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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1 호
2006.09.29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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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 - 風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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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누렇게 바랜 종이·낯선 글자체 ‘한국문학의 기억’ |
입력: 2006년 09월 28일 16:43: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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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근대소설이라는 이인직의 ‘혈의 루’, 현대 국어문법 고전인 주시경의 ‘국어문전음학’, 유길준의 ‘대한문전’, 이효석의 ‘노령근해’, 김동인의 ‘감자’·‘젊은그들’, 최초의 문예동인지 ‘창조’, 역시 우리나라 최초의 월간잡지 ‘소년’….
100년~50년전 출간된 이 근현대 문학 자료들을 한 자리에서 관람할 수 있는 귀한 자리가 마련됐다. 지난해 설립된 (재)아단문고가 29일부터 10월4일까지 서울 효창동 백범기념관 컨벤션홀에서 여는 ‘문자의 상상, 역사의 기억’전시회다.
아단문고 소장품전인 전시회에는 한국 문학을 이야기하며 빼놓을 수 없는 근현대 단행본·잡지 120여종 140여책이 선보인다. 100년전 발행된 자료만 해도 ‘귀의 성’(전2권·1907년)을 비롯해 ‘혈의 루’(1908년) ‘금수회의록’(") ‘소년’(") 등이 있다. 전시품 중 가장 최근 발행서적이 황순원의 소설 ‘인간접목’(1957년)이다.
전시장은 8개 부문으로 구성됐다. 1910년대 출간된 신소설 부문과 이효석·이태준·김동인·황순원·염상섭·채만식·이기영 등의 소설·수필 등 작품 41책이 출품된 소설 부문,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1933년), 최현배의 ‘우리말본’(1937년) 등의 국어학 서적이 있다. 또 문예지와 오장환·김소월·조지훈 등의 시집, 정지용·박종화 등의 수필, 나운규·함세덕·유치진 등의 희곡 및 시나리오, ‘걸리버 유람기’(최남선·1909년) ‘서유기’(박건회·1913년) 등 번역문학 부문이다.
전시자료들은 누렇게 빛이 바래고 낯선 체의 글자, 귀퉁이가 성하지 않은 몸으로 우리문학의 뿌리임을 대변한다. 제목을 따라 쓴 누군가의 낙서도 정겹다. 서적이란 물질이 아니라 그 속에 풍성하게 담긴 정신들을 챙겨볼 만한 전시회다. 특히 아단문고 첫 전시회로 사라져가는 문학의 뿌리를 간수한 수집가의 열정도 되새겨 볼 만하다.
〈도재기기자 jaekee@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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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은 아무도 몰래 수천 개의 알을 낳지만 암탉이알을 낳을 때면 온 동네가 다 안다. / 말레이지아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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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화유의 미국영어 - 일반인을 위한 경제생활 영어
12. I'm pinching pennies.
고물차를 끌고 다니는 미국 친구를 보고 왜 새 차를 사지 않느냐고 하니까 I'm pinching pennies for a rainy day.라고 말했다. pinch는 '꼬집는다' 또는 '쥐어 짠다'는 말이므로 pinch pennies는 '1센트짜리 동전들을 쥐어 짠다' 즉 '동전 한푼도 아껴 쓴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rainy day는 '비 오는 날'이라는 뜻이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때'란 의미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고물차를 끌고 다니는 미국 친구가 한 말을 "나는 경제적으로 어려워질지도 모를 때에 대비하여 돈을 아끼고 있다." 즉 "궂은 날에 대비해서 근검 절약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I'm saving money for a rainy day.와 같은 말이다. 매우 근검 절약하는 가정 주부를 보고 She is a real penny-pinching housewife.라고 하면 "그 여자는 매우 알뜰한 가정 주부이다"는 말이 된다. She is a real penny-pincher.라고 해도 같은 뜻이 된다. penny-pincher은 좋게 말하면 "알뜰하다"는 것을 가리키고 나쁘게 말하면 '구두쇠다' 또는 '노랭이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penny-pincher는 '노랭이' 또는 '구두쇠'를 가리키기도 하고 '알뜰한 사람'을 뜻할 수도 있다. pinch pennies의 반대말은 splurge이다. She is pinching pennies on food while splurging on fancy clothes.는 "그 여자는 먹는 것에는 지독히 돈을 아끼면서 고급옷을 사는 데는 펑펑 돈을 잘쓴다"는 말이다. 위에서 fancy란 말이 나왔는데, 이것은 우리말 '근사한' 또는 '고급'에 가까운 말이다. He drives a fancy car.는 "그는 근사한 차를 몰고 다닌다"는 말이고 We eat out at a fancy restaurant once every week. "우리는 매주 한 번씩 고급 식당에서 외식을 한다"는 말이다. fancy와 같은 뜻으로 posh란 말도 잘 쓴다. He lives in a posh residential area and drives a fancy car.는 "그는 고급 주택가에 살면서 근사한 차를 몰고 다닌다"는 뜻이다.
A: Why don't you drive a fancy car like everybody else? I think you can afford one. B: I can, but I'm pinching pennies for a rainy day. A: Saving money for a rainy day is all right, but don't you think you are being a bit too stingy? B: Maybe I am. But I just don't like splurging on things like cars. A: 자넨 왜 다른 사람들 같이 근사한 차를 몰고 다니지 않지? 그만한 여유가 있을 것 같은데 말야. B: 여유는 있지, 그러나 난 궂은 날에 대비해서 근검 절약하고 있는 거야. A: 궂은 날에 대비해서 돈을 모으는 것도 좋지만 자네는 좀 지나치게 구두쇠 노릇을 한다고 생각지 않나? B: 구두쇠인지는 모르지, 하지만 난 자동차 같은 것에 돈을 펑펑 쓰고 싶지는 않아.
A: Mrs. Jones is a real penny-pincher. B: yes, she is. She clips all the refund coupons and uses them when she goes shopping. A: That's a very good practice, indeed. Those refund coupons really save a lot of money. B: You are right. But most people are just too lazy to clip and use them. A: 존스 씨 부인은 정말 알뜰한 분이에요. B: 네, 그래요. 존스 씨 부인은 할인 쿠폰을 모두 오려 놨다가 쇼핑 가서 쓴다구요. A: 그건 매우 잘하는 일이에요. 할인 쿠폰을 쓰면 정말 많은 돈이 절약돼요. B: 옳은 말씀이에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 게을러서 쿠폰을 오려서 쓰질 않지요.
* refund coupon은 신문.잡지 등에 상품의 판매 촉진 방법으로 인쇄한 딱지. 그 상품을 사면 쿠폰(미국식 발음 은 큐우판)에 적힌 액수만큼 할인받는다.
* Laughing is the best rest. - 웃음은 가장 좋은 휴식이다
After his two terms in the White House. Eisenhower continued his avid interest in golf. One day after a round at a Geogia country club, the locker room attendant stepped up to the former Presidnet and said, "Do you notice anything different since you left the White House?" "Yes," said Mr. Eisenhower. "A lot more golfers are beating me." 백악관에서 두 번의 임기를 마치고 은퇴한 아이젠하워 전대통령은 좋아하는 골프를 계속했다. 어느날, 조지아 주의 한 컨트리 클럽에서 골프를 치고 나자 골프장 종업원이 전직 대통령에게 다가와 이렇게 물었다. "백악관을 떠나신 이후 뭐가 좀 달라진 것이 있습니까?" "있지, 나한테 이기는 사람이 더 많아졌단 말이야"라고 아이젠하워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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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식 토정비결 - 전영순,하정화
<본초류>
10.인삼 - 세계 최고의 고려 인삼
우리나라에 인삼이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백제 온조왕 때 당나라에 갔던 사신이 인삼종자를 가져온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지금으로부터 천 몇백 년 전에 전라도 지방에서 야생 인삼의 종자를 채취하여 재배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인삼의 약효가 인정되어 약재로 쓰기 시작한 것은 고려 중엽 때이며 조선조 초기부터 일반에게 널리 보급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의 강화, 개성과 함께 충남 금산이 인삼의 특산지로 손꼽히고 있다. 특히 금산은 전국 인삼 거래의 중심지인데, 모든 인삼 거래는 이곳을 통해야만 상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금산에 인삼이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전이라고 한다. 그때 강씨(강씨)라는 사람이 산신의 계시로 금산읍에서 4km 떨어진 진악산에서 인삼을 발견하여 보급한 것이라 한다. 금산의 5일장이 열리는 날이면 금산읍 중도리에 있는 인삼시장에는 산더미처럼 인삼이 쌓인다. 또한 그것을 사고 파는 사람들과 외지에서 온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발디딜 틈없이 붐빈다. 게다가 금산 읍내에는 조금 특별한 인삼 가게들이 많다. 이를테면 수삼을 큰 솥에 넣고 푹 삶아낸 찐짜 인삼차를 파는 '인삼다방'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고장의 특산물인 인삼을 둘러싸고 갖가지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해마다 10월이면 인삼 수확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인삼의 보급 등을 위해 '인삼 미인 선발대회', '인삼 심포지엄' 등이 열리며 활쏘기, 씨름, 농악, 불꽃놀이, 가장행렬, 붓글씨 대회, 강신제 등의 '인삼축제'가 벌어진다. '화문석'의 고장이기도 한 강화도의 수삼과 함께 부여 홍삼도 유명하다.
인삼은 기후와 토질에 따라 약효가 크게 달라진다. 인삼 중에서도 최고의 약효를 지닌 것이 고려인삼, 즉 우리나라산(산) 인삼이다. 미국이나 캐나다 등에도 자연산 삼이 자라기는 하지만 그곳에서 자란 인삼은 무처럼 크기만 할 뿐 맛도 쓰고 약효는 우리나라 인삼의 십분의 일도 안된다. 역시 토종이 최고인 셈이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난 인삼의 종자를 다른 여러 나라에서 가져가서 재배해본 결과, 푸짐하게 잘 자라기는 하지만 약효는 별로 없다는 것이 확인 되었다. 역시 한 곳에서 태어난 인간과 자연물은 닮았음을 알 수 있는 일이다. 옛날부터 최고의 영약으로 알려진 산삼은 오갈피나무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인데 그 뿌리가 약으로 쓰인다. 깊은 산 숲 속의 그늘진 곳에서 포기포기 자라며 드물게는 무리를 이루어 자란다. 이것을 인간이 심어 기른 것이 바로 인삼이다. 이처럼 산삼의 재배종인 인삼은 뿌리를 캐서 물에 씻어 겉껍질을 말려 쓰기도 하고 그냥 먹기도 한다. 흔히 인삼이라고 하면 말린 삼(백삼)을 말하는 것이지만 엄밀히 따지면 가공방법에 따라 수삼과 백삼으로 나눌 수 있다. 수확한 것을 그대로 파는 것을 수삼이라 하고, 껍질을 벗겨 햇볕에 말려 파는 것을 백삼이라 한다. 또한 쪄서 말린 것을 홍삼이라 하는데 붉은 밤색을 띠며, 요즘에는 전매공사에서 전담하고 있다. 이들 가공인삼은 주로 5~6년근을 사용한다. 이밖에도 당삼, 산삼 등이 있다. 모양은 대체로 백삼과 비슷하지만 당삼은 약간 노란색을 띤 흰색이고 단맛이 난다. 야생종인 산삼은 뿌리꼭지가 가늘면서 긴 것이 특징이다. 인삼보다 약효도 뛰어나고 값도 훨씬 비싼 편이다. 또한 산삼은 그 모양에 따라 값어치가 크게 달라진다. 예로부터 사람의 모양을 빼닮은 것일수록 영험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왔다. 특히 여자의 나신 모습을 한 동녀삼이나 사내 아이의 발가벗은 모습을 한 동자삼을 최고로 친다. 그리고 오래된 인삼일수록 약효가 뛰어나다. 최근에 고려인삼은 수출품으로 외화 획득에도 이바지하고 있다. 인삼을 가공한 껌, 캔디, 과자 등이 개발되어 판매되고 있으며, 특히 일본이나 중국 관광객에게 인기가 높다.
성분
우리 토종 인삼에는 사포닌 배당체(4~5%) 날기름(0.05~0.25%), 스테로이드, 탄수화물, 유리아미노산, 비타민, 효소, 기름, 수지, 무기물 등이 들어 있다. 이 중에서도 약효의 중심이 되는 것은 사포닌 성분이다. 사포닌은 피부에 직접적인 작용을 가하여 세포를 부활시킨다. 즉, 새로운 피부 세포를 자꾸 만들어 생기있고 탄력있는 피부를 유지시켜 주는 것이다. 또한 최근에 밝혀진 것으로 다당류인 파나키산이라는 성분이 있다. 이것은 혈당치를 내리기 때문에 당뇨병에 효과가 있으며 피부의 수분을 보호해주는 작용을 한다. 이와 같은 인삼의 성분을 활용하여 요즘에는 여성들 사이에서 인삼미용법이 각광을 받고 있다.
쓰임새
인삼은 보통 대추, 생강, 밤 등을 적절히 배합하여 달여 마시는 것이 가장 무난한 방법이지만, 수삼은 그냥 날것으로 먹거나 꿀을 발라서 먹기도 한다. 수삼을 썰어서 꿀에 재웠다가 먹는 방법은 별로 좋지 않다. 꿀에 잰 인삼은 이틀 정도 지나면 일종의 독소 성분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각종 의서에는 인삼에 관한 기록이 약방의 감초보다 더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기록에는 인삼이 신비한 효험을 발휘하는 영약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 중에서 몇 가지 예만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약용식물사전}에는 '인삼은 보혈 강장은 물론 병후 소약, 정력감퇴, 노쇠, 영양부족, 위장병, 신경쇠약, 폐병, 빈혈증, 신경통, 변비, 감기 등과 기타 만병에 뛰어난 효험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본초강목}에는 '인삼은 모든 허증과 현훈, 혈붕, 토혈 등을 다스린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보제방}에는 '비위가 약하고 식욕이 없을 때 생강즙과 인삼가루, 꿀을 넣고 달여서 고약같이 만든 다음 미음에 타서 먹으면 좋다'는 처방이 나온다. 이밖에도 지금까지 알려진 인삼의 효능은 다양하다. 즉, 강심작용, 건위작용, 노화예방, 간기능 회복, 두뇌활동 촉진, 조혈작용 등의 효험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뿐만 아니라 인삼은 현대인의 불치병인 암을 억제하는 작용을 하고 고혈압, 동맥경화, 당뇨병, 스트레스, 갱년기 장애, 냉증, 알콜 중독, 류머티즘, 알레르기, 피로회복, 피부미용 등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다. 인삼이 인체에 주는 효과에 대해서는 한 가지 임상실험의 예를 통해서 실감할 수 있다. 평균 체중이 1.4kg인 수토끼 집단에 2개월 동안 날마다 인삼가루 0.5g씩을 먹인 다음 부고환을 떼어서 현미경표본으로 만들어 정충의 체외생활 지속시간과 활동 상태를 보통 토끼와 비교해 보았다. 그 결과 인삼을 먹인 토끼 집단은 먹이지 않은 토끼들보다 정충 형성이 우세했고 수도 많았으며 운동도 활발하였다. 또한 정충의 체외생활 지속 시간도 무려 7시간이나 더 길었고 고환 자체의 무게도 0.4g이나 더 무거웠다. 민간에서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요법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천식으로 숨이 찰 때는 인삼가루를 하루에 5~6회, 각 한 숟갈씩 열탕으로 먹는다. *비위가 허약하고 식욕이 없을 때 생강즙에 인삼가루 4냥, 벌꿀 10냥을 넣고 고약같이 달여놓고 이것을 다시 따뜻한 물에 1숟갈씩 타서 먹는다. 위에서 열거한 바와 같이 인삼은 훌륭한 약효를 지니고 있지만 체질에 따라서 적합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따라서 인삼을 먹기 전에는 자기 체질에 인삼이 맞는지의 여부부터 알아보아야 한다. 이를테면 인삼을 먹고나면 얼굴이 붉어지거나 가슴이 답답하고,혹은 피부발진을 일으키는 사람은 가급적이면 인삼을 먹지 않는 편이 좋다. 이런 체질을 가진 사람을 소양인이라고 하는데 비위에 열이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인삼은 비위기능이 약하고 체질이 냉하며 몸이 허약한 소음인에게 가장 적합한 약재이다.
이것이 토종
인삼은 중국에서 다량 수입되고 있다. 근래에 시중에서 유통되고 있는 중국산 백삼은 길이에 비해 지나치게 굵고 표면이 울퉁불퉁하게 거칠며 약효도 거의 없다. 중국 사람들도 옛날에는 우리나라 산 인삼을 사들여서 보약재로 썼다고 하는데 이제는 거꾸로 우리가 중국산을 사들이고 있는 것이다. 중국산 인삼은 다리가 잘 발달되지 않았고, 있더라도 한두 개가 고작이다. 그리고 삼 머리가 길며, 홍삼의 경우 암갈색으로 어두운 빛을 띠고 있고, 백삼은 윤기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중국산 인삼은 냄새도 좋지 않다. 반면에 토종 인삼은 잘 발달된 다리가 2∼4개 있으며 삼 머리가 건실하고 짧다. 홍삼의 경우 적갈색, 또는 담갈색으로 윤택하며 백삼은 깨끗한 유백색이며 인삼 특유의 향내가 난다. 토종 백삼을 구할 때는 우선 인삼연구소의 품질검사 표시를 확인하거나 인삼 전문상가를 찾아가서 흠집이 적고 곧게 뻗은 것을 골라야 한다. 수삼은 장기간 보관이 어려워 외국산은 거의 없다. 그러나 국산이라도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마구 섞어파는 일이 흔하므로, 덤으로 몇 뿌리 더 얻는 데 현혹되지 말고 크기가 고르게 묶인 것을 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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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고려 불상의 이모저모 - 강희정(이화여대 박물관 학예연구원)
바위에 새긴 불상
거대한 석상의 또 다른 예로 마애불이 있다. 커다란 바위나 암벽에 낮은 부조나 선각으로 불상을 조각한 마애불은 3에서4미터에 이르는 자연 암벽을 몸체로 사용하고 머리 부분은 별도의 돌로 만들어 올린 혼합형과 머리까지 암벽에 새긴 완전한 마애불의 두 종류가 있다. 안동 이천동의 마애불은 앞의 방식을 따랐다. 신체는 두루뭉실 엉성하게 조각하고 머리만 원각으로 따로 새겨 얹은 형상인데, 낮은 보관과 천개를 올린 것이 흥미롭다. 보살상이 머리에 쓰고 있는 보관은 당대의 실제 복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여성화 경향이 더욱 현저해진 고려의 보살상은 특히 오대, 복송, 원으로 이어지는 중국왕실의 지체 높은 여인네들의 장신구나 머리 꾸밈에 많은 힌트를 얻은 듯하다. 물론 이는 고려만의 일은 아니다. 중국 내부나 일본에 이르기까지 인도적 모델을 찾기 어려웠던 시기에 폭넓게 사용되었던 방법 중 하나였다. 고려시대 석불 중 두드러지는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천개이다. 고인돌의 뚜껑돌처럼 생긴 천개는 말 그대로 ‘하늘 뚜껑’인 셈인데 기능에 대한 정설은 없다. 보통 노천에 세워진 석불이나 마애불에 직접적으로 눈비가 닿는 것을 막기 위해 모자처럼 불상머리 위에 얹은 것으로 생각된다. 천개는 모양을 내서 곱게 다듬기도 했으나 납작한 판석을 그대로 올려 놓은 것도 있다. 또 은진미륵처럼 불상 조성 당시에 미리 천개를 고려하여 만든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이전 시대의 조각에 천개만을 따로 만들어 얹은 경우도 적지 않다. 어느 쪽이든 천개는 법당이 아닌 야외에 세워진 고려석불의 중요한 특징이라 해도 좋을 듯싶다. 충주 월악산 덕주사의 마애불, 천원 삼대리의 마애불은 높이가 각각 13미터와 7미터에 이르는 대불이다. 역시 얼굴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부분만 얕은 부조를 하고 나머지는 선각으로 처리하였다.
덕주사에는 신라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이 자리에서 회한의 눈물을 뿌렸다는 전설이있다. 그러나 규모와 수법은 통일신라의 것과 거리가 있어 실제 절의 창건 여부와는 관계가 없다. 이들 거대한 석조불상은 통일신라기에 비해 조형적 완성도가 떨어진다. 이는 조각가의 솜씨가 통일신라기에 미치지 못하기도 하지만 미의식보다는 불상의 규모를 더욱 중시한 데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고려시대 마애불은 통일신라기와 달리 중앙의 미의식이 지방의 미술을 좌우할 만큼 파급력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지방민의 종교적 열의가 자유롭게 분출된 결과물이다. 불상의 대형화 움직임은 신라하대인 9세기 경부터 전국 각지에서 태동하여 고려 건국과 더불어 한층 강화되었다. 충분히 중앙집권화 되지 않은 상태에서 중앙정부로는 새로 일으켜 세운 불교국가의 위상과 저력을 과시하려는 의도에서, 지방세력가는 부처님의 힘을 빌어 자신들의 기득권을 강화하려는 방편에서, 경쟁적으로 더 큰 불상을 세웠던 것이다. 부처의 위신을 빌어 힘을 키우려는 세력가나, 대중들에게 부처의 위엄을 보여 주려는 교단의 바람이 영험 있어 보이는 거대한 석불상을 양산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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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랍문화의 이해 - 공일주
3. 언어의 이중구조
집단적인 이중구조
특정국가에서의 교육정책이 언어집단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자연히 여러 계층을 만들게 된다. 이를테면 외국어 구사력이 뛰어나지만, 국어를 전혀 모르는 집단은 국어에 적대적이고 외국어를 잘하지 못하는 집단에 대해서도 적대적이다. 그래서 반작용으로 외국어를 잘하지 못하는 집단에 외국어를 잘하는 집단과 적대적인 위치에 놓인다. 개별적인 이중언어 구조를 없애는 데 필요한 조건들이 고려된다면 위와 같은 집단적 이중언어 구조도 결말이 날 수 있다. 역사적인 원인에 따른 집단적 이중언어 구조는 현재 알제리, 모리타니아, 소말리아, 지부티의 이중언어 구조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이들 나라는 첫째, 식민지의 결과로, 둘째, 독립 후 국가가 계속해서 실시한 교육적 노력으로 발생한 결과이다. 이집트에서의 개별적 이중언어 현상은 그것의 존재를 알게 해 주는 특징이 있다. 즉, 사회의 문화적 결속력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과 이중언어 구조의 사용사가 상류층이란 사실이다. 그들은 아랍어를 국어로서 매우 잘 구사하면서도 민족문화에 젖어 있었고, 동시에 아랍어에 기여할 정도로 외국어도 잘 하였다. 선진외국에 긍정적 개방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언어 구사력을 통해 새로운 사상의 도입에 기여했다. 물론, 시리아를 제외하고 동부의 모든 국가는 대학의 과학, 문학, 인문학 분야의 교육어로서 이중언어 구조를 잔존시켜야 만했다. 따라서, 외국어를 싫어하지 않으면서도 민족어를 사랑하고, 개방을 거절하지도 않으면서도 함께 융화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다. 여기에는 전술한 이중구조를 거절하지 않고 모든 생각 위에 아랍어가 군림하기를 바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영속적인 또는 단계적인 이중구조는 그 둘 각각이 일반적이거나 특수한 이중언어 구조가 된다. 영속적이고 일반적인 이중언어 구조는 튀니지 같은 언어구조이고, 일반적이며 단계적인 것은 모로코의 언어구조이며, 영속적이고 특수한 언어구조는 동부 아랍국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 영속적, 단계적, 일반적, 특수한 이중구조가 함께 섞어 있어 그 특징이 분명하지 않는 모리타니아, 소말리아, 지부티가 있다. 또, 민족 해방전선의 제4차 전당대회의 결정과 1979-1980년 회기의 당중앙 위원회의 결정, 그리고 민족어의 최고 위원회가 창립되어 기본적 방참이 세워지기 전의 알제리를 들 수 있다.
예부터 유산으로 내려온, 그리고 습득되어진 이중언어 구조가 계속되는 동안에 마그립 국가에는 다음 세 가지 경향이 나타났다. 첫째, 역사적인 뿌리를 프랑스 식민주의 학교에서 볼 수 있다. 이들 학교는 점령 당사국의 제안으로 동양학자들이 세웠지만, 아랍어, 문학에 능란한 이중언어 사용자들을 쫓아 내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 종교와 관련된 문제에만 번역의 기능을 떠맡게 하거나, 민족 운동가의 활동에서 간첩활동을 했다고 그들을 쫓아 냈다. 그들 중에는 아랍어는 종교와 의식의 언어일 뿐이고, 프랑스어(마그립 국가)나 영어(동부국가)는 세속의 언어이자 과학의 언어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상당히 널리 퍼져 있었다. 오늘날까지 이런 경향은 아랍어가 뒤떨어진 언어이고, 감정적이며 비이성적인 언어라는 견해를 가진다. 둘째, 앞선 경향에 반대되는 입장으로 국민의 광범위한 인구를 포함한다. 그들 중의 대부분이 아랍어를 쓰는 문화시민이고 소수는 종교나 애국심에 따라 나뉘어진 이중언어 사용자들이다. 이들은 교육의 원칙으로서 이중언어 또는 다중언어 구조를 거절하지 않는다. 물론, 이 때 이중 또는 다중언어 구조는 잘 조직된 규칙에 따라 제약을 받게 되고, 그들은 세계어인 영어를 제1외국어가 되기를 우선하는 경향이 짙다. 셋째, 앞의 두 경향의 중간 위치를 같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날 모든 일에 민족어(국어)가 열정적으로 지배되지 못하고, 동시에 이를 영속적, 그리고 일반적 이중언어 구조라 부를 수도 없어, 아랍어가 먼 장래에 지배적이지도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부류이다.
아랍사회의 성인 개개인을 결속시키는 데 필요한 이중언어 구조의 중요성을 앞에서 언급했다. 그러나 초기단계에서 하나 이상의 언어가 지배층 권력의 일부 입장에 따라 자라나는 세대에게 매우 중요한 영향을 준다. 아랍헌법에 의하면, 모어는 사실 그 국가의 민족어가 되고, 동시에 유일한 공용어가 된다. 그래서 이 공용어는 그 사회의 학문, 경제, 정치, 문화, 사회생활 등 모든 영역에서 사용되어야 한다. 청소년과 어린이들의 생활과 이들 언어가 분리될 수 없으므로 청소년과 어린이들의 언어습득 단계에서도 다른 언어를 접하게 된다. 현대 아랍 교육학자들 중에는 인간은 한번에 두 개의 언어교육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것은 각 언어가 사고와 감정을 하나의 길로만 표현하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에게 실시한 일련의 실험결과를 통해서도 이러한 견해에 지지를 보낸다. 초기단계에서 어린이가 습득한 외국어 낱말은 다만 앵무새처럼 따라 하게 되고, 그 의미는 완전하게 결손된다고 생각하였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다. 들을 이에게 소리로서 그 의미를 전하게 되고, 그 언어는 사회 속에서의 가치를 전한다. 따라서, 그 국가에서 따르고 있는 언어의 이중언어 구조체계 내에서 외국어와 함께 어린이가 배우는 민족어의 낱말의미는 각각 달라질 수밖에 없다. 세계의 교육계를 휩쓸었던 이 견해는 적어도 조기에 어린이는 모어와 경쟁이 되는 언어를 수용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심리 언어학적인 이 연구는 민족어 이외에 다른 언어를 추구하려고 하는 어린이는 10살 전에는 두 언어에 대한 이해력이 배증하지만, 그 중 하나는 자발적으로 말하고 다른 하나는 언어와 사고에 있어 노력을 기울여 말한다고 한다. 물론, 보편적인 언어풍토 속에서 최종적인 형태로 안정이 되는 대신에, 두 언어 사이에 자주 주저하게 된다. 어린이는 두 국가로, 두 역사로, 두 재능으로 나뉘게 되고, 각 언어는 독특한 특징을 가진다. 그래서 둘 중의 어느 한 언어가 선두에 서기 위해 다른 언어를 지배하게 되고 어린이에게서 선두위치를 빼앗으려 한다. 현대 아랍 연구자 중에는 10살도 되기 전에 아이에게 교육어로서 외국어를 강요하는 사람들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곧 어린이에게 그의 역사가 아닌 삶을, 그의 조상이 아닌 조상에게 속하길, 그리고 그의 고국이 아닌, 그의 부족이 아닌 것에 속하길 강요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어쨌든 그들은 아이가 천재가 아니고서는 12살 또는 15살 되기 전에 두 언어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심리적, 그리고 교육적인 면 이외에도 문화적인 면이 있다.
언어와 문화 사이의 상호 관련성은 곧 학문(이론)과 실제라 할 수 있다. 학문은 지식이고 여기서 지식은 문화의 기본요소 중의 하나이며, 실제는 지식을 여러 생활분야에 적용시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실제는 살고 있는 실제상황에서 학문적 이론을 구체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문과 실제는 밀접한 조화를 이룬다. 사실 문화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학문과 실제를 쪼갤 수 없는 것이다. 문화와 언어 사이의 관계에 바탕을 두고 볼 때 학문은 문화 속의 기본적인 요소이고, 동시에 실제에 필요한 배경을 이룬다. 그런 면에서 사회 속에서 고유한 문화를 찾을 수 없고, 다만 민족어가 그 사회의 문화와 사상을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현재의 아랍국가에는 원래 고유문화와 수입된 문화 사이에 갈등과 이중구조가 있다. 국가들의 개성을 희박하게 하고 그의 문화를 불완전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문화수준의 향상과 문화발전을 실현시키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현대사회에서 선진사회가 언어와 문화, 그리고 문명 사의의 완전한 조화에 그 바탕을 두고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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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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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빨리 밥 먹어라
"잘못했다고 빌어라." 이 년 만에 집에 들어서는 내게 하신 할머니의 말씀이다. 이 년전, 나는 할아버지를 속이고 어릴 때부터 꿈꿔 오던 수도의 삶을 선택하였다. 그때 할아버지의 반대가 너무 심해 나는 할아버지의 뜻을 따르겠노라고 말씀 드린 뒤 몰래 수녀원에 갈 준비를 하였다. 마지막까지 사실을 몰랐던 가족들에겐 본의 아닌 허락을 받아냈지만 할아버지께는 끝내 아무런 말슴을 드리지 못했다.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고 있던 나는 수녀원에 가기 전까지 할아버지께 잘해 드리려고 노력했다. 월급날엔 당시 구하기 힘들었던 청자 담배를 사서 부치기도 하였다. 할아버지는 내가 봉투째 보낸 첫 달 월급을 돌아가실 때까지 안 쓰고 지갑 속에 넣어 다니며 동네 어른들게 자랑하실 정도로 나를 끔찍하게 생각해 주셨다. 일찍 부모를 여윈 할아버지는 장남이신 나의 아버지가 6.25전쟁 때 전시하자 아버지에게 쏟았던 사랑을 손녀인 나에게 주셨다. 그런 사랑을 어릴 때는 잘 몰랐지만 커 가면서 그 사랑이 나의 마음에 늘 채워져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말씀은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술을 드실 때마다 "내가 오래오래 살아서 우리 손녀 시집갈 때 상객으로 따라가야지"하시며 눈물을 글썽이셨다. 그런 할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수녀원에 입회하였고, 처음엔 직장에 있는 것처럼 편지를 드렸다. 그러나 거짓말로 쓰는 편지가 어려워 점점 편지쓰는 것도 줄였다. 그러뎐 어느 날 할아버지께서 외출하셨다가 내가 수녀원에 간 사실을 듣게 되었다. '이젠 날벼락이 떨어지겠구나'하며 온 가족이 떨고 있는데 할아버지께서는 눈물만 흘리셔서 또 한번 가족들을 놀라게 하셨다. 그 엄하신 할아버지께서 우시기만 하시니 가족들의 마음은 더욱 아팟을 것이다. 수녀원에서 보내 주는 휴가도 할아버지께 붙잡힐 것 같아 처음에는 가지 않았다. 집에서도 언젠가는 내가 돌아오겠지 하고 퇴거도 해 주지 않았다. 그런데 선거를 앞두고 주민등록 정리를 해야 된다며 집에서 나를 데리러 왔다. 집으로 들어서는 나에게 할머니는 "할아버지께 잘못했다고 빌어라"하셨다. 내가 방에 들어서자 누워 계시던 할아버지께서는 벽쪽으로 등을 돌리셨다. 나는 할아버지 등 뒤에서 울기만 했다.
"배고프겠구나. 어서 건너가서 밥 먹어라."
갑자기 할아버지의 다정한 음성이 들렸다. 그제서야 나는 "할아버지, 잘못했습니다. 저는 잘 있었지만 할아버지 걱정에....."라고 소리내어 울면서 용서를 빌었다.
"빨리 밥 먹어라."
그 한마디로 모든 것이 다 용서되엇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날 저녁, 밤을 세워 가며 할머니와 나는 수녀원 이야기를 했다. 할아버지도 옆에 누우셔서 다 들으시고 수녀원도 사람 살 만한 곳이란 걸 이해하셨고, 또 내 얼굴이 여전히 밝고 행복해 보임을 아시고 모든걸 받아주셨다. 할아버지의 큰 사랑은 나의 거짓말까지 다 품어 주신 것이다.
이엘리아 님/경남 마산시 합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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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철학/구비 |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11. '행복의 원천은 덕에 따른 행위': -안티스테네스, 키니코스 학파 창설(기원전 4세기 초)
그때 세계에서는 BC380년경: 이소크라테스(파네규리코스)
아리스티포스의 이러한 쾌락주의 이론은 그 안에 어려운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그 하나는 어떻게 하면 연속적인 쾌락을 유지하며 보다 강렬한 즐거움을 누리되, 쾌락이 고통에 침해 되지 않도록 하느냐는 것이다. 그런 문제에 부딪치게 되면 자연히 그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이성적인 사고와 식견(Pronesis), 즉 지혜가 요청된다. 그러나 그들은 쾌락이 목적이고 식견은 수단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이성적 사고가 등단하지 않을 수가 없어진다(인간은 이성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방향을 추구하다 보면 학구적인 이론보다는 생활의 지혜가 요청되며, 그들은 그것을 높은 의미의 교양이라고 보았다. '교양을 얻지 못할 바에는 거지가 되고 싶다'든지, '교양의 상실은 인간성의 상실이다'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교양은 수양과 통하기 때문에 밝은 인생의 지혜가 중요하다. 질투, 격정, 미신에서 벗어나 자유자재로 즐길 수 있는 삶은 인격적 승화와 더불어 찾아온다고 가르친다. 그의 제자 가운데 헤게시나스는 즐거움의 한계와 종말을 느끼면 자살로써 그 고를 벗어나야 한다고 가르쳐, 역사상 최초의 '죽음을 권유하는 사람'이라는 아름답지 못한 칭호를 얻기도 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중 BC 370년경에 죽은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는 키니코스(Cynicos)학파를 창설한 사람이다. 그도 소크라테스의 학문적 방법이나 이론적 학설보다는 소크라테스의 정신은 윤리적인 면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본다면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스승의 윤리적인 삶과 인격의 고매함에 더 큰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안티스테네스도 소크라테스의 정신 중 윤리적 행위의 목적은 행복에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이론보다도 실천에 속하는 문제라고 보았다. 참행복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세속적인 관심들로부터 떠나 정신적인 단순성과 정직한 노동에서 얻어진다고 보았다. 행복의 원천이 되는 덕에 따른 행위는 무욕과 자기억제를 전제로 하며, 바른 습관과 훈련을 쌓아 인격을 높이는 일이라고 가르쳤다. 내면적인 자기만족과 정신적인 자유가 없는 곳에는 행복이 머물 곳이 없다는 무욕의 소극성을 소중히 여긴 셈이다. 이러한 안티스테네스의 교훈이 제자들에게 이르러서는 더욱 소극적인 방향으로 흘렀다. 마침내는 무욕, 모든 현실과 가정 및 사회적인 책임으로부터의 소외성, 반문명, 현실회피, 기성사상과의 절연 등을 강조했고, 자연상태에의 복귀가 소망스러운 덕과 윤리적 귀착점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세월이 지나는 사이에 키레네 학파와의 대립적 위치를 택하게되고, 심지어는 쾌락주의자들을 통렬히 비판하기에 이른다.
시노페의 디오게네스(Diogenes, BC 323년경 죽음)의 사상이 그 뜻을 대신할 것 같다. 그들은 "쾌락에 속하기보다는 차라리 광인이 되겠다" 든지, 쾌락에 굴복하거나 노예가 되지 않는 불사의 여왕인 '자유'만이 궁극적인 목표라고 믿기에 이르렀다. 디오게네스에게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뒤따르고 있다. 제자들 중의 크라테스와 그의 애인 히파르키아 같은 이들은 부유한 재산을 다 포기하고 디오게네스의 제자가 되어 거지와 같은 생활을 즐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디오게네스는 소유라고는 없었다. 절구통 하나를 갖고 있어 낮에는 통 위에 앉아 가르치고 밤에는 그 속에 들어가 잠을 잤다는 얘기다. 알렉산더 대왕이 찾아왔을 때도 아침 햇볕이 쪼이는 것을 막지 말아달라는 요청을 하였을 뿐, 대화의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극단의 청빈과 무욕에서 정신적 안정, 평화, 자유를 추구했다는 이야기의 반증일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리스티포스와 키레네 학파에서는 후에 에피쿠로스 학파가 계승되었는데, 안티스테네스와 키니코스 학파를 계승한 것은 스토아 철학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소크라테스의 또 한 중요한 제자로 메가라의 에우클레이데스(Eukleides, BC 400년경)가 있다. 그는 아테네에 법에 따르면 잡혀서 사형을 받아야 하는 적국 출신이지만, 아테네에 몰래 들어와 소크라테스의 오랜 제자가 되었고, 스승의 임종에도 참여했었다. 스승의 사후 귀국해서는 엘레아 학파의 일과 소크라테스의 선(agaton)을 합치시켜 선은 유일한 실재라는 철학적 이론을 전개시켰다. 먼저 얘기한 두 학파보다는 오히려 철학적 이론을 전개시켜준 셈이다. 소크라테스의 개념을 선의 위치에서 실념화시켜주는 업적을 남겼다. '식견, 신, 정신, 덕과 같은 명목을 가지고 부른다고 하여도 유일한 존재자, 즉 불면이며 자기동일인 것은 선이 있을 뿐이다'는 뜻을 남겨주어 플라톤을 연상케 하는 면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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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가루처럼 내리는 비가 '가랑비'이고 이슬처럼 내리는 비가 '이슬비'
'가라고 가랑비, 있으라고 이슬비', 이러한 말을 자주 들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음상을 연상하여 만든 '시'에서나 쓸 법한 말입니다. '이슬비'야 '이슬'처럼 내리는 비라서 붙은 이름이니까,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랑비'는 어떻게 내리는 비일까요? 어떤 분은 '가랑가랑' 내리는 비라고 하더군요. '가랑가랑'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까, 그냥 의성 의태어인데 어떻게 설명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비가 감기가 들었느냐'고 농담을 한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가랑비'는 그러한 뜻이 아닙니다. 원래 '가랑비'는 '가라비'('가라'는 모두 '아래아자')입니다. 그것은 '가루비'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작은 것을 나타내는 접미사 '이응'이 붙은 것입니다. 따라서 가루처럼 내리는 비가 가랑비이고 이슬처럼 내리는 비가 이슬비입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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