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 18 호
2006.09.26 Music Off = Esc
|
|
편지 |
- 風磬
|
|
문학소식 |
|
|
글터 → 명언 / 격언 |
개를 한번 쓰다듬어 주면 계속해서 내내 쓰다듬어주어야 한다. / F.P.J.
|
|
글터 → 과학/예술/교육 |
- 조화유의 미국영어 - 일반인을 위한 경제생활 영어
9. Keep the change.
서울의 한 택시 운전 기사한테서 들은 이야기인데, 한번은 미국인 승객이 내리면서 1,000원짜리 3장을 주고는 뭐라고 영어로 한마디 하기에 "수고했다"는 말이 거니 생각하고 택시 요금 2,500원을 제하고 500원을 거슬러 주었다. 그랬더니 그 미국인은 또 뭐라고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는 돈을 받지 않고 내리더라는 것이야. 나중에야 이 운전 기사는 그 미국인이 한 말이 Keep the change. 였고 이것이 "잔돈은 가지세요"라는 뜻이 라는 것을 대학 다니는 아들한테서 배웠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택시 운전 기사는 물론 식당의 waiter나 waitress, 호텔에서 심부름하는 bellboy (bellhop 또는 bellman 이라고도 함) 등에게 tip을 주는 것이 상식이다. tip은 대개 요금의 10% 정도를 내는 것이 무난한데, No tipping(팁 줄 필요 없음)이라고 써붙인 곳에서는 물론 팁을 주지 않아도 된다. 예컨대 식사 요금이 17달러 50센트가 나왔다면 20달러짜리 한 장을 웨이트리스에게 주면서 Keep the change.라고 하면 "잔돈은(팁으로) 가지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요금은 손님이 직접 cashier에게 갖다 내는 것이 보통이므로 테이블 위에 식사 요금의 10% 정도를 팁으로 놓고 나오면 된다.
Passenger: How much is it? Taxi driver: Eight twenty ma'am. Passenger: (Handing over a 10-dollar bill) Keep the change. Driver: Thank you ma'am. 승객: 얼마지요? 운전사: 8달러 20센트입니다. 승객: (10달러짜리를 주면서) 잔돈은 가지시오. 운전사: 감사합니다.
미국인들은 금액을 말할 때 dollar와 cent라는 단위는 생략하는 것이 습관이다. 예컨대 15달러 26센트는 fifteen dollars twenty-six cents라고 길게 말하기 보다는 fifteen twenty-six라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1달러 40센트는 one forty라 하지 않고 a dollar forty라 한다. 즉 1달러 얼마일 때는 1달러를 one dollar라 하지 않고 a dollar라고 하는 것이다. 예를 하나 더 들어 요즘 미국 의 가솔린 가격은 갤런당 평균 a dollar twenty-five(1달러 25센트)이다.
Diner: Waiter! Waiter: Yes, sir. Diner: Check, please. Waiter: Sure, sir. A minute later- Waiter: Here's your check, sir. Diner: Thank you. (Handing him a 20-dollar bill) Keep the change. Waiter: Thank you very much, sir. 식당 손님: 웨이터! 웨이터: 예, 손님. 손님: 계산서 좀 갖다 주시오. 웨이터: 그러겠습니다. 잠시 후- 웨이터: 여기 계산서 가져왔습니다. 손님: 고마워요. (20달러짜리를 웨이터에게 주며)잔돈은 가지시오. 웨이터: 대단히 감사합니다, 손님.
Customer: How much is this? Saleslady: A dollar sixty-five a piece. Customer: How about that one over there? Saleslady: A dollar thirty-five. It's on sale. Customer: I'll take that one. 손님: 이거 얼마지요? 판매원: 하나에 1달러 65센트입니다. 손님: 전기 있는 저것은요? 판매원: 1달러 35센트입니다. 그건 세일중입니다. 손님: 그것을 주세요.
* Laughing is the best rest. - 웃음은 가장 좋은 휴식이다 A private, lounging outside the PX on a dark night, observed the dim form of another soldier approaching. "Hey, bud" he called out. "Got a light?" "Certainly," said the other. The newcomer struck a match and lit the private's cigarette. And in the flare of the match, the private noted the four stars of a full general on the other's shoulder. it was none other than General Eisenhower. Stiffening to attention, the private said in despair, "I beg your pardon, sir." the general said, "At ease, private, it's all right. Just be glad I'm not a second lieutenant." 캄캄한 밤에 PX 밖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던 한 사병이 어둠속에서 다른 군인이 접근하는 모습을 발견하고 "이봐, 친구, 불 가진 것 있나?"라고 말했다. "있지." 다른 군인이 말했다. 그리고 그는 성냥불을 켜서, 사병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성냥 불빛으로 사병은 상대방 군인의 어깨에 대장 계급자의 별 네 개를 보았다. 그것은 바로 다름아닌, 아이젠하워 장군이었다. 갑자기 몸이 굳어져서 차렷 자세를 취한 사병은 당혹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장군님." "열중 쉬어, 괜찮아, 내가 소위가 아닌 걸 다행으로 생각하게," 장군이 말했다.
|
|
|
글터 → 지식/생활/건강/의학 |
- 음식 토정비결 - 전영순,하정화
<곡류>
7.팥 귀신을 물리치는 신성한 곡식
팥을 한자명으로 소두 또는 적두라고 부른다. 우리가 보통 '콩'이라고 할 때는 콩나물의 재료로 쓰이는 대두를 말하는데 팥은 여기에 비하여 '작은콩' 또는 '붉은콩'이라는 뜻이다. 이렇듯 팥은 콩과는 사촌벌 되는 잡곡으로 우리 조상들과 수천년 동안 숨결을 함께 해왔다. 특히 팥은 일상적인 식탁에서보다는 세시풍속에서 그 진가를 발휘해 왔다. 동지팥죽이나 시루떡, 기타 떡고물 등 명절 때나 제사 때 흔히 볼 수 있는 음식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팥을 민속작물이라고 한다. 팥의 기원에 대해서는 기록이 분명하지 않으며 다만 인도에 있는 덩굴팥이나 히말라야 산기슭 등에서 발견되는 야생종을 원종으로 추측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콩과 마찬가지로 이미 신라시대 이전부터 재배되었던 기록이 있다. 함경북도 회령군 오동의 청동기 시대 유적에서는 팥의 잔해가 출토된 바 있다. 여기서 발견된 원시무문토기에는 팥의 압문이 들어 있다. 또한 백제의 군창 자리에서 녹두와 함께 출토된 적도 있다.
팥은 동양의 온대지방에서 주로 재배되는데 유럽지역에서는 거의 재배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팥을 최초로 재배한 곳은 중국이나 한국일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중국, 한국, 일본 등지가 주산지이다. 팥은 콩과 비슷한 조건에서 잘 자라지만 약간 다습한 곳을 좋아하며 늦게 파종하여도 적응이 잘 되므로 7월 상순까지도 파종이 가능하다. 팥은 조금 독특한 식물이다. 우선 그 색깔부터 선명한 붉은 빛을 띠고 있다. 그런 이유로 예로부터 주술적인 면에 많이 이용되어 왔다. 역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붉은색은 양의 색깔로 귀신을 쫓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굿을 할 때 잡귀를 쫓아내기 위하여 사용되기도 한다. 일반 민가에서는 동짓날 팥죽을 쑤어 먹는 등의 세시풍속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동지 팥죽의 유래는 고대 중국의 고사에서 찾을 수 있다. 아주 오랜 옛날 중국에 공공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이 사람에게는 아무 재주도 갖지 못한 아들이 하나 있었다. 이 아들은 마침내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었는데 그 날이 동짓날이었다. 죽은 아들은 역귀가 되어 사람들을 괴롭혔다. 그런데 이 아들은 생전에 팥을 싫어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죽은 동짓날 팥죽을 쑤어 귀신을 쫓는 풍습이 생겨난 것이라 한다.
동지 팥죽은 먼저 사당에 떠다놓고 차례를 지낸 다음 집안 곳곳에 한 그릇씩 떠다놓고 대문, 벽, 문설주 등에 팥죽물을 수저로 떠서 뿌렸다. 이렇게 하면 액을 막고 잡귀를 쫓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동국세시기}에는 10월 오일에는 팥떡을 마구간에 바치고 말의 건강을 비는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팥죽은 비단 동짓날에만 쑤어 먹은 것은 아니다. 우리 전래 풍습에는 동네에서 초상이 나면 상가에 팥죽을 쑤어서 가지고 갔으며 이사할 때도 팥죽을 쑤었다. 특히 명절 때나 고사를 지낼 때 꼭꼭 상에 올리는 시루떡은 팥고물을 사용한다. 이것도 앞에서 말한 일종의 주술적 의미를 지닌 것이라 하겠다.
성분
팥에는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 미네랄류, 비타민 B1, B2 등의 영양소와 소량의 사포닌이 들어있는데 주성분은 단백질과 당질이다. 당질 중에서도 특히 전분을 많이(34%) 함유하고 있다. 또한 팥의 전분은 세포섬유에 쌓여 있기 때문에 혀끝에 닿는 감촉이 좋으며 삶아도 전분이 풀처럼 끈적하게 풀리지 않는다. 그러나 소화는 비교적 안되는 편이다. 또한 기초적인 영양분 함유량에 있어서도 콩의 1/5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팥은 비타민 B군이 풍부하기 때문에 각기 예방에 대단히 효과가 있다. 특히 비타민 B1은 당질이 체내에서 연소될 때 꼭 필요한 성분이다. 이 비타민 B1은 신경과 관련이 깊어 이것이 부족하면 식욕부진, 피로감, 수면장애, 기억력 감퇴, 신경쇠약 등의 증세가 나타난다. 쌀밥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흔히 비타민 B1이 부족하기 쉽다고 한다. 따라서 팥과 같은 식품을 같이 먹음으로써 영양의 균형을 맞추어주면 좋다. {약성론}에 의하면 '팥은 열독을 다스리고 나쁜 피를 맑게 한다'. {명의별록}에는 '팥은 한열(한열)과 속이 열한 것을 다스리며 소변을 이롭게 한다. 소갈에도 좋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리방법에 따라 다음과 같은 다양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삶은팥/ 팥을 그냥 삶아서 먹으면 혈액을 증가시키는 철분과 함께 비타민 B1을 손쉽게 얻을 수 있다. *달인팥/ 팥에 다섯 배 정도의 물을 붓고 완전히 졸아들 때까지 달여서 공복에 먹으면 이뇨, 소염작용이 있어 간 기능을 도와주고 숙취에 효과가 있다. *팥농축액/ 팥과 다시마를 물에 넣고 내용물이 부드럽게 될 때까지 삶아서 먹으면 녹말을 소화하는데 필요한 비타민 B1을 다량 섭취할 수 있다.
쓰임새 앞에서 언급한 주술적인 용도 외에 팥은 주로 식용으로 쓰인다. 물론 먹을거리로 만들어서 거기에 주술적인 의미를 담는 경우도 있다. 팥죽이나 시루떡 등이 그런 것이다. 요즘은 기업체에서 인스턴트 식품으로까지 내놓은 팥죽(단팥죽은 일본 사람들이 우리 팥죽을 배워서 만든 것이다)을 비롯하여 팥밥, 팥시루떡, 송편이나 절편 안에 넣는 팥고물, 팥단자, 팥고추장, 팥장 등이 민속음식으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다. {도경본초}에 의하면 '각기를 앓는 사람이 있었는데 팥을 포대에 채워넣고 이 팥포대를 아침 저녁으로 오랫동안 밟아댔더니 드디어 나았다'고 한다. 또 {본초강목}에서는 '팥은 난산을 다스리고 잉어, 붕어, 닭고기를 넣고 삶아 먹으면 젖이 잘 나온다'는 기록이 있다. 요즘에도 일부 지방에서는 생일날 팥밥을 지어 먹는다. 찹쌀에 팥을 넣어 밥을 지으면 찹쌀의 끈기와 팥의 붉은빛이 합쳐져 묘한 조화를 이루는데 이것을 보통 '찰밥'이라고 한다. 여기에 밤, 대추, 호도 등속을 넣어 약밥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팥은 민간요법의 재료로도 다양하게 쓰인다.
*피부가 거친 사람은 팥을 볶아서 이것을 다시 물에 개어 얼굴을 씻어내면 피부가 부드러워진다. *비만으로 걱정이 많은 사람은 삶은팥을 다량 섭취하면 좋다. 이때 팥에 설탕을 넣으면 좋지 않으므로 약간의 소금을 첨가하여 충분히 맛을 낸다. *만성 각기에는 팥과 율무쌀을 8:3 비율로 섞어 함께 삶아 밥 대신 먹는다. 하루 세 끼니 밥처럼 먹으면 된다. 이 때는 약간의 설탕을 넣어도 좋다. *이질에는 팥 1홉을 밀가루와 함께 삶아 한번에 먹는다. *변비에는 팥을 달여낸 즙을 수시로 마시면 통변된다. *부종에는 뽕나무 삶은 물에 팥을 달여 수시로 마시면 효과적이다. *과음으로 인해 구토가 심할 때는 팥을 달여 그 물을 마시면 가라앉는다.
이밖에도 팥은 고기 중독을 푸는데 좋으며 산모가 젖이 부족할 때도 그 즙을 마시면 좋다. 또한 메밀겨와 팥을 같은 비율로 섞어 만든 베개를 사용하면 통기성과 단단함이 있어 머리를 차게 해준다. 건강의 기본이 '머리는 차게 하고 발은 덥게 하는데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팥베개는 열 축적을 막아주므로 정신건강에 좋다.
이것이 토종
팥은 현재 중국, 태국 등지에서 주로 수입된다. 수입산 팥은 국내산에 비해 대체로 알이 잘다. 특히 색깔에서는 뚜렷한 차이가 나기 때문에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색깔이 검붉을 정도로 진한 것을 수입산으로 보면 된다. 국내산은 알이 굵고 붉은색이 엷고 선명한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수입산과 반반씩 섞어 파는 경우도 있으므로 구별이 묘연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일단은 색깔이나 크기가 일정하게 고른 것을 선택하여 수입산인지의 여부를 가려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장려품종이 선정되어 있지 않지만 우수한 품종으로는 홍천 적두, 진천 적두, 영동적두 등이 있다.
|
|
|
글터 → 국사/세계사/신화
|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팔만대장경에 담긴 염원 - 김영미(이화여대 교수)
팔만대장경은 누가 어떻게 다 새겼을까?
8만여 장의 판목에 16만여 쪽에 이르는 경전을 누가 어떻게 새겼을까? 그 비용은 어떻게 감당했을까. 대장경을 만들기 위해 최씨정권은 당시 서울이었던 강화에는 대장도감을 두고 남해에는 분사도감을 설치하였다. 강화와 남해에 도감을 설치한 것은 이 곳이 몽고군이 남하하더라도 안전이 보장되는 섬이기 때문이며, 또한 섬과 해안가에서 산벚나무와 돌배나무를 구하기 편리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남해의 분사도감은 정안과 관계가 있는데 그는 대장경 조판을 발원하고 지휘한 최이의 처남이었다. 당시 그는 최이가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하는 것을 보고 해를 피하기 위하여 남해에 물러나 있다가, 대장경 조판 소식을 듣고 사재를 털어 절반을 나누어 새기기로 하였던 것이다. 대장경 조판을 위해서는 두 가지 작업을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는 경판에 대고 새기기 위한 판본을 마련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경판을 마련하는 일이다. 경판은 먼저 목재를 베어내 운반한뒤, 적당한 크기와 부피로 판목을 잘라내어 바닷물에 담가 두었다가, 다시 소금물로 쪄서 기름성분을 완전히 빼낸 다음 몇년 동안 그늘에서 말리고 대패질을 하여 마련하였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경판 한 장의 크기는 세로 24에서 25센티미터, 가로69센티미터 또는 78센티미터,두께는 2.4에서 3.6센티미터 정도이다. 이러한 크기의 경판을 마련하려면 적어도 지름이 50센티미터 이상인 곧은 나무를 사용해야 했다. 따라서 8만여 장이나 되는(잘못 판각하여 버리는 경우를 생각하면 이보다 훨씬 더 많음)경판을 마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경판이 완성되면 승려나 문인이 쓴 경문을 그 위에 뒤집어 붙인 뒤에 양각하였는데, 양면에 각각 14자씩 23행을 새겼다. 그 후 양쪽 끝에 각목으로 마구리를 대고 경판 표면에 진한 먹을 발라 나무를 물들인 후 결을 메끄럽게 한 다음, 그 위에 안료를 섞지 않은 생옻을 두세 차례 칠하여 말렸다. 그리고 순도 99. 6퍼센트 이상의 구리판으로 네 귀둥이를 감싸서 판이 뒤틀리지 않도록 마감하였다. 이렇게 하여 대장경판은 지금까지도 뒤틀리거나 좀먹지 않은 채 보존될수 있었다. 이처럼 복잡한 제작과정에는 많은 인력이 동원되었다. 벌목공, 운반공, 목공, 칠공, 필사하는사람, 글자를 교정보는 사람, 그리고 새기는 사람 등이 바로 그들이다. 그 중 나무를 베어 운반하고 켜낸 후 말리는 일, 강화로 마른 경판을 운반하거나 남해에서 새긴 경판들을 강화로 운반하는 일 등은 지방민에게 부과되었을 것이다. 동원된 지방민들은 처음에는 고역으로 여기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했을 것이다. 인과응보설과 윤회설을 굳게 믿고 있던 당시 사람들에게 불사에 동참하는 일만큼 공덕을 쌓는 일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일이 16년간이나 지속되었으므로 항상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만은 없었을 것이고 때로는 괴로운 의무가 되었을 것이다. <고려사>에서 ‘정안이 대장경 조판에 참여한 뒤 그 지방 사람들은 불사가 매우 번거러워 싫어하고 괴롭게 여겼다’고 한 것이 바로 그 예이다. 조선초기 유학자들이 찬술한 <고려사>의 기록이므로 사실 여부에 대해서는 사료비판이따라야 하겠지만, 16년간이나 작업이 지속되었음을 감안한다면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한편 글씨를 쓰거나 새긴 사람들이 모두 강제 동원되었던 것 같지는 않다. 새긴 사람들 가운데는 전문적인 각수라고 보기 어려운 신분의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각수가운데 승려의 이름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사원에서 경전을 개별적으로 판각하여 간행하기도 했던 것을 감안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진사 신분의 사람들도 각수로 참여하였다. 진사 임대절은 7년 동안 177장을 새겼고, 진사 영의는 한 해 동안 31장을 새겼다. 또 박문정, 염수정, 황공석은 경판을 새긴 뒤에 국자감시에 합격하였다고 한다. 그 밖에도 진사들을 더 찾을 수 있는데, 이들은 강제 동원된 전문 각수라고 할 수 없고 신앙으로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려 자발적으로 동참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겠다. <고려사>에서는 최우. 최항 부자와, 정안이 대장경판 조성을 감당했다고 하였다. 1255년(고종 42)국왕은 대장경판 조성에 최이부자가 세운 공로를 기리는 조서를 내렸는데, 그에 따르면 최이는 사재를 기울여 대장경을 거의 반이나 조판하였고, 최항도 재산을 시주하고 일을 감독하였다는 것이다. 또 정안도 사재를 내어 대장경을 절반 가량 조판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모든 비용을 댄 것은 아니었다. 경판의 끝부분을 보면 대개 구석에 한 명에서 이르는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들은 경판을 만들거나 새기는 데 재산을 시주한 사람들이다. <대방등대집경>권 3의 맨 끝장(제34장)을 보면 천태산인 요원 , “이 공덕의 힘에 의지하여 영원히 윤희의 과보를 벗어나고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극락향에 편안히 사소서”라고 기원하고 있다. 그 밖에 ‘여신도 김씨가 부모를 위해’, ‘사미 백우가 부모를 위해’등의 기록으로 미루어 재가신자들과 승려들이 발원하며 경판을 시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대장경을 새기는 데 일반민으로부터 관리, 지식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이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즉 팔만대장경은 몽고군이 물러나기를 바라는 국가적 사업의 산물인 동시에 개인적인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한 전 고려인의 염원이 담긴 문화재인 것이다.
|
|
|
글터 → 사회/문화/인물
|
- 아랍문화의 이해 - 공일주
3. 언어의 이중구조
양층언어
아랍사회에서는 상층과 하층 간의 기능적인 언어구분이 뚜렷하다. 가령 쉽게 말하면 쿠란에서 내려오는 아랍어는 문어체로서 상층어에 해당되고, 실제 오늘날 아랍 각 지역에서 쓰이는 아랍어는 하층어에 해당된다. 그래서 상층어는 사원의 설교, 국회연설, 라디오와 텔레비전 뉴스방송, 신문사설, 보도기사, 시 등에 쓰이고, 하층어는 하위직 직종을 가진 가진 하인, 웨이터, 근로자에게 지시를 내릴 때, 가족, 친구, 동료와 대화할 때, 그리고 라디오 연속극 및 서민문학에 쓰인다. 또, 아랍어에서 고전 아랍어와 현대 표준 아랍어는 상층어이고 다양한 지역방언과 구어체 아랍어는 하층어이다. 현대 표준 아랍어는 고전 아랍어의 많은 기능을 떠맡고 있으나, 어휘, 문체에서 서로 다르다. 특히 상층어와 하층어 중에서 상층어는 사회적 선망을 얻게 되는데, 그 예로 쿠란을 읽을 때에는 반드시 상층어를 쓰려 하며, 또 상층어는 아랍문화의 본질적 가치를 반영해 주고, 고전작품이 갖는 우위성을 지닌 아랍문학의 문학어로 간주된다. 상층어와 하층어의 또다른 차이는 아랍인은 하층어를 어릴 적부터 배운다는 사실이다. 어떤 경우에는 상층어도 동시에 배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은 전혀 배울 수 없다. 따라서, 상층어는 교육을 통해 배우고 하층어는 습득된다. 하층어는 상층어에서 배운 낱말들을 차용하는 경향까지 보인다. 특히하층어를 사용하는 화자가 공식적인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더욱 그러하다. 그 결과 상층어의 어휘가 하층어에 혼합된다. 심지어 학식있는 아랍의 대학교수들마저 고전 아랍어도 아니고 방언도 아닌 구어체 교양 아랍어를 쓰고 있다.
오늘날 아랍에서 가르치는 아랍어는 현대 표준 아랍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아랍의 많은 학자들은 고전 아랍어가 쿠란의 언어이고, 구어체 방언이 가질 수 없는 아름다움과 논리성과 풍요로움을 지녔으므로, 고전 아랍어가 가장 이상적인 교육어라고 한다. 따라서, 고전 아랍어가 마땅히 교육되어야 하고, 고전 아랍어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에게만 구어체 방언이 가르쳐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의사소통의 필요성에 따라 “왜 학습자가 아랍어를 배우고 싶어하는가? 배운다면 어느 종류의 아랍어가 해당 학습자에게 가장 적절한가? 즉, 고전 아랍어인가? 현대 표준 아랍어인가? 혹은 구어체 방언이면 어느 나라, 어느 지역의 방언이 되어야 할까?” 등의 사회 언어학적 질문이 요구된다. 가령, 아랍에서 농사짓는 농부에게 고전 아랍어나 현대 표준 아랍어는 도움이 안 된다. 그보다는 그가 속한 지역의 방언만이 의사소통에 적합하다. 반면에, 아랍에서 업무를 수행하려는 외교관은 현대 표준 아랍어의 습득 없이는 전문가로서의 업무를 적절하게 수행하기 힘들다. 그리고 현대 표준 아랍어를 공부해야 뉴스나 잡지를 읽을 수 있게 된다. 쿠란이나 문학작품, 아랍시에서나 볼 수 있는 고전 아랍어의 원화자(Native Speaker)는 오늘날 존재하지 않고 고전 아랍어가 쓰이는 지역도 없다. 또, 현대 표준 아랍어는 현대라고는 하지만, 그 현대의 개념으로 보아 10년 전 또는 20년 전의 작품이나 교재에 쓰인 어휘나 문체도 현대의 어휘, 문체라고 할 수 없다. 더욱이 현대 표준 아랍어의 원화자도 없고 사용지역도 규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구어체 방언은 현재, 아랍 각 지역에 쓰이며, 원화자도 존재한다. 결국, 아랍의 22개국에 1억 8천만 이상의 원화자가 쓰고 있는 아랍어는 각 나라마다 다르고 한 나라안에서도 각 지역마다 다른 구어체 방언의 화자라는 사실이다. 아랍인들 사이에는 은근히 자기가 쓰는 방언이 표준어에 근접해 있다고 우겨댄다. 어쨌든 아랍인들 사이에 일치된 여론은 상층어, 즉 현대 표준 아랍어가 현대적 필요에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고전 아랍어와 현대 아랍어는 글로 나타내므로 문어체이고, 각국의 방언은 구어체이다. 문어체 아랍어와 각 나라에서 쓰이는 아랍어 사이의 상호작용에 의해 생긴 구어체 교양 아랍어는 자연히 우세한 방언의 요소를 갖는다. 다시 말하면, 현대 표준 아랍어는 현대의 문학, 저널리즘, 텔레비전, 라디오, 뉴스, 과학과 기술, 저작, 행정과 외교 등에 쓰이는 문어체이다. 이 문어체 아랍어가 아랍세계에서 시간과 공간을 걸쳐 그 차이를 확대시켜 왔을지라도 현대 표준 아랍어는 쿠란이나 중세 아랍문학에 쓰인 고전 아랍어에서 문법론의 대부분을 공유한다. 이 같은 아랍어의 상층어는 점차 그 모습을 갖추어 현대 아랍어 또는 표준 아랍어라고 아랍인 학자들이 일컫게 되었고, 그 밖의 아랍어 학자나 아랍어 방언 학자들은 현대 표준 아랍어라 일컬었다. 아랍지역에는 위와 같은 아랍어만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다. 아랍어외에도 그들의 일상생활에 또 다른 언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8세기 이후, 아랍인의 정복으로 아라비아 반도 이외의 지역에서는 두 개 이상의 언어가 사용되었는데, 오늘날 아랍어와 함께 베르베르(Berber)어를 쓰는 나라는 알제리, 리비아, 튀니지, 모로코이며, 이 곳의 베르베르인은 약 1200만, 그리고 이들 대부분이 이중언어를 사용한다.
|
|
|
글터 → 수필/산문
|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장모님이 사 주신 책상
결혼 일주년을 맞은 우리 부부의 보금자리인 상도동 단칸방에는 큼지막한 책상이 떡하니 자리잡고 있다. 당시 야간 대학 이학년에 재학 중이던 나와 결혼식을 올린 아내는 주위에서 신랑의 직장생활과 공부 뒷바라지를 어찌 감당하겠느냐는 걱정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유독 장모님만은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결혼한 뒤에도 이년간이나 더 학교에 다녀야 했던 나는 중학교때부터 쓰던 낡고 작은 책상을 옮겨 오기로 했다. 아내의 집이나 우리 집이나 살림이 넉넉지 않아 결혼비용을 최대한 절약하자고 마음먹었기 때문이었다. 아내가 극구 새 책상을 사겠다고 했지만 나는 아내를 구슬러 간신히 마음을 돌려놓았다. 그런데 가구가 들어오던 날, 장롱과 화장대 뿐 아니라 주문하지도 않은 커다란 책상까지 배달되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나와 아내는 가구점에 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았다. 가구점 주인은 책상은 맞게 배달되었으며 계산도 모두 끝났다고 했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장모님이 그 책상을 보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 딸 많이 사랑해 주고 공부도 열심히 하란 뜻이네!"
장모님의 말씀에 나는 그저 "네"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신혼의 단꿈이 젖어 있던 어느 날, 아내가 장모님이 이상하다는 말을 했다. 오전에는 항상 집에 안 계셔서 어디 다녀오셨느냐고 물으면 대답을 안 하신다는 것이었다. 장인어른께 전화로 살짝 여쭈니 식당에 나가신다고 하셨다. 건강도 안 좋으신 분이 어떻게 식당일을 하시겠냐는 생각에 나는 장모님께 식당에 절대 나가지 마시라고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장모님은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송서방 괜찮네. 운동삼아 아침에만 잠간 하는 일인데 뭐....."
그날은 그렇게 전화를 끊었지만 장모님이 식당에 나가신 이유는 우리 부부에게 사 주신 책상 값을 갚기 위해서라는 것을 나는 훨씬 나중에야 알았다.
송제인 님/서울시 송파구 잠실2동
|
|
|
글터 → 고전/철학/구비 |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8. 허무주의를 마감하다: -소크라테스의 등장(기원전469-399년)
그때 세계에서는 BC451년: 로마 최초의 성문법 12동 판법 제정 BC403년: 중국, 전국시대 시작
소피스트 말기쯤에 가서는 자신들도 회의에 빠지게 되고 마침내는 허무주의에 이르는 과정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 대표자 중의 한 사람은 고르기아스라고들 말한다. 고르기아스(Gorgias, ?-380 BC)는 백 세 이상까지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고 해도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파악할 수 있다고 해도 말로 표현하기나 전달할 수는 없을 것이다"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이론적인 철학보다도 윤리적인 실천성이 더 비중있게 다루어지고 있었으나, 고르기아스는 보편적인 덕은 거부하고 개별적인 덕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한 사회가 학문과 사상의 병적인 상황에 이르게 되면 그것을 치유할 인물이 나와야 한다. 그렇게 되지 못하면 사회는 정신적 혼란, 가치관의 붕괴, 짙은 회의주의에 빠지게 된다. 소피스트 말기가 바로 그런 상황이 되었다. 여기에 새로운 치유적 책임을 맡은 인물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소크라테스(Socrates, 469-399 BC)였다. 그는 너무 유명한 인물이기 때문에 그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전해지고 있다. 심지어는 철학적 사색에만 잠겨 있는 남편에 대해 부인의 행패가 지나쳤기 때문에 철학자의 부인은 모두 악처일것이다고 농담하는 경우가 있을 정도다.
우리가 알 수 있는 몇 가지 특성은 그는 대단한 추남이었던 것 같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에는 유명한 인물은 그에 해당하는 신화의 주인공 신으로 비유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플라톤을 아폴론으로 비유한 것도 그중의 하나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실레노스(Silenos)신에 비유되고 있다. 그 신은 대단한 추남 신이어서 남들이 있는 곳에는 나타나지 못하고 장마비가 그친 뒤 혼자서 논두렁을 돌보는 신으로 묘사되고 있다. 제자들이 소크라테스에게 "비가 오면 불편하시겠습니다. 콧구멍이 우리와 같이 아래로 향해 있지 않고 위로 되어서 빗물이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고 얘기했더니, "그야 그렇지. 자네들은 땅에서 올라오는 냄새를 맡으며 살지만 나는 위에서 내려오는 신선한 것을 받아가치고 살거든"이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과는 사회풍조가 달랐다는 점이다. 그 당시에는 여성미와 마찬가지로 남성미가 높이 평가받던 시대로서, 추남은 어딘가 모자라는 인물로 평가받던 풍토였던 것이다. 지금식으로 말하자면 소크라테스는 용모 때문에 큰 핸디캡을 안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청렴 정직했고, 순결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욕심이 없었고, 솔직한 성품의 소유자였다고 평했다. 항상 남이 따를 수 없는 기지와 유머를 잃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고요하면서도 명랑했다. 사랑과 존경을 받기에 마땅했고, 넘치는 인간애를 풍기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오해와 증오의 대상이 되어 죽음을 강요당했을 정도였으나, 제자들의 지극한 사랑과 존경만은 잃지 않았다. 사제간의 사랑과 존경은 가장 모범적인 편이었다. 이런 소크라테스가 여러 소피스트들 중에 나타나 30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고, 그의 숭고한 죽음이 인류의 양심에 큰 빛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옷이나 외모에는 관심이 없었던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제자들에게 "너희들의 스승은 옷도 제대로 갖추어 입지 못하느냐, 좀 새옷을 해드리지"라고 말하면, 제자들조차도 "저 해진 옷자락 속에서 아테네의 빛이 나타나는 것은 보지 못하느냐"고 응수했다고 한다.
젊어서 아테네에 나타난 소크라테스는 여러 스승들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스승들에게 질문을 한다. 그러면 스승들이 만족할만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때 소크라테스는 그러면 거기서부터 문제를 전개시켜나가자고 제안한다. 그런 일이 거듭되다 보면 스승은 자신의 한계와 무지를 드러낼 수밖에 없고 자연 소크라테스를 기피하게 된다. 얼마 후부터는 소크라테스 자신이 스승의 위치로 올라가 가르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르치보다는 대화와 토론을 일삼는 소크라테스를 반기지 않았으나, 소크라테스가 확실한 개념까지 유도해주고 해답에까지 이끌어주면 모두가 만족스러움을 얻기에 이르렀다. 사심 없이 진리만을 추구하기 위하여 열성과 지혜를 쏟는 소크라테스의 자세를 옳게 여기기 시작한 많은 제자들이 그를 따르고 진지한 대화와 토론에 의해 진리탐구에 열중하게 되었다. 제자들의 수는 늘어나기 시작했고, 이윽고 소크라테스는 우리를 '참지혜와 진리로 이끌어주는 스승'이라는 정평을 받기에 이르렀다.
|
|
|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
'보신탕'은 이승만 정권 시절에 생긴 말...그 이전에는 '개장국'
여러분들은 보신탕을 드시나요? 왜 드시지요? 보신탕이라서 몸 보신하느라고 드시나요? 보신탕이란 말은 언제 생겼으며 왜 생겼을까요? 보신탕은 이승만 정권 시절에 생긴 말입니다. 그 이전에는 '개장국'이었습니다. 개고기를 된장으로 끓인 장국에 말아 먹는다는 뜻에서 개장국이란 말이 나온 것이지요. '개장국'이란 단어가 제일 처음 나오는 문헌은, 제가 지금까지 찾아 본 것 중에서는(그러니까, 그 이전에도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정조 때 간행된 '명의록언해'라는 책입니다. 궁궐의 담을 넘어가 나쁜 일을 저질렀던 범인을 국문하는 과정에서 그 범인이 '개장국'을 먹고 담을 넘어갔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이것으로 보아 이미 18세기 후반에는 '개장국'이란 단어가 쓰이었던 것이지요. 그 이전에도 쓰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 그 이전의 문헌에서는 이 단어를 찾지 못했습니다. '개고기'를 먹은 역사는 아주 오래 된 것 같습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
|
|
|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