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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1호 - 2024.10.10. 목요일(음력 : 9.08.)
angelo@nownforever.co.kr / 風文 윤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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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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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을 정당화하다 보면 잘못이 갑절로 늘어난다. - 프랑스 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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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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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받침 발음, 어떻게 할 것인가
겹받침의 발음은 발음 전문가인 아나운서들도 어려워할 만큼 쉽지 않지만 발음의 원리를 이해하면 실수 없이 발음할 수 있다.
‘하늘이 맑다’에서 ‘맑다’는 [막따]로 발음하는데, ‘하늘이 맑게 갰다’에서 ‘맑게’는 [말께]로 발음한다. ‘맑다’를 [막따]로 발음하는 이유는 표준발음법 제11항의 “겹받침 ‘ㄺ, ㄻ, ㄿ’은 각각 [ㄱ, ㅁ, ㅂ]으로 발음한다.”는 규정에 따른 것이고, ‘맑게’를 [말께]로 발음하는 이유는 ‘ㄺ’은 ‘ㄱ’ 앞에서 [ㄹ]로 발음한다는 규정 때문이다.
이처럼 “겹받침 ‘ㄺ, ㄻ, ㄿ’은 뒤 자음을 대표음으로 발음해 ‘닭’은 [닥]으로 발음하고, ‘삶’은 [삼ː]으로 발음하며, ‘읊다’는 [읍따]로 발음한다.
그런데 겹받침 중에는 앞 자음을 대표음으로 발음하는 경우도 많은데, ‘넓다’를 [넙따]가 아닌 [널따]로 발음하는 경우 등이다. 이처럼 겹받침 ‘ㄳ’, ‘ㄵ’, ‘ㄼ, ㄽ, ㄾ’, ‘ㅄ’은 앞 자음을 대표음으로 발음해 ‘넋’은 [넉]으로, ‘앉다’는 [안따]로, ‘여덟’는 [여덜]로 ‘외곬’은 [외골]로, ‘핥다’는 [할따]로, ‘없다’는 [업ː다]로 발음한다.
다만 ‘밟다’는 ‘ㄼ’ 받침이지만 예외적으로 뒤 자음을 대표음으로 발음해 [밥ː따]로 발음하고, ‘넓둥글다’도 ‘넓다’와 ‘둥글다’의 합성어 형태이기 때문에 대표음 [ㅂ]으로 발음해 [넙뚱글다]로 발음한다.
끝으로 겹받침 뒤에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나 어미 등이 오게 되면 겹받침의 앞 자음은 남겨 두고 뒤 자음을 뒤 음절의 첫소리로 옮겨 발음하는데, ‘닭이’를 [달기]로, ‘여덟을’을 [여덜블]로, ‘젊어’를 [절머]로 발음한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자장면과 짜장면
한동안 ‘짜장면’은 ‘자장면’으로만 적어야 했다. “파열음 표기에는 된소리를 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외래어표기법 제1장 제4항)라는 규정을 따랐기 때문이다.
흔히 /께임, 뻐쓰, 쎈터, 쨈/으로 발음하지만 ‘게임, 버스, 센터, 잼’으로 적는다. /짜장면/을 ‘자장면’으로 적는 것이 특별한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보통의 외국어는 ‘울림소리-안울림소리’의 대립을 이루는데, 한국어는 ‘예사소리-거센소리-된소리’의 대립을 이룬다. 이런 불일치 때문에 울림소리를 예사소리 또는 된소리로 발음한다든지(boat-/보트/~/뽀트/), 안울림소리를 거센소리 또는 된소리로 발음한다든지(Paris-/파리/~/빠리/) 하는 혼란이 생기는 것이다. 이런 혼란을 줄이려고 외래어를 한글로 표기할 때 울림소리는 예사소리로, 안울림소리는 거센소리에 대응시키고 된소리는 쓰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운 것이다. 이에 따라 ‘뻐쓰’와 마찬가지로 ‘짜장면’도 틀린 표기가 되었던 것이다.
‘짜장면’은 2011년에 열린 국어심의회에서 “이미 굳어진 외래어는 관용으로 존중하되, 그 범위와 용례는 따로 정한다”(외래어 표기법 제1장 제5항)라는 규정을 이 말에 적용하기로 하면서 바른 표기가 되었다. 관용 표기의 대표적인 예로는 ‘껌(gum)’, ‘카메라(camera)’ 등이 있는데, 이렇게 범위와 용례를 따로 정하는 까닭은 관용 표기가 많아지면 표기법 전체의 안정성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2004년에 제정된 타이어와 베트남어에 대한 한글 표기 세칙에서는 예외적으로 된소리 표기를 인정한다. 이에 따라 ‘Phuket’은 ‘푸켓’이 아닌 ‘푸껫’으로, ‘Ho Chi Minh’은 ‘호치민’이 아닌 ‘호찌민’으로 적어야 한다.
이대성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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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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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 2 - 천상병
그 길을 다시 가면
봄이 오고
고개를 넘으면
여름빛 쬐인다.
돌아오는 길에는
가을이 낙엽 흩날리게 하고
겨울은 별수 없이
함박눈 쏟아진다.
내가 네게 쓴
사랑의 편지
그 사랑의 글자에는
그러한 뜻이, 큰 강물 되어 도도히 흐른다.
∼∼∼∼∼∼∼∼∼∼∼∼∼∼~~~~~~~~~~~~~~~~~~~~~~~~~~~~~~~~
춘설 - 정지용
문 열자 선뚝 ! 뚝 둣 둣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우수절 들어
바로 초하로 아침,
새삼스레 눈이 덮인 뫼뿌리와
서늘고 옵고 빛난 이마받이 하다.
얼음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름 절로 향기롭워라.
웅승거리고 살어난 양이
아아 꿈 같기에 설어라.
미나리 파릇한 새순 돋고
옴짓 아니기던 고기입이 오믈거리는,
꽃 피기전 철 아닌 눈에
핫옷 벗고 도로 칩고 싶어라.
~~~~~~~~~~~~~~~~~~~~~~~~~~~~~~~~~~~~~~~~~~~~~~~~~
밤 - 김수영
부정한 마음아
밤이 밤의 창을 때리는구나
너는 이런 밤을 무수한 거부 속에 헛되이 보냈구나
또 지금 헛되이 보내고 있구나
하늘아래 비치는 별이 아깝구나
사랑이여
무된 밤에는 무된 사람을 축복하자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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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게 하소서 - 이해인
주여, 나로 하여금
이웃의 말과 행동을
잘 듣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내 하루의 작은 여정에서
내가 만나는 이의 말과 행동을
건성으로 들어 치우거나
귀찮아 하는 표정과 몸짓으로
가로막는 일이 없게 하소서
이웃을 잘 듣는 것이
곧 사랑하는 길임을
내가 성숙하는 길임을 알게 하소서
이기심의 포로가 되어
내가 듣고 싶은 말만 적당히 듣고
돌아서면 이내 잊어버리는 무심함에서
나를 구해주소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못 들은 척 귀막아버리고
그러면서도 '시간이 없으니까'
'잘 몰랐으니까' 하며 핑게를 둘러대는 적당한
편리주의, 얄미운 합리주의를 견책하여 주소서
주여, 나로 하여금 주어진 상황과 사건을
잘 듣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앉아야 할 자리에 앉고
서야 할 자리에 서고
울어야 할 때에 웃고
웃어야 할 때에 웃을 수 있는
민감하게 듣고 순응하는
삶의 지혜를 듣게 하소서
주여, 나로 하여금
자신을 잘 듣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나를 잘 듣는 사람만이
남을 잘 들을 수 있음을
당신을 잘 듣을 수 있음을
거듭 깨우치게 하소서
선한 것을 지향하는 마음의 소리를
잘 듣기 위해
침묵과 고독속에
자신을 조용히 숨길 줄도 알게 하소서
나는 두귀를 가졌지만
형편없는 귀머거리임을 몰랐습니다.
사람과 사물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말만 많이 했음을 용서하소서
들으려는 노력으도 아니하면서
당신과 이웃과 세상에 대해
멋대로 의심하고 불평했음을
지금은 뉘우칩니다.
매일매일의 내 작은 여정에서
내 생애의 큰 여정에서
잘 듣고 잘 말하는 이가 되도록
밝고 큰 귀와 입을 갖고 싶습니다.
언제나 이웃을 위해
마음의 귀가 크게 열려 있는
성인들의 사랑을 본받고 싶습니다.
말소리만 커지는 현대의 소음과
언어의 공해 속에서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겸손히 듣고 또 듣는
들어서 지혜를 깨우치는
삶의 구도자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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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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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의 교실 - 박유석
참새들
새장 속에 갇힌 게
비의 탓이라고
조잘대더니
빗방울에
유리창의 먼지가
말끔히 닦이는 걸 보다가
마음의 얼룰도 닦는다.
토라진 얼굴 펴고
마음을 열어
빗방울의 속삭임에
귀를 준다.
함빡
웃음 핀 교실은
빛의 꽃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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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과 썰물 - 유미희
누군가
최르르촤르르
바다의 한쪽 문을
열고 있어요
아기게가
우르르
갯벌 골목으로 놀러 나와요.
눈군가
쏴아아솨아아
바다의 한쪽 문을
닫고 있어요
아기게가
우르르
갯벌 집으로 자러 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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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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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53가지 지혜 - 루스 실로
제3장. 의를 기른다
39. 협박은 금물이다, 벌을 주든 용서를 하든지 하라
부모의 애매한 태도는 자녀들의 마음의 건강을 해친다
우리 유태인들은 '건강'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깨끗한 코우샤 푸드만을 먹으며, 식사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는 것을 종교적 계율로까지 삼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신체의 건강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마음의 건강이다. 마음의 건강이란, 육체적으로 말하자면 찌뿌드드한 상태에 빠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자녀들로 하여금 항상 우울하거나 부모의 눈치만 살피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 이처럼 자녀들의 솔직하고 그늘지지 않는 마음씨의 소유자로 키우는 최대의 요점은 자녀들을 억누르지 말고 솔직하고 명쾌한 태도로 대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자녀들의 마음을 올바르고 건강하게 만드는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인 것이다. 유태인의 격언에 '자녀들을 협박해서는 안된다. 벌을 주든 용서하든 둘 중에 하나밖에 없다'라는 말이 있다. 이 격언이야말로 자녀들의 마음에 건강을 심어주는 최상의 조언이라 하겠다. 유태인들은 아이들에게 벌을 주려고 결심한 이상 도중에 우물쭈물하지 않는다. 반면 벌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하면 모든 일을 불문에 부치고 용서해 준다.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일곱 명의 충실한 제자가 있다. 그들은 스승인 프로이트에게 주피터의 머리모양을 조각한 고대 로마의 복제품 반지를 선물로 받고, 합심해서 정신분석학계를 지도해 나가기로 다짐했다. 그런데 제자 중 한 사람인 모토 랑크가 프로이트 학파로부터 탈퇴하여 스스로 한 학파를 만들었다. 랑크는 프로이트가 온 정열을 쏟아 정신분석을 훈련시킨, 프로이트에게는 마치 자식과도 같은 소중한 존재였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랑크의 배신에 대해서 '나는 모든 것을 용서했다. 이제는 끝이 났다'고 담담하게 이야기했을 뿐이다. 이 일화는 비록 스승과 제자라는 특수한 관계이긴 하지만, 명쾌한 판단을 내린 훌륭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이와 같은 명쾌한 결단이 사제지간이 아닌 부모자식 간에 일어났다면 자식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자녀들은 벌을 주든지 용서해 주든지, 한 가지를 선택하는 부모의 명쾌한 태도에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고 건전하게 성장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벌을 주는 것인지, 용서해 주는지 분간할 수 없는 흐릿한 태도를 취한다면, 자녀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불안정한 심리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협박은 자녀들의 마음의 건강을 해친다
비근한 예이지만, 자녀가 그릇을 깨뜨렸을 때,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앞으로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니. 가만 두지 않겠어'라고 위협을 했다면 아이는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분명 잔뜩 겁에 질려 불안한 심리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자녀들에게 협박조로 말하는 것은 용서하는 것도 벌을 주는 것도 아니다. 단지 자녀들의 마음속에 불안감만 심어줄 뿐 아무 이득도 없다. 부모의 미지근하고 불확실한 태도나 말의 이면에는 은근히 자녀들에 대한 협박이 포함되어 있는 셈이다. 협박은 부모가 자녀들의 잘못에 대한 명쾌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초조감이 변질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동양 어머니들의 '잔소리'는 자녀들의 행동에 큰 걸림돌이 된다. 물론 나쁜 의도에서 하는 말이 아니겠지만, 언제나 자녀들을 심리적으로 억압하고 있다는 점에서 협박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자녀들을 솔직하고 그늘지지 않는 마음씨의 소유자로 키우는 최대의 요점은 부모들이 자녀들을 억누르지 말고 솔직하고 명쾌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미지근하고 불확실한 태도나 끊임없는 잔소리는 자녀들을 심리적으로 억압하고 있다는 점에서 협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0. 자녀들의 잘못은 매로 다스린다
자녀를 때릴 때는 구두끈으로 때려라
우리 유태인들은 자녀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지혜의 근원인 머리를 제외한 다른 신체 부위에 매질을 하는 것에 대해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외출을 했다가도, 아이들이 남에게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했을 경우에는 즉시 집으로 돌아와서 엉덩이나 뺨을 때리며 꾸짖는다. 내가 아는 성미 급한 친구는, 아이가 잘못을 했을 경우 길거리든 식당이든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때리기도 한다. 유태인들은 부모의 손도 입(말로 꾸짖는 거)이나 눈(침묵으로 꾸짖는 것)처럼 자녀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하나의 '교육적 도구'라고 생각한다. 특히 손은 눈이나 입과는 달리 실제로 육체적 '고통'을 주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스스로의 행동을 반성하게 하는 효과가 크다. 그러므로 유태인들은, 매질은 자녀들의 마음을 순간적으로 고쳐주는 데 절대 필요하며, 동시에 자녀들에게 신체적 고통을 주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구약성서의 잠언 13장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어떤 자녀이건 응석을 마냥 받아주며 방임하는 것은 부모된 자의 책임을 다하지 것이 못 될 뿐 아니라, 자녀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진정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만이 자녀들의 잘못을 매로 다스린다는 뜻이다.
또 이런 말도 있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잠언 22장 15절)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내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잠언 29장 15절)
자녀들을 길들이는 데 있어 매는 꼭 필요한 것이고, 나아가서 그것을 통해 지혜까지도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한 말들이다. 물론 채찍으로 노예를 때리듯이 자녀들을 다루라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다만 상징적인 의미로서, 부모의 손으로 직접 때린다는 것은 미움이 아닌 '사랑의 채찍'임을 강조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일종의 스킨쉽인 것이다. 한편 유태인의 격언 중에 '아이들을 때려야 할 때는 구두끈으로 때리라'는 말이 있다. 즉 매를 때리는 목적은 아이들에게 육체적 고통을 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마음을 바로잡는데 있으므로 아이의 몸에 상처를 입히는 심한 매질은 피하라는 뜻이다.
신념이 없는 부모는 자녀들을 때리지 못한다
요즘은 어느 나라에서건 아이들을 때리는 것은 야만적이라는 인식 때문인지, 자녀들이 잘못을 했더라도 매를 들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인 것 같다. 그렇지만 매질이 자녀들에게 육체적 고통을 주기 위한 도구로 사용될 때에는 예외이겠지만, 잘못을 저지는 자녀들의 마음을 바로잡는 수단일 때는 결코 야만적이라 할 수 없다. 사용하는 시기와 정도를 분별할 줄만 안다면, 오히려 장려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부모가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쳐서 매를 드는 경우가 아니라면, 매를 맞는 자녀들도 부모의 손길에서 진심 어린 애정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한편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매를 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부모에게 신념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 처하는 자기 자신이 옳다고 믿고 있는 가치관이 있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인식시키는 것을 부모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한다면, 이와 같은 매를 포함한 그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자녀를 옳게 가르치려고 노력할 것이다. 지신의 신념에 자신감을 갖지 못한 채 자녀들을 어정쩡하게 다스리는 부모가, 자녀들만큼은 신념 있는 확고한 사람으로서 성장해 줄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한 바람이다. 즉 부모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매질을 혐오하는 풍조는 민주주의적 교육 방식과는 무관하다. 자신감을 상실한 부모만이 그저 자녀들을 먼발치서 지켜볼 따름이다.
이것이 포인트!
자녀의 응석을 받아주며 방임하는 것은 부모된 자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 못 될 뿐 아니라, 자녀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매질을 혐오하는 풍조는 민주주의적 교육과는 무관하다. 자신감을 상실한 부모만이 그저 자녀들을 먼발치서 지켜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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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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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9 - 시오노 나나미
제2부 하드리아누스 황제
(재위 : 서기 117년 8월 9일 ~ 138년 7월 10일)
베누스 신전
공공건축은 선제 트라야누스가 대규모로 시행한 뒤였기 때문에, 이 분야에서 하드리아누스가 남긴 업적은 특기할 만한 게 별로 없다. 다만 고대인들이 남긴 사료는 동시대인에게는 '뉴스'다. '뉴스'는 신기하고 유별나기 때문에 뉴스가 된 것이고, 통상적인 일은 뉴스가 되지 않는다. 기존의 건조물을 수리 ·복구하는 일은 로마인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니까 기록될 확률도 낮아진다 다만 가도나 교량을 수리 ·복구하면, 직접적인 이익을 누리는 이들은 그 일을 해준 사람에 대한 고마움을 유형의 것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문헌자료에 나타나지 않는 이런 종류의 사료를 후세의 우리가 추적할 수 있게 된 것은 비석이나 동판에 새긴 금석문이 발굴된 이후부터다. 거기에 따르면 하드리아누스가 제국 순행에 건축가나 엔지니어들을 데려간 것은 명확한 목적이 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그는 통화에 새겨서 선전할 필요도 없는 통상적인 책무도 어김없이 수행하고 있었다. 유지 ·보수는 조직이 얼마나 건재해 있는지를 가늠하는 척도가 아닐까. 수도 로마의 도심에 서 있는 공공건조물은 하드리아누스 시대에도 이미 200년이 지나 있었고, 아피아 가도는 무려 400년이나 사용되어왔다. 그렇긴 하지만, 사회간접자본 정비가 황제의 3대 책무 가운데 하나로 꼽힌 것이 로마 시대다. 또한 '뉴스'가 되지 않는 일만 하고 있으면, 일반 대중을 무시할 수 없는 최고권력자의 지위를 유지하기 어렵다. 하드리아누스도 그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제1차 순행을 떠나기 전에 베누스(비너스)와 로마에 바치는 신전을 건립하겠다고 발표했다. 포로 로마노 동남쪽 끝, 콜로세움 앞에 세워진 이 신전은 참으로 특이했다. 종래의 건축방식으로는 하나의 신전 안에 베누스 여신과 신격화한 로마를 함께 모시게 된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가 지은 이 신전은 두 신을 따로 모셨을 뿐 아니라, 두 신전이 서로 등을 맞댄 채 반대방향을 향하고 있다. 독창적인 이 신전들의 내부, 특히 베누스 여신을 모신 신전 내부에 늘어서 있는 원주는 모두 진홍빛의 그리스산 대리석이고, 바닥도 옅은 잿빛과 붉은빛 대리석의 모자이크였다고 한다. 로마에 바쳐진 신전의 경우는, 오늘날 등을 맞댄 부분의 내벽 일부밖에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원주와 바닥에 어떤 빛깔의 대리석이 사용되었는지 알 수 없다. 아무튼 웅장한 트라야누스 스타일에 비하면, 하드리아누스는 화려한 것을 좋아한 모양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트라야누스는 다마스쿠스 태생의 건축가 아폴로도로스에게 모든 것을 일임했지만, 하드리아누스는 달랐다. 그는 나름대로 확실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건축가나 기사들에게는 그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작업만 맡기는 타입이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타입이라고나 할까. 건축 전문가에게는 껄끄러운 타입인지도 모른다. 아폴로도로스는 트라야누스의 기질과 요구사항만 이해하면 건축가로서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지만, 하드리아누스의 건축가들은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자칫하면 건축 개념에 얽매이기 쉬운 전문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여러 기능을 한 군데에 모아놓은 포룸 양식을 생각해낼 수 있었고, 하드리아누스는 등을 맞댄 신전이라는 전대미문의 아이디어를 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다만 카이사르의 아이디어는 후임 황제들의 '포룸'에 답습되었지만, 등을 맞댄 신전은 불운하게도 그렇지 못했다. 아름답고 화려했을 게 분명한데, 그 후 아무도 이 양식을 모방하지 않았다. 베누스 여신을 참배한 다음, 밖으로 나와서 다시 반대쪽으로 돌아가 로마 신을 참배하는 방식이 사람들에게는 익숙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실로 독창적인 신전이라는 이유로 수도 로마를 찾는 속주민에게는 반드시 보아야 할 명소가 되었지만, 로마의 주민들은 어느 한쪽 신만 참배하고 또 한쪽은 생략하는 것을 황제의 독창성에 대한 응답으로 삼은 모양이다. 모방할 마음이 나지 않은 것은 속주민도 마찬가지인 듯, 로마 제국 어디에도 이런 양식의 신전은 남아 있지 않다.
이 독창적인 건축물에 대해서 전문가들은 어떤 의견을 갖고 있었을까. 아폴로도로스는 여신이 일어서면 신전 지붕이 뻥 뚫려버릴 거라고 말한 모양이다. 이 말이 하드리아누스의 귀에 들어갔다. 황제는 기분이 상했다 딜레탕트적인 면을 찔린 것이 퍽이나 아팠던 모양이다. 하드리아누스가 즉위한 뒤 가뜩이나 공공건축을 맡을 기회가 줄어들었던 아폴로도로스는 이 일로 더욱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 하드리아누스 자신은 예술가로 자처했을지 모르지만, 예술가라기보다는 예술 애호가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설령 딜레탕트라도 그 아이디어가 당시 최고 수준의 기술과 완벽하게 결합하면 훌륭한 성과를 낳을 수 있다. 그 좋은 예가 판테온이 아닐까.
판테온
후세에 덧붙인 부분이 조금 있는 것을 제외하면, 판테온은 오늘날에도 고대 로마 시대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건축물이다. 원래는 기원전 1세기 말에 아그리파가 세운 신전이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군사적 재능이 부족한 옥타비아누스(황제가 되기 이전의 아우구스투스)를 양자, 즉 후계자로 점찍고, 그 부족한 면을 보충하기 위해 아그리파라는 젊은 병사를 발탁하여 옥타비아누스의 오른팔로 삼았다. 카이사르의 판단은 적중하여, 마르쿠스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가 황제가 되기 전에도 황제가 된 뒤에도 그의 유일무이한 충신이 된다. 게다가 아우구스투스의 외동딸 율리아의 두 번째 남편이 되어 자식을 줄줄이 낳아서,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 후계자까지 안겨준 의리의사나이였다.
아그리파는 공공사업에서도 황제의 유일한 협력자가 되었다. 수도로마에 수많은 공공건물을 지었고, '아그리파 목욕탕'이라고 불린 수도 로마 최초의 공중목욕탕은 하드리아누스 시대에도 훌륭하게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카이사르의 눈에 띈 덕분에 낮은 신분에서 로마 제국의 2인자 지위까지 출세한 아그리파는 모든 신들에게 바치는 '판테온' (만신전)을 건립하는 것으로 감사의 뜻을 표하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이 세운 '목욕탕' 북쪽, 카이사르가 세운 '사이프타 율리아' 서쪽에 '판테온'을 지었다. 기원전 15년 무렵의 일이다. 그러나 판테온은 그 후 몇 번이나 화재로 피해를 입는다. 석조 건축이라 해도 뜻밖에 목재가 많이 사용되었다. 기둥 위에 걸쳐놓은 들보, 목재로 떠받쳐져 있는 천장, 기와로 덮인 지붕도 그 아래 널빤지가 불에 타면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다. 피해가 웬만하면 수리할 수도 있겠지만, 하드리아누스 시대의 판테온은 아예 헐어버리고 새로 짓는 편이 낫겠다고 여겨질 정도로 손상이 심한 상태였다. 따라서 후세의 우리가보는 판테온은 하드리아누스가 토대부터 다시 지은 것이다. 신전 정면에는 'M. Agrippa L.F. Consul leer(tium) Fecit'라고 새겨져, 마르쿠스 아그리파가 세웠다고 명기되어 있지만, 이는 하드리아누스가 초대 건설자를 존중하여 새긴 것이다. 고고학적 조사에서도 아그리파가 세운 판테온은 원형이 아니라 사각형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같은 장소에 하드리아누스가 완전히 다른 양식으로 지은 것이다.
글로 설명하기보다 그림을 보는 편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설명은 생략하겠지만, 목재를 일절 사용하지 않았고, 게다가 대담하고 독창적이라는 점에서 콜로세움과 쌍벽을 이루지 않을까 생각한다. 건축에 관해서는 누구 못지 않게 딜레탕트인 나도 감탄한 것은 건물이 완벽한 원형 구조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원형은 역학적으로 가장 견고한 구조일까. 돔 구조의 둥근 지붕을 떠받치는 시멘트 천장도 위로 올라갈수록 얇게 만들어져 있을 뿐 아니라, 위로 올라갈수록 시멘트에 가벼운 속돌이 더 많이 섞여 있다고 한다. 하중을 줄이기 위한 방책일 것이다. 다신교의 대표적 상징인 이 판테온이 기독교 시대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 구조가 워낙 견고해서 파괴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독교 교회로 전용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상들이 들어서 있던 벽감에는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석상이 대신 놓여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그런 석상들이 다 철거되어, 교회가 아니라 로마 시대의 건축물로 돌아와 있다. 본당 중앙에 서서 지붕 꼭대기에 뚫린 창문으로 로마 시대와 다름없는 푸른 하늘을 쳐다보면서 생각한다 완벽한 원형 구조를 생각해냈을 때 하드리아누스는 그야말로 날아오를 듯한 기분이 아니었을까. 자기야말로 천재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로마 시대에는 그런 생각을 '나는 신이다'라는 말로 표현해도 불경스럽지 않았다. 만약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때야말로 그는 단순한 딜레탕트를 초월하여 진정한 예술가가 되었을 것이다.
빌라 아드리아나
로마 황제는 절대 권력을 부여받고 있었다. 또한 절대적인 재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풍요로운 이집트가, 그곳을 제패할 때의 정치적 이유 때문에(제5권에서 상세히 기술) 황제의 개인 영지가 되었다. 황제는 경제를 활성화할 목적으로 제국 전역에 산재해 있는 농경지의 '지주'가 되었기 때문에, 거기서도 엄청난 수익이 들어왔다. 광산은 모두 국유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거기서 산출되는 금이나 은, 구리와 철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황제의 것이다. 또한 황제가 관할하는 이른바 황제 속주에서는 속주세를 비롯한 각종 세금이 '황제 금고'(피스쿠스)로 들어온다. 다만 금·은·동은 화폐로 주조해야 하고, 황제 속주는 곧 전선이라고 해도 좋기 때문에, '피스쿠스'는 대부분 방위비로 쓰였을 것이다. 내가 늘 생각하는 바지만, 로마 시대에는 변경에 불과했던 오늘날의 잉글랜드에서 거두어들이는 '피스쿠스'만 가지고는 그곳에 주둔해있는 병력-3개 군단 1만 8천 명, 거의 같은 수의 보조병, 하드리아누스 시대에 신설된 '누메루스' (파트타임 병사)-의 운용비조차 충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황제들이 엄청난 부자였던 것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도시국가로 출발한 로마에서 공식 주권자는 황제가 아니라 시민이다. 황제는 시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신분일 뿐이다. 아테네도 마찬가지지만, 로마에서도 유권자인 시민은 자기네 지도자에게 권력은 줄지언정 지도자가 그 권력을 이용하여 사복을 채우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에서 30년 넘게 사실상의 독재를 했지만, 개인 재산은 한푼도 늘리지 않았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정치투쟁에는 물 쓰듯 돈을 썼지만, 사저는 개축조차 하지 않았고, 온천이 풍부한 나폴리 근방에서 휴가를 보낼 때는 그 일대에 있는 친구들의 별장에 신세를 졌다. 최고권력자가 된 뒤에 지은 것은 테베레 강 서쪽에 있는 정원뿐인데, 그것도 유언으로 시민들에게 기증했다. 카이사르가 '체제'라면 '반체제' 쪽에 서 있던 키케로는 그 무렵 로마 최고의 고급 주택가였던 팔라티노에 저택을 소유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카이사르가 신세진 바이아 별장을 비롯하여 무려 여덟 개나 되는 별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
제정 시대에 들어오면, 앞에서 말한 이유로 황제의 수입이 안정되면 서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그런데도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팔라티노 언덕에 관저와 사저를 짓긴 했지만, 최고급은 입지조건뿐이고 건물 자체는 검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또한 로마인의 생활양식에서 777놓을 수 없는 별장도 아내 리비아 소유의 별장을 사용했을 뿐이다. 유일하게 많은 돈을 쓴 것은 카프리 섬의 별장인데, 이 별장을 지은 것도 자기 소유인 이스키아 섬과 나폴리 시 소유의 카프리 섬을 교환했기 때문에 실현되었고, 건물 자체는 호화롭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는 본디 로마에서 손꼽히는 명문 클라우디우스 집안 출신이다. 별장은 자기 것만으로도 충분한 신분이어서, 팔라티노 언덕에 지은 관저 외에는 카프리 별장이 유명할 뿐이다. 이 별장도 풍광이 뛰어난 곳에 지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건물의 규모나 호화로움에서는 원로원 의원의 별장과 별 차이가 없었다. 제3대 황제 칼리굴라는 사저도 관저도 짓지 않았지만, 호화 유람선을 지어 네미 호수에 띄운 낭비도 화근이 되어 즉위한 지 4년도 지나기 전에 암살되었다.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그 자신은 낭비를 하지 않았지만, 황후인 메살리나가 사복을 채우는 데 열심이었다. 이것이 황제의 평가를 떨어뜨린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제5대 황제 네로는 로마 도심에 '황금 궁전' (도무스 아우레아)을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관저와 공관과 사저를 겸하는 건물에 드넓은 인공호수와 자연공원까지 갖춘 이 '황금 궁전'은, 사실은 시민을 위한 녹지대를 도심에 만들려는 대담하고도 환경 친화적인 시도였지만, 여기에다 '도무스' (Domus)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오해를 낳게 되었다. 도무스는 시내의 개인주택을 뜻하고, 빌라'는 교외의 단독주택을 의미했다. 따라서 '황금 궁전'이란 말은 후세의 의역이고, 직역하면 ·찬란하게 빛나는 사저'가 된다. 네로에게 최고 권력을 부여한 로마 시민들도 이런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찬란하게 빛나는 사저·를 지은 황제는 최고 권력을 위탁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단죄한 것이다.
1년 남짓한 내전을 거쳐 제위에 오른 베스파시아누스도, 그 뒤를 이은 티투스도, 콜로세움은 지었지만 관저나 사저는 일절 짓지 않았다. 이것도 이들이 온전하게 치세를 마칠 수 있었던 하나의 요인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 다음 황제는 달랐다. 도미티아누스는 공공건물도 많이 지었지만, 팔라티노 언덕에 호화로운 궁전도 지었다. 관저와 공관과 사저를 경한 이 궁전은 다음 황제들 증축할 필요도 없을 만큼 규모가 컸다. 그밖에도 서늘한 산악지방 알바에는 산장을, 해변 휴양지인 치르체오에는 별궁을 지었다. 이것이 그에 대한 평가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 리가 없다. 도미티아누스도 암살되었고, 네로 황제와 마찬가지로 죽은 뒤에 '기록말살형'에 처해졌으며, 그의 초상은 모두 파괴되었다. 다음 황제인 네르바는 제위에 오른 지 1년여만에 죽었기 때문에 돈을 쓰고 싶어도 쓸 시간이 없었지만, 도미티아누스를 뒤이은 황제인 만큼 사적인 낭비로 보일 우려가 있는 일은 삼갔을 게 분명하다. 네르바의 뒤를 이은 트라야누스도 도미티아누스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신중하게 처신했다는 점에서는 네르바와 마찬가지였다. 트라야누스는 공공건물이라면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이 지었고, 에스파냐 속주 출신인데다 황제가 되기 전에는 계속 전선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수도 로마에는 사저도 없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궁전은 일절 짓지 않고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지은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별궁은 치비타베키아 항구 근처에 하나지었다지만, 소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별궁이라기보다 별장이라고 하는 편이 적절할 만큼 소박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의 뒤를 이은 것이 하드리아누스 황제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는 나름대로 취향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자신의 취향에 맞는 별궁을 갖고 싶었지만, 그것을 지을 땅을 고르는 데에는 신중했다. 시내는 물론 시내와 가까운 교외도 배제하고, 결국 로마에서 동쪽으로 30킬로미터쯤 떨어진 티부르(오늘날의 지볼리)에 별궁을 짓기로 했다. 티볼리는 몇 가지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우선 수도 로마에서 얼마간 떨어져 있기 때문에 남의 이목을 끌 염려가 적지만, 그렇다고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으니까 정무를 보는 데 지장을 주지도 않는다. 둘째, 전원지대여서 땅을 넓게 이용할 수 있다. 셋째, 근처에 아니에네 강이 흐르고 있어서 물을 끌어다 쓰기에 편리하다. 넷째, 수도와 티부르티나 가도로 이어져 있고, 티볼리부터는 할레리아 가도를 통해 아드리아 해로 갈 수 있었다.
황제쯤 되면, 제국 각지를 순행할 때는 물론이고 사저에서 휴양중일때도 공무를 보아야 한다. 카프리 섬의 벼랑 위에 별장을 짓고 틀어박힌 티베리우스도 바다가 거칠어지기 쉬운 겨울철에는 육로를 통해 수도 로마와 연락할 수 있는, 미세노 해군기지 근처의 별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해군기지 근처에 머문 것은 해로를 통해 들어오는 보고나 정보를 쉽게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빌라 아드리아나' (Villa Adriana),즉 '하드리아누스의 별장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진 티볼리 별궁에도 티베리우스의 카프리 별장과 마찬가지로 공무용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완전 포장된 로마식 가도로 수도 로마와 직결되어 있는 것은 공무에서 달아날 수 없는 황제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조건이었다. 빌라'가 언제 착공되었는지는 벽돌에 새겨진 제조공장의 상표로 짐작할 수 있다 연구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가장 오래된 벽돌은 서기123년에 제조되었다고 한다. 로마는 항상 벽돌 수요가 많았으니까, 벽돌공장은 대량 주문을 받아서 제조하자마자 곧장 공사 현장으로 보냈을 게 분명하다. 그래서 착공한 해가 123년이라면, 하드리아누스가 즉위한 지 6년 뒤가 된다. 이 무렵 그는 이미 순행을 떠나 있었고, 123년이면 파르티아 왕과 정상회담을 열기 위해 에스파냐에서 지중해를 횡단하여 시리아까지 항해한 해다. 그렇다면 황제가 되어 귀국한 서기 118년부터 121년까지 3년 남짓 수도에 머무는 동안 이미 별궁을 짓기로 작정하고 부지도 선정하고 기본 설계까지 생각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자기 취향에 맞는 휴식처를 갖는 것은 오래 전부터 그의 꿈이었을 게 분명하다. 공공건물도 건축가에게 일임하지 않았던 하드리아누스가 별궁 설계를 남에게 맡길 리가 없다. 제국 각지를 순행하면서도 무엇을 어떻게 지을까 궁리를 거듭했을 것이다. 덕분에 완공까지는 많은 시일이 걸렸지만, 완공된 건물은 로마 시대의 어느 빌라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작품, 좋게 말하면 독창적이고 엄격하게 평가하면 딜레탕트적인 작품이 되었다. 별궁의 규모는 주변 지역까지 포함하면 그야말로 웅대하다. 여기에 자극을 받은 미국의 대부호 폴 게티가 미국 서해안의 말리부에 지은 저택도 면적이 그 5분의 1에 불과하다고 한다. 세계 최강이고 가장부자 나라인 미국의 대부호도 로마 황제의 5분의 1정도밖에 흉내내지 못했다는 게 재미있다. 하물며 이들 두 사람이 갖고 있던 권력의 크기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두 번째 긴 순행을 떠난 서기 128년, 빌라'는 착공한 지 5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뚜렷한 형태를 이루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별궁이 '하드리아누스적' 특징을 갖는 것은 제2차 순행 때 돌아다닌 지방에서 받은 영향에 크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황제는 순행지에서 티볼리로 계속 아이디어를 보냈을 것이다 하드리아누스는 착상이든 예술품이든 수집하기를 좋아하는 버릇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연구자들은 하드리아누스가 로마 제국 안에서도 자기 취향에 맞는 지방을 티볼리 별궁에 재현하여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낼 생각이었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을 들으면, 취향에 맞는 자신의 세계를 별궁 내부에 만들려고 한 하드리아누스와 취향에 맞든 안 맞든 세계 자체가 자기에게는 집이라고 생각한 카이사르의 차이를 생각하게 된다. 이것도 속주태생 로마인과 토박이 로마인의 차이일까. 아니면 두 사나이의 비르투스 (그릇)의 차이일까. 그러고 보니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는 수집벽이 전혀 없었다는 게 생각난다.
로마인은 'negotium'(일)과 'otium'(여가)을 구분하는 생활방식을 확립한 민족이기도 했다. 일반 시민들도 해가 뜨면 일을 시작하고 해 가 지면 잠자리에 드는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오전에는 일을 하고 오후에는 여가를 즐기는 식으로 일과 여가를 구분했다. 또한 웬만한 시민은 시내의 집 외에, 농축산물을 확보하는 것이 주목적이긴 하지만 시골에도 집을 갖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공인 중의 공인인 황제의 일상은 이렇게까지 명확하게 양분될 수 없다. 그래도 하드리아누스는 티볼리 별궁을 그 건축 과정까지 포함하여 자신의 '여가'로 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그렇게까지 자신의 모든 취향을 투입한 게 아닐까. 하지만 하드리아누스는 '일'을 망각할 황제는 아니었다. 트라야누스를 서술할 때 이미 소개한 일화지만, 다시 한번 상기해볼 가치는 있을 것이다. 한해는 하드리아누스가 제사를 거행하러 신전으로 가는데, 한 여자가 그를 불러 세웠다. 여자는 황제에게 무언가를 청원하려고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드리아누스는 '지금은 시간이 없다"고 대답하고 그냥 지나가려고 했단.. 그러자 여자는 그의 등에 대고 외쳤다. "그러면 당신은 통치할 자격이 없습니다1"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발길을 멈추고 여자의 청원을 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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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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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개인의 재능 - 엘리엇 / 이창배(李昌培) 옮김
영국인은 전통(傳統)이 없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할 때 그 전통이라는 이름을 가끔 쓰기는 하지만 별로 그것에 대해서 말하는 일이 드물다. 우리는 ‘전통’ 또는 ‘하나의 전통’에 의거하여 어떤 것을 논할 수는 없고, 기껏해야 어느 누구의 시가 ‘전통적’이니, 또는 ‘너무 전통적’이니 말할 때 이 말을 형용사로 쓸 정도이다. 아마 이 말은 비난에 쓰이는 어구로밖에 별로 나타나지 않은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전통적’ 이라는 말은 어떤 정평 있는 작품에 대하여, 그것이 고고학적으로 흥미 있게 부활된 것을 막연히 칭찬할 때 쓰인다. 이 고고학이라는 확실성 있는 과학에 대한 충분한 관련이 없이는 영국인의 귀에 이 말을 기분 좋게 들려 주지 못할 것이다.
국가나 민족은 모두 제각기 독특한 창작적 경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비평적 경향을 가진다. 또한 각 민족은 자기들의 창작적 소질의 단점 한계는 생각하는 일이 있지만 비평적 습성의 단점 한계는 오히려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우리 영국인은 프랑스어로 쓰여진 대량의 비평적 저술을 통하여 프랑스인의 비평적 방법이나 습관을 알고 있으며, 또는 안다고 생각한다. 그에 따라 프랑스 인은 영국인보다 더 ‘비평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 사실로써 마치 프랑스 인에게는 영국인보다 자연스런 면이 적은 것처럼 그릇 생각한 나머지 때로는 좀 뽐내기까지 한다. 그러나 비평은 호흡이나 다름없이 불가피한 것이며, 우리가 한 권의 책을 읽고 그에 대한 어떤 감동을 받았을 때 우리의 마음 속에 떠오르는 것을 표현하고, 그와 같은 비평적 활동을 하는 우리 자신의 정신을 비평한들 나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이런 과정에서 밝혀지는 한 가지 사실은, 우리가 어떤 시인을 칭찬할 때, 그가 다른 어떤 사람과도 비슷하지 않은 면을 특히 강조하려는 우리의 경향이다. 그의 작품이 어떤 면이나 기타 부분에서 우리는 개성적인 것, 즉 그 사람의 특질을 발견하고자 한다. 우리는 그 시인이 그 이전 사람들과 다른 점, 특히 바로 직전 사람들과의 차이점에 주의하여 다른 작품과 분리시켜 즐길 만한 것이 있는가를 찾고자 애쓴다. 그러나 실은 우리가 이러한 선입견 없이 한 시인에 접근해 보면, 그의 작품의 가장 잘된 부분뿐만 아니라 가장 개성적인 부분까지도 과거의 시인, 즉 그의 선배들이 가장 힘차게 그들의 불멸의 심혼을 경주한 부분인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내가 말하는 것은 타인의 영향을 받기 쉬운 청년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원숙기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전통, 즉 전해 내려온다는 것의 유일한 형식이 우리의 바로 전 세대의 성과를 맹목적으로 집착하여 그 방식을 그대로 좇는 것이라면 전통은 확실히 저지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도 이러한 단순한 흐름이 모래 속에 파묻히는 것을 많이 보아 왔다. 되풀이보다는 신기(新奇)가 오히려 낫다. 전통이란 더 광범위한 의의를 가진 것이며, 그것은 유산으로서 물려받을 수 없는 것이니, 그것을 얻자면 큰 힘을 들여야 한다. 전통은 첫째 역사 의식을 내포하는데, 이 의식은 이십오 세 이후에도 계속 시인이 되고자 하는 이에게는 거의 필수불가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역사적 의식에는 과거의 과거성에 대한 인식뿐 아리나 그 현재성에 대한 인식도 내포되어 있으며, 이 역사적 의식으로 말미암아 작가가 작품을 쓸 때 자신의 골수에 박혀 있는 자신의 세대를 파악하게 된다. 그래서 호머 이래의 유럽의 문학 전체와 그 일부를 이루는 자국의 문학 전체가 동시적 존재를 가졌고, 또한 동시적 질서를 구성한다는 느낌을 반드시 가지게 된다. 이 역사적 의식은 일시적인 것에 대한 의식인 동시에 항구적인 것에 대한 의식이고, 일시적인 것과 영구적인 것을 함께 인식하는 의식으로서, 문학자로 하여금 전통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한 작가로 하여금 시간의 흐름 속에서 차지하는 자기의 위치와 자신이 속해 있는 시대에 대하여 극히 날카롭게 의식하게 하는 것이다.
시인이건 어느 부문의 예술가이건 혼자서 완전한 의의를 가진 자는 없다. 즉 그 자신에 대한 평가는 그와 과거의 시인들, 예술가들에 대한 관계의 평가이다. 우리는 그를 단독으로 평가할 수 없고, 대조하고 비교하기 위하여 과거의 예술가들 사이에 놓아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다만 역사적 비평의 원리일 뿐 아니라 미학적 비평의 원칙인 것이다. 작가가 순응해야 하고 일치해야 할 필요성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한 새로운 예술 작품이 창작될 때 일어나는 것은 그 이전의 모든 예술 작품에도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현존하는 고전 작품들은 그 작품들 간에 한 이상적인 질서를 형성하고 있으며, 그 고전 위에 새로운 예술 작품이 소개됨으로써 질서는 수정된다. 현존 질서는 신작품이 도래하기 전에는 완전하다. 신기한 것이 계속 일어난 후에도 그 질서가 꾸준히 서 나가기 위해서는 현존 전 질서는 다소라도 변경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전체에 대한 각개의 예술 작품의 관계와 균형과 가치가 재조정되는데, 이것이 낡은 것과 새 것 간의 순응이다. 유럽의 문학이나 영국의 문학 형태에 있어 이 질서의 관념을 시인한 자는 누구나 현재가 과거에 의하여 이끌리는 만큼 과거는 현재에 의하여 변개된다는 것을 불합리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이것을 깨달은 시인은 큰 책임을 느끼게 될 것이다.
특별한 의미에서, 시인은 또한 과거의 표준에 의하여 반드시 비판을 받아야 됨을 알게 된다. 비판을 받는 것이지 가치의 절하를 당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시인만큼 훌륭하다거나 나쁘다거나 이러한 비판을 받는 것이 아니며, 과거의 비평가가 세운 규준에 따라 평가되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것은 신구 양측이 서로, 신은 구에 의하여 구는 신에 의하여 측정되는 평가이고 비교이다. 하나의 새로운 작품이 다만 과거에 순응하는 것만으로는 순응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니 따라서 예술 작품이 아닐 것이다. 또 새 작품이 과거의 규준에 적합하기 때문에 그것이 더 가치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합하다는 사실은 그 가치의 표준이다. 실상 그 표준은 우리가 다만 서서히 조심해서 응용할 수 있는 표준이다. 왜냐 하면, 일치 여부를 틀림없이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란 없기 때문이다. 일견 일치라는 것 같지만 어쩌면 개성적인지도 모르고, 일견 개성적인 것 같으면서도 일치할지도 모른다고 우리는 말한다. 그러나 어느 한쪽이면서 다른 것이 아닌 것이 거의 없는 것이다.
시인의 과거에 대한 관계를 좀더 알기 쉽게 설명해 보자. 시인은 첫째, 과거를 하나의 덩어리로, 즉 구분할 수 없는 한 환약 뭉치로 생각할 수도 없고, 둘째, 전적으로 한두 가지 개인적으로 감탄한 것에 기준하여 자신을 형성할 수도 없고, 셋째, 순전히 자기가 좋아하는 한 시대를 본뜰 수도 없다. 첫째 점은 허용될 수 없지만, 둘째 점은 청년기의 귀중한 경험이며, 셋째는 쾌히 한껏 바랄수 있는 보충책이다. 시인은 중심적인 흐름을 깊이 의식할 필요가 있다. 그 흐름은 결코 특출한 명성 사이로만 변함없이 흐르는 것은 아니다. 예술은 결코 개선되는 것이 아닌데 예술의 소재만은 항상 변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시인은 또한 유럽의 정신이나 자국의 정신은 변천하는 것이며, 이 변천은 하나의 발전이어서, 그 발전 도상에서는 어떤 것이고 버려지는 것이 없고, 셰익스피어나 호머나 구석기 시대 화가의 암벽화까지라도 폐물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아마 세련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확실히 복잡화하는 이 발전은 예술가의 견지에서는 조금도 진보가 아닐 것이고, 심리학자의 처지에서 보더라도 우리가 생각하는 정도의 발전은 아닐 것이고, 다만 경제 상태나 기계의 복잡화에 관점을 두고 본 결과에서만이 진보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와 과거 간의 차이는, 현재를 의식하는 것은 과거를 의식하는 것인데, 그것이 과거가 과거 자체에 대해서 가졌던 의식과는 다른 면에서, 그리고 보다 광범위하게 의식한다는 점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과거의 작가는 우리보다 아는 것이 매우 적었으니까 우리와 거리가 멀다.’라고 했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그 과거의 작가들이다. 이것은 시의 직분에 대한 나의 생각인데, 이에 대하여 항상 항의가 나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 항의란, 즉 이론상 지나칠 정도로 많은 분량의 박학(博學, 또는 현학)이 시에 요구된다는 것인데, 그런 요구쯤은 만신전에 모신 시인들의 전기를 예로 들기만 해도 능히 물리칠 수 있다. 과도한 학문은 시적 감수성을 죽여 버리거나 그르친다고 확언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은 자기에게 필요한 감수력과 느긋한 마음을 침해하지 않을 정도의 지식을 가져야 한다. 한편 지식을 시험용이나 응접실용이나, 또는 바깥 치장을 하거나 선전하기 위해서 어떤 유용한 형체에만 국한하는 것은 재미 없다. 어떤 이는 지식을 자연히 흡수할 수 있는데, 둔한 이는 그것을 위하여 땀을 흘려야 한다. 셰익스피어는 대부분의 기타 사람들이 전 대영 박물관에서 얻을 수 있는 이상의 역사적 정수를 플루타크로부터 습득하였다. 시인은 반드시 과거의 의식을 발전시키거나 획득하여야 하며, 한평생 그 의식을 계속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시인은 그 순간의 자기 자신을 항상 보다 더 가치 있는 것 앞에 굽히는 것이 된다. 한 예술가의 발전이란 끊임없는 자기 희생이요, 개성의 계속적인 몰각이다.
이제 남은 일은 이 개성 몰각화의 과정과 전통 의식에 대한 관계를 밝히는 것이다. 예술이 과학의 상태에 접근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몰개성화의 경우에 있어서이다. 그러므로 나는 독자에게 한 암시적인 유추로서, 한 줄의 가늘게 묶인 백금선이 산소와 이산화유황을 담은 용기에 들어갈 때 일어나는 작용을 고찰해 보도록 권유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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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사회/문화/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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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마카아벨리 평전 - 제19장 역사가 니콜로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는 시골집에 틀어박혀 (피렌체사)를 쓰고 있는 중이다. 그 자신과 그가 갈망하던 생활 사이에 또다시 옛날의 그 숲과 올리브 동산과 사람들과의 절연이 들어서 있다. 날이 밝으면 이전에 베토리에게 적어 보낸 대로 여느 때와 다름없는 그런 생활이 시작된다. 끈끈이로 잡을 개똥지빠귀는 없지만, 그물로 잡을 만한 꾀꼬리는 있다. 또한 숲이 있고 술집이 있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번 나른한 분위기 속으로 빠져든다. 그리고 자신이 모데나에서 귀차르디니와 나누었던 그 유쾌했던 이야기들과, 총독 친구의 그늘에서 며칠 간이나마 맛볼 수 있었던 공사의 기분 좋은 향내를 다시 기억해 낸다. 그러다가 저녁이 오면, 그의 고독은 다시 위대한 영혼들로 둘러싸이고, 그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나 이번에 만나는 사람들은 근대의 피렌체인들이며, 일찍이 그에게 위대했던 업적들을 일러주었고 또 그 자식이 존경하는 마음으로 귀기울였던 고대의 로마인이 아니다. 이제 그는 메디치 추기경에 의해 공화국의 역사가로 명 받았기에, 더 이상 아무 거리낌 없이 스스로의 영감에 따르던 때만큼 자유로움을 느끼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는 원래 역사가이기보다는 정치 저술가이자 역사 철학자였기 때문에, 역사를 쓰는 것보다는 역사로부터 정치과학적 법칙을 추출해 내는 데 더 익숙하다. 비록 그가 역사를 쓴다 해도, 그에게 이는 다만 그것을 정치과학적 법칙으로 환원하는 과정의 일부에 불과한 것이다.
바로 그 시작부터 모호함과 난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라틴어로 쓸 것인지 아니면 이탈리아어로 할 것인지 언어를 택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마도 그가 게약시 그 문제에 관해서는 백지 상태로 모든 것을 일임해 달라고 말했을 때, 이미 답이 심중에 마련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가 쓰는 역사는 결코 낡은 옷으로 몸을 감싼 죽은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되며, 자신이 묘사하는 행동의 주체인 바로 그 사람들의 살아 있는 언어로 된 살아 있는 존재이어야만 했다. 역사가 언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가도 문제였다. 그가 원래 생각했던 시점은 코지모의 복귀와 함께 메디치 가가 피렌체에서 세력을 잡게 된 1434년이었다. 일찍이 레오나르도 아레티노가 쓴 역사는 이 해보다 약간 앞서 끝을 맺었고, 포초의 역사 또한 그 해를 약간 넘긴 때까지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그는 역사 서술의 시점을 이렇게 설정하는 것이 지금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무난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자신에게도 편리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그렇게 하는 편이 시간도 근접하고 자료 조사도 용이할 뿐 아니라, 행복했던 서기장 시절 이후 줄곧 계획해 온 이 일을 위해 그 동안 자신이 정리한 자료들을 이용하기에도 좋으며(나는 여기서 처음으로 이 문제를 해명한 바 있다), 그의 전임자들이 이미 밟았던 길을 다시 가지 않으려는 자신이 생각에도 부합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자신이 아첨한다는 악평을 받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와, 다른 역사가들이 지금까지 도시의 내부사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려 하지 않았던 관례, 그리고 새롭고 차별성을 가져야 할 자신의 저술이 전임자들의 역사를 계승치 못하고 오히려 그것에 기댐으로써 중요성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그는 결국 도시의 기원으로 돌아가서 그로부터 1434년까지의 내부적 사건들을 요약하고는, 이를 서론격인 1권에 담기로 작정하였다. 즉 로마 제국의 화해로부터 그가 원래 생각했던 시간까지를 거의 포괄하는 이탈리아 역사의 윤곽을 그리려는 것이었다. 이로써 그의 서술을 더 넓은 범위에다 더 충실한 내용을 가지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이리하여 그는 드디어 일에 착수한다. 우리는 서문의 첫머리에서 그가 (두명의 훌륭한 역사가) 레오나르도와 포초의 유명한 역사서들을 조소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는 역사 쓰기에 새로운 서술 형식과 통일성과 가치를 부여한다. 그는 휴머니스트 학파의 전통과 양식, 자료의 집적에 불과한 연대기들, 그리고 대중 연대기를 뒤로 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나섬으로써, 근대 역사학의 기초를 마련한다(마키아벨리가 근대 역사학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리돌피의 견해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하는 편이 나을 것도 같다. 바로 아래에서 저자도 인정하는 바와 같이, 그는 사실의 검증을 더 중시하는 현대의 역사가들과는 달리 역사를 관통하는 인간 행위의 규칙성을 찾아내려고 했다는 점에서 역사학보다는 일종의 역사정치학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그 이전의 연대기적 역사 서술과 비교할 때, 그는 분명히 수사적이고 장식적이기보다는 더 실용적인 역사의 길로 가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 있다-옮긴이). (리비우스 논고)에서 그랬듯이, 그는 지금까지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역사가로서보다는 정치가로서, 정치학이라는 목적을 위해 역사를 쓴다. 그는 정반대의 측면에서 귀차르디니의 더 역사다운 역사를 유명하게 만든 성실하고도 세밀한 사실 추구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사실들로부터 교훈과 법칙과 이론을 추출해 내고 싶어하며, 때로는 사실을 이론에 맞추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그래서 더 가치가 있다. 우리는 그의 저술에서 여태까지와는 다른 점을 찾아야만 한다. 피렌체와 이탈리아에는 이미 부지런한 연대기 작가들이 다수 있었고, 나중에라도 칼 5세의 시게보다 훨씬 맞지 않는 사료와 문서 속에서 참을성 있게 진실을 캐내는 진정한 역사가들을 보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 때까지 마키아벨리 같은 인물을 없었고, 또 그 후로도 찾기 힘들 것이다.
그는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이 어딘지를 알고 있었고, 그래서 바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 그는 자신의 소략한 사료를 앞부분의 경우 비온도, 빌라니, 브루니와, 뒷부분에서는 포초, 마르키온네 디 야코포 스테파니, 또는 카발칸티와 대중없이 섞어놓은 채로 결코 그것을 면밀히 비교해 보려 하지 않는다. 이는 그의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데. 그러소는 한번에 한 사람씩을 따르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그는 그의 발자국을 따라가되, 뒤죽박죽으로 샇여 있는 자료들을 끼워맞추고, 다양한 사건들간의 관계를 찾아내고, 갑작스런 예지력으로 길을 밝히고, 힘차고도 눈부신 문체 속에서 모든 사물을 되살려내면서, 그가 손대는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다. 역사 속의 사람들과 사건들이 한 인간이자 정치인으로서의 자신에게 무심하게 보일 때에는, 그의 이야기는 마치 꾸벅꾸벅 졸다가 갑자기 정신을 차리는 식의 두서없는 모양새를 보일 뿐 아니라 문체까지도 그를 인도하는 사료의 수준으로 하락한다. 하지만 어떤 사건이나 영웅이 그의 상상력을 자극하거나 그가 태오도릭 같은 인물의 모습 아래로 자신의 신국주상을 드리울 수 있을 때, 그의 문체와 사상은 작은 날갯짓에도 놀라울 만한 힘으로 솟아오르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역사 서술 방식을 취함으로써 굳이 새로운 사료를 힘들게 구하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 필요한 자료는 알베르가초의 서재안에 다 있었다. 우리는 이미 1485년네 비온도의 역사서가 마키아벨리의 집에 있었던 것을 안다. 브루니와 포초의 라틴어 사서들도 (아차이우올리와 야코포 브라촐리니의 이탈리아어 번역으로) 그 당시 인기리에 여러 판으로 간행되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장서 속에 들어 있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 속에 빌라니의 필사본이 빠져 있긴 했지만, 당시 피렌체에서라면 그 책 한 부 정도 사거나 빌리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테파니와 카발칸티의 필사본 경우에는 그 당시로도 구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을리라. 물론 그가 이 외의 다른 사료들을 거의 이용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전혀 찾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피에로 미네르베티의 (피렌체 연대기) 필사본을 빌려다가 읽고는 책표지 안쪽의 여백 면에다가 자필로 주석까지 달아놓았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재미있는 것은, 재치 있는 책주인이 이 여백 면에다 당시의 유행에 따르되 각각의 경우와 빌린 사람에 맞추어 3행 시절로 된 상용적인 주의문을 붙여놓았다는 점이다.
오 마키아벨리여, 저와 더불어 즐기기되
제발 등불은 가까이 대지 마시고
곧 돌려주시며 아이들에게서도 멀리해 주시기를.
그래서, 책을 구하기 위해, 아울러 여자도 보고 좀더 격조 있는 대화도 나누기 위해 그는 때대로 도시에 들르곤 했다. 그는 잠깐이었지만 자신의 (전술론)이 준티 출판사에서 간행되기 직전인 1521년 8월, 교정을 보기 위해 다녀가기도 하였다. 그는 정오표에서 보이듯이 아주 깔끔하게 교정을 보았던 것 같다. 만일 (만드라골라)의 경우를 일단 제외한다면, 이는 그의 주저들 중에서도 처음 빛을 보아 간행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금방 인쇄된 책 한 장 한 장을 애정 어린 손길과 눈빛으로 어루만지고, 원회의 친구들에게 그것을 보여주는 즐거움을 마다하지 않았으니라.
비록 코지모 루첼라이는 죽었지만, 친구들은 흩어지지 않았고, 마키아벨리는 이들과의 격조 높은 만남 속에서 산 카쉬아노에서의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을 모두 잊어버린 채 스스로 되살아나는 듯한 기분에 젖었다. 그곳에서 (피렌체사)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옛 친구들이 있었다. 그리고 평시민 가문 출신이지만 세련된 몸가짐과 총명한 머리를 가진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바로 도나토 잔노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결코 그리 잘 알려져 있던 인물은 아니었다. 그의 이러저러한 글들 가운데, 우르비노 공 로렡오 데 메디치를 가리는 (월계시집 Lauretum)안에 들어 있는 것으로 (신군주)에게 군사적 덕성을 갖출 것을 촉구하는 라틴어 2행 시적이 눈에 띌 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와 라틴 작가들 연구에 큰 힘을 쏟았고, 그리하여 이 방면에 상당한 명성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당시 피사 대학에서 그리스 어문학 강의를 해오고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그의 겸손함과 아울러 반듯하면서도 사교적인 성품에 매료되어 그를 각별한 마음으로 대하였다. 마치 그 젊은이가 얼마 후 10인위원회 서기국의 옛 직책에 앉아 민병대에 대한 자신의 궁을 계승 발전시키리라는 것, 그리하여 결국은 당대의 정치 저술가들 가운데 자신과 귀차르디니의 뒤를 이어 세 번째로 명예의 자리를 차지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기나 한 것처럼 말이다.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잔노티를 신뢰하고 있었다(물론 그만을 신뢰했던 것은 아니겠지만). 그는 (피렌체사)의 일부가 씌어지는 대로 그에게 읽혔을 정도로 그와는 허물없는 사이였다. 그리고 그들간의 대화는 언제나 역사가 그 일을 맡긴 메디치 가에 관련될 때 부딪히는 서술의 진실성이라는 고민으로 되돌아갔다. 마키아벨리의 요점은 이런 것이었다. (도나토, 난 결코 코지모가 권력을 장악한 그때부터 로렌초 사후까지의 역사를 내가 모든 짐에서 벗어난 상태에서처럼 쓸 수는 없어. 물론 그들의 행위 자체는 무엇이든 배제하지 않고 그대로 쓸 것이네. 다만 사건의 전반적인 원인들을 논하지 않으려 할 뿐이야. 그래서 나는 코지모가 정권을 잡았을 때 일어난 일들을 기술하되, 그가 어떤 방법과 수단을 사용하여 그 높은 곳에 다다르게 되었는지는 말하지 않으려네. 이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은 내가 그의 적을 통해 하는 말을 눈여겨 보아야만 할걸세. 난 내가 직접 말하기보다는 그의 적의 입을 빌려 말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지.)
잔노티가 직접 마키아벨리로부터 여러 번 들었다는 이 말 또는 이와 비슷한 말들은 (피렌체사)의 서술이 아직 문제의 1434년에까지 도달하지 않은 때에 나왔음이 분명하다. 물론 저자가 시험적으로 미리 써보곤 했던 몇몇 단편적인 글들은 이미 그 시기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이를 일단 제외한다면 그러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이 저작의 저술 단계를 시간적으로 비정하고자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뿐 아니라 그 결과도 시원치가 않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지만, 내 생각으로는 통상 후닥닥 초고를 쓴 다음 차후 그것을 꼼꼼히 되쓰곤 했던 마키아벨리이지만, 이 저작의 경우에는 다른 것에 비해 좀더 천천히 작업을 진행시켰을 것 같다. 그에게는 자료 조사의 문제가 별로 심각하지 않았다는 점은 이미 앞서 언급했던 바이지만, 그래도 이 때문에 글 쓰는 것이 주춤거렸을 수도 있다. 또는 생각이 순조롭게 잘 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의 기하학적 삶에서 마지막 사사분기 전체를 차지한 (여가)의 시간을 온통 주요 저작들의 생산에 쏟아부었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의 (계속적인 독서) (전반기 29년)와 (오랜 경험) (삼사분기 14년 반)으로쿼 배운 모든 것을 토해 내었다. 그리고 그는 생의 마지막 8분의 1에 해당하는 7년을 거의 모두 (피렌체사)의 서술에 할애한 반면, 그 바로 앞서의 7년 동안에 (군주론), (만드라골라), (카스트루초 전), (리비우스 논고), (전술론)을 모두 써내는 놀라운 저력을 보여주었다.
현시점에서 몇몇 문서를 통해 당시를 되돌아볼 때, 사람들에게는 마키아벨 리가 (피렌체사)를 쓰고 있던 시기, 특히 이 초기의 시간이 마치 그가 오직 이 일에만 진력한 듯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명상적이고 고립적인 삶을 살았던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시기는 그의 전기와 서신들에서 기묘한 공백기에 해당한다. 그것은 적어도 상징적 의미에서, 저작의 방대함과 집필의 어려움에 압도된 저자의 명상과 은둔의 모습을 보여주는 공백기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전기 작가라면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에서 멋대로 상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는 하다. 이러한 지식의 공백은 단순히 자료가 우연히 망실된 결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비록 시골의 고적함 속에서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통해 이탈리아 정치판의 뒤엉킨 실타래를 풀게 해줄 사건의 실마리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 한때 정무궁에서 외교 서신들을 열람하곤 했던 그는 이제 시내로 갈 때면(그가 1521년 크리스마스 기간 동안 그곳에 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술집이나 원회에 들러 새로운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시골에 있을 때면, 유럽의 다양한 면모들이 스쳐 지나가는 로마 행 가도 부근에 자리한 술집 밖에 앉아 새 소식을 나꿔챘다. 혹은 친구들로부터 세상 형편을 전해 듣기도 했는데, 변화의 커다란 소용돌이 속에서도 구경꾼이 아니라 행위자로 남게 된(운 좋게도 말이다) 귀차르디니도 그러한 친구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때쯤, 인생에서나 정치에서나 마찬가지로 큰 도박꾼이었던 교황 레오네는 또다시 대도박을 감행하고 있었다. 베토리가 편지에서 쓰고 있듯이, 운명이 그의 조카를 앗아감으로써(1519년에 죽은 우르비노 공 로렌초 데 메디치의 경우를 말함-옮긴이), 그가 가문의 영화를 추구할 명백한 동기는 사라진 셈이었다. 이 상태에서 그가 단지 교회에 대한 권력의 확대만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더 원대한 전국적 야심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명확지 않다. 조만간 추기경 직에서 물러나야 될 사촌 줄리오에게 한몫 떼어줄 심산이었다는 말도 있었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그가 최근 몇 년 동안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와 에스파냐의 왕 칼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다가, 칼 몰래 프랑수아와 조약을 맺고는 제위 게승 문제를 둘러싼 분쟁에서 프랑수아 편을 들었으나, 결국 칼의 승리로 끝나자 갑자기 모든 반대를 물리치고 칼 쪽으로 선회했다는 사실이다.
1521년 5월 8일 조약이 체격되고 29일 비준이 끝나자(당시 마키아벨리는 카르피에서 돌아와 있던 상태였다),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던 교황, 황제 동맹국 주재 사절은 메디치 추기경이, 총감독관은 귀차르디니가 맡았다. 운명은 다시 한번 레오네 편이었다. 프랑스군은 아다 강 유역 바우리에서 에스파냐 군에 일격을 당했고, 이 전투에서 카테리나 스포르차의 막내아들 조반니 데 메디치는 명성을 얻었다. 프랑스는 이로 인해 밀라노마저도 곧 내주고 말았다. 레오네는 이 승리로 크게 기뻐하였으나 그것이 가져다줄 과실을 맛보지는 못했다. 12월 초하루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이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던 것이다. 이는 늘 좋은 운세에 편승해 온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겨진 운명의 장난 같은 것이었다.
교황의 죽음으로 동맹은 와해되었다. 전쟁은 그의 돈 아니 교회의 돈으로 지탱되고 있었기 때문에, 제국 군 역시 자연히 흩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교회가 빼앗은 파르마 시는 새로 힘을 얻은 프랑스 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귀차르디니의 지휘아래 잘 방비디고 있었다. 롬바르디아에 아무 할 일 없이 남겨져 있었던 메디치 추기경은 교황 선출 회의에 참석하려고 로마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비록 자신이 교황에 오를 수는 없었지만, 공공연히 그 자리를 노리던 소데리니 추기경을 저지함으로써, 이미 전임 교황의 처사에 분개하고 있었던 일단의 사람들에게 새로운지지 기반을 더해 준 셈이 되었다. 1522년 1월 9일, 아드리아노 6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플랑드르 출신에다 전임 교황이나 로마 교황청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매우 경건한 성격의 인물이었다. 이러한 결과에 대경실색한 사람들이 그 도시를 빠져나가고 있을 무렵, 메디치 추기경은 피렌체 공화국과 그곳의 대주교구를 장악하기 위해 돌아왔다. 마키아벨리는 틀림없이 레오네의 죽음으로 자신의 손실을 입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뒤에 베르니가 비삐에나 추기경에게 전한 다음과 같은 말을 정말로 그 스스로가 했을 수도 있었을 법하다. 그는 결코 그에게 득도 해도 되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득보다는 해가 많았든지. 그러나 그저 범상한 재능의 시인과 문인들에게도 그토록 많은 시혜를 베풀었던 교황 레오네는 자신도 그 누구도 모르는 사이에 피렌체의 위대한 서기장에게도 역시 두 가지 점에서 혜택을 주었던 것이 아닐까. 먼저 그 하나는 스스로의 마음을 이리저리 바꿈으로써 그에게 환상과 동시에 고귀한 상상력을 촉발시킨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를 절망적으면서도 생산적인 여가의 상태로 방치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언제나 메디치 가의 도움으로 가능했던 마키아벨리의 문학은 무엇보다도 그를 도운 적인 없는 레오네에게 더 크게 빚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 역시 다른 피렌체인들처럼 레오네의 죽음으로 무언가를 상실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른 것보다도 그는 언젠가는 로마로부터 좋은 소식이 오리라는 희망을 잃어버린 것이다. 만약 소데리니가 교황 선출 회의에서 승리했다면 서기장의 미래는 확실히 보장되었을 것이다. 쫓겨난 전 곤팔로니에레는 마키아벨 리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에게 보인 당시의 싸늘한 태도보다는 옛날의 충성심을 더 쉽게 기억했을 것이므로. 피에로를 비롯한 이 소데리니 가 인물들은 이제 매디치의 권력에 노골적으로 대항하고 있었고, 이 와중에서 지금은 메디치 가의 후견 아래 있는 그들의 옛 부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 야심으로 가득한 추기경은 프랑스 왕과 힘을 합쳐 렌초 다 체리의 지휘 아래 시에나 교회에서 군대를 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줄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이 고려하고 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러면서도 더 신속하게 피렌체 정부를 교체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당시에 줄리오는 도시의 유일한 실권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구 읍도파와 자유의 애창자들을 적어도 곁으로는 감싸안으며 매우 부드럽게 도시를 다스리고 있었으므로, 다시 한 번 국정 개혁에 대한 의견들을 청취하고자 하였다. 이는 사람들의 마음을 떠보고 피렌체의 어떤 사람들 머릿속에 무슨 야심들이 들어 있는지를 알압기에 매우 알맞은 방법이었다. 자기 쪽 직계의 적손은 이미 끊어져 버린 상태였으므로, 그의 원래의 의도는 진실된 것이었을 법하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때문이었는지 또는 추종자들의 야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적새심에 의한 분노 때문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그는 메디치 가의 사생아 두 명을 키우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어버렸는데, 이폴리토와 알레싼드로가 바로 그들이었다. 아폴리토는 줄리아노의 아들이었고, 알레싼드로는 당시 우르비노공 로렌초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있기는 했지만 사실은 줄리오 추기경 자신의 소생이라 추정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추기경은 그러한 감언이설로 인해 이제는 다시 주워 담기는 쉽지 않을 정도로 욕망과 환상에 사로잡히기에 이르렀다. 이미 다수의 정부 개혁안이 제출되었으나, 그는 내친 김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의견을묻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마키아벨리에게도 의견을 물었고, 그는 이에 대해 앞서 레오네 10세에게 제시한 개혁안을 약간 수정하여 그대로 올렸다. 다만 이제는 그 일이 곧 결과를 볼 것 같았기 때문에, 그는 안의 형식을 직접적인 포고나 성명의 모양으로 바꾸었다. 알레싼드로 데 파치 역시 의견을 내놓았는데, 여기서 그는 마키아벨리의 안을 가리켜 (이상스럽고도 엉뚱한) 데가 있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마키아벨 리가 지금까지 이러한 유의 평가에 익숙해 있었음은 두말 할 나위 없다. 사실 그의 안은 세부적이 SAUS에서 다소 인위적인 데다 실제적이지 못한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전혀 엉뚱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요약하자면 평시민 정부로 돌아가되, 추기경이 살아 있는 동안에느 SAPELCL 가에 따르고 그 뒤로는 자유를 보장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는 또한 추기경이 5월 초하루 축제일에 반포하려고 작성해 놓은 것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포고의 기초를 이루는 내용이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일이 그 정도로까지 갔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11일, 알렌싼드로 데 차치는 적당한 라틴어 연설을 tj서, 자유를 되찾게 한 추기경을 칭송하였다. 작자가 이 글을 그에게 바치려 하자, 추기경은 심복인 숌버그를 통해 이렇게 대답하였다. (자네의 연설문은 정말 반갑네만, 그 내용은 아니라네.) 개혁에 대한 생각들을 희석시키려는 변명이랄까 의도랄까가 처음으로 나타나 것은 렌초 다 체리의 원정에서 였다. 하지만 그것이 피렌체 정부의 준비 상태나 그 일을 계획한 사람의 짧은 생각 때문에 무산되자, 이어서 그것에 연루된 음무계힉이 불거져 나왔다. 그것은 그리스도 성체절(6월 19일)에 메디치 추기경을 암살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는 또한 국정 개혁을 앞당기는 길이기도 했다.
이 음모의 주모자는 마키아벨리와 가장 가까운 두 친구 자노비 부온델몬티와 시인 뤼지 알라만니였다. 그리고 그 외의 가담자로는 또 다른 뤼지 알라만니를 비롯하여 디아체티노와 브루촐 리가 있었는데, 이들 모두가 원회에 드나든 문인들이었다. 이는 가엾은 마키아벨리로서는 조금도 달가울 게 없는 사건이었다. 그야말로 이들의 친구 중 하나이자 앞서의 반메디치 음모 사건에 연루된 인물로 지목되었던 장본인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더 나쁜 것은, 부온델몬티가 공모자 한 사람에게 그를 이 계획에 동조할 만한 시민들 중 하나로 거명한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이 계획에 정말 연루되었는지, 그리고 이 사실이 공모자에 대한 신문중에 나온 것인지 어떤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하지만 그 공모자란 인물이 자노비에게 그러지 말라고 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마키아벨리는 처지가 힘든 데다 친메디치파로 알려져 있지도 않기 때문에, 의심을 사지 않고 필요한 일을 해내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첫 재판에서 이에 대한 부온델몬티의 심중이 어떠했는지 아무것도 진술된 사실이 없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는 시인 뤼지 알라만노아 함께 앞질러 귀띔을 받고는 미리 몸을 피했기 때문이다. 붙잡힌 사람은 다른 뤼지 알라만니와 디아체티노뿐이었는데, 그들은 신문 끝에 일을 자백하고는, 6월 6일 효수형에 처해졌다. 내가 앞서 언급한 니콜로 마르텔리(서간집 Lettere의 저자와는 다른 사람이다.)라는 이름의 그 공모자는 브루촐리처럼, 그리고 바티스타 델라팔라를 비롯한 다른 공모자들처럼 용케 도망을 갔다. 그러다가 1524년 메디치 정부의 손에 잡혔고, 결국에는 부온델몬티의 그 숨겨진 심중을 밝히게에 이르렀지만, 때는 이미 1526년으로 아르노 강의 다리 밑으로 거친 강물이 넘쳐 흐르고 있는 상태였다.
강물은 테베레 강의 다리 밑으로도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소데리니 추기경은 처음엔 메디치 추기경을 싫어했던 교홍 아드리아노의 편애를 듬뿍 받았으나, 메디치 가쪽에서 그이 음모에 대한 불리한 정보를 부지런히 일러바침으로써 결국에는 카스텔 산탄젤로에 갇히는 신세가 디고 말았다. 그의 형 피에로는 그 음모가 발각된 지 며칠 뒤인 1522년 6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이제 이 헌신적인 시민에 대한 기억도 메디치 정부의 판결에 의해 공개적으로 훼손되어 버렸다. 베네데토 다로베차노가 그를 위해 카르미네 성당에다 만들어 놓은 무덤은 텅 빈채 남아 있었고, 후세를 위한 그의 진짜 묘비명은 마키아벨리가 쓴 그것이었다.
피에로 소데리니가 세상을 떠난 그날 밤
그의ㅡ 영혼은 지옥의 목구멍까지 내려갔지.
그러자 플루토가 소리쳤네. (이 어리석은 영혼아, 지옥엔 왜 왔느냐? 림보로 가서 어린애들하고나 지낼 것이지.)
이 넉줄밖에 되지 않는 시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너무 많은 말들이 있었다. 다른 어리석은 영혼들은 tepfl니에 대한 동지애적 입장에서 이에 분개하였다. 심지어는 마카아벨리를 비난에서 구하려는 목적으로 그가 이 작품을 썼다는 증거들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기에 옛 서기장이 자신에게 항상 친절과 호의를 보여주었던 곤팔로니에레를 조롱하는 듯한 모습은 마땅찮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진실과 마키아벨리의 진정한 성격을 왜곡하는 정당한 이유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라는 사람이야말로 농담을 좋아하는 데다가, 몰락한 영웅들, 특히 발렌티노처럼 사악한 인물이나 소데리니 같이 유약한 인물에는 더 정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하지 않는가 말이다. 결국 이 유명한 묘비명은 피렌체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라도 어떤 상황에서라도 내뱉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신랄한 농담에 다름아니다. 그리고 무릇 농담이라면 날카로워야지 결코 애처롭거나 너그러워서는 안 되는 법이다. 그것은 그 자체가 목적인, 완전히 말로 하는 농담일 뿐이며, 마키아벨리 자신이 그를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거 뭐, 별로 얼얼하지도 않구먼)이라고 말했던 그런 유의 농담인 것이다. 농담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인 현대인들보다, 자신의 위대한 숙부는 (시인의 입장에서) 그냥 재미로 농담삼아 이 묘비명을 썼을 뿐이라고 한 줄리아노 데 리치의 16세기 주석이 사실 더 진실에 가깝다.
그 음모 계획에 뒤이은 재판 과정과 판결 이후에 마키아벨리의 기분이 어떠했는지는 어떤 문서도 우리에게 말해 주는 바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문서가 가르쳐줄 수는 있는것보다 더 쉽사리 그의 기분을 상상할 수가 있다. 바로 그 당시, 그는 또한 선량하고 경건한 사제로서 모두가 좋아하던 동생 토토를 잃는 슬픔까지 겪었던 것이다. 니콜로는 그의 옆에있어주려고 피렌체로 돌아왔다. 당시 그 자신은 사절로 나갈 수 없는 처지였으므로, 피렌체로 와보았자 그는 다만 사절로 예정된 사람들에게 도움말을 주는 데 만족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한때는 그렇게 좋았던 이도시로의 여행도 이제는 왠지 가슴 아프고 공허하게만 느껴졌다. 그의 인생에서 남아 있었던 몇 안 되는 즐거움 중의 하나인 원회 출입도 끝이 났다. 죽거나 도망간 친구들에 대한 슬픔에다 그 스스로도 어찌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봉착한 그는 한때 귀양지 같은 곳이었다가 지금은 도피처가 된 자신의 시골집에 그 어느 때보다도 깊숙이 몸을 숨겼다. 이는 또한 바로 그 무렵 피렌체에서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돌림병으로부터 몸을 피하는 길이기도 했다. 1522년 11월 27일, 그는 자신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그 무렵, 부온델몬티와 알라만니가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다시 들어오려다가 붙잡혔다는 소식이 피렌체에 알려졌다. 두 명의 망명객은 결국 풀려날 것이므로 이 사건이 그들에게는 별반 위험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원회에서의 추억을 일깨우는 모든 것이 그로 하여금 두려움과 참담함을 새삼 느끼게 만들었다. 자신이 또 다른 메디치 추기경(조반니 데 메디치를 말함. 1513년에 레오네 10세가 됨-옮긴이)에 반대하는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감수해야만 했던 고문과 투옥으로 인한 고통이 마음과 육신 양쪽으로 생생히 되살아났다. 그는 자신이 인생사에서 (두 음모 계획 사이에서 끼어 있던) 마지막 세월들을 낙담 속에서 쓸쓸히 되돌아보았다. 그것은 마치 그 해말이나 1523년초쯤에 그 가까이 가고 있었음이 확실한 (피렌체사) 제 8권 서두와 흡사했다. 그의 쓴 술잔을 가득 채우느라고, 아고스티노 니포의 유명하고도 악명 높은 표절이 간행된 것도 바로 이때다. 그 볼썽 사나운 (군주론)의 모조품 말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최근 내가 발견한 베토리의 한 편지에서 그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걱정을 안겨다주는 아들 로도비코에 대한 새로운 근심으로 심란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는 결국 8월초까지 갈 돌림병이 한창 기승을 부리고 있던 때였다. 시민들은 피렌체를 떠나 시골로 흩어졌다. 그러나 역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았다. 롬바르디아에서는 에스파냐와 프랑스 간의 전쟁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프랑스 군은 밀라노를 잃은 후, 본니베 장군의 지휘 아래 새롭게 정신을 다진 군대로 되돌아왔다. 이에 맞선 것은 칼 5세 휘하의 샤를이란 이름을 가진 두 인물, 즉 나폴리 총독인 란노아와 프랑스 왕을 배반하고 반란을 일으킨 부르봉이었다. 바로 이대(1523년 9월 14일) 교황 아드리아노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로마 시민들은 오히려 그의 주치의에게 도시를 구한 은인이라며 화관과 치하의 글을 바치면서 기뻐하였다. 교황 선출 회의는 길어졌고, 줄리오 데 메디치가 이끄는 노장파와 폼페오 콜론나를 앞세운 소장파가 날카롭게 대립하였다. 문인들에게는 이 상황이 마치 옛날 또 다른 줄리오와 또 다른 폼페오 간에 있었던 대립의 재판으로 보였다(이탈리아어 이름인 줄리오와 폼페오를 라틴어식으로 바꾸면 율리우스(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된다-옮긴이). 이 투쟁은 마침내 줄리오의 승리로 끝났고, 그는 클레멘테 7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11월 18일). 메디치 추기경들은 오히려 음모 사건들의 덕을 본 셈이었다.
일단 두려움이 가시자, 언제나 쉽사리 달아오르는 마키아벨리의 가슴은 다시 희망으로 불타기 시작하였다. 그에게 먼저 떠오른 생각은 새 교황이 추기경이었을 때 자신에게 쓰라고 맡긴 작품을 바치고 그에 대한 보상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때까지 질질 끈다 싶을 정도로 느릿느릿 작업해 오고 있던 그 책이 이제 갑자기 보물 단지처럼 여겨졌다. 내가 알기로 당시 작업의 진도는 바야흐로 8권에 이르러 이야기는 교황의 숙부이자 메디치 군주국의 진정한 창시자인 로렌초의 행적을 다루어야 할 시점에 와 있었다. 이 사건들은 시간적으로도 당시에 가깝고 그 사안도 중요했기 때문에, 그로서는 조심해서 다룰 필요가 있었다.
1524년 8월 30일, 마키아벨리는 재산 문제로 포피아노에서 어떤 일을 해달라고 부탁한 귀차르디니에게 답장을 보냈다. 그는 먼저 그 해엔 꾀꼬리마저 잡을 수 없다고 불평을 늘어놓은 뒤(이탈리아에서는 꾀꼬리의 일종인(beccafico)를 식용으로 하고 있다-옮긴이) (또 하릴없이 한 해가 지나가는데 식탁엔 맛있는 음식조차 놓을 수 없구나!), 늘 그렇듯이 어조를 싹 바꾸고는 이렇게 썼다. (난 지금까지 시골에서 피렌체사의 저술에 전념해 오고 있었다네. 거두절미하고, 자네가 지금 내가 쓰고 있는 부분을 내 편에서 한번 봐준다면 자네에게 10솔도를 줄 용의가 있네. 난지금 어떤 대목을 세세히 기술하고 있는데, 그게 사실을 과장하거나 폄하하지는 않았는지 자네의 의견을 듣고 싶단 말일세. 물론 결과는 내 스스로 판단해서 내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 한 아무에게도 불편을 주지 않도록 처리할걸세.)
로렌초 데 메디치의 죽음은 그에게 이 8번째 권을 종결하는 동시에, 당시 그가 교황에게 바치려고 작정한 작품 전체를 끝맺는 데에는 최상의 시점으로 보였다. 그는 책을 서둘러 마무리하고는 이어 전체적으로 글을 다듬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손질을 거침으로써, 그의 글은 쓸데없는 장식을 덧붙이던 당시 문인들의 유행과는 달리 오히려 더욱 명료하고 꾸밈없는 문체를 가지게 될 것이었다. 그는 글을 장식하기보다는 글에 힘을 실어주려 하였다. 그는 일종의 환영 비슷한 기대감 속에서 자신의 위대한 시간들을 작업을 위해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그러다가 쓰던 글에서 고개를 들고는, 친구들이 전해 오거나 술집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롬바르디아의 평원과 프로방스의 따뜻한 날씨 속에서 경쟁 관계에 놓인 두 강대국이 시시각각 펼치는 전쟁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그는 숨을 멈추고 교황 클레멘테의 아슬아슬한 게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마치 레오네 10세만큼의 역량도 운세도 갖지 못했으면서도 게임을 계속하려는 듯이, 이제는 황제를 떠나 프랑스쪽으로 가고 있었다. 이 모든 일들을 생각하느라 마키아벨리는 수시로 펜을 멈추었다. 그리고, 꾀꼬리를 잡지 못한 그를 위로나 하려는 듯, 쌀쌀한 가을의 새벽빛 속에 그가 놓은 가시나무 덫 사이로 첫 개똥지빠귀들이 휘파람 소리를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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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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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6. 지혜의 샘
시체와 독수리 떼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여들 듯, 비린 생선에 쉬파리가 모여들 듯,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모이게 마련인가 보다. 중국 조나라 사람 염파는 군인으로서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자 고향 사람과 친척은 물론이고, 줄을 잡아 입신양명하려는 사람들이 그의 집에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런데 얼마 후 그는 자리에 복직되었다. 다시 그의 집에 선물꾸러미가 쌓이고 안부조차 묻지 않았던 사람들이 몰려와서 갖은 아첨을 하기 시작했다. 염파는 이들의 행동에 화가 나서 이들에게 물러가라고 고함을 쳤다. 그 때 노인 한 사람이 나서더니,
“그대는 생각이 어찌 그렇게 어리석소. 그대에게 세도가 있을 때 우리가 좇고 세도가 없었으면 가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무엇 때문에 화를 내는가? 그대가 세도가 있을 때 우리가 찾아보지 않으면 그대는 더욱 역정을 낼 것이오!”라고 말하였다. 복숭아와 살구나무는 좋은 꽃과 열매를 맺으므로 구태여 사람을 청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절로 모여들기 때문에, 그 밑에는 자연히 길이 생겨난다. 그러나 깊은 물이 얕아지면 오던 물고기도 오지 않는다. 참으로 용렬하고 헛된 일이건만 사람들은 반성할 줄 모른다. 시체가 있는 곳에 까마귀가 몰려드는 것을 어찌 나무랄 수 있는가? 그러므로 개가 꼴 보기 싫으면 개 먹을 뼈다귀 없는 낙지를 사듯, 까마귀가 싫으면 시체를 그 곳에 놓지 않으면 된다. 그런 부류의 사람이 싫으면 그런 자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된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 떼가 모이게 마련이다.
(Where the carcass is, there shall the eagles be gathered together.)
나쁜 일
화불단행,
어려운 일이 일어나면 또다른 어려운 일이 뒤따른다는 말이다. 어려운 일이 닥쳐 허둥대다 보면 다른 위험에 적절히 대비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듯, 어려운 일이 닥칠수록 정신을 가다듬어야 한다. 영국 시인 헤릭(1591~1674)은 <슬픔이 계속되는 인생>이라는 시에서, ‘한가지 걱정이 지났다 하면,또 다른 걱정이 다가와 있고, 고통과 비애는 파도가 치듯이 계속되는구나’하고 읊었고, 영국의 계관시인 메이스필도(1878~1967)는 헤릭보다 좀 더 현대적인 어투로, ‘개떡같이 힘든 일이 계속되는 것이 인생이다‘라고 하여, 사는 것 자체가 항상 고난의 연속임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노자는 도덕경에서 ‘아무리 강한 회오리 바람이라도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강한 소나기라도 하루종일 오는 법이 없다. 누가 이러한 자연현상을 일어나게 하는가? 그것은 천지이다. 천지조차 그런 것을 오래 가게 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사람이야 오죽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아무리 힘이 들고 어려운 일이 겹쳐오더라도 참고 견디다 보면 해결된다는 말이다. 눈 위에 다시 서리가 내리듯이 재앙은 겹쳐서 오게 마련이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똑바로 차리면 어려움을 쉽게 이겨나갈 수 있다.
나쁜 일은 겹쳐서 일어난다. (Misfortunes never come singly.)
아름다움을 보는 눈
아름다움이란 사람이 감성과 이성의 조화를 통하여 사물을 보았을 때 느끼는 기쁨과 만족을 말한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이란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노자는 ‘세상 사람이 아름다움이라 알고 있는 아름다움은 참다운 아름다움이 아니다’라고 하여 보는 이의 주관성을 인정하였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아름다움은 없다. 장자는 달과 꽃이 부끄러워 하고 물고기가 자신의 자태를 감추고 기러기가 넋을 잃고 떨어질만한 미와 총명을 겸비한 여자를 구했던 사람이다. 그는 그러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사람으로 서시를 들고 있는데 ‘서시가 가슴을 부여잡고 있다’는 한 이야기를 보기로 하자. 서시는 가슴앓이 병을 앓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언제나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것이 서시가 지닌 매력의 키 포인트였다. 어느날 같은 마을에 사는 추녀가 서시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서시와 같이 가슴에 손을 대고 눈을 찌푸리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아름다움’을 과시하였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그 꼴이 보기 싫어 문을 잠그고 집에서 나오지 않았고 어떤 사람들은 다른 마을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그녀는 서시의 ‘찌푸린 아름다움’을 알기는 하였으나 무엇이 서시를 ‘아름답게’ 하였는지를 몰랐던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보는 사람의 견해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의 눈은 외부세계를 반영시켜 주지만 우리의 마음을 비춰주는 거울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판단할 때 들어난 겉모습만 보고서 판단하지 말고 속마음까지 들여다 보아야 한다.
아름다움이란 보는 눈에 따라 달라진다. (Beauty is in the eye of the beholder.)
아름답고 추함은 상대적인 개념일 수 밖에 없어서, 보는 관점에 따라 추함이 아름다움이 될 수 있고 아름다움이 추함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배수의 진
중병에는 극약 처방이 필요하다고 한다. 지극히 위독한 병은 아찔하게 현기증이 날 정도로 강한 약을 쓰지 않으면 효험을 낼 수가 없다고 서경은 말한다. 현대 의학에서 난치병으로 남아 있는 암의 경우, 치료제는 아주 강한 독성을 갖고 있다. 암의 치료가 어려운 것은 치료약이 암세포만 선별적으로 골라 죽이지 못하고 주위의 정상세포까지 파괴하는 부작용 때문이다. 그래서 병원에서는 이러한 부작용을 뻔히 알면서도 암에 걸린 사람에게 성패가 반반인 극단적인 치료법을 쓰고 있다. 생사가 달린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는 극단적인 처리 방안이 필요하다. 일반적인 대처방안은 위기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신의 배수지진
한나라 왕 유방은 한신에게 명하여 강국인 조나라를 치게 하였다. 조나라는 20만 대군을 좁은 협곡길이 있는 정형이라는 지역에 집결시켰다. 한신은 조나라 군사보다 턱없이 적은 수인 1만의 군대로 정형의 입구에서 강을 등지고 진을 쳤다.이러자 조나라 군대는 이것을 보고 병법도 모르는 자라고 크게 비웃었다. 한신의 군대는 조나라 군사가 있는 성 앞까지 와서 싸우다가 패배를 가장하여 도망하여 강을 등지고 있는 군대와 합병하였다. 조나라 대군이 추격에 나서자, 한신은 성 주위 산간에 매복시켰던 2,000의 경기병으로 하여금 성을 점령하게 하였고, 나머지 8,000 여 군사는 강을 등지고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워 조나라 대군을 섬멸하였다.
손자병법
한신은 손자병법에 ‘사지에 몰아넣으면 살고 망지에 두면 멸망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고 하면서,“오합지졸과 같은 군사들을 생지에 내놓으면 모두 살기 위해 도망을 가나, 이들을 사지에 두면 살기 위해서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운다. 그렇기 때문에 큰 힘을 발휘한다.”고 말했다. 그는 “죽음을 각오하면 반드시 용기가 넘친다. 죽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고 죽음에 처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예수는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지만, 이 세상의 자기 목숨 버리기를 무서워하지 않으면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 영생을 얻는다”고 하였다. 적을 치기 위해 강을 건넌 후, 타고 온 배를 불사르는 결사의 각오로 어려운 일을 대하면 꼭 해결되기 마련이다.
위기가 닥치면 배수진이 필요하다. (Desperate diseases must have desperate reme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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