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첫쪽 ♧……………독서편지 T기본글꼴 기본글꼴✔ 나눔고딕✔ 맑은고딕✔ 돋움✔ ✔ 뷰어로 보기 2006.11.18 12:03 【독서편지】: 제 63 호 風磬 조회 수 8,671 추천 수 14 댓글 0 게시물 주소복사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독서편지】: 제 63 호4339.11.18 (09.28)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용량제한으로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 않보이시는 분은 저의 블로그 또는 아래의 링크를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문학소식 - 계간 '시와시학'이 주관하는 제11회 시와시학상 수상자로 작품상에 문인수 시인, 평론상에 김수이 경희대 교수, 젊은시인상에 박찬일 시인이 선정됐다. 시상식은 내달 9일 오후 6시 사간동 출판문화회관에서 열린다. -2006 광주시 문화예술상 수상자로 수필가 김수봉(68)씨 등 4명이 선정됐다. 광주시는 12일 "문학부문인 '박용철 문학상'에 김수봉(전 살레시오고 교감)씨를 선정하는 등 미술과 국악 등 3개 부문 수상자 4명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미술부문 '오지호미술상' 본상에는 서양화가 김영태(79)씨가, 특별상에는 박광구(44.광주 석산고 교사)씨, 국악 부문 '임방울국악상'에는 국악인 정철호(84)씨가 수상했다. '전라도 말씨로' 등 수많은 수필집을 낸 김씨는 시민 백일장과 근로청소년 글짓기 대회 등 '문학과의 만남'이라는 다양한 문학행사 활동으로 시민 문화향유권 제고에 기여했다.오지호 미술상 수상자인 김씨는 40여년전에 광주일요화가회를 창립, 지역 미술인구 저변확대에 기여하고 국내외 전시회를 통해 한국 미술을 널리 알리는 등 미술발전에 공헌했다.사단법인 판소리 고법보존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정씨는 판소리 고법 예능보유자로 임방울 선생 예술정신과 유파 전승을 위한 노력 등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수상자는 문화예술단체의 추천과 전문가로 구성된 심사를 통해 선정됐다. 광주시 문화예술상은 한국 문화예술발전에 큰 업적을 남긴 지역 출신 오지호,허백련,박용철,임방울 선생의 예술정신을 이어받아 문화예술 발전에 공적이 큰 예술인에게 주어진다. -제20회 이영도 시조문학상 제16회 이호우 시조문학상 시상식이 11월17일 오후 5시 청도군민회관에서 개최된다.제16회 이호우 시조문학상 수상작은 김영재(58) 시인의 `아름다운 땀 냄새’가 선정됐다. 이 작품은 시대정신이 강하게 투영된 시로서 대립적 구조와 명암의 대비 등 표현기법의 다양성을 통해 혹독한 현실을 고발하는 시정신을 극대화시킨 것으로 평가받았다. 또 제20회 이영도 시조문학상에는 김경자(67) 시인의 시조 `파시2’가 수상작으로 뽑혔다. `파시2’는 사라져 가는 전통에 대해 깊이있게 조명하면서 재창조에 몰입하는 시적 안목이 돋보이는데다 시를 엮어나가는 표현기법이 적절한 비유로 형상화시켰다는 호평을 받았다. 이날 시상식에 앞서 오후 4시에는 `이영도 시인의 문학세계’ 문학강연이 열리며 시삭식 후에는 이영도 30주기 기념 `이영도 문학의 밤’ 특별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한편 이호우·이영도 시조문학상은 청도 출신의 시조시인 이호우·이영도 시인의 작품세계와 예술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됐다 글터 → 명언 / 격언 글이란 한번 인쇄되면 스스로의 생명을 지니게 되는 법. / 캐롤 버넷(미 배우) 글터 → 수필 내잠 속에 비내리는데 - 이외수 꽃가꾸기 흔히 많은 여자들 사이에 앉아 있는 남자를 보면, 저 사람 꽃밭에 앉았네,라는 농담들을 던진다. 직장 여성을 직장의 꽃이라고 말하고 밤거리의 여성을 밤의 꽃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여자를 꽃에다 비유하는 것은 아무래도 여자가 지닌 아름다움 때문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런데 최근에 이르러 꽃도 플라스틱으로 많이 만들어져 나와서 어떤 것은 거의 생화와 구분하기조차 힘든 것까지 있다. 물론 코를 갖다대고 냄새를 맡아 보면 금방 알 수가 있겠지만 육안으로는 식별이 그리 용이하지가 않다는 얘기다. 그와 마찬가지로 요즘의 여자들 또한 정말로 아름다운 여자가 있고 가짜로 아름다운 여자가 있는데 그것은 꽃에서의 경우보다 더욱 식별이 곤란하다. 어떤 남자가 말했다던가. 여자를 앞에서 볼 때는 위로부터 아래로 보고 뒤에서 볼 때는 아래서 부터 위로 보게 되는 것이 정상이라고. 하지만 그건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 여자, 이를테면 그저 길에서 흔히 마주치는 여자를 보게 될 경우의 얘기일 것이다. 막상 자기의 아내될 여자를 그런 선별법에 의해서 고르는 남자는 아마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요즈음의 여자들을 보라. 남편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고소를 하기도 하고 팁을 적게 준다고 손님에게 맥주병을 던지기도 하고 보험금을 타먹기 위해 남편을 독살하기도 한다. 물론 다들 저마다의 사정이라는 것이 있으므로 옳고 그르다는 얘기는 하지 않겠다. 하지만 우리나라 여성들이 옛날보다 한결 강해졌다는 생각만은 떨쳐버릴 수가 없다. 끝으로 보기에도 모두가 한결같이 아름답고 연약해 보이는데 속이 어떠한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괴테가 말하기를 전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여성적인 것뿐이라고 했다는데 이제는 도대체 여성적인 게 어떤 것인지조차 모호해져 가는 듯한 느낌이다. 식물에게 있어서의 꽃을 보라. 그것은 열매를 맺기 이전에 가지는 최상의 화려한 축제 단계다. 아름다운 자태는 물론이려니와 달디 단 꿀과 황홀한 향기까지 가지고 있다. 거기에 도취되어져 벌과 나비가 찾아온다. 여자에게 있어서의 꽃을 보라. 역시 식물의 경우와 별로 다를 게 없다. 여자에게도 달디단 꿀이 있으며 황홀한 향기와 아름다운 자태가 있다. 거기에 도취되어져 벌과 나비가 찾아온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은 여자도 많이 있는 것 같다. 여자에게있어서의 향기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마음에다 비유하는 것이 제격이겠는데 플라스틱 가화와 마찬가지로 향기가 나지 않는 여자도 상당히 많은 듯하다. 내면의 아름다움은 등한시하고 겉치레에 너무 신경을 쓰는 경향이 있다. 영원한 안식보다는 순간의 쾌락에 더 많이 치중하고 마음의 풍요보다는 물질의 풍요에 더 많이 치중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라. 꽃이란 언제가는 지고 만다. 식물에게 있어서는 꽃이 지게 되면 그 향기까지 사라져 버리지만 여자에게 있어서는 약간 다르다. 비록 꽃이 졌다고는 하더라도 그 향기는 남아 있을 수가 있는 것이다. 기실 여자의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삼단 같은 머리카락, 샛별 같은 두 눈동자, 반달 같은 눈썹에 앵두 같은 입술에서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미모가 뛰어난 여자라 하더라도 마음속에 들어 있는 것이 없으면 은연중에 그 미모가 천박해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박색이라고는 하더라도 마음속에 선성이 갖추어진 여자라면 그 박색의 외모 속에서도 어떤 매력 같은 것을 느끼도록 만들어 주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수많은 여자들이 가정을 등한시하고 철야 고스톱에 열을 올린다든가 남자 몰래 춤이나 추러 다닌다는 것은 얼마나 한심스럽고 슬픈일인가. 그러한 여자들은 청춘을 되찾기 위한 방편이라고 변명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자신을 더욱 추악한 몰골로 늙어 가도록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공원에서 백발이 성성한 나이의 노부부가 서로 손을 꼬옥 잡고 산책하는 것을 볼 때 왠지 가슴이 뭉클해지고 말이라도 한번 걸어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는 그들에게서 새로이 피어나는 꽃송이들을 발견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꽃송이들은 이미 우리가 미처 볼 수 없는 영혼의 화원에서 피어나는 것들로서 아무리 비바람이 몰아쳐도 시들지 않고 그 향기를 대대손손 물려줄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련의 겨울이 지나고 나면 다시금 새로운 꽃을 피우듯이 사람도 모든 고통을 극복한 뒤에는 언제나 새로운 꽃을 피우게 되는 법인데 그 꽃은 물론 마음 안에서 피는 것이므로 먼 곳까지 향기가 퍼져 나간다. 그리고 그 꽃은 반드시 일생이라는 거름을 그 자양분으로 한다. 여자여, 그대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그대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을 그대 스스로 어디에다 두는가에 달려 있으며 어떻게 가꾸는가에 달려있다. 거기에 따라 그대는 그대 자체를 향기 그윽한 꽃으로 만들 수도 있고 속물 근성만 가득한 여자로 만들 수도 있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군대 가는 사람 따로 있었다 - 권영국 아쉬운 밤 흐뭇한 밤 뽀얀 담배 연기 둥근 너의 얼굴 보이고 넘치는 술잔에 너의 웃음이... 자, 우리의 젊음을 위하여 잔을 들어라. 헤어짐의 아쉬움과 우정, 그리고 군복무의 비장한 각오가 표현된 입영전야란 노랫말의 일부분이다. 정들었던 사람들과 헤어져야 하는 안타까움, 힘든 훈련과 얼차려 등 말로만 듣던 군생활에 대한 두려움 속에 입대를 앞둔 젊은이들은 이 노래를 합창하며 소주잔을 기울인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훈련소로 떠나면서 처음으로 자신이 살아왔던 세계와의 긴 이별을 경험하게 된다. 젊은이들은 군입대를 반갑지 않은 인생의 장애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군생활이 젊은 시절에 새로움을 경험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3년이라는 기간이 짧은 청년기에서 너무나 길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천여 년 전인 고려시대 사람들의 군대 생활은 어떠하였을까? 어떤 사람들이 군대에 갔고, 복무 기간은 얼마 동안 이었으며, 군량과 무기는 어떻게 마련하였는가 등의 여러 의문을 오늘날과 비교하면서 살펴보자. 어떤 사람들이 군대에 갔나 오늘날의 의무병제 아래에서도 권력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은 여러 편법을 동원해 군역의 의무를 회피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사실은 사회 권력층이나 부유층 자제들의 현역입영 비율이 일반인에 비해 현저히 낮다는 최근의 국정감사 자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양반 신분과 평민. 천민. 신분을 엄격하게 구분했던 고려시대에는 군대에 가는 계층부터 오늘날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모든 양인 남자는 일단 법제상으로는 모두 군대에 가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특권 지배층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군대에 가지 않았다. 이들 대부분은 과거나 음서를 통해 관리가 되어 군대에 가지 않았다. 설령 군인으로 동원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특별한 군사조직에 편입되거나 장교로 진출하여 일반인이 지는 힘든 군역은 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군대에 갔을까? 이 물음에 대해서 그 동안 연구자들은 서로 다른 견해들을 제시하였다. 하나는 군사력의 중심을 이루는 중앙군은 농민이었다고 보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중앙군과 지방군 모두 일반 농민 출신의 군인으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전자는 신라 말기 중앙 귀족이나 지방 호족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이 후삼국의 전란 속에서 점차 전문적인 군인이 되고 신분도 아울러 향상되어 일종의 특수한 신분층을 이루게 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군인을 핵심적 지배층인 문무 양반 속에 끼지는 못했지만 말단 지배층에 포함되는 중간 계층으로 이해한다. 후자는 군인이 농민으로 구성되었다고 이해한다. 평상시에는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자기 차례가 되면 군인이 되어 개경에 올라가 도성을 지키거나 변경에 나아가 국경을 지켰다고 본다. 이처럼 지금까지 연구자들을 군인의 존재를 둘러싸고 그 신분을 두 가지로 각기 달리 파악해 왔다. 평상시엔 농민으로, 순번제로 군인되어 최근에는 위의 두 견해를 절충하여 오늘날의 직업 군인과 같은 전업 군인과 일반적인 의무 군인의 두 부류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추세이다. 그러나 이처럼 두 부류의 군인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전체 군인의 다수를 차지한 것은 농민 출신의 의무 군인이었고 이들이 국방력의 중심을 이루었으므로 결국 고려시대의 군인은 병농일치의 존재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양인 농민이 다 군인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 가운데서 군인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일부만이 군인이 되었다. 즉 군대 생활을 감당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춘 비교적 부유한 농민들이 군인으로 징발되었는데 이들을 정호라고 하였다. 이에 반해 경제적으로 생활이 어려워 생업을 당장 하지 않으면 안되어서 군대 생활을 감당하지 못하는 농민은 군인이 되는 대신 조. 용. 조 3세로 불리우는 조세의 의무를 졌다. 이들을 백정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백정 농민도 언제든지 군인이 될 수 있는 후보자로서 군인이 부족한 비상시에는 군인으로 동원되었다. 이 경우 국가에서 토지를 지급하여 경제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군대 생활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처럼 고려시대에 군인이 된 기본 계층은 농민이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6품 이하의 양반, 향리, 노비 등도 군인으로 동원되었다. 그러나 고려 후기로 오면서 모든 농민층이 군인의 징발 대상이 되었다. 즉 농업 생산력의 발전으로 농민들의 생활이 전반적으로 안정되면서 그동안 농민층 내에 존재하던 정호와 백정의 구분이 의미가 없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모든 백성이 군인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점차 강화되면서 그동안 사실상 군인으로 징발되지 않았던 양반층의 상당 부분이 군인으로 징발되거나, 간접적인 형태로 군역의 의무를 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기에는 거의 군인으로 징발되지 않던 노비도 일부가 군사조직 속에 편입되게 되었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그리움을 참으면 별이 된다. 볼펜 한자루 우리 집은 영덕 근처의 작은 시골 마을입니다. 지금 저는 집을 떠나 타지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려면 버스를 자주 갈아 타야 하기 때문에 시골에 사는 것이 번거롭게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아버지께 도시로 나가 살자고 조르지만 아버지께서는 끄떡도 하지 않으십니다. 시골 초등학교에서 일학년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계시는 아버지는 이곳 아이들의 때묻지 않은 보석같은 마음이 얼마나 예쁘고, 이곳의 사람 사는 냄새가 얼마나 좋으냐며 이곳을 떠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시곤 합니다. 지난 스승의 날 저녁, 아버지께서는 한아름 선물을 받아 오셨습니다. 그 중에는 양말, 손수건 같은 작은 것에서부터 꽤 값이 나가는 상품권이나 선물도 더러 있습니다. 그 선물들을 식구들이 하나하나 풀러 보는 사이, 아버지께서는 주머니에서 노오란 포장지로 서툴게 포장한 작은 꾸러미를 하나 꺼내셨습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포장지를 펴 보셨습니다. 식구들은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잇을가 잔뜩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았습니다. 고가품의 좋은 선물이 나올 것라고 기대하면서....... 하지만 포장지 안에서 나온 것은 흔한 볼펜 한자루뿐이었습니다. 실망한 식구들이 "에이 겨우 볼펜 한 자루야"라고 말하자, 아버지께서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수업이 끝나고 아버지께서 퇴근하려는데 반에서 집안 형편이 가장 어려운 아이가 아버지께 왔답니다. 그리고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포장지에 쌓인 볼펜을 아버지 손에 살짝 건네 드린 후 말없이 뛰어가 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허허 녀석! 이십년 교직 생활 동안 가장 큰 선물이구나." 아버지는 환하게 웃으시며 와이셔츠 앞주머니에 꽂혀 있던 만년필을 꺼내시더니 그 자리에 볼펜을 대신 꽂으셨습니다. 만년필 대신 아버지의 주머니에 꽂힌 볼펜이 셔츠와 참 잘 어울렸습니다. 박치형 님/경북 포항시 남구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53 - 모나드...'우주의 살아 있는 거울': 라이프니츠(1646-1716년) 그때 세계에서는 1702년: 최초의 일간신문 "데일리 쿠란트" 발생 1705년: 핼리, 주기적 혜성(헬리헤성) 발생 우리는 데카르트 이후의 대륙철학을 이성론 또는 합리론 계통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합리주의 철학'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 것은 이성론은 옛날부터 최근까지 계속되어왔으나, 17세기 중심의 대륙철학은 특히 수학, 기하학을 배경으로 하는 합리적 연역법을 택했기 때문에 합리성을 강조한는 의미에서다. 이 합리주의 철학의 마지막을 장식한 사람은 독일의 라이프니츠(G. W. Leibniz,1646-1716)였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드물게 보는 천재였다. 15살에 대학에 입학했고 20살에 박사학위를 얻었을 정도였다. 그의 전공은 법률이었다. 그러나 모든 분야의 학문에 업적을 남겼다. 너무 어려서 사법고시에 합격했기 때문에 법적연령 미달로 얼마를 기다려야 했을 정도로 조숙했고 학문적 원숙성을 일찍부터 지니고 있었다. 그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기초적인 학문은 수학이었다. 미적분을 창안해냈을 정도였다. 미적분의 최초의 공로자는 누구인가 하는 논란이 있었다. 뉴턴으로 돌리는 영국인들이 많이 있었으나 최근에는 거의 같은 시기에 두 사람이 따로따로 발견한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그는 철학적 학설과 체계를 형성하기 이전에 수학을 보편수학으로 발전시키며 그 방법과 원리가 모든 학문의 원리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최근 그의 유고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먼 후일에는 호텔 로비에서 만난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다가 '지금 우리 대화의 초점이 흐려지고 있으니까 수학으로 풀어보고 그 초점을 찾은 뒤에 다시 토론을 하자'는 때가 올 것이다"는 내용이다. 물론 누구도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오늘의 언어분석철학과 논리적 실증주의가 발달하면서는 바로 그 작업이 철학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모든 지식과 사상은 언어로 표현될 수밖에 없으며, 언어는 논리적 구조를 갖추어야 한다. 그 논리는 마침내 수학적 구조에 기인하게 되는 것이다. 즉 수학논리학으로 전개되지 않을 수가 없다. 수학에서 논리, 논리에서 언어가 규정된다면 수학적 정리는 벗어날 수가 없다. 하버드의 철학자였던 콰인 교수 등이 바로 그런 방향의 첨단을 걸으며 연구활동을 해왔다. 이렇게 본다면 라이프니츠의 착상이 얼마나 참신했나를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다. 그는 여러가지 면에서 독창적인 학설을 제창해주었다. 그러나 가장 근본이 되는 철학적 이론은 단자론(모나드 론)이다.우주의 궁극적인 실체는 물질의 원자가 아니라 힘 또는 에너지의 단위일 것이라는 생각을 품게 되었고, 그 물질적 존재의 실체는 모나드라고 보는 것이다. 모나드(monad)란 원래 수학용어로 'I'또는 '단위'를 뜻하는 모나스(monas)에서 나온 말이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모나드는 넓이나 형체를 가지지 않으며, 무엇으로도 나눌 수 없는 궁극적인 실체로서 모든 존재의 기본이 되는 것이다. 또 모나드는 원자와는 달리 비물질적인 실체로, 그 본질적인 작용은 표상이다. 표상이란 외부의 것이 내부에 포함되는 것으로, 모나드는 이 작용에 의해서 자신의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외부의 다양성에 관계를 가질 수 있으며, 그 표상되는 다양성이 곧 세계 전체다. '우주의 살아 있는 거울'이라고 하는 모나드는 '소우주'를 이루고 있으나, 각기 독립되어 있어 서로 인과관계를 가지지 않는다. 이질적이며 무한의 다양성을 갖는 모나드들은 신의 예정조화 작용에 의하여 만물을 형성, 유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표상을 가지는 모나드들은 지배를 받는 물질적 모나드가 되기도 하고 그것들을 지배하는 정신적 표상의 모나드이기도 하다. 최초의 모나드는 신의 본질을 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모나드들의 운동기능이 공존과 이존의 위치에서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공간으로 보고, 계속해서 일어나는 계기적 성격을 갖는 것을 시간의 위상에서 찾아보게 된다. 모나드 현상의 공존의 순서와 계기의 순서가 공시간으로 나타난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뉴턴의 절대공간관이나 절대시간관에 비해 라이프니츠의 공시간은 상대적인 것으로 보아 좋을 것 같다. 이렇게 존재의 배후에 신의 예정과 조화의 작용이 지배한다고 보게 되면 이 존재하는 세계는 가장 완전하면서도 소망스러운 세계라고 보아야 하겠다. 거기에서 인출되는 것이 염세주의에 대립되는 낙천주의 사상이 된다. 이 이상의 좋은 세계는 존재할 수 없다는 이론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에 대한 낙천주의가 성립된다. 프랑스의 볼테르가 "캉디드"라는 작품을 발표해 이 낙천주의를 반박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낙천주의를 맏고 있는 주인공이 그 망상에 빠져 비극적인 삶을 산다는 풍자성이 짙은 작품이다. 신과 이성의 능력의 무제약성과 현실의 우연적인 갈등의 한 계성의 차이는 해소되지를 못한다고 보아서 좋을 것 같다. 라이프니츠는 그 자신이 법률가였으며 그 방면의 사회적 직책을 감당했기 때문에 사회문제와 국제적 평화문제 등에 관한 노력에서도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일단 우리는 대륙계통의 이성 합리주의 철학의 막을 내려야 좋을 것 같다. 라이프니츠를 능가하는 철학자도 나오지 못했고 그의 학설을 계승할 만한 인물도 배출되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가 라이프니츠의 충족이유율을 정리해 발전시켜준 것은 발전적인 해석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항상 계승되는 것은 형이상학적 과제보다는 방법론이며 철학 속에 깔려 있는 과학적 과제들이 의미를 갖는 것 같다. 염세주의 철학자가 라이프니츠의 충족이유율은 계속 발전시켰고, 거기에는 많은 철학자들이 공감하고 있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김치'는 한자어...'짠지'는 토박이말 전주에서의 일입니다. 음식점에서 음식을 먹었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지' 더 드릴까요?' 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몰라서 우두커니 있는데, 그제서야 아주머니가 김치를 이곳에서는 '지'라고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지'의 뜻을 알았고,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여러 가지 단어들을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김치'는 한자어이고 '지'가 고유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김치'에 대해서는 추후에 다시 알려 드리겠습니다. 한자를 이곳에 올리지 못해서 설명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이지, 짠지, 싱건지, 똑딱지, 단무지' 등의 단어들을 분석할 수 있었습니다. 오이로 담근 김치는 '오이지' 짜게 담은 김치는 '짠지' (충청도에서는 아직도 김치를 짠지라고 합니다) 싱겁게 담근 김치는 '싱건지' 똑딱 똑딱 썰어서 담근 김치는 '똑딱지'(표준어로는 깎두기) 단무(최근에는 표준어가 '단무우'가 '단무'로 바뀌었습니다)로 담근 김치는 '단무지' 모두 알 수 있지요.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3장 죽음과의 악수- 경험하고 싶은 마지막 고통 - 우스펜스키 임종할 때 자신의 생각을 올바르게 통제하고 분명한 의식을 지닌 채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고 <티베트 사자의 서>는 가르치고 있다. 생각하는 것에 따라 다음의 삶이 결정되고 다음의 삶을 얻게 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죽는 순간, 부디 무의식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데 그것을 실천한 사람이 있다. 바로 우스펜스키이다. P.D. 우스펜스키는 러시아의 수학자이다. 그는 죽기 석 달 전, 건강이 지독히 악화되어 있었다. 의사가 안정을 취하라고 그에게 충고했다. 그럼에도 우스펜스키는 상상을 초월한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밤이 되어도 그는 자지 않았다. 여행을 하고, 걷고, 달리며 늘 움직였다. 의사들은 깜짝놀라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고 충고했다. 나는 모든 고통을 경험하고 싶다. 죽음의 고통이 너무도 격렬해서 무의식이 되어 버리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죽기 전까지 모든 고통에서 견디고 싶다. 그것이 내 속에 충분한 정력을 배양해 줄 수 있도록 그리고 죽음이 왔을 때 완벽한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이리하여 석 달 동안 모든 종류의 고통을 다 경험하고자 우스펜스키는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죽음을 맞이하게 된 우스켄스키는 그날, 밤새도록 방안을 돌아다녔다. 의사들이 만류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걷다 죽고 싶다. 앉아 죽어 무의식이 되어 버리는 일이 없게. 잠든 채 죽어, 무의식이 되어 버리는 일이 없게. 우스펜스키가 걸으면서 친구들에게 말했다. 이제 조금 남았다. 앞으로 열 발자국이면 다 끝난다. 나는 약해져 있다. 그러나 마지막 한 걸음을 디딜 때까지 계속 걸어야 한다. 마지막까지 뭔가 하고 있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죽음이 날 사로잡을지 모른다. 긴장을 풀면 잠에 떨어질 것이다. 죽음의 순간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나는 결코 원치 않는다. 마지막 한 발을 내딛으면서 우스펜스키는 죽어갔다. 걸으면서 우스펜스키는 푹 주저앉았다. 즉, 죽음이 덮쳐와 마침내 우스펜스키가 쓰러진 것이다. 마지막 한 발을 내딛으며 그는 말했다. 여기까지야, 이것이 내 마지막 한 발이다. 지금 나는 쓰러지려 하고 있다. 떠나가기 전에 말하게 해달라. 나는 저 옛날의 육체를 떨어뜨리고 있다. 당신들은 지금 내 육체가 해방되는 것을 볼 것이다. 그러나 나는 훨씬 전부터 육체가 떨어진 것을, 그래도 아직 내가 존재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육체와의 결합은 전부 무너지고 있다. 그런데 아직 내부에선 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지금 육체만이 쓰러져 간다. 나 에게는 쓰러질 방법도 없다. 그는 안간힘을 다해 자기의 존재와 이렇게 대결하고 있었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17. 바이킹은 정말 해적이었나? `바이킹=해적`이라는 등식은 그들이 타고 다녔던 배 그리고 전설처럼 내려오는 그들의 용맹성과 함께 이미 굳어진 신화인 듯하다. 하지만 그러한 이미지는 방이킹의 한 측면에 불과할 뿐이다. 9-11세기에 걸쳐 유럽은 제2차 민족 이동이라 불리는 이민족들의 침입으로 시달렸다. 이 때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가장 넓은 지역을 휩쓸고 다닌 이민족이 북방의 바이킹(또는 노르만 족)이다. 이들의 침입으로 많은 수도원과 도읍이 약탈당했고 인명 피해도 많았으며 경작지는 방치되어 황무지로 변하기도 했다. 이런 바이킹의 활동 결과 유럽 인들은 바이킹을 주로 해적으로 묘사했다. `바이킹`이라는 말은 노르웨이나 아이슬란드의 문헌에서 나타난 `비킹`에서 유래했는데 그 어원은 강의 후미를 가리키는 vik라고 한다. 이 바이킹의 고향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이다. 이곳은 자연 환경이 험하기는 했지만 목축, 농경, 어로와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북유럽은 전체적으로 보리, 오트밀, 소맥 등의 곡물이 재배되었으며 양, 소, 밀, 돼지 등의 가축 사육도 이루어졌다. 교역 물품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피였다. 이렇게 북유럽 사람들은 바이킹 활동 이전에는 목축을 중심으로 한 농경민이 태반이었다. 그들은 자유인으로서 일부일처제의 가정을 꾸려 나갔으며 약간의 노예를 가진 독립적인 농민이었다. 그리고 바이킹 활동이 시작된 이후에도 일정 기간 약탈을 자행한 후에는 고향으로 되돌아오거나 정복한 땅에 정착하여 농민 생활을 계속했다. 9-11세기에 걸친 바이킹 활동의 원인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밝혀져 있는 것은 없다. 가장 그럴 듯한 이유로는 자원이 매우 한정된 이 지역에 인구가 급격히 증가한 것을 들 수 있다. 정착할 토지가 없는 농민과 지배할 영지가 없는 귀족들은 모험과 생계를 위해 바다로 나가려 했다. 또한 이 시대는 스칸디나비아에서 정부라 할 만한 것이 자리잡아 가던 때였다. 독립적인 지위를 누리던 수많은 소부족들이 9세기 들어서 서서히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왕 밑으로 통합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왕의 통치를 견디지 못한 부족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다는 설도 유력한 것 중의 하나이다. 바이킹의 약탈 행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영국 동쪽에 있는 란디스판 섬의 수도원에 남아 있는데 그 때가 793년이었다. 그들은 노르웨이에서 건너온 바이킹이었다. 스웨덴의 바이킹은 동쪽의 슬라브 족의 땅으로 진출했는데 이들은 10세기 말 키에프를 중심으로 슬라브 인을 지배하고 키에프공국을 세웠다. 이것이 최초의 러시아 국가였다. 북해와 대서양에서는 주로 노르웨이와 덴마크 바이킹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그들은 수시로 영국과 프랑스의 해안지대와 강 하구에 출현하여 약탈을 일삼았으며 11세기에는 지중해의 시칠리아를 정복하기도 했다. 그들의 침략에 시달린 서프랑크 왕은 911년 그들에게 세느 강 하구 일대를 나누어 주고 그들을 봉신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이후 노르만디 공국이 되는데 노르만디라는 지방은 노르만 족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들은 또한 영국을 정복하여 노르만 왕조(1066)를 세우기도 했다. 이후 노르만 족은 멀리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까지 진출했고 일부는 거기서 북미 대륙으로 건너갔다는 설도 있다. 이렇듯 당시 바이킹의 활동은 분명 해적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정복 왕조를 세운다든지 일정 지역에 정착하여 산 것 등을 보면 해적 이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9-11세기 바이킹을 비롯한 이민족의 유럽 침입은 이전 세기에 서서히 발전해 오던 유럽 문명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유럽의 중세 후기는 그러한 고통으로부터 발전한 것이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5. '반중국클럽'은 반드시 실패한다 미국으로서는 맞상대할 적수가 없다면 그야말로 적막하고 무료한 나날을 보내게 될 것이다. 소련이 와해된 뒤 미국이 주장하는 소위 '자유세계' 는 냉전이라는 허송세월을 보낸 끝에 결국 승리하였다. 그러나 이 승리가 그들에게 가져다준 즐거움과 흥분은 얼마 가지 않았다. 미국은 새로운 적수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자신과 자신의 동맹들을 위한 공동의 적수를 세워 함께 공격하고, 제재하지 않으면 서구 세계 내부의 모순이 심화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만일 이와 같은 모순이 깊어지고 널리 퍼진다면 그들이 세워놓은 공통이익의 기반 또한 무너질 것이며, 결국 냉전승리의 성과는 우스운 꼴이 되고 그 의의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미국은 틀림없이 이렇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1) 없으면 무죄, 있으면 유죄 그래서 중국은 어쩔 수 없이 미국이 이끄는 서구 세계의 표적이 되고 말았다. 중국이 이 점에 대해 아직 인식하지 못 하고 있을 때 그들은 이 미 '사악하고 "위협적이며 "원칙을 지키지 않는' 따위의 단어들과 함께 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중국은 '평화공존 5개항의 월칙'하에 국가간의 관계를 정립해야 한다고 줄곧 주장해 왔지만 이데올로기가 다르다는 이유로 항상 거부당 하였다. 미국은 달랐다. 어느 한 국가의 이데올로기가 미국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이 국가는 '이질적'인 나라이고, 이 '이질적'인 나라는 '이질적'이 라는 것 외에는 아무 죄도 없는데 공격당하고 제거당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중국은 이미 상당한 경제발전을 이룩하였고 민족의식도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중국에는 거대한 시장이 있고 중국은 국제문제에 대해 서도 독특한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세계의 이목을 집중적으로 받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머지않은 장래에 중국은 전세계적으로 일어나는 불평등현상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될것이고 이는 곧 미국의 패권의욕을 가로막는 막강한 방파제가 될 것이다. 아시아시대가 도래하면서 미국은 이 지역에서 가지고 있던 미국세력의 전통성에 도전을 받게 되었다. 최근 우리는 일본 오키나와 시민이 미군기지에 대해 종전에 볼 수 없었던 불만과 분노를 터트렸다는 것과 동남아국가의 지도자들이 미국을 혐오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따라서 미국으로서는 지정학적 정치요소들을 고려하여 '중국위협론'이라는 이론을 내세우고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여 이 이론을 확립시켜야 할 급박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2) 미국은 '반중국클럽' 결성을 서두르고 있다 미국이 고정적이고 열성적인 '반중국클럽' 회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대중국 관계에서 미국과 일치되거나 혹은 비슷한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나라를 찾아야만 할 것이다. 이런 나라들은 중국의 급격한 발전에 당황해 하며, 또 영토나 영해 문제와 같이 해결되지 않은 역사적 문제가 남아 있어 중국의 국제적 지위가 상승함에 따라 그들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불리하게 된다는 공통적 문제의식을 가지게 될 것이다. 남사군도, 조어도, 대만 및 티베트 문제는 미국이 반중국연맹을 형성하고자 할 때 언제든지 써 먹을 수 있는 빅 카드인 셈이다. 미의회 의원 한 사람이-나는 그가 초등학교라도 졸업했는지 의심스럽다 최근 얼토당토않은 말을 했다. 그는 남사군도는 중국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중국은 아직 이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고 있다고 하였다. 정말 미국 의회 의원들의 수준을 의심하게 하는 발언이다. 알래스카가 미국 본토와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서 미국령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캐나다에 속하는 편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한 사이판이 미국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미국에 속하지 않고 일본에 속하는 것이 더옳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대만문제에 있어서 미국인의 이론은 더더욱 모호하다. 그들은 중국이 거의 백 년 동안 대만을 실질적으로 통치한 적이 없기 때문에 대만은 이미 기본적으로 중국의 영토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일본을 포함한 서구 열강들이 몇백 년 간 중국을 능욕하고 갈기갈기 찢어발기다가 남겨 놓은 산물을 기정 사실화하여 중국에게 억지로 국토분할의 상황을 받아들이게끔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완전히 드러난 제국주의 및 패권주의의 낯짝인 것이다. 그들은 전혀 이치에 닻지 않는 곳에서 출발하여 그들 나름의 엉터리진리를 만들어 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대만공화국을 건설하고, 대만을 중국으로부터 독립시켜야 한다는 정책을 펴고 있는 정당이 있다 해도 그것은 민주정치구현에 해당하는 것일 뿐이고, 중국에서 가하는 비판이나 반항, 혹은 수차례의 군사훈련만은 간과할 수 없는 행동이며 이 지역의 긴장국면을 심화시킨단 말인가? 그래서 미국은 나팔을 불어 군마들을 끌어모으고 중국을 포위하고 공격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도대체 어디에서 유래된 논리인가? 여러 해 동안 미국은 중국과 동맹국간의 관계를 이간질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들은 몇몇 나라를 통해 남사군도에 대해 주권이 있음을 외치도록 하였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중국을 위협하였다. 이것은 그들에게 일석이조의 효과를 주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그들의 무기장사는 갈수록 번창할 것이고, 둘째 동남아국가는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될것이고 이로부터 자기도 모르게 중국에 대한 포위망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셋째 미국은 아시아에 미군을 계속 주둔시킬 합법적 이유를 가지게될 것이다. 1996년 4월 17일, 일본 수상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와 클린턴대통령은 동경 기자회견을 열어 '미 .일 안전보장 연합선언'을 공표하였 다.그 내용을 보면 일본은 과거 어떤 때보다도 더욱 적극적으로 '중국제재'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선언을 보면 미국은 동아시아에 십만의 군인을 주둔시킬 준비를 하고 있음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런 민감한 시기에 민감한 지역의 한 국가와 새로운 안보체제를 구축한 것은 이 지역의 다른 국가-특히 중국-를 겨냥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음이 확실해지는 것이다. '국권이 모호한'-요스키 나가이가 한 말-일본으로서 이렇게 행동한 것은 이후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중국을 가상 의 적으로 보고 자신들의 전략을 확정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미 . 일 안보체제가 '재정립'된 후 미국의 페리 국무장관은 언론에 '중 국이 군사훈련이란 명의로 유도탄을 발사한 것은 일종의 위협에 해당되고 공포 분위기를 조장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본다. 중국은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고, 자신들도 그러한 무력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이런 행동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이는 대만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다른 나라를 겨냥한 것이기도 하다. 미국은 서태평양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미국의 국가이익과 관련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미국도 무력을 사용할 태세가 되어있음을 중국에 알리는 것은 중요하다'라고 발표하였다. 이 성명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항을 명확하게 나타내고 있다. 첫째 미국은 이 지역의 정세가 복잡해지는 것을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며, 둘째 이 지역에 있는 다른 나라들에 대한 유인과 선전으로 반중국클럽의 취지를 지체없이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금전 두 닢 우애 좋기로 소문나 형제가 돈을 벌기 위하여 고향을 떠났다. 병든 어머니마저 약 한 첩 써 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형이 먼저 아우에게 말했다. "우리는 이제 천해의 고아가 되었다. 부모님 안 계신 고향에 사느니 차라리 고향을 떠나자. 우리가 이대로 고향에 산다면 나중엔 자식들이 아파도 약 한 첩 제대로 먹일 수 없을 게다. 서울로 가자. 서울에 가서 무슨 짓을 하든 돈을 벌러 사람답게 살아보자." 아우는 형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 아우도 어머니 약 한 첩 지어 드리지 못한 가난이 원망스러웠다. 형제는 탈상을 하자마자 길을 떠났다. 마침 봄날이어서 괴나리봇짐을 걸러 메고 길을 떠나가기는 안성맞춤이었다. 형제는 부지런히 노력해서 큰 부자가 될 꿈에 부풀었다. 그러나 길을 떠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 곧 노잣돈이 떨어졌다. 뱃속에 곡기를 채우지 못한 지 이틀이나 된 몸으로 문경 새재를 넘었다. 보릿고개인데다 봄가뭄에 인심이 흉흉해서 어디 가서 밤 한 그릇 얻어먹기가 힘들었다. 몇 켤레 봇짐에 매달고 온 짚신마저도 다 헤어져 이젠 길을 걷기조차 어려웠다. "형님, 배가 고픕니다." "나도 고프다. 참고 견디어라. 저기 저 강 건너 마을에 가서 어떻게 밥을 한번 얻어 보자." "형님 발도 아픕니다." "어허, 참으래두." 형제는 간신히 강나루에 닿았다. 그런데 배를 기다리다가 나루턱에 황금 동전 두 닢이 떨어져 있는 것을 아우가 주웠다. "형님, 하늘이 우리를 도우셨는가 봅니다. 정말 사람이 굶어 죽으라는 법은 없군요." 형제는 뛸 듯이 기뻐하다가 서로 한 닢씩 동전을 나누어 가지고 배를 탔다. 배는 물살을 가르며 재빨리 강 한가운데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때 아우가 갑자기 아까 나누어 가졌던 금전을 꺼내 강물 속에다 던져 버렸다. "너 왜 그래? 갑자기 그게 무슨 짓이야?" 형은 놀라 소리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배가 건너편 나루터에 닿자 형이 아우한테 물었다. "도대체 네가 왜 그랬는지 알 수가 없구나. 그 연유라도 한번 말해 보아라." 아우가 형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 "금전을 줍기 전까지는 그렇지 않았는데, 금전을 나눠 갖는 순간부터 형이 무척 미워졌습니다. 형이 없었으면 금전 두 닢이 다 내 차지가 되었을 텐데 하는 생각 때문이지요. 그래서 차라리 돈을 버리고 형을 미워하는 마음을 없애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래도 돈보다 형님을 미워하지 않는 마음이 더 중요하지요." 글터 → 이글저글 일본은들은 무려 8,000,000종의 귀신들을 섬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약 2,000종을 섬겼다.일본의 고대 왕들은 오늘날의 사인이나 도장의 뜻으로 손바닥에 사람의 피를 묻혀 종이에 눌러 서명하였다.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이자 술꾼인 이태백은, 61세의 어느 달밤에 호수에서 배를 타고 즐기다가 물 위에 비친 달에 너무 매혹되어, 입을 맞추려고 몸을 굽히다가 그만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괴물 만들기, 과거 중국에서는 때로 어린이들이 납치되어 괴물로 만들어졌다. 납치범들은 매일 어린이의 등부터 조금씩 껍질을 벗긴 다음 동물의 피부를 이식하였다. 이 과정은 시간이 많이 걸렸다. 왜냐하면 동물의 가죽이 접착되는 것은 지극히 작은 부분이었고 대부분 도중에 죽었기 때문이다. 또 어린이들의 성대를 잘라내고 이상한 기계를 써서 네 발로 걷도록 훈련시켰다. 뿐만 아니라 잔인하게 고문하기까지 하여 많은 아이들이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러한 극악한 행위로 ‘키안제의 야생소년’이 만들어져 19세기 중국에 와 있던 몇명의 서양인들 앞에 나타났다. 그 어린이는 네 발로 걷고 이상하게 짖으며, 몸에는 구불구불한 털이 동물 가죽과 같이 덮여 있었다. 미국의 의사 맥가완은 이 광경을 목격하였고 또 다른 어린이 괴물을 만들어내는 과정도 보았다. 즉 몇 년 동안 햇빛을 전혀 보지 못하게 하여 뼈가 병신이 되게 만드는 것이다. 이때 어린이들은 그들을 극도로 쇠약하게 만드는 약과 음식물밖에 먹지 못했다. 맥가완은 어린이를 납치하여 이런 요법을 행사한 중국인 중이 믿지 못해 하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종교인이며 신성한 자라고 뽐냈다고 전한다. 그 가엾은 어린이는 웅크리고 앉아서 바보같이 침만 흘리고 있었다. 그 중은 잡혔으나 나중에 도망쳤고 그 절은 불태워졌다.한자에는 약 40,000자의 서로 다른 글자가 있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14 추천 0 비추천 목록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댓글 쓰기 에디터 선택하기 ✔ 텍스트 모드 ✔ 에디터 모드 ?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독서편지 List Zine Gallery FirstThumb 제1388호 - 2024.11.08. 금요일(음력 :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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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63 호4339.11.18 (09.28)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용량제한으로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 않보이시는 분은 저의 블로그 또는 아래의 링크를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문학소식 - 계간 '시와시학'이 주관하는 제11회 시와시학상 수상자로 작품상에 문인수 시인, 평론상에 김수이 경희대 교수, 젊은시인상에 박찬일 시인이 선정됐다. 시상식은 내달 9일 오후 6시 사간동 출판문화회관에서 열린다. -2006 광주시 문화예술상 수상자로 수필가 김수봉(68)씨 등 4명이 선정됐다. 광주시는 12일 "문학부문인 '박용철 문학상'에 김수봉(전 살레시오고 교감)씨를 선정하는 등 미술과 국악 등 3개 부문 수상자 4명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미술부문 '오지호미술상' 본상에는 서양화가 김영태(79)씨가, 특별상에는 박광구(44.광주 석산고 교사)씨, 국악 부문 '임방울국악상'에는 국악인 정철호(84)씨가 수상했다. '전라도 말씨로' 등 수많은 수필집을 낸 김씨는 시민 백일장과 근로청소년 글짓기 대회 등 '문학과의 만남'이라는 다양한 문학행사 활동으로 시민 문화향유권 제고에 기여했다.오지호 미술상 수상자인 김씨는 40여년전에 광주일요화가회를 창립, 지역 미술인구 저변확대에 기여하고 국내외 전시회를 통해 한국 미술을 널리 알리는 등 미술발전에 공헌했다.사단법인 판소리 고법보존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정씨는 판소리 고법 예능보유자로 임방울 선생 예술정신과 유파 전승을 위한 노력 등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수상자는 문화예술단체의 추천과 전문가로 구성된 심사를 통해 선정됐다. 광주시 문화예술상은 한국 문화예술발전에 큰 업적을 남긴 지역 출신 오지호,허백련,박용철,임방울 선생의 예술정신을 이어받아 문화예술 발전에 공적이 큰 예술인에게 주어진다. -제20회 이영도 시조문학상 제16회 이호우 시조문학상 시상식이 11월17일 오후 5시 청도군민회관에서 개최된다.제16회 이호우 시조문학상 수상작은 김영재(58) 시인의 `아름다운 땀 냄새’가 선정됐다. 이 작품은 시대정신이 강하게 투영된 시로서 대립적 구조와 명암의 대비 등 표현기법의 다양성을 통해 혹독한 현실을 고발하는 시정신을 극대화시킨 것으로 평가받았다. 또 제20회 이영도 시조문학상에는 김경자(67) 시인의 시조 `파시2’가 수상작으로 뽑혔다. `파시2’는 사라져 가는 전통에 대해 깊이있게 조명하면서 재창조에 몰입하는 시적 안목이 돋보이는데다 시를 엮어나가는 표현기법이 적절한 비유로 형상화시켰다는 호평을 받았다. 이날 시상식에 앞서 오후 4시에는 `이영도 시인의 문학세계’ 문학강연이 열리며 시삭식 후에는 이영도 30주기 기념 `이영도 문학의 밤’ 특별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한편 이호우·이영도 시조문학상은 청도 출신의 시조시인 이호우·이영도 시인의 작품세계와 예술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됐다 글터 → 명언 / 격언 글이란 한번 인쇄되면 스스로의 생명을 지니게 되는 법. / 캐롤 버넷(미 배우) 글터 → 수필 내잠 속에 비내리는데 - 이외수 꽃가꾸기 흔히 많은 여자들 사이에 앉아 있는 남자를 보면, 저 사람 꽃밭에 앉았네,라는 농담들을 던진다. 직장 여성을 직장의 꽃이라고 말하고 밤거리의 여성을 밤의 꽃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여자를 꽃에다 비유하는 것은 아무래도 여자가 지닌 아름다움 때문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런데 최근에 이르러 꽃도 플라스틱으로 많이 만들어져 나와서 어떤 것은 거의 생화와 구분하기조차 힘든 것까지 있다. 물론 코를 갖다대고 냄새를 맡아 보면 금방 알 수가 있겠지만 육안으로는 식별이 그리 용이하지가 않다는 얘기다. 그와 마찬가지로 요즘의 여자들 또한 정말로 아름다운 여자가 있고 가짜로 아름다운 여자가 있는데 그것은 꽃에서의 경우보다 더욱 식별이 곤란하다. 어떤 남자가 말했다던가. 여자를 앞에서 볼 때는 위로부터 아래로 보고 뒤에서 볼 때는 아래서 부터 위로 보게 되는 것이 정상이라고. 하지만 그건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 여자, 이를테면 그저 길에서 흔히 마주치는 여자를 보게 될 경우의 얘기일 것이다. 막상 자기의 아내될 여자를 그런 선별법에 의해서 고르는 남자는 아마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요즈음의 여자들을 보라. 남편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고소를 하기도 하고 팁을 적게 준다고 손님에게 맥주병을 던지기도 하고 보험금을 타먹기 위해 남편을 독살하기도 한다. 물론 다들 저마다의 사정이라는 것이 있으므로 옳고 그르다는 얘기는 하지 않겠다. 하지만 우리나라 여성들이 옛날보다 한결 강해졌다는 생각만은 떨쳐버릴 수가 없다. 끝으로 보기에도 모두가 한결같이 아름답고 연약해 보이는데 속이 어떠한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괴테가 말하기를 전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여성적인 것뿐이라고 했다는데 이제는 도대체 여성적인 게 어떤 것인지조차 모호해져 가는 듯한 느낌이다. 식물에게 있어서의 꽃을 보라. 그것은 열매를 맺기 이전에 가지는 최상의 화려한 축제 단계다. 아름다운 자태는 물론이려니와 달디 단 꿀과 황홀한 향기까지 가지고 있다. 거기에 도취되어져 벌과 나비가 찾아온다. 여자에게 있어서의 꽃을 보라. 역시 식물의 경우와 별로 다를 게 없다. 여자에게도 달디단 꿀이 있으며 황홀한 향기와 아름다운 자태가 있다. 거기에 도취되어져 벌과 나비가 찾아온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은 여자도 많이 있는 것 같다. 여자에게있어서의 향기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마음에다 비유하는 것이 제격이겠는데 플라스틱 가화와 마찬가지로 향기가 나지 않는 여자도 상당히 많은 듯하다. 내면의 아름다움은 등한시하고 겉치레에 너무 신경을 쓰는 경향이 있다. 영원한 안식보다는 순간의 쾌락에 더 많이 치중하고 마음의 풍요보다는 물질의 풍요에 더 많이 치중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라. 꽃이란 언제가는 지고 만다. 식물에게 있어서는 꽃이 지게 되면 그 향기까지 사라져 버리지만 여자에게 있어서는 약간 다르다. 비록 꽃이 졌다고는 하더라도 그 향기는 남아 있을 수가 있는 것이다. 기실 여자의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삼단 같은 머리카락, 샛별 같은 두 눈동자, 반달 같은 눈썹에 앵두 같은 입술에서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미모가 뛰어난 여자라 하더라도 마음속에 들어 있는 것이 없으면 은연중에 그 미모가 천박해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박색이라고는 하더라도 마음속에 선성이 갖추어진 여자라면 그 박색의 외모 속에서도 어떤 매력 같은 것을 느끼도록 만들어 주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수많은 여자들이 가정을 등한시하고 철야 고스톱에 열을 올린다든가 남자 몰래 춤이나 추러 다닌다는 것은 얼마나 한심스럽고 슬픈일인가. 그러한 여자들은 청춘을 되찾기 위한 방편이라고 변명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자신을 더욱 추악한 몰골로 늙어 가도록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공원에서 백발이 성성한 나이의 노부부가 서로 손을 꼬옥 잡고 산책하는 것을 볼 때 왠지 가슴이 뭉클해지고 말이라도 한번 걸어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는 그들에게서 새로이 피어나는 꽃송이들을 발견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꽃송이들은 이미 우리가 미처 볼 수 없는 영혼의 화원에서 피어나는 것들로서 아무리 비바람이 몰아쳐도 시들지 않고 그 향기를 대대손손 물려줄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련의 겨울이 지나고 나면 다시금 새로운 꽃을 피우듯이 사람도 모든 고통을 극복한 뒤에는 언제나 새로운 꽃을 피우게 되는 법인데 그 꽃은 물론 마음 안에서 피는 것이므로 먼 곳까지 향기가 퍼져 나간다. 그리고 그 꽃은 반드시 일생이라는 거름을 그 자양분으로 한다. 여자여, 그대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그대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을 그대 스스로 어디에다 두는가에 달려 있으며 어떻게 가꾸는가에 달려있다. 거기에 따라 그대는 그대 자체를 향기 그윽한 꽃으로 만들 수도 있고 속물 근성만 가득한 여자로 만들 수도 있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군대 가는 사람 따로 있었다 - 권영국 아쉬운 밤 흐뭇한 밤 뽀얀 담배 연기 둥근 너의 얼굴 보이고 넘치는 술잔에 너의 웃음이... 자, 우리의 젊음을 위하여 잔을 들어라. 헤어짐의 아쉬움과 우정, 그리고 군복무의 비장한 각오가 표현된 입영전야란 노랫말의 일부분이다. 정들었던 사람들과 헤어져야 하는 안타까움, 힘든 훈련과 얼차려 등 말로만 듣던 군생활에 대한 두려움 속에 입대를 앞둔 젊은이들은 이 노래를 합창하며 소주잔을 기울인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훈련소로 떠나면서 처음으로 자신이 살아왔던 세계와의 긴 이별을 경험하게 된다. 젊은이들은 군입대를 반갑지 않은 인생의 장애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군생활이 젊은 시절에 새로움을 경험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3년이라는 기간이 짧은 청년기에서 너무나 길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천여 년 전인 고려시대 사람들의 군대 생활은 어떠하였을까? 어떤 사람들이 군대에 갔고, 복무 기간은 얼마 동안 이었으며, 군량과 무기는 어떻게 마련하였는가 등의 여러 의문을 오늘날과 비교하면서 살펴보자. 어떤 사람들이 군대에 갔나 오늘날의 의무병제 아래에서도 권력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은 여러 편법을 동원해 군역의 의무를 회피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사실은 사회 권력층이나 부유층 자제들의 현역입영 비율이 일반인에 비해 현저히 낮다는 최근의 국정감사 자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양반 신분과 평민. 천민. 신분을 엄격하게 구분했던 고려시대에는 군대에 가는 계층부터 오늘날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모든 양인 남자는 일단 법제상으로는 모두 군대에 가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특권 지배층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군대에 가지 않았다. 이들 대부분은 과거나 음서를 통해 관리가 되어 군대에 가지 않았다. 설령 군인으로 동원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특별한 군사조직에 편입되거나 장교로 진출하여 일반인이 지는 힘든 군역은 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군대에 갔을까? 이 물음에 대해서 그 동안 연구자들은 서로 다른 견해들을 제시하였다. 하나는 군사력의 중심을 이루는 중앙군은 농민이었다고 보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중앙군과 지방군 모두 일반 농민 출신의 군인으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전자는 신라 말기 중앙 귀족이나 지방 호족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이 후삼국의 전란 속에서 점차 전문적인 군인이 되고 신분도 아울러 향상되어 일종의 특수한 신분층을 이루게 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군인을 핵심적 지배층인 문무 양반 속에 끼지는 못했지만 말단 지배층에 포함되는 중간 계층으로 이해한다. 후자는 군인이 농민으로 구성되었다고 이해한다. 평상시에는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자기 차례가 되면 군인이 되어 개경에 올라가 도성을 지키거나 변경에 나아가 국경을 지켰다고 본다. 이처럼 지금까지 연구자들을 군인의 존재를 둘러싸고 그 신분을 두 가지로 각기 달리 파악해 왔다. 평상시엔 농민으로, 순번제로 군인되어 최근에는 위의 두 견해를 절충하여 오늘날의 직업 군인과 같은 전업 군인과 일반적인 의무 군인의 두 부류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추세이다. 그러나 이처럼 두 부류의 군인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전체 군인의 다수를 차지한 것은 농민 출신의 의무 군인이었고 이들이 국방력의 중심을 이루었으므로 결국 고려시대의 군인은 병농일치의 존재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양인 농민이 다 군인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 가운데서 군인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일부만이 군인이 되었다. 즉 군대 생활을 감당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춘 비교적 부유한 농민들이 군인으로 징발되었는데 이들을 정호라고 하였다. 이에 반해 경제적으로 생활이 어려워 생업을 당장 하지 않으면 안되어서 군대 생활을 감당하지 못하는 농민은 군인이 되는 대신 조. 용. 조 3세로 불리우는 조세의 의무를 졌다. 이들을 백정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백정 농민도 언제든지 군인이 될 수 있는 후보자로서 군인이 부족한 비상시에는 군인으로 동원되었다. 이 경우 국가에서 토지를 지급하여 경제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군대 생활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처럼 고려시대에 군인이 된 기본 계층은 농민이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6품 이하의 양반, 향리, 노비 등도 군인으로 동원되었다. 그러나 고려 후기로 오면서 모든 농민층이 군인의 징발 대상이 되었다. 즉 농업 생산력의 발전으로 농민들의 생활이 전반적으로 안정되면서 그동안 농민층 내에 존재하던 정호와 백정의 구분이 의미가 없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모든 백성이 군인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점차 강화되면서 그동안 사실상 군인으로 징발되지 않았던 양반층의 상당 부분이 군인으로 징발되거나, 간접적인 형태로 군역의 의무를 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기에는 거의 군인으로 징발되지 않던 노비도 일부가 군사조직 속에 편입되게 되었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그리움을 참으면 별이 된다. 볼펜 한자루 우리 집은 영덕 근처의 작은 시골 마을입니다. 지금 저는 집을 떠나 타지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려면 버스를 자주 갈아 타야 하기 때문에 시골에 사는 것이 번거롭게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아버지께 도시로 나가 살자고 조르지만 아버지께서는 끄떡도 하지 않으십니다. 시골 초등학교에서 일학년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계시는 아버지는 이곳 아이들의 때묻지 않은 보석같은 마음이 얼마나 예쁘고, 이곳의 사람 사는 냄새가 얼마나 좋으냐며 이곳을 떠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시곤 합니다. 지난 스승의 날 저녁, 아버지께서는 한아름 선물을 받아 오셨습니다. 그 중에는 양말, 손수건 같은 작은 것에서부터 꽤 값이 나가는 상품권이나 선물도 더러 있습니다. 그 선물들을 식구들이 하나하나 풀러 보는 사이, 아버지께서는 주머니에서 노오란 포장지로 서툴게 포장한 작은 꾸러미를 하나 꺼내셨습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포장지를 펴 보셨습니다. 식구들은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잇을가 잔뜩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았습니다. 고가품의 좋은 선물이 나올 것라고 기대하면서....... 하지만 포장지 안에서 나온 것은 흔한 볼펜 한자루뿐이었습니다. 실망한 식구들이 "에이 겨우 볼펜 한 자루야"라고 말하자, 아버지께서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수업이 끝나고 아버지께서 퇴근하려는데 반에서 집안 형편이 가장 어려운 아이가 아버지께 왔답니다. 그리고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포장지에 쌓인 볼펜을 아버지 손에 살짝 건네 드린 후 말없이 뛰어가 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허허 녀석! 이십년 교직 생활 동안 가장 큰 선물이구나." 아버지는 환하게 웃으시며 와이셔츠 앞주머니에 꽂혀 있던 만년필을 꺼내시더니 그 자리에 볼펜을 대신 꽂으셨습니다. 만년필 대신 아버지의 주머니에 꽂힌 볼펜이 셔츠와 참 잘 어울렸습니다. 박치형 님/경북 포항시 남구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53 - 모나드...'우주의 살아 있는 거울': 라이프니츠(1646-1716년) 그때 세계에서는 1702년: 최초의 일간신문 "데일리 쿠란트" 발생 1705년: 핼리, 주기적 혜성(헬리헤성) 발생 우리는 데카르트 이후의 대륙철학을 이성론 또는 합리론 계통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합리주의 철학'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 것은 이성론은 옛날부터 최근까지 계속되어왔으나, 17세기 중심의 대륙철학은 특히 수학, 기하학을 배경으로 하는 합리적 연역법을 택했기 때문에 합리성을 강조한는 의미에서다. 이 합리주의 철학의 마지막을 장식한 사람은 독일의 라이프니츠(G. W. Leibniz,1646-1716)였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드물게 보는 천재였다. 15살에 대학에 입학했고 20살에 박사학위를 얻었을 정도였다. 그의 전공은 법률이었다. 그러나 모든 분야의 학문에 업적을 남겼다. 너무 어려서 사법고시에 합격했기 때문에 법적연령 미달로 얼마를 기다려야 했을 정도로 조숙했고 학문적 원숙성을 일찍부터 지니고 있었다. 그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기초적인 학문은 수학이었다. 미적분을 창안해냈을 정도였다. 미적분의 최초의 공로자는 누구인가 하는 논란이 있었다. 뉴턴으로 돌리는 영국인들이 많이 있었으나 최근에는 거의 같은 시기에 두 사람이 따로따로 발견한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그는 철학적 학설과 체계를 형성하기 이전에 수학을 보편수학으로 발전시키며 그 방법과 원리가 모든 학문의 원리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최근 그의 유고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먼 후일에는 호텔 로비에서 만난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다가 '지금 우리 대화의 초점이 흐려지고 있으니까 수학으로 풀어보고 그 초점을 찾은 뒤에 다시 토론을 하자'는 때가 올 것이다"는 내용이다. 물론 누구도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오늘의 언어분석철학과 논리적 실증주의가 발달하면서는 바로 그 작업이 철학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모든 지식과 사상은 언어로 표현될 수밖에 없으며, 언어는 논리적 구조를 갖추어야 한다. 그 논리는 마침내 수학적 구조에 기인하게 되는 것이다. 즉 수학논리학으로 전개되지 않을 수가 없다. 수학에서 논리, 논리에서 언어가 규정된다면 수학적 정리는 벗어날 수가 없다. 하버드의 철학자였던 콰인 교수 등이 바로 그런 방향의 첨단을 걸으며 연구활동을 해왔다. 이렇게 본다면 라이프니츠의 착상이 얼마나 참신했나를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다. 그는 여러가지 면에서 독창적인 학설을 제창해주었다. 그러나 가장 근본이 되는 철학적 이론은 단자론(모나드 론)이다.우주의 궁극적인 실체는 물질의 원자가 아니라 힘 또는 에너지의 단위일 것이라는 생각을 품게 되었고, 그 물질적 존재의 실체는 모나드라고 보는 것이다. 모나드(monad)란 원래 수학용어로 'I'또는 '단위'를 뜻하는 모나스(monas)에서 나온 말이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모나드는 넓이나 형체를 가지지 않으며, 무엇으로도 나눌 수 없는 궁극적인 실체로서 모든 존재의 기본이 되는 것이다. 또 모나드는 원자와는 달리 비물질적인 실체로, 그 본질적인 작용은 표상이다. 표상이란 외부의 것이 내부에 포함되는 것으로, 모나드는 이 작용에 의해서 자신의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외부의 다양성에 관계를 가질 수 있으며, 그 표상되는 다양성이 곧 세계 전체다. '우주의 살아 있는 거울'이라고 하는 모나드는 '소우주'를 이루고 있으나, 각기 독립되어 있어 서로 인과관계를 가지지 않는다. 이질적이며 무한의 다양성을 갖는 모나드들은 신의 예정조화 작용에 의하여 만물을 형성, 유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표상을 가지는 모나드들은 지배를 받는 물질적 모나드가 되기도 하고 그것들을 지배하는 정신적 표상의 모나드이기도 하다. 최초의 모나드는 신의 본질을 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모나드들의 운동기능이 공존과 이존의 위치에서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공간으로 보고, 계속해서 일어나는 계기적 성격을 갖는 것을 시간의 위상에서 찾아보게 된다. 모나드 현상의 공존의 순서와 계기의 순서가 공시간으로 나타난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뉴턴의 절대공간관이나 절대시간관에 비해 라이프니츠의 공시간은 상대적인 것으로 보아 좋을 것 같다. 이렇게 존재의 배후에 신의 예정과 조화의 작용이 지배한다고 보게 되면 이 존재하는 세계는 가장 완전하면서도 소망스러운 세계라고 보아야 하겠다. 거기에서 인출되는 것이 염세주의에 대립되는 낙천주의 사상이 된다. 이 이상의 좋은 세계는 존재할 수 없다는 이론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에 대한 낙천주의가 성립된다. 프랑스의 볼테르가 "캉디드"라는 작품을 발표해 이 낙천주의를 반박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낙천주의를 맏고 있는 주인공이 그 망상에 빠져 비극적인 삶을 산다는 풍자성이 짙은 작품이다. 신과 이성의 능력의 무제약성과 현실의 우연적인 갈등의 한 계성의 차이는 해소되지를 못한다고 보아서 좋을 것 같다. 라이프니츠는 그 자신이 법률가였으며 그 방면의 사회적 직책을 감당했기 때문에 사회문제와 국제적 평화문제 등에 관한 노력에서도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일단 우리는 대륙계통의 이성 합리주의 철학의 막을 내려야 좋을 것 같다. 라이프니츠를 능가하는 철학자도 나오지 못했고 그의 학설을 계승할 만한 인물도 배출되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가 라이프니츠의 충족이유율을 정리해 발전시켜준 것은 발전적인 해석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항상 계승되는 것은 형이상학적 과제보다는 방법론이며 철학 속에 깔려 있는 과학적 과제들이 의미를 갖는 것 같다. 염세주의 철학자가 라이프니츠의 충족이유율은 계속 발전시켰고, 거기에는 많은 철학자들이 공감하고 있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김치'는 한자어...'짠지'는 토박이말 전주에서의 일입니다. 음식점에서 음식을 먹었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지' 더 드릴까요?' 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몰라서 우두커니 있는데, 그제서야 아주머니가 김치를 이곳에서는 '지'라고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지'의 뜻을 알았고,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여러 가지 단어들을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김치'는 한자어이고 '지'가 고유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김치'에 대해서는 추후에 다시 알려 드리겠습니다. 한자를 이곳에 올리지 못해서 설명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이지, 짠지, 싱건지, 똑딱지, 단무지' 등의 단어들을 분석할 수 있었습니다. 오이로 담근 김치는 '오이지' 짜게 담은 김치는 '짠지' (충청도에서는 아직도 김치를 짠지라고 합니다) 싱겁게 담근 김치는 '싱건지' 똑딱 똑딱 썰어서 담근 김치는 '똑딱지'(표준어로는 깎두기) 단무(최근에는 표준어가 '단무우'가 '단무'로 바뀌었습니다)로 담근 김치는 '단무지' 모두 알 수 있지요.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3장 죽음과의 악수- 경험하고 싶은 마지막 고통 - 우스펜스키 임종할 때 자신의 생각을 올바르게 통제하고 분명한 의식을 지닌 채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고 <티베트 사자의 서>는 가르치고 있다. 생각하는 것에 따라 다음의 삶이 결정되고 다음의 삶을 얻게 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죽는 순간, 부디 무의식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데 그것을 실천한 사람이 있다. 바로 우스펜스키이다. P.D. 우스펜스키는 러시아의 수학자이다. 그는 죽기 석 달 전, 건강이 지독히 악화되어 있었다. 의사가 안정을 취하라고 그에게 충고했다. 그럼에도 우스펜스키는 상상을 초월한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밤이 되어도 그는 자지 않았다. 여행을 하고, 걷고, 달리며 늘 움직였다. 의사들은 깜짝놀라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고 충고했다. 나는 모든 고통을 경험하고 싶다. 죽음의 고통이 너무도 격렬해서 무의식이 되어 버리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죽기 전까지 모든 고통에서 견디고 싶다. 그것이 내 속에 충분한 정력을 배양해 줄 수 있도록 그리고 죽음이 왔을 때 완벽한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이리하여 석 달 동안 모든 종류의 고통을 다 경험하고자 우스펜스키는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죽음을 맞이하게 된 우스켄스키는 그날, 밤새도록 방안을 돌아다녔다. 의사들이 만류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걷다 죽고 싶다. 앉아 죽어 무의식이 되어 버리는 일이 없게. 잠든 채 죽어, 무의식이 되어 버리는 일이 없게. 우스펜스키가 걸으면서 친구들에게 말했다. 이제 조금 남았다. 앞으로 열 발자국이면 다 끝난다. 나는 약해져 있다. 그러나 마지막 한 걸음을 디딜 때까지 계속 걸어야 한다. 마지막까지 뭔가 하고 있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죽음이 날 사로잡을지 모른다. 긴장을 풀면 잠에 떨어질 것이다. 죽음의 순간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나는 결코 원치 않는다. 마지막 한 발을 내딛으면서 우스펜스키는 죽어갔다. 걸으면서 우스펜스키는 푹 주저앉았다. 즉, 죽음이 덮쳐와 마침내 우스펜스키가 쓰러진 것이다. 마지막 한 발을 내딛으며 그는 말했다. 여기까지야, 이것이 내 마지막 한 발이다. 지금 나는 쓰러지려 하고 있다. 떠나가기 전에 말하게 해달라. 나는 저 옛날의 육체를 떨어뜨리고 있다. 당신들은 지금 내 육체가 해방되는 것을 볼 것이다. 그러나 나는 훨씬 전부터 육체가 떨어진 것을, 그래도 아직 내가 존재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육체와의 결합은 전부 무너지고 있다. 그런데 아직 내부에선 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지금 육체만이 쓰러져 간다. 나 에게는 쓰러질 방법도 없다. 그는 안간힘을 다해 자기의 존재와 이렇게 대결하고 있었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17. 바이킹은 정말 해적이었나? `바이킹=해적`이라는 등식은 그들이 타고 다녔던 배 그리고 전설처럼 내려오는 그들의 용맹성과 함께 이미 굳어진 신화인 듯하다. 하지만 그러한 이미지는 방이킹의 한 측면에 불과할 뿐이다. 9-11세기에 걸쳐 유럽은 제2차 민족 이동이라 불리는 이민족들의 침입으로 시달렸다. 이 때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가장 넓은 지역을 휩쓸고 다닌 이민족이 북방의 바이킹(또는 노르만 족)이다. 이들의 침입으로 많은 수도원과 도읍이 약탈당했고 인명 피해도 많았으며 경작지는 방치되어 황무지로 변하기도 했다. 이런 바이킹의 활동 결과 유럽 인들은 바이킹을 주로 해적으로 묘사했다. `바이킹`이라는 말은 노르웨이나 아이슬란드의 문헌에서 나타난 `비킹`에서 유래했는데 그 어원은 강의 후미를 가리키는 vik라고 한다. 이 바이킹의 고향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이다. 이곳은 자연 환경이 험하기는 했지만 목축, 농경, 어로와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북유럽은 전체적으로 보리, 오트밀, 소맥 등의 곡물이 재배되었으며 양, 소, 밀, 돼지 등의 가축 사육도 이루어졌다. 교역 물품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피였다. 이렇게 북유럽 사람들은 바이킹 활동 이전에는 목축을 중심으로 한 농경민이 태반이었다. 그들은 자유인으로서 일부일처제의 가정을 꾸려 나갔으며 약간의 노예를 가진 독립적인 농민이었다. 그리고 바이킹 활동이 시작된 이후에도 일정 기간 약탈을 자행한 후에는 고향으로 되돌아오거나 정복한 땅에 정착하여 농민 생활을 계속했다. 9-11세기에 걸친 바이킹 활동의 원인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밝혀져 있는 것은 없다. 가장 그럴 듯한 이유로는 자원이 매우 한정된 이 지역에 인구가 급격히 증가한 것을 들 수 있다. 정착할 토지가 없는 농민과 지배할 영지가 없는 귀족들은 모험과 생계를 위해 바다로 나가려 했다. 또한 이 시대는 스칸디나비아에서 정부라 할 만한 것이 자리잡아 가던 때였다. 독립적인 지위를 누리던 수많은 소부족들이 9세기 들어서 서서히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왕 밑으로 통합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왕의 통치를 견디지 못한 부족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다는 설도 유력한 것 중의 하나이다. 바이킹의 약탈 행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영국 동쪽에 있는 란디스판 섬의 수도원에 남아 있는데 그 때가 793년이었다. 그들은 노르웨이에서 건너온 바이킹이었다. 스웨덴의 바이킹은 동쪽의 슬라브 족의 땅으로 진출했는데 이들은 10세기 말 키에프를 중심으로 슬라브 인을 지배하고 키에프공국을 세웠다. 이것이 최초의 러시아 국가였다. 북해와 대서양에서는 주로 노르웨이와 덴마크 바이킹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그들은 수시로 영국과 프랑스의 해안지대와 강 하구에 출현하여 약탈을 일삼았으며 11세기에는 지중해의 시칠리아를 정복하기도 했다. 그들의 침략에 시달린 서프랑크 왕은 911년 그들에게 세느 강 하구 일대를 나누어 주고 그들을 봉신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이후 노르만디 공국이 되는데 노르만디라는 지방은 노르만 족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들은 또한 영국을 정복하여 노르만 왕조(1066)를 세우기도 했다. 이후 노르만 족은 멀리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까지 진출했고 일부는 거기서 북미 대륙으로 건너갔다는 설도 있다. 이렇듯 당시 바이킹의 활동은 분명 해적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정복 왕조를 세운다든지 일정 지역에 정착하여 산 것 등을 보면 해적 이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9-11세기 바이킹을 비롯한 이민족의 유럽 침입은 이전 세기에 서서히 발전해 오던 유럽 문명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유럽의 중세 후기는 그러한 고통으로부터 발전한 것이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5. '반중국클럽'은 반드시 실패한다 미국으로서는 맞상대할 적수가 없다면 그야말로 적막하고 무료한 나날을 보내게 될 것이다. 소련이 와해된 뒤 미국이 주장하는 소위 '자유세계' 는 냉전이라는 허송세월을 보낸 끝에 결국 승리하였다. 그러나 이 승리가 그들에게 가져다준 즐거움과 흥분은 얼마 가지 않았다. 미국은 새로운 적수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자신과 자신의 동맹들을 위한 공동의 적수를 세워 함께 공격하고, 제재하지 않으면 서구 세계 내부의 모순이 심화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만일 이와 같은 모순이 깊어지고 널리 퍼진다면 그들이 세워놓은 공통이익의 기반 또한 무너질 것이며, 결국 냉전승리의 성과는 우스운 꼴이 되고 그 의의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미국은 틀림없이 이렇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1) 없으면 무죄, 있으면 유죄 그래서 중국은 어쩔 수 없이 미국이 이끄는 서구 세계의 표적이 되고 말았다. 중국이 이 점에 대해 아직 인식하지 못 하고 있을 때 그들은 이 미 '사악하고 "위협적이며 "원칙을 지키지 않는' 따위의 단어들과 함께 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중국은 '평화공존 5개항의 월칙'하에 국가간의 관계를 정립해야 한다고 줄곧 주장해 왔지만 이데올로기가 다르다는 이유로 항상 거부당 하였다. 미국은 달랐다. 어느 한 국가의 이데올로기가 미국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이 국가는 '이질적'인 나라이고, 이 '이질적'인 나라는 '이질적'이 라는 것 외에는 아무 죄도 없는데 공격당하고 제거당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중국은 이미 상당한 경제발전을 이룩하였고 민족의식도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중국에는 거대한 시장이 있고 중국은 국제문제에 대해 서도 독특한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세계의 이목을 집중적으로 받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머지않은 장래에 중국은 전세계적으로 일어나는 불평등현상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될것이고 이는 곧 미국의 패권의욕을 가로막는 막강한 방파제가 될 것이다. 아시아시대가 도래하면서 미국은 이 지역에서 가지고 있던 미국세력의 전통성에 도전을 받게 되었다. 최근 우리는 일본 오키나와 시민이 미군기지에 대해 종전에 볼 수 없었던 불만과 분노를 터트렸다는 것과 동남아국가의 지도자들이 미국을 혐오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따라서 미국으로서는 지정학적 정치요소들을 고려하여 '중국위협론'이라는 이론을 내세우고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여 이 이론을 확립시켜야 할 급박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2) 미국은 '반중국클럽' 결성을 서두르고 있다 미국이 고정적이고 열성적인 '반중국클럽' 회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대중국 관계에서 미국과 일치되거나 혹은 비슷한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나라를 찾아야만 할 것이다. 이런 나라들은 중국의 급격한 발전에 당황해 하며, 또 영토나 영해 문제와 같이 해결되지 않은 역사적 문제가 남아 있어 중국의 국제적 지위가 상승함에 따라 그들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불리하게 된다는 공통적 문제의식을 가지게 될 것이다. 남사군도, 조어도, 대만 및 티베트 문제는 미국이 반중국연맹을 형성하고자 할 때 언제든지 써 먹을 수 있는 빅 카드인 셈이다. 미의회 의원 한 사람이-나는 그가 초등학교라도 졸업했는지 의심스럽다 최근 얼토당토않은 말을 했다. 그는 남사군도는 중국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중국은 아직 이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고 있다고 하였다. 정말 미국 의회 의원들의 수준을 의심하게 하는 발언이다. 알래스카가 미국 본토와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서 미국령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캐나다에 속하는 편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한 사이판이 미국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미국에 속하지 않고 일본에 속하는 것이 더옳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대만문제에 있어서 미국인의 이론은 더더욱 모호하다. 그들은 중국이 거의 백 년 동안 대만을 실질적으로 통치한 적이 없기 때문에 대만은 이미 기본적으로 중국의 영토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일본을 포함한 서구 열강들이 몇백 년 간 중국을 능욕하고 갈기갈기 찢어발기다가 남겨 놓은 산물을 기정 사실화하여 중국에게 억지로 국토분할의 상황을 받아들이게끔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완전히 드러난 제국주의 및 패권주의의 낯짝인 것이다. 그들은 전혀 이치에 닻지 않는 곳에서 출발하여 그들 나름의 엉터리진리를 만들어 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대만공화국을 건설하고, 대만을 중국으로부터 독립시켜야 한다는 정책을 펴고 있는 정당이 있다 해도 그것은 민주정치구현에 해당하는 것일 뿐이고, 중국에서 가하는 비판이나 반항, 혹은 수차례의 군사훈련만은 간과할 수 없는 행동이며 이 지역의 긴장국면을 심화시킨단 말인가? 그래서 미국은 나팔을 불어 군마들을 끌어모으고 중국을 포위하고 공격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도대체 어디에서 유래된 논리인가? 여러 해 동안 미국은 중국과 동맹국간의 관계를 이간질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들은 몇몇 나라를 통해 남사군도에 대해 주권이 있음을 외치도록 하였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중국을 위협하였다. 이것은 그들에게 일석이조의 효과를 주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그들의 무기장사는 갈수록 번창할 것이고, 둘째 동남아국가는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될것이고 이로부터 자기도 모르게 중국에 대한 포위망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셋째 미국은 아시아에 미군을 계속 주둔시킬 합법적 이유를 가지게될 것이다. 1996년 4월 17일, 일본 수상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와 클린턴대통령은 동경 기자회견을 열어 '미 .일 안전보장 연합선언'을 공표하였 다.그 내용을 보면 일본은 과거 어떤 때보다도 더욱 적극적으로 '중국제재'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선언을 보면 미국은 동아시아에 십만의 군인을 주둔시킬 준비를 하고 있음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런 민감한 시기에 민감한 지역의 한 국가와 새로운 안보체제를 구축한 것은 이 지역의 다른 국가-특히 중국-를 겨냥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음이 확실해지는 것이다. '국권이 모호한'-요스키 나가이가 한 말-일본으로서 이렇게 행동한 것은 이후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중국을 가상 의 적으로 보고 자신들의 전략을 확정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미 . 일 안보체제가 '재정립'된 후 미국의 페리 국무장관은 언론에 '중 국이 군사훈련이란 명의로 유도탄을 발사한 것은 일종의 위협에 해당되고 공포 분위기를 조장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본다. 중국은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고, 자신들도 그러한 무력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이런 행동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이는 대만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다른 나라를 겨냥한 것이기도 하다. 미국은 서태평양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미국의 국가이익과 관련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미국도 무력을 사용할 태세가 되어있음을 중국에 알리는 것은 중요하다'라고 발표하였다. 이 성명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항을 명확하게 나타내고 있다. 첫째 미국은 이 지역의 정세가 복잡해지는 것을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며, 둘째 이 지역에 있는 다른 나라들에 대한 유인과 선전으로 반중국클럽의 취지를 지체없이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금전 두 닢 우애 좋기로 소문나 형제가 돈을 벌기 위하여 고향을 떠났다. 병든 어머니마저 약 한 첩 써 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형이 먼저 아우에게 말했다. "우리는 이제 천해의 고아가 되었다. 부모님 안 계신 고향에 사느니 차라리 고향을 떠나자. 우리가 이대로 고향에 산다면 나중엔 자식들이 아파도 약 한 첩 제대로 먹일 수 없을 게다. 서울로 가자. 서울에 가서 무슨 짓을 하든 돈을 벌러 사람답게 살아보자." 아우는 형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 아우도 어머니 약 한 첩 지어 드리지 못한 가난이 원망스러웠다. 형제는 탈상을 하자마자 길을 떠났다. 마침 봄날이어서 괴나리봇짐을 걸러 메고 길을 떠나가기는 안성맞춤이었다. 형제는 부지런히 노력해서 큰 부자가 될 꿈에 부풀었다. 그러나 길을 떠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 곧 노잣돈이 떨어졌다. 뱃속에 곡기를 채우지 못한 지 이틀이나 된 몸으로 문경 새재를 넘었다. 보릿고개인데다 봄가뭄에 인심이 흉흉해서 어디 가서 밤 한 그릇 얻어먹기가 힘들었다. 몇 켤레 봇짐에 매달고 온 짚신마저도 다 헤어져 이젠 길을 걷기조차 어려웠다. "형님, 배가 고픕니다." "나도 고프다. 참고 견디어라. 저기 저 강 건너 마을에 가서 어떻게 밥을 한번 얻어 보자." "형님 발도 아픕니다." "어허, 참으래두." 형제는 간신히 강나루에 닿았다. 그런데 배를 기다리다가 나루턱에 황금 동전 두 닢이 떨어져 있는 것을 아우가 주웠다. "형님, 하늘이 우리를 도우셨는가 봅니다. 정말 사람이 굶어 죽으라는 법은 없군요." 형제는 뛸 듯이 기뻐하다가 서로 한 닢씩 동전을 나누어 가지고 배를 탔다. 배는 물살을 가르며 재빨리 강 한가운데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때 아우가 갑자기 아까 나누어 가졌던 금전을 꺼내 강물 속에다 던져 버렸다. "너 왜 그래? 갑자기 그게 무슨 짓이야?" 형은 놀라 소리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배가 건너편 나루터에 닿자 형이 아우한테 물었다. "도대체 네가 왜 그랬는지 알 수가 없구나. 그 연유라도 한번 말해 보아라." 아우가 형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 "금전을 줍기 전까지는 그렇지 않았는데, 금전을 나눠 갖는 순간부터 형이 무척 미워졌습니다. 형이 없었으면 금전 두 닢이 다 내 차지가 되었을 텐데 하는 생각 때문이지요. 그래서 차라리 돈을 버리고 형을 미워하는 마음을 없애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래도 돈보다 형님을 미워하지 않는 마음이 더 중요하지요." 글터 → 이글저글 일본은들은 무려 8,000,000종의 귀신들을 섬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약 2,000종을 섬겼다.일본의 고대 왕들은 오늘날의 사인이나 도장의 뜻으로 손바닥에 사람의 피를 묻혀 종이에 눌러 서명하였다.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이자 술꾼인 이태백은, 61세의 어느 달밤에 호수에서 배를 타고 즐기다가 물 위에 비친 달에 너무 매혹되어, 입을 맞추려고 몸을 굽히다가 그만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괴물 만들기, 과거 중국에서는 때로 어린이들이 납치되어 괴물로 만들어졌다. 납치범들은 매일 어린이의 등부터 조금씩 껍질을 벗긴 다음 동물의 피부를 이식하였다. 이 과정은 시간이 많이 걸렸다. 왜냐하면 동물의 가죽이 접착되는 것은 지극히 작은 부분이었고 대부분 도중에 죽었기 때문이다. 또 어린이들의 성대를 잘라내고 이상한 기계를 써서 네 발로 걷도록 훈련시켰다. 뿐만 아니라 잔인하게 고문하기까지 하여 많은 아이들이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러한 극악한 행위로 ‘키안제의 야생소년’이 만들어져 19세기 중국에 와 있던 몇명의 서양인들 앞에 나타났다. 그 어린이는 네 발로 걷고 이상하게 짖으며, 몸에는 구불구불한 털이 동물 가죽과 같이 덮여 있었다. 미국의 의사 맥가완은 이 광경을 목격하였고 또 다른 어린이 괴물을 만들어내는 과정도 보았다. 즉 몇 년 동안 햇빛을 전혀 보지 못하게 하여 뼈가 병신이 되게 만드는 것이다. 이때 어린이들은 그들을 극도로 쇠약하게 만드는 약과 음식물밖에 먹지 못했다. 맥가완은 어린이를 납치하여 이런 요법을 행사한 중국인 중이 믿지 못해 하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종교인이며 신성한 자라고 뽐냈다고 전한다. 그 가엾은 어린이는 웅크리고 앉아서 바보같이 침만 흘리고 있었다. 그 중은 잡혔으나 나중에 도망쳤고 그 절은 불태워졌다.한자에는 약 40,000자의 서로 다른 글자가 있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