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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6호 - 2024.10.05. 토요일(음력 : 9.03.)
angelo@nownforever.co.kr / 風文 윤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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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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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노라면 항상 무언가 배우게 마련. 그 대부분은 내가 얼마나 잘못 알고 있었나를 깨우치는 것.
- 빌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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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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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의 사이시옷
촛불 시국이다. 수백만 개의 촛불이 이 땅의 밤을 밝히고 있다. 촛불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연약함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촛불 아래 기도하는 어머니의 모습처럼 간절한 염원과 경건함의 상징이기도 하다.
‘촛불’은 ‘초+ㅅ+불’로 이루어진 말이다. 사이시옷은 ‘고유어+고유어, 고유어+한자어, 한자어+고유어’로 된 합성어에서 사잇소리 현상이 있는 경우 앞말에 받쳐 적는다. ‘촛불’은 고유어+고유어로 이루어진 말로서 사이시옷을 받쳐 적는 예이다.
‘초’는 원래 한자어 ‘燭(촉)’에서 온 말로, 옛말에서는 ‘쵸’라고 하였고, 이후 소리가 변하여 ‘초’가 되었다. 오늘날 이 말은 고유어로 분류된다. 따라서 ‘촛농(-膿), 촛대(-臺)’도 ‘고유어+한자어’로 보아 사이시옷을 받쳐 적는다. 만일 ‘초’를 그 기원에 따라 한자어라고 한다면 ‘초농, 초대’로 적어야 하겠지만, 오늘날에는 고유어로 분류되기 때문에 사이시옷 표기를 하는 것이다. ‘찻잔, 찻상, 찻장’ 등의 표기도 같은 예이다. ‘차’ 역시 한자어 ‘茶(차, 다)’에서 왔지만 오늘날 고유어로 인식되는 말이다. 따라서 ‘찻잔’ 등도 ‘고유어+한자어’로 보아 사이시옷을 받쳐 적는다.
요즘 촛불과 함께 횃불이 종종 등장하기도 한다. ‘횃불’은 ‘홰+ㅅ+불’로 이루어진 말이다. ‘홰’는 불을 붙이는 데 쓰기 위해 싸리 등 나뭇가지 따위를 묶어 만든 물건이다. 촛불보다 더 큰 불이이서 격동적인 느낌을 준다.
‘촛불, 횃불’ 모두 사이시옷 표기를 하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 사이시옷은 ‘사람 인(人)’ 자를 닮았다. 온 국민이 마음을 담아 받쳐 든 불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디 그 간절한 바람을 담은 빛이 나라의 미래를 환히 밝혀 주기를 소망한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과 교수
언어는 정신의 지문
소설가 최명희는 ‘언어는 정신의 지문(指紋)’이라고 했다.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 끝마디에 각자 서로 다른 무늬인 지문을 가지고 있어 그 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상징이 된 것처럼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 역시 그 사람의 생각과 정신을 반영해 지문처럼 그 사람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는 말이다.
언어에 대한 최명희의 관심과 애정은 남달라서 ‘모국어는 우리 삶의 토양에서 우리의 생각과 느낌을 품고 길러 정신의 꽃으로 피워주는 씨앗’이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자신을 ‘모국어라는 말의 씨를 이야기 속에 뿌리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정신과 혼이 담긴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전하기 위해 ‘혼불’ 등의 소설들을 집필했다.
최명희가 남긴 ‘언어는 정신의 지문’이라는 말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말 한마디가 상대방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가 되기도 하고, 커다란 정신적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에게 전하는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가 그와 아픔을 함께 나눔으로써 고통을 이겨낼 수 있게 하기도 한다.
이처럼 평소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 우리의 정신과 혼이 찍히는 지문과도 같을진대 어찌 함부로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욕설과 비속어를 입에 담고 사는 사람들의 경우 포악한 언어들이 그의 정신을 더욱 포악하게 만들 것이고, 습관적으로 외국어를 남용하는 사람들의 경우 우리의 정서와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외국어가 그의 정신에서 우리 고유의 정감과 정서를 점점 배제시키게 될 것이다. 이는 곧 우리가 사람들과 정감을 나눌 수 있는 아름다운 우리말을 사용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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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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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 한낮의 별빛 - 천상병
돌담 가까이
창가에 흰 빨래들
지붕 가까이
애기처럼 고이 잠든
한낮의 별빛을 너는 보느냐
슬픔 옆에서
지겨운 기다림
사랑의 몸짓 옆에서
맴도는 저 세상 같은
한낮의 별빛을 너는 보느냐
물결 위에서
바윗덩이 위에서
사막 위에서
극으로 달리는
한낮의 별빛을 너는 보느냐
새는
온갖 한낮의 별빛계곡을 횡단하면서
울고 있다.
∼∼∼∼∼∼∼∼∼∼∼∼∼∼~~~~~~~~~~~~~~~~~~~~~~~~~~~~~~~~
진달래 - 정지용
한골에서 비를 보고 한골에서 바람을 보다
한골에 그늘 딴골에 양지 따로 따로 갈어 밟다
무지개 해ㅅ살에 빗걸린 골 산벌떼 두름박 지어
위잉 위잉 두르는 골 잡목 수풀 누릇 붉읏 어우러진 속에
감초혀 낮잠 듭신 칡범 냄새 가장자리를 돌아
어마 어마 기여 살어 나온 골 상봉에 올라 별보다 깨끗한 돌을 드니
백화가지 우에 하도 푸른 하늘...포르르 풀매...
온상중 홍엽이 수런 수런거린다
아래ㅅ절 불켜지 않은 장방에 들어 목침을 달쿠어
발바닥 꼬아리를 슴슴 지지며 그제사 범의 욕을 그놈 저놈하고 이내 누웠다
바로 머리 맡에 물소리 흘리며
어늬 한곬으로 빠져 나가다가 난데없는 철 아닌 진달래 꽃사태를 만나
나는 만신을 붉히고 서다.
~~~~~~~~~~~~~~~~~~~~~~~~~~~~~~~~~~~~~~~~~~~~~~~~~
꽃 - 김수영
심연은 나의 붓끝에서 퍼져가고
나는 멀리 세계의 노예들을 바라본다
녹개와 분뇨들을 바라본다
그러나 심연보다도 더 무서운 자기상실에 꽃을 피우는 것은 신이고
나는 오늘도 누구에게든 얽매여 살아야 한다
도야지우리에 새가 날고
국화꽃은 밤이면 더한층 아름답게 이슬에 젖는데
올 겨울에도 산 위의 초라한 나무들을 뿌리만 간신히 남기고 살살이 갈라갈 동네아이들.....
손도 안 씻고
쥐똥도 제멋대로 내버려두고
닭에는 발 등을 물린 채
나의 숙제는 미소이다
밤과 낮을 건너서 도회의 저편에
영영 저물어 사라져버린 미소이다
<195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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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 이해인
부르지 않아도
이미
와 있는 너
이승의 어느 끝엘 가면
네 모습
안 보일까
물 같은 그리움을
아직은 우리
아껴 써야 하리
내가 바람이면
끝도 없는 파도로
밀리는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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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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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53가지 지혜 - 루스 실로
제2장 정을 기른다
30.자선행위를 통해 사회를 배운다
'선행'은 사후에까지 남는다
언젠가 일본의 한 거리에서 '사랑의 열매'라든가, 신체장애자를 위한 모금활동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동양인들이 이런 '자선활동'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모르겠으나 유태인들은 자선행위 등 남을 위한, 특히 불우한 환경에 처해 있는 사람이나 신체장애자에 대한 선행에 대해서는 대단히 높이 평가하고 있다. 예로부터 유태인들 사이에는 그런 행위에 대한 확실한 가치 기준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예를 한 번 들어보자.<탈무드>에 대한 다음과 같은 우화가 나온다. 옛날 어느 왕이 한 남자에게 사신을 보내어 곧 입궁하라고 명령했다. 그 남자에게는 세 명의 친구가 있었는데, 그중 한 친구와는 매우 적절한 사이였다. 두 번째 친구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좋아하는 친구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친구는 친구이기는 했으나 그다지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겁에 질린 그는 무엇인가 문책을 당할 것이 틀림없으리라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왕의 명령인지라 아니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세 친구를 불러 동행해 주기를 간청했다. 먼저 가장 친한 친구에게 부탁을 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냉정하게 한마다로 거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두 번째 친구는 '왕궁의 대문 앞까지만 동행하겠다'고 대답했다.
"당연히 같이 가야지. 자네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으니 함께 임금님을 만나도록 하세."
이렇게 쾌히 승낙한 친구는 그다지 친한 사이가 아닌 세 번째 친구였다.
<탈무드>에 의하면, 첫 번째 친구는 다름 아닌 '재산'을 말하는 것으로,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죽을 때는 가지고 갈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두 번째 친구는 '친척'을 뜻하는 것으로, 겨우 화장터까지만 동행한다는 의미이고,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가주겠다는 세 번째 친구는 '선행'을 뜻하는 것으로, 평소에는 눈에 띄지 않지만, 사후에까지 남는 것은 이것뿐이라고 <탈무드>는 가르치고 있다. 가난한 사람, 비참한 사람들을 위해 베푸는 '선행'은 <탈무드>가 집대성된 옛날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유태인들에게 있어서는 재산이나 친척보다도 훨씬 소중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공공관념이 매우 부족한 것 같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시대의 지성이라 할 대학생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공연히 시비를 걸고 폭행을 가하는 행위에 대해 나 나름대로 냉정히 생각해 보았다.
물론 모두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전철이나 버스 등에서 젊은이들이 노약자가 서 있는 것을 보고도 눈을 감아버리거나 차창 밖을 내다보면서 모르는 체하는 광경을 더러 볼 수 있다.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도 있지만, 거의 나이가 많은 분들이다. 공공관념의 결여는 대개 어렸을 때 형성된다. 그런 까닭에 사회 윤리를 바로 보는 눈이 트이지 않는 것이다. 즉,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일류 대학에 들어가고 또 일류 회사에 입사하기만을 바라는 부모들이, 어떻게 해야 남과 원만하게 사회생활을 해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지혜를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은 배움과 일과 자선 위에서 성립된다
유태의 속담에 '세상은 배우는 것과, 일하는 것과, 자선행위 위에서 성립된다'는 말이 있다. 즉 인간이란 제아무리 많이 배우고, 제아무리 일을 잘한다고 하더라도 '자선행위'를 할 줄 모른다면 이 세상을 올바르게 살았다고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자선'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체다카'는 정의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영어로 '자선'에 해당하는 '채리타'가 라틴어의 '베풀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과는 달리, 유태인에게 있어 '자선행위'는 '정의' 바로 그것으로 통한다. 유태인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어렸을 때부터 조그만 저금통을 사주고 '자선'을 위해 저축하도록 가르치는데, 아이들은 교회당(시나고그)에 갈 때마다 저축했던 돈을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바친다. 그런 행위를 통해 자신과 이 사회가 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성장하는 것이다. 전철이나 버스 안에서 노인이나 신체장애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닌 듯 자연스럽게 행하며, 어떤 저항감도 느끼지 않고 사회윤리에 동화되어 가는 것도 바로 이 '자선행위'를 당연한 의무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태인들은 남에게 선물하기를 좋아하는데, 이런 행위 역시 선심을 쓴다는 의식에서 베푸는 것이 아니라 사회생활을 하려면 당연히 취해야 할 행위라는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사회생활에 적응시키기 위해서 지능개발에 신경을 쓰는 것도 좋겠지만, 일찍부터 사회의 그늘진 곳에 눈을 돌리는 지혜를 가르쳐줌으로써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으로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이것이 포인트!
제아무리 많이 배우고, 제아무리 일을 잘한다고 하더라도 '자선행위'를 할 줄 모른다면 이 세상을 올바르게 살았다고 할 수 없다. 아이의 지능개발에 신경 쓰는 것도 좋겠지만, 일찍부터 사회의 그늘진 곳에 눈을 돌리는 지혜를 가르쳐줌으로써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으로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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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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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9 - 시오노 나나미
제2부 하드리아누스 황제
(재위 : 서기 117년 8월 9일 ~ 138년 7월 10일)
실지회복책
서기 118년 7월, 하드리아누스는 수도 로마로 돌아왔다. 황제가 된 뒤 처음으로, 게다가 11개월만의 귀환인데도 하드리아누스를 맞는 수도의 공기는 냉랭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하드리아누스는 황제로서는 처음으로 원로원 회의에 참석했다. 차갑게 굳은 표정의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마흔 두 살의 황제는 역설했다. 네 명의 집정관 경험자를 살해한 것은 결코 자신의 의도가 아니었다. 황제 암살 음모가 있다는 보고를 받고 긴급 대처를 명령하긴 했지만, 사실인지 아닌지를 조사하라고 명령한 것이지, 재판도 하지 않고 처형하라고 명령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오해한 근위대장이 독단으로 살해를 강행했다 그래서 아티아누스를 근위대장에서 해임했다‥‥‥‥ 이어서 하드리아누스는 앞으로는 절대 원로원 의원을 정식 재판도 거치지 않고 살해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굳게 맹세했다. 그리고 부득이하게 원로원 의원이 처벌 대상이 된 경우에도 원로원 재판에서 과반수가 찬성표를 던진 경우에만 유지로 인정하겠다고 말했다. 의원들의 굳은 표정이 그 정도로 누그러질 리는 없었다. 트라야누스는 제위에 오른 직후 원로원 의원을 국가반역죄로 재판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하드리아누스는 그렇게까지 말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그들은 놓치지 않았다. 또한 정적 네 명을 처단해버린 뒤니까 무엇이든 서약할 수 있을 거라고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는 정치란 비정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해달라고 원로원 의원들에게 요구하기에는 지나치게 현실주의자였다. 그리 고 로마 제국의 정식 주권자는 원로원만이 아니었다. 로마 시민도 어엿한 주권자다.
수도로 귀환한 지 1년 남짓 동안 보여준 하드리아누스의 씀씀이는 착실한 세무 담당자라면 졸도할 정도의 규모였다. 황제 즉위를 함께 축하한다는 이유로 시민권 소유자 1인당 70데나리우스 정도의 하사금을 주는 일은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틀림없이 실행했을 것이다. 로마 시민이기도 한 군단병들에게는 파르티아에서 철수한다는 인상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라도 트라야누스가 죽은 직후 충성 서약을 받을 즈음에 이미 하사금을 주었기 때문이다. '보너스 외에도 하드리아누스는 콜로세움이나 대경기장을 무대로 한 검투시합이나 전차경주 등 시민들이 열광하는 볼거리를 제공하는 데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어느 황제나 즉위할 때 시행한 일이니까, 하드리아누스도 관례에 따랐을 뿐이다 황제 즉위를 시민과 함께 축하한다는게 이유니까, 경비도 황제 금고에서 나간다 다만 하드리아누스의 하사금은 통상적인 액수의 갑절이었다고 한다. 하드리아누스의 인기몰이 시책은 수도 로마의 시민만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황제가 즉위할 때 본국 이탈리아의 지방자치단체나 속주는 새 황제에게 황금관을 바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하드리아누스는 본국 지방자치단체에서 바치는 황금관은 완전히 폐지하고, 속주에서 바치는 황금관은 액수를 반으로 줄였다. 여기에는 사실상의 세금 감면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고대에는 황금관을 바치는 것이 곧 복종의 뜻을 표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동방 원정길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얼마나 많은 황금관을 받았던가. 따라서 이것은 본국 지방자치단체가 수도 로마와 완전히 평등해진 것을 의미했고, 속주도 평등에 가까워진 것을 의미했다. 하드리아누스는 이 결정을 법제화했기 때문에, 법을 개정하지 않는 한 제국의 정책으로 정착하게되었다. 연구자들 중에는 이 정책을 처음 시행한 것은 트라야누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쨌든 속주 출신인 두 황제의 시책으로 본국 이탈리아와 속주의 지위는 더욱 균등해졌다. 하지만 그가 다음에 한 일은 트라야누스라면 꿈도 꾸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물론 실시할 필요도 없었지만.
이런 일은 역시 허를 찔러 기습적으로, 게다가 대대적으로 실시하지 않으면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체납 세금을 전액 탕감한 것이다. 그때까지 어떤 황제도 하지 않은 이 조치가 시행된 것은 트라야누스 포룸의 대광장이었다. 몇 해 전에 완공된 포룸은 하얀색으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선제 트라야누스의 기마상이 서 있는 드넓은 광장에 세금 체납자의 이름과 체납액이 적힌 파피루스 문서가 산더미처럼 쌓이고, 거기에 불이 붙었다. 체납세 탕감 조치는 체납자 본인만이 아니라 가족과 자손한테까지 적용되었다. 이로써 황제 금고와 국고의 세입 감소는 7억 세스테르티우스나 되었다고 한다. 무슨 일인가 하고 몰려든 시민들이 환성을 지르며 타오르는 불길 주위에서 덩실덩실 춤을 춘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났다면, 어려운 살림에도 꼬박꼬박 성실하게 세금을 낸 사람들이 우습게 된다. 정직한 사람이 어이없는 꼴을 당하지 않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선정의 근본임을 알고 있던 하드리아누스는 공정한 조세제도를 실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앞으로는 15년마다 부동산 등기를 다시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과세액은 부동산의 가치에 따라 결정된다. 교활한 사람이나 게으름뱅이만 세금을 체납하는 것은 아니다. '국세조사' (census)는 30년 내지 40년에 한번 꼴로 실시되기 때문에, 그 사이에 재산가치의 변동이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세금을 내고 싶어도 낼 수 없는 사람이 많아졌다.
공정한 세제란 넓고 얕게 세금을 부과하는 제도라고 바꿔 말할 수 있지만, 연구자들에 따르면 로마 제국은 그것을 현실화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조세제도를 생각하면 당연한 귀결이지만, 로마 황제들은 세율 인상을 신경질적으로 피했다. 관세가 '20분의 1'(vicesima), 매상세가 '100분의 1'(centesima), 국유지 임차료(거의 영구 임대이기 때문에 세금이라고 생각해도 좋다)가 '10분의 1'(decima)이었는데, 각각의 세율을 일컫는 라틴어가 그 세금의 통칭으로 정착한 것은 세율이 바뀌지 않았다는 가장 좋은 증거다. 하드리아누스도 이 점에서는 완전히 보수적이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이렇게 공정한 세제를 실시하려고 애쓰는 한편, 사회복지에도 적극적으로 맞붙었다. 대부분은 트라야누스가 이미 제도화한 것이지만, 하드리아누스는 그것이 좀더 기능을 발휘하도록 제도를 조정했다. 빈곤 가정의 자녀들에게 주는 양육자금인 '알리멘타'. 중소규모의 농업이나 수공업에 지원해주는 저리 융자. 원로원 계급에 속하기는 하지만 경제적으로 곤궁한 이들에 대한 원조. 그리고 곤궁한 모자 가정에 대한 원조. 이것만은 하드리아누스가 창설한 제도인데, 여기에는 가난의 원인이 어머니의 나쁜 행실에 있는 경우는 제외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는 게 흥미롭다. 로마 제국의 복지는 자립하려고 애쓰는 사람을 원조하는 것을 대전제로 삼고 있었다. 통치자로서의 하드리아누스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굳이 법제화하거나 제도화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현대의 어느 연구자는 그런 하드리아누스에게 '기능과 효율의 신봉자' 라는 평가를 선사했다.
이리하여 1년도 지나기 전에 하드리아누스를 에워싸고 있던 공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일부원로원 의원은 아직도 그 사건에 앙심을 품고 있었지만, 일반 시민들은 원래 자기들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특권계급을 덮친 불행인 만큼 기억에서 몰아내는 데 아무런 저항도 느끼지 않았다. 이 무렵 하드리아누스는 잇따라 새 '은화'와 '동전'을 발행했다. '금화'가 아닌 것은 은화와 동전이 훨씬 유통량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누구나 지니고 있는 통화는 로마 위정자들이 정책 선전에 활용해온 광고매체이기도 했다. 하드리아누스는 그런 통화에 자신의 통치이념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새겨 넣었다.
'관용' (Pietas)
'화합' (Concordia)
'정의' (Justitia)
'평화' (Pax)
로마 제국의 치고 통치 책임자는 황제다. 즉 통화에 새겨진 이런 이념이 현실화하느냐 마느냐는 하드리아누스에게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을 추진하는 기반은 트라야누스의 중신 네 사람을 말살하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완벽해졌다. 그렇긴 하지만 오로지 집정관 경험자 네 명이 살해된 사건을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버리기 위해 이런 시책을 시행했다고 생각하면, 하드리아누스가 너무 딱하다. 정략적 사고법에 뛰어난 사람은 절대로 한가지 목적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하드리아누스가 원로원이나 시민의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던 것은 파르티아 원정이 헛일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로마인은 자신들이야말로 패권자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 확신이 있었기에, 피를 흘리는 것까지 각오하고 제국의 안전을 보장하는 역할을 떠맡은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로마인에게는 원정한 지방에서 철수하는 것만큼 패권자의 명예를 더럽히고 패권자라는 확신을 뒤흔드는 일은 없었다. 이 진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하드리아누스는 거짓말까지 했다. 원로원 회의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중병에 걸려 로마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트라야누스가 원정군 총사령관에 자신을 임명할 때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철수할 것을 지시했으며, 그래서 선제의 뜻에 따라 철수했을 뿐이라고. 트라야누스의 기질로 보아, 속으로는 파르티아 원정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더라도 철수라는 말은 죽어도 입밖에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 만 그것을 증언할 수 있는 네 사람은 살해되었다. 이들 외에 증언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던 근위대장 아리아누스는 하드리아누스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무조건 믿고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마음만 먹으면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트라야누스의 아내 플로티나다. 하지만 이 여인도 끝내 침묵을 지키는 방법으로 하드리아누스 편에 섰다. 황태후는 팔라티노 언덕의 황궁에서도 떠난 모양이다. 궁정에서 열리는 공식 행사에도 사적인 연회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원래부터 좋아한 그리스 문화를 만끽하는 조용한 생활로 돌아가 있었고, 공적인 일이라면 그리스 철학을 공부하는 모임, 현대식으로 말하면 그리스 철학 연구재단의 명예회장을 맡은 정도였다.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로마 사회의 귀인이었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네로에게 네가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내 덕분이라고 말하여 아들의 미움을 샀다. 그와는 반대로 플로티나는 남프랑스 속주 태생으로, 조상이 로마시민권을 얻었을 뿐이다. 하지만 생활방식의 품격은 혈통과는 무관한 것일까.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의 양자니까 플로티나와 하드리아누스는 호적상으로 모자 관계였지만, 같은 이탈리아에 살면서도 이따금 안부 편지만 교환한 모양이다.
1년 동안 대담한 인기만회 정책을 편 뒤에도 하드리아누스는 1년 남짓 본국 이탈리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시민들은 황제가 옆에 있어주는 것을 좋아한다. 투기장이나 경기장 귀빈석에 황제의 모습이 보이면 안심한다. 하드리아누스도 여러 가지 정책이 뿌리를 내리는 것을 감시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자기가 좋은 황제라는 인상을 더욱 철저하게 심어줄 필요도 있었다. 취미인 사냥과는 딱 손을 끊었다. 사냥터로는 발길도 돌리지 않았다. 로마인들은 사냥을 오리엔트. 군주의 취미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상기해준다면 좋지만, 대왕의 뒤를 이은 헬레니즘 군주들은 대왕의 이 취미만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헬레니즘 국가들의 군주가 아니더라도, 파르티아 왕이나 아르메니아 왕에서부터 베두인족 족장에 이르기까지 로마인들이 아는 동방의 제후들은 모두 사냥을 좋아하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안에서는 기껏해야 멧돼지나 사슴을 쫓아다니는 게 고작이어서, 사자 사냥이 꿈이었던 하드리이누스로서는 사냥을 못해도 불만은 없었을 것이다.
하드리아누스의 또 다른 취미는 그리스 문화였지만, 이 시기에는 그 취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원로원 보수파에게 경계심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네로나 도미티아누스가 그리스를 좋아하기로 유명했기 때문에, 자칫하면 일반 시민에게 그들과 동일시 될 우려가 있었다. 어쨌든 '지고의 황제'의 뒤를 " 이은 만큼, 좋은 황제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것도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탈리아 각지를 순행하느라 수도를 비우거나 아무래도 손을 멜 수 없는 일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원로원 회의에 반드시 참석했다. 의장인 집정관이 입장할 때는 다른 의원들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했고, 토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국가 통 치에 필요한 황제의 권력 행사는 자기 개인의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민을 위해서라고 언명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또한 생일을 제외하고 는 경기대회를 그에게 바치는 것도 단호히 거부했다. 원로원 의원과는 누구든 대등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의 저택에 초대를 받으면 기꺼이 응했다. '황제'라기보다 '시민 중의 제일인자'로 행동하려고 애썼다. 사회간접자본 정비는 '황제'로서 해야 할 책무 가운데 하나지만, 트라야누스가 모두 해주었기 때문에 새로 시작해야 할 공사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유지 ·보수는 늘상 필요하니까, 이 시기의 하드리아누스가 한 일은 그것뿐이다. 새로 착공한 공공건물은 신격화한 선제에게 바친 신전뿐이었지만, '트라야누스 포룸'을 건설할 당시에 이미 지반작업과 설계가 끝나 있었기 때문에 이 공사도 건축가 아폴로도로스의 지휘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시민 중의 제일인자'로 행동하는· 것은 원로원 회의 때만이 아니었다. 로마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제정한 법이 살아 있어서, 교사와 의사에게는 인종이나 민족의 구별없이 로마 시민권을 주는 대신 적절한 가격으로 교육이나 의료를 제공하도록 하는 일종의 민생제도가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료소는 많았지만, 대규모 병원시설은 '테베레 강속의 섬' (이솔라 티베리나)에만 있었다. 하드리아누스는 그곳에서 요양중인 환자들을 방문했다. 또한 '카이사르 민생법' 덕분에 개인이 설립한 학교는 많았지만 대학은 없는 것이 수도 로마의 실정이었다. 그래서 고등교육은 로마가 제패하기 전부터 교육도시로 유명했던 그리스의 아테네나 소아시아의 페르가몬, 로도스 섬,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맡기고 있었다. 따라서 대학은 방문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지만, 수토 로마나 본국이탈리아에 대학이 있었다면 하드리아누스는 반드시 방문했을 것이다. 환자를 위문하거나 학생을 격려하는 이유는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무슨 일에나 정력적으로 맞붙는 하드리아누스가 이 무렵 몰두한 대상은 시민이었지만, 그것도 지나치게 기를 쓰고 하면 아무리 하드리아누스라도 실패를 면할 수 없다.
어느 날 오후, 황제는 수도에 많이 있는 공중목욕탕에 갔다 어쩌면 그것은 최신 시설에 최대 규모인데다 웅장하고 화려해서 시민들에게 인기가 높았고 따라서 입장객이 가장 많았던 '트라야누스 목욕탕'이었는지도 모른다. 공중탕에서 시민들과 함께 목욕을 즐기는 것은 민주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싶은 황제들이 자주 해온 일이니까 하드리아누스가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공중목욕탕에 다니는 횟수는 하드리아누스가 가장 많았다. 경호는 어떻게 했는지 걱정되지만, 어쨌든 모두 알몸이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공중탕에서 벌어진 암살은 로마 역사상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원로원 회의장보다, 어쩌면 궁중보다도 공중탕이 더 안전했을지 모른다. 또한 조각이나 경기장에서 알몸을 보는 데 익숙해져 있는 로마인이지만, 몸이 늙고 추하면 남들 앞에 나체를 드러낼 마음이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 황궁에는 본격적인 로마식 욕실이 있었으니까 거기서 목욕을 하면 된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는 원래 아름답고 건장한 육체를 가진데다 이 무렵에는 40대 전반의 한창나이였다. 그래서 싫든 좋든 알몸을 맞댈 수밖에 없는 공중탕에 다녔던 것이다.
하루는 한 노인이 비누(오늘날과 같은 비누는 아니지만 충분히 쓸모있는 물건)를 칠한 몸을 목욕탕 벽에다 문지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기억력이 뛰어난 하드리아누스는 이 노인이 일찍이 자기 휘하에 있던 백인대장인 것을 생각해냈다. 그래서 노인을 불러 물었다. 왜 벽에다 몸을 문지르고 있느냐고. 퇴역 백인대장도 물론 하드리아누스를 알고 있었다. 지금은 황제와 시민이지만, 과거에는 하드리아누스에게 '전우 여러분' (콤밀리테스)이라고 불린 병사들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등때를 밀어줄 사람을 고용할 돈이 없어서 그런다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고대에는 작은 낫 같은 것으로 때를 벗겨냈다 상처가 나지 않을까 걱정되지만, 날카롭게 간 칼로 수염을 깎던 시대다. 숙달되면 다치지 않고 때를 벗길 수 있었을 것이다.
노인을 동정한 하드리아누스는 늙은 옛 부하에게 때밀이 노예를 그것도 두 명이나 선사했다. 게다가 그 노예들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까지 붙여주었다. 노병이 감사하고 감격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하드리아누스 자신도 뿌듯한 기분을 맛보면서 황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튿날 오후 목욕탕에 간 하드리아누스는 벽마다 등을 문지르고 있는 노인들로 메워져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이 사태에 황제가 어떻게 대응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처음에는 어처구니가 없었을테고, 다음에는 웃음을 터뜨렸을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노인들의 시위가 허사로 끝났다는 것, 한동안 시민들에게 좋은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것뿐이다. 그래도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수도로 귀환한 지 2년 만에 황제에 대한 시민들의 감정은 완전히 호전되었다. 수도로마를, 본국 이탈리아를 비워도 괜찮겠다고 생각할 만큼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황제가 없어도 '내각 (콘실리움)이 완벽하게 기능을 발휘하도록 조직을 다지는 작업도 끝나 있었다. 기능과 효율의 신봉자라면 조직 만들기의 중요성은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고 있다 어느 연구자는 하드리아누스를'천재적 조직자'로 평가한다. 그리고 하드리아누스가 계획하고 있던 순행이야말로 이 면에서 그의 재능이 꽃을 피우는 무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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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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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보람에 대하여 - 미우라 아야꼬(三浦綾子)/김욱 옮김
어느 심포지엄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그 때 주제(主題)는 노인의 사는 보람에 대해서였다. 여러 가지 좋은 의견들이 많았는데, 나는 여기서 다시 한번 사는 보람에 대한 나의 평소의 생각들을 정리해 보기로 한다. 먼저 ‘노인의 사는 보람’과 ‘젊은이들의 사는 보람’은 과연 다른 것인지? 나는 이 문제에 대해 항상 의문을 갖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노인에게는 노인의 사는 보람이 있고, 젊은이에게는 젊은이의 사는 보람이 있어 마땅한 것이라고. 그런 것일까? 나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노인과 젊은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알 수 없는 것이다. 분명히 노인과 젊은이 사이에는 표면적인 차이는 있다. 노인은 체력(體力)이 떨어지면서 모든 일에서 손을 떼게 된다. 그러다가 노쇠해진 다음에는 노인병(老人病)과 죽음에의 불안이 엄습해 오게 마련이다. 이와는 달리 젊은이에게는 넘치는 활력과 여러 가지 가능성으로 가득 찬 미래가 있다. 일거리가 있고, 경제력은 늘어나기만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근본적인 차이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젊은이가 지니고 있는 체력과 경제력, 그리고 미래의 가능성이라는 것은 언제 어느 때 잃게 될는지 모르는 불안정한 것이다.
나만 하더라도 아침저녁으로 40명 분의 식사를 준비하면서 낮에는 국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정도로 튼튼한 체력을 가져본 적이 있었다. 당시 내가 살던 곳에서 국민학교 선생이라는 직업은 여성으로서는 급료도 고급축에 끼는 직업이었다. 내게는 또한 약혼자가 있었고, 푸른 미래가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나는 고열(高熱)로 쓰러졌다. 폐결핵으로 인한 발병이었다. 스토마이라든가 파스도 없는 시대여서 결핵요양소에서 요양 중이던 친구들은 마구 죽어갔다. 나는 경제력을 잃게 되면서 의료 보호를 받게 되었다. 40명 분의 식사 준비를 하면서 학교에 나갔던 체력은 간 곳도 없이, 화장실 출입을 할 기력마저 없어졌다. 몇 해를 이렇게 앓다가 이번에는 카리에스가 발병, 꼬박 7년을 기브스 베드에서 신음하는 몸이 되었다. 그리하여 변기(便器)를 써야만 하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설 수조차 없었다. 결국은 12년 동안이나 요양 생활을 하게 되었다. 내가 그래도 몸이 나아진 것은 37세 때이다. 당시의 나의 요양 중의 몰골을 나는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체력도, 지력도 잃은 채 사회에서 뒤쳐진 몸으로 언제 회복될는지도 모르는, 이를테면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환자들 틈에 끼어 있었던 것이다.
저들 많은 환자들이 안고 있는 문제와 노인들이 안고 있는 문제에서 도대체 무엇이 얼마나 다르다는 것일까? 만일 틀리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이가 젊다는 것뿐이다. 젊었던 만큼 차례로 죽어가는 요우(療友)를 바라보며 다음은 내 차례가 될는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오히려 더욱 강렬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젊은이와 노인이란 근본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라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인간은 늙은 후에야 비로서 체력과 기력이 뒤떨어짐을 느끼거나, 무력한 경제력을 한탄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나는 ‘노인의 사는 보람’ 이라는 한정된 표현에 대해 찬성할 수 없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젊은이의 사는 보람이 장년(壯年)이 되어서는 또다른 사는 보람으로 바뀌고, 또한 장년 시절의 사는 보람이 나이가 들어서는 통용되지 않는 것으로 되는 것이라고 한 대서야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것이야말로 사는 보람이라고 믿었던 것을 버리고 다시 또 사는 보람을 찾아야만 되는 것이라면, 인간은 일생 동안 여러 차례 ‘사는 보람’을 잃게 되는 것이 아닌가. 만약 그처럼 연대(年代)가 바뀜에 따라 사는 보람을 바꾸어야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참된 사는 보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을 사는 보람으로 삼아온 것이 아닌가고 나는 생각한다. 진정한 뜻으로의 사는 보람이란 건강한 때도, 건강을 잃은 때도, 일할 것을 가지고 있을 때도, 잃었을 때도, 나이들었을 때도 불변(不變)한 것이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자기가 사는 보람은 무엇인가를 때때로 조용히 검토해 보아야 한다. 남편이 사는 보람이요, 아이들이 사는 보람이요, 일하는 것이 사는 보람이 되고 한다면, 그것을 잃었을 때 우리는 동시에 사는 보람을 잃게 된다.
잃을 수 없는 사는 보람은 반드시 있다. 나는 그것을 이 자리에서 단언할 수가 있다. 나는 건강을 잃고, 직업을 잃고, 연인을 잃으며 병상(病床)에 누워 있으면서도 내가 믿은 사는 보람만은 잃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신의 사랑이며, 신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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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사회/문화/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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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마카아벨리 평전 - 제15장 사랑과 고통
그러나 마키아벨리에게 피렌체는 이미 옛날의 그곳이 아니었고, 도시에서 빈둥거리는 것이 시골에서 빈둥거리기보다 더 나은 바도 없어 보였다. 물론 그는 괘활한 성격에다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편이었기에 산탄드레아의 술집 주인이나 푸주간, 그리고 가마 굽는 친구들보다야 더 세련된 얼굴들을 보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생활이 분명 싫지는 않았으리라. 피렌체인 특유의 재치와 독설과 예민성이 난무하는 주점에서 그는 언제나 최고의 인기를 독차지하는 그런 류의 사람이었고, 이 역시 자신의 재능을 때로는 시험하기도 하고 때로는 다잡기도 하는 한 가지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서는 아무 하는 일 없이 이러한 종류의 놀음만으로 지내는 것은 결코 성에 차지 않았다. 저녁이 오면, 그는 쓰잘데없는 말의 유희가 남긴 덧없는 수확물만을 가슴에 안은 채, 그 불멸의 목소리들과 함께 했던 알베르가초의 고독보다 더 큰 오로움을 느끼는 자신을 새삼 되돌아보게 되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언제나 미소년의 뒤를 쫓아 다니는 도나토 델 코르노의 상점과, 경박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품위 있는) 여인은 아닌 궁인 cortigiana(15세기말 이후 이탈리아에서 고급 창녀를 완곡하게 지칭한 말. 저급의 창녀는 이들과 구별하여 (meretrice) 혹은 (puttane)라고 불렀다. 이들 (궁인)의 미가 뛰어나고 따라서 그들과 교제하는 데 큰 돈이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우아한 예법과 높은 학식으로도 유명하였다. 역사적으로 비교하자면, 고전기 아테네나 도쿠가와 시대의 일본에서 유사한 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6세기 중후반, 각별히 시와 서간문을 통해 르네상스 문학에 기여한 궁인으로는 로마의 툴리아 다라고나와 베네치아의 베로니카 프랑코 등이 있다-옮긴이) 리차의 저택을 자주 드나들었다. 지혜롭다는 명성 덕분에, 그는 어떻게 해서든 하층 시민의 신분을 벗어나 보려는 그 상인의 난롯가를 차지하고 게다가 아름다운 부인으로부터 몇 번의 키스까지도 (몰래) 훔쳐낼 수 있었다. 그는 심사숙고한 자신의 생각으로 이러한 화롯가 자리와 키스에 보답하였다. 하지만 결과가 좋지 않게 나타나자(정치에서처럼 인생에서도!), 한쪽은 그를 가리켜 상점 진드기, 다른 족은 집 진드기라 불렀다. 오, 가엾은 마키아벨리여!
이 시기의 경우 역시, 베토리와 주고받은 편지들은 다른 사료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전기를 쓰는 데 중요할 뿐 아니라, 그의 삶 자체에서도 진실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의 오랜 친구들 가운데 베토리는 새 정권에서 받아들여진 소수의 사람들 중 하나였고, 더욱이 2년동안이나 로마 대사로 봉직해 오고 있었다. 마키아벨 리가 바라는 호의와 일자리를 줄 만한 곳은 바로 로마였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베토리의 편지가 언제나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는 하나의 중대한 사건이었다. 11월 23일, 베토리는 로마에서의 남은 날들을 함께 보내자며 그를 자기 집에 초대하였다. 하지만 그는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와 웃고 농담하는 것 외에 그 어떤 것도) 약속해 주지 않았다. 편안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즐겼던 그는 전혀 대사같이 살지 않았다. 그는 평소에 사람들을 별로 만나지 않았는데, 이는 그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탓도 있지만, 당시 유럽의 모든 곳에서 그곳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사람의 물결 속에서도 마키아벨리만한 인물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는 그가 한 말이다). 그처럼 차갑고 비위 맞추기가 어려운 인물의 입에서 나온 칭찬치고는 듣기가 쉽지 않은 말인 셈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그의 초대에 감사하면서도 이에 응하는 데 주저하였다. 그것은 소데리니 가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다. 그가 그들 가문과 맺어온 관계로 볼 때, 자신이 로마에 가면서 그들에게 들르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행동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그는 집으로 되돌아오는 즉시 바르젤로 Bargello (원래 이탈리아 도시 공화국에서 경찰서장 격에 해당하는 외국인 관리를 가리켰던 말로, 특히 피렌체에서는 그의 주거지로 쓰였다가 그 뒤에는 감옥으로 전용되었고 지금은 박물관이 되어 있는 건물을 일컫는다. 여기서는 감옥이라는 뜻-옮긴이)로 끌려가지나 않을까 우려하였다. 그는 베토리가 재차 걱정 말라고 말했지만 결국 가지 않았다. 그에게 약속된 풍족한 생활에 귀가 솔깃하기도 했겠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손에 (군주론)을 들고 가서 그것을 진상하고 싶어했다. 그는 유명한 12월 10일자 편지에서 말한 바처럼, (메디치 군주들)의 부름을 받고 시골에서 올라와 (이제 나 여기 있노라!)하고 외쳐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흘러가고 베토리의 편지는 매번 그에게 실망만을 확인시켜 줄 뿐이었다. 그는 단지 가벼운 신변잡사나 호색적인 애정 행각, 도는 (카사)와 브란카치처럼 자신을 힐난하는 사람들의 저급함 등의 이야기만을 주절대고 있었다. 마키아벨 리가 그의 비위를 적당히 맞춰준 것은, 물론 그 자신이 이러한 이야기들을 결코 싫어하지는 않았기 대문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와 연락을 게속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낮에 똑똑했던 사람이 밤이 왔다고 바보가 되지는 않는 다는 것을 친구에게 되새겨주었고, 사랑을 아무런 제약과 구속 없이 받아들이라고 권했으며, 피렌체 주점에서 들은 이런저런 농담들을 그에게 들려주었다. 마키아벨 리가 베토리에게 보낸 1514년 2월 25일자 편지에는 피렌체에서 사육제를 즐기던 중 그렇고 그런 브란카치가 역시 그렇고 그런 카사베키아에게 저열한 속임수로 장난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는 그 내용이 매우 외설적이긴 하지만 너무나 눈앞에서 보는 듯이 생생해서, 조금만 손질하면 우리 문학 최고의 단편 설화로 평가받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농담 조의 이야기에서 정치 문제로 화제를 바꾸었다. (어언 천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 (그에게는 그런 느낌이었으리라), 그는 오랜 관심사로 돌아와, 언제나 (그리스도교 세계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주범)인 에스파냐 왕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편지 말미를, 수입은 90피오리노뿐인데 세금으로 나가는 것은 40피오리노나 되는 자신의 처지를 전하며, 대부청 gle Ufficiali 야 Monte에다 대출 천거를 좀 해줄 수 있겠느냐는 부탁으로 끝맺었다. 베토리 역시 이러한 변덕에 자신의 변덕으로 응대하였는데, 정말 놀라운 것은 친구를 천거하되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을 내세우는 묘한 방법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대부청에다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마키아벨리는 (가난하지만 좋은 사람입니다. 물론 달리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이는 사실입니다. 제가 보증하지요... 그는 지금 수입에 비해 과중한 세금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돈은 없고 아니들만 오글오글합니다.
베토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란 인물은 일이 편지 한 통쯤으로 해결될 만한 정도일 때는 다정다감하고 수고를 아끼지 않는 좋은 친구로 보이지만, 일이 중차대해서 귀에 좀 거슬리거나 흐름을 역류하거나 모든 호의를 앗긴 사람을 위해 자신에 대한 조그만한 호의라도 잃을 위험이 있을 때엔 나 몰라라 하는 사람이었다는 말이다. 그에게는 마키아벨리를 인정하고 그를 좋아할 정도의 머리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결코 자신의 불편과 노고를 무릅쓰고 그를 도와주려는 그런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군주론)의 남은 부분을 받아 읽고 난 뒤에도 별 노력 없이 한두 번 알아보기는 했을지 모르지만, 이후 친구에게 책에 대해서나 로마로 오는 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한마디 말도 비치지 않았고, 마키아벨리 역시 책 문제가 아니고는 로마에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변함없이 편지를 웃고 즐기는 이야기로 채웠고, 답장 또한 그와 같은 내용인 것을 좋아하였다. 결국 둘 중 더 초조한 족이었던 니콜로가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확실하게 알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곧 답이 왔고, 비록 그러리라고 짐작은 한 바 있었지만, 그것을 보자 마키아벨리는 마치 몽둥이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처음 그는 격한 감정에 답장조차 할 마음이 없었다. 비록 그가 편지를 쓰긴 했으나 시골에 있다보니 편지 부치는 것을 잊어버렸다는 변명 조의 말을 뒤에 했지만 말이다. 당시 그는 솔가하여 다시 시골로 내려가 있는 상태였다. 6월 10일, 그는 매우 비장한 어조로 평소와는 달리 짤막한 답장을 보냈다.
그래서 난 이 버러지 같은 인생들과 함께 여기 머물게 되었네. 어쨌든 이곳엔 내가 무얼 했는지를 기억하는 사람도, 내가 어떻게든 소용에 닿을거라고 믿는 사람도 없으니 말일세. 하지만 이 생활도 오래갈 것 같지는 않아. 무엇보다 빈둥거리는 나날 속에서 내 자신이 녹슬어 가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네. 만일 신이 도움을 베풀어주지 않는다면, 집을 떠나 고관 댁의 가정교사나 비서직이라도 알아보는 것 외에 무슨 별 뾰족한 수가 있겠나. 아니면 어느 한적한 곳으로 가서 아이들에게 책읽기라도 가르쳐야겠지. 여기 가족들에게는 마치 내가 죽은 듯이 하고 말이야. 사실 그들은 나 없이 더 잘 살아갈걸세. 돈만 축내고 살지만 그렇다고 안쓰고 살 도리도 없으니, 이야말로 짐이 아니고 뭐겠나. 내가 이런 편지를 쓰는 것은 자네를 불편하고 난처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고 단지 내 답답한 마음을 털어버리고 다시는 이 문제로 왈가왈부하지 않으려 함일세. 그 일은 서로에게 부담만 주는 것 같으니 말일세.
이후 서신 교환은 뜸해졌다. 베토리는 이러한 절규에 대해서 한 달하고도 반이 지날 때까지도 답하지 않았다. 이 동안 그는 친구가 (엄청나게 가슴 아파하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있을 법한 위로 한마디 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7월 27일 편지를 보내왔으나, 그 내용은 온통 돈으로 신분을 사려는 장사꾼 도나토 델 코르노의 일에 대한 것뿐이었다. 마키아벨리의 드높은 꿈과 그가 의연함 속에서도 내비쳤던 생계 문제에 대해서는 그저 몇 마디 던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도움의 손길은 왔다. 설사 그것이 그가 기대했던 것과는 크게 달랐을 뿐 아니라 전혀 예기치 않았던 곳에서 온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것은 쿠피드의 화살에서 나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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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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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4.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법
장물아비와 도적
장물아비란 도적이 훔쳐낸 물건을 현금화시켜 주는 사람이다. 범죄수사에 노련한 형사들이 내세우는 경험론적 수사 법칙 제1조는 ‘도적이 물건을 많이 훔치더라도 장물아비가 없으면 도적질을 못 하게 된다’ 도둑도 뒤에 장물아비가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하찮은 도둑도 그러하듯, 훌륭한 선수라면 당연히 뒷바라지 하고 지도해 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 없으면 큰 성과를 올리지 못한다.‘하루에 천 리를 달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말도 백락(伯樂)이라는 훌륭한 조련사에게 조련을 받지 못하면 뛰어난 말이 되지 못한다‘고 하듯이 아무리 재능있는 사람도 그것을 꿰뚫어보고 살려주는 사람을 못 만나면, 세상에 나타내지 못하고 썩어버린다. 공자 역시“팔아야지, 팔아야지, 팔고 말고,나는 좋은 값을 기다리는 사람이다”라고 하며 자신의 값어치를 알아줄 사람을 찾아 다녔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상갓집 개’같이 여기저기 눈치를 보면서 돌아다녔다. 그는 “나를 써주는 사람의 나라를 동주와 같은 유토피아를 만들겠다”고 하였으나 세상에 뜻을 펴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일을 꾀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일이 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라고 말하면서 안 될줄 알면서도 계속 정진을 했던 사람이다. 여자는 자기를 기쁘게 할 사람을 위해 몸을 단장하고,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고 사기는 전한다.
장물아비가 없으면 도적도 없다.(If there were no receivers, there would no thieves)
바위를 뚫는 물방울
로마의 시인 오비드(Ovid, 43 B.C. ~ A.D. 17)는 “물은 약하고 바위는 아주 단단한데 약한 물이 바위를 뚫을 수 있구나!“라고 말했다. 천하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이 가장 단단한 것을 부린다는 사실에 대한 감탄이다. 노자는 크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 데 부드럽고 약한 물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하며,“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고 하였다. 물은 만물에 혜택을 주어 자라게 하면서 그 공로를 누구와 다투지 않고 자기 위치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흐르기’때문이다. 물방울이 바위를 뚫듯이 아무리 불가능한 일이라도 쉬지 않고 계속하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든 시도하여 성공하지 못하면 다시 여러 번 시도하여야 한다. ‘남이 한 번하여 능하더라도 나는 백 번하고, 남이 열 번하여 능하거든 나는 천 번해야 한다’고 중용은 전하고, 서양 속담에도 ‘여러 번 쏘는 자는 표적을 맞출 수 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쉬지 않고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Cdnstant deopping wears away a stone)
안전하려면
영어 표현에 이런 말이 있다.
‘나는 내 딸이 여러 명의 친구하고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한명의 남자친구와 나가는 것은 싫어해, 왜냐하면 여러 명과 같이 나가면 안전하기 때문이댜,’
단 둘이 가면 으슥한 곳으로 가‘엉뚱한 짓(?)’을 할 기회가 많은데 여러 명이 가면 둘만 행동할 수 없으므로 더 안전하다는 말이다. 딸 둔 부모들의 생각은 동서양이 다 똑같다.
돈 주안(Don Juan)
여자를 잘 ‘꼬시기’로 소문난 사람은 돈주안이다. 이 사람은 어떻게나 여자를 잘 구슬리는지 그가 한 번 ‘찍은’여자는 제아무리 춘향과 같은 일편단심을 가진 열녀나 정숙한 정겨부인, 요조숙녀라도 ‘뱀 앞에 선 개구리’같이 ‘날 잡아잡슈’한다고 한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이 사람이 가진 ‘능력’에 대한 시기심과 질투때문에 그를 부정적 의미를 지닌‘난봉꾼’으로 부르고 있다. 하지만 그는 서양의 시나 소설의 주인공으로 많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추아받는 인물입에 틀림없다. 모짜르트의 오페라(돈지오바니)에 주인공으로 나오고, 바이런의 동면시 (돈 주안)도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한국의 난봉꾼으로는 해방 후의 인물, 박인수란 사람을 들 수 있다. 그넌 6.25전쟁이 끝난 후 무질서한 사회풍조를 틈타 수십 명의 여자들을 닥치는 대로 섭렵하였는데 그러다가 마침내 ‘혼인을 빙자한 간음행위’라는 죄명으로 법정에 섰다. 하지만 당시 판관은 ‘보호받을 값어치가 있는 정조만 법은 보호한다‘고 하여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장가나 시집을 가려면 많은 상대자를 사귀어보고 그 중 하나르 ‘찍어야’한다. 그래야 안전하다. 신랑감으로 절의 중과도 맞춰본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말이다. 물론, 정은 주지 않고 상대방의 정만‘게 껍질 속의 살’빼먹듯이 빼먹는 파렴치한 짓을 하고 다니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여러 사람이 하는 일은 안전하다(There is safety in numbers) 여러 사람이 하는 일은 실패할 확률이 적다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한국 사람들이 외국에 이민가서 시작하는 일은 대부분 한국 사람들이 많이 하는 ‘세탁소업’,‘구멍가게’,‘한국식당’등이다.
탐닉
즐거움도 끝까지 즐기려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그것이 극에 달하면 거기에는 권태와 절망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그 한도를 조절하지 못하면 부작용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군자는 중용을 지키고 소인은 중용에 거슬리게 행동한다’고 한다. 군자는 자신을 자제하고 소인은 자제하지 못하고 극단으로 치닫는다. 그래서 ‘마음을 수양하는 데는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고 맹자는 말하였고‘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다’고 노자는 말하였다. 이렇게 신을 이기는 방법은 욕심을 버리는 것으로, 그렇게 하면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편안해진다. ‘자유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너무 빠져들면 해롭다’는 말대로 항상 자제하는 습성을 기르자. 꿀도 적당히 먹지 않으면 토해내게 되듯이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보다 나쁘다고 논어는 말한다. 산 속에 있는 도적을 잡아내기는 쉬워도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잘못을 잡아내기는 힘이든다고 한다. 자신을 이겨내는 생활을 해야 한다.
좋은 일이라도 너무 빠져들면 해롭다.(You can have too much of a good thing.)
5. 지헤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돈
돈이면 개도 멍첨지이다.
공자와 같은 분도 돈을 많이 벌고 싶어했으나 벌지 못하자 “거친 밥을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워도 즐거움이 그 곳에 있으니.....”하는 등의 변명성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돈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좋아하느 것 두 가지를 꼽으라 하면 아마도 그건 돈(money)과 섹스(sex)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이 두 가지를 가장 좋아하면서도 가장 ‘싫어하는 척’해야 인격자로 대접을 받고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참 이상도 하다. 공자는 섹스를 좋아하는 것같이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한탄했다. 그런 그가 지금 살아 있다면 돈 싫어하는 사람도 보지 못했다고 솔직히 고백할 것으로 믿는다.
공중변소에 세금을 매긴 황제
타이터스(Titus, 39-81 A.D.)는 선정을 베풀어 신민으로부터 추앙을 받았던 로마 황제다. 그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공중 변소세를 부과한 황제인데, 로마의 장군이었던 그의 아버지 베스파시안으로부터 강한 질책을 받았다. 세금을 걷을 데가 없어 변소에도 다 세금을 부과하냐고 말이다. 공중 변소세가 처음 실시되던 날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변소에서 거두어들인 동전을 갖고 타이터스 코 앞에 내밀면서 냄새가 나느냐고 물었다. 타이터스는 모른 처가며,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 베스파시안은 “이 돈은 소변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말했다. 타이터스는 아버지 덕에‘돈에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Money has no smell)’란 명언을 남기게 되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도와주는 방법도 여러 가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돈은 냄새가 나지 않으므로 깨끗한 돈과 더러운 돈으로 구분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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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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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 - 박신식
우르릉 꽝꽝
깜장 구름 아가에게
쉬하며 오줌 누이는
천둥 할아버지
쏴아쏴아
그놈 참
세차게 누기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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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는 저녁을 - 오규원
여름에는 저녁을
마당에서 먹는다.
초저녁에도
환할 달빛.
마당 위에는
멍석,
멍석 위에는
환한 달빛.
달빛을 깔고
저녁을 먹는다.
숲 속에서는
바람이 잠들고
마을에서는
지붕이 잠들고
들에는 잔잔한 달빛.
들에는
봄의 발자국처럼
잔잔한
풀잎들.
마을도
달빛에 잠기고
밥상도
달빛에 잠기고.
여름에는 저녁을
마당에서 먹는다.
밥그릇 안에까지
가득 차는 달빛.
아, 달빛을 먹는다.
초저녁에도
환한 달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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