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첫쪽 ♧……………독서편지 T기본글꼴 기본글꼴✔ 나눔고딕✔ 맑은고딕✔ 돋움✔ ✔ 뷰어로 보기 2006.11.15 01:11 【독서편지】: 제 60 호 윤영환 조회 수 6,700 추천 수 15 댓글 0 게시물 주소복사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독서편지】: 제 60 호4339.11.15 (09.25)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이로인해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 않보이시는 분은 저의 블로그 또는 아래의 링크를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오가시며 → 자유글판 문학소식 글터 → 명언 / 격언 그 사람과 함께 어울리기를 피하는 사람들을 보고도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 / J.C. 글터 → 수필 내잠 속에 비내리는데 - 이외수 해바라기의 향수 그의 작품 앞에서 나는 가끔 미치고 싶을 때가 있다. 몽마르뜨의 울타리, 허물어진 과수원엔 사과꽃이 피고 바람과 햇빛이 움직이며 지나가는 소리... 그는 나무의 뒤틀린 표정과 약동하는 자연을 즐겨 화폭에 담았었다. 파리는 그의 고향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낯선 땅에서 늘 고향을 생각하고 있었고 그것은 숨김 없이 작품에 노출되어 화면 가득히 고향 내음이 풍기는 것이다. 변태. 확실히 변태적으로 구성된 인간이었다. 열두 살 먹은 누이동생을 사랑했고 이십 리 먼 길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달려가 만나 보아야 속이 시원했던 그를 변태라고 이름해 주고 싶다. 심지어는 자기 손으로 자기의 귀를 잘라 버리기까지 했으니까. 그의 작품을 보면 안타까운 무엇이 있다. 그것도 일종의 변태에서 오는 불완전의 완전성일는지는 몰라도 아뭏든 신경질적으로 움직여 나간 그의 터치를 가만히 살펴보고 있으면 내 신경이 그리고 근육이 모조리 그림처럼 회전하고 또는 굽이치는 것 같다. 나는 반 고호의 변태를 마치 최면술에 끌린 사람처럼 좋아한다. 그의 엉뚱하고 싱거운 첫사랑도 나는 먼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밀밭과 상나무 라는 작품을 좋아한다. 아마도 반 고호는 그것을 그리면서 어리던 날을 생각했을 것이다. 상나무가 있고 밀이 익어 가는 풍경. 하늘에는 그가 특유한 기법으로 발라 놓은 구름이 뜨고 바람이 불면 밀익는 냄새가 와락 전신에 안겨 올 것 같은, 이 그림 앞에서 나는 고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어릴 적에 쬐끄만 가시내와 사금파리를 거적에 널어 놓고 살림을 놀던 나무. 고호의 상나무에서 나는, 나는 왜 그런지 나의 고향을 읽는다. 파리에서 작품 생활로 고달픈 나날을 보내면서도 언제나 고호는 고향을 잊지 못해 했을 것이다. 그래서 광적으로 일렁이는 그의 환멸은 못 견디게 그리운 고향을 그리고 싶어 했을 것이다. 나는 파리의 복잡한 시가지나 딱딱한 건물을 그의 그림에서 아직 한번도 본 일이 없다. 많은 세월이 흐른 후 무수한 화가들의 무수한 작품들이 나온다 해도 반 고호의 작품처럼 개성적이고 절실한 느낌의 것은 나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고호는 불쌍하도록 가난했다. 그래서 그는 감자를 먹는다든가 씨를 뿌리는 마디 굵은 농촌 사람을 즐겨 그렸는데 이상한 것은 색감이 어둡고 우울하지 않다는 얘기다. 고호가 두고 온 고향엔 그의 동생이 있었는데그토록 신경질적이고 변태적인 그였지만, 형제간의 우애는 주위의 모든 사람이 부러워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두고 온 고향. 그리운 고향 사람들... 그것들은 변태 화가의 가슴 속에서 고호의 화면처럼 그렇게 뒤틀리고 몸부림쳤을까 ? 보고 싶은 고향의 모습을 파리의 교외에서 찾으려고 애썼던 외로운 화가 반 고호. 마을 사람들에게 미쳤다고 추방을 당했던 그를 나는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친것은 그가 아니고 그의 그림이었던 것이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출신지에 따라 인격이 다른 사회 - 박종기(국민대 교수) 지역에 따라 인격이 다르다고? 고려시대 사람들은 살고 있는 지역에 따라 지위에 차이가 있었다. 주, 부, 군, 현 등 군현에 거주하는 사람을 군현인이라 하였다. 그 중 농업을 전업으로 하는 양인을 법적으로 백정이라 불렀다. 이는 도살업 등 천한 직업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백정과는 크게 다르다. 또 재산이 있고 관리, 군인, 향리 등 벼슬길에 오른 사람은 정호라 하였다. 한편 향,소, 부곡, 장, 처 등 부곡제지역에 사는 사람을 흔히 부곡인이라 불렀는데, 이들을 법적으로 잡척이라고 불렀다. 이런 사람들보다 훨씬 낮은 계층을 천민이라 했는데, 국가나 관청, 개인의 부림을 받았던 노비가 대표적이다. 천민은 인격체가 아니라 하나의 물건으로 취급받았다. 고려시대 사람들은 대개 거주지인 본관의 이름을 붙여 남경사람, 처인부곡사람 등으로 불렀다. 언뜻 보기에 오늘날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 사람의 본관이 군현에 소속되었는지,부곡지역에 소속되었는지를 엄격히 따져 세금 부과여부와 관리 진출에 차별을 둔 관행이 있었다. 이는 조선시대와 다른 고려시대 특유의 사회제도였으며, 요즈음 사회통념상 어느 지역출신인가에 따라 일정한 편견을 갖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고려시대에는 이같이 지역에 따라 사람의 격이 다르고,그에 따라 부담하는 세금과 역의 내용이 달랐다. 이러한 체제는 지금 우리의 눈에는 천 년이라는 긴 세월의 간격만큼이나 생소하고 낯설게 보이지만, 이 또한 우리 역사 속에 엄연하게 존재하였다. 특히 부곡제도는 고려시대 사회체제의 특징을 보여 주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부곡인은 어떤 사람인가? 부곡지역의 사람들은 일반 군현의 농민과 같이 농업에 종사하였다. 그 중에서 향, 부곡, 장, 처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국가, 왕실과 사원의 토지를 추가로 경작하는 역을 부담하였다. 한편 소의 주민들은 금, 은, 먹, 종이, 소금 등이나 광산물, 해산물이나 각종 수고업제품을 생산하는 역을 부담하였다. 국가에서는 이들을 ‘여러 가지 특별한 역을 진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모두 잡척층이라 하였다. 정부는 부곡제라는 지방제도를 만들어, 이들이 다른 직업으로 혹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일을 제도적으로 제안했다. 출신지 거주지별로 사람들을 묶어 해당 지역 행정단위의 격을 달리하여 여러 가지의 제약을 두었던 고려시대의 지방지배 방신을 본관제라 하였다. 부곡제도는 통일신라기부터 국가각 토지경작을 위해 주민들이 산간 오지나 벽지에 들어가서 정착한 곳을 향과 부곡으로 파악하여, 군현의 하부 단위로 묶어 둔 데서 기원하였다. 이들은 소규모 촌락으로 국가나 지방세력에 예속되어 일반 군현에 비해 더한 차별을 받았다. 이러한 관행이 고려시대에는 반왕조적인 세력과 그들의 근거지를 부곡제로 묶어 일반 사람들과 차별하였다. 또한 고려시대에도 농경지 확대를 위한 개간을 정책적으로 장려하였다. 이러한 개간과정에서 형성된 촌락 역시 향과 부곡으로 파악하였다. 이들 주민에게 국가, 왕실, 사원의 토지를 경작하게 하거나,각종 수공업제품을 생산하도록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이러한 다양한 과정을 통하여 부곡지역을 제도화하였다. 우리 역사에서 고려시대까지는 강력한 지방세력이 존재하였고 군현의 경계지역에는 개발되지 않은 땅이 많았으므로 그만큼 개발의 여지가 많았다. 따라서 국가가 전국의 백성을 일률적으로 장악할 수 없을 정도로 지역간 계층간에 발전의 격차가 있었다. 부곡제는 이러한 발전격차를 메꾸어 나가는 역할을 하였던,일종의 사회적 분업체제의 하나였다. 부곡집단은 고려시태에 통틀어 900여 개나 되었다. 지역적으로 전체의 80~90퍼센트가 지금의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지역에 있었다. 군현이 500여 개였던 것에 비하면 아주 많은 수치였다. 이러한 집단은 군현에 묶여 행정적으로 지배를 받았다. 고려 전기 부곡인은 여러 가지 면에서 각종 차별을 받았다. 부곡인의 역을 확보하기 위하여 이들이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하였고,결혼도 되도록이면 부곡인끼리만 하도록 했다. 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거나 다른 직업을 선택하는 것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멀리 떨어진 지역의 둔전을 경작하기 위하여 집단적으로 징발되기도 하였다. 재상의 지위에 오른 부곡인들 역사는 흐르는 물과 같다. 물은 하나의 생명체로서 자연을 살찌우기도 하고 변화시키기도 하듯이, 인간의 역사 역시 하나의 변화하는 생명체로서 그 흐름 속에 다양한 인간군상을 만들어 내고 있다. 고려의 부곡제도도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극복하려고 했던 사람들에 의하여 변화되었다. 똑같은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났으나, 출신지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 것이 바로 천 년 전 고려시대 사람들의 처지였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 오면 모든 사람들이 적어도 출신지나 거주지 때문에 차별을 받지 않게 되었다. 부곡지역이 사라지고 천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법적 이념적으로는 평등한 대우를 받았다. 단순한 세월의 흐름이 이러한 변화를 가져다 주지는 않았다. 출신지의 제약을 벗어나려는 고려시대 사람들의 피나는 노력과 용기있는 행동이 뒷시대 사람들의 보다 나은 생활을 위한 자양분이 되었다. 고려 후기 유청신과 박구의 사례에서 주어진 제약과 굴레를 극복한 부곡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유청신은 고려가 국내외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시기인 원나라 간섭기에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의 처음 이름은 비라고 하였다. 지금의 전라남도 고흥지역인 고이부곡 사람이었다. 우리 나라 제도에는 부곡의 향리인 부곡리는 국가에 공이 있어도 관직을 5품 이상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유청신은 어릴 때부터 영리하고 용기가 있었으며, 뒤에 몽고어를 익혀 여러 번 원에 사신으로 가서 일을 잘 처리했다. 이로써 충렬왕의 사랑을 받아 낭장(6품의 벼슬)에 임명되었다. 충렬왕이 교서를 내려 말하였다. ‘유청신은 조인규를 따라 원에 가서 힘을 다하여 공을 세웠다. 유청신은 부곡인 출신이므로 5품밖에 줄 수 없으나 그에게만은 3품을 허용하겠다. 또한 그의 고향인 고이부곡을 고흥현으로 승격시키겠다’고 하였다. 부곡인은 기술직인 잡과에 응시하여 관직에 오를 수 있다고는 하지만, 관리로서 출세할 수 있는 길은 사실상 막혀 있었다. 관리가 되더라도 5품 이상으로 승진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유청신은 충렬왕의 총애를 받아 3품직인 대장군으로 승진하였다. 몽고어를 잘 한다는 능력 하나로 출세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고이부곡이 오늘날의 고흥이 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뒤에 충선왕이 다시 실권을 장악한 다음 유청신은 재상이 되었다. 충선왕은 재위기간 대부분을 원나라에 머무르며, 국내의 정치는 측근인 유청신과 최유엄에게 맡겼다. 그만큼 당시 유청신은 정치적으로 비중이 큰 입지를 점하고 있었다. 뒤에 충선왕이 실각하자 그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고려를 원의 한 지방 지방 행정단위로 편입시키자는 이른바 입성론을 제기하였다. 이 실책 때문에 조선초 역사가들은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유청신의 행적을 간신전에 기록하였다. 하지만 입성책동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의 집안은 계속해서 번성하였다. 아들 유기와 손자 탁도 모두 재상을 역임하여, 3대에 걸쳐 재상을 배출한 고려 후기의 신흥 명문가가 되었다. 탁의 아들들도 이성계에 의해 발탁되어 조선시대에도 명문가의 명맥을 이어갔다. 같은 무렵 또 한 사람의 부곡인이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박구라는 사람은 지금의 울산에 소속된 부곡인이었다. 그의 선조는 장사를 하여 상당한 재산을 모은 부자였다. 그는 재력을 바탕으로 벼슬길에 올라 충렬왕 때 무반의 최고직인 상장군(정3품)이 되었다. 일본정벌에 참여하여 군공을 세웠고, 그 뒤 출세를 거듭하여 재상이 되었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철부지 남편의 고백 사랑하는 당신에게 오늘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며 당신에게 글을 쓸 수 있어 참 좋구려. 여보, 난 말이오. 남들처럼 돈 많이 벌어 당신을 편안하게 해 주지 못하는 내가 미웠소. 당신이 그런 나의 맘을 몰라주고 내 자존심을 건드릴때면, 내가 한심하게 여겨지고 남편으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당하고 사는 것 같아 비참한 기분도 들었소. 그럴때면 야속해서 당신을 쳐다보기도 싫었다오. 하지만 아름다운 숲속에도 썩은 나무가 있듯이, 보기 싫은 건 당신의 전부가 아니라 아주 일부분이라는 걸 깨달았소. 오랜만에 당신이 파마를 하고 나타나도 눈치 못 채는 사람이면서 왜 그리도 당신한테 바라는 것은 많은 지...... 지난 봄, 내 생일날 나는 당신이 밤새워 장만한 푸짐한 생일상을 받고서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른다오. 결혼해서 십오 년동안 당신의 생일을 한번도 기억해 주지 못한 나로서는 그 자리가 마치 부조금없이 남의 잔칫상을 받은 것 마냥 부담스럽기까지 했소. 돌이켜보면 나는 당신을 원망하고 철부지처럼 심술과 투정을 부린 때가 많았소. 우리는 백발이 되어 버린 지금에서야 당신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 것 같소. 참. 생일날 선물 꾸러미와 같이 준 편지는 정말 고마웠소. 철부지 남편을 무한한 사랑으로 이끌어 준 당신의 마음을 또 한번 느꼈다오. 어느덧 늘어난 주름살을 바라보며 생각한다오. 당신과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나에게 주어진 이 하루하루가 크나큰 축복이라고...... 생각나오?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장래를 진지하게 고민하던 결혼 전 말이오. 이제부터라도 그때의 약속을 차근차근 지키고 싶소.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나를 믿고 묵묵히 따라 준 당신에게 늘 감사하오. 사랑하는 정찬 엄마, 아무리 바빠도 가까운 시일 내에 단둘이 오븟하게 가까운 곳이라도 여행 한번 다녀옵시다. 진짜로 잘해 줄 거요. 약속하오. 송상헌 님/충북 충주시 연수동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50 - 범신론과 이신론:스피노자의 신관 그때 세계에서는 1653년: 인도, 타지마할 묘 완성 1679년: 영국 버넷, "영국 종교개혁사"(--1714년) 지금은 스피노자가 주장하는 것 같은 범신론을 그대로 믿거나 따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일부 철학자들은 철학적으로 생각하다 보면 그런 사상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스피노자가 범신론을 내놓은 뒤 1세기가 지나 독일의 철학자 셸링이 그 사상을 물려받아 동일성의 철학을 수립한 것을 보면, 범신론적 사고는 어떤 면에서는 일반성을 띠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지금도 파리에 가면 유명한 관광지의 하나인 판테온이 있다. 혁명적 기여를 한 위대한 프랑스 지도자들의 묘소인 것이다. 데카르트도그 지하실에 안장되어 있고 J.J. 루소도 잠들어 있다. 나폴레옹도 프랑스를 위해 일하고 판테온에 잠드는 일생을 살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다. 물론 나폴레옹은 더 큰 무덤에 잠들어 있기는 하지만... 로마에 가도 판테온이 있다. 더 오래 된 묘소건물이다. 이 판테온(Pantheon)이라는 말은 여기 잠들어 있는 모든 사람은 신이라는 뜻과 통한다. 'Pan'은 모두를 뜻하기 때문이다. 판테이즘(Pantheism)과 통하는 전통의 내용이다. 일본인들은 신사를 짓기 좋아한다. 그 신사에는 여러 죽은 지도자들의 영을 모신다.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을 위해 죽은 모든 사람의 영을 모시는 곳이다. 역시 범신론적인 생각과 통하는 바가 있다. 영적인 존재는 신적인 존재와 통한다고 보는 다신론과도 맥을 같이하는 정신일 것 같다. 이에 비하면 유일신을 믿으며 그 인격적 신관을 견지하는 기독교의 신은 Theism으로 통한다. 그래서 같은 유신론이지만 The-ism을 믿는 기독교에서는 Pantheism은 미신적인 것이라고 비판한다.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유신론이기 때문이다. Pantheism은 철학적 대상으로서의 신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스피노자는 신에 취해서 신을 잃어버렸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믿음의 대상이 아닌 신이었기 때문이다. 범신론은 어떤 이는 만유신론이라고도 부른다. 모든 것은 신이며, 어디에나 신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또 하나의 신관, 유신론이 있을 수 있다. 이신론(Deism)이다. 주로 계몽주의 이후에 영국 철학자들이 택한 유신론이다. 그들은 신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 신이 자연의 법칙과 세계의 질서를 제공해주었다. 그래서 인간적 삶과 세계질서는 그 법칙과 질서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예배를 드린다거나 기도를 하는 일 등은 의미가 없다. 그 법칙과 질서에 따라 살면 되는 것이다. 그런 신은 인간과 어떤 인격적 관계도 갖고 있지 않다. 세계질서가 신앙의 기틀이 되는 것이다. 영국의 철학자들 가운데 무신론을 택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적지 않은 철학자들이 이신론을 주장했다. 그리고 지금도 과학을 따르는 사람들, 합리적인 이성론을 따르는 사람들 중에는 적지않은 이신론자들이 있다. 어쨌든 스피노자는 대표적인 범신론자가 되었고, 그의 철학은 종교 및 신학과도 깊은 관련을 맺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러한 신학적 관심은 언제나 유럽 사회에서 큰 문제거리다 되어왔다. 인격적인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가 들어오기 이전까지는 신에 관한 연구는 대개가 철학적인 것이었다. 죽 자기자신이 모든 존재의 원인이 되는 것을 신으로 본다는 철학적 신관이 비판 없이 받아들여졌다. 또 철학 이전의 신화시대에는 신화의 주인공들로서의 신들이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사회관념으로 무리없이 전달되었다. 그리스 인들이 연출한 연극의 내용들은 대부분이 그런 신화적인 것들이었다. 인간과 신, 자연과 신, 신들을 매개로 한 인간적 삶의 내용이 비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소크라테스가 다이모니온의 얘기를 했을 때 누구도 그것을 과학적으로 비판하거나 분석해 본 바는 없었다. 그런 철학적인 자연신관이 지배적이었을 때 기독교가 서구의 종교로 등단하면서 이 모호였던 신관에 큰 변혁이 일어났던 것이다. 심지어는 어떤 신관을 갖는가에 따라 참신앙과 이단이 구별되기도 했고, 그 신관의 차이가 철학의 본질적인 문제가 되는 중세기가 지속되기도 했던 것이다. 그것을 구별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Theism으로서의 기독교적인 신관 Pantheism으로서의 철학적 자연신관, Deism으로서의 합리적인 과학적 신관을 가려본 것이다. 그리고 이 구별은 서양철학과 신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신학이 고대로부터의 철학적 신관이라면, 기독교의 신학은 믿음의 학이라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는 구별을 내리고 있다. '신들'은 철학적이나, '신'은 신앙적인 의미를 갖기도 한다. 니체는 '신들은 이미 죽었다'고 말했던 것이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아기들이 차는 '기저귀'의 어원은 무엇일까요? 어린 아이들이 차는 기저귀를 잘 아실 것입니다. 이 단어는 도통 그 어원을 알기가 어렵다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어떤 형태소들이 모여서 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이 잘 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옛말이 오늘날에는 변화를 겪어서 그것을 알 수가 없게 되었으니까요. 이 단어는 '깆'이라는 명사에 '-어귀'라고 하는 접미사가 붙어서 된 단어입니다. '깆'은 오늘날 '깃'으로 변화를 겪었습니다. '깆'이란 '옷깃, 양복 깃'의 '깃'입니다. '저고리나 웃옷의 목에 둘러 대어 앞으로 여미는 부분'이 '깃'이지요. '기저귀'가 그 모양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지 않던가요? 물론 이것은 천으로 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어귀'는 많이 쓰이는 접미사입니다. 음성모음 뒤에는 '-어귀'가, 그리고 양성모음 뒤에서는 '-아귀'가 쓰입니다. 예컨대 '손'에는 '-아귀'가 붙어서 '손아귀'가 되었지요. 그리고 옛날에는 '기저귀'를 그냥 '깆'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천으로 된 기저귀보다는 종이로 된 기저귀를 쓰니, 세상이 많이 변하기도 했습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3장 죽음과의 악수 - 장엄한 낙조같던 송시열 선생의 죽음 우암 송시열은 선조 40년(1607) 충북 옥천군 구룡리에서 탄생하였다. 부친 수옹공이 청산아사에 있을 때, 종가 제삿날 공자가 여러 제자를 데리고 집에 온 꿈을 꾸고서 아들의 출생을 맞았다고 한다. 선생은 광해군 1년인 세 살 때에 이미 스스로 글자를 깨쳤으며, 어려서부터 늘 글읽기를 좋아하였다. 나는 와서 배우는 사람에게 남의 신하가 되어서는 불충에 빠지지 않게 하였으며, 남의 아들이 되어서는 불효에 빠지지 않게 하였으며, 윗사람과 사귐에 아첨하지 않고, 아랫사람과 사귐에 더럽지 않게 하였다. 라고 <송자대전>은 기록하고 있다. 또 나는 가례와 소학을 읽고 몸을 검속하였으며 심경과 근사록을 읽고는 의리를 알았으며, 사서오경은 평생 동안 짊어지고 다니면서 읽어서 남겨둔 대목이 없었다. 고 말했다. 팔십 평생이 오로지 독서로 일관된 생애였다. 인품은 강직하고 말씀이 적었으며 학문의 목적은 의를 구명하는데 두고, 한번 의라는 판명을 하였으면 비록 생명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행하여야 한다고 믿으며, 의롭게 순국한 분들을 일일이 추모하고 저술로 남겨둘 것을 잊지 않았다. 삼학사의 전기를 저술하고, 충신과 공신의 자손을 모두 찾아내어 보살피게 함으로써 그 영혼을 위로하고 절의정신을 고취하였다. 숙종의 비 민중전을 위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직간을 하였다. 낳은 지 겨우 몇 달밖에 안되는 장희빈의 아들을 숙종이 원자로 봉하려 하자 선생은 민비 아직 젊으시니 뒷날을 기다려 봐야 한다 는 상소를 올렸다. 이것이 임금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제주도에 위리 안치된다. 민비가 폐출되자, 선생을 불러다가 국문하라는 어명이 떨어졌다. 제주도를 출발하여 정읍에 이른 것은 6월 8일, 진시에 현재의 위치에서 사약을 받으라는 명령이 내려온다. 고령의 나이로 선생의 병세가 이미 깊어지자 국문하기 전에 운명할 것을 염려한 일당들이 속히 사사할 것을 숙종에게 주청했기 때문이다. 선생은 글을 지어 여주에 있는 효종의 능을 향해 4배를 드리고 하세의 인사를 하였다. 자손에게 훈계하는 글을 짓고 자신을 따르던 문인들을 행해 마지막 말을 남긴다. 나는 항상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신념으로 살았으며 올해 내 나이 80을 넘었는데도, 마침내 도를 들은 바 없이 죽으니 이것이 나의 유한이다. 이러한 시대는 사는 것이 죽는 것만도 못한 세상이니 나는 곧 웃음을 머금고 땅 속으로 들어갈 터이니 이 뒤로는 오직 그대들이 도를 이루기를 바라노라. 그리고 학문은 마땅히 주자를 주체로 하고 사업은 효종이 하고자 한 뜻을 주장해야 한다. 청나라에 대한 분통함을 참고 원통한 마음을 항상 간직하고 어떠한 곤궁한 일이 있더라도 잊어서는 안된다는 인통함원박부득기의 여덟글자를 가슴속에 간직하여 동지들에게 전수해서 복수하고 설치할 날 까지 잊어버리지 말라고 당부한다. 기력이 엄엄하여 눈을 감고 있다고 겨우 뜨면서 지금 시각이 어떻게 되었느냐? 하더니 시각이 다 되었으니 약을 들이도록 하여라. 약이 늦으면 그 전에 죽을지 모른다. 고 하면서 약을 재촉하였다. 약이 들어오자 옷을 몸에 걸쳐 달라는 시늉을 하였다. 최소한의 예모를 갖추고 수명하려는 것이었다. 어명을 받들어 약을 든다. 때의 춘추 83세요, 휘일은 6월 3일, 기록에 보면 전야에는 큰 별이 떨어지고 흰 무지개가 청사의 지붕에 걸쳐졌다고 한다. 자신의 과오가 없었음에도 이들은 부당하게 내려진 사약의 잔을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태연히 재촉해서 받아 마셨다. 대인의 풍모답게 죽음에 있어 모면하려 들지 않았던 점이 존경스럽다. 태연자약하게 독배의 잔을 기울이는 장엄한 모습을 누군가 서산에 넘어가는 붉은 해 같다 고 말하였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14. 당고조, 당태종은 중국 사람이 아니었다 사실 중국의 역사는 한족과 이민족이 반반씩 이뤄 놓은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민족에게 수백 년간 정권을 빼앗겼을 뿐 아니라 역사상 유명한 인물 중에도 한족이 아닌 사람들이 숱하다. 그 예를 하나 보자. 5,6세기 중국은 선비, 흉노, 저, 갈, 강족 등 5개의 이민족의 16개의 나라를 세우며 명멸해 간 이른바 5호 16국의 혼란기였다. 오랜 기간 섞여 살게 되자 이민족과 한족은 문화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호한 체제`라는 독특한 정치, 문화 양식을 발전시켜 갔다. 게다가 통혼이 성행함에 따라 광범한 혼혈이 이루어져 한족인지 이민족인지 구별하기 어려워졌다. 양자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족의 동진 정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영향력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오랜 분열을 극복하고 화북을 통일한 선비족의 북위 정권이 지나치게 한화정책을 추진하자 북방 요새인 6진의 군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뒷날 수당 통일제국을 형성하는 중추 집단인 이들은 애초에 한화정책을 반대하고 선비족의 고유성을 지킬 것을 목적으로 거병했다. 이 때부터 중국은 다시 수당 통일제국을 향한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되었다. 6진 가운데 하나인 무천진의 군벌 세력들은 북위를 멸망시키고 서위, 북주의 정권을 독점하면서 배타적인 기득권 세력을 형성했다. 이 군벌 집단은 선비족인 북위 정권이 지나치게 한화정책을 취하는 데 반발해서 난을 일으킨 만큼 중국식으로 바뀌었던 성을 다시 선비족 원래의 성으로 되돌리는 등 강한 호족 성향을 띠었다. 이 무천진 군벌에 속하는 인물들이 바로 수나라를 일으킨 양견(수문제)와 당나라를 세운 이연(당고조)의 할아버지 이호 등이었다. 이씨 집안은 원래 대야씨라는 성을 가진 호족 집안이었다고 한다. 한화정책을 강하게 추진하던 북위 효문제 때 이씨로 성을 고쳤다가 무천진 군벌의 우두머리인 우문태로부터 대야씨를 하사받았다. 중국인이 자랑하는 수당제국의 황제들이 `오랑캐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수,당나라는 호족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다. 이들이 고구려를 온 힘을 쏟아 침략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때마다 수양제, 당태종(이세민), 당고종은 수도에 남아 있지 않고 직접 전장에 나와 전투를 지휘했다. 황제가 친히 전투를 지휘한다는 것은 전통적인 중국의 관념에서 볼 때 대단히 드문 일로 유목민들인 호족의 관습에 따른 것이다. 당태종은 중국식 군주 칭호인 천자라고만 불리는 것보다 유목민의 군대를 가리키는 칸을 덧붙인 천가한이라고 불리길 좋아했다. 당고종이 자기 아버지인 당태종의 후궁이었던 무조(측천무후)를 자신의 황후로 삼은 것이라든지 현종이 자기 아들의 비였던 양옥환(양귀비)를 귀비로 맞은 것 등은 중국적인 관습이 지배하는 사회였다면 있을 수 없는 불륜이었다. 그러나 이는 북방 유목민들 사이에서는 극히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관습이었다. 또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황제인 측천무후가 당나라 때에 나왔다는 것도 여권을 종중하는 유목민의 전통이 당에 강한 영향력을 미쳤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당이라는 제국의 국제성이야말로 가장 비중국적인 것이다. 이는 유목민의 개방성에 연유한 것이다. 당의 수도 장안은 서역과 동아시아 각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각기 제 나라의 풍속과 습관을 지닌 채 살고 있어서 마치 세계의 인종 전시장 같았다. 신라의 최치원도 그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종교도 페르시아의 마니 교, 유럽의 데스토리우스 교 등이 아무런 규제 없이 수입되었다. 이도 유목민의 뿌리 깊은 종교적 개방성에서 비롯된 문화 현상이었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3. 미국은 대만문제에 간섭 지 마라 부록 - 무슨 이우로 대만을 지지 하는가.. 중국은 대만 북부와 남부 해역에서 유도탄의 보강된 성능을 또 시험하기 시작했다. 작년 여름 대만총통 리떵후이의 방미에 항의하기 위해 첫번째 유도탄 시험을 시작한 이후 중 미 관계는 점점 악화되었다. 대만은 근 반세기 동안 미국과 중국의 관계를 긴장시키는 주요한 원인이 되어 왔다. 최근에는 대만의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이 창궐하고 있으나역사적으로나 국제법상으로는 대만독립을 지지할 어떠한 근거도 찾아볼수 없다. 고산족(高山族)이나 산지인(山地人)으로 불리는 토착민을 제외한다면 대만은 15, 16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역사서에 등장한다. 당시 대만은 해적들과 중국, 일본,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지에서 온 상인들의 근거지였었다. 17세기 중엽 명조의 마지막 군인이며 모험가였던 쩡청꽁(鄕成功)이 대만으로 건너 와 당시 대만에 주둔하고 있던 네덜란드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대만을 점령하여 통치권을 확립했었다. 1688년 청조가 수립되자 대만을 공격하여 쩡청꽁의 후예들을 축출하고 청나라에 병합시켰다. 이후 200년 간 복건성으로 귀속되어 있었다. 18, 19세기에 대륙의 복건성이나 광동성으로부터 많은 중국인이 이주해 와 정착하게 되는데 이들의 후대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대만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은 복건성이나 광동성에 살았던 그들의 조상과 민족, 언어, 문화면에서 다른 점이 거의 없다. 현대사에서 대만은 1894년부터 1895년 사이에 발생한 전쟁으로 큰 변화를 겪는다. 당시 일본은 부패한 청나라 정권을 침략한 후 대만과 펑후(澤湖)열도를 그들의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이후 대만은 반세기 가까이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2차대전의 종전으로 비로소 일본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1945년 일본이 패배한 후 대만은 중국에 반환되었고 미국을 포함한 모든 나라는 대만을 중국의 일부라고 인정하였다. 당시 많은 대만인들 역시이를 받아들였다. 1950년 6월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대만의 국민당 통치는 짧게 끝나버렸을 것이다. 한국전쟁으로 국민당의 장지에쓰 정부는미국의 제7함대에 의존하게 되었고, 대만은 사실상 미국의 보호지역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미국이 군사적, 경제적 지지를 국민당 정부에 보낸 것은 결코 민주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50, 60년대에 장지에쓰가 이끄는 정부는 대만에서 전권을 휘두른 전체주의 정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당은 이제껏 국민당이 대만의 통치자라고 하지 않고 중국의 합법적정부라고 주장해 왔다. 이런 주장이 대만으로 퇴각한 그들이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였을 것이다. 1972년 '중 . 미 합동성명'에서 대만문제는 중국 내부의 문제임을 천명하고 미군은 대만에서 철수하려 하였다. 이와 같이 대만의 역사에서는 대만독립을 지지할 어떤 근거도 찾아볼 수 없다. 중국이 서태평양에서 끊임없이 군사력을 보강하고 있고 대만과 대륙은 모두 강한 민족주의 정서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대만이 독립될 희망은 거의 없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대만이 가진 세기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이 인정되어 대중화(大中華)의 틀 안에서 선진적인 정치 및 경제자치를 실현하는 상황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계획 역시 중국의 각 당파가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일 뿐이며 만약 미국 정부가 현실적인 국가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국내 당파싸움에 이용할 목적으로 중국 내정에 개입한다면 대만의 진정한 자치 가능성조차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송이 할머니의 죽음 송이는 여고생이 되자 자기만의 방을 하나 갖고 싶었다. 지금까지는 남동생 훈이와 한방을 써 왔으나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엄마, 내 방 하나 마련해 주세요." 송이는 틈만 나면 엄마를 졸랐다. "나도 다 컸단 말이에요. 여동생이라면 또 모를까, 남동생하고 같은 방을 쓰는 애들은 아무도 없어요." "그래, 네 말이 맞긴 맞다. 이제 너도 다 컸는데, 남동생하고 같은 방을 쓸 수는 없지. 그렇지만 송이야, 지금 당장 어떡하니? 좀 기다려 봐. 이건 돈이 많이 드는 일이야." 송이 엄마는 송이 말대로 방을 하나 마련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서울 강남 땅에서 방 하나가 더 있는 40 평짜리 아파트로 이사하려면 적어도 수천만 원 돈이 더 필요해서 당장 어떻게 해줄 수가 없었다 송이는 참고 기다려 보라는 엄마의 말을 믿고 엄마가 어떤 조치를 취해 줄 것을 고대했다. 그러나 한 학기가 지나도록 엄마는 아무런 조치를 취해 주지 않았다. 송이는 엄마한테 말했다. "엄마, 친구들은 다들 자기 방이 있어요. 우리 이 집 팔고 분당으로 이사가요. 분당엔 집 값이 강남보다 싸잖아요? 나 분당에서 학교 다녀도 돼요." "아니야, 살아도 강남에서 살아야지, 경기도 땅엔 왜 가니? 좀더 기다려 봐." "그 동안 많이 기다렸잖아요?" "글쎄, 좀더 기다려 보라니까!" 송이는 자기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엄마가 섭섭했으나 하는 수 없었다. 그 뒤 새학기가 시작된 어느 가을날이었다. 독서실에서 밤늦게 공부하고 돌아온 송이는 다시 엄마한테 방을 마련해 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송이 엄마가 획 신경질을 내면서 말했다. "할머니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그 방을 네가 쓰면 되잖아?" 다음날 밤이었다. 일흔이 넘은 송이 할머니가 그만 극약을 먹고 돌아가셨다. 송이 할머니가 송이 엄마의 말을 들은 것이다. 글터 → 이글저글 보름달이 활짝 빛나는 밤에는 범죄가 늘어난다고 한다. 살인, 절도, 무장강도, 주거침입, 강간 등의 범죄는 통계적으로 볼때 보름달이 환하게 떠올라 있을때 잘 일어난다고 한다.김일성이 덮는 이불은 참새 턱밑 잔털만으로 만든 것으로, 700,000마리 분의 참새 털이 소모되었다.링컨 대통령 암살범 윌커스 부스, 거필도 대통령 암살범 찰스 J.기토, 맥킨리 대통령 암살범 리온 체코르, 루즈벨트 대통령 저격범 존 슈랭크 등은 모두 카톨릭 신자들이었다.스탈린은 독일과의 포로 교환에 대한 제안을 거절하여 아들 제이콥이 독일 포로 수용소에서 죽게 만들었다.레닌은 시베리아에 유형간 죄수였는데, 마찬가지로 혁명운동을 하다 유형당한 여자 죄수와 결혼했다.파터 대제는 아내의 애인을 처형하여 그 목을 알콜이 담긴 항아리에 넣어 아내의 방에 두었다.호지명은 유명한 런던 칼톤 호텔에서 버스보이로 시작, 접시닦이, 요리사가 되었다가 주방장으로 승진하여 일한 적이있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15 추천 0 비추천 목록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댓글 쓰기 에디터 선택하기 ✔ 텍스트 모드 ✔ 에디터 모드 ?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독서편지 List Zine Gallery FirstThumb 제1388호 - 2024.11.08. 금요일(음력 : 10.08.) Date2024.11.08 風文 Views409 Read More 제1387호 - 2024.11.06. 수요일(음력 : 10.06.) Date2024.11.06 風文 Views345 Read More 제1386호 - 2024.11.04. 월요일(음력 : 10.04.) Date2024.11.04 風文 Views371 Read More 제1385호 - 2024.11.02. 토요일(음력 : 10.02.) Date2024.11.02 風文 Views381 Read More 제1384호 - 2024.10.28. 월요일(음력 : 9.26.) Date2024.10.28 風文 Views338 Read More 제1383호 - 2024.10.25. 금요일(음력 : 9.23.) Date2024.10.25 風文 Views544 Read More 제1382호 - 2024.10.24. 목요일(음력 : 9.22.) Date2024.10.24 風文 Views320 Read More 제1381호 - 2024.10.23. 수요일(음력 : 9.21.) Date2024.10.23 風文 Views933 Read More 제1380호 - 2024.10.22. 화요일(음력 : 9.20.) Date2024.10.22 風文 Views798 Read More 제1379호 - 2024.10.21. 월요일(음력 : 9.19.) Date2024.10.21 風文 Views790 Read More 제1378호 - 2024.10.18. 금요일(음력 : 9.16.) Date2024.10.18 風文 Views802 Read More 제1377호 - 2024.10.17. 목요일(음력 : 9.15.) Date2024.10.17 風文 Views509 Read More 제1376호 - 2024.10.16. 수요일(음력 : 9.14.) Date2024.10.16 風文 Views500 Read More 제1375호 - 2024.10.15. 화요일(음력 : 9.13.) Date2024.10.15 風文 Views605 Read More 제1374호 - 2024.10.14. 월요일(음력 : 9.12.) Date2024.10.14 風文 Views403 Read More 제1373호 - 2024.10.13. 일요일(음력 : 9.11.) Date2024.10.13 風文 Views426 Read More 제1372호 - 2024.10.11. 금요일(음력 : 9.09.) Date2024.10.12 風文 Views452 Read More 제1371호 - 2024.10.10. 목요일(음력 : 9.08.) Date2024.10.10 風文 Views401 Read More 제1370호 - 2024.10.09. 수요일(음력 : 9.07.) Date2024.10.09 風文 Views348 Read More 제1369호 - 2024.10.08. 화요일(음력 : 9.06.) Date2024.10.08 風文 Views337 Read More 제1368호 - 2024.10.07. 월요일(음력 : 9.05.) Date2024.10.07 風文 Views299 Read More 제1367호 - 2024.10.06. 일요일(음력 : 9.04.) Date2024.10.06 風文 Views364 Read More 목록 Search 검색 제목+내용제목내용댓글닉네임태그 전체검색 제목+내용+댓글 확장 변수 쓰기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64 Next / 64 GO
【독서편지】: 제 60 호4339.11.15 (09.25)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이로인해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 않보이시는 분은 저의 블로그 또는 아래의 링크를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오가시며 → 자유글판 문학소식 글터 → 명언 / 격언 그 사람과 함께 어울리기를 피하는 사람들을 보고도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 / J.C. 글터 → 수필 내잠 속에 비내리는데 - 이외수 해바라기의 향수 그의 작품 앞에서 나는 가끔 미치고 싶을 때가 있다. 몽마르뜨의 울타리, 허물어진 과수원엔 사과꽃이 피고 바람과 햇빛이 움직이며 지나가는 소리... 그는 나무의 뒤틀린 표정과 약동하는 자연을 즐겨 화폭에 담았었다. 파리는 그의 고향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낯선 땅에서 늘 고향을 생각하고 있었고 그것은 숨김 없이 작품에 노출되어 화면 가득히 고향 내음이 풍기는 것이다. 변태. 확실히 변태적으로 구성된 인간이었다. 열두 살 먹은 누이동생을 사랑했고 이십 리 먼 길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달려가 만나 보아야 속이 시원했던 그를 변태라고 이름해 주고 싶다. 심지어는 자기 손으로 자기의 귀를 잘라 버리기까지 했으니까. 그의 작품을 보면 안타까운 무엇이 있다. 그것도 일종의 변태에서 오는 불완전의 완전성일는지는 몰라도 아뭏든 신경질적으로 움직여 나간 그의 터치를 가만히 살펴보고 있으면 내 신경이 그리고 근육이 모조리 그림처럼 회전하고 또는 굽이치는 것 같다. 나는 반 고호의 변태를 마치 최면술에 끌린 사람처럼 좋아한다. 그의 엉뚱하고 싱거운 첫사랑도 나는 먼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밀밭과 상나무 라는 작품을 좋아한다. 아마도 반 고호는 그것을 그리면서 어리던 날을 생각했을 것이다. 상나무가 있고 밀이 익어 가는 풍경. 하늘에는 그가 특유한 기법으로 발라 놓은 구름이 뜨고 바람이 불면 밀익는 냄새가 와락 전신에 안겨 올 것 같은, 이 그림 앞에서 나는 고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어릴 적에 쬐끄만 가시내와 사금파리를 거적에 널어 놓고 살림을 놀던 나무. 고호의 상나무에서 나는, 나는 왜 그런지 나의 고향을 읽는다. 파리에서 작품 생활로 고달픈 나날을 보내면서도 언제나 고호는 고향을 잊지 못해 했을 것이다. 그래서 광적으로 일렁이는 그의 환멸은 못 견디게 그리운 고향을 그리고 싶어 했을 것이다. 나는 파리의 복잡한 시가지나 딱딱한 건물을 그의 그림에서 아직 한번도 본 일이 없다. 많은 세월이 흐른 후 무수한 화가들의 무수한 작품들이 나온다 해도 반 고호의 작품처럼 개성적이고 절실한 느낌의 것은 나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고호는 불쌍하도록 가난했다. 그래서 그는 감자를 먹는다든가 씨를 뿌리는 마디 굵은 농촌 사람을 즐겨 그렸는데 이상한 것은 색감이 어둡고 우울하지 않다는 얘기다. 고호가 두고 온 고향엔 그의 동생이 있었는데그토록 신경질적이고 변태적인 그였지만, 형제간의 우애는 주위의 모든 사람이 부러워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두고 온 고향. 그리운 고향 사람들... 그것들은 변태 화가의 가슴 속에서 고호의 화면처럼 그렇게 뒤틀리고 몸부림쳤을까 ? 보고 싶은 고향의 모습을 파리의 교외에서 찾으려고 애썼던 외로운 화가 반 고호. 마을 사람들에게 미쳤다고 추방을 당했던 그를 나는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친것은 그가 아니고 그의 그림이었던 것이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출신지에 따라 인격이 다른 사회 - 박종기(국민대 교수) 지역에 따라 인격이 다르다고? 고려시대 사람들은 살고 있는 지역에 따라 지위에 차이가 있었다. 주, 부, 군, 현 등 군현에 거주하는 사람을 군현인이라 하였다. 그 중 농업을 전업으로 하는 양인을 법적으로 백정이라 불렀다. 이는 도살업 등 천한 직업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백정과는 크게 다르다. 또 재산이 있고 관리, 군인, 향리 등 벼슬길에 오른 사람은 정호라 하였다. 한편 향,소, 부곡, 장, 처 등 부곡제지역에 사는 사람을 흔히 부곡인이라 불렀는데, 이들을 법적으로 잡척이라고 불렀다. 이런 사람들보다 훨씬 낮은 계층을 천민이라 했는데, 국가나 관청, 개인의 부림을 받았던 노비가 대표적이다. 천민은 인격체가 아니라 하나의 물건으로 취급받았다. 고려시대 사람들은 대개 거주지인 본관의 이름을 붙여 남경사람, 처인부곡사람 등으로 불렀다. 언뜻 보기에 오늘날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 사람의 본관이 군현에 소속되었는지,부곡지역에 소속되었는지를 엄격히 따져 세금 부과여부와 관리 진출에 차별을 둔 관행이 있었다. 이는 조선시대와 다른 고려시대 특유의 사회제도였으며, 요즈음 사회통념상 어느 지역출신인가에 따라 일정한 편견을 갖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고려시대에는 이같이 지역에 따라 사람의 격이 다르고,그에 따라 부담하는 세금과 역의 내용이 달랐다. 이러한 체제는 지금 우리의 눈에는 천 년이라는 긴 세월의 간격만큼이나 생소하고 낯설게 보이지만, 이 또한 우리 역사 속에 엄연하게 존재하였다. 특히 부곡제도는 고려시대 사회체제의 특징을 보여 주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부곡인은 어떤 사람인가? 부곡지역의 사람들은 일반 군현의 농민과 같이 농업에 종사하였다. 그 중에서 향, 부곡, 장, 처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국가, 왕실과 사원의 토지를 추가로 경작하는 역을 부담하였다. 한편 소의 주민들은 금, 은, 먹, 종이, 소금 등이나 광산물, 해산물이나 각종 수고업제품을 생산하는 역을 부담하였다. 국가에서는 이들을 ‘여러 가지 특별한 역을 진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모두 잡척층이라 하였다. 정부는 부곡제라는 지방제도를 만들어, 이들이 다른 직업으로 혹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일을 제도적으로 제안했다. 출신지 거주지별로 사람들을 묶어 해당 지역 행정단위의 격을 달리하여 여러 가지의 제약을 두었던 고려시대의 지방지배 방신을 본관제라 하였다. 부곡제도는 통일신라기부터 국가각 토지경작을 위해 주민들이 산간 오지나 벽지에 들어가서 정착한 곳을 향과 부곡으로 파악하여, 군현의 하부 단위로 묶어 둔 데서 기원하였다. 이들은 소규모 촌락으로 국가나 지방세력에 예속되어 일반 군현에 비해 더한 차별을 받았다. 이러한 관행이 고려시대에는 반왕조적인 세력과 그들의 근거지를 부곡제로 묶어 일반 사람들과 차별하였다. 또한 고려시대에도 농경지 확대를 위한 개간을 정책적으로 장려하였다. 이러한 개간과정에서 형성된 촌락 역시 향과 부곡으로 파악하였다. 이들 주민에게 국가, 왕실, 사원의 토지를 경작하게 하거나,각종 수공업제품을 생산하도록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이러한 다양한 과정을 통하여 부곡지역을 제도화하였다. 우리 역사에서 고려시대까지는 강력한 지방세력이 존재하였고 군현의 경계지역에는 개발되지 않은 땅이 많았으므로 그만큼 개발의 여지가 많았다. 따라서 국가가 전국의 백성을 일률적으로 장악할 수 없을 정도로 지역간 계층간에 발전의 격차가 있었다. 부곡제는 이러한 발전격차를 메꾸어 나가는 역할을 하였던,일종의 사회적 분업체제의 하나였다. 부곡집단은 고려시태에 통틀어 900여 개나 되었다. 지역적으로 전체의 80~90퍼센트가 지금의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지역에 있었다. 군현이 500여 개였던 것에 비하면 아주 많은 수치였다. 이러한 집단은 군현에 묶여 행정적으로 지배를 받았다. 고려 전기 부곡인은 여러 가지 면에서 각종 차별을 받았다. 부곡인의 역을 확보하기 위하여 이들이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하였고,결혼도 되도록이면 부곡인끼리만 하도록 했다. 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거나 다른 직업을 선택하는 것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멀리 떨어진 지역의 둔전을 경작하기 위하여 집단적으로 징발되기도 하였다. 재상의 지위에 오른 부곡인들 역사는 흐르는 물과 같다. 물은 하나의 생명체로서 자연을 살찌우기도 하고 변화시키기도 하듯이, 인간의 역사 역시 하나의 변화하는 생명체로서 그 흐름 속에 다양한 인간군상을 만들어 내고 있다. 고려의 부곡제도도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극복하려고 했던 사람들에 의하여 변화되었다. 똑같은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났으나, 출신지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 것이 바로 천 년 전 고려시대 사람들의 처지였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 오면 모든 사람들이 적어도 출신지나 거주지 때문에 차별을 받지 않게 되었다. 부곡지역이 사라지고 천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법적 이념적으로는 평등한 대우를 받았다. 단순한 세월의 흐름이 이러한 변화를 가져다 주지는 않았다. 출신지의 제약을 벗어나려는 고려시대 사람들의 피나는 노력과 용기있는 행동이 뒷시대 사람들의 보다 나은 생활을 위한 자양분이 되었다. 고려 후기 유청신과 박구의 사례에서 주어진 제약과 굴레를 극복한 부곡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유청신은 고려가 국내외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시기인 원나라 간섭기에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의 처음 이름은 비라고 하였다. 지금의 전라남도 고흥지역인 고이부곡 사람이었다. 우리 나라 제도에는 부곡의 향리인 부곡리는 국가에 공이 있어도 관직을 5품 이상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유청신은 어릴 때부터 영리하고 용기가 있었으며, 뒤에 몽고어를 익혀 여러 번 원에 사신으로 가서 일을 잘 처리했다. 이로써 충렬왕의 사랑을 받아 낭장(6품의 벼슬)에 임명되었다. 충렬왕이 교서를 내려 말하였다. ‘유청신은 조인규를 따라 원에 가서 힘을 다하여 공을 세웠다. 유청신은 부곡인 출신이므로 5품밖에 줄 수 없으나 그에게만은 3품을 허용하겠다. 또한 그의 고향인 고이부곡을 고흥현으로 승격시키겠다’고 하였다. 부곡인은 기술직인 잡과에 응시하여 관직에 오를 수 있다고는 하지만, 관리로서 출세할 수 있는 길은 사실상 막혀 있었다. 관리가 되더라도 5품 이상으로 승진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유청신은 충렬왕의 총애를 받아 3품직인 대장군으로 승진하였다. 몽고어를 잘 한다는 능력 하나로 출세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고이부곡이 오늘날의 고흥이 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뒤에 충선왕이 다시 실권을 장악한 다음 유청신은 재상이 되었다. 충선왕은 재위기간 대부분을 원나라에 머무르며, 국내의 정치는 측근인 유청신과 최유엄에게 맡겼다. 그만큼 당시 유청신은 정치적으로 비중이 큰 입지를 점하고 있었다. 뒤에 충선왕이 실각하자 그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고려를 원의 한 지방 지방 행정단위로 편입시키자는 이른바 입성론을 제기하였다. 이 실책 때문에 조선초 역사가들은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유청신의 행적을 간신전에 기록하였다. 하지만 입성책동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의 집안은 계속해서 번성하였다. 아들 유기와 손자 탁도 모두 재상을 역임하여, 3대에 걸쳐 재상을 배출한 고려 후기의 신흥 명문가가 되었다. 탁의 아들들도 이성계에 의해 발탁되어 조선시대에도 명문가의 명맥을 이어갔다. 같은 무렵 또 한 사람의 부곡인이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박구라는 사람은 지금의 울산에 소속된 부곡인이었다. 그의 선조는 장사를 하여 상당한 재산을 모은 부자였다. 그는 재력을 바탕으로 벼슬길에 올라 충렬왕 때 무반의 최고직인 상장군(정3품)이 되었다. 일본정벌에 참여하여 군공을 세웠고, 그 뒤 출세를 거듭하여 재상이 되었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철부지 남편의 고백 사랑하는 당신에게 오늘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며 당신에게 글을 쓸 수 있어 참 좋구려. 여보, 난 말이오. 남들처럼 돈 많이 벌어 당신을 편안하게 해 주지 못하는 내가 미웠소. 당신이 그런 나의 맘을 몰라주고 내 자존심을 건드릴때면, 내가 한심하게 여겨지고 남편으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당하고 사는 것 같아 비참한 기분도 들었소. 그럴때면 야속해서 당신을 쳐다보기도 싫었다오. 하지만 아름다운 숲속에도 썩은 나무가 있듯이, 보기 싫은 건 당신의 전부가 아니라 아주 일부분이라는 걸 깨달았소. 오랜만에 당신이 파마를 하고 나타나도 눈치 못 채는 사람이면서 왜 그리도 당신한테 바라는 것은 많은 지...... 지난 봄, 내 생일날 나는 당신이 밤새워 장만한 푸짐한 생일상을 받고서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른다오. 결혼해서 십오 년동안 당신의 생일을 한번도 기억해 주지 못한 나로서는 그 자리가 마치 부조금없이 남의 잔칫상을 받은 것 마냥 부담스럽기까지 했소. 돌이켜보면 나는 당신을 원망하고 철부지처럼 심술과 투정을 부린 때가 많았소. 우리는 백발이 되어 버린 지금에서야 당신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 것 같소. 참. 생일날 선물 꾸러미와 같이 준 편지는 정말 고마웠소. 철부지 남편을 무한한 사랑으로 이끌어 준 당신의 마음을 또 한번 느꼈다오. 어느덧 늘어난 주름살을 바라보며 생각한다오. 당신과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나에게 주어진 이 하루하루가 크나큰 축복이라고...... 생각나오?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장래를 진지하게 고민하던 결혼 전 말이오. 이제부터라도 그때의 약속을 차근차근 지키고 싶소.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나를 믿고 묵묵히 따라 준 당신에게 늘 감사하오. 사랑하는 정찬 엄마, 아무리 바빠도 가까운 시일 내에 단둘이 오븟하게 가까운 곳이라도 여행 한번 다녀옵시다. 진짜로 잘해 줄 거요. 약속하오. 송상헌 님/충북 충주시 연수동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50 - 범신론과 이신론:스피노자의 신관 그때 세계에서는 1653년: 인도, 타지마할 묘 완성 1679년: 영국 버넷, "영국 종교개혁사"(--1714년) 지금은 스피노자가 주장하는 것 같은 범신론을 그대로 믿거나 따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일부 철학자들은 철학적으로 생각하다 보면 그런 사상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스피노자가 범신론을 내놓은 뒤 1세기가 지나 독일의 철학자 셸링이 그 사상을 물려받아 동일성의 철학을 수립한 것을 보면, 범신론적 사고는 어떤 면에서는 일반성을 띠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지금도 파리에 가면 유명한 관광지의 하나인 판테온이 있다. 혁명적 기여를 한 위대한 프랑스 지도자들의 묘소인 것이다. 데카르트도그 지하실에 안장되어 있고 J.J. 루소도 잠들어 있다. 나폴레옹도 프랑스를 위해 일하고 판테온에 잠드는 일생을 살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다. 물론 나폴레옹은 더 큰 무덤에 잠들어 있기는 하지만... 로마에 가도 판테온이 있다. 더 오래 된 묘소건물이다. 이 판테온(Pantheon)이라는 말은 여기 잠들어 있는 모든 사람은 신이라는 뜻과 통한다. 'Pan'은 모두를 뜻하기 때문이다. 판테이즘(Pantheism)과 통하는 전통의 내용이다. 일본인들은 신사를 짓기 좋아한다. 그 신사에는 여러 죽은 지도자들의 영을 모신다.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을 위해 죽은 모든 사람의 영을 모시는 곳이다. 역시 범신론적인 생각과 통하는 바가 있다. 영적인 존재는 신적인 존재와 통한다고 보는 다신론과도 맥을 같이하는 정신일 것 같다. 이에 비하면 유일신을 믿으며 그 인격적 신관을 견지하는 기독교의 신은 Theism으로 통한다. 그래서 같은 유신론이지만 The-ism을 믿는 기독교에서는 Pantheism은 미신적인 것이라고 비판한다.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유신론이기 때문이다. Pantheism은 철학적 대상으로서의 신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스피노자는 신에 취해서 신을 잃어버렸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믿음의 대상이 아닌 신이었기 때문이다. 범신론은 어떤 이는 만유신론이라고도 부른다. 모든 것은 신이며, 어디에나 신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또 하나의 신관, 유신론이 있을 수 있다. 이신론(Deism)이다. 주로 계몽주의 이후에 영국 철학자들이 택한 유신론이다. 그들은 신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 신이 자연의 법칙과 세계의 질서를 제공해주었다. 그래서 인간적 삶과 세계질서는 그 법칙과 질서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예배를 드린다거나 기도를 하는 일 등은 의미가 없다. 그 법칙과 질서에 따라 살면 되는 것이다. 그런 신은 인간과 어떤 인격적 관계도 갖고 있지 않다. 세계질서가 신앙의 기틀이 되는 것이다. 영국의 철학자들 가운데 무신론을 택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적지 않은 철학자들이 이신론을 주장했다. 그리고 지금도 과학을 따르는 사람들, 합리적인 이성론을 따르는 사람들 중에는 적지않은 이신론자들이 있다. 어쨌든 스피노자는 대표적인 범신론자가 되었고, 그의 철학은 종교 및 신학과도 깊은 관련을 맺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러한 신학적 관심은 언제나 유럽 사회에서 큰 문제거리다 되어왔다. 인격적인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가 들어오기 이전까지는 신에 관한 연구는 대개가 철학적인 것이었다. 죽 자기자신이 모든 존재의 원인이 되는 것을 신으로 본다는 철학적 신관이 비판 없이 받아들여졌다. 또 철학 이전의 신화시대에는 신화의 주인공들로서의 신들이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사회관념으로 무리없이 전달되었다. 그리스 인들이 연출한 연극의 내용들은 대부분이 그런 신화적인 것들이었다. 인간과 신, 자연과 신, 신들을 매개로 한 인간적 삶의 내용이 비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소크라테스가 다이모니온의 얘기를 했을 때 누구도 그것을 과학적으로 비판하거나 분석해 본 바는 없었다. 그런 철학적인 자연신관이 지배적이었을 때 기독교가 서구의 종교로 등단하면서 이 모호였던 신관에 큰 변혁이 일어났던 것이다. 심지어는 어떤 신관을 갖는가에 따라 참신앙과 이단이 구별되기도 했고, 그 신관의 차이가 철학의 본질적인 문제가 되는 중세기가 지속되기도 했던 것이다. 그것을 구별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Theism으로서의 기독교적인 신관 Pantheism으로서의 철학적 자연신관, Deism으로서의 합리적인 과학적 신관을 가려본 것이다. 그리고 이 구별은 서양철학과 신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신학이 고대로부터의 철학적 신관이라면, 기독교의 신학은 믿음의 학이라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는 구별을 내리고 있다. '신들'은 철학적이나, '신'은 신앙적인 의미를 갖기도 한다. 니체는 '신들은 이미 죽었다'고 말했던 것이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아기들이 차는 '기저귀'의 어원은 무엇일까요? 어린 아이들이 차는 기저귀를 잘 아실 것입니다. 이 단어는 도통 그 어원을 알기가 어렵다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어떤 형태소들이 모여서 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이 잘 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옛말이 오늘날에는 변화를 겪어서 그것을 알 수가 없게 되었으니까요. 이 단어는 '깆'이라는 명사에 '-어귀'라고 하는 접미사가 붙어서 된 단어입니다. '깆'은 오늘날 '깃'으로 변화를 겪었습니다. '깆'이란 '옷깃, 양복 깃'의 '깃'입니다. '저고리나 웃옷의 목에 둘러 대어 앞으로 여미는 부분'이 '깃'이지요. '기저귀'가 그 모양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지 않던가요? 물론 이것은 천으로 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어귀'는 많이 쓰이는 접미사입니다. 음성모음 뒤에는 '-어귀'가, 그리고 양성모음 뒤에서는 '-아귀'가 쓰입니다. 예컨대 '손'에는 '-아귀'가 붙어서 '손아귀'가 되었지요. 그리고 옛날에는 '기저귀'를 그냥 '깆'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천으로 된 기저귀보다는 종이로 된 기저귀를 쓰니, 세상이 많이 변하기도 했습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3장 죽음과의 악수 - 장엄한 낙조같던 송시열 선생의 죽음 우암 송시열은 선조 40년(1607) 충북 옥천군 구룡리에서 탄생하였다. 부친 수옹공이 청산아사에 있을 때, 종가 제삿날 공자가 여러 제자를 데리고 집에 온 꿈을 꾸고서 아들의 출생을 맞았다고 한다. 선생은 광해군 1년인 세 살 때에 이미 스스로 글자를 깨쳤으며, 어려서부터 늘 글읽기를 좋아하였다. 나는 와서 배우는 사람에게 남의 신하가 되어서는 불충에 빠지지 않게 하였으며, 남의 아들이 되어서는 불효에 빠지지 않게 하였으며, 윗사람과 사귐에 아첨하지 않고, 아랫사람과 사귐에 더럽지 않게 하였다. 라고 <송자대전>은 기록하고 있다. 또 나는 가례와 소학을 읽고 몸을 검속하였으며 심경과 근사록을 읽고는 의리를 알았으며, 사서오경은 평생 동안 짊어지고 다니면서 읽어서 남겨둔 대목이 없었다. 고 말했다. 팔십 평생이 오로지 독서로 일관된 생애였다. 인품은 강직하고 말씀이 적었으며 학문의 목적은 의를 구명하는데 두고, 한번 의라는 판명을 하였으면 비록 생명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행하여야 한다고 믿으며, 의롭게 순국한 분들을 일일이 추모하고 저술로 남겨둘 것을 잊지 않았다. 삼학사의 전기를 저술하고, 충신과 공신의 자손을 모두 찾아내어 보살피게 함으로써 그 영혼을 위로하고 절의정신을 고취하였다. 숙종의 비 민중전을 위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직간을 하였다. 낳은 지 겨우 몇 달밖에 안되는 장희빈의 아들을 숙종이 원자로 봉하려 하자 선생은 민비 아직 젊으시니 뒷날을 기다려 봐야 한다 는 상소를 올렸다. 이것이 임금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제주도에 위리 안치된다. 민비가 폐출되자, 선생을 불러다가 국문하라는 어명이 떨어졌다. 제주도를 출발하여 정읍에 이른 것은 6월 8일, 진시에 현재의 위치에서 사약을 받으라는 명령이 내려온다. 고령의 나이로 선생의 병세가 이미 깊어지자 국문하기 전에 운명할 것을 염려한 일당들이 속히 사사할 것을 숙종에게 주청했기 때문이다. 선생은 글을 지어 여주에 있는 효종의 능을 향해 4배를 드리고 하세의 인사를 하였다. 자손에게 훈계하는 글을 짓고 자신을 따르던 문인들을 행해 마지막 말을 남긴다. 나는 항상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신념으로 살았으며 올해 내 나이 80을 넘었는데도, 마침내 도를 들은 바 없이 죽으니 이것이 나의 유한이다. 이러한 시대는 사는 것이 죽는 것만도 못한 세상이니 나는 곧 웃음을 머금고 땅 속으로 들어갈 터이니 이 뒤로는 오직 그대들이 도를 이루기를 바라노라. 그리고 학문은 마땅히 주자를 주체로 하고 사업은 효종이 하고자 한 뜻을 주장해야 한다. 청나라에 대한 분통함을 참고 원통한 마음을 항상 간직하고 어떠한 곤궁한 일이 있더라도 잊어서는 안된다는 인통함원박부득기의 여덟글자를 가슴속에 간직하여 동지들에게 전수해서 복수하고 설치할 날 까지 잊어버리지 말라고 당부한다. 기력이 엄엄하여 눈을 감고 있다고 겨우 뜨면서 지금 시각이 어떻게 되었느냐? 하더니 시각이 다 되었으니 약을 들이도록 하여라. 약이 늦으면 그 전에 죽을지 모른다. 고 하면서 약을 재촉하였다. 약이 들어오자 옷을 몸에 걸쳐 달라는 시늉을 하였다. 최소한의 예모를 갖추고 수명하려는 것이었다. 어명을 받들어 약을 든다. 때의 춘추 83세요, 휘일은 6월 3일, 기록에 보면 전야에는 큰 별이 떨어지고 흰 무지개가 청사의 지붕에 걸쳐졌다고 한다. 자신의 과오가 없었음에도 이들은 부당하게 내려진 사약의 잔을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태연히 재촉해서 받아 마셨다. 대인의 풍모답게 죽음에 있어 모면하려 들지 않았던 점이 존경스럽다. 태연자약하게 독배의 잔을 기울이는 장엄한 모습을 누군가 서산에 넘어가는 붉은 해 같다 고 말하였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14. 당고조, 당태종은 중국 사람이 아니었다 사실 중국의 역사는 한족과 이민족이 반반씩 이뤄 놓은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민족에게 수백 년간 정권을 빼앗겼을 뿐 아니라 역사상 유명한 인물 중에도 한족이 아닌 사람들이 숱하다. 그 예를 하나 보자. 5,6세기 중국은 선비, 흉노, 저, 갈, 강족 등 5개의 이민족의 16개의 나라를 세우며 명멸해 간 이른바 5호 16국의 혼란기였다. 오랜 기간 섞여 살게 되자 이민족과 한족은 문화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호한 체제`라는 독특한 정치, 문화 양식을 발전시켜 갔다. 게다가 통혼이 성행함에 따라 광범한 혼혈이 이루어져 한족인지 이민족인지 구별하기 어려워졌다. 양자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족의 동진 정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영향력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오랜 분열을 극복하고 화북을 통일한 선비족의 북위 정권이 지나치게 한화정책을 추진하자 북방 요새인 6진의 군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뒷날 수당 통일제국을 형성하는 중추 집단인 이들은 애초에 한화정책을 반대하고 선비족의 고유성을 지킬 것을 목적으로 거병했다. 이 때부터 중국은 다시 수당 통일제국을 향한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되었다. 6진 가운데 하나인 무천진의 군벌 세력들은 북위를 멸망시키고 서위, 북주의 정권을 독점하면서 배타적인 기득권 세력을 형성했다. 이 군벌 집단은 선비족인 북위 정권이 지나치게 한화정책을 취하는 데 반발해서 난을 일으킨 만큼 중국식으로 바뀌었던 성을 다시 선비족 원래의 성으로 되돌리는 등 강한 호족 성향을 띠었다. 이 무천진 군벌에 속하는 인물들이 바로 수나라를 일으킨 양견(수문제)와 당나라를 세운 이연(당고조)의 할아버지 이호 등이었다. 이씨 집안은 원래 대야씨라는 성을 가진 호족 집안이었다고 한다. 한화정책을 강하게 추진하던 북위 효문제 때 이씨로 성을 고쳤다가 무천진 군벌의 우두머리인 우문태로부터 대야씨를 하사받았다. 중국인이 자랑하는 수당제국의 황제들이 `오랑캐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수,당나라는 호족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다. 이들이 고구려를 온 힘을 쏟아 침략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때마다 수양제, 당태종(이세민), 당고종은 수도에 남아 있지 않고 직접 전장에 나와 전투를 지휘했다. 황제가 친히 전투를 지휘한다는 것은 전통적인 중국의 관념에서 볼 때 대단히 드문 일로 유목민들인 호족의 관습에 따른 것이다. 당태종은 중국식 군주 칭호인 천자라고만 불리는 것보다 유목민의 군대를 가리키는 칸을 덧붙인 천가한이라고 불리길 좋아했다. 당고종이 자기 아버지인 당태종의 후궁이었던 무조(측천무후)를 자신의 황후로 삼은 것이라든지 현종이 자기 아들의 비였던 양옥환(양귀비)를 귀비로 맞은 것 등은 중국적인 관습이 지배하는 사회였다면 있을 수 없는 불륜이었다. 그러나 이는 북방 유목민들 사이에서는 극히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관습이었다. 또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황제인 측천무후가 당나라 때에 나왔다는 것도 여권을 종중하는 유목민의 전통이 당에 강한 영향력을 미쳤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당이라는 제국의 국제성이야말로 가장 비중국적인 것이다. 이는 유목민의 개방성에 연유한 것이다. 당의 수도 장안은 서역과 동아시아 각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각기 제 나라의 풍속과 습관을 지닌 채 살고 있어서 마치 세계의 인종 전시장 같았다. 신라의 최치원도 그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종교도 페르시아의 마니 교, 유럽의 데스토리우스 교 등이 아무런 규제 없이 수입되었다. 이도 유목민의 뿌리 깊은 종교적 개방성에서 비롯된 문화 현상이었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3. 미국은 대만문제에 간섭 지 마라 부록 - 무슨 이우로 대만을 지지 하는가.. 중국은 대만 북부와 남부 해역에서 유도탄의 보강된 성능을 또 시험하기 시작했다. 작년 여름 대만총통 리떵후이의 방미에 항의하기 위해 첫번째 유도탄 시험을 시작한 이후 중 미 관계는 점점 악화되었다. 대만은 근 반세기 동안 미국과 중국의 관계를 긴장시키는 주요한 원인이 되어 왔다. 최근에는 대만의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이 창궐하고 있으나역사적으로나 국제법상으로는 대만독립을 지지할 어떠한 근거도 찾아볼수 없다. 고산족(高山族)이나 산지인(山地人)으로 불리는 토착민을 제외한다면 대만은 15, 16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역사서에 등장한다. 당시 대만은 해적들과 중국, 일본,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지에서 온 상인들의 근거지였었다. 17세기 중엽 명조의 마지막 군인이며 모험가였던 쩡청꽁(鄕成功)이 대만으로 건너 와 당시 대만에 주둔하고 있던 네덜란드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대만을 점령하여 통치권을 확립했었다. 1688년 청조가 수립되자 대만을 공격하여 쩡청꽁의 후예들을 축출하고 청나라에 병합시켰다. 이후 200년 간 복건성으로 귀속되어 있었다. 18, 19세기에 대륙의 복건성이나 광동성으로부터 많은 중국인이 이주해 와 정착하게 되는데 이들의 후대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대만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은 복건성이나 광동성에 살았던 그들의 조상과 민족, 언어, 문화면에서 다른 점이 거의 없다. 현대사에서 대만은 1894년부터 1895년 사이에 발생한 전쟁으로 큰 변화를 겪는다. 당시 일본은 부패한 청나라 정권을 침략한 후 대만과 펑후(澤湖)열도를 그들의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이후 대만은 반세기 가까이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2차대전의 종전으로 비로소 일본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1945년 일본이 패배한 후 대만은 중국에 반환되었고 미국을 포함한 모든 나라는 대만을 중국의 일부라고 인정하였다. 당시 많은 대만인들 역시이를 받아들였다. 1950년 6월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대만의 국민당 통치는 짧게 끝나버렸을 것이다. 한국전쟁으로 국민당의 장지에쓰 정부는미국의 제7함대에 의존하게 되었고, 대만은 사실상 미국의 보호지역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미국이 군사적, 경제적 지지를 국민당 정부에 보낸 것은 결코 민주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50, 60년대에 장지에쓰가 이끄는 정부는 대만에서 전권을 휘두른 전체주의 정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당은 이제껏 국민당이 대만의 통치자라고 하지 않고 중국의 합법적정부라고 주장해 왔다. 이런 주장이 대만으로 퇴각한 그들이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였을 것이다. 1972년 '중 . 미 합동성명'에서 대만문제는 중국 내부의 문제임을 천명하고 미군은 대만에서 철수하려 하였다. 이와 같이 대만의 역사에서는 대만독립을 지지할 어떤 근거도 찾아볼 수 없다. 중국이 서태평양에서 끊임없이 군사력을 보강하고 있고 대만과 대륙은 모두 강한 민족주의 정서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대만이 독립될 희망은 거의 없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대만이 가진 세기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이 인정되어 대중화(大中華)의 틀 안에서 선진적인 정치 및 경제자치를 실현하는 상황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계획 역시 중국의 각 당파가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일 뿐이며 만약 미국 정부가 현실적인 국가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국내 당파싸움에 이용할 목적으로 중국 내정에 개입한다면 대만의 진정한 자치 가능성조차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송이 할머니의 죽음 송이는 여고생이 되자 자기만의 방을 하나 갖고 싶었다. 지금까지는 남동생 훈이와 한방을 써 왔으나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엄마, 내 방 하나 마련해 주세요." 송이는 틈만 나면 엄마를 졸랐다. "나도 다 컸단 말이에요. 여동생이라면 또 모를까, 남동생하고 같은 방을 쓰는 애들은 아무도 없어요." "그래, 네 말이 맞긴 맞다. 이제 너도 다 컸는데, 남동생하고 같은 방을 쓸 수는 없지. 그렇지만 송이야, 지금 당장 어떡하니? 좀 기다려 봐. 이건 돈이 많이 드는 일이야." 송이 엄마는 송이 말대로 방을 하나 마련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서울 강남 땅에서 방 하나가 더 있는 40 평짜리 아파트로 이사하려면 적어도 수천만 원 돈이 더 필요해서 당장 어떻게 해줄 수가 없었다 송이는 참고 기다려 보라는 엄마의 말을 믿고 엄마가 어떤 조치를 취해 줄 것을 고대했다. 그러나 한 학기가 지나도록 엄마는 아무런 조치를 취해 주지 않았다. 송이는 엄마한테 말했다. "엄마, 친구들은 다들 자기 방이 있어요. 우리 이 집 팔고 분당으로 이사가요. 분당엔 집 값이 강남보다 싸잖아요? 나 분당에서 학교 다녀도 돼요." "아니야, 살아도 강남에서 살아야지, 경기도 땅엔 왜 가니? 좀더 기다려 봐." "그 동안 많이 기다렸잖아요?" "글쎄, 좀더 기다려 보라니까!" 송이는 자기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엄마가 섭섭했으나 하는 수 없었다. 그 뒤 새학기가 시작된 어느 가을날이었다. 독서실에서 밤늦게 공부하고 돌아온 송이는 다시 엄마한테 방을 마련해 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송이 엄마가 획 신경질을 내면서 말했다. "할머니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그 방을 네가 쓰면 되잖아?" 다음날 밤이었다. 일흔이 넘은 송이 할머니가 그만 극약을 먹고 돌아가셨다. 송이 할머니가 송이 엄마의 말을 들은 것이다. 글터 → 이글저글 보름달이 활짝 빛나는 밤에는 범죄가 늘어난다고 한다. 살인, 절도, 무장강도, 주거침입, 강간 등의 범죄는 통계적으로 볼때 보름달이 환하게 떠올라 있을때 잘 일어난다고 한다.김일성이 덮는 이불은 참새 턱밑 잔털만으로 만든 것으로, 700,000마리 분의 참새 털이 소모되었다.링컨 대통령 암살범 윌커스 부스, 거필도 대통령 암살범 찰스 J.기토, 맥킨리 대통령 암살범 리온 체코르, 루즈벨트 대통령 저격범 존 슈랭크 등은 모두 카톨릭 신자들이었다.스탈린은 독일과의 포로 교환에 대한 제안을 거절하여 아들 제이콥이 독일 포로 수용소에서 죽게 만들었다.레닌은 시베리아에 유형간 죄수였는데, 마찬가지로 혁명운동을 하다 유형당한 여자 죄수와 결혼했다.파터 대제는 아내의 애인을 처형하여 그 목을 알콜이 담긴 항아리에 넣어 아내의 방에 두었다.호지명은 유명한 런던 칼톤 호텔에서 버스보이로 시작, 접시닦이, 요리사가 되었다가 주방장으로 승진하여 일한 적이있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