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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54 호
4339.11.08 (09.18)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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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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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시며 → 자유글판 |
하루에 7~8잔 마시라고 하는데 언제 마시면 가장 좋을까
◈ 오전 07:00 기상 직후 물 한 잔
기상직후 물을 한 잔 마시면 밤새 축적된 노폐물을 용해시켜
몸 밖으로 배출시키므로 체내의 신진대사를 촉진시키고 원활한
혈액순환을 도우며 신장의 부담을 덜어준다. 더욱이 배설 기능이
강화되어 변비예방이나 치료는 물론 하루의 컨디션을
가볍게 시작할 수 있다.
◈ 오전 08:00 아침식사 전 물 한 잔
식사 전에 물을 한 잔 마시면 위장의 컨디션을 조절하며,
과식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
◈ 오전 10:00 근무 중 물 한 잔
사무실에 앉아 일을 하다 지치거나 피로해질 때 찬물 한 컵을 마시면
피로도 풀리고 지루함을 덜어준다. 또한 물은 흡연 욕구를
자제시키므로 담배를 많이 피우는 흡연가들의 건강 예방에도 좋다.
◈ 오후 12:00 점심식사 전 물 한 잔
점심식사 직전에 물을 한 잔 마시면 과식을 막아준다.
특히 외식을 많이 하는 직장인의 점심은 식당의 음식이 전반적으로
짜거나 매운데, 이때 중간 중간에 물을 조금씩 마셔주면
체내 염분 조절이 이루어지므로 성인병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
◈ 오후 03:00 공복에 물 한 잔
오후3시경은 군것질 욕구가 생기거나 흡연 욕구가 강해지는 시간.
이때 군것질이나 담배 대신 물을 한 잔 마시면 군것질 욕구도 사라지고
흡연 욕구를 줄이는데 도움이 된다.
◈ 오후 07:00 저녁식사와 함께 물 한 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식하게 되는 저녁식사 중간 중간에 물을
조금씩 마셔주면 체내 염분조절도 이루어지므로 성인병 예방에
도움이 되며 과식을 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 오후 10:00 잠자기 전 물 한 잔
잠자기 전 미네랄 풍부한 물을 마시면 다음날 훨씬 가벼운
몸 상태를 느낄 수 있다.
<물 건강 7계명>
하나: 하루에 반드시 7~8컵 이상을 공복에 마신다
둘: 가능한 한 냉장고에 넣어 10도이하로 차게 마신다
셋: 받아놓은 물은 밀폐해서24시간 안에 마신다
넷: 미네랄이 함유된 물은 가능한 한 끓이지 말고 생수로 마신다
다섯: 마시는 물은 알카리성, 씻는 물은 약산성이 바람직하다
여섯: 음주 후엔 반드시 2컵 이상의 찬물을 마신다
일곱: 물은 천천히 마신다
출처:곽병원
- 주신분 : 호단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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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국제신문 신춘문예 공모, 12월15일 마감 당신의 상상력을 기다립니다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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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의 주역을 꿈꾸는 예비 문학인을 위한 등용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국제신문이 2007년도 신춘문예 작품을 공모합니다. 국제신문 신춘문예는 참신하고 패기 넘치는 신예 문학인을 배출하는 한판의 문학 축제입니다. 당신의 상상력, 당신의 열정을 기다립니다. 새해 창간 60주년을 맞아 새롭게 도약하는 국제신문과 함께 문학의 중흥을 이끌 주인공이 되십시오. 국제신문은 당선 문학인에게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공모 부문은 단편소설 시 시조 동화 등 4개입니다. 여러분의 많은 응모를 바랍니다.
▲마감 = 2006년 12월 15일(마감일 소인 유효)
▲보낼 곳 = 부산 연제구 중앙로 2221(거제1동 76의 1) 국제신문 편집국 문화부 신춘문예 담당자 앞(우편번호 611-702)
▲응모 요령
1. 모든 응모작품은 어떠한 지면(인터넷 매체 포함)에도 발표된 적이 없는 순수 창작품이어야 함. 표절 또는 동일한 작품이 다른 매체에 중복 투고된 사실이 밝혀지면 심사에서 제외하며 발표 후라도 당선을 취소함.
2. 이름(필명인 경우 본명을 따로 명기할 것) 주소 전화번호 등은 작품의 별도 표지에 명기할 것.
3. 응모작품 겉봉에는 '신춘문예 응모'라고 쓰고 응모 부문과 작품 편수를 밝힐 것. 소설·동화의 경우 작품 표지에 200자 원고지로 환산한 원고량을 표기할 것.
4. 모든 응모 작품은 반환하지 않음.
▲당선작 발표 = 2007년 1월 1일 국제신문 지면
▲문의 = 국제신문 편집국 문화팀 (051)500-5135~7
◇공모 부문 및 상금
단편소설 |
200자 원고지 80장 안팎 |
500만 원 |
시 |
3편 이상 |
300만 원 |
시조 |
3편 이상 |
300만 원 |
동화 |
200자 원고지 30장 안팎 |
300만 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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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권력에 대한 탐욕은 힘이 아니라 약함에 뿌리박고있다. / 에리히 프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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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내잠 속에 비내리는데 - 이외수
점보빵과 화이트크리스마스
겨울에 얼어죽은 가래나무 가지에 겨울에 얼어죽은 가래나무 새 한 마리 날아와 울 때까지 봄밤에도 몇 번이나 눈이 내리고 더러는 언 빨래들 살을 부비며 새도록 잠을 설치는 소리
필요에 따라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상당히 많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누구든 차별 없이 대해 주는 사람들은 아주 드물다. 그것은 내가 학생과 군인과 건달과 소사와 필경사와 연탄 배달부와 도안사와 월부 책장사와 학원 강사와 글쟁이를 단계적으로 거치면서 몸소 체험한 끝에 알아낸 사실이다. 그러니까 내 눈에는 아직도 세상이 직업의 귀천을 분명히 가리고 있는 것으로 비쳤다는 사실인데 솔직한 심정으로 말하자면 나도 천대받을 당시에는 사는 일이 대단히 아니꼽고 더럽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아무리 잘난 체하는 사람이라도 깊이 따지고 보면 별 것도 아니어서 혐오스러울 정도로 속물 근성만 남아 있는데도 단지 남보다 잘 먹고 잘 산다는 자부심 하나 때문에 외관상 좀 초라해 보이는 사람이면 숫제 자기 집 종놈처럼 취급하려 드는 부류들도 나는 더러 본 적이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항시 표정이 근엄해 보여서 절로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근엄한 표정을 짓는 것은 근엄한 표정보다 더 좋은 표정이 인자스러운 표정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다. 안다고는 하더라도 인자스러운 표정은 감히 흉내를 낼 수조차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근엄한 표정을 지으면서 허세를 부려도 죽고 나면 그뿐이다. 온 세상의 시계가 멎어 있어도 반드시 시간은 시간대로 흐르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죽어가는 순간까지 근엄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면 그는 정말로 근엄한 속물이다. 그러나 죽어가는 순간까지 근엄할 필요가 어디 있으랴. 아무리 지상에서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살았어도 그는 일단 하나님께로 가게 될 것이며 거기서는 근엄한 표정을 지어 봤자 전혀 통하지가 않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누구든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가난이라는 것을 한번쯤 체험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하난데 그 이유는 가난이 자신을 어떤 인간인가 알게 만들어 주면서 남 또한 어떤 인간인가를 알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중요하다. 왜 살아야 하는가도 중요하다. 그리고 그런 것들의 중요성은 가난 속에서 비로소 선명하게 발견되어진다. 그러나 가난을 극복하고 난 다음에 부자가 되는 경우 근엄한 표정이나 짓는다면 그건 헛가난을 치른 것이다. 가난할 때는 마음이 넉넉했었는데 부자가 되어 마음이 각박해졌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는 한마디로 마음의 눈이 멀어 버린 것일 테니까. 나는 어느 해 겨울에 천사를 본 적이 있다. 자식 농담도 잘 하네, 라고 피식 웃어 넘겨 버리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맹세코 이건 거짓말이 아니다.
천사에 대해서는 항간에 여러가지로 논란이 분분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우선 배꼽이 있다느니 없다느니로부터 시작해서 성별이 있다느니 없다느니로 옥신각신하다가 나중에는 신이 어떻고 종교가 어떻고까지 이르러 밤을 새우는 사람들도 자주 보아 왔다. 그러나 그대들이여, 배꼽이 무슨 상관이며 성별이 무슨 상관이랴, 그대들이 마음만 열어 놓는다면 언제나 천사는 그 속에 자리한다. 국어 사전을 찾아보면, 천사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고 사람의 세상에 내려온다는 사자 라고 풀이되어 있다. 그렇다. 그해 겨울에 나는 실제로 그러한 천사를 만난 적이 있다. 그해 겨울은 내 생애 최악의 겨울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굶을 기력도 없었고 더 이상 한뎃잠을 잘 기력도 없었다. 길을 가다 보면 수시로 길바닥에 쓰러져 편안히 잠들어 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문득문득 내 의식을 사로잡았다. 그것은 충동이라기보다 일종의 유혹이었다. 아무데서나 쓰러져 잠이 들면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으며 또한 영원히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분간 연탄 가게에서 연탄이나 나르면서 잠자리와 먹을 것을 제공받고 살았었는데 자금난으로 연탄 가게가 문을 닫아 버린 후로 다시 조악한 삶이 시작되어 버렸다. 며칠을 굶었을까. 쓰레기통이라도 한번 뒤져 보고 싶은 욕망이 자꾸 불끈불끈 치밀어 올랐다. 항시 쌀밥과 고기 반찬이 눈에 선했다. 객지의 어두운 저녁 골목을 접어들면 어느 집에선가 꽁치를 굽는 냄새, 더러는 된장국 냄새, 골목 쪽으로 나 있는 유리창으로는 환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방에서는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소리, 이따금 새어 나오는 웃음 소리, 부엌에서는 수돗물이 넘치고 달그락달그락 그릇들 부딪치는 소리. 아아, 그러한 저녁에 나는 낯선 어느 집 담벼락에 기대어 허기를 참지 못해 시멘트 벽에다 머리라도 박아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날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눈이라도 오려는지 하늘이 회색으로 낮게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거리는 요란했다. 상점마다 네온싸인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메리 번쩍번쩍, 크리스마스 번쩍번쩍, 선물용 케익은 두루두루 번쩍번쩍, 진미당에서 번쩍번쩍. 자선 냄비도 딸랑딸랑 요란을 떨고 있었다. 불우 이웃을 도웁시다, 따뜻한 동포애를 보여 줍시다, 메가폰을 들고 사내 하나가 외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오며가며 자선 냄비에다 돈들을 던져 넣고 있었다. 다만 나는 어지럽고 배가 고팠다. 외로왔다. 나는 이병욱을 찾아 가기로 했다. 그는 당시 대학생이었으며 소설을 공부하고 있었다. 혹시 집에 없으면 어떻게 하나, 나는 불안하고 막막했었다. 통행 금지도 없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혼자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거리를 배회해야 한다는 것은 정말로 비참하고도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다행히 그는 집에 있었다. 아직도 ! 살아 있었느냐고 버릇처럼 그는 내게 악수의 손길을 내밀었다. 형이나 내나 참 더러운 크리스마스 이브요. 이럴 때는 여자라도 하나 있어야 하는 건데, 여자가 없다면 돈이라도 대신 있어야 하는 건데, 젠장, 하루종일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으니까 처량하기 짝이 없습니다. 방으로 들어서자 저녁은 먹었느냐고 그가 내게 물었다. 먹었어. 나는 거짓말을 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매형에게 얹혀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매형 역시 그리 부자는 아니었다. 이 방이 굉장히 춥지요. 내가 올 때마다 연탄이 꺼지나부지. 매형네 방에서 이 방으로 고래가 연결되어 있어요. 연탄 한 장으로 이 방까지 따뜻하기를 바랄 수야 없지요. 난 그래도 충분히 견딜 만한데. 이불을 뒤집어 써요. 그러나 나는 정말로 견딜만 했다. 벽으로 시선을 던지니 백지 두 장이 눈에 띄었다. 겨울 겨울 겨울. 백지 한장에는 그렇게만 적혀 있었다. 정말로 겨울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 -리차드 바크-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먹이를 늦게 줍는다. -이 병욱- 다른 한 장에는 또 그렇게만 적혀 있었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니까 이상한 슬픔 같은 것이 느껴져 왔다. 그런데 밖에서 이흥모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 보니 한 잎 두 잎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 속에서 이흥모는 아주 쓸쓸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알 만했다. 그도 갈데가 없었던 것이다. 나한테 원고지 사라고 매형이 준 돈 사 백원이 있는데 지금 이돈을 가지고 나가면 채 두 시간도 버티지 못할 거야. 이 병욱의 말이었다. 막걸리 한 되에 50원을 하던 시절이었다. 자정까지 기다렸다가 정각이 되면 나가자구. 나가서 김치를 안주삼아 막걸리나 마시자구. 이야기나 하면서 아껴 마시면 생각보다 오래 마실수 있을 거야. 형 의견은 어떠우 ? 나야 술을 마실 희망만 있다면 좋지, 뭐. 그래서 우리는 초저녁부터 자정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정말로 겨울밤은 길었다. 자정을 기다리기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들은 각자 우리들의 신세가 너무 처량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상당히 오랜 시간을 침묵으로만 일관했다. 그리고 길고도 지루한 시간을 견디고 견딘 끝에 마침내 자정이 되었다.
정각이다. 우리는 문을 열었다. 눈이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었다. 숙연했다. 거리로 나오니 사방이 조용했다. 조용한 크리스마스, 가족과 함께 보내는 크리스마스, 캠페인 때문인 것 같았다. 눈은 한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마땅한 술집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이브에 술을 팔면 하나님께 혼이라도 난다고 생각했던 모양인지 대개의 술집들이 문을 닫아 걸고 있었다. 번화가로 나가면 혹 열려 있는 술집이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우리는 돈이 충분치 못했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골목 안 싸구려 술집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눈은 계속해서 무더기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엄청나게 내리는군. 도시 전체가 다 파묻혀 버렸으면 좋겠군. 내일 아침까지만 이대로 내린다면 형의 소원이 이루어지겠소. 멀리서 성가대의 합창 소리가 아련히 들려 오고 있었다. 한참 동안 우리는 눈 속을 헤매었다. 그리고 간신히 술집 하나를 찾아내었다. 변두리 골목의 후미진 술집이었다. 스마일 집 ? 막걸리 냄새라곤 전혀 안 나는 간판일세. 그렇거나 말거나 우리는 술집 안으로 들어섰다. 삼십대의 남자 두 명이 이십대의 여자 한 명을 데리고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주인 여자는 문지방에 걸터앉아 졸고 있다가 우리가 들어서자 잠에 취한 목소리로 어서오세요 라고 말했다. 우리는 약간 비애에 젖은 듯한 표정들을 지으며 둥근 쇠판 주변에 둘러 앉았다. 아주 천천히 마시자구. 되도록이면 이야기를 많이하고 술을 아끼면서 시간을 질질 끄는 거라. 형. 제발 오늘은 너무 성급하게 마시지 맙시다. 알았으니까 염려 놓으라구. 그리하여 기다리고 기다렸던 술이 시작되었다. 주인 여자에게는 미안했지만 우리는 김치 이외의 안주는 시킬 수가 없었다. 우리는 되도록이면 천천히 마시려고 노력했다. 술이 다 끝나 버리면 이 병욱의 집에 돌아가 잠을 자는 일 이외에는 아무런 할일이 없어져 버리게 되는셈이었으므로 되도록이면 이야기를 많이 하려고 노력 했다. 우리는 문학을 이야기했다. 까뮈의 페스트를 이야기하고 르 끌레지오의 홍수를 이야기했다.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천우학을 이야기하고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을 이야기했다. 그러다가 다시 우리나라 작가들의 생애와 작품들을 이야기했다. 어용 시인 하나가 안주가 되어 난도질을 당하더니 작품은 하나도 없으면서 문단 정치로 문학가가 된 어느 분께서 연탄불 속에 구워져 노린내를 풍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시간이 흐르고 주전자가 세 번 비었다. 좀더 천천히 마십시다. 이 흥모가 말했다. 이 상태로 나가면 두 시간을 넘기기가 힘들 거라는 추산이었다. 그런데 이때 뜻하지 않은 사태가 발생했다. 제가 술 한 잔씩 따루어 드려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요 ? 건너편에서 삼십대 남자들과 술을 마시던 여자가 어느새 우리에게로 다가와 그렇게 말을 걸었던 것이다. 스물 다섯이나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나이였다. 말씨와 몸가짐이 무척 조심스러워 보여서 전혀 술집 작부 같아보이지는 않는 여자였다. 우리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저쪽에서 듣자니까 너무 좋은 얘기들을 하고 계시는 것 같아서 아까부터 이리로 오고 싶었어요. 여자가 말했다. 우리는 일제히 건너편 좌석을 건너다보았다. 삼십대의 남자 두 명이 아주 못마땅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컵을 날려 버릴 것 같은 분위기였다. 저 분들은 ... 이 흥모가 그들에게 실례되지 않겠느냐는 듯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걱정마세요, 저는 이 집에서 술을 따르는 여자이니까요. 아무한테도 독점되어져 있지 않아요. 그제서야 우리는 약간 안심이 되었다. 앉으세요. 우리는 다시 술을 시켰고 그녀는 우리들에게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글 쓰시는 분들이신가 봐요. 여자가 말했다. 뭐, 글을 쓴다기보다도 ... 우리는 모두 습작기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들이었으므로 대충 그렇게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녀는 알고 보니 문학에 관한 한은 대단히 박학다식한 여자였다. 말씨도 차분하고 몸가짐도 단정한데다 안 읽어 본 책이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뚜렷이 그걸 드러내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저 가끔 한마디씩 거드는 말들이 모두 생기와 탄력을 가지고 우리들이 나누는 대화 속에서 활기차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는 뜻밖의 장소에서 우리와 언어가 잘 통하는 여자 하나를 만났다는 사실에 마냥 감격스러워서 큰소리로 웃고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제가 노래 하나 할까요 ? 화이트 크리스마스. 여자가 말했다. 우리야 골 백번 찬성의 뜻을 표명할 수 밖에 없었다. 여자는 주전자를 들고 일어섰다. 그리고 우리들 세 사람 사이를 옮겨다니며 어깨 너머로 껴안듯이 허리를 숙이고 감싸면서 원어로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부르기 시작했다. 굉장히 잘 부르는 노래였다. 가수가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다. 메리 크리스마스! 노래를 다 끝마치자 그녀는 우리에게 다시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다가 이리로 왔느냐고 물어 보았으나 일체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잔잔한 미소만 띨 뿐 술이나 드세요, 가만히 잔만 내밀 뿐 일체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말해 주지 않았다. 그때 맞은편 탁자에서 술을 마시던 남자들이 자꾸만 우리에게 시비를 걸어오기 시작했다. 나와 흡사한 나이들이었다. 자식들, 문학 좋아하시네. 순전히 구라들만 피우고 있구만. 요즘 애들은 버르장머리가 도통 없단 말씀야. 문학을 해서 그런 모양이지. 말꼬리마다 물고 늘어지면서 모욕적인 말 한마디 씩을 던져 왔다. 조금씩 이 흥모가 흥분의 빛을 띄우고 있었다.이 병욱도 심상치 않은 눈치였다. 저 사람들 건달이래요, 건드리지 마세요. 여자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흥 ! 그제서야 나는 코웃음을 뱉었다. 새끼들아 문학이 밥 멕여 주냐. 집구석에 들어가서 발 닦고 자빠져 잠이나 자라. 이제 야지는 완전히 우리를 향해 노골화되어 있었다. 아무리 나이가 나보다 많아도 저런 사람들은 사회적인 선배 대우를 해줄 수 가 없어. 이 병욱과 이 흥모가 동시에 웃통을 벗고 있었다. 남자답게 우리 밖에 나가 한판 붙읍시다. 이 병욱의 말. 건달이면 모가지가 두 개냐. 이 흥모의 말. 참으세요. 여자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리고 있었다. 나는 이제 내가 나서야 할 때 라는 생각을 했다. 그들이 건달이라고는 하지만 나도 그 바닥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 만큼 알고 있는 터수였다. 나는 조용히 일어섰다. 그리고 씹어 뱉듯이 말했다. 니들 하루만 살고 말 거냐. 그때 그들 중의 하나가 흠칫 몸을 사리는 듯했다. 내 손에는 이미 젓가락 두 개가 들리워져 있었는데 그는 혹시 순간적으로 그것을 칼로 오인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당신들 이 형을 몰라서 겁없이 까부는 모양인데 오늘같이 좋은 날 괜히 눈알이라도 한 개 빠지지 말고 나가쇼. 이 병욱이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어 다시 나는 경고해 두었다. 빨리 계산을 끝내고 나가 주라, 난 전혀 살고 싶지 않은 놈이야. 니들 둘이서 같이 죽어 준다면 저승길이 심심치는 않을 거지만. 순간적으로 젓가락 한 개가 반짝 빛살을 튕기며 주방 베니어판에 날카로운 소리로 날아가 꽂혔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지만 그건 치기무쌍하던 때의 내 장기였다. 자, 우리 조용히 앉아서 술이나 마시자. 우리는 조용히 앉아서 다시 아까처럼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에 그들은 그 술집 안에서 소리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우리는 그들이 나가고 난 후 한 되 정도를 더 마셨다. 우리는 그래도 술이 부족한 것 같았다. 이 병욱이 매우 난감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이제 가지고 있는 돈만큼의 술을 다 마셔 버렸다는 것쯤은 나도 짐작으로 대번에 눈치챌 수가 있었다. 서운했다. 아직도 날이 더 새려면 멀었는데, 모처럼 푸근한 분위기 속에서 술을 마시게 되었는데, 건달들도 물러갔는데, 밖에는 아직도 한정 없이 함박눈이 내리고 있는데, 오늘은 통행 금지도 없는 날인데, 이젊은 나이에 크리스마스 이브를 춥고 을씨년스러운 이 병욱의 골방에서 보내야 한다니, 모두들 안타깝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우리에게는 그 염병할 놈의 돈이라는 게 다 떨어져 버렸던 것이다. 날이 새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벌써 가시려고요, 몇 시간만 더 마시다 가세요. 모처럼 만난 말동무들인데 이대로 헤어지면 섭섭해요. 혹시 누구와 만날 약속이라도 있어요 ? 여자가 사정도 모르고 우리의 팔소매를 부여잡고 있었다. 사실은 돈이 다 떨어졌어요. 자정까지 기다려서야 우리가 외출하게 된 경위를 이 병욱이 여자에게 설명했다. 그러자 여자의 표정이 활짝 개이면서 안심했다는 듯한 빛을 띠었다. 그런 거라면 걱정말아요, 내가 사면 되니까. 이래봬도 난 돈이 많은 여자예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여자는 방으로 들어가더니 지폐를 아무렇게나 한 움큼 집어 가지고 나와서는 이 병욱의 바바리 코트 주머니에다 듬뿍 넣어 주었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관찮다니까요. 내가 사는 거라니까요. 그래도. 아무 부담도 느끼실 필요가 없어요, 내가 좋아서 이러는 거니까요. 몇 분동안을 옥신각신 하던 끝에 하는 수 없이 우리는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돈이 많으니까 이번엔 비싼 안주를 시키세요. 여자가 말했다. 우리는 비싼 안주를 시켰다. 웃고 이야기하고 떠들고 노래 부르면서 우리는 술을 마셨다.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다. 주인 여자는 방 안에 들어가 잠을 자고 있었다. 새벽 네 시쯤이 되자 다시 그 돈이 다 떨어져 버렸다. 주인 여자가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먹고 마신 안주값과 술값을 계산해 손수 돈 통 안에다 넣어 주었던 것이다. 돈은 얼마든지 있다니까요. 다시 여자는 방 안으로 들어가 한 움큼의 돈을 움켜쥐고 나왔다. 그리고 아까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이 병욱의 호주머니에다 듬뿍 찔러 넣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날이 훤하게 샐 때까지 술을 마셨고 그 돈마저도 다 떨어졌다. 정말로 이제는 가야겠어요. 우리는 일어섰다. 밖으로 나오니 아직도 눈은 그치지 않고 있었다. 바래다 드리겠어요. 여자가 따라 나오고 있었다. 밤 사이 내린 눈이 정강이까지 푹푹 빠져들고 있었다. 여자는 제과점 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볼 일이 있으니 잠깐 기다려달라고 우리에게 말했다. 그리고 잠시 후 제과점에서 커다란 점보빵 한 두 덩어리를 안고 나왔다. 틀림없이 굶고들 있을 거예요, 연탄도 없을 테고, 이것으로 식사를 하세요. 아,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단 말인가, 우리는 말문이 막혀서 그저 입만 다물고 있었다. 이제 난 들어갈래요. 내일이 내 생일인데 다시 만나 주시겠어요. 여자가 말했다. 우리는 밤 사이 신세를 졌으므로 무엇으로든 보답할 기회를 만들려고 쾌히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그런데 이 흥모는 도중에서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이 병욱을 따라갔었는데 부끄럽지만 빵 덩어리를 보면서 아껴 먹으면 닷새는 먹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왜냐하면 이 흥모와 이 병욱은 그래도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할 방법이 있었으므로 그 빵 덩어리 전부를 나한테 주겠노라고 말했었던 것이다. 그날 이 병욱과 나는 하루종일 그림 도구를 구하러 뛰어다녔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가난에 빠진 우리로서는 그녀에게 줄 만한 마땅한 선물을 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림을 한 점 그려 주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날 나는 온 정성을 다해 밤을 새워 그림을 그렸다. 일찌기 나는 그토록 어떤 일에 정성을 다 바쳐 본 일이 없었다. 다음날 낮에야 그 그림은 완성되어졌는데 무엇보다도 그림을 끼울 액자가 문제였다. 돈이 백 원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돈은 커피값으로 준비되어진 돈이기 때문에 액자를 살 수가 없었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이 병욱의 가족 사진을 넣어 두었던 액자를 쓰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사진을 빼고 그림을 넣었더니 천만다행으로 꼭 맞았다. 그런데 액자가 너무 오래 되어서 파리똥이 가득히 끼어 있었다. 우리는 또 그것을 온갖 정성을 다해 비눗물로 닦아 내었다. 그래도 새 것 같지는 않았다. 몹시 마음이 언짢았지만 더 이상은 불가항력이었다. 이윽고 우리가 그것을 들고 약속한 다방으로 갔을 때는 약속 시간 오분 전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돈이 백 원 밖에 없었으므로 나는 다방 밖에서 기다리기로 작전을 세웠다. 당시 커피 값은 50원이었고 나까지 들어가면 50원이 모자라기 때문이었다. 혹시 여자와 마주치게 될 것을 꺼려하여 나는 멀찍이서 그 여자가 오는 것을 지켜만 보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병욱이 그림을 들고 다방으로 들어간 지 거의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 여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떻게 된 노릇일까 ? 수시로 이 병욱은 밖으로 나와 초조한 표정을 내게 보였다. 그 술집으로 한번 가보기로 하자. 우리는 그렇게 결론을 짓고 다시 그 술집으로 가보았다. 그 술집은 낯설었다. 그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 그 여자 말이죠, 떠났어요. 사흘 전에 우리집에 와서 일 좀 하게 해달라 고 사정하기에 허락해 주었는데 아주 썩 손님들을 잘 다룹디다. 어디로 갔는지는 몰라요. 내 경험으로 봐서 틀림없이 술집 여자는 아니예요. 가만 있자, 얼핏 들으니까 어디 대학원을 다닌다든가. 그뿐이었다. 우리는 다시 무엇엔가 홀려 버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몇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 일은 자주 내 뇌리 속에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하려 한다. 그 여자는 분명히 천사였었노라고. 어디선가 읽은 이야긴데, 어느 무신론자 하나가 목사님에게 당신은 하나님을 보았느냐고 따져 물은 적이 있다고 한다. 그때 그 목사님은 하나님을 보여 주겠노라면서 어둡고 찌들은 빈민가로 그를 데리고 갔었던 모양이었다. 보시오, 저들이 다 하나님의 모습이요. 목사님은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들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는 거였다. 얼마나 명쾌한 가르침인가. 천사 또한 그와 마찬가지다. 우리가 마음의 눈이 트이면 그 어디에서든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듯이 천사들의 모습 또한 그 어디에서고 발견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대의 마음가짐에 따라 스스로가 천사를 그대 가슴 안에 간직할 수도 있고 그대 자신 또한 천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하찮게 보지 말라. 그가 바로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고 사람의 세상에 내려온 사자, 곧 천사인 줄 누가 알랴. 요즘은 세상사 모든 일이 다 심상치가 않거니 저 높은 곳에서 필시 하나님이 내려다보시고 계시다가 그대가 마음으로 뿌린 씨앗은 그대 마음의 양식이 되게 하시리라. 비록 말세가 가까와졌다고는 하지만 너무 각박하게 살 필요야 있겠는가. 다만 한마디 덧붙이고 싶은 것은 내가 살아 온 나날들이 마냥 남의 신세만 지고 누덕누덕 기워서 만들어 놓은 것들 뿐인것 같아 면구스럽기 짝이 없다. 그러나 내게 그 일상들의 부분부분을 기울 수 있는 바늘과 실들을 빌려 준 그 분들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그녀가 베풀어 준 술과 안주와 노래와 두 덩어리의 점보빵에 보답키 위해서라도 나는 목숨이 다 하는 날까지 감사하며 열심히 글을 쓰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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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식 토정비결 - 전영순,하정화
<해삼물류>
43.돔 - 백 가지 물고기의 왕, 최고의 횟감
도미를 일러 백 가지 물고기(백어) 중에 왕이라 한다. 세계적으로는 130여 종이 분포하는데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경사나 제사를 올릴 때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생선이다. 또한 도미의 회맛은 한번 보면 오랫동안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여러 가지 횟감 중에서도 도미가 가장 비싸게 팔리는 것 중의 하나가 된 것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서는 대부분 도미를 하급 생선으로 취급하고 있다. 이를테면 영국에서는 "돔 같은 것은 유태인이나 먹는 잡어"라고 하는가 하면 달팽이를 진미로 여기는 프랑스 사람들은 돔을 식충어라고 한다. 이밖에 미국이나 중국 등지에서도 돔은 잡어로 취급되어 별로 귀여움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도미의 진가를 모르는 이런 나라 사람들을 일컬어 혹자는 '야만적'이라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도미는 지능이 대단히 발달된 어족이며 일부일처제의 도덕성 또한 엄격하다고 한다. 한 예로 일몰시각에만 도미들은 암,수가 교접을 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도미는 대단히 고등 진화과정을 거친 특유의 향과 담백한 맛을 지닌 생선이다. 게다가 도미는 수명에 있어서도 사람과 비슷하여 50년 가량 사는 것도 있다는 것이다. 단정하게 균형 잡힌 몸매, 신비할 정도로 화려한 색채를 지닌 도미는 모든 어류 중에서도 고급 생선으로 대접받을 만한 조건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도미는 농어목 도미과에 속하는 고기들의 총칭이다. 그리고 종류도 다양하여 참돔, 감성돔, 청돔, 새눈치, 황돔, 붉돔, 녹줄돔, 실붉돔 등이 있다. 이 중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것이 참돔으로 그 생김새도 퍽이나 아름답다. 이 참돔은 경우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아름다운 분홍색과 녹색의 광택을 띠고 있으며 청록색의 반점이 흩어져 있다. 또한 몸의 길이가 커서 1m에 달하는 것도 있다. 수명도 길어서 40년 정도까지 살 수 있고 우리나라의 전 연안바다에 분포한다. 5월 경의 산란기를 제외하고는 먼 바다에서 사는데 수심 30∼50m 사이의 암초지대가 주 서식지다. 1930년대 발견된 부산 동삼동 조개무지에서는 참돔의 뼈가 출토되었는데 턱뼈의 길이로 보아 몸 길이가 50cm 정도로 추정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도미는 이미 선사시대부터 우리 조상들에게 식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감성돔(흑돔)은 몸이 타원형이며 등쪽 외곽이 솟아나 있다. 몸빛은 전반적으로 회흑색이지만 배 부분으로 갈수록 색깔이 연하다. 몸 길이는 40cm 정도이고 내만성 어류로서 보통 40∼50m 정도의 얕은 바다에 산다. 우리나라의 중부 이남 연해에 분포하며 4∼6월 경에 산란기를 맞이한다. 전새개골에 작은 톱니가 있으며 7∼8줄의 비늘이 있다. 또한 감성돔은 내만성 물고기로 깊이 40~50cm 이하의 얕은 바다에 서식하는데, 우리나라 중부 이남, 일본 중부 이남, 대만 등에 널리 분포하며 여름철에 맛이 좋다. 금눈돔은 몸길이가 30∼50cm 안팍으로 형체가 둥글고 납작하다. 눈은 고양이 눈처럼 황금색으로 빛난다. 몸색깔은 붉고, 복부쪽은 은백색, 비늘은 크고 거칠다. 몸색깔은 홍색, 황색, 회색, 흑색 등으로 연안성 어류이다. 우리나라 남해, 일본 전역의 바다 밑에서 서식한다. 이밖에도 우리나라 연해에 서식하는 도미로는 돌돔, 능성돔, 옥돔 등이 있다. 이 중, 옥돔은 우리나라 제주의 특산물로 머리가 뭉특하고 눈이 큰 것이 특징이다. 도미류는 선도가 비교적 오래 가므로 장기간 저장을 하더라도 맛이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육질의 안정성은 좋지 않으므로 냉동은 좋지 않다. 따라서 얼음 저장을 하는 것이 좋다.
성분
감성돔은 전형적인 흰살고기로서 단백질, 지질, 비타민 A 및 수용성 비타민도 적당량 함유되어 있으나 비타민 C나 D는 그 함량이 적다. 칼슘(Ca), 철(Fe) 등의 함량도 적으므로 무기질의 공급원으로는 그다지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돔의 엑기스에는 글루타민산을 비롯한 아미노산이 대단히 균형있게 들어 있고 육질에는 누클레오티드의 이노신산이 축적되어 있어 맛이 아주 좋다. 일곱줄의 세로줄 무늬가 있는 돌돔은 육질이 단단하며 연중 맛의 변화가 적은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능성돔은 붉은 홍색으로 단백질이 적은 반면 지방은 2배로 많아 최고의 맛을 지닌 횟감으로 쳐준다. 금눈돔류의 성분은 참돔과 유사하며 도미의 대용으로 쓰이는 경우가 있다. 껍질(피부)의 붉은 색은 아스타크산틴이란 카로티노이드계 색소이다.
[감성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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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임새
'썩어도 돔'이란 말이 있듯이 돔의 육질에는 고도의 불포화 지방산이 적은데다 육질에 축적된 이노신산의 분해 속도가 아주 느려 신선도가 떨어지더라도 곧바로 맛이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본과 우리나라에서는 최고의 횟감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붉은 돔과 흑돔은 생선회 등 생식에 알맞고, 이밖에 가열조리(소금구이, 기름튀김 등)의 재료로 이용한다. 금눈돔류는 생식으로 회를 쳐서 먹거나 조림의 재료로 널리 쓴다. 색깔과 모양이 도미와 유사하지만 육질이 부드럽고 지방은 도미보다 훨씬 많다. 맛은 비교적 적으므로 양념을 하여 맛을 낸다. 도미류는 대부분 지질이 적어 담백한 맛을 내며 필수 영양소가 골고루 갖추어져 있고 미네랄 성분이 풍부해 간장과 신장의 기능을 향상시키고 소화에도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이것이 토종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도미류의 어족이 풍부하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이를 탐낸 일본 사람들이 우리 바다를 자주 침범하여 우리나라산 도미를 무단으로 잡아가곤 하였다. 오늘날 일본 사람들이 도미회를 필사적으로 즐기는 것도 예전에 우리나라 연해에서 잡아간 도미맛에 길들여졌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해 볼 수도 있다. 일본의 {요리물어}라는 문헌에는 도미를 이용한 '고려자'라는 요리가 등장하는데 그 명칭으로 보아 이것도 우리나라에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그 맛과 질이 우수한 우리나라산 도미도 근래에 와서는 어족이 고갈되어 귀한 물고기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틈을 타서 외국산 도미가 수입되고 있는 실정이다. 붉은돔(참돔)의 경우 수입산은 가슴지느러미가 길며 체형상으로는 등이 볼록하게 굽어있는 느낌을 준다. 색깔은 붉은색, 또는 도적색으로 짙은 편이며 복부 부분은 담색이다. 일본 연해에서 수입된 참돔은 국내산과 체형이 비슷하나 색깔이 담홍색으로 대체로 짙은 편이다. 국내산 붉은돔은 체형이 날씬한 유선형이며 머리가 대체로 둥근 편이다. 등에는 청록색의 반점이 있고 꼬리지느러미 끝에 검은띠가 있다. 몸체의 빛깔은 자연스런 선홍색을 띠고 있다. 은회색돔(감성돔)의 경우 수입산은 머리가 대체로 각이 져 있으며 입이 뾰족하다. 색깔은 검거나 회백색으로 바래져 있으며 등이 굽어 있고 두께가 얇은 어종도 있다. 옆에서 보았을 때 체고가 높다. 대체로 체형이 자연스럽지 못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국내 연안바다에서 건져올린 은회색돔은 체형이 매끄러운 유선형으로 자연스럽고 은회색의 광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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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고려장은 과연 고려시대 장례풍속이었나 - 이우석(건국대 박사과정)
고려시대에도 3년상이 있었을까
985년(성종4)에는 상복착용의 기간을 5등급으로 나눈 오복제도를 마련하였다. 고려시대의 오복제도는 중국의 것을 거의 그대로 수용한 조선시대와 달리 상대적으로 간략하게 구성되었으면서도, 부분적으로 친족에 따른 상복 착용의 기간을 다르게 규정하고 있다. 오복은 친족의 대상에 따라 입는 상복을 참최(3년), 자최(3년,1년), 대공(9월), 소공(5월),시마(3월)로 구분한 것이다. 참최 3년과 자최 3년은 자식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해 입는 복제이다. 3년상은 초상 후 1년이 되는 소상과 2년이 되는 대상, 그리고 대상 후 두달 만에 지내는 담제를 포함해 실제로는 27개원이 된다. 중국의 <의례>나 조선의 <경국대전>에 외할아버지를 위한 상복은 소공 5월로 되어 있는데, 고려는 자최 1년으로 높였으며, 처부모를 위한 상복도 시마 3월로 되어 있으나, 고려에서는 소공 5월로 높이고 있다. 1184년(명종14)에는 처부모복을 자최 1년으로 더욱 높이고 있다. 신랑이 신부의 집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몇 년간 신부의 집에서 머물러 생활하는 결혼풍습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처부모와의 관계가 돈독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상황이 복제에 반영된 것이다. 원래 부모의 상을 당하면 관리는 관직을 그만두고 상례를 집행해야 하는데, 고려시대에는 관리들에게 참최 3년과 자최 3년은 각각 100일, 자최 1년은 30일, 대공 9월은 20일, 소공 5월은 15일, 시마 3월은 7일의 휴가를 주었다. 또한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각1일, 대상, 소상제에 각 7일, 담제에 5일의 휴가를 주어 3년상이 허용된 오복제도의 취지는 벼슬살이를 통해 경제생활을 운영해 나갈 수밖에 없는 사족을 배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3년상은 오복제도가 마련되기 이전인 광종 때(950에서 975)에도 자율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유방헌은 아버지의 상을 당해 3년상을 마치고 있다. 그러나 3년상은 당시에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이와 더불어 주모되는 것이 여모이다. 여묘란 분묘를 상주가 3년간 보살피는 것으로 수묘 또는 수분이라고도 하였다. 전기에는 노비에게 분묘를 지키도록 하고 3년이 지나면 양인으로 신분을 상승시켜 주기도 하였다. 그만큼 여묘 3년은 고된 일이었다. 고려 중기가 되면 상주가 직접 부모의 분묘를 돌보는 기록이 보이는데,국가에서는 이러한 여묘자에게 정문을 하사하여 그 효행을 기렸다. 이렇듯 집에서 행하는 3년상이나 부모의 분묘 곁에서 행하는 여묘는 지배층에게도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관인들은 부모상에 따른 100일 동안은 휴가에 따라 백일만에 상복을 벗는 것이 일반적이었다.100일의 휴가는 본래 관직자를 위한 것이엇으나 사회지도층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이 100일만에 상복을 벗자 재야시족들이나 서민들도 이를 추종하게 되었던 듯하다. 국왕의 장례라고 하면 매우 엄숙하고 까다로운 의식을 떠올리기 쉬운데,고려 사람들은 국상에 대한 의식을 제정하지 않고 임시로 고전을 참고하고 전례를 인용하여 장례를 치렀다. 고려 국왕의 장례는 중국 한나라 이후 일반적으로 왕실에서 사용되던 이일역월제를 채택하였다. 보통 역월제라고도 하는 이일역월제는 27개월로 끝나는 유교식 3년상을 달을 날로 바꾸어 27일 만네 끝내는 단상제인데, 이는 왕의 승하에 따른 정치적 공백을 최소화하여 왕권의 안정적 계승을 위한 조처였다. 능에 장사 지낸 3일 후에 상복을 벗는데, 그 동안 종실 관리 백성등은 검은 갓에 흰 상복 차림을 하였다. 소상이 되면 혼전 또는 우궁이라 불리는 곳에 모셔 오던 왕의 초상을 사원으로 옮기고 대신 그곳에는 신주를 안치하여 아침 저녁으로 음식을 올렸다. 그리고 대상이 되면 혼전의 신주를 태묘(후의 종묘)로 옮겼다.
인간을 생각하는 마음이 살아 있는 상장례 통과의례 가운데 하나인 상장례는 흔히 보수적 성격이 강하여 변하지 않고 오래 유지된다고 한다. 통시대적으로 볼 때, 고려시대는 사찰에서, 조선시대는 사당에서 상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현대의 도시생활에서는 병원의 영안실이 그 기능을 넘겨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는 결혼예식장처럼 장례식장이 건립되어 이 곳에서 장례의식을 치른다고 한다. 또한 늘어나는 묘지로 인해 전국토가 공동묘지화 되는 추세에 직면하여 국가에서는 국토의 효율적 이용을 위해 매장 후 일정기간이 지나면 화장하여 가족 납골당에 안치하는 법안을 추진하고 있다. 전통사회에서 사회통합 기능을 수행했던 복잡한 장례의식들의 변화는 급격히 변모하는 현대산업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이지만 그 의식 속에 담겨 있었던 인간존중의 정신은 되새겨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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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랍문화의 이해 - 공일주
3. 인간과 인간
이슬람 공동체
개인, 가족 및 사회 공동체는 사회생활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기본 구성단위이며, 이 삼자간의 물질적, 인간적 상호작용 관계는 일찍부터 사회 과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되어 왔다. 오늘날 아랍 개개인과 그 가족 및 공동체도 오랜 역사를 통해서 문화적이고 종교적 전통을 지니게 되었다.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한 아랍인 개인의 기질은 곧 다른 아랍인과의 공동체 속에서 영향을 주고 받는다. 인간은 수직적으로 신과 관계를, 그리고 수평적으로 이웃 동료와의 관계를 가지며 산다. 사회, 문화적 영역이 다소 수정된다면 그 영역은 이슬람 공동체를 형성하는 신자와 동료 신자간의 결속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과 공동체 간의 고리라고 할 수 있다. 개인으로서 인간과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존재론적 현상에서 두가지 양상을 나타낸다. 즉, 신과 인간간의 수직적 관계와 인간과 사회간의 수평적 관계가 한 쌍을 이룬다. 사회, 문화적 실재를 나타내는 수평적인 경우에도 두가지 차이가 있다 .하나는 종교 공동체에 해당하는 신자들간의 상호 주관적인 개념으로서 순전히 이슬람적인 해석이다. 두번째는 구성원으로서의 여러 개별 신자와 종교 공동체간의 인과적인 관계가 있는데 이것은 서구사회에서 볼 수 있다. 이 중에서 첫번째 것을 택하는 것은 개인과 집단간에 존재하는 우선 순위에서 나온 것이다. 우선 순위 문제는 수평적인 축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고 수직적인 축도 고려되어야 된다. 다시 말해서 인간보다 신을 우선하는 것이 종교의 원리이다. 결국, 공동체를 이루는 상호주관성이 이슬람의 특징이다. 움마는 실제 이슬람 신자들의 공동체이고 이들이 합쳐져서 상호작용하며, 다소 제도화된 산물이다. 움마는 무언가를 공유하는 생활양식이다. 무함마드식 움마는 무함마드를 통한 계시에 근거를 두고 무함마드의 생활을 모범으로 따르는 신앙 공동체이다. 무함마드 사후 칼리파들은 신자들의 공동체를 제도화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움마는 이슬람의 정치조직과 완전히 겹치는 것이 아니었다. 정치조직 안에서 움마가 구성되고 존속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 결과 움마의 제도화는 다음 두가지 특징을 가졌다. 하나는 자립, 그리고 자활의 움마인데 중앙 집권적이고 계층적인 조직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움마을 조직화하려는 노력이었다. 이슬람 공동체의 초기 건설자는 아라비아 반도의 부족과 중동지역의 부족집단이다. 이 두 집단은 하나의 연속체를 이루었으며, 이런 친족 또는 부족집단은 움마를 조직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부족간 연합된 형태는 이슬람 역사에서 움마의 모양을 이루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그리고 널리 퍼진 신비주의 종단은 각 지역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광범위한 조직을 만들어 갔다. 그래서 이슬람이 전파되는데 그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가장 중요한 이슬람 공동체는 정기적인 집회를 갖는 모스크였다. 종교기금(와끄프, Waqf)에 의해 운영되었고, 금요설교와 비공식적 모임, 그리고 교육을 통해 무슬림의 생각들을 확산시키는데 모스크가 중요한 위치를 가졌다. 이슬람 역사상 많은 통치자들이 이런 사실에 유의하여 모스크를 활용했다. 오늘날에도 많은 정부들이 와끄프의 재산을 조정하거나 실제 관리하고 있으며, 이를 이용하여 짓거나 모스크 유지비로 쓰고 있다. 움마에서 제도화된 것은 아니지만 신자들에게 신앙고백과 결속이라는 두가지 상호활동이 있다. 움마는 공유된 무슬림 생활양식의 청사진이므로 같은 환경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떠올리게 하고, 그들 간에 모델이 된 행동은 집단의 동질성을 확인시켜 주는데 유익했다. 결속은 공동의 단체에 속하고 있다는 동질성과 안전을 지켜준다는 의미가 있다. 결속은 서로를 확인해 주고 무슬림이 다른 무슬림의 신원을 보충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동료 무슬림의 신원을 확인해 주는 것은 자기 확인은 물론 신앙고백도 포함된다. 여기서 동료는 자신의 거울이 된다. 결속은 동전의 한면과 같고 다른면에는 평등성이 있다. 이슬람에서 결속은 모두가 평등하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결속의 방법으로 신앙고백이 존재한다. 움마의 실질적인 표현은 명절이나 평상시 행사에 서로 나타난다. 전자는 순례와 희생제 축일에 나타나는데 순례는 공동체 의식과 형제애를 고양시키는 행사가 되었다.
아랍인, 이슬람 그리고 중동
전 이집트의 대통령 가말 압둘 나세르(Gamal Abdul Nasser)는 그의 책 ‘이집트의 해방’에서 세개의 동심원을 그려 세계속에서의 그의 조국 이집트를 그려 보았다. 세개중 가장 가운데 있는 원은 이집트를 둘러싼 ‘아랍인’이라 정하고, 아랍인은 우리(이집트)의 부분이오, 우리(이집트)는 아랍인의 부분이라고 하면서 이집트의 역사가 곧 아랍역사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라 정의하였다. 둘째번 원은 아프리카 대륙이라 하였는데 지리적으로는 나일강에 의해 이어지고 지도자적인 책임과 아프리카인의 의식계몽을 위하여 이집트가 묶여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셋째번 원은 대륙과 대양을 잇는 믿음의 형제들간의 영역이라 했다. 그것은 곧 이슬람이라는 둥근원이었다. 그러나 문화적인 관점에서 볼때 나세르의 세 동심원 중에서 두가지만 언급할 가치가 있다. 셋째번 이슬람이라는 원은 의미없는 내용인 것이다. 문화적으로 이집트는 다른 모든 아랍국가처럼 수세기에 걸쳐 이슬람 세계뿐만 아니라 아랍세계에 속해 있다. 그러나 문화적 요인을 관련지어 볼 때 이집트나 지중해 연안을 끼고 자리잡은 어느 아랍국가도 아프리카의 일부가 아니다. 그러나 수단은 국가명 자체가 아랍국가이지만 그 위치가 또 명확하다. 그것은 수단의 삼분의 일인 남부가 아프리카에 속해 있고, 나머지 북부 삼분의 이는 문화적으로 인종적으로, 언어적으로 아랍세계의 일부인 것이다. 문화적인 관점에서 볼때 아랍국가들은 블랙 아프리카(Black Africa)와 공통점이 없으나, 만약 모든 아랍국가가 포함될 수 있는 동심원이 있다면 작게는 아랍세계와 크게는 이슬람 세계가 그 원에 놓일 수 있을 것이다. 이 원은 지리적으로 유럽, 블랙 아프리카, 중앙 아시아 그리고 나이지리아와 이어지는 중간지역으로서 문화적인 정의에 따른 구분이 되므로 이 중개지역이 중동이 되는 것이다. 이슬람이라는 동심원은 아랍인 무함마드가 세운 일신교에 바탕을 둔 세계종교이다. 몇십년 안에 이슬람이 승리를 가지게 된 것은 인류역사에 독특한 현상이 되었으며, 스페인에서 기독교에 무릎을 꿇게 되는 15세기까지 교세확장을 계속했다. 터키에서 이슬람 정권은 18세기까지 강화되었으며, 그 밖의 지역 특히 중앙 아프리카에서도 이슬람은 계속 확장되었다. 오늘날 인류의 오분의 일 내지는 육분의 일이 무슬림이다. 아프리카 대서양 연안에서 파키스탄까지, 그리고 중앙 아시아에서 사하라까지 인구의 90% 이상이 이슬람을 신봉하고 가까이에는 인도네시아가 단일국가로서 1억 5천만명의 무슬림이 있다. 무슬림 세계 안에 둘째번 원 즉 중동이 있다. 중동은 영국이 제1차 세계대전 중에 걸프지역을 일컬었던 말로서 미국도 종전 후 함께 써 왔는데, 지금은 학자마다 지역구분이 다소 다르다. 가령 북으로는 터키, 남으로는 오만, 서쪽으로는 이집트, 그리고 동쪽으로는 이란에 걸쳐있는 모든 지역을 통틀어 중동이라 하기도 하고, 혹자는 대서양의 모로코에서 북아프리카의 수단을 포함하여 터키, 이스라엘,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 아라비아 반도의 모든 국가들과 이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하기도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지역이 근동(Near East)에 해당하기도 하여 가끔은 ‘중근동’이라 부르기도 한다. 하여튼 우리가 익히 쓰고 있는 중동이란 말은 아라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한 서남 아시아로 국한하여 쓰는 것이다.
이슬람에 의하면 세계가 두개의 영역, 즉 이슬람의 영역(House of Islam)과 전쟁의 영역(House of War)으로 나뉜다. 이슬람의 영역은 무슬림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이고, 나머지 세개는 비무슬림의 지배하에 있으므로 강제로 정복해서 지하드에 의해 이슬람 영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는 반면, 중동은 이슬람의 영역에 속한다. 무슬림 세계가 이슬람교에서만 그 정체성(Identity)을 찾고 있지만 중동은 종교가 아닌 문화적 개념이다. 중동은 문화적인 독특성을 특징으로 갖는 문화대륙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특징을 갖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이슬람인데, 이슬람만이 이들 민족을 중동이라는 카테고리안에 묶어 두는데 충분한 것은 아니다. 그 예로, 문화적인 관점에서 볼때 중동은 서쪽으로는 대서양까지, 북쪽으로는 지중해, 흑해, 코카서스, 카스피해, 그리고 투르크멘, 카자흐, 타지키스탄 공화국까지, 동쪽으로는 인더스강까지, 남동쪽으로는 아라비아해까지, 그리고 남쪽으로는 수단 영역까지 광대한 지역을 포함한다. 이들 중동지역에는 이슬람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기독교 공동체와 유대교 공동체가 있다. 터키와 모로코의 유대인, 시리아, 이라크, 레바논, 이스라엘, 요르단의 기독교인 들이 교회를 가지고 있고, 쿠웨이트, 바레인, 아랍에미레이트에도 석유가 나기 전부터 기독교 교회를 가지고 있었다. 중동에서 비무슬림 소수 공동체의 존재와 중요성을 간과해 버리는 예가 종종 있는데, 상당한 관심을 가지면 중동에서의 이슬람 이외의 타종교가 여럿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앞서 우리는 중동이 이슬람 세계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고 했으므로 아랍세계가 중동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아랍세계는 중동안에 위치한 핵이 된다. 지중해, 흑해, 아라비아해가 아랍세계는 물론 중동과 이슬람 세계와 인접해 있다. 그러나 북쪽과 동쪽으로 아랍세계는 터키,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과 같은 비아랍인이며 무슬림 중동국가들과 경계를 이루고 있고, 남쪽으로는 아프리카에 이르러 사하라와 수단 등에도 길을 열어놓고 있다. 아랍세계 자체는 지리적으로 두개의 부분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서남 아시아이고 다른 하나는 북아프리카이다. 이집트는 물론 서남 아시아는 주민의 모어가 아랍어라는 특징이 있고, 이집트의 서쪽으로 지중해 남쪽 해안을 따라 쭉 뻗은 북아프리카의 아랍국가들은 규모는 작지만 오늘날까지 베르베르어를 모어로 쓴다. 이집트나 아시아에 있는 아랍국가보다는 훨씬 활발하게 유럽어 특히 프랑스어를 식자층의 언어로 쓰고 있다. 아랍국가를 다섯으로 구분하면 첫째번은 지중해 남쪽해안에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이집트가 있고, 둘째번은 이집트의 남동쪽에 아랍국가 수단, 셋째번은 북동쪽에 있는 비옥한 초생달 지역으로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가 있으며, 넷째번은 동쪽에 아라비아 반도의 국가로서 사우디아라비아, 예멘 그리고 마지막으로 걸프지역이 있다.
그렇다면 아랍인은 누구인가? 앞서 말한 세 중심원에 해당하는 아랍인, 중동, 이슬람 중에서 첫째번과 셋째번만이 ‘아랍인의 의식’을 두드러지게 표현해 준다. 물론, 아랍인은 현대 아랍정치에서 자주 ‘중동’이라는 말과 익숙해져 있다. 주로 영어권과 불어권에서 쓰이던 중동이란 용어는 토착화된 용어가 아니기 때문에 아랍인들의 사고속에 문화적 개념으로 자리잡지 못한 것 같다. ‘아랍인(Arab)'이란 말은 이슬람 이전에 아라비아 반도와 시리아 사막에 살던 사람들을 가리켰다. 기원전 854년의 앗수르 기록에 의하면 아랍인들은 낙타들과 관련지어 등장하는게 확실한 것은 그들이 낙타를 기르는 사막의 베드윈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후 28세기를 거치면서 이제는 아랍인이 사막과 관련지어 생각되었다. 기원전 600년쯤 예레미야 3:2에 나오는 직유법’사막의 아랍인처럼‘은 이것을 잘 설명해 준다. 이보다 1세기 전에 이사야(13:20)는 텐트를 치는 아랍인을 가리키면서 그들이 사막에 사는 유목민이라고 생각했다. 이래서 아랍이라는 말과 베드윈(Bedouin)이라는 두 용어간의 개념상의 연관은 너무 긴밀하여 자주 아랍인을 베드윈이라 칭했다. 무함마드가 아라비아 반도와 시리아 사막 외곽지역으로 점령의 세력을 키워가면서 이때부터 ‘아랍’이라는 말은 둘째번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아랍인’이란 이슬람에 개종한 후에 그들의 조상의 언어를 버리고 대신 아랍어를 수용한 사람들을 가리켰다. 동시에, 새로운 영토에서 아랍인 정복자들은 그들 고유의 부족적 특징을 잃고 살았다. 그들이 도시 거주자가 되고 정착함으로써 새로운 국가에서 아랍인 정복자와 그 지역주민간에 있었던 초기의 차이는 점차 사라져 버렸고,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에 북아프리카와 서남 아시아에서 유일한 지배적인 인구가 되었다. 아랍과 서구의 많은 학자들이 아랍인은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고 애썼다. 그만큼 아랍인의 용어규정이 어렵지만 이것이 곧 아랍인의 의식구조와 면면히 결부되어 있으므로 그 답을 몇 가지로 나눠 설명하려고 한다. 첫째는, 아랍인이란 아랍어로 말하고 아랍문화 속에서 자라났으며, 현대 아랍국가에 사는 사람으로서 무함마드의 가르침을 믿고 과거 아랍제국의 영광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아랍국가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꼭 그렇지 않은 사람도 아랍인이라 생각한다. 가령, 모어가 아랍어이지만 북아프리카의 프랑스 문화에서 자라는 사람들은 자신이 아랍인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도 그들을 아랍인이라 부른다. 또 비아랍국가에 살고 있는 아랍인도 있을 수 있는데, 이를테면 프랑스, 미국, 영국, 독일, 라틴 아메리카 등지에 살고 있는 아랍인들은 사는 곳은 다르지만 아직도 아랍인이다. 그들은 무함마드를 믿지 않을 수도 있다. 또, 수십만 명의 아랍인 기독교인이 있는 것을 보면 위 정의는 간단하지 않다. 아랍인, 기독교인이다 해서 무슬림만큼 민족애와 조국애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볼수 없기 때문이다. 또, 공산주의자들이나 또다른 이유로 아랍제국의 영광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부류도 있다. 더구나 이민을 가서 다른 나라 시민권을 가진 아랍인들도 있지만, 그들 역시 아랍인이라는 동질성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이 밖에도 이집트의 콥트 기독교인과 아랍국가에 사는 유대인들이 있다. 이런 이유로 더 나은 정의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두번째로 바그다드의 소설가이자 시인인 자르라의 정의를 제안하고자 한다. 자브라는 “아랍어를 자신의 언어로 말함으로써 아랍인으로 느끼는 자”는 누구나 아랍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랍인들이 각기 다른 정치체계속에 살고 있지만 별개의 국가나 국민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아랍인들의 사고에는 적어도 1세대 동안에 아랍 지도자들이 품었던 생각은 아랍인은 하나의 국가, 즉 아랍국가를 이룰 거라는 것이다. 지금은 여러 국가로 나뉘어 있지만 조만간 하나로 만들어질 것이며,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사고속에서 모든 아랍인은 형제요, 단일민족의 후손들인 것이다. 이런 사고는 곧 이슬람과 연관된다. 이슬람은 아랍인은 물론 비아랍민족을 보듬고 있다. 이런 점에서 아랍보다는 이슬람이라는 용어가 더 대의명문이 서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전쟁의 영역’을 ‘이슬람의 영역’으로 바꿔 나가는 작업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아랍인에게 이 두 영역의 의미는 내부의 평화를 이교도나 무신론자들의 국가에 심자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국가나 비기독교 국가에 자신들의 모스크(사원)를 짓거나 선교활동을 하면서도 자신들의 영역 안에는 타종교의 선교가 절대로 못 들어오게 하는 것이다. 20세기 들어와서 서구지배와 서구문물의 침투로 전쟁의 영역에 대한 개념이 전통을 고수하는 아랍인들에게까지 다소 시대에 뒤떨어진 개념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위와 같은 전쟁의 영역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무슬림과 비무슬림 간의 차이는 매우 첨예화하였다. 아랍학자 클리포드(Clifford)는 아랍에 대한 서구의 개입의 결과로 아랍인은 점차 수심에 가득찬 시기심과 방어적인 자존심을 가지고 중세이교도에 대한 증오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고 하였다. 아랍세계와 무슬림 세계 사이에 역사적인 차이가 있음에도 아랍인들은 자주 아랍주의를 이슬람과 동일시한다. 원래 아랍민족의 종교이었던 이슬람이 아랍인을 동일시함으로써 둘 사이의 구별을 어렵게 만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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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손빨래의 즐거움
내가 아직도 손빨래를 한다고 하면 남들은 무척 놀란다. 세탁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힘든 손빨래를 고집하는 이유는 옷을 좀 더 깨끗하게 빨기 위해서다. 손빨가 힘든 것만은 아니다. 옷을 비비며 스트레스를 풀기도 하고 손으로 빨아서 더 깨끗해 보이는 옷을 보면 기분도 좋아진다. 그리고 간혹 남편의 바지를 빨다 보면 호주머니에서 남편이 미처 챙기지 못한 십 원짜리 동전부터 천 원짜리 지폐들이 나온다. 아이들이 과자를 사 먹은 뒤에 동전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옷을 벗을 때 미처 꺼내지 못한 동전도 간혹 줍게 된다. 그런 돈은 다시 일일이 주기도 뭐해서 저금통에 넣는다. 한번은 그렇게 해서 십만 원을 모은 적이 있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막상 생각지도 못했던 십만 원이 생기니까 보기만 해도 마음이 든든했다. 그 돈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나는 그 동안 갖고 싶엇지만 참아 왔던 여러 가지 물건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지만 돈을 들고 나가 기껏 산 물건은 남편의 생일에 주려고 산 카세트였다. '으이그 속상해. 왜 나는 맨날 내 것은 못사고 남편 거나 아이들 것만 챙기지?'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남편이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카세트를 사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남편은 그 선물을 받고 무척이나 놀란 모양이었다. "돈이 없을텐데 어떻게 이런 걸 샀어?" 빨래하면서 한푼 두푼 모은 그 동안의 얘기를 했더니 남편은 허허 웃으며 "이 카세트로 영어 공부 열심히 해서 당신 해외 여행 시켜 줄게"하고 말했다. 그뒤로 남편은 정말 출퇴근 할 때마다 카세트에다 어학 테이프를 넣고 다니면서 영어 공부를 했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가슴이 뿌듯했다.
최향란 님/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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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44 - 자연철학과 자연과학: 브루노(1548-1600년) 등
그때 세계에서는 1412년: 로마교회, 면죄부 판매를 비난한 보헤미아의 종교개혁자 후스를 파문 1581년: 갈릴레오 갈릴레이, 진자의 등시성 발견
지금은 자연철학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되어 있다.그러나 옛날로 올라갈 수록 자연과학보다는 자연철학이 더 일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부터 자연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그 영역이 점차 확대되었고 자연철학은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그 철학에서 과학에로의 과정이 잘 나타난 제1차적 시기가 르네상스 직후인 것이다. 옛날 사람들에게서 모든 생활이 인간과 자연의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오히려 자연은 방대하고 인간의 수는 적었기 때문에 자연의 위력이 인간의 능력을 지배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중국의 사상가들이 천이라든가 도라는 철학적 개념을 높이 여긴 것도 자연에 대한 철학적 관념을 따서 얻은 것이다. 그리스 인들은 운명은 절대적인 것으로 여겼다. 그 운명관은 자연의 반복되는 필연관에서 추상해낸 뜻이다. 이렇게 속을 모르는 자연을 대하면 자연은 우주와 통하며, 우주에 대한 생각은 철학적 견해와 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뒤 자연과학이 어느정도 발달되고 자연 속에 숨겨진 신비로운 사실들이 밝혀지면서는 대자연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의 생명체 비슷이 여겨지기도 했다. 자연은 인간까지도 포함한 어떤 신비로운 세계로 존재하는 것 같은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지금은 잊혀지고 있는 여러 학자들이 자연철학의 영역을 새로이 정립해나갔다. 아마 그중에서 지금도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브루노(G. Bruno,1548--1600) 같은 학자일 것이다. 그는 고대철학을 함께 연구한 도미니크 교단에 속하는 수도사였다. 그 당시까지의 자연과학의 이론을 묶어 자연철학을 연구, 발표했다. 그 사상이 당대에서 보았을 때는 너무 급진적이었기 때문에, 반종교적인 혐의를 받아 여러 곳으로 유랑생활을 하다가 체포되어 7년간 감옥생활을 강요당한 뒤, 한창 일할 나이인 52세로 사형을 당했다. 한때 사람들은 소크라테스 이후의 사상적 처형이라고 해서 큰 충격을 받았다. 3백 년이 지난 1900년에야 그의 업적과 죽음을 애석히 여기는 기념비가 새워졌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브루노의 학설을 배경으로 스피노자의 철학이 탄생되었고, 라이프니츠의 단자론 사상이 나온 것을 보면 그는 역시 새로운 역사의 개척자이도 했다. 사람들은 그의 자연철학을 범신론적인 보편주의 세계관이라고 보고 있다. 그 핵심을 만들고 있는 것은 자연적 신비정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에 대한 철학적 사고는 자연과학의 급속한 진전에 따라 그 입지가 약화되기 시작했다. 그의 위치를 뒤받은 과학자들로는, 수학적 과학의 존귀성을 강조하면서 실험을 통한 경험의 정밀성을 추진시킨 레오나르도 다빈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글로 천동설을 뒤엎고 지동설로 바꾸어 놓은 N. 코페르니쿠스(N. Coernikus, 1473-1543), 천문학, 수학, 물리학, 유성운행의 법칙을 발견한 요한 케플러(J. Kepler, 1571-1630) 등이 있다. 특히 케플러는 가설과 귀납방법을 병행시켰고, 자연과학은 질이 아닌 양적 연구의 정밀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물론 그 방법적 바탕이 되는 것은 수학이었다. 이밖에도 우리가 잘 아는 갈릴레오 갈릴레이(G. Galilei, 1564--1642)를 잊을 수가 없다. 그는 실험에 의하여 물체계를 수량으로 규정하는 분해적 방법을 제창했다. 약간 시대적으로는 뒤지나 아이작 뉴턴(I. Newton,1642--1727)도 이 시대에 활동한 사람들이다. 그도 만유인력 학설을 정착시켰고 미적분은 발견했는가 하면, 자연과학의 방법론적인 개척에 공헌했다. 이러한 과학자들이 한 시대를 풍미하고 지나간 뒤부터는 과거와 같은 자연철학은 서서히 그 성격과 방향을 바꾸어나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던 것이 19세기 후반기에는 놀라울 정도로 자연과학이 발달하고, 오늘의 기계와 기술의 왕국시대를 만들면서는 자연철학은 거의 그 위상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태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아주 최근에 이르러 발달된 자연과학과 기계 및 기슬의 남용이 자연훼손과 환경오염의 극치를 만들게 되면서는 다시 한번 인간의 어버이는 자연이며 자연을 파괴한 인류는 인간 자체의 파멸을 초래한 것이라고 떠들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나타나는 자연은 이미 고대인들이 주장했던 철학적 대상의 자연은 아니다.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되살리는 일이며, 가능하다면 원시자연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면 그것이 소망스럽다는 방향으로 되돌아 가고 있다. 인간은 자연과의 투쟁에서 더 많은 행복과 혜택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착각했다. 그러나 자연과의 조화, 자연의 밝혀지지 않은 혜택을 누릴 수 있음이 진정한 삶인 것을 깨달아가는 것 같다. 이때 새로운 정신이 등단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자연과학을 통한 자연의 육성, 인간의 지혜를 통한 자연에의 봉사가 인간적 삶의 정도임을 깨닫게 해주는 내용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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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
전북에서는 '생강'을 '시앙/새앙'이라고 말합니다.
감기가 극성을 부립니다. 겨울철 건강을 생각하셔서 생강차를 끓여 드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커피에 길들여진 우리 입맛을 우리차로 바꾸는 계기도 되겠지요. 생강으로는 생강엿을 만들기도 하고 식혜를 만들기도 합니다. 겨울 밤이 이슥할 때, 속이 출출할 때, 뒷마당에서 떠온한 사발의 식혜, 그 차갑고 달콤한 맛은 상상만 해도 즐겁습니다. 전북 완주군 봉동읍은 생강 주산지입니다. 이 지역에서는 생강을 '시앙' 또는 '새앙'이라고 말합니다.
" 아이, 시방 시앙 한 근에 얼마썩 가? " " 뭔 새앙값이 이르케 싸대야? "
전북 지방에서 쓰는 '시앙'은 이 지역 방언입니다. 표준어로는 '생강, 새앙, 생'이라고 써야 합니다. 이 지역에서 쓰던 '새앙'이란 말은 표준어가 된 것입니다.
" 요즘 새앙(생강) 한 근에 얼맙니까? " " 예, 생강 한 근에 이천원입니다. "
" 겨울철에는 생엿이 참 맛있습니다. "
새앙 한 근 사다가 따끈한 생강차를 끓여 가족끼리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면 어떨까요?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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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2장 사라진 사람들
차라리 남자이기를 포기한 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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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의 이름앞에는 언제나 마하트마<위대한영혼>란 수식어가 붙는다. 하얀 법복을 입고 맨발로 순례자와 같은 행렬을 이끌고 그는 인도 동해안의 단찌히로 가고 있었다. 제자들을 이끌고 소금을 만들러 가는 도중이었다. 1930년 3월 12일 영국 정부가 소금에 고액의 세금을 붙여 인도사람의 제염을 금지케 했으므로 이에 저항하는 사챠그라하 운동을 벌인 것이다. 즉 무저항, 불복종이야말로 인도인의 유일한 무기였던 것이다. 이 일로 간디는 푸나의 형무소에 투옥된다. 영국에 대한 항쟁으로 탄압과 투옥이 반복되는 생애였다. 영국에서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여 돌아온 것은 스물한살때였는데 그때부터 그는 인도인의 자유를 위해 수없는 단식에 들어갔다. 민중과 고락을 같이한 그의 사생활은 간소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조그만 집에서 살며 언제나 엷은 베옷으로 항상 반나체였다. 고기는 멀리했고 마시는 것은 물뿐이었다. 그는 79세의 노인으로 힌구교도와 회교도의 알력때문에 21일 간의 단식에 또 들어갔다. 14번째의 단식으로 이것은 이 두 교도들의 화해를 위한 기도였다. 죽을 때까지 단식을 결심하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지역 사람들의 마음이 화합할때 나는 단식을 끝낼 것이다. 단식한지 3일째 되던 날, 인도정부는 간디의 요구대로 파키스탄에 상당한 액수의 돈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많은 인도사람들은 이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간디가 인도와 싸우고 있는 이슬람교도를 돕기 위해서 단식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힌두교도와 시크교도들은 간디 집 앞에서 이렇게 외치며 시위했다. 피에는 피. 간디를 죽게 내버려 두자. 간디는 델리에 있는 모든 종교지도자들이 그들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평화를 회복하겠다는 약속을 받고나서 6일째 되던 날 단식을 그만 두었다. 간디는 자신만을 위해서는 짧은 시간도 쓰지 않았다. 단식이 끝나고 건강이 회복되기도 전 그는 또 일을 시작했다. 국민들에게 힘을 불어 넣고 고향에 가서 살게 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았다. 간디가 단식을 끝낸 지 얼마 안되어 기도회를 하는 곳에 폭탄이 떨어졌다.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는 않았다. 간디의 집안 일을 보던 파텔은 간디의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기도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을 모두 검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간디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거절했다.
내가 죽어야 한다면 기도회에서 죽고 싶다. 네가 나를 죽음에서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오직 신만이 나를 지킬 수 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삶의 끝은 죽음이다. 병이 나서 죽는 것 보다는 형제들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낫다. 내가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과 노여움을 버릴 수 있다면 다른 사람도 나에 대한 미움과 노여움을 버릴 것이다. 이렇게 말하던 간디는 40년 뒤에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죽음에 대한 간디의 생각은 힌두교의 교리를 따른 것이다. 인간은 신을 만날 수 없으면 그저 사라지는 것이라 믿었다. 죽음이란 강과 개울이 만나서 바다로 흐르는 것처럼 당연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1월 30일, 간디는 새벽 3시에 일어났다. 그리고 하루 종일 일하고 기도했다. 저녁 5시에 열리는 기도회에 늦었기 때문에, 간디는 파텔과 함께 서둘러 집을 나왔다. 영국인 기자 로버트스팀슨의 육성을 들어보자.
간디는 보통 때처럼 허리에 흰 천을 두르고 샌들을 신었으며 조금 추운 날씨라서 어깨에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는 친구들의 어깨에 팔을 가볍게 올려놓고 웃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 가기 위해서 계단을 올라가고 있을 때, 이 300명의 사람들이 간디에게로 몰려오고 있었다. 간디는 마지막 계단을 오른 뒤에 사람들을 향해 손을 가볍게 흔들어 인사했다. 언제나처럼 간디는 웃고 있었다. 그때 카키색 군복을 입은 30대의 땅딸막한 남자가 사람들의 첫 줄에 서 있었는데 그가 간디에게 다가서서는 총을 꺼내 몇 발을 쐈다. 간디는 오 신이시여! 하고 중얼거렸다. 몇 초가 지났다. 그는 쓰러졌고, 그리고 죽었다. 피가 그의 흰옷을 온통 물들였다. 범인은 힌두교인이었다. 힌두교 광신자 나투람고두제가 간디를 쏘았던 것이다. 그는 공범자와 함께 처형되었고, 살인을 도와준 5명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간디의 장례식은 백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신성한 줌나강 둑에서 행해졌다. 간디의 아들 람다스가 장작에 불을 붙였고, 그 장작은 14시간 동안 탔다. 간디의 남은 뼈는 봄베이 앞바다와 인도의 신성한 갠지스강에 뿌려졌다. 인도인들은 이 뼈를 띄운 성수를 앞다투어 마셨다. 네루 수상은 라디오로 간디의 죽음을 인도 국민에게 알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빛은 사라졌고 어디에나 어둠만이 남았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지도자이며 아버지인 간디가 죽었습니다. 전 국민이 간디의 죽음을 애도했으나, 그 부인의 거룩한 욕구봉헌의 기도는 알지 못했으리라. 미국의 라이프잡지 기자가 간디는 정말 위대하십니다. 재산을 다 바쳐 인도 국민을 먹여 살리고, 위로하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하고 찬탄 어린 인사를 건넸을 때, 그의 부인은 머리를 가로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남편의 위대함은 재산을 바쳐 가난한 동족을 먹인 일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우리 부부에게 내려 주신 성생활의 쾌락을 그분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기도로 바치고자 나에게 금욕을 말씀하신 후, 오늘까지 한 번도 어기지 않고 그것을 지켜오신 일입니다. 그것이 남자 간디의 위대함이었습니다. 부인의 나직한 이 말을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무언가가 내 목안에 뜨겁게 넘어갔다. 간디는 말할 것도 없지만 이 거룩한 욕구봉헌의 약속을 함께 지킨 간디 부인에게도 머리가 숙여졌다. 간디가 죽었을 때 그가 남긴 것은 샌들, 지팡이, 안경, 니켈로 도금한 시계, 중국산 물병이 전부였다고 한다. 영혼이 가난하기 때문에 소유라도 많아야 직성이 풀리는 것인지, 물질에 더욱 집착하는 부끄러운 우리네의 삶을 조용히 돌아다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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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8. 중국인들은 왜 가을을 싫어하나?
우리는 중국의 역사를 지나치게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알게 모르게 우리의 무의식에 남아 있는 중화사상과 주로 중국측 기록에 의존한 우리의 역사 지식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병자호란 때 우리가 겪었던 삼전도의 치욕이나 일제 36년의 식민지 시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중국인은 수많은 치욕과 수모를 겪어 왔다. 기원 전후경 중국은 빈번히 흉노라고 불리는 북방 기마민족의 침입을 받아 그 방비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흉노는 몽고계 또는 투르크 계로 불리는데 활솜씨와 승마 실력이 굉장히 뛰어나 언제나 바람처럼 기습하여 활세례를 퍼붓고 물건을 약탈한 후 바람처럼 사라지곤 했다. 평상시 그들은 중국 북부에 흩어져 살면서 말을 타고 유목과 수렵 생활을 하고 있었다. 초원에서는 봄에서 여름에 걸쳐 배부르게 풀을 먹은 말이 가을이 되면 통통하게 살이 오르지만 어느새 풀은 시들고 혹독한 겨울이 찾아오면 대지는 꽁꽁 얼어붙게 된다. 겨울이 오기 전에 흉노는 살찐 말에 올라타고 겨울 식량을 구하기 위해 따뜻한 남쪽 중국 본토로 밀려온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인은 가을이 되면 흉노의 습격을 두려워했다. <한서>는 `흉노는 가을에 온다. 살찐 말과 강한 활과 함께` 라고 중국인들의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다.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약 350년간은 북방의 유목민족인 흉노와 남방의 농경민족인 한이 전쟁과 화친을 되풀이한 남북 대립의 시대였다. 당시 양측의 관계는 힘으로서는 굴욕적이다 싶을 정도로 흉노의 일방적인 우세 속에서 유지되었다. 아버지를 죽이고 선우(흉노의 최고 지도자)에 오른 묵특이 만리장성 이북의 초원지대를 통일한 때는 마침 한고조 유방이 항우를 멸하고 한을 세운 때였다. 이 두 거대 세력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기원전 201년 유방의 심복이었던 장군 한신이 흉노군에 포위당하자 투항, 흉노 편에 가담한 사건이 발생했다. 진노한 유방은 직접 대군을 지휘하여 흉노를 공격하다가 평성이라는 곳에서 묵특의 군사에게 포위당하게 되었다. 죽음의 위기에 빠진 그는 묵특의 부인에게 뇌물을 주고 구명을 호소했다. 그녀는 묵특을 “두 군주께서는 서로 다투지 마십시오. 지금 한나라 땅을 얻는다 하더라도 초원에서 말 달리신 선우께서는 끝내 그곳에 살지 못할 것입니다”라며 설득했다. 묵특은 이에 유방의 목숨을 건져 주고 화친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의 내용은 형제맹약의 체결, 한의 공주가 선우에게 시집갈 것, 흉노에게 매년 솜, 비단, 술, 곡식 등 물자를 공급할 것 등이었다. 한으로서는 굴욕적인 불평등 조약이었고 이런 형태의 조약은 이후의 역사에서 송, 명과 북방의 거란, 여진, 몽고족 사이에서 반복되어 나타난다. 흉노가 한을 얼마나 조롱했던가를 좀더 살펴보자. 한고조 유방이 죽은 후 선우는 유방의 미망인에게 편지를 띄운다. “나 의로운 군주는 소와 말이 가득한 들판 가운데서 항상 죽국에 가 노닐고 싶었노라. 이제 그대도 홀로 되었고 독수공방 외로우니 우리 두 사람 모두 즐겁지 않을 것 같소. 우리 서로 갖고 있는 것과 갖지 않은 것을 바꿔 봄이 어떻소.” 이런 모욕적인 추파에 유방의 미망인은 “선우께서 저희 나라를 잊지 않고 글을 내려 주시니 우리는 그저 두렵기만 할 뿐입니다. 물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저는 연로하고 기력이 쇠하여 보행도 주체할 수 없습니다. 선우께서는 과히 허물치 마시고 제게 그같이 힘든 일을 요구하지 말아 주십시오. 대신 수레 두 대와 말 두 짝을 보내 드리옵니다” 라는 답장을 했다. 이는 한-흉노 관계가 거의 일방적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화친조약이 체결된 후에도 흉노는 2,3년을 주기로 주로 가을에 중국을 침략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새로운 조약을 체결, 물자를 약탈해 갔다. 이런 관계가 한의 우위로 뒤바뀐 것은 월남과 조선을 정벌하여 무위를 떨쳤던 한무제 때에 이르러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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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식 돈벌이 - 후지다 덴
제 1부 - 현금을 손에 쥔 나의 방법
인간 양성이 돈벌이의 비결이다
햄버거 대학이라면 아무래도 햄버거를 팔고 또 팔아갈 인간을 양성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확실히 맥도날드의 전통인 사업의 노하우나 매뉴얼도 가르치지만 역시 인간다운 인간의 양성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나는 햄버거 대학의 입학식 때에는 단연코 이런 말을 한다. '나는 여러분에게 우리 회사가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후세의 심판에 견딜 수 있는 인터내셔널한 인간이 되어 주십시오. 맥도날드에 있는 덕택에 여러 각도에서 사물을 볼 줄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인간이 되어 준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자신이 거기까지 성장했다고 생각하면 독립을 한다거나 전직을 생각하여 그만두겠노라고 사의를 표명해 와도 좋습니다. 나는 이 대학을 인터내셔널 비즈니스맨 양성학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월급을 받으면서 이 양성학교에 들어 온 것입니다. 그 결과로 우리 회사가 돈을 벌게 될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무튼 여러분을 소나 말처럼 부려서 돈을 벌려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참으로 근사한 격려사이지만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장사에 서툰 사람은 사원들을 소나 말처럼 부려 돈을 벌어야겠다는 식으로 생가하기 때문에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의 성장을 진심으로 염원하며 양성해 준다면 이상하게도 사원들을 소나 말처럼 부려 먹어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의 몇 배, 아니 몇 십 배 이상을 벌게 될 것이다. 상술의 근본은 인간의 상술이다. 인간 부재의 상술로는 돈이 벌릴 리가 만무하다.
맛을 조리사의 솜씨에만 의존하지 말라. 맥도날드 햄버거는 여태까지의 레스토랑의 상식을 하나씩 깨뜨리고 레스토랑 식당업계의 '태풍의 눈'으로 되어 있는데, 그 이유의 하나는 맥도날드 햄버거는 조리사의 솜씨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들 수가 있다. 여태까지의 레스토랑은 조리사의 솜씨에 많은 좌우되었다. 조리사의 솜씨가 좋으면 맛이 있고 조리사가 서투르면 맛이 없는 것밖에는 만들 수 없다. 그래서 조리사는 파리로 유학하여 요리 본고장의 맛과 조리법을 공부해 오기도 하고 일류 호텔의 식장에서 수업을 쌓지 않으면 안되었다. 일본의 식사 방법을 5만 년 전의 석기시대와 별로 다름이 없는데 이 일본 요리만 하더라도 일류 요리사가 되기 위해서는 각고의 수업이 요구되어 왔다. 예를 들면 일본 특유의 '사시미' 인데, 이것은 생선을 칼로 도려낸 것뿐인 간단한 요리이며 3만 년 전과 조금도 변함이 없다. 이것을 밥 위에 얹고 손으로 뭉치면 '니기리 스시'가 도니다. 참으로 단순하고 간단한 것이다. 그런데 이 '니기리 스시'만 하더라도 대단한 일이다. 밥을 잘 지을 수 있게 되기까지가 3년, 보기 좋게 죄어서 쥘 수 있게 되기까지는 최소한 5년이 걸린다느니 하여, 신출내기 요리사는 쌀을 퍼 온다거나 다 된 음식을 객석으로 나르거나 할 뿐 밥에는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게 한다. '니기리 1인분!' 이라고 손님은 가볍게 주문하지만 만드는 쪽에서는 굉장한 작업이다. 그런데 맥도날드 햄버거처럼 대량생산을 하는 경우에는 요리사가 서툴러서 맛이 떨어지거나 하는 일이 있으면 큰일이 벌어진다. 초밥집 같은 경우에 밥이 잘못되면 다시 지으면 되겠지만, 대량생산으로 만드는 햄버거이기 때문에 모조리 버리고 그것을 다시 만든다면 큰 손해를 보게 마련이다. 그래서 맥도날드는 기계를 사용하여 풋내기라도 언제든지 맛있는 제품을 생산 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냈던 것이다. 기계에 맡기는 일이므로 누가 어디서 조작하든 전세계에서 똑같은 맛의 햄버거가 만들어진다. 결국 맥도날드에서는 높은 급료로 일류 조리사를 고용할 필요가 없는 레스토랑을 세계의 도처에 출현케 한 것이다. 그러므로 햄버거 대학에서는 조리사를 양성하지는 않는다. 매뉴얼에 따라서 정확히 기계를 조작할 수 있는 파일럿을 양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정확하게 기계를 조작함으로써 수십 년의 수업을 쌓은 조리사가 만들어 내는 것보다도 맛있는 햄버거를 눈깜짝할 사이에 만들어 낼 수 가 있는 것이다. 비싼 급료를 지불하고 조리사를 고용하지 않아도 가능하며 세계적으로 균일한 맛을 내는 햄버거 - 이것이야 말로 이른바 유태 상술에서 말하는 '입'을 노린 최대의 상품이라고 나는 눈독을 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나의 그 눈은 틀림이 없었다. 세계 공통의 그 좋은 맛은 일본에서도 역시 환영을 받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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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어떤 탄원서
존경하옵는 검사님, 저는 지난달 20일 세상을 떠난 허영수의 어미 되는 사람입니다. 이런 글을 드려야 할 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이 글을 드립니다. 저는 태룡이를 용서하고 싶습니다. 검사님께서 태룡이를 용서해 주시면 영수 대신 태룡이를 아들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비록 하나밖에 없는 제 아들을 숨지게 한 태룡이의 죄는 밉지만, 그렇다고 그 어린것을 교도소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태룡이를 용서해 주십시오. 친자식을 잃은 제가 아들 친구마저 어두운 골방에서 괴로운 나날을 보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친자식을 잃은 대신 태룡이를 양아들로 맞게 해 주십시오.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하는 제 자신이 정말 제정신인지, 그게 정말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것인지 정작 제 자신도 잘 알 수 없어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어쩌면 제 자신을 속이는 일인 것 같아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강하게 고개를 흔들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한번 그런 생각을 하자 그 생각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태룡이를 미워하던 마음이 없어지고 태룡이를 가엾게 여기는 마음만이 일었습니다. 태룡이는 엄마가 없는 아이입니다. 엄마도 없는 아이가 친구를 죽인 입장이 되어 지금 재판을 받고 있으니 그 마음이 오죽하겠습니다. 태룡이도 아마 죽고 싶은 심정일 것입니다. 검사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태룡이는 그날 영수를 일부러 숨지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 결과는 엄청난 것이지만, 그 원인은 단순한 사고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날 영수와 태룡이는 교회 앞마당에서 장난기가 발동해 서로 장난을 치다가, 싸움이 된 것뿐입니다. 태룡인들 장난 끝에 영수가 콘크리트 바닥에 넘어져 숨질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둘은 아주 친한 친구 사이였습니다. 중학교를 같이 다닌 둘은 또 고등학교도 같은 학교를 다니게 돼 아주 형제 같았습니다. 둘은 늘 같이 붙어 다녔는데, 주로 태룡이가 우리 집에 자주 오는 편이었습니다. 태룡이는 인사성도 밝고 영수보다 의젓했습니다. 지금도 교회에 다녀오겠다고 꾸벅 인사하고 나가던 두 녀석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둘이 장난을 치다가 한 사람이 죽을 줄이야 그때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저는 영수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태룡이를 원망하는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며칠 전에 아들 앨범을 뒤적이다가 영수와 태룡이가 다정한 모습으로 찍은 사진을 보게 되었는데, 둘이 어찌나 다정해 보이던지 저는 태룡이만이라도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수는 이제 제 곁으로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시신을 대전 화장터로 보낼 때만 해도 금방이라도 영수가 눈을 뜨고 '엄마!'하고 제 품안으로 파고들 것 같았습니다만, 이제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면서 영수가 이제 제 곁에 있지 않다는 것이 더욱 확실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검사님, 영수의 죽음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잘못이 있다면 어미인 저의 잘못만 있을 뿐입니다. 모든 걸 제 잘못으로 알겠습니다. 그러하오니 태룡이를 저의 품으로 돌려주십시오. 태룡이를 그대로 감옥에서 썩게 할 수 는 없습니다. 아들을 먼저 보낸 이 어미의 마음을 헤아려 주십시오. 검사님께서 태룡이를 용서해 주시면 태룡이를 아들 삼아 세 딸과 함께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지금 태룡이를 받아들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태룡이는 평생 고통스러운 일생을 살게 될 게 뻔한 일입니다.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니는 제 딸들도 다들 제 뜻에 따른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탄원서를 검사님께 보내고 나서 아이들을 데리고 8 년 전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남편의 묘에 다녀올까 합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 때 따라 죽고 싶었던 마음을 아들이 다 잡아 주었는데, 이제 제 아들이 죽어 흔들리는 마음을 남편을 통해 다잡고 싶습니다. 검사님, 부디 아들 잃은 이 어미의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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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테리’ 이 말은 그리스어로 ‘자궁’이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당시 의사들의 히스테리에 대한 의식이 드러나 있다. 당시 의사들은 이와 같은 정신신경계통의 병은 특별히 여성에게 많은 병이고 자궁의 기능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안녕하십니까?”하고 인사를 한다. 밤새 아무 탈없이 잘 지냈느냐는 뜻이다. 중국인들은 “아침밥 먹었느냐?”, “위장에 별 탈 없는냐?”하고 인사를 하고, 네덜란드인들은 “식사를 잘 했느냐?”고 말한다. 또 그리스인들은 “기쁨을(Rejoice)!”하고, 유태인들은 “평화를(Shalom)!”하고 인사한다. 그리고 폴란드인들은 “당신은 행복하십니까?”라고 인사한다.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일까? 신.구약에 7,000번 이상 나오는 Lord일까, 혹은 여화일까. 출애굽기 3:14-15절에서 하나님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I am who I am.”이라 하셨다. 이는 “I am that I am.” “I am he who is.”로 표현되는데, 즉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심을 뜻한다.
What a guy! 만약 영국인이라면 이 말을 조롱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이라면 칭찬으로 여길 것이다.
doctor 미국 남북전쟁 때에는 장의사(undertaker)를 의사(doctro)라 하였다.
예수와 스크라테스는 책을 한 권도 쓰지 않았다. 스승 예수와 소크라테스가 한 말을 제자들이 받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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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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