 감각을 통해 외물, 즉 자연적 사물에서만 주어진다면, 그것은 자연과학과 통할 수는 있어도 진정한 철학으로는 미흡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의 학문적 배경과 성장이 그러했던 것이다. 진정한 철학은 밖에 있는 사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관념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철학은 근본적으로 주관적 관념론의 성격을 갖는 것이라고 보았다. 철학적 지식의 대부분, 특히 성직자로서 문제삼을 수 있는 철학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인식은 감각을 통하더라도 주관적 성격을 가지며, 결국은 물적 실체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적 구성을 통해 철학적 사고가 수립된다고 보았다. 정신은 지각내용으로서의 관념을 보존하며 능력을 갖춘다고 생각했다. 로크는 아직도 물적 실체의 실제성을 고려하고 있으나, 그것은 감각의 결합으로 돌리며 오히려 심리학의 과제로 삼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았다. 우리는 흔히 존재라고 부르는 것은 지각에서 얻어진 것이며, 그 지각표상은 우리의 의식기능, 즉 심리작용에서 밝혀져야 한다는 방향전환을 시도했던 것이다.이러한 버클리의 철학이 로크에서 흄으로 안내하는 변화의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버클리는 잠시 미국 프로바던스에 와서 기거한 일이 있었다. 지금도 부라운 대학 부근에 가면 그가 묵었던 집이 남아 있다. 그리 오래 전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고, 더불어 영국인들이 자신의 전통을 소중히 보존하고 있음에 경의를 표하게도 된다. 사람들은 만일 버클리 같은 철학자가 가운데 끼지 않았다면, 경험론의 마지막 완성자이면서 적지 않은 문제를 남겨준 D. 흄이 탄생되었을까 하고 묻는 이가 있다. 그만큼 흄은 로크의 뒤를 계승하면서 버클리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본질적으로는 로크의 계승자였으나 버클리의 방향시정이 적지 않은 보탬이 되었다. 그리고 몇십 년의 세월이지만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철학적 사상의 변천과 발전은 더욱 급속도로 진행되기도 하는 법이다. 버클리는 그 자신이 성직자였던 만큼 그 배후에는 철학의 정신적이며 관념적인 면이 잠재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요소들은 그대로 계승되어갈 성질의 철학이 아니었다 .흄은 버클리를 거쳐 다시 로크의 문제를 새로운 철학으로 발전시켜나간다. 그리고 버클리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흄의 철학을 두고 다시 하늘을 날으려는 뜻을 버리고 땅에 내려앉은 성격의 철학이 되었다고 불만을 갖기도 했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참꽃'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진달래꽃 '참꽃'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진달래꽃을 말하고, '개꽃'은 사람이 먹을 수 없는 '철쭉꽃'을 말합니다. 앞에서 말한 '먹을 수 있는 꽃'과 '먹을 수 없는 꽃'은 진달래를 말씀드리면서 드린 말씀입니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3장 죽음과의 악수 - 3족을 멸문당한 충절 - 성삼문 성삼문 필적 성삼문은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자는 근보, 호는 매죽헌이다. 도총관이던 승의 아들로 홍주 노은동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막 낳으려고 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 하고 세 번 묻는 소리가 나서 삼문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1438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경연관이 되어 세종을 항상 가까이 모시면서 집현전 학사 정인지, 박팽년, 신숙주 등과 훈민정음 반포에 기여하였다. 문종이 죽고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세조)은 어린 단종을 내쫓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예방승지였던 성삼문은 국새를 안고 크게 통곡을 하였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뜻을 규합하여 이듬 해에 단종의 복위를 꾀하였다. 명나라 사신의 송별 연회장에서 운검을 쥐게 된 아버지(승)와 무인 유응부가 세조를 죽이기로 하고, 한명회, 정인지 등의 일파를 제거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연회날, 세조가 갑자기 자리가 협소하니 운검을 그만두라 는 지시를 내린다(운검이란 임금곁에서 큰칼을 들고 경호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그때 유응부를 계획대로 실행하자고 우겼고 삼문은 훗날을 기다리자고 말하였다. 그러는 사이, 모의에 가담했던 김질이 겁을 먹고 밀고하는 바람에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그들은 모두 체포되기에 이른다. 노기 등등한 세조의 심문이 이어졌다. 형틀에 매어진 그에게 갖은 극형이 가해졌다. 쇠가 식었구나, 다시 달구어 오너라. 나으리의 형벌이 과연 참혹하구나. 성삼문은 세조 옆에 앉아 있는 신숙주를 보며 또 호령했다. 전에 너와 함께 집현전에 있을 때 영릉(세종)께서 원손(단종)을 안으시고 뜰을 거니시며 과인이 죽은 후에 너희들은 모름지기 이 아이를 생각하라 하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생생한데 너는 어찌 잊었느냐. 너의 의리를 저버리는 악함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이야 정녕 내 몰랐구나! 무색해진 신숙주를 세조는 전각 뒤로 피하게 하였다. 세조는 유응부를 문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응부도 연회날 내가 창으로써 나으리를 물리치고 옛 임금을 복원케 하려 했는데,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제 간사한 무리의 밀고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만 나으리는 나를 빨리 죽이시오. 하고 말하였다. 극도로 노한 세조는 무사를 시켜 유응부의 살을 깎으며 고문을 가하였다. 광연전에서 나으리를 죽이지 못한 것이 못내 한이다 라고 하면서 같이 잡혀간 성삼문 등 문신을 복 크게 꾸짖는다. 옛부터 서생들과는 도모하지 말랬더니, 내 말만 듣고 그때 칼을 썼더라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오! 유응부는 분개하였다. 이개, 하위지도 단근질로 거의 다 죽게 될 무렵 마침내 처형을 당했고 이개의 두 아들도 죽었다. 경회루에 빠져 죽으려 했던 박팽년도 노량진에서 형을 받아 죽었다. 성균관에서 귀가한 유성원은 사당에 나가 절한 뒤 자결하고 말았다. 성삼문은 단근질로 거의 다 탄 몸을 이끌고 형장 새남터로 끌러나가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북소리 이 목숨을 재촉하는데 돌아보니 지는 해 서산을 넘네. 황천길 주막집도 없을 것이니 오늘 밤 뉘 집 찾아 쉬어 볼까나. 대여섯 살밖에 안된 딸이 울부짖으며 행렬의 뒤를 따라오니 아버지 삼문은 뒤를 돌아다보며 말한다. 사내아이는 다 죽어도 너만은 죽지 않으리라. 그의 부친도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극형을 당했고, 삼빙, 삼고, 삼성 등 세 아우와 그의 네 아들 맹첨, 맹년, 맹종과 갓난아기 까지도 모두 죽음을 당했다. 당시 성삼문의 나의 불과 37세였다. 가족들도 참사를 면하지 못했으므로 누구 하나 그들의 흐트러진 시신을 거둘 수 없었다. 또 관의 눈이 무섭고 법이 지엄하여 일반 사람들은 감히 엄두도 못낼 일이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사람의 눈을 피해가며 그들의 시체를 몸소 거둬 가지고 한강 너머의 노량진에 묻은 사람이 있다. 그는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이었다. 오늘의 사육신 묘 란 표지가 나붙은 자리가 바로 그 장소이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20. 마스터피스(걸작품)의 어원 걸작품 또는 명작을 영어로 마스터피스(masterpiece)라고 한다. 그런데 이 마스터피스의 유래는 중세 길드까지 거슬러올라간다. 길드의 존재가 처음으로 부각된 것은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한 11세기와 12세기로, 또한 이 때는 중세 도시가 성립하던 시기였다. 근거리 교역이나, 요즘식으로 말하면 국제 무역이라고 할 수 있는 원격지 무역에 종사하던 상인들은 봉건 영주가 거주하는 성 주변이나 교통이 편리한 지역에 정착했다. 또 상인들은 자신의 거주지를 스스로의 힘으로 지키기 위해 무장도 하고 성벽도 쌓기 시작했다. 이후 점차 활동의 규모가 커지자 상인들은 길드라는 조합을 만들었다. 이는 공동의 이익과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조직이었는데 자연 재해나 해적으로 인한 상업상의 손실을 보상해 주고 조합원이 죽었을 때는 그 가족의 생활을 책임지기도 했다. 현대와는 다르게 치안 상태가 불투명했던 당시에 서로 돕기 위한 길드야말로 상인들의 생존과 번영을 보장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상인 조합은 중세 도시의 자유와 자치권 획득에도 앞장 섰다. 상인과 더불어 중세 도시 주민의 핵심을 이루고 있던 사람들이 수공업자였다. 수공업자 조합은 상인 조합보다 늦게 만들어졌는데 동일 업종마다 조직되었기 때문에 동업 조합이라고도 한다. 이 동업 조합의 목적은 동업자간의 경쟁을 배제하고 또 다른 도시의 동일 업종 수공업자와의 경쟁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동업 조합은 생산에 대한 독점권은 물론 생산과 판매도 엄격하게 통제했다. 이러한 수공업자 조합의 성격은 개인의 창의성과 자유 경쟁을 완전히 배제한 것이었는데 당시와 같이 공업 생산력이 미약한 단계에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수공업자 조합에는 독립된 작업장과 가게를 가진 장인(master)이 가입했는데, 그는 한두 명의 직인(journeyman)과 또 같은 수의 도제(apprentice)를 두었다. 장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수련공격인 도제가 되어 장인과 함께 생활하면서 일을 배운다. 도제는 한 사람의 독립된 인격체가 아니라 장인의 피보호자였기 때문에 보수는 고사하고 장인의 집안 일까지 도맡아 했다. 그의 유일한 희망은 빨리 기술을 배워 직인이 되고 궁극적으로 한 사람의 독립적인 장인이 되는 것이었다. 평균 7년 정도 장인 밑에서 수업을 마치면 직인이 되는데 이 때부터 장인으로부터 급료를 받으면서 본격적인 기술 연마를 하게 된다. 또한 직종에 따라 견문을 넓히기 위해 각지를 돌아다니는 관행도 생겼다. 직인 생활을 마치고 장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기술을 증명할 작품을 조합에 제출하여 인정을 받아야 했다. 바로 이 작품을 마스터피스라고 한다. 즉 장인의 작품이라는 뜻이다. 이 말이 이후 걸작 또는 명작이라는 뜻으로 변형되어 쓰이게 된 것이다. 14세기까지는 5,6년 정도의 직인 생활을 거치면 장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15,6세기가 되면 상황이 달라지는데 동업자의 수가 늘어나면 경쟁이 치열해질 것을 우려한 장인들이 동업 조합원의 정원을 제한한 것이다. 이로써 장인이 되는 길은 매우 어려워졌고 직인들의 불만은 높아 갔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직인들은 따로 직인 조합을 결성했고 16세기 말이 되면 오늘날의 노동 조합의 파업과 유사한 분규가 적지 않게 발생했다. 여기에다가 엄청난 부를 축적한 대상인들이 도시의 지배권을 장악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장인들의 불만도 높아졌다. 이렇게 동업 조합의 정식 회원인 장인의 작품을 가리키던 마스터피스라는 말은 근대 사회로 넘어가면서 길드의 폐지와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공장제 대량 생산의 대두로 그 본래의 뜻에서 벗어나 걸작품을 뜻하는 한정된 의미로 사용되게 되었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6. '일개 여편네'가 떠들 일이 아닌 인구문제 부록 :한자녀 낳기운동이 모두를 살린다 - 요스키 나가이(中K要介, 일본) 내가 베이징에서 근무할 때 해외청년협력단에 참여한 간호사 한 분이 베이징에 온 지 얼마 안 돼 나를 찾아 온 적이 있다, 그녀는 지방 병원에서의 단기근무를 자원하여 베이징을 떠나기에 앞서 작별인사를 하려 왔었다. 1개월 후 그녀가 다시 나에게 왔을 때는 맥이 완전히 빠져 있었다. 내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녀는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문화충격을 받았어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베이징에서 기차를 몇 번씩 갈아타고 어느 농촌의 병원에 도착했다. 그녀가 빠른 걸음으로 병원에 들어가려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병원문 앞에 쌓인 쓰레기더미에 눈길이 갔다. 그 쓰레기더미 속에는 갓난아기의 시체가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 광경을 보고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중국은 교통사고 사망자의 시체를 현장부근에 며칠 동안 그대로 방치한다고 한다. 완전히 '물건' 취급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을 일본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중국에는 과연 인권이란 것이 없는 것일까? 중국의 인권을 논할 때 중국 인구를 잊어서는 안 된다. 중국의 인구가세계 인구의 6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나서 중국의 인권문제를 논할 수는 없다. 12억 인구를 가진 나라가 통일된 후, 그들에게 주택을 제공하고 배를 채워주는 일은 상상을 초월한 정치적 능력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전체 국민을 배불리 먹일 수 있는 체제를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중국의 인구는 매년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20세기 말에는 원래 예측했던 12억을 훨씬 넘어 13억 이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배제 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인구팽창에 대해 중국은 긴급한 조치를 취해야만 했고,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한자녀낳기정책이다. 미국을 위시한 서구 국가들은 앞다투어 중국의 이러한 정책을 비난하고 있다. 천주교를 신봉하는 나라가 종교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이와 같은 행위는 천륜을 거역하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행위가 될 것이다. 중국의 어느 지방에서는 노동력이 되지 않는 여자아이를 출산할 경우 호적에 올리지 않거나 아이를 내다버리는 참혹한 일이 간혹 발생하고 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일어나는 구미 각국의 비난이 반드시 옳다고 할 수는 없다. 중국에는 중국만의 상황이 있다. 만일 인구 억제정책이 실패한다면 국가가 붕괴위기에 처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곧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모든 사람이 희생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중국은 인구 억제정책을 강력 시행하여 시급히 현대화를 이루고 빈곤에서 탈피해야 하는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다. 덧붙여 삶과 죽음에 대한 견해의 차이도 들 수 있을 것이다.중국인의 관점에서 보면 사체는 그저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그러므로 사체를 확인할 사람이 올 때까지 방치하거나 영아를 버리는 일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 속에는 가치관의 차이가 숨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며 이러한 일로 중국이 인권을 무시하는 나라라고 간단히 단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순한 양과 풀밭 맞대기가 하면 싸움을 하는 젊은 부부가 있었다. 남편은 아내가 늘 순한 양처럼 고분고분하기를 원한 반면, 아내는 남편이 늘 푸른 풀밭처럼 넓고 아늑하기를 원했다. "여보, 제발 순한 양이 좀 돼 봐요." "그럼 당신이 먼저 풀밭이 돼 보세요. 당신이 풀밭이라면 나는 순한 양이 될 수 있어요." "나는 이미 늘 풀밭이야." "나도 늘 순한 양이에요." 그들은 이런 식으로 늘 상대방의 원하는 것이 먼저 되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서로 상대방이 자기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당신도 이젠 나를 좀 사랑해 봐. 사랑을 받으려고만 들지 말고 먼저 사랑할 줄도 좀 알란 말이야." "그런 당신은?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당신이야말로 나를 좀 사랑해 봐요." "허허 참. 난 당신을 사랑해. 우리가 지금까지 이렇게 살고 있는 것도 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야." "하하, 당신도 참, 그건 바로 내가 할 소리예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나마 이렇게 이혼까지 가지 않고 살고 있는 거예요." "여보, 이젠 그런 쓸데없는 말장난을 그만하고, 정말 나를 좀 사랑해 봐. 부탁이야. 사랑을 얻으려면 먼저 사랑을 해야 해. 사랑을 받기만을 원하면 결국 사랑을 잃게 돼. 주지 않으면 얻을 수가 없어." "여보, 나도 정말 부탁이에요. 당신이 나를 사랑하면 그 사랑이 모두 다 당신한테 돌아가는 거예요." 그들의 이런 식의 싸움은 늘 되풀이되었다. 서로 상대방에게 싸움의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고 서로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러자 싸움의 양태가 갈수록 격렬해졌다. 남편이 고함을 치고 욕을 하면 아내도 소리를 지르고 욕을 했다. 남편이 화를 참지 못하고 물건을 내던지면서 아내도 화를 참지 못하고 물건을 내던졌다. 자연히 그들은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갔다. 하루는 그들 사이에 하나의 협상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도중에 누가 "순한 양!" 하고 소리치거나 "풀밭!"하고 소리치면 일단 입을 다물고 더 이상 싸우지 않는다는 협상이었다. 그들은 이 협상을 잘 지켜졌다. 정신없이 한창 싸우다가도 남편이 먼저 "순한 양!"하고 소리치면 아내도 "풀밭!"하고 소리치고는 싸움을 중단했다. 그러나 일단 싸움이 중단되기는 했으나 싸움의 회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그리고 남편이 바라는 대로 '순한 양'과 같은 아내가 되기는커녕 '성난 양'과 같은 아내가 되어 갔으며, 아내가 바라는 대로 '풀밭' 같은 남편이 되기는커녕 '폐허'와 같은 남편이 되어 갔다. 그런데 그들 부부가 사는 아파트 202 동에도 그들과 똑같이 "순한 양!", "풀밭!" 하고 소리치며 싸우는 부부가 있었다. 그런데 그들 부부와는 달리 그렇게 소리치면 칠수록 그들은 정말 '순한 양'과 '풀밭'이 되어 갔다. 갈수록 싸움의 회수도 줄어들고 부부 사이의 금실도 좋아졌다. 그들은 202 동에 사는 부부가 부러웠다. 그래서 한번은 202 동에 사는 부부한테 가서 물었다. "참 이상하군요. 우리 부부도 당신들처럼 싸움을 하다가 '순한 양!', '풀밭!' 하고 소리치는데, 부부 사이가 좋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지기만 합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그렇지 않군요.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러자 202 동에 사는 부부가 빙긋 웃음을 주고받으면서 말했다. "아, 그건, 우리가 상대방에게 무엇이 되라고 소치 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무엇이 되라고 소리치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은 남편이 자기 자신에게 '풀밭'이라고 소리치고, 아내가 자기 자신에게 '순한 양'이라고 소리칩니다.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이지요." 글터 → 이글저글 남서부 사막에 사는 날씬한 채찍꼬리 도마뱀에게는 수컷이 없다. 암컷이 암컷을 낳고, 또 암컷이 암컷을 낳아 번식한다.코알라는 유우칼리 나무 위에서 그 잎만 먹고 물은 전혀 마시지 않는다. 원주민어로 코알라는 ‘no water’의 뜻이다. 새끼를 낳으면 6개월 동안을 캥거류처럼 앞에 달린 주머니 속에 넣어 키우고 그 뒤에는 업고 다닌다.사슴은 쓸개가 없다.나그네쥐의 가족계획, 나그네쥐(lemming)들은 4년마다 한 번씩 수백만 마리가 줄을 지어 노르웨이의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는다. 그렇게 하여 지나치게 늘어난 종족의 수를 줄여 식량의 부족을 막고 안전하게 종족을 유지한다.우리가 사는 집에는 ‘인간 가족들’만 사는게 아니다. 쥐, 두꺼비, 노래기, 박쥐, 딱정벌레, 좀벌레, 무당벌레, 밀가루 벌레, 진딧물, 청파리, 장수말벌, 빈대좀, 책좀, 바퀴벌레, 지네, 생쥐, 밀벌레, 모기, 거미, 참새, 달팽이, 지렁이, 쥐며느리, 팔태충... 등이 같이 산다. 우리는 결코 고독하지 않다.암탉은 수탉 없이도 알을 낳을 수 있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