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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50 호
4339.11.04 (09.14) : Music Off = Esc
-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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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계획표속의 책
과거에 학창시절이나 잘나가던 회사시절엔 계획표가 있었습니다. 남는 자투리 시간을 알차게 쓰자는 취지 였지요.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후회가 됩니다. 하지만 철 없는 시절엔 계획표만큼 좋은 것이 없지요. 나쁜길로 새나가 죄지을 일도 없고 부모님 가슴에 못박는 횟수도 현저히 줄어들지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쁜 짓을 행할 마음도 꺼리도 없습니다. 시간이 아까워 바들바들 떠니까 적어도 제게는 남는 자투리 시간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지 매우 젊은(?)나이이고 고3도 아닌데 서너시간밖에 잠을 자지 않습니다. 억지로 수면시간을 줄인 것은 아니고 습관이 되 버리니 그냥 그렇게 살아집디다.
일일 계획표는 잘짜여 지면 좋겠지만 대충 짜려면 없는 것이 낫지요. 어떤 분과의 술자리에서 나눈 이야기 인데요, 자신의 계획표 안에 책을 놓고 쉬는 날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날 만은 TV도 보고 사람들도 만나 마음껏 놀고 스트레스를 풀면서 지내는 자신만의 법정공휴일 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농으로 그것 죽는표라고 말했습니다. TV는 꼭 봐야하는 방송만 보고 사람을 만나러 갈때도 책을 보는 것이 좋지 않느냐고 말했습니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기다릴 때 우리는 5~10분정도의 자투리 시간이 있습니다. 멍청하게 먼산 바라보고 있지 말고 책을 보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흔들림에 눈이 좀 피곤해도 가는도중에 책을 보며 약속장소로 가면 더 빨리 갈 수 있다고 말했죠. 그랬더니 그사람은 뭘 그리 빽빽하게 사느냐고 했습니다. 바보처럼 먼산을 바라보는 것도, 멍하니 바보처럼 바닥을 주시하면 앉아 있는 것도 할 만하다더군요. 생각해보니 그분의 말도 맞는 말입니다. 나 자신을 생각해볼 시간도 주변을 둘러보며 자연과 사람을 느껴보는 것도 좋은 수양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제게 책에 대해 지나친 집착이 아니냐고 농으로들 질책했지요. 습관이라는 것이 참으로 무섭기도하지만 잘 들인다면 보물이이지요. 왜 책을 손에서 놓지 말아야 하는가는 읽어본 사람만 아는 희열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저도 술자리에서 책을 펼칠만큼 미친자(?)는 아닙니다. 책보다는 사람이 우선이니까요.
일일 계획표를 만드는 것에 대해서는 스스로의 판단이지만 만들지 않는 것이 현명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계획대로 산다면 만났어야할 인연도 못만날 수도 있고 이미 만난 인연과도 헤어질 수도 있고 무엇보다 반전이 없는 시시한 삶이 되버리지 않을까요? 다양한 상황과의 맞닥드림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고 멋진 경험이 되어 내안의 마음의 도서로 소장하는 것이 풍요로운 삶으로가는 시나리오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날씨 좋은 휴일에 따분하게 책만 끌어 안고 지내냐'는 전화에 '너는 따분한 책밖에 보질 못했구나' 답하며 미소로 주말을 시작합니다.
- 風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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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시며 → 자유글판 |
차 한잔의 사색
여기 순수를 따다 만든 차 있는데 무심으로 차 한잔 하시지요 문밖 인기척에도 얽매이지 말고 방안 물끓는 소리에도 얽매이지 말고 눈에 보이는 차 색깔에도 얽매이지 말고 코에 느껴지는 차 향기에도 얽매이지 말고 혀에 닿는 차 맛에도 얽매이지 말고 누구의 찻그릇에도 얽매이지 말고 차 내는 사람에게도 얽매이지 말고 차 마시는 사람에게도 얽매이지 말고 너무 기쁜것에도 얽매이지 말고 너무 슬픈것에도 얽매이지 말고 오고 가는 세상사에도 얽매이지 말고 차의 그 순수만 마시면 되지요.
그래도 그냥 차 한잔하는 마음 허전하시면 산사의 노승은 찻잔에 차 꽃이나 띄워 마시지요 풍경소리에는 귀 씻어주는 순수가 숨어 있고 차 꽃에는 찻잎 틔우는 순수가 숨어 있을테니까.
황 청원님의 산문집 새벽여행 중에서...
- 글 주신분 : 호단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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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2007 경남신문 신춘문예 공모
경남신문은 한국 문단의 새 주역이 될 참신하고 역량 있는 신인작가 발굴을 위해 ‘2007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작품을 공모합니다. 단편소설. 시. 시조. 수필. 동화 5개 부문에 걸쳐 작품을 모집하는 경남신문 신춘문예는 그동안 지역문학의 위상을 드높이면서 신인들의 등용문으로 굳건히 자리잡아 왔습니다. 한국 문단을 주도할 패기 넘치는 신인들의 작품을 기대합니다.
○공모부문(당선작 고료 · 원고량) *단편소설: 300만원(200자 원고지 80매 내외) *시: 100만원 (5편) *시조: 100만원(5편) *수필: 100만원(200자 원고지 20매 내외) *동화: 100만원(200자 원고지 30매 내외)
○접수마감: 2006년 12월 2일(토요일). 우편접수는 4일 도착분까지 유효. ○보낼 곳: 경남 창원시 신월동 100-5 경남신문사 편집국 문화체육부 신춘문예 담당자 앞 (우편번호 641-701) ○발표: 2007년 본지 신년호 ○참고사항
1. 응모작품은 미발표 순수창작품이어야 하며. 동일한 원고를 타 기관에 중복 투고하거나 표절작품일 경우 당선을 취소합니다. 사후 확인될 경우에는 무효처리됩니다. 2. 원고 겉표지에 반드시 주소. 전화. 성명. 응모부문을 기입하여야 합니다. 원고지와 A4용지의 제출이 가능하며. 디스켓이나 이메일로는 접수받지 않습니다. 3. 각 부문 당선작은 1편으로 하며. 당선작이 없고 가작이 나올 경우 고료는 반액으로 합니다. 4. 당선작품은 본지 2007년 신년호부터 게재하며. 심사위원은 당선자 명단과 함께 발표합니다.
○문의=경남신문 편집국 문화체육부(☎ 283-5005)
대전일보 제23회 신춘문예작품 공모
본사는 제23회 2007년도 대전일보 신춘문예작품을 공모합니다. 한국문단의 신인등용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대전일보 신춘문예는 소설가 윤대녕, 한창훈 혜범스님, 이정록, 최정심 시인 등 많은 중견 작가들을 배출하여 지역문단은 물론 한국 문학 발전에 빛난 업적을 남겼습니다. 21세기 한국문학의 새지평을 열어갈 신인작가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 공모내용 ▲단편소설(2백자 원고지 70매 내외):상패와 상금 2백만원 ▲ 시 (3편이상):상패와 상금 1백만원 ▲동 시(3편이상):상패와 상금 1백만원 ▲동 화(2백자원고지 30매 내외):상패와 상금 1백만원
◇ 응모요령 ▲접수마감:2006년 12월 9일(토) 당일소인유효 ▲문의 및 접수처:대전일보사 문화사업본부 신춘문예담당자 앞 ☎ (042)251-3801~4 ▲당선작 발표:2007년도 본보 신년호 ▲대일문학 10집발간: 007년도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과 대일문학 회원작품 수록예정 ◇ 유의사항 겉봉에 신춘문예 응모작품이라고 쓰고 응모부문을 필히 명기할 것 원고 끝부분에 성명, 주소, 연락처, 본명을 명기할 것 미발표된 신작에 한하고 표절 또는 이중 당선시 당선을 취소함 원고 작성시 워드프로세서를 사용할 것 인터넷 접수는 안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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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교육의 비결은 학생들을 존중하는 데 있지요. /랠프 월도 에머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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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내잠 속에 비내리는데 - 이외수
인생의 빚
만약 인간이 먹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면 과연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어쩌면 식량 문제에 쓰여졌던 그 막대한 경비와 노력들이 보다 높은 차원에서의 인류 복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쓰여질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전혀 예기치 않았던 부작용이 발생해서 오히려 인간을 더욱 절망적인 상태로 몰아가게 될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 쥐를 대상으로 하여 삶의 한 단면을 실험하고 관찰했던 기록을 읽은 기억이 있다. 쥐가 생활하기에 적합한 시설이나 안전 조건이 아주 잘 갖추어진 창고 속에 건강한 쥐 몇 쌍을 넣고 항시 맛있고 영양가 높은 음식을 넣어주었을 경우 과연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얼핏 생각하면 번식력이 왕성한 쥐들은 오직 생식의 문제에만 전념해서 삽시간에 식구를 늘일 것이며 전체가 쥐떼로 득시글거릴 것으로 짐작되어진다. 그러나 실험의 결과는 전혀 예상과는 달랐다. 쥐들은 어느 한도까지 증식되어지면 그 일부가 차츰 시름시름 죽어가기 시작하고 마침내는 그 수가 가장 많았을 때의 삼분지 일 정도만 남게 되더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단 그렇게 줄어 든 다음에는 다시 증식되어지고 이어 시름시름 죽어가기를 계속 거듭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죽은 쥐를 해부하여 그 원인을 캐보니까 대개 비장이 부었거나 부신등의 내분비 계통에 이상이 생겼더라는 거였는데, 그 증상은 공포, 과로, 흥분을 겪었을 때 생기는 소위 스트레스 증상과 거의 흡사한 것이며, 이것은 신경의 피로 때문에 생기는 증상이라는 거였다. 삶의 문제란 한갓 미물인 쥐에게 있어서도 이렇듯 먹고 마시고 입고 잠자고 또는 섹스를 즐기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정신적인 문제라든가 육체적인 문제를 안고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끊임없이 갈등을 느끼며 살아야 하는 것이 모든 생명체의 숙명이다. 그 중에서도 인간은 가장 갈등이 많은 동물이다.
나는 대학을 스스로 때려 치워 버리고 아무런 희망도 계획도 없이 무작정 춘천에 주저앉아 먹이 문제 하나로 몇년씩이나 고통을 받아야 했었던 적이 있다. 내게는 일할 곳도 잠잘 곳도 전혀 마련되어져 있지 않았었다. 낮이면 춘천의 번화가로 나가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서 하루에 딱 20원씩만 동전을 구걸했었던 적도 있다. 그때 20원으로 번데기를 사면 지금 백원 어치 정도의 분량이었다. 그리고 삶은 감자를 사면 작은 걸로는 두알, 큰 걸로는 한 알을 주었었다. 나는 이틀마다 한번 씩 20원어치의 번데기와 삶은 감자로 하루의 요기를 대신했다. 그러니까 하루는 굶고 다음날 번데기 20원어치를 사먹고 다시 하루는 굶고 다음날 삶은 감자20원어치를 사먹는 것이다. 이러한 생활을 무려 2년 간이나 계속하는데 나중에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서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고 앉았다 일어서면 어지러워서 금방 쓰러져버릴 것처럼 위태로웠었다. 더러 공지천 둑으로 나가 혼자 웅크리고 앉아울곤 했었다. 밤이면 벽돌 공장으로 몰래 숨어 들어가 모랫더미 아래 벽돌을 대충 쌓아 지붕이 없는 임시 단독 주택을 만들어 놓고 잠을 자곤 했었다. 또 더러는 시외 버스 터미널이나 역 대합실의 벤치 신세를 지기도 했었다. 친구나 후배들을 찾아가서 신세를 지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어서 이제는 양심도 자존심도 도저히 그것을 허락할 수 없는 단계에까지 와 있었다. 특히 그즈음 내 측면에서는 모두들 맹렬히 나를 비난하고 있었다. 경멸하고, 조소하고, 혐오하고, 지탄하기에 추호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간접적으로든 직접적으로든 버러지만도 못한 자식이라는 욕설이 자주 내 귀로 전해져 왔다. 나는 반발하지 않았다. 그들의 말이 천만 번 지당하다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그까짓 교육 대학을 칠 년씩이나 다녔던 저의는 무엇이며 이런거렁뱅이의 행색을하고 아직도 살아 남아 있는 이유가 뭐냐. 나 같으면 당장 자살이라도 해버리겠다. 제대로 학교를 다녔으면 벌써 몇년 전에 선생님 소리를 들었을 게아니냐. 그런데 이게 무슨 꼴이냐, 정말로 네가 인간이라면 시장바닥에 좌판이라도 깔아 놓고 꼴뚜기라도 팔면서 살 길을 한번 모색해 보아야 할 게 아니냐, 네가 무슨 디오게네스냐. 주제를 알아야지 지금이 어느 시대냐. 알렉산더 시대냐. 제발 정신 좀 차려라. 노골적으로 내 앞에서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국민 학교 선생도 어물 장수도 내가 가야 할 길은 아니라는 생각만은 확실했다. 그리고 인간이 오직 먹고 살기 위해서만이 목숨을 부지해야 하는 동물은 결코 될 수 없다는 생각도 확실했다. 솔직이 말해서 나는 고통스러웠다. 남들처럼 현실에 최면당한 채로 살기는 싫었다. 그러나 남들처럼 살지 않으려 들면 들수록 그 고통은 더해갔다. 그런 중에도 아주 드물게 여자가 생기곤 했었다. 꿈 같은 사랑을 한번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너무 굶었기 때문인지 발기 불능 상태가 계속되던 중이었고 하도 사는 일이 처절해서 꿈 같은 사랑도 제대로 되어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여자가 생기더라도 한 달 이상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해 나가 본 적이 없었다.
참 개 같은 삶이여. 가만히 있어도 시간은 흐르는 법이므로 급기야는 공포의 겨울까지닥쳤다. 이제는 벽돌 공장에서도 역 대합실에서도 너무 추워서 새우잠을 잘 수가 없게 되었다. 사는 모습이 너무 비천하고 혐오스러우니까 마침내는 20원을 꾸어 주는 사람도 거의 희박해져서 재수가 없으면 일주일내내 일원조차도 수중에 들어오지 않았다. 굶주림이란 정말로 몸서리쳐져서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길바닥에 굴러 다니는 돌멩이조차 문득 버려진 떡으로까지 보인 적도 있었다. 재수가 좋으면 후배들의 시화전에 그림이나 그려주고 소주라도 몇 잔 얻어 마실 수가 있었다. 또 가끔은 뜻하지 않은 술자리가 생겨 가까스로 안주라도 몇 점 집어 넣고 요기를 삼을 수가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여, 그대들은 바람 부는 겨울밤을 한잠 못 자고 바람막이가 될 장소만 찾아 헤매다 통금 위반에 걸려 본 적이 있는가. 통금 위반에 걸리는 것은 행복하다. 최소한 보호실에서 춥지 않게 하룻밤을 보낼 수가 있으며 벌금이 없으면 이삼 일 정도는 구치소에서 신세를 질 수도 있다. 일부러 방범 대원에게 붙잡히려고 깊은 겨울밤 골목을 헤매는 한 인간의 비극을 상상해보라, 실화라고 믿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틀림없는 실화다. 나는 마침내 생의 벼랑 끝에 당도해 있는 자신을 확연히 의식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이토록 구역질 나는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던가. 희망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장래를 간직한 채 비굴하게 전전긍긍하느니 떳떳한 방법으로 자살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번민했다. 그러나 여기서 죽는 것은 더욱 비굴하다. 자살은 결국 패배자가 내미는 최후의 이기주의적 자기 합리화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살아 봐야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 시절 나의 삶이란 나 자신에 대한 빚, 그 자체였었다. 나는 얼마간이라도 그 빚을 떳떳하게 청산하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후배 하나를 만나게 되었다. 그 후배는 공교롭게도 시골에서 교직 생활을 하고 계시는 내 아버님의 제자였는데, 당시 강원 대학을 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그즈음 재질이 없어 그림을 집어 치우고 글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었고 그 후배 역시 소설에 열중하고 있던 문학도였다. 형, 아직도 살아 있수? 참 질기기도 하우. 후배는 내게 그렇게 인사를 했다. 지금은 이 나라의 아름다운 시인이 되어 있는 이언빈, 신승근, 박기동, 최승호 같은 문우들도 당시 나를만나면 그렇게 인사를 하는 악습들을 가지고 있었다. 솔직이 말해서 나는 그런 인사를 받으면 내심 몹시 부끄러웠었다. 살아 있지 뭐.라고 얼버무리면서 나는 대충 후배의 인사를 어물어물 받아넘겼다. 방학이지만 볼일이 있어서 올라왔어요. 모처럼 만났으니 대포 한잔합시다. 구세주 같으신 말씀, 나는 그 후배를 따라 대포집으로 가서 이런저런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 끝엔가 그 후배가 내게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이런 제의를 해왔다. 형, 내가 자취하던 방이 비어 있는데요. 거기서 한번 살아 보지않을라우. 뜻밖의 제의였다. 나는 사실 별로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나 자신에 대한 빚도 한두 가지가 아닌데 남에게까지 연속적으로 빚을 지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남에대한 빚은 20원씩 꾼 빚 한 가지에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게다가 친구나 후배들을 찾아 다니며 밥과 잠자리를 제공받았던 일들도 적지 않은 부담감으로 남아 있었던 터였다. 형 성미는 잘 알아요. 하지만 마지막으로 딱 한번 자존심을 꺽어 보슈. 그 후배의 말에 의하면 그의 집에 자기가 전세로 방 한 간을 얻어 가지고 자취를 했었는데 그냥 방을 비워 두느니 거기 틀어 박혀 악을 쓰고 글이라도 한번 써 보는게 좋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걔네가 빚에 쪼들려서 급히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임기 응변식으로 도와 주는 셈 치고 그 방을 내가 전세 내게 되었어요. 걔네도 째지게 가난해서 날마다 죽 한 그릇도 제대로 못 먹는 형편이란 말요. 그러니까 형의 먹이는 형이 스스로 구해야 되는 거요. 게다가 부엌은 있지만 얼마 전부터 아궁이에 물이 고여서 무너앉은 지 오래니까 연탄을 넣을 수도 없어요. 그렇지만 이불은 두터운게 있으니까 그걸 뒤집어 쓰고 겨울을 나보라는 얘기였다. 방이라도 있으면 그래도 좀 낫잖우. 독한 맘 먹고 한 작품 기찬 걸로 만들어봐요. 고맙게도 후배는 거듭 내게 그렇게 격려해 주었다. 그리하여 그날로 나는 그의 집에서 살게 되었다. 그의 집은 후배에게서 들은 그대로 였다. 약간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아침은 굶고 점심은 거르고 저녁은 생략하는 형편이었다. 과장됨이 없이 실지로 그렇게 하는 때도 허다했다. 보아하니 자네도 매일 굶는 모양인데 보리쌀 한 톨이라도 있어야 나눠먹지. 이 많은 식구가 굶기를 밥 먹듯이 하는 형편이니. 그의 어머님께서는 가끔 내게 동정어린 목소리로 그렇게 말씀하기곤 했다. 전 괜찮아요. 조금도 염려 마세요. 지금이라도 시내에 나가면 밥 정도는 해결할 수가 있어요. 하지만 일부러 이렇게 인내심을 기르고 있는 거예요. 나는 그때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큰소리를 치곤 했다. 가끔은 그가 밥 사발을 들고 와서 내게 권하기도 했었다. 나는 되도록이면 그것을 필사적으로 사양하려 했었다. 정말이지 그때쯤엔 이미 굶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의 일처럼 생각되어지곤 했었다. 나는 다만 밤을 세워 소설이라는 걸 한번 써보려고 안간힘을 썼었다. 그러나 파지만 자꾸 쌓일뿐 전혀 소설은 되어 주지 않았다. 아침이 되면 지쳐서 잠이 들었고 가끔 잠결에 방문이 열리며 그의 어머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여보게 자나? 여보게 자나? 네, 잡니다. 라고 내가 마른 목소리로 대답해 드리면 그제서야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벌써 닷새째 아무것도 안 먹고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군. 아무리 굶어야 글이 나온다고는 하지만 기척도 없이 조용하기만 하면 혹시 죽은 것이나 아닌가 싶어서 겁이 덜컥덜컥 나는 걸 어쩌누. 일부러 그렇게 오래 굶으면서 글을 쓴 다니 하여튼 별난 사람일세. 고생을 사서도 그렇게 하는 걸 보니 성공은 하겠지만 옆에서 보기가 민망스럽고 딱하구만. 그러니까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수시로 확인해 보시곤 했었다는 얘기다. 그런 나날 속에서 가끔 그가 내게로 건너왔다. 그는 내게 방을 내어준 후배의 친구로서 누구보다 열심히 시를 쓰는 대학생이었다. 우리는 때로 밤을 하얗게 지내면서 문학을 이야기하고 인생을 이야기했다. 굶주림을 이야기하고 운명을 이야기했다. 그런 밤 밖에서는 함박눈이 쌓이는 예감, 불도 피우지 않은 냉방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우리는 속절없이 외로움에 전율했다.
내 방 안에서 어느 누구를 만날 수 있을까 가끔씩 문에 부딪히다 사라지는 소리 하얀 뱀이 안고 있는 안개의 숨소리지 꿈처럼 가슴 속에 깨어지는 유리의 비늘이지
-이흥모 사는 것은 5 -
그는 여러 가지로 아르바이트를 모색해 보는 중이었으나 좀처럼 마땅한 자리가 생겨나 주지 않았다. 휴학을 해야 하느냐 도둑질이라도 해서 학업을 계속하느냐로 그는 고민하고 있었다. 그의 밑으로는 여러 명의 동생이 딸려 있었으므로 당시 대학 1학년밖에 안된 그로서는 하루지내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대부분 생활이 어려운 형편이었다. 물론 잘먹고 잘사는 사람들도 많기는 했었지만 잘먹고 잘사는 사람들끼리만 어울렸고 우리와는 전혀 인연이 닿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그 어려운 형편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할 수가 있었던 것은, 하다못해 우리가 파먹을 원고지 뒷면이라도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조차 없었더라면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 살아 있지 않았을지도 모르며 살아 있다고는 하더라도 전혀 다른 형태로 살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굶고 살았다는 것이 무슨 자랑이며 굶어야만 글이 나온다는 것이 어느 나라의 저주스러운 법률인가. 어떤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글쟁이들이 끝까지 굶주리면서 글을 쓰다가 마침내 거리에서 동사라도 해주기를 바라는 듯한 어투로 말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대들이여 사흘이라도 한번 굶어 보시라. 그리고 원고지 앞에 앉아 보시라. 저절로 글이 나오리라고 생각되어지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굶주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거의 날마다를 그런 식으로 살아 보시라. 글은 커녕 욕밖에 나오지 않을 것이다. 아, 세상은 정말 쓰펄이라도 아니할 수가 없구나. 되지도 않는 소설은집어 치우고 어디 가서 일자리나 구해 봐야겠다. 정 안 되면 이젠 똥이라도 푸는 수밖에 없어. 나는 마침내 죽기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생각을 하며 그의 집을 나왔다.
거리에는 어둠과 함께 바람뿐. 커튼 뒤로 돌아서 있는 상. 상의 파이프 오르간에 푸른 죽음처럼 거리가 실린다. 한 권의 새 노트에 새벽까지바람이 접히고 유리창마다 바다가 흔들리고 있다. 오 흔들리는 바다에 나와 선 사내. 몇 잔 싱싱한 취기만 깔깔한 입 속에 남은 채 다시폐항의 깨진 빈 틈으로 새어 나는 바람을 맞고 있다. -이흥모 거리에는 바람이 -
그로부터 파란만장하게 살아 오기를 이제 십 년. 나는 망가지고 망가진 끝에 기어코 쓰잘데없는 시정잡배가 되었다. 툭하면 술 처먹고 마누라한테 주정이나 하고 툭하면 세상을 향해팔뚝질이나 하면서도 아직 글다운 글이라곤 한번도 써본 적이 없다. 애는 둘씩이나 되는데, 인생의 빚은 늘어가는데, 나이는 자꾸 먹어가는데, 몸은 점차로 쇠약해지는데, 언제 쓰려고 이렇게 비틀거리고만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시절 나와 함께 춥고 배고픈 겨울을 보내었던 시인이여, 어둠과 절망뿐인 나날 속에서 파지 뒷장이라도 파먹으면서 문학을 종교처럼 믿어 왔던 나의 시인이여. 그대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그대의 새 노트에 접히던 바람은 오늘도 내 생생한 기억 속에 남아 있으되 그대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오늘밤엔 후둑후둑 비가 내린다. 그대 그리운 발자국 소리도 비가 내린다. 이런 날은 문득 그대 생각. 소주 한병을 들고 먼 길을 젖은 채로 걸어와서 형, 아직도 살아 있수, 참 뻔뻔스럽소, 빙긋이 웃으면서 손을 내밀 것 같은 생각. 우리들의 겨울은 정말로 좇 같노라고 술취한 목소리로 회상하면서 우리가 굳게 끌어안고 살았던 그 기나긴 어둠이며 좇 같음들이 다시는 오지 않기를 건배하며 빌고 싶다는 생각...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그대는 아직도 진정한 시인이며 그때 우리가 보내었던 그 겨울이 결코 헛되이 잊혀지지는 않을 것임을. 그리고 나 또한 믿고 있다. 한번쯤은 죽기 전에 반드시 그 처절한 나날들을 모두 모아서 피 같은 즙으로 짜낼 것임을. 그 시절 내가 만났던 모든 사람들이여. 이제 더욱 더 나를 혐오해 다오. 나는 아직도 그대들에게 진 빚을 아무것도 갚지 못했다. 내 나이는 아직도 어른 여덟, 이제 먹이 문제는 가까스로 해결되었다. 집도 생겼다. 그것은 내가 같잖은 잡문 따위나 팔아서 마련한 또 하나의 빚이다. 어찌 혐오스럽지 않겠는가. 그러나 기다려 다오. 어떻게 해서든 일생에 단 한번쯤은 인간이 오직 먹고 살기 위해서만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도 반드시 보여 주고 싶어진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 온 길은 나 자신에 대한 빚이면서 또 타인들에 대한 빚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내게는 빚을 갚을 만한 확신이 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 왔던 모든 나날들은 처절한 굶주림과 고통뿐이었지만 그것들은 또 나 자신에 대한 빚이면서 재산이므로 언젠가는 내 소설의 거름으로 썩을 것이다. 그리고 단 한 그루의 나무라도 크게 하여 아름다운 열매를 익게 할것이다. 나는 오직 그 희망이 있으므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아직까지도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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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식 토정비결 - 전영순,하정화
<해삼물류>
39.김 - 식욕 돋구는 장수식품
우리의 주식은 쌀로 지은 밥이다. 그리고 이 밥을 먹을 때는 국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반찬이 곁들여진다. 그래서 우리의 전통적인 밥상에는 기본메뉴라 할 수 있는 김치를 비롯하여 각종 나물, 생선, 육류 등이 지역적 특성과 풍토에 따라 오르게 마련이다. 우리나라 방방곡곡에서 밥과 함께 곁들여 먹는 반찬의 가짓수는 사람 수 만큼이나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반찬 중에서 김처럼 밥맛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것도 없다. 그래서 밥집이나 여염집 밥상에는 늘 구은 김이 오르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을 빳빳한 김에 싸서 먹는 맛은 일품이다. 또한 김과 밥의 조화는 '휴대용 정식'이라 할 수 있는 김밥에서 절정에 달한다. 밥과 함께 단무지나 시금치, 쏘세지, 달걀후라이 등을 넣고 김으로 말아서 적당한 크기로 썰어놓은 김밥은 산이나 들, 그리고 여행길 등 어디서든 간단하고 맛있게 주린 위장을 채울수 있는 간편한 휴대식이다. 여기서 '간편함'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김이다. 김은 홍조류에 속하는 해초를 일정한 크기로 만든 건조품이다. '해태'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은 일본식 한자표기이며, 엄밀하게 따지면 우리나라의 파래를 지칭하는 것이다. 김은 북태평양에 접한 해안 어디든 널리 분포되어 있다. 알래스카 만에서 캘리포니아주까지 북동부에서 주로 서식하는데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시베리아에서 왔을 때부터 이미 몇천년 동안 이용해왔다고 인류학자들은 보고하고 있다. 즉 이들 인디언들은 음식에 소금을 넣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체내의 염분을 보충하기 위해 김을 먹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먹었던 것은 오늘날과 같은 가공된 형태의 김은 아니었다. 해초 상태의 천연김을 줄기채로 그냥 먹었을 것이다. 천연산 김은 우리나라 남해를 비롯하여 일본 연해 등 농도가 높은 곳에도 약 20여 종이 분포하고 있으며, 이것이 양식되면서 오늘날과 같이 가공된 형태의 김으로 발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쌀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에서 중요한 식품의 하나로 인식되기에 이른 것이다. 현재 김 생산을 가장 대규모로 산업화한 나라는 일본이고 중국에서도 일찌기 김 양식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김 양식의 역사는 외국에 비해 짧은 편이다. 문헌상에는 서기 1424년 발간된 {경상도 지리지}에 최초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경상도 하동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구전에 의하면 1700년 경에 섬진강 어구에서 조개를 채취하고 있던 한 할머니가 나무토막에 붙어있는 김을 발견하고 떼어먹어 보았더니 맛이 독특해서, 그후 대나무를 물 속에 박아 인공으로 김을 착생시킨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또 {조선의 수산}이라는 문헌에는 17세기 말에 전남 완도에서 최초로 양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전남 광양군에서는 4천여 년 전에 이미 김을 귀중한 토산물로 여겼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 김 양식의 역사에 대하여 문헌마다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은, 오늘날과 같은 근대적인 방법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미 오래 전에 지역에 따라서 김이 양식되었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즉, 옛날에 인디언들이 소금기 보충을 위해서 천연김을 먹었던 것처럼 우리 조상들도 아주 오래 전부터 해안지역마다 나름의 방식대로 김을 채취해 먹었을 것이라 보면 될 것이다. 그리고 김양식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늦어도 조선 중기 무렵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오랜 역사를 거쳐 김은 이제 우리 밥상에서 떠날 수 없는 일상식품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아울러 높은 영양가를 지닌 식품으로 널리 알려지기에 이른 것이다.
성분
마른 김 한 장은 달걀 두 개분의 비타민을 함유하고 있다. 그런데 김은 채취한 시기에 따라 영양분의 함량이 조금씩 다르다. 일반적으로 겨울철에 난 것이 단백질의 함량이 높아서(30∼35%) 질 좋은 것으로 취급된다. 건조품인 김의 주성분은 당질과 단백질이다. 그리고 다른 곡류나 채소류에 비해서 단위당 함유량도 많은 편이다. 그런데 곡류에 비해서 먹는 양이 적으므로 단백질원으로는 기대하기 어렵다. 그 대신 김에는 칼슘, 인, 철분, 칼륨을 비롯하여 마그네슘, 아연, 망간, 코발트, 니켈, 구리, 요오드 등 미량의 무기질이 포함되어 있어서 독특한 맛과 향기로 식욕을 돋구어 주고 소화흡수를 촉진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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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임새
가장 질좋은 김은 빛깔에 광택이 있고 향기가 진하며 불에 구웠을 때 청록색으로 변하는 것이다. 보통 밥을 싸서 먹거나 가루를 내어 떡국, 국수 등에 넣어 먹는다. 이밖에도 김무침, 김조림, 김장아찌, 김튀김, 김국 등의 입맛 돋구는 요리가 있다. 김을 구울 때에는 두 장씩 겹쳐서 낮은 불에 서서히 가열시켜야 한다. 김을 잘못 구우면 오그라들 뿐만 아니라 영양 손실도 많게 된다. 두 장을 겹쳐서 구울 때도 한쪽만 불을 쬐는 것이 좋다. 또한 김을 구울 때 소금을 너무 많이 쓰면 맛을 떨어뜨리고 건강에도 해롭다고 한다. 한편 김에는 피코에리트린이라는 홍자색의 색소와 피코시안이라는 청색 색소 및 클로로필이 포함되어 있는데 피코에리트린은 가열됨으로써 청색인 피코시안으로 변한다. 따라서 김을 불에 쬐면 적자색이 없어지면서 녹색을 띠게 되는 것이다. 또 김을 오래 보관해두면 자색을 띠게 되는데 이것은 피코시안 및 클로로필이 분해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응은 김을 직사광선 아래 두거나 습기를 머금으면 더 빨리 일어난다. 그러므로 김을 보관할 때는 밀봉하여 어두운 곳에 두어야 한다. 식욕을 돋구어 주는 김의 특유한 향기는 김 자체에 의한 것이 아니라 김에 혼합되는 미생물의 분해작용으로 인한 것이라 한다.
이것이 토종
'완도 하면 김, 김 하면 완도'라 불릴 만큼 완도는 김의 고장이다. 지금은 김 생산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사정이 다르지만 지난 70년대만 하더라도 완도에서 생산되는 김의 양은 전국생산량의 70%를 차지할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도 연간 소득이 수백억대에 이른다고 한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김은 질도 좋아서 일본에 수출하기도 했고, 국내수요가 대량으로 늘어나는 바람에 소득이 높아져서 한때는 '개가 지폐를 물고 다닌다'고 할 정도였다. 김 양식법이 근대화되면서 우리나라 남해안 일대에서는 어디든 김을 생산하게 되었고 생산량과 수요가 동시에 급증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최근에는 대규모 간척사업과 해수 오염으로 김 양식장이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이 김 생산이 줄어들 경우, 국내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서는 일본이나 중국 등지에서 김을 수입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우리 바다에서 나는 우리 김을 먹기 위해서는 바다를 오염으로부터 지키는 일이 시급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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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술에 울고 웃던 고려인 삶의 빛과 그림자 - 홍영의(국민대 박물과 학예원)
농민만 우롱하는 금주령
지금 이땅에 금주령이 내려진다면 1930년대 미국의 마피아 대부 알카포네처럼 밀주로 떼돈을 벌 수 있을까. 또 술과 관련된 그 많은 사업들과 그것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은 어찌 될까. 미국은 경제공황 때문에 금주령을 내렸다지만, 우리는 어떤 핑계를 댈 수 있을까. 설마 1960,70년대 잘살기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던 새마을 운동 때의 밀가루 막걸리에 치기 어린 향수를 느껴가며, 한 때 남아돈다는 쌀 때문에 집집마다 담아놓은 농주와 겨우 복원한 민속주를 금주령이란 미명 아래 없앨 수 있을까 말이다. 더구나 막대한 재정수입을 포기하면서까지... 오히려 술 때문에 모진 고통을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아니면 몇 개 안되는 세계 1위 자리를 선뜻 양보하기 위해서라면 모를까. 위스키의 본고장인 영국에서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세계 1, 2위를 다투는 양주 수입국,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1인당 술 소비량, 음주운전 적발과 그로 인한 사고가 가장 많은 나라. 고려시대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우리의 실정이다. 그럼 고려정부는 술을 어떻게 정책적으로 적절히 이용했을까. 지금처럼 주세를 국가의 주요한 재정수입으로 삼았을까. 또 금주령은 무슨 이유로 내렸을까. 이에 대해 애주가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궁금하다.
고려시대에는 양온서라는 관청을 두어 행사에 필요한 술과 감주를 관장하였다. 양온서는 장례서.사온서 등으로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뀌었으며, 사온서는 조선시대까지 계속 존속하였다. 983년 (성종2)에는 성례. 낙빈. 연령. 영액. 옥장. 희빈 등 6개의 주점을 설치하였다. 사람과 물물의 유동량이 많은 개경의 번화가 등지에 주점을 설치하여 술을 판매하였던 것이다. 국가에서 주점을 설치하여 술을 관장한 이유는 다점.역원 등과 마찬가지로 효과적인 대민정책과 정보수집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아울러 주점은 화폐유통에도 활용되었다. 이것은 1002년(목종5) “차. 술. 음식 등의 점포들이 교역을 할 때에는 화폐를 사용하라”고 한점에서 짐작할 수 있다. 숙종때에는 해동통보를 유통시키면서 중앙과 지방에 술을 관장하는 관청을 설치하였다. 이 때 송나라처럼 술의 전매제가 시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정한 세금을 부과하였을 것이다. 한편 국가에서는 금주령을 내리기도 했다. 금주령은 홍수나 가뭄등의 자연재해로 곡식이 부족하거나, 나라에 대상이 있어 자숙해야 할 때 내려졌다. 또한 절이나 승려가 술 때문에 폐단을 일으킬 때에도 금하였으며, 어떤 때에는 소주를 사치품목으로 여겨 금지한 일도 있었다.심지어 원간섭기에는 원나라에서 금주령이 내려지자 고려 정부에서도 하는 수 없이 이를 실시한 적도 있었다. 즉 국가행사인 성절일.팔관회.연등회 등을 제외하고는 사사로이 술을 만들어 마시는 무리는 처벌하였고, 누룩까지도 값을 치루어 거둬 들여야만 했다. 이렇게 내려진 금주령은 관료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큰 불편이 아닐 수 없었다. 술에 취해 돌아오다가 야경꾼들에게 들켜 곤욕을 치룬 이규보는, ‘나라에서 농민들에게 청주와 쌀밥을 먹지 못하게 한다는 소식을 듣고’라는 시에서 이렇게 불만을 토로하였다.
장안의 부유한 집에는 술과 패물이 산같이 쌓였는데 절구로 찧어낸 구슬 같은 쌀밥을 말이나 개에게도 먹이고 기름처럼 맑은 청주를 종들도 마음껏 마시네 이 모두 농부에게서 나온 것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로세 ... 희디 흰 쌀밥이나 맑디 맑은 청주는 모두 이들의 힘으로 생산한 것 하늘도 이들이 먹고 마심을 허물치 않으리 권농사에게 말하노니 법령이 혹 잘못된 것 아니요 높은 벼슬아치들은 술과 음식에 물려 썩히고 오랑캐들도 나누어 갖고는 언제나 청주를 마신다오 노는 사람들도 이와 같은데 농부들은 어찌 못 먹게 하는가
말이나 개에게 쌀밥을 먹이고, 종들에게 청주를 마음껏 마시게 하면서도 매일같이 힘들여 일하는 농민에게는 그들이 생산한 흰 쌀밥, 맑은 술 한 번 제대로 먹고 마시지 못하게 하는 현실을 개탄한 것이다. 금주령을 내렸지만, 힘없는 사람이나 피해를 당했을 뿐, 권세가들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던 것 같다. 이와 같은 현실은 고려말 윤여형이 <상률가>에서 농민들의 참상을 절실하게 표현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고위 관료와 부호에게 토지를 빼앗기고, 조세를 이중 삼중으로 물리며, 그들의 집에서는 하루 먹는 것이 만전어치나 되고, 그 좋은 음식들이 모두 다 촌 늙은이 눈 밑의 피인 줄을 그들이 어찌 알기나 하랴마는 그 자리에서 묵묵히 일하던 우리네 삶은 아직도 그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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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랍문화의 이해 - 공일주
2. 인간의 신에 대한 관계
이스람 신비주의
윌리암 잉게(W. R. Inge)는 그의 유명한 『기독교 신비주의』에서 종교적 신비주의란 영혼과 자연 속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려는 시도 혹은 좀더 일반적으로 사상이나 감정 속에서 영원 속의 순간과 순간에세 영원의 내재를 인식하게 되는 시도로서 정의될 수 있다고 했다. 신비주의에 대한 여타의 많은 정의가 간략하게 문장으로 표현하려 했으나 이들 정의 중 일부가 비판되고 날카로운 통찰로 재검토되었다. 이슬람 신비주의자들도 신비주의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정확하고 만족스러운 설명을 하는 데 쩔쩔맸다는 것은 상기할 만하다. 만약 일반적 신비주의를 정확하고 간결하게 정의를 내릴 수 없다면 수피즘으로 알려진 특이한 형태의 이슬람 신비주의도 아마 개개의 무슬림들, 그리고 개인적 체험 속에서 알라의 실제 존재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각기 체험을 기술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하나님과 합일을 위한 추구에서 기독교 신비주의는 우선 먼저 숭배의 대상이고 최고의 모형이며 도달 목표인 예수 그리스도께 의존한다. 다음으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본질과 그의 목적을 고찰한다. 신비적인 노력에 관한 예들을 위해 성자들의 생애와 신비주의자들의 서적을 뒤적일 수도 있다. 성례전과 주일성수, 금욕의 실천, 개인 묵상, 그리고 영적수련을 통한 신의 은총을 기대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슬림 신비주의자는 자기 자신과 알라 사이를 중재하는 그리스도와 같은 중재자가 없다. 사실 완전한 인간으로 이상화되었던 무함마드는 무슬림들이 원하던 것을 부분적으로는 공급했지만, 신적 영광은 받지 못했다. 수피에게 로고스(logos)는 쿠란과 창조된 세계에 계시된 알라이므로 쿠란은 신앙과 목상의 초점이었고, 실제 우주는 활동하는 알라를 직접 관찰해 보는 현장이 되었다. 기독교 신자들처럼 공적인 의식이나 사적인 신앙생활의 규정된 규율도 따랐다. 이슬람의 초기 성자들은 최고의 모형이 신앙의 창시자, 무함마드라는 생각을 가졌다. 그후 줄곧 많은 입문서가 신비주의자 교육을 위해 쓰여졌고, 공동의 금욕생활과 알라에 대한 기도를 위해 수도원이 세워졌다. 수피즘은 이스람 기원 첫 3세기(서기 7~10세기) 동안에 걸쳐 발생했는데 8~9세기에 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수피즘(Sufism:Tasawwuf)이란 용어는 수프(Suf,털)에서 파생됐다. 무슬림들은 조잡한 털옷을 입음으로써 기독교 관습에 관한 저항하고 기독교 세계에 관한 거부를 나타내었다고 말하고 사람도 있다. 금욕주의와 묵상주의가 이 운동의 첫 단계의 특징이 되었다. 그것은 비잔틴과 페르시아의 정복지로부터 흘러 들어와 이슬람을 압도하고 이슬람의 원시적 단순성과 다른 세 속성을 파괴하려고 위협하는 배금사상과 사치에 대한 필연적인 반발이었다. 이런 저항에 대표적인 사람으로 하산 알 바스리(728년 사망)를 드는데, 무으타질라학파의 창시자이며 무슬림 신학자이다. 그는 칼리파 우마르 2세 앞에서 고위적의 부패를 날카롭게 질타함으로서 후대 수피들의 귀감이 되었다. 그것은 개인적인 모험을 무릅쓰고 자신이 할 말을 했기 때문이다. 8세기 중에서 어떤 무슬림들은 그들 동료와 헤어져 레반트 지역에 가서 당시 흩어져서 은거하던 기독교인들을 의식적으로 모방하고 전적으로 금욕생활에 전념하기 위해 사막이나 동굴로 들어가 은둔했다. 다음은 시라아의 한 여자 금욕주의자가 금욕주의자들에 대한 묘사한 글이다.
그들은 모든 목적마다 신과 맺어져 있네. 그들은 높은 야망은 신께로만 상달되니 그들은 진실을 신께 맹세하네. 영원한 이를 위해, 오, 고귀한 추구여. 그대들은 명예도 자식도 부와 비싼 옷가지들. 모든 탐욕, 식욕, 이 세상의 쾌락을 위해 다투지 않네. 그대들이 도시에서 사는 편안함과 즐거운 생활을 소중히 여지기 않듯 저 건너 먼 수평선을 바라보며 그대들은 강렬한 목적 의식으로 조물주을 찾으려 애쓰네. 황량한 실개천이 헤매는 곳을 밟기도 하고 신꼭대기 높이 치솟은 곳에 그대들은 모이리. 대분분의 다른 사람들은 정직하고 합법적인 사고로 입에 풀칠할 정도이면 자신들의 개인적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 했고, 그렇지 않으면 자기의 초라한 집을 떠나지 않고 오로지 밤낮으로 알라에게 기도함으로써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금욕주의 운동은 메디나에서 쿠파, 바쓰라, 다마스쿠스, 바그다드, 그리고 후라산과 신드의 먼 지방까지 퍼져 갔다. 이내 곧 수피즘이 발달하여 두 개의 주요 중심지로 이슬람의 수도 바그다드와 페르시아의 북동부가 떠올랐다. 페르시아 북동부에서 선구자가 된 이브라힘 븐 아담은 왕국을 포기하고 국외로 떠돌아다녀 한때는 시리아의 정원사로 스스로 고용되기도 했다. 서기 9세기에는 단순한 금욕주의에서 복잡한 이론이 실린 신비주의적 고행으로 발전되었고, 이로부터 고도로 발달된 신지학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 초기단계으 주요한 인물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이 오로지 간접적인 자료에만 의존하고 있어 현재로서는 이러한 변화과정을 정확하게, 그리고 자신 있게 더듬어 볼 수 없다. 예를 들면 발흐 태생의 샤끼끄(Shaqiq, 810년 사망)는 ‘알라에 대한 믿음’을 신비적인 상태로 정의한 최초의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이 자료는 비교적 최근에 근거한 것인데 그 당시에 이미 신비주의자들에게는 ‘영적 상태(hal)와 영적 도달점(maqam)’의 구분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12세기 이후에는 수피운동이 활발했고 스피 스승의 가르침에 따르려고 하는 무리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영적 지도자(쉐이크)와 초심자(무리드) 사이의 관계는 권위와 무결점이 그 특징이었다. 수피즘 교육의 중심지는 수도원이었고 아직까지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종단으로는 창시자 압드 알 까디로 알 질라니(1165년 사망)의 이름을 딴 ‘까다리아’종단이 있다. 그는 원래 엄격한 한발리파였고, 바그다드에 있는 그의 무덤은 오늘날까지 수많은 순례자의 눈길을 끌고 있다. 그 뒤 까다리아 종단으로부터 많은 종단들이 퍼져 나가게 되었는데 그 중 유명한 종단으로는 압드 알 까디르의 조카인 아흐마드 알 리파이(1182년 사망)가 세운 리파이야 종단으로, 오늘날 터키, 시리아, 이집트에 퍼져 있다. 이 종단은 매우 광신적인 모습과 13세기 몽골이 이라크를 점령했던 시기에 영향을 받은 원시 샤머니즘의 영향으로 요술은 물론 유리먹기, 불밟기, 뱀놀이 등과 금욕의 극단적인 수행이 두드려졌다. 두번째 종단으로는 샤피이학자이며 압드 알 까디르의 제자였던 알 수흐라와르디(1234년 사망)가 세운 수흐라와르디야 종단이 있다. 이스람 세계에서 이후에 세 명의 유명한 신비주의자가 등장했다. 그 중에 알 아라비는 1165년 스페인 남부 무르시아에서 태어나 세빌리아에서 수학하고 튀니지에서 스피즘을 주창했다. 1202년 그가 동쪽으로 여행을 시작하여 이라크, 아나톨리아, 시리아를 거쳐 메카에 이르러 그곳에서 한동안 머물다가, 마침내 다마스쿠스에 정착한 후 1240년 세상을 떴다. 그는 창의력이 풍부하여 순니, 시아 이스마엘파, 수피. 신플라톤주의, 영지주의, 그리고 연금술에 의지하여 신비주의에 대한 종합적인 체계를 세웠다. 그의 교파을 요약하면 알라은 절대적이고 물질계를 초월하여 우주 어디나 존재하며 우주의 창조적이고 합리적인 원칙은 무함마드으 실재라고 표현했다. 둘째 번으로는 이븐 알 파리드를 위대한 신비주의자로 꼽는데 1181년 카이로에서 태어나 1235년 그 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알 아라비와 달리 그는 여행이라고는 오직 메카순례뿐이었다. 그는 위식을 통해 알라와 세상 사이의 중재자 무함마드의 영혼과 합일된다고 생각했다. 셋째 번으로는 잘랄 알 딘 루미가 있는데 그는 1207년 발흐에서 태어나 그의 여생을 코냐에서 보냈고 수피교리와 훈련요령에 대하여 글을 썼다. 수피들은 알라를 염원하라는 쿠란의 가르침에 따라 알라라는 단어를 반복했으며, “알라 이외에는 신이 없다.”라는 신앙고백을 되풀이했다. 이러한 의식적인 반복행위는 아랍어로 디크르(Dhikr)라고 하는데 이 디크르는 ‘라 일라하 일랄라(알라 이외에는 신이 없다)’, 알라후 아크바르(알라는 위대하다), 알라와 같은 구절을 끊임없이 반복하여, 이때 노래에 맞춰 몸을 움직이기도 한다. 이러한 디크르에 수행과정의 도구로서 묵주가 사용되기도 하는데, 묵주는 본래 불교에서 사용되던 것으로 인도에서 직접 들어온 것이 아니고 동방 기독교 교회를 통해 수피들에게 전해진 것이었다. 십자군 전사들이 중동에서 이를 발견하여 서양에 소개함으로써 로마 카톨릭 교회에 전래되었다. 수피종단에서의 수행과정은 각기 특징적인 디크르를 갖고 있으며, 이를 완전히 습득하기 위해 쉐이크나 피르(pir, 우르두어로 성인이라는 뜻)로 일컬어지는 스승과 밀접한 관련을 가져야 했다. 그래서 이런 영적과정을 아랍어로 따리까라고 하는데 이것은 수피들의 수행자체뿐만 아니라 스승과 제자 간의 교류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수피종단은 기독교의 수도원과 흡사한 모습을 보여 준다. 따라서, 종단의 핵심 멤버로 엄격한 금욕주의를 실천한는 쉐이크와 그이 제자(테르위쉬)들이 있었고, 일반신도들은 일상생활을 하면서 따리까의 일부수행에 참여하였다.
신비주의자들은 전통이나 계시, 관찰, 논리적 사고와 명상 등을 통해서 얻어지는 지식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고, 다만 신에 대한 참 지식은 오로지 직관에 의해서 얻어진다고 하였다. 그들은 인간의 심성은 거울과 같아서 그 내부에서 신의 영상을 볼 수 있다고 믿었으나 인간 심성으로서의 거울은 세속에 대한 욕심이 많아 먼지가 가득함으로 그 실체를 보기 위해서는 세속적 먼지(욕구)를 지워야 한다고 말했다. 신비주의자들의 수행과정에는 세속으로부터 이탈시키는 수도, 그리고 명상과 자기성찰을 통해 신의 사랑으로 발전시키는 것 등 두가지가 있다. 그 수행과정을 여행으로 묘사하여 궁극적으로는 알라 안에서의 자아소멸을 이루려 하였다. 수피들은 그 수행과정에서 수행 성취단계들을 구분지어 영적 도달점(station)와 영적상태(state)로 나누었는데, 그들의 정교한 이론에 속하는 이런 구분은 영적 도달점을 개인의 노력에 의해 획득되어진 정도로 정의하는 한편, ‘영적상태’를 은총에 따라 계속 변하는 전진을 정의했다. 수피즘의 유명한 이론가인 알 꾸샤이리(1072년 사망)는 ‘영적상태’를 선물로, ‘영적 도달점’을 자신이 일해서 얻는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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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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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세상에서 가장 놓은 약
남편의 직장 문제로 떨어져 살다 보니 외롭고 힙들 때가 종종 생긴다. 특히 몸이 아플 때는 더욱 그렇다. 갑자기 내린 비로 기온이 뚝 떨어진 어느 날이었다. 몸살감기에 걸린 나는 온몸에 열이나고 기운이 하나도 없어 아이의 밥도 제대로 챙겨 주지 못하고 끙끙 앓아 눕게 되었다. 이럴 때 한층 더 보고 싶은 남편의 생각에 아픈 것이 서럽기까지 했다. 결국 나는 아이가 옆에서 공부를 가르쳐 달라고 보채는 것도 짜증이 나"귀찮아"하며 소리를 질렀다. 아이는 눈물이 글썽해져서 밖으로 나갔다. 그때였다. 전화벨이 울렸고 수화기 저편에서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참을 수 없이 북받치는 설움에 혼자 흐느끼고 있는데 밖에 나갔던 아이가 빵과 우유를 사 들고 들어왔다. "엄마, 배고플까봐 사 왔어" 아이의 그 한마디에 나는 아픈 것도 서러운 것도 남편이 보고 싶은 것도 까맣게 잊은 채 아이를 끌어안고 펑펑 소리내어 울고 말았다. 아이도 따라 울었다. 한참 뒤 아이가 나의 눈물을 닦아 주며 말했다. "엄마, 난 엄마가 아픈 게 제일 싫어. 그러니까 아프지 마." 그 순간 나는 그 동안 미처 모르고 있던 가장 좋은 약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는 내가 누워 있는 며칠동안 밖에 나가 놀지도 않고, 학원 차가 올 때 배웅을 못 나가도 아무런 투정을 하지 않았다. 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학원에서 돌아오는 아이를 마중 나갔을 때, 아이는 기쁜 얼굴로 학원 차에서 내리더니 내게 달려와 안겼다. "엄마 사랑해요"라고 살짝 속삭이는 아이의 말에 난 또 한번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황은하 님/경북 안동시 용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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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40 - 철학 제2막이 내리다: 근대철학의 시작(14세기경)
그때 그세계에서는 1309년: 스위스 동맹 1335년: 이탈리아, 인문주의 강성과 그리스 문예
세계 철학사상의 역사는 3막으로 되어 있다. 제1막은 고대철학이었다. 자연의 뜻이 배경되고 지중해 연안과 아테네.로마가 중심무대가 되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역이 되어 여러가지 내용의 철학이 연출되었다. 그러나 그 제1막은 로마의 종말과 더불어 막을 내렸다. 제2막은 기독교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배경에는 큰 성인들과 신앙적 분위기가 짙게 깔려 있었다. 신의 섭리와 영광이 그려져 있다. 무대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가 중심이었는데, 후기는 전 유럽으로 확대되었다. 일부의 후진국가들은 전면에 지나지 않았다. 중심 배역은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맡았으나, 오리게네스, 안셀무스,둔스 스코투스등이 조역을 맡아 신성한 뜻과 인간의 이성적인 대화가 계속되었다. 제1막은 기독교의 세력이 끝을 고하게 했으나, 제2막은 자연스레 끝나면서 제3막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제3막은 아직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현대철학은 근세철힉의 연장이라고 보아야 하겠기 때문이다. 누가 보든지 제3막의 배경은 인간, 그것도 집단적인 인간이 되고 있다. 이성인간을 상징하는 계몽사상, 로망성을 대표하는 예술과 정열의 인간, 산업혁명과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집단인간, 최근의 산업사회와 메커니즘을 개척한 인간상 등이 계속 무대의 중심을 만들어오고 있다. 그러나 이 3막의 정리는 누가 할지 모르는 먼 훗날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역사의 제2막인 중세기를 끝내면서 우리는 몇 가지 문제를 정리했고, 근대를 위한 설명도 뒤따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추가하고 싶은 내용은, 중세기는 기독교의 세기였는데, 그 종교성 자체에 큰 변질이 찾아와 이제는 더이상 중세기라고 부를 수 있는 전통성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는점이다.
그것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7)같은 종교 사상가가 나타나 기독교적 신학과 신앙의 전통성을 바꾸어놓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는 기사의 가문에 태어나 1300년경 파리의 교수가 되고, 2년후기는 교황에 의해 박사학위를 받았을 정도로 대표적인 학자로 인정받았다. 1307-1311년 사이에는 도미니크 교단의 총대표직을 맡았을 정도의 공인받는 학자였다. 그의 명성과 학문적 위엄은 당대에 비교할 인물이 없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만년에는 종교재판정에 서게 되었고, 유죄판결을 선언받기 전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중세기가 스스로 학문적 변질을 초래했다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것이었다. 그는 최초로 독일어로 저술한 사람이었다. 세계 공통어인 라틴어를 버리고 모국어인 독일어로 글을 썼다는 것은, 그것이 이미시대적인 요청이었고, 에크하르트는 민족문화의 선구자가 되었다고 보아 좋을 선도자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를 신비주의 종교 사상가라고 부른다. 그가 취급한 과제는 기독교적 신학이었다. 그러나 그 방향과 내용은 이미 전통적인 기독교 정신을 떠나 완전히 자기자신의 종교철학적 내용으로 바꾸어놓았다. 계시는 위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나, 에크하르트의 신앙적 인식은 안으로부터 불꽃같이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교회는 인간은 죄인이므로 구원을 받아야 하는 존재로 말하고 있으나, 에크하르트는 그 모든 것은 우리들 정신의 깊은 속에서 일어나고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히려 인간이 욕망과 인간적 기대와 관심을 무화시킴으로써 신을 인식하는 것은 신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계시를 통해 주어지는 신의 가르침보다는 우리 영혼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리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내용은 이미 신학이 아니라 인간의 철학적 사고의 유산이며, 신앙의 학이 아닌 종교철학의 과제로 변질되어 있었다. 그의 정신이 그 당시에는 비판을 받았으나, 얼마 후에 야콥 뵈메에 이르러 더 전진된 종교철학으로 나타났을 때에는 누구의 비난도 받지를 않았다. 뵈메의 "아우로라(새벽)"라는 책은 지금도 에크하르트의 저서와 더불어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후에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도 이런 진보적 과정이 있었던 때문이며, 종교 자체가 전통적인 신앙에서 변질, 이탈 되었다는 것은 중세기의 종말인 동시에 무신론에의 길을 열어주는결과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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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
라면은 살짝 끓여서 물을 버리고 다시 삶아 먹는 것이 좋다는군요.
'라면'은 간식으로 많이 먹는 식품입니다. 어떤 어린이는 아침부터 라면을 먹는 아이도 있다고 합니다. 88 올림픽 때, 미국 선수들이 라면을 무척 즐겼다고 들었습니다. 이 '라면'은 흔히 일본어에서 온 것으로 알고들 있습니다만, 사전을 통해서 보면, 중국어에서 온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자어로 '손 수 변'에 '설 입'자를 쓴 '랍'자에 '국수면'자를 써서 '랍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납치하다'의 단어에서 쓰는 '납'자와 같습니다.
이 한자어 '랍면'은 중국어로 'lamien'으로 읽습니다. 일본에서는 '라-멩'이라고 하는데, '라'를 발음할 때 길게 합니다. 이 발음 역시 중국어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중국어에서 온 것으로 보입니다. 라면은 기름에 튀기는 음식이기 때문에 오래 지나면 기름이 부패하게 되어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끓여 드실 때, 살짝 끓여서 물을 버리고 다시 삶아 먹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조금 힘이 들지만요.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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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사회/문화/인물 |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1장 죽기가 힘들었던 사람들
빗속으로 사라진 황제의 유해 -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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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4년 카이사르는 파르티아 원정을 공식 발표했다. 그리스를 지나 오리엔트로 가서 파르티아를 무찌른 뒤 흑해를 빠져나가 도나우강을 제패하면서 그곳을 방어선으로 확정하려는 의도였다. 이즈음 카이사르가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시빌라의 신탁 가운데 오직 왕만이 파르티아 원정에 성공할 수 있다는 예언이 있었는데, 이것이 그 소문의 출처가 된 것이다. 그 해 2월, 로마에서 열린 루페르칼리아 축제의 연회장에서 안토니우스는 왕관을 본뜬 관을 카이사르에게 바쳤다. 물론 카이사르는 거절하였다. 그로부터 한 달도 되지 않은 3월 15일. 생일을 넉달 앞둔 56세에 그는 원로원 회의장에서 살해되고 만다. 원정을 승리로 이끌고 개선가를 부르며 귀국한 카이사르가 왕위를 바란다면 그때는 어떤 수단을 써도 그의 야심을 막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죽이려면 파르티아 원정을 떠나기 전 마지막 원로회의의 장소가 절호의 기회다. 암살자들은 회의가 열리기 직전,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단검을 들고 카이사르를 마구 찔러댔다. 카이사르는 스물 세 군데의 상처를 입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슴에 받은 두번째 상처가 치명적이었다. 죽음을 깨달은 카이사르는 꼴사납게 넘어지지 않도록 토가자락을 몸에 감으면서 쓰러졌고, 잠시 후에 숨을 거두었다. 하필 정적이었던 폼페이우스 입상 아래서였다. 원로원 의사당은 폼페이우스가 지은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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