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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48 호
4339.11.02 (09.12)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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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 - 風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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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시며 → 자유글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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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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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과학의 임무는 지구를 떠맡는 노릇이 아니라 도덕적 상상력을 물려받는 일이다. 왜냐하면 도덕적 상상력이 없으면 인간과 믿음 그리고 과학이 함께 멸망해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 / 제이컵 브러노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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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과학/예술/교육 |
- 조화유의 미국영어 - 일반인을 위한 경제생활 영어
39. This is on the house.
한국을 처음 여행하고 돌아온 미국 친구가 This is service.가 한국에서는 무슨 뜻으로 쓰이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미국 친구가 제주도에서 꽤 비싼 토산품을 하나 샀더니 조그만 목각품을 주면서 This is service.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얼마냐고 했더니 돈은 더 받지 않더라면서 한국에서는 This is service.가 This is a free gift.(이건 그냥 선물로 드리는 겁니다)란 뜻으로 쓰이는 것 같은데 사실이냐고 물었다. This is service.는 물론 Konglish(한국식 영어)다. 한국에서는 상인들이 "이건 서비스로 드리는 겁니다"라는 말을 잘 쓴다. 물론 "이것은 그냥 덤으로 드리는 것입니다"란 뜻이다. 이 말을 그대로 This is service.라고 직역을 해서 외국 관광객한테 써먹는 상인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것은 덤으로 드리는 것입니다"에 해당하는 영어는 This is a free gift. 또는 We'll throw this in. 또는 This is on the house, 그리고 This is complimentary. 등이다. throw in은 덤으로 하나 더 던져 넣어준다는 뜻이고, on the house에서 house는 영업소를 가리키므로 free of charge(공짜로)란 뜻이다. 저자가 미국 사람들한테 증정본을 줄 때는 책에다 With the compliments of the author(저자 증정) 또는 With the compliments of W.Y.Joh(조화유 증정)라고 써서 준다. 그러니까 with the compliments of가 우리말 '증정'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이것은 글로서 쓸 때만 이렇게 표현하고 실제로 책을 주면서 말할 때는 This is complimentary. 또는 This is a complimentary copy for you.라고 하는 게 보통 이다. complimentary는 free(무료)를 아주 고상하게 표현하는 말이다. courtesy는 '예의'란 뜻이지만 by courtesy of라고 하면 역시 '증정'이란 뜻이 된다(by와 of를 빼고 간단히 courtesy라고만 쓰기도 한다). 새로 생긴 학교에 James Wilson이라는 학부형이 책상, 걸상 등을 무료로 기증했다면 The school funiture was supplied by courtesy of Mr. James Wilson.이라고 할 수 있다. 그냥 supplied by Mr. James Wilson이라고 하면 돈을 받고 주었는지 공짜로 주었는지 확실치 않지만 supplied by courtesy of Mr. James Wilson이라고 하면 무료 기증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by courtesy of를 줄여서 간단히 courtesy라고 쓰는 경우가 더 많다. 미국 텔레비전을 보면, 뉴tm 시간에 간혹 COURTESY, NBC-TV와 같은 자막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이 장면의 사진은 NBC-TV에서 제공한 것입니다"란 뜻이다.
At a store- Customer: I'll take this one. Salesgirl: All right, sir. That will be $17.50. Customer: (Handing her a $20 bill) Here you go. Salesgirl: (Putting the change on his hand) 17.40, 18, 19, 20. Here's your receipt, and this is a free gift, sir. Customer: Oh, thank, you. 상점에서- 손님: 이것을 사겠습니다. 점원: 알겠습니다. 17달러 50센트 되겠습니다. 손님: (20달러짜리를 주며)자, 여기 있습니다. 점원: (잔돈을 손님 손에 하나씩 놓으면)17달러 50센트, 18달러, 19달러, 20달러. 여기 영수증 받으세요. 그리고 이것은 선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손님: 아, 고마워요.
At a flower shop- Florist: (Giving an extra flower) I'll throw this in. Customre: Oh, thank you very much. Florist: You're welcome, sir. 꽃가게에서- 점원: (꽃을 하나 더 주며) 이것은 덤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손님: 아, 감사합니다. 점원: 별말씀을요.
At a bar- Waiter: (Giving an extra beer) This is on the house, sir. Customer: Oh, thank you. Waiter: You're welcome. 술집에서- 웨이터: (맥주 한 병을 더 주며) 이것은 저희가 그냥 드리는 것입니다. 손님: 아, 고마워요. 웨이터: 천만에요. * Laughing is the best rest. - 웃음은 가장 좋은 휴식이다
Teacher: What happened in 1809? Student: Lincolm was born. Teacher: Correct. And what happended in 1861? Student: Lincoln had his 52nd birthday. 선생: 1809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지? 학생: 링컨이 태어났습니다. 선생: 맞았어. 그러면 1861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지? 학생: 링컨이 52회 생일을 맞았습니다(1861년은 미국 남북 전쟁이 터진 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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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지식/생활/건강/의학 |
- 음식 토정비결 - 전영순,하정화
<과실류>
37.호두 - 사람의 머리를 닮은 고급 과일
예전엔 호두알 두개를 손에 쥐고 '달그락 달그락' 하는 소리를 내고 다니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러다가 싫증이 나면, 손때가 새까맣게 묻어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는 호두를 깨뜨려서 속살을 파먹는 것도 재미있는 일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더욱 재미있는 일은 호두의 모양이 신기할 정도로 사람의 머리와 닮았다는 점이다. 우선 딱딱한 껍질 모양을 보면 사람의 머리뼈를 닮았고, 그것을 깨고 난 뒤에 나오는 호두의 속살도 마치 사람의 두뇌와 흡사하다. 그래서 예로부터 호두를 많이 먹으면 총명해진다는 말이 전해 오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 호두는 미용제로 더 각광을 받아 왔다. 청조 말기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서태후는 늙어서 살결이 더욱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녀는 노화방지를 위해 페르시아만에서 나는 진주를 비싸게 사들여 갈아 마셨다고 한다. 그러나 일설에 의하면 그녀의 진짜 미용비결은 호두에 있었다고 한다. 늘상 호두죽을 애용함으로써 늙어서도 아름다운 살결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호두나무가 처음으로 자생한 곳은 옛 페르시아 지역이라고 한다. 그래서 서구에서는 '호두'라는 말 앞에다 '페르시아'를 붙여서 'Persagn Walnut'라 부른다. 이후로 호두는 동남아시아, 중국 등지로 한 갈래가 전파되고, 유럽 서부 지역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다가 미국의 개척민들이 캘리포니아 일대에 옮겨 심었으며 이곳에서 급속도로 번식하여 최근에는 미국이 세계 호두 생산의 중심지가 되었다.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우리나라에 유입된 호두의 품종은 '동양종(Oriental Walnut)'으로 내한성이 강하여 추위에 잘 견딘다. 이 품종은 나중에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것을 서양종과 교배하여 품종개량에 성공하였고 우리나라는 이것을 역수입하기에 이른다. 만춘, 청옥, 화광 같은 품종이 바로 그것이다.
성분
호두에는 단백질과 지방이 풍부하게 들어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자양 강장의 좋은 식품으로 알려져 왔다. 또한 비타민, 미네랄 등도 풍부하여 머리를 좋게 하고 살결을 곱게 해주며 두발을 검게 해주는 효능이 있다. 또 이뇨작용이 있고 신장을 강하게 해주며 신경쇠약, 불면증, 기관지 천식에 좋다. 그리고 다리와 허리를 튼튼하게 해주는 효능도 가지고 있다. {본초강목}에 의하면 '호두는 기를 보하고 혈을 기른다. 조를 윤하게 해주고 담을 없애주며 수염과 머리카락을 윤택하게 해준다. 또 종독을 흩어버린다'고 한다. {본초비요}에서는, '호두는 폐를 따뜻하게 하고 장을 부드럽게 해준다. 또한 천식, 요통, 심복의 모든 통증을 다스린다'고 서술하고 있다. 최근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호두기름은 급성폐렴에 특효약이라 한다. 그리고 폐렴 뿐만 아니라 기침이 심한 독감에도 탁월한 효과가 인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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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임새
호두는 주로 식용 및 약용으로 쓰인다. 영양가가 풍부하고 소화 흡수가 잘 되므로 중병을 앓고 난 환자의 회복제로 많이 쓰이며 불면증 환자나 신경쇠약자에게도 좋다. 호두를 식용할 때는 보통 죽으로 만들어서 먹는다. 호두 10개의 속살과 쌀 1컵을 물에 잘 불려서 함께 섞은 후에, 이것을 으깨어 물 6컵으로 걸러서 냄비에 담고 끓여서 1컵 분량의 죽으로 만들면 된다. 이 호두죽은 몸이 허약하거나 정력이 부족한 사람에게 좋다. 그러나 과식하면 소화기능에 장애를 주어 속이 메스꺼워지는 수도 있으므로 양을 잘 조절해야 한다. 호두죽보다도 더욱 좋은 것이 바로 호두홍조죽이다. 이것은 호두죽에다 설탕과 '홍조'라는 한약재를 첨가한 것으로 소화를 도와주는 역할과 함께 보혈 작용도 한다. 이 홍조죽을 아침 저녁으로 하루에 두 차례씩 한 달간만 꾸준히 복용하면 비만증이 없어지고 살결이 고와지며 머리카락이 검어진다고 한다. 또한 탈모를 방지하는 효과도 있고, 이뇨를 도우며 변비를 없애주는 등 대부분의 성인병과 부인병 예방에 효험이 있다. 특히 이 음식은 피부에 영양을 보충해주고 깨끗이 해주는 효능이 있기 때문에 여성의 미용제로서 아주 적합하다. 죽을 쑤어먹는 방법은 다소 번거롭기 때문에, 하루에 호두 2알 정도를 꾸준히 먹어도 부드럽고 윤기있는 피부를 유지할 수 있다. 이처럼 호두는 알칼리성 식품으로 여러모로 좋지만, 알칼리성 식품으로 하루에 세 알만 먹어도 하루에 섭취해야 할 지방분은 충분하다. 또 냉한 체질의 사람은 다소 많이 먹어도 좋지만, 몸에 열이 많은 사람에게는 별로 적합하지 않다. 특히 호두는 지방이 많은 고열량 식품이기 때문에 겨울철 추위를 이기는 데 좋다.
이것이 토종
우리나라에서 호두의 본고장은 역시 천안이다. 열차를 타고 가다가 천안역에 이르면 으례히 '자, 천안의 명물 호도과자요!'하고 외치며 지나가는 상인의 목소리를 누구나 한 번쯤은 들었을 것이다. 천안에 호두가 심어진 것은 고려시대의 일이다. 당시 이 고장 출신 고관이었던 유청신이라는 사람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호두를 들여와 이 고장에 심었으며 이후 몇 백년 동안 번식하면서 천안의 토종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천안지역에서 생산되는 호도의 양은 우리나라 전체 생산량의 70%를 차지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전체 생산량의 절대량이 부족하여 국내 수요를 충당하기 어려운 까닭에 이미 오래 전부터 미국에서 수입되어 왔다. 최근에는 중국산 호두 수입도 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미국산이 대부분이다. 호두는 겉모양만 보고는 외국산과 국산을 구별하기가 무척 어렵다. 굳이 차이점을 들자면 미국산은 우리나라산보다 알이 굵고 모양이 공처럼 둥근 편이며 표면에 골이 깊지 않고 잔주름이 많이 있다. 이에 반해 국산은 모양이 약간 길쭉하며 잔주름이 적은 대신 골이 깊게 패여 있다. 크기도 대체로 미국산보다는 작은 편이다. 또한 호두 고유의 맛을 담뿍 담고 있어 고소하고 담백하며 과육의 충실도가 높다. 중국산의 경우는 모양이 일정치 않으나 럭비공처럼 긴 것이 다소 섞여있는 점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껍질을 쪼개보면 국산은 속살이 노랗게 윤이 나지만 수입산은 색깔이 검은 편이다. 가격은 수입품이 국산보다 30%가량 싸다. 그러나 맛과 질은 당연히 국내산보다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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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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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무당의 입김이 천하를 호령하다 - 정학수(경기도사 편찬위원회 집필위원)
민초의 동반자 무당
무당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과 의례 그리고 신봉자 집단 등으로 이루어진 종교형태를 무속. 무교. 무격신앙이라고 하는데, 이는 흔히 종교적 체계를 갖추지 못한 채 민간에서 전승되는 신앙이라는 의미에서 일반적으로 민간신아의 부류에 넣어 부르고 있다. 우리가 민간신앙하면 으레 무속신앙을 떠올리는 것은 무속이 지니고 있는 전문성 이외에도 오히려 민초들의 사고와 종교의식이 무속신아에 집약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무속의 중심인 무당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해결해 주는 해결사임을 자처하고 있고 민초들은 그것을 철썩같이 믿고 있는 것이다. 잦은 자연재해와 전쟁 그리고 힘있는 자들 밑에서 시달이며 춥고 배고픈 생활을 하던 민초들에게근 유교나 불교가 강조하는 정신적 윤리성이나 내세적 구원의 의식이 자리잡을 겨를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현세에 굶지 않고 병들어 죽지 않을까 하는 현실적 당면 문제가 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절실한 것이었다. 따라서 무속은 민초들에게 베풀어 주는 역할, 곧 불안의 해소와 생활에 희망을 주고 삶의 이상과 의미를 부여하는 중대한 종교적 기능을 해왔던 것이다. 무속은 불교와 같은 종교가 수용되기 이전부터 있었던 것은 틀림없지만, 그것이 언제 어떻게 성립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고조선의 단군신화에 무속적 요소들이 나타나고 있어 무속이 고조선 시기를 전후해서 이미 우리 문화 속에 자리잡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조선 초기 유교적 사관에 입각하여 편찬한 <고려사>에서는 고려시대의 무속을 음사라 하여 세상에서 마땅히 없어져야 할 것으로 모았다. 남녀가 굿판에 모여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유교적인 안목에서 부정적으로 본 것은 당연한 것이고, 또 가나호 굿을 빙자하여 간통, 재산축적 등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였으니 더욱 비판과 경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시각은 앞의 함유일의 사례에서 보았고, 무속을 몰아내야겠다는 의도에서 쓴 이규보의 글에도 강조하고 있지만 특히 무인집권기에 현덕수라는 사람이 겪은 일에도 그와 같은 무속의 폐해가 잘 나타나 있다. 그가 일찍이 안남도호부사가 되었을 때 정사가 청렴하고 밝았으므로 아전과 백성이 그를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특히 그는 음사를 미워하여 무당을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아전이 여자무당과 그 남편까지 잡아와서 현덕수가 신문하였는데, “이 무당은 여자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동료들이 웃으며 말하기를, “만약 여자가 아니면 어찌 남편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현덕수가 곧 사람을 시켜 무당을 살펴보게 하였더니 과연 남자였다. 예전부터 무당이 죽은 사람을 살린다는 술수를 핑계하고 사대부의 집에 드나들면서 몰래 부녀자를 간음하기도 하였다. 몸을 더럽힌 자는 부끄러워서 감히 남에게 알릴 수 없었으므로 이르는 곳마다 그러한 병폐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음지에서도 뿌리 내린 무속신앙
이 밖에도 <고려사>에는 음사로 치부하는 무당 관련 기사가 자주 등장한다. 물론 그 대부분은 후세를 경계하기 위한 의도에서 서술된 것이다. 무속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만, 고려시대에는 무속이 엄연히 존재하였고 또한 자뭇 성행하였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당시 유학자들은 무속을 미신, 국가재정 낭비등의 이유로 배척하였는데, 인종때에는 무당을 도성 밖으로 몰아내거나 궁중 출입을 금지하기도 하였다. 그 후 무당이 주관하는 국가 제사를 중지하고, 일부 지방관은 무당을 탄압했으며, 나아가 국가에서 무당에게 세금을 징수하기도 하였다. 이는 이후 무당의 활동을 어느 정도 제약하고 천시하는 경향을 낳기도 하였으나 큰 효과를 보지는 못하였다. 우리 역사에서 종교는 사회통합과 정치이념의 확립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고려시대의 주요한 종교는 불교였다. 불교는 왕실과 지배층을 비롯하여 민간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지지를 받았으니, 개인의 신앙 대상일 뿐 아니라 국가 사회의 지도사상이었다. 흔히 고려시대라 하면 팔만대장경을 떠올리듯이, 고려는 우리에게 불교적 이미지를 강하게 남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으려는 것이 인지상정이고 보면, 절박한 곤경에 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디에든 매달리려고 한다. 그럴 때면 고상하고 숭엄한 천상의 멀리 있는 신보다는 나를 직접 겨냥하여 속시원히 말해주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점쟁이나 무당들이 더욱 절실한 믿음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무속은 신앙의 대상이기 이전에 일상적으로 집안신이나 마을신, 성황신 등을 모시는 것과 같이 민초들에게 있어서는 생활의 한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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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사회/문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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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랍문화의 이해 - 공일주
2. 인간의 신에 대한 관계
다섯 가지 기둥
금식
무함마드는 금식을 영적훈련으로서 추천했다고 한다. 금식의 날들은 무함마드가 정한 모범을 따르는 관례이다. 자신은 먹고 이웃을 굶주리게 방치하는 것은 좋은 무슬림이 아니라고 무함마드는 말한다. 무슬림은 라마단 동안 해가 떠서 해가 질 때까지 금식한다. 다시 말해서, 무슬림들은 매년 29일 내지 30일 동안 해가 떠 있을 때 먹거나 마시거나 이성과의 성접촉을 일절 금해야 제대로 라마단을 지키는 것이며, 이들 중 하나라도 어기면 무효가 되어 다른 때에 벌충해야 한다. 한 달 동안의 라마단이 끝나면 3일간의 명절이 이어진다. 그 첫째날을 ‘이드 알 피뜨르(금식 종료절)’라고 하여 라마단 금식을 마치는 축일이 된다. 금식을 깨는 식사를 ‘파뚜르’라 하는데 해가 지면 가능한 빨리 식사한다. 또, ‘싸후르’가 있는데, 한밤중 이후에 하며 가능한 늦게 한다. 금식은 달이 뜨는 것을 기준으로 라마단(이슬람력 9번째 달)이라는 새달로 시작하여 샤우왈(이슬람력 10번째 달), 새달이 나타남으로 끝낸다. 세계 어디서나 두 사람 이상의 무슬림들이 초승달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서 금식을 시작하고, 또 이 초승달이 떠오르는 저녁에 금식의 기간을 마친다. 라마단이 금식과 관련된 연유를 쿠란 제 2장 185절에서 말한다. “라마단은 쿠란이 내려온 달이니, 이 달 동안 집 안에 거하는 자는 누구나 금식을 행하라”. 쿠란의 첫번째 계시가 이 라마단달에 내려왔다고 하며 또 무슬림들은 라마단달 24일째 되는 밤에 무함마드가 히라 동굴에서 첫 계시를 받았다고 믿는다. 금식은 히즈라 2년(624년)에 메디나에서 무슬림의 의무사항으로 규정되었다. 그 전에는 무하람(이슬람력 첫번째 달) 제 10일에 선택적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무함마드가 메디나로 이주한 후에 유대교인들이 무하람 제 10일을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왕의 속박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여 모세의 명에 따라 금식하는 것올 보고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 이슬람에서 금식은 최고 경지의 영적, 도덕적, 육체적 훈련을 요구한다. 금식의 목적은 뭇타낀(신을 경외하는 자, 헌신과 믿음이 깊은 자)이 되는 것인데, 알라는 뭇타낀의 친구이고, 알라는 뭇타낀을 사랑하며, 알라는 뭇타낀과 함께 한다. 위와 같은 쿠란구절에 따르면 뭇타낀은 영적발전의 최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무슬림에게 영적의 성장을 높이기 위해 금식을 의무로서 부과시킨 것이다. 결국, 이슬람에서 금식은 영적 훈련에 초점이 있다. 위와 같은 영적, 도덕적 가치 이외에 금식은 사회적 가치를 갖는다. 부자와 가난한 자, 높은 자와 낮은 자가 같은 동리에 모여 모스크에서 완전히 평등하게 매일 다섯 번의 기도를 한다. 이 밖에도 하디스에는 자발적인 금식이 있는데 샤으만 달 마지막 며칠 간, 또는 음력 13, 14, 15일째(아이얌 알 비드), 또는 이드 알 아드하(희생제)의 하루전(아라파), 또는 샤우왈의 첫 6일, 또는 두 알 힛자(이슬람력 12번째 달)의 11, 12, 13번째 날(타슈리끄)과 무하람의 10번째 날(아슈라)이다. 라마단 달 마지막 열흘 간의 밤들 중의 하룻밤을 ‘라일라알 까드르’라 부른다. 그 뜻은 ‘권능의 밤’인데 쿠란에는 두 곳(44장, 97장)에서 이 단어를 쓰고 있다. 이 밤에 천사들과 영이 알라의 허락을 받아 모든 명령(심부름)을 하려구 내려온다고 한다. 바로 이 날 밤에 쿠란이 계시되 있다고 말한다. 게다가 천사들과 영감이 내리는 밤이라 한다. 지혜와 지식이 가득한 모든 명령을 담고 이 세상에 온 새로운 계시의 기준(권능)의 밤이다. 그러므로 라마단 끝에서 열흘 간은 헌신의 날들로 지켜진다. 이스람에서 금욕주의를 권하지 않지만 이 10일간은 무슬림이 금욕생활을 하며, 세상의 모든 일을 제쳐 두고 모스크에 가서 지낸다. 어떤 하디스에 따르면, 라마단의 25번째, 27번째, 29번째 밤이 ‘라일라 알 까드르’라 한다. 결국, 라일라 알 까드르도 육체적인 경험이 아닌 영적경험의 밤이다. 무슬림은 라마단 기간 동안 신의 존재에 가까이 영적경험의 밤이다. 무슬림은 라마단 기간 동안 신의 존재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혼신을 다해 영적경험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금식의 목적에 맞게 행하는 무슬림은 그다지 많지 않다.
자카
사전적 의미의 자카는 ‘몸을 정화하다, 죄를 씻어 맑게 하다. ’ 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스람에서 자카는 생존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 그가 소유한 재산을 정화하거나 합법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그 재산의 일부를 내준다는 뜻이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이나 여행자나 국가에게 주는 자선금일 수도 있고 자카 지불에 규정된 양보다 적게 소유한 가난한 사람의 생계유지에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재산의 종류에 따라 내야 할 액수도 다르다. 1. 기여금의 최소 규정액은 가축의 수효로 정한다. 가사나 노동에 직접 쓰이지 않는 동물로써 자유롭게 방목한 것에 한한다. 2. 토지는 농산물의 10분의 1이다. 관개 또는 비관개 토지에서 얻은 여러 곡식을 정선해서 준비한다. 3. 금과 은 같은 유동자산은 영업세 200디나르를 넘는 상품, 증권, 공사채처럼 취급하여 1년간 번 수익의 2. 5 퍼센트를 낸다. 4. 자선 구호금은 법정 최소액을 정해 제한할 필요가 없다. 5. 법적 최소액을 넘어서 낸 것은 싸다까라 한다. 싸다까는 보상을 받는 행위로 추천된다. 이상과 같이 자카에 책임이 있는 사람은 무슬림이고, 마땅히 치러야 할 세금에 해당하는 돈에는 빚을 져서는 안 된다. 개인 주거지에 대한 십일조는 내지 않는다. 기본 생활 필수품과 개인사물, 가구, 가전도구, 식기, 견인용 동물, 타고 다닐 동무에도 과세하지 않는다. 이슬람은 개인과 사회가 하나로 협력하도록 한다. 그래서 각 개인은 사회 전체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으며, 개인의 일은 공동체 재산의 일부분임을 나타낸다. 만약 그가 이러한 의무를 행하지 않으면 처벌받는다. 공동체는 개인의 안전을 위한 책임이 있으며, 약한 자를 보호하고 그들의 재산을 지켜 주며, 그들의 복지를 위해 싸워준다. 그래서 이슬람에서 협력의 실제적이고 가장 좋은 방법은 자선이다.
순례
순례는 아랍어로 알 핫즈와 알우므라, 그리고 알 지야라로 표현된다. 알 핫즈는 대순례라고 하는데, 이슬람 규범에 따른 순례이며, 이슬람 다섯 기둥의 하나이다. 일련의 상세한 의식과 이를 위해 여러 날이 요구되고 메카의 대사원에서 실시된다. 대순례는 메카에 올 수 있는 사람에게 의무사항이므로, 이 요구는 절대적인 의무가 아니다. 건강과 여건이 허용되는 사람에게 의무로 지워진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족에 대한 책임을 소홀히 하지 않기 위함이다. 순례를 다녀온 사람에게 알 하앗즈라는 칭호가 붙는다. 제 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1년에 순례객이 1만 명 정도였는데, 오늘날에는 1년에 100만 명이 넘고 있다. 그래서 순례객이 많아 동시에 카바를 두루 돌아다니기가 힘들어 대사원 밖에 까지 넘쳐나게 되었다. 알 우므라는 소순례라 하는데 핫즈의 약식형이라 할 수 있다. 어느때든지 할 수 있고 이 의식은 1시간 반 동안 실시된다. 순례이 달이 아닌 1년의 어느 때든지 낮이든 밤이든 카바를 7번 두루 돌아다니고 일곱 코스를 필수적으로 수행한다. 일부는 걷고, 이스마엘을 위해 물을 찾으려 하갈이 뛰었다는 것을 기념하여 싸파와 마르와 사이는 뛰면서 이 순례를 행한다. 그리고 신전에서 14킬로미터 떨어진 아라파트에서 하룻밤을 자는데 이 곳은 아담과 하와가 하늘에서 내려와 재결합한 후 경배했던 곳이라고 한다. 소순례는 대리인이 대신할 수 있다. 소순례는 대순례의 요구사항을 충족시키지 못하지만 소순례를 행하는 동안에 그들을 알 하앗즈라고 불러준다. 원래 소순례를 행한 사람은 ‘무으타미르’라고 불린다. 알 지야라는 방문이란 뜻이다. 알 지야라는 규범적인 관습도 아니고 의식도 아니다. 이를 테면 메디나의 예언자의 무검을 방문하는 것이다. 이를 확장시켜 알 지야라는 가끔 성지의 방문에도 적용된다. 그런 방문은 자주 전통적인 프로그램에 따라 실시된다. 그러나 의식은 아니지만 항상 개경장이 암송된다. 카바 순례는 이슬람 이전에 있었다. 쿠란은 이방 아랍인의 순례가 타락되어 그들의 대사원 경배에서는 위파람을 부르고 박수를 치기도 했다. 무함마드는 이슬람 공동체를 세운 후 그의 두 번 순례를 기초로 하여 순례요건을 정했다. 629년 3월(히즈라 7년)의 순례(후다이비야 맹약후)와 632년 3월(히즈라 10년, 고별순례)의 순례인데, 이 고별순례가 모범적인 예가 되었다. 그러나 쿠란은 순례의식의 창시자는 아브라함이라고 한다. 순례는 대사원 ‘알 마쓰지드 알 하람’과 미나, 무즈달리파, 그리고 아라파트에서 행해진다. 순례요령은 다음과 같다.
1. 카바에 도착하자마자 카바를 7번 돈다. 2. 그 다음에 개인기도(두아)를 하는데 흑석과 문 사이 알 물타잠이라는 곳에서 카바 벽 쪽으로 몸을 밀어 젖히며 다가간다. 이것은 순례객이 너무 많아 이 정확한 지점에서 이것을 수행하기 위함이다. 실제는 카바를 향하여 좀 멀리 떨어진 지점에서, 즉 아브라함의 발자국이 남아 있는 곳(마깜이브라힘)에 가까운 지점에서 그이 기도를 암송하기도 한다. 3. 그리고 나서 순례객은 아브라함의 발자국이 있는 간이 시설물에서 두 번 라크아를 한다. 4. 순례객은 잠잠우물(이스마엘 발 아래에서 물이 솟아나)에서 물을 마신다. 5. 그리고 나서 싸파 언덕과 마르와 언덕 사이를 7번 걷는 의식을 한다(싸파에서 마르와 까지 한 코스, 마르와에서 싸파까지 두번째 코스 등으로 계산하고 싸파에서 시작하고 마르와에서 끝낸다). 마르와에서 순례의식이 끝남을 의미하는 의식은 순례객이 머리를 자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흐람(순례를 행하기 위하여 들어간 상태와 순례복장을 이름)의 상태를 유지한다. 순례는 이슬람력 12번째날 8일(명상의 날), 9일(아라파트의 날), 10일 (희생의 날)에 이루어지는데 미나에 도착하면 순례자는 7개의 돌을 자므라크 알 아까바(세 기둥 중 가장 큰 것으로 이스마엘을 바칠 때 유혹한 사단을 상징)에 던진다. 7개의 돌을 던진 후 12일 마지막 날까지 아무 때나 희생제를 치른다. 무슬림에게 순례는 마음의 여행이어서 종교 안에서 하나됨을 느끼고 사회적 응집력과 사상을 배운다. 우리는 이상과 같이 다섯 가지 이슬람의 기둥을 살펴보았다. 여기에서 구제는 유대교와 기독교에 모두 공통적인 것이고, 금식은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했던 일이다. 샤하다 첫번째는 구약 신명기 제 6장 4절(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의 쉐마를 기억하게 한다. 아랍어 ‘나비(예언자’는 아랍어에 이미 잘 알려진 용어인다. 기도도 유대교인의 회당에서의 기도와 비교해 볼 때 시편 55장 17절 다니엘 6장 10절에서 하루에 세번씩 기도와 간고를 했다고 말한다. 무슬림이 하루에 다섯 번 기도한 것도 이슬람 이전의 종교에서 따 온 것이다. 오늘날 무슬림들은 신을 벗고 기도한다. 출 30장 19절에서 21절에서는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었다고 쓰여 있다. 무슬림들이 기도하기 전에 씻는 것도 제사장들의 씻는 의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무슬림들이 기도하기 전에 씻는 것도 제사장들의 씻는 의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 여인들은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기 전에는 성물을 만지지도 말고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게 했다. 기도의 방향은 처음에 유대고인처럼 예루살렘으로 향했다가 무함마드가 유대교인과 사이가 나빠지자 예루살렘에서 메카로 바꾸어 버렸다. 기도의 방향은 이미 유대교인에게 있었던 방식이었다. 기도할 때는 엎드렸고, 예수 그리스도가 기도할 때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오늘날 무슬림이 기도할 때 이마를 땅에 대는 것과 크데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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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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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나보다 어린 우리 오빠
"오빠, 빨리 일어나 병원 가야지. 우리 오빠, 참 착하지?" 우리 오빠는 나보다 어리다. 그래서 나는 어디를 가든 오빠를 꼭 데리고 다닌다. 어렸을 때는 오빠가 나를 데리고 다녔다. 하루는 텔레비젼에서 타잔을 보다가 오빠에게 타잔처럼 해보라구 마구 졸랐다. 처음에는 선뜻 하려고 나서지 않던 오빠는 여동생의 부탁을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그래서 우린 창고에서 창고에서 밧줄을 꺼내 산으로 올라갔다. 사 미터가 조금 넘는 언덕 위 나무에 줄을 매달고 오빠는 타잔처럼 줄을 잡고 "아~아아"하면서 뛰어 내렸다. 아뿔사!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나무에 묶였던 줄이 풀어지는 바람에 오빠는 언덕 밑으로 추락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나는 바들바들 떨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서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자세히 보니 오빠는 언덕 밑바닥에 뾰족하게 박혀 있던 커다란 돌에 머리를 다친 듯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머리에서 피가 나지 않았다. 잠시후 정신을 차린 오빠는 아무렇지도 않다면서 도리어 놀랐겠다며 나를 걱정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피가 나지 않으면 아프지 않은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빠의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우린 위험한 장난을 했다고 부모님께 혼이 날까봐 그 일을 숨겼다. 며칠 후 오빠와 장난하다 우연치 않게 오빠의 머리를 만졌는데 머리가 물렁했다. 이상했다. 내 머리는 딱딱한데 오빠 머리는 물렁 물렁한 게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엄마, 아빠 머리도 딱딱한 걸 확인하고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이상해. 엄마, 아빠 그리고 내 머리는 이렇게 딱딱한데 오빠 머린 물렁물렁해." 그 날로 곧장 병원으로 실려간 오빠는 몇차례의 수 이었는데 피가 끝도 없이 흘러나와 의사들은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다면서 열었던 머리를 닫아 버렸다. 이렇게 살아 있는 것만도 기적이라고 했다. 그 후 오빠의 뇌는 성장을 멈추었고 당시 열다섯 살이었던 오빠는 십팔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열 다섯 살이다. 그래도 나는, 기끔씩 물어본다.
"오빠, 지금 오빠 나이가 몇이지?" "임마, 오빠 나이도 몰라? 열 다섯이잖아?"
어쩜 그보다 어릴지도 모른다. 그때 한쪽 눈도 약간 다쳤는데, 점점 나빠지더니 결국 지금 그 눈은 장식용일 뿐이다. 성장이 멈춰 버린 머리에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는 오빠, 나랑 타잔 놀이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내 말이라면 뭐든지 다 들어주고 나의 기사가 되어 주었던 오빠가 그렇게 된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아니 양심의 가책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서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오빠는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자꾸만 커 갔다. 내가 타잔놀이만 하자고 하지 않았다라도 오빠는 늠름한 청년이 되있었을텐데..... 그나마 오빠가 살아서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이 고마울 뿐이다. 오늘은 오빠의 한쪽눈을 수술하는 날이다. 여태껏 반쪽 인생을 살아온 오빠에게 나머지 반쪽의 삶을 찾아주고 싶다.
"하나님, 부디 오빠의 수술이 잘되게 도와주세요."
김명희 님/경남 거제시 옥포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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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38 - 이성의 영역, 신앙의 영역 : 요한네스 둔스 스코투스(1270-1308년)
그때 세계에서는 1281년: 원나라, 잡극 성행 1292년: 단테의 "신곡" 1309년: 프랑스, 장 드 조앙빌 "성왕 루이 전"
토마스의 철학을 읽고 있으면 그 구상과 방대한 체계 내용이 꼭 성베드로 교회나 밀라노의 성 안을 보는 것 같은 인상이든다. 그 모든 것이 카톨릭과 스콜라 사상의 전성기를 보여주는 공통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성당의 많은 벽화와 조각 그리고 구조가 마침내는 신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상징되고있듯이, 토마스의 거대한 철학도 마침내는 하느님에 대한 영광과 구원의 역사적 완성에 맞추어져 있다. 어떤 사람들은 단테의 "신곡"을 읽으면서 또 한번 토마스를 대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다. 단테 자신도 토마스를 '지식있는 사람들의 종사' 라고 불렀듯이, 중세적인 풍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전체 세계관이 신에의 영광과 찬양으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한 시대와 사회를 대표하는 철학자의 뒤를 따르는 사람도 많이 있었으나, 반대입장을 취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이 일어났다. 도미니크 교단을 따르는 사람들은 토마스의 뒤를계승했으나, 이미 완성된 체계였기 때문에 새로운 학설은 나오지 못했다. 이에 비하면 반토마스 운동은 대립적 위치에 있었던 프란체스코 교단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된 특성이 있다. 무조건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던 토마스와는 다르게 플라톤 철학으로 되돌아가려는 운동이었고, 아우구스티누스를 근거로 토마스를 비판했는가 하면, 토마스의 주지주의를 비판하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후에는 자연히 근대적인 사상을 받아들이는 학자들이 중세기의 대표자인 토마스를 뒤로 돌리게 된 것이었다. 어떤 이는 책 제목 자체가 "수사 토마스를 시정함"이라고 되어 있을 정도였다.
그 사람들 중에 토마스와 맞먹을 정도의 대표적인 한 철학자가 나타났다. 요한네스 둔스 스코투스(Johannes Duns Scotus, 1270-1308)였다. 그는 아일랜드 출신으로 옥스퍼드에서 가르치다가 명성과 걸맞게 쾰른으로 초청을 받았으나, 부임하는 해에 38세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만일 토마스만큼의 긴 세월을 학문에 바쳤다면 또 한 사람의 토마스가 태어났을지도 모를 인물이었다. 그는 토마스와는 다르게철학과 신학, 이성과 신앙을 상호보완적으로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구분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논리와 교리는 서로 자주적인 위치에서 학문적 본질이 평가받아야 한다. 자기 의식은 유일한 확실성의 원칙이며, 다른 모든 것은 그 주변을 돌고 있는 진리의 움직일 수 없는 중심이라고 보았다. 그는 수학을 연구했기 때문에 논증에 대한 엄격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신학의 내용까지도 논증을 거쳐야 하는 것은 아니다. 철학자에게는 참이 될 수 있는 것이 신학에 있어서는 거짓이 될 수도 있다. 신앙과 신학의 차원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논증을 초월한 은총과 신이 베푸는 내적 체험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후계자답게 인간성의 근본은 의지라고 본다. 의지가 지성보다 우위를 차지한다는 주장이다. 인식도 그렇다. 의지가 주의력을 집중시키면 외부적 대상을 받아들이지만, 주의력을 해산시키면 지적 노력은 사라지고만다. 강하게 의지가 알기를 요구했을 때 그 대상은 지적 내용으로 부각될 수가 있다. 사유와 지적 활동은 그 의지의 부차적인 협조작용을 할 뿐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꼭 쇼펜하우어나 니체를 읽는 것 같은 인상을 풍긴다. 모든 결정력은 영혼의 욕구를 대신하는 의지가 내리는 것이다. 자유의지는 소중한 것이며 신의 가호를 받는 것이다. 이 자유의지 때문에 윤리학은 가능해지며, 지적 활동은 그 의지의 머슴에 지나지 못한다. 선은 참보다 우위에 있다. 의지는 실천을 전제로 하기때문에, 논리적 지식보다 윤리적 실천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신학은 지식을 주는 데있지 않고 신앙적 실현을 뒷받침 하는 것이다. 즉, 토마스의 이론과 학설을 완전히 바꾸어놓는 결과가 되었다. 이 의지의 핵심은 사랑에 있기 때문에 신앙은 신의 사랑의 실현에서 이루어진다.
그의 세계해석이나 보편논쟁의 문제에 관해서는 특이한 설명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많은 후계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콜라 철학의 주류는 교회의 후원을 얻는 토마스 학설로 되돌아간다. 교회는 언제나 전통적 권위를 지켜야 하며, 그것이 교권과도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반토마스적인 학설이 일어났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중세기의 종말을 예고해주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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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
'사냥'의 어원에 대한 부연설명
사냥이라는 고유어가 있었는데, 이것을 견강부회식으로 한자의 산행으로 쓴 것에서, 곧잘 '사냥'을 '산행'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설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냥'을 '사'(아래 아자)에다가 '양'이 붙은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즉 즉 '산(아래 아자)'은 '사나이'를 말하고 '양'은 모양을 뜻하는 것이라는 그럴 듯한 말도 합니다. 만약에 '사냥'이 고유어로 쓰인 것이었다면, 문헌에 한번이라도 등장하여야 하겠는데, 제가 찾아 본 15-19세기의 문헌에서는 거의 대부분이 '산행'으로 되어 있고, 어휘자료집을 보면 역시 '산행'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글이 있습니다. 여기에 학술적으로 어렵게 써서, 여러 사람들이 국어의 어원풀이를 지겹다고 생각할까 보아서, 여기에서는 문헌자료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한 가지 용비어천가 마지막 장에 '산행 가 이셔 하나빌 미드니잇가'라는 글을 연상하시기 바랍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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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사회/문화/인물 |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1장 죽기가 힘들었던 사람들
소금에 절인 생선과 함께 실린 진시황의 시신
진지황은 장양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나라에 인질로 있을때 장양왕은 계획적으로 접근한 대상인 여불위에 집에서 그의 나이 어린 첩을 보자 자기에게 달라고 간청한다. 그녀는 이미 여불위의 아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자초(장양왕)에게로 가서 12개월 만에 아들을 낳으니 그가 정, 장양왕의 뒤를 이어 13세에 진왕이 된 진시왕이다. 그의 길게 찢어진 눈, 높은 코, 넓다란 가슴, 거기다 산개의 울음소리보다 더 우렁찬 목소리는 주위를 압도했다고 한다. 그는 삼황오제의 존칭을 줄여 스스로 시황제라 칭하였으며 성격은 포악하고 사치를 즐겼다. 분서갱유를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한종, 후공, 석생을 시켜 불사약을 구해오도록 명령하였다. 방사, 서시 등이 동해로 나가 신약을 찾았으나 수 년이 지나도 성공하지 못하자 견책을 받을까 두려워 거짓말을 꾸며대었다. 봉래섬의 신약은 얻을 수 있으나, 항상 큰 고래같은 물고기가 방해하여 그곳에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활을 잘 쏘는 사람과 같이 가서 그것이 나타나면 활로 쏘게 해주십시요. 마침 시황은 해신과 싸우는 꿈을 꾸었는데 해신의 형상이 마치 사람과 같았다고 한다. 점몽 박사는 이런 해석을 내렸다. 수신이란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어나 교룡이 나타나면 그것이 바로 수신이 나타나는 징후입니다. 이 악신이 나타났다면 당연히 몰아내야 합니다. 그러면 선신이 나타날 것입니다. 시황은 선약을 구하러 동해로 나가는 사람들에게 대어를 잡는 도구를 휴대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자신도 직접 활을 갖고 나가 지부에 이르러 대어를 한 마리 사살하였다. 그 후 해안을 끼고 서쪽을 순행하는 도중 평원진에 이르자 진시황은 병환이 났다. 갑자기 위중해져서 황제는 아들 부소에게 발상하면 함양에 돌아와 장례에 참여하라 는 친서를 보내도록 하였다. 무더운 7월 병인일, 그렇게 살고 싶어하던 시황은 불사의 꿈을 끝내 버리지 못한 채, 사구평대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그의 나이는 쉰 살 밖에 되지 않았다. 승상 이사는 황제가 외지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공자의 변란이 일어날까 두려워 이 사실을 숨기고 진시황의 관을 온량고(온도가 조절되는 수레) 안에 안치하고 밥때가 되면 환관으로 하여금 음식을 갖다 바치게 하며 황제가 사망한 사실을 숨겼다. 한편 조고는 공자 호해와 승상 이사와 음모하여 공자 부소에게 보내는 친서를 파기하고 승상 이사가 사구에서 시황의 유조를 받은 것으로 꾸며 호해를 태자로 세웠다. 그 후 다시 공자 부소와 몽념의 죄를 꾸짖으며 자살하라는 위조친서를 보낸다. 더위가 한창인지라 온량고 안에서는 사람 썩는 악취가 새어나왔다. 당황한 그들은 소금에 절인 생선을 같이 싣게 해서 냄새를 위장하였다. 일행이 함양에 도착하자 비로소 발상을 하고 태자 호혜가 제위에 오른 그로부터 두 달 뒤인 9월에야 시황은 여산에 매장되었다.
시황은 즉위 초부터 여산을 조영하기 시작하였다. 궁형을 받은 죄인 등 70여만 명을 투입하여 궁정 백관의 모형과 각종 진귀한 기물로 그 안을 가득 채웠다. 수은으로 황하, 양자강 등 수많은 강과 대해를 본떠서 만들고 천상과 지상 세계를 갖추어 축소 재현하였다. 진시황릉에 부장된 병마용갱의 병사와 말은 실물의 크기로 7000여 체가 매장되어 그 규모와 위용은 실로 대단하였다. 94년 여름, 그것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다행이 필자에게도 주어졌다. 돔형 은회색 지붕으로 된 제1호 갱 안에 들어서니 발 아래의 호 속에 병사들이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군모와 군장을 갖춘채 도열해 있었다. 한 마디로 충격적이었다. 진시황의 아들 호해는 후궁들은 순사케 했을 뿐만 아니라 매장에 관여한 장인들까지도 모두 산 채로 가두어 버렸다. 그리고 무덤 위에 나무를 심어 산처럼 보이도록 위장을 하였다. 그러나 1974년 3월 농업용수를 구하기 위해 우물을 파던 한 노동자에 의해 2200년간이나 잠들어 있던 진시황의 지하군단이 세상에 밝혀지게 된 것이다. 4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이 진시황릉과 만리장성, 그것이 중국을 먹여 살리는 관광수입의 한 몫을 톡톡히 한다지만 무모한 집착과 그 어이없는 큰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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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세계사 |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2. 태양신이 하사한 함무라비 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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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당한 대로 상대방에게 해주는 것을 흔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리고 이것은 구약 성경의 히브리 사람들의 율법에도 나온다. 이러한 보복의 사상이 최초로 표현된 것은 함무라비 왕(Hammurabi, B.C. 1728∼1686)의 법전에서이다. 문명의 발상지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개방된 평원지대였기 때문에 수많은 민족의 이주와 정복, 이에 따른 지배자의 교체가 잇따랐다. 기원전 2350년경에 셈 족인 아카드 인(Akkadians)이 처음으로 통일 왕국을 세웠다. 하지만 오래 가지 못하고 같은 셈 족인 아무르 인(Amurites)이 바빌로니아 왕국을 세워 다시 이 지역을 통일했다. 이 왕국은 기원전 18세기 함무라비왕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함무라비 왕은 중앙집권적 체제를 정비하고 함무라비 법전을 만들었다. 우리가 이 함무라비 법전을 알게 된 것은 법조문이 새겨진 비문이 발견된 덕분이다. 1901년 프랑스의 드 모르간(De Morgan)이 지휘하는 페르시아 탐험대가 수사(Susa:페르시아 만 북방에 있는 고대 도시의 유적)에서 큰 돌기둥 하나를 발굴했다. 세 토막으로 끊어져 있었지만 이어 보니 완전한 모습이었다. 이 돌기둥은 높이 2.5미터, 둘레가 1.8미터였다. 그리고 돌기둥의 상부에는 함무라비 왕이 태양신으로부터 법전을 받는 광경이 조각되어 있다. 즉 함무라비 왕이 지상의 백성을 통치하는 권한을 신으로부터 위임받는다는 뜻이다. 이 돌기둥에는 이란의 고대 문자인 설형 문자가 촘촘히 새겨져 있다. 이 문자를 해독한 결과 그것이 법률 조문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 함무라비 법전은 282조로 되어 있는데 토지 제도, 재산, 결혼, 상속, 범죄에 대한 형벌 등 여러 규정을 담고 있다. 이 법전에서 견지하고 있는 원칙은 중형주의와 보복주의이다. 중형주의의 예로는 절도의 경우 10배, 20배, 30배를 물거나 사형, 술을 마신 성직자는 화형을 집행한 것 등이다. `만약 누군가(귀족)가 다른 사람(귀족)의 눈을 상하게 하면 그의 눈도 상하게 한다. 만약 그가 타인(귀족)의 뼈를 부러뜨렸을 때는 은 1마나를 지불한다`는 조문은 보복주의의 예이다. 또한 다른 사람의 딸을 때려서 유산하게 하면 자기의 딸이 사형당하며, 목수가 집을 짓다가 무너져서 주인의 딸이 죽으면 목수의 딸이 죽어야 한다는 것도 보복주의 원칙이 나타나 있는 예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이 법의 적용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앞에 든 예문처럼 동등한 보복은 귀족들 사이의 사건에 한정되었다. 그리고 평민의 범죄는 귀족의 범죄보다 더 중형에 처해졌다. 이렇게 함무라비 법전은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가장 완전한 첫 성문 법전으로 당시의 사회를 비교적 소상히 전해 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함무라비 법전이 새겨져 있는 이 돌기둥은 현재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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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식 돈벌이 - 후지다 덴
제 1부
현금을 손에 쥔 나의 방법
긴자에서 올린 세계 신기록의 매상고
나는 몇 해 전에 '유태인의 상술'을 출판해 낸 바 있는데, 그 직후 독자들로부터 상상도 못할 정도의 편지 공세를 받고 어안이 벙벙해져 버렸다. 나는 '유태인의 상술' 의 마지막 장에서 아주 간단하게 당시 내가 새로 시작한 맥도날드의 햄버거에 관해 약간 언급했었는데, 편지의 대부분은 이 햄버거에 관한 내용이었던 것이다. 새 점포의 개설, 구미에의 출장, 찾아온 유태인들과의 상담 등으로 바쁜 스케줄 속에서도 틈을 내어 독자들의 편지에 회답을 썼는데, 그 동안에도 독자들로부터의 편지는 날로 더 쌓여 갈 뿐이었다. '유태인의 상술'에서는 아주 걱정스럽게 맥도날드 햄버거에 대해서 언급했을 따름이지만, 이번에는 나의 장사 이야기부터 시작하기로 하자. 만일 독자들 가운데서 돈 버는 것이 싫거나 햄버거는 보기도 싫다거나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장은 뛰어 넘어가도 상관이 없겠다. 나는 1971년 7월 23일에 긴자의 미쯔고시 빌딩 1층에 맥도날드 햄버거 1호 가게를 열었다. 그 후 가게의 수는 착실히 증가해 현재는 전국에 41개 점포를 헤아리기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숫자에 만족하지 않고 1974년까지는 1백 개로 늘리고, 그 이듬해에는 2백 개의 점포에 연간 매상액 3백억엔의 일본 제일의 레스토랑 체인으로 만들 예정으로 있다. 다행히도 '유태인의 상술'을 읽은 전국 각지의 우수한 청년이나 탈샐러리맨 희망자가 잇달아 조력해 줄 것을 제의해 왔기 때문에 인재 부족은 느끼지 않는다. 긴자 미쯔고시의 1호점은 개점 1주년을 맞은 얼마 후인 1972년 10월 1일과 8일에 하루 매상고 2백 22만 엔을 돌파하여 한 점포의 하루 매상의 세계 기록을 갱신했다. 종래의 기록은 햄버거의 본가인 미국의 미네소타 주에 있는 햄버거 레스토랑이 올린 2백 9만 엔 (엔화로 환산하여) 이었다. 게다가 미국의 이 2백 9만 엔의 기록은 17년의 역사와 연간 40억 엔에 달하는 선전비를 텔레비전에 투입한 결과 수립된 것이다. 그런데 나는 빵을 먹는 습관이 없는 일본에서 텔레비전 선전비도 들이지 않고, 더군다나 겨우 개점 후 1년 몇 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이 세계 기록을 깨뜨렸던 것이다. 다시금 덧붙여 말한다면 미네소타 주의 햄버거 레스토랑은 12시간의 영업으로 2백 9만 엔의 기록을 올린 것에 비해, 나의 2백 22만 엔은 그보다 2시간이 적은 10시간의 영업으로 수립한 기록이다. 그리고 8개월 뒤에 나는 이 대기록을 내 손으로 다시 갱신했다. 1973년 6월 10일 같은 긴자 미쯔고시 1호점에서 실제 매상액 2백 93만 엔으로 공전의 대기록을 수립했던 것이다. 이보다 앞서 텔레비전 광고를 시작한 것도 대기록을 낸 한 가지 요인인지 모르겠지만, 그렇더라도 굉장한 기록임에는 틀림없다. 본점인 미국의 맥도날드사도 이 대기록에는 입을 딱 벌렸다. 그들은 탄성을 연발하며 본점으로부터 최고 간부급들이 시찰하기 위해 잇달아 일본으로 건너왔다.
나의 이와 같은 성공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유태인 상인에게 있어서 상품이란 '여자'와 '입' 밖에 없지만, 그 중의 하나인 '입'을 노린 것도 성공의 커다란 이유라고 본다. 이 '여자와 입을 노려라'고 하는 유태인 상술의 대원칙에 대해서는 나의 저서 '유태인의 상술'에서 자세히 언급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만일 아직도 읽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빨리 구해서 읽기를 권한다. 세계 기록의 탄생에는 이 밖에도 몇 가지의 중요한 요인이 있다. 그것을 공개하는 것은 유태 상술의 진수를 폭로하는 것이 되며 극비로 되어 있는 맥도날드 상술을 공개하는 결과가 되지만, 나는 여러분의 풍요를 위해서 감히 본서를 통해 이것을 공개하고자 한다. '유태인의 상술'과 마찬가지로 당신의 재산을 만드는 데 많은 활용해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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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문어의 사랑
깊은 바다 속 바위에 붙어 참문어와 풀문어가 서로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 사랑한 나머지 어부가 자기들을 잡아 올리는 줄도 알지 못했다. 그들이 엉킨 다리를 풀고 서로 몸을 떼었을 때에는 햇살이 눈부신 부둣가였다.
"여기가 어디지?" "육지야." "왜 우리가 육지로 나오게 되었지?" "어부한테 잡힌 거야." "어머! 어떻하지?" "걱정하지마. 무슨 좋은 방법이 있을 거야."
참문어가 풀문어를 위로해 주었다. 어부는 곧 그들을 집으로 데리고 가 커다란 항아리 속에 집어넣었다. 우선 그들이 죽기를 기다렸다가 바람 잘 불고 햇볕 잘 드는 곳에서 말린 뒤, 겨울밤 술안주로 삼거나 제삿날 제상 위에 올려놓을 작정이었다. 항아리 속에 갇힌 참문어와 풀문어는 무서웠다. 순간 순간 몰려오는 죽음의 공포에 서로의 몸을 껴안고 떨었다.
"졸지마, 졸면 죽어!"
그들은 기진하여 쓰러지지 않도록 서로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려고 애를 썼다. 시간이 쏜살같이 흘렀다. 몇 날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었다.
"이거 먹어. 먹고 기운 차려. 죽으면 안돼."
참문어는 풀문어에게 자기의 다리 하나를 잘라 주었다. 풀문어는 배가 고팠지만 차마 참문어의 다리를 먹을 수가 없었다.
"괜찮아, 먹어. 난 무엇이든지 줄 수가 있어."
참문어는 풀문어에게 자꾸 자기의 다리를 먹으라고 권했다. 그러나 풀문어는 먹지 않았다. 그 대신 자기의 다리를 잘라 참문어에게 주었다.
"이거 먹어. 너도 배고프잖아?"
참문어도 풀문어의 다리를 먹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다리를 먹이려고 둘 다 여덟 개나 되는 다리를 모두 잘랐다. 며칠 뒤, 어부가 항아리 뚜껑을 열어 보았을 때 그들은 둘 다 죽어 있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다른 문어들은 단지 속에 갇히면 제가 제 다리를 뜯어먹으며 연명하다가 서서히 죽어 가는데, 그들은 다리를 잘랐으면서도 먹지 않고 그대로 굶어 죽어 있었다. 그들이 서로 사랑한 나머지, 서로 상대방에게 제 살을 먹이려고만 하다가 그만 그대로 굶어 죽은 줄을 어부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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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이글저글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원래 제목은 ‘Tomorrow is anther Day’이다. 이 소설의 작가 마가렛트 미첼의 가족은 이 소설의 후편을 쓰기 위해서 미국 남부 여류 작가 알렉산드라 리프레이를 선정했다. 후편은 1991년 출판되어 판매 첫날 전국 서점에서 1,000,000부가 팔렸다.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잃는 것보다 인도를 포기하는 것이 낫다고 영국인들이 말할 정도로 셰익스피어는 위대한 문학가임에는 틀림없지만 역사가로는 엉터리였다. ‘쥴리어스 시저’에서 시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사실 당시에는 시계가없었고 12세기경에야 발명되었다. ‘안토니오와 클레오파트라’에서 언급되는 당구 경기와 대포도 그 때에는 있지 않았다. ‘헨리 4세’에 나오는 칠면조도 당시에는 없었다. ‘한여름 밤의 꿈’에서는 보헤미아의 해안에서 폭풍을 만난 배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보헤미아, 지금의 체크슬로바키아에는 해안이 없어서 배가 들어갈수 없다.
‘율리시즈’ 제임스 조이스는 자서전적인 소설‘Stephen Hero’ 가 출판사에서 거절당하자 모든 원고를 불태워버리고 ‘율리시즈’를 쓰기 시작했다. 이 소설은 인간의 내면에 도사린 갈등을, 특수한 수법인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을 좇아가는 방법으로 파헤쳤다. 1914년에 시작하여 1922년 완성때까지 8년이 걸린 900페이지의 이 소설은 1904년 6월 16일 단 하룻동안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그야말로 20세기 최대의 소설이라 할만하지만 1933년까지 10년 동안 더러운 책이라고 판매 금지되어 불태워졌다.
1788년에서 1820년까지 셰익스피어의 조국, 영국에서는 그의 3대 비극 중 하나인 ‘리어 왕’의 공연이 금지 되었다.
훼밍웨이는 ‘무기여 잘 있거라’의 마지막 페이지를 39번이나 고쳐 썼다.
알렉산더 뒤마는 277권의 소설을 썼고 메리 포크너는 904권의 소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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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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