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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5호 - 2024.10.04. 금요일(음력 : 9.02.)
angelo@nownforever.co.kr / 風文 윤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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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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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절대로 미래를 생각하는 일이 없다. 미래는 너무도 빨리 닥쳐오기 때문에.
- 앨버트 아인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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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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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가 불면 맛이 없다?
우리말은 기능과 형태, 의미에 따라 9개의 품사로 나눌 수 있다. 명사, 대명사, 수사, 동사, 형용사, 관형사, 부사, 조사, 감탄사 등이 그것인데, 명사와 대명사, 수사는 문장에서 주어나 보어와 같은 몸체 역할을 한다고 해서 체언이라고 하고, 동사와 형용사는 체언의 동작이나 상태 등을 서술하는 역할을 한다고 해서 용언이라고 부른다. 관형사와 부사는 각각 체언과 용언을 수식하는 역할을 해서 수식언이라고 하고, 조사는 다른 말과의 문법적인 관계를 나타낸다고 해서 관계언이라고 한다. 끝으로 감탄사는 문장에서 독립적으로 쓰여 독립언이라고 부른다.
대부분의 품사들은 형태가 변하지 않지만 동사와 형용사 등 용언은 어간에 여러 가지 어미들이 붙어 형태가 바뀌는데, 이를 활용(活用)이라고 한다. ‘먹다’라는 동사의 기본형이 실제로 문장에서는 ‘먹으니’ ‘먹으면’ 등의 형태로 바뀌어 사용되는 것이 그 예이다. ‘먹다’가 ‘먹-’이라는 어간에 ‘-으니’ ‘으면’ 등의 어미가 붙는 것처럼 어간과 어미가 일정한 모습을 보이는 동사를 규칙동사라고 하는데, 이와 달리 어간과 어미의 기본 형태가 달라지는 동사를 불규칙동사라고 한다.
예를 들어 ‘듣다’ ‘붇다’ 등의 동사는 어간의 받침 ‘ㄷ’이 어미 앞에서 ‘ㄹ’로 변해 ‘들으니’ ‘들으면’ ‘불으니’ ‘불으면’ 등으로 활용을 한다. 흔히 ‘국수가 불면, 체중이 불면’과 같이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국수가 불으면, 체중이 불으면’과 같이 말해야 한다. 또한 ‘국수가 불기 전에 드세요’라는 말도 ‘국수가 붇기 전에 드세요’로 말해야 하는데, 이는 기본형이 ‘불다’가 아니라 ‘붇다’이기 때문이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로마자 표기법(2)
로마자 표기법에서 자음을 표기할 때 주의할 점을 살펴보자. 자음 중에서 ‘ㄱ ㄷ ㅂ’은 모음 앞에 나올 때는 각각 ‘g d b’로 적는다. Gimpo(김포) Daegu(대구) Hobeop(호법). 자음 앞이나 단어 끝에 나올 때는 ‘k t p’로 적는다. Okcheon(옥천) Wolgot(월곶[월곧]) Hapdeok(합덕). ‘k t p’는 ‘ㅋ ㅌ ㅍ’를 적을 때도 쓴다. kong(콩) Taereung(태릉) Pyeongchang(평창). ‘k t p’는 쓰이는 자리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모음 앞에서는 ‘ㅋ ㅌ ㅍ’로 읽고, 자음 앞이나 단어 끝에서는 ‘ㄱ ㄷ ㅂ’로 읽으면 된다. 된소리는 같은 글자를 두 번 적는다. beotkkot(벚꽃) hotteok(호떡) Ssangrim-myeon(쌍림면).
'ㄹ’은 모음 앞에서는 ‘Guri(구리)’와 같이 ‘r’로 적고, 자음 앞이나 단어 끝에서는 ‘Chilgok(칠곡)’이나 ‘Imsil(임실)’과 같이 ‘l’로 적는다. 단 ‘ㄹ’이 연이어 나오는 경우에는 ‘Ulleung(울릉)’과 같이 ‘ll’로 적어야 한다. 두 번째 ‘ㄹ’이 모음 앞에 나온다고 해서 ‘*Ulreung’과 같이 적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럼 ‘설악’과 ‘대관령’은 각각 어떻게 적어야 할까? ‘설악’을 ‘Seolak’으로 적는 것은 한글 표기에 이끌려 잘못 적은 것이다. [서락], 즉 ‘ㄹ’이 모음 앞에서 실현되므로 ‘Seorak’으로 적어야 한다. ‘대관령’을 ‘Daegwanryeong’으로 적는 것도 한글 표기에 이끌린 오류이다. [대괄령], 즉 ‘ㄹ’이 연이어 실현되므로 ‘Daegwallyeong’으로 적어야 한다.
이대성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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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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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 아폴로에서 - 천상병
참으로 오랜만에 음악을 듣는 것이다. 내 마음의 빈터에 햇살이 퍼질 때, 슬기로운
그늘도 따라와 있는 것이다. 그늘은 보다 더 짙고 먹음직한 빛일지도 모른다.
새는 지금 어디로 갔을까? 골짜구니를 건너고 있을까? 내 마음 온통 세내어주고
외국여행을 하고 있을까? 돌아오라 새여! 날고 노래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이 그늘의 외로운 찬란을 착취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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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 정지용
시키지 않은 일이 서둘러 하고 싶기에 난로에 싱싱한
물푸레 같어 지피고 등피 호 호 닦어 끼우어 심지 튀기니
불꽃이 새록 돋다 미리 떼고 걸고 보니 칼렌다
이튿날 날짜가 미리 붉다 이제 차츰 밟고 넘을 다람쥐 등솔기같이
구부레 벋어나갈 연봉산맥길 위에 아슬한 가을 하늘이여
초침 소리 유달리 뚝닥거리는 낙엽 벗은 산장 밤 창유리까지에
구름이 드뉘니 후 두 두 두 낙수 짓는 소리 크기 손바닥만한
어인 나비가 따악 붙어 들여다 본다 가엾어라 열리지 않는 창
주먹쥐어 징징 치니 날을 기식도 없이
네 벽이 도로혀 날개와 떤다 해발 오천척 우에 떠도는
한조각 비맞은 환상 호흡하노라 서툴리 붙어 있는
이 자재화 한폭은 활 활 불피여 담기여 있는
이상스런 계절이 몹시 부러웁다
날개가 찢여진 채 검은 눈을 잔나비처럼 뜨지나 않을까 무섭어라
구름이 다시 유리에 바위처럼 부서지며 별도 휩쓸려 내려가
산아래 어늰 마을 우에 총총 하뇨 백화 숲 의부옇게 어정거리는
절덩 부유스름하기 황혼 같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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靈交日(영교일) - 김수영
나는 젊은 사나이의 그 눈초리를 보았다
흔들리는 자동차 속에서 창밖의 풍경이 흔들리듯
그의 가장 깊은 영혼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바람도 불지 않는 나무에서 열매가 떨어지듯 나의 마음에서 수없이 떨어져내리는 휴식의 열매
뒷걸음질치는 것은 분격인가 조소인가 회한인가
무수한 궤도여
위안이 되지 않는 시를 쓰는 시인을 건져주기 전에
시이여
그 사나이의 눈초리를 보셨나요
잊어버려야 할 그 눈초리를
굸은 밧줄 밑에 딩구는
구렁이가 악몽이 될 수 있겠나요
무수한 공허 밑에 살찌는 공허보다
더 무서운 악몽이 있나요
시내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셨나요
그것보다도 흔적이 더 ㅇ벗는 내어버린 자아도
하! 우주의 비밀을
아니
비밀은 비밀을 먹는 것인가요
하하하..........
<195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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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구두 - 이해인
내가 걸어다닌 수많은 장소를
그는 알고 있겠지
내가 만나 본 수많은 이들의 모습도
아마 기억하고 있겠지
나의 말과 행동을 지켜보던 그는
내가 쓴 시간의 증인
비스듬히 닳아 버린 뒤축처럼
고르지 못해 부끄럽던 나의 날들도
그는 알고 있겠지
언제나 편안하고 참을성 많던
한 켤레의 낡은 구두
이제는 더 신을 수 없게 되었어도
선뜻 내다 버릴 수가 없다
몇년동안 나와 함께 다니며
슬픔에도 기쁨에도 정들었던 친구
묵묵히 나의 삶을 받쳐 준
고마운 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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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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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53가지 지혜 - 루스 실로
제2장 정을 기른다
28.남의 집을 방문할 때는 젖먹이를 데리고 가지 않는다
젖먹이를 바깥세상과 접촉시키는 것은 좋지 않다
우리 유태인들은 생후 1년 전후의 젖먹이는 바깥세상과의 접촉을 피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젖먹이를 데리고 외출하는 일이란 거의 없다. 더구나 남의 집을 방문할 때는 더 더욱 그렇다. 그것은 아기에게도 어른에게도 괴로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따금 친구로부터 '오늘 놀러오지 않으래?'라는 청을 받는 경우가 있지만, 돌이 안 된 아기가 딸려 있는 동안에는 '아기와 함께 있어만 돼'라고 정중하게 거절한다. 때로는 아기와 함께 와도 좋다는 조건으로 초대를 받더라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데리고 가는 일이 거의 없다. 설사 데리고 가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수다를 떨며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야말로 간단히 커피 한 잔 정도 들고 돌아오는 것이 보통이다. 철없는 아기들은 대개 의자를 쓰러뜨리기도 하고, 귀중품이나 깨질 염려가 있는 물건에도 손을 대는 것이 다반사이기 때문에 초대를 한 쪽은 물론 아기의 부모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아기 쪽에서 보더라도 자신이 취하는 행동 모두를 엄마로부터 제지당하는 꼴이 되니, 이것은 엄마나 아기, 또 초대한 주인에게 신경만 쓰일 뿐 아무런 이득도 없는 것이다. 그래도 낮에는 간혹 데리고 가는 수가 있지만, 밤에 아기를 데리고 외출하는 일은 결코 없다. 어릴 때부터 일정한 시간에 잠자는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는 아기를 데리고 외출하는 것만은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피해야 한다.
어중간한 교제는 아기나 부모 모두에게 이롭지 못하다
나는 동양의 어머니들이 흔히 젖먹이를 등에 업고, 혹은 안고서 남의 집을 방문하는 것을 본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다. 내 친구 집에서 그런 어머니를 본 적이 있는데, 그녀는 아기 시중을 드는 것이 목적인지 친구와 환담을 하는 것이 목적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아기에게만 신경 쓰다가, 친구와는 제대로 나누지 못한 채 돌아가고 말았다. 이런 방문은 아기 엄마에게 있어서 불유쾌한 일임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모처럼 즐거워야 할 만남인데 아기 시중드는 데 정신이 팔리다 보면, 초대한 쪽이나 방문한 쪽이나 시간만 허비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즐길 때는 마음껏 즐겨야 한다. 어중간한 즐거움은 차라리 즐기지 않느니만도 못하다는 것이 유태인의 사고방식이다. 젖먹이를 양육하는 일에 전념해야 할 시기에 아기만을 위해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아기에게도 엄마에게도 행복한 일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엄마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하더라도 주위 사람들이 그대로 놔두지 않는 것 같다. 친척이나 아는 사람들은 아기들을 몹시 보고 싶어하며 오히려 엄마들이 아기를 데리고 오는 것을 환영한다. 커가는 아기의 재롱을 보고 어르는 것이 그들에게는 즐거움이 될지 모르지만, 아기나 엄마에게는 즐거움은커녕 괴로움을 안겨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기는 아기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쓸데없는 신경을 써서 피로에 빠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는 곧 아기에게 정서적으로 불안감을 줄 염려가 있다는 말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유태인들은 한 살 전후의 아기와 그 엄마는 편하게 지내도록 신경을 써주며, 되도록 외출은 삼가도록 한다.
이것이 포인트!
젖먹이를 데리고 외출하는 것은 자칫 정서적으로 불안감을 줄 염려가 있다. 왜냐하면 아기는 아기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쓸데없는 신경을 써서 피로에 빠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29.친절을 통해 아이를 지혜로운 인간으로 키운다
친절을 부정하다 불타 죽은 소돔 사람들
친절은 유태인에게 있어, 단지 도덕이나 공공심이라는 교훈적인 행위로만 해석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사람이란 나름대로 지혜 있는 인간으로 성장해 가는 것이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만큼 자녀들이 무엇인가 남을 위해 친절을 베풀었다고 해서 부모가 칭찬을 한다거나, 자녀들 자신이 칭찬 받을 것을 바라는 마음에서 남에게 친절을 베푼다는 것은 권장할 일이 못 된다. 친절이란 자녀들 개개인의, 특히 마음의 성장을 나타내는 행위이므로 부모나 어른들이 자녀들에게 분별없이 강요하거나 칭찬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유태인들이 소중히 여기고 있는 구약성서에는 친절에 관한 이야기가 몇 군데 나온다. 이중 '소돔과 고모라'는 친절이라는 지혜를 망각한 인간들의 죄를 잘 표현한 얘기인데, 여기서 잠시 소개할까 한다.
소돔은 인근에 있는 도시인 고모라와 함께 사해의 남쪽 해안에 접해 있는 곳이었다. 어느 날 소돔으로 한 나그네가 찾아와서는 이 도시의 금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었다. 그런데 그의 집에 도둑이 들어 그가 지키는 파수꾼이 되었다. 그런데 그의 집에 도둑이 들어 그가 지키고 있는 금화 50닢을 훔쳐가 버렸다. 이 나그네는 도둑맞은 금화를 변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두 딸과 함께 노예로 팔려갔다. 그런데 이 소돔의 백성들은 사실 죄 많은 인간들로, 오랫동안 다른 지방에서 온 사람들을 곤경에 빠뜨리는 잔악한 일들을 저질러 왔다. 이 나그네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소돔의 시민 중 한 사람이 그 금화를 훔쳤던 것이다. 그런데 노예로 팔려간 딸 중 하나가 옛 친구를 만나 먹을 것이 없다고 애걸하자 친절한 친구는 그녀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그러자 이 사실을 알게 된 소돔 시민들은 친구에게 먹을 것을 준 친절한 친구를 사형에 처하고 말았다. 그 처형 방법도 잔인해서, 발가벗긴 온 몸에다 꿀을 바른 다음 벌집 아래 매달아 수많은 벌들이 쏘아 죽이게 하는 잔인한 방법을 썼던 것이다. 그 결과 친절한 인간을 죽인 도시는 다음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여호와께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그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창세기 제19장)
이와 같이 친절은 최고의 지혜인 한편, 친절을 부정하는 행위는 마땅히 최고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것이다.
손님이 헛기침을 하면 스푼을 주라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친절에 보답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가장 아름다운 행위이다. 이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유태의 격언에 '손님이 헛기침을 하면 스푼을 주라'는 말이 있다. '스푼을 주십시오'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헛기침을 하는 손님의 마음을 재빨리 눈치채고 스푼을 챙겨주는 친절을 베풀라는 뜻이다. 그만큼 남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세심한 배려를 잊지 말라는, 지극히 유태인다운 격언이다. 친절이란 꼭 남의 칭찬을 받을 만한 가치 있는 행위만이 아니라, 오히려 일상 생활의 사소한 배려에서 나오는 행위를 뜻한다. 말을 바꾸면, 친절이란 그것이 도덕이니 공공심에 부합되기 때문이 아니라 평소 상대방에 대한 마음씀씀이를 나타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포인트!
친절이란 자녀들 개개인의, 특히 마음의 성장을 나타내는 행위이므로 부모나 어른들이 자녀들에게 분별없이 강요하거나 칭찬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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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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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9 - 시오노 나나미
제2부 하드리아누스 황제
(재위 : 서기 117년 8월 9일 ~ 138년 7월 10일)
황제로서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Imperator Caesar Trajanus Hadrianus Augustus)라는 공식 이름과 함께 하드리아누스의 치세-로마인의 표현에 따르면 '황제로서의 날들' (dies imperi)-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한 가운데 시작되었다. 그중 하나는 유대 문제였다. 2년 전인 서기 115년에 일어난 유대교도의 반란은 아직도 완전히 진압되지 않았다. 이미 유대에 파견되어있던 용장 투르보에게 조속히 진압을 종결지으라는 훈령이 떨어진다. 웬만한 도시나 마을이라면 반드시 정착촌이 있다고 할 만큼 이산 경향이 강한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제국 동방을 안정시키려면 유대 사회를 불온한 상태로 방치해둘 수 없었다.
또 다른 문제는 브리타니아에서 폭발한 원주민 반란이다. 이들의 거주구역은 오늘날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만나는 일대였던 모양인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령관을 파견할 필요는 없었다. 브리타니아에는 이미 3개 군단이 상주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반란을 허용했을까. 유대인 반란이 트라야누스가 파르티아 원정에 전력을 투입한 틈을 노린 것과 마찬가지로, 브리타니아인도 이때야말로 로마에 반기를 들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다 광대한 제국의 어느 한 곳에 병력을 집중하면, 자연히 다른 지방의 방위가 허술해진다. 실제의 방위력이 약해지는 게 아니라 방위에 대처하는 긴장의 강도가 떨어진다 이렇게 긴장이 느슨해진 틈을 전투심이 왕성한 칼레도니아(오늘날의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찌른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단순한 마음가짐에 있었던 만큼, 최고사령관인 황제가 엄격한 태도로 대처하면 현지 군단에도 그것이 당장 전염된다. 실제로 로마 군단이 본격적인 반격에 나서자마자 브리타니아 문제는 해결되었다.
세 번째 문제는 북아프리카의 마우리타니아 속주에서 일어난 반란이다. 이 반란에 대해서는 자세한 내용이 알려져 있지 않다. 유대인 반란을 재빨리 진압한 투르보를 쉴 틈도 주지 않고 북아프리카로 파견하여 문제를 해결하도록 했고, 그래서 반란이 초기에 진압되었기 때문일까. 하지만 이것은 파르티아 전쟁으로 다른 지역의 방위가 느슨해진 틈을 찌른 봉기는 아니었다. 반란의 중심이 된 것은 다키아 전쟁 때도 파르티아 전쟁 때도 로마 편에서 대 활약한 마우리타니아 출신 기병들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그 들의 대장인 루시우스 퀴에투스의 마음속에 싹튼 분노와 불만의 반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퀴에투스는 트라야누스가 파르티아 전쟁 막 바지에 보인 무기력한 태도에 분노했고, 트라야누스의 뒤를 이은 하드리아누스한테도 불만을 품었다. 하드리아누스로서는 아무리 작은 규모 의 반란이라도 완전히 진압할 필요가 있었다.
네 번째 문제는 도나우강 북쪽의 사르마티아족이 또다시 로마 영토를 위협한 것이었다. 하드리아누스도 이 문제만큼은 자기가 직접 나서기로 결심한다. 속주 총독으로 부다페스트에 있을 때 이미 겪어본 상대라는 것이 그가 직접 나선 이유였다. 하지만 공표할 수 없는 이유도 있었다. 파르티아 전쟁에 참가한 도나우 군단을 철수시킬 때, 침입한 야만족을 격퇴한다는 구실을 붙여 황제가 직접 인솔하면 후퇴한다는 인상을 약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하드리아누스가 즉위한 직후에 시급히 해결해야 했던 가장 큰 문제는 파르티아 전쟁을 어떻게 끝내느냐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대한 하드리아누스의 생각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제국의 안전을 지키려면 평화는 필수불가결하고, 하드리아누스는 제국의 장래를 생각하여 위험을 무릅쓰기로 결심했다"고 어느 영국 연구자가 말했는데, 하드리아누스는 바로 그렇게 행동했다. 하지만 그것은 엘베 강까지의 게르마니아 제패를 시도한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뒤, 그 뒤를 이은 티베리우스 황제가 라인 강까지 철수를 강행했을 때와 똑같은 위험을 무릅쓰는 행위다 전쟁 속행을 열망하는 장수들과 원로원의 반발을 각오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티베리우스 황제는 게르마니아 땅에서 철수할 때, 총사령관 게르마니쿠스를 동방으로 보내고 그때까지 라인 강 연안의 기지에서 해마다 게르마니아로 진격했던 로마군을 라인 강 군단기지에 붙잡아두는 방법을 채택했다. 하드리아누스가 택한 방법도 그와 비슷했다. 트라야누스가 파르티아 전쟁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그 자신이 사르마티아족을 격퇴한다는 구실로 도나우강 전선으로 이동한다. 동방의 방위선은 파르티아 전쟁 이전에 트라야누스가 확립해둔 흑해에서 홍해까지의 선으로 되돌아가고, 파르티아 전쟁에 참가했던 동방군단들도 전쟁 이전의 주둔지로 돌아가 흑해와 홍해를 잇는 방위선을 굳게 지킨다.
티베리우스 황제 때와 다른 점은 참모본부에 대한 처리였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명령에 따라 임지가 동방으로 바뀐 게르마니쿠스는 참모역할을 맡았던 휘하 장수들을 새 임지에 데려갔지만, 도나우강 전선으로 가는 하드리아누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표면상의 이유는, 수도 로마에서 트라야누스의 유골을 주인공으로 하여 거행되는 개선식에 트라야누스가 제위에 올랐을 때부터 고락을 같이 해온 장수들이 빠질 수는 없다는 것이었지만, 하드리아누스의 본심은 이들에게 사실상 은퇴할 길을 열어주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본국이탈리아로 돌아간 장수들 가운데 다시 전선으로 복귀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로마가 진격해오지 않는 것을 본 파르티아 왕은 수도 크테시폰으로 돌아왔다.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로마군과 싸운 게릴라들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아르메니아 왕위에는 파르티아 왕이 새로 임명한 파르티아 왕족이 즉위했고, 하드리아누스는 그것을 승인했다. 모든 것은 파르티아 전쟁 이전 상태로 돌아갔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는 파르티아의 수도가 함락되었을 당시 트라야누스가 손에 넣은 황금 옥좌와 왕녀는 돌려보내지 않았다. 또한 왕과 황제의 대리인이 유프라테스 강에 떠 있는 섬에서 평화협정에 조인하는 공식 행사를 통해 파르티아와 로마 사이에 평화가 회복된 것을 확인하지도 않았다. 그런 일을 하면 모락모락 연기를 내고 있는 불만에 불을 지퍼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후퇴란 7떤 이유를 붙여도 불명예스러운 건 변함이 없다. 따라서 가능한 한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끝내고싶었을 것이다. 트라야누스가 아르메터아 속주 총독으로 파견한 세베루스를 동방 방위의 최고 책임자인 시리아 속주 총독에 앉힌 것도 그런 배려를 보여주는 예다. 동방에서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낸 하드리아누스는 그 해 11월에 군단을 이끌고 서방으로 떠났다. 소아시아를 가로질러 헬레스폰토스 해혈을 건너 유럽으로 들어간다. 거느리고 온 군단을 지나가는 길에 각자의 기지에 놓고 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행군이지만, 나중에 동시대인들에게 'immensi laboris'(지칠 줄 모르는 일꾼)라는 평을 받게 된 하드리아누스는 기회도 시간도 낭비하지 않았다.
도나우강이 흑해로 흘러드는 하류에는 북쪽으로 돌출한 형태의 다키아 속주와 흑해 사이에 록솔라니족의 거주지역이 있다. 하드리아누스는 슬라브계로 여겨지는 이 부족의 족장과 회담하여 동맹관계를 맺는 데 성공했다 부족의 유력자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는 종래의 방식을 활용한 결과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서기 118년에 도나우강 중류 지역으로 이동한 하드리아누스는 다키아와 먼 판노니아 속주 사이에 살고 있는 야지게스 족과 동맹관계를 굳히기 위한 교섭에 들어간다. 지도를 보면, 로마가 왜 이 일대를 속주화하지 않았는지 의아하게 여겨진다. 속주화했다면 도나우강 방위선도 단축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로마는 오랫동안 동맹관계를 유지해온 상대에 대해서는 야만족이라 해도 독립을 존중해주었기 때문이다. 그거야 어쨌든 하드리아누스는 정상회담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봄에 황제는 도나우강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 먼 판노니아 속주에 이르렀다. 여기서의 상대인 사르마티아족한테는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야만족을 도나우강 북쪽으로 멀리 쫓아내는 격퇴전이 벌어지는 동안 하드리아누스 자신은 부다페스트의 총독 관저에 머물러있었던 모양이지만, 그것은 마우리타니아 반란을 진압하고 도나우강으로 달려온 용장 투르보에게 지휘를 맡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덧붙여 말하면, 트라야누스가 임명한 먼 판노니아 속주 총독은 사르마티아족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도나우강 이북의 대세력이었던 다키아 왕국이 트라야누스에게 패하여 지상에서 사라진 것은 로마 제국에는 강적의 소멸이라는 경사스러운 일이었지만, 다키아족이 위세를 떨치고 있을 당시에는 숨을 죽이고있던 군소 부족들이 제 세상인 양 날뛰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물론 적은 여럿으로 나뉘어 있는 편이 훨씬 대처하기 쉽다. 하지만 가능한 경우에는 외교로, 불가능한 경우에는 군사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영원히 계속될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로마인들이 이들을 야만족이라고 부른 것은 생활수준이 로마인보다 훨씬 뒤떨어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법의 백성인 로마인은 서약을 지키는 습관이 없는 그들을 멸시했고, 야만족이라는 말은 그런 멸시의 표현이기도 했다. 도나우강 전선에 머물러 있는 동안, 하드리아누스는 근위대장인 아티아누스가 보낸 밀서를 받았다. 이 친서에는 선제의 중신 네 사람이 하드리아누스 암살을 모의하는 기미가 있다고 적혀 있었다.
숙청
하비디우스 니글리누스-트라야누스가 다키아 속주 초대 총독에 임명한 사람. 다키아 전쟁과 파르티아 전쟁 때 트라야누스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무장으로 활약. 코르넬리우스 팔마-아라비아(오늘날의 요르단) 제패의 공로자. 아라비아속주의 초대 총독. 집정관을 두 번 지냈다. 푸블리우스 켈수스-트라야누스 휘하의 장군. 역시 두 번 집정관을 지내는 명예를 얻었다. 트라야누스도 집정관은 세 번밖에 지내지 못했다. 루시우스 퀴에투스-앞에서 몇 번이나 언급한 북아프리카 키레나이카(오늘날의 리비아) 출신의 장군. 마우리타니아 기병대를 이끌고 활약했다. 그 활약상은 트라야누스 원기둥에서도 트라야누스 다음으로 많은 장면에 등장했을 정도였고, 다키아 전쟁과 파르티아 전쟁을 통해 사실상 트라야누스의 부장이었다. 이 사람도 나머지 세 사람과 마찬가지로 집정관을 지냈다. 원로원 계급 중에서도 최상층에 속하는 인물로서, 당시의 로마인이라면 '집정관 경험자' (콘술라리스)라는 말만 들어도 누구를 말하는지 알았다고 한다.
이런 움직임을 하드리아누스가 예상치 못했을 리는 없다. 영국의 연구자도 말했듯이, 제국의 안전을 지키려면 평화는 필수불가결하고 그 평화를 확립하려면 위험도 무릅쓰기로 결심한 하드리아누스에게 '위험'은 바로 트라야누스 시절과는 전혀 다른 그의 정치적 방침에 대한반발이었기 때문이다. 밀서를 인은 하드리아누스도 몰래 답장을 보내, 당장 대처하라고 명령했다 근위대(프라이토리아)는 오늘날 미국의 FBI(연방수사국)와 비슷한 임무도 맡고 있었다 근위대장 아티아누스도 당장 대처했다. 근위대 병사들은 대장의 명령을 받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니글리누스는 별장이 있는 북이탈리아의 파엔차에서 살해되었다. 팔마도 역시 중부 이탈리아의 테라치나에 있는 별장에 머물고 있다가 살해되었다. 켈수스가 살해된 곳은 남부 이탈리아의 바이아에 있는 별장이었다. 루시우스 퀴에투스는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행길에 살해되었다.
원로원은 느닷없이 찬물을 뒤집어쓴 거나 마찬가지였다. 체포하여 재판을 거친 다음 사형에 처한 게 아니다. 밤중에 강도를 위장하여 침입해서 죽인 것도 아니다. 대낮에 근위대 병사들이 당당히 쳐들어가서 불문곡직하고 죽인 것이다. 게다가 살해된 네 사람은 모두 '집정관 경험자'다. 트라야누스 치세 20년 동안 집정관 경험자는 물론 원로원 의원조차도 황제 암살 음모죄, 즉 국가반역죄로 고발당하여 사형에 처해진 적은 없었다. 집정관 경험자가 재판을 받은 적은 있었지만, 그것은 속주 총독 시절의 악정을 규탄받았기 때문이고, 국가반역죄로 걸려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황제 살해는 곧 국가에 대한 반역행위라 하여 국가반역죄를 법제화한 것은 암살된 카이사르의 전철을 밟기 싫어한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다. 하지만 그의 뒤를 이은 몇몇 황제들은 이 법을 원로원 안의 반대파를 숙청하기 위한 무기로 활용한다. 티베리우스, 네로, 도미티아누스 시대에 황제와 원로원의 관계가 악화한 것은 이들 세 황제가 이 법을 반대파 숙청의 무기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하드리아누스가 즉위하자마자 원로원의 유력자 네 명을 살해한 것은 원로원 의원들에게 과거의 악몽을 상기시켰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말년 같은 공포정치가 또 시작되는 게 아닐까 하고 두려워한 것이다. 하드리아누스의 <회고록>에는 이 사건에 대한 변명이 적혀 있었던 모양이다 자기는 죽이라고까지는 명령하지 않았는데, 아티아누스가 멋대로 죽였다는 것이다. 황제열전에서도 그런 방향으로 이이기가 전개된다. 프랑스의 여류작가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역사소설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도 이 사건에 대해서는 종래의 해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유르스나르의 이 소설은 뛰어난 문학작품으로서, 죽음을 눈앞에 둔 늙은 하드리아누스가 젊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하드리아누스의 다음다음 황제로서 철인 황제로 불렸고, 오현제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앞으로 쓴 편지 형식을 취하고 있다. 늙은 하드리아누스의 회상이니까 우울한 분위기가 작품 전체를 지배하고 있지만, 소설인데도 철저한 조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이것은 그 사료에서 취한 것이고 저것은 이런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을 일일이 입증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가 쓴 <율리우스 카이사르 씨의 사업>과 쌍벽을 이룬다 다만 산문적이고 현실적인 카이사르에 비하면, 성격이 복잡하다는 점에서 좀 더 근대적인 하드리아누스 쪽이 소설 주인공에는 더 잘 어울린다. 그렇긴 하지만, 브레히트의 작품도 거침없이 시원스럽고 대범한 카이사르, 나중에는 공화정을 제정으로 바꾸는 혁명까지도 유쾌하게 해치우는 카이사르를 훌륭하게 묘사해냈다. 유르스나르는 이 작품 덕택에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는 말을 들을 만큼, 그녀의 하드리아누스는 성공작이었다. 현대 프랑스인들이 로마 시대의 어느 황제보다 하드리아누스를 좋아하는 것도 유르스나르의 공적임이 분명하다 유르스나르가 본 하드리아누스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는 별문제로 하고, <하드리아누스의 회상>이 문학작품의 최고 걸작을 읽는 즐거움을 주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런데 유르스나르는 하드리아누스 생애의 유일한 오점이라 해도 좋은 '집정관 경험자' 살해사건을 어떤 식으로 해석했을까. 조금 길기는 하지만 요약하지 않고 전체를 소개하고 싶다. 그것은 내가 뀨르스나르에게 바치는 경의다. 예술작품은 요약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옛날의 후견인한테서 밀서가 날아온 것은 사르마티아족 유력자한테 항복을 받아내어 이탈리아로 돌아갈 전망이 선 직후였다. 편지에는 로마로 돌아온 퀴에투스가 팔마를 만나러 간 일이 적혀 있었다. 또한 우리의 적들은 그들의 사회적 지위라는 요새에 틀어박혀 과거의 부하들을 소집하기 시작했으며, 그 두 사람이 책모를 계속하는 한 우리의 안전은 보장받을 수 없다는 말도 적혀 있었다.
나는 아티아누스에게 당장 대처하라고 명령했다. 친애하는 그 노인은 마치 전광석화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그가 한 일은 내 지령을 넘어서 있었다. 내 적들을 일격에 지상에서 말살해버린 것이다. 몇 시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같은 날 켈수스는 바이아에서 살해되고, 팔마는 테라치나의 별장에서, 니글리누스는 파엔차의 시골집 문간에서, 퀴에투스는 동조자들과 밀담을 끝내고 시내로 돌아오려고 마차에 타려다가 살해되었다. 공포의 물결이 수도 로마를 덮쳤다. 나의 늙든 매형 세르비아누스는 내가 제위에 오르자 겉으로는 야심을 포기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내가 실수를 저지르기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네 사람이 숙청당한 사실에 생애 최고의 기쁨을 느꼈을 게 분명하다. 악의에 찬 소문이 다시금 내 주위에 감돌기 시작했다. 이것을 나는 이탈리아로 돌아가는 선상에서 알았다. 나는 깜짝 놀랐다. 적한테서 해방되면 누구나 안도할 게 뻔하지만, 내 대부는 장기적인 반향에는 무관심해지기 쉬운 노인답게 행동한 것이다. 그는 잊어버렸다 내가 앞으로 20년 동안이나 그 네 사람의 죽음이 초래한 반향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나는 생각했다. 옥타비아누스 시절에 정적을 숙청한 것이 아우구스투스의 업적에 계속 오점으로 남은 사실을. 치세 초기에 저지른 범죄가 그 후 네로의 악업으로 연결되어간 것을. 그리고 도미티아누스의 마지막 몇 년. 평범하긴 했지만 다른 황제들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는 않았던 도미티아누스가 자기 행위의 소산인 공포에 인간성을 잃어버리고, 결국에는 황궁 안인데도 마치 깊은 숲속에서 궁지에 몰린 야수 같은 죽음을 맞이한 사실을 나는 상기했다. 이미 내 공적 생활은 내 통제력을 벗어나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나에 관한 기록의 서두에 이미 깊게 새겨져버렸다 이제 내 머리에서도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원로원, 그 위대하면서도 약한 정치집단, 자신들이 추적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당장 일치 단결하는 그 기관은 동료 네 명이 내 명령으로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이리하여 세 명의 가증스러운 모사꾼과 한 명의 흉포한 야수는 순교자로 추앙될 것이다. 나는 아티아누스에게 브린디시까지 와서 그가 한 일을 해명하라고 엄중하게 명령했다.
그는 항구 근처의 여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동쪽에 면해 있는 그 방은 일찍이 베르길리우스가 죽은 방이라고 한다. 그는 방 입구까지 발을 질질 끌면서 마중을 나왔다. 통풍을 앓고 있었다. 단둘이 남게 되자내 입에서는 비난과 질책이 쏟아져 나왔다. 온화하고 이상적인 통치를 할 작정이었는데, 깊이 생각지도 않고 저질러진 네 사람의 처형으로 치세가 시작되다니! 네 사람 가운데 한 사람만은 본보기로 죽일 수밖에 없었지만, 아무리 본때를 보이기 위해서라 해도 적법성이 결여된 형태로 처형한 것은 비난의 표적이 될 게 뻔하다. 이번의 권력 남용은 앞으로 내가 아무리 관대하고 공정하게 행동해도 항상 나를 따라다니는 비판의 구실이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내 미덕조차도 가면으로 간주되어 폭군의 전설을 낳는 이유가 되고, 역사상으로도 나를 떠나지 않고 줄곧 따라다니게 될 것이다. 내가 느끼고 있는 공포도 고백했다. 나도 이제는 인간성이 지닌 잔혹함과 무관할 수는 없지 않을까. 범죄는 범죄를 부른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는데, 나도 그 예가 되지 않을까. 마치 피맛을 본 야수처럼.
충성심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던 그 노인이 벌써 그 충성심에서 해방된 게 아닐까. 그리고 나에게서 약점을 보았다고 믿고, 그 약점을 이용하여, 나를 위한다는 구실로 니글리누스나 팔마와의 오랜 불화를 청산한 게 아닐까. 평화 확립이라는 내 과업을 위험에 노출시킨 것으로도 모자라서, 나의 로마 귀환을 우울하고 어두운 것으로 만들 준비까지 해주었느냐고 질책했다. 노인은 앉아도 되느냐고 물었다. 자리에 앉은 그는 붕대를 감은 다 리를 옆에 있는 발받침대에 올려놓았다. 나는 이야기하면서 그 아픈 다리에 무릎덮개를 덮어주었다. 그는 내가 지껄이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어려운 암송을 그런 대로 무난히 해내는 제자를 지켜보는 선생처럼 미소를 머금은 채. 내가 말을 끝내자마자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폐하의 방식에 반대하는 사람한테는 어떻게 대처할 작정이었느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들 일당이 폐하의 암살을 모의했다는 증거를 모으는 것은 간단했다. 그것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 지는 별문제지만.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숙청을 수반하지 않는 정권교체는 있을 수 없다. 폐하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그 일을 하는 역할이 나에게 맡겨진 것이다. 여론이 희생자를 요구한다면 나를 근위대장에서 해임하면 된다. 이렇게 간단한 일은 없다. 그는 이미 이 해결책을 생각하고 있었고, 나에게 그 해결책을 채택하라고 권했다. 그리고 원로원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그 이상의 일을 할 필요가 있으면, 좌천당해도 추방당해도 자기는 만족한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아티아누스는 나에게 아버지 대신이고 충실한 인도자였다. 나는 이따금 그에게 돈을 달라고 조르기도 하고, 곤란한 일이 있을 때는 의논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 처음으로 나는 깨끗이 수염을 깎은 온화한 얼굴과 지팡이 위에 조용히 겹쳐놓은 주름투성이의 두 손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의 행복을 구성하고 있는 몇 가지 요소에 대해서는 나도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 그가 사랑하는 병약한 아내, 이미 결혼한 두 딸, 그리고 외손자들. 이 손자들에게 그는 자신이 그러했듯이 조심스러우면서도 끈질긴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리고 미식에 대한 기호, 그리스제 카메오와 젊은 무희들에 대한 취미. 그래도 그에게는 이런 것들보다 나에 대한 사랑이 먼저였다. 게다가 그것은 3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한결같았다. 그의 최대 관심사는 나를 돌보고 키우는 것, 나를 위해 애쓰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와의 관계에서 나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이나 장래의 꿈만 우선시켰다. 나에 대한 그와 성실함은 예사롭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그 성실함이 기적적이고 불가해한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이런 헌신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할 수 있을만큼,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것. 이 나이가 되어도 아직 그것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나는 그의 충고를 받아들였고, 그는 지위를 잃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내가 그렇게 하리라고 예상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즉석에서 충고를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오랜 친구에게 보답하는 행위라는 것을. 그 충고가 예리한 정치감각에 뒷받침되어 있고, 달리 좋은 방책을 찾을 수 없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는 것을. 그가 더 많은 희생을 치를 필요는 없었다. 몇 달 동안 은둔생활을 시킨 뒤, 나는 그에게 원로원 의석을 주는 데 성공했다. 기사계급으로 태어난 자에게는 최고의 명예였다. 그는 가족이나 일에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고, 유복하긴 하지만 화려하지는 않은 평온한 노년을 보냈다. 나는 알바노 근처에 있는 그의 별장을 자주 찾아갔다. 이제 그 일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회전을 앞둔 전날 밤의 알렉산드로스처럼, 로마에 들어오기 전에 공포의 신에게 제물을 바친 것은 과거의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티아누스도 제물로 꼽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정말 아름다운 장면이다. 나 또한 펜으로 승부하는 작가로서 탄복할 수밖에 없다.『하드리아누스의 회상』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정말로 이야기가 그런 식으로 진행되었을까. 하드리아누스는 '집정관 경험자' 네 명의 음모를 알고 근위대장인 아티아누스에게 '당장 대처하라'고 명령하지만, 그 '대처'란 네 명을 체포하는 것뿐이고 살해를 의미하지는 않았을까. 하드리아누스 자신이 쓴 회고록에는 아티아누스가 독단으로 살해했다고 적혀 있었다지만, 인간은 진실이라고 해서 전부 다 쓰는 것은 아리다. 특히 후세의 평가에 영향을 줄 게 뻔한 이런 문제에서는 본인이 썼으니까 당연히 진실일 거라고 믿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이 <회고록>을 토대로 씌어진 게 분명한 황제열전도 하드리아누스 시대보다170년이나 뒤인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에 간행된 작품이다. 따라서 다른 '역사적 사실'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역사책에 기록된 것은 모두 진실인가 하는 영원한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케 하는 사례일 뿐이다.
이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소설을 쓴 유르스나르는 하드리아누스에게 살인의 오명을 씌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드리아누스한테는 인간의 도덕에 어긋나는 일을 시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장 대처하라고 명령했다'는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사전에 따르면 대처란 대응하여 처리한다는 뜻이다. 증거는 간단히 찾아낼 수 있었다니까, 그 증거를 잡아서 고발하고 체포하여 정식 재판에 회부하라는 뜻이었을까. 하지만 그렇게 했다면 과연 비난을 면할 수 있었을까. 죄목은 국가반역죄다. 이런 중죄는 원로원에서 재판한다. 선제인 트라야누스 시대에는 이 죄목으로 고발된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물론재판도 없었다. 황제가 단호한 태도로 나가면 항상 추종하는 것이 원로원이니까, 네 명의 음모가에게는 유지가 선고되고 사형이 집행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원로원 의원들의 공포까지 없앨 수 있었을까. 이 죄목으로 정적을 처단했다는 사실은 엄연히 남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하드리아누스는 티베리우스나 네로나 도미티아누스와 어디가 다르냐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선제가 국가반역죄로 원로원 의원을 처단한 적이 없는 트라야누스였기 때문에, 하드리아누스는 원로원의 유력자 네 명을 이 죄목으로 재판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까.
군주나 지도자의 도덕과 개인의 도덕은 다르다. 개인이라면 성실, 정직, 올곧음, 청렴 등이 미덕일 수 있다. 하지만 공인이 되면, 공인중에서도 최고 책임자가 되면 이런 미덕을 반드시 지킬 수는 없다 라틴어로는 같은 '비르투스'(virtus)지만, 개인의 경우에는 미덕이라고 번역할 수 있어도 공인에 대해서는 '기량'이라고 번역하는 정도로는 충분치 않아서 '역량'이라고 번역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트라야누스가 개인의 도덕과 황제의 도덕을 양립시킬 수 있었던 것은 다키아 전쟁에 승리하여 로마 제국의 영토를 확대했기 때문이다. 이런 트라야누스를 암살하려 했다면 일반 시민부터 격분했을 테고, 원로원도 외면했을 것이다. 트라야누스에게는 정적이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국가반역죄와는 무관하게 치세를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는 영토를 확대하기는커녕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전쟁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뿐만 아니라 트라야누스가 원정한 땅에서 군대를 철수하는 작업도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진행하고 있었다. 불만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우구스투스의 유훈에 거역하면서까지 엘베 강에서 라인 강으로 후퇴를 감행한 티베리우스가 악평을 각오한 것과 마찬가지다. 만약 티베리우스가 제국 전체의 안전보장을 배려하기보다 엘베 강까지의 게르마니아 땅을 정복하는 데 전념했다면 원로원도 그를 지지했을 테고, 원로원의 일원인 역사가 타키투스도 티베리우스를 그렇게까지 비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하드리아누스는 늙은 후견인의 충고로 눈을 뜰 때까지 네 음모가를 말살할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 그가 명령한 '대처'에는 살해의 의미까지는 포함되지 않았을까 따라서 네 명을 죽인 것은 아티아누스의 독단이었을까. 서기 118년 당시 하드리아누스는 스무 살이나 서른 살의 젊은이가 아니었다. 반년만 지나면 마흔 세 살이 되는 성숙한 어른이었다. 공화정 시대부터 로마의 최고지도자인 집정관의 자격 연령은 마흔 살이었다. 하드리아누스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치세의 3분의 2나 되는 기간을 들여 제국 전역을 순행한 것이었다. 그만큼 그는 무엇이든 자기 눈으로 보고, 그것을 토대로 판단하여 통치한 사람이다. 무엇이든 스스로결정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성격이다. 그런 하드리아누스가 원로원의 유력자 네 명에 대한 '대처'라는 중대사를 어정쩡한 형태로, 즉 마지막 마무리도 하지 않은 형태로 명령했을까. 게다가 그 자신이 로마로 돌아온 뒤에 대처한다 해도, 그보다 나은 방책을 찾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만약 이 사건을 소설로 쓴다면, 하드리아누스가 명령한 '대처'에는 네 명을 죽이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었다는 가설을 토대로 이렇게 쓸 것이다. (나의 늙은 후견인은 항구 근처의 여관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방 입구까지 발을 질질 끌면서 마중을 나왔다. 그는 통풍을 앓고 있었다. 노인은 앉아도 되느냐고 물었다. 의자에 앉은 그는 붕대를 감은 다리를 옆에 있던 발받침대에 올려놓았다. 그 아픈 다리에 나는 자연스럽게 무릎덮개를 덮어주었다. 한동안 나는 열 살 때부터 오랫동안 돈을 조르거나 어려움을 의논해온 아티아누스의 면도한 부드러운 얼굴과 지팡이 위에 조용히 걸쳐놓은 주름투성이의 두 손을 마치 처음 보는 듯이 바라본 뒤에 입을 열었다. "근위대장을 그만두십시오."
노인의 얼굴에는 손수 돌보아 길러온 젊은이가 훌륭하게 성장한 것을 본 사람처럼 흐뭇한 미소가 번져갔다. 근위대장에서 해임된 아티아누스에게는 몇 달 동안 은거생활을 거친 뒤 원로원 의석을 주는 데 성공했다. 기사계급으로 태어난 자에게는 최고의 명예였다. 알바노 근처에 있는 그의 별장에는 나도 자주 찾아갔다. 아티아누스는 유복하긴 하지만 화려하지는 않은 평온한 노년을 만끽하고 있었다. 우리 사이에는 그 일이 화제에 오른 적이 없었다.)
문학적 향기가 부족하다는 비판이라면 달게 받겠다. 하지만 정치는 비정한 것이다. 그것을 직시하지 않으면, 만인의 행복을 목표로 삼는 정치는 할 수 없다. 그리고 정치에 필수 불가결한 권력을 행사하려면 우선 권력 기반이 튼튼해야 한다 권력 기반이 확립되지 않으면 권력도 일관되게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일부 학자들처럼 하드리아누스가 아티아누스에게 책임을 전가했다고 단정하지는 않는다. 아티아누스의 헌신이었다는 유르스나르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사전에 따르면 헌신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 바치는 것, 자신을 희생물로 제공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죽음으로써 삶을 얻는 것이기도 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일까지 해주는 사람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지도자의 '역량(비르투스)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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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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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대하여 - 조만 옮김
괴테의 초기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몇몇 두드러진 모티브들이 나타나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른다. 베르테르는 그가 자살하던 날 저녁, 자기 하인에게 한 조각의 빵과 포도주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심한 폭우가 쏟아져 내림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동산으로 나가 거닐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내가 마실 죽음의, 싸늘한 고통의 잔’을 잡고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로테에게 확신시키려고 떨리는 펜을 들어 글을 쓴다. 한밤중 일순간에 베르테르가 자기 머리에다 대고 총의 방아쇠를 당김으로써, 마침내 그 일(죽음)은 이루어졌다[괴테는 성서적인 용어인, 이루었다(vollbracht)를 사용한다]. 이러한 장면 ― 여기서 주인공은 최후의 만찬인 빵과 포도주를 먹고, 절망과 고뇌에 찬 모습으로 밤의 동산을 거닐고, 그리고 죽음의 잔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는 성구를 인용하고 나서, 그 자신이 자기의 친구들인 로테와 알버트를 자유롭게 해 주기 위한 희생의 행위로서 간주한 죽음에 복종한다 ― 은 분명히 괴테에 의해 의도된 것으로서 수난의 사건들에 대한 후표상(後表象)으로 승인받기 위함이었다.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유형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거나 혹은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은 하나의 고립된 모티브를 단순하게 다루지 않고, 인지할 수 있는 모티브들의 윤곽을 분명히 파악하여 다루려고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그 장면을 해석할 것인가? 그 장면은 종교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잇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 바로 이 점에 대해서는 여러 탁월한 학자들에 의해 반대가 있어 왔다. 괴테를 연구한 한 전문가는 그 소설을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을 내포한 소설로 특징 짓고, 분명히 ‘종교적인 소설은 아닌 것’으로 못박았다. 또 다른 유명한 학자는 그 소설을 복음서의 현대적인 번역이라 일컬었고, 그 소설의 제목 "Die Leiden"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보다는 ‘수난’으로 이해되고 번역되어야 할 것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러한 견해들 가운데 어떤 견해가 옳을까?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이러한 장면이 이 소설 전체의 패턴과 일치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결정할 필요가 있다. 특별히, 그 인상적이 모습의 예수는 앞서 가버린 것으로 예시된 그 소설의 결말에 나타나는 후표상일까? 괴테를 가장 열광적으로 숭배하던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인 나폴레옹 이래, 그 소설은 계속 사랑의 비극으로 널리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사실상 베르테르의 과도한 종교적 망상의 주제는 사랑의 주제가 나타나기 오래 전에 제시된다. 베르테르는 아주 초기의 편지들에서부터 자기의 친구 빌헬름에게 모든 존재를 뜨겁게 감싸안고 싶은 자신의 열망을 털어놓는다. 이런 열망 속에서 그는 하느님의 현시를 깨닫는다. “[……]줄기 사이에 행해지는 작은 세계의 우글거림과 작은 벌레와 모기들의 형형색색의 알 수 없는 모습을 가슴 뿌듯이 느끼며, 자신의 모습을 본떠 우리들 인간을 창조하신 전지전능한 하느님의 존재와 영원토록 우리들을 환희 속에 머무르게 하신 지고한 자의 입김을 느끼네.” (5월 10일의 편지).
동시에 베르테르는 처음부터 인간이 갖는 한계에 대한 예민한 인식에 붙잡혀 있었다. “인간의 활동력도 탐구력도 어떤 한계 내에 속박을 받고 있지. 그리고 우리들의 고달픈 생존을 연장시키려는 것 외에 어떠한 다른 목적도 갖고 있지 않은 그러한 욕구의 만족 때문에 갖은 힘을 다 써 가며 모든 활동을 허비해 버리는 것을 보게 되면……, 빌헬름이여! 이 모든 것은 나로 하여금 침묵을 지키게 하네.” (5월 22일의 편지).
심지어 그는 로테를 만나기 전까지, 인간이 처한 상황의 한계로부터 도피하는 한 방편으로 자살을 생각함으로 위로를 받았다. 이러한 생각은 그가 하느님을 만나는 데 항상 방해가 되었던 것이다.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과는 달리, 로테에 대한 그의 새롭게 발견된 사랑은 한동안 그의 종교적인 동경의 불가피한 결과였던 좌절로부터 그를 구해 준 유일한 것이었다. 그러나 소설의 종결 부분에 오면, 베르테르는 로테에 대한 그의 사랑이 그가 공허하게 이루고자 했던 신적인 사랑에 대한 부적합한 대용물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그 자신에게 아직도 열려 있는 유일한 방식, 즉 죽음을 통하여 전능자와의 합일을 모색한다. 우리는 분명히 종교적 의미를 언표하고 있는 한 소설을 취급하고 있다. 베르테르의 전존재는 그 소설의 첫 페이지부터 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에 대한 갈망, 혹은 적어도 그가 모든 존재 속에서 범신론적으로 인식하는 더 높은 세력에 대한 갈망으로 소모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 결말을 향해 도입된 모티브들은 그 작품 전체 맥락과 완전히 일치한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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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사회/문화/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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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마카아벨리 평전 - 제14장 (비탄에 잠긴 마키아벨리)
그의 성격이 꼭 그렇듯이, 행복과 불행, 꿈과 현실, 저열함과 위대함 등이 뒤섞인 속에서 (리비우스 논고)와 (군주론)이 태어난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같은 1513년 12월 10일자 편지에서 만족감과 애정과 기대가 묻어나는 말로 친구에게 (군주론)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이 책의 내용을 늘리고 가다듬는 중이긴 하지만, 필리포 카사베키아에게 그것을 읽어봐 달라고 부탁했다는 말을 전하고 있다. 그가 책을 늘리고 가다듬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책의 판본이 두 개 일것이라고 믿는 일단의 비평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 내용을 완전히 바꾸어놓지는 않았다. 그는 또 그 책을 줄리아노에게 헌정했으면 하는데, 과연 그래야 할지 말아야 할지 주저하고 있다는 말도 하고 있다. 헌정하지 않는 쪽에 대한 설득력 있는 이유로는 (줄리아노가 아예 읽어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문제가 있었고, 헌정하고자 하는 것은 (빈궁함으로 인해 받게 될 경멸)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신만의 절박한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 메디치 군주들이 나를 써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네. 설사 돌 나르는 일부터 시킨다고 해도 상관없네. 어쨌든 내가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다름아닌 내 탓이기 때문일세. 그들이 이 책을 읽게 된다면, 내가 국정술 연구에 바친 지난 15년을 결코 잠과 놀이만으로 헛되이 보내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겠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노고를 길잡이 삼아 많은 경험을 쌓은 사람의 봉사를 받는 데야 그 누군들 기쁘지 않겠는가. 그들이 나의 진실됨을 의심할 필요는 없네. 나는 지금까지 줄곧 진실된 길을 걸어왔고, 그것을 이제 와서 새삼 깨뜨릴 생각은 없네. 나처럼 43년 간이나 진실되고 바른 삶을 살아온 사람은 결코 그 본성을 바꿀 수가 없는 법이지. 내가 가난하다는 사실이 바로 내가 진실되고 바르다는 증거가 아니고 뭔가.
베토리는 이 멋진 편지에 대해 처음에는 답장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다시 그 일을 되새기게 하는 편지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도 대답을 받기 위해 친구인 도나토의 야심찬 계획(돈을 써서 하층 계급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계획을 말함 본서 15장의 관련 부분을 볼 것-옮긴이)을 도와달라고 그에게 부탁하는 내용에다 슬적 얹어서 보낸 것이었다. 베토리는 이에 대해 12월 24일자로 답장을 보냈는데,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신변잡담만 잔뜩 늘어놓았다. 물론 우리의 가엾은 서기장은 이를 분명히 유쾌하게 보았으리라. 그가 처한 가난으로 이름이 땅에 떨어질 처지에 놓인 때라 그 재미는 덜했겠지만 말이다. 그가 가장 마음을 쓰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 대사 친구는 (일을 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 데 익숙해 있는) (리돌피의 책에는 이 구절이 (sendo a secco a faccende e a guadagnare)로 되어 있으나, 이는 (sendo asueto afaccende e a guadagnare)의 잘못으로 보인다. 베토리가 마키아벨리에게 보낸 1513년 12월 24일자 편지의 원문을 볼 것. Machiavelli, Tutte le opere, a cura 야 M. Martelli ( Firenze: Sansoni, 1971), Lettera 218, p. 1163b; Machiavelli, Lettere, a cura 야 F. Gaeta (Torino: UTET, 1984), Lettera 226, p. 434-옮긴이) 마키아벨리로서는 아직 막연한 상태에 있는 줄리오 데 메디치의 프랑스 사행 계획이 구체화된다면 모를까 지금으로서는 로마에서 그가 할 만한 일이 없다는 말만 남겼을 뿐이었다. 줄리오는 노 줄리아노의 사생아로서, 최근 교황에 의해 추기경 직에 오른 바 있었다(줄리아노는 피에로의 아들이자 대 로렌초의 도생이다. 그를 노 줄리아노로 부르는 것은 대 로렌초의 셋째아들 역시 줄리아노이기 때문이다. 줄리오를 추기경으로 임명한 교황은 다름아닌 그의 조카 레오 10새 (대 로렌초의 둘째아들 조반니)였고, 그 또한 1523년에 교황 클레멘테 7세가 된다-옮긴이). 프랑스에서 옛 서기장은 그 나라와 말에 대한 지식 덕분에 쓰임새가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군주론)에 관해서는 단지 다음과 같이 차가운 말 한마디뿐이었다. (자네가 그 책을 나에게 보내게 될 때, 그것을 헌정하는 것이 좋을지 어떨지를 말해 주겠네.)
그래도 마키아벨리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는 책을 가다듬는 일을 계속하였으나, 그의 고상한 관념들은 여전히 극히 대중적인 표현 속에 갇혀 있었다. 그는 치구들과의 서신 교환을 끊지 않았고, 심드렁한 편지들에는 역시 심드렁하게 답하였다. 베토리는 손님으로 초대받은 카사베키아와 브란카치가 그에게 집을 손질해서 좀 더 점잖은 분위기로 바꾸어보라고 훈계한다며 농담 섞인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에 대해 마키아벨리는 그러면 그들에게 사순재식의 소반을 대접해서 잃어버린 사육제를 아쉽게 만들라고(예수가 광야에서 단식 수행한 것을 기려 부활제를 앞두고 6주 동안 술과 육식을 금하는 계율이 사순재인데, 그것이 끝날 때쯤인 사순절 직전 사흘 동안 벌이는 환락의 축제가 곧 사육제이다. 여기서는 손님들이 괜한 점잔을 빼면 아예 소식을 내놓아 그들을 골려주라는 뜻-옮긴이) 일러주었다. 베토리는 이러한 조언이 정말 참신하다고 즉각 반기면서,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매사에 대한 판단력만큼은) 그를 따를 사람이 없다고 칭찬하였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이처럼 작은 일에도 끼어들기를 마디하지 않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언제나 큰 포부를 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책을 멋있게 필사하기 시작했고 작업이 끝나는 대로 그 중 몇 장을 서둘러 베토리에게로 보냈다. 하지만 베토리는 답장에서 늘 하던 대로의 신변잡사와 이런저런 애정 행각들만 잔뜩 늘어놓고는, 책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짤막한 말만을 남겼을 뿐이었다. (자네 책의 몇 개 장들을 보았네. 나에게는 비할 바 없이 마음에 드는구먼. 그러나 최종적인 평은 나머지를 다 볼 때까지 접어두고 싶네.) 이 침착하고 조심성 많은 대사에게는 자신이 (비할 바 없이)라고 평한 것만으로도 이미 많은 것을 말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아직도 저술을 향한 열정에 휩싸여 있었을 마키아벨리에게는 이러한 평이 우유부단하고 차가운 것으로 느껴졌을 게 틀림없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있었기에 베토리의 태도를 그리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때쯤 그는 가족과 함께 거처를 시내로 옮겼는데, 이렇게 한 데는 남은 겨울의 나날들을 좀더 편하게 보내고자 하는 생각도 있었겠고, 더불어 자신의 책을 출판해 줄 친구들을 찾아 베토리에게 기대기보다는 좀더 스스로에게 도움이 되는 길을 찾아 보겠다는 마음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는 빈 손에다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시골에 틀어박힌 지 8달 만에 가슴에 가득 희망을 품고 다시 돌아왔다. 그가 알베르가초의 서재에서 가지고 나온 것은 다름아닌 (군주론)과 (리비우스 논고)의 일부를 담은 어떤 너트 같은 것이었겠지만, 그것은 아직 사람들의 악의와 냉담함을 맛보지는 못한 상태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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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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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4.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법
신용
사업에 돈은 필수불가결하다. 그러나 돈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 그래서 돈을 움직여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사업하는 사람은 돈보다 더 필요한 것이 있다. 그건 바로 신용이다. 무슨 사업이든 겉으로는 돈이 항상 문제다. 그러나 어떤 약속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은 신용의 폭이 넓어져 돈이 모이게 되고, 이를 이용해서 큰 사업을 일으킬 수 있다. 영국 작가 사무엘 스마일스(S.Smiles, 1812 ~1904)는 “약속을 지키는 것은 신사의 의무이며 사업 성공의 초석이다”고 하였다. 신용으로 맨손에서 세계적인 부자가 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그 자서전에 나오는 이야기 한 토막을 보자.
‘나는 삼창정미소의 요윤근 씨를 찾아갔다. 쌀가게 당시 외상을 제 때 제 때 갚았던 나의 신용을 담보로 그분은 선뜻 거금 삼천 원을 빌려주었다. 쌀 한 가마에 5원 하던 때였다. 그런데 공장을 시작한 후 한 달 만에 공장에 불이 나서 공장과 손님이 맡긴 자동차, 외상으로 들여왔던 부속품이 모두 불에 탔다. 빚더미 위에 빚이 얹혀졌다. 길은 외길 뿐이었다. 나는 이미 신용을 담보로 이미 삼천 원을 빌려쓴 오 영감님에게 다시 찾아갔다. 단 한번도 담보를 잡고 돈을 빌려준 적이 없으면서 단 한 번도 돈을 떼인 적이 없는 것이 자랑인 그분은 나의 이야기를 듣자,“그래 내 평생에 사람 잘못보아 돈 떼어먹혔다는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으니 다시 더 빌려주겠네”하면서 삼천오백 원을 더 빌려주었다.’ 신용 있는 사람은 말과 행동이 공손하고 일에 신중하고 남과 사귐에 성실하며,오래된 약속도 지킨다. 돈이 사업성공의 비결이 아니라 신용이 성공의 비결이다. 크게 성공한 사람은 첫째도 신용,둘째도 신용, 셋째도 신용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신용을 지키는 사람은‘사업이 잘 되지 말라’고 정한수를 떠놓고 매일 빌어도 잘 될 수밖에 없다.
신용은 사업 성공의 초석이다.(Punctuality is the soul of business.)
알바니아 상인들은 자기들끼리 몇백만 달러 어치가 되는 보석을 영수증 하나 없이 주고 받으며 장사를 한다고 한다. 주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신용이 체질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거짓말을 하거나 보석을 떼어먹으면 그 날로 끝이다. 그를 잡아서 감옥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죽음보다 더한 정신적인죽음을 가해 완전히 매장해 버린다. 그들에게는 신용이 재산이고 생명인 셈이다.
예절의 근본
남과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은 신용을 얻게 된다. 수레와 말이 준비되어 있어도 멍에가 없으면 마차가 굴러갈 수 없듯이 신의 없는 사회는 제대로 굴러갈 수 없다.
미생지신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의 대표적 주자를 꼽으라면 단연코 중국 노나라 사람 미생이 으뜸일 것이다. 미생은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와 만나기로 한 다리 아래에서 기다리다가 여자가 오지 않자, 홍수가 밀려와도 약속을 지키기 위해 피하지 않고 기다리다 기둥을 끌어안은 채 익사했다고 한다. 굳은 신의, 또는 우직하여 융통성이 없는 경우를 일러 미생지신이라 하는 것은 이와 같은 내력 때문이다. 미생은,‘군자는 덮어놓고 고집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 공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었는지는 모르나, 약속지키는 것의 소중함을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었다. 약속은 잘 하나 지키지는 못하는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서, 남의 마음만 떠보고 헌신짝처럼 버릴 사람이다. 그래서 ‘위험에 처해 있을때 믿을 수 없는 자를 믿는 것은, 앓는 이로 음식을 씹거나 부러진 다리로 걷는 것이나 같다‘고 성경은 말한다. 논어에 ‘사람에게 신의가 없으면 쓸 데가 없고, 믿음이 끊어지면 맹세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였다. 아무리 철석과 같은 맹세도 지켜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식언을 하지 않아야 한다. 식언은 한 번 나온 말을 다시 입으로 걷어들인다는 뜻으로 지키지 않을 약속의 말을 한다는 뜻이다. 말을 쉽게 하는 것은 책임감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약속을 지키고, 또 지킬 수 있는 말만 하자.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은 예절의 근본이다.(Punctuality is the paliteness of princes)
특히 사소한 것 같지만 시간 약속을 잘 지키자. 시간 약속 하나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큰 약속을 지키는 수 있을 것인가? 아무리 사소한 약속이라도 지키는 사람만이 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성경 누가복음은‘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성실하고, 작은 일에 정직 하지 못한 사람은 큰 일에도 정직하지 못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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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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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 최도규
앞산 골짜기엔
가끔
안개가 와 머물다 간다.
마음대로 숨을 수 없는
나무들을 위해
온통 하얀 모습으로
숨바꼭질하게 하고
초록 풀잎마다
방울방울
예쁜 구슬도 달아 주고
목쉰
풀벌레의 노랫소리도
깨끗이 닦아 주고는
해님이 높이 솟아오르면
산허리에
뭉게뭉게
하얀 꽃으로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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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길 - 조기호
홀씨 하나 등에 업고
떠도는 바람
오늘은
나뭇가지에서
새우잠을 잔다.
먼 머언
낯선 땅에 꽃 한 송이 피우려고
가뿐 숨 몰아쉬며
동동동 떠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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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쪽 → 배경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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