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첫쪽 ♧……………독서편지 T기본글꼴 기본글꼴✔ 나눔고딕✔ 맑은고딕✔ 돋움✔ ✔ 뷰어로 보기 2006.11.20 09:50 【독서편지】: 제 65 호 風磬 조회 수 8,659 추천 수 14 댓글 0 게시물 주소복사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독서편지】: 제 65 호4339.11.20 (09.30)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용량제한으로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 않보이시는 분은 저의 블로그 또는 아래의 링크를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문학소식 글터 → 명언 / 격언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을 빼놓곤 이 나라에 들어오는 것은 모두 세금이 매겨진다. / 마크 트웨인 글터 → 수필 내잠 속에 비내리는데 - 이외수 눈오는 날에 국어 사전을 찾아보면 눈은 기온이 영하일 때 대기의 상승권에서 수증기가 응결하여 내리는 흰 결정체라고 풀이되어져 있다. 그러나 과학에 관계되어진 참고서를 뒤적거려 보면 나름대로 약간 더 상세한 풀이를 얻어 낼 수 있는데, 이를테면 눈은 공기중의 수증기가 불순물질에 승화하여 붙은 얼음의 결정이며 처음에는 작은 결정이었다가 점점수증기를 부착시켜 성장한 다음 기온과 습도에 따라 각기 다른 모양을 이룬다는 등의 풀이가 그것이다. 눈에는 싸락눈과 함박눈 따위가 있는데 싸락눈을 핵으로 하여 그 주위에 얼음층이 싸여진 상태를 우박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풀이로는 도저히 눈이라는 것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낄 수가 없다. 따라서 이러한 풀이에 대입하여 인간이라는 것을 풀이하려고 든다면 그 또한 그야말로 삭막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인간이면 다 인간이냐 인간다운 인간이어야 인간일 거라는 말도 있지만, 사실 우리가 인간다운 인간이 되기란 그리 쉬운 노릇이 아니다. 인류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오직 인간다운 인간을 만든다는 목적하나로 교육기관을 설치하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개선하면서 그 명맥을 유지해 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 인류를 보라. 정말로 인간다운 인간으로 발전하고 성장해 왔다는 생각이 드는가. 혹시 더비인간적인 인간으로 퇴보하고 몰락해 간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가. 아직도 전쟁이라는 단어는 그대로 남아 있고 아직도 죄악이라는 단어는 그대로 남아 있고 아직도 증오라는 단어는 그대로 남아 있다. 물이 오염되고 땅이 오염되고 하늘이 오염되고 인간의 가슴까지 오염되어 있다. 인간은 전쟁의 불안을 막기 위해서 핵폭탄을 만든 대신 전쟁의 불안에다 핵폭탄에 대한 불안을 결과적으로 하나 더 추가시켜 놓았고 생활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해 각종 화합 물질과 교통 장비들을 만들어 놓고 육신과 정신이 함께 병들어 버리는 바보짓을 저질러 놓았다. 누구의 잘못인가. 그러나 그런 것을 따질 필요는 없다. 다만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각성부터 서둘러야 할 것이다. 나는 오늘날 우리나라 일부 고등 학생들을 보면 애처로움부터 앞선다. 도대체 그 무슨 엄청난 꿈이 있어 저토록 무거운 가방을 들고 학교를 다니는 것일까. 밤늦게까지 입술이 허옇게 부르트도록 공부를 해서 좋은 대학을 가고 그 다음 좋은 직장에 취직한다는 것이 공부하는 목적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마치 그것이 공부하는 목적의 전부인 것처럼 착각되어질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좀더 정서적인 측면으로 시선을 돌려야 할 때가 왔다. 눈이 내리는 것을 바라보면서 기온이 영하일 때 대기권 상층에서 어쩌구저쩌구 하는 식의 무감동한 풀이 따위를 떠올리는 컴퓨터형 인간이 아직까지는 없을 것이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그러한 인간이 나타나게 될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과학이 발달했다는 자만과 긍지를 느끼기 이전에 정서가 메말라 가고 있다는 사실에 우려부터 느끼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이제는 겨울. 우리는 눈이 내리면 우선 가슴부터 열어 놓고 볼일이다. 그리고 그 가슴 가득히에 순백의 눈을 받아 놓고 볼 일이다. 그 다음에는 그 눈 위에다 스스로의 아픔을 고백하고 스스로의 어둠을 고백하고 스스로의 그리움을 고백하고 스스로의 눈물을 고백하고 볼 일이다. 더러는 그것을 종이에다 옮겨도 볼 일이며 옮긴 다음에는 멀리서 또 가까이서 사랑으로 움트는 어느 그리운 이름들에게도 보내어 볼 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선 그 순백의 눈처럼 순결하고 아름다운 몸과 마음부터 가지고 볼 일이다. 겨울에는 비발디를 사랑하는 귀를 틔우고 클림트를 사랑하는 눈을 적시고 모든 시를 사랑하는 가슴을 밝힐 일이다. 진실로 인간다운 인간이 되기 위해 우선은 모든 사물과 함께 인간과 인간끼리 마음부터 통해야 하는 것이니 그 마음이 메마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볼 일이다. 끝으로 덧붙이는 말 한마디는 눈이 내리는 날은 절대로 돈에 대한 생각 같은 것도 하지 않고 볼 일이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공경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더냐 - 신안식(건국 대 강사) 1198년 정월 노비 만적은 미조이, 연복, 성복, 소삼, 효삼 등과 더불어 개경의 북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노비들을 불러 모아 놓고 항쟁을 모의하였다. 국가에서 경인년, 계사년 이후로 높은 벼슬이 천한 노예에서 많이 나왔으니 장수와 정승이 어찌 종자가 있으랴.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어찌 육체를 괴롭게 하면서도 채찍 밑에 곤욕을 당할 수 있느냐. 그의 제의는 모두 그렇게 여길 만큼 설득력이 있었다. 무인정변으로부터 이에 저항한 김보당의 거사를 진압할 때까지 정국을 주도한 자들 중에 천한 노예출신이 많았다는 주장은노비들도 신분상승할 수 있다는 욕구를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만적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힘을 모아 최고 집정자인 최충헌 등을 제거하고, 각기 그 주인을 죽인 다음 노비문서를 불살라 버리면, 자신들이 공경장상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노비신분에서 벗어나 양인이 되자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공경장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가능하다고 포기해 버리기에는 시대 여건이 너무나 유동적이었다. 노비신분의 굴레 노비는 남자 노와 여자 비를 합하여 부르는 말이며, 소속에 따라 개인 소유권 사노비와 국가 공공기관 소유의 공노비로 구별된다. 사노비에는 솔거노비와 외거노비가 있었다. 이들은 신분을 세습하거나 양인이 가난하여 몸을 팔거나, 전쟁포로, 그리고 권세가가 불법적으로 양인을 노비로 만드는 경우 등으로 사노비가 되었다. 솔거노비는 주인 호적에 올라가 있었고, 주인집에 살면서 나무하고 취사하는 등 집안의 잡역을 담당하였다. 외거노비는 그의 거주지에 별도의 호적이 있었고, 주인과 떨어져 살면서 주로 농사에 종사하면서 생활하다가 주인의 필요에 따라 일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가정을 꾸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솔거노비는 주인의 매매, 증여, 상속, 탈취 등으로 인하여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그만큼 제한적이었다. 외거노비는 주인과 떨어져 살아 주인의 간섭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에 솔거노비보다는 현실적으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일반적으로 노비는 노비끼리 결혼하였다. 양인과의 결혼은 원칙적으로는 금지되었지만 꼭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그 자식은 ‘일척즉천’의 원칙에 따라 부모 가운데 한쪽이라도 노비이면 노비가 되었고, 그 소유권은 ‘천자수모법’에 따라 어머니의 주인에게 또는 어머니가 양인인 경우에는 아버지의 주인에게 귀속되었다. 동시에 이들은 주인의 사유재산으로서 재물과 같은 존재였으며, 죽임 이외에 주인의 횡포에 따른 어떤 법적인 보호도 받지 못하였다. 주인이 반역죄와 같은 중대한 범죄에 관련될 때 고발할 수 있는 것을 제외하고 노비는 주인에게 절대 복종해야 했다. 공노비는 궁궐과 관청 등 국가의 공공기관에 예속되었다. 전쟁 포로나 반역한 사람, 적에게 투항하거나 이적 행위를 한 사람들은 처형되거나 공노비가 되었다. 또한 이러한 사람들의 가족이나 사노비는 몰수되어 공노비가 되었다. 이들 중에는 해당 관청의 잡역을 담당하고 그 대가로 생활하는 공역노비가 있었고, 따로 농사를 지으면서 규정에 따라 공납을 부담하는 외거노비가 있었다. 이들은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릴 수도 있었다. 외거노비가 재산을 소유하거나 결혼을 할 때는 공역노비보다 유리하였다. 이들은 60세가 되면 역에서 면제되었다. 고려시대의 노비들은 위와 같은 신분적인 규제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혜택으로부터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었다. 일찍이 태조 왕건은 ‘훈요 10조’에서 노비와 같은 천류들은 그 종자가 따로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 양인이 되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아무리 큰 공을 세우더라도 노비는 상금을 받는 것 외에는 관리가 될 수 없도록 제도로 만들었다.이것이 고려국가의 신분정책의 하나였다. 물론 최씨무인집권기와 원 간섭기 등 사회 모순이 중첩된 시기에는 노비가 중책을 맡은 경우도 있었지만 극히 예외적이었다. 그러나 신분상승의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신분상승을 꿈꾸던 시대 어느 시대든지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를 바꿀 수 있는 길은 있었다. 열심히 노력하여 권력과 부를 얻거나, 사회체제를 변혁하는 경우이다. 고려시대에도 이러한 사례들을 찾을 수 있다. 명종 때 노비 평량이라는 자가 출세한 것이 앞의 예이고, 공주 명학소의 사람들과 다른 노비들의 항쟁이 뒤의 예이다. 평량은 원래 평장사 김영관의 노비였는데, 견주(경기도 남양주)에 살면서 농사에 힘써 많은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그는 당시 권세가들에게 뇌물을 주어 노비에서 벗어나 양인이 되고 산원동정이란 벼슬까지 얻게 되었다. 그의 아내도 소감 왕원지의 노비였다. 무인정변 이후 문신 지배층들이 몰락하면서 왕원지의 집안도 가난해졌는데, 그는 가족을 이끌고 노비의 남편인 평량에게 의탁하러 왔다. 그러자 평량은 이들을 후하게 대접하고 개경으로 돌려 보냈다. 그리고 바로 뒤이어 처남들을 보내 도중에서 죽여 버렸다. 아내의 주인이 없어지면 영원히 양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뒤 그의 아들은 벼슬을 얻고 관리의 딸에게 장가도 들었다. 그러나 뒤에 왕원지의 가족을 죽인 사실이 드러나자, 평량은 귀양을 가게 되었고 그의 아들들도 관직에서 쫓겨났다. 공주 명학소의 사람들은 소 지역에 대한 차별대우 때문에 봉기하였다. 소에 사는 사람들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여러 물품들을 전문적으로 생산해야 했기 때문에 일반 군현의 주민들보다 역이 무거웠다. 또한 탐욕을 부리던 관리들로부터도 많은 침탈을 받았다. 특히 무인집권기에는 더욱 심하였다. 이들이 항쟁을 일으킨 때에는 평안도 지역에서 일어나 조위총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대규모로 관군을 동원해야 했는데, 중앙 정부는 군사 동원에 필요한 물자를 마련하기 위해 개경 이남 지역을 가혹하게 수탈하였다. 명학소의 사람들이 지금의 충청도와 경기도 일대를 함락시키자, 중앙 정부는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올려 주어 불만을 누그러뜨리고자 하였다. 명학소 사람들은 이 조치를 받아들여 봉기를 중단하였지만, 정부의 조치는 곧 속임수로 판명되었다. 그러자 그들은 다시 봉기하여 왕경까지 점령하려 하였지만, 결국 실패하고 주모자인 망이, 망소이 등은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고려시대 노비의 항쟁은 대략 10건의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발생 시기는 주로 무인집권기 이후이고, 발생 지역은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 절반이 수도 개경에서 일어났다. 항쟁에 가담한 노비는 대부분 공역노비와 솔거노비였다. 그것은 이들이 외거노비보다 주인이나 국가로부터 많은 수탈과 차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항쟁의 동기도 신분적 제약에서 벗어나려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항쟁의 결과는 대부분 실패하여 참살되거나 강물에 빠뜨려져 죽임을 당하였다. 이들의 저항은 무인정변 이후 정치적 격변과 향촌사회의 저항에 따른 사회적 혼란 및 대몽전쟁기의 경제적 궁핍, 그리고 몽고와 강화한 뒤 외세의 간섭이라는 새로운 상황 등을 배경으로 하여 일어났다. 따라서 노비들은 자신들의 신분적인 차별을 극복하고 새로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항쟁하였으며, 때에 따라서는 기존 지배체제에 저항하려는 세력들과 연합하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노비의 항쟁이 수도 개경에서 빈번하게 발생한 것이 주목된다. 개경은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그곳의 노비들은 다른 지방의 노비들보다 사회의식이 상대적으로 높았을 것이다. 그 점은 신분제 자체를 부정했던 1198년의 사노비 만적의 봉기에서 잘 나타난다. 그러한 사회의식은 항쟁이 실패해도 그 영향을 계속해서 남기고 있었다. 1232년(고종19) 몽고 군대를 피해서 중앙 정부가 수도를 강화도로 천도하자 어사대에 속한 노비 이통이 봉기한 경우, 그리고 1271년(원종12년) 굴욕적인 대몽강화에 반발하여 삼별초의 항쟁에 동조하려 한 노비 숭겸, 공덕의 경우 등에서 그러한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 그리움을 참으면 별이 된다. -- 사랑으로 입혀 주신 점퍼 중학교 시절 가난이라는 단어는 항상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따끈따끈한 쌀밥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릅니다. 항상 저는 밀가루밥을 싸 가지고 다녔습니다. 점심 시간이 되면 친구들은 내 밀가루밥을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 넌 맨날 밀가루밥이니?" 그럼 저는 "우리 아빠가 밀가루밥을 너무 좋아해서....." 라는 궁색한 말로 쌀밥을 먹고 싶은 저의 마음을 숨기곤 했습니다. 학교에서 가정 조사를 할 때면 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그 시간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텔레비젼, 라디오, 전화 등등 제가 구경도 못해 본 것들이 집에 있는지 조사하는데, 남들이 '저요, 저요'하며 손 드는 것을 보는게 괴로웠기 때문입니다. 제가 중학교 삼학년이 되었을 때도 가난한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힘들었던 시절에 만난 담임 선생님은 저에게 남다른 애정을 보여 주셨습니다. 추운 가을날 예전과 다름없이 바람이 송송 들어오는 허름한 점퍼를 입고 학교에 갔는데,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는 제 옷을 만져 보시더니 점심 시간에 교무실에 잠간 들르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일이지?' 저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선생님께 갔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반갑게 맞으시면서 어디서 나셨는지 옷이랑 책이랑 가방을 건네주셨습니다. 그리고 점퍼는 직접 입혀 주시면서 지퍼까지 채워 주셨습니다. 따뜻한 점퍼를 입고 괜히 쑥스러워 얼굴을 붉히고 있는 저를 보며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그냥 웃기만 하셨습니다. 저는 그때 비록 가난했지만 참 행복했습니다. 선생님의 따뜻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어디선가 사랑의 씨앗을 뿌리고 계실 선생님은 불러 봅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건강하세요." 김애영 님/전남 목포시 산정동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55 - 가장 영국적인 철학자: 존 로크(1632-1704) 그때 세계에서는 1673년: 청, 삼번의 난 (-1681) 1689년: 영국,프랑스간 식민지전쟁 시작(윌리엄 전쟁) 존 로크 - John Locke (1632-1704) 만일 우리가 가장 영국적이면서도 대표적인 경험주의 철학자를 뽑는다면, 우리는 서슴지 않고 홉스의 후계자인 존 로크를 들어야 할 것이다. 로크는 (J. Locke, 1632-1704)는 스피노자와 같은 해에 태어나 27년이나 더 오래 활약한 가장 영국인다운 철학자였다. 사람들은 그를 자유를 위해 싸운 가장 자유로운 사상가였다고 평한다. 역시 홉의 후계자다운 면을 지니고 있었다. 데카르트와 홉스를 연구했고, 화학과 의학을 연구하기도 했다. 철학적 심리학을 개척한 업적도 컸다고 보아야 하겠다. 홉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섀프츠베리가에 봉사한 학자였다. 홉스는 캐번디시가에 봉사했었다. 그의 철학의 기초는 인식론적 경험주의를 체계화시켰다는 점이다 그는 경험이 없으면 인식도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인식은 경험의 내용과 과정에서 얻어지며 또 평가되어야 한다. 인식의 산물인 모든 관념은 경험의 산물일 뿐이다. 이성이나 오성의 선천성같은 것은 인정될 수가 없다. 경험의 다소와 성질에서 인식은 그 의미를 갖는다. 우리의 이성이나 오성은 백지와 같은 것이다 거기에 경험을 통해 어떤 내용이 그려지는가 함이 문제이다. 경험이 관념의 원체가 된다면 인식기능과 과정은 자연히 심리적 작용을 따르게 되며 철학의 중요한 문제는 오성(Understanding)의 기원, 관계, 가치와 의미를 살피며 규정짓는 작업이 되어야 한다. 경험은 두 가지 요소를 갖는다. 하나는 외적 감각이며, 그 뒤에는 내적 반성이 뒤따른다. 외적 감각은 단순한 관념을 제공해주나 내적 반성은 복합관념을 만들어준다. 이렇게 생겨진 관념들을 서로 결합시키거나 분리시키는 일이 인식의 임무이며 책임이다. 선천적 기능이나 생래적인 관념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관념은 대상에 의한 객관적인 성질과 반성에 따르는 주관적 성질을 갖는다. 대상에 따른 객관적 성질과 반성에 따르는 주관적 성질을 갖는다. 대상에 따른 객관적 성질을 제 1차적인 관념으로 보면, 반성적인 성질은 제 2의 성질이 된다. 이러한 관념들의 상호 관계에서 이루어진 복합관념이 모든 지식을 만들어간다. 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 존재의 실체를 논해오고 있으나, 그것은 인식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며, 우리가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인식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며, 우리가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그 실체에 의존하는 여러 가지 양태와 두 가지 사물이상의 비교에서 태어나는 관계를 밝히는 것이다. 여기서 동일관계, 차별관계 또는 인과관계가 나타나며, 또 우리는 그것을 밝혀보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로크는 자연과학이나 수학, 기하학보다는 심리적 경험을 존중히 여길 수밖에 없어진다. 데카르트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에 원형관념에 대한 직각적 인식이나 논증성을 반대하지 않으나, 인식의 기본은 역시 경험을 바탕으로 반성하며 전개되는 것이다 .다른 것들은 부수적인 의미를 가질 뿐이다. 이 밖의 문제들에 대해서도 로크는 지도적 역할과 사상적 개척을 소흘히 하지 않았다. 윤리에 있어서는 동기론보다는 결과론을 중시하면서, 많은 사람이 더 많은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성적 가치라든지 의무론 같은 대륙적인 가치관보다는 영국적인 전통을 계승시켰다. 도덕적 원칙이나 원리 같은 것이 본래부터 주어져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과 노력의 확대에서 더 좋은 삶과 사회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종교문제는 그 당시에 있어서도 비중이 큰 문제였다. 로크는 홉스와 같은 무신론을 택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은 철학적으로 받아들일 타당성이 업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은 이신론을 주장했다.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신관이었고, 또 많은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의 이신론을 직접 계승한 학자들도 있었으나, 그의 영향을 받은 많은 철학자들이 있어 후에 계몽주의 시대를 개척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는 교육에 있어서도 뚜렷한 식견을 전개시켰다. 쉽게 말하면 자연주의적 계발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의 타고난 선한 능력과 지적 발달을 무리없이 계발, 성장시켜 나가면 된다는 주장이었다. 지금도 영미 계통의 교육철학의 바탕을 만들어주고 있을 정도이다. 사람들은 J.J. 루소의 선구자였다고 평하고 있다. 로크는 그 당시의 대표적인 교육철학의 흐름을 만들어 주었다. 정치론에 있어서는 홉스의 국가계약설을 발전시켜 입헌정체론으로 정착시켰다. 이는 오늘의 의회민주주의를 육성하는 뒷받침이 되었다. 이런 철학자들의 철학이론이 현실적이며 경험적 전통을 쌓아 올렸기 때문에, 영국사회에서는 예로부터 국민들의 지고자나 영도자는 국회의원, 장관일 수 있어도, 국회의원이나 장관들의 지도자는 학자, 사상가, 교수들이라는 생각이 정착되게 되었던 것이다 정신적 지도자가 현실적 지도자보다 더 중한 책임을 맡으면 한 사회의 이념적 방향과 정신적 성장을 도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눈 위에서 달리는 말'이 '썰매'의 어원 겨울이 되면 썰매를 타고 놀곤 하던 생각이 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지금은 시골의 깊은 산 촌에나 가야 어쩌다 발견하는 것이어서 젊은 사람들 중에는 이 '썰매'를 구경도 못한 사람이 꽤나 있을 것입니다. 최근에 어느 텔레비젼에서 초등학교 학생에게 '인두'를 보이며 이것이 무엇에 썼던 것인 것 같으냐고 물으니까, 한참 들여다 보다가 '화살촉'이 아니냐고 되묻는 광경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어린이들에게 '썰매'를 보이면, '나무깔판'이 아니냐고 되물을 것 같습니다. '썰매'는 엉뚱하게도 한자어입니다. 즉 '설마'(눈 설, 말 마)의 음이 변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눈위에서 달리는 말'이란 뜻이지요. 어떻습니까? 그럴 듯하게 이름을 붙였지요? 이렇게 우리 선조들은 슬기롭게 이름을 붙였었습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3장 죽음과의 악수 - 기독교의 죽음관과 성 이그니티우스, 예수, 죽음의 의미 이그니티우스는 크리스티교의 사도 교부의 한 사람으로, 안티오키아의 사제였다. 로마제국 공인의 신들을 승인할 것을 그는 거부했기 때문에 박해를 박고 체포당하였다. 로마의 원형극장에서 사자에게 죽임을 당하는 사형이 내려졌다. 이 장면은 영화 쿼바디스 나 스팔타카스 에서 우리가 흔히 보았던 장면이다. 그는 스스로 순교를 택했으며 다가오는 사자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이 짐승을 환대해 주기로 하자, 더욱 사나워졌으면 좋겠는데, 만일 나에게 덤벼들 의사가 없는 듯하면, 이쪽에서 먼저 도전하여 힘껏 끌어낼 것이다. 나는 신의 밀알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위한 잡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빵이 되기 위해서는 맹수의 이빨로 빻아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바 생명 이니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오히려 그들에겐 영광된 일이었다. 그리고 언제 죽는가 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죽음으로 부르는 때가 오면 기쁘게 응한다는 자세를 취한다. 왜냐하면 고통이 없는 나라, 하나님이 몸소 계시는 나라, 천국으로 가는 것이기에 기쁨과 희망을 가지고 죽음에 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깨달음의 죽음이 아니라, 어차피 그들의 죽음은 구원과 연결된 죽음이며, 부활과 영생이 약속된 죽음이기 때문이다. 예수, 죽음의 의미 예수의 죽음은 죄없는 죽음이었다. 아담과 하와가 범한 원죄를 속죄하기 위한 죽음이었으므로 대속의 의미를 갖고 있다. 중국의 오주혜박사는 그의 죽음으로 사의 본질이 죄라는 것을 알게 되며 이로써 창조주에게 다가가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예수가 자란 갈릴리는 헤롯안테파스왕의 지배하에 있었다. 로마황제는 식민지 분봉왕들을 감시하기 위해 시리아에는 총독을 보내고, 유태에는 지사를 파견했다. 그래서 유태지사 빌라도는 유월절을 감시하기 위해 가이사랴시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와 머물고 있었고, 갈릴리의 영주 헤롯안테파스 또한 성주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제사장 가야바를 의장으로 한 중의회가 예수를 고발하고 나섰다. 죄목은 신성모독죄였다. 예루살렘의 웅장한 성전을 보고 그의 제자가 찬탄하자 예수는 이런 말을 했다. 마침내 이 성전이 무너지는 날이 오리니, 그때는 돌 위에 하나의 돌도 남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지은 성전 대신에 나는 사흘 만에 다른 성전을 세우리라. 예수의 이 말은 이튿날, 재판에서 성전모독의 발언으로 규탄되기에 이른다. 유월절을 앞두고 예수의 그룹은 당시 둘로 갈라져 있었다. 유다그룹이 떠나고 베드로와 얼마 안되는 제자들만이 남아 있었지만, 예수는 그들마저 자기를 저버릴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제사장 가야바는 성전 경비대를 올리브산 기슭, 착유소로 보냈다. 예수 일행이 거기에 있다고 일러준 것은 유다였다. 경비대원들은 손에 횃불을 들고 막대기와 칼로 무장하고 켓세마네로 향했다. 예수는 죽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겟세마네에서 지극히 번민하면서 그는 죽음의 잔일랑 제발 거두어 주십사 고 하느님에게 간구하였다(마가 14, 34-36). 죽기를 싫어하고 살고 싶어하는 예수는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누가복음>에 기록된 것처럼 예수는 죽음의 불안 때문에 괴로워 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하고 경비대원에게 순순히 끌려가야 했다. 제사장 가야바는 약속한대로 그들의 제자들을 체포하지 않았다. 베드로가 가야바의 관저에서 예수를 부인하고 난 뒤 자책감과 굴욕감 때문에 몹시 울었다는 얘기는 무엇을 뜻함인가? 가야바에게 매수된 유다도 30냥의 은화를 그의 관저 뜰에 내동댕이친 뒤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그의 제자들은 이렇듯 가야바에게 관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중의회는 예수를 계속 추궁하였다.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중의회는 판결에 필요한 수만큼의 증언을 성립시키지 못하자 하는 수 없이 고발 을 무효화시켜 버렸다. 그러나 제사장 가야바는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를 고발하고자 혈안이 되었다. 그는 교묘한 유도 심문을 생각해 냈다. 그대가 그리스도인가? 예수에게 물었다. 그리스도란 메시아 를 의미한다. 그 속에는 유대인의 제왕 과 구세주 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정치적 메시아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로마 점령하에 시달리는 유태인의 독립과 예전의 영광을 회복코자 하는 구세주이니 정치범으로 제소할 수가 있겠고, 정신적인 메시아를 지칭하는 것이라면 신성모독으로 처벌할 수 있는 아주 교묘한 함정이었던 셈이다. 예수는 가야바의 유도심문의 진의를 간파하고 있었다. 내가 말할지라고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않을 것이니라. 어차피 자신의 처형을 전제로 한 것임을 안 예수는 자신을 구세주 라고 말하였다. 예수의 대답에 가야바는 옷을 찢으며 의원들에게 이제 증인을 댈 필요도 없다. 며 유죄를 선언했고 의원들도 이를 인정하여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사형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지사 빌라도의 승인이 필요했다. 가야바는 빌라도에게 예수의 사형을 요구했다. 죄목은 로마에 대한 정치적 반역이었다. 그와 같은 명목을 취하면 군중이 석방을 바라고 있는 제로테의 지도자인 바라바와 교환할 수도 있고, 중의회의 면목을 세우는 것도 가능했기 때문에 가야바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빌라도는 관저 앞에 모인 군중들에게 물었다. 둘중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는가? 군중들은 현실적인 혁명가 바라바를 원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군중은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요구했다. 이 십자가형의 요구는 종교 이단자로서가 아니라 반로마 운동의 정치범으로 말살하려는데 그 의도가 있었다. 빌라도는 바라바를 감옥에서 석방하고, 예수를 매질하게 한 후 군병들에게 넘겨 주었다. 군병들은 예수를 병영에 끌고 가서 옷을 벗기고 붉은 겉옷을 입힌 다음, 병영 뜰에 자라고 있는 에다브라는 가시를 머리에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잡게 하였다. 그에게 침을 뱉으며 조롱했다. 빌라도는 로마법의 관례에 따라 부하에게 죄표를 만들게 했다. 히브리오, 그리스어, 라틴어의 세 나라말로 쓰여진 유태인의 왕 나사렛 예수 라는 죄표를 목에 걸고 십자가를 짊어진 채 예수는 골고다 언덕을 향하고 있었다. 때는 한 낮이었다. 예수는 두 사람의 죄수와 더불어 어께에 기둥을 매고 걸어 갔다. 약 70킬로그램의 무게인 십자가를 메고 비틀거리면서 언덕으로 올라갔다. 처형자들은 자가가 운반해 온 십자가 횡목 위에 반듯이 뉘워졌다. 손에 못이 박혔다. 못 박히는 일이 끝난 다음 끈으로 매달려 졌다. 그리고 마지막 두 개의 못을 마저 쳤다.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에 의식을 마취시키기 위해 신맛을 넣은 포도주를 먹이는게 당시의 습관이었는데, 예수는 이 포도주를 거절했다. 그리고는 고통을 감수했다. 그의 십자가 양쪽에는 두 정치범의 십자가가 더 세워졌다. 이 죽음의 목격자 속에는 중의원 의원, 제사장 가야바, 로마병과 백부장, 예수를 따라온 부인들, 구경꾼등이 있었다. 그러나 진짜 제자들은 사방에 흩어져 예루살렘 주변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 예수의 마른 입술에서 새어나온 말이었다. 대낮부터 오후 세 시까지 무더운 하늘의 해는 숨고 주위는 어두워졌으나(마태복음 27장 45절) 아무런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다. 주여, 주여,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오후 세시, 예수는 마침내 십자가에서 목을 늘어뜨렸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다 이루었다. 예수가 숨을 거두기 직전에 외친 두 마디였다. 그의 나이 서른세 살로 때는 서기 30년 4월 7일이었다. <마가복음>은 3일 뒤에 부활한 예수의 일을 적고 있다. 그의 죽음은 부활 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고, 그러한 부활과 승천을 근거로 창조주를 믿게 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해답의 열쇠를 제시하려 했던 것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요한복음 11장 25절). 예수의 이 한 마디 말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19. 토너먼트라는 말의 숨은 이야기 운동 경기의 방법으로 참가자(또는 팀) 전원이 돌아가면서 경기를 갖는 제도인`리그(league)`와 달리 일 대 일로 겨루면서 진 상대를 탈락시키는 제도를`토너먼트(tournament)`라고 한다. 이 토너먼트는 원래 중세 유럽의 기사들의 마상 시합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세 봉건 사회는 피라미드형 계층제를 형성하고 있었다. 봉건 사회의 인적 구성을 비유적으로 `기도하는 사람`, `싸우는 사람`, `일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는데 각각 성직자, 기사, 농노를 가리킨다. 여기서 싸우는 사람인 기사는 맨 말단인 평기사뿐만 아니라 말을 탄 전사라는 의미에서 봉건적 지배계급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기사는 중세의 정치 군사적 지배자일 뿐만 아니라 토지 보유자로서 경제 지배자이기도 했다. 이 기사들의 주된 임무는 당연하게도 전쟁이었다. 유력한 제후들은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고, 평기사는 주군에 대한 봉건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또 전리품 배분을 노리고 전쟁에 참가했다. 따라서 기사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용맹과 충성심이었다. 그런데 11세기 이후 사회가 안정되고 상업이 부활하면서 기사들의 생활도 변했다. 전반적으로 생활이 풍요로워졌을 뿐만 아니라 거친 전투 기질이 완화되면서 생활 방식이 세련되어 갔다. 여기에는 전쟁과 전투를 줄이거나 완화하려는 교회의 노력도 한몫 거들었다. 이런 변화를 반영한 것이 토너먼트 즉 마상 시합이었다. 이것은 대략 11세기경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이후 봉건 기사들의 가장 큰 행사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처음에는 실전과 마찬가지로 진행되었는데 두 기사 집단이 단체로 싸워 상대편을 한 명이라도 더 많이 말에서 떨어뜨리는 쪽이 승리하는 시합이었다. 이긴 쪽은 진 쪽으로부터 무기나 갑옷, 말 등을 빼앗거나 포로로 잡고 나중에 몸값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이런 마상 시합만 전전하면서 돈을 버는 기사도 나타났다. 동시에 평화시에 무예를 연마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에 이를 장려하는 국왕도 나타났다. 그러나 위험한 경기였기 때문에 부상을 입거나 죽는 기사도 많아서 왕자의 시합 참가는 금지되기도 했다. 이후 이 난폭한 경기는 점차 일 대 일 시합으로 바뀌었으며 무기도 인체에 손상을 주지 않는 것으로 변했다. 그리하여 15세기 이후가 되면 국왕이나 세도 있는 귀부인 앞에서 화려한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의 경기가 되었고 시합에서 우승하는 것이 기사 최대의 명예로 되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프랑스의 국왕 앙리 2세는 마상 시합 중 상대방의 창에 눈이 찔려 급사하기도 했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6. '일개 여편네'가 떠들 일이 아닌 인구문제 미국과 서구 국가들-바티칸을 포함하여- 중국의 인구정책을 계속해서 문제 삼으며 대대적으로 공격하였다. 클린턴 부인 힐러리는 베이징에서 열린 제4차 세계여성대회에 참석하여 중국의 여성들은 아이를 몇 명이나 낳을 것이며 몇 살 터울로 낳을 것인지 등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한바탕 중국을 힐책하였다. 이런 권리는 인권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베이징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부시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후 중국을 방문하여 떵샤오핑의 접견을 받았다. 두 사람이 대화 하는 중에 부시는 중국의 인구 억제정책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였다. 떵샤 오핑은 잠시 생각한 후, '우리는 당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는 있습니다.하지만 매년 증가하는 최소 2천3백만 명의 거대한 인구를 중국은 더 이상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네 미국이 중국의 2천3백만 명에 해당하 는 이민 할당액을 늘려 줄 수 있습니까? 물론 가능하겠지요?' 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의에 부시는 깜짝 놀라 억지로 웃으면서 '그럼, 다음으로 양국의 문화교류 문제를 얘기해 봅시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우스갯소리 같지만 아주 현실적인 문제를 말해 주고 있다. 중국에서 만약 가족계획을 시행하지 않거나 혹은 인구 억제정책을 가장 기본적이고 장기적인 국책으로 삼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아주 처참해질 것이다. 이는 중국뿐 아니라 세계 모든 나라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프레이저 전 총리는, '미국은 중국의 인구정책에 대해 비판할 권리가 없다고 지적하면서 '사실 사람들은 중국의 인구정책을 고맙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그는 또 미국의 행위를 깊이 분석하여 바늘로 찌르듯이 정확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그는 '미국은 자신이 늘 정확하며 자신에게 반대하는 것은 틀리다고 믿고 있다. 미국은 줄곧 자신의 관점에 도덕적인 색깔을 입히고 반대의견에는 비도덕적이라는 딱지를 붙여왔다'라고 하였다. 정말 일리가 있는 말이다. 서구 국가들이 반중국의 소리를 높이고 있는 가운데서도 정직하고 전략적 안목을 지닌 정치가 프레이저가 자신의 관점을 고수하며 이를 세상에 알린 것은 참으로 존경스런일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의 인구정책은 마땅히 역사적인 안목과 지혜를 가지고 미래지향적으로 이해하고 분석하여야 할 일이지 결코 '일개 여편네의 관점'에서 가타부타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인구이화(人口異化)'라는 개념을 도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자식을 낳고 기르는 것은 신성하고 아름다운 것이며 그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생명을 지속시키고 인류문명을 보존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원동력인 것이다. 그러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면 지구는 발디딜 틈도 없게 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구체적으로 12억에 달하는 거대한 인구를 가진 중국은 자원도 풍부하지 않고 농경지는 갈수록 적어지는 등 상당히 어려운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 '사람이 많으면 인적자원이 풍부해진다'라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중국이 20억 혹은 25억의 인구를 가지게 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지게 될지는 한 번상상해 보라. 기아, 빈곤, 구걸, 전염병, 내란 등과 같은 현상이 복합적으로 나타나지 않겠는가? 아이를 낳아도 따뜻한 밥을 먹일 수 없고 좋은교육을 받게 할 방법이 없다면, 중국의 미래가 암담해질 뿐 아니라 이로인해 전세계의 미래도 심각한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미국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중국의 난민이 2천3백만을 넘고도 남을 것이다. 중국의 농촌과 변방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아직도 '다산다복 "후손이 없는 것이 가장 큰 불효이다'라는 전통적인 생육관에 사로잡혀 있다. 중국 정부는 이런 사고방식을 타파하기 위해 그동안 많은 노력을 해왔다. 아울러 중국의 지도자들은 여러 국제적인 모임에서 '국민의 발전할 권리' 를 역설하였고, 급속하고 무절제한 인구팽창은 결국 민족의 발전을 물거 품으로 만들 것이며 역사의 퇴보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인권운동가들은 왜 이 점은 간과하는지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다. 그들이 천박하고 편견을 가지고 있거나 독선적인 것이 아니라면 다른 어떤 속셈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이런 가정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정부와 미국 의회에 중국의 모든 행정업무를 맡긴다면 그들은 중국의 팽창하는 인구에 대해 어떤 정책을 취할까? 아마도 처음에는 몇 명의 자녀를 낳든지 어느 시기에 낳든지 이는 모두 기본적인 인권이니 마음대로 낳아 기르자고 할 것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혀를 잘라 버리고 싶을 정도로 자신의 입을 원망하게 될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역사발전의 단계와 역시속에 누적된 국민성을 고려하지 않은 정책은 미친 사람의 잠꼬대에 지니지 않게 될 것이다. 얼마 전 서구 국가에 의해 공포스럽게 과장 보도된 '고아원-죽음의 집'이라는 사건은 중국 정부에 대한 그들의 음모를 여실히 보여준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미국과 영국의 신문들이 '중국의 어느 복지원에서 온 의사'의 말만 듣고 진상을 알아보려는 노력은 추호도 하지 않은 채 제멋대로 추측하고 왜곡하여 '중국 정부는 고의적으로 고아들을 열악한 환경에 방치하여 죽게 하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적어도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 결론에 대해 콧방귀를 터트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중국 정부가 인성을 말살하고 하늘과 땅을 속여가며 이렇게 많은 고아들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는 것인가? 아니면 이것도 바로 중국이 펼치고 있는 '인구정책'의 일환이란 말인가? 우리가 베이징, 칭따오(淸島), 말쩌우(蘭州), 이우(義烏) 등지에 있는 고아원을 방문하여 얻은 1차적 자료에 의하면 {뉴욕타임즈}와 영국의 어느 Tv 방송국의 보도는 완전히 중국의 현실을 왜곡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왜곡과 모함은 이미 부끄러움을 모르는 위험수위에 이른 것으로,그 목적은 '사악한 악마의 제국'으로 중국을 묘사하여 세상에서 영원히 고립시키려는 데 있는 것이다. 칭따오의 한 고아원에는 피아노와 전자오르간 및 각종 완구들이 가득했다. 두 아이가 우리를 위해 피아노를 연주할 때 다른 아이들은 피아노 소리에 맞춰 노래를 불러 주었다. 영국 방송국은 이런 광경은 왜 찍어 가지 않는 것인가? 란쩌우의 고아원은 아주 잘 지어진 2층 건물이었다.우리는 마침 오후 간식시간에 도착하였는데 만두와 케이크, 그리고 바나나가 모든 아이들에게 돌아갔다. 이런 광경을 {뉴욕타임즈}는 왜 보도하지 않는가? 이유는 간단하다.서구에서 말하는 이른바 '언론의 자유'라는 것은 점차 엽기적 자유, 망상의 자유, 편견의 자유와 지독한 중국 저주의 자유로 채워져 있는 것이다. 그들은 먼저 중국을 사악하고 포악한 국가로 정해놓고 이 점을 증명할 방법을 찾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일관된 행동방식이다. 중국 정부는 한 민족에게 치유될 수 없이 극단적인 정신적 손상을 입힌 그들을 정정당당히 기소해야 할 것이다. 싱가포르의 리꽝야오 수상이 취한 방법처럼 그들을 중국법정에 세우든지 미국이나 영국의 법원에 고소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국제사회에서 자신의 의견을 밝히고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는데 결코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아울러 더 많은 서양인들이 우리의 고아원에 와서 그 아이들과 대화하게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악의를 가지지 않고 만난다는 조건이 붙어야 할 것이다. 독직하거나 책임감이 결여된 사람들이 어떤 분야에나 있는 것은 중국이든 외국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건이 이러한 사람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면 이 한 사건에 국한시켜 논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고아원에서 일하는 한 사람이 자기의 직무에 소흘하여 원아들에게 해악을 끼켰다고 그 누명을 온 나라에 뒤집어 씌울 수는 없는 것이다. 얼마 전에 스코틀랜드에서 어떤 청년이 십여 명의 아이들을 총으로 쏴 죽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영국 방송국은 메이저 정부에 대해 직접적인 비평을 하지는 않았다. 미국에서 총기사건이 그렇게 많이 일어나는 것은 개인이 총기와 탄약을 소지할 수 있게 미국법으로 허락하였기 때문이고, 따라서 총기에 의해 사망하는 무고한 사람들은 모두 미국 정부의 음모에의해 살해되었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미국인들은 이를 받아 들일 수 있단말인가? 인구 억제정책을 강력하게 시행하는 것은.매년 태어나는 어린 생명들에게 배고픔을 주지 않으려 함이고, 교육을 못 받아 현대문명으로부터 버림 받는 일을 막자는 것이고,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한 인간으로 만들어 인류의 평화와 번영에 이바지하도록 하자는 의도에서다. 우리는미국을 위시한 서구 국가에 대해. 자유의 여신상 손에 들려진 흰불로 자신들 나라에 깊이 박힌 추악함과 인류발전을 저해하는 갖가지 현샴딜을비추어야 보아야 할 것이라고 층고하고 싶다. 여신도 자세를 바꾸어 눈을감고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게 해야 한다. 다른 사람 몸에 든 가시에만 신경을 쓰다 보면 자기 눈에 박힌 기둥뿌리는 모르는 법이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보물찾기 한 시골 국민학교 뒷산에서 보물찾기 대회가 열렸다. 국민학교를 졸업한 지 30여년 만에 모교를 찾은 졸업생들이 재학 시절의 은사님을 모시고 소풍을 간 것이다. "자 동창생 여러분, 오늘의 마지막 순서로 보물찾기를 실시하겠습니다. 오늘의 이 보물찾기는 아주 이색적인 것으로, 우리들의 영원한 스승 김판영 선생님께서 제안하신 것입니다. 김 선생님께서는 여러분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난 후 지금까지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될 소중한 보물들을 많이 잃어버렸다고 하시면서 이제는 그것들을 다시 찾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 동안 잃어버리고 만 그 소중한 것들을 다시 찾고자 합니다. 자, 다들 보물을 찾으러 출발하십시오. 지금이 오후 세 시니까 오후 네 시까지 딱 한 시간 동안의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예전에 우리들이 소풍을 와서 보물을 찾았던 저 산꼭대기까지 바위틈이나 나뭇가지 등을 살펴보십시오. 그곳에 보물을 가리키는 종이쪽지가 숨어 있을 것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찾아오시는 분께 가장 큰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20여 명의 졸업생들이 5월의 신록 속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마에 주름살이 깊게 패인 김판영 선생은 보물을 찾으러 떠나는 제자들을 지켜보며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한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졸업생들은 대부분 손에 종이 쪽지 한 장씩을 들고 다시 사회자 앞으로 모여들었다. 사회자 앞에는 예쁘게 포장된 많은 상품들이 쌓여 있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가장 큰상을 받기를 원했다. "자, 여러분. 지금부터 여러분이 찾은 보물에 대한 시상이 있겠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찾아오신 분께 김 선생님께서 직접 시상을 하시겠습니다. 한 사람씩 차례대로 종이 쪽지를 건네주시기 바랍니다." 사회자가 말을 마치자 임산부처럼 배가 툭 튀어나온 졸업생이 먼저 쪽지를 내밀었다. 거기엔 '우정'이라는 말이 씌어 있었다. "네, 그렇군요. 그 동안 우리들은 정말 소중한 우정을 잃어버리고 있었군요." 사회자는 그 사내에게 조그만 탁상시계 하나를 상품으로 주었다. 다음은 대머리가 된 사내가 쪽지를 내밀었다. 거기엔 '인내'라는 글씨가 씌어 있었다. "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 쇠꼴을 먹이면서부터 길렀던, 가난을 참고 견디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말았군요." 그 다음은 청바지에다 남방셔츠를 입은 사내가, 또 그 다음은 십자가 금목걸이를 한 아주머니가 '희망'이나 '시간'이니 하는 쪽지를 내밀었다. 그때마다 자그마한 상품들이 주어졌다. 사람들은 모두 '사랑'이라는 쪽지를 찾아온 사람이 가장 큰 상품을 차지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트 형태의 커다란 귀걸이를 한 아주머니가 '사랑'이란 글귀가 씌어진 쪽지를 내밀어도 그 아주머니에게 돌아간 상품은 고작 압력 밥솥이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궁금해했다. 누가 일등을 할 것인가, 누가 가장 큰 상품을 탈것인가 하고 시상대 위에 놓여 있는 가장 크기가 큰 상품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러나 마지막 시상식이 다 끝날 때까지 그 상품을 가져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보물찾기를 제안한 김판영 선생이 나서서 제자들 앞에 한 말씀뿐이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을 만나서 퍽 반갑기도 하지만, 또한 퍽 유감이기도 합니다. 그건 여러분들이 가장 소중한 보물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분명 사랑입니다. 잃어버린 사랑은 반드시 찾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희생이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여러분, 사랑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어머니들의 희생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머니의 사랑, 그것은 바로 희생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이 '희생'이라는 보물을 꼭 찾아 줄 것을 기대했습니다." 글터 → 이글저글 바다표범 수컷은 최대 3개월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잠을 자자 않고도 살 수 있다.공룡의 몸은 거대하지만 뇌는 개의 것보다 더 작다. 스테고사우러스의 뇌는 도토리알만 하다.아프리카 호수에서 사는 시클리드과 열대어들은 알을 붙이고 다니다가 부화하면 새끼들을 입 속에 넣고 다닌다. 위험이 없을 때만 새끼들을 입 밖으로 내보내고 먹이를 먹는다. 그들이 어떻게 자신의 새끼들을 삼키지 않을 수 있는지 신기한 일이다. 또 주머니 개구리 수컷은 암컷이 알을 낳자마자 알들을 뒷발로 쓸어모아 등에 바른다. 알들은 끈적끈적해서 굴러떨어지지 않는데, 몇 시간 안에 수컷의 등 피부가 부드러워져서 알들은 움푹 파인 등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그 위에 피부가 한 겹 자라난다. 올챙이들은 거기에서 자란다. 다윈 개구리 수컷은 새로 태어난 알들을 입으로 빨아들여 목에 있는 특별한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새끼는 그 속에서 작은 개구리가 될 때까지 자란다.코브라가 내쏘는 독액 1그램은 150명의 사람을 죽이고도 남는다.악어에 대한 모든 것, 아프리카에서는 사자보다도 악어에 물려 죽을 확률이 더 높다. 악어는 다른 악어도 잡아먹는 잔인한 동물로서 먹이를 씹지 않고 한꺼번에 삼킨다. 먹이가 일단 위 속에 들어가면 위액이 나와 함께 삼켜진 쇠붙이도 녹여내며, 잔 돌맹이들도 갈아서 분해시킨다. 또 악어의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지기도 하는데 이건 울음이 아니라 그저 먹이에 의해 섭취된 염분을 배출하는 단순한 생리작용일 뿐이다. 악어는 혀를 움직일 수 없고 항상 새로운 이빨이 생겨나와 날카로운 상태가 유지된다. 만약 사람이 육지에서 악어에게 쫓긴다면 설사 육상선수라 해도 살아나기 어렵다. 하지만 악어는 갑자기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없으므로 지그재그로 달린다면 위기를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14 추천 0 비추천 목록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댓글 쓰기 에디터 선택하기 ✔ 텍스트 모드 ✔ 에디터 모드 ?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독서편지 List Zine Gallery FirstThumb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글쓴이 조회 수 1388 사평역에서 - 곽재구 2006.09.07 風磬 37,772 1387 400년 전의 사부곡 2006.09.07 風磬 19,362 1386 접촉사고 2006.09.10 風磬 21,259 1385 어느 강사의 교훈 2006.09.10 風磬 23,373 1384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음악 2006.09.10 風磬 20,941 1383 요리사와 딸 2006.09.10 風磬 22,996 1382 나만의 최선 2006.09.12 風磬 18,486 1381 슬픈기도 2006.09.14 風磬 22,556 1380 엄마의 수첩 2006.09.16 風磬 22,732 1379 【독서편지】: 제 10 호 2006.09.16 風磬 18,166 1378 【독서편지】: 제 11 호 2006.09.17 風磬 17,751 1377 【독서편지】: 제 12 호 2006.09.18 風磬 21,873 1376 【독서편지】: 제 13 호 2006.09.20 風磬 16,441 1375 【독서편지】: 제 14 호 2006.09.21 風磬 17,447 1374 【독서편지】: 제 15 호 2006.09.22 風磬 15,803 1373 【독서편지】: 제 16 호 2006.09.23 風磬 15,472 1372 【독서편지】: 제 17 호 2006.09.25 風磬 14,366 1371 【독서편지】: 제 18 호 2006.09.26 風磬 15,439 1370 【독서편지】: 제 19 호 2006.09.27 風磬 11,015 1369 【독서편지】: 제 20 호 2006.09.28 風磬 14,373 1368 【독서편지】: 제 21 호 2006.09.29 風磬 10,001 1367 【독서편지】: 제 22 호 2006.09.30 風磬 8,836 목록 Search 검색 제목+내용제목내용댓글닉네임태그 전체검색 제목+내용+댓글 확장 변수 쓰기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64 Next / 64 GO
【독서편지】: 제 65 호4339.11.20 (09.30)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용량제한으로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 않보이시는 분은 저의 블로그 또는 아래의 링크를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문학소식 글터 → 명언 / 격언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을 빼놓곤 이 나라에 들어오는 것은 모두 세금이 매겨진다. / 마크 트웨인 글터 → 수필 내잠 속에 비내리는데 - 이외수 눈오는 날에 국어 사전을 찾아보면 눈은 기온이 영하일 때 대기의 상승권에서 수증기가 응결하여 내리는 흰 결정체라고 풀이되어져 있다. 그러나 과학에 관계되어진 참고서를 뒤적거려 보면 나름대로 약간 더 상세한 풀이를 얻어 낼 수 있는데, 이를테면 눈은 공기중의 수증기가 불순물질에 승화하여 붙은 얼음의 결정이며 처음에는 작은 결정이었다가 점점수증기를 부착시켜 성장한 다음 기온과 습도에 따라 각기 다른 모양을 이룬다는 등의 풀이가 그것이다. 눈에는 싸락눈과 함박눈 따위가 있는데 싸락눈을 핵으로 하여 그 주위에 얼음층이 싸여진 상태를 우박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풀이로는 도저히 눈이라는 것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낄 수가 없다. 따라서 이러한 풀이에 대입하여 인간이라는 것을 풀이하려고 든다면 그 또한 그야말로 삭막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인간이면 다 인간이냐 인간다운 인간이어야 인간일 거라는 말도 있지만, 사실 우리가 인간다운 인간이 되기란 그리 쉬운 노릇이 아니다. 인류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오직 인간다운 인간을 만든다는 목적하나로 교육기관을 설치하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개선하면서 그 명맥을 유지해 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 인류를 보라. 정말로 인간다운 인간으로 발전하고 성장해 왔다는 생각이 드는가. 혹시 더비인간적인 인간으로 퇴보하고 몰락해 간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가. 아직도 전쟁이라는 단어는 그대로 남아 있고 아직도 죄악이라는 단어는 그대로 남아 있고 아직도 증오라는 단어는 그대로 남아 있다. 물이 오염되고 땅이 오염되고 하늘이 오염되고 인간의 가슴까지 오염되어 있다. 인간은 전쟁의 불안을 막기 위해서 핵폭탄을 만든 대신 전쟁의 불안에다 핵폭탄에 대한 불안을 결과적으로 하나 더 추가시켜 놓았고 생활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해 각종 화합 물질과 교통 장비들을 만들어 놓고 육신과 정신이 함께 병들어 버리는 바보짓을 저질러 놓았다. 누구의 잘못인가. 그러나 그런 것을 따질 필요는 없다. 다만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각성부터 서둘러야 할 것이다. 나는 오늘날 우리나라 일부 고등 학생들을 보면 애처로움부터 앞선다. 도대체 그 무슨 엄청난 꿈이 있어 저토록 무거운 가방을 들고 학교를 다니는 것일까. 밤늦게까지 입술이 허옇게 부르트도록 공부를 해서 좋은 대학을 가고 그 다음 좋은 직장에 취직한다는 것이 공부하는 목적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마치 그것이 공부하는 목적의 전부인 것처럼 착각되어질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좀더 정서적인 측면으로 시선을 돌려야 할 때가 왔다. 눈이 내리는 것을 바라보면서 기온이 영하일 때 대기권 상층에서 어쩌구저쩌구 하는 식의 무감동한 풀이 따위를 떠올리는 컴퓨터형 인간이 아직까지는 없을 것이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그러한 인간이 나타나게 될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과학이 발달했다는 자만과 긍지를 느끼기 이전에 정서가 메말라 가고 있다는 사실에 우려부터 느끼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이제는 겨울. 우리는 눈이 내리면 우선 가슴부터 열어 놓고 볼일이다. 그리고 그 가슴 가득히에 순백의 눈을 받아 놓고 볼 일이다. 그 다음에는 그 눈 위에다 스스로의 아픔을 고백하고 스스로의 어둠을 고백하고 스스로의 그리움을 고백하고 스스로의 눈물을 고백하고 볼 일이다. 더러는 그것을 종이에다 옮겨도 볼 일이며 옮긴 다음에는 멀리서 또 가까이서 사랑으로 움트는 어느 그리운 이름들에게도 보내어 볼 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선 그 순백의 눈처럼 순결하고 아름다운 몸과 마음부터 가지고 볼 일이다. 겨울에는 비발디를 사랑하는 귀를 틔우고 클림트를 사랑하는 눈을 적시고 모든 시를 사랑하는 가슴을 밝힐 일이다. 진실로 인간다운 인간이 되기 위해 우선은 모든 사물과 함께 인간과 인간끼리 마음부터 통해야 하는 것이니 그 마음이 메마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볼 일이다. 끝으로 덧붙이는 말 한마디는 눈이 내리는 날은 절대로 돈에 대한 생각 같은 것도 하지 않고 볼 일이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공경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더냐 - 신안식(건국 대 강사) 1198년 정월 노비 만적은 미조이, 연복, 성복, 소삼, 효삼 등과 더불어 개경의 북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노비들을 불러 모아 놓고 항쟁을 모의하였다. 국가에서 경인년, 계사년 이후로 높은 벼슬이 천한 노예에서 많이 나왔으니 장수와 정승이 어찌 종자가 있으랴.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어찌 육체를 괴롭게 하면서도 채찍 밑에 곤욕을 당할 수 있느냐. 그의 제의는 모두 그렇게 여길 만큼 설득력이 있었다. 무인정변으로부터 이에 저항한 김보당의 거사를 진압할 때까지 정국을 주도한 자들 중에 천한 노예출신이 많았다는 주장은노비들도 신분상승할 수 있다는 욕구를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만적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힘을 모아 최고 집정자인 최충헌 등을 제거하고, 각기 그 주인을 죽인 다음 노비문서를 불살라 버리면, 자신들이 공경장상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노비신분에서 벗어나 양인이 되자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공경장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가능하다고 포기해 버리기에는 시대 여건이 너무나 유동적이었다. 노비신분의 굴레 노비는 남자 노와 여자 비를 합하여 부르는 말이며, 소속에 따라 개인 소유권 사노비와 국가 공공기관 소유의 공노비로 구별된다. 사노비에는 솔거노비와 외거노비가 있었다. 이들은 신분을 세습하거나 양인이 가난하여 몸을 팔거나, 전쟁포로, 그리고 권세가가 불법적으로 양인을 노비로 만드는 경우 등으로 사노비가 되었다. 솔거노비는 주인 호적에 올라가 있었고, 주인집에 살면서 나무하고 취사하는 등 집안의 잡역을 담당하였다. 외거노비는 그의 거주지에 별도의 호적이 있었고, 주인과 떨어져 살면서 주로 농사에 종사하면서 생활하다가 주인의 필요에 따라 일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가정을 꾸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솔거노비는 주인의 매매, 증여, 상속, 탈취 등으로 인하여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그만큼 제한적이었다. 외거노비는 주인과 떨어져 살아 주인의 간섭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에 솔거노비보다는 현실적으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일반적으로 노비는 노비끼리 결혼하였다. 양인과의 결혼은 원칙적으로는 금지되었지만 꼭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그 자식은 ‘일척즉천’의 원칙에 따라 부모 가운데 한쪽이라도 노비이면 노비가 되었고, 그 소유권은 ‘천자수모법’에 따라 어머니의 주인에게 또는 어머니가 양인인 경우에는 아버지의 주인에게 귀속되었다. 동시에 이들은 주인의 사유재산으로서 재물과 같은 존재였으며, 죽임 이외에 주인의 횡포에 따른 어떤 법적인 보호도 받지 못하였다. 주인이 반역죄와 같은 중대한 범죄에 관련될 때 고발할 수 있는 것을 제외하고 노비는 주인에게 절대 복종해야 했다. 공노비는 궁궐과 관청 등 국가의 공공기관에 예속되었다. 전쟁 포로나 반역한 사람, 적에게 투항하거나 이적 행위를 한 사람들은 처형되거나 공노비가 되었다. 또한 이러한 사람들의 가족이나 사노비는 몰수되어 공노비가 되었다. 이들 중에는 해당 관청의 잡역을 담당하고 그 대가로 생활하는 공역노비가 있었고, 따로 농사를 지으면서 규정에 따라 공납을 부담하는 외거노비가 있었다. 이들은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릴 수도 있었다. 외거노비가 재산을 소유하거나 결혼을 할 때는 공역노비보다 유리하였다. 이들은 60세가 되면 역에서 면제되었다. 고려시대의 노비들은 위와 같은 신분적인 규제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혜택으로부터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었다. 일찍이 태조 왕건은 ‘훈요 10조’에서 노비와 같은 천류들은 그 종자가 따로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 양인이 되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아무리 큰 공을 세우더라도 노비는 상금을 받는 것 외에는 관리가 될 수 없도록 제도로 만들었다.이것이 고려국가의 신분정책의 하나였다. 물론 최씨무인집권기와 원 간섭기 등 사회 모순이 중첩된 시기에는 노비가 중책을 맡은 경우도 있었지만 극히 예외적이었다. 그러나 신분상승의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신분상승을 꿈꾸던 시대 어느 시대든지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를 바꿀 수 있는 길은 있었다. 열심히 노력하여 권력과 부를 얻거나, 사회체제를 변혁하는 경우이다. 고려시대에도 이러한 사례들을 찾을 수 있다. 명종 때 노비 평량이라는 자가 출세한 것이 앞의 예이고, 공주 명학소의 사람들과 다른 노비들의 항쟁이 뒤의 예이다. 평량은 원래 평장사 김영관의 노비였는데, 견주(경기도 남양주)에 살면서 농사에 힘써 많은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그는 당시 권세가들에게 뇌물을 주어 노비에서 벗어나 양인이 되고 산원동정이란 벼슬까지 얻게 되었다. 그의 아내도 소감 왕원지의 노비였다. 무인정변 이후 문신 지배층들이 몰락하면서 왕원지의 집안도 가난해졌는데, 그는 가족을 이끌고 노비의 남편인 평량에게 의탁하러 왔다. 그러자 평량은 이들을 후하게 대접하고 개경으로 돌려 보냈다. 그리고 바로 뒤이어 처남들을 보내 도중에서 죽여 버렸다. 아내의 주인이 없어지면 영원히 양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뒤 그의 아들은 벼슬을 얻고 관리의 딸에게 장가도 들었다. 그러나 뒤에 왕원지의 가족을 죽인 사실이 드러나자, 평량은 귀양을 가게 되었고 그의 아들들도 관직에서 쫓겨났다. 공주 명학소의 사람들은 소 지역에 대한 차별대우 때문에 봉기하였다. 소에 사는 사람들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여러 물품들을 전문적으로 생산해야 했기 때문에 일반 군현의 주민들보다 역이 무거웠다. 또한 탐욕을 부리던 관리들로부터도 많은 침탈을 받았다. 특히 무인집권기에는 더욱 심하였다. 이들이 항쟁을 일으킨 때에는 평안도 지역에서 일어나 조위총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대규모로 관군을 동원해야 했는데, 중앙 정부는 군사 동원에 필요한 물자를 마련하기 위해 개경 이남 지역을 가혹하게 수탈하였다. 명학소의 사람들이 지금의 충청도와 경기도 일대를 함락시키자, 중앙 정부는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올려 주어 불만을 누그러뜨리고자 하였다. 명학소 사람들은 이 조치를 받아들여 봉기를 중단하였지만, 정부의 조치는 곧 속임수로 판명되었다. 그러자 그들은 다시 봉기하여 왕경까지 점령하려 하였지만, 결국 실패하고 주모자인 망이, 망소이 등은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고려시대 노비의 항쟁은 대략 10건의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발생 시기는 주로 무인집권기 이후이고, 발생 지역은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 절반이 수도 개경에서 일어났다. 항쟁에 가담한 노비는 대부분 공역노비와 솔거노비였다. 그것은 이들이 외거노비보다 주인이나 국가로부터 많은 수탈과 차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항쟁의 동기도 신분적 제약에서 벗어나려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항쟁의 결과는 대부분 실패하여 참살되거나 강물에 빠뜨려져 죽임을 당하였다. 이들의 저항은 무인정변 이후 정치적 격변과 향촌사회의 저항에 따른 사회적 혼란 및 대몽전쟁기의 경제적 궁핍, 그리고 몽고와 강화한 뒤 외세의 간섭이라는 새로운 상황 등을 배경으로 하여 일어났다. 따라서 노비들은 자신들의 신분적인 차별을 극복하고 새로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항쟁하였으며, 때에 따라서는 기존 지배체제에 저항하려는 세력들과 연합하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노비의 항쟁이 수도 개경에서 빈번하게 발생한 것이 주목된다. 개경은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그곳의 노비들은 다른 지방의 노비들보다 사회의식이 상대적으로 높았을 것이다. 그 점은 신분제 자체를 부정했던 1198년의 사노비 만적의 봉기에서 잘 나타난다. 그러한 사회의식은 항쟁이 실패해도 그 영향을 계속해서 남기고 있었다. 1232년(고종19) 몽고 군대를 피해서 중앙 정부가 수도를 강화도로 천도하자 어사대에 속한 노비 이통이 봉기한 경우, 그리고 1271년(원종12년) 굴욕적인 대몽강화에 반발하여 삼별초의 항쟁에 동조하려 한 노비 숭겸, 공덕의 경우 등에서 그러한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 그리움을 참으면 별이 된다. -- 사랑으로 입혀 주신 점퍼 중학교 시절 가난이라는 단어는 항상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따끈따끈한 쌀밥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릅니다. 항상 저는 밀가루밥을 싸 가지고 다녔습니다. 점심 시간이 되면 친구들은 내 밀가루밥을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 넌 맨날 밀가루밥이니?" 그럼 저는 "우리 아빠가 밀가루밥을 너무 좋아해서....." 라는 궁색한 말로 쌀밥을 먹고 싶은 저의 마음을 숨기곤 했습니다. 학교에서 가정 조사를 할 때면 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그 시간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텔레비젼, 라디오, 전화 등등 제가 구경도 못해 본 것들이 집에 있는지 조사하는데, 남들이 '저요, 저요'하며 손 드는 것을 보는게 괴로웠기 때문입니다. 제가 중학교 삼학년이 되었을 때도 가난한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힘들었던 시절에 만난 담임 선생님은 저에게 남다른 애정을 보여 주셨습니다. 추운 가을날 예전과 다름없이 바람이 송송 들어오는 허름한 점퍼를 입고 학교에 갔는데,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는 제 옷을 만져 보시더니 점심 시간에 교무실에 잠간 들르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일이지?' 저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선생님께 갔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반갑게 맞으시면서 어디서 나셨는지 옷이랑 책이랑 가방을 건네주셨습니다. 그리고 점퍼는 직접 입혀 주시면서 지퍼까지 채워 주셨습니다. 따뜻한 점퍼를 입고 괜히 쑥스러워 얼굴을 붉히고 있는 저를 보며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그냥 웃기만 하셨습니다. 저는 그때 비록 가난했지만 참 행복했습니다. 선생님의 따뜻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어디선가 사랑의 씨앗을 뿌리고 계실 선생님은 불러 봅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건강하세요." 김애영 님/전남 목포시 산정동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55 - 가장 영국적인 철학자: 존 로크(1632-1704) 그때 세계에서는 1673년: 청, 삼번의 난 (-1681) 1689년: 영국,프랑스간 식민지전쟁 시작(윌리엄 전쟁) 존 로크 - John Locke (1632-1704) 만일 우리가 가장 영국적이면서도 대표적인 경험주의 철학자를 뽑는다면, 우리는 서슴지 않고 홉스의 후계자인 존 로크를 들어야 할 것이다. 로크는 (J. Locke, 1632-1704)는 스피노자와 같은 해에 태어나 27년이나 더 오래 활약한 가장 영국인다운 철학자였다. 사람들은 그를 자유를 위해 싸운 가장 자유로운 사상가였다고 평한다. 역시 홉의 후계자다운 면을 지니고 있었다. 데카르트와 홉스를 연구했고, 화학과 의학을 연구하기도 했다. 철학적 심리학을 개척한 업적도 컸다고 보아야 하겠다. 홉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섀프츠베리가에 봉사한 학자였다. 홉스는 캐번디시가에 봉사했었다. 그의 철학의 기초는 인식론적 경험주의를 체계화시켰다는 점이다 그는 경험이 없으면 인식도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인식은 경험의 내용과 과정에서 얻어지며 또 평가되어야 한다. 인식의 산물인 모든 관념은 경험의 산물일 뿐이다. 이성이나 오성의 선천성같은 것은 인정될 수가 없다. 경험의 다소와 성질에서 인식은 그 의미를 갖는다. 우리의 이성이나 오성은 백지와 같은 것이다 거기에 경험을 통해 어떤 내용이 그려지는가 함이 문제이다. 경험이 관념의 원체가 된다면 인식기능과 과정은 자연히 심리적 작용을 따르게 되며 철학의 중요한 문제는 오성(Understanding)의 기원, 관계, 가치와 의미를 살피며 규정짓는 작업이 되어야 한다. 경험은 두 가지 요소를 갖는다. 하나는 외적 감각이며, 그 뒤에는 내적 반성이 뒤따른다. 외적 감각은 단순한 관념을 제공해주나 내적 반성은 복합관념을 만들어준다. 이렇게 생겨진 관념들을 서로 결합시키거나 분리시키는 일이 인식의 임무이며 책임이다. 선천적 기능이나 생래적인 관념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관념은 대상에 의한 객관적인 성질과 반성에 따르는 주관적 성질을 갖는다. 대상에 따른 객관적 성질과 반성에 따르는 주관적 성질을 갖는다. 대상에 따른 객관적 성질을 제 1차적인 관념으로 보면, 반성적인 성질은 제 2의 성질이 된다. 이러한 관념들의 상호 관계에서 이루어진 복합관념이 모든 지식을 만들어간다. 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 존재의 실체를 논해오고 있으나, 그것은 인식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며, 우리가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인식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며, 우리가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그 실체에 의존하는 여러 가지 양태와 두 가지 사물이상의 비교에서 태어나는 관계를 밝히는 것이다. 여기서 동일관계, 차별관계 또는 인과관계가 나타나며, 또 우리는 그것을 밝혀보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로크는 자연과학이나 수학, 기하학보다는 심리적 경험을 존중히 여길 수밖에 없어진다. 데카르트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에 원형관념에 대한 직각적 인식이나 논증성을 반대하지 않으나, 인식의 기본은 역시 경험을 바탕으로 반성하며 전개되는 것이다 .다른 것들은 부수적인 의미를 가질 뿐이다. 이 밖의 문제들에 대해서도 로크는 지도적 역할과 사상적 개척을 소흘히 하지 않았다. 윤리에 있어서는 동기론보다는 결과론을 중시하면서, 많은 사람이 더 많은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성적 가치라든지 의무론 같은 대륙적인 가치관보다는 영국적인 전통을 계승시켰다. 도덕적 원칙이나 원리 같은 것이 본래부터 주어져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과 노력의 확대에서 더 좋은 삶과 사회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종교문제는 그 당시에 있어서도 비중이 큰 문제였다. 로크는 홉스와 같은 무신론을 택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은 철학적으로 받아들일 타당성이 업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은 이신론을 주장했다.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신관이었고, 또 많은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의 이신론을 직접 계승한 학자들도 있었으나, 그의 영향을 받은 많은 철학자들이 있어 후에 계몽주의 시대를 개척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는 교육에 있어서도 뚜렷한 식견을 전개시켰다. 쉽게 말하면 자연주의적 계발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의 타고난 선한 능력과 지적 발달을 무리없이 계발, 성장시켜 나가면 된다는 주장이었다. 지금도 영미 계통의 교육철학의 바탕을 만들어주고 있을 정도이다. 사람들은 J.J. 루소의 선구자였다고 평하고 있다. 로크는 그 당시의 대표적인 교육철학의 흐름을 만들어 주었다. 정치론에 있어서는 홉스의 국가계약설을 발전시켜 입헌정체론으로 정착시켰다. 이는 오늘의 의회민주주의를 육성하는 뒷받침이 되었다. 이런 철학자들의 철학이론이 현실적이며 경험적 전통을 쌓아 올렸기 때문에, 영국사회에서는 예로부터 국민들의 지고자나 영도자는 국회의원, 장관일 수 있어도, 국회의원이나 장관들의 지도자는 학자, 사상가, 교수들이라는 생각이 정착되게 되었던 것이다 정신적 지도자가 현실적 지도자보다 더 중한 책임을 맡으면 한 사회의 이념적 방향과 정신적 성장을 도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눈 위에서 달리는 말'이 '썰매'의 어원 겨울이 되면 썰매를 타고 놀곤 하던 생각이 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지금은 시골의 깊은 산 촌에나 가야 어쩌다 발견하는 것이어서 젊은 사람들 중에는 이 '썰매'를 구경도 못한 사람이 꽤나 있을 것입니다. 최근에 어느 텔레비젼에서 초등학교 학생에게 '인두'를 보이며 이것이 무엇에 썼던 것인 것 같으냐고 물으니까, 한참 들여다 보다가 '화살촉'이 아니냐고 되묻는 광경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어린이들에게 '썰매'를 보이면, '나무깔판'이 아니냐고 되물을 것 같습니다. '썰매'는 엉뚱하게도 한자어입니다. 즉 '설마'(눈 설, 말 마)의 음이 변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눈위에서 달리는 말'이란 뜻이지요. 어떻습니까? 그럴 듯하게 이름을 붙였지요? 이렇게 우리 선조들은 슬기롭게 이름을 붙였었습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3장 죽음과의 악수 - 기독교의 죽음관과 성 이그니티우스, 예수, 죽음의 의미 이그니티우스는 크리스티교의 사도 교부의 한 사람으로, 안티오키아의 사제였다. 로마제국 공인의 신들을 승인할 것을 그는 거부했기 때문에 박해를 박고 체포당하였다. 로마의 원형극장에서 사자에게 죽임을 당하는 사형이 내려졌다. 이 장면은 영화 쿼바디스 나 스팔타카스 에서 우리가 흔히 보았던 장면이다. 그는 스스로 순교를 택했으며 다가오는 사자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이 짐승을 환대해 주기로 하자, 더욱 사나워졌으면 좋겠는데, 만일 나에게 덤벼들 의사가 없는 듯하면, 이쪽에서 먼저 도전하여 힘껏 끌어낼 것이다. 나는 신의 밀알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위한 잡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빵이 되기 위해서는 맹수의 이빨로 빻아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바 생명 이니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오히려 그들에겐 영광된 일이었다. 그리고 언제 죽는가 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죽음으로 부르는 때가 오면 기쁘게 응한다는 자세를 취한다. 왜냐하면 고통이 없는 나라, 하나님이 몸소 계시는 나라, 천국으로 가는 것이기에 기쁨과 희망을 가지고 죽음에 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깨달음의 죽음이 아니라, 어차피 그들의 죽음은 구원과 연결된 죽음이며, 부활과 영생이 약속된 죽음이기 때문이다. 예수, 죽음의 의미 예수의 죽음은 죄없는 죽음이었다. 아담과 하와가 범한 원죄를 속죄하기 위한 죽음이었으므로 대속의 의미를 갖고 있다. 중국의 오주혜박사는 그의 죽음으로 사의 본질이 죄라는 것을 알게 되며 이로써 창조주에게 다가가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예수가 자란 갈릴리는 헤롯안테파스왕의 지배하에 있었다. 로마황제는 식민지 분봉왕들을 감시하기 위해 시리아에는 총독을 보내고, 유태에는 지사를 파견했다. 그래서 유태지사 빌라도는 유월절을 감시하기 위해 가이사랴시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와 머물고 있었고, 갈릴리의 영주 헤롯안테파스 또한 성주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제사장 가야바를 의장으로 한 중의회가 예수를 고발하고 나섰다. 죄목은 신성모독죄였다. 예루살렘의 웅장한 성전을 보고 그의 제자가 찬탄하자 예수는 이런 말을 했다. 마침내 이 성전이 무너지는 날이 오리니, 그때는 돌 위에 하나의 돌도 남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지은 성전 대신에 나는 사흘 만에 다른 성전을 세우리라. 예수의 이 말은 이튿날, 재판에서 성전모독의 발언으로 규탄되기에 이른다. 유월절을 앞두고 예수의 그룹은 당시 둘로 갈라져 있었다. 유다그룹이 떠나고 베드로와 얼마 안되는 제자들만이 남아 있었지만, 예수는 그들마저 자기를 저버릴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제사장 가야바는 성전 경비대를 올리브산 기슭, 착유소로 보냈다. 예수 일행이 거기에 있다고 일러준 것은 유다였다. 경비대원들은 손에 횃불을 들고 막대기와 칼로 무장하고 켓세마네로 향했다. 예수는 죽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겟세마네에서 지극히 번민하면서 그는 죽음의 잔일랑 제발 거두어 주십사 고 하느님에게 간구하였다(마가 14, 34-36). 죽기를 싫어하고 살고 싶어하는 예수는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누가복음>에 기록된 것처럼 예수는 죽음의 불안 때문에 괴로워 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하고 경비대원에게 순순히 끌려가야 했다. 제사장 가야바는 약속한대로 그들의 제자들을 체포하지 않았다. 베드로가 가야바의 관저에서 예수를 부인하고 난 뒤 자책감과 굴욕감 때문에 몹시 울었다는 얘기는 무엇을 뜻함인가? 가야바에게 매수된 유다도 30냥의 은화를 그의 관저 뜰에 내동댕이친 뒤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그의 제자들은 이렇듯 가야바에게 관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중의회는 예수를 계속 추궁하였다.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중의회는 판결에 필요한 수만큼의 증언을 성립시키지 못하자 하는 수 없이 고발 을 무효화시켜 버렸다. 그러나 제사장 가야바는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를 고발하고자 혈안이 되었다. 그는 교묘한 유도 심문을 생각해 냈다. 그대가 그리스도인가? 예수에게 물었다. 그리스도란 메시아 를 의미한다. 그 속에는 유대인의 제왕 과 구세주 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정치적 메시아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로마 점령하에 시달리는 유태인의 독립과 예전의 영광을 회복코자 하는 구세주이니 정치범으로 제소할 수가 있겠고, 정신적인 메시아를 지칭하는 것이라면 신성모독으로 처벌할 수 있는 아주 교묘한 함정이었던 셈이다. 예수는 가야바의 유도심문의 진의를 간파하고 있었다. 내가 말할지라고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않을 것이니라. 어차피 자신의 처형을 전제로 한 것임을 안 예수는 자신을 구세주 라고 말하였다. 예수의 대답에 가야바는 옷을 찢으며 의원들에게 이제 증인을 댈 필요도 없다. 며 유죄를 선언했고 의원들도 이를 인정하여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사형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지사 빌라도의 승인이 필요했다. 가야바는 빌라도에게 예수의 사형을 요구했다. 죄목은 로마에 대한 정치적 반역이었다. 그와 같은 명목을 취하면 군중이 석방을 바라고 있는 제로테의 지도자인 바라바와 교환할 수도 있고, 중의회의 면목을 세우는 것도 가능했기 때문에 가야바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빌라도는 관저 앞에 모인 군중들에게 물었다. 둘중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는가? 군중들은 현실적인 혁명가 바라바를 원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군중은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요구했다. 이 십자가형의 요구는 종교 이단자로서가 아니라 반로마 운동의 정치범으로 말살하려는데 그 의도가 있었다. 빌라도는 바라바를 감옥에서 석방하고, 예수를 매질하게 한 후 군병들에게 넘겨 주었다. 군병들은 예수를 병영에 끌고 가서 옷을 벗기고 붉은 겉옷을 입힌 다음, 병영 뜰에 자라고 있는 에다브라는 가시를 머리에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잡게 하였다. 그에게 침을 뱉으며 조롱했다. 빌라도는 로마법의 관례에 따라 부하에게 죄표를 만들게 했다. 히브리오, 그리스어, 라틴어의 세 나라말로 쓰여진 유태인의 왕 나사렛 예수 라는 죄표를 목에 걸고 십자가를 짊어진 채 예수는 골고다 언덕을 향하고 있었다. 때는 한 낮이었다. 예수는 두 사람의 죄수와 더불어 어께에 기둥을 매고 걸어 갔다. 약 70킬로그램의 무게인 십자가를 메고 비틀거리면서 언덕으로 올라갔다. 처형자들은 자가가 운반해 온 십자가 횡목 위에 반듯이 뉘워졌다. 손에 못이 박혔다. 못 박히는 일이 끝난 다음 끈으로 매달려 졌다. 그리고 마지막 두 개의 못을 마저 쳤다.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에 의식을 마취시키기 위해 신맛을 넣은 포도주를 먹이는게 당시의 습관이었는데, 예수는 이 포도주를 거절했다. 그리고는 고통을 감수했다. 그의 십자가 양쪽에는 두 정치범의 십자가가 더 세워졌다. 이 죽음의 목격자 속에는 중의원 의원, 제사장 가야바, 로마병과 백부장, 예수를 따라온 부인들, 구경꾼등이 있었다. 그러나 진짜 제자들은 사방에 흩어져 예루살렘 주변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 예수의 마른 입술에서 새어나온 말이었다. 대낮부터 오후 세 시까지 무더운 하늘의 해는 숨고 주위는 어두워졌으나(마태복음 27장 45절) 아무런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다. 주여, 주여,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오후 세시, 예수는 마침내 십자가에서 목을 늘어뜨렸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다 이루었다. 예수가 숨을 거두기 직전에 외친 두 마디였다. 그의 나이 서른세 살로 때는 서기 30년 4월 7일이었다. <마가복음>은 3일 뒤에 부활한 예수의 일을 적고 있다. 그의 죽음은 부활 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고, 그러한 부활과 승천을 근거로 창조주를 믿게 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해답의 열쇠를 제시하려 했던 것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요한복음 11장 25절). 예수의 이 한 마디 말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19. 토너먼트라는 말의 숨은 이야기 운동 경기의 방법으로 참가자(또는 팀) 전원이 돌아가면서 경기를 갖는 제도인`리그(league)`와 달리 일 대 일로 겨루면서 진 상대를 탈락시키는 제도를`토너먼트(tournament)`라고 한다. 이 토너먼트는 원래 중세 유럽의 기사들의 마상 시합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세 봉건 사회는 피라미드형 계층제를 형성하고 있었다. 봉건 사회의 인적 구성을 비유적으로 `기도하는 사람`, `싸우는 사람`, `일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는데 각각 성직자, 기사, 농노를 가리킨다. 여기서 싸우는 사람인 기사는 맨 말단인 평기사뿐만 아니라 말을 탄 전사라는 의미에서 봉건적 지배계급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기사는 중세의 정치 군사적 지배자일 뿐만 아니라 토지 보유자로서 경제 지배자이기도 했다. 이 기사들의 주된 임무는 당연하게도 전쟁이었다. 유력한 제후들은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고, 평기사는 주군에 대한 봉건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또 전리품 배분을 노리고 전쟁에 참가했다. 따라서 기사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용맹과 충성심이었다. 그런데 11세기 이후 사회가 안정되고 상업이 부활하면서 기사들의 생활도 변했다. 전반적으로 생활이 풍요로워졌을 뿐만 아니라 거친 전투 기질이 완화되면서 생활 방식이 세련되어 갔다. 여기에는 전쟁과 전투를 줄이거나 완화하려는 교회의 노력도 한몫 거들었다. 이런 변화를 반영한 것이 토너먼트 즉 마상 시합이었다. 이것은 대략 11세기경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이후 봉건 기사들의 가장 큰 행사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처음에는 실전과 마찬가지로 진행되었는데 두 기사 집단이 단체로 싸워 상대편을 한 명이라도 더 많이 말에서 떨어뜨리는 쪽이 승리하는 시합이었다. 이긴 쪽은 진 쪽으로부터 무기나 갑옷, 말 등을 빼앗거나 포로로 잡고 나중에 몸값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이런 마상 시합만 전전하면서 돈을 버는 기사도 나타났다. 동시에 평화시에 무예를 연마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에 이를 장려하는 국왕도 나타났다. 그러나 위험한 경기였기 때문에 부상을 입거나 죽는 기사도 많아서 왕자의 시합 참가는 금지되기도 했다. 이후 이 난폭한 경기는 점차 일 대 일 시합으로 바뀌었으며 무기도 인체에 손상을 주지 않는 것으로 변했다. 그리하여 15세기 이후가 되면 국왕이나 세도 있는 귀부인 앞에서 화려한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의 경기가 되었고 시합에서 우승하는 것이 기사 최대의 명예로 되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프랑스의 국왕 앙리 2세는 마상 시합 중 상대방의 창에 눈이 찔려 급사하기도 했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6. '일개 여편네'가 떠들 일이 아닌 인구문제 미국과 서구 국가들-바티칸을 포함하여- 중국의 인구정책을 계속해서 문제 삼으며 대대적으로 공격하였다. 클린턴 부인 힐러리는 베이징에서 열린 제4차 세계여성대회에 참석하여 중국의 여성들은 아이를 몇 명이나 낳을 것이며 몇 살 터울로 낳을 것인지 등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한바탕 중국을 힐책하였다. 이런 권리는 인권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베이징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부시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후 중국을 방문하여 떵샤오핑의 접견을 받았다. 두 사람이 대화 하는 중에 부시는 중국의 인구 억제정책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였다. 떵샤 오핑은 잠시 생각한 후, '우리는 당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는 있습니다.하지만 매년 증가하는 최소 2천3백만 명의 거대한 인구를 중국은 더 이상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네 미국이 중국의 2천3백만 명에 해당하 는 이민 할당액을 늘려 줄 수 있습니까? 물론 가능하겠지요?' 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의에 부시는 깜짝 놀라 억지로 웃으면서 '그럼, 다음으로 양국의 문화교류 문제를 얘기해 봅시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우스갯소리 같지만 아주 현실적인 문제를 말해 주고 있다. 중국에서 만약 가족계획을 시행하지 않거나 혹은 인구 억제정책을 가장 기본적이고 장기적인 국책으로 삼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아주 처참해질 것이다. 이는 중국뿐 아니라 세계 모든 나라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프레이저 전 총리는, '미국은 중국의 인구정책에 대해 비판할 권리가 없다고 지적하면서 '사실 사람들은 중국의 인구정책을 고맙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그는 또 미국의 행위를 깊이 분석하여 바늘로 찌르듯이 정확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그는 '미국은 자신이 늘 정확하며 자신에게 반대하는 것은 틀리다고 믿고 있다. 미국은 줄곧 자신의 관점에 도덕적인 색깔을 입히고 반대의견에는 비도덕적이라는 딱지를 붙여왔다'라고 하였다. 정말 일리가 있는 말이다. 서구 국가들이 반중국의 소리를 높이고 있는 가운데서도 정직하고 전략적 안목을 지닌 정치가 프레이저가 자신의 관점을 고수하며 이를 세상에 알린 것은 참으로 존경스런일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의 인구정책은 마땅히 역사적인 안목과 지혜를 가지고 미래지향적으로 이해하고 분석하여야 할 일이지 결코 '일개 여편네의 관점'에서 가타부타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인구이화(人口異化)'라는 개념을 도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자식을 낳고 기르는 것은 신성하고 아름다운 것이며 그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생명을 지속시키고 인류문명을 보존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원동력인 것이다. 그러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면 지구는 발디딜 틈도 없게 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구체적으로 12억에 달하는 거대한 인구를 가진 중국은 자원도 풍부하지 않고 농경지는 갈수록 적어지는 등 상당히 어려운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 '사람이 많으면 인적자원이 풍부해진다'라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중국이 20억 혹은 25억의 인구를 가지게 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지게 될지는 한 번상상해 보라. 기아, 빈곤, 구걸, 전염병, 내란 등과 같은 현상이 복합적으로 나타나지 않겠는가? 아이를 낳아도 따뜻한 밥을 먹일 수 없고 좋은교육을 받게 할 방법이 없다면, 중국의 미래가 암담해질 뿐 아니라 이로인해 전세계의 미래도 심각한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미국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중국의 난민이 2천3백만을 넘고도 남을 것이다. 중국의 농촌과 변방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아직도 '다산다복 "후손이 없는 것이 가장 큰 불효이다'라는 전통적인 생육관에 사로잡혀 있다. 중국 정부는 이런 사고방식을 타파하기 위해 그동안 많은 노력을 해왔다. 아울러 중국의 지도자들은 여러 국제적인 모임에서 '국민의 발전할 권리' 를 역설하였고, 급속하고 무절제한 인구팽창은 결국 민족의 발전을 물거 품으로 만들 것이며 역사의 퇴보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인권운동가들은 왜 이 점은 간과하는지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다. 그들이 천박하고 편견을 가지고 있거나 독선적인 것이 아니라면 다른 어떤 속셈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이런 가정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정부와 미국 의회에 중국의 모든 행정업무를 맡긴다면 그들은 중국의 팽창하는 인구에 대해 어떤 정책을 취할까? 아마도 처음에는 몇 명의 자녀를 낳든지 어느 시기에 낳든지 이는 모두 기본적인 인권이니 마음대로 낳아 기르자고 할 것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혀를 잘라 버리고 싶을 정도로 자신의 입을 원망하게 될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역사발전의 단계와 역시속에 누적된 국민성을 고려하지 않은 정책은 미친 사람의 잠꼬대에 지니지 않게 될 것이다. 얼마 전 서구 국가에 의해 공포스럽게 과장 보도된 '고아원-죽음의 집'이라는 사건은 중국 정부에 대한 그들의 음모를 여실히 보여준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미국과 영국의 신문들이 '중국의 어느 복지원에서 온 의사'의 말만 듣고 진상을 알아보려는 노력은 추호도 하지 않은 채 제멋대로 추측하고 왜곡하여 '중국 정부는 고의적으로 고아들을 열악한 환경에 방치하여 죽게 하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적어도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 결론에 대해 콧방귀를 터트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중국 정부가 인성을 말살하고 하늘과 땅을 속여가며 이렇게 많은 고아들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는 것인가? 아니면 이것도 바로 중국이 펼치고 있는 '인구정책'의 일환이란 말인가? 우리가 베이징, 칭따오(淸島), 말쩌우(蘭州), 이우(義烏) 등지에 있는 고아원을 방문하여 얻은 1차적 자료에 의하면 {뉴욕타임즈}와 영국의 어느 Tv 방송국의 보도는 완전히 중국의 현실을 왜곡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왜곡과 모함은 이미 부끄러움을 모르는 위험수위에 이른 것으로,그 목적은 '사악한 악마의 제국'으로 중국을 묘사하여 세상에서 영원히 고립시키려는 데 있는 것이다. 칭따오의 한 고아원에는 피아노와 전자오르간 및 각종 완구들이 가득했다. 두 아이가 우리를 위해 피아노를 연주할 때 다른 아이들은 피아노 소리에 맞춰 노래를 불러 주었다. 영국 방송국은 이런 광경은 왜 찍어 가지 않는 것인가? 란쩌우의 고아원은 아주 잘 지어진 2층 건물이었다.우리는 마침 오후 간식시간에 도착하였는데 만두와 케이크, 그리고 바나나가 모든 아이들에게 돌아갔다. 이런 광경을 {뉴욕타임즈}는 왜 보도하지 않는가? 이유는 간단하다.서구에서 말하는 이른바 '언론의 자유'라는 것은 점차 엽기적 자유, 망상의 자유, 편견의 자유와 지독한 중국 저주의 자유로 채워져 있는 것이다. 그들은 먼저 중국을 사악하고 포악한 국가로 정해놓고 이 점을 증명할 방법을 찾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일관된 행동방식이다. 중국 정부는 한 민족에게 치유될 수 없이 극단적인 정신적 손상을 입힌 그들을 정정당당히 기소해야 할 것이다. 싱가포르의 리꽝야오 수상이 취한 방법처럼 그들을 중국법정에 세우든지 미국이나 영국의 법원에 고소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국제사회에서 자신의 의견을 밝히고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는데 결코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아울러 더 많은 서양인들이 우리의 고아원에 와서 그 아이들과 대화하게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악의를 가지지 않고 만난다는 조건이 붙어야 할 것이다. 독직하거나 책임감이 결여된 사람들이 어떤 분야에나 있는 것은 중국이든 외국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건이 이러한 사람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면 이 한 사건에 국한시켜 논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고아원에서 일하는 한 사람이 자기의 직무에 소흘하여 원아들에게 해악을 끼켰다고 그 누명을 온 나라에 뒤집어 씌울 수는 없는 것이다. 얼마 전에 스코틀랜드에서 어떤 청년이 십여 명의 아이들을 총으로 쏴 죽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영국 방송국은 메이저 정부에 대해 직접적인 비평을 하지는 않았다. 미국에서 총기사건이 그렇게 많이 일어나는 것은 개인이 총기와 탄약을 소지할 수 있게 미국법으로 허락하였기 때문이고, 따라서 총기에 의해 사망하는 무고한 사람들은 모두 미국 정부의 음모에의해 살해되었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미국인들은 이를 받아 들일 수 있단말인가? 인구 억제정책을 강력하게 시행하는 것은.매년 태어나는 어린 생명들에게 배고픔을 주지 않으려 함이고, 교육을 못 받아 현대문명으로부터 버림 받는 일을 막자는 것이고,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한 인간으로 만들어 인류의 평화와 번영에 이바지하도록 하자는 의도에서다. 우리는미국을 위시한 서구 국가에 대해. 자유의 여신상 손에 들려진 흰불로 자신들 나라에 깊이 박힌 추악함과 인류발전을 저해하는 갖가지 현샴딜을비추어야 보아야 할 것이라고 층고하고 싶다. 여신도 자세를 바꾸어 눈을감고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게 해야 한다. 다른 사람 몸에 든 가시에만 신경을 쓰다 보면 자기 눈에 박힌 기둥뿌리는 모르는 법이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보물찾기 한 시골 국민학교 뒷산에서 보물찾기 대회가 열렸다. 국민학교를 졸업한 지 30여년 만에 모교를 찾은 졸업생들이 재학 시절의 은사님을 모시고 소풍을 간 것이다. "자 동창생 여러분, 오늘의 마지막 순서로 보물찾기를 실시하겠습니다. 오늘의 이 보물찾기는 아주 이색적인 것으로, 우리들의 영원한 스승 김판영 선생님께서 제안하신 것입니다. 김 선생님께서는 여러분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난 후 지금까지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될 소중한 보물들을 많이 잃어버렸다고 하시면서 이제는 그것들을 다시 찾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 동안 잃어버리고 만 그 소중한 것들을 다시 찾고자 합니다. 자, 다들 보물을 찾으러 출발하십시오. 지금이 오후 세 시니까 오후 네 시까지 딱 한 시간 동안의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예전에 우리들이 소풍을 와서 보물을 찾았던 저 산꼭대기까지 바위틈이나 나뭇가지 등을 살펴보십시오. 그곳에 보물을 가리키는 종이쪽지가 숨어 있을 것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찾아오시는 분께 가장 큰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20여 명의 졸업생들이 5월의 신록 속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마에 주름살이 깊게 패인 김판영 선생은 보물을 찾으러 떠나는 제자들을 지켜보며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한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졸업생들은 대부분 손에 종이 쪽지 한 장씩을 들고 다시 사회자 앞으로 모여들었다. 사회자 앞에는 예쁘게 포장된 많은 상품들이 쌓여 있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가장 큰상을 받기를 원했다. "자, 여러분. 지금부터 여러분이 찾은 보물에 대한 시상이 있겠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찾아오신 분께 김 선생님께서 직접 시상을 하시겠습니다. 한 사람씩 차례대로 종이 쪽지를 건네주시기 바랍니다." 사회자가 말을 마치자 임산부처럼 배가 툭 튀어나온 졸업생이 먼저 쪽지를 내밀었다. 거기엔 '우정'이라는 말이 씌어 있었다. "네, 그렇군요. 그 동안 우리들은 정말 소중한 우정을 잃어버리고 있었군요." 사회자는 그 사내에게 조그만 탁상시계 하나를 상품으로 주었다. 다음은 대머리가 된 사내가 쪽지를 내밀었다. 거기엔 '인내'라는 글씨가 씌어 있었다. "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 쇠꼴을 먹이면서부터 길렀던, 가난을 참고 견디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말았군요." 그 다음은 청바지에다 남방셔츠를 입은 사내가, 또 그 다음은 십자가 금목걸이를 한 아주머니가 '희망'이나 '시간'이니 하는 쪽지를 내밀었다. 그때마다 자그마한 상품들이 주어졌다. 사람들은 모두 '사랑'이라는 쪽지를 찾아온 사람이 가장 큰 상품을 차지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트 형태의 커다란 귀걸이를 한 아주머니가 '사랑'이란 글귀가 씌어진 쪽지를 내밀어도 그 아주머니에게 돌아간 상품은 고작 압력 밥솥이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궁금해했다. 누가 일등을 할 것인가, 누가 가장 큰 상품을 탈것인가 하고 시상대 위에 놓여 있는 가장 크기가 큰 상품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러나 마지막 시상식이 다 끝날 때까지 그 상품을 가져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보물찾기를 제안한 김판영 선생이 나서서 제자들 앞에 한 말씀뿐이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을 만나서 퍽 반갑기도 하지만, 또한 퍽 유감이기도 합니다. 그건 여러분들이 가장 소중한 보물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분명 사랑입니다. 잃어버린 사랑은 반드시 찾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희생이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여러분, 사랑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어머니들의 희생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머니의 사랑, 그것은 바로 희생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이 '희생'이라는 보물을 꼭 찾아 줄 것을 기대했습니다." 글터 → 이글저글 바다표범 수컷은 최대 3개월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잠을 자자 않고도 살 수 있다.공룡의 몸은 거대하지만 뇌는 개의 것보다 더 작다. 스테고사우러스의 뇌는 도토리알만 하다.아프리카 호수에서 사는 시클리드과 열대어들은 알을 붙이고 다니다가 부화하면 새끼들을 입 속에 넣고 다닌다. 위험이 없을 때만 새끼들을 입 밖으로 내보내고 먹이를 먹는다. 그들이 어떻게 자신의 새끼들을 삼키지 않을 수 있는지 신기한 일이다. 또 주머니 개구리 수컷은 암컷이 알을 낳자마자 알들을 뒷발로 쓸어모아 등에 바른다. 알들은 끈적끈적해서 굴러떨어지지 않는데, 몇 시간 안에 수컷의 등 피부가 부드러워져서 알들은 움푹 파인 등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그 위에 피부가 한 겹 자라난다. 올챙이들은 거기에서 자란다. 다윈 개구리 수컷은 새로 태어난 알들을 입으로 빨아들여 목에 있는 특별한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새끼는 그 속에서 작은 개구리가 될 때까지 자란다.코브라가 내쏘는 독액 1그램은 150명의 사람을 죽이고도 남는다.악어에 대한 모든 것, 아프리카에서는 사자보다도 악어에 물려 죽을 확률이 더 높다. 악어는 다른 악어도 잡아먹는 잔인한 동물로서 먹이를 씹지 않고 한꺼번에 삼킨다. 먹이가 일단 위 속에 들어가면 위액이 나와 함께 삼켜진 쇠붙이도 녹여내며, 잔 돌맹이들도 갈아서 분해시킨다. 또 악어의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지기도 하는데 이건 울음이 아니라 그저 먹이에 의해 섭취된 염분을 배출하는 단순한 생리작용일 뿐이다. 악어는 혀를 움직일 수 없고 항상 새로운 이빨이 생겨나와 날카로운 상태가 유지된다. 만약 사람이 육지에서 악어에게 쫓긴다면 설사 육상선수라 해도 살아나기 어렵다. 하지만 악어는 갑자기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없으므로 지그재그로 달린다면 위기를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