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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5 호
2006.09.22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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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 風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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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강을 다 건널 때까진 절대 악어를 집적대지 말라./ 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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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과학/예술/교육 |
- 조화유의 미국영어 - 일반인을 위한 경제생활 영어
6. Your credit card maxed out.
1950년, 프란시스 맥너머러라는 뉴욕의 한 사업가가 식사를 하고 돈을 내려고 하니 지갑이 없었다. 실수로 집에 두고 왔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그 식당의 단골이 아니었더라면 큰 망신을 당했을 것이다. 그날 밤 그는 잠자리에서 현금이 없어도 식당을 이용하는 무슨 방법이 없을까 하고 궁리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해서 이 세상에 가장 먼저 등장한 크레디트 카드인 Diners Club(다이너스 클럽) 카드가 생겨났다. 크레디트 카드는 모두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plastic money라고도 한다. 상점에서 현금 대신 크레디트 카드를 내놓으면 대개 그 크레디트 카드가 아직도 유효한 카드인지, 그리고 아직도 신용 대출 한도액이 넘지 않았는지를 먼저 확인 하는 절차를 밟는다. 어떤 상점에서는 전화로 확인하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바로 credit card processor(크레디트 카드 처리기계)에 카드를 넣어 확인을 하기도 한다. 확인 결과 그 카드를 받을 수 없다는 메시지가 나오면 점원이 손님에게 I'm sorry but your credit card maxed out. 또는 I'm sorry but your're over your credit limit.라고 말한다. "미안하지만 손님의 신용 대출 한도금액이 초과되었습니다"는 뜻이다.
Customer: How much? Cashier: That will be $65.20, sir. Customer: You take credit cards, don't you? Cashier: Yesh, we do. Customer: Here you go. After verifying the validity of the customer's credit card- Cashier: I'm sorry but your credit card maxed out. Customer: Is that right? In that case, I think I'll pay cash. 손님: 얼마지요? 점원: 65달러 20센트 되겠습니다. 손님: 크레디트 카드도 받지요? 점원: 네, 받습니다. 손님: 여기 있습니다. 손님의 카드에 문제가 있는지를 확인한 후- 점원: 죄송하지만 손님의 크레디트 카드는 신용 대출 한도액이 넘었습니다. 손님: 그래요? 그렇다면 현금으로 내지요.
A: Is there a bank around here? I'm looking for an ATM. B: There's on around that corner. A: Thanks a lot. B: You're welcome. A: 이 근처에 은행이 있습니까? 현금 자동 인출기를 찾고 있습니다. B: 저 모퉁이를 돌아가면 하나 있어요. A: 대단히 감사합니다. B: 별말씀을.
* ATM = Automated Teller Machine
* Laughing is the best rest. - 웃음은 가장 좋은 휴식이다 An illiterate sign painter worked on an order from a photo shop. The sign read: "Films Developed Some Day." Of course the sign should have read "Films Developed Same Day." 문맹인 간판쟁이가 사진관 간판 주문을 받고 만든 간판에 씌어 있기를 "언젠가는 필름이 현상됩니다." 물론 "필름 당일 현상"을 잘못 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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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지식/생활/건강/의학 |
- 음식 토정비결 - 전영순,하정화
<곡류>
5.콩 (대두) - 구수한 된장맛의 뿌리
여름에는 시원한 콩국수로, 겨울에는 맷돌에 갈아 별미로 콩죽을 만들어 먹은 콩. 먼 조상 때부터 우리 생활 곳곳에 여러가지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던 이 콩은 요즘에는 싸고 흔해진 탓인지 다소 천대받고 있는 듯하다. 흔히들 콩을 일컬어 밭에서 나는 쇠고기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오곡의 하나로 오랜 옛날부터 재배되어 왔으며 그 쓰임새 또한 무척이나 다양하다. 콩은 대, 잎, 깍지, 알맹이 어느 한 가지도 버릴 것이 없는 작물이다. 예로부터 대와 깍지는 쇠죽을 쑤어 소에게 먹였으며 어린잎은 된장을 싸서 먹으면 반찬이 된다. 그리고 익어서 수확한 콩으로는 메주를 쑤어 장을 담궜는가 하면 된장, 고추장, 청국장, 두부, 두유 등 지방과 단백질을 공급하는 가공식품들의 원료로 쓰인다.
콩은 동양 최대의 작물이다. 중국에서는 이미 4~5천 년 전에 콩이 재배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의 재배역사도 이미 삼한시대 이전으로 추정된다. 콩의 원산지는 대부분 중국으로 보고 있지만, 견해에 따라서는 우리나라를 콩의 원산지로 보기도 한다. 남북한을 통털어 한반도 전역에 콩의 야생종과 중간종이 널리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와 만주가 원산지이며, 거꾸로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건너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단지 확실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므로 어느 곳이 원산지인지 지금 분명하게 가릴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 또는 인접국가인 중국 등이라는 사실만은 틀림없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 재배되는 콩은 수천 년 풍상에도 굴하지 않고 이 땅을 지켜온 순수한 종자인 것이다. 한편 서양에서 콩이 재배된 것은 불과 몇 십년 전의 일이다. 유럽에는 1739년 파리식물원에 처음으로 파종되었으나 시험 재배에 모두 실패하고 최근에 이르러서야 남부 유럽에 겨우 콩이 보급되었다. 오늘날 세계적인 콩 생산국인 미국의 경우에도 겨우 60년 전부터 콩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산량 면에서는 사정이 크게 달라져서, 1930~40년대만 해도 만주와 한반도에서 세계 콩 생산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것이 오늘날에는 총생산량과 교역량의 60%를 미국에서 차지하게 되었다. 한때는 세계 제 2위의 콩 샌산국이었던 우리나라는 요즈음(1990년 기준) 연간 23만 톤 정도를 생산하여 국내수요의 겨우 20%정도만 자급하고 있으며 나머지 100만 톤 정도를 미국, 중국 등지에서 수입하고 있으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대부분의 식품은 아무리 영양을 골고루 갖춘 것이라 할지라도 많이 먹으면 탈이 생기기 쉽다. 그러나 콩은 아무리 많이 먹어도 좋다고 한다. 무조건 장려해도 좋다는 말이다. 왜 그럴까? 대답은 간단하다. 다른 식품에 비해서 콩은 지지리도 맛이 없다. 이를테면 '콩밥'하면 교도소를 떠올리게 될 정도로 식욕을 돋구지 않으며 특유의 비린내가 있어서 꺼리는 사람도 있다. 콩으로 만든 두부, 비지 등에도 사람들의 입맛을 붙들만한 특별한 맛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콩은 섭취량에 한계가 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옛 문헌에는 콩만 먹고 장수를 누린 기록들이 많다. 일례로 일본의 '오무라'라는 괴짜 노인은 나이 90에 '콩의 장수론'을 주장했다. 그는 쌀을 비롯한 다른 음식물을 일체 먹지 않았고 20여년 동안 매일 콩만 먹었다고 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콩을 볶아서 먹든지, 나물로 먹든지, 삶아서 먹든지 상관 없다고 한다. 무조건 많이,자주 먹으라는 말이다. 그러나 콩을 삶아서 먹거나, 볶아서 먹는 경우 소화 흡수율이 낮다. 실제로 삶은 콩만 먹는다고 했을 때 줄곧 설사에 시달릴 것이 뻔하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두부, 두유 등의 가공형태로 싫컷 먹으면 된다. 예컨데 삶은 콩은 소화흡수율이 65%정도인데 비해 두부는 92.4%의 단백질이 소화 흡수된다. 비지나 두유도 거의 완벽하게 소화된다.
성분
콩은 식물성 중에서는 최고의 단백원이다. 단백질의 질에 있어서는 동물성 단백질보다는 떨어지지만 건강의 적인 콜레스테롤이 콜레스테롤이 전혀 함유되어있지 않으므로 안심하고 먹을 수 있다. 콩에 들어있는 단백질은 뇌의 동맥경화를 막아 뇌졸증을 예방하고 혈관을 튼튼하고 부드럽게 유지시켜 준다. 또한 통변을 원할하게 하여 대장암을 예방해줄 뿐만 아니라 변비, 치질에도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콩에는 레시틴이라는 인지질이 함유되어 있는데 이것은 콜레스테롤을 낮추는 약의 원료로 사용되고 있으며 노화를 방지하고 노인들의 치매를 예방할 수 있다. 또한 콩에는 사포닌이라는 성분이 함유되어 있다. 이 성분은 비만체질을 개선하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 콩에 함유된 비타민E는 혈관의 탄력성을 유지시켜주므로 피부 노화를 방지해준다. 이처럼 콩은 고단백 영양소를 함유하고 있으며 많은 양의 당질을 포함하고 있는 반면 지방 함유량이 적어 이상적인 식품이라 할 수 있다. 콩이 콩나물이 되면 비타민 B와 C군이 증가한다. 신기하게도 이것은 콩에서 생겨난 것이면서도 콩에는 없는 영양소를 함유하고 있는 경우다. 콩을 발아시키면 콩의 상태에는 없는 비타민 C가 생성되고 비타민 B2가 증가하며 소량이지만 나이아신과 비타민 K도 함유한다. 그리고 콩나물에는 칼륨과 칼슘 등의 미네랄과 식물섬유도 많이 함유되어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서민들의 식탁을 풍요롭게 해주는 콩나물은 값은 싸지만, 콩을 섭취하는 것보다 더 많은 영양소를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식탁의 보물이라 할 수 있다.
쓰임새
우리나라는 콩의 종주국인 만큼 그 이용에 있어서도 가히 독보적이다. 콩자체를 조리한 음식은 물론 각종 음식의 보조 재료, 또는 기발한 가공식품인 각종 장류 등 다양하다.
*장류/ 콩과 밀, 보리 등의 곡류에 곰팡이를 번식시켜 발효한 것에 소금이나 고추가루를 첨가하여 일정기간 숙성시킨 것이다. 구수한 맛과 짠 맛, 그밖의 독특한 향기를 부여한 조미식품인 장류는 간장, 된장, 고추장, 청국장 등이 있다. 이 중에서 간장과 된장의 맛은 메주에서 결정된다. 메주는 콩을 삶아서 뭉친 것을 한겨울 동안 발효시킨 것이다. 이렇게 만든 메주를 장독에 넣어 소금물을 붓고 오랫동안 우려낸 것이 간장이다. 또한 간장을 담그고 난 메주는 된장으로 쓴다. 이러한 장류는 육류식품이 부족한 동양권에서 중요한 단백원으로 사랑을 받아왔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집안의 장맛이 좋아야 가정이 길하다는 속신이 생길 만큼 이들 식품의 제조, 관리에 각별한 배려를 쏟아왔다. 예를 들어 신라의 김유신은 전쟁터에서 장맛을 보고 집안의 무사함을 알 수 있었다고 하고, 장독대가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치성의 장소로 사용된 것만 보아도 선조들의 장에 대한 각별한 관심사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장류는 이처럼 수많은 비법과 금기사항을 수반하고 가정주부들의 손맛과 정성으로 발달되어 온 민족양념인 셈이다.
*두부/ 콩에 함유된 단백질 중 수용성 단백질을 추출, 성형하여 만든 것이다. 콩단백질의 원형을 가장 잘 살린 식품이 바로 두부인 것이다. 두부는 콩을 물에 불려 곱게 간 후 여기에 물을 넣고 한 번 끓인 다음 여과한 콩즙에 간수를 넣으면 콩즙 속의 단백질이 응고하게 된다. 이것을 마포에 넣어 가볍게 눌러놓으면 두부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만든 두부는 옛날 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식품이었다. 틀니나 의치가 없던 시대에 살던 노인들이 안심하고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두부는 일종의 '효자식품'의 구실을 톡톡히 해왔던 것이다.
*두유/ 두유는, 물에 담가 불린 콩을 멧돌에 갈아 물을 넣고 끓인 뒤에 비지를 뺀 물이다. 오래 전부터 이를 콩국이라 해서 마셔왔으며 여름이면 많은 가정에서 이것을 차게 해서 국수를 말아먹는다. 두유는 흔히 공장에서 만드는 인스턴트 식품으로 생각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두유는 집에서도 쉽게 만들 수 있다. 노란콩을 한나절 정도 물에 불린 후 건져서 맷돌이나 믹서에 조금씩 넣고 물을 충분히 부어주면서 3분쯤 부드럽게 간다. 그런 후에 무명자루나 발이 고운 체를 이용하여 비지를 걸러내고 남비나 압력솥에 넣어 100˚C 정도에서 반 시간 정도 끓이면 영양가가 풍부한 두유가 된다. 이 때 거품이 많이 나면 식용유를 몇 방울 넣어주면 없어진다.
이것이 토종
최근들어 중국산 콩이 대량 유입되는 바람에 미국산은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다. 중국산은 알갱이가 작고 약간 푸른빛이0 감돈다. 특히 중국산은 껍질이 두텁고 거칠며, 품질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깨진 알갱이가 많고 돌 등의 이물질이 종종 뒤섞여 있다. 이에 반하여 국산콩은 알이 크고, 고르게 노란 빛을 띠고 있으며 껍질이 얇고 크기가 고르다. 또한 이물질이 적은 것도 특징이다. 우리 나라 콩의 주산지는 경기도 연천을 들 수 있다. 이 지방에서 나는 콩은 '연천태'라고 하여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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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세계사/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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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지눌은 왜 불교계를 비판하고 결사를 창립했나 - 박영재(서울대 강사)
수선사 중창과 지방민의 후원
결사가 옮겨간 곳에는 원래 신라시대에 세웠다고 하는 폐사 직전의 길상사가 있었는데. 지눌은 이 곳에 지방민의 힘을 빌어 중창을 마무리 지었다. 그 때의 정황이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전남 북부 장성현 백암사 승려 성부는 목수 일로 평생을 보냈는데, 불법을 듣고 발심하여 염불을 일삼았다. 중창은 모두 그의 손에 의에 이루어진 것이다. 금성(전남 나주)의 안일호장 진직승은 처와 함께 지극한 마음을 내어 술과 매운 냄새나는 채소를 끊고 반야심경을 수지하였는데, 백금 10근을 시주하여 절을 조성하는 비용으로 삼았다. 그리고 남방의 각 고을에 사는 부자는 재물로, 가난한 자 몸으로 절을 완성하였다. 위 자료에서 우리는 수선사가 중창될 때 후원한 인물들이 인근 지역의 지방민, 특히 진직승과 같은 상층 향리층이었음을 알 수 있다. 중앙정치권력의 후원은 일절 없었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수선사 중창에 지방민이 발벗고 나선 것일까. 그들이 지눌에게 염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지방민의후원으로 이룩된 수선사는 지방민의 바람에 어떤 모습을 보였을까. 지눌은 전 시대와는 달리 지체 높은 집안의 후예가 아니라 지방 향리지식층으로서 하급관리를 지낸 인물의 자제였다. 승과에 합격하였지만 이렇다 할 승직도 갖지 못한, 그러면서 권력과 연결된 부패한 불교를 박차고 개경을 떠나 결사를 결행한 승려였다. 지방민도 무인정변 이후 역시 이전의 모습과는 달랐다. 문신 중심의 기존 지배층이 무신에 의해 도태되면서, 지방민은 중앙관인층의 모집단으로서 중앙으로의 새로운 길이 크게 열렸고 지방사회는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리고 전국적인 농민. 천민향쟁으로 피지배층은 사회의식의 성장을 가져왔다. 이제 지눌의 참신한 불교사상과 도덕성은 새로운 사회의식에 눈뜬 이들 지방민의 종교적 욕구를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이들과 지눌은 교감이 없을 수 없었다. 지눌이 이타적 보살행의 실천을 강조한 것은 종교적 깨달음을 사회에 환원하고자 한 것인데, 이는 결국 지방사회의 일반민에 대한 관심의 표출인 것이다. 그리고 중생의 다양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성불의 가능성을 모두에게 개방한 것은, 당시 역사발전에서 역동적으로 분출된 하층민의 신분해방과 무관한 사상이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지눌과 지방민은 중창공사에서 처음으로 만나 바야흐로 결사의 터전을 닦기에 이르렀다. 1197년 공사가 시작, 1205년 드디어 중창공사는 마무리되고 지눌의 결사운동은 본격화되었다.
세 번의 감동적인 깨달음
지눌은 일생 세 번의 깨달음을 경험하였다. 그는 이를 토대로 사상체계를 세워 나갔으며, 그 사상은 결사의 장에서 펼쳐졌다. 첫 번째 깨달음은 전남 창평 청원사에서 <육조단경>, 두 번째는 예천 하가산 보문사에서<신화엄경론>을 읽고 이루었다. 두 번째의 경우는 선승이면서도 교종 계통의 논서를 보고 깨달은 것이 특이하다. 선종세서 문자를 소홀히 여기는 관행과는 대조적인 것이다. 그는 두 번째의 깨달음을 이룬 후 대중을 인도하려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깨달음이 완성되면서 이타행의 종교적 실천도 익어갔던 것이다. 지눌은 수선사 중창을 도반에게 맡기고서 이듬해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2년을 지내면서 열정적인 구도열릉 다시 한 번 보였다. 드디어 <대혜어록>을 보다가 활연대오하였다. 이 마지막 깨달음은 결사 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현실에 대한 선의 적극적인 면을 발견하고 현실사회와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속세를 떠나 은둔하려는 결사가 속세로 되돌아오면서 속세에 물들지 않는 단계로 차원이 높아지게 되었다. 이제 그는 깨달음이 굳건하게 서고 현실과 결사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대중과 함께 결상에 매진하는 일만 남았다. 지눌의 세 번에 걸친 깨달음은 그대로 대중을 이끄는 지도원리가 되었으며 저술로 구체화되었다. 현재 저술로는 <권수정혜결사문>. <진심직설>. <수심결>. <원돈성불론>. <화엄론절요>. <법집별행록절요사기>. <간화결의론>등이 전해 온다. 문자를 거부하는 일반 선승과 달리 여러 저술을 남기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들 저술은 대단히 논리적이고 체계적이면서 다양한 중생의 능력을 고려하여 차근차근 친절하게 깨달음의 세계로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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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사회/문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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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랍문화의 이해 - 공일주
2. 문화와 종교의 매개체
종교의 도구
정확한 발음과 관련되어 쿠란이 경외심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아랍인과 무슬림들의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인 생활에서 쿠란의 경외심은 초기부터 중요하게 다뤄졌다. 아랍어의 언어적 성취가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것이 쿠란이다. 이런 확신으로 인해 아랍어의 급속한 발전을 가져왔고, 중세와 현대에서 1개 방언에 불과하던 쿠라이시 방언이 가장 위대한 언어로 발돋움하였다. 아랍어와 이슬람 간의 긴밀한 관계는 수세기를 걸쳐 아랍인과 무슬림의 신앙과 태도를 반영한다. 언어와 종교간의 상호관계는 그들의 전통을 발전시켜 왔으며, 언어적 도그마를 만들게 되었다. 쿠란이 알라의 말씀이라는 믿음은 그 책이 영원 전부터 일곱번째 하늘에 있었던 '움무 알 키탑(책의 모체)에서 왔다는 무슬림들의 믿음에서 더욱 강조되었다. 그래서 쿠란은 기적이고 인간에 의해 어떤 형태나 모양으로 모방될 수 없다고 한다. 문체가 독특하고 본바탕이 순수하며, 아름다움에서 극치를 이룬다고 말한다. 그러한 생각은 쿠란 해설가, 문법학자와 문학 비평가에게 널리 통용되었다. 그래서 문학비평이 발달했고, 언어학과 문법론이 발달하게 된 것은 오로지 쿠란 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현대문학의 흐름이나 현대 언어학의 조류에 걸맞지 않게 지금도 아랍각국 대학에서는 고전문학과 고전문법이 강세를 차지하고 있다.
무슬림 학자들은 언어현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오늘날 아랍각국에는 표준 아랍어와 생활 아랍어, 그리고 방언들이 있다. 표준 아랍어는 쿠란에서 내려온 고전 아랍어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것이고, 생활 아랍어는 방언이 어느 정도 그 사회의 대표성을 획득하면서 대부분의 표준말과 일부 방언이 섞인 아랍어이다. 이런 언어현상이 아랍각국에 상존함에도 아랍인 무슬림들은 오로지 쿠란을 가르쳐야 된다는 일념하에 쿠란의 아랍어만 고집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부모로부터 습득한 자기네 고유방언 이외에 7세 이후 학교에 입학하여 거의 12년 동안 쿠란에서 그 줄기를 받아 현대 아랍어를 학교에서 배우지만, 아직도 아랍인은 표준발음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다. 그것은 아랍 고유의 방언 속에 현대 표준 아랍어 자음 28개 중에서 적어도 4내지 5개 자음이 실제 방언에는 없기 때문이다. 또, 무슬림들은 쿠란에 외래어가 없다고 고집한다. 그래서 쿠란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것조차 제재를 가한다. 그것은 아랍어만이 쿠란의 내용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무슬림들은 쿠란이 그처럼 독특함을 지니는 것은 곧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랍어에 대한 신적 기원은 쿠란 11장 29절 “알라는 아담에게 모든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는 구절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성주의자였던 무으타질라 그룹에서는 아랍어는 인간들 사이의 협약의 산물이라 규정한다. 또다른 사람들은 아랍어는 자연을 모방하기 위해 쓰인 음성의 집합이라 규정한다. 이 밖에도 아랍어는 그 일부가 신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나머지는 협약의 결과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위와 같은 여러 가지 견해에도 불구하고 현대에 와서 언어학자들은 언어를 인간의 행동과 관련지어 여러 가지로 정의한다. 하지만, 아랍어가 이슬람의 언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으며, 아랍인은 시대의 흐름을 종교가 가로막는 언어관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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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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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상교야! 집 거정하지 마고
어둠이 연병장으로 밀려올 때쯤이면 난 어김없이 담배 하나를 물고 고향쪽 하늘을 쳐다본다. '모두들 잘 있는지.....' 가족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리려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상교야! 편지왔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내 마음이 벌써 고향집에 닿은 것일까. 편지 겉봉엔 익숙한 동생의 글씨가 가지런히 쓰여 있었다. 나는 정신을 어디에 빼앗긴 것처럼 한동안 어리둥절했다. 그것은 아버지가 보내신 편지였다. 연세가 칠십육 세나 되신 고령의 아버지가, 학교라고는 초등학교 근처에도 가 본일이 없으신 당신께서 손수 글을 적어 보내신 것이다. '상교야! 집 거정하지 마고 건강하게 군생활 열시미 해.....' 글씨를 제대로 읽고 쓸 줄 모르시는 아버지는 받침 생략과 띄워 쓰기도 엉망인 그저 소리나는 대로 삐뚤삐뚤 쓰신 편지를 보내셨다. 아버지의 글은 한동안 나의 몸을 마비시키는 듯했고 나는 부끄러운 기억이 떠올라 얼굴이 붉어졌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금방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초등학교 때 어쩌다 소풍이라도 가는 날이면 으레 아버지께 오시지 말 것을 신신당부했고, 또 가을 운동회때는 '아버지와 함께 뛰는' 경기가 있었는데 연세 많은 아버지와 함께 뛰어봤자 꼴찌가 분명할 테고, 남들 앞에 아버지와 함께 서는 것이 부끄럽기도 해서 슬그머니 숨어 버리곤 했다. 그때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쓰리고 서글프고 아프셨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나 죄송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다. 비록 한글도 모르는 아버지시지만 나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굵게 팬 이마의 주름살, 궂은 농사일로 거북이 등처럼 갈라진 손등이 잘 말해준다. 그 사랑이 없었더라면 내 어찌 세상에 발을 붙이고 또 지금 이렇게 건강한 사람이 되었을까. 이런 부끄러운 자식을 위해 정성스럽게 편지를 써 보내시다니..... 나는 힘겹게 글을 쓰시는 아버지의 굽은 등이 떠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져 편지를 읽어 나갈 수가 없었다.
권상교 님/충북 제천시 고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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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5. '우주는 아름다운 조화가 있는 전체': 피타고라스(기원전 572--492년)
그때 세계에는 BC 587년: 유대왕국 멸망(제2차 포로) BC 563년: 불타 태어남(--483)
탈레스로부터 시작된 자연에 관한 소박한 연구과제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으로 일단락을 지었다. 그러나 그 계통과는 다른 또 한 갈래의 철학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온다. 그것은 철학에서 과학에의 방향이 아닌 철학에서 형이상학, 즉 관념적 사유로서의 철학이 있어야 하며 또 필요했던 것이다. 그처음 개척자는 우리가 여러 면에서 자주 듣는 피타고라스(Pythagoras, 572--492 BC)와 그의 학파 사람들이다. 피타고라스는 에게 해의 섬 사모스 지방의 철학자였다. 그 당시 사람들은 그를 신비로운 인간으로 숭앙했다. 여러가지 분야의 학문에서 탁월하게 앞서 있었으며 종교적인 의식행사까지 주관하는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같으면 스님이나 신부, 목사의 직책까지 겸했다고 보아 좋을 것 같다. 그는 음악에 있어서도 남다른 식견을 갖고 있었으며,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가장 일찍 체계적인 수학이론을 정립시켜주었다. 또 기하학의 스승이기도 했다. 또 그는 인생과 세계운명에 대해서는 윤회설을 믿고 있었다. 그것은 중동지방에서 그리스 쪽으로 전래된 종교 및 철학적 사고를 받아들인 것으로 반드시 업보와 보응설이 뒤따르게 된다. 어떤 이들은 동방에서 전해진 인과응보설이라고 하나, 본래부터 그리스 정신 속에는 운명론과 더불어 응보설이 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는 종교적 규율로 육식을 금했다. 그것은 위생적인 견지에서 보다는, 인간과 동물은 같은 생명성을 갖고 있는데, 생명이 생명을 해치면서 육식을 하는 것은 종교적 신앙에 타당치 않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상스럽게도 인도인들이 신들과 인간과 자연생명에는 연관성이 있다고 보았듯이, 그리스 인들도 피타고라스 같은 사상가를 통해 비슷한 뜻을 이어받았으나 오래 지속된 흔적은 나타나지 않는다. 피타고라스도 세계와 만물의 아르케는 무엇인가고 물었다. 그러나 자연주의 철학자들과는 다르게 무엇이 원질인가 하는 것 보다는 어떤 원리와 법칙에서 존재하는 세계가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물었다. 그것 때문에 탈레스와 다른 피타고라스 계통의 철학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피타고라스는 그 존재하는 세계의 원리와 질서는 수의 조화법칙에 의한 것으로 보았다. 최초의 수학자다운 견해였다. 그는 그만큼 수의 신비로운 면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는 홀수와 짝수로 이루어지고 있다. 피타고라스는 그 두 종류의 수에 성격을 다음과 같이 부여했다.
홀수(1, 3, 5, 7, 9): 한계. 하나. 오른쪽. 남. 고정됨. 직선. 빛. 선. 정방형. 짝수(2, 4, 6, 8, 0): 무한. 많음. 왼쪽. 여. 움직임. 곡선. 어둠. 악. 구형.
이렇게 보면 우리는 세계의 만상을 수의 성질과 법칙에 따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공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러한 피타고라스는 철학자이면서 종교적이며 윤리적인 스승이기도 했다. 그는 또 당대에 인정받는 의사이기도 했다. 오르피즘과 통하는 영혼론을 발전시켜 영혼이 육체적 올무로부터 해탈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순결과 정화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그는 종교적인 단체를 통한 공동훈련을 강조해서 금기의 뜻을 펴나갔고, 음악과 철학에서 정신적 순화를 강조했다. 인간은 누구나 가치관의 상승에 따르는 삶의 순화와 고난이 필요하며, 지식과 지혜는 계속 인간적 삶을 높여줄 수가 있다고 보았다. 그는 수학자와 음악가답게 모든 가치의 표준은 조화에 있으며, 조화의 질서가 생활과 세계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건강과 더불어 윤리적인 덕도 조화의 원칙에서 성취된다고 보았다. 단체훈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평등스러운 우정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피타고라스의 정신은 과학적이며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소망스러운 방향으로 전개되기도 했으나, 일부에서는 신비주의와 심지어는 미술적인 건전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철학적인 교훈과 학설은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 가장 큰 철학적 과제는 자연에 따라 자연을 연구하는 소박한 실재론이 아닌, 자연을 관념적인 정신적 원리에 따라 설명하려는 철학의 방향을 열어준 것이다. 그래서, 철학은 두 갈래 즉, '자연을 따라서'와 ' 자연을 넘어서'의 길로 나누어진 것이며, 피타고라스는 후자의 철학적 영역을 개척해준 셈이다. 피타고라스의 철학사상은 한때 후계자들에 의해 커다란 논쟁의 과제로 인정되었다. 그리고 그 문제는 사실보다도 이론적인 문제로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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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
'씨름'은 옛말 '힐후다'에서 나온 말
'씨름'을 모르시는 분은 안 계시겠지요. '씨름'을 더 이상 분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씨름'을 더 이상 분석할 수 없으면, 이런 질문은 하지 않겠지요. '씨름'을 '씰우- + -음'으로 분석될 수 있다면 믿으시겠어요? '-음'은 물론 명사를 만드는 접미사이고요. 그렇다면 '씰우-'는 무엇일까요? 물론 동사어간이지요. 그러나 '씰우-'를 설명하려면 '씰우-'의 어원을 따져야 합니다. 우리 옛말 중에 '힐후다'라는 동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승강이질하다, 논쟁하다, 다투다" 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이 '힐후다'가 히읗 구개음화가 되어서 '실후다'가 되었고, 유성음 사이에서 '히읗'이 탈락하여 '실우다'가 되었습니다. 이 '실우다'의 명사형이 '실움'입니다. 이것이 다시 된소리로 되어 '씨룸'이 되고 이것이 다시 '씨름'이 된 것이지요.대신 '힐후다'라는 동사가 '실우다'로 된 뒤에 이 동사는 쓰이지 않고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로 그 동사의 흔적으로 명사형인 '씨름'만 남게 되었지요. '씨름'을 몸싸움으로만 연상하지 마십시오. 이 '씨름'은 '입씨름'에도 남아 있습니다. 옛날에는 '입씨름'을 '입힐훔'으로 쓰이었습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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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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