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첫쪽 ♧……………독서편지 T기본글꼴 기본글꼴✔ 나눔고딕✔ 맑은고딕✔ 돋움✔ ✔ 뷰어로 보기 2006.11.19 08:49 【독서편지】: 제 64 호 風磬 조회 수 8,660 추천 수 31 댓글 0 게시물 주소복사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독서편지】: 제 64 호4339.11.19 (09.29)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용량제한으로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 않보이시는 분은 저의 블로그 또는 아래의 링크를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문학소식 글터 → 명언 / 격언 급진주의자란 두 다리가 모두 허공에 둥둥 뜬 사람. / 프랭클린 D.루즈벨트 글터 → 수필 내잠 속에 비내리는데 - 이외수 맞기만 하는 권투선수 왜 그는 링 위에 오르기만 하면 샌드백으로 변해 버리는 것일까. 왜 그는 상대편처럼 날렵한 몸놀림으로 펀치를 날릴 수가 없는 것일까. 왜 그는 텔레비젼에까지 나와서 범국민적으로 욕을 얻어먹어야만 하는것일까. 저 새끼 저걸 권투라고 하나. 아니, 그럼 저게 권투였단 말인가 ? 난 지금까지 발레를 보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런 소리를 들어가면서까지 권투를 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차라리 권투를 집어치우고 하교 시간의 국민 학교 정문 앞에서 양팔벌리기를 하고 애들한테 한 대씩 얻어 맞을 때마다 백 원씩만 받아도 지금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지만 웃기지 마시라. 그를 욕하는 당신의 모든 입장을 그와 똑같이 만들어 놓으면 당신도 틀림없이 그렇게 두들겨 맞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모든 일을 언제나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려고 드는 악습이 있다. 그런데도 때로는 별로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곧잘 다수의 의견에 쉽게 표를 던져 버리는 악습도 있다. 만약 남을 욕할 일이 생겼을 경우에는 우선 입장부터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볼 일이다. 한참 동안 욕을 하면서, 그건 바로 그런 경우에 처해 있는 자신을 욕하고 있음을 문득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인생이란 예측을 불허하는 것이어서 살다 보면 당신도 어느 때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법이다. 당신 자신이 그런 경우를 당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혹시 당신의 아들이나 친척 중의 누군가가 그런 경우를 당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특히 프로 권투 세계 타이틀 매치를 가지게 되면 사람들은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텔레비젼을 시청하는데, 만약 우리나라 선수가 두들겨 맞기만 하다가 지는 경우에는 거액을 놓고 도박을 걸지 않은 사람들까지 온통 흥분을 해서 병신 같은 자식이니 멍청한 자식이니 하는 욕설들을 퍼붓는다. 나는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약간은 귀에 거슬린다는 느낌을 받는다. 되도록이면 한번쯤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을 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 어떤 경우에도 전혀 입장을 바꾸어 놓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공상에의 권유 그대여, 공상하라. 공상은 참으로 오묘하다. 혹자는 공상이 비현실적이고 비생산적이며지극히 허무맹랑한 유희에 불과하다는 이유에서, 의식적으로 그것에천착하는 것을 회피해 버릴는지도 모른다. 또 혹자는 복잡다단한 생활의 틈바구니에서 허겁지겁 쫓겨다니느라 미처 공상 따위에 시간을 할애할 만한 마음의 여유조차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상이란 결코 허무맹랑하거나 비생산적이거나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이 공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실현할 수가 있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공상이야말로 창조의 어머니며 발전의 실마리다. 공상이 없다면 아무것도 창조되어지지 않으며 아무것도 발전되어지지 않는다. 현대인치고 정신적으로 피로해 있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어느 정신과 의사의 말은, 바로 현대인치고 정상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이 없다는 말의 조심스러운 표현이겠는데, 그 말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모든 현대인은 누구나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말이 아닐는지. 그러나 정신적으로 피곤하면 피곤할수록 공상을 한번 해보시라. 세상이 아니꼽고 메스껍고 치사하고 더럽다는 생각이 들면 들수록 공상을 한번 해보시라. 공상은 그대 머리속에 설치되어져 있는 완벽한 천국이다. 무엇이든 가능하다. 단 몇 분간의 공상으로도 그대는 쉽게 세상에 대한 원한을 풀 수가 있다. 가령, 어느 회사의 말단 사원이 이세상에 존대말이 없어진다면, 하는 공상을 하기 시작했다고 치자. 어떤 현상들이 일어날 것인가. 그 말단 사원은 사장에게 이런 투로 말하게 될 것이다. 사장, 이제 출근하냐 ? 월급 좀 올려 주라. 결재 서류를 가지고 오란 말이지. 그래 알았어. 사장, 퇴근 안 하냐 ?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는 해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의 아랫사람이 그대에게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그건 좀 기분이 나쁠 것이다. 그렇지만 공상이란 마음대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으므로, 자기에게 불리한 공상이 시작되어질 낌새가 보이면 재빨리 다른 공상으로 옮겨 버리면 된다. 그대의 공상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므로 그대는 죄책감 따윈조금도 느낄 필요가 없다. 공상 속에서는 아무런 절차도 없이 자유자재로 신분과 지위와 명예와 재산과 명성과 존망 따위를 획득할 수가 있다. 심지어는 신까지도 되어 볼 수가 있다. 내가 만약 신이 된다면,하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그대는 신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공상을 하는 데도 자기 분수가 있는 법. 만약 그대가 자질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사람이라면 신이 된다고 하더라도 조잡한 짓밖에는 못할 것이다. 공상을 하더라도 되도록이면 자기 분수에 맞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또 되도록이면 좀 고상한 공상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겨우 권총을 들고 은행을 털어서 흥청망청 돈을 쓰거나, 남의 집 담을 넘어 들어가 처녀들이나 겁탈하는 따위의 공상을 한다면 그대는 참으로 멍청한 인간이다. 공상 속에서는 얼마든지 거부가 될 수도 있으며 삼천궁녀를 거느릴 수도 있는데, 하필이면 그런 공상 따위로 자신의 품위를 떨어뜨릴 필요가 있겠는가. 그리고 반드시 이 비좁은 지구의 삼차원 속에서만 꾸물거릴 필요가 있겠는가. 몇 억 광년 거리의 별에도 좀 갔다오고 보잘것없는 빈대 따위로 환생도 좀 해보는 게 어떻겠는가. 더러는 모든 인간들의 가슴에 충만한 빛과 사랑도 넣어 주고, 또 더러는 노래와 춤만 가득한 나날들을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떻겠는가. 그 무한한 능력을 가진 공상의 세계에서도 겨우 개인적인 이익에만 급급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정말로 불쌍하기 짝이 없다. 좋은 공상을 하는 사람은 평소에도 반드시 좋은 일을 할 수가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선은 자신의 가슴을 항시 맑게 다스리며 살아가고 볼 일이다. 사실 모든 것의 근본은 마음 안에 있는 것이어서 그대의 공상은 곧 그대의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괴롭고 부끄러운 사실은 우리가 공상 속에서, 내가 만약 신이라면,하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엄연히 우리가 인간으로서 현실에 존재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속수무책인 우리들 범인으로서의 비극이자 희극인 것이다. 따라서 공상 끝에는 언제나 허무와 절망이 도래하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허무와 절망을 느끼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공상을 할 필요가 있다. 공상이야말로 자신의 존재를 비극적으로든 희극적으로든 거듭확인시켜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군대 가는 사람 따로 있었다 - 권영국 군대 생활은 얼마 동안 하였나 오늘날 군인들의 복무기간은 육군이냐, 공군이냐, 해군이냐 또는 현역이나 보충역이냐 등의 조건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6개월에서 30개월 정도이다. 고려시대 군인의 복무기간은 원칙적으로 16세에서 59세까지였다.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군대 생활로 보내는 셈이다. 물론 지금도 현역으로 제대한 후에는 예비군이 되어 1년에 며칠씩 군사 훈련을 받아야 하고, 또 제대 후 8년 동안 예비군으로서의 의무가 끝난 다음에는 민방위에 편성되어 40세에 이르기까지 1년에 몇차례씩 소집에 응하여야 한다. 군인들의 복무 기간이 16세에서 59세까지라고 하여도 44년간을 계속 군대에 매여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3년에 한번씩 교대로 개경에 올라가 경비하거나 양계 지역에 들어가 국경을 방어하였다. 따라서 16세에서 59세에 이르기까지 1년은 군복무를 하고 2년은 자신의 고향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식의 군대 생활을 반복하는 셈이다. 그러나 실제로 40여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이러한 군복무를 계속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20,30대의 건장하고 젊은 동안에는 3년에 한번씩 교대로 개경에 올라가 경비하거나 변경에 나아가 국경을 지키는 군생활을 반복하였겠지만, 고된 군복무를 하기 어려운 나이가 되면 오늘날 예비군과 비슷한 군사조직에 편입되어 자기 고향에서 향토를 지키거나 지방의 치안을 담당하는 정도의 가벼운 일을 하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도 오늘날의 군복무 기간인 2,3년에 비하면 엄청나게 긴 기간 동안 군생활을 하여야 했다. 군사 조직은 어떠하였나 군사 조직에는 크게 중앙군과 지방군이 있었다. 2군 6위로 구성된 중앙군은 그 기능에 따라 국왕과 궁성을 호위하는 부대와 수도 개경을 경비하는 부대로 구분되었다. 2군 6위의 전체 병력은 편제상으로 4만 5천명이었다. 그 가운데 3만 8천명은 지방에서 교대로 개경에 올라와 도성을 경비하는 농민 의무병이었으며, 나머지 7천명 정도는 직업군적 성격의 전업군인이었다. 지방군은 지역에 따라 남도의 주현군과 국경의 주진군으로 구분되었다. 주현군은 보승군,정용군, 일품군 등 오늘날의 현역병과 같은 성격의 군인과 2.3품군으로 불리우는 예비군적 성격의 군인으로 나뉘었다. 주진군은 동북면과 서북면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초군. 좌군. 우군. 보창군. 영새군 등의 여러 부대로 조직되었다. 특히 국경지역에는 토착주민으로 조직된 주진군 이외에 남도 주현에서 교대로 수자리하러 오는 방수군이 주둔하였다. 주현군의 수는 현역병이 약 5만여 명 정도였고 예비군의 성격의 군인은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한편 국경지역은 적과 바로 인접하고 있기 때문에 거의 모든 장정이 주진군 조직 속에 편입되어 그 수는 약 14만명 정도였다. 군복무 중에 하는 일들 군대 생활은 형식이나 절차, 내용 등에서 오늘날과 많은 차이가 있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군인들은 전방에 배치되어 휴전선을 지키거나 후방에서 향토를 방위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고려와 같은 왕조국가에서는 국경을 지키는 것 못지않게 국왕이 거처하는 궁성과 도성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였다. 따라서 수도인 개경에는 많은 군인을 배치하였다. 군복무의 구체적인 내용은 부대와 병종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먼저 중앙군인 2군 6위의 주된 임무는 왕실과 도성을 경비하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 2군은 국왕의 신변과 궁성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고, 6위는 개경을 경비하고 도성 안의 치안을 유지하였다. 중앙군의 또 하나의 임무는 양계 지역에 들어가 국경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국경의 수비는 1년을 단위로 교대하였는데 비상시에는 그 기간이 더 길어졌다. 이것은 군인의 임무 가운데 가장 힘들고 무거운 것이었으며 복무 기간 중이나 왕래하는 도중에 죽는 군인도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에서는 이들의 시체를 수송해 주고 장례비용을 지급해 주는 등 군인 가족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를 하였다. 이들은 또한 외적의 침입이나 내란이 일어났을 때 이를 진압하는 데 동원되었다. 이러한 출정시에는 중군, 좌군, 우군, 전군, 후군의 5군이나 중군, 좌군, 우군이 3군으로 편제되었다. 지방군 역시 병종과 부대에 따라 임무에 차이가 있었다. 남도의 주현군 가운데 보승군과 정용군은 교대로 개경에 올라와 자신이 속한 중앙의 6위에 각기 소속되었다. 이 밖에 그들은 중앙과 지방의 각종 노역에도 동원되는 한편 일부는 교대로 지방관아 소재지에 나아가 향토 방위와 치안을 유지하였고 비번시에는 거주지에서 생업에 종사하였다. 주현군 가운데 1. 2. 3품군은 성을 쌓거나 다리를 놓거나 궁궐을 짓거나 제방을 쌓는 등의 각종 노역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이들 품군도 비상시에는 모두 전투에 동원되었을 것이다. 주진군의 임무는 국경 지역의 방어였다. 이들은 성을 견고히 하여 굳게 지켰다. 고려가거란, 여진, 몽고 등 북방으로부터의 침입을 받으면서 이들을 매번 물리칠 수 있었던 저력은 다름아닌 이 주진군의 활약에서 나왔던 것이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품군이라는 노동부대가 따로 조직된 것이 한 특징이기도 하였지만, 일반 군인들도 중앙이나 지방에서 벌어지는 온갖 노역에 동원되었으며 이러한 노역동원에 대한 군인들의 누적된 불만은 무인정변을 일으키는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로 작용되기도 하였다. 군량과 무기는 어떻게 마련하였나 오늘날에는 군에 입대하면 자신이 입고 간 옷이나 신발을 비롯한 소지품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군생활에 필요한 군복. 군량. 무기 등 군수품 일제를 국가로부터 지급받는다. 몇 푼 안되는 액수이지만 월급까지 받는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군복이나 군량은 물론 무기까지도 군인이 스스로 마련해야 하였다. 그러면 그들은 이러한 군수품들을 어떻게 마련하였을까? 고려사에서 “국가는 기름진 땅을 나누어 42도부 갑사 10만여 인에게 녹으로 주었다. 그 때문에 그들의 옷과 양식과 무기가 모두 토지에서 나와 국가에서 따로 군사를 양성하는 비용이 없었다”라고 한 것처럼, 국가에서 군량. 의복. 무기 등을 지급하는 대신 군인전이라는명목의 토지를 지급하여 군복무에 필요한 비용을 군인 스스로 조달할 수 있게 하였다. 군인전은 전업 군인과 의무 군인 모두에게 지급되었는데 지급 규정이나 토지 지배에 많은차이가 있었다. 전업 군인의 군인전은 관리에게 지급되는 토지와 마찬가지로 전시과 규정에 따라 지급 되었다. 이들의 군역은 문무관리의 관직과 같은 직업의 성격을 띤 것이므로, 이들의 군인전은 관리에게 지급된 토지와 성격이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토지는 원칙적으로 자기 소유토지에 대해 수조권을 지급하는 형태로 조세를 면제받았다. 그러나 토지가 없거나 부족한 경우에 한해 타인의 토지에서 수조권을 지급받았다. 의무 군인도 역시 군인전이라는 토지를 지급받았다. 그러나 이들에게 지급된 군인전은 전업 군인에게 지급된 그것과는 성격이 달랐다. 이들은 일정한 규모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부농층이었으므로, 이들의 군인전은 본래 경작하고 있는 토지에 대해 군인전이라는 명목을붙여 조세를 면제해 주는 것이었다. 전업 군인은 직업 군인이었므므로 복무하는 기간 내내 군인전을 보유하였던 반면에, 의무군인의 경우는 실제 군인으로 복무하는 기간에 한해 군인전을 주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즉 개경에 올라가 도성을 경비하거나 변경수비에 나아간 기간에 한해서만 그의 소유토지에 대해서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 그리고 복무 기간동안의 군인전 경작과 군량 수송등을 위해 군인을 도와주는 양호를 지급하였다. 따라서 의무 군인의 경우 16세에서 59세까지 군역을 지는 기간이라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군복무를 하는 기간에 한해서만 군인전을 지급하였고 나머지 기간에는 일반농민과 마찬가지로 조. 용. 조의 3세를 비롯한 각종 국역을 부담하였다. 군인전의 지급 액수는 지급 시기와 병종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전시과에 규정된 전업 군인의 경우 대체로 20결에서 25결 내외를 지급받았다. 그런데 고려 후기 공민왕때에 ‘예전에 국가에서 토지 17결을 1족정으로 삼아 군인 1정에게 지급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전시과 규정과는 다른 계통의 자료로 바로 이것이 의무 군인에게 지급한 군인전에 관한 내용일 것이다. 즉 전업 군인이 아닌 의무 군인에게 17결을 1족정으로 하는 군인전을 지급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의무 군인들은 대부분 17결, 즉 1족정의 토지를 지급받지 못하였다. 족정과 반정이라는 구분이 바로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대부분의 군인전은 족정인 17결을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에 미치지 못하는 7,8결 정도의 토지를 반정이라 불렀다.1결의 면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약 1,500평 정도로 보는 견해에 따른다면 반정을 받은 대부분의 의무 군인은 약 1만평 정도의 토지를 군인전으로 받은 셈이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그리움을 참으면 별이 된다. 도자기와 청자 한갑 대학교 사학년 교생 실습을 나가서 겪은 일이다. 나는 분단별로 돌아가며 아이들과 점심을 같이 먹었는데 아이들의 시선은 늘 도시락 반찬에 집중되었다. 나는 그런 시선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같이 먹는 아이들이 골고루 하나씩은 먹을 수 있도록 항상 반찬의 가짓수를 조절했다. 그런데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 나는 학생이 점심 시간만 되면 슬그머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엔 그냥 화장실이 급해서 그러겠지 생각했는데 식사가 다 끝나도록 그 학생은 들어오지 않았다. 몇몇 학생들에게 물어보니 아버지가 막노동을 하여 생계를 꾸려 나가는데 식구가 여덟 명이나 되어 도시락은 엄두도 못 내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다음날부터 난 두 개의 도시락을 준비했다. 그리고 학교에 일찍 가서 그 아이의 책상안에 도시락을 몰래 넣어 두었다. 다행히 그 아이가 도시락을 맛있게 먹어 주어서 참 기뻤다. 사주 동안의 교생 실습이 끝나 나는 그 일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저런 아쉬움 속에 교정을 걸어 나오는데 누군가 자꾸 따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교문을 벗어나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데도 이상한 느낌이 들어 몇대의 차를 그냥 보내고 있을 때였다. 한 학생이 내 앞으로 쭈뼛거리며 다가섰다. 세수도 안 한 얼굴, 더러운 교복, 구멍난 운동화의 주인공은 내가 도시락을 싸다 주엇던 바로 그 아이였다. "내게 할 말이 있니?" 그 아이는 대답도 없이 가만히 서 잇다가 내 손에 무언가 쥐어 주고는 얼른 도망가 버렸다. 신문지로 돌돌 말린 포장을 뜯었을 때 그 속에서 청자 담배 한 갑이 나왔다. 아마 내 기억으로는 그 당시 백 원쯤 하던 담배였는데 그 아이에겐 상당히 큰 돈이었을 것이다. 점심도 제대로 못 먹는 그 아이가 백원이나 되는 돈을 모으려고 얼마나 고생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난 그 담배를 오랫동안 간직하며 조금씩 아껴 피웠다. 그 아이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 말을 꼭 전해 주고 싶다. 이십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 청자 한 갑의 선물을 가슴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고..... 장달순 님/경남 하동군 하동읍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54 -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토머스 홉스 (1588-1679) 그때 세계에서는- 1667년: 존 밀턴 "실락원"저술 1688년: 네덜란드, 하멜의 "조선표류기 조난기" 간행 토머스 홉스 (1588-1679) 지금까지 대륙 중심의 합리주의 철학을 얘기했기 때문에 자연히 우리는 이야기의 순서를 영국쪽으로 전개시켜야 할 것 같다. 모든 점에서 이 두 분야는 대조적인 발전을 오늘까지 지속시켜오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로저 베이컨은 성직자로 있으면서 자연과학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그 자신이 실험실에서 새로운 연구활동을 전개했다. 그것은 영국적 전통을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근대화 및 현대화 과정에 출발점을 만들었다. 그 뒤를 계승한 프랜시스 베이컨은 다시 그 흐름을 경험주의 철학으로 발전시키는 결실을 안겨주었다. 근대철학의 창시자의 한 사람이 된 것이다. 이런 사상적 후계자로 나타난 한 자유로운 철학자 또는 광범위한 사상가가 우리가 잘 아는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였다. 그도 또 일찍 자신의 재질을 발휘한 학자였다. 15살에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가 여러 분야의 학문을 연구했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무신론자로서의 일생을 살았고, 자유로운 삶을 오래 즐긴 사람이라고 평한다. 그가 무신론자가 된 것은 어머니의 모태에 있을 때부터 사회적 혼란기에 심한 역경을 헤맸기 때문이라고 하며, 그런 과거가 홀로 부담과 의무감 없이 명문가에 기식하는 학자 및 사상가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90세가 넘을 때까지 활동을 계속하면서 정신적 향락에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그는 철학적 학설을 물질주의적 유물론 사상으로 이끌어갔고 사회정치 문제에 더 큰 관심을 모았다. 기식하고 있는 가문의 정치, 행정활동에 기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성에 관한 문제와 종교문제에 대해서도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홉스는 국제적 무대에서 일했기 때문에 영국인으로서는 드물게 대륙철학을 연구했다. 그리고 베이컨을 기점으로 하는 경험론적 학설을 받아들였으므로, 초창기에는 좁은 영국철학에 빠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확고히 그의 철학을 뒷받침하는 것은 이성론이나 신적 존재를 배경으로 삼는 대륙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가 택한 것은 물질주의적인 자연주의 철학이었고, 철학적 표현을 빌린다면 수리 및 기계관적인 자연주의자였다. 물체는 모든 정신 및 물적 존재의 근원이며, 그것은 필연적이며 기계적인 법칙에 의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물체적 연구가 철학의 기초가 되며, 거기에는 연역적 방법과 귀납적 방법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을 주관하는 것도 독립된 이성적 존재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생리적 기능의 바탕이 되는 물리적 작용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가 인간행위의 필연성과 결정론을 주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인간행위에 있어서의 자유는 과장된 성격일 뿐이고,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듯이, 모든 행동은 주어진 원인에 따라 이루어질 뿐이라고 본다. 자유가 있는 듯이 착각하는 것은 그 원인을 모르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물리적인 힘이 대외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국가 및 사회적 존재인 것이다 자연물체와 구별되는 인공물체라고 보아 좋을 본성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의 개인이나 사회적 삶을 좌우하는 것은 어떤 관념적 능력이나 이성이 아니라, 인간적 물체의 본질인 본능, 욕망, 의욕 등이다. 그래서 사회를 원초적으로 구성하는 것은 만인이 만인을 적으로 삼는 이기적 동물인 것이다 그 상쟁의 비극을 회피하고 제어하기 위해 우리는 계약을 만들고 질서를 보존하게 되며, 그것을 유지하는 데 국가의 권력이 동원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들이 상식적으로 표현하는 위치에서 본다면 홉스는 인간의 성악설을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철학자라고 보아 좋겠다. 법과 국가권력은 그 본래적인 악을 방지하고 서로의 삶을 돕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인식의 기초가 되는 것도 본구적인 이성기능이 아니라 감각을 통해 가능해지며, 감정과 의지는 필연적인 규범과 법칙에 따를 뿐이다. 그 배후에는 물질적 힘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홉스의 철학은 오히려 정치, 국가, 사회원리 등의 외향적인 방향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어진다. 대륙의 합리주의와 완전히 상반되는 길을 선택했고, 또 그 길을 개척해 나왔던 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의 국가관과 사회철학에 더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회철학자로서의 위치를 굳혀주자고 그의 후계자들이 또 그 길을 따르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가 홉스에게서 느끼는 또 하나의 특색은 그의 인간성과 학문의 특수성이다. 남이 다 하는 주장을 했다든지 다른 철학자에게서도 볼 수 있는 내용의 철학이기보다는, 그의 인간됨과 학설의 특유성이 우리로 하여금 그의 철학사적 의미를 경시하지 못하도록 이끌어주고 있다. 또 그의 후계자들도 그의 개성있는 학설을 찬반양면에서 뚜렷이 가려주고 있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집사람'은 본래 '가족'이란 뜻 '계집'은 지금은 비칭이 되었지만, 본래는 그 형태가 '겨집'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집'에 '겨시다'(계시다)이기 때문에 '겨집'이라고 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는데, 아직 근거를 제시할 수 없는 민간어원설입니다. '겨집'은 '여자'의 뜻으로, 평칭으로 사용되어서 '아무개는 아무개의 겨집이다'라고 했었는데, 이 '겨집'에'가 비칭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바뀐 경우가 많지요. '버리다'도 '베리다'라고 하면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을 말할 때 쓰인다던가, '소주'를 '쇠주'라고 하면 역시 낮추어서 부르는 것이 된다던가 하는 것 등이 그러한 것이지요. '집사람'의 본래의 뜻은 이것의 한자어 즉 '가인'(집 가, 사람 인)으로서, '가족'이란 뜻이었지요. 부인을 가족으로 생각하고 '집사람'이라고 호칭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옛날 문헌에서 '집사람'이라고 한 것을 보면 대개 그 부인을 말하는 경우가 많았었지요.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3장 죽음과의 악수 - 김대건의 치명 한국 천주교회는 네 번에 걸쳐 큰 박해를 받았다. 이때 1만명의 선량한 신도들이 목이 잘리었다. 신의 이름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이 순교행위를 카톨릭에서는 치명 이라고 명명하는데 최상으로 축복된 순간 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신앙적 죽음을 통해서만이 가장 영예로운 신앙의 증거가 즉각에 이루어지고, 신의 무한한 축복과 영원불멸한 낙토천국이 현실화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많은 순교자들이 의연하게 그리고 기쁘게 죽어갔던 것이다. 1846년 9월 16일. 3개월의 옥중 생활을 마친 김대건 신부의 순교장면을 보자. 한강 새남터(노량진 시장) 형장에 끌려나온 김대건 신부에게 마지막 군령이 내려졌다. 사학악인 김대건의 목을 베어 달아, 모두 이를 경계할 것을 명하노라. 군졸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관습에 따라 두 귀에 화살을 꿰고, 얼굴에는 물을 뿜고 흰 회를 발랐다. 그리고 두 명의 군졸이 김대건 신부의 양쪽 겨드랑 밑에 두 개의 몽둥이를 끼워 앞뒤로 걸머메고 군졸의 둥근 진의 바깥쪽을 세 차례나 돌린 후, 신부를 꿇어앉히고 한 가닥의 밧줄로써 김대건 신부의 머리칼을 동여매어 그 한 끝을 사형대의 말뚝 구명에 끼워 잡아당기니 신부의 얼굴은 하늘을 쳐다보게 되었다. 그래도 신부는 태연하게 눈썹조차 움직이지 않으면서 말했다. 한 번 나고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이 면하지 못하는 것이어늘, 이제 천주를 위해 죽는 것이 도리어 나의 소원이니 오늘 묻고, 내일 물어도 이 같을 뿐이요, 때리고 죽여도 이 같을 뿐이니 빨리 죽여 달라. 그리고 군졸들에게 몸가짐이 이러하면 좋으냐? 쉽게 자르겠느냐? 좀 더 똑바로 하여라. 아 그만하면 됐다. 자 나의 목을 잘라라. 준비는 다 되었다. 이리하여 12명의 희자수가 시퍼런 칼을 휘두르며 자르는 흉내를 내면서 신부의 주위를 빙빙 돌아 달리다가 각각 한 칼씩 내려치니 여덟 번째의 칼날에 신부의 머리는 앞쪽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형리는 곧 그 목을 주워서 목판에 얹어 관장 앞으로 가서 검사를 받았다. 관장은 검사를 마친 후, 궁중으로 돌아가서 사형집행을 끝마쳤음을 보고하였다. 이리하여 최초의 한국인 신부 김대건은 그의 영광된 치명으로 말미암아 1857년 9월 23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하여 가경자의 칭호를 받았고, 1925년 7월 5일에는 복자의 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18. 십자군 전쟁은 진짜 성전이었나?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고 많은 사람을 죽이면 영웅이 된다`는 말처럼 전쟁은 유일하게 합법하된 살인 행위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전쟁은 여러 수단이 동원되어 정당화되고 또 미화되기까지 한다. 성전이란 말이 그것에 꼭 맞는 표현일 것이다.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자행되는 전쟁이 거룩할 수도 있다니 말이다. 역사에서 대표적인 성전이라고 할 수 있는 십자군 전쟁도 사실 그러한 전쟁이다. 기독교 세계인 서유럽이 `성지 탈환`을 명분으로 하여 이슬람 세계를 공격한 십자군 전쟁은 약 200년에 걸쳐 계속되었다. 당시 서유럽 세계는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는 기독교인들을 이슬람 인들이 박해했다는 것을 구실로 삼아 `성지 탈환`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물론 전혀 박해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이 이야기는 비잔틴의 황제가 꾸면 낸 것이었다. 11세기 중엽 비잔틴 제국은 이미 국력이 쇠한 상태였다. 여기에 이슬람으로 개종한 셀주크 투르크 족(Seljik urks)이 급속히 세력을 팽창하여 11세기에는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이슬람 지역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이러한 셀주크 투르크의 팽창에 위협을 느낀 비잔틴은 먼저 그들을 공격했으나 도리어 패했을 뿐만 아니라 투르크 족이 소아시아 지역을 점령하는 것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알렉시우스 1세 (Alexius 1, 1081-1118)는 교황 우르반 2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 때 지어 낸 말이 성지에서 박해가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말은 기독교도로서의 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주술적 효과를 가져왔다. 한편 교황은 이 기회에 성지를 탈환하고 비잔틴 교회를 로마 교회에 통합시켜 기독교 세계를 부흥시키려고 했다. 그리하여 1095년 11월 프랑스의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우르반 2세는 십자군을 제창했다. 그는 신념에 찬 목소리로 이슬람의 승리는 기독교 세계의 불명예이며 유럽의 귀족들은 힘을 합쳐 이슬람을 물리치고 성지를 회복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또한 순례자들에 대한 박해를 실감나게 강조하면서 이슬람에 대한 전쟁은 성전이며 이 전쟁에서 전사하는 자는 모두 천국에서 그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고무된 참석자들은 “하느님이 이를 원하신다”라고 호응했다고 한다. 이후 서유럽의 넘치는 활력과 강렬한 신앙심이 결합되어 전 유럽이 십자군으로 궐기했다. 이렇게 십자군 전쟁은 성전으로 규정되었고 따라서 야만적인 종족인 적에 대한 어떠한 행위도 허용되는 것으로 믿어졌다. 그리고 실제로 약탈과 만행, 적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이 기다리고 있었다. 1096년 가을 1차로 구성된 십자군을 필두로 하여 약 200년간 8차례나 십자군 원정이 감행되었다. 하지만 1차에서만 성지 탈환이라는 명목상의 목적이 달성되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에루살렘에 입성한 1차 십자군의 경우 6주간이나 계속된 전투에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을 행했다. 십자군들은 적의 병사뿐만 아니라 주민들까지 가리지 않고 죽였다. 십자군에 참가했던 어떤 프랑스 성직자는 `예루살렘의 큰 거리나 광장에는 사람의 머리와 팔다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십자군 병사나 기사들은 시체를 아랑곳하지 않고 전진했다. 신전이나 벽은 물론 기사의 말고삐까지 피로 물들었다. 그러나 이제까지 오랫동안 성지 순례를 방해했던 사람들로 더럽혀졌던 이곳이 그들의 피로 씻겨져야 한다는 신의 심판은 정당한 것일 뿐 아니라 찬양할 만한 것이었다`라고 쓰고 있다. 십자군의 잔혹한 학살을 잘 묘사하면서도 이 전쟁을 악에 대한 신의 심판으로 규정하면서 학살을 정당화하고 있다. 1차 십자군의 공격으로 `성지` 예루살렘을 비롯해 영토를 빼앗긴 이슬람 측은 전열을 정비하고 십자군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그리하여 1187년에는 다시 예루살렘을 되찾게 된다. 서유럽은 여러 차례에 걸쳐 십자군 운동을 일으키지만 소기의 목적은커녕 이동하는 지역에 대한 약탈과 어처구니없는 탈선 행위로 일관했다. 그 중 4차 십자군은 가장 추악한 경우였다. 교황 이노센트 3세의 주도하에 집결한 4차 십자군은 원래 이집트를 공격해서 그곳의 이슬람 세력을 축출할 요량으로 기사 4,500명, 말 4,500마리, 보병 2만 명, 식량 9개월 치를 베네치아에서 수송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모인 병력은 반도 안 되었고 더구나 수송을 담당해 주기로 한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줄 비용마저 조달되지 않았다. 베네치아 상인들에 대한 계약 위반과 빚으로 궁지에 몰린 십자군에게 베네치아 상인들이 기발한 제안을 해 왔다. 그것은 얼마 전에 기독교 국가인 헝가리에 의해 점령된 자라 시를 십자군이 다시 찾아 주면 계약 위반과 빚에 대해 따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성지 탈환을 위해 일어선 십자군에게 기독교인이 사는 자라 시를 공격해 달라는 엉뚱한 제안이었지만 궁지에 몰려 있던 십자군들은 선뜻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십자군들은 성지로 가기에 앞서 자라 시를 점령했을 뿐만 아니라 약탈까지 감행했다. 이에 분노한 당시 교황 이노센트 3세는 십자군들을 파문했다고 한다. 또한 1212년에 조직된 소년 십자군의 경우는 더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 소년 십자군은 성지 탈환에 대한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프랑스의 양치기 소년에서 비롯되었다. 그 소년이 그가 받은 신의 계시를 널리 알리자 수천 명의 소년들이 이를 따르게 되었고 처음에는 반대하던 부모, 성직자, 국왕도 소년들의 굳은 결심을 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소년이 중심이 된 이 기이한 십자군이 출발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프랑스 남부의 마르세이유에서 7척의 배를 타고 출발했다. 그런데 그들을 수송한 선주는 베네치아 상인보다 더 비열했다. 폭풍으로 난파된 2척 이외에 5척에 타고 있던 소년들을 모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노예로 팔았던 것이다. 이렇듯 추악한 일면을 가진 십자군 전쟁이 오랫동안 서유럽 인들에게 성전으로 인식되어 왔다. 물론 200년이란 오랜 기간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유럽 인들의 신앙심을 증명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막대한 경비와 인력이 드는 전쟁이 그렇게 오랜 기간 수행되었다는 것을 신앙심만으로 해석할 수는 없는 일이다. 도리어 중세 전반기에 급속도로 팽창하던 이슬람 세력에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던 유럽이 10세기 이후 안정과 번영을 거치면서 11세기가 되면 어느 정도 힘에서 균형을 찾아 나가고 있었고 이러한 힘의 균형이 십자군이라는 무력 충돌로 표현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5. '반중국클럽'은 반드시 실패한다 3) 중국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미국의 음모에 대해 중국은 절대 요행심리를 가져서는 안 되며 당당하게 우리의 의사를 표명해야 한다. 대만에 대한 외부세력의 어떠한 간섭도 중국을 적으로 간주하는 비우호적 행동이 될 것이며. 중국이 무력사용 중지의 요청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생각은 망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용의주도한 전천후외교를 펼쳐 대만문제에 관한 우리들의 일관된 생각과 장기적인 전략을 전세계가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유엔에서 이미 '대만은 중국의 영토'라는 결의를 한 이상, 중국이 대만독립에 반대하여 취하는 모든 행동은 국제법에 저촉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 의회에서 말하는 이른바 '대만보호'의 구호는 미국인이 사리를 분별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어떤 떳떳하지 못한 저의를 품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남해의 여러 섬에 대해 중국은 자국의 입장을 천명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즉 중국은 영유권 논쟁의 이해 당사국으로서 주권을 주장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이 문제는 가볍게 보아 넘길 수는 없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그다지 심각한 문제도 아니다. 중국은 이에 대해 이미 적지 않은 합리적인 제의를 하였다. 중요한 것은, 이해 당사국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안을 제출하도록 하면 몇몇 당사국의 입장이 상충될 것이다. 이러할 경우 '논쟁을 그만 두고 공동개발'이라는 모안을 채택하면 모든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겠는가? 이때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것은 아시아의 문제는 아시아인의 지혜로 풀어나가야 할 것이며, 미국이 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미국이 이 지역의 영토분쟁에 '중국위협론'을 끌어들이고 이를 빌미로 반중국동맹을 결성하려고 든다면 이로 인해 아시아의 이해 당사국은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고 결국 미국만 어부지리를 얻게 될 것이다. 미 . 일 안보체제의 재정립은 그다지 놀랄 일은 되지 못한다. 일본의 국권문제는 확실히 아직은 애매모호한 상태이다. 이것은 일본의 전후 재건정책과 관련이 있다. 일본은 미국의 지지와 도움으로 2차대 전의 폐허에서 일어설 수 있었으며 몇 십 년 동안 경제적으로 거대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국가의식은 미국의 통제 아래 있었고 미국이 돌보는 아이가 되어버렸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좀 이상하다. 그들은 돈으로 미국을 살 정도의 부를 축적했으나 국제적으로 진정한 자기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는 드물다. 일본이 진심으로 중국과 가까워질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들의 입장은 갈수록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 달라지고 있다. 일본은 대중국차관을 동결하겠다는 위협을 하며 중국의 핵실험을 앞장 서서 반대하였다. '일본은 원자탄의 피해를 입은 유일한 국가이므로' 중국이 일본 국민의 감정을 이해해야 한다고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중국이 아시아 국가 중에서 2차대전의 피해를 가장 많이 입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몇 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은 줄곧 서구 열강들에 의해 약탈과 능욕을 당해온 국가이지 않 은가? 중국은 일본에게 피해를 입힌 적이 없으나 일본은 중국을 수도 없이 괴롭혔다는 사실을 일본은 간과하고 있다. 중국은 모든 핵보유국가 중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가장 수준이 낮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본은 알지 못한단 말인가? 서구 국가들은 상당 수준의 핵무기를 보유한 후, 돌아서서는 중국에게 핵실험을 하지 말라고 요구하였다. 이런 것이 강권정치의 전형적인 수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전세계에서 어느 나라가 중국처럼.절대 먼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또 핵무기 비보유국에는 절대로 핵무기를 쓰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했던가? 어떤 일이든 미국이 하면 잘하는 일이고, 중국이 하면 잘못 하는 일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사실에서도 일본인이 아시아의 한 구성원에서 떨어져 나가고 있는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이 전적으로 중국에 대웅하기 위해 미국과 동맹을 체결한다면 이는 일본인에게 조금도 이로울 것이 없으며 오히려 큰 손실을 가져다 주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선 모든 아시아 국가들이 일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2차대전중 일본이 모든 아시아 국가들에게 준 고통은 앞으로 몇 백 년이 흐른다 해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일본은 앞으로 어떻게 하여 중국과 아시아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할 것이며, 또 어떤 방법으로 아시아 국가가 다시 일어서는데 도움을 줄 것인가 등에 대한 목표를 세워야 할 것이다. 또한 앞으로 일본은 대만문제에 대해 절대 함부로 흥분하거나 논리에 맞지 않은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일본이 대만문제에 대해 특별한 야심이 없고 과거의 감정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처럼 대만문제를 중국 내부의 문제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중국이 대만에 대해 취하는 태도를 ' 중국위협론'으로 비약시키는 것은 하등의 근거가 없는 것이다. 몇 년 전 일본의 어느 학자가 중국의 분열을 부추기며 중국이 분열하고 붕괴되어야만 일본의 걱정이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고 한 적이 있다. 일본 정부는 이런 황당무계하고 치욕적인 생각으로 또한번 중국인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될 것이며 나아가 아시아의 시대적 조류에 역행하는 행동 또한 절대 해서는 안 된다. 일본이 경제대국으로서의 지위에 만족하지 않고 정치상의 위상을 확보하려는 데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일본이 유엔상임이사국이 되려는 희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일본은 아직 외교적으로 독자적인 노선을 가지고 있지 못하며 과거 역사에 대한 반성이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요구하는 수준에 못 미친다는 데서 기인한다. 이 점에 있어서 일본은 독일과 근본적으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므로 일본은 아직도 아시아 국가에서 유엔상임이사국이 될 만한 대표성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 이런관점에서 보면 일본보다는 오히려 인도나 아프리카의 어느 한 국가가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4) 무시해야 할 것과 깨우쳐 주어야 할 것들 미국이 '반중국클럽'을 결성하려는 음모를 깨트리기 위해, 중국은 아시아에 새로운 구도가 탄생하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여야 할 것이다. 얼마 전 방콕에서 열린 아태정상회담에서 이러한 계획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중국이 이 카드 저 카드를 번갈아 가며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카드'란 사실 국제정치에 있어 단기적이고 얄팍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세계정세의 현실에서부터 출발하여 중국과 유럽, 중국과 러시아, 중국과 동남아국가연맹 등등에 얽힌 각종 이해 관계를 고려하여 현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기초 위에 눈앞의 이해득실에 현혹되지않는 국가간의 어떤 연결점을 찾아야 한다. 또 긍정적이고 상호 이해를증진시킬 수 있는 대화채널도 수립하여야 한다.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고립된다면 쌍방 모두에게 매우 불행한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란 점을 널리 홍보하여야 할 것이다. 다른 나라들은 중국의 국력과 번영이, 국제무대에서 날뛰는 사악한 세력의 압력이나 방해로 손상되는 일은 결코 없을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중국과 대립하는 것보다 중국을 다른 국가와 동둥하게 대하고 쌍방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평화적 동반자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중국이 국제관계에서 취해야 할 중요한 조치 중에는 미국의 전망과 구상을 무시해야 할 것들도 있다. '미국을 무시한다'는 것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되어야 한다. (1) 중소국가들이 미국의 강권에 대항하여 벌이는 각양각색의 투쟁을지지해야 한다. (2) 다른 나라들과의 무역, 경제 합작을 강화한다. 만약 미국이 갖은 방법을 써 철저하게 방해하려고 든다면 우리는 다른 국가나 지역으로 전환하여 투자하고 시장 및 여타 무역합작에 주력하며, 국민들이 미국제품 안 사기, 미국영화 안 보기, 미국 쌀과 밀 안 먹기 등의 운동을 벌이도록 해야 한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모토롤라라는 회사를 모르는 중국인은 아마없을 것이다.이 회사는 중국시장에 진출한 몇 년 동안 거의 50억 달러가 넘는 이익을 남겼다고 한다. 모토롤라 광고의 일부를 대행하는 회사에 다니는 내 친구가 하루는 사적인 자리에서 '미국인은 속과 겉이 완전히 다른 놈들이야'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가 말하는 내용은 이러하였다. 모토롤라는 그들의 신기술을 중국측에 조금씩 전수하기로 했었다. 이것은 중국과 합작을 체결할 당시에 이루어진 계약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모토롤라가 중국에 전수한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중국이 독자적으로 제조할 수 있는 것은 호출기에 붙은 쇠줄뿐이란 것이다. 이 친구는 모토롤라와 중국이 공동투자하여 덴진에 설립한 어느 기업을 참관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모든 중국노동자들은 퇴근할 때 도난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로 반드시 엑스레이 검색대를 통과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그들이 만든 규칙에는 일단 의심이 되는 노동자에 대해서는 몸수색을 할 권리가 있다는 조항이 들어있다고 한다. 미국이 표방하는 인권과 민주 .자유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세력이 동구로 확장되면서 중국은 노출되거나 혹은 잠재된 '반중국동맹'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중 .러 두 나라사이에는 다시 고려해야 할 문제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지금 두 나라는 지정학적 내지는 세계정치의 관점에서 군사협력을 포함한 다양한 협력가능성을 모색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4)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원동(遠東) 지역으로 진출하는 미국세력의 침투를 막아야 한다. 미군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이 지역 국가들이 깨닫게 하고, 미국은 자기들이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 가도록 하여야 한다. 일본은 중 .일 양국관계의 역사적인 측면에서 중국이 일본에 대해 크나큰 관용을 베풀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들이 중국을 침락했을 때 자행한 만행에 대해 우리의 원한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일본이 패망한 후 중국인들은 그들이 즐겨 쓰는 '철없는 아이들이 무슨 죄야?'라며 묵묵히 일본의 고아들을 데려다 길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 일 관계정상화를 위한 노력이 진행될 때 중국은 주동적으로 전쟁 배상요구를 포기했었다. 그러나 일본은 중국의 핵실험을 빌미 삼아 대중국 엔화차관을 동결시키고 있는 것이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것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 국제적인 실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일본은 자신이 아시아인들에게 끼친 고통에 대해 조금도 반성하는 기색이 없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또한 죄를 지은 나라에 대해 철저한 웅징을 하지 않으면 이처럼 오만방자하게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오랫동안 중국은 그저 '앞만' 바라보았다. 80년대 중반, 평화를 갈망하는 심정에서 3천 명에 달하는 일본청년들을 중국으로 초청했던 것이 한 예가 될 것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참으로 선량하기만 하였다.그런데 이 3천 명의 일본청년들 중 진정으로 일본 침약행위의 진상을 이해하고, 난징(南京) 대학살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학생은 불과 10퍼센트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베이징사범대학에서 중국어를 공부하는 오니시라는 일본 유학생을 알고 지낸다. 어느 날 열린 댄스파티에서 함께 춤을 추다가-그녀가먼저 나에게 춤을 청했다-다짜고짜로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을 때 난징에서 중국인을 몇 명이나 죽였는지 아십니까?'라고 직설적으로 물은 적이 있다. 이런 질문은 듣기 거북했을 것이다. 부드럽고 아름다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던 당시의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었다.예상대로 그녀는 내 어깨에서 손을 내리고 약간 신경질적으로 반문하였다. '무슨 뜻이지요?' 나는 담담하게 웃으면서 '만입니다. 난징은 텅비어 버렸지요'라고 말하였다. 나는 그녀의 스탭을 보면서 그녀가 몹시 불쾌해졌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일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얼마 후 우리는 우연히 또다른 장소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그녀는 여전히 예의바 르게 나를 대하였다. 나는 무의식중에 또 그녀에게 '50년 전 일본 군인들이 난징에서 어떤 일을 자행했는지 아십니까?'라고 물었다.그녀는 잠시 멍해지더니 '장 선생님, 저번에도 물어 본 사실을 잊어 버리셨어요?" 라고 또박또박 말하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내가 너무 무례했을 수도 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을 다시 거론하는 것 아무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특히, 무도회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화제였다. 나는 그녀에게 그 말을 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나에게 보여준 표정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필요할 때는 일본을 힘껏 일깨워줘야 한다. 미국이 나쁜 전례를 남긴 후, 일본 국내의 친대만(의원들도 대만총통 리떵후이를 일본으로 초청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만약 이 점에서 그들이 중국의 인내심을 시험하려 든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우리의 확고한 태도를 보여주어야 한다. 일본인은 대중국 차관문제와 기타의 문제들을 분리하려 하고 있으나, 이미 체결된 차관공여의 약속은 과거에 대한 일종의 도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동경대학 법학과의 객원연구원인 아까마는 '일본은 현재 워싱턴의 신호만을 기다리고 있다. 워싱턴의 신호가 혼란하면 일본의 신호도 혼란해진다'라고 말하였다. 이 말은 일본외교의 실상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사실 일본은 국제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못하고 '미국의 입김에 휩쓸려 다녔다.' 심지어는 중 .일 양국의 지도자들이 오래도록 심혈을 기울여 수립해 온 관계까지도 저버리고 있으니 정말 21세기를 맞을 전략적 안목이 부족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일본인에게 평화를 기대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일본인들은 일본의 역사를 통해 평화와 야심을 버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아시아의 일본이 되려면 미국의 전차에 매달려 따라다니며 떨어지는 떡고물을 얻어 먹을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우리 동네 샘물 내가 살던 고향 마을에는 늘 마르지 않는 샘이 하나 있었다. 사시사철 그 어느 때에도 물이 마르지 않아 마을 사람들은 평생 물 걱정을 하며 사는 일이 없었다. 논바닥이 거북 등처럼 쩍쩍 갈라지는 여름 가뭄 때에도 유독 그 샘물에서만은 차고 맑은 물이 퐁퐁 솟아났다. 겨우내 눈이 내리지 않아 몇 십년 만에 겨울 가뭄이 들었다고 난리가 나도 우리 동네 샘물만은 결코 마르는 법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이 샘을 자랑하였으며 또한 사랑하였다. 어른들은 들에 나가 김을 매다가 돌아와서는 꼭 이 샘물에다 손발을 씻었다. 나와 같은 조무래기들도 하루 종일 땡볕에서 뛰어 놀다가 저녁 먹을 때가 되면 그 샘가에 가서 땟국을 씻고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보자기에 싼 책 보따리를 등허리에 질끈 동여매고 10리나 되는 읍내 국민학교에서 지쳐 돌아올 때면 나는 으레 이 샘물을 한 바가지 마시고 나서야 다시 힘을 얻곤 했다. 동네 아낙네들은 매일같이 그 샘물을 길어다가 밥을 지었으며, 그 샘가에 와서 빨래를 하는 젊은 아낙네도 있었다. 샘은 바로 마을 사람들의 젖줄이었으며, 마을 사람들 중에 이 샘을 애지중지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물론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내가 청년이 되어 고향 마을을 떠날 때까지 그 샘은 나를 키워 준 또 하나의 어머니였다. 그런데 나는 늘 흘러 넘치는 그 샘물이 아깝다고 생각되었다. 이웃 마을 사람들이 그 샘물을 길어 가는 것조차 아까워 어떤 땐 속이 상할 때가 있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그 물을 일부러 몇 바가지씩 떠서 물배를 채워 보기도 하고, 아무 쓸데도 없이 물을 길어다가 그냥 길가에 버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 물을 몇 동이나 길어다가 뒷간을 말끔히 청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물은 언제나 흘러 넘치기만 할 뿐 조금도 줄어들지는 않았다. 그 아까운 샘물이 훌러 넘치지 않도록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궁리를 해도 별달리 뾰족한 수는 없었다. 나의 그러한 생각은 내가 고향을 떠난 후에도 계속되었다. 도시에서 돈을 주고 물을 사 먹을 때마다 그러한 생각은 점점 더 깊어 갔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때의 내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던가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샘물이 흘러 넘치지 않으면 그대로 썩고 만다는 것을 이제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도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사랑이 없으면 사람은 죽고 만다는 것을. 사람도 늘 그 샘물처럼 서로 사랑이 흘러 넘쳐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을. 글터 → 이글저글 노는 것이 자랑, 중국인들에게는 19세기까지만 해도 일하지 않고 가만히 놀면서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게 대단한 자랑이었다. 따라서 그 증거물로 귀족들은 손톱을 길게 길렀고, 길면 길수록 아름다운 것으로 간주되었다.중국인의 라이프스타일, 친구를 만나서 악수를 할 때 친구의 손을 잡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손을 잡는다. 손님에게 차를 대접할 때 접시위에 찻잔을 놓는것이 아니고 찻잔위에 접시를 놓는다. 더울 때 더운 차를 마셔서 몸을 식힌다. 목욕을 하고 나서 마른 수건이 아닌 젖은 수건으로 몸을 닦는다. 집을 지을 때 지붕부터 먼저 세운다. 그들의 나침반은 북쪽이 아니라 남쪽을 가리킨다.고대 중국의 화가들은 여성의 성기나 남녀의 성행위를 그릴 수는 있었지만 여성의 발은 절대로 그릴 수 없었다.이에는 이, 중국에서는 살인자와 술취한 사람은 모두 사형시키고 간음한 자와 강도는 음경을 잘랐다. 또 국가의 재산을 손상시킨 사람들은 귀와 손을 자르고, 좀도둑이나 여행자를 괴롭힌 사람은 코를 잘랐다. 통금시간을 어긴다든지, 작은 물건을 훔친다든지 하는 가벼운 범죄에 대해선 불에 달군 인두로 이마에 표식을 새기는 벌을 내렸다.긴 소매인 이유, 중국인들이 유난히 소매가 긴 옷을 입는 이유는 시장이나 남의 집에 갔을 때 물건을 훔치기 위해서였다. 또 손님을 문 밖에까지 나가서 배웅하는 이유는 손님이 자신의 집 물건을 도둑질해가지 않나 살펴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31 추천 0 비추천 목록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댓글 쓰기 에디터 선택하기 ✔ 텍스트 모드 ✔ 에디터 모드 ?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독서편지 List Zine Gallery FirstThumb 제1388호 - 2024.11.08. 금요일(음력 : 10.08.) Date2024.11.08 風文 Views409 Read More 제1387호 - 2024.11.06. 수요일(음력 : 10.06.) Date2024.11.06 風文 Views345 Read More 제1386호 - 2024.11.04. 월요일(음력 : 10.04.) Date2024.11.04 風文 Views371 Read More 제1385호 - 2024.11.02. 토요일(음력 : 10.02.) Date2024.11.02 風文 Views381 Read More 제1384호 - 2024.10.28. 월요일(음력 : 9.26.) Date2024.10.28 風文 Views338 Read More 제1383호 - 2024.10.25. 금요일(음력 : 9.23.) Date2024.10.25 風文 Views544 Read More 제1382호 - 2024.10.24. 목요일(음력 : 9.22.) Date2024.10.24 風文 Views320 Read More 제1381호 - 2024.10.23. 수요일(음력 : 9.21.) Date2024.10.23 風文 Views933 Read More 제1380호 - 2024.10.22. 화요일(음력 : 9.20.) Date2024.10.22 風文 Views798 Read More 제1379호 - 2024.10.21. 월요일(음력 : 9.19.) Date2024.10.21 風文 Views790 Read More 제1378호 - 2024.10.18. 금요일(음력 : 9.16.) Date2024.10.18 風文 Views802 Read More 제1377호 - 2024.10.17. 목요일(음력 : 9.15.) Date2024.10.17 風文 Views509 Read More 제1376호 - 2024.10.16. 수요일(음력 : 9.14.) Date2024.10.16 風文 Views500 Read More 제1375호 - 2024.10.15. 화요일(음력 : 9.13.) Date2024.10.15 風文 Views605 Read More 제1374호 - 2024.10.14. 월요일(음력 : 9.12.) Date2024.10.14 風文 Views403 Read More 제1373호 - 2024.10.13. 일요일(음력 : 9.11.) Date2024.10.13 風文 Views426 Read More 제1372호 - 2024.10.11. 금요일(음력 : 9.09.) Date2024.10.12 風文 Views452 Read More 제1371호 - 2024.10.10. 목요일(음력 : 9.08.) Date2024.10.10 風文 Views401 Read More 제1370호 - 2024.10.09. 수요일(음력 : 9.07.) Date2024.10.09 風文 Views348 Read More 제1369호 - 2024.10.08. 화요일(음력 : 9.06.) Date2024.10.08 風文 Views337 Read More 제1368호 - 2024.10.07. 월요일(음력 : 9.05.) Date2024.10.07 風文 Views299 Read More 제1367호 - 2024.10.06. 일요일(음력 : 9.04.) Date2024.10.06 風文 Views364 Read More 목록 Search 검색 제목+내용제목내용댓글닉네임태그 전체검색 제목+내용+댓글 확장 변수 쓰기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64 Next / 64 GO
【독서편지】: 제 64 호4339.11.19 (09.29)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용량제한으로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 않보이시는 분은 저의 블로그 또는 아래의 링크를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문학소식 글터 → 명언 / 격언 급진주의자란 두 다리가 모두 허공에 둥둥 뜬 사람. / 프랭클린 D.루즈벨트 글터 → 수필 내잠 속에 비내리는데 - 이외수 맞기만 하는 권투선수 왜 그는 링 위에 오르기만 하면 샌드백으로 변해 버리는 것일까. 왜 그는 상대편처럼 날렵한 몸놀림으로 펀치를 날릴 수가 없는 것일까. 왜 그는 텔레비젼에까지 나와서 범국민적으로 욕을 얻어먹어야만 하는것일까. 저 새끼 저걸 권투라고 하나. 아니, 그럼 저게 권투였단 말인가 ? 난 지금까지 발레를 보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런 소리를 들어가면서까지 권투를 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차라리 권투를 집어치우고 하교 시간의 국민 학교 정문 앞에서 양팔벌리기를 하고 애들한테 한 대씩 얻어 맞을 때마다 백 원씩만 받아도 지금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지만 웃기지 마시라. 그를 욕하는 당신의 모든 입장을 그와 똑같이 만들어 놓으면 당신도 틀림없이 그렇게 두들겨 맞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모든 일을 언제나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려고 드는 악습이 있다. 그런데도 때로는 별로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곧잘 다수의 의견에 쉽게 표를 던져 버리는 악습도 있다. 만약 남을 욕할 일이 생겼을 경우에는 우선 입장부터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볼 일이다. 한참 동안 욕을 하면서, 그건 바로 그런 경우에 처해 있는 자신을 욕하고 있음을 문득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인생이란 예측을 불허하는 것이어서 살다 보면 당신도 어느 때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법이다. 당신 자신이 그런 경우를 당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혹시 당신의 아들이나 친척 중의 누군가가 그런 경우를 당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특히 프로 권투 세계 타이틀 매치를 가지게 되면 사람들은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텔레비젼을 시청하는데, 만약 우리나라 선수가 두들겨 맞기만 하다가 지는 경우에는 거액을 놓고 도박을 걸지 않은 사람들까지 온통 흥분을 해서 병신 같은 자식이니 멍청한 자식이니 하는 욕설들을 퍼붓는다. 나는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약간은 귀에 거슬린다는 느낌을 받는다. 되도록이면 한번쯤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을 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 어떤 경우에도 전혀 입장을 바꾸어 놓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공상에의 권유 그대여, 공상하라. 공상은 참으로 오묘하다. 혹자는 공상이 비현실적이고 비생산적이며지극히 허무맹랑한 유희에 불과하다는 이유에서, 의식적으로 그것에천착하는 것을 회피해 버릴는지도 모른다. 또 혹자는 복잡다단한 생활의 틈바구니에서 허겁지겁 쫓겨다니느라 미처 공상 따위에 시간을 할애할 만한 마음의 여유조차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상이란 결코 허무맹랑하거나 비생산적이거나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이 공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실현할 수가 있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공상이야말로 창조의 어머니며 발전의 실마리다. 공상이 없다면 아무것도 창조되어지지 않으며 아무것도 발전되어지지 않는다. 현대인치고 정신적으로 피로해 있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어느 정신과 의사의 말은, 바로 현대인치고 정상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이 없다는 말의 조심스러운 표현이겠는데, 그 말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모든 현대인은 누구나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말이 아닐는지. 그러나 정신적으로 피곤하면 피곤할수록 공상을 한번 해보시라. 세상이 아니꼽고 메스껍고 치사하고 더럽다는 생각이 들면 들수록 공상을 한번 해보시라. 공상은 그대 머리속에 설치되어져 있는 완벽한 천국이다. 무엇이든 가능하다. 단 몇 분간의 공상으로도 그대는 쉽게 세상에 대한 원한을 풀 수가 있다. 가령, 어느 회사의 말단 사원이 이세상에 존대말이 없어진다면, 하는 공상을 하기 시작했다고 치자. 어떤 현상들이 일어날 것인가. 그 말단 사원은 사장에게 이런 투로 말하게 될 것이다. 사장, 이제 출근하냐 ? 월급 좀 올려 주라. 결재 서류를 가지고 오란 말이지. 그래 알았어. 사장, 퇴근 안 하냐 ?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는 해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의 아랫사람이 그대에게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그건 좀 기분이 나쁠 것이다. 그렇지만 공상이란 마음대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으므로, 자기에게 불리한 공상이 시작되어질 낌새가 보이면 재빨리 다른 공상으로 옮겨 버리면 된다. 그대의 공상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므로 그대는 죄책감 따윈조금도 느낄 필요가 없다. 공상 속에서는 아무런 절차도 없이 자유자재로 신분과 지위와 명예와 재산과 명성과 존망 따위를 획득할 수가 있다. 심지어는 신까지도 되어 볼 수가 있다. 내가 만약 신이 된다면,하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그대는 신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공상을 하는 데도 자기 분수가 있는 법. 만약 그대가 자질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사람이라면 신이 된다고 하더라도 조잡한 짓밖에는 못할 것이다. 공상을 하더라도 되도록이면 자기 분수에 맞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또 되도록이면 좀 고상한 공상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겨우 권총을 들고 은행을 털어서 흥청망청 돈을 쓰거나, 남의 집 담을 넘어 들어가 처녀들이나 겁탈하는 따위의 공상을 한다면 그대는 참으로 멍청한 인간이다. 공상 속에서는 얼마든지 거부가 될 수도 있으며 삼천궁녀를 거느릴 수도 있는데, 하필이면 그런 공상 따위로 자신의 품위를 떨어뜨릴 필요가 있겠는가. 그리고 반드시 이 비좁은 지구의 삼차원 속에서만 꾸물거릴 필요가 있겠는가. 몇 억 광년 거리의 별에도 좀 갔다오고 보잘것없는 빈대 따위로 환생도 좀 해보는 게 어떻겠는가. 더러는 모든 인간들의 가슴에 충만한 빛과 사랑도 넣어 주고, 또 더러는 노래와 춤만 가득한 나날들을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떻겠는가. 그 무한한 능력을 가진 공상의 세계에서도 겨우 개인적인 이익에만 급급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정말로 불쌍하기 짝이 없다. 좋은 공상을 하는 사람은 평소에도 반드시 좋은 일을 할 수가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선은 자신의 가슴을 항시 맑게 다스리며 살아가고 볼 일이다. 사실 모든 것의 근본은 마음 안에 있는 것이어서 그대의 공상은 곧 그대의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괴롭고 부끄러운 사실은 우리가 공상 속에서, 내가 만약 신이라면,하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엄연히 우리가 인간으로서 현실에 존재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속수무책인 우리들 범인으로서의 비극이자 희극인 것이다. 따라서 공상 끝에는 언제나 허무와 절망이 도래하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허무와 절망을 느끼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공상을 할 필요가 있다. 공상이야말로 자신의 존재를 비극적으로든 희극적으로든 거듭확인시켜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군대 가는 사람 따로 있었다 - 권영국 군대 생활은 얼마 동안 하였나 오늘날 군인들의 복무기간은 육군이냐, 공군이냐, 해군이냐 또는 현역이나 보충역이냐 등의 조건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6개월에서 30개월 정도이다. 고려시대 군인의 복무기간은 원칙적으로 16세에서 59세까지였다.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군대 생활로 보내는 셈이다. 물론 지금도 현역으로 제대한 후에는 예비군이 되어 1년에 며칠씩 군사 훈련을 받아야 하고, 또 제대 후 8년 동안 예비군으로서의 의무가 끝난 다음에는 민방위에 편성되어 40세에 이르기까지 1년에 몇차례씩 소집에 응하여야 한다. 군인들의 복무 기간이 16세에서 59세까지라고 하여도 44년간을 계속 군대에 매여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3년에 한번씩 교대로 개경에 올라가 경비하거나 양계 지역에 들어가 국경을 방어하였다. 따라서 16세에서 59세에 이르기까지 1년은 군복무를 하고 2년은 자신의 고향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식의 군대 생활을 반복하는 셈이다. 그러나 실제로 40여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이러한 군복무를 계속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20,30대의 건장하고 젊은 동안에는 3년에 한번씩 교대로 개경에 올라가 경비하거나 변경에 나아가 국경을 지키는 군생활을 반복하였겠지만, 고된 군복무를 하기 어려운 나이가 되면 오늘날 예비군과 비슷한 군사조직에 편입되어 자기 고향에서 향토를 지키거나 지방의 치안을 담당하는 정도의 가벼운 일을 하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도 오늘날의 군복무 기간인 2,3년에 비하면 엄청나게 긴 기간 동안 군생활을 하여야 했다. 군사 조직은 어떠하였나 군사 조직에는 크게 중앙군과 지방군이 있었다. 2군 6위로 구성된 중앙군은 그 기능에 따라 국왕과 궁성을 호위하는 부대와 수도 개경을 경비하는 부대로 구분되었다. 2군 6위의 전체 병력은 편제상으로 4만 5천명이었다. 그 가운데 3만 8천명은 지방에서 교대로 개경에 올라와 도성을 경비하는 농민 의무병이었으며, 나머지 7천명 정도는 직업군적 성격의 전업군인이었다. 지방군은 지역에 따라 남도의 주현군과 국경의 주진군으로 구분되었다. 주현군은 보승군,정용군, 일품군 등 오늘날의 현역병과 같은 성격의 군인과 2.3품군으로 불리우는 예비군적 성격의 군인으로 나뉘었다. 주진군은 동북면과 서북면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초군. 좌군. 우군. 보창군. 영새군 등의 여러 부대로 조직되었다. 특히 국경지역에는 토착주민으로 조직된 주진군 이외에 남도 주현에서 교대로 수자리하러 오는 방수군이 주둔하였다. 주현군의 수는 현역병이 약 5만여 명 정도였고 예비군의 성격의 군인은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한편 국경지역은 적과 바로 인접하고 있기 때문에 거의 모든 장정이 주진군 조직 속에 편입되어 그 수는 약 14만명 정도였다. 군복무 중에 하는 일들 군대 생활은 형식이나 절차, 내용 등에서 오늘날과 많은 차이가 있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군인들은 전방에 배치되어 휴전선을 지키거나 후방에서 향토를 방위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고려와 같은 왕조국가에서는 국경을 지키는 것 못지않게 국왕이 거처하는 궁성과 도성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였다. 따라서 수도인 개경에는 많은 군인을 배치하였다. 군복무의 구체적인 내용은 부대와 병종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먼저 중앙군인 2군 6위의 주된 임무는 왕실과 도성을 경비하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 2군은 국왕의 신변과 궁성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고, 6위는 개경을 경비하고 도성 안의 치안을 유지하였다. 중앙군의 또 하나의 임무는 양계 지역에 들어가 국경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국경의 수비는 1년을 단위로 교대하였는데 비상시에는 그 기간이 더 길어졌다. 이것은 군인의 임무 가운데 가장 힘들고 무거운 것이었으며 복무 기간 중이나 왕래하는 도중에 죽는 군인도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에서는 이들의 시체를 수송해 주고 장례비용을 지급해 주는 등 군인 가족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를 하였다. 이들은 또한 외적의 침입이나 내란이 일어났을 때 이를 진압하는 데 동원되었다. 이러한 출정시에는 중군, 좌군, 우군, 전군, 후군의 5군이나 중군, 좌군, 우군이 3군으로 편제되었다. 지방군 역시 병종과 부대에 따라 임무에 차이가 있었다. 남도의 주현군 가운데 보승군과 정용군은 교대로 개경에 올라와 자신이 속한 중앙의 6위에 각기 소속되었다. 이 밖에 그들은 중앙과 지방의 각종 노역에도 동원되는 한편 일부는 교대로 지방관아 소재지에 나아가 향토 방위와 치안을 유지하였고 비번시에는 거주지에서 생업에 종사하였다. 주현군 가운데 1. 2. 3품군은 성을 쌓거나 다리를 놓거나 궁궐을 짓거나 제방을 쌓는 등의 각종 노역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이들 품군도 비상시에는 모두 전투에 동원되었을 것이다. 주진군의 임무는 국경 지역의 방어였다. 이들은 성을 견고히 하여 굳게 지켰다. 고려가거란, 여진, 몽고 등 북방으로부터의 침입을 받으면서 이들을 매번 물리칠 수 있었던 저력은 다름아닌 이 주진군의 활약에서 나왔던 것이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품군이라는 노동부대가 따로 조직된 것이 한 특징이기도 하였지만, 일반 군인들도 중앙이나 지방에서 벌어지는 온갖 노역에 동원되었으며 이러한 노역동원에 대한 군인들의 누적된 불만은 무인정변을 일으키는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로 작용되기도 하였다. 군량과 무기는 어떻게 마련하였나 오늘날에는 군에 입대하면 자신이 입고 간 옷이나 신발을 비롯한 소지품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군생활에 필요한 군복. 군량. 무기 등 군수품 일제를 국가로부터 지급받는다. 몇 푼 안되는 액수이지만 월급까지 받는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군복이나 군량은 물론 무기까지도 군인이 스스로 마련해야 하였다. 그러면 그들은 이러한 군수품들을 어떻게 마련하였을까? 고려사에서 “국가는 기름진 땅을 나누어 42도부 갑사 10만여 인에게 녹으로 주었다. 그 때문에 그들의 옷과 양식과 무기가 모두 토지에서 나와 국가에서 따로 군사를 양성하는 비용이 없었다”라고 한 것처럼, 국가에서 군량. 의복. 무기 등을 지급하는 대신 군인전이라는명목의 토지를 지급하여 군복무에 필요한 비용을 군인 스스로 조달할 수 있게 하였다. 군인전은 전업 군인과 의무 군인 모두에게 지급되었는데 지급 규정이나 토지 지배에 많은차이가 있었다. 전업 군인의 군인전은 관리에게 지급되는 토지와 마찬가지로 전시과 규정에 따라 지급 되었다. 이들의 군역은 문무관리의 관직과 같은 직업의 성격을 띤 것이므로, 이들의 군인전은 관리에게 지급된 토지와 성격이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토지는 원칙적으로 자기 소유토지에 대해 수조권을 지급하는 형태로 조세를 면제받았다. 그러나 토지가 없거나 부족한 경우에 한해 타인의 토지에서 수조권을 지급받았다. 의무 군인도 역시 군인전이라는 토지를 지급받았다. 그러나 이들에게 지급된 군인전은 전업 군인에게 지급된 그것과는 성격이 달랐다. 이들은 일정한 규모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부농층이었으므로, 이들의 군인전은 본래 경작하고 있는 토지에 대해 군인전이라는 명목을붙여 조세를 면제해 주는 것이었다. 전업 군인은 직업 군인이었므므로 복무하는 기간 내내 군인전을 보유하였던 반면에, 의무군인의 경우는 실제 군인으로 복무하는 기간에 한해 군인전을 주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즉 개경에 올라가 도성을 경비하거나 변경수비에 나아간 기간에 한해서만 그의 소유토지에 대해서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 그리고 복무 기간동안의 군인전 경작과 군량 수송등을 위해 군인을 도와주는 양호를 지급하였다. 따라서 의무 군인의 경우 16세에서 59세까지 군역을 지는 기간이라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군복무를 하는 기간에 한해서만 군인전을 지급하였고 나머지 기간에는 일반농민과 마찬가지로 조. 용. 조의 3세를 비롯한 각종 국역을 부담하였다. 군인전의 지급 액수는 지급 시기와 병종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전시과에 규정된 전업 군인의 경우 대체로 20결에서 25결 내외를 지급받았다. 그런데 고려 후기 공민왕때에 ‘예전에 국가에서 토지 17결을 1족정으로 삼아 군인 1정에게 지급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전시과 규정과는 다른 계통의 자료로 바로 이것이 의무 군인에게 지급한 군인전에 관한 내용일 것이다. 즉 전업 군인이 아닌 의무 군인에게 17결을 1족정으로 하는 군인전을 지급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의무 군인들은 대부분 17결, 즉 1족정의 토지를 지급받지 못하였다. 족정과 반정이라는 구분이 바로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대부분의 군인전은 족정인 17결을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에 미치지 못하는 7,8결 정도의 토지를 반정이라 불렀다.1결의 면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약 1,500평 정도로 보는 견해에 따른다면 반정을 받은 대부분의 의무 군인은 약 1만평 정도의 토지를 군인전으로 받은 셈이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그리움을 참으면 별이 된다. 도자기와 청자 한갑 대학교 사학년 교생 실습을 나가서 겪은 일이다. 나는 분단별로 돌아가며 아이들과 점심을 같이 먹었는데 아이들의 시선은 늘 도시락 반찬에 집중되었다. 나는 그런 시선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같이 먹는 아이들이 골고루 하나씩은 먹을 수 있도록 항상 반찬의 가짓수를 조절했다. 그런데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 나는 학생이 점심 시간만 되면 슬그머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엔 그냥 화장실이 급해서 그러겠지 생각했는데 식사가 다 끝나도록 그 학생은 들어오지 않았다. 몇몇 학생들에게 물어보니 아버지가 막노동을 하여 생계를 꾸려 나가는데 식구가 여덟 명이나 되어 도시락은 엄두도 못 내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다음날부터 난 두 개의 도시락을 준비했다. 그리고 학교에 일찍 가서 그 아이의 책상안에 도시락을 몰래 넣어 두었다. 다행히 그 아이가 도시락을 맛있게 먹어 주어서 참 기뻤다. 사주 동안의 교생 실습이 끝나 나는 그 일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저런 아쉬움 속에 교정을 걸어 나오는데 누군가 자꾸 따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교문을 벗어나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데도 이상한 느낌이 들어 몇대의 차를 그냥 보내고 있을 때였다. 한 학생이 내 앞으로 쭈뼛거리며 다가섰다. 세수도 안 한 얼굴, 더러운 교복, 구멍난 운동화의 주인공은 내가 도시락을 싸다 주엇던 바로 그 아이였다. "내게 할 말이 있니?" 그 아이는 대답도 없이 가만히 서 잇다가 내 손에 무언가 쥐어 주고는 얼른 도망가 버렸다. 신문지로 돌돌 말린 포장을 뜯었을 때 그 속에서 청자 담배 한 갑이 나왔다. 아마 내 기억으로는 그 당시 백 원쯤 하던 담배였는데 그 아이에겐 상당히 큰 돈이었을 것이다. 점심도 제대로 못 먹는 그 아이가 백원이나 되는 돈을 모으려고 얼마나 고생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난 그 담배를 오랫동안 간직하며 조금씩 아껴 피웠다. 그 아이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 말을 꼭 전해 주고 싶다. 이십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 청자 한 갑의 선물을 가슴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고..... 장달순 님/경남 하동군 하동읍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54 -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토머스 홉스 (1588-1679) 그때 세계에서는- 1667년: 존 밀턴 "실락원"저술 1688년: 네덜란드, 하멜의 "조선표류기 조난기" 간행 토머스 홉스 (1588-1679) 지금까지 대륙 중심의 합리주의 철학을 얘기했기 때문에 자연히 우리는 이야기의 순서를 영국쪽으로 전개시켜야 할 것 같다. 모든 점에서 이 두 분야는 대조적인 발전을 오늘까지 지속시켜오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로저 베이컨은 성직자로 있으면서 자연과학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그 자신이 실험실에서 새로운 연구활동을 전개했다. 그것은 영국적 전통을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근대화 및 현대화 과정에 출발점을 만들었다. 그 뒤를 계승한 프랜시스 베이컨은 다시 그 흐름을 경험주의 철학으로 발전시키는 결실을 안겨주었다. 근대철학의 창시자의 한 사람이 된 것이다. 이런 사상적 후계자로 나타난 한 자유로운 철학자 또는 광범위한 사상가가 우리가 잘 아는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였다. 그도 또 일찍 자신의 재질을 발휘한 학자였다. 15살에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가 여러 분야의 학문을 연구했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무신론자로서의 일생을 살았고, 자유로운 삶을 오래 즐긴 사람이라고 평한다. 그가 무신론자가 된 것은 어머니의 모태에 있을 때부터 사회적 혼란기에 심한 역경을 헤맸기 때문이라고 하며, 그런 과거가 홀로 부담과 의무감 없이 명문가에 기식하는 학자 및 사상가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90세가 넘을 때까지 활동을 계속하면서 정신적 향락에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그는 철학적 학설을 물질주의적 유물론 사상으로 이끌어갔고 사회정치 문제에 더 큰 관심을 모았다. 기식하고 있는 가문의 정치, 행정활동에 기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성에 관한 문제와 종교문제에 대해서도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홉스는 국제적 무대에서 일했기 때문에 영국인으로서는 드물게 대륙철학을 연구했다. 그리고 베이컨을 기점으로 하는 경험론적 학설을 받아들였으므로, 초창기에는 좁은 영국철학에 빠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확고히 그의 철학을 뒷받침하는 것은 이성론이나 신적 존재를 배경으로 삼는 대륙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가 택한 것은 물질주의적인 자연주의 철학이었고, 철학적 표현을 빌린다면 수리 및 기계관적인 자연주의자였다. 물체는 모든 정신 및 물적 존재의 근원이며, 그것은 필연적이며 기계적인 법칙에 의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물체적 연구가 철학의 기초가 되며, 거기에는 연역적 방법과 귀납적 방법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을 주관하는 것도 독립된 이성적 존재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생리적 기능의 바탕이 되는 물리적 작용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가 인간행위의 필연성과 결정론을 주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인간행위에 있어서의 자유는 과장된 성격일 뿐이고,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듯이, 모든 행동은 주어진 원인에 따라 이루어질 뿐이라고 본다. 자유가 있는 듯이 착각하는 것은 그 원인을 모르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물리적인 힘이 대외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국가 및 사회적 존재인 것이다 자연물체와 구별되는 인공물체라고 보아 좋을 본성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의 개인이나 사회적 삶을 좌우하는 것은 어떤 관념적 능력이나 이성이 아니라, 인간적 물체의 본질인 본능, 욕망, 의욕 등이다. 그래서 사회를 원초적으로 구성하는 것은 만인이 만인을 적으로 삼는 이기적 동물인 것이다 그 상쟁의 비극을 회피하고 제어하기 위해 우리는 계약을 만들고 질서를 보존하게 되며, 그것을 유지하는 데 국가의 권력이 동원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들이 상식적으로 표현하는 위치에서 본다면 홉스는 인간의 성악설을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철학자라고 보아 좋겠다. 법과 국가권력은 그 본래적인 악을 방지하고 서로의 삶을 돕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인식의 기초가 되는 것도 본구적인 이성기능이 아니라 감각을 통해 가능해지며, 감정과 의지는 필연적인 규범과 법칙에 따를 뿐이다. 그 배후에는 물질적 힘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홉스의 철학은 오히려 정치, 국가, 사회원리 등의 외향적인 방향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어진다. 대륙의 합리주의와 완전히 상반되는 길을 선택했고, 또 그 길을 개척해 나왔던 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의 국가관과 사회철학에 더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회철학자로서의 위치를 굳혀주자고 그의 후계자들이 또 그 길을 따르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가 홉스에게서 느끼는 또 하나의 특색은 그의 인간성과 학문의 특수성이다. 남이 다 하는 주장을 했다든지 다른 철학자에게서도 볼 수 있는 내용의 철학이기보다는, 그의 인간됨과 학설의 특유성이 우리로 하여금 그의 철학사적 의미를 경시하지 못하도록 이끌어주고 있다. 또 그의 후계자들도 그의 개성있는 학설을 찬반양면에서 뚜렷이 가려주고 있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집사람'은 본래 '가족'이란 뜻 '계집'은 지금은 비칭이 되었지만, 본래는 그 형태가 '겨집'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집'에 '겨시다'(계시다)이기 때문에 '겨집'이라고 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는데, 아직 근거를 제시할 수 없는 민간어원설입니다. '겨집'은 '여자'의 뜻으로, 평칭으로 사용되어서 '아무개는 아무개의 겨집이다'라고 했었는데, 이 '겨집'에'가 비칭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바뀐 경우가 많지요. '버리다'도 '베리다'라고 하면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을 말할 때 쓰인다던가, '소주'를 '쇠주'라고 하면 역시 낮추어서 부르는 것이 된다던가 하는 것 등이 그러한 것이지요. '집사람'의 본래의 뜻은 이것의 한자어 즉 '가인'(집 가, 사람 인)으로서, '가족'이란 뜻이었지요. 부인을 가족으로 생각하고 '집사람'이라고 호칭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옛날 문헌에서 '집사람'이라고 한 것을 보면 대개 그 부인을 말하는 경우가 많았었지요.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3장 죽음과의 악수 - 김대건의 치명 한국 천주교회는 네 번에 걸쳐 큰 박해를 받았다. 이때 1만명의 선량한 신도들이 목이 잘리었다. 신의 이름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이 순교행위를 카톨릭에서는 치명 이라고 명명하는데 최상으로 축복된 순간 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신앙적 죽음을 통해서만이 가장 영예로운 신앙의 증거가 즉각에 이루어지고, 신의 무한한 축복과 영원불멸한 낙토천국이 현실화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많은 순교자들이 의연하게 그리고 기쁘게 죽어갔던 것이다. 1846년 9월 16일. 3개월의 옥중 생활을 마친 김대건 신부의 순교장면을 보자. 한강 새남터(노량진 시장) 형장에 끌려나온 김대건 신부에게 마지막 군령이 내려졌다. 사학악인 김대건의 목을 베어 달아, 모두 이를 경계할 것을 명하노라. 군졸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관습에 따라 두 귀에 화살을 꿰고, 얼굴에는 물을 뿜고 흰 회를 발랐다. 그리고 두 명의 군졸이 김대건 신부의 양쪽 겨드랑 밑에 두 개의 몽둥이를 끼워 앞뒤로 걸머메고 군졸의 둥근 진의 바깥쪽을 세 차례나 돌린 후, 신부를 꿇어앉히고 한 가닥의 밧줄로써 김대건 신부의 머리칼을 동여매어 그 한 끝을 사형대의 말뚝 구명에 끼워 잡아당기니 신부의 얼굴은 하늘을 쳐다보게 되었다. 그래도 신부는 태연하게 눈썹조차 움직이지 않으면서 말했다. 한 번 나고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이 면하지 못하는 것이어늘, 이제 천주를 위해 죽는 것이 도리어 나의 소원이니 오늘 묻고, 내일 물어도 이 같을 뿐이요, 때리고 죽여도 이 같을 뿐이니 빨리 죽여 달라. 그리고 군졸들에게 몸가짐이 이러하면 좋으냐? 쉽게 자르겠느냐? 좀 더 똑바로 하여라. 아 그만하면 됐다. 자 나의 목을 잘라라. 준비는 다 되었다. 이리하여 12명의 희자수가 시퍼런 칼을 휘두르며 자르는 흉내를 내면서 신부의 주위를 빙빙 돌아 달리다가 각각 한 칼씩 내려치니 여덟 번째의 칼날에 신부의 머리는 앞쪽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형리는 곧 그 목을 주워서 목판에 얹어 관장 앞으로 가서 검사를 받았다. 관장은 검사를 마친 후, 궁중으로 돌아가서 사형집행을 끝마쳤음을 보고하였다. 이리하여 최초의 한국인 신부 김대건은 그의 영광된 치명으로 말미암아 1857년 9월 23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하여 가경자의 칭호를 받았고, 1925년 7월 5일에는 복자의 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18. 십자군 전쟁은 진짜 성전이었나?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고 많은 사람을 죽이면 영웅이 된다`는 말처럼 전쟁은 유일하게 합법하된 살인 행위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전쟁은 여러 수단이 동원되어 정당화되고 또 미화되기까지 한다. 성전이란 말이 그것에 꼭 맞는 표현일 것이다.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자행되는 전쟁이 거룩할 수도 있다니 말이다. 역사에서 대표적인 성전이라고 할 수 있는 십자군 전쟁도 사실 그러한 전쟁이다. 기독교 세계인 서유럽이 `성지 탈환`을 명분으로 하여 이슬람 세계를 공격한 십자군 전쟁은 약 200년에 걸쳐 계속되었다. 당시 서유럽 세계는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는 기독교인들을 이슬람 인들이 박해했다는 것을 구실로 삼아 `성지 탈환`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물론 전혀 박해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이 이야기는 비잔틴의 황제가 꾸면 낸 것이었다. 11세기 중엽 비잔틴 제국은 이미 국력이 쇠한 상태였다. 여기에 이슬람으로 개종한 셀주크 투르크 족(Seljik urks)이 급속히 세력을 팽창하여 11세기에는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이슬람 지역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이러한 셀주크 투르크의 팽창에 위협을 느낀 비잔틴은 먼저 그들을 공격했으나 도리어 패했을 뿐만 아니라 투르크 족이 소아시아 지역을 점령하는 것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알렉시우스 1세 (Alexius 1, 1081-1118)는 교황 우르반 2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 때 지어 낸 말이 성지에서 박해가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말은 기독교도로서의 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주술적 효과를 가져왔다. 한편 교황은 이 기회에 성지를 탈환하고 비잔틴 교회를 로마 교회에 통합시켜 기독교 세계를 부흥시키려고 했다. 그리하여 1095년 11월 프랑스의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우르반 2세는 십자군을 제창했다. 그는 신념에 찬 목소리로 이슬람의 승리는 기독교 세계의 불명예이며 유럽의 귀족들은 힘을 합쳐 이슬람을 물리치고 성지를 회복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또한 순례자들에 대한 박해를 실감나게 강조하면서 이슬람에 대한 전쟁은 성전이며 이 전쟁에서 전사하는 자는 모두 천국에서 그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고무된 참석자들은 “하느님이 이를 원하신다”라고 호응했다고 한다. 이후 서유럽의 넘치는 활력과 강렬한 신앙심이 결합되어 전 유럽이 십자군으로 궐기했다. 이렇게 십자군 전쟁은 성전으로 규정되었고 따라서 야만적인 종족인 적에 대한 어떠한 행위도 허용되는 것으로 믿어졌다. 그리고 실제로 약탈과 만행, 적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이 기다리고 있었다. 1096년 가을 1차로 구성된 십자군을 필두로 하여 약 200년간 8차례나 십자군 원정이 감행되었다. 하지만 1차에서만 성지 탈환이라는 명목상의 목적이 달성되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에루살렘에 입성한 1차 십자군의 경우 6주간이나 계속된 전투에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을 행했다. 십자군들은 적의 병사뿐만 아니라 주민들까지 가리지 않고 죽였다. 십자군에 참가했던 어떤 프랑스 성직자는 `예루살렘의 큰 거리나 광장에는 사람의 머리와 팔다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십자군 병사나 기사들은 시체를 아랑곳하지 않고 전진했다. 신전이나 벽은 물론 기사의 말고삐까지 피로 물들었다. 그러나 이제까지 오랫동안 성지 순례를 방해했던 사람들로 더럽혀졌던 이곳이 그들의 피로 씻겨져야 한다는 신의 심판은 정당한 것일 뿐 아니라 찬양할 만한 것이었다`라고 쓰고 있다. 십자군의 잔혹한 학살을 잘 묘사하면서도 이 전쟁을 악에 대한 신의 심판으로 규정하면서 학살을 정당화하고 있다. 1차 십자군의 공격으로 `성지` 예루살렘을 비롯해 영토를 빼앗긴 이슬람 측은 전열을 정비하고 십자군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그리하여 1187년에는 다시 예루살렘을 되찾게 된다. 서유럽은 여러 차례에 걸쳐 십자군 운동을 일으키지만 소기의 목적은커녕 이동하는 지역에 대한 약탈과 어처구니없는 탈선 행위로 일관했다. 그 중 4차 십자군은 가장 추악한 경우였다. 교황 이노센트 3세의 주도하에 집결한 4차 십자군은 원래 이집트를 공격해서 그곳의 이슬람 세력을 축출할 요량으로 기사 4,500명, 말 4,500마리, 보병 2만 명, 식량 9개월 치를 베네치아에서 수송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모인 병력은 반도 안 되었고 더구나 수송을 담당해 주기로 한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줄 비용마저 조달되지 않았다. 베네치아 상인들에 대한 계약 위반과 빚으로 궁지에 몰린 십자군에게 베네치아 상인들이 기발한 제안을 해 왔다. 그것은 얼마 전에 기독교 국가인 헝가리에 의해 점령된 자라 시를 십자군이 다시 찾아 주면 계약 위반과 빚에 대해 따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성지 탈환을 위해 일어선 십자군에게 기독교인이 사는 자라 시를 공격해 달라는 엉뚱한 제안이었지만 궁지에 몰려 있던 십자군들은 선뜻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십자군들은 성지로 가기에 앞서 자라 시를 점령했을 뿐만 아니라 약탈까지 감행했다. 이에 분노한 당시 교황 이노센트 3세는 십자군들을 파문했다고 한다. 또한 1212년에 조직된 소년 십자군의 경우는 더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 소년 십자군은 성지 탈환에 대한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프랑스의 양치기 소년에서 비롯되었다. 그 소년이 그가 받은 신의 계시를 널리 알리자 수천 명의 소년들이 이를 따르게 되었고 처음에는 반대하던 부모, 성직자, 국왕도 소년들의 굳은 결심을 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소년이 중심이 된 이 기이한 십자군이 출발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프랑스 남부의 마르세이유에서 7척의 배를 타고 출발했다. 그런데 그들을 수송한 선주는 베네치아 상인보다 더 비열했다. 폭풍으로 난파된 2척 이외에 5척에 타고 있던 소년들을 모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노예로 팔았던 것이다. 이렇듯 추악한 일면을 가진 십자군 전쟁이 오랫동안 서유럽 인들에게 성전으로 인식되어 왔다. 물론 200년이란 오랜 기간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유럽 인들의 신앙심을 증명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막대한 경비와 인력이 드는 전쟁이 그렇게 오랜 기간 수행되었다는 것을 신앙심만으로 해석할 수는 없는 일이다. 도리어 중세 전반기에 급속도로 팽창하던 이슬람 세력에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던 유럽이 10세기 이후 안정과 번영을 거치면서 11세기가 되면 어느 정도 힘에서 균형을 찾아 나가고 있었고 이러한 힘의 균형이 십자군이라는 무력 충돌로 표현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5. '반중국클럽'은 반드시 실패한다 3) 중국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미국의 음모에 대해 중국은 절대 요행심리를 가져서는 안 되며 당당하게 우리의 의사를 표명해야 한다. 대만에 대한 외부세력의 어떠한 간섭도 중국을 적으로 간주하는 비우호적 행동이 될 것이며. 중국이 무력사용 중지의 요청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생각은 망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용의주도한 전천후외교를 펼쳐 대만문제에 관한 우리들의 일관된 생각과 장기적인 전략을 전세계가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유엔에서 이미 '대만은 중국의 영토'라는 결의를 한 이상, 중국이 대만독립에 반대하여 취하는 모든 행동은 국제법에 저촉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 의회에서 말하는 이른바 '대만보호'의 구호는 미국인이 사리를 분별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어떤 떳떳하지 못한 저의를 품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남해의 여러 섬에 대해 중국은 자국의 입장을 천명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즉 중국은 영유권 논쟁의 이해 당사국으로서 주권을 주장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이 문제는 가볍게 보아 넘길 수는 없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그다지 심각한 문제도 아니다. 중국은 이에 대해 이미 적지 않은 합리적인 제의를 하였다. 중요한 것은, 이해 당사국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안을 제출하도록 하면 몇몇 당사국의 입장이 상충될 것이다. 이러할 경우 '논쟁을 그만 두고 공동개발'이라는 모안을 채택하면 모든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겠는가? 이때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것은 아시아의 문제는 아시아인의 지혜로 풀어나가야 할 것이며, 미국이 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미국이 이 지역의 영토분쟁에 '중국위협론'을 끌어들이고 이를 빌미로 반중국동맹을 결성하려고 든다면 이로 인해 아시아의 이해 당사국은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고 결국 미국만 어부지리를 얻게 될 것이다. 미 . 일 안보체제의 재정립은 그다지 놀랄 일은 되지 못한다. 일본의 국권문제는 확실히 아직은 애매모호한 상태이다. 이것은 일본의 전후 재건정책과 관련이 있다. 일본은 미국의 지지와 도움으로 2차대 전의 폐허에서 일어설 수 있었으며 몇 십 년 동안 경제적으로 거대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국가의식은 미국의 통제 아래 있었고 미국이 돌보는 아이가 되어버렸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좀 이상하다. 그들은 돈으로 미국을 살 정도의 부를 축적했으나 국제적으로 진정한 자기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는 드물다. 일본이 진심으로 중국과 가까워질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들의 입장은 갈수록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 달라지고 있다. 일본은 대중국차관을 동결하겠다는 위협을 하며 중국의 핵실험을 앞장 서서 반대하였다. '일본은 원자탄의 피해를 입은 유일한 국가이므로' 중국이 일본 국민의 감정을 이해해야 한다고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중국이 아시아 국가 중에서 2차대전의 피해를 가장 많이 입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몇 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은 줄곧 서구 열강들에 의해 약탈과 능욕을 당해온 국가이지 않 은가? 중국은 일본에게 피해를 입힌 적이 없으나 일본은 중국을 수도 없이 괴롭혔다는 사실을 일본은 간과하고 있다. 중국은 모든 핵보유국가 중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가장 수준이 낮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본은 알지 못한단 말인가? 서구 국가들은 상당 수준의 핵무기를 보유한 후, 돌아서서는 중국에게 핵실험을 하지 말라고 요구하였다. 이런 것이 강권정치의 전형적인 수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전세계에서 어느 나라가 중국처럼.절대 먼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또 핵무기 비보유국에는 절대로 핵무기를 쓰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했던가? 어떤 일이든 미국이 하면 잘하는 일이고, 중국이 하면 잘못 하는 일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사실에서도 일본인이 아시아의 한 구성원에서 떨어져 나가고 있는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이 전적으로 중국에 대웅하기 위해 미국과 동맹을 체결한다면 이는 일본인에게 조금도 이로울 것이 없으며 오히려 큰 손실을 가져다 주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선 모든 아시아 국가들이 일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2차대전중 일본이 모든 아시아 국가들에게 준 고통은 앞으로 몇 백 년이 흐른다 해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일본은 앞으로 어떻게 하여 중국과 아시아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할 것이며, 또 어떤 방법으로 아시아 국가가 다시 일어서는데 도움을 줄 것인가 등에 대한 목표를 세워야 할 것이다. 또한 앞으로 일본은 대만문제에 대해 절대 함부로 흥분하거나 논리에 맞지 않은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일본이 대만문제에 대해 특별한 야심이 없고 과거의 감정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처럼 대만문제를 중국 내부의 문제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중국이 대만에 대해 취하는 태도를 ' 중국위협론'으로 비약시키는 것은 하등의 근거가 없는 것이다. 몇 년 전 일본의 어느 학자가 중국의 분열을 부추기며 중국이 분열하고 붕괴되어야만 일본의 걱정이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고 한 적이 있다. 일본 정부는 이런 황당무계하고 치욕적인 생각으로 또한번 중국인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될 것이며 나아가 아시아의 시대적 조류에 역행하는 행동 또한 절대 해서는 안 된다. 일본이 경제대국으로서의 지위에 만족하지 않고 정치상의 위상을 확보하려는 데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일본이 유엔상임이사국이 되려는 희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일본은 아직 외교적으로 독자적인 노선을 가지고 있지 못하며 과거 역사에 대한 반성이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요구하는 수준에 못 미친다는 데서 기인한다. 이 점에 있어서 일본은 독일과 근본적으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므로 일본은 아직도 아시아 국가에서 유엔상임이사국이 될 만한 대표성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 이런관점에서 보면 일본보다는 오히려 인도나 아프리카의 어느 한 국가가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4) 무시해야 할 것과 깨우쳐 주어야 할 것들 미국이 '반중국클럽'을 결성하려는 음모를 깨트리기 위해, 중국은 아시아에 새로운 구도가 탄생하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여야 할 것이다. 얼마 전 방콕에서 열린 아태정상회담에서 이러한 계획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중국이 이 카드 저 카드를 번갈아 가며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카드'란 사실 국제정치에 있어 단기적이고 얄팍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세계정세의 현실에서부터 출발하여 중국과 유럽, 중국과 러시아, 중국과 동남아국가연맹 등등에 얽힌 각종 이해 관계를 고려하여 현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기초 위에 눈앞의 이해득실에 현혹되지않는 국가간의 어떤 연결점을 찾아야 한다. 또 긍정적이고 상호 이해를증진시킬 수 있는 대화채널도 수립하여야 한다.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고립된다면 쌍방 모두에게 매우 불행한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란 점을 널리 홍보하여야 할 것이다. 다른 나라들은 중국의 국력과 번영이, 국제무대에서 날뛰는 사악한 세력의 압력이나 방해로 손상되는 일은 결코 없을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중국과 대립하는 것보다 중국을 다른 국가와 동둥하게 대하고 쌍방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평화적 동반자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중국이 국제관계에서 취해야 할 중요한 조치 중에는 미국의 전망과 구상을 무시해야 할 것들도 있다. '미국을 무시한다'는 것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되어야 한다. (1) 중소국가들이 미국의 강권에 대항하여 벌이는 각양각색의 투쟁을지지해야 한다. (2) 다른 나라들과의 무역, 경제 합작을 강화한다. 만약 미국이 갖은 방법을 써 철저하게 방해하려고 든다면 우리는 다른 국가나 지역으로 전환하여 투자하고 시장 및 여타 무역합작에 주력하며, 국민들이 미국제품 안 사기, 미국영화 안 보기, 미국 쌀과 밀 안 먹기 등의 운동을 벌이도록 해야 한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모토롤라라는 회사를 모르는 중국인은 아마없을 것이다.이 회사는 중국시장에 진출한 몇 년 동안 거의 50억 달러가 넘는 이익을 남겼다고 한다. 모토롤라 광고의 일부를 대행하는 회사에 다니는 내 친구가 하루는 사적인 자리에서 '미국인은 속과 겉이 완전히 다른 놈들이야'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가 말하는 내용은 이러하였다. 모토롤라는 그들의 신기술을 중국측에 조금씩 전수하기로 했었다. 이것은 중국과 합작을 체결할 당시에 이루어진 계약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모토롤라가 중국에 전수한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중국이 독자적으로 제조할 수 있는 것은 호출기에 붙은 쇠줄뿐이란 것이다. 이 친구는 모토롤라와 중국이 공동투자하여 덴진에 설립한 어느 기업을 참관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모든 중국노동자들은 퇴근할 때 도난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로 반드시 엑스레이 검색대를 통과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그들이 만든 규칙에는 일단 의심이 되는 노동자에 대해서는 몸수색을 할 권리가 있다는 조항이 들어있다고 한다. 미국이 표방하는 인권과 민주 .자유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세력이 동구로 확장되면서 중국은 노출되거나 혹은 잠재된 '반중국동맹'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중 .러 두 나라사이에는 다시 고려해야 할 문제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지금 두 나라는 지정학적 내지는 세계정치의 관점에서 군사협력을 포함한 다양한 협력가능성을 모색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4)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원동(遠東) 지역으로 진출하는 미국세력의 침투를 막아야 한다. 미군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이 지역 국가들이 깨닫게 하고, 미국은 자기들이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 가도록 하여야 한다. 일본은 중 .일 양국관계의 역사적인 측면에서 중국이 일본에 대해 크나큰 관용을 베풀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들이 중국을 침락했을 때 자행한 만행에 대해 우리의 원한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일본이 패망한 후 중국인들은 그들이 즐겨 쓰는 '철없는 아이들이 무슨 죄야?'라며 묵묵히 일본의 고아들을 데려다 길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 일 관계정상화를 위한 노력이 진행될 때 중국은 주동적으로 전쟁 배상요구를 포기했었다. 그러나 일본은 중국의 핵실험을 빌미 삼아 대중국 엔화차관을 동결시키고 있는 것이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것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 국제적인 실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일본은 자신이 아시아인들에게 끼친 고통에 대해 조금도 반성하는 기색이 없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또한 죄를 지은 나라에 대해 철저한 웅징을 하지 않으면 이처럼 오만방자하게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오랫동안 중국은 그저 '앞만' 바라보았다. 80년대 중반, 평화를 갈망하는 심정에서 3천 명에 달하는 일본청년들을 중국으로 초청했던 것이 한 예가 될 것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참으로 선량하기만 하였다.그런데 이 3천 명의 일본청년들 중 진정으로 일본 침약행위의 진상을 이해하고, 난징(南京) 대학살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학생은 불과 10퍼센트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베이징사범대학에서 중국어를 공부하는 오니시라는 일본 유학생을 알고 지낸다. 어느 날 열린 댄스파티에서 함께 춤을 추다가-그녀가먼저 나에게 춤을 청했다-다짜고짜로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을 때 난징에서 중국인을 몇 명이나 죽였는지 아십니까?'라고 직설적으로 물은 적이 있다. 이런 질문은 듣기 거북했을 것이다. 부드럽고 아름다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던 당시의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었다.예상대로 그녀는 내 어깨에서 손을 내리고 약간 신경질적으로 반문하였다. '무슨 뜻이지요?' 나는 담담하게 웃으면서 '만입니다. 난징은 텅비어 버렸지요'라고 말하였다. 나는 그녀의 스탭을 보면서 그녀가 몹시 불쾌해졌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일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얼마 후 우리는 우연히 또다른 장소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그녀는 여전히 예의바 르게 나를 대하였다. 나는 무의식중에 또 그녀에게 '50년 전 일본 군인들이 난징에서 어떤 일을 자행했는지 아십니까?'라고 물었다.그녀는 잠시 멍해지더니 '장 선생님, 저번에도 물어 본 사실을 잊어 버리셨어요?" 라고 또박또박 말하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내가 너무 무례했을 수도 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을 다시 거론하는 것 아무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특히, 무도회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화제였다. 나는 그녀에게 그 말을 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나에게 보여준 표정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필요할 때는 일본을 힘껏 일깨워줘야 한다. 미국이 나쁜 전례를 남긴 후, 일본 국내의 친대만(의원들도 대만총통 리떵후이를 일본으로 초청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만약 이 점에서 그들이 중국의 인내심을 시험하려 든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우리의 확고한 태도를 보여주어야 한다. 일본인은 대중국 차관문제와 기타의 문제들을 분리하려 하고 있으나, 이미 체결된 차관공여의 약속은 과거에 대한 일종의 도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동경대학 법학과의 객원연구원인 아까마는 '일본은 현재 워싱턴의 신호만을 기다리고 있다. 워싱턴의 신호가 혼란하면 일본의 신호도 혼란해진다'라고 말하였다. 이 말은 일본외교의 실상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사실 일본은 국제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못하고 '미국의 입김에 휩쓸려 다녔다.' 심지어는 중 .일 양국의 지도자들이 오래도록 심혈을 기울여 수립해 온 관계까지도 저버리고 있으니 정말 21세기를 맞을 전략적 안목이 부족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일본인에게 평화를 기대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일본인들은 일본의 역사를 통해 평화와 야심을 버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아시아의 일본이 되려면 미국의 전차에 매달려 따라다니며 떨어지는 떡고물을 얻어 먹을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우리 동네 샘물 내가 살던 고향 마을에는 늘 마르지 않는 샘이 하나 있었다. 사시사철 그 어느 때에도 물이 마르지 않아 마을 사람들은 평생 물 걱정을 하며 사는 일이 없었다. 논바닥이 거북 등처럼 쩍쩍 갈라지는 여름 가뭄 때에도 유독 그 샘물에서만은 차고 맑은 물이 퐁퐁 솟아났다. 겨우내 눈이 내리지 않아 몇 십년 만에 겨울 가뭄이 들었다고 난리가 나도 우리 동네 샘물만은 결코 마르는 법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이 샘을 자랑하였으며 또한 사랑하였다. 어른들은 들에 나가 김을 매다가 돌아와서는 꼭 이 샘물에다 손발을 씻었다. 나와 같은 조무래기들도 하루 종일 땡볕에서 뛰어 놀다가 저녁 먹을 때가 되면 그 샘가에 가서 땟국을 씻고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보자기에 싼 책 보따리를 등허리에 질끈 동여매고 10리나 되는 읍내 국민학교에서 지쳐 돌아올 때면 나는 으레 이 샘물을 한 바가지 마시고 나서야 다시 힘을 얻곤 했다. 동네 아낙네들은 매일같이 그 샘물을 길어다가 밥을 지었으며, 그 샘가에 와서 빨래를 하는 젊은 아낙네도 있었다. 샘은 바로 마을 사람들의 젖줄이었으며, 마을 사람들 중에 이 샘을 애지중지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물론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내가 청년이 되어 고향 마을을 떠날 때까지 그 샘은 나를 키워 준 또 하나의 어머니였다. 그런데 나는 늘 흘러 넘치는 그 샘물이 아깝다고 생각되었다. 이웃 마을 사람들이 그 샘물을 길어 가는 것조차 아까워 어떤 땐 속이 상할 때가 있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그 물을 일부러 몇 바가지씩 떠서 물배를 채워 보기도 하고, 아무 쓸데도 없이 물을 길어다가 그냥 길가에 버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 물을 몇 동이나 길어다가 뒷간을 말끔히 청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물은 언제나 흘러 넘치기만 할 뿐 조금도 줄어들지는 않았다. 그 아까운 샘물이 훌러 넘치지 않도록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궁리를 해도 별달리 뾰족한 수는 없었다. 나의 그러한 생각은 내가 고향을 떠난 후에도 계속되었다. 도시에서 돈을 주고 물을 사 먹을 때마다 그러한 생각은 점점 더 깊어 갔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때의 내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던가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샘물이 흘러 넘치지 않으면 그대로 썩고 만다는 것을 이제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도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사랑이 없으면 사람은 죽고 만다는 것을. 사람도 늘 그 샘물처럼 서로 사랑이 흘러 넘쳐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을. 글터 → 이글저글 노는 것이 자랑, 중국인들에게는 19세기까지만 해도 일하지 않고 가만히 놀면서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게 대단한 자랑이었다. 따라서 그 증거물로 귀족들은 손톱을 길게 길렀고, 길면 길수록 아름다운 것으로 간주되었다.중국인의 라이프스타일, 친구를 만나서 악수를 할 때 친구의 손을 잡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손을 잡는다. 손님에게 차를 대접할 때 접시위에 찻잔을 놓는것이 아니고 찻잔위에 접시를 놓는다. 더울 때 더운 차를 마셔서 몸을 식힌다. 목욕을 하고 나서 마른 수건이 아닌 젖은 수건으로 몸을 닦는다. 집을 지을 때 지붕부터 먼저 세운다. 그들의 나침반은 북쪽이 아니라 남쪽을 가리킨다.고대 중국의 화가들은 여성의 성기나 남녀의 성행위를 그릴 수는 있었지만 여성의 발은 절대로 그릴 수 없었다.이에는 이, 중국에서는 살인자와 술취한 사람은 모두 사형시키고 간음한 자와 강도는 음경을 잘랐다. 또 국가의 재산을 손상시킨 사람들은 귀와 손을 자르고, 좀도둑이나 여행자를 괴롭힌 사람은 코를 잘랐다. 통금시간을 어긴다든지, 작은 물건을 훔친다든지 하는 가벼운 범죄에 대해선 불에 달군 인두로 이마에 표식을 새기는 벌을 내렸다.긴 소매인 이유, 중국인들이 유난히 소매가 긴 옷을 입는 이유는 시장이나 남의 집에 갔을 때 물건을 훔치기 위해서였다. 또 손님을 문 밖에까지 나가서 배웅하는 이유는 손님이 자신의 집 물건을 도둑질해가지 않나 살펴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