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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3 호
2006.10.01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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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 - 風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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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남의 글에 각주다는 게 인문학자냐 |
‘용재총화’ ‘농암잡지’ 등 잡설서 길어올린 세설 81편 논문쓰기의 괴로움 등 삶의 단면 고전의 바다서 건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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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귀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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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글에 빗대어 세상을 말하다 강명관 지음. 도서출판 길 펴냄. 1만30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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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뒷골목 풍경>(푸른역사)에서 개똥이, 소똥이를 불러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역사를 들려주던 ‘옛글 읽어주는 남자’ 강명관 교수가 3년만에 ‘잡문’을 묶어냈다. 고전을 씨앗 삼은 ‘세설’ 81편에다 인문학의 위기와 대입 제도의 폐해, 편리에 젖은 도시적 삶의 단면을 뭉툭 잘라 담았다. <옛글에 빗대어 세상을 말하다>는 고전의 바다에서 건져올린 짧은 단상 모음이지만 긴 여운을 주는 책이다.
세상 이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매 한가지, 소소한 일상과 짝지어진 옛글은 고답과 거리가 멀다. 차라리 통통 튄다. 한문학을 경로로 문학과 역사와 사상사를 가로지르며 소통해온 이 인문학자(한문학자로 가두지 말길)의 대중적 글쓰기가 고전의 문턱을 낮춘 덕이다. <조선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2001)와 같은 전작들에서 보이듯 이 책에서도 양반문화와 유교윤리에 비판적인 시각은 여전하다. 성리학 책을 몽땅 외운 조선 학자한테서는 이념에 지배된 지식인의 전형을 보고, 문화유산 답사로 찾은 강릉 선교장에서는 본채에서 호령했을 주인마님보다 행랑채의 노비를 떠올리는 데서 고전의 반성적 ‘독해’를 엿볼 수 있다. 그의 눈으로 보면 열녀를 찬양하는 <삼강행실도>는 사람을 죽이는 책이며 윤리의 탈을 쓴 <소학>도 인간을 옭아매는 책이다.
저자는 인문학 중에서도 변방인 영역에서 ‘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며 글을 연다. (‘옛글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란 글에서 ‘인간 억압’의 반대편에 서기 위해서라고 고백한다.) ‘민족문화의 보존’ 따위의 거창한 것에는 별 관심 없다는 그는 ‘거룩한’ 논문쓰기가 괴롭기 짝이 없다. 자연스레 ‘잡문 예찬론’으로 이어진다. “논문의 형식과 잡문의 형식은 다만 그릇일 뿐이다. … 그러니 나에게 잡문은 논문과 같다.” 문체와 격식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퇴짜 맞은 논문의 기억이 묻어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에헴’하는 문집보다 <용재총화> <농암잡지> <학강산필> <패림> 등 형식도 장르도 없는 잡설에서 깊고도 생생한 사색을 퍼 날라온 그는 남의 이야기에 각주를 달아야 하는 삶이 인문학자의 삶이냐고 되묻는다. 행간에서 인문학의 위기를 자초한 학계의 풍토가 일면 읽힌다. 교수 아비도 못푸는 문제가 수두룩한 아들의 수능 언어 영역을 풀어보고는 “과거의 격식에 맞게 지은 글은 으뜸으로 추켜세우고, 격식에 벗어난 글은 물리쳐 버리는” 정약용의 한탄에 빗대본다. 교육문제 뿐만 아니라 부동산문제도 예나 지금이나 골칫덩이였던지 연암 박지원은 소수의 부자가 토지를 광점하는 세상을 탄식하며 토지 소유의 상한선을 둘 것을 제안하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저자는 “연암의 대책이 실천되지 않은 이유와 오늘날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실패하는 이유가 다를 것이 없다”고 씁쓸해 한다.
이처럼 요지경 세태에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지만 속도에 지친 긴장을 풀어주며 목소리를 낮추기도 한다. <허백당집>에 나온 게으름 귀신의 훈수는 귀차니스트들이 반길 말이다. “세상 사람의 부지런함은 화를 불러오는 근본이요, 그대의 게으름은 복을 받는 근원이야.” 부지런함의 근원은 돈과 권력을 좇는 욕망의 조정이라는 저자의 해몽이 흐뭇하다. 또 가을 북한산에 오른 조선후기 문장가 이옥의 명문은 컴퓨터에서 눈을 떼고 먼 풍경을 바라보게 한다. “저녁의 산색은 단풍잎이 모두 술에 취해 아양을 떠는 것 같고, 아침의 산색은 마치 졸린 것처럼 비취색이 배어든다. 저녁의 물은 말이 내달리듯 빨리 흘러서 모래와 돌이 구르고, 아침의 물은 기가 있어 바위와 계곡이 비에 젖은 듯 촉촉하다.”
이밖에 조선시대의 일상을 보여주는 자잘한 에피소드가 읽는맛을 더한다. 용돈이 궁해서 과거 합격장을 팔아먹은 고종 이야기나 유배간 형 정약전에게 닷새에 한마리씩 개고기를 먹으라는 동생의 조언, 내 몸이 없어져야 비로소 끝이 날 거라는 이규보의 치통앓이, 자칭 냉면주의자인 저자가 들춰낸 냉면의 기록들을 훑다보면, 고전을 ‘마스터한’ 듯한 착각이 들지도.
권귀순 기자 gskwon@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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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거짓말을 하기는 쉽다. 그러나 단 한번만 거짓말을하기는 어렵다. / [텍사스 뉴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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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과학/예술/교육 |
- 조화유의 미국영어 - 일반인을 위한 경제생활 영어
14. What do I owe you?
주유소를 경영하는 어느 교포가 미국인의 자동차를 고쳐 주었더니 그 미국인이 "와 루 아이 오우 유?"라고 물었다. 교포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고 멍청히 서있으니까 이번엔 미국인이 How much?라고 물었다. 그제서야 이 교포는 자동차 수리비가 얼마냐고 묻는 말임을 알아들었다면서 처음에 미국인이 한 말 "와 루 아이 오우 유?"가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저자에게 물어온 일이 있다. 미국인이 한 말을 써보면 What do I owe you?이다. 천천히 읽으면 "왓 두 아이 오우 유"가 되겠지만 이렇게 정식으로 발음하는 사람은 보기 드물고 대부분 빨리 "와 루 아이 오우 유"라고 하는 게 보통이다. What do I owe you?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내가 당신한테 무슨 빚을 지고 있습니까?"가 되겠지만 사실은 "얼마를 내면 됩니까?"라는 뜻이다. 미국 사람이 How much?라고 할 때는 뭇 알아들을 사람이 별로 없겠지만 What do I owe you?라고 하면 제대로 알아들을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미국인들은 How much? 못지않게 What do I owe you?도 많이 쓰니까 잘 기억해 두기 바란다.
owe는 금전적으로 채무가 있는 것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빚을 지고 있는 것도 뜻한다. 예컨대 I owe you 50 dollars.라고 하면 "나는 당신한테 50달러 줄 게 있습니다"는 말이지만 I owe you an apology.라고 하면 "나는 당신한테 사과할 일이 있다"는 말이 된다. 또 무단 결석한 학생을 보고 선생님이 You were absent from school yesterday. You owe me an explanation.이라고 했다면 "너 어제 학교에 나오지 않았는데 이유가 무엇인지 말해 보라"는 말이 된다. owe는 또 이런 경우에도 쓴다. 즉 성공한 사람이 어려울 때 신세를 진 사람을 보고 I owe my success to you.라고 했다면 "나는 나의 성공을 당신에게 빚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성공은 당신 덕분입니다"란 뜻이다.
Auto mechanic: Your car is ready to go. Customer: What do I owe you? Mechanic: Here is your invoice. The total comes to $245.36 including tax. 정비공: 자동차 수리가 끝났습니다. 손님: 얼마지요? 정비공: 여기 청구서가 있습니다. 세금을 포함해서 모두 245달러 36센트입니다.
Customer: What do I owe you? Saleslady: That will be $75.00 Customer: (Handing ovewr four 20-dollar bills) Here you go. Saleslady: I owe you five dollars. (Handing over a 5-dollar bill) Here's your change. Thank you and come again. 손님: 얼마 내면 되죠? 판매원: 75달러 되겠습니다. 손님: (20달러짜리 4장을 주면서)여기 있습니다. 판매원: 제가 5달러를 내드려야겠군요. (5달러짜리를 건네주며) 거스름돈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A: I owe you an apology. B: What for? A: I think I started our fight yesterday. B: Forget it. Let bygones be bygones. A: 내가 사과할 일이 있어요. B: 뭣 때문에요? A: 어제 우리들의 싸움은 내가 먼저 시작한 것 같아요. B: 잊어버리세요. 지나간 일은 덮어 둡시다.
* Laughing is the best rest. - 웃음은 가장 좋은 휴식이다 Female candidate: We need more women in the government! Male candidate: Oh, sure. We need them to clean the offices! 여성 후보: 더 많은 여성들이 정부에 필요합니다! 남성 후보: 그럼요. 정부 청사 청소하는 데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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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지식/생활/건강/의학 |
- 음식 토정비결 - 전영순,하정화
<본초류>
12.고사리 - 줄기 연하고 향 짙은 토종 고사리
어린 아이의 꼭 움켜쥔 손을 '고사리 같은 손'이라 한다. 끝이 앙증맞게 꼬부라져 있는 고사리의 모양은 과연 어린이의 움켜쥔 작은 손과도 닮았다. 고사리는 높이가 1m 정도에 달하며 봄철에 어린 잎이 돋아나 꼬불꼬불 말린다. 그래서 {본초강목}에서는 "고사리는 음력 2~3월에 싹이 나 어린이의 주먹모양과 같은데 펴지면 봉황새의 꼬리와 같다."고 묘사하고있다. 고사리는 참고사리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양치류로 햇볕이 잘드는 산이나 들에서 자생하는 구황식품이다. 연필대 만큼 크고 굳은 줄기가 땅속에 가로누워 있고 이른 봄에 여기에서 싹이 돋아 꼭대기가 꼬불꼬불하게 말리며 흰 솜같은 털로 온통 덮여 있다. 어린 잎과 줄기를 채취하여 삶은 다음 물에 담구어 쓴맛과 떫은맛을 우려낸 후 건조하여 저장한다. 고사리는 전세계에 큰 군락을 만들어 자생하는 생활력이 왕성한 식물로 아시아 지역에서는 오래 전부터 식용해왔다. 중국 춘추시대 때 주나라 무왕의 녹을 먹지 않겠다고 수양산으로 들어간 백이, 숙제가 고사리를 먹고 연명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러나 그들이 먹은 고사리도 결국은 무왕의 영토에서 난 것이 아니냐고 그들을 비아냥거린 사람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예로부터 고사리는 일상화된 먹을거리의 하나였다. 이처럼 보편화된 음식물로서 고사리는 제삿상에도 빠질 수 없는 나물이 되었다. 근자에 이르러 고사리에는 '브라켄톡신'이라는 암을 유발하는 물질이 들어 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지만 확실히 증명된 사실은 아니다. 따라서 오랜 세월 동안 우리 선조들이 먹어온 고사리를 일부러 식단에서 추방할 필요는 없다. 무릇 어떤 동식물이건 너무 과다하게 섭취하면 부작용이 따르기 마련이다. 적당하게 섭취하는 방법을 잘 지키면 약이 될 수 있고, 잘못 섭취하면 해를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성분
고사리는 섬유질이 많고 카로틴과 비타민 C를 약간 함유하고 있으며 비타민 B2는 날것 100g에 0.3mg 정도 함유하고 있다. 또한 뿌리 100g에는 칼슘이 592mg이나 함유되어 있어 칼슘 식품이 적은 산촌에서는 무척 필요한 산나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생고사리의 잎에는 비타민 B1의 파괴 인자인 아노이리나아제(aneurinase)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건조한 고사리에 다량의 당질(37.9%)이 들어있는데 이것은 고사리에 포함된 녹말로 고사리 전분, 고사리떡의 주성분이 된다. 이밖에도 단백질, 지질, 섬유질, 회분, 칼슘, 철분 등이 들어있다. 특히 고사리에는 석회질이 많이 들어 있는데 이것을 많이 섭취하면 뼈와 이가 튼튼해진다. 또한 고사리 뿌리를 깨끗이 씻어서 만든 가루를 섭취하면 자양강장과 해열에 좋다.
쓰임새
고사리는 주로 나물, 전분, 떡 등의 원료로 사용한다. 그런데 충분히 물에 우려낸 고사리일지라도 너무 많이 섭취하면 좋지 않다는 주장도 있으니 유념해야 할 것이다. 특히 고사리잎에는 비타민 B1분해효소가 들어있는데 이것을 곧바로 섭취하면 안된다. 따라서 이러한 성분을 제거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방법을 사용한다. 4월 하순에서 5월 상순 사이에 어린 고사리를 따서 나뭇재를 섞어둔다. 여기에 뜨거운 물을 붓거나 뜨거운 물로 고사리를 삶아 식기를 기다린다. 그러면 비타민 B1분해효소가 쓴맛과 함께 빠져나온다. 요즘은 나뭇재 대신 소금과 중조를 쓰기도 한다. {본초강목}에 의하면 어린 고사리를 회탕으로 삶아 물을 버리고 햇볕에 말려 나물을 만든다고 하였다. 가을에 접어들면 고사리 뿌리를 캐내어 절구에 찧어 이것을 푸대에 넣고 잘 주물러 녹말을 얻는다. 고사리 녹말로는 떡이나 풀을 만든다. 또 고사리를 따서 건조시켜 저장해 두었다가 수시로 식용하기도 한다. 이 때에는 물에 담가 우려서 다시 삶아 나물이나 탕거리로 쓴다. 요즘에는 비닐하우스에서 촉성재배한 고사리가 한겨울에 나돌기도 한다. 고사리는 약으로도 쓰인다. 고사리 녹말은 이질에 좋으며 어린잎은 신경흥분제가 되고 탈항을 다스리며 이뇨와 해열에도 효과가 있다. 그러나 {본초강목}에서는 고사리는 이익함이 없는 음식이라고 했다. 또한 {본초습유}에서는 '많이 먹으면 양기가 사라진다. 백이와 숙제는 고사리를 먹고 요절하였다'라고 한다.
이것이 토종
고사리는 중국 등지에서 다량 반입되고 있으므로 주의를 기울여서 구입해야 한다. 토종고사리는 대체로 대가 가늘고 색깔이 연한 갈색이며 털이 적게 붙어 있다. 길이는 20cm 안팎으로 짧은 편이며 고사리 윗부분이 원형대로 붙어 있다. 또한 채취할 때 손으로 뜯기 때문에 토종 고사리는 절단면이 일정하지 않고 거칠다. 고사리 고유의 향이 짙으며 육질이 연하고 물에 담그면 빨리 부푼다. 그리고 국산 마른 고사리는 보통 짚으로 묶었다. 반면 외국산은 대가 굵직하고 곧은 편으로 길이는 30cm 정도로 길다. 자세히 보면 표면은 쪼글쪼글하고 색깔이 짙은 갈색이며 털이 많이 붙어 있다. 또한 대량으로 재배하여 낫으로 채취하기 때문에 먹을 때 뾰족한 절단면이 혀에 거슬리며 윗대궁 부분이 대부분 떨어져 나가고 없다. 육질 또한 질기고 고사리 고유의 향이 잘 나지 않는다. 그리고 중국산은 물에 풀어 물고사리로 많이 판매하는데 물에 부푸는 속도가 느리고 검은색을 띠면서 깨끗하지 않다. 토종 고사리는 봄철에 산지에서 캐내는 대로 소비되기 때문에 유통량이 많지 않고 시장에서 구하기 힘들다. 따라서 진짜 토종 고사리를 구하려면 봄철에 산지에서 미리 구입해서 건조시켜 저장하는 방법을 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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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세계사/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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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푸른 옥에 핀 꽃, 천하제일의 고려청자
- 장남원
우리는 세계에서 뛰어난 도자문화를 이룩한 민족이다. 특히 청자를 완성함으로써, 도기에서 자기로 도자 제작 기술상의 진보를 이루었으며 중국과 함께 일찍부터 세계도자사의 선두에 서게 되었다. 고려청자는 공예품이면서도 고려 미술의 여러 특징을 잘 소화 흡수하였는데, 특히 형태에서 보여 주는 빼어난 선과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유색, 격조 있는 문양 등 뛰어난 조형감각을 발휘함으로써 세인의 주목을 받아 왔다.
청자의 탄생 청자란 점토로 기물을 만들고 700도씨 부터 800도씨 사이에서 구워낸 후 그 위에 다시 철분이 1에서 3퍼센트 가량 들어 있는 장석질의 유약을 입혀 1,200도씨 내외의 고온에서 구워 낸 자기를 말한다. 청자 제작이 가능하려면 선결해야 할 기술적 요건이 있다. 우선 1,000도씨 이상의 온도에서 경질도기를 구워 낼 수 있어야 하고, 그에 더하여 높은 온도에서 녹는 잿물유약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굽는 온도가 1,000도씨를 넘으면 흙 속에 섞여 있던 규사질이 땔감으로 사용한 나무재와 결합하면서 유약층을 이루게 되는데, 이것을 자연유 현상이라 한다. 이것에 착안하여 인공적인 잿물을 만들고 이를 입혀 구워 낸 것이 회유도기이다. 우리보다 도자기술이 먼저 발달한 중국의 경우 재를 유약으로 사용한 회유도기는 은나라 때부터 있었으며, 발전을 거듭하여 한나라와 육조시대를 거쳐 4세기 이후에는 질 좋은 청자를 만들게 되었다. 이후 오대 송에 이르면 세련되고 완성도 높은 청자를 완성시키게 되어 월주요. 요주용. 남송관요. 용천요같은 가마들이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에서는 언제부터 청자가 만들어졌을까? 삼국시대부터 1,000도씨 내외의 높은 온도로 실생활에서 사용하기 좋은 경질의 도기를 굽기 시작하였는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면 녹유, 갈유등 유약 입힌 도기 생산이 가능해졌다. 유약은 도기 표면을 아름답게 해줄 뿐만 아니라 그릇 자체의 내구성을 높여 주고 물기의 흡수도를 낮춘다. 그래서 위생적인 실용품으로 많이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 같은 배경 아래서 청자의 탄생은 이미 예고된 것이다. 또한 삼국시대 이래 전래된 중국의 청자와 백자는 우리 민족이 자기를 적극적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래서 9세기 이후 국내에서는 청자의 생산이 본격화되며 곧이어 백자도 함께 제작도기 시작하였다. 청자는 황해도와 경기도를 비롯하여 충청남도, 전라도로 이어지는 서남해안의 가마들을 중심으로 먼저 발달하는 지리적 특성을 보인다. 그리고 기술적인 진보를 배경으로 장보고 등을 통한 중국과의 해상교류, 신라말 고려초 지방호족들의 세력 확장과 그에 따른 자기 수요 및 자본의 창출, 선총의 전래와 차문화의 보급 등으로 생산지역이 더욱 확산되었다. 당시 청자 가마터로는 황해남도의 봉천군 원산리를 비롯하여 경기도의 용인군 이동면 서리 장흥면 부곡리 원당면 원흥리 안양시 비산동, 충청남도의 성연면 오사리 보령군 천북면 사호리 등이 주목된다. 이들 초기 청자 가마터에서는 대개 차를 마시는 다완이나 제기 의식용구 등이 출토되었는데, 그 가운데 다구류가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고려에 들어와 차가 승려나 문인의 벗으로, 왕실이나 불교 교단의 각종 행사에 필수 품목으로 부상하여 차 마시는 습관이 성행하였고 이를 위한 청자가 다량 제작되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송사>고려전의 1015년 기록에 민가의 그릇은 모두가 구리라고 한 것처럼 청자가 아직은 일부 용도로 만들어졌을 뿐 고려의 생활문화 전반에 깊이 뿌리내린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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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사회/문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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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랍문화의 이해 - 공일주
1. 신의 인간에 대한 관계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 반도
기원전 800년경에 남부 아라비아 비문이 쓰여지면서 아랍어와 아랍인의 역사에 기록되었다. 서기 226년에는 페르시아에서 사산조가 시작되었고, 265년에는 팔미라의 아랍족장이 페르시아 군대를 격퇴시켰으며, 274년에는 아랍여와 제노비아가 로마황제의 포로가 되었다. 이런 굵직한 역사적인 사건 뒤에 이슬람교가 발생하기 직전 아라비아 반도에는 다양한 신 숭배가 성행되었는데, 그 신들의 대부분은 지역마다 흩어진 각 부족이 섬기는 신이었다. 주된 종교는 애니미즘으로서, 신이나 정령은 수목, 돌, 연못, 동물 등에 깃들여 있다고 믿었으며, 사람들은 신과 정령의 보호를 받기 위해 의식을 거행하곤 했다. 그 중에서도 신앙의 대상으로 가장 유명한 것이 메카의 중앙에 위치한 ‘카바’신전에 놓인 흑석이다. 당시의 메카인들은 이 돌이 아담과 이부가 생존했을 때부터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믿고 있었으나, 이것은 오늘날 이슬람에서 대표적인 애니미즘의 잔존물이 되고 말았다. 이 돌은 현재 검은 보호막으로 덮여 있는데, 당시에는 여러 부족들이 공동으로 최대의 종교적 의례를 행하는 성지이자 순례의 중심지였고, 따라서 이 신전에 모신 우상만도 360여 개나 되었다. 이러한 다신들 중에는 후발이라는 남신과, 알 웃자, 알 라트, 마나트라고 하는 세 여신들이 있었는데, 이 여신들은 가장 지고하고 능력 있는 절대자로 숭배되 알라의 딸들로 믿고 있었다.
최고의 신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는 증거는 있지만, 종교적 관습으로는 군소 신들의 숭배가 중심이 되어 있었다. 즉, 우상숭배가 많았고 영들이 깃들여 있다고 하는 동굴, 나무, 샘, 돌 등에 산제물이 드려졌다. 메카에는 세 여신, 즉 마나트, 알 라트, 알 웃자가 숭배되었는데, 현재 요르단 남쪽 페트라의 박물관에 알 웃자 여신상이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당시에는 미신적인 의식이 여러 사당에서 행해졌고, 메카에 있는 카바아 같은 주요 사당에는 연례적인 순려가 있었다. 운명에 대한 강력한 믿음이 있었으나 내세에 대한 믿음은 거의 또는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랍시에 대한 구비전승도 계속되었고, 이 밖에 다른 종교들도 있었다고 전한다. 메카에는 기독교인들이 있었는데 주로 외국인이었다. 이를테면 에태오피아에서 온 흑인 노예들과 시리아에서 와라카 븐 나우팔이라는 사촌이 있었는데, 그도 기독교인이었다고 한다. 무함마드는 사막에서 시리아 수도사와의 접촉이 있었고, 하니프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일신론자였으며, 당시 메카인들에게 거의 영향럭을 끼치지 못했다. 본래 기독교를 신봉했던 메카 주위의 히자즈 지역에는 여러 유목부족들이 있었다. 남쪽의 예멘지역은 4세기 이후 기독교인 지역이 되었다. 부족 중의 일부는 사막의 유목민(베드윈)이고, 또 일부는 반유목민, 그리고 일부는 읍 규모의 타이프나 도시 규모의 메카, 메디나에 살던 정착민이었다. 개별부족들은 동맹에 의해 결속되고, 전체지역이 하나로 통일되지는 못했으며, 종족끼리 피의 복수가 부족윤리로 확립되어 있어 복수와 앙갚음이 이어지고 있었다. 또, 무함마드 시절에 두 강대국이 있었는데, 그것은 곧 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이었다. 당시 아라비아는 이 두 강대국의 세력 다툼에 영향을 받고 있었는데, 수도를 콘스탄티노플에 두고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 남동유럽을 차지하고 있던 비잔틴 제국에서는 기독교 정통교리가 이단교리, 즉 단성론자와 네스토리우스파에 맞서 격심한 반목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아랍인에 대항하기 위해 시리아에 완충국가로서 갓싼조를 지원했다. 남부 아라비아 나즈란의 기독교인들이 516년에 예멘왕이 되었던 두 누와스에 의해 523년에 학살당했으며, 525년에는 비잔틴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요청에 따라 기독교 아비시니아 사람들이 군대를 파견하여 두 누와스를 처단하고 예멘을 점령해 버렸다.
한편, 수도를 이라크에 두고 이라크에서 아프가니스탄까지 퍼져 있던 사산조하의 페르시아 제국은 아랍인에 대항하기 위해 완충국가로서 이라크에 있는 히라의 라큼왕국을 지원했다. 그 후 614년 페르시아인들은 비잔팀에게서 예루살렘을 쟁탈했고, 628년에는 비잔팀이 페르시아인들을 대파함으로써 두 제국은 많은 싸움으로 지쳤다. 마침내 이슬람이 퍼지기 시작할 즈음에는 힘의 공백기가 이뤄지고 있었다. 이로써 이슬람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그 위세를 떨치며 정복길을 떠났다. 당시의 경제적, 사회적 상황으로는 북-난, 동-서로 이어지는 무역로가 있어 이 길을 따라 대상무역이 성행했다. 그리고 메카는 순례 중심지로서뿐만 아니라 중요한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여아 생매장이나 여성이 거의 보호받지 못하는 등 사회악이 만연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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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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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인기 최고 우리 집 마루
"진희야, 아빠 등 좀 봐라." 아버지의 등에는 물인지 담인지 모를 물이 흥건했다. "와, 아빠 등목하셨어요?" 내 물음에 아버지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땀이다!"하고 외치셨다. 사 년 전 어느 여름 날, 마루를 만들고 계신 아버지 곁에서 나는 심부름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큰언니 결혼식을 일년 정도 앞두고 있던 때였는데 결혼식 손님을 맞기에는 마루가 너무 좁았다. 그래서 마루와 토방을 이어 넓히자고 했는데 아버지가 직접 해보겠다고 일을 벌이신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 아버지의 솜씨는 참 미더웠다. 마루가 토방보다 높아 낮은 토방에 우선 자갈을 갈고 그 위에 다시 흙을 깔아 턱을 맞춘 다음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온 부분을 끌로 다듬는 아버지의 손놀림은 어느 미장공 못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 드디어 마루가 완성되었다. 청록색 정사각형 무늬가 있는 장판을 깔아 놓으니 온 집안이 환해지는 듯 했다. 그런데 발을 디디는 순간, 바닥이 울퉁불퉁하게 솟아 있음을 알았다. 어머니는 이리저리 걸어다녀 보더니 영 불편한 얼굴로 말씀하셨다. "미장이 불러오자니까 자기만 믿으라더니." 어머니께서는 울퉁불퉁한 마루바닥을 못마땅해 하셨다. 그러나 그 해 여름 내내 우리집 거실은 인기 최고였다. 아버지께서는 거실 한가운데에 목침을 놓고 큰대자로 누워 세상 만사 다 잊어버린 듯 주무셨다. 어머니께서도 머리에 빨간 수건을 두른 채 잠깐 눈만 부친다며 눕지만 두세 시간 정도는 깨어날 줄 모르셨다. 그리고 밤이면 마루는 아예 온 가족의 침실이 되었다. 어머니, 언니, 오빠의 판판하지 않다는 불평은 쏙 들어가고 울퉁불퉁한 마루는 우리집에서 없어서는 안 될 정도의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안 해 본 일 없고, 못하는 일 없다던 아버지는 큰언니의 결혼을 한 달쯤 앞두고 바다에 나가셨다가 영영 돌아오지 않으셨다. 하늘나라 어느 집에 마루를 만들어 주러 가셨나 보다. 이제야 실토하지만 아버지 실력은 별론데..... 하늘은 정말 바보다. 아버지는 마룻바닥 하나 제대로 미끈하게 못 만드시는데 그것도 모르고 데려갔으니 말이다. 지금이라도 그냥 아버지를 보내 주면 내가 다시는 하늘을 향해 바보라고 하지 않을 텐데..... 사랑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영원히 곁에 있을 수 없음을 내게 알려주신 아버지. 그러나 아버지께서도 모르시는 게 있다. 그리움은 영원히 내 곁에 있다는 것을.....
엄진희 님/충남 보령시 신혹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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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13. 현실세계와 이념세계: -플라톤의 이데아 론(기원전 4세기)
그때 세계에서는 - BC 411년: 투키디데스(역사) BC 365년: 장자태어남
유구한 철학의 역사를 통해 플라톤의 이데아(Idea)만큼 영향력을 발휘한 철학사상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플라톤의 정신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인류의 이성적 꿈의 산물이며, 인간은 그 꿈을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우리들의 존재세계를 두 가지로 나누어 보았다. 그하나는 감각적 인식과 신체적 생존의 세계로 나타나고 이루어지는 현실적 사물의 세계이며, 다른 하나는 정신, 즉 사유를 통한 이념의 세계라고 보았다. 그때 현실적 사물의 세계를 현실되게 하며 그 현실로 하여금 마침내 귀의케하는 존재가 바로 이념적 원형의 세계라고 본 것이다. 플라톤이 아카데메이아 입구에 '기하학을 모르는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고 써붙였다는 것은, 기하학은 모든 사물과 구체적인 존재의 원형을 알려주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삼각형의 모습을 가진 형태는 수없이 많다. 그러나 삼각형의 원형은 근본적으로 하나가 있다. 그것에 맞지 않는 삼각형은 참다운 삼각형이 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정의의 상황과 모습은 어디서나 발견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상적인 정의의 원모습은 하나가 있다. 거기에 적합한 것이 참다운 정의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 원형에 해당하는 것- 그것을 플라톤은 이데아라고 본 것이다.
이러한 이데아는 사유계와 경험계로 나누어진 현실 사물을 사유의 원형으로 귀의시켜야 한다, 감성계에 속하는 모든 것들은 원형적인 실재로 환원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원형은 자료로서의 물질계를 원형으로서의, 형상으로 바꾸어주며 형상 중 최고의 형상은 원형인 이데아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이 현실을 이상의 이데아로 상승하게 하며 깨닫게 해주는가? 근대 이후의 모든 철학자들은 이성과 이성적 사유를 그 중심기능으로 보았을 것이다. 우리들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그 핵심적 기능을 담당하는 것을 에로스(Eros)로 보았다. 그 당시에는 사랑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에로스에 대한 생각이 일반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에로스는 미와 이상에 대한 사랑, 또는 정신적 가치의 창조적 활동의 주체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 에로스의 지향성과 상승성이 우리들의 영을 현실세계로부터 이상적인 실재의 세계로 이끌어준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이데아는 존재의 바탕이면서 질서의 원천과 목적이 되며, 최고인식의 내용이 된다. 이 이데아는 현실계를 초월한 성스러운 직관을 동반하면서 우리의 삶을 이데아의 내용으로까지 상승, 승화시켜주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이데아 중의 이데아, 최고의 이데아, 이데아 계의 태양과 같은 것은 선의 이데아라고 설명한다. 철학적으로 본다면 참이라든지 진리라는 뜻이 더 귀하게 나타날 것 같은데, 그보다는 선을 더 높이 본 것은 선은 참, 진리를 포함하고 있으면서 그 참이 선과 더불어 있어 삶의 세계와 역사의 완성을 가능케 해주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에 있어서는 참과 선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참은 인식의 문제가 되나, 선은 존재의 이념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플라톤 당시에는 진리보다도 지혜가, 진실보다는 선이 더 귀중하게 여겨졌으며, 인간성의 조화로운 성숙도는 선으로 표현되어왔던 것이다.
미의 관념도 그렇다. 미는 그 자체가 조화로움을 지니고 있으며, 조화는 선의 이데아에서 원만히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렇게 본다면 플라톤의 철학은 진리와 미의 조화가 선의 이데아에서 채워진다고 볼 수 있는 동시에, 결국 플라톤의 철학은 윤리적이며 국가적인 이상주의와 연결되어 있다는 견해를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는 칸트의 이론철학과 인식론에 해당하는 (순수이성비판)을 더 소중히 여긴다. 그러나 칸트 자신은 윤리적 가치를 위한 전제로 인식의 문제가 취급되었다고 본다. 데카르트도 그렇다. 모든 이론적인 학문은,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가 하는 실천적 학문을 위한 전제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중요시하는 것은 그의 인식론적 방법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인식론적 대화법을 방법으로 받아들이고는 있으나, 그 목적과 방향은 이미 이데아라는 대전제로 제시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의 수많은 저작들을 묶어 집대성한 (롤리테이아) 즉, 이상국에 관한 고찰이 플라톤 이해의 궁극적인 과제라고 보아 좋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플라톤 철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어떤 이상적인 국가를 건설하는가 함이 젊었을 때부터의 꿈이었다. 다시 말하면, 이데아 연구의 과정은 이데아로 가는 인식의 길이고, 이데아를 실천하는 윤리학이 있고, 그리고 그 완성체인 이상국에의 길이 그가 추구한 철학 도정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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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고양이'를 왜 '나비야!'하고 부를까요?
'고양이'를 모르시는 분은 안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양이의 어원을 아시는 분은 그리 많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고양이'를 더 이상 분석해 보실 수 있나요? '고양 + 이'로 분석하시렵니까? '-이'가 붙는 단어가 많으니까 말입니다. '매미'가 '맴맴' 운다고 해서 '맴'에다가 접미사 '-이'를 붙여서 '매미'를 만들었으니까, '고양이'도 '고양고양'하고 우는 소리에다가 '-이'를 붙인 것은 아닌가 해서 위와 같이 분석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고양이'가 '고양고양' 울던가요? 아니면 '야옹야옹'하고 울던가요? '고양이'는 어원적으로는 더 이상 분석할 수 없는 단어입니다. 절대로 '고양고양' 울어서 거기에다가 '-이'를 붙인 것이 아닙니다. '고양이'는 '괴 + -앙이'로 분석됩니다. 옛말에서 고양이는 '괴'였거든요. 그런데 이 '괴'는 '고이'로 발음되던 이중모음이었습니다.(그러나 꼭 '고이'와 발음은 같지 않았습니다.) '괴앙이'가 음운변화를 일으켜서 오늘날의 '고양이'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알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양이를 부르는 소리입니다. 보통은 '나비야!'하고 부르는데, 이 '나비'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추측은 할 수 있겠지요. 고양이 가 원숭이처럼 나무 등을 잘 타니까, 원숭이의 옛말인 '납'을 (지금은 잔나비, 또는 잰나비) 비유하여 그렇게 불렀다는 추측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추측은 금물입니다. 왜냐 하면 아직까지 그러한 근거를 찾을 수가 없거든요.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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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 미스테리 믿거나 말거나.. -.-;;
8년, 7개월, 6일간 소리를 질렀다면 커피 한잔을 데울 수 있는 에너지를 축적할 수 있다. (좀 무가치해 보이는 구만.)
6년 9개월 동안 계속 방귀를 끼면, 핵폭탄 한개치의 에너지를 축적할 수 있다. (이건 좀 해볼만 하다.)
인간의 심장은 피를 9.14 미터 뿌릴 정도의 압력을 가진다. (우와~)
돼지의 오르가즘은 30분간 지속된다. (난 환생하면 돼지로 태어나기로 결정했다.)
바퀴벌레는 머리가 잘린 후 굶어 죽을 때까지 9일 동안 살아있다. (징그러버라~) (돼지가 역시 최고다.-.-;;)
머리를 벽에 박치기 하면 시간당 150칼로리를 소비할 수 있다. (집에서는 따라하지 마세요.......회사라면 모를까......)
사마귀 숫컷은 머리가 붙어 있는 상태에서는 교미할 수 없다. 암컷은 숫컷의 머리를 잘라내면서 섹x의 시작을 알린다. (오~ 사랑해~ 정말? 싹둑! -.-;;;;)
벼룩은 자기 몸 길이의 350배 길이를 점프한다. 마치 인간이 미식축구장 7개를 점프하는 높이다. (350배라니.......정말 멋지지 않냐?)
메기는 27,000가지 미각을 느낄 수 있다. (연못 바닥에 뭐 그렇게 맛있는게 있다고........)
사자는 하루 50회 이상 교미를 한다. (그래도 난 환생하면 돼지다. 양보단 질!)
나비는 발로 맛을 본다. (음.......그래, 항상 그게 궁금했어.)
인간 신체의 가장 힘이 샌 근육은 혀. (음..........그래?)
유일하게 점프하지 못하는 동물은 코끼리이다. (정말 다행이지 않냐?)
타조는 눈이 뇌보다 크다. (응. 나 이런 사람 알아.)
불가사리는 뇌가 없다. (이런 사람도 알아.)
북극곰은 왼손잡이이다. (도대체 그딴걸 알고 싶어서 연구한 놈은 누구야?!)
인간과 돌고래가 쾌락을 위해 섹x를 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어라, 그럼 돼지는?)
- 출처와 글쓴이 모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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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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