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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9 호
2006.09.27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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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 風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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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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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개울 바닥에 돌이 없다면 시냇물은 노래를 부르지않을 것이다. / 칼 퍼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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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과학/예술/교육 |
- 조화유의 미국영어 - 일반인을 위한 경제생활 영어
10, Where to, sir?
미국에 가보면 비로소 우리나라의 대중 교통 수단이 얼마나 잘 되어 있는가를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New York은 그런대로 지하철이 편리하게 되어 있지만 Los Angelges 같은 도시는 지하철과 시내 버스가 모두 노선이 극히 제한되어 있는 데다가 그나마 드문드문 다니기 때문에 불편하기 짝이 없다. 또 택시라는 것도 서울처럼 길에만 나가면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택시를 타려면 택시 회사에 전화를 걸어서 불러야 한다. L.A.에서 호텔에 묵고 있는 여행자가 택시를 이용하려면 전화 번호부에서 Yellow Cab 이라는 택시 회사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어 I need a ride. Can you send a taxi?(차편이 필요합니다. 택시 한 대 보내줄 수 있습니까?)라고 말하면 된다. 그리고 택시를 보낼 시간과 장소를 말해 주면 된다(Yellow Cab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택시 회사 이름이다). 택시가 와서 타면 운전 기사가 제일 먼저 하는 말은 남자 승객에게는 Where to, sir? 여자 승객에는 Where to, ma'am?이다. 물론 "어디로 모실까요?"란 듯이다. 행선지를 대주고 "좀 빨리 갑시다"라고 말하고 싶으면 Stap on it, please.라고 하면 된다. 이것은 우리나라 말 그대로 "좀 밟아요"란 표현이다. 물론 여기서 '밟는다'는 것은 accelerator를 밟는다는 뜻이다. 차를 타고 가다가 "아직 멀었어요?"라고 하는 말은 Are we there yet?이다.
Mrs. Brown: Hello, is this Yellow Cab? Yellow Cab: Yes, it is. Mrs. Brown: I need a ride to the L.A. International airport at 2 o'clock. Can you send a texi? Yellow Cab: Certainly, ma'am. Where shall we pick you up, ma'am? Mrs. Brown: In front of the Hilton Hotel at 2 o'clock sharp. Yellow Cab: May I have your name, ma'am? Mrs. Brown: Mrs. Brown. Yellow Cab: All right, Mrs. Brown, we will pick you up at 2 sharp. Mrs. Brown: Thank you. Yellow Cab: Thank YOU, ma'am. 브라운 부인: 여보세요, 옐로우 캡 택시 회사죠? 옐로우 캡: 예, 그렇습니다. 브라운 부인: 2시에 L.A. 국제 공항에 나가야 하는데 택시를 보내줄 수 있어요? 옐로우 캡: 물론이죠. 택시를 어디로 보낼까요? 브라운 부인: 2시 정각에 힐튼 호텔 앞으로 보내 주세요. 옐로우 캡: 부인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브라운 부인: 미시즈 브라운입니다. 옐로우 캡: 알겠습니다. 호텔로 부인을 2시 정각에 모시러 가겠습니다. 브라운 부인: 감사합니다. 옐로우 캡: 저희가 오히려 감사합니다.
Taxi driver: Where to, ma'am? Mrs. Brown: 3025 Olympic Boulevard in Koreatown. Could you step on it, please? I'm in a hurry. Driver: Yes, ma'am. After a while- Mrs. Brown: Are we there yet? Driver: A few more blocks, ma'am. At the destination- Driver: Here we are, ma'am. Mrs. Brown: How much is it? Driver: It's seven fifty. Mrs. Brown: (Handing over a 10-dollar bill) Keep the change. Driver: Thank you, ma'am. Bye. 운전기사: 어디로 모실까요, 부인? 브라운 부인: 코리아타운의 올림픽가 3025번지요. 시간이 없으니까 좀 빨리 달려 주세요. 운전 기사: 알겠습니다. 얼마후- 브라운 부인: 아직 멀었어요? 운전기사: 몇 블록 더 가야 됩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운전 기사: 다 왔습니다, 부인. 브라운 부인: 얼마죠? 운전 기사: 7달러 50센트입니다. 브라운 부인: (10달러짜리를 주며) 잔돈은 그만 두세요. 운전 기사: 감사합니다. 부인, 안녕히 가세요. * Laughing is the best rest. - 웃음은 가장 좋은 휴식이다 Humorist Will Rogers, a chain-smoker, cracked: "Quitting smoking is the easiest thing in the world. I quit smoking nine times." 줄담배를 피웠던 유머 작가 윌 로저스는 이런 농담을 했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담배 끊는 것이다. 나는 아홉번이나 끊었거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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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지식/생활/건강/의학 |
- 음식 토정비결 - 전영순,하정화
<곡류>
8. 조 - 알갱이는 작지만 가장 오래된 곡식
조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토종작물로 분류된다. 벼과에 속하는 일년생 단자엽 식물로서 곡류 중에서 알갱이가 가장 작다. 그러나 어떤 작물보다도 저장성이 강하다. 조는 그 원형이 강아지풀이다. 강아지풀은 세계적인 잡초로서 아직도 조와 교배가 용이하고 또한 조와 동일한 발생지에 분포한다. 조는 중국, 만주에서 오랫동안 재배되어 왔다. 기록에 의하면 조는 서기전 2700년경 중국 신농의 오곡 중에 포함되어 있다. 이미 그 시대에 야생종을 순화하여 재배했다는 증거이다. 우리나라도 재배시기는 대략 비슷할 것으로 보인다. 원시농경의 형태가 남아있는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 유적에서 발견된 곡식이 조 또는 피로 보인다고 한다. 조는 온난하고 건조한 지역에 적합한 작물이며 북위 45~50도 이남에 분포한다. 또한 해발 1300m지대에서도 재배가 가능하다. 실제로 조는 세계 전역에서 넓게 재배되고 있다. 유럽 동남부, 아프리카 북부, 아시아 전역은 물론, 북남미에서도 재배되고 있다. 미국에는, 초기의 유럽 이민들이 전파하였으며 1848년 경부터 재배가 장려되어 20세기 초반에는 이미 미국의기장류 중 90%를 차지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쌀보다 먼저 들어온 조는 예전에는 주곡의 하나로 취급되었다. 그래서 지난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14만ha의 면적에 재배되었으나, 그후 재배면적이 급격하게 줄어 1983년에는 1천5백ha밖에 재배되지 않았다. 줄잡아서 20년 동안 재배면적이 1백분의 1로 줄어든 것이다. 이처럼 역사가 오래된 작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조를 오곡에 포함시키지 않은 점은 의아스러운 일이다. 이러한 현상은 조의 식량적 가치가 다른 곡식에 비하여 낮고 소출량이 낮아 경제적 수익성이 따르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조에는 차조와 메조가 있는데 현재 우리나라 재배현황을 보면 메조가 80~90%를 차지하고 있다. 조는 알갱이가 무척 작고 둥글다. 이를 일컬어 흔히들 좁쌀이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좁쌀영감'하면 잔소리가 많으며 속이 좁은 사람을 가리키는데 이것도 조알갱이의 모습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종자의 껍질색은 동색, 황색, 회색, 흑색 등 다양하며 종피색도 회백색, 황백색, 암녹색, 회색 등이 있다. 그리고 줄기는 단면이 둥글며 속이 차있는 것이 특징이다. 품종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줄기의 크기는 대략 80~150Cm 정도까지 자란다. 이삭의 표면은 많은 털이 달려있어 거칠고 강아지풀처럼 알갱이가 단단히 뭉쳐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본격적으로 조 품종의 육종사업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재래종을 수집하여 분류하는데 그치고 있다. 봄조에는 모래조, 지나조, 천안조(차조)가 있으며 그루조에는 청미실, 강달조, 국분 등이 알려져 있다. 조는 주로 강원도, 경상북도, 전라남도, 제주도에서 많이 재배되며 단위수량도 높은 편이다. 현재는 전남 해남군 화원면 일대에서 주로 재배되고 있으나 해마다 그 재배량이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성분
조는 단백질과 지방을 많이 함유하고 있으며 소화흡수율이 뛰어나다. 도정한 조의 영양성분을 보면 단백질10%, 당질 70%로 대부분 쌀과 같은 녹말이다.
쓰임새
과거에 조는 쌀이나 보리와 함께 섞어서 주식으로 이용되었다. 또한 엿, 떡, 소주, 풀, 새먹이 등으로 이용된다. 또한 짚은 연료 및 벌레를 잡는데 쓰인다. 특히 조의 줄기는 가난한 사람들이 봄철 보릿고개를 지날 때 다른 곡물이나 채소와 함께 섞어서 짚떡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이밖에도 가축의 사료, 지붕 이엉, 땔감 등에 사용되어 왔다. 근래에 들어 조의 생산량도 줄고 쓰임새도 축소되어 이제는 가축이나 새의 사료로 사용되는 정도이다. 그러나 만주 일대에 살고 있는 우리 교민들은 아직도 조를 주곡으로 먹는다고 한다. 그리고 구미지역에서는 좁쌀가루와 밀가루를 섞어 빵을 만들기도 한다. 순수한 밀가루 빵보다 맛은 약간 떨어지지만 영양면에서는 손색이 없다. 한편으로 조는 민간약으로 쓰이기도 한다. {신수본초}에 의하면 '좁쌀 뜨물은 곽란으로 열이 나고 번갈이 있을 때 마시면 즉시 낫고 소갈을 그친다'고 나와 있다. {본초습유}에서는 '좁쌀을 물에 끓여 먹으면 복통 및 코피를 멎게 하고 가루를 만들어 물에 타서 죽을 먹으면 몸의 독을 푼다. 곽란 및 위통을 다스리고 놀라는 병에 좋다'는 기록이 있다. {본초강목}에 의하면 '차좁쌀은 폐병을 다스린다. 차조는 폐의 곡물이니 마땅히 폐병환자에게 도움이 된다'고 하였다.
조를 활용한 민간요법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구토가 심할 때는 좁쌀가루를 식초에 조금 타서 먹는다.(천금방) *설사에는 차좁쌀 가루에 설탕을 조금 섞어 4~5숟갈씩 먹는다.(간역방) *소갈증에는 좁쌀로 밥을 지어 말린 다음 이것을 가루를 내어 물에 타서 먹는다.(의방심경) *코피가 그치지 않을 때 좁쌀 가루를 물에 타서 먹는다.
좁쌀 미음은 특히 환자들에게 좋다. 인삼을 함께 넣어서 푹 끓여 체에 받쳐서 먹는다. 좁쌀 미음은 특히 신장병 환자에 적합한 식품이다. 특히 병원에 입원한 환자에게는 쌀밥보다는 조밥을 주는 것이 현명하다. 쌀에 차좁쌀을 적당히 섞어서 밥을 지어 먹으면 소화나 영양 면에서 매우 좋다고 한다. 이밖에도 조는 각종 전염병 예방과 위장, 비장, 간장, 안질환 등에 탁월한 약효를 지니고 있다.
이것이 토종
현재 조는 중국산이 다량 반입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주도, 해남 화원 등지에서 다량 재배되었으나 지금은 중국산에 밀려 재배면적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해남 화원의 경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화원 단위농협에서 매해 수백 톤씩 수매를 했으나 92년도에는 수매량이 5톤 정도에 머물렀다. 이런 추세로 간다면 머지 않아 토종 좁쌀은 멸종되어버릴 지도 모른다. 농가에서 조 재배를 기피하는 이유는 여타의 작물과 마찬가지로 저가격으로 수지타산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메조의 경우에는 중국산에 완전히 장악되어버렸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산은 차조와 메조의 구분이 모호하여 두 가지 다 누른색이 강하다. 이것은, 황하 유역에서 조가 많이 재배되므로 황색토양의 영향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중국산과 차이가 분명한 차조를 우리가 적극적으로 재배한다면 결코 수입산에 밀리지 않고 순수한 토종을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토종 좁쌀의 특징을 보면 메조의 경우 이삭이 작고, 알갱이는 약간 흰빛이 도는 연노란색으로 대체로 색깔이 연한 편이다. 또한 차조는 메조보다 이삭이 훨씬 크고 굵으며 알갱이는 녹색에 가까운 노란색이다. 토종 좁쌀은 현재 농협에서 일괄 수매하여 보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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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세계사/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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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팔만대장경에 담긴 염원 - 김영미(이화여대 교수)
고려인 모두의 염원이 담긴 찬란한 문화의 꽃
단지 판목의 막대한 숫자 때문에 팔만대장경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몽고 침입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우리민족이 발휘한 문화적 저력에 유의해야 한다. 16년간이라는 단기간에 대장경을 완성할수 있었던 것은 그 동안 우리 민족이 불교를 깊이 연구하고 출판 문화를 발전시켜 왔기 때문이다. 먼저 목판 인쇄술을 비롯한 인쇄술의 발달을 들 수 있다.삼국시대에 불교가 들어온 이래 사찰에서응 불경을 금은 등으로 사경하였을 뿐 아니라 목판으로 간행하기도 하였다. 석가탑으로 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견>은 751년 이전에 간행된 것으로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목판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각종 경전을 수집 간행하였는데,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현종 때 초조대장경을 조판할 수 있었다. 그 후 선종과 숙종 때 대각국사 의천은 국내뿐만 아니라 송, 거란, 일본에서 승려들의 저술을 구해 먼저 <신편제종교장총록을 편찬하고 속장경을 판각하였다.그 밖에 혜덕왕사 소현도 금산사(전북 김제군)에 광교원을 설치하고 경을 판각하였다.
이와 같이 각 사찰에는 필요한 저술을 판각하여 유통시킬 수 있을 만큼 기술이 축척되어 있었다. 그리고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서도 유교 경천 및 역사서를 판각할 수 있는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1192년(명종 22)에 이부상서 정국검과 판비서성사 최선에게 명하여 여러 선비들을 모아 <증속자치통감>을 교감한 후 여러 주현에서 판각하여 신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중앙과 지방의 행정 기관 및 사찰에서 축적으로 있던 목판인쇄술이 집대성된 것이 팔만대장경이었다. 그런데, 이미 1234년에 <상정고금예금>이 금속활자로 간행되었던 사실로 미루어 금속활자에 의한 인쇄술도 상당히 발달했음을 알 수 있는데, 굳이 목판으로 새긴 것은 수요가 있을 때마다 재간행할 수 있다는 목판으로 인쇄의 이점과, 소실된 초조대장경을 복구하려는 염원 때문이었을 것이다. 두 번째로 불경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던 점을 들 수 있다. 태초가 경전을 수집 간행토록 한 이후 정종은 양곡7만 섬을 내어 불경명보, 광학보등을 설치하여 경전을 연구하고 간행 보급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960년에는 송의 요청으로 <천태론소>를 비롯한 경전들을 보내줄 정도였다. 그 후 송의 최초로 대장경을 간행하자 991년 송에 간 한언공이 대장경 2천오백여 권 481상자를 구해 왔는데, 현종 때 조판한 대장경은 이를 저본으로 한 것이다. 1063년 거란본 대장경을 들여온 이후에는 이에 근거하여 송 대장경에 없는 경전, 본문에 차이가 심하거나 판각하여 편입하는 한편 송에서 새로 번역된 경전들을 계속조판 하였다. 초조대장경을 조판한 이후에도 계속 여러 판본을 비교 연구하여 더욱 완성된 판본을 만들어 갔던 것이다. 이러한 연구가 팔만대장경을 간행할 때 반영되었으니, 수기를 책임자로 한 교감자득은 우리 나라에서 유통되던 파본, 송 대장경, 거란 대장경을 교감하여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30권을 작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대장경을 판각함으로써 그동안 간행된 대장경 중 내용이 가장 정확하여 오자가 없는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 1924년 <대정신수대장경>을 간행할 때, 팔만대장경 저본으로 삼기로 하였다. 또 현재 전하지 않는 거란 대장경의 면모를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되고 있다.
한편 팔만대장경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판고의 건축술도 주목되야 한다. 대장경판이 오늘날까지 상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대장경판 자체뿐 아니라 뛰어난 판고 건축술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장격각은 팔만대장경을 나누어 보관한 동. 서 사간고로 이루어져 있다. 법보전과 수다라장의 건물규모는 각각 30칸(195평)씩으로, 건물안의 판가는 길이150센티미터, 높이 64센티미터로 판가당 34에서 44장의 경판이 꽂혀 있고, 각 판가는 5단으로 이루어져 각각 수직으로 습도가 결정적이다. 판고는 해발 645미터에 있는데, 세 계곡이 만나는 지점에서 1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곳으로 바람이 늘 불어온다. 바람은 맨 밑단에서부터 맨위 판가에 이르기까지 경판 틈을 골고루 지나면서 습도를 조절해 준다. 또한 판고 지붕의 구운 기와도 온도 조절까지 하게 되어 곰팡이나 썩음균의 서식을 막아준다. 판고는 팔만대장경을 해인사로 옮길 무렵 세웠을 것이다. 원래 팔만대장경은 강화도 선원사에 보관하였는데, 1398년(조선 태조 7)왜구의 침입 및 병란에 대비하기 위해 한강을 통해 서울. 지천사(현재 독립문 부근)를 거쳐 약 8개월 만에 해인사로 보안하였던 것 이다. 그런데 조선왕조 개창 이후 성리학을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잦은 요청에 따라 팔만대장경경판이 한때 일본으로 건너갈 위기에 처한 적도 있다. 1414년(태종 14)경판을 일본에 보내 줄 것을 조정해서 의논하기도 하였으며, 1413년(세종 5)에는 대장겨판을 주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는 데에 의견이 일치하기도 했으나, 일본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다가 훗날 줄 수 없는 물건을 요구할 때는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그만두었던 것이다. 그 후에는 1695년(숙종 21)이후 일곱 차례의 큰화재로 해인사의 많은 건물이 불에 타는 등 피해를 입었으나 판고는 무사 하였다. 1951년에는 가야산 일대의 인민군 패잔병 소탕을 위해 해인사 대적광전 일대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은 공군 편대장은 수백 명의 적을 소탕하기 위해 파리 인도와 바꿀 수 없는 세계적 보물인 팔만대장경판을 잿더미로 만들 수 없다고 거부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한 순간의 판단은 750년간 우리 민족의 역사를 지켜본 팔만대장경판을 보존할 수 있게 하였다. 이제는 한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 모든 국민들이 성숙한 문화의식으로 골프장 건설 등 개발을 통해 얻을 눈앞의 이익을 쫓으려는 사람들의 짧은 생각으로 비판하고 시정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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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사회/문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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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랍문화의 이해 - 공일주
3. 언어의 이중구조
이중언어
이중언어는 하나의 화자가 두 개 이상의 언어를 알고 구사하는 현상을 말한다. 알제리는 전 인구 2900만 중에서 69에서 82%가 아랍어 화자이고, 인구의 17에서 30%가 베르베르인이다. 이곳에는 마그립 지역(리비아,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모리타니아를 통칭하는 말)의 토착어이었던 베르베르 이외의 대부분 알제리의 지식층은 프랑스어를 구사한다. 리비아는 전 인구 554만의 90%가 아랍어 화자인데, 77%는 아랍인이고, 9.8%의 베르베르인 중에서 거의 절반이 아랍화되었다. 리비아 주민 속에도 원래 베르베르인이 살았고,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의 베르베르인과의 접촉이 있었으나, 9세기와 10세기 대규모 아랍인의 유입으로 아랍어는 리비아의 공용어가 되었다. 모로코에서는 3000만 인구의 약 64.7%가 아랍어를 모어로 쓰는, 문화적으로는 아랍인이지만, 주로 아랍인 혼혈의 베르베르인이다. 34.8%가 베르베르어 사용자인데, 그들 대부분은 이중언어를 쓴다. 베르베르인은 주로 산간지역에 살고 있는데, 모로코가 비교적 나머지 마그립 국가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북서 아프리카에서 베르베르어 화자 후손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튀니지의 인구 900만 인구 중 98.3%가 아랍인인데, 알제리나 모로코보다 훨씬 완벽하게 아랍화되었으며, 튀니지에서 베르베르어 화자는 약 1.2%로 남부의 고립지역에산다. 튀니지는 동방으로부터 육로나 해상으로 접근하기 쉬워 일찍이 외국의 침입을 많이 받아 페니키아인, 로마인, 아랍인, 터키인, 그리고 프랑스인의 문화적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모로코 방언에 포함된 베르베르어 차용어는 10에서 15%에 이르고, 튀니지와 알제리 방언에는 8에서 10%, 리비아 방언에는 2에서 4%가 포함되어 있다.
아라비아 반도의 동부와 북동부에 위치한 동부 아라비아 방언의 화자에게도 이중언어 사용자들이 이 지역 주민의 20%를 차지한다. 동부 아라비아 방언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동부지방, 바레인,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그리고 쿠웨이트의 방언을 포함한다. 또, 걸프지역에 400만 이상의 주민이 사는데, 그 중 약 85%는 아랍어를 제1언어로 쓰고, 80만 가령의 이중언어 사용자는 그들의 모어가 페르시아어, 우르두어, 인도어, 그리고 아프리카어이며, 그들의 제2언어는 아랍어이다. 걸프지역 주민의 대부분은 중앙 또는 북부 아라비아에서 이주하였고, 18세기 이후에 많은 소부족들이 이 지역으로 건너왔다. 바레인은 전 인구 60만 명에서 72%가 아랍족이고, 12%는 이란인이어서 이들은 페르시아어 이중언어인이다. 쿠웨이트는 1990부터 1991년 걸프전으로 110만의 외국인을 잃어 지금은 130만 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다. 이 나라는 주고 아랍국가에서 이주에 의한 인구증가가 심하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북부, 중앙과 서부지역은 비교적 인종이 혼합되지 않은 반면, 남부, 남서, 그리고 동부 해안지역은 주민들이 혼합되었고, 이 곳에서는 중동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유럽의 제 언어가 통용되지 않는다. 1700만의 인구 중 토착인이 75%에 해당된다. 아랍에미리트는 200만의 국민 중 76%가 아랍인인데, 이 중 30%는 토착인이고 46%는 다른 아랍국가에서 온 아랍인이다. 위와 같은 유형은 사회적인 이중언어이지만, 또 개인적 이중언어 현상도 존재한다. 이를테면, 오늘날 알제리의 지식층 대부분은 프랑스어를, 이집트의 직식층은 프랑스어와 영어를, 요르단과 수단의 지식층은 영어를, 그리고 레바논에서는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가 통용된다. 더욱이 아랍지역에 거주하는 이들 주민은 연령이나 학력 등에 따라 이중언어의 사용실태가 다르고, 미국이나 영국에 사는 아랍인들의 자녀도 연령에 따라 이중언어의 사용정도가 다르며, 특히 1세는 2세보다 아랍어에 더 능란한데, 그것은 환경적 요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 같다.
아랍지역에서는 과거 식민지 국가가 어느 나라였느냐에 따라 이중언어 사용실태가 달라진다고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아랍세계는 지금 언어의 이중구조로 인하여 고유문화와 외국문화 사이에 갈등을 빚고 있다. 이것은 곧 아랍인의 언어의식에도 상당히 깊게 내재되어 문화적인 필요에 따라 이중구조를 지탱하고 있다. 그래서 아랍의 이중구조를 일반적인 이중구조, 특수한 구조, 영속적인 구조, 단계적인 구조, 개별적인 구조 등으로 나누어 설명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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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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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구멍뚫린 어머니의 신발
어느 해 유월이었다.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는 잔잔한 바람과, 코끝으로 전해오는 풋풋한 풀내음이 그날다라 얼마나 짜증스러웠는지 모른다. 친구들은 모두 즐겁게 놀고 있겠지하고 생각하니 울고 싶었다. 남들 다 가는 수학여행을 가지 못한 것도 억울한데 이렇게 들에서 일을 해야 한다는 데 내게는 너무나 가혹한 벌처럼 느껴졌다. 실은 어머니가 수학여행비라며 옆집에서 꾼 오만원을 주셔서 그것으로 수학여행을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들 새 옷에, 새 신에다 넉넉한 용돈을 가지고 가는데 나만 빈손으로 가면 초라해 보일 것 같아 차라리 농사일이나 돕겠다고 남은 것이다. '이왕 도와 드리는 것 열심히 해야지.' 이렇게 생각했지만,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하루 종일 어머니께 투정 부리고 짜증을 냈다. 그렇게 사흘 동안 일하고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어머니께서 신이나 한 켤레 사 신으라며 꼬깃꼬깃하게 접힌 이만 원을 내게 쥐어 주셨다. 오랜만에 잡아보는 어머니의 손은 많이 거칠었다. 다음날 나는 학교 갔다 오는 길에 어머니가 주신 이만 원으로 빨간 운동화를 사 신었다. 새 운동화에 흙먼지가 묻을까 봐 조심조심 대문을 들어서다 나는 그만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어머니는 못 쓰게 된 장판 조각에 발을 대고, 발 크기만큼 오리고 계셨다. 그리고 축담에는 닳고 닳아 밑창이 뻥 뚫린 허름한 신발 한 켤레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갑자기 새 신을 신은 내 발을 감추고 싶었다. 왜 진작 몰았을까. 당신은 장판을 잘라 헌신에 붙여 신으면서 자식에게는 새 신을 사 신기고 싶어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그런 어머니에게 나는 마구 화를 낸 것이다.
"수학여행 가는데 옷 한 벌 안 사주고 용돈도 이것밖에 안 줘!"
그때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다음해 어버이날 나는 일년 동안 모은 돈으로 어머니께 하얀 구두를 선물했다. 하얀 구두보다 더 맑게 웃으시는 어머니를 보며, 내 마음은 그제서야 조금 편안해 질 수 있었다.
김선옥 님/경남 남해군 남해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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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9.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와 그 방법론(기원전 5세기)
그때 세계에서는 BC400년경: 중국, 제자백가 활동 시작: 한반도에 철기문화 들어옴.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과제는 자연연구에 몰두해 있던 당시의 철학적 방향을 인간성찰의 방향으로 돌려주는 데서 비롯된다. 인간을 도외시한 자연은 진정한 철학이 될 수가 없다. 이 인간애의 성찰은 자연히 자아에 대한 자기반성의 길을 따를 수밖에 없다. 그가 항상 '너 자신을 알라'고 가르친 것은 그 당시 한 신전에 씌어 있던 글이라고는 하나,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학문의 기초라고 본 것이다. 그러면 인간과 자아의 핵심이 되며 진리탐구의 구심점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우리들의 사고에서 가장 가까운 개념을 찾는다면 이성인 것이다. 이 이성이 대외적으로 세계성을 띠게 되었을 때는 로고스가 된다. 로고스와 이성은 하나로 통한다. 질서로서의 로고스이며 사유로서의 이성인 것이다. 그러면 이성을 통한 지리에로의 길은 무엇인가? 대화와 토론인 것이다. 넓게 말하면 사유의 변증법인 것이다. 토론은 묻고 대답하는 동안에 더 높은 지식으로 향상되며, 이제는 더 물을 필요가 없이 확실한 개념에 도달하게 되면 그것이 곧 공통성과 보편성을 갖는 진리로 나타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일찍부터 그 방법을 택했고, 제자들의 공감은 물론, 학문연구의 한 방법을 확립시켜준 것이다. 데모크리토스와 같이 자연을 연구하는 사람의 위치에서 본다면 불필요한 말장난 같아 보이기도 하나, 그의 제자 플라톤은 그 방법으로 수없이 많은 (대화편)을 서술했고, 지금 우리들에게 주는 암시 또한 대단한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자기를 찾아오는 제자들에게, 내가 다른 스승들보다 앞서 있는 것은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알고 있다는 점임을 지적했다. '무지에 대한 지'라는 뜻이다.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르는 사람은 아무것도 알아낼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스승으로서 할 일은 무엇인가? 내가 아는 것을 가르치는 데 있지 않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진리를 찾아내게 하는 산파역을 맡으면 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자연히 두 가지 길이 열린다. 귀납적 변증과 보편개념의 도출과 확립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학문적 업적은 이해할 수가 있다. 그 실제적인 방법은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가 있다. 대화가 있기 때문에 편견에 빠지지 않으며 선입관념의 노예가 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데카르트의 회의가 근대 철학을 유도해왔고, 소크라테스의 회의가 고대철학의 길을 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회의보다도 물음을 통한 토론에서 철학의 길을 열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주지주의에 치우쳤다고 볼 수도 있다. 그는 윤리문제를 취급함에 있어서도 덕은 지라고 말한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베이컨의 말이 있으나,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아는 것이 선의 출발'이라고 보아 좋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고의로는 악을 행치 않는다. 모르기 때문에 악을 행하게 된다고 말한다. 물론 그런 정도의 주지주의에는 문제가 있다. 소크라테스 연구로 학위논문을 제출한 키에르케고르는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나는 필요하다면 몇 번이라고 그대의 이름을 부를 수가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와 그리스의 지성은 아주 큰 과오를 범했다. 그들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차이가 얼마나 크다는 것을 몰랐다"고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뒤를 계승하는 서양의 이성주의와 합리주의 철학의 대부분은 이러한 주지주의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것이 서양철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라톤에 의해 밝혀지고 있는 소크라테스적 사유와 이성적 논증은 지금도 크게 환영받고 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그는 덕이 무엇인가고 묻는다. '현실 사물로 하여금 주어진 목적에 도달케 하며 완성시키는 유능성, 아름다운 소질'이라고 정의를 내린다. 물론 다른 의견을 제시할 사람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설명과 추리가 잘못되었다고는 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뒤를 따르는 윤리학자들이 부분적인 비본질적인 설명을 가하는 때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많은 대중과 제자들의 존경을 받아온 소크라테스가 어째서 독약을 마시는 사형을 받아야 했는가? 어떤 이들은 소크라테스의 위대함을 높이기 위해 반소크라테스 파에 속하는 인물들을 지나치게 비판하기도 한다. 거기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소크라테스를 사형으로 이끌어간 많은 사람들은 학문이나 사상의 문제 때문에 소크라테스를 반박, 처형으로 이끈 것은 아니었다. 인간적 감정과 이해관계가 더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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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보배'의 '배'는 한자음으로 '패'...즉 '조개 패'를 말합니다
'보배'는 어느 나라에서 온 말일까요? '보'자는 '보배 보'자라고 해서 한자임에 틀림이 없지만, '배'는 무엇일까요? '배'도 역시 한자음인데, 우리나라 한자음으로는 '패'로 읽지요. 즉 '조개 패'자입니다. 이 '보패'가 중국음으로서는 '보배'가 되어 우리나라에 그대로 전래된 것이지요. 한자로 된 중국의 단어를 받아들일 때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중국의 발음을 원음대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나라의 음운규칙에 따라 우리나라 음으로 받아 들이는 경우의 두 가지가 그것입니다. '보배'는 바로 전자의 방식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전자의 방식으로 받아들인 것의 대표는 '다홍 치마'의 '다홍'입니다. '클 대, 붉을 홍'이라서 우리나라 음으로는 '대홍'이지만, 중국음으로는 '다홍'입니다. 후자의 방식으로 받아들인 것은 '주전자' 등입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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