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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4호 - 2024.10.28. 월요일(음력 : 9.26.)
angelo@nownforever.co.kr / 風文 윤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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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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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은 벌어들임으로써 가능하나, 삶은 베풂으로써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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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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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구와 속담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따로 보기’ 기능이 있다. 이는 ‘관용구’ ‘속담’ 등만을 따로 검색할 수 있는 기능인데, 예를 들어 ‘관용구’로 들어가 ‘발’을 검색하면 ‘발’과 관련된 관용구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실제로 ‘관용구’에서 ‘발’을 검색해 보면 ‘발’로 시작하는 관용구는 74개, ‘발’을 포함하는 관용구는 134개가 있는데, 예를 들어 ‘발이 넓다’는 ‘사교적이어서 아는 사람이 많다’는 뜻으로, ‘말발이 서다’는 ‘말하는 대로 시행이 잘 되다’는 뜻으로 등재되어 있다.
다음으로 ‘속담’에서 ‘발’을 검색해 보면 ‘발’로 시작하는 속담은 22개, ‘발’을 포함하는 속담은 218개가 있는데, 예를 들어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는 ‘말은 비록 발이 없지만 천 리 밖까지도 순식간에 퍼진다’는 뜻으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믿고 있던 사람이 배반하여 오히려 해를 입는다’는 뜻으로 풀이되어 있다.
그렇다면 ‘관용구’와 ‘속담’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관용구’는 ‘단어들의 의미만으로는 전체의 의미를 알 수 없는, 특수한 의미를 나타내는 어구(語句)’인데 비해, ‘속담’은 ‘예로부터 민간에 전하여 오는 격언이나 잠언’으로 사전에 뜻풀이가 되어 있다. 즉 ‘관용구’가 단순히 비유의 기능을 가지는 어구인데 비해, ‘속담’은 풍유나 해학적인 요소가 들어가 교훈이나 풍자를 담은 어구로 구별하고 있는 것이다.
관용구나 속담을 평소에 많이 알고 있고, 실제 말과 글을 통해 구사할 수 있다면 우리말 실력은 한층 더 높아질 것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의 ‘따로 보기’ 기능을 이용해 관용구와 속담을 익히도록 하자.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모음조화
옛말에서는 ‘모음조화’(양성모음은 양성모음끼리, 음성모음은 음성모음끼리 어울리는 현상)가 넓은 범위에서 규칙적으로 실현되었다. 예를 들면, 명사가 어떤 모음으로 끝나느냐에 따라 ‘을’(ㅳㅡ들←ㅳㅡㄷ+을)이 붙기도 하고 ‘ㅇㆍㄹ’(소ㄴㆍㄹ←손+ㅇㆍㄹ)이 붙기도 하는 식이었다. 심지어 ‘나모(나무), 하ㄴㆍㄹ(하늘)’처럼 어휘 내부적으로도 모음조화가 적용된 사례도 많다. 그런데 현대로 올수록 모음조화가 흐트러지게 되는데, ‘ㆍ’(아래아)가 소실되면서 양성과 음성의 대립 체계가 무너지게 된 것이 주요 원인이다. 다만, 흉내말에서는 여전히 모음조화가 잘 유지되고 있다. ‘알록달록-얼룩덜룩’, ‘잘까닥-절꺼덕’, ‘졸졸-줄줄’처럼 모음조화를 활용해서 말맛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어미 ‘-어/-아’의 표기도 모음조화와 관련이 깊다. ‘겪어, 베어, 쉬어, 저어, 쥐어’처럼 어간 끝음절의 모음이 음성일 때와 ‘피어, 그어, 희어’처럼 중성일 때에는 ‘-어’가 선택된다. 어간 끝음절의 모음이 양성인 경우에는 조금 복잡하다. ‘잡아, 보아, 얇아’처럼 어간 끝음절의 모음이 ‘ㅏ, ㅑ, ㅗ’일 때는 ‘-아’가 선택된다. 반면에 어간 끝음절의 모음이 ‘ㅐ, ㅚ’일 때는 ‘개어, 되어’처럼 ‘-어’가 선택된다. ‘ㅐ’와 ‘ㅚ’가 옛날에는 중성모음 계열에 속하는 소리였던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종합해 보면, 본말 ‘빼앗다’는 ‘빼앗았다, 빼앗아라’로 활용되고, 준말 ‘뺏다’는 ‘뺏었다, 뺏어라’로 활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같애, 바래’가 아니라 ‘같아, 바라’로 적어야 하며, ‘(배낭을) 메다’건 ‘(끈을) 매다’건 모두 ‘메어, 매어’와 같이 적어야 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대성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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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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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1 - 윤동주
소리 없는 북, 답답하면 주먹으로
뚜다려 보오.
그래 봐도
후
가아는 한숨보다 못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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凍夜(동야) - 김수영
壁(벽) 뒤로 퍼진 遠近(원근) 속에
밤이
가벼웁게 개울을 갖고
개울은 달빛으로 얼음 위에
얼음을 놓았는데
너무 고요해서 잠에서 깨어나
내가 비는 것은
이 무한한 웃음의 가슴속에
그 얼음이 더 얼라는
來日(내일)의 呪符(주부)이었다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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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 이해인
겹겹이 싸매 둔 장미의 비밀은
장미 너만이 알고
속으로 피흘리는 나의 아픔은
나만이 안다
살아서도 죽어 가는
이 세상 비인 자리
이웃과 악수하며 웃음 날리다
뽀얀 외롬 하나
구름으로 뜨는 걸
누가 알까
꽃밭에 불밝힌
장미의 향기보다
더 환히 뜨겁고
미쁜 목숨 하나
별로 뜨는 사랑
누가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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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땐 별이 되고 (흰구름 단상 13~17) - 이해인
13
`나는 내가 경험한 작은 사랑이 세상에 나가 큰 사랑으로 넓어지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것이 결국은 내 사랑의 완성이 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는 구절이 가장 기억에 남던 양귀자님의 소설 <천년의 사랑>을 여행중에 읽었다. 소설가들의 상상력은 항상 놀랍기만 하다.
14
부산에서 안동으로 기차를 타고 가는 길이 매우 아름다웠다. 세상 다른 곳에도 빼어난 아름다움이 많이 있을테지만 - 아주 작아도 구석구석 우리 나라 고유의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이 넘치는 곳을 여행할 때마다 새롭게 느끼며 우리 나라에 태어난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해외에 다녀온 이들이 가끔 “한국보다는 외국이 더 살기 편하다” “고국에 잔뜩 기대를 하고 왔는데 볼 것이 없다”고 가볍게 말할 때는 “그래요?” 하면서도 매우 서운한 마음이 들곤 했다. 특별히 애국자가 아니더라도 내가 태어난 모국을 끔찍이 위하고 사랑하는 것이 도리다. 그래서 그의 단점과 허물을 남의 탓을 하며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그 구성원인 우리 각자가 더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외국어보다 국어 공부를 더 열심히 하는 것 역시 애국이 아닐까? 젊은이들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국어 맞춤법이 생각보다 너무 많이 틀린 것을 보면 안타깝다. `우리 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다`로 시작하는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읽어야 할 좋은 책이다.
15
아무리 애를 써도 결코 억지로는 짜낼 수 없는 시. 그러나 안 써지는 것 역시 즐거워하기로 한다. 시가 어려워도 시를 포기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 세상은 더욱 아름다우리. 보석처럼 열심히 갈고 닦은 빛나는 시인들을 나는 죽을 때까지 질투하며 부러워하리라.
16
르완다의 뼈만 남은 어린이들의 그 퀭한 눈들이 자꾸 나를 쳐다본다. 북한의 배고픈 겨레에게 우리 정부는 너무 무심하고 냉랭하다. 오늘도 태연히 밥을 먹는 게 부끄럽다. 눈물을 글썽인다고, 기도한다고 그들에게 힘이 될까? 우리 나름대로 절식을 해서 그 몫을 떼어 돕는다지만 어쩐지 답답하다. 이웃의 아픔과 불행에 그냥 속수무책인 것만 같은 나의 위치가 가끔 괴로울 때가 있다. 수도자의 가난이란, 마음뿐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돕고 싶은 가난한 이들에게 자기 개인의 뜻과 이름으로 베풀고 싶은 원의조차 포기하는 가난함에 있다. 온전한 순명, 철저한 고독에 나 자신을 내맡기는 신앙과 용기가 내겐 아직도 무척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17
암세포가 온몸에 퍼져 항암치료를 받는 C수녀님 방에 그분이 좋아하는 풀꽃 한 묶음 들고 갔더니 매우 기뻐하셨는데 그 모습을 보니 나도 기뻤다. 아름다운 꽃은 중환자들에게도 아름다운 위로가 됨을 다시 보았다. 생사의 갈림길에 있는 환자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귀찮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속단하는 것은 잘못인 것 같다. “거듭 생각해도 고마운 것이 너무 많고, 고마운 이들이 너무 많아요. 전에 큰 수술을 받았을 때는 이만하면 됐으니 데려가 달라는 기도가 나오던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조금만 더 생명을 연장시켜 달라는 욕심을 부리게 돼요. 그분이 다 알아서 잘해 주시리라 믿고 싶어요” 하는 수녀님의 야윈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할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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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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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밤 - 김영수
오순도순
아이들이 놀던 자리
살며시
그림자가 모여 앉았다.
은행잎도
전봇대도
골목길에 모여
아이들처럼 놀고 있다.
달님은
대문을 활짝 열고
서 계신 어머님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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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밤에 - 노원호
사작사작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착하고 예쁜 것
그것을 찾느라
달빛이 걷고 있다.
이 집에도 기웃
저 집에도 기웃
달빛은 점점 밝아지고 있는데
오늘 낮
담벼락에 낙서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린다.
달밥에 나는
달빛이 걷는 소리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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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외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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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의 날개 위에 - 하이네(Heine)/임종대 옮김
노래의 날개 위에,
사랑하는 님, 당신을 실어 가리다.
저 멀리 갠지즈의 평원으로,
그 곳은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곳.
그 곳에는 붉은 꽃 피어나는 정원이
고요한 월광(月光)을 받고 있다.
연꽃들도 사랑하는
자매를 기다리고 있다.
제비꽃들은 키득거리며 소곤거리며,
별들을 쳐다본다.
장미들은 은밀히 향기로운 동화를
서로의 귓속에 소곤거린다.
껑충거리며 지나가다 엿들은
천진스런, 영리한 영양(羚羊)들,
그리고 멀리서 출렁이는
성스러운 강물 소리,
그 곳에 앉읍시다.
종려나무 아래,
그리고 사랑과 안식을 마시며
행복한 꿈을 꿉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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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추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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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수의 감성사전
군대
전쟁에 대비해서 조직된 무장단체. 자국의 인명과 재산을 보호하는데 그치는 군대와 타국의 인명과 재산을 탈취하는 데까지 주력하는 군대로 대별된다. 전자는 약소국의 군대이고 후자는 강대국의 군대다.
진눈깨비
저물어 가는 겨울 풍경 속으로 쏟아지는 비창이다. 세월의 통곡이다. 목메이는 그리움이다. 쓰라린 아픔이다. 부질없는 사랑이다. 회한의 눈물이다. 시린 뼈의 신음이다.
고스톱
금세기에 이르러 방방곡곡 가가호호마다 유행하기 시작한 개인 금융사업의 일종이다. 화투를 무기로 소규모의 생존경쟁에 뛰어들어 적들의 호주머니를 약탈함으로써 자신의 정신건강을 양호케 하고 경제생활을 윤택케 만든다. 화투에는 여러가지 꽃들이 그려져 있으며 그 향기에 도취되면 패가망신을 당해도 화투를 버리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만다. 양쪽 팔이 부러지면 발가락으로라도 화투를 쳐야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 할 수 있는 상태에까지 이르고 만다. 항간에는 마음을 비우면 끗발이 좋아진다는 설이 유행처럼 나돌고 있으나 학계에서는 정설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진정으로 마음을 비운 자라면 호주머니까지 비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거지
부자들에게 자선을 베풀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는 하나님의 심부름꾼. 하늘을 지붕으로 삼고 땅을 베개로 삼아 무소유의 철학을 모소 실천해 보여주는 청빈도인. 신분증이 없는 세금 징수원. 전 국민을 납세 대상자로 삼고 있으며 납세 방법은 최대한 자율화되어 있다.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거지에게서 또다른 예수의 모습을 본다.
독도
출렁거리는 파도 속에 허리를 내맡긴 채 무념무상에 잠겨있는 동해고불.
봄
동안거가 끝나면 봄이 온다. 봄은 겨울을 가장 쓰라리게 보낸 사람들에게는 가장 뒤늦게 찾아오는 해빙의 계절이다. 비로서 강물이 풀리고 세월이 흐른다. 절망의 뿌리들이 소생해서 소망의 가지들을 자라게 하고 소망의 가지들이 소생해서 희망의 꽃눈들을 틔우게 한다. 눈부신 슬픔을 알게 만들고 눈부신 사랑을 알게 만든다. 초라한 서민들의 늘어진 어깨 위에도 좁쌀가루 같은 햇빛이 쏟아져 내리고 죽은 행려병자의 남루한 누더기에 위에도 생금가루 같은 햇빛이 쏟아져 내린다. 그러나 세상에 아무리 햇빛이 가득해도 마음 안에 햇빛이 가득하지 않으면 아직도 봄은 오지 않은 것이다. 아직도 겨울은 끝나지 않은 것이다.
허영
열등의식과 욕구불만을 원료로 배합하고 허욕이라는 향료와 허세라는 색소를 첨가해서 만들어낸 마약의 일종이다. 중독 되면 정신이 황폐해지고 영혼이 척박해진다. 자신을 실제보다 과장되게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필요이상 겉치레에 신경을 쓰는 특질을 보인다. 선천적으로 남자보다는 여자가 중독 될 위험이 높다. 중독 되면 치료가 매우 어렵다. 허영의 둥지에서는 동경의 알이 부화되고 동경의 알속에서는 향락의 새가 태어난다. 그 새는 사치의 날개를 활짝 펼쳐 중독자를 패가망신의 지름길로 안내한다. 허영에 중독된 환자를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의료기관은 아직 지구상에 설치되지 않았다. 백약이 무효하고 마음을 비울 수만 있다면 완치가 가능하다는 사실만 상식화되어 있다.
절망
혼수상태에 빠져버린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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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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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수필집 2-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중년이란 무엇인가? 그 첫 번째 '탈모에 대하여'
며칠 전 어느 주간지로부터 '나의 이십 대'라는 페이지에 하루키 씨 얘기를 싣고 싶은데, 그 일로 이십 대에 찍은 사진을 한 장 빌렸으면 한다는 전화가 걸려 왔다. 나는 옛날에는 사진 찍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지금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십 대의 사진이란 게 거의 없는데, 그래도 어떻게 대 여섯 장은 찾아냈다. 그런데 그 십 년 남짓 이전의 사진을 보고, 내 머리카락이 이십 대 때보다 훨씬 풍성해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머리 스타일이 달라진 탓이겠지 했는데, 몇 번을 다시 보아도 단연 지금 쪽이 머리카락 양이 많다. 더부룩한 것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이발소에 다니는 횟수도 옛날보다 늘어났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머리카락이 많아졌다는 건 흔한 얘기가 아니다. 마누라는 '옛날에 비해 머리를 안 쓰니까, 그래서 스트레스가 없어진 때문 아니예요?'라고 간단히 말하는데, 암만 별 볼일 없는 소설이라 해도 소설을 쓰는 이상은 그 나름으로 머리를 쓰고, 머리를 쓰면 스트레스도 자연 쌓인다. 문단이라든가 업계, 세금, 월부금 등등의 일도 있고, 더구나 소설가도 옛날처럼 뜰에 나 앉아 참새 떼를 바라보며 '벌써 봄이로군'하고 주절거릴 수 있는 시대가 아닌 것이다. '머리를 안 쓰니까'라는 둥 간단히 결론 짓지 말았으면 좋겠다. 네게도 역시 여러 가지 힘든 일이 있다. 그런 것이 바깥으로 반영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니, 아닌게 아니라 내 머리카락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전업 작가가 되고 난 뒤부터이다. 그렇다면 전업 작가가 된 일이 나의 생활에 어떤 변화를 초래했는가 하는 문제를 총괄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면 내 증모현상의 수수께끼;도 자연히 풀릴 것이다. 명명 변화를 리스트 업 해보니까 다음과 같다.
(1)동경을 떠나 교외에서 살게 됐다.
(2)타인과 만나는 일이 극단적으로 적어졌다.
(3)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밤에는 일찍 자게 되었다.
(4)하루 세 끼를 꼬박 먹고, 혼자서도 요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5)매일 운동을 하게 되었다.
(6)교제상 마시는 술이 팍 줄었다.
물론 머리카락이 빠지는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어 획일적인 결론은 내릴 수 없지만, 내 경우에는 이러한 생활의 변화가 모발 상태에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뒤집어 말하면 뼈를 깍아내듯 소설을 쓰고 있지 않다는 얘기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한때-오 년 정도 이전 일인데-머리 숱이 눈에 띄게 줄어든 적이 있다. 그 무렵엔 사업상 이런저런 말썽이 많아(지금은 그때 일을 되돌이키는 것만으로도 피곤하다) 그 탓으로 머리카락이 쑥쑥 빠져 나갔다. 목욕탕에 들어가 머리를 감으면 바닥 배수구에 항상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머리카락이 한 움큼이나 뒤엉켜 있었다. 나는 원래 머리숱이 많은 편이라서, 처음 한동안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드디어 목욕을 마치고 거울 앞에 서면 머리카락 사이로 두피가 조금씩 들여다 보일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좀 이마가 벗겨진 것 아니야'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 단계까지 가서야 나도 머리를 의식하게끔 되어, 머리 스타일을 바꾸기도 하고, 헤어 스토닉으로 열심히 두피를 맛사지하게도 되었다. 탈모라든가 발기부전이라든가 하는 것은(후자는 아직 관계없지만서도) 비만이나 금연과는 달리 스스로 노력하면 어떻게 개선될 수 있는 종류의 사태가 아닌 만큼, 당사자의 심경은 몹시 어둡다. 그러나 타인이란 참으로 잔혹하여, 본인이 그 사실을 염두에 두면 둘수록 '괜찮아. 까짓 것, 요즘에는 진짜 같은 가발도 많으니까'라는 둥, '하루키 씨, 대머리가 되면 또 대머리가 된대로 귀여울테니까 염려 놓아요'라는 둥, 정말 집요하다. 이게 어느 귀 한 쪽이 잘라져 나갔다거나 하는 일이라면, 모두들 동정의 여지도 있고, 앞에 두고 놀려대거나 하는 일도 없을텐데, 탈모라는 것은 구체적인 통증을 동반하지 않으니 진지하게 동정을 받는 일이란 불가능에 가깝다. 특히 젊은 여자는 자신이 대머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 없는 만큼, 이런 류의 일에 관해서는 정말 철딱서니가 없다. '아이, 볼상 사나워. 정말 대머리가 됐잖아. 봐요, 좀 보여줘요. 어머 머릿가죽이 보여. 아이 징그러워, 우와'하고 말이다. 이런 경우는 꽤 화가 치민다. 하지만 고맙게도 나를 둘러싸고 있던 성가시고 불쾌한 상황이 개선돼 삼에 따라, 나의 탈모량도 서서히 줄어들어, 두석 달이 지났을 무렵에는 원래의 상태대로 감쪽같이 회복되었다. 그 이후 머리카락 때문에 마음을 조린 일은 한번도 없다. 언젠가 또다시 무슨 날벼락 같은 문제에 휩쓸려 머리카락이 빠지게 될 날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때까지는 가능한 한 사소한 일에 안달복달하지 않고, 불필요하게 많은 일도 하지 않으며 느긋한 나날을 보내고 싶다.
중년이란 무엇인가? 그 두 번째 '비만에 대하여'
지난 주에는 탈모에 관한 얘기를 했으니까 이번 주에는 비만에 관해 쓰겠습니다. 그다지 달가운 화제도 못 되므로, 읽고 싶지 않으신 분은 안 읽어도 상관없습니다. 중년이 되어(나는 서른 여섯 살이므로 싫든 좋든간에 일단은 중년 초기에 속한다) 가장 곤란한 일은, 가만히 내버려두면 점점 살이 찐다는 것이다. 이십 대일 무렵에는 아무리 먹어대고 마셔대도, 체중계의 바늘이 60킬로그램 선을 넘어서는 일이 결코 없었는데, 최근에는 조금만 방심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65킬로그램 정도가 되어 버려 아연해지고 만다. 아무래도 나이를 먹으면 '아연해지는' 경험이 날로 풍성해지는 것 같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한동안 장편 소설에만 매달려 있었던 터라 시간이 아까워서 조깅을 쉬었더니, 지난 2월에 나의 체중은 마침내 66킬로그램이라는 미지의 영역에 발을 내딪고 말았다. 운동 부족에다 일에서 오는 긴장감 때문에 과식, 폭음이 겹치다 보면 살이 찌는 게 당연한 일이다. 이 정도 체중이 되면 사뭇 몸이 무겁고, 사이즈 29인치인 바지에 몸을 쑤셔넣기도 고통스러워진다. 그래서 석달 동안 감량에 감량을 거듭한 결과 59킬로그램까지 체중을 줄이는데 성공했다. 조금 더 힘내어 어떻게든 58킬로그램 선에 정착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키가 168센티니까 그 정도 선이면 가장 가뿐한 상태로 생활할 수 있다. 내 경험으로 봐서 일 개월당 2킬로그램 정도의 감량이라면 그렇게 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찌기는 쉽고, 빼기는 어렵다'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다. 또 다르게는 '비만에 이르는 길은 짧고 평탄해도, 감량에 이르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하기야 이 점은 체질 탓도 있어, 중년이 되면 너나할것 없이 모두 살이 찌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안자이 미즈마루 씨 같은 경우는 나보다 한 단계 위의 중년인데도, 늘 바싹 말라 있어 부럽기 짝이 없다. 그리고 우리 마누라 같은 경우도 절대로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이다.
살이 찌는 체질인가 안 찌는 체질인가 하는 차이에는 유전적인 요소가 꽤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점은 제삿날이라든가 결혼식처럼 친척들이 한꺼번에 모인 자리에 나가, 주위를 한바퀴 휘 둘러보면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다. 내 경우를 보면, 우리 친척들은 뚱뚱하다고 할 정도까지는 안되지만 꽤 통통한 체형의 사람이 많고, 마누라의 친척들 쪽은 모두가 대개 야위었다. 그래서 나는 가끔 제삿날에 친척들이 모이는 자리에 나가면 '이거야 상당한 끈기를 가지고 임하지 않으면 큰일 나겠는걸'하고 결심을 새로이 하여 운동에 힘쓴다. 마츠모토 세이초(소설가. 1950년대 중반 이후에는 추리소설가로 전신, 일본 추리 문학계에 한 획을 그었다.)의 오래 전 단편에 세끼 손가락이 짧다는(아마도 그런 이유였다고 생각한다) 이유로 박복한 운명을 짊어지지 않으면 안되었던 일가족의 얘기가 있는데, 나는 요즘 들어 그런 사람들의 기분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인생이란 본질적으로 불공평하고 불평등한 것이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노력 없이는 도저히 획득할 수 없는 것을 또 다른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아무런 노력 없이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은 불공평, 불평등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니다. 이런 얘기를 쓰다 보면 점점 화가 난다. 그러나 그 대신-이라고 말하기는 좀 뭣하지만- 마누라 집안에는 암으로 죽는 사람이 많은 반면 우리 집안은 암으로 죽는 사람이 거의 없다. 비만과 암 사이에 어떤 상관 관계가 있는가 하는 데까지는 난 잘 모르겠지만, 이와 같이 혈통이라고 하는 것은 꽤 흥미로운 것이다. 나는 어쩌다 결혼식에 초대를 받기라도 하면, 식장에서 좌우로 나뉘어져 나란히 앉아 있는 양가 친척들의 얼굴 생김이니 체격이니 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견주어 보며 시간을 보낸다. 그런 기회가 있으면 꼭 한번 시도해 보세요. 틀림없이 흥미로울테니까. 그건 그렇고 세상에는 비만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이 꽤 많은듯, 책방에 나가 보면 살을 빼기 위한 노하우 책이 즐비하게 진열돼 있는데, 또 그 대부분이 베스트 셀러인 모양이다. 나도 몇 권인가 들쳐 보았지만, 내가 느낀 바로는 '이거야말로 결정판!'이랄 만한 책은 단 한 권도 없었다. 세 권을 읽으면, 거기에는 살을 빼기 위한 세 가지 방법이 있어, 그 각각의 방법이 전혀 반대의 주장을 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그리고 개중에는 몹시 극단적인 주장을 전개하고 있는 책도 있다. 살을 빼기 위한 영양학이 아직 체계적으로 확립되어 있지 않은 현재, 지나치게 편협한 요법에 의존하면 사람에 따라서는 위험 부담이 클 것이라 여겨진다.
나는 애당초 꼼꼼한 성격이라 다이어트나 살을 빼기 위한 운동에 대해서 꽤나 연구를 많이 했는데, 그 결과로써 나온 결론은 '사람에게 다양한 생김새나 성격이 있는 것처럼 사람이 살 찌는 방식에도 다양한 형태가 있으므로, 만인에게 적합한 살빼기 방법이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자신의 체질이나 식생활, 직업이나 수립에 맞추어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에게 적합한 방법을 찾아내는 수밖에 없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처럼 권위있는 영양과 의사가 각 개개인의 얘기를 '음,음'하고 들어가며, 그 상대에게 알맞는 살 빼기 프로그램을 만들어 주는 게 이상적인 방법이 아닐까 하고도 생각하지만, 갑작스레 그런 수준까지 도달하기는 무척 어려울 것이다. 지금 상황으로는 한군데다 뭉뚱그려 놓은 다이어트 책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뭐가 어찌됐든, 프랑스 요리집에서 디너를 먹고 디저트를 생략해야 하는 분함이나 불쾌함은 필설로는 다 하기 어렵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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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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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8. 지혜로 보는 생과 사
초상집의 개
초상이 난 집은 너무 슬픈 나머지 개에게 밥 주는 것도 잊어 버린다. 그래서 개는 먹지 못해 마르면서 주인 눈치만 살핀다. 공자는 이상적이고 도덕적인 정치를 펴고 싶었지만 ‘때’를 못 만나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그가 정나라에 갔을때, 제자들은 공자와 길이 어긋나서 그를 찾아 헤매었다. 한 제자가 지나가는 노인에게 스승의 행방을 수소문하였다. 그 노인은 “말을 들으니 동문에 계시는 분이 그분 같네그려”라고 하면서, “생긴 것은 성인과 같이 잘 생겼으나 몸이 피로해 보이고 초라한 모습이 초상집 개와 같이 비쩍 말라 있더라”라고 말했다. 제자들이 급히 가보니 공자가 그 곳에 있었다. 제자가 노인이 한 말을 전하자 공자는 껄껄 웃으며,“성인과 같이 생겼다는 말은 과찬으로 맞지 않는 말이지만, 초상집 개와 같이 초라하다는 말은 맞다”고 하였다. 아무리 성인이라도 때를 못 만나면 초상집 개같이 비쩍 말라서 이리저리 눈치만 보면서 보내게 된다. 그래서 공자의 이러한 모습을 생각하여“지혜가 있다 한들 시세(때)를 타는 것만 못하느니라”고 하였다. 중용에도‘군자는 때에 알맞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아울러 영국 사람들이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던 셰익스피어는“좋을 때 인생을 즐겨라, 모든일에는 때가 있나니”라며 때를 놓치지 말라고 하였다.
세월은 치료약
그리스 철인 미낸더는‘세월은 모든 필요악의 치료제’라고 하였다. 필요악이란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겪어야 할 고통을 뜻한다. 소가 없으면 외양간은 깨끗할지 모르나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없다. 그러므로 가을의 풍성한 곡식을 얻기 위해서는 외양간을 깨끗이 치우는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필요악이다. 그런데 이런 세월이 아니면 고칠 수 없는 병이 있다. 바로 사랑 때문에 생겨난 병이다. 몸에 난 상처는 약을 바르면 되지만 마음의 상처는 어떤 약으로도 고칠 수 없고 오직 세월만이 최고의 약이다. 세월은 육체적 아픔도 치료하여 주지만 정신적 아픔에도 탁월한 효능을 발휘한다. 그래서 영국 명정치가였던 디즈레일리도 “세월은 훌륭한 정신과 의사다”라고 하였다. “우리가 결혼하면 당신의 뛰어난 머리와 나의 뛰어나 몸매를 가진 2세가 태어날 거예요”라면서 구혼한 세계적 무용가 이사도라 던컨에게,“내 못생긴 얼굴에 당신의 우둔한 머리가 결합된 2세가 태어나면 안 되오”라며 거절한 버나드 쇼도 “세월은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훌륭한 치료제다”고 말했다.
다시 오지 않는 때
현재와 같은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공자는 냇가에 흐르는 물을 보고 “가는 것은 이와 같은가, 밤낮으로 쉬지 않고 가는구나“라며 인생의 흐름을 읊었다. 우리는 지금 이 시간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애는‘시간이 말하여 주기’ 때문이다. 작가 러드야드 키플링은“그것은 나의 능력에 벗어난 일이오,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시간을 따라서 천천히 한 발 한 발 것을 수 밖에 없소”라고 했다. 우리는 그의 말처럼 걷기 싫어도 한 걸음 한 걸음 세월에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놀라운 일을 행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힘들고 어려운 문제가 겹쳐서 오더라도 시간이 그 해결책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도연명은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시간은 쉬지 않고 지나가므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원기 왕성한 나이는 다시 오지 않고, 하루에 두 번 새벽은 오지 않는다. 때에 따라 열심히 노력을 하라.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시간은 돈이다. 한 시각은 천금과 같이 중요하다. 지금 이 시간은 한 번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기 때문이다. 소동파는 <춘야>란 작품에서 ‘봄날의 한 시각은 천금과도 같다’고 하였다.
하느님이 정한 때
‘무엇이나 다 정한 때가 있나니, 하늘아래 벌어지는 모든 일은 하느님이 정한다’고 성경은 전하고 있다. ‘하느님은 그가 원하는 바에 따라, 날 때와 죽을 때 심을 때와 거둘 때, 죽을 때와 치료할 때, 부술 때와 다시 세울 때, 울 때와 웃을 때, 슬퍼할 때와 춤출 때, 사랑할 때와 사랑하지 않을 때, 키스를 할 때와 키스를 하지 않을 때, 찾을 때와 잃을 때, 간직할 때와 버릴 때, 찢을 때와 꿰맬 때, 침묵을 지킬 때와 말할 때 사랑할 때와 미워할 때, 전쟁할 때와 평화로울 때를 정한다‘고 히였다. 우리의 모든 때를 하느님이 정해준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우리에게 닥칠 일을 한치도 내다볼 수 없게 우리를 만들어 놓았다. 우리는 하느님이 하는 일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할 수 없다. 하느님은 나와 같은 사람이 아니므로 그에게 맞서서 싸울 수도 없고 법정에 세워 따질 수도 없다. 어찌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느님의 섭리를 알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창조주가 준 이 시간을 갖고 창조주의 뜻에 따라 좋은 일을 행하면서 기쁘게 살아야 한다. 또 먹고 마시며 자기가 한 일에 대하여 기쁘게 살아야 한다. 또 먹고 마시며 자기가 한 일에 대하여만족을 느끼며 열심히 살 수밖에 없다. 인생을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기억하자. 인생은 짧고 시간은 빨리 지나간다는 점을.
운명과 순종
1960년대 초에‘케 세라 세라’란 노래가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춘궁기가 되면 보릿고개라 하여 못 먹어서 살 가죽이 들뜨고 누렇게 되는 부황난 사람도 많았다. 아울러 도시의 대학에서는 ‘군정 연장 반대’‘한일 회담 반대’등 데모가 쉴 사이 없이 벌어졌었다. 없는 집에서 다투면 깨어질 것은 하나 남은 쪽박이라고,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뒤숭숭한 상황이었다. 노래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뒤에 두고 유행되었다. ‘케 세라 세라’는 이탈리아어로, 영어로 번역하면 ‘What will be, will be'가 된다. 우리말로는 ’될 대로 되라’. 다시 맣래 피할 수 없는 운명 또는 정해진 운명이면 그성에 순종하라는 뜻이다. 모만 곳을 발로 차지 말라는 말이 있듯, 운명을 소용돌이쳐 흘러내리는 큰 강이라고 본다면 그 흘러내리는 격류를 거슬러 올라가지 말고 흐름에 따라 내려가라는 말이다. 이 노래는 체면과 무기력을 선동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현명한 처신을 노래한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솔로몬은 ‘현존한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은 오래 전에 이미 그 일이다’고 하였고, 맹자는‘하늘의 뜻에 따르는 사람은 생존하고 거스르는 사람은 멸망한다’고 하며 운명에 순응하라고 하였다. 그는 부르지 않았는데도 절로 찾아오는 것은 하늘의 명이라고 하여 운명은 하늘의 뜻이라고 하였다. 고통은 피하는 것보다 익숙해지는 것이 낫다. 운명도 피하는 것보다 감싸안는 것이 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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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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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Prestuplenie i nakazanie:1866)-도스토예프스키 2/2
"내게는 이게 쾌락입죠! 고통은 아닙니다. 쾌락입니다. 서... 선생님"
그는 머리채를 끌리면서 땅바닥에다 이마를 박으며 외쳤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아무말 없이 주머니 속에 있는 돈을 꺼내어 살그머니 창가에 놔두고 나왔다. 그 돈은 그의 굷주림을 채우기 위하여 전당포의 노파에게 꾸어온 돈 중에서 술값을 치른 나머지였다.라스콜리니코프는 마르메라도프의 비참한 가족의 실상을 보고 가난이 가져 오는 타락의 이면에는 더욱 무서운 정신의 타락이 놓여 있어서 순진하고 티없는 사람들의 성질을 파괴하고 부식시킨다는 것을 뼈아프게 느꼈다. 이튿날 아침 라스콜리니코프는 여느 때나 다름없이 초조한 마음으로 깨었다. 하숙집 주인은 그가 몇 달 치의 하숙비를 치루지 않았기 때문에 밥을 안 준 지 벌써 보름이 되었고 이제는 그를 경찰에다 고소하려는 마음을 먹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어제 그가 나가고 없는 동안 편지가 와 있었다. 하녀가 갖다 주는 편지를 보자 그의 안색은 갑자기 달라졌고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고향의 그리운 어머니에게서 온 긴 편지였다. 편지 속에 녹아 있는 어머니의 따뜻한 애정은 읽는 동안 사뭇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그러나 누이동생 두냐의 결혼에 대한 소식은 그의 마음을 몹시 어둡게 하였다. 상대자는 나이가 45세나 되고 사업도 하는 돈 많은 변호사인 루딘인데 이 사나이는 외모는 점잖게 보이나 전형적인 속물이었다. 누이동생이 그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소식은 그의 자존심을 몹시 상하게 하였다. '결혼하는 것을 무슨 큰 은혜나 베풀어 주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그런 이기적인 놈의 아내가 되다니! 그건 안 될 말이다' 그 동안 두냐는 어려운 일을 겪었다. 오빠의 학비를 보조하기 위해 지방 귀족의 집에서 가정 교사를 했다. 그 집의 소유자인 마르파는 두냐를 신뢰하고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다. 마르파의 남편은 스비드리가일로프인데 그는 선악의 경계도 모르고 오로지 악마적 본능의 충동에 의하여 어떠한 장애도 짓밟고 넘어가는 사나이였다. 이러한 그에게도 뜻밖에 한줄기 선량한 일면이 숨겨져 있었다. 그는 두냐에게 반해서 여러 번 유혹의 손길을 뻗치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다른 사람을 유혹한 방탕함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는 갖은 간계를 다하여 두냐를 밀실에 유인하여 처녀를 완전히 자기 손아귀에 넣었으나 최후의 순간에 스스로 문 열쇠를 두냐에게 내어 주어 그녀의 몸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돌려 보낸 일도 있었다. 오빠의 학비를 보조하기 위해서 스비드리가일로프에게서 빌린 돈이 있어서 그 기간 동안 일을 해 주기 위해서 마지못해 그러한 상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던 두냐는 한때 스비드리가일로프가 그에게 수작을 걸고 있는 것을 안주인 마르파에게 들켜 마르파의 오해로 말미암아 갖은 욕을 다 보고 그 집에서 쫓겨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두냐의 결백을 알게 된 마르파는 그녀에게 사과를 했고 또한 온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두냐의 깨끗함과 자기 남편의 잘못을 알리고 다녔으므로 두냐는 마을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루딘과의 혼담이 나왔던 것인데 두냐는 오빠와 집안 살림을 위하여 루딘의 구혼을 승락한 것이다. 이러한 결혼은 라스콜리니코프에게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누이동생은 몸을 팔아서 불필요한 사치품을 얻거나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활의 필요에 몰려 자기의 몸을 판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 근본을 따지고 보면 마찬가지다. '나는 그 애를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가? 이번에 그 결혼 때문에 어머니와 누이가 이곳에 올라온다고 하는데 그 여비를 마련하는 데도 아버지의 몇 푼 안 되는 연금을 또 저당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어떤 지위를 얻는다면 나는 어머니나 누이를 위하여 내 일생을 바쳐도 좋다. 그러나 대학 졸업이란 꿈 같은 일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입술을 비틀며 떨었다. "그렇다. 그 일을 실행하자 만사는 돈이다. 신이 있다고 말하는 놈의 주둥아리는 내가 찢어 놓을 테다!" 그 일이란 다름이 아니라 전당포의 그 노파를 죽이는 일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새로운 세계의 건설을 꿈꾸고 있었다. "그렇다! 그 노파를 죽여 돈을 빼앗자 그 돈을 전인류 공동의 복리를 위하여 공헌케 하자. 하나의 값없는 벌레의 죽음과 백의 귀중한 사람의 목숨과 바꾸자. 그 단 하나의 조그마한 범죄는 훌륭한 공공 사업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역사상 입법자나 개혁자라고 하는 라이칼가스 솔론 마호메트 나폴레옹 등 비범한 사람도 사실은 전통적인 가치를 파괴하고 수많은 피를 흘리게 한 도살자이다. 그러나 그들의 처사를 세상 사람들은 죄인으로 취급하여 처벌하기는커녕 오히려 영웅이니 위인이니 하는 숭배의 대상으로 선악을 초월한 어떤 특수 지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비범한 사람은 파괴하고 살인을 하더라도 그 천재성과 권력 때문에 기존 법률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행동이 인류 전체의 행동을 목적으로 삼는 경우에는 일부분의 희생은 필요악이며 이러한 범죄는 마땅히 시인되어야 한다고 라스콜리니코프는 생각했다. 이러한 판단에서 자신도 선택된 비범한 사람에 속한다고 믿는 라스콜리니코프는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얼마나 유용하게 살아가는가를 기준으로 사고를 진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에 해독만을 끼치는 기생충과 같은 존재인 전당포의 노파를 살해할 결심을 굳힌 것이다. 초인이란 선악의 개념을 초월하여 행동하는 비범한 사람의 이름이다. 이와 같이 신에 대한 신앙을 잃고 초인의 사상을 전개해 버린 라스콜리니코프는 누이 두냐와 마르메라도프 가의 불쌍한 가족과 순진한 처녀 소냐를 도와 주기 위해서 이를 실행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러나 비범한 사람은 무슨 일을 해도 상관없지만 이러한 벌레 같은 추잡한 노파를 죽인다는 것이 너무 저열한 일이 아닐까? 위인은 과연 이런 지저분한 일을 했을 것인가... 마음 한 구석에는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는 거의 숙명적으로 이 계획에 유혹되어 갔다.
여섯 시에 노파가 혼자 집에 있다는 것은 그의 누이 리자베타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어느덧 가까운 교회당의 시계가 여섯 시를 알렸다. 라스콜리니코프는 행위가 옳고 그른 것보다 시간이 늦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그는 노파를 죽이는 데 사용할 흉기를 훔쳐 내는 데 성공했다. 미리 보아 두었던 도끼를 몰래 훔쳐 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것을 웃옷 안에 숨겼을 때 이제 자신의 계획이 시작됐다는 안심을 했다. 갈 곳은 건물의 4층에 있는 노파의 방이다. 초인종을 누르니 심술궂게 생긴 그 노파가 눈을 번뜩이며 조심스럽게 문을 반쯤 열더니 반갑지 않다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라스콜리니코프는 노파를 몸으로 밀면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로 왔지?"
"전당 잡히러 왔지요. 저번에 말하던 은으로 만든 담배갑을 가져 왔어요"
"아무래도 이건 은이 아닌 것 같은데..."
하면서 노파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밝은 창 쪽으로 몸을 돌려 라스콜리니코프가 일부러 단단히 묶어 두었던 끈을 풀려 하였다. 그 때 그는 도끼를 힘있게 쥐었다. 갑자기 머릿속이 멍해졌다.
"원 참 이렇게 단단히 묶은 걸 가지고 오다니..."
노파는 화난 목소리로 말하면서 그쪽으로 돌아섰다. 그 때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노파의 머리에 도끼를 내리쳤다. 피투성이가 된 노파는 그 자리에 푹 고꾸라졌다. 그는 곧 노파의 호주머니에서 돈주머니와 열쇠걸이 귀고리 등 일일이 살필 사이도 없이 닥치는 대로 호주머니에 긁어 넣었다. 이 때 노파가 쓰러져 있는 방으로부터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죽은 듯이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가 그쪽으로 뛰어갔다. 방 한 가운데에 리자베타가 언니의 시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도끼를 쳐들어 소리도 못지르고 부들부들 떨고만 있는 리자베타의 머리를 내리 찍었다. 그녀는 애걸하는 시늉으로 손을 주저주저 내밀었으나 머리가 두 조각으로 깨져 거꾸러졌다. 뜻하지 않은 두 번째 살인을 저지르자 라스콜리니프는 자신의 행동에 격심한 공포와 혐오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
그는 자신을 꾸짖으면서 피묻은 손과 도끼를 씻은 다음 방을 나왔다. 뒤이어 시끄러운 발자국 소리와 이 집을 아는 사람들이 찾아와 문이 안 열린다고 떠들어 대는 틈에 들키지 않고 집 밖으로 도망쳐 나왔다. 하숙집에 돌아온 라스콜리니프는 불안과 공포 때문에 완전히 실신 상태에 빠져 열에 뜬 하룻밤을 지냈다. 모든 것이 이미 경찰에 알려져 버린 것 같은 무서운 망상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의 신경은 완전히 착란 상태에 빠져 나흘 동안이나 혼수 상태에 빠져 버렸다. 그의 친구 라즈미힌이 찾아와서 그를 충실히 간호하여 주었다. 그러나 라스콜리니코프는 정직하고 다정한 이 친구도 멀리하고 홀로 무섭게 번민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해 보아도 이상할 만큼 비겁했다. 하숙집 주인이 하숙비를 안 낸다고 고소를 했는데 경찰에 불려가서 자신의 범행이 발각된 것으로 착각하여 기절하기도 하였다. 무슨 소리만 들려도 모두 자기를 탐색하려는 것으로 망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위에 아무도 없으면 재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뛰쳐 나가 거리를 무작정 헤맸다. 훔쳐온 물건은 어떤 공사장의 토굴 속에 내던져 둔 채 한 푼도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조금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초조한 심정으로 불안하고 의아한 행동을 했다. 그를 의심하고 있는 경찰 서기장인 포르피리를 만나 보기도 하고 밤늦게 무의식적으로 죽은 노파의 집으로 들어가 보기도 하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마르메라도프를 만났다. 마르메라도프는 술에 취하여 마차에 깔려서 기절해 있었다. 그는 몹시 흥분했다. 마치 친아들처럼 또는 경관처럼 마르메라도프를 그의 집까지 데리고 가서 곧 의사의 치료를 받게 하였으나 이미 절망적이었다. 가난하고 불쌍한 그의 집안은 비참한 기도 소리로 가득하였다. 가련한 매춘부 소냐도 달려왔다. 라스콜리니코프는 호주머니를 더듬어 그날 아침에 어머니가 식비를 내라고 보내 준 돈 전부를 내놓고 그대로 마르메라도프의 집을 나왔다. 그런데 소냐가 보낸 어린 계집 아이가 그의 뒤를 몰래 따라와서 그의 주소를 알고 돌아갔다. 소냐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주었다. 라스콜리니코프가 불안과 공포에 빠져서 병자가 다되어 있을 때 어머니와 누이동생 두냐가 약속대로 그를 찾아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앞에 두고 그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어머니는 편하게 느껴졌지만 예전과 같지 않았다. 어딘지 먼 곳에 있는 사람처럼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상처받은 그의 자존심은 어머니와 두냐에게 달라진 모습으로 보였다. 다정하고 침착한 예전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으므로 라스콜리니코프의 어머니는 가슴이 아팠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견딜 수 없는 고뇌 속에서 어느 날 자살을 결심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살하기 전에 소냐를 찾아왔다. 누구에게라도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고 싶었기 때문이다. 소냐는 그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 주었다. 소냐는 비록 매춘부였으나 마음은 천사와 같이 맑고 슬기로운 처녀였으며 사람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불타는 종교심을 지니고 있었다. 소냐는 그에게 성경을 읽어 주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묵묵히 듣고 있었다. 휘어진 촛대의 불빛은 처량하게 살인자와 매춘부를 비치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소냐에게 다가갔다. 소냐는 말없이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눈동자를 날카롭게 번뜩거리며 말하였다
"지금 나는 어머니와 누이동생과 이별하고 왔소. 마지막으로 이곳을 들러야겠기에... 나는 무엇 때문에 당신에게 왔을까?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서 왔지... 리자베타를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소?"
소냐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맑은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이분은 무엇 때문인지 괴로워하고 있다. 무엇이 이토록 고귀한 분을 괴롭게 하는 것일까?' 무서운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라스콜리니코프가 입을 열었다.
"그는 우연히 리자베타를 죽였던 거요. 그가 누구인지 아직 모르겠소?"
"네" 하고 소냐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나를 보시오"
얼마 후에 소냐의 표정은 점점 창백해지고 눈은 놀라움에 더욱 커보였다. 소냐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당황하면서도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당신이 무엇을 하셨단 말씀이에요?"
소냐는 말했다. 그리고 그의 목에 팔을 감아 힘 있게 자기의 가슴에 끌어안았다.
"당신은 지금 네 거리로 나가서 땅에 엎드려 입을 맞추세요. 그리고 절을 하고 나서 '나는 사람을 죽였소' 하고 큰 소리로 외치세요. 그러면 하느님께선 반드시 당신을 구원하여 주실 거에요"
라스콜리니코프는 신의 구원과 은혜를 믿지 않는 젊은 사상가였다. 그는 소냐에게 자신이 행한 일을 고백하기는 했으나 그것은 용서받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소냐의 순결함 앞에서 그냥 말해 버리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자수하라고? 내가 왜?'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지니고 있었던 라스콜리니코프는 직접 노파를 살해하고 또한 순진무구한 리자베타까지 죽이고 나서 끝없이 갈등하고 번뇌하였다. 그는 그의 번뇌로 인해 어머니와 두냐도 제대로 보살필 수 없었다. 어머니와 두냐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의로운 친구 라주미힌이 성심껏 돕고 있었다. 라주미힌은 라스콜리니코프의 유일한 친구로서 예전에도 그의 일자리를 알선해 주는 등 퍽 호의를 보여 주던 사람이였다. 라주미힌은 두냐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라주미힌에게 그의 누이와 어머니를 부탁했다. 두냐도 그를 신뢰하는 것 같았다. 달라진 라스콜리니코프를 보면서 두냐는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고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자매를 살인했다는 사실을 알고서 자수를 권유했다. 그러나 그는 고집 세게 반박했다.
"모든 사람이 피를 흘렸다. 피는 강물처럼 땅 위를 흐르고 있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앞으로도 언제나 흐른다. 술처럼 흐르고 있는 거야. 그리고 사람들은 피를 흘려서 영예의 관을 쓰고 인류의 선각자라고 불리는 거야. 나는 다만 좋은 일을 하려고 한 것이다. 이 하나의 잘못을 저지르는 대신에 더 많은 좋은 일을 하려고 한 거야. 아니야. 잘못도 아니지. 단 한 번의 더러운 짓에 불과한 거야"
그의 무의지는 단 한 사람의 순결한 영혼을 지닌 소냐에 의해 이끌렸다. 소냐의 뜻에 따라 그는 자수를 결심했다. 그는 만사를 라주미힌에게 맡겼다. 여러 가지로 걱정한 나머지 병이 들어 누워 있는 어머니에게 마지막 이별을 하러 찾아갔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아들을 맞았다. 아들의 신변에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었다.
"나는 어쩐지 너에게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구나... 너는 이제 곧 떠나야 하니?"
"네. 곧 출발하겠습니다"
"또다시 돌아오겠느냐?"
"네... 돌아오게 되겠지요"
"그렇다면 꼭 한 마디만 내게 들려다오. 네가 가는 곳은 퍽 먼 곳이냐?"
"네. 대단히 먼 곳입니다"
"그렇게 먼 곳에 가는 것이 너의 임무니? 아니면 무슨 출세할 길이라도 있어서 그러는 것이냐?"
"어머니 그런 일은 저 자신도 모르겠어요. 어머니는 저를 위해서 기도를 올려 주시겠지요"
나가려는 아들을 꽉 붙들고 그의 눈을 뚫어지게 살펴보는 어머니의 얼굴은 몹시 창백했다.
"설마... 이제 두 번 다시 못 보게 되는 일은 없겠지 넌 내일이라도 나를 만나러 오겠지, 응?"
"네. 오겠어요. 어머니 안녕히 계세요"
라스콜리니코프는 하숙으로 돌아왔다. 두냐는 혼자서 수심에 잠겨 오빠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빠가 고민에 견디지 못하여 강물에 몸을 던지지나 않았나 염려하여 간밤을 소냐와 울면서 지새웠다는 것이다. 두 남매는 여러 말은 안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 속에는 말없는 이해와 슬픔과 동정이 교류하였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벌떡 일어섰다.
"나는 가서 자수하겠다. 그러나 왜 자수하는지는 나 자신도 모르겠구나"
두냐의 뺨에는 눈물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두냐, 너는 울고 있구나 너는 변함없이 나를 대해 주겠지 내 손목을 쥐어 주겠니?"
"오빤 무슨 그런 말씀을"
두냐는 오빠를 힘껏 안았다.
"이만큼 괴로워하셨으면 오빠의 죄는 벌써 반은 사라지지 않았을까요?"
"죄라고? 무슨 죄란 말이냐? 저 욕심꾸러기..."하고 항변하려 했으나 자기 때문에 누이동생을 비롯하여 불행을 맛보고 있는 사람들의 일을 생각하니 풀이 꺾이었다.
"두냐, 용서해다오. 그럼 이제 이별이다. 내가 가 버리면 어머님은 돌아가시거나 미치거나 하실거다. 아무튼 너는 어머님의 곁에 있어라 라주미힌이 반드시 뒤를 보아 줄 것이다"
경건하고 신앙심 깊은 소냐의 사랑에 용기를 얻은 그는 대지에 입을 맞추고 경찰서를 향하여 걸어갔다. 소냐는 그의 뒤를 눈에 띄지 않게 따라 갔다. 거리를 두고 몸을 숨기며 그의 뒤를 따랐다.
...시베리아로 가는 죄수들 속에 라스콜리니코프도 섞여 있었다. 법률상으로 그의 죄는 중벌을 받아야 할 것이었으나 솔직한 자백과 그의 갸륵한 인격에 우러난 과거의 가지가지의 아름다운 행동과 그리고 병적 상태에서 한 것이라는 많은 친구들의 증언 등을 참작하여 8년 징역이라는 가벼운 형이 언도되었다. 두냐는 라주미힌과 결혼하였다. 어머니는 이 두 사람의 극진한 간호의 보람도 없이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죽어갔다. 두냐와 라주미힌은 몇 년 내에 라스콜리니코프가 갇혀 있는 시베리아로 이주하여 라스콜리니코프의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가게를 개업할 궁리를 하고 있었다. 죄수가 호송되어 갈 때 라스콜리니코프의 뒤를 멀리서 따라가는 한 여인이 있었다. 소냐였다. 그녀는 정기적으로 라스콜리니코프를 면회하면서 그곳 죄수들의 편리를 함께 돌보아 주었다. 그 곳 죄수들 사이에서 그녀는 천사로 통했다. 순결하고 투명한 그녀의 사랑은 죄수들의 마음에 빛으로 스며들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처음 얼마간은 소냐가 찾아오는 것을 꺼렸다. 그러나 막상 소냐가 몸이 아파 그를 찾아오지 않았을 때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을 느꼈다. 그러한 외로움을 느끼며 라스콜리니코프는 어느 사이엔가 자신의 내부에 그녀에 대한 순결한 사랑을 자각하게 되었으며 얼음 같은 마음에 부드러운 빛이 피어 오르는 것을 깨달았다. 소냐는 행복했다. 그녀는 라스콜리니코프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여러 말을 주고받지는 않았으나 두 사람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감옥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신앙 깊은 소냐의 따뜻한 사랑에 싸여 그는 자신의 허무주의적인 초인 사상을 버리고 신의 품에 안기는 새로운 기쁨과 평안을 맛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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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외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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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열쇠 - A.J. 크로닌
제2부 기묘한 천직
1.(2/2)
불안과 기쁨이 뒤섞인 하루해를 보내고 이렇게 초조해 하다니, 참으로 바보 같다고 자신에게 타이르는 듯했으나 어머니는 전 신경을 귀에 모으고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참으로 견딜 수 없이 그의 귀가가 기다려졌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다지 넉넉지 못한 작은 빵집을 하고 있는 다니엘 그레니의 딸이었다. 외할아버지는 타인카슬 시에서 20마일쯤 떨어진 조선소가 많은 따분하기 짝이 없는 달로라는 작은 읍에서 빵집을 경영하면서, 한편으로는 교단의 옥외 설교사로 선출되어 색다른 그리스도 교단을 지도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열 여덟 살 때에 빵집이 일주일간 휴업하는 동안에 티드사이드 어부인 젊은 알렉산더 치셤과 열렬한 연애를 하여 단숨에 결혼해 버린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다른 종파끼리의 결혼은 불행을 가져오는 것으로 흔히 알고 있었으나 그들의 실제 생활은 보기 드물게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신앙에 있어서도 치셤은 무턱대고 믿는 신자가 아니었다. 그는 온건하면서도 대범한 종교관을 가지고 있었다. 아내에게 자기의 종교를 강요하는 짓은 절대 하지 않았다. 어머니도 역시 어릴적부터 신물나도록 신앙교육을 받았고, 부친으로부터 넓은 관용과 미덕을 가르치는 색다른 교리를 배워 왔기 때문에 종파적인 토론 따위는 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결혼한 지가 오래 되었지만 어머니는 결혼 초의 꿈 같은 세월을 지금까지 지속시킬 수 있었고 그것은 정말 행복한 것이었다.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그분이 집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기쁘다" 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손재간이 있는 사람이어서 무엇이나 잘해 주었다. 세탁기를 고치거나 닭장을 잠그는 일이나 꿀벌통에서 꿀을 따는 일까지 아버지의 손이 가는 곳은 언제나 말끔했다. 그가 재배하는 탱자원은 티드사이드에서 제일 아름답게 손질되어 있었으며, 그가 사육하고 있는 애완용 닭은 전람회에서 언제나 일등을 차지했다. 최근 프랜치스를 위하여 만들어 준 비둘기집은 상점에서 파는 것보다 훨씬 훌륭한 것이었다. 겨울 밤 같은 때에 프랜치스는 이미 잠이 들고 어머니는 난로 옆에서 뜨개질을 하고 있으면 젊고 건강한 아버지는 식당을 맨발로 왔다갔다하면서 묵묵히 뭔가 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어머니는 상냥한 미소를 머금으며 "저요, 참으로 당신이 좋아요" 라고 말하곤 했다. 어머니는 이제 침착성을 잃은 눈으로 시계를 보았다. 벌써 돌아와야 할 시간은 지났다. 밖은 구름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갑자기 캄캄해지는가 싶더니 굵은 빗방울이 유리창을 때리기 시작했다. 마침 그때 노라와 프랜치스가 들어왔다. 그녀는 애써 아들의 근심스러운 시선을 피했다. "자아, 이리 오너라" 하고 폴리 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자기 옆으로 불러 앉히고 뭔가 그 자리의 분위기를 바꾸어 보려고 했다. "재미있었니? 그래, 잘했다. 노라야, 넌 손을 씻었니? 프랜치스, 넌 오늘밤의 음악회가 기다려졌겠지? 나도 노래를 좋아해.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노라, 알았지, 얌전하게 있어야 해요. 이제부터 차를 마실 시간이야." 이렇게 되고 보니 이젠 더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조바심으로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감추려고 하니 더욱더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 엘리자벳은 그만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알렉스를 기다리는 것은 단념합시다. 자, 우리끼리 시작하기로 해요."
그녀는 억지로 웃으려고 했다.
"틀림없이 곧 돌아오실 거예요."
차는 정말 맛이 있었다. 핫케이크와 과자도 잼도 엘리자벳이 손수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긴장된 분위기는 무겁게 식탁주위에 가득 차 있었다. 언제나 프랜치스를 은근히 재미나게 해주는 폴리 아주머니도 웃기는 말도 하지 않고 단정하게 앉은 채로 차를 마시고 있다. 그녀는 이미 마흔이 다된 나이였다. 갸름한 얼굴은 피로한 기색이였지만 유쾌한 사람이었고, 좀 이상한 옷을 입고는 있었지만 그 품위 있고 침착한 태도는 퍽 교양이 있어 보였다. 레이스가 달린 손수건을 무릎에 올려놓은 모습이다, 코끝이 뜨거운 차로 완전히 빨갛게 된 것이나, 모자를 새털로 장식한 것 등 모두가 친절한 인상을 풍겼다. "그렇긴 하지만, 저는" 하고 그녀는 자연스럽게 침묵을 깨뜨렸다.
"밀리도 이 자리에 부를 걸 그랬나봐요. 저는 그의 아버지의 기분을 잘 알고 있어요. 신학교에 간다지요, 안셀모는."
그녀는 조용히 무엇이나 잘 알고 있다는 듯 다정한 시선으로 프랜치스를 바라보았다.
"프랜치스도 호리웰에 보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엘리자벳. 당신도 이 애가 설교단 위에서 설교하는 것을 보고 싶죠?"
"그렇지만 외아들이라 안 돼요."
"하느님은 그런 외아들을 좋아하신답니다."
폴리 아주머니는 아는 척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웃지 않았다. 자기 아들은 틀림없이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유명한 변호사라든가 혹은 의사라든가 어느 것이든 좋았다. 그렇지만 성직자가 되어서 화려하지도 않게 더구나 일생을 고독하게 보내야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그녀는 점점 더 불안해지기만 했다. 참다 못한 그녀가 큰 소리로 말했다.
"정말이지 알렉스가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는데......무슨 일인지 도대체......음악회는 이미 늦어 버렸고, 제발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틀림없이 아직 계산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일 거예요" 하고 폴리 아주머니는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완전히 침착성을 잃어버리고 보기 딱할 정도로 상기되어 있었다.
"아마 지금쯤은 합숙소에 돌아와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에탈에 갔다 올 때는 언제나 거기에 들르거든요."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지 불안을 떨쳐 버리려고 했다.
"우리들 일을 잊어 버렸을지도 모르지. 성질이 느긋한 사람이니까."
어머니는 온갖 생각이 다 나는 모양이었다.
"앞으로 5분만 더 기다려 봅시다. 폴리 아주머니, 한 잔 더 하세요."
그러나 차를 마시고 난 다음에는 더 이상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었다. 불안한 침묵이 계속 되었다. 무슨 일이 있단 말인가......오늘은 거기서 자고 오는 것일까? 너무 걱정이 되어 더 이상 엘리자벳은 자기를 억제할 수가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깃든 얼굴로 다시 한 번 시계 쪽으로 시선을 던지더니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폴리 아주머니, 잠깐 실례하겠어요. 빨리 다녀올게요.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보고 오겠어요. 오래 걸리지 않아요."
프랜치스도 걱정이 되어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후미진 사잇길 캄캄한 어둠 속에서 살기 등등한 얼굴들이 보이기도 하고, 아버지가 여러 사람에게 포위되어......서로 치고 받고......군중 속에 쓰러져 있기도 하고......돌바닥 위에 쓰러진 채 머리가 깨져 있기도 하고......프랜치스의 머릿속에는 환상이 꼬리를 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이상하게 몸이 후들후들 떨리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저도 데리고 가 주세요, 어머니" 하고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아요" 하고 그녀는 간신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기에서 손님을 대접하고 있어야지." 그때 옆에 있던 폴리 아주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더해 가기만 하는 불안에도 전혀 내색하지 않고 침착한 태도를 지키고 있었다. "데리고 가세요, 엘리자벳. 노라와 나는 조금도 염려하지 말고......." 침묵이 흐르는 동안 프랜치스는 눈으로 데리고 가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그래, 그럼 같이 가자꾸나." 어머니는 그에게 두터운 외투를 입혀 주었다. 그리고 자기도 케이프를 걸치고 아들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비가 억수같이 퍼붓고 있었다. 빗물은 길바닥에 물거품을 일으키며 도랑으로 분류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간신히 마커트 와인드 언덕을 올라가니 멀리 읍내 공회당의 광장에 켜진 조명등이 희미하게 보였다. 프랜치스는 심한 바람과 어둠 때문에 또다른 공포를 느꼈다. 그러나 입술을 꽉 깨문 채 자꾸만 빨라지는 어머니의 발걸음을 부지런히 쫓아갔다. 10여분 수 두 사람은 국경의 다리를 건너 물에 잠긴 부두를 따라서 제2합숙소까지 왔다. 그러나 여기에서 어머니는 깜짝 놀라 멈춰섰다. 합숙소에는 자물쇠가 잠겨져 있었고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망설이면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1마일쯤 떨어진 강 위쪽에 있는 덤 마리스의 제5 합숙소의 희미한 등불이 눈에 띄었다. 마리스는 어느 모로 보나 술주정꾼에 지나지 않았으나, 틀림없이 뭔가 소식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길은 이미 폭우로 보이질 않았다. 도랑에 빠져 넘어지기도 하고 홍수가 진 들판을 힘겨운 줄도 모르고 가로질렀다. 어머니 옆에 바싹 달라붙어 걷고 있는 프랜치스도 한 발짝 옮길 적마다 어머니의 불안이 더해 가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은 겨우 제5 합숙소에 도착했다. 그 집은 콜타르를 바른 목조 오두막으로, 강 언덕에 쌓아올린 석축의 높은 방파제를 등지고 있었다. 오두막 주위에는 어망이 빙 둘러쳐져 있었다. 프랜치스는 이제 1분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숨을 헐떡이며 뛰어가서 황급히 문을 밀어젖혔다. 순간 하루 종일 그렇게도 괴롭혔던 환상이 현실로 나타났다. 아버지가 마리스의 간호를 받으면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흙빛이 된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한쪽 팔에는 아무렇게나 붕대가 감겨져 있었으며, 얼굴에는 시뻘건 상처가 깊게 나 있었다. 두 사람 다 허리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신고 있었으나 옆 테이블에는 술병과 컵 두개가 놓여 있고 세숫대야의 흙탕물은 피로 새빨갰다. 바람이 심하게 불 때만 사용하는 칸데라의 희미하고 노란 불빛이 방안을 비추고 있었다.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 왔고 으스스한 공포의 그림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황급히 달려가서 침대 옆에 쓰러질 듯이 무릎을 꿇었다.
"알렉스......알렉스......많이 다쳤군요."
아버지는 눈이 부어 올라 보이지 않는 것 같았으나 핏기가 없는 부르튼 입술로 약간 웃어 보인 것 같았다. 아니 웃으려고 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상대놈보다는 덜하답니다, 아주머니!"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의 고집과, 그에 대한 사랑과, 그를 이 지경으로 만든 자들에 대한 분노의 눈물이었다.
"여기 왔을 때는 이미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을 정도였습니다" 하고 마리스는 애매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내가 위스키를 두어 잔 먹였더니 기운을 차렸어요."
어머니는 타는 듯한 시선을 마리스에게 돌렸다. 토요일 밤이니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취한 것일까. 이 바보 녀석이 이렇게 중상을 입은 남편에게 술을 먹였는가 하고 생각하니 너무나 엄청난 일에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엘리자벳은 남편이 많은 피를 흘렸다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 그러나 여기에는 무슨 수를 쓰고 싶어도 붕대 하나 없었다. 바로 데리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1초라도 빨리. 그녀는 긴장하여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때요, 알렉스. 나와 함께 걸을 수 있겠어요?"
걱정 없을까? 천천히 걸어가기만 하면......그녀는 공포와 불안에 떨면서 생각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남편을 따스하고 밝은 안정한 장소로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관자놀이의 뼈까지 파고 든 가장 심한 상처는 겨우 출혈이 멎은 것 같았다. 그녀는 프랜치스를 돌아다보았다.
"프랜치스, 빨리 뛰어가라. 폴리 아주머니에게 치료할 준비를 해 달라고 말하고 바로 의사 선생님을 부르러 가거라. 알겠니!"
프랜치스는 오한이라도 든 것처럼 몸을 떨면서 자기도 모르게 알았다는 표시로 고개를 떨군 채 미친 듯이 부두 쪽으로 달려갔다.
"그럼, 여보, 일어나 보세요. 자, 내 손을 붙잡고."
마리스가 부축을 하려 했지만 방해가 될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엘리자벳은 냉정히 거절하고 혼자서 남편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다리를 휘청거리면서 그는 시키는 대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몹시 떨려서 자기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난 가네, 마리스! 잘 자게나" 하고 그는 어지러움을 느끼면서 중얼거렸다. 그녀는 왠지 남편이 살아날 가망이 없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그러나 입술을 깨물며 쏟아지는 빗속으로 그를 데리고 나섰다. 합숙소의문이 닫혔다. 그녀는 날씨 따위는 생각할 여유도 없이 비틀거리면서 서있는 남편을 데라고 나오긴 했지만 앞이 캄캄할 뿐이었다. 그때 문득 한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어째서 여지껏 그 생각을 하지못했을까. 기와공장의 다리를 건너 지름길로 가면 적어도 1마일 정도는 가까우니까 20분이면 집에 도착하여 침대에 뉘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녀는 새로이 결심을 하고 남편의 손을 잡았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을 남편을 부축하여 강 위쪽의 다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도 아내의 속셈을 짐작하지 못했으나 요란하게 흐르는 물소리가 들려 오자 걸음을 멈추고 아내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요, 엘리자벳. 티드 강이 이렇게 세차게 흐르고 있는데 기와공장 다리를 어떻게 건넌다는 말이오? 난 건너지 못해요."
"잠자코 계세요, 알렉스. 말을 많이 하면 기운이 빠져요."
그녀는 남편을 안심시키려 끌어안듯이 부축하고는 앞으로 나아갔다. 이윽고 다리가 있는 곳에 다다랐다. 다리는 철사로 된 로프에 손잡이가 달려 있는 좁은 나무다리로 강폭이 가장 좁은 곳에 있었다. 비교적 튼튼하게는 되어 있으나 기와공장이 이미 오래 전에 폐쇄된 후로는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한 발을 다리에 걸친 엘리자벳은 어둠과 귀가 먹을 정도로 세찬 물소리에 불현듯 막연한 불안과 형용키 어려운 불길한 예감 같은 것이 마음을 스쳐 갔다. 다리는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걸어갈 만큼 폭이 넓지 못했으므로 그녀는 잠깐 멈춰 섰다. 엘리자벳은 부상당한 남편을 생각하니 갑자기 모성애와 같은 묘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비에 흠뻑 젖어 무력해진 남편을 돌아다보며 말했다.
"여보, 이 손잡이를 꼭 잡아야 해요."
"응, 잡고 있어."
그녀가 손에 쥐어 준 굵은 철사 로프를 알렉스는 커다란 손으로 잡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는 혼란해지고 숨은 차고, 마치 무엇이 홀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그녀는 그 이상 어떻게 하여야 좋을지 몰랐다. 그러나 이대로 여기서 포기할 순 없는 것이다.
"저를 꼭 잡고 따라 오세요" 하고 그녀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두 사람은 한 걸음 한 걸음 걷기 시작했다. 겨우 다리 중간쯤 이르렀을 때였다. 아차 하는 순간 남편의 한쪽 발이 미끄러졌다. 이렇게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이 아니었다면 별 문제가 될 것도 없었을 테지만, 이미 다리 위에까지 넘치고 있는 티드 강의 세찬 탁류와 장화의 무게에 저항하여 필사적으로 발을 끌어올렸으나 다시 한쪽 다리마저 미끄러져 버렸다.납덩이처럼 무거운 두 다리의 장화는 에탈에서 얻어맞아 기진맥진해진 그의 체력으로써는 어쩔 수가 없었다. 남편의 비명 소리에 놀라 돌아다본 그녀는 반사적으로 큰 소리를 지르며 남편을 꼭 붙잡았다. 그때 밀려온 거센 탁류에 남편은 난간의 로프를 놓쳐 버렸다. 그녀는 두 팔로 남편을 껴안고 전신의 힘을 다해 그를 끌어당기려 했다. 그때 다시 밀려온 거센 탁류와 칠흑 같은 어둠이 순식간에 두 사람을 집어삼키고 말았다. 그날 밤 프랜치스는 밤새도록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다렸다. 그러나 끝내 두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강물이 좀 줄어들었을 때에 서로 부둥켜안은 두 사람의 시체가 모래톱에 가까운 물가에서 발견되었다. 그 무서웠던 환상의 공포는 프랜치스를 하루 아침에 고아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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