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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8호 - 2024.10.07. 월요일(음력 : 9.05.)
angelo@nownforever.co.kr / 風文 윤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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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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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을 찾으려고 온 세상을 두루 헤매도 스스로의 마음 속에 아름다움을 지닌 사람이 아니면 그 것을 찾을 수 없는 법. - 랠프 월도 에머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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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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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살공주?
아이들은 어려서 부모로부터 우리말과 글을 배우게 된다. 부모가 하는 말을 아이들이 그대로 따라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말을 배우게 되고, 좀 더 성장해 글을 적을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맞춤법에 맞게 글을 적도록 부모의 지도를 받는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글자를 똑바로 쓰지 않으면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없고, 자신이 하려고 했던 이야기가 엉망진창이 되어버린다는 사실도 알려 준다. 일례로 ‘백설공주’라고 적어야 할 것을 ‘백살공주’라고 적게 되면 주인공인 백설공주가 오히려 백설공주에게 독사과를 건네주는 할머니 왕비가 되어버리는 것처럼 전혀 엉뚱한 이야기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럼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들이 맞춤법에 맞게 한글을 적을 수 있을까. 국어의 맞춤법은 ‘표준어를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한다. 즉 국어의 맞춤법은 표준어를 어법에 맞도록 적는 방법이기 때문에 가장 먼저 평소에 우리 아이들이 일상 대화에서 표준어를 사용하도록 지도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표준어 대신에 비표준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예를 들면 ‘가르마’를 ‘가리마(×)’로, ‘단출하다’를 ‘단촐하다(×)’로, ‘바람’을 ‘바램(×)’으로, ‘투미하다’를 ‘티미하다(×)’로, ‘애먼’을 ‘엄한(×)’으로, ‘천생’을 ‘천상(×)’으로, ‘해코지’를 ‘해꼬지(×)’로, ‘설렘’을 ‘설레임(×)’으로, ‘스라소니’를 ‘시라소니(×)’ 등으로 잘못 사용하다 보면 아이들이 이를 글자로 표기할 때에도 표준어 대신 비표준어의 형태로 잘못 표기할 수 있으므로 아이들이 일상 대화에서부터 표준어를 사용하는 습관을 길러주어야 한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로마자 표기법(4)
로마자 표기법에서 성명, 지명 따위의 고유명사 적는 법을 살펴보기로 한다. 성명은 성과 이름의 순서로 띄어 쓰고, 이름은 전부 붙여 쓴다. 서양 사람 이름 적듯이 이름을 먼저 쓰는 것은 원칙에 어긋난다. 우리나라 사람의 이름은 한글로 쓸 때나 로마자로 쓸 때나 항상 성을 먼저 쓰는 것이 원칙이다. Min Yongha(민용하), Song Nari(송나리).
이름을 구성하는 각각의 음절은 붙여 써야 한다. ‘Min Yong Ha’와 같이 쓰는 것은 잘못이라는 뜻이다. 만약 각 음절을 구분해서 적고 싶다면 ‘Min Yong-ha’와 같이 음절 경계에 붙임표를 둘 수는 있다.
이름에서 일어나는 음운 변화는 표기에 반영하지 않는다. 이름 ‘석민’이 [성민]으로 소리 나더라도 ‘*Seongmin’으로 적지 않고 각 음절의 한글 표기를 따라서 ‘Seokmin’으로 적어야 한다는 뜻이다. ‘석민’이 ‘성민’으로 오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Han Seokmin(한석민), Han Seongmin(한성민).
Gyeonggi-do Suwon-si Paldal-gu(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와 같이 ‘도, 시, 군, 구’와 같은 행정 지명의 단위는 붙임표로 구분하여 적는다. 반면에 자연 지물명, 문화재명, 인공 축조물명 등은 붙임표 없이 붙여 쓴다. ‘남산, 한강, 불국사’를 로마자로 적을 때는 붙임표를 넣지 말고 그냥 ‘Namsan, Hangang, Bulguksa’와 같이 적으라는 뜻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름에 쓰인 ‘산, 강’ 따위를 구태여 ‘*Nam Mountain’이나 ‘*Han River’와 같이 영어로 번역해서 쓰면 안 된다는 점이다. 서울을 가로지르는 강의 이름은 ‘한’이 아니라 ‘한강’이기 때문이다.
이대성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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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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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 그날은 - 천상병
이젠 몇년이었는가
아이론 및 와이샤쓰같이
당한 그날은
이젠 몇년이었는가
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
땀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
네 살과 뼈는 알고 있다.
진실과 고통
그 어느쪽이 강자인가를
내 마음 하늘
한편 가에서
새는 소스라치게 날개 편다.
∼∼∼∼∼∼∼∼∼∼∼∼∼∼~~~~~~~~~~~~~~~~~~~~~~~~~~~~~~~~
예장 - 정지용
모오닝 코오트에 예장을 갖추고 대만물상에 들어간 한 장년신사가 있었다
구만물 위에서 알로 나려 뛰었다
웃저고리는 나려가다가 중간 솔가지에 걸리여 벗겨진 채
와이샤쓰 바람에 넥타이가 다칠새라 납족이 엎드렸다
한겨울 내-흰 손바닥 같은 눈이 나려와 덮어 주곤 주곤 하였다
장년이 생각하기를 (숨도 아이에 쉬지 않어야 춥지 않으리라)고
주검다운 의식을 갇추어 삼동 내-부복하였다
눈도 희기가 겹겹이 예장같이 봄이 짙어서 사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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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 김수영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
명령하고 결의하고
[평범하게 되려는 일]가운데에
해초처럼 움직이는
바람에 나부껴서 밤을 모르고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고 있는
투명한 움직임의 비애를 알고 있느냐
여보
움직이는 배애를 알고 있느냐
순간이 순간을 죽이는 것이 현대
현대가 현대를 죽이는 [종교]
현대의 종교는 출발에서 죽는 영예
그 누구의 시처럼
그러나 여보
비오는 날의 마음의 그림자를
사랑하라
너의 벽에 비치는 너의 머리를
사랑하라
비가 오고 있다
움직이는 비애여
결의하는 비애
변혁하는 비애......
현대의 자살
그러나 오늘은 비가 너 대신 움직이고 있다
무수한 너의 [종교]를 보라
예사 위에 울리는 곡괭이소리
동물의 교향곡
잠을 자면서 머리를 식히는 사색가
-모든 곳에 너무나 많은 움직임이 있다
여보 비는 움직임을 제하는 결의
움직이는 휴식
여보
그래도 무엇인가가 보이지 않느냐
그래서 비가 오고 있는데!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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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는 - 이해인
돌아도 끝없는
둥근 세상
너와 나는
밤낮을 같이하는
두개의 시계바늘
네가 길면
나는 짧고
네가 짧으면
나는 길고
사랑으로 못박히면
돌이킬 수 없네
서로를 받쳐 주는 원 안에
빛을 향해 눈뜨는
宿命의 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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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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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53가지 지혜 - 루스 실로
제2장 정을 기른다
33.성문제는 사실만을 간결하게 가르친다
성에 대해 죄의식을 갖지 않는다
유태인에게 있어서 섹스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구약성서의 창세기 4장에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카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라고 인류 최초의 성행위가 간결하게 씌어 있다. 이 구절 중에 '동침하였다'란 말은 히브리어로 '야다'라고 하는데, 이 말은 '섹스를 한다'와 '상대를 안다'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육체적으로 사랑을 나눌 때 진정으로 서로를 알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유태인들은 그리스도교인들처럼 섹스에 대해 죄의식을 갖지 않는다.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된 것이므로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탈무드>에도 '섹스는 자연의 일부, 부자연스러울 까닭이 없다'라는 말이 있다. 어린아이들은 4-5세 때부터 섹스에 대해 흥미를 가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부모에게 묻는다. 동양의 부모들은 자녀로부터 성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당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유태인 부모들은 '섹스=자연'이란 사고방식을 자녀들의 성교육에도 그대로 적용시킨다. 성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더듬거리거나 얼굴을 붉힌다든지, 혹은 화를 내는 일이 결코 없다. 성경에 씌어 있는 사실만을 간단명료하게 자녀들에게 전할뿐이다.
사실대로 말해 주면 쓸데없는 망상을 하지 않는다
성에 대해 감추거나 공연히 주저하는 것은 오히려 상상력을 자극시키며, 불필요한 흥미를 품게 하는 역효과밖에 내지 않는다. 어린이들은 그런 때에 '비밀스런 냄새'를 맡게 되며, 그것에 대해 집착한 나머지 본래의 자연스러움을 잃게 되는 동시에 괴상한 일들을 상상하게 될 것이다. 물론 질문 받지 않은 것까지 설명해 줄 필요는 없겠지만, 만약 질문을 받았다면 거짓말로 얼버무려서는 안 된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무슨 일이든 사실대로 솔직히 이야기해 주면, 어린아이들은 절대로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성문제도 예외는 아니다. 사실대로 얘기해 주면 공연한 상상력을 발동시킬 여지가 없기 때문에, 내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 이상의 일들은 자녀들이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키부츠에서도 어린이들의 섹스는 자연 그대로 맡겨둔다. 어린이가 자위행위를 하더라도 못 본 체한다. 친구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어느 키부츠에서는 아홉 살 미만의 어린이들은 자위행위에 대해서 아무런 주의도 받지 않지만, 아홉 살이 되면 비로소 '남들이 모르게 하라'고 타일러준다고 한다. 그리고 여섯 살된 남자아이가 여자아이의 성기를 만지작거리는 장난을 목격한 교사가 '네 몸에 하라'고 간단히 타이르자, 그 후로는 절대 그런 장난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유태인들은 이와 같이 섹스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가르친다. 또 자녀들이 섹스와 관련된 행위를 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간단하게 주의를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유태인들은 흔히 '5분 동안에 끝낼 수 있는 말이 아니면 아예 꺼내지도 말라'고 말한다. 즉 무슨 말이든지 간에 간단 명료하게 하라는 경고인데, 이와 같은 유태인의 사고방식은 아이들의 성교육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포인트!
성에 대해 감추거나 공연히 주저하는 것은 오히려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시키며, 불필요한 흥미를 품게 하는 역효과밖에 내지 않는다. 성은 자연스러운 것이므로 그대로 자연스럽게 이야기해 주도록 하라.
34.어릴 적부터 남녀의 성별을 자각시킨다
'할례'는 유태인이 되는 의식
유태계 화가 마르크 샤갈의 초기 그림 중 '할례(1909년 제작)'라는 작품이 있다. 그는 이 작품을 그리기 전후 '혼례(1909)', '부부(1909), '성가족(1910)' 등 유태인의 전통적인 생활상을 리얼하게 묘사한 작품을 잇따라 발표했다. 할례란, 유태인들에게 있어서는 결혼식 못지 않게 중요한 행사로서, 생후 8일째 되는 날 남자아이의 페니스 표피를 잘라 버리는 의식이다. 그럼으로써 일찍부터 자녀에게 남녀의 성별을 명확하게 자각시키는 것이다. 할례의식은 다음과 같이 행해진다. 아기가 태어난 지 8일째가 되면, 그 아기의 형제 자매는 물론이고 이웃이나 친척들을 불러 그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먼저 아버지가 한 입 가득 술을 머금고는 솜 조각에 술을 뿜는다. 그러고는 그것으로 아기의 입을 적신다. 이것은 아기가 통증을 느끼지 못하도록 알코올로 마취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아직 신경이 덜 발달된 만큼 통증을 느끼지는 못한다. 할례의식을 행하는 사람을 '모헬'이라고 일컫는데, 모헬은 자신이 비장하고 있는 특수한 칼로 남자아이의 표피를 자른다. 의식이 끝나면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은 춤과 노래로 축하해 주는데, 이때 아이의 엄마는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 보통이다.
할례의식을 치르지 않은 남자아이는 유태인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것은 유태인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한 가족이 되는 할례의식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태어난 아기가 여자일 경우는 교회에서 명명식을 하는 것으로 할례의식을 대신하며, 남자아이 때처럼 축하파티를 벌이지는 않는다. 구약성서에는 할례에 대하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씌어 있다.
너희들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은 너희 자손이 아닌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할례는 순수한 종교적 의식이지만, 최근에는 위생적 측면에서 유태인이 아닌 사람도 생후 즉시 이와 같은 수술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렸을 때 표피를 제가함으로써 아이가 성장한 다음 포경 따위로 괴로워할 필요도 없고, 청결을 유지할 수 있는 등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남성의 권위를 자각시키는 유태인의 성인식
유태인 남자는 장남일 경우, 생후 30일째 되는 날 또 다른 의식을 치뤄야 한다. 그리고 13세가 되면 남자에 한해서 '바알 미츠바'라고 하는 성인식을 치르게 되는데, 바알 미츠바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아들'이라는 뜻이다. 열세 번째 생일날 다음에 돌아오는 안식일을 택해 행해지는 이 의식은, 어린이가 교회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성경을 읽고, 집에 돌아와서는 친척, 친구들을 초대하여 축하 파티를 여는 것이다. 유태인 사회는 이처럼 철저하게 남성의 권위가 존중되는 사회이다. 남자아이들은 이러한 의식을 치름으로써, 남자로서의 힘과 권위를 자각하면서 성장한다. 이렇게 해서 성장한 남자가 한 가정을 이룰 경우, 그는 가정의 중심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안정된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의 기초는 생후 8일째 되는 날 할례의식을 치름으로써 다져지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이 포인트!
할례는 순수한 종교적 의식이지만, 최근에는 위생적 측면에서 유태인이 아닌 사람도 생후 즉시 이와 같은 수술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렸을 때 표피를 제가함으로써 아이가 성장한 다음 포경 따위로 괴로워할 필요도 없고, 청결을 유지할 수 있는 등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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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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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9 - 시오노 나나미
제2부 하드리아누스 황제
(재위 : 서기 117년 8월 9일 ~ 138년 7월 10일)
브리타니아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치세 기간은 21년이다. 그 가운데 그가 본국이탈리아에 있었던 것은 세 차례에 걸쳐 7년밖에 안 된다. 게다가45세부터 58세까지의 13년은 거의 줄곧 속주를 순행하면서 보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하드리아누스가 순행 중에 이룩한 업적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었다.
(1) 시찰지역이 어디든 반드시 해야 할 일
(2) 그 지역 나름의 문제 해결
앞으로 하드리아누스의 순행을 서술할 때는 라인 강 방위선 시찰을 서술할 때 설명한 (1)은 생략하고, (2)만 다루게 될 것이다. 하지만(1)이 늘 수반되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드리아누스의 순행은 (1)과 (2)가 양쪽 다 이루어졌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고, 그렇게 오랜 세월을 그 일에 바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생각을 이해하는 일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서기 122년, 46세가 된 하드리아누스는 봄을 기다려 라인 강어귀에서 배를 타고 브리타니아로 건너갔다. 브리타니아 행은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다. 5년 전인 117년에 브리타니아의 브리간테스족이 봉기하여 제9군단이 궤멸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갓 제위에 오른 하드리아누스가 대륙에서 군단을 파견하고, 브리타니아에 주둔해 있는2개 군단도 반격에 나서서 반란이 진압되기는 했지만, 브리타니아의 방위체제 재구축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급한 문제가 되어 있었다. 로마는 브리타니아에 3개 군단을 상주시키고 있었다. 웨일스 지방의 카디프와 가까운 이스카(오늘날의 칼리온)에는 제2군단, 잉글랜드 서부의 데바(오늘날의 체스터)에는 제20군단, 잉글랜드 동부의에부라쿰(오늘날의 요크)에는 제6군단이 주둔해 있다. 이들 세 곳의 군단기지와 로마가 오래 전에 제패한 론디니움(오늘날의 런던)을 중심으로 한 동남부 지역 사이에 로마식 가도망이 깔려 있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고 체스터와 요크에서도 로마인들이 칼레도니아라고 부른 스코틀랜드 방면으로 간선도로가 뻗어 있었다. 게다가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에 로마 제국은 역사가 타키투스의 장인인 아그리콜라 장군의 적극전법으로 스코틀랜드 구석까지 제패의 손길을 뻗쳤다.
서기 117년에 반란을 일으킨 브리간테스족은, 당시에는 아직 분리되지 않았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접경 근처에 사는 원주민이었다. 이 부족의 원래 이름이 무엇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브리간테스는 로마인이 붙인 이름이다. 라틴어로 산적이라는 뜻이다. 산적을 뜻하는 영어 'brigand'는 이 라틴어에 기원을 두고 있지 않을까. 로마인이 이런 이름을 붙인 것을 보면, 로마화를 거부한 사람들이었을 게 분명하다. 로마화는 정복지의 주민을 정착시켜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하지만 브리간테스족 전체가 로마화를 거부한 것은 아니다. 로마인이 옮겨 심은 파일나무나 화초가 뿌리를 내리는 것과 보조를 맞추어, 잉글랜드 근처에 사는 브리간테스들의 로마화는 착실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들의 거주지역 남부에 사는 브리간테스들은 이제 상당한 정도로 로마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서기 117년의 반란은 동족이 떠나가는 데 초조해진 북부의 브리간테스들이 일으켰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로마 병사만 잔혹하게 죽인 것이 아니라, 로마 쪽에 붙은 브리간테스도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마는 패권 국가였다. 패권자에게는 그의 패권 아래 있는 자들을 보호할 책무가 있다. 하드리아누스가 생각한 브리타니아 방위체제 재구축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로마화한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산적'으로부터 지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성과가 바로 저 유명한 '하드리아누스 성벽' 이다. 고대 로마인들이 '발룸 하드리아니' (Vallum Hadriani), 현대 영국인들이 '헤이드리언스 월' (Hadrian's Wall)이라고 부른 이 성벽은 타인강 하구에서 뉴캐슬을 지나 솔웨이 만까지 80로마마일(약 117킬로미터)을 석벽과 망루와 요새로 채워버린 브리타니아 속주의 방어설비다. 하천 같은 천연 경계선을 이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게르마니아 방벽'과 같은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석벽만 있는 곳의 단면도는 다음페이지의 그림과 같다. '북'은 로마제국의 영토 밖이고, '남'은 제국의 영토 안을 가리킨다. 북쪽에서부터 하나씩 살펴보자.
(1)참호-너비 9.1미터, 깊이 9미터의 V자형 참호. 성벽 위를 관통하는 감시통로에서 참호의 밑바닥까지 보이도록 되어 있다. 참호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야만족 기마병을 막는 것이고, 두 번째 목적은 무리를 지어 몰려드는 야만족 집단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것이다.
(2)석벽-북쪽을 향한 부분의 높이는 6미터 내지 10미터, 남쪽은 4미터 내지 6미터. 이처럼 높이가 일정하지 않은 것은 지형의 차이 때문이다. 석벽 전체의 두께는 지형에 관계없이 3미터 안팎이다.
(3)도로-석벽을 따라 뻗어 있는 길로서, 말이나 수레도 쉽게 지나다닐 수 있도록 전체가 로마식 가도로 되어 있다 즉 완전포장 도로다. 폭도 로마 가도와 같은 2차선이다.
(4)보루-높이 3미터, 너비 6미터로, 성벽을 따라 길게 이어지는 긴 제방이다. 보루는 두 개가 나란히 만들어져 있고, 그 사이에 (5)의창호가 있다
(5)참호-너비와 깊이가 모두 6미터의 안팎.
성벽을 돌파한 기마병이 있더라도 (4)와 (5)로 저지할 수 있고, 떼지어 습격해오는 야만족도 이중으로 저지할 수 있다. 따라서 '하드리아누스 성벽'이란 (1)부터 (5)까지의 전체를 가리킨다.
그리고 '성벽'의 요소마다 성채와 요새와 망루가 세워지고, 그곳에는 전략상의 이유와 지형을 고려하여 수비대가 배치된다. 평지에 서있는 성벽이라면 기병대나 기병과 보병의 혼성부대, 구릉지라면 보병부대, 망루에는 파트타임 병사인 '누메루스' , 성벽 바깥에 설치된 전초기지에는 보조병과 '누메루스'의 혼성부대가 배치되는 식이다. 성채나 요새 사이의 거리는 평균 1.5킬로미터, 망루 사이의 거리는 지형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평균 500미터 . 이것이 최전선이고, 이곳에서 군단기지로 로마식 가도가 뻗어 있었다. '하드리아누스 성벽'으로 막지 못해도, 요크와 체스터의 군단기지에서 출동한 주전력이 맞아 싸울 수 있는 체제로 되어 있었다.
1900년 뒤의 '헤이드리언스 월'은 그동안의 풍상으로 손상된데다 오랫동안 채석장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로마 시대의 다른 유적과 마찬가지로 과거를 상기하려면 상상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영국은 전통적으로 로마학이 성한 곳이다. 게다가 '성벽'은 영국 안에 있는 중요한 로마 유적이다. 그래서 이곳도 철저히 조사했고, 유적 보존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게다가 '성벽'을 따라 유적 관광객을 겨냥한 여관들도 즐비하기 때문에 초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주말 여행에 알맞은 곳이다. 그런데도 저속함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영국다워서 흐뭇하다. 로마 시대의 유적 관리는 이탈리아에 있는 유적도 모두 영국인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지만, 브리타니아에 있는 로마 시대 유적은 질에서나 양에서 이탈리아에 훨씬 뒤진다. 영국박물관도 예외일수 없다. 그런데 로마 시대 유물에 쏟는 영국인의 세심한 주의는 단순히 고대 로마에 대한 사랑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들이야말로 고대 로마의 계승자라는 과거 대영제국 백성의 기개가 남긴 영향일까? 어쨌거나 '하드리아누스 성벽'에 서서 강자들의 꿈이 남긴 자취를 그리워하려면, 눈이 쌓이고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겨울철에 갈 수밖에 없다. 이 성벽을 건설한 하드리아누스의 브리타니아 순행은 영국에서 가장 좋은 계절인 봄부터 여름까지 이루어졌지만, 건설된 '성벽'을 지키는 로마 병사들은 눈 덮인 적지를 앞에 두고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땅에서 근무했기 때문이다 패권 국가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여 말하면, 하드리아누스의 뒤를 이은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시대에 이 '하드리아누스 성벽'보다 북쪽에 성벽이 또 하나 세워진다. 그것은 '안토니누스 성벽'이라고 불린다. 포스 만과 클라이드만을 잇는 선에 축조되었는데, 만약 이 선이 로마 제국의 방위선으로 정착했다면 에든버러와 글래스고도 제국 안에 들어왔을 것이다. 스코틀랜드도 로마화했을 거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결국은 '하드리아누스 성벽'이 로마화한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의 경계선으로 고착된다. 그리고 이것은 훗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분리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 두 개의 '성벽'을 본 사람이라면 군사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느꼈겠지만, '하드리아누스 성벽'은 직접 현지에 간 사람이 이룩한 성과인 반면 '안토니누스 성벽'은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책상 위에서 이룩한 성과였다. 하드리아누스가 서기 122년에 언제쯤 도버 해혈을 건너 갈리아로 들어왔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그 후의 행동범위로 미루어 보면, 늦여름이나 초가을에는 브리타니아를 떠났을 것이다. 병사들의 손으로 건설되어 가는 '성벽'이 완성되기를 기다릴 수는 없었다. 순행해야 할 제국은 광대했다. 브리타니아는 비가 많기 때문에 '성벽'에 딸린 식량창고는 바닥을 높여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전선에 근무하는 병사들의 위생을 배려하고 로마인답게 쾌적성도 고려하여, 졸졸 흐르는 시냇물 앞에 목욕탕도 지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이런 부대시설까지 포함한 '성벽'의 완성된 모습을 끝내 보지 못하고 죽는다. 하지만 자기 생각을 실현하는 행운을 얻은 사람과 그 성과를 누리는 사람은 다른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특히 그것이 공공의 이익을 목적으로 한 거라면 더욱 그렇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로마화의 우등생이었던 갈리아에는 하드리아누스가 재구축해야 할 것이 거의 없었다. 알려져 있는 것은 아베니오(오늘날의 아비뇽)를 건설한 것뿐이다. 거기서 하드리아누스는 선제 트라야누스의 아내 플로티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받았다. 뒤에서 남몰래, 하지만 표면에 나서지 않으면 안될 경우에는 결연하게 그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플로티나의 죽음을 하드리아누스는 어떤 심정으로 받아들였을까. 그가 쓴 <회고록>이 남아 있다 해도, 이런 사적인 감정은 기록되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플로티나의 부음을 전해들은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호적상으로는 양어머니인 이 여인의 고향 네마우수스(오늘날의 님)에 그녀에게 바치는 신전을 지었다는 것뿐이다.
히스파니아
이런 이유로 갈리아에는 잠깐밖에 머물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이에 주민들 사이의 충돌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가 소란하다는 보고가 멀리 오리엔트에서 날아·왔다. 이번만은 여느 때와 달리 그리스계 주민과 유대계 주민의 충돌이 아니었다. 소란을 일으킨 것은 소 한 마리를 둘러싼 이집트 원주민끼리의 다툼이었다.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도 '옛날 일'이라고 썼을 정도니까, 이집트에는 먼 옛날부터 신성한 소에 대한 신앙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그 소는 보통 소가 아니라 햇빛과 달빛을 받은 소다. 그 증거는 소의 피부에 생긴 특수한 줄무늬로 나타나고, 그 줄무늬야말로 해와 달에서 받은 빛을 나타낸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그 신성한 소가 지상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다른 소에서는 볼 수 없는 줄무늬 피부를 가진 소가 발견되었다는 것인데, 기쁨에 들뜬 사람들 사이에 이 소를 어느 동네가, 그리고 누가 보유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싸움이 일어났다. 이런 것을 믿는 사람들까지도 로마 제국의 백성이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자기가 나설 것까지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집트 주재 장관에게 문제 해결을 일임했지만, 소를 둘러싸고 싸우는 사람들에게 엄중하게 자중을 요구하는 친서를 보냈다. 하지만 남이 머리를 식히란다고 해서 식힐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애초부터 그런 소동은 일으키지 않는다. 조만간 이집트의 지배체제도 재구축하러 가야 한다고 하드리아누스는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서방에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황제는 서기 122년에서 123년에 걸친 겨울을 에스파냐의 타라고나에서 보냈다. 그리고 타라고나에 이베리아 반도의 식민도시와 지방자치단체 대표들을 소집했다. 로마 시민권 소유자의 수는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로마 시민도 아닌데 제국 방위에 힘썼다는 이유로 속주민인 보조병이 만기 제대할 때는 로마 시민권을 주었으니까, 단순히 계산해도 25년마다 15만 명의로마 시민이 새로 탄생한 셈이다 이것이 로마 제국의 국책이고, 이제도 덕분에 로마 시민권 소유자인 군단병을 확보할 수도 있었지만, 이런 정책을 계속하면 폐해도 생긴다. 그 폐해란 종래의 로마 시민과 새로운 로마 시민 사이에 일어나기 쉬운 갈등이었다. 어쨌든 로마 시민권 소유자가 얻는 이익은 고참이든 신참이든 똑같았기 때문이다. 로마 시민법으로 보호받을 뿐 아니라 소득의 10퍼센트에 해당하는 속주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그랬다. 이렇게 되면 옛날부터 시민이었던 자들은 새로운 시민에 대해 '신참인 주제에' 하는 기분을 갖기 쉽다. 세 개의 속주로 나뉜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이런 구파와 신파의 대립이 군단병 모집에 협조하지 않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다.
본국 이탈리아 출신의 자손인 고참 시민들을 통틀어 '이탈리아인'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도 여기에 속했다-이라고 불렀는데, 군단병 모집에 대한 이들의 반응은 온건한 '거부'였다. 한편 '에스파냐인'으로 통칭되는 신참 시민들의 반응은 강경한 '거부'였다. 온건과 강경의 차이는 하드리아누스가 구파에 속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파는 구파에 속하는 황제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해치는 타협책으로 나오지 않을까 우려했고, 그래서 오히려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로마군 최고사령관이기도 한 황제로서는 어떻게든 손을 쓸 필요가 있었다. 두 파의 대표를 소집하여 타라고나에서 회합을 가졌을 때, 하드리아누스가 어떤 조정안을 채택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로마인의 종래 방식으로 미루어, 고참과 신참의 구별없이 주어져 있는 권리 가운데 몇 가지를 신참 시민한테만 몇 년 유보한다는 타협책을 내놓았을지도 모른다. 그 몇 가지 권리란 속주세 면제처럼 실익을 수반하는 것이 아니라, 지방의회 의원 출마 자격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인간이란유동성만 보장되어 있으면 격차를 뜻밖에 순순히 받아들이는 법이다.300년 전부터 로마 시민이었던 사람과 3년 전에 로마 시민이 된 사람사이에는 그 분리가 영원히 고착되지만 않는다면 오히려 격차가 있는 편이 사회 안정에 이바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어쨌든 하드리아누스는 사태 수습에 성공했다. 타라고나까지 왔으면서도 고향 이탈리카에는 발길도 돌리지 않았지만, 그리고 황제 취임을 기념하는 건조물 하나 세우지 않았지만, 그것도 구파와 신파를 자극하지 않기 위한 배려였는지도 모른다.
에스파냐에 머무는 동안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하드리아누스가 숙소인 총독 관저의 정원을 혼자 거닐고 있는데, 노예 하나가 칼을 들고 덮친 것이다. 도움도 청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습격자를 제압한 황제는 변고를 알고 뒤늦게 달려온 사람들에게 범인을 넘겼지만, 범인이 정신병 환자라는 것을 알고는 벌을 주지말고 치료해주라고 명령했다. 이 에피소드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첫째, 로마 시대부터 이미 정신병자한테는 죄를 묻지 않았던 게 아닐까.
둘째, 47세를 맞이했는데도 하드리아누스의 체력은 건실했고, 스스로도 체력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고향 땅에서 하드리아누스의 유일한 기분전환은 말을 타고 에스파냐의 산야를 내달리며 사냥을 즐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치 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하드리아누스에게 중대한 소식이 날아왔다 파르티아 왕국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시리아 속주 총독의 긴급 보고였다 같은 오리엔트에서 날아온 소식이라도, 소를 둘러싼 주민들끼리의 분쟁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하드리아누스는 외교도 방위의 중요 수단이라고 믿고 있었다. 황제는 몸소 현지에 가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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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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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경(畏敬)이라는 감정 - 가리키 준조(唐木順三)/김춘미 옮김
신슈(信洲) 아쓰가 산의 서쪽 기슭, 표고 1,100m정도 되는 곳에 큰 샘이 하나 있다. 물의 양도 많고 물맛도 좋아, 마을 사람들은 이 물을 끌어다가 수돗물로 사용하고 있다. 샘 주위의 서너 평은 출입 금지 지역이다. 두랄루민 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에는 가시 철망을 어마어마하게 감아 놓았다. 은색의 두랄루민은 인공적인 느낌을 준다. 기둥 밑은 시멘트로 굳혀 놓았다. 지금은 사람 그림자도 없지만, 여름철에는 등산객이 많다는 것을 여기저기 널려 있는 음료수 깡통이나 샘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유리병으로 짐작할 수 있다. 군데군데 모닥불을 피운 자국도 남아 있다. 등산객들이 취사(炊事)할 물을 이왕이면 직접 샘에서 기르려고 하다 보니, 샘이 더럽혀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두랄루민과 가시 철망으로 샘을 보호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럴 수박에 없다고 생각은 했지만, 내 마음은 편하지가 않았다.
삼나무/솔송나무/느티나무 등 수백 년이 된 나무들의 당당한 풍채에 비해, 이 가시 철망이나 두랄루민은 정말이지 궁상스러울 뿐만 아니라 추하고 천박했다. 이런 궁상스럽고, 추하고, 천박한 짓을 왜 하지 않으면 안되었을까? 이런 일을 하게 만든 인간의 행동거지가 추하고, 경박하고, 생각이 모자라기 때문이 아닐까? 옛날에 길 가던 나그네는 샘물을 소중히 알고, 정갈하게 간수했으며, 뒤에 찾아 올 나그네가 상쾌하게 쉬어 갈 수 있도록 마음을 썼다. 이는 여행객의 도덕이고 습관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생가에 버드나무를 심은 것도 나그네를 생각해서였다. 그 나무 그늘에서 땀을 식히고, 한숨을 돌리고, 다음 발걸음을 기운차게 내딛게 하기 위한 마음 씀씀이었다.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물에 대한 존경심이 없을 것이다. 갈수기(渴水期)에 물이 잘 안 나오면 그 때서야 물의 고마움에 대해 조금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때에도 수도국이나 시 행정(市行政)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는 게 고작일 것이다. 물도 수도 문제나 수자원 문제가 되었고, 정치적 문제 혹은 정치적 대상이 되어 버렸다. 현대에 있어, 이는 불가피한 일일는지 모른다.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불만이다. 현대에는 수많은 문제가 기계적이거나 정치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럼으로써 의심스럽고 신성한 것의 베일이 벗겨지고, 정체가 폭로되고, 대중의 비판에 의해 올바른 궤도에 오른 것도 많다. 이런 점을 인정하지만, 물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내 불만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샘가에 서서 두랄루민도 가시 철망도 필요 없던 시절을 생각한다. 옛 사람들은 논밭을 적셔 주고, 마실 물을 제공해 주는 샘이 있는 곳을 신성한 장소로 여기며, 감사하는 마음을 지녔을 것이다. 동시에 이해(利害)를 떠나, ‘심구무원주, 원궁수불궁(尋究無源水, 源窮水不窮)인 물에게서 어떤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것, 인간의 지혜나 힘을 초월한 무엇인가를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외경심을 지녔을 것이다. 신성한 장소는 더럽혀서는 안 된다. 소홀히 해서도 안 된다. 함부로 드나들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느끼고, 이를 자자손손(子子孫孫)에게 지키게 했을 것이다.
내가 ‘외경심’ 이라 한 것은 무언가 위대한 것, 사람의 힘이나 지혜가 미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삼가고 어려워하는 마음가짐을 말하다. 최근 ‘대화’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이야기를 나누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 대화를 통해 일을 처리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대화로 만사 처리가 가능하다는 인간의 오만한 생각이 은연중에 내포되어 있다. 인간의 지식이나 힘으로 해결하지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신성하고 초월적인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외경’의 감정이나 정서가 급속히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샘물이 솟는 곳, 몇백 년 된 노목이 우뚝 서 있는 곳, 조상들이 외경하던 장소에, 주스통이나 사이다병을 버리고, 초콜릿 은박지를 버리고, 나무 껍질을 벗겨 자기 이름을 새기는 따위의 행위는 외경심을 상실한 데서 나오는 당연한 귀결(歸結)이다. 서로 깨끗한 물을 길으려고 수원지를 오염시키는 일도 생기고, 그래서 가시 철망으로 수원지를 둘러쌀 필요도 생긴다. 그리고도 그런 일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은 이를 공중 도덕의 결여라는 말로 설명한다. 공중 도덕의 결여는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쉽게 보이는 현상이다.
내가 문제삼는 것은 사회 도덕이나 공중 도덕 같은 인간과 인간 간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과 인간을 초월한 것과의 관계, 나와 나 이상의 그 무엇하고의 관계이다. 사회 도덕이나 공중 도덕은 교육, 텔레비전, 저널리즘 등을 통하여 서서히 나아질 수 있고 나아져 가고 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외경심이란 공중 도덕의 경우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 하면, 근대라는 시대는 이 ‘외경심’, ‘두려움’을 없애려는 방향으로 발전하여 왔기 때문이다. 근대화란 바로 두려움의 감정이나 정서를 불식하는 과정이었다.
17세기 데카르트 이래 인간은 이성의 힘을 믿고, 이를 올바르게 사용하면 이 세상에 불가해(不可解)란 없다고 생각해 왔다. 즉, 이간의 지식이나 능력에 대하여 무한히 신뢰하는 방향으로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 이것이 근대를 근대답게 만든 근본적 특징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간 이상의 것, 형이상학적인 것, 신성한 것은 인지가 덜 발달된 시대의 유물이나 무용지물(無用之物)로 간주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이러한 것이 유럽 근대의 특색이다. 유럽은 과학 기술의 선진화(先進化)로 세계에서 우위를 점하였고, 유럽의 근대가 세계의 근대가 되어 왔다. 우리의 근대화가 촉진될수록 외경심 같은 감정은 청소년 사이에서 사라져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외경심 ― 두려워하고 삼가하는 마음 ― 은 자기를 초월한 존재와의 관계에서 자생하는 감정이다.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를 무용화(無用化)하고 거부함으로서 성립된 근대가 이 고도의 감정을 상실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당연성이 정당하다고는 할 수 없다. 지금 우리는 근대라든가 근대화를 비판하고, 근대가 인간을 얼마나 왜소화(矮小化)시키고 미세화(微細化)시켰는가를 생각해야 할 때이다.
자연은 인간의 지식으로 쉽게 분석되고 해명될 만큼 얄팍한 것이 아니다. 웅대한 자연의 생명에 접하지 못하게 될 때, 인간의 삶은 그 깊이를 잃게 될 것이다. ‘심구무원수, 원궁수불궁(尋究無源水, 源窮水不窮)’이라는 한산시(寒山詩)중의 일절은 오늘날에도 그 심오한 의미를 상실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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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사회/문화/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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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마카아벨리 평전 - 제16장 (무료함) 속의 글쓰기 - 당나귀, 만드라골라, 벨파고르
정치에서 물러나 지난 몇 년 동안의 고통과 최근 몇 달 간의 각성을 경험하고, 교황의 원한과 우르비노 공의 어리석은 무관심으로 인생 행로에 거의 결정적인 낙인이 찍히자, 마키아벨리는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심기를 다독거리고 스스로의 재능을 분출해 내고자 하였다. 그의 글들과 마찬가지로 무료한 삶 역시, 반드시 그가 처한 역경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우리가 문학이라 부르는 그러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우리는 이 사람의 내밀한 불안감이 그의 한숨만큼이나 그가 짓는 냉소를 통해 측정될 수 있음을 이미 터득한 바 있다. 그는 이제 갑자기 그 냉소와 한숨으로 글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글은 다름아닌 (당나귀 L'Asino) 이다. 이 작품이 보통 (황금 당나귀)로 불리는 것은 뒤에 변조된 것으로 옳지 않다. 테르차 미라 terza rima (11음절구 3행 시절-옮긴이)의 형식으로 씌어진 이 단시는 단테 풍을 따르되 그것에 풍자적인 향취를 더한 것이다. 이 작품은 여태까지 커다란 오해 속에 다만 무시되어 온 측면이 있지만, 사실은 그런 상태로 방치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짐승으로 변장하여 진짜 짐승 같은 사람들을 깨문다는 작자의 생각은 기발하다. 이 위대한 산문 작가의 시들이 중중 그러하듯이, 이 시의 많은 부분이 산문 조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떤 구절들은 매우 훌륭하다. 하지만 여기서 더욱 관심을 끄는 것은 그 내용의 자전적 성격으로, 이는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측면이다. 이 단시는 그 때문에 작자가 명예로워지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작자 덕분으로 작품이 명예를 얻는 그러한 것이다. 그의 독설적인 어조는 첫 행에서부터 확연히 드러난다. 그는 도움을 바라기 위해 페보 Fobo/Phoebus(아폴론을 말함. 마키아벨리는 바로 앞에서 자신의 시를 빛내기 위해 그의 활과 화살통과 하프를 내리도록 빌지는 않겠다고 읊는다-옮긴이)를 귀찮게 하고 싶지는 않다고 분명히 밝힌다.
그런 호의가 부탁한다고 얻어지지는 않기 때문이지.
이제는 안 돼. 그리고 난 잘 알고 있네.
당나귀 툴툴거리는 소리에 하프는 필요치 않다는 것을.
그는 곧 자신이 (군주론을 통해 얻으려 했던 것처럼!) 그런 (대가와 보상과 또는 공적)을 찾지 않을 것이며, 설사 (공공연한 것이든 은밀한 것이든 어떤 중상모략으로 인해) (군주론 때문에 일어났던 것처럼!) 그가 상처를 받더라도 개의치 않겠다고 천명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인다.
물리든 맞든 난 개의치 않네.
언제나 그런걸. 난 그걸 닮았다네.
내가 노래하는 그 녀석(당나귀)의 모습을.
그는 마치 당나귀처럼 물리고 채이는 것에 별반 마음 쓰지 않을 것이다. 과거 남을 그와 같이 대했던 그는 많은 날들을 (매우 조용히, 그리고 친절하고 참을서 있게) 지내왔다. 오랫동안 사람들을 살펴보면서 세상 여기저기를 주유했던 그는 이제 입장을 바꾸어 자신의 행동이 평가받는 것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다.
그래서 우리의 당나귀야, 그토록 많은 계단들을
우리들의 이 세상에서, 오르락내리락 했었지
이 모든 인생사를 살피기 위해.
(...)
하늘이라도 너의 울음소리를 막을 수는 없을거야.
유감스럽게도 첫 장에서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시는 변신을 앞둔 최적의 시점에서 끝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전에 니콜로는 자신의 쓰라린 운명을 다시 한탄한다.
옛 사람이든 지금 사람이든
(...) 아직 그 누구도 맛보지 못했으리.
더 깊은 배반감을, 더 큰 고통을.
아울러 그는 (리비우스 논고)의 한 장에서처럼 국가와 그것의 쇠퇴를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필치로 그려낸다. 하지만 우아하고 힘찬 맛은 떨어진다.
단테를 모방한 시에 당연히 베아트리체가 빠질 수는 없는 법이다. 설사 그 베아트리체가 힘이 약하고 고귀함이 덜한 짐승들까지도 포함해서 모든 야생 동물들의 보호자일 뿐이며, 자신의 시인과 잠자리를 같이하는, 덜 정숙한 그런 베아트리체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가 그녀를 통해 당시 자신이 사랑하던 여인의 모습을 그리려 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그녀야말로 어두운 불운의 골짜기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그를 받아들여 위로하고 다시 활력을 불어넣어주지 않았던가. 물론 그가 짧은 시간만이라도 스스로를 위하여 당나귀로 변신하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지만. 이 연애 사건에 대해서 우리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우선 그것이 얼마나 계속 되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 사건이 그가 작가로서 새로운 힘을 얻는 데 얼마나 영향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만일 그녀에게 그만한 영향력이 있었다면, 그녀는 분명코 한번 정도는 그를 변신케 했으리라.
마키아벨리는 무미건조하고 활기 없는 장을 몇 개 쓴 뒤에 (당나귀)를 중도에서 끝내 버렸다. 아마도 당시 그는 시가 자신을 정치로부터 물러서게 만든 그런 잔인함을 이겨내도록 해주고 어떤 내밀한 기쁨으로 그를 위로해 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는 우리 역시 그랬듯이 시작의 시작을 즐겼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마무리를 위해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 그 생각들을 좋아하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이야기했고, 그 일부는 아마 친구들에게 일게 했던 듯싶다.
이 시기의 친구 관계나 독서 경향 역시 좀더 문학 쪽으로 기울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1517년 12월 17일, 로마에 있던 시인 뤼지 알라만니에게 편지를 쓴다. 그는 여기서 또다시 도나토 델 코르노의 그 이를 부탁하고 있는데, 델 코르노는 아직도 신사들 사이에 앉아보는 희망을 이루지 못한 상태였을 뿐 아니라 1512년에 줄리아노 데 메디치에게 빌려준 돈 500피오리노도 되돌려받지 못한 처지였다. 그런데 그는 이 일에 관해 얘기하다가 갑자기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아리오스토의 (광란의 오를란도 Orlande Furioso)를 읽어보았네. 시의 짜임새가 전체적으로 매우 훌륭하고 저알 찬탄을 금할 수 없는 곳도 많이 있더군. 그런데 만일 그가 그곳에 자네와 함께 있거든 내 이야기를 하고 이 말을 전해 주게나. 오직 한 가지, 내가 애석해하는 일은 그가 그토록 많은 시인들에 대해 얘기하면서도 정작 나만은 쏙 빼놓았다는 것이며, 나의 시 (당나귀)에서라면 그가 (광란의 오를란도)에서 나를 대접한 그런 방식으로 그를 대접하지는 않으리라는 것 말일세.)
이처럼 서로간에 엄청난 차이를 가진 두 시를 한데 모아보노라면 얼굴 가득히 퍼져나가는 미소를 어찌할 수 없다. 아리오스토가 그토록 많은 그렇고 그런 시인들을 언급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쏙 빼놓았다는 서기장의 유감 어린 말은 생각보다는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한 기품 있는 비평가는 이에 대해 마키아벨 리가 스스로 지닌 능력과 스스로 그러리라 생각한 능력을 혼동하고 있다고 퉁명스럽게 말한 바 있다. 나는 그보다는 차라리 그가 스스로 마음으로 느꼈고 (군주론)의 산문 속에서 쏟아냈던 시적 감흥을 자신이 운문 형식으로 표현했던 실제의 다소 저급한 시와 혼동했다고 말하겠다. 마키아벨리의 것으로서 아리오스토가 알고 있었을 법한 시라고 해봐야 첫 (십년기) 정도였을 것이고, 혹시 필사본 상태로 회람되고 있었던 (당나귀)의 몇 장쯤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문학적인 마키아벨리. 더욱이 학구적인 모습의 마키아벨리. 이는 사실 (당나귀)에서 노래한 경우와 비교할 때 훨씬 더 놀라운 변신이 아닌가! (물론 이러한 비교로 문학자들을 폄하하려는 뜻은 조금도 없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그는 루첼라이 원 Orti Oricellarei에서 열린 학인들의 노임에 단골 손님으로서 드나들고 있었다. 이 모임에 관해서는 앞서 언급한 바 있지만, 나로서는 그것이 어떻게 해서 하나의 학당으로, 더욱이 플라톤 학당의 연장이라고까지 이야기될 수 있는지 그 정당한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당시 모임의 주최자인 코지모 루첼라이는 몸이 불편한 상태였는데, 이것이 오히려 앎에 대한 그의 호기심을 키워놓았다. 그래서 피렌체의 영민한 청년들이 그의 야외 침상 주위로 모여들었고, 이 덕분에 문인, 군인, 법조인 등 다방면의 재능 있는 사람들이 피렌체에 들러가게 되었다. 이 모임에 가장 열성적인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뤼지 알라만니, 두 명의 흐란체스코 다 디아체토, 디아체티노, 야코포 나르디, 필리포 데 네를리, 바티스타 델라 팔라, 안톤프란체스코 델리 알비치 등이 있었다. 그리고 자노비 부온델몬티도 언제나 그곳에 있었는데, 피렌체의 서기장은 교황 줄리오 2세의 재워 초기 로마 교황청에서뿐 아니라 바로 그의 집에서 아리오스토와 만나 면식을 텄음에 틀림없다. 둘 사이에 이미 친분이 있다는 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마키아벨 리가 알라만니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같은 편지에서 그 단골 손님들이 루첼라이의 정원에서 그랬듯이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본다. 당시는 커다란 나무들이 이루는 시원한 그늘 밑에 기분 좋게 앉아 있을 그런 게절은 전혀 아니었다. 그리고 모임의 주도권은 로마의 알라만니와 네를리에게로 넘어가 있었으므로, 마키아벨리는 그들이 뒤에 남겨놓고 간 (가엾고 불행하고 추위로 죽어가는) 사람들도 생각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즉 (살아 있는 흉내라도 내기 위해서) 자노비 부온델몬티, 바티스타 델라 팔라, 그리고 그는 수시로 만나서 그들이 게획중이던 플랑드르로의 여행에 대해 의논하곤 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길을 가고 있다고 꿈꿀 정도로 이 여행 계획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에, 정작 실제의 여행에서 느낄 즐거움을 벌써 반은 소진해 버린 상태였다. 그들은 또 여행중에 베네치아로 가서 사육제를 보는 (짤막한 일정)도 잡아 놓았다. 하지만 길을 떠난 뒤 친구들을 모으기 위해 일단 로마에 (들를) 것인지, 또는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린 뒤 합류하여 (곧장 떠날) 것인지는 아직 미정이었다.
아마도 이는 단지 그냥 계획에 불과했던 것 같다. 그러나 한 가지 실현된 것도 있었다. 니콜로는 몇몇 피렌체 대상인의 의뢰로 사순절 기간 동안 제노바에 다녀왔던 것이다. 그의 소임은 투자처의 파산에 대비하여 최대한 손실을 줄이는 일이었다. 1518년 3월 3일 그는 출발 직전에 있었고, 26일에는 그를 보낸 사람들에게 제노바에서 편지를 썼다. 4월 8일, 그들은 그에게 이 지겨운 일의 처리 방법을 자세히 일러 보냈고, 14일에는 그에게 다시 편지를 써서 협상에 진전이 없으면 돌아오라는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20일까지도 여전히 피렌체에서 그에게 부치는 편지가 전해지고 있었다. 우리의 전임 서기장이 다시 길을 나서게 된 것은 단지 멏 푼 안 되는 돈을 벌기 위해서라기보다 그저 몸을 움직여 스스로 (살아 있는 흉내라도 내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는 피렌체 공화국이나 그 외의 다른 공화국들, 혹은 제후들의 사절 직은 아니지만 이러저러한 상인들의 대리인 역할도 마다 않았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지금 그가 이야기할 것은 온통 줄 돈과 받을 돈, 그리고 염료와 옷감에 대한 것뿐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그가 메디치의 군주들, 그 중에서도 특히 점점 더 오만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로렌초의 애정과 호의를 기대하기는 틀린 상태였다. 베토리는 프랑스에 가 있었고, 이후 로렌초와 함께 귀국할 예정으로 있었다. 로렌초가 단순한 시민의 모습을 벗어던진 것처럼, 그 역시 더욱 궁정의 조신처럼 변해서 말이다. 마키아벨리는 최근의 상처를 여전히 아파하면서도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인다. 군주들이 자신을 알아주고 호의를 베풀 것이라는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에서, 그는 루첼라이, 부온델몬티, 로렌초 스트로치 등 사사로운 위치에 있는 인물들의 평가와 관대함에 몸을 기대었다. 우리로서는 그러한 관대함이란 게 어떤 것이었는지를 모르며, 추측이란 것도 무언가 실마리가 없을 때는 별 소용이 없는 법이다. 단지 마키아벨리 자신이 그것을 인정하고 있고, 원회에 단골로 오는 한 사람에 의하면 그가 (약간의 수입)을 얻었다는 점이 알려져 있는 정도이다. 짐작건대, 그가 지고 있던 자그마한 액수의 빚을 탕감해 주었거나, 또는 문학에 대한 스트로치의 욕심이나 다른 사람들의 장사 잇속에 어떤 도움을 준 데 대한 보답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들은 이러한 도움과 함께 그를 친절하고 인간적으로 대해 주었으며 그의 재능을 알아주었는데, 그에게는 사실 이러한 것들이 돈보다도 더 귀중한 것이었으리라. 그리하여, 그는 이렇게 자신을 (따뜻이 감싸주고 친절로써 도와주는) 훌륭한 친구들 사이에서 마침내 그의 가치를 인정해 주고 (그의 모든 저술들을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들을 찾아내게 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보여준 이러한 호의가 그를 기쁘게 했다면, 루첼라이 원회에서의 격조 높은 이야기들은 그의 마음을 고양시키고 자극하였다. 그는 당시 이미 그곳에서 커다란 호응 속에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사 첫 10권에 대한 논고)를 읽고 있었을 가능성이 짙다. 이 저술은 깊은 뿌리를 가지고 움츠려 있다가 산탄드레아 시절 초기에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이후 그가 이 책에 손을 댄 것은 아마 사랑의 격정이 식고 난 후인 1515년 전반기쯤이거나, 더 확실하게는 1516년이었고, 1517년에도 재차 그 작업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옛 저술로 되돌아갔다는 것이 곧 문학에서 정치로 복귀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 공화주의적 담론들은 그것이 메디치 군주들의 전성기에 문인 모임에서 읽혀졌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정치적이기보다는 문학적인 냄새를 풍긴다는 해석이 좀 더 그럴싸하게 들린다. 당시는 아직 정치가 이론을 벗어나 논의되던 때가 아니었고, 레오네 시대의 그곳 단골들은 지금까지의 어떤 잘못된 주장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메디치파였다. 오히려 마키아벨리야말로 그들 중에서 메디치 가와 가장 거리가 먼 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시원한 그늘 아래서 그 똑똑한 청년들에게 (리비우스 논고)를 읽어주었다. 그들은 자신의 저술을 적어도 (사냥개)보다는 더 중히 생각해 주는 사람들이었다(로렌초가 (군주론)을 헌정하는 마키아벨리보다 사냥개를 바친 사람에게 더 친절히 대했다는 일화를 뱃댄 말. 이 책 15장 265쪽을 볼 것-옮긴이). 그들 중 하나였던 필리포 테네를 리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이들의 요청으로 이 때 읽은 것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 이를 자신에게 가장 잘 대해 준 코지모 루첼라이와 자노비 부온델몬티에게 헌정하였다. 책머리의 헌정사는 아마 이 당시 그의 심정을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일 것인데, 놀라운 것은 지금까지 어떤 전기 작가도 그것이 뜻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헌정사의 의도는 그토록 오랫동안 그의 재능을 업신 여기고 (군주론)마저도 무시해 버린 사람들에 대한 분노의 질책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저자가 자신의 이 새로운 책을 군주가 아니라 (수많은 미덕으로 그보다 훨씬 더 나은) 사사로운 위치의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지위와 명예와 부를 내릴 수도 있었을 사람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사람에게, 국가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통치자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바치고 싶다고 언명하는 대목의 행각에서 다름아닌 로렌초의 이름을 읽어낼 수 있다. 이러한 헌정사를 읽노라면, 책보다 (사냥)개를 더 반겼다는 일화가 더욱 그럴 듯하게 보인다.
만일 그의 대작들이 빛나고 있지 않았더라면, 이 시기는 이른바 (모든 것을 잃은 뒤) 마키아벨리의 생애에서 가장 어두운 때가 되었을 것이다. 전지 작가와 문학사가들이 지금까지 생각지 못한 새로운 점들을 감안해 볼 때, 나는 처음엔 (메쎄르 니차 Messer Nicia) 또는 (칼리마코와 루크레치아의 희극 Commedia di Callimace e di Lucrezia)으로 불리다가 뒤에 가서는 (만드라골라)로 더 잘 알려진 희극 작품의 저술 시기가 1518년 사육제 기간이라는 사실을 확신한다. 이는 문서보관소의 관련 문서들만큼이나 쓸모 있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문서 자료의 부족을 한탄하는 전기 작가들에게도 위안을 줄 만한 사료이다. 이 희극 작품의 우아한 프롤로그 속에는 (리비우스 논고)의 헌정사에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쓰라린 심정이 담겨 있다.
설사 이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너무 가벼운 내용이라
자신은 현명하고도 무게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분들에게 말이죠.
하지만 너그러이 생각해 주세요.
이 헛된 생각을요.
다만 그의 쓸쓸한 마음을 달래려는 것뿐
다른 어떤 곳에서도
달리 할 일이 없으니까요.
나에겐 모든 것이 막혀 있죠.
다른 것으로 능력을 보여줄 길이.
흘린 땀에 아무런 대가도 받지 못한 채.
그는 이보다 조금 앞선 (당나귀)에서,
땀 흘린 아무런 대가도 없이
라고 읇은 바 있는데, 이제 여기서 다시금 (또 다른 목소리와 또 다른 모습으로) 자신의 위로받지 못하는 슬픔의 감정으로 되돌아간다. (당나귀)에서 그는 사람을 물어뜯는 옛 기술로 되돌아가리라고 위협한바 있는데, 이제 (만드라골라)에서도 역시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다. 그는 군주들, 그리고 지위와 고귀한 신분과 부에서 자신의 위에 있는 사람들 면전에다 경멸투로 자존의 말들을 던진다.
만일 누군가가 험담을 퍼부으며
그의 머리채를 잡아 흔들고
그에게 겁을 주거나 그의 마음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나는 경고하리라 그리고 이렇게 말하리라.
그 또한 욕설을 퍼부을 줄 알며
이것이 그의 첫번째 기술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세상 어디서든
우리말이 들리는 곳이라면
그는 아무에게도 굽히지 않으리
비록 겉으로는 아래에 있어도
자신보다 더 좋은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이미 우리에게 이 작품이 걸작이리라는 확신을 느끼게 하는 이 프롤로그는 그의 전기적 측면, 즉 자전적 측면을 보여주는 주요한 사료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실 마키아벨리는 그의 희극 작품들 어디서나 나타나서, 나라와 신앙의 결점과 달리 어떻게 할 수 없는 자신의 불행을 웃어넘기고 있다. 한 위대한 근대 시인의 산문 속에서 이야기된 것처럼, 그러한 웃음의 힘은 무시무시할 정도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마키아벨 리가 가장 애호하는 무기인 것이다. 이미(당나귀)에서 그랬듯이, 그는 자신의 방어를 위하여, 눈물의 부끄러움으로부터 스스로를 구하기 위하여 웃음을 사용한다.
하지만 남자에게 눈물이란 언제나 보기 흉한 법이므로,
운명과 마주할 때면
눈물 없는 얼굴로 다가설지니.
감히 말하건대, 마키아벨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오랫동안 겪어 왔고 또한 (군주론)에 대한 잔혹할 정도의 실망감에서 절정을 이루었던 고통과 Tm라림도 (만드라골라)에서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스며 나오는 냉소 없이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점을 알고 있을 것이다. 바로 여기 이러한 분위기에서 그가 홀로 되씹었던 짤막한 시구들이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웃네. 하지만 웃어도 마음은 허망하기만 하네.
나는 태우네. 하지만 불꽃은 밖으로 피어나지가 않네.
이 놀라운 희극 작품에서 명확지는 않지만 어떤 도덕적, 사회적 목적을 찾아내려 한 사람들도 있었고, 그것이 그냥 웃음을 주는 외의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 당신이 웃지 않는다면
약속하지요. 당신 술값은 내가 내기로.
나는 마키아벨 리가 이 작품을 쓰면서 어릿광대극이나 풍자극을 생각하기보다는 그저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때로는 웃고 때로는 우는 그러한 억누를 수 없는 시심에 따랐으리라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굳이 어떤 목적을 찾는다고 할 때, 이처럼 사람을 생각도록 하는 작품이 단지 웃음을 주기 위해서 씌워졌을 뿐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작품에서 풍겨오는 시적이고 인간적인 감흥만큼이나 그것이 유발하는 생각들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리비우스논고)의 저자보다는 (군주론)의 저자를 더 쉽게 만날 수 있다. 물론 어떤 면에서 냉소적 주장과 (건달 같은 얼굴)을 한 티모테오 신부를 (리비우스 논고) 1권 12장(신앙심을 유지케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로마가톨릭 교회가 신앙심의 유지에 실패함으로써 이탈리아가 어떻게 쇠퇴해 왔던가에 대하여)에서 이론화된 개념들의 예술적 재현이라고 볼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작품에서는 희미하기는 하지만 어떤 비극의 냄세가 난다. 이 피렌체인의 몇몇 편지들이 그렇고 또 그이 일상생활이 그렇듯이, 그것은 미소 혹은 조소가 쫓아와 한숨을 흩날려버릴 때까지 희극적 광대극의 유쾌한 웃음을 바짝 얼어붙게 만드는 것이다. 바보스런 니차의 입을 빌린 재치 있는 기지도 보이고, (이곳에서 우리같이 권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개도 짖지 않는다)는 말처럼 거의 자전적 성격의 대사들도 있다. 전기 작가라면 이처럼 희미해져 버린 자신의 경계를 감히 넘어서려고 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지금 이야기한 것처럼, 마키아벨리는 (만드라골라)에다 스스로의 모습을 너무나 짙게 채색해 놓았기 때문에, 바로 앞의 대사에서 보듯이 그러한 모습이 표면에 나타나지 않을 때조차도 그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인 것이다.
나로서는 그가 이 작품을 쓸 당시 느꼈던 희열, 그가 이 작품을 언제나 스스로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꼽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그의 희열이 글의 전편에서 발산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이상은 하지 않겠다. 그러한 감정은 (군주론) 속에서 느껴지는 것과 같은 것으로, 걸작품의 창조와 함께 하는 즐거움인 것이다. 이로써 모든 것이 설명된다. 고전적 전법으로부터 거의 완전히 독립되어 있는 형식상의 새로움, 등장 인물들의 현대성과 인간미, 그들 중에서도 특히 플라우투스 Titus Maccius Plautus(대략 기원전 254년에서 184년에 걸쳐 살았던 로마의 희극 시인.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이 음모를 꾸미는 자이다-옮긴이)에게서 봄직한 식객 역할의 리구리오(그는 시장에서 만난 한 평범한 피렌체 사람을 꼭 닮았다). 이 새로운 요소들 모두가 그처럼 앞의 시대와 깊이 연결되어 있는 인물에게서 나왔다. 이 모든 연결고리를 깨뜨리고 이 작품을 만들어낸 것은 다름 아닌 천재성과 결합된 시 바로 그것이었다.
(만드라골라)는 무대에 오르기 전에 루첼라이 원회에서 먼저 읽혀졌을 법하다. 사람들은 아마 로렌초가 프랑스인 신부를 데리고 돌아왔을 때(1518년 9월 7일) 열렸던 대규모 축하연 기간중에 공연이 있었으리라 믿고 싶어할 것이다. 혹은 그 혼약을 기리는 축제 기간이 더 가능성이 높을지도 모르겠다. 이는 물론 그 당시 작품이 이미 완성되었고 아울러 배우들도 자신의 역할을 숙지한 상태였다는 가정 하에서 가능한 일이지만 말이다. 만일 이러한 조건이 성립만 한다면, 마키아벨리가 메디치 가에 대해 품었던 불신과 분노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추측은 매우 그럴 듯하게 돌 것이다. 한편, 1519년의 사육제 기간 동안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피렌체에서 열린 축제는 거의 없었다. 로렌초가 중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5월 4일, 그는 결국 27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그의 행동거지는 시민들 사이에 반감을 불러왔고, 그 역시 자신의 방식대로 다스릴 수 없었던 도시를 싫어하였다. 말년에 들어 그가 신임한 인물은 필리포 스트로치아 프란체스코 베토리뿐이었지만, 그들은 이러한 위치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를 위해 아무런 힘도 되어주지 않았다. 로렌초는 소인베들을 가까이했고, 수다쟁이에다 대식가 였다. 그래서 (교황은 그가 잘 먹고 잘 떠들 수 있도록 매년 200스쿠도의 연금을 내렸다). 하지만 교황이든 그 조카든 정작 먹고 떠드는 것 외에 다른 것도 잘할 줄 알았던 마키아벨리에게 내려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 모두가 로렌초의 이러한 죽음에 실망했다 하더라도, 메쎄르 니콜로만은 슬퍼하지 않았을 것임이 확실하다. 그러나 같은 해에 있었던 또 한 사람, 즉 코지모 루첼라이의 죽음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이후로도 원회가 계속되기는 했다. 그가 정원을 삼촌들인 팔라와 조반니에게 물려주었기 때문이다. 팔라는 그야말로 이름뿐인 문인이었으나 조반니는 진짜였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원회에 대해서나 니콜로에 대해서나 커다란 손실이었다. 원회로서는 그것을 이끌어오던 정신을 상실한 셈이고, 니콜로로서는 격려와 찬사 이상을 주던(물론 이러한 것이 그가 가장 바라던 도움이었다) 너그러운 후원자를 잃은 셈이었다.
마키아벨리의 문학 작품들 중, 저작 시기의 이유 때문에 여기서 이미 언급했던 것들 외에, 비슷한 주제를 가지고 있고 그 저술 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그래도 대략 이 시기로 비정되는 다른 작품들도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여기서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름다운 장시(세레나타 Serenata)처럼, 일찍이 포스콜로가 전편을 외우고 있다고 자랑한 바 있고 시간적으로도 연애 사건 당시에 씌어진 것이라 여기서 빠질 이유가 없는, 드문드문 나타나는 그의 시구들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우리 말 논고 Dialogo intorno alla nostra lingua)와, 원래는 (파볼라 Favola) 또는 (아내를 차지한 악마 Il demonio che presenogle)였다가 지금은 (벨파고르 이야기 Novella di Belfagor)로 불리는 설화적 작품들이다.(노벨라 novella)란 현대 이전의 설화체 문학이나 현대의 소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를테면 보카치오, 뤼지 피란델로의 작품연대가 불분명하고, 특히 (우리 말 논고)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지만, 마키아벨리의 전기에서 이러한 작품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 말 논고)가 과연 마키아베리의 저술인가에 대해 지금의 비평가들과 문학사가들은 그렇다는 데 합의를 보고 있지만, 사실 뚜렷한 증거는 없는 상태이다. 그의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문체는 제쳐두고라도, 당시 그처럼 낡은 논쟁에 대해 그토록 새로운 점들을 이야기할 만한 사람은 그 외엔 생각할 수가 없다. 이를테면, (한 도시에 새로운 교설이나 새로운 기술이 들어올 때면 언제나) 어떤 말이든 신어를 필요로 한다는 주장 같은 것이 그 좋은 보기이다. (무릇 언어란 어느 한 나라의 것이라고 얘기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나라들에서 가져온 어휘들을 스스로의 용법 속에서 변용할 뿐만 아니라, 차용된 어휘들로 인해 원래의 나랏말이 바뀌기보다는 오히려 그 빌려온 어휘들을 바꿀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이 바로 마키아벨리이다.
그리하여 그는 언어에 대해 글을 쓴 다른 저술가들에게서는 보기 힘든 독창성과 날카로움을 가지고, 특히 (속어 웅변론 De vulgari eloquentia)의 재발견 이후 당시 크게 유행했던 논제,즉 (고전 로마의 ) 언어와 피렌체의 언어에 관한 문제를 자세히 고찰하고 있다. 그는 단테 같은 인물과의 논쟁도 불사하고 있으며, 논쟁 당사자이자 동시에 판관이라는 유리한 위치를 십분 활용하여 어렵지 않게 승리를 거두고 있다. 모두가 알다시피, 논쟁중에 던진 (비난은 그 결말과 무관하기) 때문에, 나는 그가 단테에 대하여 비난조의 말들을 던졌다고 해서 그것이 이 책을 피렌체 서기장의 저술이 아닌 것으로 볼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단테야말로 마키아벨리가 산탄드레아의 숲에서 몸에 지니고 다녔던 책들을 쓴 당사자였고, 그가 (십년기)와 (당나귀)에서 그의 글을 모방하였으며, 자신의 사적인 편지들 속에서 종종 기억을 통해 당시 어떤 사람보다도 더 자주 인용하곤 했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고서도 그러하다는 말이다.
(멜파고르 이야기)는 마키아벨리 자신이 지어내어 저녁 식사 자리나 술자리에서 재미있게 들려주었던 많은 이야기들 중 유일하게 글로 옮겨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몇몇 편지들과 함께 마치 그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은 이 문학 장르에서 그가 과연 어느 정도로까지 뛰어날 수 있었던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 만일 (만드라골라)가 한 비평가에게 한 편의 극화된 설화같이 보였다면, 다른 비평가에게 (벨파고르 이야기)는 시나리오 줄거리를 따온 것처럼 비쳤다. 아마 둘 다 옳은 말일 것이다. 이 문제는 여기에서 지면만 허용된다면 더 논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지적해야겠다. 그것은 최상급의 이탈리아 작가들 중에서도 하나 이상의 문학 장르에서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는 사실이다. 마키아벨리야말로 그의 천재성이 발휘된 거의 모든 곳에서 최상의 위치에 섰거나 후세에 깊이 족적을 남겼던 인물이었다. 그는 정치와 역사 저술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고, 설화 문학에서는 단 한 작품만을 남겼을 뿐이지만 그 수준 역시 탁월하였다. 그는 희곡에서도 역시 한 작품만을 썼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자발적인 영감 덕택이지, 친구들의 권유에 못 이겨서도 또는 어떤 행사를 기념할 목적에서 상투적인 라틴적 전범에 의거하여 제작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러한 영감은 그로 하여금 이탈리아 희곡 전체를 통틀어 최상급의 희극 작품을 생산해 내게 하였다. 이에 비하면 아리오스토조차도 평범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것은 당시까지 근대의 어떤 작가가 쓴 작품보다 뛰어나며, 아마 시대를 뛰어넘어 최고의 작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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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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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5. 지헤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돈
돌고 도는 돈
돈은 돌고 돈다. 돌고 도는 돈이니 언젠가 내 차례가 온다는 자신감을 갖고 열심히 별 궁리를 해보자. 한가지 주의할 것은 하느님이 복을 주어야 부자가 되지, 죽어라고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신중한 계획을 세우고 성실하게 일하면 부유하게 되고 조급하게 굴면 가난하게 된다는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또 나쁜 짓을 하여 돈을 모으지 말자. 공자는 ‘의롭지 못한 부귀는 뜬 구름과같다’고 하였고, 솔로몬은 ‘속여서 얻은 재산은 사라지는 안개요, 죽음의 덫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재물을 보고서 구차스럽게 얻으려 하지 말고 옳은 방법으로 돈을 모으라’는 공자 말씀에 따라성실하게 행동하자. 어진 사람은 재물로서 몸을 일으키고, 어질지 못한 사람은 몸으로 재물을 모은다고 대학도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모은 돈을 쓰는 법
어느날 공자의 제자 자공이 공자에게, “돈이 많고서도 교만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하고 묻자, 공자는 “그것도 좋지만 돈이 많고도 예를 좋아함보다 좋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공자는 돈이 많다는 것에 아무런 반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 돈에 대하여 한보사건과 같이‘뒤가 구려서’숨기는 부정적 측면으로 보지 않고, 떳떳이 번 돈은 사회의 발전에, 긍정적인 방향에 쓰라고 가르쳤다. 장자는 공자와 달리 가난 때문에 초년에 죽을 고생을 하였다. 그러나 무위자연을 주장한 대철인답지 않게 노년에는 비단옷감을 생산하여 큰 돈을 벌었다. 그가 재산을 모은 이유는 꼭 써야 할 곳에 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써야 할 곳으로 다음 사항을 들었다. 애써 사람답게 살려고 하는데 곤궁함을 면치 못하는 사람, 전쟁으로 과부가 되거나, 고아가 된 사람, 아들 딸을 잃어 무의무탁한 노인 등이다.
노자는 “재물이란 그것을 덜어낼수록 보태어지고, 그것을 보탤수록 줄어든다”고 하여 고아, 과부와 가난한 자에게 돈을 쓰면 쓸수록 부태어지고 이런 데 인색하면 재산이 점점 줄어든다고 하였다. 하여간 ‘아낌 없이 돈을 써도 부유해지는 사람이 있고 지나치게 아껴도 여전히 가난에 찌들은 사람이 있다’고 성경의 잠언은 기록하고 있다. 선한 일에 아낌없이 돈을 쓰는 사람은 더욱 부유해질 것이며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은 자기 자신도 남으로부터 도움을 받게 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너는 물질을 후하게 나누어 주어라. 언젠가는 그것이 너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라, 이 땅 위에 무슨 재난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한다.
돈과 인간관계
“부자는 자기 몸을 괴롭히면서 일을 하여 많은 재산을 모으지만 그 재산을 자기를 위하여 쓸 수가 없다”고 장자는 말하였다. 그의 말대로라면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돈을 벌어 그것으로 자기를 위하겠다는 생각은 그릇된 것이라는 말이다. KAL기 괌 추락사건을 보면, 수천억의 재산을 가진 사람이 자기 부인과 아들, 며느리, 손녀, 딸, 외손자들과 같이 휴가 여행을 가다가 모두 죽은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 그가 남긴 수천억의 재산은 혼자 남은 사위에게 돌아갔다. 이렇듯 큰 돈이 있어도 죽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래서 돈을 사랑하는 자는 그 돈으로 만족을 얻지 못하고, 부유하기를 바라는 자 역시 그 수입으로 만족을 얻지 못한다고 성경의 전도서는 전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욕심은 한이 없다는 말이다.그런데 현실적으로 재산이 늘어나면 늘어나는만큼 소비도 늘어나기 마련이다. 또 늘어난 재산을 관리하다 보면 걱정과 근심이 끊임없이 늘어난다. 그러므로 일정 이상의 재산이 불어나게 되면 소유주의 눈과 귀만 즐겁게 하는 것 외에 아무런 유익이 없다. 솔로몬은 우리에게 “노동자는 먹을 것이 많든 적든 단잠을 잘 수 있으나 부자는 재산이 많으므로 이것 저것 생각하고 걱정을 하다 잠을 자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그는 이어서 ”나는 이 세상에서 헛된 것을 보았다. 어떤 사람은 자식도 형제도 없이 혼자 살면서 억척스럽게 일하며 모은 자기 재산을 만족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는 즐거움을 마다하고 누구를 위해 그처럼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일을 하는가?”라고 묻고 있다.
결론
솔로몬은 이러한 모든 일들이 헛된 것이며 불행한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가진 것이 없더라도 마음이 편한 것이 많은 것을 가지고 정신 없이 일하는 것보다 낫다고 하였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부자라고 한다. 욕심을 버리고 현실에 만족하는 삶이어야 부유하고 행복하다는 말이다. 노자는 “높은 자리를 차지하면 그 자리가 위태롭고, 얻기를 탐하면 잃기가 쉽다. 심히 아끼면 썩기가 쉽고, 많이 지니면 반드시 크게 잃는다.”고 하였다. 그는 ‘만족할 줄 아는 풍족함이라야 언제나 풍족하다’고 하였다. 노자가 부자나 돈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렸든 간에, 돈이나 재물은 ‘그것을 얻기 전까지는 그것을 얻기 위해 걱정과 근심을 하고, 또 그것을 얻고 나면 이미 얻은 것을 잃을까봐 걱정하고 근심한다’고 공자는 논어에서 밝혔다. 돈이 있으나 없으나 걱정과 근심은 똑같다는 말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걱정 근심하느니 보다 이미 얻어놓은 것을 잃을까봐 걱정하고 근심하는 것이 훨씬 더 좋지 않을까?’하고 생각한다. ‘잘 먹고 죽은 시신은 때깔도 좋다’란 말은 그래서 생겨났나 보다.
멍첨지
영국의 계관시인 테니슨(1809~1892)은 돈과 초연한 것같이 “고요함 외에는 기쁨이 없다”고 말하였으면서도 다음과 같이 읊었다.
세상만사 금전에 좌우되나니, 돈이 없으면 아무 일도 못 하느니라.
Ever door is barr`d with gold, and opens but to golden keys.
그는 많은 사람들이 실패의 쓴 잔을 마시고 성공하는 사람은 극히 적다고 하였다. 그는 돈을 벌기가 대단히 어렵고 힘드는 일이라고 우리에게 경고하였다.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건강’은 빌리지 못한다고, ‘칼국수’를 상식하는 대통령이 말했듯이 아무리 지혜로운 머리를 가진 사람이라도 돈만 주면 얼마든지 불러다 쓸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 것같다. 공자와 같은 분도 돈을 많이 벌고 싶어했으나 벌지 못하자, “거친 밥을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워도 즐거움이 그 곳에 있느니...”하는 등의 변명성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잔치는 즐기기 위한 것이며 포도주는 흥을 돋구기 위한 것이지만 돈은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고 솔로몬도 말했다. 돈에 침 뱉는 사람 없다. 돈이 싫은 사람이 있으면 나 여기 있소 하고 나와보라!
돈이면 개도 멍첨지이다.(A golden key can open any door.)
금 열쇠는 어떤 문이라도 열 수 있다. 금 열쇠란 누구나 갖고 싶어하는 돈이다. 세상에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말이다.
나쁘게 번 돈
지혜의 왕 솔로몬은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재산은 아무런 유익함이 없으나 정직은 생명을 구한다’고 하였고 ‘의로운 자의 수입은 선한 일에 쓰이지만 악인이 번 돈은 죄를 짓는데 쓰인다’고 하였다. 아울러 공자는 의롭지 못한 부귀는 나에게 뜬 구름과 같다’고 하였다. 나쁜 짓이나 부정을 저질러 축재한 재산은 방탕한 일이나 향락에 쓰여지게 되어 쉽게 없어진다. 그래서인지 사기꾼치고 잘사는 사람이 없다. 산 속에 그물을 쳐놓으면 교활한 여우는 걸리지 않고 아름답고 착한 꿩만 덫에 걸려 퍼득인다. 나쁜 짓 하는 사람은 날뛰고 설치는데 올바른 행동을 하는 사람은 궁지에 몰려 있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은 모두 오래 가지 못하고‘큰 집’에서 수의를 입고 강제로 도를 닦게 된다. 악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필히 재앙이 따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남을 속여서 얻은 재물이 맛있는 음식같이 보이지만 그것은 얼마 안 가서 입 속의 모래알 같이 변할 것이다’라고 하였고 ‘속여서 얻은 재산은 사라지는 안개와 같고 죽음의 덫이다’고 하였다. 부정하게 번 돈 때문에 두명의 전직 대통령을 비롯하여 현직 대통령의 아들까지 감옥에 가 있다.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돈’은 없어져 버리고 몸만 죽음의 덫에 걸려 있는 셈이다. 모든 재물을 정당하게 자기 노력으로 얻어라. 그래야 그 재산이 오래 가는 법이다. 어긋나게 들어온 재물은 어긋나게 나가게 마련이다.
악하게 번 돈은 악하게 쓰여진다. (What`s rot over the devil`s back is spent under his be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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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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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 권오삼
어, 어
나뭇잎에 떨어졌네!
그럼
또르르
구슬 되어 굴러가지.
어,어
전깃줄에 걸렸네!
그럼
어디 한번
매달려 볼까?
대롱대롱대롱대롱
아이고
힘 빠졌다.
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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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속 - 이주홍
주룩주룩 퍼붓는
빗속인데
뛴다고
안 젖나 뭐
그래도 안 뛰면
마음이 젖지
주룩주룩 퍼붓는
빗속인데
한 우산에 든다고
안 젖난 뭐
그래도 안 들면
우정이 젖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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