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 41 호
4339.10.25 (09.04) : Music Off = Esc
|
|
편지 |
- 風磬
|
|
오가시며 → 자유글판 |
|
|
문학소식 |
제3회 마해송 문학상
(주)문학과지성사는 우리 창작 동화의 첫 길을 연 고 마해송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국내 아동문학의 발전을 지원하기 위해 '마해송문학상'을 제정하였습니다. 이 상이 역량있는 동화 작가들을 발굴하고 격려하여 우리 아동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나갈 수 있기를 바라며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 모집 부문
장편 동화 및 단편집(미발표 창작물)
◆ 원고분량 단행본 1권 분량의 완성된 원고 (같은 원고를 타사 공모에 중복 투고하였을 경우 심사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 응모자격 기성 및 신인 작가
◆ 시상 내용 당선작 1편, 상패 및 상금 1천만원 (상금은 선인세로 지급하며, 당선작은 당선 발표 연도에 출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 응모 마감 및 발표 응모마감: 2006년 11월 30일(木) 수상자 발표: 『문학과사회』2007년 봄호
◆ 응모 방법 원고는 우편으로만 받으며 겉봉에 '마해송문학상 응모작'임을 명기 (이름, 주소, 전화번호, 이메일 주소를 기입해 주세요, 응모작은 반환하지 않습니다.)
◆ 보낼곳 121-840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395-2 (주)문학과지성사 마해송문학상 담당자 앞 |
|
|
|
|
글터 → 명언 / 격언 |
고향이란 예전에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들로부터 가장 사랑을 받는 듯. / W.D.T.
|
|
글터 → 과학/예술/교육 |
- 조화유의 미국영어 - 일반인을 위한 경제생활 영어
32. It's double time.
어떤 유학생이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filling station(주유소)에 취직했다. 첫날 오후 5시에 퇴근을 하려니까 manager가 불러 You can work overtime if you like. It's double time.이라고 말했다. 유학생은 매니저가 한 말의 전반은 "원하면 시간 외 근무를 해도 좋다"라고 바로 알아들었으나 후반 It's double time.은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곱배기 시간'인데, 그렇다면 시간 외 근무 시간이 정상 근무 시간보다 배나 길다는 뜻인가? 천만에다. double time에서 time은 wage 또는 pay란 뜻이다. 따라서 double time은 double (the regular) wage 즉 '정상 근무 시간 임금의 배'란 뜻이다. 그리고 time and a half는 '정상 근무 시간 임금의 1.5배'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regular time 또는 straight time은 정상 근무 시간 임금이란 뜻이다.
Manager: What can I do for you? Student: My name is Bill Williams. I'm a student at Ohio State, and looking for a job during summer vacation. Manager: What can you do? Student: I think I can pump gas. Manager: Have any experience? Student: No, but I'm a fast learner. Managera: Okay. You got yourself a job. Report for work at 8 tomorrow morning. Student: Thank you very much. By the way, what's the wage per hour? Manager: $4.50. It's time and a half after 5 until midnight, and midnight to 8 o'clock in the morning it's double time. Take your pick. Student: I will work midnight to 8 a.m. Manager: All right. You can start tonight, then. Student: I will. Thank you again. Manager: My pleasure. 매니저: 어떻게 왔지요? 학생: 빌 윌리엄즈라고 합니다. 오하이오 주립 대학 학생인데요. 여름 방학 중의 일자리를 찾고 있습니다. 매니저: 어떤 일을 할 줄 압니까? 학생: 자동차에 기름 넣는 일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매니저: 경험이 있어요? 학생: 경험은 없지만 저는 뭐든지 빨리 배웁니다. 매니저: 좋아요, 일을 하도록 하시오. 내일 아침 8시에 출근하시오. 학생: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런데, 시간당 임금은 얼마 입니까? 매니저: 4달러 50센트입니다. 오후 5시 이후 자정까지는 그것의 1.5배고, 자정부터 이튿날 아침 8시까지는 그것의 2배를 지불합니다. 원하는 대로 골라잡으시오. 학생: 자정부터 오전 8시까지 일하겠습니다. 매니저: 좋아요. 그럼 오늘 밤부터 일을 시작해도 좋습니다. 학생: 그러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매니저: 천만에요.
A: Do you work weekends, too? B: yes, I moonlight at a restaurant. A: Are you paid double time on weekends? B: No. Just straight time. A: Not even time and a half? B: No. Just regular time. A: 주말에도 일하세요? B: 네. 부업으로 식당에서 일합니다. A: 주말엔 정상 임금의 배를 받나요? B: 아뇨. 보통 때와 똑같이 받아요. A: 1.5배도 못받습니까? B: 네, 그저 정상 근무 시간 임금을 받을 뿐이에요.
|
|
|
글터 → 지식/생활/건강/의학 |
- 음식 토정비결 - 전영순,하정화
<과실류>
30.밤 - 토종밤은 약밤
초여름 달밤에 밤나무숲 부근을 지나가면 이상하고 야릇한 냄새가 난다. 이것을 이름하여 '밤꽃 냄새'라 하는데 남성의 체액 냄새와 흡사하다고 한다. 하늘에서는 휘영청 달빛이 부서져 내리고 숲속에서는 진하디 진한 밤꽃 향기가 흘러나와 코끝을 슬슬 간지럽히면 독수공방하던 동네 과부들은 괜시리 오금이 저리고, 불현듯 솟구치는 지아비 생각에 온 밤을 뜬눈으로 하얗게 지새우곤 했다. 이처럼 가슴 설레게 하는 밤꽃이 지고나면 새끼손톱만한 밤송이가 맺히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잎사귀처럼 녹색이다가 익어갈수록 갈색으로 변하면서 벌어지는데, 연약한 알맹이를 둘러싸고 있는 무성한 가시는 밤알에게는 훌륭한 방어무기이다. 이 가시 덕택에 밤알이 완전히 익어서 땅에 떨어지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는 것이다. 단풍잎이 붉게 물들어가고, 들에는 황금빛 물결이 일렁이는 가을이 오면 밤나무숲 사이에는 으레 새 오솔길이 난다. 그것은 바로 쩍쩍 벌어지기 시작하는 밤송이의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한 동네 조무래기들이 다람쥐처럼 밤나무 밑을 드나들어 생긴 길이다. 밤나무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 아이들이 맨발로 장대를 잡고 밤나무에 올라가 가지를 후려치면, 쩍쩍 송이가 벌어진 틈에서 잘 익은 밤알들이 후두둑후두둑 떨어져 내린다. 고개를 쳐들고 가슴 조이며 치마폭을 펼치면, 쏟아져 들어오는 밤알들. 따끔따끔한 것쯤이야 무던하게 견뎌낼 수 있을 만큼 황홀한 기분이다. 또한 통째로 떨어진 밤송이를 가시에 찔려가며 낫끝으로 파먹는 재미는 어른이 되어서도 잊을 수 없는 추억거리다.
밤나무는 참나무과에 속하는 교목성 낙엽과수이며 세계적으로 열한 가지 종이 북반구에만 분포한다. 특히 중부 유럽지역에서 많이 나고 동양에서는 일본, 중국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많이 나는 편이다. 우리나라에는 전국에 걸쳐 재배되는데 함경북도와 평안남도에는 중국계의 함종밤(함종율)이 많고 그 이남지역에는 재래종이 많이 재배되었다. 그러나 1958년 경부터 밤나무혹벌의 발생으로 재래종 밤나무밭은 거의 전멸하기에 이르렀으며, 이를 계기로 해충에 강한 품종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재배면적도 크게 증가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재배되는 밤나무의 품종은 주로 우리나라와 다른나라 재래종 중에서 해충에 강한 것을 교배하여 우량품종으로 만든 것이거나 일본에서 새로 육성된 내충성 우량품종이다. 그 대표적인 품종은 다음과 같다. 이른바 '중부6호'라고 불리는 산대밤은 경기도 광주군에서 엄선한 품종으로 나무줄기와 잎새가 무성하게 우거지며 줄기마름병 및 벌레에 강하다. 또한 이 품종은 수확량만이 아니라 가공에도 적합하다. 그리고 서울 임업시험장에서 선발한 품종으로 장위밤이 있다. 이 품종 역시 혹벌이나 줄기마름병 등에 강하다. 이밖에 일본에서 도입된 품종으로 삼조생, 이평밤(이평율), 은기 등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선발된 품종으로는 광주올밤, 중흥밤, 옥광밤(중부18호), 산성밤(중부26호), 백중밤 등이 있다.
성분
밤은 다섯 가지 필수영양소가 골고루 들어 있는 훌륭한 영양식품이다. 그래서 밤을 많이 따먹고 자란 밤나무골 아이들은 살이 쪄서 대부분 토실토실했다고 한다.
밤에는 칼슘, 철, 나트륨 등, 뼈가 되고 피가 되는 무기질이 골고루 들어있고, 특히 밤에 들어 있는 탄수화물은 위장을 튼튼하게 해준다. 밤 100g에 들어 있는 영양분은 탄수화물 34.5g, 무기질 1.2g, 단백질 3.5g, 철분 2.1mg, 비타민 A 74mg, 칼슘 35mg,비타민 B2 0.23mg, 비타민 C 28mg, 비타민 B1 0.45mg 등이다.
|
쓰임새
밤을 이용한 음식 중에 대표적인 것으로는 밤밥을 들 수 있다. 밤밥을 지을 때는 생밤의 껍질을 깨끗이 벗겨서 반쪽으로 가르고 뜨물에 담가서 색이 변하지 않도록 한다. 그리고 이것을 꺼내 쌀과 섞어서 소금을 약간 뿌린 뒤 보통 흰밥처럼 지으면 된다. 이때 팥 삶은 물을 붓고 밥을 지으면 고운 색깔과 함께 한결 구수한 밥맛을 낼 수 있다. 밤가루와 쌀가루를 함께 섞어서 끓이면 밤죽이 되는데, 이것은 당분이 많아서 예로부터 젖 떼는 아이의 이유식으로 이용되어 왔으며 건강식으로도 널리 애용되어 왔다. 이밖에도 밤다식, 밤단자, 밤과자, 밤주악, 밤엿 등은 우리의 전통음식으로 밤을 재료로 한 고급음식이다. 그리고 밤을 떡, 통조림 등으로 가공하기도 한다. 한편 한방에서는 밤을 약용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동의보감에 의하면 몸이 허약하거나, 비위가 허해 설사를 할 때, 콩팥이 허해 허리가 아플 때 쓰면 좋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 토종밤 중에서 '약밤'이 있는데 이것은 특별히 약성이 좋은 것으로 알려졌다. 밤나무의 열매뿐만 아니라 목재도 고급가구재, 건축재, 철도갱목, 조선재 및 버섯 재배용으로 사용되며, 특히 목질에 함유된 탄닌은 화학제품의 연료로 이용된다. 밤을 고를 때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항을 고려해야 한다. 즉, 날것으로 그냥 먹을 밤은 알이 굵고 껍질에 윤기가 흐르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좋으며, 보관했다가 먹을 것은 개량종이라도 알이 지나치게 굵지 않고 윤기가 나지 않는 것을 택해야 달고 맛이 있다.
이것이 토종
밤나무는 신의주와 함흥을 잇는 선 아래 지역에서 특히 식생이 잘 된다. 또한 우리 밤은 예로부터 알이 굵기로도 유명한데, 삼국지 중 마한 편에 의하면, 마한에는 굵기가 배만한 밤이 난다고 했다. 또한 당나라 때 편찬된 수서라는 책에도 백제에 큰 밤이 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토종밤은 알이 잘고 껍질을 벗긴 밤알이 노란 빛을 띠며 맛이 뛰어나다. 그래서 단순히 '밤'이라 하지 않고 '약밤'이라 불렀다. 이렇게 맛이 뛰어나서인지 재래 토종밤은 해충에 약하다. 벌레도 맛있는 밤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서 예로부터 재배해온 밤으로는 '평양밤'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원래 중국이 원산으로 만주 남부에서 화북지방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 그러나 요즘에 많이 심고 가꾸는 것은 주로 일본밤을 개량한 것으로 밤알이 매우 굵고 많이 열리지만 단단하지 않고 맛이 적다. 이러한 개량종에 밀려 우리 토종밤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토종밤과 외국산밤은 일반적으로 구분하기 어려우나 굳이 특징을 따진다면 토종밤은 껍질의 색깔이 선명하고 윤기가 난다. 반면 수입산은 일반적으로 껍질이 퇴색되어 있고 보관상 농약처리를 하여 농약냄새가 나는 것도 있다.
|
|
|
글터 → 국사/세계사/신화
|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삶의 즐거움과 괴로움 - 농민의 한해살이는 어떠했을까 : 전병무(국민대 강사)
땅을 갖기 위해 산으로 저습지로
몇 년 전 장안에 화제가 되었던 ‘서편제’라는 영화가 있다. 이가운데 주인공 3명이 아리랑을 부르면서 논밭길을 지나는 장면애 있다. 무언가 남도의 정서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 배경이 된 사다리 모양의 논밭이다. 인구가 늘어난 요즈음 산비탈에 있는 사다리 모양의 논밭은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이러한 형태의 토지는 고려시대에서도 볼 수 있었다. 송나라 사신 서긍의 <고려도경>에는 “(고려는) 평기자 적기 때문에 경작지가 산간에 많다. 그 높낮이 때문에 경작하고 개간하기가 대단히 힘들며, 멀리서 바라보면 사다리나 돌계단과 같다”고 한 대목이 있다. 이와 같이 산비탈을 갈아 곡식을 심던 토지가 산전이다. 외국인의 눈에는 이것이 특이하게 보였는지 모르지만, 고려 농민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개간한 땅이엿다. 땅에서 태어나 땅에서 죽는 농민에게는 토지란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농민들은 한 뙈기 땅이라도 자신의 이름으로 갖는 것이 최대 소원이었다. 그리하여 산간계곡에서 자갈을 치우고 나무뿌리를 들어내거나, 자연재해로 황폐해진 농토를 다시 가는 등 농재개간에 온 정성을 다하였다. 농민에게는 생계의 터전을 마련하기에 더없는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농지 개간은 농민에게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보장해 주었고, 국가는 세름을 더 많이 거둘 수 있어 서로 좋은 것이었다. 그래서 국가는 적극적으로 이를 지원해 주었다. 개간은 산전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농업은 자연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가뭄이나 홍수는 농토를 황폐화시키기 일쑤였다. 또한 이민족과의 전쟁 중에도 농토는 망가졌다. 이렇게 농토로서의 역할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토지를 진전이라고 한다. 농민들에겐 이 역시 주요한 개간 대상이었다. 산전처럼 완전히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었지만, 1년에서 3년 동안 세금이 면제되는 등의 특혜가 주어졌기 때문에 농민들에게는 큰 관심사였다. 산전과 진전의 개간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자 농민들은 저습지나 간척지 개발로 눈을 돌렸다. 이는 저습지에 고인 물을 빼는 데 유용한 하거 공사와 벙천, 방조제 공사등 수리시설의 개발과 함께 이루어졌다. 다만 저습지와 간척지 개발은 대규모의 인원이 동원되어야 했다.
공동체 모듬살이의 한 자지, 향도
농민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자신이 태어난 마을에서 살다가 그 땅으로 돌아간다. 농민에게 마을은 곧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생활공동체였던 것이다. 농민들은 일상의례와 공동노동 등을 통해 자신이 마을 구성원의 아나임을 확인하였다. 농민들은 국가의 제도에 의해서도 사는 지역에 묶여졌다. 국가가 걷은 각종 세금은 농민 개개인이 내는 것이지만, 국가는 이를 군현 단위로 매겼다. 이 속에서 농민들은 마을 단위의 공동체 속에서 살아 갔다. 공동체 조직으로 대표적인 것이 본래 불교의 신앙조직이었던 향도였다. 불교신앙 가운데는 매향이라고 하여 바닷가에 향나무를 묻는 신앙활동이 있었다. 위기가 닥쳤을 때나 불안감에 사로잡혔을 때, 묻었던 향나무를 통해 미륵을 만나 구원받고자 하는 염원에서 나온 것이다. 이 매향활동을 하는 무리들을 향도라고 한다. 고려는 불교국가였기 때문에 향도와 같은 신앙 공동체 조직이 성행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향도는 단순히 매향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대규모 인력이 동원되는 물상을 만들거나 절을 지을 때, 혹은 석탑을 세울 때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지금의 경북 예천에는 보물53호로 지정된 개심사지 5층 석탑이 있는데, 거기에는 개심사석탑기가 새겨져 있다. 이 석탑은 1010년(현종 원년) 3월에 공사가 시작되어 이듬해 4월까지 약 1년 정도 걸려 완성되었다고 한다. 소 천마리와 수레 18대가 동언된 엄청난 공사였다. 이 때 두 부류의 향도가 참가하였는데 임원만 해도 각각42명, 95명 이었으며, 1만명의 무리가 참가하였다고 한다. 실로 군현민 전체가 참여하였던 것이다. 이 작업은 군현 단위 공동노동에 촌락의 지배층과 농민들이 협력, 결속하는 전통에서 나온 행위였다. 고려 후기에 이르면 촌락 공동체 조직인 향도의 성격이 변하여, 불교 신앙단체의 모습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지배층 중심의 향도에서 일반 백성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조직하는 향도로 변모해 갔던 것이다. 조선 초기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향도연회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대체로 이웃 사람끼리 모여 회합을 갖는데 적으면 7인에서 9인이요, 많으면 100여 인이 되며, 매월 돌아가면서 술을 마신다. 상을 당한 자가 있으면 향도끼리 상복을 마련하거나 관을 준비하고 음식을 마련하며, 혹은 상여줄을 잡아 주거나 무덤을 만들어 주니 이는 참으로 좋은 풍속이다.
이제 향도는 자연촌락을 중심으로 하층민이 모여 그들만의 행사를 치루는 모임이자 농민의 일상생활 그 자체가 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향도는 마을 공동노역이나 혼례와 상례, 민속 신앙과 관련된 마을 제사 등 공동체 생활을 주도하는 농민조직으로 정립되어 갔다. 이것이 조선시대 대표적인 농민조직인 두레로 계승 발전되어 나갔다. 하루하루를 소중히 살았던 고려 농민들의 바람이 있었다면 무엇일까? 그바람은 고려말 우왕 때 이금이라는 승려의 일화를 통하여 음미해 볼 수 있다. 그는 백성들에게 자신을 미륵불이라고 하면서, 농민들에게 재화를 분배해 주고, 농업기술도 전수해 줄뿐 아니라 왜구도 격퇴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는 고려 체제를 위협하는 자신의 사상적 구호로 인해 곧 체포되어 처형되었지만, 그가 제시한 구호 속에서 당시 농민들의 바람을 알 수 있다. 그가 내걸었던 구호는 고려 농민뿐만 아니라 여전히 우리 시대 농민의 바람이기도 하다.
|
|
|
글터 → 사회/문화/인물
|
- 아랍문화의 이해 - 공일주
1. 신의 인간에 대한 관계
이슬람의 배교에 대한 율법
이슬람을 버리는 자들에 대해 쿠란은 뭐라고 말하는가? ‘... 너희 신앙에서 되돌아올 때까지 투쟁을 그치지 않을 것이다. 배교자가 되어 불신앙 속에 죽는다면 그들은 현세나 내세에서나 열매가 없을 것이다(수라 2.217). ‘... 믿은 후에 신앙을 거부하고 배교에 배교를 거부하는 자는 그들의 회개도 받아들일 수 없고 그들은 길을 잃은 자들이다(수라 3.90).’ ‘... 만약 그들이 배교한다면 그들을 붙잡는 대로 죽여라(수라 4.89)’ ‘...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을 친구나 보호자로 삼지 마라. 그들은 서로가 친구이고 보호자이다(수라 5.54).’
쿠란 본래의 문맥상 위 구절들은 무슬림들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이들 중 여러 구절이 이슬람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지만,진실되지 못해 그들이 이전 신앙상태로 되돌아가는 위선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쿠란 주석가 유수프 알리는 수라 4. 89절을 우후드 전투 이후의 상황과 관련시킨다. “우후드 전투에서 위선자들의 이탈이 무슬림 확장에 문제를 초래하게 되자, 메디나의 무슬림들 사이에는 그들에 대한 반감이 컸다. 어떤 집단은 그들을 검으로 다스리길 원했다.또한 쿠란의 구절들에 의해 뒷받침되어 결정되었다. 만약 그들이 공동체 속에 들어오게 된다면 그들은 무슬림 공동체로서는 분명히 위험한 존재였다. 그러나 모든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해 어떤 극단적인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그들에게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무함마드 언행록이 흔히 무슬림들 사이에서 갖는 권위는 교회의 전통이 카톨릭 또는 정교회 기독교인들에게 갖는 권위와 유사한데, 배교의 문제에 관해서는 매우 엄격한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다음은 알 부카리가 언급한 하디스이다. ‘위선자들이 알리에게 붙들려 왔고, 그들은 화형에 처해졌다.’ 이소식이 이븐 압바스에게 전해지자 그가 말하길 ‘나라면, 나는 무함마드의 말에 따라 분명히 그들을 죽였을 것이다. 누구든지 종교를 바꾸는 자는 죽여라”. 무슬림 주석가들은 쿠란의 구절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을 내린다. 예를 들어, 13세기 저명한 주석가 알 바이다위는 제4장 89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누구든지 그의 믿음에, 공공연히 또는 몰래 등을 돌리는 자는, 그를 어디에서 발견하든지 간에 그를 잡아 죽여라. 너의 자신을 그에게서 완전히 떼어 놓아라. 그의 관심사에 끼어들지 말라.” 만일 어떤 무슬림에게 배교에 대한 무슬림들의 태도에 대해 물어 볼수 있을 정도로 그와 친하다면 그는 당연히 배교와 관련된 율법 같은 것은 이슬람에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관용적인 태도가 많이 내포되어 있음을 반영할 수도 있다.
현대 이슬람법 개혁
이슬람 신앙의 다섯 기둥(신앙고백, 기도, 종교, 금식, 순례)은 이슬람법 체계의 밑받침이 된다. 샤리아는 이슬람 신조를 실행하는 근본으로 여겼으므로 그 형성기부터 무슬림 개개인 행위에 커다란 관심을 두었다. 사내아이의 할례도 의무규정으로 되어 있고, 도박과 음주는 금하도록 되어 있다. 돼지고기 먹는 것도 금지되는데 유대인의 음식규제를 따른 것 같다. 샤리아는 고리대금을 금지시켰고 현대사회의 부당이윤, 불로소득, 이자놀이를 금했다. 그러나 울라마는 이윤획득의 원칙을 발전시켜 투자하는 사람이 직접 기업에 참여하는 경우 그의 자본투자에서 발생하는 이윤을 보수로 받을 수 있게 했다. 특히, 하나피 학파들의 노력으로 상법을 발전시켜 중세 지중해 무슬림 상인들의 활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샤리아는 자선사업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재단의 형성과 활동에 대한 규정을 해 놓았고, 사망한 사람의 상속법을 제정해 두었다. 상속에 있어 여자는 남자의 반에 해당한다고 규정하였다. 아내가 남편과 이혼하는 조건은 매우 까다롭고, 남편이 이혼을 원할때는 매우 간단하게 해 두었다. 그는 아내와 동침을 거절하고 3개월만 기다리면 되었다. 여자는 동시에 한 남편 이상을 둘 수 없지만, 남자는 네명의 아내까지 둘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샤리아법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슬람 국가에서 4명의 아내를 가진 남자는 많지 않다. 첫번째 아내가 아이를 못 낳는 경우를 제외하고 경제적인 뒷받침이 어렵기 때문에 둘 이상은 힘들다. 20세기 전반까지도 사우디아라비아에선 엄격한 샤리아법 적용이 있었다. 간통한 여인을 돌로 쳐죽이고 도둑의 손을 자르는 처벌이 있었다. 지금도 사우디아라비아의 ‘칼라스’ 광장에서 손을 자른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물론, 수단에서도 1983년 누메이리가 샤리아법을 강화하여 이것을 적용한 바 있다. 이 형벌은 다른 무슬림 국가에서는 오래 전에 크게 완화 되었다. 샤리아법에 노예제도를 인정함으로써 인간의 불평등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출세여부는 신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서 결정된다. 무슬림은 비무슬림인 기독교나 유대교인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킬 의무가 있었다. 무슬림에게 기독교인은 신의 계시를 부분적으로 받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들끼리의 종교활동에는 상당한 자유를 주었지만, 기독교인이 무슬림들에게 선교하려고 하면 기독교를 상당히 열등한 종교로 치부해 버리고 만다. 역사적으로 비무슬림은 군대도 갈 수 없었으며 말 대신에 당나귀만 타고 다녔다. 비무슬림 남자는 무슬림 여자와 혼인이 금지되고, 무슬림 남성은 기독교 여성과 결혼할 수 있었다. 샤리아는 도덕적, 인간적, 종교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어 정치, 경제, 공공문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아랍어 낱말 ‘까눈’은 세속법이란 뜻인데 유럽어에서 이 용어 Canon은 교회법을 의미한다. 이말대로 유럽이 갖는 법은 세속법이고, 그들이 갖는 법은 이슬람 공동체의 성법이란 인식에서 온 것이다. 중동에서 법의 개혁은 19세기 중반 오스만 상법과 오스만 형법이 반포되면서 오스만 제국때 시작되었다. 이 법의 형식과 기본이 주로 19세기 서구의 진출로 유럽법(특히 영국과 프랑스)에 기원을 두고 있다. 니자미야 법원이 샤리아법을 가족법에만 한정시키고 민법과 형사법도 다루게 되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법을 재해석하고 개혁하기보다는 이슬람법 자리에 서양법을 앉히는 꼴이 되었다. 20세기까지 이런 현상은 계속되었고, 대부분의 이슬람 세계에서 현대 상법, 형법, 그리고 마침내는 민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이슬람법은 가족법의 핵심이 되고 있다. 아직도 고전적인 가족법이 중동에서 쓰이고 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민법과 형법에서 공식적인 법의 변화가 있었음에도 무슬림 가족법은 수세기를 통하여 변함 없이 계속되고 있다. 인도에서도 이슬람법은 가족법에만 한한다. 그래서 가족법이 개혁된다면 이것은 이슬람의 현대화 개혁을 의미한다. 중동에서 초기의 가족법 개혁은 다음 두가지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첫째, 여성의 지위향상이고, 둘째는 부모와 직계자녀의 권리강화가 그것이다. 그리고 가족법이 주로 개혁할 부분은 혼인, 이혼, 유언을 남기지 않는 상속 등이다. 중요한 혼인법 개혁 중에는 조혼배제와 일부다처의 제한이다. 무슬림 국가에서 전통법에 따르던 혼인 나이를 올렸는데 이집트와 파키스탄에서는 여자는 최소한 16세로 하고, 남자는 최소한 18세로 규정하였다. 그런데 일부다처제의 개혁입법은 훨씬 더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무슬림 국가의 가족법 개혁에 이집트가 선두에 서고 있지만 이집트 남성에 대한 일부다처를 제한하려는 시도는 불발로 끝났다. 시리아에서는 1953년 결혼한 무슬림 남성이 또다시 혼인하려면 법원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다시 말해서 남편이 재정적인 능력이 있을 때에만 허락했다.
1957년 튀니지에서 급진적인 변화가 있었다. 부르기바 대통령이 일부다처를 두 가지 근거를 내세워 불법이라고 공포했다. 첫째, 일부다처는 노예제도처럼 과거의 필요에 있어서 존재했던 것이고, 현재는 일부다처를 대부분이 반대한다. 둘째는 쿠란에 지적되었듯이 아내를 모두 똑같이 대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러나 다른 무슬림 국가에서는 튀니지의 방법을 따르지 않았다. 1958년 모로코에서는 남편이 다른 여자와 혼인하려고 할때 부인에게 이혼할 권리를 준다는 내용의 혼인계약에 규정해 놓았다. 1959년 이라크법에서는 남편이 두번째 부인을 얻고 싶을때 법원의 허락이 필요하다고 규정하고 만일 1959년 법을 어기면 형사상의 제재는 물론 두번째 부인과의 혼인도 불법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1963년 법에는 형사상 제재는 받지만 합법적이라고 바꾸어 버렸다. 무슬림 가족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는 것은 아마도 이혼이 아닐까 한다. 이슬람법에 의하면 특별한 이유없이 이혼하면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아내에게 이혼할 수 있는 권리를 주고 남편의 일방적인 이혼권리를 제한한다는 점에서 개혁이 필요했다. 1915년 오스만 제국에서 처음으로 개혁이 있었는데 처자를 불법 유기했을 때, 그리고 남편이 전염병을 얻어 부부생활이 위험하다고 판단될 때 아내도 이혼할 권리를 얻었다. 좀더 넓은 의미의 이혼법 개혁은 1929년 이집트에서 있었다. 이개혁법에서 여성이 이혼할 수 있는 4가지 사유를 추가했다. 첫째, 남편이 가족부양을 못 할 때, 둘째, 남편이 심각한 정신적, 육체적 질병에 걸렸을 때, 셋째, 남편이 아내를 불법유기했을 때, 넷째, 부인을 학대했을 때 등이다. 그러나 1957년 튀니지에서는 법원이 명하는 재정적 보상을 하면 아내가 이혼을 요구할 수 있게 했다. 파키스탄에서는 아내가 그의 지참금을 돌려 준다면 아내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혼인을 그만둘 수 있었다. 무슬림 가족법 개혁의 마지막 부문은 역시 유언 없는 상속문제이다. 상속제도는 전통적인 무슬림 사회의 필요성에 맞추어 있었다. 쿠란은 이슬람 이전의 부족법에서 명시한 것을 바꾸어 상속지분에서 직계가족을 강조하고, 여성가족 구성원에게도 그 지위를 개선해 주었다. 쿠란에서는 상속자가 그들의 지분을 받은 후에 나머지는 아무리 먼 친척이라도 가장 가까운 남자 아버지 쪽의 친족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현대에와서 대가족의 유대가 줄어들고 나머지 재산이 가장 가까운 아버지 친척에게 돌아가자 아들은 쿠란에서 말하는 지분만을 받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현대에 와서 직계 가족의 권리를 강화하는 방안이 검토되었다. 상속법의 직접적인 변화보다는 유산에 관련된 법을 바꿈으로써 간접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따라서, 부모는 재산의 1/3을 아내나 딸을 위해 유증할 수 있다. 상속법의 변화 중에 고아가 된 손자에게 줄 상속문제이다. 전통적인 이슬람법에 따르면 만일 할아버지의 다른 아들이 살아 있으면 고아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그런 규정은 전통적인 무슬림 사회가 가족의 단결을 대가족의 기본 특징으로 삼고 연장자가 남은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변화하는 현대사회에서 이런 고아도 보호받아야 했다. 그래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상속지분을 그가 받는 것으로 개혁이 이루어져야 했다. 하지만, 울라마들은 현대의 법개혁을 비이슬람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서구의 세속법을 알던 사람들이 정치권력을 이용하여 이슬람을 함부로 바꾼다고 주장한다. 물론 몇몇 울라마들이 법의 개혁을 부르짖지만, 더 많은 울라마들은 이슬람법이 시행될 호기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개별적인 무슬림 국가가 각각 어떻게 변했든 간에 이슬람 세계에서 이슬람과 현대화 간의 종합은 실패했음을 점차 인식하는 무리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슬람 현대화를 다시 정의 하면서 역사적, 문화적 뿌리를 재발견하고 재정립해야 함을 많은 무슬림들이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이슬람법의 전통적인 역할에서 이슬람 생활방식에 그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정치와 사회를 이슬람화하기 위해 샤리아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한다. 초기 이슬람 형성기 때 있었던 이슬람화 과정이 오늘날 이슬람의 원리에 따라 재해석되고 적용되어야 한다고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말한다.
|
|
|
글터 → 수필/산문
|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나도 운동하면 걸을 수 있어요
나는 스물아홉살이고, 여섯 살 먹은 재우 엄마다. 재우는 여섯 살이나 되었는데도 혼자서 걷지 못한다. 그래서 가까운 곳이라도 내가 업고 다녀야 한다. 재우가 태어났을 때 나는 이 세상을 얻은 것 마냥 기뻤다. 그러나 그런 기쁨도 잠시, 팔삭둥이로 태어난 재우는 오 개월이 지나도록 고개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내가 재우 때문에 걱정하자 어른들은 발육이 조금 늦을 수도 있다며 천천히 기다려 보라고 하셨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때서야 부랴부랴 대학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니 재우가 '경직성 뇌성마비'라는 것이었다. 조기 출산하여 어쩔수 없이 인큐베이터에 있었는데 산소공급이 제때 잘 안돼서 오른쪽 뇌를 다친 것이다. 나는 우리 재우가 치료를 해도 백 퍼센트의 완쾌는 불가능한 불치병에 걸렸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설마, 아닐 거야,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 의사 선생님의 오진인 거야.' 하지만 그 누구도 사랑하는 내 아들이 건강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한가닥 희망을 안고 병원앞에서 아이를 안고 흐느껴 울고 있는데 누군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쪽 마음이 지금 어떤지 저도 잘 알아요. 제게도 뇌성마비 아들이 있거든요. 하지만 힘내세요."
그분은 자기 자식은 지금 일곱 살인데, 네 살 때 병을 발견하고 그제서야 치료를 시작해 많이 만힝 늦어 더 어려운 상황이라면서 그래도 재우는 일찍 발견해서 다행이라고 위로를 해 주셨다. 그 위로에 힘을 입어 그때부터 나는 아이를 업고 부지런히 치료하러 다녔다. 버스나 전철을 타면 으레 내게로 시선이 모아진다. 그 중에는 수근거리며 불쾌하다는 표정을 짓는 사람들도 많다. 그럴 때마다 나는 덜컥 겁이 나고 가슴이 무너진다. '나야 괜찮지만 재우가 그런 모욕을 견딜 수 있을까. 아이가 불편한 몸 때문에 남들에게 따돌림 당하고 내 앞에서 울면 어떡하나.'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프다. 그런 나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얼마 전 재우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엄마, 나도 운동하면 걸을 수 있어요."
해맑게 웃는 아이를 보면서 '우리 아들 기특하다'고 얘기해 주고 싶었는데 도저히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들보다 못한 나는 그저 울음을 삼키며 자꾸만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이임정 님/서울시 성북구 동소문동
|
|
|
글터 → 고전/철학/구비 |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31 - 신은 우리영혼에 내재하는 진리의 근원: 아우구스티누스의 윤리, 역사관
그때 세계에서는 414년: 고구려 광개토왕비 세움 429년: 반달족, 북아메리카에 반달왕국 세움
대개의 경우 고대 철학자들은 두 가지 과제를 취급하고 있다. 인식과 윤리의 문제였다. 그러나 중세기에 이르게 되면 신앙의 위치가 강조되기 때문에 철학의 핵심이 달라지게 된다. 인식보다는 진리(자체) 가 무엇인가를 물었고, 윤리보다는 신앙적 구원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회의주의에 머물렀기 때문에 인식론을 소중히 취급했으나, 윤리는 역시 신앙적인 것의 전제적 과제가 된다. 물론 신플라톤 철학에 머물고 있을 때는 덕을 이성과의 합치에서 설명하며 처세적인 지혜로 인정하고 있으나, 기독교적 입장에서 본다면 윤리는 종교적인 것의 예비적 성격을 넘어서지 못한다. 윤리의 궁극적인 의미는 현실세계를 어떻게 신의 뜻에 부합시켜 구원에의 과정으로 이어가는가 함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도덕의 실천이 방편과 과정이 되어 신앙과 구원의 길이 열려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신의 뜻을 배제하거나 거역한 덕은 이방인의 덕이며 광채가 있는 악덕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많은 그의 후계자들이 플라톤의 4덕과 더불어 바울의 믿음, 소망, 사랑의 3덕을 추가하며, 세상적인 덕과 신앙적인 덕을 구별, 합병시켜 7덕으로 삼은 것도 아우구스티누스 이후의 습관이라고 보아 좋겠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신을 가장 크게 살핀다면, 사랑에 의한 완성이 그의 모든 철학의 근본이 된다고 보아 좋을 것 같다. 그 자신의 어록 몇 개를 소개키로 하자.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을 사랑할 수는 없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것을 사랑할 때는 그 사랑의 힘에 의하여 그것을 일층 더 완전히 알게 된다" "인식한 것은 사랑 속에서 영존한다" "모든 것을 포함하는 하나의 작용이 있다. 그것은 사랑에 의여 움직이는 믿음이다" "사랑이란 의지 이외에 무엇이겠는가" "참되고 선한 사랑에서 선이 나온다" "자유의 율법은 사랑의 율법 이다" "사랑 그 자체가 사랑의 대상이다" "사랑의 출발은 의의 출발이고, 사랑의 육성은 의의 육성이고, 사랑의 위대함은 의의 위대함이며, 사랑의 완성은 의의 완성이다" "시간적인 것, 영원한 것, 사랑" "선은 사랑에 의하여 증대된다" "평화를 사랑하는 것은 소유하는 것이다. 빵은 나누어주면 줄어도 평화는 나누어주면 더 풍부해진다" "신애 없는 인간애 없고, 인간에 없는 신애 없다" "덕이란 사랑할 것을 사랑하는 사랑이다" "사랑은 구원의 원동력이다" 등의 말은 아우그스티누스의 모든 사상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우리가 다 아는 대로 기독교는 역사종교다. "구약" 과 "신약" 이 역사적 기록들이며, 바울은 "로마서" 에서 역사이론을 전개시키고 있다. 제2의 바울이라고 아우구스티누스도 그 전통에 따라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내용은 역사적 기록이지만 거기에 깔려 있는 것은 기독교 교리적 역사관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이원적 신정사관 이라고 부른다. 우리들의 역사는 하늘나라로 향하는 교회 중심의 역사와, 지상의 나라에 머물 때는 임금들의 역사로 나누어진다. 하늘나라의 역사는 아벨로부터 신의 의도를 대행하는 인물들로 이어지다가 그리스도와 그 교회가 중심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에 비하면 세상의 역사는 반역한 천사들, 카인, 아시아의 폭군들, 로마제국을 통해 전래된 이기적인 목적의 악의 연속이다. 이 둘의 싸움은 우리를 고통과 갈등으로 몰아가고 있으나, 마침내는 신의 뜻과 구원의 의지가 성취되어 세상나라는 징계와 심판을 받고 신의 은총의 왕국이 성립된다. 그것이 구체성을 띠고 나타나는 때는 그리스도의 재림인 것이다. 그래서 악이 없고 세상의 권세가 모두 신에게 복종하는 영원한 나라가 신의 뜻에 따라 건설된다는 역사관이다. 물론 이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다. 그러나 기독교회의 정통성을 따라 그는 방대한 역사이론을 전개시키고 있다.
|
|
|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
"구실을 삼다"와 "사람 구실을 못한다"에서
'구실'은 서로 다른 단어
"구실을 삼다", "사람 구실을 못한다" 의 두 문장에서 쓰이는 두 가지의 '구실'은 같은 단어일까요, 서로 다른 단어일까요? "구실을 삼다"의 '구실'은 '핑계의 밑천으로 삼다'는 뜻이고, "사람구실을 못한다"의 '구실'은 '응당 하여야 할 일'을 뜻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단어입니다. 한 번 사전을 찾아 보시지요. "구실을 삼다"의 '구실'은 한자어입니다. 즉 '입구, 열매실'로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 구실을 못한다"의 '구실'은 한자어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람 구실을 못한다"의 '구실'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원래의 뜻을 아신다면, 아마 이 해하시기 힘드실 것입니다. 원래'구실'은 이전에는 '구위실', 또는 '구의실'로 쓰이었던 것입니다. 이 '구위실'은 그 뜻이 '공공 또는 관가의 일을 맡아 보는 직무'라는 뜻이었습니다. 한자를 보면 '관직'이란 뜻이었던 것이지요. 이것이 다시 '조세의 총칭'으로도 변하였습니다. 아마도 옛날에는 관직으로서 하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 '세금'을 받아내는 것이었던 모양이지요? 가렴주구가 심했던 것 같습니다. 이러던 것이 '직책'이란 뜻으로 바뀐 것이지요. 그러니까 '구위실'에서 '구의실'로, 그리고 이것이 다시 '구실'로 음운변화를 거치면서 그 뜻도 '관직'에서 '조세'(세금)로, 그리고 이것이 다시 '직책'이란 뜻으로 변한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한자를 배울 때만도 '공공기관'의 맨 앞의 '공'을 '귀 공'이라고 배웠는데(지금은 '공 공'이라고 하더군요), 이 때의 '귀'가 '귀하다'의 '귀'가 아니라, 바로 '관청'이란 뜻이었던 것을 안 것은 국어학을 전공으로 공부하고 나서의 일이었습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
|
글터 → 구비 |
단군신화
옛날에 환인의 서자 환웅이 계셔 자주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내어 구하였다.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 태백산을 내려다보니, 인간 세계를 널리 이롭게 할 반하였다. 이에 천부인 세 개를 주어, 내려가서 세상 사람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무리 삼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밑에 내려와서 이 곳을 신시라 일컬으니, 이분이 곧 환웅 천왕이다. 그는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들 무릇 인간의 삼백 예순 가지나 되는 일을 주관하여 인간 세계를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이 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에서 살았는데, 늘 신웅에게 사람 되기를 빌었다. 때마침 신이 신령한 쑥 한 심지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하였다.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 날 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 곰과 범은 이것을 받아서 먹었다. 곰은 기한 지 삼칠 일에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능히 기하지 못하였으므로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여자가 된 곰은 그와 혼인할 상대가 없었으므로, 항상 단수 밑에서 아기 배기를 축원하였다. 환웅은 이에 임시로 사람으로 변하여 그와 결혼해 주었더니, 여자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름을 단군 왕검이라 일렀다.
단군은 요 임금이 왕위에 오른 지 50년인 경인년-요 임금의 즉위 원년은 무진이니 50년은 정사이지 경인은 아니다. 아마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 같다-에 평양성-지금의 서경-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불렀다. 또 다시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에 옮겼다. 그 곳을 또는 궁-혹은 방자로도 되어 있다-홀산 또는 금미달이라 한다. 그는 1천 5백년 동안 여기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주의 무왕이 왕위에 오른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매,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기었다가 후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 산신이 되었는데, 그 때 나이가 1천 9백 8세였다.
갈래 - 신화(서사) 성격 - 건국신화(개국신화) 내용 - 단군의 탄생 및 고조선 건국의 경위 주제 - 홍익인간의 이념과 단일 민족의 역사성
의의 홍익인간이라는 건국이념을 밝히고 있다. 천손의 혈통이라는 민족적 긍지를 반영하고 있다. 우리 민족의 유구한 단일성, 역사성을 암시하고 있다.
감상
'단군신화'는 환인, 환웅, 단군의 삼대기로 이루어져 있다. 환인은 역사적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하고, 환웅은 초월적인 시간 속에서 역사적인 시간으로 들어오고, 단군은 역사적인 시간 속에서 일정한 수명을 지닌다. 이러한 현상은 천상의 것보다는 지상의 것을, 수직적인 질서보다는 수평적인 질서를 더욱 중요시하는 사유 방식의 표현이다.
인간 중심 사상의 근거 - 인간 세계를 널리 이롭게 할 만했다. 환웅과 웅녀의 혼인의 상징성 신과 인간의 결합 천상과 지상의 결합 천신 숭배 부족과 곰 토템 부족의 결합 선주족과 이주족의 결합
홍익인간의 건국이념을 보여주는 상징물 - 천부인 세 개
단군신화는 현존 신화 중 가장 오래되었다. '환인 - 환웅 - 단군'의 삼대기이다. 민족 영웅 서사시의 원류가 된다. '신이한 탄생 - 신성한 결혼 - 등극 - 사후의 이적'의 구조이다.
민속적 금기 - 三七日
'기한지 21일만에 여자의 몸이 되었다.'의 신화적 의미 고난 시련 극복의 과정 새로운 생명의 탄생 과정 수성 제거의 주술성
후대의 서사시 - 제왕운기 - 이승휴 이 신화에 나타난 사상 - 토템 사상, 광명 사상, 산악 숭배 사상 , 숭천사상 하늘과 땅을연결하는 제의적 공간 - 신단수
|
|
|
글터 → 이글저글 |
감기를 이기는 최초의 처방은 집에서 만든 닭국이다. 집안에 내려오는 조리법을 쓰되 소금을 적게 넣고 다진 마늘을 넣어야 한다.
마늘은 아주 효과적인 항생제로 알려져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군은 대량의 마늘즙에 물을 섞고 그것을 물이끼 위에 칠하여 상처에 발랐다. 독감에 걸렸거나 감염으로 미열이 날 때 다진 마늘을 오렌지 쥬스에 타서 하루에 세번 마시면 효과가 있다.
아이스크림은 우리를 시원하게 해주는 음식인가? 그대답은 ‘아니오’이다. 입안의 아이스크림이 순간적으로 맛봉오리를 차게 할 수 있고 또 심리적으로 시원하게 한다고 믿을 수는 있다. 그러나 아이스크림은 열량덩어리로 열을 발산하는 기본 단위이다. 따라서 아이스크림은 몸을 덥게 하는것이지 시원하게 하는것이 아니다.
가장 비싼 요리 중 하나인 바닷가재는 특히 콜레스테롤 함량이 높고, 바다 맨 밑바닥의 온갖 더러운 것을 다 먹어치우는 청소기이다. 자, 이래도 바닷가재 요리를 좋아하시겠습니까?
위궤양은 90%까지는 가능하지만 100%치료 되지는 않기 때문에 항상 재발할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위산에서만 기생하는 박테리아가 위에 붙어 있기 때문이다.
조깅하는 사람이 1킬로미터 달리면 60칼로리를 소모한다. 따라서 4.5킬로그램의 살을 빼기 위해서는 1년동안 하루에 1.6킬로미터 달려야 한다. 그런데 우습게도 한시간의 화투놀이로도 100칼로리를 소모할 수 있다.
|
|
|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