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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2 호
2006.09.30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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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 - 風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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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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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거울은 사실을 보여 주지 시를 보여 주지는 않는다. / 메이 사튼 (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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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과학/예술/교육 |
- 조화유의 미국영어 - 일반인을 위한 경제생활 영어
13. We're just getting by.
얼마 전 어떤 파티에서 사업하는 친구를 오래간만에 만났다. 내가 "사업은 잘되나?"라고 물었더니 그는 "그저 그렇지 워"라고 대답했다. 조금 있다가 또 아는 사람을 만나 질문을 했더니, 그 사람도 "그럭저럭 먹고 살지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두 사람은 신수가 훤하게 사업이 잘되는 것 같았다. 사업이 잘된다고 하면 누가 돈이라도 꾸어달랠까 봐 그런지, 아니면 IRS(국세청) 조사관이라도 들을까 봐 그런지는 몰라도 열이면 일곱 명 정도는 사업이 잘돼도 시원찮은 것 같이 말한다. 그것은 한국 사람들의 묘한 성격 탓이라고 생각한다. 좋게 말하면 겸손하려는 겸양지덕(謙讓之德)이 있는사람들이고, 나쁘게 말하면 솔직하지 못한 것이다. 한국 사람들에 비하면 미국 사람들은 비교적 솔직한 편이다. 사업하는 미국 사람들에게 How's your business?라고 물어보면 Pretty good.(잘된다)이라거나 Not bad.(괜찮다)라고 비교적 긍정적으로 대답하는 게 보통 이다. 사업이 좀 부진한 편이라도 A little slow.(약간 저조하다)라고 하거나 So-so.(그저 그렇다)라고 말하지 "겨우겨우 먹고 산다"와 같은 극단적인 표현은 잘 쓰지 않는다. "겨우겨우 먹고 산다"는 말이 영어에도 없는 것은 아니다. Just getting by.(자스트 게딩 바이)가 바로 그것인데, get by는 '겨우겨우 살림을 꾸려나간다'는 뜻이다. '밑지지 않고 본전치기는 된다'는 말인데, 여기에 해당하는 영어는 break even이다. even은 여기서 same과 같은 뜻이므로 손익 계산서의 대변과 차변 양쪽이 같다는 뜻이다. "본전만 찾으면 다행이다"를 영어로 하면 You are lucky if you break even.이 된다. if you 대신 to를 써서 You are lucky to break even.이라고도 한다.
A: Hi, Mr. Brown, long time no see. B: Hi, Mr.Kim, how're you doing? A: Fine. How about yourself? B: Pretty good. A: That's good. How's your business coming? B: So-so. A little slow actually. How about yours? A: Oh, just getting by. B: Reallly? I heard your business was booming. A: That's not true. We just break even. B: Well, you are lucky to break even in this recession. A: 안녕하세요, 브라운 씨, 오래간만입니다. B: 안녕하십니까, 김 선생. A: 잘 있습니다. 브라운 씨는요? B: 저도 잘 있습니다. A: 다행이군요. 사업은 잘되십니까? B: 그저 그렇습니다. 사실은 약간 저조한 편이지요. 김 선생 사업은 어떠십니까? A: 아, 그저 겨우 꾸려 나가지요. B: 그래요? 제가 듣기로는 사업이 아주 잘되신다고 하던데요. A: 그렇지 않습니다. 본전밖에 안 됩니다. B: 이런 불경기에 본전만 되면 다행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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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지식/생활/건강/의학 |
- 음식 토정비결 - 전영순,하정화
<본초류>
11.칡 - 굶주린 백성들의 배고픔 달래주는 구황식물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긔 어떠리/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고려 말에 이방원(이방원:조선 건국 후 태종이 되었음)이 지은 '하여가'라는 단가이다. 이 노래는 고려 말 충신 정몽주로 하여금 고려 왕실을 버리고 이성계를 따르도록 권유하는 이방원의 마지막 설득인데, 여기서 이방원은 당시의 어지러운 정치상황을 교묘하게'드렁칡'에 비유하여 노래하고 있다. 이에 정몽주는 '단심가'로 답하며 '일백 번 고쳐 죽어'도 고려 왕실에 대한 충성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고부동한 신념을 밝히고 결국 세상을 하직하게 된다. 칡뿌리 같이 얽혀 살자던 이방원은 나중에 조선의 세번 째 임금이 되었고, 칡뿌리 처럼 얽혀 살 수는 없다는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피를 뿌리고 죽어서 충신의 대명사로 역사 속에서 오늘날까지 우리의 뇌리 속에 기억되고 있다. 반면 야산에는 오늘날에도 얼키고 설켜서 뒤엉킨 칡뿌리가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처럼 역사적 사건 속에서 이합집산하는 정치상황의 비유 대상이 되기도 하였던 칡은 배고픈 서민들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구황식품이었다. 우리 조상들은 극심한 흉년이 들어 양식이 바닥나면 산에 가서 칡뿌리를 캐어다 가루를 내어 떡이나 국수를 만들어 먹으며 연명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칡의 어린잎이나 칡꽃도 서민들의 배고픔을 달래주는 데 한몫을 해왔다. 분류학상으로 콩과에 속하는 낙엽활엽의 만목인 칡은 동아시아 지역에 서식하는 온대식물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 만주, 대만, 일본 등지에 분포하는데, 대부분 산이나 들에서 자생한다. 칡덩굴은 20m이상 줄기가 뻗어나간다. 그리고 칡뿌리도 굵은 것은 지름이 40cm나 되는 것도 있다. 이처럼 칡은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마음껏 생명력을 발휘하면서 뻗어나간다. 이러한 칡을 중국에서는 약재채취를 위하여 인위적으로 재배한다고 한다. 과거에 우리나라에서도 사방공사를 할 때 토양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일부러 심기도 하였다. 그러나 너무 무성하게 자란 칡이 주변의 큰 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말라죽게 하는 바람에 급기야 칡을 인위적으로 뽑아버리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던 적이 있다. 또한 칡을 제거하는 기계까지 등장하여 다량으로 채취한 칡은 가축 사료로 활용하였다.
성분
칡뿌리의 성분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다만 녹말질 등 당질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칡뿌리에서 얻은 녹말을 우리나라에서는 갈분이라 한다. 야생하는 칡뿌리를 잘게 쪼갠 다음 망치로 오랫동안 두드려 부수고 물에 씻어내면 녹말이 분리되는데 이것을 침전법으로 정제하여 건조하면 갈분이 되는 것이다. 칡뿌리의 약성분에 대한 기록은 여러 책에서 발견된다. 우선 {신농본초경}에 의하면 '칡뿌리는 소갈증, 신열, 구토, 모든 신체마비 등을 다스리고, 양기(정력)를 일으키며 모든 독을 푼다'고 한다. [명의 별록]에는 '칡뿌리는 상한중풍]과 두통을 다스리며 통증을 그치게 하고 신경통을 없앤다. 생칡뿌리를 즙을 내어 마시면 갈증과 높은 신열을 다스린다.'고 되어 있다.
쓰임새
한약 달이듯 하여 차로 마시기도 하고 말려두었다가 가루로 마시기도 한다. 또한 탕에 풀어먹기도 하고 국수나 떡을 만들어 먹을 수도 있다. 칡뿌리를 가루낸 것을 갈분이라 하는데 이것은 식용이나 과자의 원료로 쓰이기도 하고 접착력이 뛰어나서 풀을 만들기도 한다. 갈분을 만드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칡뿌리를 물에 씻은 다음 적당한 크기로 썰어 절구에 넣고 찧는다. 그리고 나서 자루에 넣고 끈으로 묶는다. 큰 그릇에 물을 채우고 그 물속에 자루를 담그고 힘차게 주물럭거리면 칡가루가 자루 속에서 흘러나온다. 이것을 여러번 되풀이 하면서 칡가루가 자루 속에서 다 흘러나오도록 한다. 흘러나온 칡가루는 그릇 밑바닥에 앙금으로 가라앉는다. 그러면 윗물을 따라버리고 새물을 부어 휘저으면 갈분이 물에 섞이게 된다. 이런 방법을 반복하는 동안 희고 고운 갈분이 남게 된다. 이것을 햇볕에 말리면 수분이 증발한 다음 좋은 전분을 얻을 수 있다. 갈분은 예로부터 환자나 어린이의 영양식으로 널리 이용되어 왔다. 이것을 끓는 물에 타서 먹으면 몸이 항상 더워지며 감기 초기에 잘 듣는다. 또한 설사에도 효과가 있다. 한방에서는 건재 약재로 사용하고 칡차 및 고급과자의 원료로도 쓰인다. 칡덩굴 껍질을 벗겨서 짠 것을 갈포라 하는데 옛날에는 옷감으로도 쓰였고 지금은 고급벽지의 재료로 사용한다. 한방에서는 칡이 중요한 약재로 쓰이며 그 효능도 다양하다. 특히 칡꽃은 주독을 없애주며 하혈에 효과가 있다고 하여 예로부터 민간약으로 널리 애용되었다. 이밖에 갈근을 가정에서 손쉽게 활용할 수 있는 요법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구역질이 자주 날 때는 칡뿌리를 찧어 즙을 내서 먹는다. *불면증에는 생칡뿌리를 즙을 내어 자주 마신다. *구갈증에는 칡뿌리 5냥을 물에 달여 탕을 마시면 된다. 음식을 잘 소화시키고 특히 술독을 풀어주는 데 좋다. 숙취했을 때는 생즙으로 마시거나 달여마셔도 효과가 있다.
이것이 토종
칡은 우리나라의 산과 들 어디에서나 자생하고 있다. 별도로 재배하지 않으므로 자생하고 있는 것을 채취하여 쓴다. 인공적으로 재배하지 않은 칡은 공해에 찌들지도 않았고, 깊은 산속 오염되지 않은 토양의 영양분을 흠뻑 머금고 있다. 이처럼 칡은 종자가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토종의 하나다. 우리나라에서 칡으로 유명한 고장을 든다면 경남 함양을 꼽을 수 있다. 이 곳은 산이 높고 골이 깊어 초목이 울창하고 온갖 약초와 산열매가 무진장 널려있는 곳이다. 그 무성한 수풀 속에서 자라난 칡은 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이 고장 사람들은 예로부터 두툼한 칡뿌리는 약재로 쓰고 덩굴 껍질은 벗겨서 갈포를 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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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세계사/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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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고려 불상의 이모저모 - 강희정(이화여대 박물관 학예연구원)
지방색 짙은 불상
전기 불상의 대형화는 석불상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철조여래좌상은 하남시 하사창동의 절터에서 옮겨온 것으로 높이 2.8미터 규모로 철불 가운데에서 작은 크기는 아니다. 신체 비례와 자세, 옷자락 처리는 석굴암 본존불을 모방하였다. 8세기 중엽에 오성된 석굴암 본존불은 철불이건 석불이건 간에 불상의 재료에 상관없이 이미 신라 하대부터 다른 불상의 모델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철을 불상의 재료로 사용한 것은 8세기 경으로 신라하대에 들어 널리 보급되었는데, 10세기 경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철불을 안면과 가슴에 양감은 있되 탄력이 줄어 역동적인 긴장감을 주지 못한다. 눈도 길고 가늘게 치켜 올라간 반면 콧날이 평평하고 입이 지나치게 작아통일신라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려 노력한 흔적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이전 시기 불상의 자비로운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거칠고 근엄한 인상이다. 별로 크기 않으나 한송사의 석조보살좌상은 고려전기 불상의 또 다른 특징을 보여 준다. 우리 나라에서는 그다지 흔치 않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조각수법도 특이하다. 높이 원통형의 보관과 장신구, 눈썹 밑을 깊이 파서 눈두덩이와의 경계를 분명히 한 점, 작고 합죽한 입매 등은 분명 신라 불상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신라 보살상의 당당한 가슴에서 잘록한 허리로 이어지는 곡선미와 달리 이 보살상은 어깨가 좁고 가파르며 몸매는 통통하고 둥글게 처리되어 있다. 그래서 같은 시기인 중국 오대의 조각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 유사한 형태의 보살상이 강릉 신복사지와 오대산 월정사에 전래되고 있어, 강원도 일대의 특수한 지역양상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고려시대는 특히 석불의 경우, 지방마다 고유색이 잘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앞에서 언급한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의 석불도 지방유파로 규정하기도 한다. 이처럼 고려석불이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는 점은 통일신라 전성기의 조각이 대체로 비슷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석불은 청동불이나 철불과 달리 특별한 기술이나 용광로와 같은 시설이 따로 필요치 않으며 비용도 많이 들지 않기 때문에 훨씬 제작이 쉬웠을 것이다. 각지에서 다양한 성격의 불상이 활발하게 만들어진 것은 불상을 조성하도록 시주하고 발원한 사람들의 계층이 매우 다양해졌음을 말해 준다.
이국적인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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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전기의 불교미술이 정치, 문화적 원심력으로 인해 지방색이 강하면서도 크고 소박한 불상을 양산한 반면, 중앙의 불교미술 흐름은 중, 후기로 넘어가면서 세련된 고려청자에 못지 않은 우아하고 귀족적인 아름다움을 뽐내게 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금동관음보살좌상이 대표적이다. 14세기 작품으로 여겨지는 이 보살상은 갸름한 얼굴과 가늘고 긴 팔다리, 여윈 듯이 보이는 몸통의 굴곡이 인상적이다. 두 팔을 휘감아 내린 천의나 영락 장식까지 착착 휘감기는 선적인 조형을 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고려 불교조각의 귀족적 미의식을 엿보게 해준다. 비록 유물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으나, 개성을 중심으로 한 문화의 중심지에서는 이와 유사한 모습의 조각이 다양하게 제작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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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기 이후 불상의 특징을 보여 주는 조각 가운데 충주의 철불2구와 호림박물관 소장의 금동대세지보살좌상이 있다. 충주 철불은 기하학적인 경향이 극도로 표현되어 추상성이 강조된 것으로 경외심을 불러 일으키는 험상궂은 얼굴을 하였다. 2구의 형상이 매우 유사하여 같은 조불소(불상제작소)에서 조성되었던듯하다. 현재는 별다른 장식도 없고 금칠도 하지 않은 상태지만, 워낙 생김새가 험상궂어 밀교 의식을 위한 불상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금동대세지보살좌상은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예가 많지 않은 세지보살상인데다가 미적 특징 또한 티벳불상과 매우 유사하여 과연 우리 나라 작품인지 한 번쯤 의심하게 하는 상이다. 확실하지 않으나 금강산에서 출토되었다는 꼬리표가 오래 전부터 붙어 있다. 이 때문에 몽고족의 금강산숭배와 조심스럽게 연관시키기도 한다. 그들이 숭배한 금강산에 자기네가 만든 불상을 모셔 놓고 예배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온몸을 메운 과도한 영락과 목결이 장식, 다부진 몸매와 경책(경전을 새긴 작은 두루마리나 그것을 담은 작은 상자)이 얹혀진 연꽃가지를 손에 든 정확한 도상의 표현에서 이국적인 라마미술의 영향을 느낄 수 있는 색다른 조각이다. 얼굴 생김새와 인체비례까지도 전형적인 티벳불상과 상당히 닮아 있다. 같은 계열의 조각이지만 이보다는 고려적 색채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예가 국립전주박물관 소장의 금동관음보살좌상과 호암미술관 소장의 금동관음보살좌상이다. 이들 두 상으로 미루어 몽고 미술이 고려에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지만 고려화도 동시에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천 가지 마음, 만 가지 불상
이렇듯 수적으로 결코 적지 않고 다양한 면모를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불상에 대한 세간의 인지도가 낮은 이유는 근본적으로 제작시기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상이 많지 않다는 데서 기인한다. 미술품의 제작 연대를 안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의 미적 취향이나 감수성, 나아가 시대정신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고려불상에는 막연히 ‘고려’라고만 적혀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어느 특정 시기를 못박아 말할 수 없는 까닭에 그저 ‘고려’라고 하느 것이다. 또한 불상의 외형적 아름다움이 통일신라기의 불상에 비하여 뒤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정신성이 약화되었다거나 예술성이 쇠퇴하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문헌이나 명문에 대해 좀더 정치한 고찰이 뒤따른다면 고려불상의 역사는 좀더 체계화될 여지가 충분하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성격 자체가 고려불상의 특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려 전 시기에 걸쳐 어느 하나의 잣대로 균일하게 평가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모습의 불상들이 제작되었다. 고려 불상에 대해 통일신라 전성기 조각을 미적 가치판단의 잣대로 삼아 측량하기에는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여러계층의 사람들이 갖가지 이유로 불상을 조성했다. 불교의 대중화만큼 불상 조성의 대중화가 이전보다 훨씬 폭넓고 뿌리깊게 이루어진 셈이다. 세련되고 우아한 귀족적 미의식이 엿보이는 불상과 투박하고 조잡한 서민적인 불상으로 대별되겠지만, 이 역시 단순한 이분법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고려불상의 특징을 굳이 꼽는다면, 대중들에 의한 거대한 불상과 일관된 특징을 추출해 내기 어려운 각양각색의 불상에서 나타나는 ‘대형화와 다양화’라고 할만하다. (성신여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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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사회/문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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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랍문화의 이해 - 공일주
3. 언어의 이중구조
(2) 이슬람의 생활양식
이슬람은 단지 종교만이 아니다. 알라가 제시한 전적인 삶의 양식이 이슬람이고, 정치와 사업과 종교활동은 물론, 모든 사람의 사회활동과 개인관계도 이슬람의 일부이다. 그래서 흔히 어떤 사람이 무슬림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그의 행동에서 인식된다. 무슬림이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쿠란이다. 인간에 대한 신의 규범은 곧 계시이다. 그 계시는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무함마드에게 전해졌고, 무함마드는 그저 타자기 역할만을 했다. 쿠란 속에 오늘날 무슬림이 살아가야 할 삶의 안애와 인고가 있다고 무슬림은 믿는다. 쿠란은 무함마드의 삶의 방식이 모든 무슬림의 모범이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모든 무슬림은 무함마드의 생활방식과 행동을 그대로 따른다. 쿠란과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 그리고 하디스의 바탕이 되었던 무슬림의 관례가 모든 무슬림의 행동규범이 된다. 선과 악은 반드시 해야 할 행동(이슬람의 다섯 가지 기둥), 추천할 만한 행동, 허용된 행동, 싫어하는 행동, 금지된 행동으로 나뉜다. 그리고 순나는 무슬림의 생활과 태도, 그리고 행동을 통제한다. 신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무슬림 생활양식의 핵심으로서 그들의 믿음(이으티카다트), 쿠란과 하디스에 포함된 가치(아답), 알라에게 헌신하는 모든 행동(이바다트),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져야 할 의무(무아말라트)를 말한다. 이슬람은 무슬림 인생관의 표현이며, 문화와 상호작용한다. 원시적인 문화에서 볼 수 있는 애니미즌적인 요소도 있도, 이것이 조금씩 변하여 무슬림의 정신생활로 발전했다. 이것이 이슬람의 내세관에도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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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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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어머니의 일기장은 수건
초저녁부터 장롱 앞에 앉아 계신 어머니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처음엔 텔레비전에 정신이 팔려 무심코 지나쳐 버렸다. 그런데 보고 있던 쇼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도 어머니는 여전히 장롱 앞에 앉아 계셨다.
"밥 안 주능교?"
대뜸 던진 내 말에도 어머니는 그저 "응? 그래 조금만 있어봐라" 하셨다. 그제서야 빨래를 정리하시나보다 하던 나의 무관심이 호기심으로 변했다.
"뭐하는데 아까부터 내내 그라고 있능교?"
슬그머니 다가앉은 나를 보시던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시며 정리하던 서랍 속에서 수건 하나를 꺼내 보이셨다.
"이게 뭔지 아나?"
내가 보기엔 그저 노란빛이 바랜 낡은 수건이었다.
"뭔데요? 수건 아인교?" 했더니 "그래 너 처음 나아서 싼 수건이다 이놈아" 하셨다. 약간의 장난기가 섞인 어머니의 말씀에 점 쑥스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수건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뒤집어도 보았다. 수건 속에 싸인 나를 상상해 보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조금 뒤 나는 그 서랍 속에서 쏟아져 나온 수건들에 대한 갖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날짜가 적혀 있고 무슨무슨 기념이라는 글자가 적힌 수건들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있으려니 마치 어머니의 지난 일기장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와 처음 나들이 나갔을 때 산 수건이라든지 내가 수학여행때 사다 드린 수건, 또 누군가 선물로 준 수건 등등. 수건 하나하나를 보며 그때 있었던 일을 어제의 일처럼 기억해 내시는 어머니의 모습은 평소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어머니의 그런 모습을 보고 조정래 씨가 쓴 수건의 맵시에 대한 글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어머님들의 수건 쓴 모습을 우리는 참 많이도 보았던 것 같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 수건을 쓰고 후끈거리는 밭이랑에 앉아 호미질을 하는 모습이라든지 빨래터에서 감은 머리를 수건으로 동여매고 앉아 빨래 방망이질을 하시던 모습들은 어릴 때 자주 볼 수 있었다. 어쩌면 우리 어머님들은 쓰시던 그 수건으로 훌쩍거리는 우리 아이들의 코도 풀어 주고 맛난 과일을 깨끗하게 닥아도 주고 무슨 설움으로 부엌 부뚜막에 앉아 흐르는 눈물을 찍어도 내었으리라 생각하면 보잘 것 없는 그 수건에도 꽤 정이 간다."
문득, 지난 가을 집 앞의 대추나무를 털던 날에 수건을 머리에 쓴 어머니의 모습이 생각났다. 나무에 모른 나는 가지가 휘어지게 열린 대추를 털면서 일부러 어머니가 계신쪽으로 가지를 마구 흔들었다. 흰 수건을 쓴 어머니의 머리위로 떨어지던 빨간 대추들..... 내 심술을 알기나 하신 듯 "이놈아!" 하시며 빙그레 웃으시던 어머니의 모습은 아마도 쉽게 잊혀지지 않을 듯하다. 저녁상을 차리려고 나가신 어머니의 달그락거리는 그릇 소리를 들르며 나는 장롱 앞에 다시 앉아 어머니의 서랍을 몰래 열어 보았다. 그 속엔 어머니의 추억이 묻은 수건들이 곱게 개어져 있었다. 깊게 패인 주름만큼이나 이것들도 어머니에게는 소중한 추억의 소품들이라 생각하니 웬지 코끝이 찡해 왔다.
김판수 님/경남 양산군 상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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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철학/구비 |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12. 세계 최대의 철학자: -플라톤의 등장(기원전428-347년경)
그때 세계에서는 404년: 펠레폰네소스 전쟁 끝남 400년경: 인도, (라마야나) (마하바라타)성립
소크라테스가 살아 있을 때는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젊은 제자가 한 사람 있었다. 바로 플라톤(Platon,428-347년경 BC)이었다. 21세에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들어와 28세 때 스승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플라톤은 젊은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조용히 학문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는 귀족출신이었고 높은 교양을 갖춘 인물이었다. 후인들은 그를 아폴로와 견주어 비유한 것을 보면 그의 풍모 또한 탁월했던 것 같다. 플라톤은 항상 네 가지 사실을 신들에게 감사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동물이 아닌 사람으로 태어난 일, 여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난 일, 외국인이 아닌 그리스 인으로 태어난 일, 소크라테스 시대에 아테네에 태어난 일이다. 네 가지 다 숨겨진 뜻이 있는 내용들이다. 또 그 만큼 소크라테스의 영향도 컸고 스승을 존경했던 것도 사실이다. 스승이 처형을 당한 뒤 플라톤은 아테네를 떠났다.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자신이 갖고 있는 학문적 포부와 이상정치를 펴낼 수 있을 도시국가가 있을까를 찾아다녔다. 그 당시는 통치자들이 정신 및 학문적 교사와 지도자를 요청하는 것이 보통이었던 때였다. 알렉산더의 부친인 필리포스 왕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채용했듯이... 플라톤은 한 곳에서 뜻을 얻어 자신의 포부를 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결국은 정적에게 몰려 자칫하면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할 뻔한 일이 생겼다. 그는 이윽고 마음을 가다듬고 아테네로 돌아와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다. 아카데메이아를 설립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서양 최초의 자유대학이 탄생되었다고 보아도 좋을지 모른다. 그는 오랫동안 많은 제자와 후배를 양성해왔다. 그리고 저술에 전념했다. 35편의 대화집인 저작을 완성시켰고, 적지 않은 서간문도 남겨주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 대부분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일 데모크리토스의 저서와 같이 그의 저서들이 상실되었다면 인류는 또 하나의 큰 손실을 겪을 뻔했다.
그 책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은 흔히 이상국이라고 부리는 대작(폴리테이아)일 것이다. 인류의 고전이라고들 말한다. 수많은 저서들 중에서 젊은이들이 애독하는 (잔치sumposion)는 사랑의 대화라고 말한다. 우리가 대학에 다닐 때는 차원 높은 애정의 대화로 즐겨 읽었다. 우리말로도 몇 종류 번역된 책들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대화의 주인공이 되어 낮은 차원의 사랑에서부터 소크라테스적인 사랑으로까지 승화시켜나간다. 플라톤의 저서는 대화형이며, 그 대화에서 다루는 주제의 주인공들이 그 분야의 대표적 인물들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물론 플라톤 자신의 철학사상이다. 아마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힌 플라톤의 저서는 (아폴로기아)와 (크리톤)일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한 연설과 그의 죽음에 관해 기록된 내용이다. 누구나 읽고 살며, 또 읽어야 할 책이다. 말년의 플라톤은 가장 존경받는 스승으로 철학자답게 행복과 영광을 누렸다. 80의 고령으로 취침중에 조용히 운명했던 것이다. 사실 플라톤은 그 당시 아테네의 유일한 철학 스승으로 존경을 받았고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전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데모크리토스의 철학이 현실과 자연 사물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성격의 철학이었다면, 플라톤은 모든 문제의 해결을 위에서부터 풀어 내려오는 이상주의적 성격을 택한 대표적인 철학자였다. 우리는 서양철학 전반에 걸쳐 아이디얼리즘(Idealism)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어떤 때는 관념론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윤리학에 있어서는 이상주의라는 의미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밖에도 이성주의 철학도 여기에 속하며, 합리적 사유와 사고도 인식론의 중심을 만든다. 그것 역시 실질적으로는 아이디얼리즘과 통하는 것이다. 이런 모든 철학의 원천이 플라톤의 이데아 론에서 비롯되고 있음이 사실이다. 따라서 그의 철학은 상당히 짙은 종교성과 예술성을 지니고 있으며, 논리적인 사유와 더불어 예술적인 직관이나 초합리적인 직각성을 많이 안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그 자신이 대표적인 이상주의자이기도 했고 예술가로서의 자질을 풍부히 지닌 철학자였다.
쇼펜하우어는 플라톤을 신과 같은 철학자라고 평하면서, 그의 이데아는 예술의 핵심을 만들고 있다고 극찬했다. 이와 버금가는 또 하나의 철학적 과제는 그가 이상의 구현을 위한 정치적 유토피아를 처음 구상했던 위대한 철학자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지금도 플라톤의 (이상국)이 정치사상가나 학자들에 의해 언급되고 있는 것은 그가 이 책 속에서 인류가 찾아 누리고 싶은 정치적 꿈을 실현시킬 국가형태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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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노닐다'는 '놀다 + 닐다의 합성어...'닐다'는 '가다'의 뜻
'한가롭게 이리 저리 거닐며 놀다'의 뜻을 가진 '노닐다'의 어원은 아주 쉽게 풀 수 있지요. 이것은 '놀다 + 닐다'의 합성어입니다. '놀다'의 뜻은 잘 아실 것이고, '닐다'는 '가다'의 뜻입니다. 옛말에서는 '니다'와 '닐다'의 두 형태가 '가다'의 뜻을 지니고 있었지요.
'니은' 앞에서 '리을'이 탈락하는 현상은 흔히 발견되는 우리 국어의 음운현상이지요. '살다'의 어간 '살-'에 '-니'가 붙으면, '사니'가 되듯 말입니다. 요즈음은 이러한 현상을 없애기라도 하듯 '살으니'로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이것은 유추에 의한 현상이지요.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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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자리이야기
4. 겨울
(1) 에리다누스자리
신화에 의하면 에리다누스는 황천과 지상 사이에 가로놓인 죽음강으로 알려져 있다. 고대 바빌론에서는 이 강을 유프라테스강, 이집트에서는 하늘을 흐르는 나일강으로 보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는 이 강과 관련된 이야기가 두 가지 나오는데 모두 아폴로의 아들들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그중 한 이야기에는 아폴로신의 아들인 패톤이 아폴로의 마차로 하늘을 달리다가 실수하여 떨어져 죽은 강이 에리다누스강이라고 되어 있다. 또 다른 이야기에는 아폴로신의 아들 오르페우스가 황천으로 아내를 구하러 갈 때 건넜던 강으로 나와 있다. 옛사람들이 이 강을 황천과 지상을 연결하는 죽음의 강으로 본 것은 이 별자리의 끝 부분이 지평선 아래에 접해 있어서 그랬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2) 토끼자리
토끼자리는 오래 전부터 알려져 온 별자리이나 그 정확한 기원이나 이야기가 될 만한 신화는 없다. 어떤 사람들은 오리온이 토끼사냥을 좋아하여 오리온자리 아래에 토끼자리가 생겼다고도 하고, 다른 이야기로는 고대 그리스 시대에 사실리아 섬에 야생토끼가 널리 퍼져 있어서 사냥꾼인 오리온자리와 큰개자리 사이에 토끼자리를 두어 야생토끼가 더 이상 늘어나지 않게 하였다는 말도 있다.
(3) 큰개자리
큰개자리에 얽힌 신화에는 뚜렷한 것이 있지는 않다.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바로는 작은개자리와 함께 사냥꾼 오리온이 데리고 다녔던 사냥개라고 한다. 옛 성좌를 보면 큰개의 모습이 괴물처럼 나와 있는데 이것은 큰개를 지옥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개로 본 데서 비롯된 것이다. 어떤 이야기에는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시녀인 프로크리스 요정이 기르던 개라고도 한다. 또 다른 이야기에는 케팔루스가 새벽의 여신 에오스에게서 얻은 사냥개가 바로 큰개자리의 주인공인데, 이 개의 발이 얼마나 빨랐던지 그 속도에 감탄한 제우스가 이 개를 하늘에 올려 별자리로 만들었다고 한다.
(4) 작은개자리
작은개 자리는 큰개의 옆에 위치해서 생겨난 별자리이기 때문에 독자적인 신화를 가지고 있지는 않는다. 단지 오리온이 큰개와 같이 데리고 다니던 사냥개라는 것이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1C경 로마의 천문학자이자 시인이었던 히기누스는 이 개를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매라로 보았다. 매라는 살해된 주인 이카리우스의 시체를 찾아 내어 주인의 딸 에리고네에게 알려준 충실한 개인데 신들이 그의 충성을 가상히 여겨 하늘의 별로 만들었다고 한다.
(5) 외뿔소자리
NGC2264, Cone Nebula, Fox Fur Nebula
이 사진은 Mosaic CCD camera가 장착된 National Science Foundation의 0.9 m 망원경에 의해 촬영된 것이고, Christmas Tree Cluster 또는 NGC 2264로 불리는 이 성운은 외뿔소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사진에서는 두 개의 유명한 성운이 보여지고 있는데, 사진 중앙 아랫쪽에 Cone Nebula가 있고, 왼쪽 윗 부분에는 Fox Fur Nebula가 있다. 사진에서 중앙의 바로 윗부분에 위치한 밝은 별은 S Mon으로 알려진 별이며, 중앙 근처의 주황색과 파란색의 부드러운 호 모양은 Herbig Haro objects인데 이는 성운에 존재하는 원시별로부터 나오는 가스 제트이다.
실존하는 동물도 아닌 외뿔소가 왜 겨울철의 대삼각형 중앙에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가장 신빙성 있는 것은 1627년 바르취우스에 의해 새로 첨가된 별자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쌍동이자리와 게자리 남쪽의 말’로서 알려저 있었다는 말도 있고, 또 일설에는 페르시아시대의 천구의에서 이 그림이 발견되었다고도 한다. 아무튼 신화에도 없는 외뿔소자리는 수수께끼인 별자리이다. 전설에 의하면 외뿔소는 인도에 살며, 몸의 크기는 말과 같고 꼬리는 영양의 그것과 비슷하고 이마에 한 개의 뿔이 있는 동물이라고 한다. 그리스와 로마시대의 문장에 보면 이 외뿔소의 모습이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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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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