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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0 호
2006.09.28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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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 새벽이슬이 언제 내려 언제 가는지 지켜보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새벽이슬은 부끄럼이 많습니다. 해가뜨면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 숨어 버리기 일쑤입니다. 가을 한복판, 떨어질 낙엽을 위로 하며 새벽이슬 내려 적셔주고 가는 요즈음, 말없는 낙엽들은 내년 새싹을 기대하며 떨어질 준비들을 하는지 말이없습니다. 나도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줄기를 선명히 보이며 사뿐히 내려앉은 잎을 검지와 엄지로 주워 책사이로 밀어 넣듯이 많은 단어들 언제든 꺼내 볼 수 있도록 차곡차곡 정리해서 꽂아 넣어야겠습니다. - 風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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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제44회 동아문학상 작품공모
1. 공모부문 및 분량 시 3편 이상 5편 내외 소설 200자 원고지 80장 내외 1편 희곡 200자 원고지 80장 내외 1편 시나리오 200자 원고지 150장 내외 1편 *작품은 원고지가 아닌 A4용지를 이용하여 일반양식으로 작성해야 하며, 분량은 원고지로 환산하여 위 조건을 지켜주시면 됩니다. *희곡 및 시나리오는 둘 중 한 부문만 채택함.
2. 시상 내용 시 60만원 소설 80만원 희곡 및 시나리오 50만원 *희곡 및 시나리오는 둘 중 한 부문만 채택함.
3. 응모자격 국내 대학(전문대 포함) 재학생, 휴학생 *특수대학생도 가능합니다. *대학원, 대학 부설 사회(평생) 교육원생은 응모할 수 없습니다.
4. 접수기간 및 방법 기간: 2006년 10월 31일까지 방법: 우편 및 인터넷 접수 *응모작 표지에 ▲응모부문 ▲소속 학교, 학과(학부) 및 학년 ▲성명 및 주민등록번호 ▲연락처(집주소/연락처/이메일) 기재 *마감일 소인까지 유효하며 이메일 접수는 당일 24시까지입니다.
5. 접수 및 문의처 주소: (우)604-714 부산시 사하구 하단 2동 동아대학교 승학캠퍼스 학생회관 3층 306호 동아교지편집위원회 전화: (051)200-6779 이메일: du-2001@hanmail.net 홈페이지: http://gyoji.donga.ac.kr
6. 발표 및 시상식 2006년 12월 중에 동아교지 홈페이지에 발표하고 개별 연락함. 시상식은 2007년 1월 중에 개최 *당선작은 동아교지 동아문학상 부분에 개최
7. 기타 제출한 원고 및 서류는 반환하지 않음. 동일 작품을 타문학상에 중복 응모할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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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개인이나 국가 모두에 가장 두려운 일은 권력의 상실이 아니고 감각의 상실이다. / 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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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과학/예술/교육 |
- 조화유의 미국영어 - 일반인을 위한 경제생활 영어
11. I'm a little short these days.
미국에서 Bob Hope 못지않게 유명한 원로 코미디언으로 Mickey Rooney란 땅딸보 노인이 있다. 키는 5척밖에 안 되는 사람이 여자복은 있어서 Ava Gardner를 비롯하여 일곱 번인가 여덟 번 미인들과 결혼한 경력을 가진 정력가이다. 이 Rooney가 일곱 번째 이혼을 한 직후 TV의 talk show(대담 쇼)에 나온걸 본 기억이 나는데, 사회자가 How have you been lately?(요즘 어떻습니까?)라고 묻자 Rooneys는 As you know, I've just got my seventh divorce, so I've been a little short lately.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익살스런 사회자가 Everybody knows you are a little short.라고 말했고 방청객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왜 웃었을까? 이 TV장면을 보고 함께 웃을 수 있는 사람이면 영어를 상당히 잘한다고 자부해도 좋다. short란 말은 '키가 작다' '짧다'는 뜻 외에 '돈이 좀 모자란다' 즉 short on money란 뜻도 있다. 따라서 Rooney가 한 말 I've been a little short lately.는 "(일곱 번째 이혼을 하고 위자료를 주고 나니) 요즘 주머니 사정이 좀 안 좋다"는 뜻이었는데, 사회자가 한말 Everybody knows you are a little short.는 "당신이 키가 좀 작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똑같은 short가 두 가지 다른 뜻으로 쓰였기 때문에 이런 재미있는 폭소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주머니 사정이 나쁜 것은 broke라고도 한다. 돈 좀 꿔달라고 말하는 친구를 보고 sorry, I'm broke, too.라고 하면 "미안해, 나도 빈털털이야"란 말이 된다. dead broke라고 하면 broke를 더욱 강조한 말이 된다. I've been in the red lately. 또는 I've been in the hole lately.는 "난 요즘 적자 상태야"란 말이다. I can hardly keep my head above water.는 "나는 요즘 내 머리를 물 위에 내놓고 있기가 어렵다"는 직역이 되지만 역시 주머니 사정이 안 좋다는 뜻이다. 이와 똑같은 뜻으로 I can hardly make ends meet. 또는 I can't make ends meet.란 말도 자주 쓰인다. 또 I have a tight pocketbook.도 역시 주머니 사정이 나쁘다는 뜻이고 I have a cash flow problem은 돈이 없다는 것을 점잖게 표현한 말이다.
Tom: Could you lend me a few bucks, Jim? Jim: Sorry, I can't. I'm broke, too. Tom: That's all right. I've been a little short since my parents stopped sending my allowance. Jim: That's too bad. I guess you can hardly make ends meet. Tom: I can't. I wish my parents knew that. 탐: 짐, 돈좀 빌려 줄 수 있겠니? 짐: 안 되겠는데. 나도 빈털털이야, 미안해. 탐: 괜찮아. 우리 집에서 생활비 송금을 중단한 뒤 주머니 사정이 나빠서... 짐: 그것 참 안됐군. 지내기가 매우 곤란하겠구나. 탐: 말이 아니지. 우리 부모님이 이런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다만.
미국 사람들은 solvent라는 말도 자주 쓴다. 이것은 '지불 능력이 있다'는 뜻의 형용사이다. My company is not bankrupt. It is still solvent.는 "내 회사는 파산하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지불 능력이 있다."는 말이다.
Brown: Do you think Mr. Miller's company is solvent? Smith: I don't think so. It's deep in red ink. Brown: What about Mr. Parker? Smith: He isn't solvent, either. He defaulted on his loan payment. Brown: I guess the current recession is really serious. 브라운: 밀러씨의 회사는 지불 능력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스미스: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그 회사는 큰 적자예요. 브라운: 파커씨는 어때요? 스미스: 그 사람도 지불 능력이 없어요. 그는 대부받은 돈에 대한 월부금도 못 냈어요. 브라운: 요즘 불경기가 정말 심각한가 보군요.
* Laughing is the best rest. - 웃음은 가장 좋은 휴식이다 A local weatherman was so often wrong in his predictions that he became the laughing stock of the community. So he applied for a transfer to some other city. "Why do you wish to be transferred?" asked his boss. "Because," the forecaster replied, "the climate here doesn't agree with me." 어떤 지방의 일기 예보 담당자가 하도 틀린 예보를 많이 했기 때문에 그 지방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도시로 전근을 신청했다. "전근을 원하는 이유가 뭔가?" 그의 상사가 물었다. 그러자 그 일기 예보 담당자는 "이 지방 기후가 제 체질에 맞지 않아서요"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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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지식/생활/건강/의학 |
- 음식 토정비결 - 전영순,하정화
<곡류>
9.메밀 - 도인들의 선식
아무리 문학에 문외한이라도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 소설은 휘영청 밝은 달빛과 어우러져 하얀 꽃이 만발한 메밀밭을 지나는 두 사내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소설의 배경으로 나오는 메밀꽃이란 게 소설의 쓸쓸한 분위기 만큼이나 실제로도 우리 조상들의 굶주리고 슬픈 삶과 사연을 함께 하고 있다. 흉년이 들면 잡곡으로 연명해야 했던 우리나라에서 메밀은 구황작물로 활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여러가지 구황작물 중에서도 메밀은 특별한 대접을 받기도 했다. 옛날 선인들은 메밀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메밀이 소화가 잘되는 식품이기 때문이다. 도를 닦는 사람들은 많이 먹지 않기 때문에 위장 기능이 약해진다. 따라서 소화가 잘되는 식품을 섭취해야 했던 것이다. 메밀은 여뀌과에 속하는 식물로, 알맹이는 흑갈색의 딱딱한 껍질에 둘러싸여 있으며 정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이것을 도정하면 껍질은 떨어져 나가고 가루가 나오는데 메밀 열매에서 가루가 나오는 비율은 70~75% 정도이다.
메밀의 재배역사는 비교적 짧다. 원산지는 동아시아의 온대 북부, 아무르강, 만주, 바이칼호 부근이다. 7~9세기의 당나라 때 일반에게 알려져 10~13세기 경에 널리 보급되었다고 한다. 문헌상의 기록을 보면 서기 713년 경에 나온 {식료본초}에 메밀에 관한 기록이 나오며 이보다 시대적으로 앞선 {제민요술}의 잡설에 메밀가꾸기에 대하여 상세하게 나온다. 그러나 최근에 중국 한나라 시대의 분묘에서 메밀이 출토된 사실로 미루어 메밀의 역사는 지금까지 밝혀진 연대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기원전 8세기 이전에 중국으로부터 들어왔고, 이후 일본으로 전했다고 한다. 일본에서 8세기 경에 이미 메밀 재배를 장려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원산지에서 가까운 우리나라에는 그보다 훨씬 이전에 재배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우리나라의 옛 문헌에서 메밀에 대한 기록은 {향약구급방}에 최초로 나온다. 메밀은 생육기간이 짧고 추위에 잘 견딘다. 파종해서부터 약 2개월 후 수확할 수 있다. 환경에 대한 적응성이 강하고 한대지방이나 높은 산지에서도 잘 자라므로 옛날부터 구황작물로 이용되어 왔다. 즉, 극심한흉년이 들었을 때 대작이나 토양이 척박한 흉작지대에서 응급작으로 재배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구황식물로 우리 조상들의 배고픔을 면하게 해주었던 메밀은 언제부턴가 메밀국수, 냉면 등의 특수한 향토음식 문화를 발전시켜 주었으며 근래에 와서는 건강식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성분
메밀의 과피를 제외한 메밀분의 주성분은 탄수화물로 전분(녹말)이 주가 되는데 아밀라제(Amylose) 25%, 아밀로펙틴(Amylopectin) 75%로 구성되어 있다. 메밀에는 특히 필수 아미노산과 식물성 단백질이 풍부하며, 비타민 B1과 B2, 칼륨, 인산 등도 많이 들어 있다. 또 모세혈관을 튼튼하게 해주는 성분도 들어 있어 혈압환자에게는 아주 좋은 식품이다. 메밀은 다른 곡류에 비해 리신, 트레오닌, 트립토판 등의 필수 아미노산이 많아 식물성 단백질로서는 우수한 식품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메밀국수 및 메밀묵 등을 많이 먹는 것은 매우 합리적인 식생활이라 하겠다. 비타민 B1의 함량이 매우 높고, 특히 모세혈관을 보강하는 루틴이 포함되어 있어 모세혈관 출혈방지 및 고혈압 예방에 효과가 있다. 메밀에는 많은 효소가 존재하므로 보존에 주의해야 한다.
쓰임새
메밀은 외국에서는 주로 사료용으로 쓰이나 한국, 일본 등지에서는 식용으로도 수요가 많다. 이를테면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메밀순을 소, 돼지, 사육용 사료로 사용하고, 인도에서는 이것을 소채로 먹기도 한다. 또한 독일에서는 메밀로 맥주, 증류주 등 술의 원료로 쓴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메밀국수, 메밀묵, 메밀부침 등으로 식탁에 오르거나 메밀묵과 닭고기를 맑은 장국에 넣어 끓인 다음 여기에 계란을 풀어 갖은 고명을 얹은 유탕등을 보신제로 먹기도 한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메밀껍질을 베갯속으로 이용해 왔다. 메밀 가루에는 프롤라민의 함량이 적으며 메밀가루 입자 상호간의 끈기가 약하므로 밀가루를 30~80%정도 배합하고 소금을 첨가하여 물로 반죽한 다음 '메밀국수'를 만든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메밀가루로 죽을 만든 다음 이것을 굳혀서 젤리상태의 [메밀묵]을 만들었다. 그리고 메밀의 연한 잎사귀는 데쳐서 나물로 무쳐 먹기도 했다.
메밀가루는 너무 희면 영양분이 적다. 감피부분이나 겉껍질의 부서진 가루가 많이 섞여 있을수록 영양면에서 좋으며 향기도 높다. 또한 메밀은 열매 뿐만 아니라 줄기나 잎에도 루틴의 함량이 풍부하므로 채소로 이용할 수도 있다. {본초강목}에 의하면 '메밀은 장과 위를 실하게 하고 북돋아준다. 또한 적체, 풍통, 설사 등을 없애준다'고 한다. {식료본초}에는 '메밀은 정신을 맑게 해주고 오장의 부패물을 제거시켜 준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요즘에 민간요법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비만이나 변비, 숙변 제거에 메밀 줄기를 활용하는 경우가 있다. 말린 메밀대를 푹 삶아서 우린 물을 먹으면 장 속의 온갖 찌꺼기가 씻겨 나온다. 물론 정상적인 사람들에게 권장할 방법은 못된다. 하지만 온갖 약이나 운동 등의 요법으로도 치료되지 않은 만성변비환자는 한번쯤 시도해볼만한 방법이다. 이밖에도 메밀은 소화불량, 중풍예방 등에도 도움이 되는 식품이다. 소화불량으로 고생하는 사람은 메밀가루와 대황가루를 섞어 잠자기 전에 온수나 술과 함께 먹으면 효험이 있다. 메밀껍질과 함께 검은콩, 녹두껍질, 결명자, 국화초를 각각 같은 분량으로 베개 속에 넣어 베고 자면 뇌와 눈이 맑아진다. 이 방법은 두풍열이 있는 사람이나 고혈압 환자에게도 좋다.
이것이 토종
우리나라에서 재배되고 있는 메밀의 품종으로는 보통종, 달단종, 유시종, 숙근종 등이 있다. 이중 보통종이 가장 많이 재배되고 있으며, 달단종은 가루에서 쓴맛이 나고 유시종은 씨알의 모가 자라서 날개처럼 된 것이며 숙근종은 다년생 메밀이다. 또한 수확하는 시기에 따라서 여름메밀과 가을메밀로 나눌 수 있는데 주로 재배되는 재래 품종은 가을메밀이다. 그러나 가을메밀이라 하더라도 각 지방에 따라서 독특한 풍토의 영향을 받아서 품종에 약간씩 차이가 난다. 그러한 의미에서 메밀은 토양의 성질에 상당히 민감한 작물이라 할 수 있으며 토종의 의미를 새삼 일깨워 주는 작물이다. 우리 나라에서 메밀은 강원도, 함경도, 평안도 등지의 산간, 개간지에서 많이 재배된다. 특히 고산지대의 자갈땅에서 생산한 메밀이 맛이 좋다.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이 되기도 한 강원도 평창 등의 해발 600m 이상되는 화전지대에서 나는 메밀은 그 맛과 질이 우수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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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세계사/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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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고려 불상의 이모저모 - 강희정(이화여대 박물관 학예연구원)
우리 나라 전 역사를 통틀어 불고가 가장 융성하고 발달하였던 때는 고려시대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불교미술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으로 석굴암을 꼽는 사람은 많아도 고려시대의 상상을 떠올리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러면 고려시대에 불교미술이 융성하지 못했던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흔히 ‘고려’ 하면 연상되는 청자나 각종 공예품을 기억한다면,고려의 정신세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치지하였던 고려 불교미술의 미적 수준이 낮았다고 단정할 아무런 근거는 없다. 불상만 놓고 본다면, 통일신라에 비하여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뒤지지 않을 고려가 크게 주목받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통일신라 중대의 불교미술을 한국미술사의 고전으로 파악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상화된 인체 묘사, 자신감 넘치는 역동적인 선은 물론 후대까지 미술 창작의 모범이 되었다는 점에서 보면 충분히 납득이 간다. 그러나 고려의 불상이나 보살상도 통일신라와는 다른 시대정신과 미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세련된 미적 완결성을 추구하던 통일신라기의 불교미술이 고려로 넘어오면서 어떤 모습으로 변모하였을까? 무엇보다도 서민적이고 한층 대형화된 ‘거대한 불상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지적할 수 있다.
거대한 불상의 시대
여느 예술과 마찬가지로 불교미술도 제작 당시의 시회적 분위기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다. 고려 불상에도 전통을 고수하려는 보수성과 새로운 기운을 반영하려는 진취성이 뒤섞여 있는데, 대체로 13세기를 전후하여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고려 전기 불상의 특징은 대형화 추세이다. 높이 18미터의 관촉사석 조보살상은 이러한 흐름을 웅변해 준다. 흔히 은진미륵으로 알려진 이 거대한 석상은 규모나 돌덩어리처럼 단순한 형체가 영국의 스톤헨지를 연상시킨다. 높은 원통형의 보관 위에 풍경이 달린 천개를 덮었을 뿐 별다른 장식이 없고 얼굴이나 신체에도 이전 시기의 조각에서 볼 수 있던 굴곡과 양감이 표현되지 않았다. 경외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기괴한 얼굴 묘사와 그에 걸맞게 두툼한 손 모습이 두드러진다. 미륵으로 알려져 있지만 길다란 연꽃가지를 들고 있어 관음보살일 가능성이 높다.
보통 몇 미터나 되는 거대한 돌을 찾기가 쉽지 않으므로 이런 종류의 불상을 만들 때에는 일반적으로 다리, 몸통, 상반신과 얼굴 등 몇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먼저 조각을 한 뒤맞춰 세운다. 그런데 은진미륵은 어떻게 세웠을까? 이 궁금증을 풀어 줄 만한 이야기가 관촉사에 전해 내려온다. 은진미륵을 만든 스님이 고민에 빠졌다. 만들기는 만들었는데, 이것을 어떻게 세운담! 깜빡 잠이 든 스님의 꿈에 너댓 살 먹은 어린아이들이 자기들 키보다 훨씬 더 커 보이는 진흙 인형을 만들고 있었다. 다리, 몸통, 머리를 따로 만들어 볕에 말렸다. “요녀석들이저걸 어떻게 하나 보자”며 스님이 멀찍이서 지켜 보는데, 발과 다리 부분을 세운 어린아이들이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모래를 잔뜩 날라오기 시작하였다. 먼저 똑바로 세운 다리 주위를 모래로 덮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모래 위에 물을 뿌려 단단하게 다지더니 비스듬한 모래 사면 위로 몸통 부분을 끌고 올라가 다리 위에 올려 세웠다. 같은 방식으로 머리를 세우더니 스님을 돌아보고 씩 웃는 게 아닌가. 그 미소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난 스님의 옷에 난데없이 물에 젖은 모래가 붙어 있었다. 그제서야 스님은 “아, 우둔한 나를 깨우치려고 관음보살님이 몸을 바꾸어 나타나셨던 게로구나”하고는 꿈에서 배운대로 은진미륵을 무사히 세울 수 있었다. 이 설화는 은진미륵도 선사시대의 고인돌이나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비슷한 방식으로 세워졌음을 시사한다. 18미터에 이르는 거상을 제대로 세우기 위하여 모래나 푸석푸석한 흙을 동원했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은진미륵과 같은 불상은 고려 전 시기에 걸쳐 조성되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특히 경기도 남부와 충청도에서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여 대조사의 석조보살입상, 예산 삽교리의 석조보살입상, 당진 안국사지의 석조삼존불입상 등이 좋은 예이다. 이들 조각은 후대로 갈수록 더욱 양감을 잃어 비석이나 장승 같은 형태로 만들어진다. 크기는 관촉사불상보다 훨씬 작은 경우가 대다수이지만, 몸체를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조각한 뒤 차례로 올려 세우는 방법은 같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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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사회/문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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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랍문화의 이해 - 공일주
3. 언어의 이중구조
일반적인 이중구조
이중언어의 사용이 다른 것을 제외하고 오직 사회의 생활부분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고 대부분의 일상생활을 포함한다. 이를테면 교육의 모든 산하기관과 학교행정, 공공기관과 민간단체를 포함한다. 이런 종류의 이중언어 구조는 일부 아랍국가에서 아랍어 발전의 결과에 기인한다. 이러한 점에서 때문에 아랍어는 현재 적어도 그 국가의 모든 사람의 언어가 된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특수한 이중구조
어느 특정한 분야에서 또는 다른 분야가 아닌 오직 사회생활의 어느 분야에서만 외국어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마치 행정에서는 안 쓰고 교육분야에서만 사용하든지, 초등학교나 고등학교 교육에서는 사용치 않고 좀더 고등교육에서 사용한다든지, 또 문학분야에서는 사용치 않고 과학분야에서만 사용한다든지, 일반 교육분야에서는 사용하지 않고 현대공학 분야에서 사용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하여 아랍의 각 나라마다 다르다.
영속적 이중구조
아랍국가에서 시작된 이중언어 현상은 기존의 바탕과 개방의 두 가지 방향에 따라 한 나라에 두 개의 언어(하나는 토착어, 다른 하나는 개방어)가 사용된다. 하나는 토착어로서 기층어 역할을 하므로 과거를 대표하고, 감정과 가치, 그리고 전통과 종교문화를 반영하여 역사적 문화적 사실에 의해 보존된다. 또 하나는 발전의 열쇠로 묘사되는데, 국가의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은 국가가 문화적인 국가가 되도록 이 언어의 보존과 확산을 내다본다. 수단의 북부 누비아인들은 집에서 누비아어를 쓰고, 학교에서는 아랍어를 쓴다. 과거의 언어에만 의존하는 것은,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정체와 허약함으로 인해 국가의 발전운동을 정체시키는 것으로 간주한다. 영속적인 이중언어 구조의 두드러진 예는 튀니지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튀니지 수도의 3개의 고등 교육기관 중 둘은 여학교이고, 하나는 남학교였다. 현대문학과 과학학부의 5년차, 6년차 100명(남 32, 여 68)에 대한 앙케이트 조사결과인데, 이 두 학부는 아랍어와 프랑스어에서 언어능력이 둘 다 동등한 학생들을 포함하고 있어, 만약 프랑스어가 더 많이 주어지면 대표적인 이중언어 구조가 된다. 이 연구는 크게 다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학생들이 가족과의 대화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대부분이 튀니지 구어체 방언을 사용하고 있었으나, 문화수준이 높은 계층에 사는 학생들은 가족과의 대화에서 대부분 두 언어를 섞어 썼다. 그러나 섞어 쓰면서도 튀니지 언어에 속한 고유의 언어형태를 변형시키지 않았고, 학생들의 3분의 1일이 화가 났을 때나 다른 감정표현에서 프랑스어를 썼다. 이와 같이 일상생활에서 욕설을 할 때 외국어에 의존하는 것은 곧 환유현상이라 하겠다. 그것은 외국어는 모어에서 느끼는 감정적인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문어체에서는 선택권이 충분하면 학생들이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고, 남학생보다 여학생들이 프랑스어를 우선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러한 현상은 두 개의 핵심적인 요인에 기인하는데, 첫째는, 언어사용의 자연적인 현상이고 둘째는, 튀니지 젊은이들의 대화에서 프랑스 사용은 흠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교육정책이 프랑스어를 민족어보다 더 중요하게 다뤘기 때문이다. 그리고 튀니지 사람들이 모든 면에서 프랑스어를 우선하도록 만든 분위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두번째 경향은 여성에게 더 강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학생들의 학습이나 행정과 관련된 대화에서도 이러한 언어가 흔하게 섞였으니, 그래도 프랑스어가 언어적, 심리적 이유 때문에 우위에 있었다.
생활 아랍어는 대중과 친밀성 있는 구어체이기 때문에 개인의 숨겨진 부분이 밝혀지게되어 자연히 그의 지연과 사회적 관련성이 나타난다. 그래서 생활 아랍어는 학생과 대답할 사람과의 사이에 존재하는 벽을 허문다. 학생들의 3분의 4는 프랑스어를 아랍어보다 더 유용하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사고형성과 현대적 기술교육에 더욱 필요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상과 같이 앙케이트 응답자가 적은 수이어서, 그리고 사회적, 지역적 다양성을 망라할 수 없어서 일반화하기 어렵지만, 일단의 튀니지 젊은이들의 대략적인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젊은이들은 원칙적으로 이중언어 구조를 반대하지 않는다. 그들의 민족적 감정은 아랍어를 향해 있고, 프랑스어는 현대적 양상을 띤 언어로서 사용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튀니지 사람은 프랑스어를 식민주의자를 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그리고 민족주의를 불러일으키는 언어로 간주하지 않는다. 교육분야에 있어서 그들 중 절반은 이중언어 구조의 존속을 바라지만, 나머지 절반은 두 개의 언어를 익혀야 하는 고충을 예로 들면서, 심지어 시간의 낭비를 부작용으로 든다. 물론 두 개의 언어를 완전히 익히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그 이유가 될 수 있겠다.
단계적인 이중구조
완전하고 종합적인 아랍어화를 이루기 위해 민족어를 쓰는 국가기구가 필요함에도 갑작스런 환경의 변화로 외국어를 쓰는 경우가 단계적인 이중언어 사용이다. 이런 예는 모로코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모로코가 독립 이후 아랍어가 모든 분야에서 널리 쓰이게 될 때까지 외국어를 쓰게 되었다. 이중언어 구조가 오늘에까지 계속됨에도 심지어 공공 성명서나 독립당의 연설문까지도 완전한 아랍어만을 고집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독립 이후에 정부 책임자들의 관심을 끌었던 첫번째 것은 이중언어 구조를 마감시키고 아랍어를 민족어로서 그 지위를 정착시키는 데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아랍어화’란 용어가 쓰이게 되었고, 모로코에서 1956년 초에 세워진 국가 위원회에서는 교육정책 방침을 입안했는데, 이 정책이 강조한 원칙 중에 아랍어화가 들어 있었다. 각계각층의 상인, 노동자, 자유직종에서 게시판이나 부착물은 프랑스어가 아닌 아랍어를 쓰도록 강제결정이 내려졌다. 대부분의 경우 이를 받아들였으나, 애석하게도 이 계획은 그 다음에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국가가 아랍어화는 교육, 행정, 일반생활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확신함에도 아랍어화의 문제는 제 갈 길을 잃고 있는 것이다.
튀니지가 영속적인 이중언어 구조라면 모로코는 단계적인 이중언어 구조의 특징을 지녔다. 알제리는 최근까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튀니지와 모로코 중간에 있듯이, 그 곳의 정부 책임자들 중 일부는 단계적으로 교육적인 이중언어 구조의 필요성을 결의하는가 하면, 다를 사람들은 튀니지 지역에서 따르고 있는 영속적인 이중언어 구조방법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이처럼 이중구조에 대하여 각기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 것이 알제리의 상황이다.
개별적인 이중구조
사회에서 교육을 받은 개인은 두 개의 언어, 즉 민족어와 외국어가 있음을 잘 안다. 두 개의 언어가 동일한 구사력과 같은 수준에서 쓰이면 이런 종류의 이중언어 구조는 아랍어화에 해롭지 않다고 생각하고, 다만 다음과 같은 조건이 고려된다면 더 유익할 수도 있다.
첫째, 행정과 일상생활에서, 그리고 구두와 필기의 일상적 쓰임에서 민족어가 첫째자리를 가진다. 둘째, 교육정책은 청소년들의 마음 속에 애국심, 민족어 사랑을 심어 주되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게 한다. 셋째, 민족어(국어)를 잘하는 자를 외국어 잘하는 자보다 우선하고 그들을 공무원에 채용한다. 시험에서 국어의 낙제점 하한선을 상향조정하고, 상대적으로 외국어의 낙제점의 하한선을 낮추거나 없애는 방안을 채택한다. 넷째, 외국어 사용을 학문연구와 학술논문 등으로 제한하고, 국어를 권장하며, 외국어는 일상생활, 특히 행정, 홍보, 문화 등에서 그 사용을 회피한다. 이런 조건들이 충족되고 충실히 고려되면, 국가는 일관성 있는 정책을 실시하여 개별적인 이중구조의 결과를 초래하지 않게 된다. 이런 조건에 의한 이중구조의 방법을 택한 일부 동부 아랍국가로는 레바논, 이집트, 시리아, 수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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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아들의 명찰
늙으면 잠이 없어진다고 하더니 새벽녘이면 눈이 번쩍 떠진다. 방바닥에 비춰지는 창 크기만한 달빛을 보며 멍하니 앉아 있노라면 네 놈 생각이 불쑥불쑥 떠올라 목언저리가 저려온다. 세상에서 가장 불효막심한 일이 제 무모보다 먼저 세상을 뜨는 것이라던데 네가 바로 그 꼴이로구나. 심장마비로 네가 죽은지 벌써 일년이 다 되어가는 데도 네 엄마가 하루에 몇번씩 우는 통에 어제는 화를 좀 냈다. 텔레비젼을 보면서도 네 또래의 사람만 나오면 눈물을 흘리고, 밥 먹을 때 네가 않았던 자리를 보고 또 울고..... 그래서 아예 네 의자를 치워버렸다. 의자 뿐만 아니라 네가 쓰던 물건은 모조리 버렸단다. 네 엄마가 그것만은 안 된다고 눈물로 호소하던 사진까지..... 그런데 오늘 아침, 도장을 찾으려고 서랍을 뒤지다가 네가 고등학교 다닐 때 교복에 달앗던 명찰을 보게 되었다. 그걸 보니 네 장례 때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떨어지더구나.
고등학교 때 넌 무던히도 어미, 아비 속을 썪였었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권투한다고 체육관이나 들락거리고..... 어느날인가는 밤 늦은 시간에 어디서 먹었는지 술에 잔뜩 취한 너를 네 체육관 친구들이 업고 왔었지. 다음날 아침, 네게 처음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난생 처음으로 네 머리를 세게 후려쳤는데 넌 그때 가만히 맞고만 있었다. 오히려 내 팔을 부여잡고 말리려는 어머니를 네게서 떼어 놓았다. 그래서 난 더 때릴 수가 없엇는데 그날 밤 가슴이 무척 쓰리더구나. 한편으로는 반항하지 않고 맞기만 하는 너를 보고 '이젠 아이가 아니로구나. 다 자랐구나'하는 생각에 대견하기도 했단다. 아들아, 그땐 정말 미안했구나.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때리는 것이 아니었다고 얘기하고 싶었는데.....
아들아, 옆에서 자고 있는 네 엄마의 고른 숨소리가 들린다. 네 명찰을 보니 그간 네 엄마에게 네 생각 못하게 한 것이 후회가 되는 구나. 내일 아침에 이 명찰을 네 엄마에게 선물로 주어야 겠다. 그리고 실컷 울어볼란다. 우리 부부 울음소리 네가 있는 하늘까지 들리도록 말이다.
박승중 님/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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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10. '악법도 법': -소크라테스의 사형선고(기원전399년)
그때 세계에서는 BC403-221년: 중국에서 춘추전국시대 BC372년: 맹자 태어남
소크라테스는 높은 존경과 평가를 받아온만큼 그를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수도 적지 않았다. 우선 소크라테스가 스승으로 크게 성공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자와 명성을 잃게 된 많은 동료 소피스트들이 그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아테네 밖 여러 지역에서 찾아온 제자들이 모두 소크라테스의 슬하로 모여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어떤 예언자는 당대의 유일한 스승은 소크라테스라고 예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상당히 많은 사회 지도층 인들은 소크라테스가 지나치게 대화를 통해 사회조직의 모든 권위를 추락시켰다고 비난하고 있었다.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이라는 작품을 보면,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부모에게도 대들면서 대화를 감행했으며, 어른과 지도층 인사들은 소크라테스적 대화 때문에 정신적 권위를 상실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구름)에 나오는 이야기는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아버지를 질책, 구타하면서도 그것이 정당하다고 변명한다는 장면을 삽입시키고 있다. 그뿐만은 아니다. 그 당시의 모든 사람들은 신들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신화의 주인공들은 논급하지 않은 채 도덕적 신관을 강조했기 때문에 종교계의 피해도 없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은 이러한 세력들이 힘을 모아 소크라테스를 법정에 서게 했고 사형을 인도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 재판과 처형과정에서 벌어지는 소크라테스의 생사관, 종교관, 애국적인 법질서관, 자신의 인생관과 철학은 프라톤의 대화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크리톤)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는 그 책들을 통해 소크라테스의 최후의 면모를 엿볼 수가 있다. 사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그 당시에 흔히 있었던 관례대로 소크라테스를 국경 밖으로 탈출시키고 거기에서 다시 스승으로서의 가르침을 계속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웠다. 도시국가의 국경선은 가까운 데 있었고, 그 경계선만 넘으면 모든 법적 문제는 해소되는 것이었다. 또 대부분의 시민들과 지성인들은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받아야 하는 죄인으로는 인정치 않고 있었다. 다른 지역에 가서 가르치면 그것으로 잘되었다고 인정할 정도의 상황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의 그런 계획을 책망했다. 아테네의 법에 충실하라고 가르친 내가 스스로 법을 어기는 일은 할 수가 없지 않느냐고 타일렀다. 그리고 조용히 독약을 마시고, 사랑하는 몇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고요하면서도 장렬한 죽음을 택했다. 그의 이러한 죽음이 소크라테스를 세계적인 철인으로 만들었으며, 역사의 빛나는 사건으로 그 여광을 만대에 남기게 된 것이다. 죽음이 그를 위대하게 만든 가장 대표적인 선례가 된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죽은 뒤 그 당시로 말하면 지중해 전역에서 모여들었던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대부분 아테네를 떼났다. 소크라테스를 대신할 만한 사표로서의 스승이 없었기 때문이며, 소크라테스의 처형과 더불어 아테네는 학자나 사상가가 머물 만한 곳으로 인정받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원로급 제자들은 제각기의 고향으로 돌아가 새로운 학설들을 전개시켜 학문적 분권상태를 만들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소크라테스 학파라고 부른다. 그 대표적인 한 사람은 아리스티포스(Aristippos, 435-355 BC)와 그 뒤를 따르는 키레네 학파에 속하는 철학자들이다. 아리스티포스는 소크라테스의 이론적이며 토론 중심의 이성주의보다는 삶의 현실을 존중히 여기는 윤리성을 이어받았다. 삶의 목적은 즐겁게 사는 데 있으며, 고통은 인생의 무대에서 배제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 자신이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여행을 즐기며 정신적인 쾌락을 추구하면서 살았다. 그리고 스승 소크라테스에게서도 그런 정신적 안정과 즐거움을 발견했고 이어받을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윤리의 목표는 개념규정보다는 '마음의 편한 상태를 찾아 누리는 것이며, 그것은 감정과 정서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참다운 즐거움은 자아 개인과 현재에 속하는 것이며. 생활현실에서 주어지는 것이며, 감성적인 것이다. 덕은 향락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과거, 미래, 개인을 떠나 사회적 의무 같은 것은 우리에게 참다운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 즐거움이 곧 선이며, 고통은 악에 속한다. 더 많이 즐기면서 살 수 있으면 그것이 곧 성공한 인생이 되는 것이다. 그 즐거움을 쾌락이라고 부르며, 그리스 어에서는 헤돈(Hedone)이라고 한다. 그래서 아리스티포스는 최초의 쾌락주의자가 되었고, 그때부터 헤도니즘(Hedonism)의 윤리가 발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까지도 많은 후계자를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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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남자 생식기 '불X'의 '불'은 무엇을 뜻하는 말로부터 온 것일까요?
남자의 생식기의 아래에 '불X'이 있지요. 남자의 정자를 모아 두는 곳이라나요? 이 말의 어원은 그대로 '불 + 알'입니다. '알'은 '닭의 알'의 '알'과 동일한 것이고, '불'은 생식기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불알' 이외에 남자 생식기 자체를 지금 쓰는 말 이외에 '불줄기'라고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위에 난 털을 '불거웃'이라고 했고요. 그런데 '불'은 무엇을 뜻하는 말로부터 온 것일까요? 그것은 아직 모릅니다. 혹시나 '불'이 '불꽃'의 '불'이 아닐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연 아닙니다. 왜냐 하면 '불꽃'의 '불'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불'이 아니라 '블'이었으니까요.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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