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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7 호
4339.10.05 (08.14)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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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 - 風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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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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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건축물에서 가장 견실한 돌은 토대의 맨 밑에 놓인돌. / 칼릴 지브란 (시리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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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과학/예술/교육 |
- 조화유의 미국영어 - 일반인을 위한 경제생활 영어
18. 어느 정도 가격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상점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알아두면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말 한 가지를 소개한다. 예를 들어 가구점에 미국 손님이 들어왔다고 하자. 점원이 May I help you?(무엇을 사시려고 합니까?)라고 물으니까 손님은 I need a dinette set.(식탁과 의자 세트를 사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 점원은 흔히 '어느 정도가격의 것을 원하십니까'라고 묻기 마련인데 What price range do you have in mind?라고 하면 적당한 질문이 된다. price range는 "가격 범위"란 뜻이니까 위의 말을 글자 그대로 직역하면 "어떤 가격 범위를 염두에 두고 계십니까?"란 뜻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또 What's your general price range? 라고도 하는데 "대충 가격 범위가 어떻습니까?" 즉 "대충 얼마 정도의 가격을 생각하고 계십니까"라는 말이다. 이와 같이 점원이 물었을 때 손님이 예를 들어 Around three hundred dollars. 또는 Three Hundred dollars or so.라고 했다면 "300달러 정도"라는 말이 된다. 점원이 너무 비싼 물건을 보여줄 때 This is out of my price range.라고 하면 "이것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가격 범위를 벗어난 것입니다." 즉 "나한테는 너무 비쌉니다"란 말을 점잖게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가구도 그렇지만 세탁기나 냉장고같이 배달을 해야 하는 물건을 살 때는 반드시 값을 치르기 전에 Does the price include delivery and installation charges?라고 물어보는 것이 좋다. 이것은 "물건값에 배달료와 설치비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즉 "(물건을 사면)배달해서 제자리에 놓아줍니까?"라는 말이다.
At a furniture store- A: May I help you? B: Yes. I need a dinette set. A: How do you like this on? It's only $699. It's on sale. B: This is out of my price range. A: What price range do you have in mind? B: Around four hundred dollars. A: All right, ma'am. How about this one, then? It's sale price is only $399. B: Looks all right. Does the price include delivery and installation charges? A: Yes, it does. 가구점에서- A: 도와드릴까요?(어서 오십시오.) B: 네, 식탁 세트를 하나 살까 해서요. A: 이것은 어떻습니까? 699달러밖에 안 합니다. 지금 세일 중이거든요. B: 나한테는 좀 비쌉니다. A: 어느 정도의 가격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B: 400달러 정도요. A: 알겠습니다, 부인. 그럼 이것은 어떻습니까? 세일 가격인데 399달러밖에 안됩니다. B: 괜찮아 보이는군요. 그 가격에 배달료와 설치비도 포함돼 있나요? A: 네, 그렇습니다.
* Laughing is the best rest. - 웃음은 가장 좋은 휴식이다
Einstein once could nor read the menu because he forgot his glasses. So he asked the waiter to read it for him. The waiter said, "I can't read it, either. I guess we're both ignorant." 아인슈타인이 안경을 잊고 안 가져 와서 웨이터에게 메뉴를 읽어 달라고 부탁했다. 웨이터의 말인 즉 "나도 못 읽어요. 우리 둘은 모두 무식자인가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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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지식/생활/건강/의학 |
- 음식 토정비결 - 전영순,하정화
<본초류>
16.도라지 - 심심산천에 흐드러지게 핀 꽃과 살진 뿌리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심심산천에 백도라지 /한두뿌리만 캐어도 /대광우리에 철철 넘누나 /에헤요 에헤요 에헤야 /어여라 나다 지화자 좋다 /네가 내 간장 스리살살 다 녹인다"
아리랑과 함께 우리의 전래 민요 가운데 가장 친근다고 할 수 있는 도라지 타령이다. 이 노래는 전국 각 지역에서 조금씩 다르게 전승되어 왔다. 그리고 도라지는 심심산천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만큼 그 명칭도 다양하다. '도랒'이라고 줄여 부르기도 하며, 도래, 돌가지라고도 한다. 또한 한자어로는 길경, 백약, 경초, 고경이라고 부른다. 도라지는 온대지방의 평지 및 해발 1,000m 정도에 이르는 산지의 양지 바른 곳 서 자란다. 줄기의 높이는 40∼100cm로 곧추선다. 굵게 살진 뿌리를 식용한다. 그 탐스러운 뿌리를 일컬어 "한 두 뿌리만 캐어도 대광주리에 철철 넘다"고 했다. 도라지의 잎은 긴 타원형이며 끝이 뾰족하다. 8∼9월이면 다섯쪽으로 갈라진 통꽃이 피는데, 보통은 청자주색을 띠며, 흰색의 꽃이 피는 것도 있다. 이를 백도라지라고 부르며, 꽃이 겹으로 피는 것을 겹도라지라고 한다. 한적한 산길에 피어있는 도라지꽃은 웬지 서글픈 느낌을 자아낸다. 우리 선조들은 대대로 도라지나물을 무쳐먹었고, 마침내 도라지는 산나물의 대명사처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도라지를 노래로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힘들 때나 기쁠 때 도라지 타령을 흥얼거리며 마음을 달래기도 하고, 기쁨을 표현하기도 했던 것이다. 도라지 뿌리 중에서 큰 것은 마치 인삼을 닮은 것도 있다. 그래서 일부 상인들은 이것을 인삼으로 속여서 파는 일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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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분
도라지엔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 칼슘, 인, 철분과 각종 비타민이 골고루 함유되어 있다. 도라지 뿌리에는 당질, 칼슘, 철분이 많고 섬유질이 주요성분을 이루고 있으며 인삼의 성분인 사포닌이 들어있다. 약성으로 보아서는 가을에서 이른봄까지가 좋으나 이 때는 쓴맛이강하다. 또한 도라지의 뿌리에는 인삼의 주요성분 가운데 하나인 사포닌이 함유되어 있어 약재로 쓰이기도 한다.
쓰임새 도라지는 씹는 맛이 특별한데 특히 2,3년생의 어린 뿌리는 아주 연하다. 봄에서 가을에 걸쳐 캐는데, 날것을 그대로 먹기도 하고 말려서 갈무리하였다가 수시로 먹기도 한다. 흔히들 도라지는 뿌리만 먹는 줄로 알고 있다. 하지만 잎과 줄기도 살짝 데쳐서 나물로 먹거나 기름에 튀겨서 먹으면 훌륭한 반찬이 된다. 도라지의 어린 싹이나 잎은 데쳐서 물에 헹구어 쓴 맛을 뺀 다음 나물로 먹으며, 줄기의 연한 부분도 먹는다. 도라지는 폐기를 맑게 하고 가슴이 답답한 것을 풀어주며, 인후에도 이롭다. 또 기혈을 보강해주고 한열을 없애주며, 뱃속의 냉기를 덜어주는 효능도 있다. 심장쇠약, 설사, 주독 등에도 효험이 있는 식품이다. {명의별록}에는 '도라지 뿌리는 오장과 혈기를 보하며, 한열과 풍비를 물리친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방에서는 도라지를 진해, 거담약으로 많이 쓰고 있는데, 실제로 도라지는 천식과 가래를 삭혀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과학적인 성분 분석 결과 도라지에는 사포닌이 들어 있어 거담 효과가 있음이 입증되었고, 기타 항염증, 해열, 진통 등의 약리 작용도 한다고 밝혀져 있다. 폐질환 환자나 폐의 기능이 약한 사람, 천식과 가래가 있는 사람, 또는 담배를 많이 피우는 사람은 도라지 37.5g과 감초 75g을 물 3되에 넣고 삶아, 이것을 차 마시듯 수시로 마시면 효과적이다. 또 인후통이 있거나 목구멍이 아플 때에는 도라지와 감초를 각각 10g씩 물에 달여 마시면 한결 고통을 덜 수 있다. 도라지와 갈근(칡뿌리)을 각각 37.5g씩 삶아서 여기에 꿀을 타서 마시면 주독과 주취를 쉽게 풀 수 있다. 감기로 코가 막혔을 때는 도라지 뿌리를 썰어 물에 넣고 달인 다음 차처럼 마시면 시원스레 낫는다. 흔히 도라지는 겨울에는 구경하기 힘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도라지의 뿌리나 잎줄기를 쪄서 말려 두었다가 겨울철에 자주 먹으면 좋다.
이것이 토종
우리나라 도라지는 표면이 매끈하고 대체로 흰빛을 띤다. 마른 도라지는 부피는 작으나 속이 알차서 무게가 있다. 또한 도라지 고유의 향이 많이 난다. 수입산 도라지는 표면이 거칠며 색깔도 맑지 못하다. 수입산 도라지는 대체로 마른 형태로 들여오기 때문에 몸은 크지만 속이 단단하지 못하여 비교적 무게가 가볍다. 그리고 향기는 적다. 그러므로 가급적이면 갓 채취된 싱싱한 것을 구입하여 쓰는 것이 좋다. 우리나라에서 도라지를 많이 재배하는 곳으로는 경남 창원을 들 수 있다. 도라지는 이 고장의 특산물이다. 이 지역 주민들은 도라지를 다양한 요리의 재료로 활용한다. 이를테면 흔히 해먹는 도라지 생채 뿐만 아니라 고기국, 생선국에 무처럼 썰어 넣어서 먹기도 하고 잘게 찢어서 초고추장에 버무려 회처럼 먹기도 한다. 특히 이 지방의 특별요리로 꼽을 수 있는 '도라지 장아찌'는 이 지방이 아니면 맛보기 어려운 별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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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세계사/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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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김부식과 정지상: 설화와 진실 - 최연식(서울대 강사)
사상을 담을 것인가, 감수성을 담을 것인가
국어 교과서에는 실리지 못했지만 김부식도 많은 시를 지었고 상당 수가 <동문선>에 실려 있다. 그 중 한 편을 적어 보자.
요 임금 뜰은 석자 높이였지만 천추에 덕을 남겼고 진시황의 성은 만리나 되었지만, 2대만에 나라를 잃었네. 옛날의 역사는 오늘의 거울이 될 만한데 수나라 양제는 아무 생각 없이 토목공사로 백성의 힘 말렸구나. (비단궁전에 대하여)
수 양제의 사치를 비판하는 내용의 이 시는 교훈적이고 계몽적이긴 하지만 정지상의 시처럼 심금을 울리는 멋있는 시라고하기는 힘들다. 남포로 임을 보내는 애절한 감정 대신 ‘정치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당위의 명제만이 있을 뿐이다. 이로 보면 김부식은 정말로 문학적 감수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딱딱한 학자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시들이 나타나게 된 문화.사상적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서 성급하게 내린 결론은 역사의 본 모습을 흐리게 할 뿐이다. 문종 때(1046-1083) 이후 고려는 송나라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매우 적극적인 노력을 하였다. 이러한 문화교류의 결과 고려 사회에는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게 되었다. 특히 지식인들의 학문과 문장에서 그러한 변화가 두드러졌다. 고려 전기에는 통일신라의 경향을 계승하여 당나라의 시가 유행하였는데, 특히 비애적인 정서를 노래하는 만당풍이 아름다운 시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문종 때 이후에는 송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시풍이 등장하였다. 송나라를 주도해 간 사대부들은 황제와 귀족들의 비서에 가깝던 남북조 시대 이래의 문인형 지식인들과는 달리 사회를 올바르게 운영해 가야 할 책임의식을 지닌 새로운 유형의 지식인들이었다. 따라서 문장을 짓는 데 있어서도 개인적 정서를 노래하기보다 사회적 책임의식을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자 하였다. 이러한 시풍의 영향을 받은 고려 중기의 시는 지식인 관료들의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을 강조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정지상과 김부식의 시는 각기 이러한 만당풍과 송나라풍의 시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송나라 풍의 시는 사상을 담고자 하다 보니 자연히 음악성과 감수성에는 비교적 관심을 덜 쓰게 되었고, 당연히 시적 아름다움에서는 만당풍에 견주기 힘들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시는 당나라의 것이 제일로 꼽히고 많은 사람들에 의해 애송되지만, 송나라의 시는 그다지 사랑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책임의식을 전면에 내세운 새로운 지식인들의 등장은 역사적 의미가 적지 않은 것으로, 이는 동아시아 사회의 발전 특히 정치. 사상 분야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개인적 감수성과 공존해야 하는 사회적 감수성을 내세운 이들의 문학관은 ‘문학은 도, 즉 사상을 담아서 사회의 교화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문이재도론’으로 불리는데 이러한 입장은 잊혀졌던 문학의 사회성을 재발견함으로써 문학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진지한 반성을 추구하게 하였다. 따라서 송나라 풍의 시가 고려 사회에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시풍이 기반하고 있는 문학관의 수용을 뜻한다. 이는 또한 개인적 감수성에 기초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정치의 주체인 지식인으로서 사회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일반 민중들을 올바른 길로 교화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지닌 문인들의 등장을 의미한다. 실제로 현재 남아 있는 자료를 보면 김부식과 가까웠던 사람들에게서 이러한 풍의 시들이 발견되고 있는데 여기에는 물론 김부식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거센 비가 바닷바람 따라 휘몰아치니 뇌성 수레 구름 사닥다리 어찌 그리 웅장한고. 개천 바닥은 물이 넘쳐 수레도 말도 못 다니고 마을은 폐허인 듯 우물과 부엌이 다 비었네. ... 만 백성들 모두 농사의 희망을 잃었으니 태평한 세상 올 섭리의 공 어서 베풀어 주소서. (김돈시, ‘거센비’)
옛 놀던 곳에 다시 찾아오니 바람과 달은 지난 봄과 같은데 다만 완산 아래에 배부른 이 없음을 탄식하네. (허홍재, ‘완산 가는 길에’)
김돈시는 김부식의 아들이며, 허홍재는 김부식이 주관하는 과거에 합격한 후 문하생으로서 김부식과 가깝게 지냈고 <삼국사기>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이들의 시에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잘 드러나 있는데, 이러한 내용은 이 시기의 시에서는 그리 흔한 것이 아니었다. 이처럼 12세기에는 사회적 의미를 강조하는 문학관이 고려 사회에 주요한 흐름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는데 여기에 큰 역할을 담당한 사람이 바로 김부식이었다. 그런데 새로운 경향의 지식인들의 출현은 자연히 기존의 수식 위주의 문인들과 갈등을 빚게 되었다. 최충의 손자인 최약은 문구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나무에 조각을 하는 기술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면서 그러한 문학은 진정한 문학이 아니라고 하였다가 기존의 문인들로부터 문장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 하는 질투일 뿐이라는 반박을 받았다. 한편 위의 허홍재의 시에 대하여도 일부 문인들은 시의 기품이 부족하다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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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사회/문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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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랍문화의 이해 - 공일주
1. 신의 인간에 대한 관계
개경장
쿠란의 진수로 표현되는 개경장은 무슬림이 하루 기도생활 중에서 최소한 17회 이상 암송하는 장이다. 예배시 이 장을 빠뜨리면 예배는 무효가 된다. 이 개경장이 쿠란의 첫 장이 된 것은 무함마드가 생존 중에 이 장을 가장 중요시했으며, 무함마드의 메카 기도 중에 이 장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제1장 1. 자비롭고 자애로운 알라의 이름으로 2. 우주의 주인이신 알라께 찬미한다. 3. 자비롭고 자애로우며 4. 심판의 날을 주관하시는 5. 당신에게만 우리가 경비하며 도움을 구하나니 6. 저희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고 7. 당신께서 은총을 내려주신 사람들과 진노를 받은 사람 그리고 길 잃은 사람들의 길
진노를 받은 사람들이나 길 잃은 사람들이 아닌 앞 4절에서 ‘우리가 경배하며’에서 경배한다(나으부드)라는 말은 노예 또는 종(압드)이라는 낱말과 어근이 같다. 무슬림은 알라의 종이나 노예가 됨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무슬림이 알라에게 속박된 것과는 달리 기독교의 주기도문에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 일컫는다. 기독교에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아버지와 그의 자녀와의 관계로 규정한다. 예수는 그가 하나님 아버지와 누렸던 관계를 그의 제자들에게도 똑같이 갖도록 초대한 것이다. 5절에 또 ‘도움을 구하나니’의 어근에서는 무슬림이 알라에게서 구하는 모든 것, 즉 도움, 원조, 구원, 후원등의 사전적 의미를 가진다. 주기도에서도 현재와 가까운 미래에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달라고 기도한다. 개경장 2절에 ‘알라께 찬미’와 5절에 ‘우리가 경배하며’는 무슬림의 찬양과 경배의 표현이다. 주기도에서는 그의 이름으로 계시해 준 모든 것에 찬양했으므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왕으로 오신 그의 권능을 받아 들이고 그의 뜻에 순종한다. 이처럼 경배하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으나 알라와 하나님을 인시하는 점에서 다르기 때문에 자연히 경배를 이해하는 데에도 영향을 끼친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맹목적이거나 수동적인 복종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기도에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시... 나라와 권세가...' 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그의 주권을 지적한 반면에, 개경장에는 2절에 '우주의 주인' 다시 말해서, 온 세상의 주인이며 지구의 모든 존재의 주인이 된다. 그러나 성경만이 갖는 특징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재림 사상이다.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저가 임하시되 땅을 재판하려 오시리라...(시편 96:10^36^13)." 성경은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라는 사실을 단순히 기억하게 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어떻게 통치하실 것인가를 말해 준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그리고 공동체(교회)를 통해 왕의 통치가 실현되어 가고 있음을 말해 준다.
개경장의 6절에서 '올바른 길(곧은 길)로 인도해 주소서!'는 시편기자가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서 곧게 하소서!"(시편 5:8)를 떠올리게 한다. 무슬림에게 올바른 길은 이슬람의 길, 즉 쿠란과 예언자 무함마드 삶에 계시된 삶의 방식이 된다. 그들의 올바른 길은 이슬람 공동체의 일원으로 알라의 축복을 경험한 사람들의 길이다. 7절에 '은총을 내려주신 사람들과 진노를 받은 사람 그리고 길 잃은 사람들의 길'은 무엇인가? '신의 노여움을 받은 사람'은 유대교 인이고, '길 잃은 자'는 기독교인인가? 개경장이 공중기도에 언제 도입되었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무함마드에게 계시된 시기는 그가 메디나로 이주(622년)하기 전이었다. 그래서 무함마드 초기에는 이런 구절이 절대로 유대인과 기독교인을 가리키지 않았다. 그 때까지는 이들로부터 반대나 적대감이 없었던 것이다. 이슬람에서 인간은 무지하고 약하므로 진리를 배워야 한다. 더구나 인간은 약하므로 이슬람법을 따르도록 가르치고 권고 받고 경고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인에게 '곧은 길로 인도함'은 늘 우리에게 유혹과 시험이 있으므로 우리에게 악의 존재를 일깨워 주기 위해 "시험에 들지 않게 다만 우리를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고 기도한다. 주기도에서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고백을 하지만, 개경장에는 죄에 대한 고백이 분명히 없다. 개경장 4절에는 심판의 날의 주인인 알라의 권한을 기억하고 자비와 동정(1절, 3절)을 깨닫게 한다. 그래서 심판의 날에 그들의 죄를 보고할 때 알라가 자비를 베풀어 주리라 기대한다. 그러나 확신은 없다. 무슬림들은 기도가 끝날 때 왼쪽과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인사하고 나란히 서서 기도하는 것이 수평적 관계를 가르쳐 준다고 말한다. 그러나 쿠란이 자비와 동정에 관해 자주 말하지만 우리에게 잘못한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생각을 무슬림들은 쉽게 떠올리지 못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는 우리가 무슬림을 이웃으로 사랑하지 못한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쿠란에서 무슬림의 적은 유대인이었다. 무슬림이 애정을 갖는 자는 기독교인이었다. 그것은 기독교인이 교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수라5:82). 무함마드는 당시 기독교인에서 감동을 받은 것 같다. 12세기 이후에 가서야 이슬람은 책에서 기독교를 공공연히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쿠란에서는 기독교인에 대해 긍정적이고 동정적인 쿠란구절, 기독교인에 대한 논쟁과 비난을 일삼은 구절, 그리고 기독교인에 대해 적대적인 구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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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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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빨갛게 벗겨진 할머니의 머리
일 년, 이 년, 삼 년……. 제가 외갓집에서 생활한 지도 벌써 십이 년이 다 되어갑니다. 제가 아마 다섯 살 때였을 겁니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습니다. 다섯 살의 어린 꼬마에겐 너무도 엄청난 겨울이었다고 기억됩니다.
"엄마! 내 아이들, 내 아이들을……."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돌아가셨습니다. 할머니는 그때 아무 대답도 못하셨지요, 그러면서도 할머니는 "딸자식 못 살린 것도 원통한데 내가 너희들 셋을 못 키우겠니"하시며 이를 악무셨습니다. 그 각오로 지금까지 저희 삼남매를 힘들게 키우셨죠. 해질녘에 들어오셔서 밤새 팔다리가 아파 신음하시면서도 어김없이 새벽 네시가 되면 일어나서 빨래하고 밥을 지으시며 저희들의 도시락까지 싸 주셨습니다. 어떻게 그 지긋지긋한 일을 팔 년씩이나 하실 수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육학년 때까지도 할머니께서 무슨일을 하시는지 잘 몰랐습니다. 어느 날, t소풍에서 돌아오는 길에 멀리서 할머니를 보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최고라고 믿엇던 할머니가 고무통에 벽돌을 가득 채워 머리에 이고 삼층 계단을 기어가듯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순간 세상이 깜깜하고 쉴새없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하지만 어린 마음인지라 창피하다는 생각에 저는 그만 서둘러 그 자리를 피해 버렸습니다. 그날 밤 잠이 든 할머니 곁으로 다가가서 마음 속으로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런데 가만 보니 할머니의 정수리 부분이 빨갛게 벗겨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할머니의 머리를 빨갛게 벗겨지게 한 것은 벽돌이 아니라 우리 삼남매였습니다. 남들은 자식 한명도 키우기 힘들어서 키운다, 못키운다 쩔쩔매는데 우리 할머니는 자식도아닌 외손주를 셋씩이나 키우시며 부모님보다 더 잘해 주시니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소중한 분이 틀림없습니다.
김은정 님/전남 여수시 연등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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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철학/구비 |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17. 달라지는 세계와 철학자들: -헬레니즘 시대(기원전334-30년)
그때 세계에서는 BC 331년: 페르시아 제국 멸망 BC 31년: 악티움 해진, 옥타비아누스 승리
일찍부터 세계정복과 지배의 꿈을 안고 있던 알렉산더는 드디어 그 포부를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지중해 연안의 유럽과 아시아는 물론, 아프리카까지 점령해 세계를 하나의 제국으로 만들고, 아프리카 동북부에 자기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 수도에서 세계를 지배하려는 뜻을 세웠다. 그리고 모든 야만적인 문명을 몰아내고 그리스 사상과 예술과 철학을 모든 점령지에 보급시켜 하나의 관대한 정신세계를 형성하기를 원했다. 그는 뜻대로 페프시아를 점령하고 군대를 인도에까지 진출시켰다(327년 BC). 인도에 갔을 때였다. 모든 부하장병들이 전쟁에 지쳐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을 보고, 뜻을 바꾸어 회군하기로 했다. 그는 바다 끝까지 정복하고 싶었으나, 그 뜻을 포기하고 돌아가 점령한 모든 지역을 통치하는 일에 착수하려고 생각을 바꾸었다. 회군하던 도중에 알렉산더는 역병을 얻고 치료를 받았으나 객지에서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등지게 되었다. 그의 꿈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었고, 장병들은 흩어져 귀가하는가 하면, 점령당했던 국가들은 앞다투어 점령 이전의 국권 회복에 나섰다. 아테네도 그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를 떠나 마케도니아로 돌아와야 했던 것이다. 다음해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전쟁의 소용돌이를 벗어난 세계는 모든 질서가 혼란과 파괴를 모면할 길이 없었다. 철학을 중심삼는 학문에 세계에도 과거에 없었던 변화가 일어났다. 그 때까지는 그리스의 아테네가 세계적인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였으나, 이제는 세계 각지에서 제각기의 학문이 다시 출발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역시 그리스적이었으며 아테네의 철학이 영향을 줄 수 밖에 없었다. 아테네가 유일한 철학의 본고장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아테네의 철학이 세계적으로 보급, 보편화되었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따라서 철학의 체계성이 단편적인 내용으로 바뀌며, 이론적인 학설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윤리성이 강한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진리가 무엇인가 함보다는 어떻게 지혜롭게 사는가가 문제였고, 모든 것에 앞서는 것은 처세술로 환원되는 경향이 되었다. 학문은 높은 교양으로 만족하는 풍조로 변해버렸다.
이렇게 되면 과거와 같은 위대한 철학자가 냐타나는 것이 아니라, 몇몇 사상가들이 모여 한 학파를 형성하는 것이 자연적인 추세가 된다. 이런 여건 밑에 태어난 몇 가지 철학사조 가운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지속된 하나는 스토아 철학의 계통이었다. 특별히 주목할 개인 철학자는 없었으나, 수 많은 철학자들이 대중적 호응을 받으면서 BC 300년경부터 로마 말기까지 계승되는 철학유파의 하나가 되었다. 초기, 중기, 말기에 걸친 시대적 특성을 갖고 있으나, 그들의 주장은 통일성을 갖고 있다. 처음 창시자는 키티온(Kition)의 제논(Zenon, 366--264?BC)이라고 한다. 아테네서 가르친 소아시아의 학자였다. 스토아(Stoa)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벽화로 장식된 전당이라는 뜻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강의를 했기 때문이다. 스토아 철학의 전통은 소크라테스의 극기와 자족을 따르고 거기에 키니코스 학파의 사상을 가미한 것으로 보아 좋을 것이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학파가 아닌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을 따른 윤리학파를 택한 편이다. 제논은 자신이 세운 학교의 초대 책임자였으나 고령에 자살한 것으로 되어 있다. 2대와 3대의 책임자를 거친 뒤 바빌로니아의 이오게네스에 이르러서는 그 학교의 위치를 로마로 옮긴 것으로 되어 있다. BC 155년경의 일이다. 이것은 철학의 중심지가 아테네에서 로마로 옮아갔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스의 사회적 위세가 아테네와 더불어 약화된 반면, 새로 등장한 로마가 이미 정치에 있어서는 세계적인 중심지가 되었고, 학문도 정치적 배후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로마로 옮아가는 길을 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유럽의 학문적 위치가 상당히 미국으로 건너간 것과도 통하며, 일본의 도쿄가 아시아의 중심지로 전환한 것도 비슷한 사정일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로마는 아테네를 능가할 정신적 유산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도 이 시대의 철학을 헬레니즘과 로마의 철학으로 부르고 있다. 그리스의 문화가 지배한 세계를 헬레니즘 사회라고 보며, 로마는 그 연장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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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무지개'는 '물'로 된 '문'이라는 뜻
'무지개'는 어떻게 해서 생기게 된 단어이며, 또 무슨 뜻일까요? '무지개'는 원래 '물지게'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지읒' 앞에서 '리을'이 탈락하므로 '무지게'로 된 단어입니다. 원래는 '무지게'가 아니고 '므지게'였지요. 왜 '무지개'가 아니고 '무지게'이냐고요? 비어두음절에서 '에'와 '애'가 중화가 되어 현대에는 '개'가 되었습니다만, 원래는 '에'였습니다.
'물지게'는 '물+지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물'은 '물 수'의 '물'입니다. 비가 온 뒤에 '무지개'가 생기지 않아요? 그리고 '지게'는 물건을 나르는 '지게'가 아니고, '문'이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지금도 한 집안의 주인을 '호주'라고 하는데, 그때의 '호'를 '집 호'라고도 하지만, 옛말에서는 '지게 호'였지요. '문짝'이라는 의미입니다. 지금은 문짝이 직사각형으로 되어 있지만, 옛날의 '지게'는 그 윗부분이 무지개의 윗부분처럼 되어 있었지요. 곡선으로 되어 있었지요. 그래서 '물'로 된 '문'이라는 뜻을 가진 것이 '무지개'입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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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울때 술을 마시면 동상에 걸릴지도 모른다. 술은 체온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내리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에서 가장 강한 뼈는 넓적다리뼈(hollow)이다. 이 뼈는 강철과 같은 정도의 압력을 견뎌낼 수 있다.
현대인의 시체는 좀처럼 잘 썩지 않는다 현대인들은 방부제가 든 음식물을 많이 먹기 때문이다
손톱,발톱의 성장에서 뿌리 부분이 완전히 손톱끝까지 성장하는 데는 6개월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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