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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37 호
4339.10.21 (08.30)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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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 - 風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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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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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고기를 낚으러 가는 노인의 가슴속엔 언제나 어린소년이 들어 있다. / J.콜더 조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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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과학/예술/교육 |
- 조화유의 미국영어 - 일반인을 위한 경제생활 영어
28. I'm calling about your help-wanted ad.
미국 직장에 취직하려고 문의 전화를 거는 경우를 몇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소개한다. 먼저 신문 광고를 보고 전화를 거는 경우부터 보자.
A: Is this 487-5426? B: Yes, it is. A: My name is Henry Dickens. I'm calling about your help-wanted ad in the Los Angeles Times this morning. B: All right. Send your resume and we'll give you a date for an interview. Our mailing address is... Are you ready to write? A: Just a second. Let me get a pen. ...Now I'm ready. B: Send your resume to American Computer Company, P.O. Box 250, Culver City, CA 90230. A: Okay, I got it. Thank you very much. B: Thank you for calling. Bye. A: 487-5426입니까? B: 네, 그렇습니다. A: 저는 헨리 디킨스라는 사람인데요. 오늘 아침 로스앤젤레스 타임즈에 난 구인 광고를 보고 전화드리는 겁니다. B: 알겠습니다. 이력서를 보내 주시면 인터뷰 날짜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이력서 우송 주소는... 쓸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A: 잠깐만요. 펜을 가져오겠습니다. ...자, 이제 준비가 됐습니다. B: 이력서를 아메리칸 컴퓨터 회사, 사서함 250, 칼버 시티, 캘리포니아 90230으로 보내 주세요. A: 잘 받아 적었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B: 전화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A: My name is Jane Parker. I'm answering your ad for a cashier. B: I'm sorry but the job is already taken. A: Oh, I see. Thank you anyway. A: 저는 제인 파커라고 하는데요. 점원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전화했습니다. B: 미안하지만 벌써 사람을 구했습니다. A: 아, 그래요? 하여튼 감사합니다.
A: My name is Paul Williamson. I'm calling about your ad in today's Chicage Tribune. Is the position still open? B: Yes, it is. A: May I ask what the starting pay is? B: About $2,600 a month plus fringe benefits. A: I'm interested in the job. B: All right. Can you come for an interview tomorrow morning at 9:30, Mr. Wiliamson? A: I sure will. B: Thank you for calling, Mr. Williamson. A: Thank YOU. A: 제 이름을 폴 월리엄슨입니다. 오늘 시카고 트리뷴에 난 광고를 보고 전화드리는 겁니다. 그 자리는 아직도 비어 있습니까? B: 네, 그렇습니다. A: 초봉이 얼마나 되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B: 월급 약 2,600달러에 기타 각종 혜택이 있습니다. A: 그 자리에 관심이 있습니다. B: 좋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 9시 반에 취업 면접하러 오실 수 있으세요, 월리엄스씨? A: 물론이죠. B: 우리 사무실에 오셔서 미스 마틴을 찾으세요. A: 그러겠습니다. B: 전화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윌리엄슨 씨. A: 제가 오히려 감사합니다.
* fringe benefits는 봉급 이외에 연금 계획, 건강 보험, 유급 휴가 등의 각종 혜택을 가리킨다. A: Personnel Dapartment. May I help you? B: Yes. I just called to see if you have any opening for cashiers right now. A: Sorry, no openings right now, but we're accepting applications for future openings. B: I see. A: You can pick up application forms at our office 9 to 12 Monday through Friday. Turn in your application along with your resume. B: Thank you very much. A: You're welcome. A: 인사과입니다. 도와드릴까요? B: 네, 점원 자리가 비어 있는지 알아보려고 전화드렸습니다. A: 지금 당장은 없습니다만, 앞으로 빈자리가 생길 것에 대비해서 원서는 접수하고 있습니다. B: 알겠습니다. A: 원서는 우리 사무실에서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9시부터 12까지 받아가실 수 있습니다. 원서를 이력서와 함꺼 제출하시면 됩니다. B: 대단히 감사합니다. A: 천만에요.
* application form(신청서, 지원서)에는 대개 Print or type.라고 써 있는데, 이것은 글자를 써넣을 때 필기체로 쓰지 말고 '인쇄체로 한자 한자 또박 또박 쓰든지 타이프라이터로 찍으라'는 뜻이다. 미국 사람들은 악필이 많으므로 필기체로 원서를 쓰면 알아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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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지식/생활/건강/의학 |
- 음식 토정비결 - 전영순,하정화
<본초류>
26.소나무 - 이파리 두개 달린 이엽송이 토종
우리나라는 소나무의 본고장이다. 어디를 가나 지천으로 널려있는 게 소나무요, 창랑한 바위산과 어울려 고고한 기품을 자랑하는 것이 소나무다. 이렇듯 흔하면서도 고고한 소나무는 백년 전쯤만 하더라도 임야의 70% 이상을 차지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을 탐낸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거의 모두 베어, 또 해방 후에는 농민들이 땔감으로 베어냈다. 게다가 일본인 학자 혼다 세이로꾸가 쓴 '소나무 망국론'이라는 엉터리 학설을 우리 관리들이 무조건 신봉하여 나라에서는 소나무를 심지도, 가꾸지도 않았다. 그 바람에 울창하고 곧던 소나무숲은 거의 사라져버리고 구불구불 뒤틀린 몹쓸 소나무만 남아있게 된 것이다. 소나무는 우리나라에 가장 많다. 또한 우리나라가 원산지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소나무 속에 드는 식물은 지구의 북반구에만 퍼져 있는데 우리나라에 나는 소나무는 우리나라 전역, 일본 일부, 중국 일부 지역에만 분포되어 있다. 이를테면 중국도 두만강 건너 북간도의 일부에 조금 나고 만주에는 전혀 없으며 중국 본토에는 산동반도의 한귀퉁이에만 조금 자생하고 있을 뿐이다. 소나무를 한자로 '송'으로 표기하는 것은 잘못이다. 중국 사람들이 '소나무 송'으로 표기하는 나무는 소나무 속이기는 해도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소나무는 아니다. 그리고 잣나무 역시 '잣나무백'으로 적는 것은 잘못이다. 중국에는 잣나무가 없다. 우리나라 남부지방 소나무들은 거의 다 줄기가 굽어있다. 이것은 좀벌레가 줄기에 구멍을 뚫고 들어가서 잎에서 만든 양분을 빼앗아먹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소나무는 성질과 모양에 따라서반송, 처진 소나무, 금강송, 금송, 은송, 미인송, 춘양목 등으로 나눈다. 이러한 명칭은 소나무의 모양을 보고 붙인 것이다.
재목의 쓰임새나 아름다움을 손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금강소나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 궁궐이나 절을 지을 때 쓴 소나무가 바로 금강송이다. 이 나무는 칠을 하지 않아도 몇 백 년간 썩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금강송의 순종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해방 직후만 하더라도 삼척, 울진, 영양 등지에 금강송의 멋진 숲이 있었는데 도벌꾼들이 다 베어가는 바람에 지금은 거의 없어졌다. 금강송 못지 않게 뛰어난 소나무는 경북의 청송과 춘양목이다. 춘양목 역시 곧게 자라고 쉬 썩지 않는다. 춘양목은 해송과 육송의 혼혈아로 보이는데 잎은 해송을 닮아 송충이에 강하고 목재는 소나무를 닮아 질이 좋다. 금강송과 해송은 서로 모양이나 성질이 비슷하여 어떤 사람들은 같은 종류로 보기도 하고 구분하기도 어렵다. 미인송은 백두산 부근에 나는데 이름 그대로 미인을 닮았다. 이것은 한국 소나무와 만주 흑송의 중간 쯤으로 보인다. 금송은 잎의 끝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황금색이 도는 소나무다. 이것은 자라는 속도가 매우 느려서 수백년이 되어도 4∼5미터 정도 밖에 자라지 않는다. 또한 은송은 잎에 세로로 금빛이나 은빛이 나는 소나무다. 금송이나 은송은 매우 귀해서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소나무의 꽃은 암꽃과 수꽃이 한 가지에 함께 핀다. 수꽃은 노랑색으로 새로 난 가지의 밑부분에 돌려 붙으며 길이가 1센티미터 정도이다. 암꽃은 가지 끝부분에 피고 길이는 수꽃보다 작고 보랏빛이다. 이 암꽃이 차츰 자라서 솔방울이 된다. 솔꽃 중에서도 수꽃은 하얗게 바람에 날려 멀리서 보면 마치 흰구름이 흩어지는 모양과도 흡사하다. 옛날 사람들은 이 송화가루를 모아서 다식을 만들어서 먹었다고 한다. 송화가루를 모아서 꿀에 개어 과자를 만들어 먹기도 하는데 그 맛이 기가 막히다.
성분
소나무에 함유된 영양분과 약효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밝혀진 성분을 보면 눈이나 피부에 좋은 비타민 A와 비타민 C,K 등 각종 비타민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다. 또한 철분과 효소도 약간 포함하고 있다. 특히 솔잎에는 살리니그린, 코니페린, 터펀틴 오일, 피-사이멘, 덴시피마릭산, 렉텐 등이 함유되어 있어 이뇨작용을 하고 풍을 다스리며 종양을 제거하는 효능이 있다. 중국의 한방고전인 {본초강목}과 우리나라 최고의 의서인 {동의보감}에서는 솔의 성분이 인체에 주는 효능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언급하고 있다. 이 의서들의 공통된 기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기력이 왕성해지고 이를 튼튼히 하며 눈과 귀를 밝게하고 오랫동안 복용하면 몸을 가볍게 할 뿐만 아니라 늙지 않고 오래 산다'고 하였다. 특히 소나무의 씨는 몸의 반쪽이 마비되는 풍비를 낫게 하고 기의 부족을 다스린다. 그리고 솔잎은 머리털이 나게 하고 오장을 편하게 하며 허기를 면하게 하고 또 중풍으로 입이 돌아간 것을 다스리기도 한다. 이와 같은 효능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솔은 과연 인간을 신선으로 만들어줄 수도 있는 신비한 나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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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임새
소나무를 생각하면 우리는 쉽게 땔감을 연상하게 되는데 우리 조상들은 수천년 동안 소나무의 온기에 의지하여 살아왔다. 늦가을에 붉은 비단처럼 땅을 덮는 마른 솔잎을 솔갈비라 하는데 불의 열기를 조절할 수 있고 타는 냄새마저 구수한 최고의 밥짓는 재료이다. 또한 소나무 장작은 한 번 도끼질로도 쫙쫙 갈라지고 불에 잘 타는 땔감이다. 그리고 한약을 달일 때에도 소나무숯을 만들어 썼는데 그 이유는 솔에 독이 없고 몸에 이로우며 은근한 불기운이 오래 지속되어 약 달이는데 적합하고 약효도 돋워주기 때문이다. 소나무는 목재 중에서도 최고의 목재이다. 그래서 집 지을 때는 반드시 소나무를 썼다. 소나무로 지은 집은 늘 향기가 가득하고 수백년이 지나도 기둥이나 서까래가 좀처럼 휘지 않으며 풍상에 닳아도 무늬결이 살아있어 아름다움을 그대로 전해주기 때문이다. 소나무는 목재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다. 나무 전체가 만병통치약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자란 토종 솔뿌리는 근골을 튼튼하게 하고 어혈을 다스리며 중풍, 산후풍, 결핵관절염, 신경통, 골수암, 골수염 등에 탁월한 효능을 가지고 있다. 또한 소나무를 이용한 술도 다양하다. 송순주, 송엽주, 송실주, 송하주 등이 있다. 송하주란 동짓날 밤에 솔뿌리를 넣고 빚어서 소나무 밑을 파고 항아리를 잘 봉하여 두었다가 그 이듬해 낙엽이 질 무렵에 꺼내어 먹으면 좋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솔잎주스를 만들어 먹어도 좋을 것이다. 깨끗한 솔잎을 따서 냉장고에 저장해두고 필요할 때 믹서로 갈아서 천으로 짜거나 걸러서 찌꺼기를 제거한 뒤 레몬 반 개 정도의 즙이나 약간의 꿀을 타서 마신다. 민간요법에서는 다음과 같이 쓰인다.
*기관지 천식에는 감꼭지 열 개와 솔잎 한 줌에 물을 적당하게 넣고 달여서 그 물을 한 번에 다 마시되 하루 세 번 빈 속에 마신다. *폐결핵에는 솔잎을 따다가 3개월 동안 술에 담가두었다가 그 우러난 물을 한 번에 두 숟갈씩 하루 세 번 밥먹기 30분 전에 먹는다. *간장염에는 사철쑥, 솔잎, 대추를 각각 2:1:1의 비율로 섞은 다음 물을 넉넉히 넣고 푹 달여서 자주 먹는다. *두통에는 봄철에 뜯은 소나무 순 5백g에 물 한 사발과 설탕 다섯 숟가락을 넣고 끓여서 식힌 다음 단지에 부어 넣는다. 이 단지를 잘 밀봉하여 땅에 열흘 정도 묻어두었다가 위에 고인 물을 마시면 된다. 하루 세 번 식전에 한 잔씩 먹는다. *관절염에는, 솔잎을 따서 천에 싼 다음 뜨겁게 하여 아픈 뼈마디에 하루 두 번 정도 갈아 붙인다. 이것을 서너번 반복하면 효과가 있다.
이것이 토종
보통 소나무는 한 곳에 나는 잎의 종류에 따라 분류한다. 한 곳에서 한 개가 나는 것을 일엽송, 두 개가 나는 것을 이엽송, 세 개는 삼엽송, 다섯 개를 오엽송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일엽송은 없고 대개가 이엽송이다. 잎이 세 개 달린 리기다소나무, 대왕송, 테다 소나무 등은 주로 미국에서 건너온 것들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소나무도 반드시 이엽송인 것은 아니다. 드물게 세 개씩 달린 것도 있다. 따라서,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어느 것이 순수한 우리 토종인지를 정확하게 가늠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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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세계사/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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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풍수지리는 과연 미신인가 - 류주희(중앙대 박사과정)
풍수지리설을 이용한 지역차별
이러한 도선의 풍수지리설은 왕건에게 적극 수용되어 정치에 반영되었다. 그러나 왕건은 도선과 달리 비보에 더 중점을 두었다. 그는 도선의 풍수지리설을 받아들이는 한편 자신의 정치운영에 맞게 비보사상과 도참사상을 연결하여 변용시켰다. 비보설은 도참설과 연결되어 특정 지역을 중시한다든가, 혹은 반란을 일으킬 형세이거나 임금에게 배역하는 모습이므로 그 지역민은 등용해서는 안된다는 등의 이론적 근거로 작용하였다. 왕건이 남긴 훈요10조 가운데 차령산맥 이남과 금강 밖은 산수의 형세가 배역하는 모습이므로 그 지역 사람들도 배역하는 마음을 가졌다고 하여 그 곳 인물들은 기용을 삼가라는 내용이 있다. 곧 후백제 땅에 대해 유독 차별적인 인사정책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지리적인 이유에서라기보다는 고려 체제에 순응하고 투항한 신라와는 달리 끝까지 반항했던 후백제에 대한 보복적인 조처로 보아야 한다. 또 한편으로 강제로 통합된 후백제 출신 인물들이 그 원한으로 반란을 꾀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그 곳 출신 인물들의 정치참여를 막고자 한 것이다. 왕건은 풍수지리의 이론에서 권위를 빌어와 후백제 지역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이는 그 정치적 의도와는 상관없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풍수지리를 동원한 묘청의 야망
풍수지리설은 비보사상과 결합될 때까지도 전 국토를 답사한 경험을 토대로 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면모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도참사상과 결합되면서 그것은 지리도참설로 흘러 정쟁에 이용되었다. 정치가들은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풍수지리의 권위를 빌리려 하였으며, 풍수가들은 정치가의 권력을 빌려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다. 정치가들은 풍수지리의 권위를 빌려 정책 추진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지배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풍수가들은 그들의 정책을 뒷받침해 줄 이론을 개발하여 제공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이 과정에서 도참 논리를 빌어 왔다. 풍수지리설과 도참사상의 결합을 보여 주는 대표적 사건이 서경천도운동이다. 서경은 동쪽과 남쪽이 대동강에 닿아 있고, 북쪽은 을밀대와 모란봉을 품은 금수산이 있으며, 서쪽은 대동강의 지류인 보통강이 흘러 풍수가들이 말하는 명당이었다. 이 곳은 수덕이 순조롭고 지맥의 근본을 이루는 ‘만대 대업의 땅’으로 지목되어, 태조는 후대의 임금들이 반드시 넉 달 동안 이 곳에 머물라는 훈요를 남기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보다 실질적인 이유가 있었다. 태조는 북방민족의 침략에 대비하는 국방상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서경지역의 이반을 사전에 봉쇄하는 정치적 의도로 서경경영을 추진하며 이론적 근거로 풍수지리를 내세운 것이다. 고려시대에 지리도참설을 바탕으로 발생한 가장 커다란 사건을 1135년(인종 13)에 묘청 등이 일으킨 서경천도운동이다. 인종 때는 외척인 이자겸이 ‘십팔자(이)위왕’이라는 도참설을 믿고 난을 일으켜, 많은 사람이 죽고 궁궐이 거의 불타 버려 민심이 매우 흉흉하였다. 대외적으로도 금나라의 외교적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때 묘청. 정지상 등은 개경의 지덕이 쇠약해져 국내외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며 서경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주장하였다. 이들의 서경천도 주장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인종 6년에 일관 백수한이 검교소감으로 서경의 분사에 임명되고, 묘청을 스승으로 삼고 음양비술을 잘한다 하여 뭇사람을 현혹하였다. 정지상 또한 서경사람이라 그 말을 깊이 믿고 말하기를 “상경은 기업이 이미 쇠하여 궁궐이 다 불타 남은 것이 없으나 서경은 왕기가 있으니 도읍을 삼는 것이 좋겠다.”하고 곧 근시인 내사랑 김안과 더불어 꾀하기를 “우리들이 만약 임금을 모시고 서경에 도읍하면 마땅히 중흥공신이 될 것이니 일신의 부귀 뿐만 아니라 자손의 무궁한 복이 될 것이다”라 하였다... 묘청 등이 아뢰기를 “신 들이 서경 임원역의 지세를 살펴보니 이것은 곧 풍수에서 말하는 큰 꽃 모양의 터입니다. 만약 궁궐을 지어서 거처하면 천하를 병합할 수 있으며 금나라가 폐백을 가지고 스스로 항복할 것이고 36국이 모두 신하가 될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를 보면 인종 때의 서경천도운동은 묘청. 정시장 등 서경세력이 자기들의 출신지역으로 도읍을 옮겨 중흥공신이 되어 정권을 잡으려는 정치적 야심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의 주장은 서경기설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마침내 묘청 등의 주장에 따라 대화궁을 짓고 그 안에 팔성당을 세우는 등 서경천도가 곧 실현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궁궐을 준공한 뒤 대화궁 근처에 벼락이 떨어지고 임금이 서경으로 행차하는 도중 갑작스런 폭풍우로 수많은 인마가 살상되는 등 불상사만 잇따라 일어났다. 이에 서경천도론은 백성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묘청 일파를 배척하는 목소리가 높아갔다. 서경천도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묘청 등은 서경에 대위국을 세워 개경의 조정과 정면으로 대결하기에 이르렀다. 이 묘청의 난을 김부식은 5,6년 전부터 계획하여 일으킨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묘청이 난을 일으켰다가 곧바로 서경사람들에게 잡혀 죽은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오랜 준비 끝에 일으킨 거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도 국왕의 서경 행차가 중지된 인종 12년 8월 이후에야 반란 계획을 꾸민 듯하며 거사도 반란을 일으키기 며칠 전에 갑자기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서경천도운동의 중심인물인 정지상. 백수한 등이 반란이 일어난 줄 모르고 개경에 그대로 머무르고 있었던 데에서 알 수 있다. 또한 대위라는 나라 이름과 천개라는 연호를 칭하고는 있지만 국왕을 새로이 옹립하지 않았다든지, 군대를 일으켰다고 그들 스스로 임금에게 알린 점 등으로 미루어 왕권 자체에 대한 도전이 아닌 중앙의 문벌귀족들을 타도하는 데 그 거사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조정이 군사를 동원하여 반란을 완전히 평정하는 데에는 일년이라는 시일이 필요하였다. 결국 김부식을 중심으로 하는 개경의 보수귀족들에 의해 서경천도운동은 좌절되고 서경의 지위는 갈수록 격하되어 갔다. 그 뒤 고려에서는 무인정권의 성립 등 사회가 크게 바뀌지만 지리도참사상은 여전히 유행하였다. 조선초까지도 풍수지리설은 도읍지의 선정 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허무맹랑한 비기로 전해지면서 미신화되어 결국에는 집터나 묘자리 등을 잡아 주는 가장 초보적인 방법만 남게 되었다. 도선이 전 국토를 합리적으로 운영하는 방법으로 집대성하였던 풍수지리설은 후대로 갈수록 미신적인 요소만 남게 된 것이다. 풍수지리를 빙자한 갖가지 행사가 왕실과 지배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때 각종 폐단이 일어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지금도 종교적 의미를 떠나 미신적 속성을 지닌 사이비 종교가 자주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다.
고려말 풍수지리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게 된 계기는 물론 그에 대한 폐단이 큰 이유가 되었겠지만, 한편으로는 성리학의 발전과 깊은 연관을 지닌다. 특히 신진사대부는 당시 왕실을 지배하고 있던 불교가 통지 이데올로기로서의 기능을 잃고 풍수도참과 습합되는 등 폐단을 노출하자 불교에 대한 비판과 함께 풍수도참을 비판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유교와 불교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던 고려말에 있었던 것이었고, 조선 건국 이후에도 여전히 풍수도참은 이성계와 무학대사에 의해 한양을 수도로 정할 정도로 중요한 사상으로 작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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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사회/문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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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랍문화의 이해 - 공일주
1. 신의 인간에 대한 관계
율법
알라의 인간에 대한 요구는 율법에 담겨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다섯기둥이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요구는 십계명에 잘 계시되어 있는데, 십계명는 인간과 하나님,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기본적인 율법은 구약의 나머지 부분과 예수의 가르침에서 설명된다. 이슬람 율법을 이해하는 것은 이슬람 국가에서 살고 있는 무슬림이 갖는 문제를 설명해 줄 수 있고, 현재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득세하고 있는 아랍국가에서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이슬람 율법의 발전과정과 이슬람 율법이 오늘날 아랍세계나 이슬람 세계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슬람 율법은 이슬람교에서 핵심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으며, 이슬람 율법의 핵심은 가족법이다. 무함마드 시대 이후 1300여 년에 걸쳐 발전해 온 법적체계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슬람에 대한 완전한 연구와 이해가 불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 안에서 교회와 국가는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곳에서조차도 서로 다른 책임을 갖는다. 그러나 이슬람에서 법의 문제는 알라의 계시로 여겨지기 때문에 이슬람법은 인간에게 내린 알라의 계시로 간주되어 인간의 책임을 명하고 인간의 삶을 인도하며 인간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문제의 해답을 준다고 생각한다.
율법과 법학파
이슬람 율법은 아랍어로 샤리아(Shariah)라고 한다. 이 뜻은 ‘낙타가 물 웅덩이로 가는 길’ 이라는 것이다. 추종자(신도)들을 새롭게 하는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 즉 추종자가 따라야 할 길이다. 그래서 율법은 법적인 내용과 종교적인 내용 둘 다 갖는다. 가령 혼인이나 식사방법, 기도하는 방법과 기도하는 때를 정해 주는 내용 등이 들어 있다. 샤리아는 통일된 단일 법체계는 아니다. 이슬람법 안에는 여러 가지 다른 법학파가 있고, 정통파 순니(Sunni)안에서도 4개의 법학파가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널리 퍼져 있는 학파는 하나피(Hanafi)학파로 주로 인도, 파키스탄, 터키,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레바논, 아프카니스탄에 존재한다. 가장 융통성이 넓다고 알려졌다. 법규는 불변이 아니라는 명제하에 여건이 변하면 법이 변화될 수 있다고 본다. 이 학파는 아부 하니파(767년 사망)가 이라크에서 창립했으며, 후에 오스만 터키(1300에서1922)제국이 이 교의를 공인하여 중근동 여러 국가의 무슬림 공동체에 지배적이다. 둘째 번으로 큰 학파는 말리키(Maliki)학파로 북아프리카에 집중되어 있는데,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이집트, 서 아프리카, 쿠웨이트에 있다. 이는 네 학파 중에서 가장 오래 된 학파이며, 말리크 븐 아나스(795년 사망)가 창건 했다. 그는 메디나 출신이고 법관을 역임했으며, 샤리아에 대한 논문도 집필했다. 무함마드 시절 10년과 그 이후 약 25년 간 메디나의 법적관례를 중시했던 학파이다. 샤피이(Shafii)학파는 셋째 번으로 큰 학파로서 중동의 곳곳에 산재해 있는데, 이집트 북부(알렉산드리아 등), 동부 아프리카, 말레이지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 아시아에 퍼져 있으며 주로 상인들에 의해 전파된 법체계이다. 샤피이(820년 사망)라는 법학자가 창립했고, 샤피이 학파는 압바시야조의 공인학파였다. 한발리(Hanbali)학파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에서 우세하다. 아흐마드 븐 한발(855년 사망)이 세웠으며, 네 학파 가운데서 가장 엄격하다. 위의 세 학파의 변혁적 해석을 강력히 반발하여 무함마드 통치하에 있던 순수한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이다. 이 학파의 창건자는 무함마드가 수박을 먹었다는 증거가 없음므로 먹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 여러 학파들 사이에 차이는 근소하다. 더구나 법률해석에 차이는 있지만 모두 자파의 해석이 가장 타당한 것으로 여긴다. 그렇지만 타파의 해석도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에 서로가 순니파로 여기고 있다. 대부분 무슬림 국가에서는 어떤 개인이 국가의 공인 법체계와 다른 학파의 해석에 따라 재판을 받고 싶다고 하면 그 요청이 받아들여진다. 특히 이스라엘, 레바논, 시리아는 한때 오스만 제국의 영토이었으므로 아직도 하나피 학파를 공인하고 있으나 국민의 상당수가 다른 학파의 교의를 따르고 있다. 아랍군이 시리아를 정복한 다음에서야 이슬람 법전이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알라는 하나이고, 쿠란은 알라의 말씀이며 무함마드는 최종적인 예언자이다.’ 라는 간단한 신앙교리로는 제국을 통치하는데 생긴 여러 문제의 해결책을 주었다. 서기 900년쯤 이슬람 율법의 발전에 중요한 근거가 되는 네 가지 준거가 점진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1.쿠란: 무함마드를 통해 계시된 알라의 말 2.순나(관습): 무함마드의 말, 행동, 묵인한 것으로 쿠란 다음으로 중요성을 갖는다. 3.이즈마아(합의): 이슬람 국가 또는 울라마(이슬람 법학자)의 만장 일치 4.끼야스(유추): 새로운 교리나 실천사항의 문제, 그리고 어렵고 의심스러운 문제에 대한 학자들의 유비적 추론이다. 법학자들은 쿠란, 순나, 이즈마아의 준거에 의해 이미 해결된 비슷한 사례를 비교하여 해답을 도출해 낸다. 무슬림의 신앙은 이슬람의 기원이 하나님이고 무함마드는 유일한 마지막 예언자라는 신앙에 근거를 두고 있으면서 위와 같은 이슬람법에 근거한 종교법을 둠으로써 이슬람 국가를 이끌어가고 있다. 이슬람법은 쿠란에 근거하는 데 메카시대의 쿠란계시는 부족적 집단주의와 세속주의를 부정하였고, 메디나 계시는 이슬람 공동체(옴마)의 토대를 제시했다. 신을 최고의 주권자로 예언자 무함마드를 지상에 있어서 신의 대리자로 보는 무슬림들이 그들의 공동체를 지상에서 실현하는 과정에서 신의 절대의지를 표현한 것이 메디나 계시다. 무함마드는 이슬람 이전의 사회질서 대신에 신의 말씀인 쿠란에 의거하여 자신의 행위의 권위성과 입법성을 주장하였다. 메디나 시기의 쿠란수라가 메카시대 수라의 3분의 1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정치적인 문제에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는 말이 된다. 또, 메디나 시기의 수라가 길어졌다는 것은 메카시기처럼 종교적 상징성이 없어지고 현실적인 정치적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어야 했음을 의미한다. 무함마드가 메디나에 갔을 때 메디나 사회의 아우스 부족과 카즈라즈 부족 사이에 분쟁의 조정자로 초대받았다고 무슬림들은 말한다. 쿠란 제4장 65절에 ‘그들이 너에게 분쟁을 조정하게 하고 그들 자신이 너의 결정에 대하여 반대가 없을 때 그들은 알라를 믿는 자들이다’고 했다. 무함마드가 중재자로, 그리고 신으로부터 받은 예언자의 사법행위의 권위를 행사하였다. 즉, 예언자의 행위는 신에 의해 보증된 무오성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그의 언행이 관습을 초월한 입법임을 뜻한다. 그래서 서구 학자 중에는 무함마드를 예언자, 입법자라고 표현했다.
무함마드가 죽은 후 칼리파가 이를 계승했는데, 칼리파는 종교 지도자의 역할뿐만 아니라 국가의 원수, 군의 총사령관도 겸했다. 특히 정통 칼리파 시대에는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신정국가의 정치적 지도자였다. 그러나 이슬람력 1세기에는 이슬람 이전의 관습과 쿠란 입법과의 갈등, 조화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태형에 의한 처벌 강화와 모세율법에서 비롯된 불륜한 성관계에 대한 투석처벌도 있었다. 이 시기에는 쿠란입법을 적용, 발전시켜 새로이 정복된 지역을 조직화하는 행정적인 법이 강화되었다. 그리고 관습(순나)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였다. 이슬람 이전부터 아랍부족 간에는 선조로부터 내려온 전통적인 관습이 있었다. 그런데 이슬람이 확립되고 나서 무함마드의 언행이 곧 순나가 되었다. 따라서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가 모든 무슬림에 의해 존중되고, 하디스 내용 중에 법률적인 부분은 순나로 인식되었다. 아랍인은 아라비아 반도를 넘어 다른 지역을 정복하면서 정복지의 주민과 토지, 재산 처분에 대한 지침이 필요했다. 칼리파 우마르(634에서644)가 비잔틴과 페르시아 법의 일면을 취해서 이런 목적의 해정지침을 내려보냈다. 그는 페르시아의 디완(Diwan:행정제도)을 써서 군인과 군인가족들의 연금을 기록하는 명부(기록부)를 만들었다. 우마르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모든 비무슬림을 추방하고, 아라비아 밖에서도 비무슬림이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도록 명했다. 아랍인들은 자카트(Zakat, 종교세)를 내면 아라비아에서 토지를 소유하게 해 주었다. 만일 그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이면 토지의 기존 소유자는 자신의 토지를 가질 수 있었다. 이처럼 토지법이 새로운 정복의 결과로 바뀌기 시작했다. 우마위야조(656에서750)는 베드윈의 개인주의에서 벗어나 중앙 집권주의와 조직화된 관료주의 경향이 나타났다. 이 시기의 행정은 외적과의 전쟁수행, 국가안보, 세금징수 등으로나타나며, 전쟁, 재정 등에 관한 법이 발전하였다. 우마위야 초기에 종교와 통치의 개념이 분화되었지만, 우마위야 칼리파들은 종교적 충성심을 비잔틴 제국과의 전쟁수행에 이용하였다. 이 때는 통치권으로부터 사법권이 분리되었다. 사법관(까디)이 통치자에 의해 임명되고, 그가 모든 법률사무를 담당하였다. 이슬람 초기의 중재자와 다른 점은 까디는 칼리파가 통치자에게 준 권한 내에서 그에게 이양된 행정, 입법, 사법적 사무를 대행하는 정부의 관료라는 점이다. 까디는 법률사무의 전문화, 종교법에서 실정법으로의 전환을 가져왔다. 거의 100년 동안 우마위야조의 이슬람법의 보존과 발전은 이 기간의 까디에게 달려 있었다. 까디들은 쿠란과 순나에 의거한 개인적인 의견에 따라 판결했다. 여기서 법학파의 학설이 달라지게 된다. 이 시기에 비아랍인으로 이슬람에 개종한 미왈리들은 흔히 볼 수 있었던 로마법, 비잔틴법, 동로마 교회법, 탈무드법, 랍비의 법 등의 원리가 도입되면서 이슬람법에 실정법적인 원리를 제공했다.
이슬람력 132년 압바스조(750에서1258)가 등장하면서 종교법의 전문가를 중심으로 법정을 구성하고, 그들의 토론을 존중하는 정책을 추구하였다. 압바스조의 까디는 이슬람법을 통하여 법을 해석하고 적용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까디는 칼리파에 의해 임명되었고 까디의 판결을 집행하는 것은 정치권력에 있었다. 특히 형사판결의 경우 집행은 법집행부가 맡았기 때문에 이슬람법 테두리 밖에 있었다. 까디의 업무도 중앙 집권화하여 칼리파에 의해 임명된 최고 까디와 그에 의해 임명되는 지방 까디가 있었다. 칼리파는 완전한 법적권한을 소유하고 까디는 입법권이 없는 관료에 지나지 않았으며 오직 행정규제만을 적용하는 임무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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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낡은 전깃불에 비춰본 가족 사진
가난한 시절의 행복
나의 어린 시절은 누구의 생일이나 특별한 손님이 오시는 날, 혹은 명절이 아니면 고기 구경을 하기 어려울 만큼 어려웠다. 밥상 위에 하얀 쌀밥과 고기반찬이 오르는 날이면, 아끼고 또 아껴가며 밥을 먹곤 했다. 바로 그때의 이야기다. 아침과 오후 하루 두 번만 버스가 들어오던 마을에서 학교는 멀었다. 꼬불꼬불한 신작로를 따라 십리도 넘는 곳에 학교가 있엇다. 투박한 풍금 소리와 함께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감나무 키를 넘어 하늘로 날아 오르던 학교. 동생과 나는 매일 아침, 어머니가 주발에 준비해 두었다가 하나 둘 헤아려 주시는 차비를 타 가지고 등하교를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동생은 나보다 한 시간 먼저 집을 나서기 시작했다. "학교 다녀 올게요." "벌써 학교 가니?" 하며 어머니는 주발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 주셨다. "저 녀석, 차도 안타는데 차비는 뭣하러 줘요?" 그러나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동생은 귀가 시간도 늘 나보다 한시간 정도 늦었다. "넌 매일 친구들과 놀기만 하면 어떡하니. 집에 일찍와서 일도 도와야지." 그때마다 동생은 멋쩍은 듯 머리만 긁적거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느 체육대회 연습으로 저녁때가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가족들은 이미 밥상앞에 둘러 앉아 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냄새인가. 밥상 한가운데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돼지고기볶음이 놓여 있엇다. 오랜만에 돼지고기를 보니 내 입에선 금방 군침이 돌았다. "오늘이 무슨 날이야?" 나는 이렇게 말하며 얼른 젓가락을 들어 고기 한 점을 집었다. "무슨 날은, 네 동생이 사 왔다." 나는 집었던 고기를 슬며시 내려 놓았다. "얼마나 고기가 먹고 싶었으면 차비를 아껴서 사 왔겠니." 그제서야 나는 식구들이 아무도 숟가락을 들지 못하고 밥상 앞에 앉아 있던 이유를 깨달았다. 동생은 식구들과 함께 고기 먹는 행복한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 먼길을 혼자 걸어 다녔던 것이다.
권인택 님/서울시 강북구 수유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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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27 - 불합리하므로 나는 믿는다: 유스티누스, 테르툴리나누스, 락탄타우스(150--325년)
교회의 수호자 콘스탄티누스 대제, 그는 기독교를 국교화한 후, 이교의 전통이 뿌리깊은 로마를 떠나 330년 보스푸루스 해안에 새 서울 콘스탄티노플을 세웠다.
그때세계에서는 214년: 페르시아, 마니교 교조 마니 탄생 227년경: 로마 페르시아와 전쟁
중세기 처음에는 기독교는 박해를 받았고 이단으로 몰리고 있었다. 속죄, 구원, 부활, 영생을 가르치는 기독교의 정신이 철학적 이해나 협력을 얻을 수 없음은 물론이었다. 바울 사도가 예수의 부활을 증거했을 때 로마의 관리는 바울에게 "당신은 그 많은 학문과 지식때문에 미쳤다" 고 단정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기독교는 영과 자유와 도덕적인 신앙성을 강조하여 종교적 승리를 거두었고, 심지어는 기독교만이 이성적인 철학의 유일한 진리체계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거기에는 몇 사람의 기독교 사상가들의 학문적 역할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로마에서 166년경에 순교당한 유스티누스(Justnus) 같은 철학자는 기독교가 모든 시대가 안고 있는 철학적 문제에 해결을 줄 수 있으며, 기독교의 계시적 요소는 인류를 악마, 다신교, 부도덕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라고 가르쳤다. 신의 로고스는 플라톤, 아라스토텔레스, 아브라함, 엘리아 등에 의해 부분적으로 나타날 수 있었으나, 그리스도에서 비로소 완성되었다는 이론을 전개시켰다. 이 세계는 신의 피조물이며, 인간의 영혼은 육체와 달리, 이성, 불사, 자유의지의 본성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그를 통해서 고대철학과 인류의 과제를 철학문제로 수용하면서 그 해결의 가능성은 기독교에만 있다는 견해를 접하게 된다.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150--222) 는 그 단계를 넘어 기독교 사상의 탁월성을 주장했을 뿐 아나라, 기독교 신앙은 이성을 포함하고도 초월하는 신앙적 계시에 의하는 것이기 때문에, 때로는 초이성적이며 반이성적인 인식을 호소하기도 했다.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 는 그의 명제는 너무나 유명하다. 아테네와 예루살렘은 이질적인 세계이며, 아카데미와 교회는 다른 차원에 속한다고 보아 신앙의 우월성을 주장했다. 심지어는 어떤 평신도도 플라톤보다 우위에 있다는 신앙의 위대성을 강조했다. 여기서는 모든 철학을 배척하고 신앙으로 귀의해야 한다는 입장을 강요한 것이다. 신앙은 철학을 포함하며, 계시는 이성을 포괄한다는 기독교적 견해를 공인받고자 했던 것이다. 마침내 락탄티우스(Lactantius, 250-325)에 이르러서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인정을 받는다. 그는 아프리카 인으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가정교사가 되었을 정도였다. 국중에서 기독교의 승리가 확증된 셈이었다. 그는 불사는 최고의 선이며 유일한 희망이 된다고 믿고 있었다. 물론 그는 스토아 철학 등에 정통한 사상가였다. 그러면서 기독교의 신앙을 절대적인 구원의 진리로 이끌어올린 결과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기독교의 철학이 교리를 배경으로 활립되었고, 일반 철학은 주 에서 객의 위치로 밀려났는가 하면, 기독교의 교리가 철학적 중심과제로 수용되었다. 비로소 중세적인 문제와 체계가 정착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중세기를 이해함에 있어 한두 가지 일반적 과제를 제시 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 하나는 인간관이다. 고대에는 인간이 자연의 한 부분과 같이 생각되었고 영과 육의 구별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중세기에 와서는 인간의 영은 신에게 속하는 것이며 육체는 자연물질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육에의 길은 타락의 길이며 죄의 가능성을 포함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 결과로 금욕주의가 제창되었고 육체적 향락을 죄악시하기도 했다. 이는 후에 수도원과 수녀원이 생기는 원인이 되기도 했고, 신부들의 독신주의 사상도 수용되는 결과가 되었다. 그리고 이 인간관과 세계질서는 오랫동안 초창기 기독교 철학의 중요한 과제로 등단하게 된다.
또 하나의 과제는 기독교의 구원관이 신의 교육적 섭리와 함께 취급되었다는 점이다. 교부 이레나이오스(140-202) 가 처음 발설자로 되어있으나, 많은 사람들이 신의 인류 전체에 대한 구원은 교회를 통한 신앙적 교훈과 연관성이 있다고 보았다. 신은 구원을 위해 인간을 교육 계획대로 완성시켜가는 것이며, 세계사는 그 과정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교부들은 그 책임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철학자인 동시에 신앙적 교사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스콜라 철학 시대로 접어들면서는 그 이론적 주장이 약화되고 있으나, 초창기 기독교는 그 주장을 교회적인 과제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겨쳤기 때문에 학문세계에는 또 하나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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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곰'과 '팡이'의 어원을 아셔요?
'곰팡이'의 뜻을 모르시는 분은 안 계시겠지요. 이 '곰팡이'는 가끔 '곰팡 나다' 처럼 '곰팡'으로도 사용되기도 하고, 최근에는 '팡이 제로'라는 '곰팡이 제거제'가 나와서 '팡이'라고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팡이'라는 말은 그리 흔히 사용되는 단어는 아닙니다. '곰'과 동일하게 사용된 단어가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곰탕'입니다. 먹는 음식의 이름이 아니고요. 지금도 함경도 방언에서는 '곰팡이'를 '곰탕'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곰'이란 단어를 아십니까? '곰팡이'는 그 원래의 형태가 '곰'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곰'이란 단어는 늘 '곰 피다' '곰이 피다' 등으로 쓰이었습니다.
그러면 '팡이'는 무엇일까요? '곰탕'이란 단어도 '곰탕 피다'처럼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예를 든다면 '장마에 곰탕 피다'처럼 쓰이었던 것이지요. 이때의 '탕'은 또 무엇일까요? '곰'은 '곰팡이'란 뜻의 단어인데, '탕'은 그 어원을 알 수 없는 것이고, '팡이'는 '피다'의 어간 '피-'에 작은 것을 나타내는 접미사 '-앙이'가 붙은 것입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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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예방을 돕는 비타민 C는 감자에 들어있고 비타민 K는 간의 기능을 원할하게 하며, 비타민 T는 빈혈을 치료한다. 그러나 비타민 중에 위궤양 치료를 돕는 비타민 U를 아는 사람은 매우 적다.
서인도 제도에 있는 작은 공화국 아이티에서는 남창을 허용하고 있다. 그래서 AIDS환자와 보균자가 많다.
의사들은 암이란 인간의 세포가 제멋대로 바람난 상태라고 말한다. 이유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지만 수많은 과학자들과 의사들의 연구에 의하면 유전인자가 원인이라 한다. 단 하나의 세포에도 유전인자라고 하는 100,000이상의 정보가 있다. 즉 72세에 당뇨병에 걸리고, 79세에 암으로 사망한다는 등등의 정보가 들어 있다. 그러나 인간의 운명이 입력된 그 침(chip)을 바꾸거나 빼버림으로써 암으로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운명을 바꿀수 있다.
문둥병은 여자보다 남자가 걸릴 가능성이 2배나 높다.
파나마 운하를 만들때 처음 이 공사를 시작한 프랑스 정부는 20,000명이 죽고 260,000,000달러를 소모한 뒤에야 포기하고 미국에 넘겼다. 미국은 1904년 이 공사를 인수한 뒤 군의관 윌리엄 코로호드 고가스를 보내 황열병의 원인을 알아보게 했다. 1년안에 그는 그 병의 원인이 모기에 있음을 알아내어 황열병을 몰아내고 공사를 진행시켰다.
꿀 속에는 철, 구리, 망간, 규소, 염화칼륨, 나트륨, 인, 알미늄, 마그네슘 등이 가득 들어 있어 글자 그대로 영양덩어리이다. 또 꿀은 아무리 오래 두어도 썩지 않는다. 이집트 왕 바로의 무덤에서 나온 5000년전의 꿀도 아직 제 맛 그대로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어떤 포도들은 푸른빛 나는 검은색이고 대부분은 진한 붉은색인데 어떻게 흰 포도주를 만들어낼까? 답은 간단하다. 검거나 붉은 어떤 포도라도 손가락으로 으깨 보면 희거나 노란빛의 즙이 튀어나온다. 즉 껍질만 아니라면 어떤 포도에서도 흰 포도주를 만들 수 있다. 붉은 포도주의 진하고 선명한 색은 포도즙이 아니라 발효시킨 껍질에서 나온것이다.
포도주는 프랑스인들이, 양주와 맥주는 독일인들이, 위스키는 영국인들이 가장 많이 마신다. 소련인들은 보드카를, 한국인들은 소주를 가장 많이 마신다. 미국에는 약 5,000,000명의 알콜 중독자와 4,000,000명의 술주정뱅이가 있다.
신약에서는 신도들을 세상의 소금이라 했고, 아라비아인들은 상대와 함께 빵과 소금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싸움이 끝나고 우정이 시작됨을 나타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금과 소금의 가치가 거의 비슷했고, 로마시대에는 군인들의 급료를 소금으로 지불했다. 즉, 소금이란 말은 라틴어 급료(salary)를 의미하는 말 salarium에서 나온 것이다. 소금이 음식에 사용되는 경우는 전체 사용량의 5%일뿐이며, 유리,비누,가죽,종이,페인트,고무,플라스틱 등을 만드는데 95%를 쓰고 심지어 도로 포장을 할때도 소금은 꼭 필요하다. 성인에게 필요한 하루의 소금 섭취량은 3,300밀리그램으로 약 1티스푼 정도이나, 실제로는 2티스푼 정도를 먹는다. 소금을 전혀 먹지 않는다면 여러가지 성인병에 걸리기 쉽다. 따라서 무염(sodium free)이나 저염(low sodium)이 환영할 만한 것이긴 해도 소금 자체가 인간의 적은 아닌 것이다. 중국에서는 자살하기 위해 소금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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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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