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첫쪽 ♧……………독서편지 T기본글꼴 기본글꼴✔ 나눔고딕✔ 맑은고딕✔ 돋움✔ ✔ 뷰어로 보기 2006.11.17 09:39 【독서편지】: 제 62 호 風磬 조회 수 9,073 추천 수 11 댓글 0 게시물 주소복사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독서편지】: 제 62 호4339.11.17 (09.27)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이로인해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 않보이시는 분은 저의 블로그 또는 아래의 링크를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문학소식 13회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시·소설·수필·동화 4개 부문 ‘이 땅의 푸른 깃발’ 동양일보는 한국문학을 지켜나갈 신인발굴을 위해 13회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작품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당선과 동시에 기성문인으로 인정받는 ‘동양일보 신인문학상’은 역량있는 문인을 발굴하는 전국규모의 문단 등용문입니다. 신인들의 많은 응모를 기대합니다.■ 횟수별 당선자<1회> 윤장규 박대규 김호영 윤혜숙 <2회>김병기 김원림 한혜선 이태곤 <3회>설덕영 김재순 <4회>박희선 송승환 배수원 이영창 <5회>이은희 성혜석 안희정 배기훈 <6회>고완수 유은선 유성종 박혜영 이향숙 <7회>조원진 박연혁 이혜영 임선빈 <8회>유현숙 김유 진영옥 김은미 김영호 <9회>서상규 이윤경 이인주 <10회>박영석 황성진 <11회>하봉채 최진규 김광수 양영숙 <12회>박순서 이종태 문경희 최석희■ 모집 부문 ▲ 시 : 5편 이상(장편 제외) ▲ 소설 : 80매 이내 1편 ▲ 수필 : 20매 이내 2편이상 ▲ 동화 : 30매 이내 1편■ 모집 마감 : 11월30일 당일소인 유효■ 시 상 - 각 부문별 당선작 - 시상식 시간·장소 추후 발표 - 응모작품은 미발표되거나 현상응보된 바 없는 순수창작품이어야 함 - 당선작에 대한 저작권은 발표일로부터 3년간 본사가 보유하고 그 이후 작가에게 귀속함 ( 당선작은 1회 당선으로 기성문인 대우) - 심사위원은 심사발표시 명단 공개 - 응모작품은 반환하지 않으며 작품끝에 주소·전화번호·본명을 명기 - 봉투에 ‘oo부문 신인상 응모작품’ 을 적을 것 - 가급적 컴퓨터 사용 바람■ 보 낼 곳 : (우)360-716 충북 청주시 상당구 율량동 1070번지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담당자 앞■ 문 의 : ☏ 043-211-0001, 0002 글터 → 명언 / 격언 근심걱정은 대개는 재상연된 것. / C.M. 글터 → 수필 내잠 속에 비내리는데 - 이외수 연못가에서 우리집에는 작은 연못이 하나 있다. 사는 게 너무 각박하다는 생각이 들어 여유를 좀 가져 보려고 내가 설계해서 만든 연못이다. 며칠 동안 낚시질을 다니며 물고기는 물론 새우며, 징거미며, 다슬기며, 조개 따위도 잡아다 넣었다. 수초도 몇 종류 갖다 심었다. 햇빛이 발광을 해서 견딜 수 없는 날은 한얼이 진얼이가 풀장으로 사용 한다. 연못 속에는 치어들까지 포함하면 식구들이 약 백여 마리 정도나 된다. 나는 그 식솔들을 다스리는 가장이다.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수온도 맞추어 줘야 하고, 먹이도 넣어 줘야 하고, 질병도 예방해 줘야 한다. 그래도 하루에 세 마리 정도는 항시 죽어서 떠오른다. 되도록이면 비늘이 상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서 가져온 것들이지만 거의가 몇 점씩 비늘이 떨어져 버린다. 물고기는 비늘이 없으면 문자 그대로 시체가 된다. 물고기에게 있어서 비늘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그것은 수온을 재기도 하고, 수압을 재기도 하며, 보호색을 만들어 몸을 보호하기도 한다. 그러나 비늘이 떨어지면 거기에 수서균들이 기생해서 그러한 기능들을 퇴화시키고 마침내는 활동조차 둔화시켜서 물 위로 떠오르게 안들어 버리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연못으로 나가 보면 허옇게 부패된 채로 떠 있는 물고기가 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차라리 모두 방생이나 해 버릴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때는 늦었다. 여기서 죽는 물고기는 방생을 해도 죽게 된다. 나는 생명력이 강한 놈들만 살아남을 때까지 좋은 환경이나 만들어 주면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한다. 고기들의 기분이야 별로 안 좋겠지만 나는 그래도 연못을 들여다보면 더러 우울이 개이는 수가 있다. 요즘은 틈만 있으면 연못을 들여다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 연못은 하나의 사회이면서 우주다. 나는 연못 밖에서 신적 존재가 되어,그 세계를 내려다본다. 우선 연못 속에서 가장 많은 수를 가진 물고기가 붕어다. 월척에서부터 고춧잎만한 치어에 이르기까지 크기가 다양하다. 그 다음이 잉어인데 별로 크지는 않다. 그 밖에 피라미가 열 마리 정도, 이스라엘 잉어가 네 마리, 금붕어가 여섯 마리, 송사리와 동자개와 모래무지와 메기 새끼가 각각 한 마리, 왜버들치 두 마리, 돌고기 두 마리, 미꾸라지 스무 마리 정도인데 천적 관계를 고려하여 크기와 수를 맞추어 넣은 것이다. 그 다음 조개가 가장 많고 다슬기도 그 수가 조개만큼은 된다. 그 밖에 새우는 다섯 마리 녹색거북새끼는 두 마리, 징거미는 네 마리 소금장수 한 마리(이놈은 어느 날 제가 스스로 하늘을 날아 어딘가에서 귀순해 왔다) 기타 숫자 불명의 플랑크톤 등이 살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까지 내 연못 속에 있는 생존자 명단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최근에 이르러 그들을 내려다보는 신적 존재로서 징거미와 녹색거북의 만행에 대해 어떤 벌을 내릴 것인가 생각중에 있다. 우선 녹색거북의 죄상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놈들은 세계 각지에서 애완용으로 귀여움을 받고 있는데, 특히 우리 연못에 있는 것은 콜롬비아 붉은귀거북으로서 양쪽 볼에 빨간 점이 한 개씩 찍혀 있다. 이쁘다. 성장하면 귀갑의 길이가 한 자 정도 되고 귀갑의 빛깔도 녹색에서 흑갈색으로 변해 버려서 전혀 아름답지 못한 몰골을 가지게 되는모양이지만 지금은 마누라나 아이들에게도 단연 인기가 좋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어려서부터 너무 음흉하다. 생긴 것과는 파운 이하게 다른 것이다. 놈들은 낮에 햇빛이 좋으면 연못가 돌 위로 올라와서 지그시 두 눈을 감고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낮잠을 오래도록 즐긴다. 그러다가 밤이면 슬그머니 물 속으로 기어들어가 그 느리고 서툰 유영법으로 거의 수면에 가깝게 헤엄쳐 다닌다. 그러다가 수면 위에 고요히 떠서 잠을 자고 있는 붕어의 치어들을 발견하면 아주 느리고 은밀하게 다가선다. 이런 경우 거북이가 느리다는 것은 장점이다. 느리기 때문에 치어들은 적이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눈치챌 수가 없는 것이다. 놈들은 그렇게 치어에게 가까이 다가가서는 우선 가만히 꼬리 지느러미부터 몰래 조금씩 끊어 먹는다. 그렇게 하고 나면 전혀 서두를 필요가 없다. 꼬리 지느러미가 없는 치어는 갑자기 추진력을 상실한 채 뒤뚱거리게 되는 것이다. 가슴 지느러미와 배 지느러미까지 모두 잘라먹고 나면 제법 여유가 만만하다. 동체는 먹고 싶으면 먹고 먹기 싫으면 내버려뒀다가 배고플 때 다시 와서 먹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징거미는 또 어떤가. 인간 사회에서도 도둑질한 물건을 다시 도둑질하는 놈이 있듯이 이 징거미라는 놈도 녹색거북이 포획해 놓은 치어를 슬그머니 물고 바위틈으로 들어가 버린다. 거북이의 동작으로는 도저히 징거미를 따라갈 수가 없다. 징거미란 놈은 순발력이 굉장히 뛰어나서 마치 물 속의 메뚜기처럼 톡 하는 순간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생태도 거의 도둑과 흡사하다. 항시 바위 틈이나 수초속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어서야 기어나온다. 야행성인 것이다. 생긴 모양은 민물새우 같은데 민물새우보다는 몸집이 크고 자기 몸체의 전장보다 세 배 이상이나 기다란 촉수 모양의 앞발 한 쌍을 가지고 있다. 놈은 그것으로 물고기를 감지하여 몸에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수초 뒤에 숨어 그것을 드리워 놓으면 마치 노쇠한 수초 줄기같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어쩌다 병이 들어서 기동이 불편한 물고기가 놈에게 한번 붙잡히면 끝장이다. 내장을 쏙쏙 빼먹어 버린다. 놈은 그 재미 때문인지 밤만 되면 아주 음흉한 모습으로 연못 속을 끊임없이 배회한다. 때문에 붕어의 치어들이 현저하게 줄어 들었다. 놈들은 다른 고기로부터 격리시켜 버리는 방법과 앞다리를 떼어 버리는 방법과 사형시켜 버리는 방법이 있지만 나는 아직 아무것도 실천에 옮겨 놓지 못하고 있다. 비록 내가 그들에게는 신적 존재로 군림하면서 한눈에 그들의 행동을 모두 내려다볼 수 있다 하더라도 다시 내 위에서 또 어떤 신적 존재가 가소롭다는 듯이 나를 내려다보면서 나와 흡사한 생각을 하고 있을지 누가 알랴. 나는 그저 모든 것을 외면하고 수초같이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수초는 가만히 한자리에서 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부드럽게 하늘거리면서 그 어떤 물고기든지 받아들이고 한편으로는 플랑크톤이나, 산소를 만들어 다른 생물들에게 아낌 없이 나누어 준다. 혹 나도 그러한 능력이 있어 반드시 세상에 필요한 것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아낌없이 나누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나 역시 한갓 미물에 불과하다. 차라리 평생을 사는 동안 녹색거북이나 징거미 같은 행동을 단 한번도 흉내내지 않고 사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겠는가. 그런데 아차, 이미 나는 그보다 더한 죄를 범하고야 말았다. 물고기들의 입장에서 보면 단순한 내 개인적 욕심 때문에 연못을 파고 거기다 고기들을 잡아 넣는 사실부터가 극악무도한 행동이 아니고 무엇이랴. 도대체 부처처럼 살려고 마음먹으면 만사에 걸치적거려서 불편하기 짝이 없으니, 에라 모르겠다. 나는 다시 꼭 나처럼 살아 버리기로 마음먹는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출신지에 따라 인격이 다른 사회 - 박종기(국민대 교수) 고려 후기는 과연 문란한 사회였는가 조선 초기 역사가들은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고려 전기를 이상적인 사회로 평가한 반면에 후기사회는 권세가와 간사한 무리들이 나라의 근본을 갉아먹은 문란한 사회로 평가하였다. 이러한 시각은 고려 후기 사회의 문란상을 부각시키면서, 조선의 건국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부곡인, 노비 등 하층민들이 지배층으로 대거 진출한 사실이 유교적 대의명분에 사로잡힌 그들의 눈에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고려 후기는 전기와 같이 문벌이나 학문적 능력만으로 고위관직에 올라 명예와 부귀를 누리던 사회는 아니었다. 이제 기회만 주어진다면 누구든지 군사적 기예나 통역관으로 혹은 원나라의 세력에 기대어 명예와 부를 누릴 수 있었다. 이를 가장 반기는 계층은 그간 온갖 제약과 굴레에 묶여 있었던 부곡인, 노비 등 하층민중이었다. 이들이 출세의 길을 달리게 된 것은 개인의 능력, 시대환경의 변화만도 아니었다. 12세기 이후 정치 사회구조의 변화로 하층민들의 사회의식이 성장하였던 결과이다. 고려 후기 사회는 전기사회의 강한 제도적 규제가 무너지면서 그 반작용이 곳곳에서 분출한, 한국사에서 낭만적이고 약동적인 사회상의 한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고 있다. 기득권자인 지배층의 시각에서 보면 왕조의 몰락이라는 비극을 잉태한 문란하고 혼란된 사회였지만, 하층민들의 눈에는 오히려 기회와 희망의 시대였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어미게와 새끼게 저녁상을 물린 뒤 시작된 남편과의 대화가 조금씩 격한 어조로 바뀌어 우리도 모르는 사이 언성이 높아졌던 모양이다. 딸아이 둘이 건너방에 있었는데 언쟁에 열중한 남편과 나는 이미 자제력을 잃은 상태였고, 아이들이 우리 얘기를 듣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큰애가 고등학교 삼학년, 작은애는 중학교 이학년인데 둘이서 작은 일로 자주 티격태격하고 했었다. 그때마다 나는 큰애를 나무랐었다. "에가 조금이라도 먼저 태어나고 배운 것도 더 많잖니. 왜 그렇게 참을 성이 없니? 네가 먼저 이해해 주면 동생도 그 본을 따라 좋아질 거야." "항상 빈 수레가 요란한 법이다. 사람도 머리에 든 것이 없으면 참을성, 이해심, 자제력이 없어서 덜그럭덜그럭 시끄러운 법이야." 그런데 오늘 저녁, 우리 부부가 말싸움을 하다보니 건너방에서 나지막한 노래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큰애의 목소리였다. "어미 게와 새끼 게가 모래밭에서 똑바로 걸어가는 연습을 하고 있어요. 엄마 먼저 똑바로 걸어가 보세요. 그럼 나도 똑바로 걸어갈 테니....." 그 순간 우리 부부는 둘 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숨을 죽이고 말았다. 박춘자 님/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52 - '그리스도의 변증론':파스칼의 "팡세" 출간(1670년) 그때 세계에서는 1666년: 영국 뉴턴, 광학 및 우주중력에 관한 법칙과 적분법 발견 1670년: 러시아, 스텐카 라진의 대반란(농민반란) 파스칼은 누구 못지않은 합리주의자였고 수학과 기하학의 천재였다. 부친이 그에게 법률공부를 시켜 법관으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좋아하는 수학을 가르치지 않았는데, 어린 파스칼이 장난삼아 여러가지 형태의 도형들을 그리고 살피다가 유클리드 기하학의 원리를 홀로 발견해내는 것을 보고 감탄한 나머지 친구들에게 내 아들은 천재라고 얘기했을 정도였다. 그런 파스칼이 종교적 체험을 겪은 뒤부터는 기하학적인 합리적 사고는 자연연구와 수리적인 사고의 원칙일 뿐, 철학적인 사고와 종교적인 체험에서 얻는 사고는 합리적인 사고를 앞지르며 초월하는 또 다른 섬세한 사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우리들의 해설을 가한다면, 그런 사고는 직각적이며 직관적인 합리가 미치지 못하는 차원 높은 사유라고 보았다. 거기에는 수리와 기하학적인 법칙의 사고에 비하면 내적인 깊은 진실과 진리 그 자체에 적응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좀더 그의 생각을 전체적으로 해석한다면, 인간학적 깊이를 가진 직각적 사유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파스칼은 자연사물을 관찰함에 있어 주어진 법칙과 원칙을 찾아 따르도록 되어 있듯이, 정신계에는 정신적 질서와 법칙이 있어 우리는 그것을 찾아 따라야 한다고 믿고 있다. 자연의 질서가 엄연히 자연세계를 좌우하듯이, 정신적 질서는 우리들의 정신적 삶을 지배하며 우리의 삶은 그에 순응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그 위에 종교적이며 신앙적인 질서가 있어 그것 또한 엄연히 우리들의 영적 생활의 의미를 채워주는 것이다. 이 은총의 질서는 기독교의 가르침에서 얻어진 것이기보다는 그 자신이 조카에게 나타난 과학과 의술을 초월한 은총의 사건에 접하고 얻은 것이었다. 따라서 신앙적 사실의 직접적인 체험에서 얻어진이 확신은 그의 "팡세"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그가 "기적이 없었다면 신앙을 가지지 않아도 죄가 되지 않으나 기적이 있었기 때문에 불신은 죄가 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이미 그의 인식이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과학 및 철학적인 것을 넘어 위에서부터 아래로 주어지는 은총의 사실임을 잘 얘기 해주는 내용이기도 하다. 이렇게 되면 파스칼의 과제는 인식의 영역에서 인간이해와 인간학적 과제로 상승하지 않을 수가 없어진다. 학자들이 파스칼은 연구하면서 그의 인간연구에 깊은 공감을 갖는 이유가 짐작된다. 대개의 경우 대륙의 합리주의자들은 이성적 사고를 존중히 여기는 나머지, 감정과 의지는 감정과 의지의 기능을 약화시키며 배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스피노자는 의지의 개입이 진리의 길을 좁게 하거나 막는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파스칼은 감정과 의지를 포함한 전 인간적인 기능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메모에서 '인간의 본질...불안' 이라는 짤막한 구절을 남기고 있다. 후에 실존주의자들이 그가 얼마나 자연스레 인간 본질의 정서적인 면을 깊이 통찰했는가에 감탄하고 있다. 그는 사회적인 정의를 설명하면서 "그는 강 이편에 살기 때문에 나를 죽여도 칭찬을 받는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사회여건과 정치적인 국경에 따라 사람을 죽이는 일 같은 것이 살인행위가 되기도 하고, 또는 '공훈'이 되기도 한다는 얘기다. "나는 우주를 생각할 수 있어도 우주는 나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우주보다 위대하다"고 말할 정도로 사유의 위대함을 지적하면서도, "지극히 작은 벌레 한 마리가 위대한 철학자의 사유를 얼마든지 중단시킬 수 있다"고도 말한다. 수많은 부장들이 청검을 갖고 두 줄로 정렬해 서 있는 저쪽 옥좌에 앉아 있는 터키 황제를 나와 꼭 같은 사람이라고 볼 수가 있겠느냐고 비유하면서, 그렇게 위대한 사유가 그렇게 한계지어져있으면서 무력한 모순에 차 있음도 설명해준다. 결국 파스칼의 철학적 과제는 인간적 과제와 통하는 것이며, 인간적 물음은 수학이나 기하학적 사고의 방법으로 풀 수 없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인간과 삶의 의미와 가치를 근본적으로 해결지을 수 있는 차원 높은 인식과 삶이 가능해질 때 근원적인 결론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무신론자는 가장 어리석으면서도 사리에 맞지않으며, 신을 탐구해가는 철학자는 지혜롭지 못하나,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은 가장 사리에 맞으면서도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라고 담담하게 이론을 전개시켜간다. 우리는 그가 중세기의 사상가였던가 기독교 정신이 쉽게 받아 들여지고 있는 시대의 인물이었다면 그리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장 이성과 합리를 존중히 여긴 17세기에ㅓ서 인간적 삶의 본질과 인간 이성이 갖는 한계를 극명히 보여주었다는 점에 깊은 공감을 표하게 되는 것이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똥뀐 녀석이 성낸다"는 말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 어느 분이 방귀를 '꾸는' 것이 아니고 '뀌는' 것이 아니냐고 물으셨는데,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방귀'와 연관되어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몇자 적습니다. 충북 영동군 황간면 용암리 마을에 방언조사를 갔을 때의 일입니다. 이 용암리는 자연부락의 이름이 '누룩방구'였습니다. 마치 누룩처럼 생긴 바위가 동네의 끝에 있어서 생긴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지방에서는 '바위'를 '방구'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뀌는 '방구'(방귀지만 실제 발음은 '방구')와 어떻게 구별하는지가 궁금해서 사람이 보리밥을 먹으면 뀌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글쎄 '똥뀐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같이 조사를 하던 학생들이 한참 웃었지만, 저는 웃음이 나오지 않고, 오히려 그 말이 오래 전부터 쓰이었던 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똥뀐 녀석이 성낸다"는 말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방귀를 뀌고서도 다른 사람이 방귀를 뀐 것인 양 남에게 돌려댄다는 뜻이겠지요. '바위'가 '방구'가 되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바위'는 고어로서는 '바회'였습니다. 소위 '히읗'이있지요. 이 '히읗'은 곧잘 '이응'으로도 변화를 겪었습니다. 예컨대 '죠희'가 '종이'가 되었던가 하는 것들이지요. 그리고 '히읗'이 '기역'으로도 변화를 겪습니다. 그래서'바위'와 '방귀'가 같은 음으로 발음되니까, 이것을 피하기 위하여 한 낱말을 다른 낱말로 바꾸어 버립니다. 이것을 우리는 '동음충돌 회피현상'이라고 합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3장 죽음과의 악수- 자신의 죽음으로써 적멸상을 가르친 벽송선사 조선조 1464년(세조 9년)에 태어난 벽송의 본명은 송지엄. 그는 무인이로서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전쟁 뒤에 찾아오는 비감을 어쩔 수 없었다. 죽음에 대한 회의가 깊어졌다. 대장부가 세상에 나서 마음을 한 번 깨달아 밝혀보지 못하고 남의 막하 군사를 쫓아다니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으니 비록 여기에 한마의 공이 있다 할지라도 그까짓 허명이 생사해탈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하고 본연히 출가를 결심하니 그때의 나이 28세였다. 그는 출가하여 직지사의 벽계정심 선사를 모셨다. 석 달이 되어도 법은 한 마디도 일러주지 않고 매일 땔감나무만 져오게 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고 하산을 결심한다. 내가 안 가르쳐 주었나, 제놈이 알아듣지 못했지. 정심의 말이다. 정심은 산 아래로 떠나고 있는 벽송을 행해 크게 불렀다. 지엄아! 지엄아, 나좀 보고 가거라! 메아리가 계속을 울렸다. 화가 잔뜩 난 지엄은 떠나온 산마루 쪽을 바라보았다. 도가 여기있다. 옛다 받아라! 정심이 무엇을 집어던지는 시늉을 해보았다. 순간 지엄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무엇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감격의 눈물을 철철 흘렸다. 다시 스승께 나아가 큰절을 올리고 용맹정진을 거듭했다. 그는 말년에 지리산에 은거하고 있었다. 어느 날 <법화경>을 강의하다가 문득 방편품 에 이르러 길게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중생이 이리석어 스스로 제게 있는 광명을 발견하지 못하고 오래도록 윤회를 받아오므로, 세존께서 이것을 불쌍이 여겨 입이 아프시도록 말씀하신 것이 바로 <법화경 방편품>이다. 그러나 모두 중생을 깨우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것이요, 정법은 아니다. 정법이란 적멸허확하여 말로써 그 형상을 그릴 수 없는것이니, 이제 너희들이 정말 부처님의 실상을 믿으려면 당장에 자기 마음속부터 들춰내야 한다. 그래야만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것이다. 오늘 나도 너희들을 위하여 또 하나의 적멸상을 보일테니 너희들은 절대로 밖에서 찾으려 하지 말고 한 마음으로 마음속을 더듬어 보아라. 지엄은 시자를 불러 차를 달여 오라고 하였다. 문답을 나눈 후 시자가 끓여 온 차를 마시고 방장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 후로 오래도록 아무 기척이 없어 문을 열어보니, 벌써 앉은 채로 입적에 든 뒤였다. 1534년 11월 초하루 아침이었다. 제자로는 서산의 스승인 숭인을 비롯하여 설은, 원오, 일선 등이 있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16. 며느리 양귀비에게 반한 당현종 측천무후가 죽자 이번에는 중종의 황후인 위씨 일족이 권세를 휘둘렀다. 당 황실의 운명은 다시 위태로워졌다. 중종의 손자였던 23세의 이융기는 이를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중종이 죽은 지 18일 만에 이융기는 젊은 관리들을 동원, 쿠테타를 일으키고 위씨 일족을 주살했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를 예종으로 옹립하고 자신은 황태자가 되었다. 이가 바로 현종이다. 당 황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등장한 현종의 치세는 중국 4000년 역사상 다시없는 전성기여서 그의 연호를 딴 `개원의 치`는 태평성대의 대명사로 쓰일 정도였다. 인구는 날로 늘어 양귀비가 등장하기 직전의 한 통계에 따르면 4,890만 9,800명을 헤아렸다. 현종은 웅대한 지략가이기도 했지만 음악에 관한 한 당대 최고의 풍류객이기도 했다. 737년 황후였던 무혜비가 돌연 사망하자 그는 수천의 후궁도 돌아보지 않고 상심했다. 눈치 빠른 환관 고력사는 재색으로 소문이 파다했던 한 여인을 천거했다. 청화궁에서 그녀를 처음 만난 현종은 자신이 작곡한 곡을 연주했다. 그러자 이 여인은 즉석에서 음률에 맞춰 선녀처럼 춤을 추었다. 현종은 그 여인에게 그만 한눈에 반하게 되었다. 이 여인이 양귀비이고 당시 황태자의 비 가운데 하나였다. 현종의 며느리인 셈이다. 양귀비는 피부가 하얗고 풍만한 여인이었다. 본명은 옥환이라고 했다. 사천성 관리의 딸로 태어나 17세 때 황태자인 수왕의 비가 되었다. 현종은 그녀를 여자 도사로 만든 후 곧 후궁으로 불러들여 자신의 비로 삼았다. 이 때 양귀비의 나이 22세, 현종은 57세였다. 그녀는 얼굴만 아름다웠던 것이 아니라 노래와 춤도 뛰어났고 특히 비파의 명수였다. 게다가 머리 회전이 빨라 현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현종은 양귀비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황제의 유흥비를 조달하던 그녀의 친척 양국충을 중용했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일개 무뢰배에 불과했던 양국충은 권력을 전횡하며 양귀비의 양자이자 변방 3개 지역을 관할하던 절도사 안록산과 앙숙지간이 되었다. 안록산은 중국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돌궐계 또는 이란 계로 추정되고 있다. 궁궐에 들어올 때면 항상 양모 양귀비를 먼저 배알해 현종이 그 이유를 묻자 “호인(오랑캐)은 어머니를 앞세웁니다”라고 대답할 정도로 자신에 찬 인물이었다. 양국충이 이미 죽은 재상 이임보를 돌궐과 내통했다고 모함하여 그의 일족을 주살하자 안록산은 `황제 옆의 간신을 제거한다`며 거병했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조정은 장안에 있던 안록산의 아들을 죽였다. 이에 격노한 안록산은 낙양을 짓밟고 국호를 대연이라 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당은 고구려 출신의 고선지에게 방어를 맡기나 고선지는 환관의 모함에 걸려 싸워 보지도 못하고 병사들 앞에서 철수를 당하고 말았다. 수도 장안이 위태해지자 현종은 사천성 방면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그러나 배고픔과 피로에 지친 병사들은 양국충을 살해하고 현종의 막사를 포위, 양귀비의 처형을 요구했다. 그러나 생사를 같이하기로 맹세하고 17년 동안 애지중지했던 양귀비를 현종은 차마 내어 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를 천거했던 환관 고력사는 현종을 설득해서 양귀비를 근처 절로 데리고 갔다. 양귀비는 그곳 배나무에서 목을 매달았다. 그 때 그녀의 나이 38세였다. 현종은 고력사로 하여금 그녀의 시체를 수습해 오게 해서 비단옷을 입히고 가슴에는 향수 주머니를 단 후 조그마한 산에서 장사 지냈다. 안록산의 난으로 번성하던 당은 치명상을 입었다. 통치의 근간이었던 균전제, 조용조, 부병제 등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따라서 중앙통제력이 약화되었다. 안록산의 난을 진압한 것도 당 조정의 군대가 아니라 위구르라는 유목민족의 군대였기 때문에 대내외적으로 대당제국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지방에서는 그 동안 규제받았던 호족들의 대토지 소유와 토지 매매가 성행하고 군벌들도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중의 하나가 당을 멸망시킨 주전충이었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4. 불성실하고 무책임한 미국의 외교 . 부록 :장쩌민 담화에 대한 미국무성 번스 대변인의 기자회견문 문 .닉크, 다음의 질문에 대해 대답해 주십시오. 첫째 중국 주석 장쩌민이 미국의 {뉴스위크}와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리포트}의 기자회견에서 발언한 내용에 대해 할 말은 없는지요? 그는 특히 미국이 대만총통의 방문을 허락한 것에 대해 일종의 배신감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둘째 장 주석은 대만총통 리떵후이와 상호 방문하길 원한다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논평하시겠습니까? 셋째 장주석이 이번 달 말 클린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할 때 클린턴에게 대만문제에 대해서 좀더 확실한 약속을 요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답:두 번째 질문인 회담 여부에 관해서는 중국과 대만지도자 당사자 들이 결정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그러한 단어를 사용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미국은 그 문제에 대해 중국 정부와 허심탄회하게 논의하였다고 생각하며 올 여름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수 차례 논의하였습니다. 미국이 시행하는 정책은 하나의 중국을 기본원칙으로 한 것임을 거듭 천명합니다. 10월 24일의 정상회담에서 이 문제가 거론되더라도 그다지 오랜 시간을 두고 토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 :계속해서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구체적으로 말해서 장 주석은 인터뷰에서 미국이 리떵후이의 방미를 결정하기 1주일 전 틀림없이 국무장관 크리스토퍼 씨가 리떵후이의 방미는 '중 .미 합동성명' 정신에 위배된 것이라고 말하였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제가 묻고자하는 것은 미국이 리떵후이의 방미를 허락하기 전에 국무원이나 국무장관이 직접 이곳에 온 중국 사절들에게 이러한 약속이나 발언을 한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답 : 일찍이 중국의 정치지도자 및 사절들과 이 문제에 대해 여러 차례 토론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회담에서 나눈 모든 대화의 내용을 다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만 우리는 공개적으로 충분히 이 문제를 토론하였습니다. 우리와 중국 정부는 아주 상세하게 토론하였으며 중국 정부는 우리들의 입장과 사건의 진상을 이해하였습니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3, 4개월 동안 비자발급과 관련된 대만과 중국문제에 대한 우리들의 입장은 최선을 다해 충분히 밝혔습니다. 우리들은 하나의 중국정책을 고수하며 중국과 대만을 따로 두고 각각 지지하지는 않습니다. 중 .미 관계에서 이 점은 분명합니다. 양국의 대통령과 주석이 회담할 때 충분한 대화를 하였고 과거 몇 개월 동안의 사건들을 돌아봤으리라 믿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 :닉크, 장 주석의 말에 의하면 리떵후이의 방미선언 1주일 전 국무위원이 중국 주석 혹은 중국 당국에 이런 식의 방문은 '중 .미 합동성명'의 정신에 위배된다고 하였다는데 사실입니까? 답 .제 생각으로는 이 문제를 다른 장소에서 거론하는 것은 적합할 수 있겠지만 지금 거론하는 것은 분명 적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들은 줄곧 장 주석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연설할 때 아주 솔직하다고 여겨왔는데 사적인 자리에서도 그러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알다시피 이 문제에 대한 쟁론은 이미 오래 끌어왔습니다. 다시 거론하지 맙시다. 그리고 중 . 미 관계의 실질적 문제해결에 착수해야 합니다. 안정되고 우호적인 관계정립 등의 더욱 중요한 문제들을 논의해야 하며, 이런 논의는 다음 세기에 있을 중 .미 관계의 앞날에도 크게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문 : 닉크, 당신은 국무장관이 중국대사에게 그와 같은 말을 확실히 한적이 있다고 증명할 수 있습니까? 답 :할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이 문제에 대해 말한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증명을 할 수 없습니다, 비공식적으로 중국인과 논의한 내용들을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 문제는 노코멘트입니다. 비자발급 전과 후의 회담에서 그들과 많은 대화를 하였지만 아직 거론되지 않은 문제들도 많습니다. 나는 {뉴스위크}에 게재된 보도내용과 관련하여 어떤 문제도 말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와 같은 것들에는 관심이 없으며 중 .미 관계의 실질적인 문제처리에 착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 .한 가지 더 묻겠습니다. 1월 17일 뉴욕에서 국무장관 크리스토퍼와 중국 외교부장 첸치천은 서로 만나 회담을 하였습니다. 미국의 주요 신문지상의 아주 돋보이는 위치에 분명하게 보도되었습니다. 즉 크리스토퍼 장관이 첸 부장에게 자기가 직접 저간의 사정에 대해 의견을 들어 보려고 국회의원들을 만났는데. 리떵후이의 미국방문을 저지하는 일은 할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직접 말했다는 것입니다.이것이 사실입니까? 국무장관과 첸 부장의 4월 17일 회동에서 나온 뉴스가 아닙니까? 답 :좋습니다. 지금 질문한 기자를 위한 딱 한 번 예외를 만들어 보지요.(웃음) 지금 제가 이 문제에 대해 몇 마디하는 것은 그 회담에 참석했고 회담의 구체적 내용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월 17일 뉴욕회담에서 크리스토퍼 장관은 분명히 첸치천 부총리 겸 외교부장에게 미국 의회에서는 리떵후이에게 비자를 발급하자는 분위기가 아주 강하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날 회담의 아주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문 닉크. 국무장관이 직접 공개적으로 말했으나 이 점을 첸치천 외교부장에게 충분하게 설명하지는 않은 것 같군요. 답 : 어쨌든 그 말은 기억이 안 납니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작은 기적 고아원에 양식이 떨어졌다. 굶은 지 벌써 사흘째인 아이들은 배가 고프다고 아우성이었다. 원장은 아이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 백방으로 쫓아 다녀 보았으나 어디에서든 쌀 한 톨 구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전쟁 직후라 할지라도 이렇게 몰인정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에 자꾸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원장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아이들이 배가 고파 우물가에서 물을 퍼먹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떤 아이들은 허기진 배를 안고 병든 병아리처럼 오종종하게 양지쪽 담벼락에 기대 있었다. '아, 저 아이들을 저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어.' 원장은 마음이 탔다. 그 누구라도 붙잡고 매달리고 싶었다. 지금까지 한번도 찾아보지 않은 하느님을 향해, "오 하느님, 제발 좀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는 말이 입에서 절로 나왔다. 그러자 원장은 갑자기 기도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기도해 본 적이 없었으나 그는 얼른 다락방으로 올라가 무릎을 꿇었다. "하느님, 저는 기도할 줄을 모릅니다. 저의 기도가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제발 좀 들어주십시오. 지금 우리 아이들이 배가 고파 울고 있습니다. 제가 돈이 있어서 쌀을 살 수만 있다면 그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하느님도 잘 아시겠지만 제 형편이 그렇지 못합니다. 제겐 지금 돈 한푼 없습니다. 이젠 아무도 도와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이번엔 제발 하느님께서 먹을 것을 좀 보내 주십시오." 그는 마치 옆에 있는 사람의 팔을 붙들고 간절히 부탁하는 사람 같았다. 그는 기도를 다 마치고 마당으로 나가 허기에 지친 아이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아 주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곧 먹을 것이 생길게다. 아무도 우리를 이대로 굶어 죽도록 하지는 않을 거다." 하고 다독다독 등을 두드리며 위로해 주었다. 그때 트럭 한 대가 고아원 대문 앞에 와서 멎었다. 젊은 남자 두 명이 급히 트럭에서 내리면서 원장을 찾았다. "무슨 일입니까? 제가 원장입니다만." 원장은 갑자기 무슨 일인가 하고 대문을 열었다. "저희들은 제빵회사 직원들입니다. 오늘 우리 공장에서 구워 낸 빵이 시중에 상품으로 내놓기에는 좀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빵을 고아원에 기증하려고 싣고 왔습니다. 배불리 먹는 데에는 아무 부족함이 없습니다. 자, 받아 주십시오." 그들은 말을 마치자마자 트럭 하나 가득 싣고 온 빵을 내리기 시작했다. 글터 → 이글저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지 5년 만에 스페인인들은 1,500,000명의 인디언들을 죽였다.로마가 불타고 있을 때 네로는 어디 있었나? 영화에서는 그 때 네로가 붙타는 로마 시를 내려다보며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 때는 바이올린이라는 것이 없었을 뿐 이니라 네로는 로마에서 80킬로미터 떨어진 앤티움이란 별장에서 쉬고 있었다.잔다르크, 1431년 2월 21일 화창한 오후 프랑스의 루앙에 있는 광장에서 수천 명의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잔다르크는 화형을 당했다. 그녀의 죄는 남자 마귀와 간통했다는 것으로, 800명의 영국 병사들도 그녀가 불에 타 죽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예수님”이었다.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미국 공군 조종사는 50명뿐이었다.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은 오늘날의 간호원이 있게 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녀는 전쟁터에서 단 2년 동안만 일했을 뿐, 그 때 얻은 병으로 그 이후 50년 동안을 환자로 지냈다.한국은 세계 5대 군사 강대국에 속한다. 소련이 첫째고, 미국, 중국, 독일, 한국 순이다. 북한의 군사력은 세계에서 11위이고 일본은 17위이다. 하지만 PKO의 승인으로 조만간 일본이 막강한 군사력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역사상 가장 오래 계속된 전쟁은 영국과 프랑스가 1338년 - 1453년의 115년 동안 싸운 백년 전쟁이다.서서 오줌누는 여자, 대부분의 여자들은 앉아서 오줌을 누지만 100년 전 농촌에서 살았던 일본 여자들은 서서 오줌을 누었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11 추천 0 비추천 목록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댓글 쓰기 에디터 선택하기 ✔ 텍스트 모드 ✔ 에디터 모드 ?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독서편지 List Zine Gallery FirstThumb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글쓴이 조회 수 1388 제1388호 - 2024.11.08. 금요일(음력 : 10.08.) 2024.11.08 風文 419 1387 제1387호 - 2024.11.06. 수요일(음력 : 10.06.) 2024.11.06 風文 348 1386 제1386호 - 2024.11.04. 월요일(음력 : 10.04.) 2024.11.04 風文 373 1385 제1385호 - 2024.11.02. 토요일(음력 : 10.02.) 2024.11.02 風文 384 1384 제1384호 - 2024.10.28. 월요일(음력 : 9.26.) 2024.10.28 風文 343 1383 제1383호 - 2024.10.25. 금요일(음력 : 9.23.) 2024.10.25 風文 549 1382 제1382호 - 2024.10.24. 목요일(음력 : 9.22.) 2024.10.24 風文 322 1381 제1381호 - 2024.10.23. 수요일(음력 : 9.21.) 2024.10.23 風文 940 1380 제1380호 - 2024.10.22. 화요일(음력 : 9.20.) 2024.10.22 風文 801 1379 제1379호 - 2024.10.21. 월요일(음력 : 9.19.) 2024.10.21 風文 793 1378 제1378호 - 2024.10.18. 금요일(음력 : 9.16.) 2024.10.18 風文 802 1377 제1377호 - 2024.10.17. 목요일(음력 : 9.15.) 2024.10.17 風文 513 1376 제1376호 - 2024.10.16. 수요일(음력 : 9.14.) 2024.10.16 風文 504 1375 제1375호 - 2024.10.15. 화요일(음력 : 9.13.) 2024.10.15 風文 607 1374 제1374호 - 2024.10.14. 월요일(음력 : 9.12.) 2024.10.14 風文 406 1373 제1373호 - 2024.10.13. 일요일(음력 : 9.11.) 2024.10.13 風文 435 1372 제1372호 - 2024.10.11. 금요일(음력 : 9.09.) 2024.10.12 風文 456 1371 제1371호 - 2024.10.10. 목요일(음력 : 9.08.) 2024.10.10 風文 404 1370 제1370호 - 2024.10.09. 수요일(음력 : 9.07.) 2024.10.09 風文 353 1369 제1369호 - 2024.10.08. 화요일(음력 : 9.06.) 2024.10.08 風文 339 1368 제1368호 - 2024.10.07. 월요일(음력 : 9.05.) 2024.10.07 風文 304 1367 제1367호 - 2024.10.06. 일요일(음력 : 9.04.) 2024.10.06 風文 364 목록 Search 검색 제목+내용제목내용댓글닉네임태그 전체검색 제목+내용+댓글 확장 변수 쓰기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64 Next / 64 GO
【독서편지】: 제 62 호4339.11.17 (09.27)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이로인해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 않보이시는 분은 저의 블로그 또는 아래의 링크를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문학소식 13회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시·소설·수필·동화 4개 부문 ‘이 땅의 푸른 깃발’ 동양일보는 한국문학을 지켜나갈 신인발굴을 위해 13회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작품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당선과 동시에 기성문인으로 인정받는 ‘동양일보 신인문학상’은 역량있는 문인을 발굴하는 전국규모의 문단 등용문입니다. 신인들의 많은 응모를 기대합니다.■ 횟수별 당선자<1회> 윤장규 박대규 김호영 윤혜숙 <2회>김병기 김원림 한혜선 이태곤 <3회>설덕영 김재순 <4회>박희선 송승환 배수원 이영창 <5회>이은희 성혜석 안희정 배기훈 <6회>고완수 유은선 유성종 박혜영 이향숙 <7회>조원진 박연혁 이혜영 임선빈 <8회>유현숙 김유 진영옥 김은미 김영호 <9회>서상규 이윤경 이인주 <10회>박영석 황성진 <11회>하봉채 최진규 김광수 양영숙 <12회>박순서 이종태 문경희 최석희■ 모집 부문 ▲ 시 : 5편 이상(장편 제외) ▲ 소설 : 80매 이내 1편 ▲ 수필 : 20매 이내 2편이상 ▲ 동화 : 30매 이내 1편■ 모집 마감 : 11월30일 당일소인 유효■ 시 상 - 각 부문별 당선작 - 시상식 시간·장소 추후 발표 - 응모작품은 미발표되거나 현상응보된 바 없는 순수창작품이어야 함 - 당선작에 대한 저작권은 발표일로부터 3년간 본사가 보유하고 그 이후 작가에게 귀속함 ( 당선작은 1회 당선으로 기성문인 대우) - 심사위원은 심사발표시 명단 공개 - 응모작품은 반환하지 않으며 작품끝에 주소·전화번호·본명을 명기 - 봉투에 ‘oo부문 신인상 응모작품’ 을 적을 것 - 가급적 컴퓨터 사용 바람■ 보 낼 곳 : (우)360-716 충북 청주시 상당구 율량동 1070번지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담당자 앞■ 문 의 : ☏ 043-211-0001, 0002 글터 → 명언 / 격언 근심걱정은 대개는 재상연된 것. / C.M. 글터 → 수필 내잠 속에 비내리는데 - 이외수 연못가에서 우리집에는 작은 연못이 하나 있다. 사는 게 너무 각박하다는 생각이 들어 여유를 좀 가져 보려고 내가 설계해서 만든 연못이다. 며칠 동안 낚시질을 다니며 물고기는 물론 새우며, 징거미며, 다슬기며, 조개 따위도 잡아다 넣었다. 수초도 몇 종류 갖다 심었다. 햇빛이 발광을 해서 견딜 수 없는 날은 한얼이 진얼이가 풀장으로 사용 한다. 연못 속에는 치어들까지 포함하면 식구들이 약 백여 마리 정도나 된다. 나는 그 식솔들을 다스리는 가장이다.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수온도 맞추어 줘야 하고, 먹이도 넣어 줘야 하고, 질병도 예방해 줘야 한다. 그래도 하루에 세 마리 정도는 항시 죽어서 떠오른다. 되도록이면 비늘이 상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서 가져온 것들이지만 거의가 몇 점씩 비늘이 떨어져 버린다. 물고기는 비늘이 없으면 문자 그대로 시체가 된다. 물고기에게 있어서 비늘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그것은 수온을 재기도 하고, 수압을 재기도 하며, 보호색을 만들어 몸을 보호하기도 한다. 그러나 비늘이 떨어지면 거기에 수서균들이 기생해서 그러한 기능들을 퇴화시키고 마침내는 활동조차 둔화시켜서 물 위로 떠오르게 안들어 버리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연못으로 나가 보면 허옇게 부패된 채로 떠 있는 물고기가 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차라리 모두 방생이나 해 버릴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때는 늦었다. 여기서 죽는 물고기는 방생을 해도 죽게 된다. 나는 생명력이 강한 놈들만 살아남을 때까지 좋은 환경이나 만들어 주면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한다. 고기들의 기분이야 별로 안 좋겠지만 나는 그래도 연못을 들여다보면 더러 우울이 개이는 수가 있다. 요즘은 틈만 있으면 연못을 들여다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 연못은 하나의 사회이면서 우주다. 나는 연못 밖에서 신적 존재가 되어,그 세계를 내려다본다. 우선 연못 속에서 가장 많은 수를 가진 물고기가 붕어다. 월척에서부터 고춧잎만한 치어에 이르기까지 크기가 다양하다. 그 다음이 잉어인데 별로 크지는 않다. 그 밖에 피라미가 열 마리 정도, 이스라엘 잉어가 네 마리, 금붕어가 여섯 마리, 송사리와 동자개와 모래무지와 메기 새끼가 각각 한 마리, 왜버들치 두 마리, 돌고기 두 마리, 미꾸라지 스무 마리 정도인데 천적 관계를 고려하여 크기와 수를 맞추어 넣은 것이다. 그 다음 조개가 가장 많고 다슬기도 그 수가 조개만큼은 된다. 그 밖에 새우는 다섯 마리 녹색거북새끼는 두 마리, 징거미는 네 마리 소금장수 한 마리(이놈은 어느 날 제가 스스로 하늘을 날아 어딘가에서 귀순해 왔다) 기타 숫자 불명의 플랑크톤 등이 살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까지 내 연못 속에 있는 생존자 명단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최근에 이르러 그들을 내려다보는 신적 존재로서 징거미와 녹색거북의 만행에 대해 어떤 벌을 내릴 것인가 생각중에 있다. 우선 녹색거북의 죄상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놈들은 세계 각지에서 애완용으로 귀여움을 받고 있는데, 특히 우리 연못에 있는 것은 콜롬비아 붉은귀거북으로서 양쪽 볼에 빨간 점이 한 개씩 찍혀 있다. 이쁘다. 성장하면 귀갑의 길이가 한 자 정도 되고 귀갑의 빛깔도 녹색에서 흑갈색으로 변해 버려서 전혀 아름답지 못한 몰골을 가지게 되는모양이지만 지금은 마누라나 아이들에게도 단연 인기가 좋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어려서부터 너무 음흉하다. 생긴 것과는 파운 이하게 다른 것이다. 놈들은 낮에 햇빛이 좋으면 연못가 돌 위로 올라와서 지그시 두 눈을 감고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낮잠을 오래도록 즐긴다. 그러다가 밤이면 슬그머니 물 속으로 기어들어가 그 느리고 서툰 유영법으로 거의 수면에 가깝게 헤엄쳐 다닌다. 그러다가 수면 위에 고요히 떠서 잠을 자고 있는 붕어의 치어들을 발견하면 아주 느리고 은밀하게 다가선다. 이런 경우 거북이가 느리다는 것은 장점이다. 느리기 때문에 치어들은 적이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눈치챌 수가 없는 것이다. 놈들은 그렇게 치어에게 가까이 다가가서는 우선 가만히 꼬리 지느러미부터 몰래 조금씩 끊어 먹는다. 그렇게 하고 나면 전혀 서두를 필요가 없다. 꼬리 지느러미가 없는 치어는 갑자기 추진력을 상실한 채 뒤뚱거리게 되는 것이다. 가슴 지느러미와 배 지느러미까지 모두 잘라먹고 나면 제법 여유가 만만하다. 동체는 먹고 싶으면 먹고 먹기 싫으면 내버려뒀다가 배고플 때 다시 와서 먹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징거미는 또 어떤가. 인간 사회에서도 도둑질한 물건을 다시 도둑질하는 놈이 있듯이 이 징거미라는 놈도 녹색거북이 포획해 놓은 치어를 슬그머니 물고 바위틈으로 들어가 버린다. 거북이의 동작으로는 도저히 징거미를 따라갈 수가 없다. 징거미란 놈은 순발력이 굉장히 뛰어나서 마치 물 속의 메뚜기처럼 톡 하는 순간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생태도 거의 도둑과 흡사하다. 항시 바위 틈이나 수초속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어서야 기어나온다. 야행성인 것이다. 생긴 모양은 민물새우 같은데 민물새우보다는 몸집이 크고 자기 몸체의 전장보다 세 배 이상이나 기다란 촉수 모양의 앞발 한 쌍을 가지고 있다. 놈은 그것으로 물고기를 감지하여 몸에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수초 뒤에 숨어 그것을 드리워 놓으면 마치 노쇠한 수초 줄기같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어쩌다 병이 들어서 기동이 불편한 물고기가 놈에게 한번 붙잡히면 끝장이다. 내장을 쏙쏙 빼먹어 버린다. 놈은 그 재미 때문인지 밤만 되면 아주 음흉한 모습으로 연못 속을 끊임없이 배회한다. 때문에 붕어의 치어들이 현저하게 줄어 들었다. 놈들은 다른 고기로부터 격리시켜 버리는 방법과 앞다리를 떼어 버리는 방법과 사형시켜 버리는 방법이 있지만 나는 아직 아무것도 실천에 옮겨 놓지 못하고 있다. 비록 내가 그들에게는 신적 존재로 군림하면서 한눈에 그들의 행동을 모두 내려다볼 수 있다 하더라도 다시 내 위에서 또 어떤 신적 존재가 가소롭다는 듯이 나를 내려다보면서 나와 흡사한 생각을 하고 있을지 누가 알랴. 나는 그저 모든 것을 외면하고 수초같이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수초는 가만히 한자리에서 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부드럽게 하늘거리면서 그 어떤 물고기든지 받아들이고 한편으로는 플랑크톤이나, 산소를 만들어 다른 생물들에게 아낌 없이 나누어 준다. 혹 나도 그러한 능력이 있어 반드시 세상에 필요한 것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아낌없이 나누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나 역시 한갓 미물에 불과하다. 차라리 평생을 사는 동안 녹색거북이나 징거미 같은 행동을 단 한번도 흉내내지 않고 사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겠는가. 그런데 아차, 이미 나는 그보다 더한 죄를 범하고야 말았다. 물고기들의 입장에서 보면 단순한 내 개인적 욕심 때문에 연못을 파고 거기다 고기들을 잡아 넣는 사실부터가 극악무도한 행동이 아니고 무엇이랴. 도대체 부처처럼 살려고 마음먹으면 만사에 걸치적거려서 불편하기 짝이 없으니, 에라 모르겠다. 나는 다시 꼭 나처럼 살아 버리기로 마음먹는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출신지에 따라 인격이 다른 사회 - 박종기(국민대 교수) 고려 후기는 과연 문란한 사회였는가 조선 초기 역사가들은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고려 전기를 이상적인 사회로 평가한 반면에 후기사회는 권세가와 간사한 무리들이 나라의 근본을 갉아먹은 문란한 사회로 평가하였다. 이러한 시각은 고려 후기 사회의 문란상을 부각시키면서, 조선의 건국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부곡인, 노비 등 하층민들이 지배층으로 대거 진출한 사실이 유교적 대의명분에 사로잡힌 그들의 눈에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고려 후기는 전기와 같이 문벌이나 학문적 능력만으로 고위관직에 올라 명예와 부귀를 누리던 사회는 아니었다. 이제 기회만 주어진다면 누구든지 군사적 기예나 통역관으로 혹은 원나라의 세력에 기대어 명예와 부를 누릴 수 있었다. 이를 가장 반기는 계층은 그간 온갖 제약과 굴레에 묶여 있었던 부곡인, 노비 등 하층민중이었다. 이들이 출세의 길을 달리게 된 것은 개인의 능력, 시대환경의 변화만도 아니었다. 12세기 이후 정치 사회구조의 변화로 하층민들의 사회의식이 성장하였던 결과이다. 고려 후기 사회는 전기사회의 강한 제도적 규제가 무너지면서 그 반작용이 곳곳에서 분출한, 한국사에서 낭만적이고 약동적인 사회상의 한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고 있다. 기득권자인 지배층의 시각에서 보면 왕조의 몰락이라는 비극을 잉태한 문란하고 혼란된 사회였지만, 하층민들의 눈에는 오히려 기회와 희망의 시대였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어미게와 새끼게 저녁상을 물린 뒤 시작된 남편과의 대화가 조금씩 격한 어조로 바뀌어 우리도 모르는 사이 언성이 높아졌던 모양이다. 딸아이 둘이 건너방에 있었는데 언쟁에 열중한 남편과 나는 이미 자제력을 잃은 상태였고, 아이들이 우리 얘기를 듣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큰애가 고등학교 삼학년, 작은애는 중학교 이학년인데 둘이서 작은 일로 자주 티격태격하고 했었다. 그때마다 나는 큰애를 나무랐었다. "에가 조금이라도 먼저 태어나고 배운 것도 더 많잖니. 왜 그렇게 참을 성이 없니? 네가 먼저 이해해 주면 동생도 그 본을 따라 좋아질 거야." "항상 빈 수레가 요란한 법이다. 사람도 머리에 든 것이 없으면 참을성, 이해심, 자제력이 없어서 덜그럭덜그럭 시끄러운 법이야." 그런데 오늘 저녁, 우리 부부가 말싸움을 하다보니 건너방에서 나지막한 노래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큰애의 목소리였다. "어미 게와 새끼 게가 모래밭에서 똑바로 걸어가는 연습을 하고 있어요. 엄마 먼저 똑바로 걸어가 보세요. 그럼 나도 똑바로 걸어갈 테니....." 그 순간 우리 부부는 둘 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숨을 죽이고 말았다. 박춘자 님/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52 - '그리스도의 변증론':파스칼의 "팡세" 출간(1670년) 그때 세계에서는 1666년: 영국 뉴턴, 광학 및 우주중력에 관한 법칙과 적분법 발견 1670년: 러시아, 스텐카 라진의 대반란(농민반란) 파스칼은 누구 못지않은 합리주의자였고 수학과 기하학의 천재였다. 부친이 그에게 법률공부를 시켜 법관으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좋아하는 수학을 가르치지 않았는데, 어린 파스칼이 장난삼아 여러가지 형태의 도형들을 그리고 살피다가 유클리드 기하학의 원리를 홀로 발견해내는 것을 보고 감탄한 나머지 친구들에게 내 아들은 천재라고 얘기했을 정도였다. 그런 파스칼이 종교적 체험을 겪은 뒤부터는 기하학적인 합리적 사고는 자연연구와 수리적인 사고의 원칙일 뿐, 철학적인 사고와 종교적인 체험에서 얻는 사고는 합리적인 사고를 앞지르며 초월하는 또 다른 섬세한 사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우리들의 해설을 가한다면, 그런 사고는 직각적이며 직관적인 합리가 미치지 못하는 차원 높은 사유라고 보았다. 거기에는 수리와 기하학적인 법칙의 사고에 비하면 내적인 깊은 진실과 진리 그 자체에 적응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좀더 그의 생각을 전체적으로 해석한다면, 인간학적 깊이를 가진 직각적 사유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파스칼은 자연사물을 관찰함에 있어 주어진 법칙과 원칙을 찾아 따르도록 되어 있듯이, 정신계에는 정신적 질서와 법칙이 있어 우리는 그것을 찾아 따라야 한다고 믿고 있다. 자연의 질서가 엄연히 자연세계를 좌우하듯이, 정신적 질서는 우리들의 정신적 삶을 지배하며 우리의 삶은 그에 순응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그 위에 종교적이며 신앙적인 질서가 있어 그것 또한 엄연히 우리들의 영적 생활의 의미를 채워주는 것이다. 이 은총의 질서는 기독교의 가르침에서 얻어진 것이기보다는 그 자신이 조카에게 나타난 과학과 의술을 초월한 은총의 사건에 접하고 얻은 것이었다. 따라서 신앙적 사실의 직접적인 체험에서 얻어진이 확신은 그의 "팡세"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그가 "기적이 없었다면 신앙을 가지지 않아도 죄가 되지 않으나 기적이 있었기 때문에 불신은 죄가 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이미 그의 인식이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과학 및 철학적인 것을 넘어 위에서부터 아래로 주어지는 은총의 사실임을 잘 얘기 해주는 내용이기도 하다. 이렇게 되면 파스칼의 과제는 인식의 영역에서 인간이해와 인간학적 과제로 상승하지 않을 수가 없어진다. 학자들이 파스칼은 연구하면서 그의 인간연구에 깊은 공감을 갖는 이유가 짐작된다. 대개의 경우 대륙의 합리주의자들은 이성적 사고를 존중히 여기는 나머지, 감정과 의지는 감정과 의지의 기능을 약화시키며 배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스피노자는 의지의 개입이 진리의 길을 좁게 하거나 막는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파스칼은 감정과 의지를 포함한 전 인간적인 기능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메모에서 '인간의 본질...불안' 이라는 짤막한 구절을 남기고 있다. 후에 실존주의자들이 그가 얼마나 자연스레 인간 본질의 정서적인 면을 깊이 통찰했는가에 감탄하고 있다. 그는 사회적인 정의를 설명하면서 "그는 강 이편에 살기 때문에 나를 죽여도 칭찬을 받는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사회여건과 정치적인 국경에 따라 사람을 죽이는 일 같은 것이 살인행위가 되기도 하고, 또는 '공훈'이 되기도 한다는 얘기다. "나는 우주를 생각할 수 있어도 우주는 나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우주보다 위대하다"고 말할 정도로 사유의 위대함을 지적하면서도, "지극히 작은 벌레 한 마리가 위대한 철학자의 사유를 얼마든지 중단시킬 수 있다"고도 말한다. 수많은 부장들이 청검을 갖고 두 줄로 정렬해 서 있는 저쪽 옥좌에 앉아 있는 터키 황제를 나와 꼭 같은 사람이라고 볼 수가 있겠느냐고 비유하면서, 그렇게 위대한 사유가 그렇게 한계지어져있으면서 무력한 모순에 차 있음도 설명해준다. 결국 파스칼의 철학적 과제는 인간적 과제와 통하는 것이며, 인간적 물음은 수학이나 기하학적 사고의 방법으로 풀 수 없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인간과 삶의 의미와 가치를 근본적으로 해결지을 수 있는 차원 높은 인식과 삶이 가능해질 때 근원적인 결론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무신론자는 가장 어리석으면서도 사리에 맞지않으며, 신을 탐구해가는 철학자는 지혜롭지 못하나,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은 가장 사리에 맞으면서도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라고 담담하게 이론을 전개시켜간다. 우리는 그가 중세기의 사상가였던가 기독교 정신이 쉽게 받아 들여지고 있는 시대의 인물이었다면 그리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장 이성과 합리를 존중히 여긴 17세기에ㅓ서 인간적 삶의 본질과 인간 이성이 갖는 한계를 극명히 보여주었다는 점에 깊은 공감을 표하게 되는 것이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똥뀐 녀석이 성낸다"는 말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 어느 분이 방귀를 '꾸는' 것이 아니고 '뀌는' 것이 아니냐고 물으셨는데,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방귀'와 연관되어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몇자 적습니다. 충북 영동군 황간면 용암리 마을에 방언조사를 갔을 때의 일입니다. 이 용암리는 자연부락의 이름이 '누룩방구'였습니다. 마치 누룩처럼 생긴 바위가 동네의 끝에 있어서 생긴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지방에서는 '바위'를 '방구'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뀌는 '방구'(방귀지만 실제 발음은 '방구')와 어떻게 구별하는지가 궁금해서 사람이 보리밥을 먹으면 뀌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글쎄 '똥뀐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같이 조사를 하던 학생들이 한참 웃었지만, 저는 웃음이 나오지 않고, 오히려 그 말이 오래 전부터 쓰이었던 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똥뀐 녀석이 성낸다"는 말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방귀를 뀌고서도 다른 사람이 방귀를 뀐 것인 양 남에게 돌려댄다는 뜻이겠지요. '바위'가 '방구'가 되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바위'는 고어로서는 '바회'였습니다. 소위 '히읗'이있지요. 이 '히읗'은 곧잘 '이응'으로도 변화를 겪었습니다. 예컨대 '죠희'가 '종이'가 되었던가 하는 것들이지요. 그리고 '히읗'이 '기역'으로도 변화를 겪습니다. 그래서'바위'와 '방귀'가 같은 음으로 발음되니까, 이것을 피하기 위하여 한 낱말을 다른 낱말로 바꾸어 버립니다. 이것을 우리는 '동음충돌 회피현상'이라고 합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3장 죽음과의 악수- 자신의 죽음으로써 적멸상을 가르친 벽송선사 조선조 1464년(세조 9년)에 태어난 벽송의 본명은 송지엄. 그는 무인이로서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전쟁 뒤에 찾아오는 비감을 어쩔 수 없었다. 죽음에 대한 회의가 깊어졌다. 대장부가 세상에 나서 마음을 한 번 깨달아 밝혀보지 못하고 남의 막하 군사를 쫓아다니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으니 비록 여기에 한마의 공이 있다 할지라도 그까짓 허명이 생사해탈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하고 본연히 출가를 결심하니 그때의 나이 28세였다. 그는 출가하여 직지사의 벽계정심 선사를 모셨다. 석 달이 되어도 법은 한 마디도 일러주지 않고 매일 땔감나무만 져오게 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고 하산을 결심한다. 내가 안 가르쳐 주었나, 제놈이 알아듣지 못했지. 정심의 말이다. 정심은 산 아래로 떠나고 있는 벽송을 행해 크게 불렀다. 지엄아! 지엄아, 나좀 보고 가거라! 메아리가 계속을 울렸다. 화가 잔뜩 난 지엄은 떠나온 산마루 쪽을 바라보았다. 도가 여기있다. 옛다 받아라! 정심이 무엇을 집어던지는 시늉을 해보았다. 순간 지엄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무엇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감격의 눈물을 철철 흘렸다. 다시 스승께 나아가 큰절을 올리고 용맹정진을 거듭했다. 그는 말년에 지리산에 은거하고 있었다. 어느 날 <법화경>을 강의하다가 문득 방편품 에 이르러 길게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중생이 이리석어 스스로 제게 있는 광명을 발견하지 못하고 오래도록 윤회를 받아오므로, 세존께서 이것을 불쌍이 여겨 입이 아프시도록 말씀하신 것이 바로 <법화경 방편품>이다. 그러나 모두 중생을 깨우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것이요, 정법은 아니다. 정법이란 적멸허확하여 말로써 그 형상을 그릴 수 없는것이니, 이제 너희들이 정말 부처님의 실상을 믿으려면 당장에 자기 마음속부터 들춰내야 한다. 그래야만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것이다. 오늘 나도 너희들을 위하여 또 하나의 적멸상을 보일테니 너희들은 절대로 밖에서 찾으려 하지 말고 한 마음으로 마음속을 더듬어 보아라. 지엄은 시자를 불러 차를 달여 오라고 하였다. 문답을 나눈 후 시자가 끓여 온 차를 마시고 방장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 후로 오래도록 아무 기척이 없어 문을 열어보니, 벌써 앉은 채로 입적에 든 뒤였다. 1534년 11월 초하루 아침이었다. 제자로는 서산의 스승인 숭인을 비롯하여 설은, 원오, 일선 등이 있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16. 며느리 양귀비에게 반한 당현종 측천무후가 죽자 이번에는 중종의 황후인 위씨 일족이 권세를 휘둘렀다. 당 황실의 운명은 다시 위태로워졌다. 중종의 손자였던 23세의 이융기는 이를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중종이 죽은 지 18일 만에 이융기는 젊은 관리들을 동원, 쿠테타를 일으키고 위씨 일족을 주살했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를 예종으로 옹립하고 자신은 황태자가 되었다. 이가 바로 현종이다. 당 황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등장한 현종의 치세는 중국 4000년 역사상 다시없는 전성기여서 그의 연호를 딴 `개원의 치`는 태평성대의 대명사로 쓰일 정도였다. 인구는 날로 늘어 양귀비가 등장하기 직전의 한 통계에 따르면 4,890만 9,800명을 헤아렸다. 현종은 웅대한 지략가이기도 했지만 음악에 관한 한 당대 최고의 풍류객이기도 했다. 737년 황후였던 무혜비가 돌연 사망하자 그는 수천의 후궁도 돌아보지 않고 상심했다. 눈치 빠른 환관 고력사는 재색으로 소문이 파다했던 한 여인을 천거했다. 청화궁에서 그녀를 처음 만난 현종은 자신이 작곡한 곡을 연주했다. 그러자 이 여인은 즉석에서 음률에 맞춰 선녀처럼 춤을 추었다. 현종은 그 여인에게 그만 한눈에 반하게 되었다. 이 여인이 양귀비이고 당시 황태자의 비 가운데 하나였다. 현종의 며느리인 셈이다. 양귀비는 피부가 하얗고 풍만한 여인이었다. 본명은 옥환이라고 했다. 사천성 관리의 딸로 태어나 17세 때 황태자인 수왕의 비가 되었다. 현종은 그녀를 여자 도사로 만든 후 곧 후궁으로 불러들여 자신의 비로 삼았다. 이 때 양귀비의 나이 22세, 현종은 57세였다. 그녀는 얼굴만 아름다웠던 것이 아니라 노래와 춤도 뛰어났고 특히 비파의 명수였다. 게다가 머리 회전이 빨라 현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현종은 양귀비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황제의 유흥비를 조달하던 그녀의 친척 양국충을 중용했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일개 무뢰배에 불과했던 양국충은 권력을 전횡하며 양귀비의 양자이자 변방 3개 지역을 관할하던 절도사 안록산과 앙숙지간이 되었다. 안록산은 중국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돌궐계 또는 이란 계로 추정되고 있다. 궁궐에 들어올 때면 항상 양모 양귀비를 먼저 배알해 현종이 그 이유를 묻자 “호인(오랑캐)은 어머니를 앞세웁니다”라고 대답할 정도로 자신에 찬 인물이었다. 양국충이 이미 죽은 재상 이임보를 돌궐과 내통했다고 모함하여 그의 일족을 주살하자 안록산은 `황제 옆의 간신을 제거한다`며 거병했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조정은 장안에 있던 안록산의 아들을 죽였다. 이에 격노한 안록산은 낙양을 짓밟고 국호를 대연이라 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당은 고구려 출신의 고선지에게 방어를 맡기나 고선지는 환관의 모함에 걸려 싸워 보지도 못하고 병사들 앞에서 철수를 당하고 말았다. 수도 장안이 위태해지자 현종은 사천성 방면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그러나 배고픔과 피로에 지친 병사들은 양국충을 살해하고 현종의 막사를 포위, 양귀비의 처형을 요구했다. 그러나 생사를 같이하기로 맹세하고 17년 동안 애지중지했던 양귀비를 현종은 차마 내어 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를 천거했던 환관 고력사는 현종을 설득해서 양귀비를 근처 절로 데리고 갔다. 양귀비는 그곳 배나무에서 목을 매달았다. 그 때 그녀의 나이 38세였다. 현종은 고력사로 하여금 그녀의 시체를 수습해 오게 해서 비단옷을 입히고 가슴에는 향수 주머니를 단 후 조그마한 산에서 장사 지냈다. 안록산의 난으로 번성하던 당은 치명상을 입었다. 통치의 근간이었던 균전제, 조용조, 부병제 등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따라서 중앙통제력이 약화되었다. 안록산의 난을 진압한 것도 당 조정의 군대가 아니라 위구르라는 유목민족의 군대였기 때문에 대내외적으로 대당제국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지방에서는 그 동안 규제받았던 호족들의 대토지 소유와 토지 매매가 성행하고 군벌들도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중의 하나가 당을 멸망시킨 주전충이었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4. 불성실하고 무책임한 미국의 외교 . 부록 :장쩌민 담화에 대한 미국무성 번스 대변인의 기자회견문 문 .닉크, 다음의 질문에 대해 대답해 주십시오. 첫째 중국 주석 장쩌민이 미국의 {뉴스위크}와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리포트}의 기자회견에서 발언한 내용에 대해 할 말은 없는지요? 그는 특히 미국이 대만총통의 방문을 허락한 것에 대해 일종의 배신감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둘째 장 주석은 대만총통 리떵후이와 상호 방문하길 원한다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논평하시겠습니까? 셋째 장주석이 이번 달 말 클린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할 때 클린턴에게 대만문제에 대해서 좀더 확실한 약속을 요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답:두 번째 질문인 회담 여부에 관해서는 중국과 대만지도자 당사자 들이 결정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그러한 단어를 사용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미국은 그 문제에 대해 중국 정부와 허심탄회하게 논의하였다고 생각하며 올 여름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수 차례 논의하였습니다. 미국이 시행하는 정책은 하나의 중국을 기본원칙으로 한 것임을 거듭 천명합니다. 10월 24일의 정상회담에서 이 문제가 거론되더라도 그다지 오랜 시간을 두고 토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 :계속해서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구체적으로 말해서 장 주석은 인터뷰에서 미국이 리떵후이의 방미를 결정하기 1주일 전 틀림없이 국무장관 크리스토퍼 씨가 리떵후이의 방미는 '중 .미 합동성명' 정신에 위배된 것이라고 말하였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제가 묻고자하는 것은 미국이 리떵후이의 방미를 허락하기 전에 국무원이나 국무장관이 직접 이곳에 온 중국 사절들에게 이러한 약속이나 발언을 한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답 : 일찍이 중국의 정치지도자 및 사절들과 이 문제에 대해 여러 차례 토론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회담에서 나눈 모든 대화의 내용을 다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만 우리는 공개적으로 충분히 이 문제를 토론하였습니다. 우리와 중국 정부는 아주 상세하게 토론하였으며 중국 정부는 우리들의 입장과 사건의 진상을 이해하였습니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3, 4개월 동안 비자발급과 관련된 대만과 중국문제에 대한 우리들의 입장은 최선을 다해 충분히 밝혔습니다. 우리들은 하나의 중국정책을 고수하며 중국과 대만을 따로 두고 각각 지지하지는 않습니다. 중 .미 관계에서 이 점은 분명합니다. 양국의 대통령과 주석이 회담할 때 충분한 대화를 하였고 과거 몇 개월 동안의 사건들을 돌아봤으리라 믿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 :닉크, 장 주석의 말에 의하면 리떵후이의 방미선언 1주일 전 국무위원이 중국 주석 혹은 중국 당국에 이런 식의 방문은 '중 .미 합동성명'의 정신에 위배된다고 하였다는데 사실입니까? 답 .제 생각으로는 이 문제를 다른 장소에서 거론하는 것은 적합할 수 있겠지만 지금 거론하는 것은 분명 적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들은 줄곧 장 주석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연설할 때 아주 솔직하다고 여겨왔는데 사적인 자리에서도 그러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알다시피 이 문제에 대한 쟁론은 이미 오래 끌어왔습니다. 다시 거론하지 맙시다. 그리고 중 . 미 관계의 실질적 문제해결에 착수해야 합니다. 안정되고 우호적인 관계정립 등의 더욱 중요한 문제들을 논의해야 하며, 이런 논의는 다음 세기에 있을 중 .미 관계의 앞날에도 크게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문 : 닉크, 당신은 국무장관이 중국대사에게 그와 같은 말을 확실히 한적이 있다고 증명할 수 있습니까? 답 :할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이 문제에 대해 말한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증명을 할 수 없습니다, 비공식적으로 중국인과 논의한 내용들을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 문제는 노코멘트입니다. 비자발급 전과 후의 회담에서 그들과 많은 대화를 하였지만 아직 거론되지 않은 문제들도 많습니다. 나는 {뉴스위크}에 게재된 보도내용과 관련하여 어떤 문제도 말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와 같은 것들에는 관심이 없으며 중 .미 관계의 실질적인 문제처리에 착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 .한 가지 더 묻겠습니다. 1월 17일 뉴욕에서 국무장관 크리스토퍼와 중국 외교부장 첸치천은 서로 만나 회담을 하였습니다. 미국의 주요 신문지상의 아주 돋보이는 위치에 분명하게 보도되었습니다. 즉 크리스토퍼 장관이 첸 부장에게 자기가 직접 저간의 사정에 대해 의견을 들어 보려고 국회의원들을 만났는데. 리떵후이의 미국방문을 저지하는 일은 할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직접 말했다는 것입니다.이것이 사실입니까? 국무장관과 첸 부장의 4월 17일 회동에서 나온 뉴스가 아닙니까? 답 :좋습니다. 지금 질문한 기자를 위한 딱 한 번 예외를 만들어 보지요.(웃음) 지금 제가 이 문제에 대해 몇 마디하는 것은 그 회담에 참석했고 회담의 구체적 내용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월 17일 뉴욕회담에서 크리스토퍼 장관은 분명히 첸치천 부총리 겸 외교부장에게 미국 의회에서는 리떵후이에게 비자를 발급하자는 분위기가 아주 강하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날 회담의 아주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문 닉크. 국무장관이 직접 공개적으로 말했으나 이 점을 첸치천 외교부장에게 충분하게 설명하지는 않은 것 같군요. 답 : 어쨌든 그 말은 기억이 안 납니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작은 기적 고아원에 양식이 떨어졌다. 굶은 지 벌써 사흘째인 아이들은 배가 고프다고 아우성이었다. 원장은 아이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 백방으로 쫓아 다녀 보았으나 어디에서든 쌀 한 톨 구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전쟁 직후라 할지라도 이렇게 몰인정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에 자꾸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원장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아이들이 배가 고파 우물가에서 물을 퍼먹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떤 아이들은 허기진 배를 안고 병든 병아리처럼 오종종하게 양지쪽 담벼락에 기대 있었다. '아, 저 아이들을 저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어.' 원장은 마음이 탔다. 그 누구라도 붙잡고 매달리고 싶었다. 지금까지 한번도 찾아보지 않은 하느님을 향해, "오 하느님, 제발 좀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는 말이 입에서 절로 나왔다. 그러자 원장은 갑자기 기도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기도해 본 적이 없었으나 그는 얼른 다락방으로 올라가 무릎을 꿇었다. "하느님, 저는 기도할 줄을 모릅니다. 저의 기도가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제발 좀 들어주십시오. 지금 우리 아이들이 배가 고파 울고 있습니다. 제가 돈이 있어서 쌀을 살 수만 있다면 그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하느님도 잘 아시겠지만 제 형편이 그렇지 못합니다. 제겐 지금 돈 한푼 없습니다. 이젠 아무도 도와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이번엔 제발 하느님께서 먹을 것을 좀 보내 주십시오." 그는 마치 옆에 있는 사람의 팔을 붙들고 간절히 부탁하는 사람 같았다. 그는 기도를 다 마치고 마당으로 나가 허기에 지친 아이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아 주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곧 먹을 것이 생길게다. 아무도 우리를 이대로 굶어 죽도록 하지는 않을 거다." 하고 다독다독 등을 두드리며 위로해 주었다. 그때 트럭 한 대가 고아원 대문 앞에 와서 멎었다. 젊은 남자 두 명이 급히 트럭에서 내리면서 원장을 찾았다. "무슨 일입니까? 제가 원장입니다만." 원장은 갑자기 무슨 일인가 하고 대문을 열었다. "저희들은 제빵회사 직원들입니다. 오늘 우리 공장에서 구워 낸 빵이 시중에 상품으로 내놓기에는 좀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빵을 고아원에 기증하려고 싣고 왔습니다. 배불리 먹는 데에는 아무 부족함이 없습니다. 자, 받아 주십시오." 그들은 말을 마치자마자 트럭 하나 가득 싣고 온 빵을 내리기 시작했다. 글터 → 이글저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지 5년 만에 스페인인들은 1,500,000명의 인디언들을 죽였다.로마가 불타고 있을 때 네로는 어디 있었나? 영화에서는 그 때 네로가 붙타는 로마 시를 내려다보며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 때는 바이올린이라는 것이 없었을 뿐 이니라 네로는 로마에서 80킬로미터 떨어진 앤티움이란 별장에서 쉬고 있었다.잔다르크, 1431년 2월 21일 화창한 오후 프랑스의 루앙에 있는 광장에서 수천 명의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잔다르크는 화형을 당했다. 그녀의 죄는 남자 마귀와 간통했다는 것으로, 800명의 영국 병사들도 그녀가 불에 타 죽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예수님”이었다.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미국 공군 조종사는 50명뿐이었다.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은 오늘날의 간호원이 있게 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녀는 전쟁터에서 단 2년 동안만 일했을 뿐, 그 때 얻은 병으로 그 이후 50년 동안을 환자로 지냈다.한국은 세계 5대 군사 강대국에 속한다. 소련이 첫째고, 미국, 중국, 독일, 한국 순이다. 북한의 군사력은 세계에서 11위이고 일본은 17위이다. 하지만 PKO의 승인으로 조만간 일본이 막강한 군사력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역사상 가장 오래 계속된 전쟁은 영국과 프랑스가 1338년 - 1453년의 115년 동안 싸운 백년 전쟁이다.서서 오줌누는 여자, 대부분의 여자들은 앉아서 오줌을 누지만 100년 전 농촌에서 살았던 일본 여자들은 서서 오줌을 누었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