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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51 호
4339.11.05 (09.15) : Music Off = Esc
-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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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 風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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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시며 → 자유글판 |
- 한 그릇의 밥으로도 은혜를 만든다 -
사람은 대개 남에게 기대기 좋아하는 감정을 보이지 않는 곳에 숨기고 있다. 그것은 좀체 밖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뿐, 안으로는 항상 꺼지지 않는 불씨의 모습을 하고 살아 있다. 어려운 일일수록 스스로 그 일을 해결하려들지 않고 누군가가 도와 줘서 쉽사리 그 일이 해결되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 역경에 처한 사람일수록 그러한 기대감이 곧 약이 된다는 말도 있지만 오히려 그런 사람일수록 그런 기대감은 ' 독 '이 될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한다.
남에게 은혜를 베풀 때에는 처음에 가볍게 하라는 옛말이 있다. 만약 처음에는 무겁고 나중에 가볍게 한다면 그 은혜를 모르는 것은 물론 오히려 푸대접한다고 원망을 듣기 쉽기 때문이다. 한 그릇의 밥으로도 은혜를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면 기꺼이 그를 도와 주라. 밤에 한 일이 낮이면 나타나듯이, 아무도 모르게 그를 조금 도와 준 일이 나중에 그를 큰 사람으로 만나볼 수가 있다.
작은 것이 오히려 큰 기쁨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그대는 지금부터 알고 행동하라.
- 이규호의 <에세이 채근담>중에서-
- 글 주신분 : 호단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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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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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교육이란 이 세상 여기저기에 흔하게 널려 있는 유일한 것이며, 아무나 가지고 싶은 만큼 가질 수 있는유일한 것이기도 하다. /조지 호레이스 로리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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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내잠 속에 비내리는데 - 이외수
내 고향 내 친구들
내 고향은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상백리. 봄이면 햇빛 좋은 동산 아래 문둥이들 마을이 고즈너기 가라앉아 있고,진달래꽃 활활 불붙어 까닭 없이 눈물 나던 곳. 할머니하고 나하고 단둘이 살면서 이삭 줍고 동냥하며 보내던 그 시절이하나 서럽지않은 지금, 고향을 다시 생각하면 무엇하리, 고향을 생각하면 무엇 하리. 친구들하고 변천 벚꽃 환한 풍경을 바라보면서 학교로 가면 천막 교실 안에서 기다리던 선생님. 정택상 선생님.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신지. 가르치시기를,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하셨는데 어린 제자는 이제 다 커서 길바닥에 깔려 있는 돌들이 모두 황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몇 십 번, 썩을 대로 다 썩어서 비틀비틀도 몇 십 번. 때로는 간절히 고향에 돌아가고 싶지만, 고향에 돌아가면 무엇을 하리. 다시 고향에 돌아가면 무엇을 하리.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낯선 사람들이 모여 차지한 고향. 군대 가기 직전에 한번 가보니 고향은 낯설기만 하고 나를 반기는 건 주막의 몇 잔 술. 그러나 이제는 모두 고향을 바꾸어 살고 있거니. 친구들하고 봇도랑 막아 놓고 살진 미꾸라지 잡던 그 들판도, 농약 무더기가 푹푹 쏟아져서 박토가 되고, 어린 마음 가슴 설레던 일들도 무참히 깨달아져서 소원도 믿음도 하나 없는데, 빌어먹을, 누군들 고향이 따로 있을까. 한때는 방세가 몇 달이나 밀려서, 하루 한 끼만 먹어도 아무 말 안하고 살던 내 마누라의 순정속에 괴롭다가 순경 아저씨한테 노상 강도 누명까지 쓰고 매도 맞다가 아니아니 그 이전에는 더 많이 서러운 일 당하며 떠돌다가 그럭저럭 뿌리 내린 강원도 땅. 나는 한 그루 병든 나무라 해도 더러는 햇빛 좋은 날 시시한 꽃이라도 한 이파리 남 보이지 않게 피우고 싶으니, 벌이건 나비건 지나다가 참으로 엿같이 사는 내 인생 어느 한 부분에 잠시 앉으시어 내 고향에 대한 말을 전해 주소서. 그리고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상백리까지 날아가서 겨울에 발가락 비져 나오는 짚세기 신고 바람 피해 물마른 도랑을 웅크린 모습으로 나란히 등교하던 내 친구들한테까지 전해 주소서. 그대가 서있는 그 자리가 바로 고향이고 그대 곁에 서 있는 그 사람이 친구라고. 이제 어디에도 고향은 없거니. 나이 서른이 넘고, 쓰러지기도 서른 번넘고 그러다 보면 고향도 없거니. 그대가 눕는 자리가 고향이고 그대가 눈 뜨는 자리가 고향인 것을. 이제 다시금 고향을 생각한들 어디에 고향이 있으리. 이제 다시금 친구들 생각한들 어디에 친구가 있으리.
우리가 청명한 목소리로 한나절을 보내던 그 빈 터에도 불도저의 강인한 이빨이 박히고, 박힌 뒤에 뒤집혀진 흙더미 위로 생경한 콘그리트 건물들이 들어서고 해질녘 그 밑에 우리는 그늘이 될 뿐 다시 모여 앉은 바람이 될 뿐. 정말로 우리가 사는 그늘이 모두 고향이고 우리가 만나는 바람이 모두 친구인 것을. 어디에 적이 있고 어디에 칼이 있으리. 아무데서나 우리는 끌어안고 아무하고나 우리는 울면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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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지식/생활/건강/의학 |
- 음식 토정비결 - 전영순,하정화
<해삼물류>
40.미역 - 산후 조리에 빠질 수 없는 회복식
아기를 낳은 부인들은 왜 미역국을 먹을까? 이것은 단순히 먼 옛날부터 전해내려오는 관습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아니다. 이러한 관습에는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 미역에는 미네랄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칼슘의 함량이 많다. 이러한 칼슘 성분은 뼈와 이를 튼튼하게 할 뿐만 아니라 산후 자궁수축과 지혈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따라서 해산날이 가까워지면 미리 미역을 사다가 놓는데, 이때 장사꾼이 미역을 그대로 주는가 꺾어서 접어주는가에 따라 순산을 점쳐보는 습속도 있다. 미역을 꺾어주면 그 미역을 먹을 산모가 아이를 낳을 때 난산을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모가 먹을 미역은 꺾지 않고 새끼줄로 묶어서 주었다고 한다. 요즘에는 시험에서 떨어지거나 회사에서 해고 당하는 일을 흔히 '미역국 먹었다'고 표현한다. 그것은 아마 미역의 표면이 점성 물질로 덮여있어 미끈거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시험과 승진을 앞둔 사람들은 미역국을 기피하기도 하지만 미역을 많이 먹으면 신진대사가 잘 되기 때문에 머리가 맑아져서 뇌의 활동도 활발하고 성적도 오히려 좋아진다. 그러므로 재수없다는 속신 때문에 미역을 기피할 필요는 전혀 없다. 미역은 갈조류 곤포과에 속하는 해조로, 우리나라 동남해안에서 많이 난다. 외해에 면한, 또는 외해에 가까운 바위나 돌에 착생하며, 만 1년생 해초다. 지방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가을에서 겨울 동안에 자라고 봄에서 초여름 동안에 유주자(무성포자)를 내어서 번식한다. 유주자는 곧 발아하여 현미경적인 배우체(유성세대)로 되어서 여름을 난다.
미역은 양식이 성해지자 자연산 미역은 거의 쇠퇴하게 되었다. 미역은 우리나라 전 연안에 분포하고 있으나 양식은 동해남부연안과 완도를 중심으로 하는 남해안에서 가장 성행하고 있다. 현재는 가격유지를 위해서 생산을 억제하고 있는 실정이라서 생산량이 그다지 많은 편은 아니다. 그러나 수요만 증가하면 생산량은 급격히 늘릴 수 있다. 미역을 비롯한 해조류는 산이나 들야채에서 얻을 수 없는 영양을 주는 것 외에도 그 깊고 신비한 푸른빛과 매끄러운 표면에서 느껴지는 독특한 촉감, 그리고 신선한 향기로 먹는 즐거움을 한층 더해준다. 미역을 즐겨먹는 사람들은 주로 우리나라와 일본 사람들이다. 반면에 서양사람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경우 미역을 언제부터 먹게 되었는지 문헌상의 기록이 없어 알기 어렵지만 식용의 역사는 무척 오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서기 1900년 경에 나온 {고려도경}에는 '미역은 귀천을 막론하고 많이 먹고 있다. 그 맛이 짜고 비린내가 나지만 오랫동안 먹으면 그런대로 먹을만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에는 문종이 미역을 신하들에게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미역을 식용해온 역사는 무척 오래되었으며 우리나라의 특산물임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 겨레의 출산풍습과 밀접하게 관련하여 이어져 내려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식탁의 찬거리로 오르내리고 있는 것이다.
성분
미역의 주요 성분은 무기질과 각종 비타민이라 할 수 있다. 이중에서도 칼슘의 함량이 많고, 인(P)의 함량비율이 좋다. 특히 미역에는 미네랄이 풍부하게 들어있는데 그중에 요오드 성분은 갑상선 호르몬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것이다. 갑상선 호르몬은 심장과 혈관의 활동, 체온과 땀의 조절 등 신진대사를 활발히 하는 작용을 한다. 이 요오드가 체내에 부족하면 신진대사가 완만해지고 적게 먹어도 자꾸만 살이 찌게 되는 것이다. 또한 요오드는 전신의 노화를 막아준다. 산후에는 특히 신진대사가 활발해야 하는데 이 때 미역으로 요오드를 제대로 공급해줘야 갑자기 몸이 비대해지는 현상을 막을 수 있다. 미역에는 또 알긴산이라는 소화되지 않는 물질이 들어있다. 이 물질은 식물섬유의 일종으로 변비를 해소하고 발암물질을 체외로 배설시켜주며 장내 나트륨의 흡수를 막아주어 고혈압도 예방한다고 한다. 한편, 미역은 지방질이 적은 저칼로리 식품으로, 다이어트용으로도 인기가 높다. 실제로 마른 미역 100g에는 지방이 1.3g정도 밖에 들어 있지 않고 그 대신 리놀산과 에이코사펜타인산(EPA), 후코스테롤 등 동맥을 부드럽게 하고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성분이 많이 들어 있다. 또한 미역에는 혈압강하작용을 하는 라미닌(laminine)이라는 아미노산이 함유되어 있으며, 혈액의 콜레스테롤의 양을 감소시키는 효과도 있다. 섬유질의 함량이 많아서 장의 운동을 촉진시킴으로써 임산부에게 생기기 쉬운 변비 예방에도 효과가 있다. 그리고 자극성이 적어 자극성 음식물을 기피하는 산모에게 매우 적합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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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임새
미역은 주로 국으로 끓여 먹는다. 송송 썬 파와, 다진 마늘 한 숟가락 정도만 있으면 다른 재료 없이도 시원하고 깔끔한 미역국을 끌일 수 있다. 그러나 보통 쇠고기, 홍합, 광어 등을 넣어서 끓이는 것이 상례다.
이밖에 미역을 사용한 요리나 반찬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생미역을 잘게 썰어서 장과 기름을 치고 주물러 무치면 미역무침이 된다. 마른 미역을 잘게 썰어 기름을 쳐서 간하여 번철 등에 볶으면 미역볶음이 되는데 고소한 맛이 난다. 생미역을 손바닥 크기로 잘라서 고추장을 넣고 밥을 싸서 먹는 것을 미역쌈이라 한다. 마른 미역을 반듯반듯하고 약간 잘게 썰어서 끓는 기름에 튀긴 것을 미역자반이라 하는데 이것은 도시락 반찬이나 술안주로 좋다. 잘게 뜯은 생미역에다 고추장, 된장, 고기, 파, 기름, 깨소금을 쳐서 주물러 물을 약간만 붓고 끓이면 미역지짐이 된다. 물에 빤 미역을 잘게 뜯어 양념한 고기와 한데 무쳐서 볶은 것을 냉국에 넣고 초를 친 미역찬국은 더운 여름철에 시원한 맛을 더해준다. 한편, {동의보감}에서는 미역의 약성에 대하여 '성질이 차고 맛이 짜며 무독하다. 속열을 버리고 혹의 결기를 다스리며 이뇨작용이 있다'고 하였다. 미역의 저장방식을 옛날과 오늘이 다르다. 옛날에는 여러 포기를 겹쳐서 펼쳐, 길이 약 2m, 너비 약 15cm 정도의 크기로 만들어서 햇볕에 건조시켜서 보관, 저장하였다. 하지만 요즘에는 100℃의 물에 잠시 데쳐서 소금으로 주물러서 소금에 절여 저장하기도 한다. 소금절임은 건조미역보다 장마철에 변질하지 않아서 보관성이 높다. 미역을 물에 담그었을 때 지나치게 풀리지 않은 것이 좋으며, 색깔을 내기위해서 황산구리를 사용한 것은 인체에 좋지 않다.
이것이 토종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미역이 각광받는 식품이지만 서양은 물론 가까운 중국만 하더라도 미역은 낯선 식품이다. 중국에서는 우리나라 미역을 '신라미역' 또는 '고려미역'이라 하여 약재로 사용했다고 한다. 요즈음에는 대부분 미역을 양식하지만 아직도 자연산 미역을 생산하는 곳도 있다. 그 예로 진도미역을 꼽을 수 있는데 이 고장에서는 바닷가 바위에 붙어 자라는 천연미역을 채취하여 말린다. 특히 진도군 조도 일대에서 나는 것이 가장 유명하다. 또한 경남 양산 지방의 기장미역은 예로부터 유명한 이 고장의 특산물이다. 기장미역은 그 질이 워낙 뛰어나서 조선시대에는 임금에게 진상되었으며 아직까지도 그 명성이 이어져 내려온다. 그러나 미역은 우리나라 어디에서 난 것이든 우리 풍토에서 자란 토종이다. 따라서 어느것이 진품인가를 따지기 전에 다양한 가공방법을 개발하여 수요를 늘려나가는 것이 급선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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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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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술에 울고 웃던 고려인 삶의 빛과 그림자 - 홍영의(국민대 박물과 학예원)
술에 얽힌 사연도 가지각색
술은 예로부터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백가지 약의 으뜸’이라 하는 반면,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광약’이라 하였다. 어떤 사람에게는 약주가 되고 위로주가 되기도 하지만, 오히려 술 때문에 몸을 해치고 가산을 탕진하는 사람도 있고, 주색에 빠져 나라를 망치는 위정자도 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가전체 소설인 <국순전>과 <국선생전>은 이러한 술을 모델로 삼은 것이다. <국순전>은 무인정권 때 현실에 대한 불만과 포부를 토로하며 지내다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죽은 임춘이 지은 것이다. <국선생전>은 한 세대 정도 차이가 나는 이규보가 지은 것으로, 그는 만년에 시. 거문고와 술을 좋아하여 삼혹호 선생이라고 불린 주성이었다. <국순전>과 <국선생전>은 형식상 인간과 술의 관계를 통해서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조명해 보고자 한 점에서 비슷한 체제를 갖고 있으나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국순전>은 인간이 술을 좋아하게 된 것과 때로는 술 때문에 타락하고 망신하는 형편을 풍자한 것으로, 당시의 국정의 문란과 병폐, 특히 관료들의 발호와 타락상을 증언하고 고발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국선생전>은 신하는 군왕을 도와 나라를 다스리는 이상을 바르게 실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신하가 총애를 받게 되면 자칫 방자하여 신하의 도리를 잃게 되고, 국가나 민생에 해를 끼치는 존재로 전락하기 쉽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자신의 몰락까지 자초하는 경우가 허다하므로, 신하는 신하의 도리를 굳게 지켜야 하고 때를 보아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작품을 남기면서도 서로 상반된 삶을 살아간 임춘과 이규보의 행태는 지금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시 지식인들은 무인정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느냐 죽느냐, 농민의 힘겨운 외침을 외면할 것인가 하는 갈등을 겪었을 것이다. 임춘이나 이규보 역시 생활고와 엘리트의식에 사로잡혀 무인정권에 순순히 젖어들었다. <국순전>과 <국선생전>은 자신들의 그러한 처리를 반영한 작품이다. 따라서 그 주인공은 바로 현실에 순응한 임춘과 이규보 자신이었고, 현실에 순응한 삶은 단술과 쓰디쓴 술, 텁텁한 술 그 자체였다. 어느 분석에 따르면, 역사의 흐름을 직. 간접적으로 변화시킨 쿠데타의 음모와 그 주위에는 항상 술이 따라다녔다고 한다. 반대파의 요주의 인물을 꼬득이거나 고립시키기 위하여 주지육림의 질펀한 향락을 베풀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 국한하여 보더라도 일대사건인 무인정변의 연원이 술 때문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을 정도다. 의종의 향락, 정중부의 수염을 태운 김돈중의 취기, 무인의 피비린내 나는 쿠데타, 그리고 최후 승리자의 축배를 위하여 술은 분명 필요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술은 권력을 휘두르는 집권층과 사치를 일삼는 귀족층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술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별의 아픔을 겪어야 하는 연인들과 생활고에 지칠대로 지친 일반민의 위안이자 벗이었다.
음주문화 소묘
고려인들은 술을 어떻게 마셨을까? 송나라 사신 서긍은 그의 견문록인 <고려도경>에서 “고려인들은 술을 좋아하되 좋은 술은 얻기가 어렵고, 서민들이 마시는 것도 맛도 싱겁고 빛깔도 탁한데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맛있게 마신다.”라고 하였다. 또 “안주로는 말린 고기와 해산물을 섞어서 내오지만 풍성하지 않고, 술을 마실 때 잔 돌리는 절도가 없으며 많이 내오는 것을 힘쓸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사람인 서긍의 눈으로 고려의 음주 습관을 표현한 것일 따름이다. 술에 얽힌 일화 가운데 주목되는 것으로, 과거 합격자 출신의 관원을 우대하며 결속을 다지는 문주회가 있었다. 옛 풍습에 문주회가 있으면 삼관의 관원들이 큰 술잔을 잡고 술을 가득히 따르며 선생을 부른다. 고관으로부터 아래로 낮은 관직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게 했다. 그 모임에 참여한 자는 비록 달관 귀인이라 할지라도, 홍지 위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으면, 선생이라 부르지 않고 대인이라 불렀다. 이 풍습은 고려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것을 보면 고려시대에도 지금의 회식과 같은 절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이 참여할 경우, 선생이라 부르지 않고 대인이라 불러 구별하였다. 또한 충렬왕 때는 ‘구직주’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청렴하기로 소문난 이행검이 고밀의 임명장에 서명하지 않았는데도, 술 잘 빚기로 소문난 고밀의 처가 매번 술로 아첨하여 벼슬을 얻었다는 것이다. 권세가나 지체 높은 관리가 마셨을 그런 술과는 달리 서민들과 밭에 거름 주는 일꾼들은 잠시 쉬어 가며 아무런 부담없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쉽게 빚을 수 있는 막걸리를 마셨을 것이다. 계와 결사의 모임인 향도들도 남녀노소가 차례대로 모여 앉아 술을 마시며 결속을 다진 일도 있다. 그 힘든 생활 속에서도 잠깐의 여유를 가지고 마셨던 이 술은 분명 새로운 세계로의 동경과 함께 삶의 질을 재생산하는 활력소가 되었음직하다. 술은 바로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었으며, 여기에 술의 참모습이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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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사회/문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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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랍문화의 이해 - 공일주
2. 인간의 신에 대한 관계
이슬람 신비주의
1. 영적 도달점의 단계변화
1)세속으로부터의 이탈
ㄱ. 회개:세속적인 생활을 단념하고 신에게 귀의하려는 결심 ㄴ. 금욕:회개가 인간에게 금지된 것을 끊는 것이라면 금욕은 인간에게 허용되는 것마저도 단념하는 것, 그리고 금욕은 신의 사랑을 위해 일체의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ㄷ. 가난:회개와 금욕을 실천한 자는 자신의 가난의 단계에 놓여 있음을 알고 세속의 부와 향락을 버리고 가난 속에서 완전성을 찾으려 힘쓴다. ㄹ. 인내:현세의 욕구를 되돌아가지 않기 위해 인내의 과정을 거친다. 인내의 단계를 통해서 모든 격정이 사라지고 기쁨의 단계에 접어든다.
2) 마음 내부의 정화 세속적인 향락에 대한 물질적인 단념만으로는 안 되고 본격적인 싸움은 마음 자체의 정화가 마음 속에서 일어나야 한다. ㄱ. 명상:신이 인간을 바라보며 인간 또한 신을 바라볼 수 있다는 확신을 감지하는 것이다. 신의 영광을 찬미하는 단계로서 인간은 신에 몰두하게 된다. ㄴ. 성찰: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주의하여 성찰한다. ㄷ. 충실:일체의 세속적인 욕구를 끊고 신에게 복종함으로써 신을 찾는 단계이다. ㄹ. 진실:충실의 극치이며 말이나 행동, 결심, 그리고 신에게 향하는 자세가 진실되어야한다. ㅁ. 두려움과 소망:인간이 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경외심을 갖고 인간의 노력 여하에 따라 원하는 일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ㅂ. 전적인 신뢰:인간 자신을 신에게 전적으로 떠맡기는 것이다. 자신의 완전한 믿음을 신에게만 둔다. ㅅ. 기쁨:전적인 신뢰에서 발전한 것으로 어떠한 어려움이나 즐거움이 오더라도 자신에게 내려진 축복으로 알고 기쁘게 받아들인다. ㅇ. 감사:모든 고락에 대해 기뻐하고 그것을 내려 준 신에게 감사한다.
2. 영적상태의 단계변화
1) 사랑:신의 사랑은 모든 영적상태의 바탕이 된다. 완전한 사랑을 이룬 자는 모든 영적상태를 이룰 수 있다. 사랑은 상호교통이 되므로 수피는 신을 사랑하고 심은 수피를 사랑한다.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말은 인간을 자신의 곁에 두려는 것이다. 2) 그리움:마음 속에는 신의 지식을 더 많이 얻고자 또는 신에게 이르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 3) 친밀과 근접:수피와 신과의 사이에 놓인 베일이 거두어지면서 가까워지는 단계이다. 4) 신과의 연결:구하는 자와 신과의 아무런 베일도 없는 최고돌의 영적상태이다. 5) 자아 소멸과 자아 연속:구하는 자의 마음이 신의 내부에서 완전히 소멸되는데, 이는 신 안에서 자아가 영속되는 단계로 가는 문이다. 이 밖에 압드 알라 알 안싸리가 쓴 ‘여행자들의 단계’에는 신비적인 체험에 이르는 단계가 더욱 논리정연하고 상세하게 쓰여 있다. 그는 신비주의의 길에 들어서는 방법으로 열 개의 부문으로 나누고, 각 부문을 열 개의 장으로 세분했다. 다음은 그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을 쿠란의 인용을 통해서 정리해 본다.
처음. 1. 눈뜸(수라 34:45):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훈계를 주건대 너희는 알라 위에 서리라. 2. 귀의(수라 49:11):회개하지 않는 자들아 그대들은 죄악을 저지르는 자다. 3. 자기반성(수라 59:18):믿는 자여 알라를 경외하라. 각 영혼이 내일을 위해 나아가는 것을 생각하게 하라. 4. 회개(수라 39:55):네 알라께 의지하라. 5. 숙고(수라 16:46):우리는 너희에게 회상을 보냈다. 6. 기억(수라 40:13):그러나 회개하는 사람을 빼고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7. 파지(수라 3:98):알라와 결속을 단단히 묶어라. 8. 도피(수라 51:50):그러므로 알라에게 도피하라. 9. 고행(수라 23:60):두려움이 가득찬 이들은 알라께로 돌아가느니라. 10. 경청(수라 8:23):알라가 그들로 하여금 듣게 하리라.
끝
91. 영지(수라 5:86):그들이 무함마드에게 보낸 것을 들을 때 그들이 인식한 진리 때문에 눈물이 넘쳐 흐르는 그들의 눈을 보리라. 92. 소멸(수라 55:26):지구 위에 사는 모든 것이 멸망하나 알라의 모습은 변치 않는다. 93. 영속(수라 20:75):알라는 더욱 좋으시고 늘 변함이 없다. 94. 검증(수라 2:262):왜 그대는 믿지 않는가? 95. 혼동(수라 6:9):그들 자신이 갈피를 못 잡는 일에서 혼동되리라. 96. 발견(수라 4:110):알라가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자애로우심을 발견하리라. 97. 박탈(수라 20:12):그대의 신발을 벗어라. 98. 고립(수라 24:25):그들은 알라가 진리임을 안다. 99. 일체(수라 8:17):그대가 던졌을 때 던진 자는 그대가 아니고 알라가 던졌다. 100. 합일(수라 3:16):알라는 신이 아니고 알라임을 입증해 준다.
이상과 같이 수피들은 신인합일을 이루기 위하여 인간의 열등한 자아와 끊임없이 투쟁하여야 했다. 그래서 자신의 요구를 억제하고 신의 속성을 받아들임으로써 신의 사랑, 그리고 신과의 합일, 영지(Gnosis)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며, 드디어 신비적인 체험을 경험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탁월한 수피는 영적도정을 거쳐 무아경의 경지를 맛보지만, 일반 대중들은 집단적인 디크르를 통해 또는 교단의 가무나 격렬한 신체동작을 통해 무아경의 경지 속에서 도취감을 느낀다. 이슬람 신비주의자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람을 꼽으라면 알 가잘리(Abu Hamid al-Ghazali, 1095년 사망)를 든다. 그는 이슬람 신학자 알 아쉬아리 이후 가장 위대한 아쉬아리 신학자이며 알 샤피이 이후 가장 위대한 샤피이 법학자로 간주된다. 그의 명성과 권력이 최고도에 달했을 때 그는 이슬람 신학에서 떠나 은거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종교에 대한 지적이고 율법중심의 접근방식에서 불만을 느끼고 철학자들 간의 궤변에 혐오감을 느껴 개인적인 체험을 추구하려고 방랑생활을 택했다. 종교문학의 가장 걸작으로 평가되는 그의 책 (오류로부터 해방)에서 그의 수피즘으로의 전향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다. 그는 자기고행과 명상의 기간이 끝난 후 거침없는 펜으로 그 후 수피들에 의해서 구체화되었던 이슬람 신비주의의 완벽한 체제를 닦았다. 이러한 위대한 작업은 그의 책 (종교학의 부활) 속에서 완성되었다. 위의 두 작품은 쉽고 재미있는 문체로 쓰여 일반대중을 계몽하는 데 뜻을 두었다. 후에 이븐 알 파리드와 이븐 알 아라비의 범신론으로 향하는 길도 열어 놓았다. 그의 수피즘은 오늘날 수피교리의 주된 흐름이 되고 있다. 이 밖에 도취된 신비주의(Intoxicated mysticism)의 후라산 학파의 주역인 아부 야지드(Abu Yazid al-Bistami, 875년 사망)는 실제로 그가 알라와 합일을 이뤘다고 주장했다. 일곱번째 하늘로 승천한 예언자의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그는 영혼의 황홀감 같은 것을 경험했고, 다른 수피들이 추종하기를 갈망할 만한 선례를 남겼다. 또한 사색적인 신비주의(Speculative mysticism)의 바그다드 학파 창시자는 알 하리쓰 븐 아싸드 알 무하시는(al-Muhasibi, 837년 사망)는 781년에 바쓰라에서 태어나 어려서 수도 바그다드로 이사해 그 당시 번성한 학문 즉 하디스학에 완벽한 생도가 되었다.
수피사상에 호의적인 예언자의 말씀을 받아들이려 했던 알 무하시비는 보수적인 한발리 학파의 창시자 아흐마드 븐 한발(Ahmad b. Hanbal)의 노여움을 사 그의 고향으로 피신하려 했으나, 이내 곧 바그다드로 돌아와 제자들을 모았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책으로 ‘알 리아야 리 후꾸끄 알라(알라의 권리 준수)’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은 신비주의 학문의 기초가 되었고, 후대학자들의 한 모델이 되었다. 알 무하시비는 정통 법률가나 신학자들처럼 쿠란과 하디스를 자주 참조하면서 그의 논지를 뒷받침했다. 또 다른 책, ‘키탑 알 나사이흐(충고의 서)’에서 그는 이슬람에서 분리되어 온 70여 개의 종단을 적고 이들 종단마다의 구원방법에 관하여 논술하였고, 그 결과 구원받을 사람은 그가 속한 수피종단임을 밝혔다. 알 무하시비가 진짜 정통파는 수피들이라고 주장하자 자연히 정통파들은 수피들을 타도하려 했다. 그는 그 후에도 1세기 동안 신학과 신비주의 사이에 전체적인 조화의 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그의 가장 가혹한 반대자인 하디스 학자들과 법률가들의 강력한 제휴를 이끌며 수피주의를 옹호했다. 알 무하시비의 알 주나이드(910년 사망)는 사변 신학자들과 싸우기도 했다. 종교 지식인의 중심적인 주제는 이슬람의 기본적이고 포괄적인 교리인 ‘신의 유일성’이었다. 그의 이론은 수피들에 의해 권위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당시 매우 엄격했던 한발리 학파의 이븐 타이미야에게서도 인정을 받았다. 그의 논지는 신비주의자는 인간 자신의 노력에 보답하는 알라의 은총에 의해 그의 인간적인 속성으로부터 멀리 떠나 궁극적으로는 자아 소멸(fana)의 영적상태에 이르고 알라와 합일(baqa)되어 살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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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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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사랑의 안경
직업이 안경사인 관계로 나는 여로 종류의 사람을 많이 접하게 된다. 거만한 사람, 겸손한 사람, 부자인 사람, 가난한 사람..... 그렇게 여러 부류의 사람과 부대끼다 보면 그 중에서 유달리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 안경점에서 늘 안경을 맞추던 아저씨가 있었다. 시장에서 채소장사를 하는 아저씨와 오랫동안 거래하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이남 삼녀의 자녀와 장모님가지 모시고 산다는 집안사정까지 훤히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아저씨가 초췌한 모습으로 안경점에 들어오셨다. 머뭇머뭇 꺼내시는 얘기인즉 장모님 안경을 맞춰 드려야 하는데 가격이 비싸다고 한사코 싫다고 하신다는 것이다. 어려운 살림인지라 아내도 선뜻 나서지 못하고 아저씨 눈치만 보고 있는 것 같다며 아내와 장모님이 부담 느끼지 않고 자신에게 미안해하지 않도록 아주 저렴한 가격인 것처럼 얘기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오만 원을 내놓으며 아내와 장모님 앞에선 정가에서 오만 원을 뺀 가격을 말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물론 좋다고 했고 며칠 뒤 올망졸망한 손자들과 아주머니, 아저씨의 손에 이끌려 할머니가 안경점에 오셨다. 할머니가 고른 안경은 정가가 십만 원이었다. 아저씨와 미리 짠대로 치면 오만원이었지만 할머니 표정으로 그것도 비싸다며 놀라실 것 같아 나는 가격을 만원이라고 말해 버렸다. '경로우대 특별 서비스'라는 그럴 듯한 거짓말까지 둘러대며 말이다. 할머니는 안경을 걸쳐 보더니 가격도 싸고 좋다며 자꾸만 거울을 들여다 보셨다. 할머니의 흐뭇한 얼굴을 보니 내 마음까지 환하게 밝아지는 듯했다. 아저씨가 지갑에서 돈을 꺼내려는데 진열대 밑에 있던 손자 녀석이 불쑥 고개를 내밀더니 꼬깃꼬깃 접은 천 원짜리 여섯 장을 내놓았다. 할머니 안경 해 드리려고 동생이랑 모은 것이라며 수줍게 웃는 꼬마의 말에 할머니와 아주머니의 눈자위가 점점 붉어지는 듯했다. 나는 그 만원도 차마 받을 수가 없었다.
윤미경 님/광주시 북구 운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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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41 - 인간성 회복운동: 르네상스와 종교개혁(14-16세기)
그때 세계에서는 1337년: 영국.프랑스 백년전쟁 1381년: 이탈리아 베네치아, 제노바를 누르고 해상 상업권 확립 1425년: 거슨, "형이상학과 논리학의 일치에 대하여"
인류는 세계역사를 통해 두 차례 큰 변혁을 겪는다. 그 하나는 고대사회에서 중세사회로의 변화였으며, 또 하나는 중세기로부터 근대사회의 탄생기였던 것이다. 이렇게 큰 역사, 그것도 세계사적인 변화는 두부모를 자르는 듯이 짧은 기간 동안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짧게는 1세기 정도의 기간이 필요하며, 길게는 2,3세기의 역사적 변혁기가 필요한 것 같다. 중세기에서 근대사회에의 변화도 그런 성격의 하나였다고 보아야 하겠다. 사상 및 철학사를 취급하는 사람들은 근대화는 두 R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하나는 르네상스(문예부흥, Renaissance)였고, 다른 하나는 종교개혁(Reformation)이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 두 가지 큰 정신사적 변화는 역사적 필연성을 갖춘 사건이기는하나, 인위적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방대한 사건이었던 것 같다. 그 사건에 참여한 주역들도 이렇게 큰 변혁이 올 것이라고는 자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문예부흥의 핵심을 만든 것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인간성의 회복이 그 중심과제였던 것이다. 기독교 특히 카톨릭의 위치에서 본다면, 중세기는 종교의 시대였고 기독교 신앙이 모든 사상계를 좌우했기 때문에 은총과 조화의 질서가 가장 충만하게 채워진 기간이었다고 보고 싶었을 것이다. 모든 철학과 사상은 신학의 그늘 밑에서 성장했고, 학문과 예술은 종교적 목적에 이바지하고 있었다. 인간은 신의 뜻과 질서에 순응하면 되었고, 자연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신의 선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인간의 영적 실재라고 볼 수 있는 정신은 신에게 속하는 것이나, 육체는 물질과 통하는 부수적인 의미를 지닐 뿐이라고 믿고 살았다. 이성은 신앙의 보조수단이고, 교회는 모든 사회제도의 모범이라고 믿어지고 있는 사회에 우리 인간은 태어나 살다가 죽음을 맞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진취적인 학자들이 고대역사와 사회를 연구해본 결과, 기독교 이전의 고대와 로마 사회는 신이 존재치 않는 생생한 인간 본연의 사회였음을 발견케 된 것이다. 따라서 그 잃어버린 인간 본연의 모습을 되찾고 싶었고, 되찾아야 하는 책임을 느끼게 되었다. 그 당시의 선각자들인 인문주의자들이 그 역할을 담당했다. 그 활동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단테에 있어 베아트리체는 성모 마리아에 해당하는 여성이었다. 중세기적인 여성상이며 구원의 상징적인 여성으로 등단한다. 그러나 그 뒤를 잇는 페트라르카의 여성은 그와 다르다. 완전히 인격을 갖춘 고전적인 인간적 이성을 배제하지 않은 여성으로 등장한다. 훨씬 인간에게 가까워지고 있다. 그러나 그 뒤를 계승하는 보카치오의 여성은 육감적이며 본능성을 숨기지 않는 성적 매력을 노출시키는 여성으로 자리잡는다. 짧은 기간 동안에 작가들의 주제로 나타나는 여성관에 이렇게 큰 차이를 보이게 된다. 인간회복의 길이다. 그리스의 성적 매력을 풍기는 조각에서 볼 수 있는 여성상과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라파엘로의 그림을 볼 때마다 종교적인 신앙의 분위기를 풍만히 느낀다. 중세적인 예술성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을 볼 때는 다른 인상을 받는다. 어디까지나 고전적이며 인간미 풍만한 그림들이다. 중세기적인 배경을 서서히 탈피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시스티나교회의 벽화를 보는 사람들에게는 성당임에도 불구하고 나체화들이 조금도 어색하게 느껴지지를 않는다. 근육과 힘의 상징이 유감없이 표출되고 있다. 이런 과정을 밟아서 중세기적인 것으로부터 다시 고대를 거쳐 인간성 회복의 운동이 일어났고, 그런 변혁이 그대로 문예부흥의 정신을 이어받게 된 것이다. 이 재발견된 인간은 이성인간인 것이다. 종교개혁도 그렇다. 오로지 믿음이면 되며,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중세기적인 전통에서 사유하는 이성이 회복되며, 신앙은 인간 양심과 일치되는 진리에의 추구와 합치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운동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우리가 루터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신부나 수도사 같은 교역자가 아닌, 탐구하는 신학자로서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신앙은 양심과의 일치에서 받아들여지며, 성서는 교리를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적 삶의 진리로서의 의미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신학과 신앙 때문에 존재하는 인간과 이성이 아니라, 인간이 신학을 만들며 신앙을 개척해나가려는 풍조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렇게 거대한 두 가지 사상적 흐름이란 시대와 사회를 풍미하고 난 뒤, 서구사회를 중심으로 새로운 근대화 작업이 시작되었고, 그 정신이 지금까지 우리들에게 계승되고 있다. 정신적으로는 그 근대화의 흐름이 현대사회에까지 미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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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
'베개'를 전북지방에서는 '비개' '벼개'라고도 합니다.
잠을 잘 때 베고 자는 것을 '베개'라고 합니다. 그 속에는 쌀겨나 볏짚을 넣어 만든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지금은 스펀지를 넣은 베개가 많습니다. 갓 태어나서 베개를 베기 시작할 때는 대개 조를 넣어 만든 베개를 사용하지만, 나이가 조금 들면 엄마의 팔베개가 더 좋아서 항상 엄마의 팔을 베개 삼아 잠들 때가 많습니다. 전북 지방에서는 이 '베개'를 '비개' 또는 '벼개'라고 하는 분이 많습니다.
" 아가 비개 잘 비고 자거라이." " 비개를 잘 비고 자야지 그라느먼 목이 아푸당게."
이처럼 '베개'를 '비개'라고 쓰는 이유는 '베다'라는 동사를 전북 지방에서는 '비다'라고 쓰기 때문입니다. 동사의 어간 '비-'에 명사를 만드는 접미사인 '-개'를 붙여 '비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개를 베다'라고 하지 않고 '비개를 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표준어로는 '베개'가 맞습니다. 베개는 건강에 아주 중요한 물건입니다. 오늘 밤 베고 자는 '베개'가 몸에 비해 너무 높지 않은지 살펴 보십시오. '비개'는 전북 방언이라는 사실도 잊지 마시고요.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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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사회/문화/인물 |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1장 죽기가 힘들었던 사람들
찬란한 햇빛속으로 사라진 겨울 나그네 - 슈베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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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한 살의 나이로 이 지상에서 겨울 나그네가 된 슈베르트는 임종의 병상에서 조차 겨울 나그네 의 악보 손질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친구 소버는 이 겨울 나그네 때문에 그의 생명이 단축되었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의 무덤의 문은 이미 열려져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베토벤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묵묵히 관 옆을 따라 걸었는 데, 장례행렬 속에서 내내 머리가 아팠다고 했다. 나는 이제는 건강한 몸이 될 수 없을 거다. 이렇게 말한 그는 자신의 병에 대해 알고 있었다. 슈베르트의 사인에 대해 사람들은 장티프스에 걸려서 라든가 원인은 독신자의 불양생에 있었다 는 정도로 덮어두어 필자 역시 이면의 깊은 고통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음악가의 만년과 죽음 이란 이덕희님의 글을 읽다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9세기의 유럽음악을 낭만주의의 가곡으로 휩쓸었던 슈베르트. 감미롭고도 정감어린 그 가곡의 작곡자가 매독 이라니 정말 믿기지 않았다. 겨우 그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매독 발병 제2단계의 고통속에서 슈베르트는 이런 시를 썼다.
나의 생명, 나의 육신, 나의 피. 그 모두를 레테의 강물 속에 던져넣어 보다 순결하고 보다 강력한 경지로 나를 놓아 주소서
-<나의 기도>중 일부
고통 속에서 차 오르는 샘물, 죽기 전 마지막 6년 동안, 그는 균열된 영혼의 지각 속에서 보석보다 더 아름다운 곡들을 쏟아내었다. 교향곡 제9번 연가곡 겨울 나그네 그리고 유명한 현악 5중주 C장조 는 죽음을 앞둔 2년 동안에 만들어진 것이다. 끔찍한 매독의 최종 단계가 오기 전에 죽음이 그를 데려간 것 역시, 신의 자비인양 여겨진다고 그를 아끼는 사람들은 말했다. 1828년 10월의 마지막 날, 식당에서 식사를 하던 도중 그는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나이프와 포크를 떨어뜨렸다. 생선요리에 중독이 되었던 모양으로 병세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악성 티프스였다. 11월 18일, 고열로 정신을 잃은 그는 때때로 침대에서 나오려고 몸부림을 쳤다. 숨이 끊어진 것은 그 이튿날 오후 3시경, 11월 21일, 그의 친구들은 그가 작곡한 노래 평화여 그대와 함께 있으라 를 눈물을 흘리면서 불렀다. 성 요제프 교회에서 장례식이 끝나자 그의 유해는 그가 그렇게도 경배하여 마지 않던 베토벤의 무덤 가까이에 묻혔다. 그 묘비에 그릴파처 는 이렇게 적어 넣었다.
음악은 이곳에 소중한 보물을 묻었다. 그보다 더 아름다운 희망도 꿈과 함께
라스트는 그를 가장 시적인 작곡가 라고 평하였다. 뫼리케는 눈물을 통헤 찬란한 햇빛을 보는 사람 이라고 하였다.
웬 아이가 보았네 들어 핀 장미화.
들장미 와 함께 슈베르트는 우리의 가슴속에 영원한 소년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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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세계사 |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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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신의 계시를 받은 살라미스 해전
마라톤 경기가 페르시아와 아테네 사이에 벌어졌던 `마라톤 전투`(기원전 490)에서 기원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의 아테네는 민주 정치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안 가 동방의 페르시아라는 강국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오리엔트 세계를 통일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은 서쪽으로의 진출을 꾀했고 먼저 소아시아의 그리스 식민지들을 굴복시켰다. 페르시아의 다음 목표는 그리스 본토였다.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 군은 아테네에서 북쪽으로 25마일 떨어진 곳인 마라톤(Marathon)에 상륙했다. 애국심에 불타는 아테네의 중무장 보병들은 자기들의 두 배가 넘는 페르시아 군대를 이곳에서 격파했다. 승리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한 병사가 아테네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그는 “기뻐하라, 우리의 승리를”이라는 한 마디를 외친 후 곧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 마라톤 전투에서의 승리는 중무장하고 전투에 나선 아테네 시민의 승리였으며 민주정치의 승리라 할 수 있다. 이것이 마라톤 경기의 기원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페르시아의 위협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기원전 480년 다리우스를 계승한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그리스를 침략하기 위해 몸소 대군을 진두 지휘했다. 이러한 상황을 맞이하여 아테네는 델포이에 있는 태양의 신 아폴론의 신전에 사람을 보내 신의 계시를 받아 오게 했다. 이것은 당시 정치의 신정적 성격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신의 계시는 절망적이었다. 다시 한번 계시를 간청하자 약간은 희망적인 내용이었다. 나무로 만든 벽 뒤에 숨으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나무로 만든 벽`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의견이 분분했다. 이 때 테미스토클레스라는 사람이 `나무로 만든 벽`이란 배를 뜻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원래 해군의 증강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사람으로 이미 2년 전에 그가 제안했던 배 200척이 건조되어 있었다. 아테네의 민회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아테네 시민은 모든 부녀자와 노인을 사라미스 섬으로 피신시키고 싸울 수 있는 남자는 200척의 배에 올라 페르시아 군과 싸울 준비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당시 아테네가 가지고 있던 200척의 배는 3단 노선이었으며 길이는 약 40미터, 폭은 6미터였다. 그리고 노를 젓는 데는 100명 이상의 사람이 필요했다. 뱃머리에는 충각이라고 하는 뾰족한 것이 달려 있었는데 이것은 나무 뿌리를 날카롭게 깎아 청동을 입힌 것이었다. 전속력으로 적함에 다가가 이것으로 적함의 옆구리를 찔러 침몰시키는 것이 당시 사용된 전술이었다. 따라서 노를 젓는 사람의 기술과 일치된 단결심이 승리의 열쇠였다. 결전은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해상에서 벌어졌다. 아테네를 버리고 해상에서 페르시아 군에 맞서 싸운다는 작전은 멋지게 성공했다. 400척이 넘는 페르시아 배의 절반 이상이 침몰했고 크세르크세스는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테네는 승리했고 민주 정치는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 살라미스의 승리는 아테네 민주주의에 변화를 가져왔다. 10년 전 마라톤에서의 승리는 중무장한 보병의 승리였다. 그런데 이 당시에는 창과 방패 등 무기는 시민이 자비로 구입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재산이 있는 시민만이 보병이 될 수 있었다. 따라서 무장을 할 수 없었던 가난한 시민은 전투에 참가할 수 없었고 정치적 발언권도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살라미스 해전에서는 가난한 시민들이 노 젓는 사람으로 활약했다. 아테네를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지켜 낸 이들은 이제 정치 무대에서도 자신들의 주장을 힘있게 펼 수 있었다. 이전의 민주 정치가 중무장한 시민들 중심으로 운영되었다면 이제는 가난한 시민을 포함하는 새로운 민주 정치로 변화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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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경제/경영/성공 |
유태인식 돈벌이 - 후지다 덴
제 1부 - 현금을 손에 쥔 나의 방법
처마끝을 빌어라
'남의 처마끝을 빌어 연간 매상 60억 엔'
햄버거 장사가 성공을 거둔 또 하나의 요인은 내가 생각해 낸 판매방법에 있었다. 햄버거는 본점인 미국에서는 의자와 테이블이 이는 스타일로 팔리고 있어 손님은 테이블이나 카운터에서 보통 요리를 먹듯이 의자에 앉아서 먹는다. 그런데 나는 남의 처마끝을 빌어서 서서 먹게 하는 현재의 입석 스타일로 바꾸었던 것이다. 유태 상술에서는 '10미터는 10킬로미터'이기 때문에 긴자에 햄버거 가게를 낸다 하더라도 극히 한정된 몇 군데 이외에는 적당한 장소가 없다. 그런데 그런 장소는 땅값이 터무니없이 비싼 데다 소유주가 놓으려고 하지 않으므로 사들려서 점포를 갖추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게다가 종래에는 레스토랑이라는 장사가 하루에 손님이 몇 번 회전되는가로 장사가 잘되고 안되고를 측정해 왔다. 그렇지 않아도 좁고 땅값이 비싼 긴자에서 테이블과 의자를 갖추어 놓고 하루에 몇 차례 손님이 회전하는가 따위를 따지고 있자면 눈이 튀어 나올 정도로 메뉴의 정가를 높게 정하지 않으면 돈을 벌기는커녕 큰 손해를 보기가 십상일 것이다. 물론 1백 퍼센트 비이프(소고기)가 45그램이나 들어 있는 햄버거를 한 개에 1백 20엔이라는 양심적인 가격으로 팔고 있다면 곧 파산해 버릴 것이다. 처음에 나는 일본의 중심가인 긴자에서 하이라이트(역주: 일본의 담배이름. 1960년부터 발매) 한 갑의 값으로 햄버거를 팔고자 했다. 하이라이트 한 갑분인 80엔이라면 대중에게는 '싸다' 고 느껴지지 않을 까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햄버거 한 개의 값이 20센트이다. 내가 긴자에서 점포를 연 그 당시의 '엔'과 '달러'의 환율은 1달러 대 3백 40엔이었다. 20센트는 72엔에 해당한다. 미국에서는 72엔이지만 일본에서는 쇠고기라든가 우유 등의 재료가 약간 비싸기 때문에 1할쯤 더 비싸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 경우에도 나는 최고 80엔으로 억제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점포의 땅값에 많은 돈을 들여서는 안되었다. '긴자의 일등지에다 땅값이 덜 드는 가게를 어떻게 하면 열 수가 있을까?' 뻔뻔스러운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리고 나는 처마 끝을 조금만 빌어야겠다는 착상을 했던 것이다. 처마 끝을 빌어서 서서 먹도록 한다면, 긴자 번화가에서 좋은 장소를 선택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라면...' 하고 눈독을 들였던 장소 중에 몇 군데는 처마 끝을 비는 것조차도 거절당했다. 오직 한 군데 내가 처음으로 눈독을 들이고 있던 특등지인 긴자 미쯔고시는 오카다 시게리 사장(당시의 전무)의 영단으로 처마 끝을 빌려주겠다고 나의 제의를 쾌히 승낙해 주셨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서서 먹는다' 는 것은 역전 구내의 국수집처럼 어딘가 초라한 느낌을 준다. 게다가 한 개에 80엔인 값싼 햄버거를 초라한 분위기에서 팔면 이미지가 흐려진다. 그렇게 되면 인텔리나 여성 손님들을 붙잡을 수가 없다. 그리하여 나는 긴자 미쯔고시에 햄버거 가게를 차리면서 밝고 멋있고 청결한 입식의 이미지를 부각시켜 초라한 느낌이 들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했다. 작전은 계획대로 들어맞아 밝고 세련되고 청결한 맥도날드 입식 점포에 젊은 여성 손님들이 쇄도했다. 덩달아서 남자 손님들도 들어오고 외국인도 들어왔다. 젊은 이들이 몰려 들었다. 이리하여 햄버거는 폭발적인 매상고를 올렸다. 이렇게 되자 용단을 내렸던 미쯔고시와는 반대로 맥도날드 햄버거 점포에 처마끝을 빌려 주기로 주저하던 곳까지도 이상하게 그 상사의 전통과 신용을 상관하지 않고 두 손을 비벼대면서 나에게 사정을 하게 되었다. '굉장하군요. 후지다상, 우리 빌딩 처마끝도 빌지 않겠소? ' 하고 말했다.
인파의 흐름을 바꾼다.
나는 긴자 다음에 신쥬쿠로 진출했다. 신쥬쿠의 현관인 동쪽 어귀를 나서면 정면에 유명한 식료품점인 니코우가 있다. 이 니코우의 손님들은 노인층이나 약간 거드름을 피우는 계층의 부인 등으로서 슈퍼에서 살 수 있는 상품을 일부러 비싼 값을 주고 니코우의 포장지로 포장하기 위해서 찾아오는 손님이 대부분이었다. 니코우는 그러한 고급 손님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 맥도날드 햄버거점이 문을 열자 단골 손님들의 면모가 싹 바뀌었다. 즉 지금까지 약간 뽐내던 손님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그러한 손님들이 노도처럼 밀려왔던 것이다. 그들은 햄버거를 먹으면서 가게 안을 활보하곤 했는데, 하이틴들도 있었고 장발족도 있었다. 이리하여 니코우는 메이지 백 년의 잠을 깬 듯이 떠들썩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고급식료품점인 니코우는 점포를 완전히 새로 단장하여 2층을 젊은이 상대의 패션층으로 할 정도로 대변모를 보였다. 햄버거가 이 전통 깊은 노점포를 변화시킨 것이다. 물론 니코우는 화려한 변신을 감행함으로써 돈벌이의 길로 돌진해 나간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인플레에 강한 산업
사족일지만 덧붙인다면 현재 햄버거 한 개의 값은 1백 20엔이다. 개업 당시보다 40엔이 인상되었지만, 이 값은 물가의 상승에 따른 것이지 결코 장사가 잘 되는 분위기에 편승하여 올린 값은 아니다. 내가 맥도날드를 시작했을 때 쇠고기 값은 한 개분 45그램에 22엔이었는데, 세계적인 쇠고기 부족 사태의 영향을 받아 단번에 42엔으로 치솟아 버렸다. 나는 할 수 없이 원료 인상폭로만큼만 값을 올렸다. 원료의 인상을 핑계로 얼씨구나 하고 대폭적인 인상을 하여 차액을 보상받는 더러운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런 짓을 하지 않더라도 손님들이 억척스럽게 먹어만 준다면 자연히 돈을 벌리기 때문이다. 문화가 발달해 가면 쇠고기의 수요가 증가한다. 인간이 가장 맛있다고 느끼는 고기가 바로 쇠고기인 까닭이다. 쇠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이 돼지고기를 먹고 닭고기를 먹는 것이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30여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그 동안 세계적인 대전쟁도 없이 호황이 계속되어 사람들의 생활수준도 향상되었고, 따라서 쇠고기의 수요가 전반적으로 증가해 가고 있다. 전에는 쇠고기의 수출국이었던 아르헨티나도 국내 수요가 증대되었기 때문에 수출을 중단하게 되었으며, 쇠고기의 주산지인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수요가 증가로 말미암아 가격이 올라 값이 전보다 2배 정도 올랐다. 햄버거와 같은 퍼스트 후드(최고의 음식)는 인플레이션에 강한 산업이라는 말들을 하고 있다. 원료값 인상을 비롯해 여러 가지 문제에 직면해 있는 것은 변함이 없지만, 그렇더라도 아직은 그러한 여러 문제점들을 흡수하고 극복해 나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경이적인 산업임에는 틀림이 없다.
돈벌이의 최대의 적은 고정관념이다.
긴자 미쯔고시의 1호점이 세계 신기록의 매상을 올릴 때 미국의 본점이 몹시 놀란 것은 무리가 아니다. 종래 미국의 맥도날드는 교외의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톡톡히 재미를 보아 왔었다. 교외에다 낸 가게가 예상외로 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머리 속에는 '패밀리 레스토랑은 교외가 아니면 안된다' 고 하는 고정관념이 생겼던 것이다. 그 결과 번화가나 상가에는 절대로 손대지 말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모험을 하려 들지 않았다. 인간은 어느 나라의 인간이든 어떤 한 가지 방법으로 성공을 하면, 그 방법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믿어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성공하면 그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전체를 바라보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햄버거에 손을 댄 것이 처음이었으므로 그러한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교외에선 안된다. 하려면 일본에서 제일 가는 변화가인 일본의 심장부가 좋다.' 이렇게 생각하고 긴자에 다 1호점을 내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본점은 교외 이외에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나의 이 제안에 맹렬한 반대를 표명했다. 그래서 내가 억지로 긴자 미쯔고시의 처마끝을 빌어 가게를 내어 교외 이외에서는 안된다고 하던 종래의 고정관념의 벽을 깨뜨리자 일대 소동이 벌어졌던 것이다. 잇달아 일본에 찾아온 본점의 경영자들은 '원더풀!'을 연발하며 자기들이 반대했던 이야기 따위는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이래서 본점에서 나온 방침이 '교외도 좋지만 이제부터는 다운타운을 공략하라'는 것으로 종전과는 180도의 방향 전환을 하였다. 나의 성공으로 허둥지둥 다운타운으로 진격을 개시했던 것이다. 성공을 거듭함에 따라 얻어진 방정식은 귀중하지만, 너무 그것에 사로잡혀 고정관념을 만들어 버리는 것은 별로 감동할 일이 못된다. 작년에 '맥도날드'는 매상이 10억 달러를 넘어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을 제외하고는 세계 제1위의 레스토랑 체인이 되었다. 이것은 세계의 2천 5백 개 점포의 매상 합계로서 미국 육군보다 음식 서비스량이 큰 것인데, 나의 처마끝 상법의 성공으로 인한 자극이 가져다 준 공헌도도 결코 적지는 않다고 자부하고 있다. 굳이 수자를 든다면 긴자 미쯔고시의 1호점에는 3천만 엔을 투자했다 최초의 1개월 매상고가 4천만엔이니 극단적으로 말하면 겨우 한 달 사이에 본점을 뽑았다고 말해도 좋겠다. 이 긴자 미쯔고시의 1호점에 찾아온 본점의 높은 사람들이 요즘에는 이 가게를 가리켜 '월드 웰나운 스토어' 라고 말한다. 온 세계에 메아리치고 있는 가게라는 뜻이다. 즉 이제는 세계의 명소가 되어 버린 것이다. 승부에서는 이기지 않으면 안되며 장사는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큼 돈을 벌어 보여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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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마부를 길들인 말
어느 마부가 일 잘하기로 소문난 말 한 마리를 사 왔다. 그런데 소문과는 달리 말은 마부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다른 말들은 채찍으로 등허리를 두어 번만 후려쳐도 말을 잘 들었으나 그 말은 그렇지 않았다. 마부는 주인이 바뀐 탓으로 말이 아직 길이 들지 않아서 그런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엔 기둥에 묶어 잡도리를 해보기도 하고, 생당근과 익은 콩을 여물로 먹여 보기도 하고, 들에 나가 풀을 뜯어먹게 해 보기도 했다. 또 마구가 몸에 맞지 않아서 그런가 싶어 마구를 바꾸어 주기도 하고 심지어는 꼬박 사흘을 굶겨 보기도 했다. 그러나 말은 여전히 마부의 말을 듣지 않았다. 마부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이번에는 말을 마구 두들겨 패 주었다. 주먹으로 패고 발로 차다 못해 채찍과 몽둥이로 온몸에 몸이 시퍼렇게 들 정도로 두들겨 패 주었다. 그래도 말은 마부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날 밤, 마굿간에 있던 조랑말이 참다못해 그 말을 보고 말했다.
"넌 정말 어리석구나. 네가 우리 집에 온 이후로 쭉 지켜봤다만, 너 어쩌자고 그렇게 맞기만 하는 거니? 나처럼 주인한테 두어 대 맞고 말 잘 들으면 더 이상 얻어맞지도 않을텐데, 제발 그러지마. 옆에서 보고 있기에 참 딱해." 그러자 조랑말을 보고 그 말이 말했다. "넌 맞는 게 몹시 두려운가 보구나." "응, 두려워. 넌 두렵지 않아?" "나도 두려워. 매가 두렵지 않은 말이 어디 있겠니? 그렇지만 언제까지나 그렇게 매를 맞으면서 일을 할 수는 없어. 무조건 때리기부터 먼저 하면서 일을 시키는 마부의 나쁜 버릇을 고쳐 놓아야만 해. 그래야만 내가 맞지 않고 일을 할 수 있어. 난 그 버릇은 꼭 고쳐 놓고야 말 테야." "그러지 마. 그러니까 네가 주인한테 자꾸 맞는 거야." "아냐, 맞아야만 일을 하면 계속 맞게 되는 거야. 난 맞고 살진 않을 거야. 맞는 것을 두려워하면 결국 맞고 살 수 밖에 없어. 그러니까 맞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돼. 맞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나중엔 결국 맞을 일이 없게 돼." "글쎄, 주인한테 늘 맞고 있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구나." 말은 여전히 마부의 말을 듣지 않았다. 마부가 아무리 채찍과 몽둥이로 두들겨 패도 말은 고분고분 마부의 뜻을 따라 주지 않았다. 마부는 고민이 되었다. 비싼 돈을 주고 사 온 말이 말을 듣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말을 때리는 데에도 지친 마부는 어느 날 말을 판 전 주인을 찾아갔다. "아무래도 내가 속아서 산 것 같소. 일을 잘하기로 장안에서 소문난 말이라고 해서 다른 말의 두 배나 되는 비싼 값을 치르고 사 온 말이 도대체 내 말을 듣지 않으니 이게 어찌된 일이오? 아무리 때려도, 심지어 채찍으로 피멍이 들도록 때려도 말을 듣지 않으니 난 이 말을 도로 당신한테 팔고 싶소. 나를 속인 대가로 이 말을 당신이 사시오. 내가 준 값 그대로 다 쳐서 말이오." 그러자 전 주인이 무릎을 탁 치면서 말했다. "아뿔사, 내가 당신한테 아주 중요한 말을 해주지 않았군요. 그 말은 채찍 앞에서는 절대로 말을 안 듣는 말입니다. 그 말은 절대 때려서는 안 돼요. 내가 그 말을 해준 다는 게 그만 깜박 잊고 말았군요." 그 말을 들은 마부는 얼른 집으로 돌아와 말이 보는 앞에서 채찍과 몽둥이를 분질렀다. 그러자 그날부터 말은 마부의 말을 잘 들었다. 소문대로 그 말은 아주 일 잘하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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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키니 수영복은 프랑스 디자이너 루이 레아르가 1946년 7월 파리의 패션쇼에서 발표하였다. 쇼 4일전 미국이 태평양의 비키니 환초에서 원자폭탄 실험을 했기 때문에, 레아르는 ‘최종적인 것’이란 뜻으로 이 비키니란 말을 썼다. 이 최초의 비키니 수영복은 신문지를 도안해서 프린트한 무명천이었는데, 이것을 입은 모델의 사진이 널리 퍼져서 그녀는 무려 100,000통의 팬래터를 받았다.
Hooker는 길거리를 배회하는 창녀를 뜻하지만 원래는 남북전쟁 때 위안부를 고용했던 후커 장군의 이름이다. 콘돔은 피임용 혹은 일반 성병을 방지하기 위한 고무풍선같은 것을 의미하지만, 원래는 영국의 군의관 콘돔 대령이 찰스 2세를 위해서 만든 것이다. 지금은 고무로 만들지만 1840년까지는 동물의 내장으로 만들었다.
결혼식(wedding)은 ‘경마에 돈을 걸다’라는 뜻을 가진 weddian이란 단어에서 유래되어 한 때는 도박을 의미하는 단어로 쓰였다. 결혼은 과연 도박일까?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을 방문하러 온 존슨 대통령을 마중하기 위해 김포공항에 나가 “존슨 대통령, 2,000,000명 정도밖에 나오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라고 말했다.
에스키모어에서는 눈(雪)을 묘사하려면 20단어 이상을 동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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