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380호 - 2024.10.22. 화요일(음력 : 9.20.)
angelo@nownforever.co.kr / 風文 윤영환
|
|
글나눔 → 참좋은한줄
|
|
|
말하는 권리는 자유의 시작일진 모르지만,
그 권리를 소중하게 만들려면 반드시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 월터 리프먼
|
|
글나눔 → 말글
|
|
|
의존명사의 띄어쓰기 (3)
의존명사로도 쓰이고, 접미사로도 쓰이는 말이 있다. ‘간(間), 들’이 그런 말들이다. ‘접미사’란 명사나 동사 따위의 뒤에 붙어 새로운 단어를 만드는 요소를 가리키는데, ‘선생님’의 ‘-님’, ‘지우개’의 ‘-개’와 같은 것을 말한다.
‘간’이 ‘기간’과 관련되는 경우에는 접미사로 분류되므로 앞 말에 붙여 써야 한다. 이때는 시간을 나타내는 말과 함께 쓰인다. (한 달간 열심히 운동을 했더니 살이 쑥 빠졌다. / 지난 오 년간 겪은 고초를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반면에 ‘간’이 ‘사이’나 ‘관계’ 또는 ‘선택’의 뜻과 관련되는 경우에는 의존명사이므로 띄어 쓴다. (서울과 부산 간 야간열차 / 서로 간에 최소한의 예의는 지킵시다. /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최선을 다해라.)
‘들’은 흔히 붙여 쓰기만 하는 걸로 아는 이들이 많은데, 한자어 ‘등(等)’과 같은 의미로 쓰일 때는 의존명사이므로 띄어 써야 한다. (책상 위에 놓인 공책, 신문, 지갑 들을 가방에 넣고 일어섰다. / 과일에는 사과, 배, 감 들이 있다.)
‘듯(이)’는 의존명사로도 쓰이고 어미로도 쓰이는 말이다. 짐작이나 추측의 뜻을 나타낼 때에는 의존명사이므로 띄어 쓴다. 이때는 ‘~할 듯이, ~하는 듯이’와 같은 형식으로 쓰인다. (그는 마치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는 듯이 말한다. / 하늘이 맑으니 남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온다.)
‘-듯(이)’가 뒤에 올 내용이 앞에 한 말과 거의 같음을 나타낼 때에는 어미이므로 앞말에 붙여 써야 한다. 이때도 용언이 앞에 나오기는 하지만 ‘~할, ~하는’과 같은 말이 나오지는 않는다.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거대한 파도가 일듯 사람들 가슴에는 분노가 솟구쳤다.)
이대성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웃프다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을 들어 본 사람이라면 그 제목을 기억하진 못해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란 노랫말은 기억할 것이다. ‘웃다’와 ‘눈물이 나다’를 병치하여 또 다른 차원의 슬픔을 표현한 이 노랫말은 닥친 현실에 초연하려 하지만 그 현실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을 잘 보여 준다.
언제부터인가 심심치 않게 듣는 말이 ‘웃프다’이다. “그들의 사연은 하나같이 웃펐다”나 “이 드라마는 직장인들의 웃픈 현실을 잘 그렸다”와 같이 쓰인다. ‘웃다’의 ‘웃-’과 ‘슬프다’의 ‘-프-’를 조합하여 만든 낱말로, 그 뜻은 ‘웃기면서 슬프다’인데 의미구조상 ‘슬프다’에 방점이 찍힌다.
그런데 ‘웃프다’로 표현하는 ‘웃픈 현실’은 대개 어이없으면서 한심한, 황당하면서 괴로운 현실이다. 우리는 이런 현실을 냉소적으로 보려 하지만, 이 ‘웃픈’ 현실이 벗어날 수 없는 현실임을 느끼기에 ‘웃픈 감정’은 결국 아픔으로 남는다. 그래서 ‘웃픈’ 현실은 ‘비웃음, 쓴웃음, 코웃음이 나오는’ 현실과는 다르다.
모순적인 말을 병치하여 새말을 만드는 것은 세상사를 하나의 감정 혹은 하나의 기준으로만 느끼고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에 들은 말 중에 ‘착하면서 나쁘다’는 뜻의 ‘착쁘다’가 있다. 블로그나 웹툰 등에서 ‘착쁜 사람’ ‘착쁜 생각’ ‘착쁜 놈’ 등으로 쓰인다. ‘웃프다’에서 착안하여 만든 말로 보이는데, 말맛은 ‘웃프다’에 미치지 못하고 사용 빈도도 낮다.
현재 ‘웃프다’는 ‘우리말샘’에 새말로 등록되어 있지만, ‘착쁘다’는 등록되어 있지 않다. 웃픈 일과 웃픈 사연을 매일매일 겪고 듣는 사이에 ‘웃프다’가 먼저 우리말 어휘의 하나로 자리 잡은 것이다.
최경봉 원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
시나눔 → 우리시
|
|
|
|
삶과 죽음 - 윤동주
삶은 오늘도 죽음의 서곡을 노래하였다.
아 노래가 언제나 끝나랴
세상 사람은
뼈를 녹여내는 듯한 삶의 노래에
춤을 춘다
사람들은 해가 넘어가기 전
이 노래 끝의 공포를
생각할 사이가 없었다.
하늘 복판에 알새기듯이
이 노래를 부른 자가 누구뇨
그리고 소낙비 그친 뒤같이도
이 노래를 그친 자가 누구뇨
죽고 뼈만 남은
죽음의 승리자 위인들!
~~~~~~~~~~~~~~~~~~~~~~~~~~~~~~~~~~~~~~~~~~~~~~~~~
|
末伏(말복) - 김수영
시냇물소리 푸르고 희고 잔잔한 물소리
숲과 숲 사이의 하늘을 향해서
우는 매미
흙빛 매미여 달팽이는 닭이 먹고
구데기 바람에 우는 소리 나면
물소리는 먼 하늘을 찢고 달아난다
바람이 바람을 쫓고 생명을 쫓는다
강아지풀 사이에 가지(茄子)는 익고
인가 사이에서 기적처럼 자라나는 무성한 버드나무
연록색,
하늘의 빛보다도 분가못할 놈......
버드나무 발아래의 나팔꽃도 그렇다
앙상한 연분홍,
오무러질 때는 무궁화는 그보다 조금쯤 더 길고
진한 빛,
죽음의 빛인지도 모르는 놈......
거역하라 거역하라.....
가을이 오기 전에는
내 팔은 좀체로 제대로 길이를 갖지 못하고
그래도 햇빛을 가리킨다
풀잎끝에서 일어나듯이
태양은 자기가 내린 것을 거둬들이는데
시들은 자죽을 남기지만 도처에서
도처에서
즉결하는 영혼이여
완전한 놈......
구름 끝에 혀(舌)를 대는 잎사귀처럼
몸을 떨며
귀기울이려 할 때
그 무수한 말 중의 제일 첫마디는
[나는 졌노라......]
자연은 여행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은 말복도 다 아니 갔으며
밤에는 물고기가 물밖으로
달빛을 때리러 나온다
영원한 한숨이여
<1959>
~~~~~~~~~~~~~~~~~~~~~~~~~~~~~~~~~~~~~~~~~~~~~~~~~
|
봄 아침 - 이해인
창틈으로 쏟아진
천상 햇살의
눈부신 색실 타래
하얀 손 위에 무지개로 흔들릴 때
눈물로 빛어 내는
영혼의 맑은 가락
바람에 헝클어진 빛의 올을
정성껏 빗질하는 당신의 손이
노을을 쓸어 내는 아침입니다
초라해도 봄이 오는 나의 안뜰에
당신을 모시면
기쁨 터뜨리는 매화 꽃망울
文身 같은 그리움을
이 가슴에 찍어 논
당신은 이상한 나라의 주인
지울 수 없는 슬픔도
당신 앞엔
축복입니다
~~~~~~~~~~~~~~~~~~~~~~~~~~~~~~~~~~~~~~~~~~~~~~~~~
|
사랑할 땐 별이 되고 (16~20) - 이해인
봄꽃들의 축제 - 이해인
21
주님, 오늘 하루도 감사했다고 당신께 아룁니다. 오늘 했던 일, 만났던 모든 사람, 마음속에 자리했던 기쁨, 슬픔, 근심, 불안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어 두려웠던 어둠의 순간들도 당신께 봉헌합니다. 기도를 바치기엔 늘 복잡하고 정성이 부족했던 저의 준비성 없는 잘못도 봉헌합니다.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기 전에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는 이 끝기도의 은혜로운 시간을 새롭게 감사드립니다.
사랑의 말은
1
시냇물에 잠긴 하얀 조약돌처럼 깨끗하고 단단하게 마음 속 깊이 숨어 있던 그 귀한 말. 사랑의 말을 막상 입으로 뱉고나면 왠지 쓸쓸하다. 처음의 고운 빛깔이 조금은 바랜 것 같은 아쉬움을 어쩌지 못해 공연히 후회도 해본다. 그러나 한번이라도 더 듣고 싶어 모든 이가 기다리고 애태우는 사랑의 말. 이 말은 가장 흔하고 귀하면서도 강한 힘을 지녔다.
2
어려서는 내게 꽃향기로 기억되던 사랑의 말들이 중년의 나이가 된 이제사 더욱 튼튼한 열매로 익어 평범하지만 눈부신 느낌이다. 비록 달콤한 향기는 사라졌어도 눈에 안 보이게 소리없이 익어 가는 나이 든 사랑의 말은 편안하구나. 어느 한 사람을 향해서 기울이고 싶던 말이 더 많은 이를 향해 열려 있는 여유로움을 고마워한다.
3
누군가를 처음으로 사랑하기 시작할 땐 차고 넘치도록 많은 말을 하지만, 연륜과 깊이를 더해 갈수록 말은 차츰 줄어들고 조금은 물러나서 고독을 즐길 줄도 아는 하나의 섬이 된다. 인간끼리의 사랑뿐 아니라 신과의 사랑도 마찬가지임을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나는 섬이 되더라도 가슴엔 늘상 출렁거리는 파도가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 메마름과 무감각을 초연한 것이나 거룩한 것으로 착각하며 살게 될까 봐 두렵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마음의 가뭄을 경계해야 하리라.
4
아침엔 조금이나마 반가운 비. 참으로 오랜만에 맡아 보는 하늘물 냄새. 안팎으로 물이 귀한 세상에 살고 있는 요즘이다. 메마른 세상에 물이 귀하니 사람들 마음 안에도 사랑의 물이 고이질 못하고 인정과 연민이 줄어드는 것인가? 연일 보도되는 사랑없음의 사건들이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때로 마음이 아닌 머리로만 살고 있는 것 같은 나 자신과 이웃을 발견하는 일도 슬프다.
|
|
시나눔 → 동시
|
|
|
산 속 - 김원기
산새 소리 듣고
하얀 초롱꽃 핀다.
초롱꽃 빛깔 닮아
산새 소리
날이 갈수록 맑아지고
산골 물 소리 듣고
애기풀꽃 핀다.
애기풀꽃 빛깔 닮아
산골 물 소리
날이 갈수록 어려지고.
------------------------------------------------------------
산 - 김용섭
산은
숲을 품고
숲은
나무를 품고
나무는
새둥지를 품고
새둥지는
새를 품고
새는
새는
노래로
온 산을 품고.
|
|
시나눔 → 외국시
|
|
|
가을날 - 릴케 / 송영택 옮김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실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 후로도 오래 고독하게 살아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에 불려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러이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
|
글나눔 → 추천글
|
|
|
이외수의 감성사전
고백
양심의 거울에 묻어있던 가책의 먼지를 닦아내고 참회로써 자신의 본 모습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마음의 자물쇠를 푸는 일이다. 오직 진실만으로 이루어지며 그 자체가 선행이다. 하나의 예술은 하나의 고백이며 모든 고백에는 감동과 아름다움이 내재되어 있다.
수면제
배고픔은 참을 수 있어도 외로움은 참을 수 없는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일용하는 밤의 양식. 불면의 세월 속에 무성하게 자라 오르는 허무의 수풀을 잠재우고 허약해진 육신의 아픔을 일시적으로 사라지게 만드는 안식의 초대자. 꿈의 동반자. 소음 제거제.
삼라만상
라면 세 그릇으로 가득 채운 상.
자살
자신의 목숨이 자기 소유임을 만천하에 행동으로 증명해 보이는 일. 피조물로써의 경거망동. 생명체로써의 절대비극. 그러나 가장 강렬한 삶에의 갈망.
출발점
과거를 끊어낸 자리. 미래의 생장점. 현재 바로 그 자리. 윤회의 매듭점.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 떠나는 자리. 시간과 공간의 소실점. 인생의 모든 새벽.
길
동물들은 생존을 위해 길을 만든다. 인간들은 멀리 있는 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길을 만든다. 땅위에도 만들고 땅속에도 만든다. 하늘에도 만들고 바다 위에도 만든다. 그러나 인간들은 본디 자신들이 어느 길로 왔으며 어느 길로 가고 있는지를 대다수가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한자어로는 그 길을 도라고 표기하며 개개인의 마음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설파되어 왔다.
시계
하루를 시간별로 스물 네 토막씩 절단하는 기계.
문
드나들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설치물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마음 안에 감옥을 하나씩 가지고 있으며 감옥마다 견고한 문이 하나씩 매달려 있다. 그리고 그 속에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법칙과 현상들이 갇힌다. 모든 이름과 추억들이 갇힌다. 그러나 아무것도 드나들지 못한다. 자기 자신이 갇혀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으며 안다고 하더라도 문을 여는 방법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 안에 있는 문은 오직 자기 자신을 버림으로써 만 그 열쇠를 발견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 열쇠를 발견하는 순간 하나의 사물들은 하나의 문이며 언제나 자신을 향해 열려 있었음을 알게 된다. 닫혀 있었던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었음을 알게 된다.
달팽이
한여름의 고독한 여행자. 그러나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집을 한번도 떠나 본 적이 없는 여행자.
자물쇠
도난을 방지하기 위하여 문이며 서랍이며 장롱이며 금고 따위에 설치하는 방범장치의 일종. 주인들은 대개 인간을 불신하고 자물쇠를 신뢰하지만 노련한 도둑을 만나면 무용지물이다. 그 자물쇠마저도 훔쳐 가버리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때로 마음의 문에까지 자물쇠를 채운다. 자물쇠를 채우고 스스로가 그 속에 갇힌다. 마음 안에 훔쳐 갈 보물이 빈약한 사람일수록 자물쇠가 견고하다. 그러나 그 누구의 마음을 걸어 잠근 자물쇠라 하더라도 반드시 열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불길로 그 자물쇠를 녹여 버리는 일이다.
총
새가 그 끝에 앉아 있을 때 가장 비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무기.
|
|
독서실 → 수필
|
|
|
무라카미 하루키 수필집 2-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베를린에서의 오즈 야스지로와 모기향
며칠 전 오즈 야스지로(1903 - 1963, 동경 태생. 영화 감독) 감독의 영화가 레이저 디스크로 나왔다기에 세 장을 한꺼번에 사 왔다. <만춘>과 <맥추>와 <동경 이야기>이다.(<만춘> <맥추> <동경 이야기> 이 세 편의 영화는 모두 가족 간에 벌어지는 사랑과 갈등의 애환을 드라마틱하지 않은 잔잔한 영상과 지극히 억제된 내면적인 연기로 그려 낸 걸작이다. 당대 최고의 여배우였던 하라 세츠코는 조용하고 정숙한 딸 연기를 하여 순응하는 여인상을 구축했다.) 제작 연도는 1949년, 1951년, 1963년 세 작품 모두 하라 세츠코(1920 -, 여배우)와 류치슈(1904 -, 구마모토현 태생, 영화 배우)가 출연한 영화다. 나는 일본 영화 중에서는 오즈 감독과 나루세 미키오(1905- 1969, 동경 태생.영화 감독)감독의 작품을 특히 좋아하여 바지런을 떠러가며 명화좌 같은 데서 보곤 한다. 그런데 오래 된 영화를 리바이벌 상영하는 극장은 대개가 소규모라 늘 만원인데다, 나이 탓도 있어 그런 곳에서 영화를 두세 편 연달아 보기란 몹시 힘에 겨웁다. 그 점 레이저 디스크나 비디오 테이프는 아주 편하다. 특히 흑백 스탠다이드 사이즈의 옛날 작품은 스크린으로 보기 보다는 화질이 훨씬 좋은 경우도 간혹 있어, 집 안에서 느긋하게 보기에는 최상이다. '음 말이지, 오즈의 새 디스크를 샀는데, 차라도 마시며 우리 집에서 같이 보지 않겠어?'하고 여자를 불러 들일 수도 있다. 상대방이 기꺼이 응해 줄지 어떨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실은 독일에서 <동경 이야기>를 한 번 본 적이 있다. 베를린의 한 호텔에 머물며 무심히 TV를 켰더니, 방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목이 아마 <디 라이제 나하 도쿄(동경으로의 여행)>였고, 대화는 독일어로 더빙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히가시야마 치에코(1890 - 1980, 치바현 태생, 여배우)가 '피곤하시죠?'라고 물어, 류치슈가 '음'하고 대답하는 장면이 'Nein!'으로 되어 있다. '음'이 '나인!'이다. 이 대사를 들으며 아주 묘한 기분이 들었다. 미국인들도 일본말로 더빙이 되어 있는 미국 영화를 보면, 틀림없이 묘한 기분을 느낄 것이다. 독일에서 <동경 이야기>를 보면서 절실하게 느낀 것은, 일본인이-적어도 당시의 일본인이 - 무턱대고 인사를 많이 한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일본어 대사로 보고 있으면 그다지 거슬리지 않지만, 독일어 대사로 보고 있으면 상당히 거슬린다. 예를 들면 손님이 '그럼, 이만. 폐 많이 끼쳤습니다. 실례하겠습니다'하고 말하고 물러나려고 한다. 그러고는 몇 번이나 머리를 깊숙이 숙여가며 인사를 한다. 그런데 이게 독일 말이 되면 딱 한마디 '아우프비더젠'으로 끝나 버린다. 그러니 입놀림에 대사를 맞추자면 '아우...프...비...더...제...에...ㄴ'하는 식으로 된다. 하긴 이건 극단적인 예지만, 요컨대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는 대사가 무지무지 많다.
"그럴까?"
"그래요."
"역시, 그럴까?"
"그렇잖아요."
"역시, 그렇겠지?"
"그래요."
같은 대사를 독일 말로 들으면, 어찌 된 셈인지 형이상학적 색채를 띠기까지 하니 묘한 일이다.
"그런 것인가?"
"그런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안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고 하는 것은, 그렇다."
"그렇다."
이런 상황이다. 나의 독일어 실력은 상당히 어중 띤 것이라, 정말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책임 못 지겠지만, 어감으로 봐서는 그런 꽤나 변증법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것처럼 느껴진다. 난해하다고도 할 수 있다. 프랑스어나 이탈리아어로 더빙된 오즈 감독의 영화에는 또 그나름의 정취가 있을 것이다. 더빙된 오즈 감독의 영화에는 또 그 나름의 정취가 있을 것이다. 두 번 세 번까지는 모르겠으나, 한 번쯤은 보고 싶다. 나는 영어로 번역된 발자크의 소설을 좋아하는 기묘한 취미를 가진 사람이라 그런 별난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만춘>이나 <맥추>는 북 가마쿠라가 무대를 이루고 있어, 에노시마나 시치리가하마 주변의 풍경이 종종 등장한다. 영화로 보는 1949년 당시의 시치리가하마에는 자동차라곤 거의 없고, 아주 고즈넉하다.물론 서핀을 하는 사람도 없다. 조깅을 하는 사람도 없다. 그 무렵의 사람들은 필시 모두 바빴을 것이리라. 오즈 야스지로가 담아 내는 그런 풍경은 늘 잠잠하고, 바람도 없고, 양지 바른 쪽과도 같은 기분 좋은 빛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특히 1945년에서 1955년 정도 사이의) 오즈의 영화에 등장하는 그런 풍경을 좋아하여,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하여 보게 된다. 놀랄 만큼 양식적임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생생한 것이다.
그리고 이건 세부적인 얘기인데, <동경 이야기> 중에 도저히 알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묘기향이 나오는 장면이다. 이 영화에는 모기향이 나오는 장면이 세 군데 있는데, 그 어느 장면에도 모기향이 하나 같이 세로로 세워져 있다. 요 얼마 전에 세로형 레코드 플레이어가 유행한 일이 있는데, 꼭 그런 식으로 세워진 채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것이다. 나는 그 점이 하도 신기하여, 모기향을 세로로 세워 놓는 방법과 그 이점에 관하여 여러 가지로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당시에는 그런 세로형 모기향이 실재했던 것일까? 아니면 오즈 미학에 따라 억지로 모기향을 세로로 세워 놓은 것일까? 그리고 독일인은 그게 모기향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을까? 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지만.
- 최근에 디스크로 나온 <동경의 황혼>에 대해서는 나도 미즈마루 씨도 감탄해 마지 않고 있습니다. 저 악동 바텐더가 뭐라 말할 수 없이 매력적이다. 세로형 모기향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실마리가 잡히지 않습니다.
교훈적인 이야기
나는 교훈이 들어 있는 이야기를 비교적 좋아한다. 그렇다고 뭐 내가 특별히 교훈적인 인간이라는 뜻은 아니다. 교훈이라는 것이 성립되는 양상을 비교적 좋아한다는 뜻일 뿐이다. 내 마누라의 언니는 학생 시절에 호리 타츠오의 <바람은 일다>(호리 타츠오가 1926년에서 1928년에 걸쳐 발표한 장편 소설로ㅡ 약혼녀인 아야코의 병과 죽음을 통하여 시인이 친인으로서의 각성에 이른다는 내용이다. 호리 타츠오 자신도 결핵으로 절명했다.)를 읽고, '건강이란 소중한 것이라고 느꼈습니다'란 독후감을 써 냈더니 선생님이 폭소를 터뜨렸다고 하는데 - 그 얘기를 듣고는 나 역시 그만 웃고 말았지만 - 이건 웃는 쪽이 잘못이다. 만약 그녀가 <바람은 일다>를 읽고 건강의 중요성을 통감할 수 있었다면, 그건 틀림없는 문학의 힘이다. 웃어서는 안된다. 그런 입장에서 다시 한 번 <바람은 일다>를 읽어 보면, 반드시 '음-'하고 수긍이 가는 부분이 몇 군데쯤 있을 것이다. 교훈이라는 것은 어떤 경우에는 유형에 순응하고 마는 일도 있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다른 의미에서의 유형을 무너뜨리는 힘을 함축하고 있는 일도 있는 것이다.
내게도 종종 소설을 읽고 난 감상문을 쓴 편지가 독자로부터 오는데, '무라카미 씨의 소설적 감성은 -'이라든가, '이런 언어의 사용은 -'이라든가, '이 작품을 읽은 느낌은 -'하는 게 대부분이고, '나는 무라카미 씨의 소설을 읽고 이런 교훈을 얻었습니다'는 내용은 한 통도 없다. 모두가 그래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한 통쯤은 있어도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나는 무라카미 씨의 소설을 읽고, 병약한 어머님을 좀더 잘 모셔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라는가, '나는 무라카미 씨의 소설을 일고 돈이 전부가 아님을 깨달았습니다'라든가 말이다. 하긴 무리일지도 모르겠지만. 교훈이란 일반적으로 그렇게 생각되어지고 있는 것처럼 딱딱한 게 아니다. 어떠한 일에도 반드시 교훈은 있고, 그것은 천편일률적인 형태를 띠고 있지는 않다. 내리는 비 속에도 교훈이 있고, 옆집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카로라 스프린터에도 교훈이 있다. 그렇다고 억지로 찾아내려는 노력을 할 필요는 없지만 있으면 있는 대로 상당히 흥미로운 것이다.
옛날, 학생 시절에 학교에서 <쯔레즈레구사>(14세기 중엽 가마쿠라시대의 수필 문학, 작가는 겸호법사. 일본 최고의 수필 문학 중 하나로 일컬어진다.)를 공부할 때, 선생님이 '현대인의 감각으로 보면 작자의 설교적, 교훈적 의도가 약간은 풍기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말씀을 하여, 그때는 '흠, 그런가'하고 생각했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교훈적인 부분만이 머리에 또렷하게 남아 있으니 기묘한 일이다. <쯔레즈레구사>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작품을 예로 들어도 유려한 문장이나 치밀한 심리 묘사는 읽을 당시에는 감탄스러워도 세월이 흐르고 나면 싸그리 잊혀지고, 아주 사소한 것일지는 모르겠으나 좌우지간 효율적인 종류의 일만을 부분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런 경향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무것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는 것보다 나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옛날에 어떤 편집자가 재미있는 일화를 들려 주었다. 그 얘기는 꽤 교훈적인 얘기인데, 너무나 교훈이 많아 나는 아직도 정리를 다 못하고 있다. 케이스 스터디로써 이 자리에서 재현해 본다.
'케이스 스터디' 모 편집자의 이야기
나는 재즈를 아주 좋아하는 터라, 어느 전위 재즈 무지션의 연주를 테이프에 담아 사업상 방문하는 차에 XX 씨(주:고명한 재즈 평론가)에게 들려 주었죠. XX씨는 그 음악이 매우 마음에 들었는지, '음, 자네 이거 아주 좋은데, 최고야'하고 격찬을 하더군요. 거기까지는 좋았어요. 그런데 문득 내가 그 테이프를 배속으로 틀어 놓았다는 걸 깨달은 겁니다. 그래서 아차, 실수를 했구나 싶어, '죄송합니다. 속도를 잘못 맞추었어요'라고 사과하고, 처음부터 다시 틀었죠. 글세 부정확한 걸 그대로 지나칠 수는 없잖습니까. 그랬더니 그 선생님 격노하면서, '자네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라는 거예요. 그 사람도 말로는 그럴싸하게 대범한 척 하면서 사실은 아량이 부족한가 봅니다. 이 일화에는 아까도 말했듯 수많은 교훈이 포함돼 있어 내 나름으로 발견한 사항을 조목조목 써 본다. 수험을 앞두고 계신 분들은 옳다고 여겨지는 것에 O를 해 주세요.
1) 전위 재즈 같은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속도로 들으면 된다.
2) 무엇이고 자기가 좋다고 생각하면 그걸로 족한 것이다.
3) 정확한 평론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4)실수를 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5) 뭐 부정확하다고 별지장이 있는 건 아니지 않는가.
6) 실수는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게 상책이다.
7) 아량이 넓은 사람은 그리 주절대지 않는다.
8) 편집자는 상대방에게 직접 험담을 하지 않는 법이다.
9) 무턱대고 칭찬하고 나면, 뒷처리가 골치 아프다.
하고 써 놓고 보니 이렇게 짧은 얘기 속에도 배워야 할 것들이 상당히 많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에도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교훈이 있을지 모르니까, 생각나시는 분은 가르쳐 주세요. <쯔레즈레구사>라면 그 얘기 뒤에 어떤 교훈이 따라 붙을까 하고 궁리하는 것만으로도 할 일없는 때를 넉넉히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
|
독서실 → 사회/문화/심리
|
|
|
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마카아벨리 평전 - 제25장 (신이 내린 글)
마키아벨리의 생애를 얘기해 나가면서 정작 그의 정치사상에 대해서는 별로 말할 기회가 없었다. 바꾸어 말해서, 이 책에서는 단지 그 수목에서 어떤 과일이 어떤 식으로 열렸는지를 보여주는 데 그쳤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그의 정치사상적 변천은 좋든 싫든 많은 부분 바로 이러한 품성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었다. 이는 이미 나에 앞서 다른 이들이 지적했던 점이었다. 사실 그의 글에 대해 피렌체의 대 산문 작가인 지노 카포니는 다음과 같이 썼다. (진중한 듯하다가도 경멸 조로 돌아섬으로써 당시 칭송과 인기를 함께 누렸던 그의 문체, 그것이 지닌 비할 데 없는 대담성과 힘.(...)나의 생각으로는, 그의 교의가 드물지 않게 지고의 권위를 부여받는 것도 작가로부터 풍겨져 오는 바로 그러한 인상 덕분인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만일 그가 바로 그 교의들, 그리고 새로우면서도 예리하며 힘차면서도 매서운, 바로 그 놀라운 생각들을 다른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궁정 라틴어로 호화롭게 치장하든가 혹은 질리도록 장황하지만 한 속어문 속에 용해시켜 버렸다면, 지금 그는 단지 몇몇 문학사 저작에서만 언급될 뿐인 그런 존재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상상해 보라. (군주론)이 빈약한 필사본 전통만을 뒤로 남긴 채, 인쇄되기도 전에 유실되어 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에라도 그렇게 되었다면, 아고스티노 니포의 그 악명높은 표절서 (통치술 De regnandi peritia)은 그 저자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이점속에서 어떤 부침을 겪게 되었을지 알 수 가 없다. 단지 사실만이, 혹은 적어도 사실이 문체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떠들어대는 작금의 그 어리석은 비평가들은 이로부터 무언가라도 배워야만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레오파르디는 자신의 (수상록 Zibaldone)에서 문체란 설사 사실로부터 분리된다 해도 어떤 위대한 것이 될 수 있다고 우리를 따끔하게 꾸짖지 않았던가 말이다. 다만 사실의 중요성만을 강조하면서, 마키아벨리의 문체가 귀감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단지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산문을 같은 곳, 같은 시대, 같은 장르에 속하는 다른 어떤 작가들의 글과 비교해 보아도, 그것은 전혀 다른 소리가 난다. 훈련을 거의 받지 않은 귀에도 마키아벨리의 한 문장, 한 구절은 다른 수많은 작가들의 경우와 쉽사리 구별된다. 우리에게는 몇몇 학자들이 필체를 근거로 그의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자필 문서들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들로부터 나오는 소리는 무디어서 내가 말한 그 독특한 음색은 잘 식별되지가 않는다. 만일 그가 그 문서들을 단지 베꼈을 뿐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면, 이 역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역병 관찰기 Descrizione della peste) (이 글의 저자는 로렌초 스트로치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 책 16장 주 15를 볼 것 - 옮긴이) 의 경우처럼 말이다. 그래서 데 상티스는 (기교적이고 보카치오적인) 마키아벨리의 존재를 믿을 수 있었던 것이다. 거꾸로, (우리말 논고)처럼 그 자필 원고는 유실되고 아둔한 학자들은 저자의 신빙성을 의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렌체 서기장의 작품이 분명한 크고 작은 원고들도 있다. 나는 이러한 점을 이 책 다른 곳에서 이미 말한 바 있다. 즉 마키아벨리를 알아보는 데는 필적보다는 문체가 더 유용하다는 것이다. 오직 아둔한 학자들만이 어떤 말, 어떤 구절이 그 위대한 작가의 것인지 혹은 그의 글을 베낀 뻔뻔스럽거나 멍청한 사람의 것인지를 구별치 못하는 법이다(그래서 결국(만드라골라)의 진본 원고를 찾아낸 것도 사실 다름 아닌 나였다).
이후 (오직) 그만의 것인 그 언어와 그 문체에 대한 해부 작업이 뒤따른다. 접미사의 사용, 풍부한 액식 어법, (한 개의 형용사 또는 동사로 다른 두 개의 명사를 억지로 수식 또는 비배시키는 수사법을 말함. 이를테면 (흐느끼는 눈망울과 두근거리는 가슴)이라고 해야 될 것을 (흐느끼는 눈망울과 가슴)이라고 하는 것-옮긴이), 간결한 문장, 낱말 특히 동사의 배치 등을 통해 글의 속도가 빠른 이유가 탐색되어야 하고, 비문체와 양도 논법, 극히 자연스러운 어투, 대립적인 어휘 또는 대립적인 개념 간의 빈번한 대비, 자신의 (비극적) 본성에 잘 호응하는 용어와 문체상의 어떤 극적 박력성을 통해 그의 글이 지닌 힘의 비밀이 주의 깊게 관찰되어야만 한다. 또한 궁정식과 평시민식을 섞어놓고, 고상한 속어와 피렌체 관용 어법을 라틴식 어휘나 혹은 직접적으로 라틴어와 혼합해 놓은 그 혼용의 방식이 연구되어야만 한다. 이렇게 하면 때로는 (일상의 옷)을 입었다가 또 때로는 궁중복으로 갈아입던 이 산 카쉬아노의 인물에 매우 쉽사리 접근할 수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설사 이러한 점들을 제대로 맞추어 인식하고 정리했다고 해도, 이 놀라운 말의 혼합물 속에는 여전히 우리를 비켜가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비교할 수도 흉내낼 수도 없지만 이 글을 지배하고 있는 어떤 풍미랄까, 더 적절한 표현을 찾자면 어떤 시 정신 같은 것이다.
한 근대 이탈리아 문학사가는 그를 시인이라 부르면서도, 시심이 과정되고 허풍스럽게 느껴진다는 이유로 그의 시를 혹평하였다. 하지만 이는 그를 평가하는 데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요소이다. 바로 그와 같이 정치가이자 역사가이며 동시에 정치, 역사 철학자인 인물의 저작 속에서, 특히 개인적인 편지들 속에서, 각별히 단테를 비롯하여 평소 암송하고 했던 라틴아와 속어 시인들을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여기저기 인용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이런 면에서는 정치가와 역사가만이 아닌 문인까지 통틀어 당시이 대작가들 중 어느 누구도 그를 따르지 못한다.
그에게 글쓰기의 스승이 되었던 사람은 누구보다도 단연 단테였고, 타키투스도 그러하였다. 아마 루크레티우스도 이에 일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비교적 최근에야 마키아벨 리가 그의 작품을 필사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역시 중요한 것은 그를 정신적으로 이끌어가는 어떤 위대한 품성이다. 그가 귀감으로 삼은 것들, 그의 글쓰기 실제에 담긴 비밀들을 다름아닌 그 자신 속에서, 평시민적 휴머니스트이자 산문 작가이면서 동시에 시인이었던 그의 정말 특이한 품성 속에서 찾아져야만 하는 것이다.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음과 같은 지노 카포니의 말(앞서 인용했던 다른 말들에다 이를 다시 덧붙인다고 해서 전혀 부끄러울 일이 없다. 나는 이 말을 접하기 전에 이미 수없이 그와 똑같은 심정을 느꼈기 때문이다)에 뜻을 같이할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절묘한 행문을 보노라면, 아마도 다른 작가들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질시를 느낄 것이다.) 그처럼 평온하고 온건한, 이른바 (솔직담백한 지노)의 문체에 조금이라도 친숙한 사람들에게라면, 니콜로가 구사하는 어떤 동사, 어떤 부사가 적어도 뭔가 상도를 벗어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처럼 범상치 않은 글에서 마찬가지로 범상치 않은 표현이 어울리는 법이다.
프렌체스코 데 상티스 역시 니콜로의 글 속에서 (근대 산문의 예감) (이보다는 (반드시 근대적임이 틀림없는 그러한 산문에 대한 예감)이라고 말했으면 더 좋았을 것을) 같은 것을 보고 느꼈으며, 그리하여 한번은 그것을 가리켜 (신이 내린 글 divina prosa) 이라고 부르기에 이르렀다. 그 당시까지 사람들은 오직 (신이 내린 시 divina poesia)에 대해서만, 그것도 최고의 시인들에 한해서만 말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마키아벨리 문서에 대한 간략한 논평
나는 극히 최근에 다른 경로로 얻은 몇 명 미편집 문서들 외에, 마키아벨리 문서철의 잔존 문서들을 조사하였다('Le carte del Machiavelli," La Bibliofilia LXXI (1969)). 이 잔존 문서들은 오랫동안 리치 가문에 보존되어 왔는데, 이는 니콜로의 막내딸인 바르톨로메아(별칭 바치나)가 그 가문의 조반니란 사람과 혼인한 이후의 일이었다. 이 결혼으로 줄리아노가 태어났는데, 그는 자신의 위대한 외조부에 관련된 문서들을 모으고 정리하고 베끼는 데 전생애를 바쳤다. 그는 16세기 말에 니콜로의 친손들로부터 문서철에 남아 있던 것들을 하나하나 입수하였다. 추측건데, 유감스럽게도 마키아벨리의 작품 원고들은 이미 이때에 다른 곳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줄리아노 리치에 대해서는 다음이 참조된다. G. Sapori, "Giuliano de' Ricci, ecc.," in Stu야 in onore di Armando Sapori, Milano, Istituto Editoriale Cisalpino, 1957, vol. 2, p. 1063 sgg.).
문서철이 줄리아노에게로 넘어갔다고 추정하는 것은 결코 근거 없는 말이 아니다. 사실, 니콜로의 증손녀이자 그의 마지막 혈손인 이폴리타가 리치 가문의 또 다른 인물 피에르프란체스코와 혼인한 뒤 1613년에 세상을 떠났을 때, 그녀의 외동달은 피렌체 서기장의 소유물이었던 물건들 모두를 세리스토리(혼인이 이루어졌던 곳)에다 옮겨놓았는데, 그 속에는 문서라고는 한 장도 들어 있지 않았다. 또한 줄리아노의 자필 노트에도 이 난파된 고문서호의 잔존물들에 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1820년대에 들어, 리치 가문의 마지막 유족들이(최근에 자손이 끊기고 말았다) 당시 여전히 토스카나 대공의 개인 도서관이었던 비블리오테카 팔라티나에다 자신들의 고문서철 일부를 팔았다. 이렇게 문서철이 분할된 이후, 그 나머지 전부를 누가 입수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가 아는 것은, 1832년 비블리오테카 팔라티나가 분할된 나머지 모두를 중간 구매자 혹은 그러한 사람들 중 한 명으로부터 총액 순금화 100제키노에 샀다는 사실이다. 당시 이 구매를 제안한 사람은 빈틈이 없는 데다 운도 좋았던 서적상이자 도서관장이었던 주제페 몰리니였다. 그가 원래의 문서철을 훼손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어쨌든 이렇게 두 번에 걸친 구입으로 얻은 모든 자료들은 이후 그의 주관 아래 정리되고 분류되었다. 현재 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마키아벨리 문서 Carte del Machiavelli)란 바로 이 자료들을 피렌체 고문서관에서 나온 다른 자료들과 합친 것이다.
문서들이 그렇게 훼손되고 흩어지기 전에 그 문고가 어떤 식으로 분류되어 있었는자, 그리고 (이 쪽이 더 중요한데) 그 내용상의 다른 중요한 점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 떠오른 것은 내가 원래는 하나였던 두 개의 문서철을 접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을 때였다. 윤택했던 시절, 대공 가문에서 구매해 놓았던 것이 이제 흘러나오게 된 것이었다. 약 30년 전 이 문서철 중의 하나가 부침이 심한 골동품 시장의 파도 위로 다시 떠올랐을 때, 나는 숙부인 파에로 지노리콘티에게 그것을 구입하여 필사본 콜렉션에 넣도록 권유하였고, 이는 그 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나도 무언가 관련이 있었던 한 약속 덕분에 피렌체 국립도서관으로 이관되었다. 나는 또한 운 좋게도 당시 바르갈리 페트루치 백작 가의 도서관에 보관중이던 다른 문서철 역시 국립도서관으로 보낼 수가 있었다. 당시 파스콸레 빌라니는 그의 저작을 쓰는 데 이 문서들을 이용, 연구하는 편의를 얻었다. 하지만 그는 그 내용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자내지는 못하였다.
이 두 개의 귀중한 고문서 유물 중에서 첫 번째 것, 즉 전 지노리 콘티 문고는 불행히도 잘 알 수 없는 이유로 해서 국립도서관에 오기 전에 훼손되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 그 중 50통의 편지가 세르조 베르텔리의 편집으로 간행되었음은 이미 dkb서 말한 대로이다. 반면 유일하게 원형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던(책이 제본된 형태가 줄리아노 데 리치의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는 좀더 (신중히) 받아들여야 할 말이다) 두 번째 문고, 즉 전 바르갈리페트루치 문고는 새로운 곳에 보관된 1956년 이후, 불과 엊그제까지만 해도 나를 제외한 현대의 마키아벨리 연구자들에 의해 완전히 무시당하고 있었던 상태였다. 이 두 번째 문고는, 전 지노리 콘티 문서철처럼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력시 전 문서철이다), 그리고 아마도 몰리니에 의해 훼손된 그 문서철처럼, 가죽으로 보강된 양피지에 싸여 있었다. 책등에는 (Lettere/del/Machiavelli)라고 씌여 있었고, 고퐁의 글씨체로 31이라는 표시가 적혀 있었다. 현재는 피렘체 국립도서관에 (Nuovi acquisti, 1004)라는 서명으로 보관되어 있다.
무엇보다 이 문서철 속에는 다른 편지와 문서들, 그리고 첫 (십년기)의 모조폼에 적혀 있는 (미우 중대한 오류들)에 대한 주석 등을 제쳐놓고도, 피렌체 서기장의 편지 75통이 오롯이 들어 있다. 특히 여기에는 1506년 3월 14일에 아고스티노 베스푸치가 마키아벨리에게 보낸 대단히 귀중한 편지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나는 앞서 언급한 나의 글 "La carte del Machiavelli"를 통해 간략한 문서 목록을 제사하고 그 내용에 대한 몇몇 연구 결과를 간행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라고 믿었다. 물론 이러한 문서 목록을 오랬동안 피렌체 국립도서관에서 같이 보존되어 온 리치 가의 다른 마키아벨리 문서 목록과 합치는 것이 이상적이겠지만, 어쨌든 이로부터 어떤 문서학적 소결론을 끌어내볼 수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다음과 같은 것이 그 중 하나이다. 니콜로가 죽은 후, 그 상속자들인 베르나르도, 로도비코, 피에로, 귀도의 문서들은 문서철 속에 뒤섞여 있었다. 사실, 그 속에서 우리는 아들들이 니콜로에게 보낸 편지뿐만 아니라 그나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보낸 편지들도 끼어 있음을 본다. 이를테면, 훨씬 뒤에 루카르도의 교구 신부가 죽으면서 귀도에게 보낸 한 놀라운 편지가 그것인데, 여기서 그는 생전에 귀도의 좋은 아버지가 아들에 대해 생각하고 말했던 모든 희망들을 적어놓았다.
어쨌거나, 그리고 혹시 다른 어떤 중요 사항들에 대해 알고 싶으면, 독자들은 앞서 말한 나의 글로 되돌아갈 수 있다. 지금의 이 짤막한 논평은 그 글을 간략히 요약한 것으로, 나의 의도는 독자들로 하여금 그 글을 다시 돌아다보게 하는 것 외에 다른 이유는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흩어진 마키아벨리 문서에 원형이 통일성을 부여해서 우리를 인도해 줄 그 간략한 문서 목록에 유의해 주기 바란다.
|
|
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
|
|
|
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7. 고전으로 되새기는 우리 인생관
기회
가축에게 먹일 풀은 햇볕이 날 때 말려서 저장해야 한다. 내일 내일 미루다 때를 놓쳐 비가 오기 시작하면 풀을 말릴 수 없어 사료를 만들 수 없다. 학문도 마찬가지이다.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주자는 중국 제일의 철학자로서 송 나라의 성리학과 이기설을 대성한 사람이다. 그의 권학문을 보자.
“오늘 배우지 않아도 내일이 있다고 게을리 하지 말아라. 올해 배우지 않아도 내년이 있다고 게을리 하지 말아라. 세월은 살과 같이 지나가고, 나를 기다려 주지 않나니 아아 늙었구나 이 누구의 잘못인고“
주자와 같이 훌륭한 사람도 기회를 놓쳐서 더 많은 학문을 쌓지 못했다고 스스로 탄식하고 있다. 기회는 ‘나 여기 있소’하고 찾아오지 않는다. 숨어서 오기도 하고, 전혀 다른 얼굴로 오기도 하며, 얼음산의 한 모퉁이로 작은 부분만 내밀기도 한다. 또 화를 가장하여 나타나기도 한다. ‘지혜가 있다한들 시세를 타느니만 못하다’하듯이 똑똑한 사람이라도 기회를 놓치면 이루는 일이 없다. 노력을 하다가 기회가 오면 전심전력을 다 해 끝까지 열심히 일을 하여야 한다.우유부단하거나 몸을 도사리면 형세는 점점 기울어진다. 한 번 지나간 세월은 다시 오지 않듯이, 같은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쇠는 뜨겁게 달아올랐을 때 두드려야지, 기회를 잃고 식은 다음에 두드리면 깨지기 쉽다.
기회를 놓치지 말라.(Make hay while the sun shines.)
합칠수록 좋은 것
두 나그네가 추운 겨울날 눈 길을 걷고 있었다. 한 사람이 지쳐 쓰러졌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지친 사람을 등에 업었다. 입힌 사람이 말했다.
“나를 놔두고 혼자 가세요. 가시거든 구조대를 불러 주세요.”
등에 업은 사람이 말했다.
“당신을 등에 업고 있으니 내 등이 따뜻해집니다. 또 힘이 들기는 하나 마찰이 돼서인지 땀도 납니다. 당신을 업는 것은 나 역시 사는 길입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넘어지면 다른 한 사람이 일으켜 줄 수 있으나, 혼자 있다 넘어지면 일으켜 줄 사람이 없다. 한 사람으로서 당해낼 수 없는 공격도 두 사람이면 능히 막아낼 수 있고, 삼겹줄은 끊어지지 않는다. 지혜는 합쳐질수록 그 진가를 발휘한다. 그래서 ‘두 사람의 마음이 합해지면 단단한 쇄붙이도 끊을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생긴다’, ‘두 마음이 같이 하는 말은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고 주역은 이르고 있다. 추운 방에 두 사람이 누우면 따뜻해진다. 36도 짜리 난로 하나보다 두 개가 훨씬 따뜻하다는 것은 정한 이치 아닌가?
지혜는 합쳐질수록 좋다.(Two heads are better than one.)
진인사 대천명
올리버 크롬웰은 영국의 청교도 혁명에서 두각을 나타낸 정치가였다. 그는 의회의원으로 있다가 시민전쟁에 참전하였는데, 철기대와 신모범군을 편성해서 국왕군을 격파하여 군인으로서도 이름을 날렸다. 내전이 재발하자 막강한 군대의 힘을 이용하여 찰스 1세를 처형하였고, 영국의 모든 실권을 가진 ‘로드 프로텍터’ 의 지위에 올라 철권을 휘둘렀다. 그는 왕위에 오르라는 빗발치는 신민의 요청을 거절하고 공화제를 시행하였다. 영국 역사상 어떤 지도자도 감히 해낼 수 없는 어려운 일을 과감히 해냈다. 영국 해외진출의 기초는 그에 의해 닦여졌을 정도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 말년에 범한 그의 과격한 행동은 ‘국민의 반발’을 사기도 하였다. 그는 죽으면서 아들인 리차드 크롬웰에게 권력을 넘겨 주었으나, 이들은 그 자리를 감당하지 못하고 아버지 올리버 크롬웰이 죽은 다음해인 1659년에 쫓겨났다. 그가 죽은 지 1년만에 왕정이 부활되고 만 것이다. 크롬웰이 시민전쟁에서 군대를 데리고 강을 건너면서 한 말이 있다.
“사람으로서 할 일을 다했으니, 하느님의 뜻에 따르라.”
그의 말은 ‘사람으로서 할 일을 다했으니, 하느님의 뜻에 따르라.”
그의 말은 ‘사람으로서 할 일을 모두 다 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라’는 말과 같다.
‘하늘은 오직 지성을 다 하는 사람에게 조화를 이루게 한다’는 말이 중용에 있고, ‘사람은 계획을 세우지만, 그 결과는 하느님에게 달려 있다‘고 성경은 전한다. ‘일을 꾀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일이 되고 안되고는 하늘에 달려 있다’고 논어도 전한다. 최선을 다 한후에 기다리는 것은 동서양이 똑같다. 진인사 대천명 (Put your trust in God. and keep your powder dry.)
파우더는 화약을 말한다.옛날에는 화약제조기술의 미숙으로 화약이 건조된 상태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싸우기 위해서는 항상 화약을 말려 놓고 대기해야 한다는 뜻이다.
|
|
글나눔 → 읽어둘문학
|
|
|
|
테스(Tess of the d'Urbervilles:1891) 2/2
그 후 긴 여름 해가 질 무렵 테스는 목장에 남아서 젖을 짜고 있었다. 석양빛을 받으며 하얀 레이스가 달린 모자를 쓰고 젖을 짜는 그녀의 모습은 아름다운 한폭의 그림이었다. 테스를 찾아 목장에 나온 에인젤은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테스를 보자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갔다. 그는 테스에 대한 애정이 날이 갈수록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에인젤은 테스의 모습에서 자신의 이상형을 본 것이다. 진흙 속에 박혀 있는 보물처럼 테스도 자신에게서 교육을 받는다면 지성과 교양을 갖춘 여인이 되리라. 에인젤은 지독히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자연으로 끌리는 두 사람의 애정을 가로막고있는 것은 어쩌면 테스의 거부보다도 에인젤에게 있는 이성 때문이 아닐까? 이성적이고 사리 분별이 뛰어난 에인젤은 어느덧 테스를 자신이 아는 것보다 더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어느 날 에인젤은 들의 여신처럼 건강하고 아름다운 테스를 보자 테스를 두 팔로 힘껏 끌어안고 말았다.
"용서하십시오. 난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테스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 참, 소가 다 놀라서 젖통을 차고 말았어요"
"테스, 나와 결혼해 주오"
"아아 에인젤 씨, 그런 말은 하지 말아 주세요. 난 당신의 아내가 될 수 있는 여자가 아녜요"
"그건 왜요? 테스 당신은 날 사랑할 수 없다는 건가요?"
에인젤은 더욱 세게 테스를 감쌌다. 테스의 얼굴에서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사랑하고 있어요. 진정으로 사랑해요. 그렇지만 당신하고 결혼을 할 수는 없어요"
"무엇 때문에? 다른 남자와 약혼이라도..."
"아녜요"
테스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제게는 그런 자격이 없어요. 당신하곤 신분도 다르고 또 저는..."
테스는 그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될 중대한 얘기가 있다. 그러나 그 말의 내용은 무거운 화석처럼 움직일 줄을 몰랐다. 깊은 밤에 일어난 그 숲의 사건 자기는 이미 처녀가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지만 그 사실을 말하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었다. 사랑하지만 절대로 결혼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토록 에인젤이 자신을 사랑한다면 몸과 마음을 다해 오직 에인젤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자신을 용서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에인젤은 또 다시 테스를 포옹하며
"그럼 내 말을 듣고서 대답해 줘요. 난 세계에서 누구보다도 당신의 훌륭한 성품을 이해하고 당신을 사랑하고 있소. 당신도 날 사랑해 주겠지?"
테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을 승낙하겠소?"
에인젤의 말을 들으면서 테스는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했다. '아아, 나는 이 진실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 나는 이 사람과 헤어질 수는 없다.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테스, 분명히 대답해 주오"
"만일 내가 당신의 아내로서 당신을 행복하게 할 수만 있다면-그리고 나 없이는 살 수 없을 만큼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신다면"
"테스! 결국 승낙해 주었구려"
테스는 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에인젤의 손등에 뜨거운 키스를 했다. 테스와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집에 돌아간 에인젤은 저녁에 가족 예배를 마친 후에 아버지께 말을 했다. 학벌이 없고 집안도 가난하지만 순결하고 정숙하며 독실한 종교 신자이고 농장 생활에 있어서는 월등한 아가씨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규수는 네가 결혼할 만한 훌륭한 가문이니? 정말 정숙한 숙녀이구?"
어머니가 불쑥 말을 했다
"그 규수는 농부의 딸이지만 보통 숙녀 정도가 아니에요. 감정이나 성품이나 몸가짐이나... 가문만 좋으면 뭘 합니까. 장래 제가 하는 일에 협조자가 되어야죠"
"마시는 정말 가문 좋고 예쁘고 교양 있고 남 주기는 아깝지"
어머니는 안경 너머로 아들을 쳐다보았다.
"외면상으로 좋은 것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테스의 생활과 행동은 시 그것입니다"
얼마 후 테스는 어머니에게 이 목장에서 신분이 좋고 교육을 받은 에인젤과 결혼하게 됐다는 편지를 냈다. 어머니로부터는 곧 테스의 결혼을 기뻐하는 회답이 왔다.
'사랑하는 테스, 네가 훌륭한 사람과 결혼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그러나 너는 전에 있었던 그 일을 결코 남편될 사람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 말을 하고 나면 불행이 오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네가 나빴던 것이 아니라 구차한 사람들에게는 흔히 있는 일이란다. 네가 50번을 물어도 나는 똑같은 대답을 하겠다. 너는 마음 속에 있는 일을 털어놓고 무슨 일이건 말해 버리는 정직한 성품이기 때문에 나는 걱정이다. 너의 행복을 비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니 내 말을 꿈에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네 결혼에 대해서는 아직 아버지에게도 말하지 않고 있다. 네 아버지는 술김에 주책없이 네 결혼을 사방에 퍼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불쌍한 줏대없는 인간이 되고 말았단다. 사랑하는 테스야, 생기에 넘치는 마음으로 결혼해 다오. 결혼 선물로는 사이다를 한 독 보내겠다. 에인젤에게 안부를 전하도록'
에인젤에게 아직 말을 하지 못한 괴로운 비밀을 어머니는 이렇듯 간단히 처리하고 있는 것이 야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의 표리를 잘 알고 있는 어머니 생각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 만일 에인젤과의 애정이 무너지게 된다면 테스는 이 세상을 살아나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도 지나고 12월 31일에 두 사람은 결혼했다. 결혼식은 테스가 즐겨다니는 교회에서 거행되었다. 그리고 신랑 신부는 목장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신혼 여행을 떠났다. 젖 짜는 아가씨들은 부러운 마음으로 신혼 부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부가 된 테스도 명랑한 웃음으로 사람들의 축복에 대답했다. 에인젤이 선사한 아름다운 신부 옷을 입고 있었다. 두 사람은 웰브리지라는 시골에 가서 조용히 며칠을 보내기로 했다. 그곳은 몰락하기 전의 더버빌 저택이었는데 에인젤은 테스의 혈통을 다른 사람들에게 내세울 수 있는 징표로 생각하고 있었다. 에인젤이 기존의 사상과 관습에 대해 비판적이고 진보적이라 해도 그 역시 인습을 어느 사이엔가 인정하고 있었다. 결국 생활로 돌아갈 때에는 인습이 우선인 것이었다. 신혼 초야의 잠자리에 들어갈 시간이 되었을 때 테스는 난로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기만 하면서 일어나지 않았다. 무언가 시시각각으로 테스의 양심에 육박해 오는 것이 있었다. 티끌 하나 없는 순결한 마음으로 자기를 사랑해 주는 남편을 바라보자 테스는 더 이상 자신을 숨길 수 없다는 생각이 가슴을 찔렀다. 마음은 점점 더 긴장해졌다. 모든 일을 말해 버리려고 에인젤을 바라보았을 때 에인젤은 고민이라도 하고 있는 사람처럼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테스, 내 말 좀 들어 줘 난 당신한테 고백할 일이 있어"
테스는 기겁을 할 지경이었다.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어쩌면 에인젤도 나와 같은 일이 있었는지도...
"여보, 당신의 천사와도 같은 순결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자신의 더러운 과거를 숨길 수가 없소"
에인젤은 이어 대학 시절에 방탕하고 창녀와 함께 몇 밤이나 지냈던 일을 고백했다.
"테스, 이 더러운 내 과거를 용서해 주겠어?"
에인젤은 부들부들 떨면서 테스의 고운 손을 꼭 쥐었다. 마치 낭떠러지에 떨어지기라도 할 것 같은 불안한 생각에 싸였던 테스는 남편의 말을 이어 자신의 일을 털어 놓기 시작했다.
"당신은 깨끗이 과거를 먼저 얘기해 주셨어요. 내게는 그보다 더 무서운 과거가..."
"쓸데없이 무슨 말을... 그보다 더 무서운 일이라니 당신에게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지"
에인젤은 자기의 가슴에 뭉쳐 있던 고백을 마치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러나 테스는 더욱 괴롭기만 했다. 칼을 들고 가슴을 에이는 듯한 생각으로 분명히 말했다.
"이대로 나를 기만할 수 없어요. 내 얘기를 다 들어 줘요"
테스는 창백한 얼굴에 단호한 결심의 빛을 띄우며 그 검은 숲 속에서 알렉 더버빌에게 당했던 무서운 일과 어린애까지 낳았다가 죽고 만 얘기를 다 털어 놓았다. 아내의 고백을 듣고 난 에인젤은 파랗게 질렸다. 조금 전까지 두 사람 앞에서 벌겋게 타오르던 난로 불마저 꺼져 가고 있었다.
"테스, 믿을 수 없는 일이야. 그게 정말이오?"
"정말이에요. 이 일 때문에 얼마나 나는 괴로워했는지 몰라요. 그리고 막상 말을 하려니 당신이 나를 버릴 것 같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을 뿐이에요"
에인젤은 머리를 움켜 쥐고 미칠 듯이 쥐어 뜯으며 소리쳤다.
"무서워, 정말 무서운 일이야. 여보 제발 거짓말이라고 말해 주오. 당신한테 그런 끔직한 일이 있다니. 테스, 부디 거짓말로 그래 본 거라고 말해 주오"
테스는 오히려 담담히 대답했다
"모두가 사실이에요. 지금에 와서 당신을 추호라도 속이고 싶지 않아요. 이제는 주님 앞에 나간다 하더라도 조금도 두려울 게 없어요. 여보 에인젤 나를 사랑하고 있다면, 내 이 과거를 용서해 줘요"
"아아, 무서워. 용서고 뭐고 그럴 수가 없어. 당신이 이렇게 고운 당신이 딴 남자한테 몸을 맡기고 아이까지 낳다니. 아아 무서운 일이야. 내 꿈은 깨졌어. 저주받은 결혼..."
테스는 엎드려서 흐느껴 울었다. 그러나 다시 얼굴을 들어 한사코 호소했다
"여보 에인젤, 용서해 줘요. 난 당신 이외의 사람을 한 번도 사랑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런 일이 있을 땐 난 아직 어린애였어요. 남자에 대한 두려움을 전혀 모르는 어린애였어요"
"당신이 죄를 지은 건 아냐. 피해를 당했을 뿐이지.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동기야 어쨌든, 난 괴로워. 이런 일을 알고 나서 당신과 같이 있을 순 없어. 당신에 대한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난 더욱 괴로워 당신과 같이 있지 못해"
이처럼 엄격해 남편의 마음이 아주 풀리리라는 희망은 전혀 없어 보였으므로 테스는 이미 이혼을 각오했다. 그들 사이에 금이 간 지 사흘째 되는 날 테스가 먼저 제안을 했다.
"난 불평은 안하겠어. 어쨌든 내일이라도 곧 친정으로 돌아가겠어요"
"이런 말을 하고 싶진 않았지만, 역시 헤어지는 게 상책일 것 같소. 적어도 얼마간은, 지금까지의 사유를 좀더 뚜렷이 알게 되고 내가 당신한테 편지라도 할 수 있을 때까지. 하지만 당신은 법률상으로 나의 아내요"
에인젤은 테스를 깊이 사랑하고 있어 그의 속마음은 그녀를 애타게 갈구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차갑고 냉정해진 에인젤은 에인젤 자신이라기보다 지금까지 인습의 안에서 성장했던 가짜 에인젤인 것이다. 그는 그가 얼마나 테스를 사랑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 날로 두 사람은 각각 짐을 꾸렸다. 이튿날 아침 그들은 마차에 몸을 싣고 우선 낙농장으로 돌아갔다. 농장주 클리크 씨 부처와 만나서 일처리를 마친 다음 그들은 다시 마차를 몰아 나즐베리에 이르러 헤어지게 됐다.
"난 참을 수 없는 것도 되도록이면 참도록 노력하겠소. 내가 자리를 잡으면 곧 당신한테 그 주소를 전하지. 그리고 그 일을 참을 수 있는 심경에 이르면 그 땐 당신 곁으로 돌아가려오. 하지만 내가 당신을 찾아가기 전에 당신이 날 찾아오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이 준엄한 선고를 테스는 순순히 받아들인 채 고향으로 향하는 다른 마차를 탔다. 마차가 언덕을 기어오르고 차츰 멀어져 가는 것을 보며 에인젤 클레어는 다음과 같은 시의 한 귀절을 읊조렸다
'주님은 천국에 계시지 않고
세상은 온통 잘못 투성이'
테스가 언덕 마루를 넘어간 뒤에야 에인젤은 자기 갈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디를 가도 마음의 고통을 풀 도리가 없었다. 그는 십자가와 같은 번뇌를 등에 지고 마침내 고국을 떠나 멀리 브라질로 가버렸다. 고국이라도 아득히 떠나 있으면 마음의 고통이 풀릴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블랙모어 분지로 마차가 접어들자 어릴 적 눈익은 풍경이 사방에 전개되어 테스는 혼미한 상태에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맨 먼저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어떻게 부모님의 얼굴을 대할까 하는 걱정이었다. 손에 든 보따리는 가벼워도 마음 속에는 무거운 짐을 진 테스는 지금 온 세상에 갈 곳이란 여기 만한 데도 없다는 듯 친정집 문간을 찾아들고 있었다. 시집 간 딸이 소식도 없이 찾아 올 줄이야 꿈에도 몰랐던 어머니는 테스를 보자 깜짝 놀라 말을 했다.
"아니, 테스 아니냐. 그래 네 신랑은 어디 있니?"
어머니는 놀라움과 불안이 섞인 얼굴로 바라보았다. 테스는 흐느껴 울면서 대강을 얘기했다.
"그렇게까지 주의를 했는데도 넌 정말 어처구니 없는 바보지 뭐냐"
더버빌 부인은 흥분을 이기지 못해 테스에게도 자기 몸에도 물을 마구 뿌리면서 고함쳤다. 주정뱅이 아버지가 동네를 돌아다니며 소문을 퍼뜨려 부러워하던 테스의 결혼이 도리어 동네 사람들의 농담거리가 되고 말았다. 테스는 괴로웠다. 그러나 그 때는 그 사람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진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기가 한 일은 잘못이 아니라고 지금도 테스는 생각하고 있었으나 진심으로 사랑하던 그 사람은 그 때문에 자기를 떠나 멀리 브라질까지 가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테스의 앞길은 암담했다. 게다가 집은 가난하고 아버지는 여전히 술에 찌들어 있었다. 어머니는 내내 바보라고 꾸짖기만 했다. 테스는 눈물을 감추고 되도록 열심히 일을 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집안 식구들에게 에인젤이 다시 자기를 찾는다고 말하고 일자리를 얻어 집을 떠났다. 테스는 맡은 일이 거의 끝날 무렵에 동생 리자루의 기별이 와서 급히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어머니가 죽게 되고 아버지 역시 중병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회복되었으나 아버지는 결국 세상을 떠났다.
한편 알렉은 그 동안 개심을 하고 캠프나 기타 종교 회합에서 설교를 하며 시골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러한 회합에서 그는 우연히 테스를 보았다. 그리고 또 뒤를 따라다녔다. 테스에 대한 연정이 되살아난 것이다. 세상을 모르는 순진한 처녀의 징조를 유린하고 그로 인해서 평생을 파멸시키고 있는 알렉의 손길이 다시 테스에게 뻗쳐 왔다. 그는 종교 순회를 집어치우고 플린트콤애쉬로 테스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알렉은 자기가 테스의 진짜 남편이며 에인젤 클레어는 결코 테스에게로 돌아오지 않는다면서 결혼을 요구했다. 테스는 에인젤에게 호소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남편으로부터는 회답이 오지 않고 알렉의 구혼은 점점 더 집요해졌다. 게다가 가난에 시달린 더버빌 가에 대한 알렉의 친절과 클레어의 이해할 수 없는 무소식이 겹쳐 차츰 테스를 궁지에 빠뜨렸다. 테스의 어머니는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알렉의 집안은 너도 알다시피 이 근처에서 제일 가는 부자다. 사실 또 네게 처음으로 남자란 걸 알게 해 준 인연도 있지 않니 그러니 이런 얘기가 나온 건 아주 다행한 일이다"
테스는 이 말을 들은 체 만 체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한 걸음 더 파고 들며 얘기했다.
"생각해 보렴. 네가 그만큼 솔직하게 과거를 말했는데 그렇다고 널 버리고 타국에 간 남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매정한 사람이지 뭐냐. 그런 박정한 남자한테 의리를 지키다니 넌 도대체 어떻게 할 작정이니?"
"그이는 반드시 돌아올 거에요"
"참 딱하기도 하지. 글쎄 돌아올 리가 있겠니. 첫날 밤에 신부를 안아보지도 않은 남자가 어떻게 돌아온단 말이냐. 거기 비하면 알렉은 참 훌륭한 사람이다. 그 사람은 네게 대한 책임을 느끼고 청혼하는 게 아닌가 말이다. 알렉과 결혼을 하면 우리는 이 집에서 쫓겨나지도 않고 동생을 학교에 보내게 되며 남부럽지 않게 살게 아니냐. 내말만 들으면 틀림이 없다"
테스는 무척 괴로웠다. 브라질에 있는 에인젤에게 또 편지를 썼다.
'그리운 남편에게 당신을 이렇게 부르게 해 주세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란 이세상에 정녕 당신밖에 아무도 없습니다. 에인젤! 저는 지금 무서운 유혹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 상대가 누구라는 것도 너무도 지겨워 차마 말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다시 한 번 지난 날의 목장 시절과 같이 저를 사랑해 주실 수 있다면 곧 돌아와 주세요. 그렇게 안 되면 저를 당신 곁으로 데려가 주세요. 저를 당신의 아내로 하실 수 없다면 하녀라도 좋습니다. 당신이 오든지 아니면 제가 당신 곁으로 가지 않으면 저는 죽을 도리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진정 당신을 위해서는 깨끗이 죽을 것이며 또 어떠한 고통이 있어도 살겠어요. 입 밖에 내고 싶지도 않은 알렉과 결혼을 강요당하고 있고 어머니도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와 결혼을 한다면 우리 집은 가난으로부터 구원된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당신을 무정하고 모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결코 당신은 저에게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그런 일은 믿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저를 구하러 돌아와 주세요. 곧 돌아오실 형편이 못된다면 얼마 후에 돌아온다는 편지를 보내 주세요 저는 아무래도 올가미에 걸려서 영원한 함정 속에 빠지고 말 것 같습니다. 빨리 저를 만나 주세요. 당신의 테스는 주님께 맹세하고 기다리겠습니다. 당신께만 순정을 바치는 애타는 테스 올림'
이러한 편지를 발송한 테스는 에인젤의 회답을 받은 뒤에 자기 태도를 결정하겠다고 어머니께 약속했다. 테스는 편지가 가고 올 날짜를 계산하며 남편의 답장을 고대했다. 그러나 답장이 올 날짜가 훨씬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알렉도 어머니도 그것 보라는 듯이 테스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알렉은 때로는 에인젤이 영국에 절대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친구에게 써 보내온 편지를 보고 왔노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테스는 이제부터 석 달만 더 기다려 보아 회답이 없을 경우에 결혼하겠다고 말하며 승낙하지 않았다. 어느덧 3개월도 흘러갔건만 에인젤로부터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 매일 문간에 사람 발자국 소리만 들려도 소식이 온 것이 아닌가 그이가 돌아온 것이나 아닌가 하고 가슴을 죄며 기다리던 보람도 없이 공허한 날만 지나갔다. 테스는 절망과 자포 자기에 빠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빈곤한 살림이 테스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더욱 꾸짖기만 했다. 테스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알렉의 청혼을 수락하여 자신의 운명에 굴복하고 말았다. 에인젤에게는 마지막 원망의 편지를 써서 보냈다. 테스의 애통함을 보다 못하여 옛 목장 시절의 두 처녀는 에인젤에게 편지를 보냈다.
'선생님 부인이 선생님을 사랑하는 만큼 선생님도 부인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부디 부인을 돌보아 주세요. 그 이유는 부인은 지금 친구의 탈을 쓴 원수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정말 멀리 쫓아 버려야 할 사람이 도리어 부인 곁을 추근추근 따라다니고 있어요. 여자에게 자기 힘만으로 이겨낼 수 없는 시련을 주어서는 안 될 거에요. 물방울도 끊임없이 떨어지면 돌이라도 아니 그 이상의 다이아몬드라도 뚫어 없애고야 말 거에요. 테스의 행복을 비는 두 친구로부터'
테스는 알렉으로부터 선사받은 아름다운 옷을 입고 맥없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알렉은 테스를 데리고 샌드번으로 가 신혼 가정을 이루었다. 에인젤 클레어는 브라질에서 사업에 실패하고 더구나 처음부터 몹시 건강을 해쳤기 때문에 영국으로 돌아올 결심을 했다. 귀국 길에 그는 어떤 영국 사람을 만나 그에게 자기 결혼에 대한 얘기를 고백했다. 그 사람은 클레어에게 부인과 화해하라고 권고했다. 클레어도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고국으로 돌아오자 그는 테스를 찾기 시작했다. 에인젤은 테스가 샌드번에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기차를 타고 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테스의 주소를 물었다. 알렉과 테스가 결혼한 지 며칠이 안되는 어느 날 이른 아침이었다. 어떤 남자가 알렉 더버빌 부인을 만나러 왔다는 집 주인의 전갈을 듣고 테스가 아무런 생각없이 현관에 나갔을 때 안색이 나쁜 한 남자를 보았다.
"테스!"
"에인젤..."
에인젤은 두 팔을 내밀었으나 팔은 다시 양 옆으로 힘없이 내려갔다. 테스가 문 밖으로 나오지 않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한낱 황색 해골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한 에인젤은 두 사람 사이에 뚜렷한 대조를 느끼고 자기의 외양이 테스에게 불쾌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겁하게 도망간 나를 용서해 주겠소? 테스!"
"이제는 너무도 늦었어요"
테스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왜 당신은 좀더 빨리 돌아와 주시지 않았어요? 그처럼 저를 기다리게 해 놓고"
"테스, 난 거기서 열병으로 누워 지냈고, 당신 편지는 5개월이나 늦게야 내 손에 들어왔던 거요"
"정말 퍽 마르셨어요. 에인젤 지금은 저 알렉의 아내예요. 그인 지금 윗층에 있어요. 이 옷도 그이가 입혀 준 거에요. 에인젤 제발 곧 돌아가 주세요. 그리고 다시는 오시지 말아 주세요"
"물론 내가 나빴어. 테스 용서하오. 내 딴에는 편지를 받아보자 곧 병석에서 일어나 돌아오느라고 왔는데도, 결국 이미 늦었구려"
에인젤의 눈에도 눈물이 글썽거렸다. 에인젤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무거운 다리를 끌며 알렉의 동네에서 빠져 나왔다. 간밤에 묵은 여관에 들렀다가 곧 정거장으로 걸어갔다. 마치 테스가 신혼 여행 때의 여관에서 고향으로 돌아갈 때와 같은 고민이 에인젤을 사로잡았다. 그는 차 시간을 기다리고 앉아 있을 수 있는 심정이 아니어서 다음 정거장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신작로는 얼마 안 가서 내리막길이 되고 움푹한 골짜기가 뻗어 있었다. 이 골짜기를 가로질러서 서쪽의 오르막길을 가다가 숨을 돌리려고 발을 멈춰 무심히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러자 지금까지 걸어온 길 저쪽에 자기를 향해서 달려오는 사람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는 테스일까 싶어 기다려 보았다. 창백한 얼굴을 하고 헐떡거리며 뛰어온 사람은 분명히 테스였다. 테스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당신이 정거장에서 나와 이리로 오는 걸 봤어요"
에인젤은 여자의 손을 쥐어 겨드랑이 밑에 끼고 전나무 아래 작은 길로 접어들었다.
"에인젤! 왜 제가 당신 뒤를 쫓아왔는지 아시겠어요? 전 그 사람을 죽이고 왔어요. 전 기어이 해치우고 말았어요. 제가 당신을 생각하고 울고 있을 때에 그는 당신을 마구 욕하지 않겠어요. 전 벌써부터 언젠가는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했어요. 그 사람이 나타나서 우리들을 망쳐 놓은 거에요. 전 그 사람에게 짓밟히며 거짓 속에서 일생을 보낼 순 없어요. 에인젤 제가 당신에게 저지른 죄를 용서해 주시겠어요? 절 사랑한다고 한 마디만 말해 주세요. 네 어서 절 사랑한다고 말해 줘요"
에인젤 클레어는 파르스름한 입술로 테스에게 키스하고 여자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난 절대로 당신 곁을 떠나지 않을 테야. 과거에 당신이 무슨 짓을 했든 말이야"
두 사람은 아래로 한없이 걸어갔다. 그리하여 산 속에 있는 어느 나무꾼의 빈 움막에 들어가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안주할 곳을 발견한 듯 흐뭇한 마음으로 포옹했다. 그들은 이 집에서 이틀을 묵었다. 생애를 건 지극한 사랑을 다만 이 자리와 이 한 순간에 기울여 테스는 에인젤에게 매달렸다. 에인젤도 테스를 사랑했다. 그들은 낮에는 숲 속에서 쉬다가, 밤이면 어둠을 타고 도망을 쳤다. 북쪽으로 가서 항구로 빠져나가 도망하려는 것이 에인젤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비장한 사랑도 오래 계속될 수는 없었다.
"여보, 제가 죽더라도 제 동생 리자루를 돌봐 주세요. 만약 그 애가 당신 것이 된다면 제가 죽은 후에도 우리 사이가 멀어지지도 않을 거에요. 여보 에인젤, 우리는 저승에 가서도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테스가 눈물을 머금고 이런 말을 한 것은 산에 들어온 지 열흘째 되던 날이었다. 다음 날 아침 수색대는 이들을 포위했다. 먼저 눈을 뜬 에인젤은 그들에게 낮은 소리를 냈다.
"테스가 잠이 깰 때까지 좀 참아 주십시오"
그들은 말없이 석상처럼 서서 테스의 잠자는 얼굴로 지키고 있었다. 이윽고 눈을 뜬 테스는 에인젤에게
"이 행복이 언제까지 갈 리 없어요. 지금까지도 저에겐 과분했어요. 저는 마음껏 행복을 누린 셈이에요. 이젠 더 살면서 당신에게 멸시 당한 일도 없게 되었어요" 하고 일어서서 수색대원 앞으로 나가며 "포승줄로 묶으세요"라고 조용히 말했다.
일찌기 웨섹스의 수도였던 아름다운 옛 도시 윈톤세스터 시에는 붉은 벽돌집 한 채가 우뚝 솟아 있었다. 그것은 테스가 갇혀 있는 감옥이었다. 이 건물에는 팔각형의 높은 탑이 솟아 있고 그 탑 꼭대기에는 길다란 깃대가 서 있었다. 극도로 쇠약한 에인젤 클레어와 키가 후리후리하고 한창 피어나는 그의 처제 리자루는 언덕 위에 서서 이 탑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계가 여덟 시를 친 지 몇 분 후에 검정 깃발이 느릿느릿 올라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그것이 7월의 아침 바람에 펄럭거렸다. 검은 깃발은 사형을 집행했다는 표시였다. 드디어 심판은 끝났다. 여러 신들의 말을 빌리면 거느리는 자는 마침내 테스에 대한 희롱을 끝마친 것이다. 그러나 더버빌 가의 옛 조상인 기사들이며 귀부인들은 무심히 무덤 속에서 잠들고 있었다. 말없이 바라보고 섰던 에인젤과 리자루는 마치 기도를 올리듯 땅 위에 쓰러져 한참 동안 꼼짝도 않고 있었다. 검정 깃발은 말없이 바람결에 나부끼고만 있었다. 이윽고 마음을 가다듬은 두 사람은 일어서더니 다시 손을 잡고 그 자리를 떠났다
|
|
첫쪽 → 배경화면
|
|
|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