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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4 호
2006.09.21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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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당신의 시 한편을 읽는 시간은?
누리터나 서점등에서 책을 고를 때 우리는 시 한편을 경험하게 됩니다. 무심코 집어 들어 펼쳐본 시집의 시 한편. 무심코 클릭했는데 펼쳐진 시 한편. 당신은 그 시 한편을 읽는 데 얼마의 시간이 걸리시나요?
길거리에서 거리를 지저분하게 만드는 광고전단지가 있습니다. 그 전단지 보는 시간보다 짧은 가요 아니면 긴가요?
시 몇줄로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내재하고 있는 의미, 단어의 심도는 책한권도 만들게 합니다. 시인은 과연 그 한편의 시에 무엇을 쓰려 했을까요?
당신은 시 한편을 읽는데 얼마의 시간이 걸리시나요?
- 風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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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강요된 것이 아닌 윤리가 진정한 윤리. / 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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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과학/예술/교육 |
- 조화유의 미국영어 - 일반인을 위한 경제생활 영어
5. Will that be all?
"댓 비 오?" "얍." 미국의 상점이나 식당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대화의 한 토막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은 영어를 꽤 잘한다고 자부해도 좋다. 저자가 처음 미국에 유학왔을 때, 한번은 McDonald's(맥다날즈) 햄버거 식당에서 hamburger 하나와 French fries(감자를 썰어 튀긴 것) 그리고 milk를 주문했더니 점원이 "댓 비 오?"라고 말했다. 그래서 Pardon me? (뭐라구요?)라고 물으니까 그점원은 또 "댓 비 오?"라고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으나 두 번 이상 묻기도 뭣하고 해서 무조건 고개를 끄떡해 봤더니 점원은 알았다는 듯이 내가 주문한 것을 갖다 주는 것이었다. 그후 식품점에가서 식품 몇 가지를 사들고 cashier(돈 받는 점원) 앞에 갔더니 또 "댓 비 오?"라고 한다. 이번에도 무조건 고개를 끄덕하긴 했지만, 도대체 "댓 비 오?"가 무슨 말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기숙사 roommate(같은 방을 쓰는 사람)에게 물어 보았더니 "댓 비 오?"는 Will that be all? 인데, 이것을 미국 사람들은 "댓 비 오?"처럼 발음한다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아하, 이게 그러니까 "그것이 전부가 되겠습니까?" 즉 "이것 뿐입니까?"(다른 것 더 사실 것 없습니까?)란 뜻이구나 하고 무릎을 쳤다. 따라서 맨 앞에 소개한 말을 영어로 써 보면,
Will that be all? Yup. 이 된다.
Yup(얍)은 yes와 같은 뜻으로 미국 사람들이 흔히 쓰는 말이므로 이 짧은 대화의 뜻은 "이것뿐입니까?" "그렇습니다"가 된다. 미국 사람들은 Will that be all?에서 will은 것의 들리지 않게 발음하거나 아예 생략하고, all도 '오올'이 아니라 그냥 '오'처럼 들리기 마련이다. 점원이 Will that be all?이라고 물을 때 Yes. 또는 Yup. 이라 대답하기도 하지만 That's it. 이라고도 한다. "저것이 그것이다"란 말이 아니라 "그게 전부입니다", 즉 "그것뿐입니다"란 뜻이다. 이것은 또 "그게 바로 그겁니다"란 뜻으로도 쓰인다. Is this what you were talking about? (이게 당신이 말하던 바로 그것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That's it.이라고 대답하면 "그게 바로 그겁니다"란 말이 된다.
Cashier: Will that be all? Customer: That's it. Cashier: Cash or charge? Customer: Cash. Cashier: Alright. That will be $25.56. 점원: 이것뿐입니까? 손님: 예(이것뿐이에요). 점원: 현금을 내실 겁니까, 아니면 크레디트 카드를 쓰실 겁니까? 손님: 현금입니다. 점원: 알겠습니다. 25달러 56센트 되겠습니다.
Salesgirl: May I help you? Customer: Let me have a cheeseburger, regular French fries and a large coke, please. Salesgirl: Will that be all? Customer: That's it. Salesgirl: Here or to go? Customer: To go. 판매원: 뭘 드릴까요? 손님: 치즈버거 하나와 보통 크기의 감자튀김 그리고 큰 컵으로 콜라 하나 주세요. 판매원: 그것뿐입니까? 손님: 그것뿐이에요. 판매원: 여기서 드실 겁니까, 가지고 가신 겁니까? 손님: 갖고 갈 거예요.
A: Hi. Can I help you? B: Yes. Let me have a hotdog and a small coke, please. A: All right, sir. Would you like it with the works? B: What do you mean? A: I mean, would you like ketchup, mustard and relishes on your hotdog? B: Oh, yes, I'd like everything on it. A: Very well, sir. A: 안녕하세요, 도와드릴까요? B: 네, 핫도그 하나 하고, 콜라 작은 것 하나 줘요. A: 알겠습니다. 전부 다 발라 드릴까요? B: 그게 무슨 뜻이죠? A: 케첩, 겨자, 양념 등을 핫도그에 발라서 드시겠냐는 말씀입니다. B: 아, 네, 전부 다 발라 주세요. A: 잘 알겠습니다.
A: Can I help you? B: Yes. Can I order takeout? A: Sure, What would you like? B: I'll have a chili con carne and a large coke. A: Anything else? B: No. That'll be it. A: $2.27, please. B: Here you go. A: Here's your change. Your order will be coming up in a couple of minutes. A: 도와드릴까요? B: 네, 사 가지고 갈 것도 주문 받습니까? A: 됩니다. 뭘 드릴까요? B: 칠리 컨 카니(멕시코 스타일의 간이식)와 콜라 큰 것으로 하나 주세요. A: 다른 것은 더 주문하실 것 없습니까? B: 없어요. 그것만 주세요. A: 2달러 27센트입니다. B: 여기 있습니다. A: 잔돈 여기 있습니다. 주문하신 것은 1,2분 후에 나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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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지식/생활/건강/의학 |
- 음식 토정비결 - 전영순,하정화
<곡류>
4.참밀 - 공해 없고 수확량 많은 토종밀
밀은 모든 작물 중에서 세계적으로 재배면적이 가장 넓어 전 세계 작물 경작지의 4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유럽지역은 전 세계 경작지의 2분의 1 이상을 차지한다. 소비량 역시 유럽지역이 단연 최고다. 구미지역에서는 주식인 빵의 재료로 중요한 위치를 지켜왔지만 지금에 와서는 동양권에서도 식생활의 변화에 따라 밀의 수요가 늘고 있다. 우리가 말하는 밀은 '참밀'의 준말이다. 한자명으로는 소맥,진맥 등 여러가지로 불리운다. 밀의 원산지는 서아시아(페르시아)라고 한다. 빵밀의 가장 오래된 탄화종자가 기원 전 5천5백년 경의 유적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밀의 원종은 그보다 훨씬 이전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학자들에 따라서는 밀의 재배역사를 1만여 년 전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처럼 오랜 재배역사를 지닌 밀은 기원전 5천 년 경에는 소아시아를 거쳐 유럽의 라인강 유역으로 흘러들어 가고, 또 흑해의 서안에서부터 러시아 일대에 전파되어 갔다. 그리하여 기원전 3천 년 경에는 마침내 유럽 전역에 전파되었다.
한편 이 무렵에는 북아프리카, 에집트 주변에서도 널리 재배되었고 기원전 2천 년 경에는 인도에까지 이른다. 또 기원전 1천 5백년 경에는 아랄해 지역에 퍼지고 몽고를 지나 중국 북부까지 전해졌다.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에 밀이 전파된 것도 기원전으로 추정된다. 경주의 반월성터와 부소산의 백제 유적지에서 밀의 유해가 발견된 사실이 이를 뒷바침한다. 따라서 밀은 우리나라에서도 여타의 작물보다 재배역사가 무척 빠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서기 4~5세기 경에는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밀은 일반적으로 온대로부터 한냉한 지역에 걸쳐 건조한 풍토에 적합한 곡식이다. 그러나 기후에 대한 적응성이 강하여 전 세계 어디에서나 널리 재배되어 쌀과 함께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작물로 그 지위를 지켜온 것이다. 현재 세계적으로 재배되는 밀은 빵소맥(보통의 밀)이 주종을 이룬다. 그러나 빵소맥 외에도 마카로니소맥을 비롯하여 10여 종이 있다. 빵소맥은 빵, 국수류, 과자의 원료로 쓰인다. 우리나라에서 주로 재배되는 밀은 주로 가을밀인데 1920년 경에 일본품종과 재래종이 재배되었고 이후에 수원85호, 86호 등의 개량종이 보급되었다. 최근에는 조숙, 다수확 품종으로 조광, 다홍밀, 올밀, 수원215호 등의 품종이 보급되었다. 그러나 날로 증가하는 밀의 수요를 국내 생산량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형편이어서 거의 절대량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사실상 우리나라에서 밀은, 예전에는 귀한 곡식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밀은 밀전병, 유밀과 같은 별식이나 간식 등을 만들 때만 쓰였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원조의 물결을 타고 질이 좋지 않은 미국산 밀가루가 다량으로 도입되면서 주식 대용으로 쓰이게 되었다. 한때는 정부에서 분식하는 날을 정해 놓고 밀가루 음식을 먹도록 권장하는 사태에 이르기도 했다. 미국산 원조밀에 의해 우리 식생활이 급격하게 변화한 것이다. 국민소득이 증대되고 쌀 자급이 이루어지면서 요즘에는 국민들의 식생활에 대한 요구 자체가 빵, 과자 등을 선호하는 추세로 나아감에 따라 밀의 수요는 꾸준히 늘어날 전망이다. 따라서 밀의 공급을 막연히 수입에만 의존할 수는 없는 형편에 이르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밀생산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면 외화도 절약하고 건강도 지키는 이중의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성분
밀은 약 69%의 당질과 약12%의 단백질 그리고 약 2.9%의 지질을 포함하고 있다. 밀 단백질의 [글루텐]은 글리아딘과 글루테닌의 복합체로서 물과 반죽하면 끈기가 있는 가소성의 특성이 있으므로 과자 등 여러 모양을 만들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단백질을 구성한 아미노산은 글루타민산, 프롤린이 많고, 리신, 트립토판, 트레오닌, S-함유 아미노산은 적다. 비타민은 쌀보다 약간 많은 편이다.
쓰임새
밀은 주로 제분하여 밀가루로 만들어 빵 및 면류(국수류), 과자 등의 제조, 동물의 사료, 된장 등의 원료로 쓰인다. 빵은 주로 밀가루(강력분, 준강력분)에 물, 소금을 가하여 반죽을 한 다음 이것을 빵 효모로 발효시키고, 가열하여 부풀게 한 유럽형과 설탕,분유, 기름 등의 보조 재료를 섞은 미국형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유럽형, 미국형 모두 보급되고 있다. 면류에는 여러 종류가 있으나 그 과정은 밀가루에 소금과 그 밖의 재료를 섞어 압면한 다음 국수모양으로 만든 것이다. 면류에는 가락국수(우동), 메밀국수 등이 있으며 즉석라면은 증기로 찐 국수를 기름으로 데치거나, 열풍건조하여 녹말이 화한 상태에서 탈수시킨 것이다. 면류를 장기보존하면 미생물에 의한 부패, 녹말의 노화, 풍미가 감소하기 쉽다. 냉장고에 보존할 필요가 있고, 건조면 또는 즉석라면류에 있어서도 햇빛이 쬐이지 않는 장소, 온도, 습도가 낮은 장소에 보존하고, 특히 기름의 산화 등에 의해 변질되기 쉬운 것은 제조일이 가까운 것을 선택하여 이용해야 한다.
이것이 토종
우리나라의 밀 수요는 점차 증가하고 있는 반면, 현재 자급도는 0%이다. 다시 말하면 100%를 수입해서 먹고 있는 셈이다. 해방 후 미국에서 대량으로 들어온 원조 밀가루와, 통일벼의 빠른 모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밀 재배는 급속히 줄어들었고 급기야 멸종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최근에는 일부 뜻있는 시민, 학생, 농민들이 힘을 모아 '우리밀 살리기 운동'을 펴고 있다. 그리하여 92년도에는 40kg들이 6천 5백 가마를 처음으로 수확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 결과 우리밀의 평균 수확량이 외국밀에 비해 1.5배 가량 월등히 높은 것으로 입증되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 토종밀은 겨울에 키우므로 병충해가 없고 농약을 사용치 않으므로 무공해 작물이다. 미국산 등 외국밀은 장기간 보관을 위해서 수확한 뒤에 사용하는 농약만 하더라도 21가지나 된다. 단적인 예로 지난 92년 가을에 호주산 밀에서 사용금지된 농약이 검출되어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이같이 독성 농약으로 범벅된 밀로 만든 가공식품이 우리들 식탁을 넘나들고 있는 현실이다. 외국산 밀이 말썽을 빚고 우리밀 살리기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자 농림부에서는 토종밀의 종자를 일반인들에게 보급하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 토종밀은 농촌과 환경을 살리고 우리 국민의 건강을 보호한다는 취지 아래 재배가 활발히 이루어질 전망이다. 토종밀과 외국산 밀은 모양만으로는 구별하기가 무척 어렵다. 그리고 성질을 보면 토종밀은 연질분으로 국수나 부침개를 만드는데 적당하고 미국산은 경질분으로 빵 굽는데 적당하다. 지금 시중에 나도는 밀가루 제품은 거의 다 미국산, 또는 호주산이라 보면 된다. 다만, 소비자와 생산자가 협동으로 재배하는 독특한 형태의 '우리밀 살리기 운동' 회원으로 가입하면 농약 공해에 찌들지 않은 순수한 우리밀을 출자금만큼 배당받을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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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세계사/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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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지눌은 왜 불교계를 비판하고 결사를 창립했나 - 박영재(서울대 강사)
불교계 비판
1165년(의종 19)8세의 이른 나이에 출가한 지눌은, 마음을 깨달아 부처가 되기 위하여 이름있는 선승을 찾아 법을 묻기도 하고 참선을 하기도 하면서 그 과정에서 얻은 기쁨을 남과 함께 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세태는 그가 수행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여기 저기 두루 다니면서 세상을 보니 불교계는 말이 아니었다. 승려들은 세속적인 이익에만 급급하고 수도는 뒷전이었다. 장탄식이 절로 나왔다. 우리가 아침 저녁으로 하는 일을 돌이켜 보면, 불법을 빙자하여 나와 남을 구분하면서 세속적인 이익에 구차스럽고 세상의 풍진 속에 푹 빠져 도덕은 닦지 않고 의식만을 허비하니, 비록 출가했다고 하나 무슨 덕이 있겠는가. 아, 삼계를 벗어나고자 하나 번뇌를 끊을 수행이 없고 남자의 몸이 되었으나 장부의 뜻은 없구나. 그러니 위로는 도를 넓히지 못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이롭게 하지 못하며 가운데로는 부모. 스승. 국왕. 시주의 은혜를 저버렸으니 참으로 부끄럽도다.
그렇다면 무엇이 승려들을 수도에 전념하지 않고 세속적 이익에만 급급하게 하였을까. 그것은 승려 개인의 종교적 양심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근본적으로는 불교계가 지배세력과 세속적 이익을 목적으로 결탁하여 불교 본연의 임무를 망각한 때문이었다. 이런 세태를 지눌은 매서운 눈으로 비판한 것이다. 그 대상은 물론 개경을 중심으로 권력과 밀착된 정치 승려와 그 무리들이었다. 이처럼 불교계의 병폐가 극에 달해 있는 어두운 상황에서 기존 불교계에 편입되어 승려 본연의 자세를 견지해 나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때는 타락의 본거지를 멀리 떠나는 것이 상책이었다. 양심과 용기 있는 승려들이 개경을 떠나 지방에서 결사운동을 전개하였으니, 그것은 시작은 작은 횃불이었으나 후일 한낮을 밝히는 해가 되었다. 특히 지눌이 주도한 결사는 불교교단이 타락하여 사회정화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이를 비판하고 개혁하기 위해 기존 교단에서 벗어나 뜻이 맞는 도반끼리 진정한 수행을 목적으로 결성한 자발적인 신앙공동체이다. 국가나 중앙 지배층의 후원을 배제하면서 수도를 떠나 지방민의 후원을 받아 출발하기 때문에, 따라서 그 규모가 초기에는 소규모적이었다.
결사 선언
지눌이 결사 의지를 처음 피력한 것은 1182년(명종12) 1월이었다. 선을 토론하는 승려집회, 즉 담선법회가 열리고 있던 개경 보제사에서, 그는 뜻이 맞는 동학에게 결사에 대한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법회가 끝난 후 세속적인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산림에 은둔해서 결사를 하자. 그래서 항상 선정을 익히고 지혜를 닦기에 힘쓰며 예불하고 경전 보며 노동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소임에 따라 수양하여 인연 따라 성품을 기르고 평생을 구속 없이 멀리 덕 높은 이의 삶을 좇는다면 어찌 유쾌하지 않겠는가. 지눌의 말은 세속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리 저리 끌려 다니면서 수행하지 않은 승려 생활은 이제 청산하고, 결국 은둔해서 출가 본연의 수도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그 말이 끝나자 여러 승려들이 ‘요즘 같이 어수선한 시대에 나무아미타불이나 외우면 되지 선정과 지혜를 닦을 필요가 있겠는가’, ‘선정과 지혜를 닦으면 신통을 부릴 수 있는가’, ‘우리의 심성이 본래 깨끗하다면 수행은 오히려 스스로를 묶는 불필요한 행위가 아닌가’등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에 대해 지눌은 논리 정연하고 일관되게 선정과 지혜를 닦는 것이 불교의 근본임을 역설하였다. 토론이 끝나자 결사 취지에 동감을 표한 동학들은 ‘정혜사’라는 결사의 명칭을 정해 놓고 후일을 기약하였다.
그러나 결사는 쉽게 성사되지 않았다. 얼마 후 실시된 승과시험에서 당락에 따라 제각각 현실적인 이해를 좇아 뿔뿔이 흩어졌던 것이다. 지눌은 승과에 합격하였지만 주지와 같은 승직에 연연하지 않고 지방으로 구도 행각을 홀로 떠났다. 보제사에서 기약한 후 6년 여가 지났을 때 결사의 인연이 다시 찾아왔다. 경북 하가산 보문사에 머물고 있던 지눌에게 전에 결사를 기약했던 동지로부터 이제 시작해 보자는 편지가 문득 날라 왔던 것이다. 이에 지눌은 팔공산 거조사로 거처를 옮겨 전에 약속했던 사람들을 모으니, 죽고 병들거나 명리를 좇아 떠나버린 자들을 빼고 겨우 3, 4명이었다. 그러나 애당초 산림에 들어가 운둔하여 선정과 지혜를 닦자는 마당에 인원수가 무슨 문제이겠는가. 1190년 늦봄 지눌은 장문의 <권수정혜결사문>을 지어 정혜사(이후 수선사, 송광사로 바뀜)의 창립을 선언하고 신분과 종교, 종파를 가리지 않고 취지에 찬동하는 모든 이에게 문호를 활짝 개방하였다 때는 지눌의 나이 31세, 결사문에는 권력과 밀착되어 세상의 하찮은 이해 따위나 좇는 타락한 불교계를 질타하고 타력에 의한 깨달음을 버리고 자력에 의한 깨달음, 즉 선정과 지혜를 닦아 주체적인 깨달음을 이루자는 정연한 주장이 전편에 도도하게 흐르고 있다. 결사를 선포하고 나자 뜻밖에 공감하고 모여든 사람들이 많아졌다. 거조사는 비좁아 결사 장소로 적당한 곳을 새로이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옮겨간 곳이 지금의 송광사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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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사회/문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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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랍문화의 이해 - 공일주
2. 문화와 종교의 매개체
아랍어
예술적인 정확한 표현의 수단
아라비아 반도의 북서지역에서 발원한 아랍어는 무함마드가 속한 쿠라이시 부족의 여러 방언들 중의 하나이다. 이슬람 이전에 아랍어는 글로 표현되는 기회가 적었지만, 구비문학의 매개체로서, 특히 아랍시를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아랍인에게 널리 애송됐던 아랍시는 여러 부족들의 생활에 특별한 위치를 갖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사이에 연합하는 힘으로써, 그리고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작용했다. 아랍인들이 그들 스스로 하나의 민족임을 의식하게 된 것은 곧 아랍어로 된 그 시 때문이었다. 시는 그들에게 예술적, 지적, 그리고 영적인 표현을 가능하게 해 주었고, 또 이슬람 이전의 시인들은 리듬 있고, 강한 느낌을 전해 주는 시를 씀으로써 일반대중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 당시의 시인은 지도자요, 대변인이요, 찬미의 주인공, 평화의 인도자, 전쟁의 승리자 역할을 하는 등 모든 면에서 그 지도적 역할을 다 했다. 따라서, 그들의 영향력은 화살보다 빠르게 사막을 가로질러 아랍인의 마음 속에 깊이 자리 잡았고, 아랍인의 가치관에 즉각 반영되었다. 그들의 시는 아랍인의 이상적인 미덕, 즉 남성다움, 용맹, 관대함, 용기와 명예를 묘사하였고, 아주 잦은 것은 아니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이별의 슬픔과 야영지를 떠나 황량한 야영지를 보며 회한에 잠기는 시는 더욱 아랍시를 돋보이게 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이슬람 이전의 시는 아랍인의 예술적인 표현을 마음껏 드러내어 가장 많은 사랑을 받게 되었다. 더구나 이 때의 시문학이 수세기를 거쳐 오늘날까지 읽혀지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중요성 또한 대단하여 무함마드 자신도 그의 초기 포교에 시인들로부터 풍자와 냉소를 받으면서도 시를 중요하게 여겼다. 이처럼 시인들은 그들의 문화의 대변자로서의 역할을 했다. 언어의 표준과 성문화의 모델로서 아랍시는 쿠란 다음 가는 두 번째 중요성을 부여 받았다. 그것은 아랍시가 아주 정확하고 그 표현이 아름다웠기 대문이다. 시에 대한 예술적인 가치를 감상하는 것 이외에도 자신의 의사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능력은 이슬람 이전이나 이슬람 시대에서 완벽한 인간의 기본자질로 여겼다. 이는 한국에서 옛날 ‘신언서판’이 중요시되었던 것과 일맥상통한 이야기이다. 또한 아랍인의 팽창에 따른 아랍어와 쿠란 읽기의 부정확성으로 인해 점차 아랍어를 얼마나 정확하게 읽을 수 있느냐에 관심을 두었다. 그래서 이슬람 시대에 순화된 아랍어, 정확한 아랍어로 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사람들의 이름이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이를테면 무함마드와 알 칼림 븐 아흐마드(786년 사망)이다. 신학자 하산 알 바스리(718년 사망)와 알 핫자즈는 적시적절하게 말할 수 있는 언어능력 때문에 그 명성이 높았다. 사실, 정확하고 올바른 언어구사가 그들의 목표였지만, 귀족과 일반대중에게는 이것이 결코 쉽거나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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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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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할아버지의 유품
벚꽃이 지던 그날, 할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던 나는 얼마의 지폐가 든 하얀 동투를 발견하고 왈칵 눈물을 쏟았다. 부모님이 이혼하는 바람에 나와 동생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했다. 할아버지가 국수를 뽇아 생계를 유지하지만 생활이 어려워 고등학교를 진학할 때는 돈도 벌 수 있는 산업체 야간학교를 택했다. 그러나 그 학교는 공장 근무를 일 년 이상 해야 하는 조건이 있었으므로 나는 중학교 삼학년 겨울방학 때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해가 바뀐 1월 10일, 첫 월급을 탄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 봉투를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할머니는 대견하다며 연신 눈물을 찍어 내셨지만 할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당연하다는 득 천원짜리 육십장을 천천히 세어 본 뒤 귀가 접힌 돈과 앞뒤가 뒤집힌 돈을 차례차례 귀를 펴고 맞춰서 툭툭 다독였다. 그 동작이 어찌나 느리던지 할아버지 앞에서 한달 용돈을 기다리던 나는 지루하고 답답하기만 했다. 할머니는 애가 고생하면서 번 돈이니 마음대로 쓰라셧지만 할아버지는 그런 할머니를 호되게 야단치시고 달랑 천 원짜리 세장을 내미셨다. 나는 속으로 '내돈인데.....'하며 뾰로통해졌다. 월급봉투를 서랍에 집어 넣는 할아버지가 너무나 야속해서 그날 밤 나는 그대로 회사 기숙사로 돌아와 버렸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매번 할아버지 앞에서 삼천원을 타기 위해 기다린 지루함이 먼 기억으로 남아 있는데 할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 책상 서랍 한쪽에서 가지런히 귀가 맞추어진 지폐 몇 장이 든 돈봉투와 스물일곱장의 월급봉투, 그리고 내 이름으로 된 저금통장을 발견한 것이었다. 한번도 '수고했다'는 말씀이 없으셨던 할아버지셨지만 월급봉투 한 장까지 하나도 버리지 않고 깨끗이 보관하신 것으로 보아 나를 얼마나 대견하게 생각하셨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내 이름 석자가 또렷이 박힌 월급봉투를 안고 나는 한참이나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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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철학/구비 |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4. 최초의 유물, 원자론자: 데모크리토스(기원전 460년경--370년경)
그때 세계에는 BC 484년경: 석가모니 죽음 BC 427년경: 고르기아스 '비존재에 대하여, 또 자연에 대하여'
지금까지 얘기해온 탈레스 이후의 몇 철학자들의 학설을 보고 나면, 역시 2천 5백 년 전의 그리스 인들이 아무리 지혜롭다고 하더라도 학문과 사상적으로는 유치했다는 생각을 금치 못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한 가지 흐름이 있었다. 철학의 과제는 자연을 연구함에 있었고, 자연세계를 있는 그대로 살펴보며 거기에서 어떤 실체 또는 실재로서의 물질세계를 밝혀보려고 하는 뜻이었다. 후일의 철학자들이 소박한 실재론이라고 불러준 것은 그 성격을 잘 설명해주는 내용이다. 과학은 이미 찾아진 내용 위에 또 다른 내용이 추가되어가기 때문에 과거의 학설이 완전히 버림받는 일은 별로 없다. 그러나 철학은 과거의 철학이 무의미하거나 이어받을 필요가 없다고 인정되면 버림을 받는 경우가 있다. 지금까지의 철학이론들은 사실 버림받을 수도 있는 내용들이다. 그러나 여기에 그들의 철학이 완전히 버림받지 않도록 만든 한 뜻있는 철학자가 나타났다. 그가 소박한 실재론을 현대적인 성격으로까지 끌어올린 대표적인 철학자였던 데모크리토스(Democritos, 460?--370? BC)다.
이 당시에 그리스를 대표하는 세 철학자가 있었다. 데모크리토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들이었다. 세 사람 다 20여권씩의 저서를 남겼다. 그런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은 대부분이 그대로 남아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으나, 테모크리토스의 저서는 대부분이 사라지고 말았다. 심지어는 다른 사람에 의해 인용되었던 부분만 전해지는 경우도 있다. 리셀 같은 철학자는 만일 데모크리토스의 저서가 완전히 남았더라면 철학의 과학적 발전과 근대적인 추이는 더 속히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생각하면 아쉬운 일이다. 확실히 데모크리토스는 탈레스의 물음에 대해 완전히 철학적 대답을 내려준 철학자였다. 그리고 막연했던 철학적 고찰에 대해 과학성 있는 대답을 주었던 것이다. 데모크리토스는 충분히 철학적 사고를 했다. 그는 철학의 근본 문제는 유와 비유와 공허의 문제를 취급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있음과 있지 않음과 공허가 있을 뿐인데, 유는 원자(Atom)의 분열과 이동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니까 철학의 과제인 유는 원자들의 운동에서 설명되어야한다. 그 원자는 만물의 원질인 동시에 실체라고 보아야 하겠다. 무게는 있으나 성질은 없는 실체인 것이다. 마치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원자론과 큰 차이가 없는 생각에 도달했던 것이다. 따라서 원자들은 필연적인 법칙에 따라 운동할 뿐이다. 선택이나 성질 등은 개입할 수가 없다. 그런 존재로서의 세계는 기계론적이며 운명적인 법칙에 따를 뿐이다. 이처럼 그는 철저한 유물론적인 세계관을 수립해주었다. 신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으며, 인간의 노력이나 선택이 세계의 법칙과 질서를 어길 수도 없어지는 것이다. 그 주변적 사고나 사상들은 원인과 결과를 모르는 잘못된 관념들에 지나지 못한다.
어떻게 본다면 데모크리토스는 최초의 원자론자가 된 셈이며, 종교와 신화시대를 종결짓는 새로운 철학에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다. 이런 성격의 철학자였기 때문에 그는 윤리문제를 취급함에 있어서도 플라톤과 같은 이상주의나 관념적인 교훈을 멀리했다. 230개가 넘는 윤리적 단편들이 전해지고 있으며, 어떻게 욕망과 본성을 조절하며 선한 인간관계를 수립해나가는가 함을 가르쳤다. 그 자신이 무신론자였기 때문에 종교적 환상이나 내세에 대한 기대 같은 것은 문제삼지 않았다. 그는 많은 재산이 있어 여행을 즐기고 해박한 교양을 쌓았으며, 백 살을 살면서도 지혜로운 처세를 지켜왔다. 말년에는 소크라테스를 멀리했다. 그는 소크라테스를, '반박을 즐기며 말이 많은 사람은 필요한 것을 배울 수 없다'고 경계했다. 소크라테스는 자연을 철학의 과제에서 소외시켰고, 자연을 회피한 소크라테스를 데모크리토스도 피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플라톤은 데모크리토스를 언급한 일이 없다. 그렇게 많은 저작을 남기면서도, 그러나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78회나 데모크리토스를 인용하고 있다. 그만큼 아리스토텔레스는 공정성과 과학성을 수용할 수 있었다는 증거가 될지도 모른다.
플라톤은 모든 물체의 해결을 위에서부터 풀어 내려왔고, 테모크리토스는 아래로부터 풀어 올라갔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옆으로부터 풀어나간 것 같은 인상을 풍기고 있다. 어쨌던 원자론으로 유물론의 문을 연 데모크리토스는 수학, 천문학, 생물학에도 공헌을 남긴 당시의 대표적인 철학자의 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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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
'수저'는 '숫가락'과 '젓가락'이 쳐진 말
밥을 먹기 위해서는 '수저'가 필요하지요. 여러분은 '수저'를 가져 오라고 하면, 무엇을 가져 오시겠습니까? '숫가락'만 가져 오시겠습니까? '젓가락'만 가져 오시겠습니까? 아니면 '숫가락'과 '젓가락'을 다 가져 오시겠습니까? 물론 '숫가락'과 '젓가락'을 다 가져 오시겠지요. 왜 그러냐구요? '수저'는 '숫가락'의 '수'와 '젓가락'의 '저'가 복합된 단어처럼 보이니까요. 그러니까, '수저'에서 '저'는 '젓가락'의 '저'로 보여서, '수+저'로 분석됨을 금새 알수 있으실 있을 것입니다. '저'는 한자입니다. '대 죽' 밑에 '놈 자'가 붙은 한자 ‘箸’입니다. 그러니까, '젓가락'은 '저'라는 한자 아래에, '가락'이라는 우리 고유어가 붙어서 된 말입니다. 그 사이에 '시옷'이 들어간 것이지요. '가락'은 '엿가락' 등에 쓰이는 '가락'과 동일한 것입니다.
'숫가락'도 '수 + 시옷 + 가락'으로 분석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의 '수'는 한자가 아니고 고유어입니다. 즉 '수'가 아니고 '술'입니다. '한 술 뜬다'의 '술'입니다. 이 '술'에 '시옷'이 붙으면 '수' 밑에 '리을 시옷'받침이 붙은 글자가 되지요. 이 두 개의 받침 중에서 '리을'이 탈락해서 '시옷'만 남게 되어, '숫가락'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저'도 '수 + 저'로 된 단어가 아니고, '술+저'로 된 단어인데, '지읒' 앞에서 '리 을'이 탈락한 것입니다. 이러한 예는 많습니다. '마지 못해서'도 원래 '말지 못해서'였던 것과 같은 것이지요.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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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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