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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4호 - 2024.10.03. 목요일(음력 : 9.01.)
angelo@nownforever.co.kr / 風文 윤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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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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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순환은 단순한 반복현상이 아니다. 극장에서의 [앙코르]와도 같이 열렬한 재청에 의한 것이다. - G.K.체스터튼(英 언론인 작가, 1876~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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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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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표기법(1)
지역명을 알려주는 표지판, 지하철 노선도의 역명에는 한글과 로마자를 병기하는 것이 원칙이다. 명함 뒷면에는 자신의 이름과 소속 기관명, 주소 등을 로마자로 쓰는 것이 보통이다. 최근 우리 생활의 많은 영역에서 외국인과 맞닥뜨리는 일이 부쩍 많아지면서, 로마자 표기법의 중요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그래서 앞으로 네 차례에 걸쳐 로마자 표기법의 주요 내용을 살펴볼까 한다.
로마자 표기법은 발음을 따라 적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한글 표기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실현되는 소리를 따른다는 뜻이다. ‘종로’를 한글 표기에 이끌려 ‘Jongro’로 적을 것이 아니라, 실제 실현되는 소리인 [종노]를 따라 ‘Jongno’로 적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으로 미루고, 오늘은 모음 표기에서 주의할 점을 살펴보기로 한다.
‘ㅓ’는 ‘eo’로 적어야 한다. ‘정동’은 ‘Jeongdong’이 된다. ‘정’을 ‘jung’으로 적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적으면 ‘중’으로 잘못 읽힐 수 있다. ‘영등포’는 ‘Yeongdeungpo’로 적어야 한다. 영어 ‘young’에 이끌려서 ‘영’을 그와 같이 적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이 또한 잘못이다. 이처럼 영어식 표기나 발음에 이끌려서 ‘위’를 ‘we’로 적는다든지, ‘비’를 ‘bee’로 적는다든지, ‘우’를 ‘woo’로 적는다든지 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데, 모두 로마자 표기법에는 어긋난다. ‘위’는 ‘wi’로, ‘비’는 ‘bi’로, ‘우’는 ‘u’로 적는 것이 원칙이다.
‘ㅢ’를 로마자로 적을 때는 발음을 따르지 않고 예외적으로 표기를 따른다. ‘희’는 [히]로 소리가 나지만 ‘hi’로 적지 않고, 표기를 따라서 ‘hui’로 적는다는 뜻이다.
이대성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찹쌀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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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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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3 - 천상병
저 새는 날지 않고 울지 않고
내내 움직일 줄 모른다.
상처가 매우 깊은 모양이다.
아시지의 성프란시스코는
은총 설교를 했다지만
저 새는 그저 아프기만 한 모양이다.
수백 년 전 그날 그 벌판의 일몰과 백야는
오늘 이 땅 위에
눈을 내리게 하는데
눈이 내리는데.
∼∼∼∼∼∼∼∼∼∼∼∼∼∼~~~~~~~~~~~~~~~~~~~~~~~~~~~~~~~~
폭포 - 정지용
산ㅅ골에서 자란 물도
돌베람빡 낭떠러지에서 겁이 났다.
눈ㅅ뎅이 옆에서 졸다가
꽃나무 알로 우정 돌아
가재가 기는 골짝
죄그만 하늘이 갑갑하다.
갑자기 호숩어질랴니
마음 조일 밖에.
힌 발톱 갈길이
앙징스레도 할퀸다.
어쨌던 너무 재재거린다.
나려질리자 쭐삣 물도 단번에 감수했다.
심심산천에 고사리ㅅ밥
모조리 졸리운 날
송화ㅅ가루
노랗게 날리네.
산수 따러온 신혼 한쌍
앵두같이 상기했다.
돌뿌리 뾰죽 뾰죽 무척 고부라진 길이
아기 자기 좋아라 왔지!
하인리히 하이네ㅅ적부터
동그란 오오 나의 태양도
겨우 끼리끼리의 발꿈치를
조롱 조롱 한나잘 따러왔다.
산간에 폭포수는 암만해도 무서워서
기염 기염 기며 나린다.
~~~~~~~~~~~~~~~~~~~~~~~~~~~~~~~~~~~~~~~~~~~~~~~~~
曠野(광야) - 김수영
이제 나는 광야에 드러누워도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나를 발견하였다
시대의 예지
너무나 많은 나침반이여
밤이 산등성이에 넘어내리는 새벽이면
모기의 피처럼
시인이 쏟고 죽을 오욕의 역사
그러나 오늘은 산보다도
그것은 나의 육체의 융기
이제 나는 광야에 드러누워도
공동의 운명을 들을 수 있다
피로와 피로의 발언
시인이 황홀하는 시간보다도 더 맥없는 시간이 어디있느냐
도피하는 친구들
양심도 가지고 가라 휴식도-
우리들은 다같이 산등성이를 내려가는 사람들
그러나 오늘은 산보다도
그것은 나의 육체의 융기
광야에 와서 어떻게 드러누울 줄을 알고 있는
나는 너무나도 악착스러운 몽상가
조잡한 천지여
깐디의 모방자여
여치의 나래 밑의 고단한 밤잠이여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어떻게 뒤떨어지느냐가 무서운 것]이라는 죽음의 잠꼬대여
그러나 오늘은 산보다도
그것은 나의 육체의 융기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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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늘은 - 이해인
그 푸른 빛이 너무 좋아
창가에서 올려다본
나의 하늘은
어제는 바다가 되고
오늘은 숲이 되고
내일은 또
무엇이 될까
몹시 갑갑하고
울고 싶을 때
문득 쳐다본 나의 하늘이
지금은 집이 되고
호수가 되고
들판이 된다
그 들판에서
꿈을 꾸는 내 마음
파랗게 파랗게
부서지지 않는 빛깔
하늘은
희망을 고인
푸른 호수
나는 날마다
희망을 긷고 싶어
땅에서 긴 두레박을
하늘까지 낸다
내가 물을 많이 퍼가도
늘 말이 없는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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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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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53가지 지혜 - 루스 실로
제2장 정을 기른다
25.세대가 다른 여러 사람과 친밀하게 접촉하라
'폐쇄공간'이 되기 쉬운 핵가족
구미 각국에서는 오래 전부터의 일이지만, 동양에서도 핵가족이 점차 늘어나 이제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들이 생겨나고 있다. 부부와 자녀들로만 구성된 이 핵가족 제도는 문명이 발달한 나라에는 거의 예외 없이 존재하는 것 같다. 전에는 어느 나라에서나 볼 수 있었던 대가족과 비교해 본다면 현재의 핵가족은, 어느 면에서는 확실히 세대간의 불화도 적어지고 집안의 공간도 여유 있게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특히 주부에게는 시부모를 비롯한 여러 인간관계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들에 신경 쓸 필요 없이, 육아나 자녀교육에만 전념할 수 있는 이상적인 가족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녀들이 웃어른인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하여 삼촌, 숙모 등 세대가 다른 어른들로부터 좋은 영향을 받을 기회가 없어진다는 단점도 있다. 그래서 지적인 자극이 적은, 이를테면 폐쇄공간에서 살게 될 위험성이 많다. 나는 자녀들을 올바르게 기르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세대가 다른 여러 사람과 친밀하게 접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유태인들이 말하는 '가족'이란 자녀들과 부모뿐 아니라 조부모, 그 밖에 삼촌이나 숙모, 그리고 사촌형제까지를 일컫는다. 그러나 유태인들과는 달리 동양에서는 삼촌과 숙모, 사촌들은 가족으로 보지 않는 것 같다. 우리 가정의 예를 들면, 축제일이나 주말에는 서로 친척들을 방문해 즐거운 시간을 하께 보낸다. 말하자면 한 가족의 일원으로서 일체감을 다짐하는 날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먼 곳에 떨어져 살고 있는 아들딸들이 모처럼의 휴일을 이용해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느낌과 흡사하다. 물론 가족의 의미를 중요시하는 유태인이라 할지라도 가깝게 모여 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에도 수시로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성장하는 자녀들은 자기 부모와 다른 생활, 다른 사고방식, 다른 직업을 갖고 있는 친척 어른들과 접촉함으로써 조금이나마 다른 세계를 접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 유태인들의 지혜는 단지 한 사람에게서 다른 한 사람에게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각 세대와의 단절 없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다.
대가족 속에서 자라난 시인 하이네
독일의 유태계 시인 하이네는 대가족들 사이에서 성장함으로써 재능을 꽃피운 전형적인 예이다. 그는 증조부와 외삼촌의 영향을 받아 시인으로서의 소질을 길렀다고 한다. 학교에서는 거의 배울 것이 없었던 하이네에게는 외삼촌인 시몬 반 괴르테론의 서고가 그의 교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 서고에서 데카르트, 네테스하임, 헤르몬트 등의 철학서적을 탐독했으며, 그 결과 '나의 가슴속에 문필적 시도를 할 용기와 욕망이 불타오르게 되었다'고 회상할 만큼 지적인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서고에서 하이네는 조부의 형제인 종조부 시몬의 방랑생활을 통해 모험에 대한 동경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정열의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하이네는 이와 같은 가족적인 배경에서 태어난 것이다. 만약 그가 핵가족 속에서 성장했더라면, 어쩌면 그의 재능은 발견되지도, 피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유태인의 대가족 제도는 이처럼 자녀들의 정신적인 성장을 돕는 데 더 없이 좋은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포인트!
자녀들을 올바르게 기르기 위해서는, 자녀들의 정신적 성장을 돕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세대가 다른 여러 사람과 친밀하게 접촉하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26.친구를 선택할 때는 한 계단 올라서라
공부를 잘한다고 좋은 친구는 아니다
누구라도 그렇겠지만, 특히 유태인은 친구와의 교제를 매우 중요시한다. 그러나 아무나 하고 교제를 하라는 뜻은 아니다. 물론 많은 사람을 알고 지내는 것은 좋은 일이겠지만, 우리 유태인은 친구 한 명을 사귀어도 참된 친구를 선택하도록 언제나 신중을 기한다. 친구란 무엇보다 우선 자기를 이끌어줄 사람이어야 한다. <탈무드>에 '친구를 선택할 때는 한 계단 올라서라'고 씌어 있는 것처럼, 자기 향상에 도움이 되는 친구라면 더욱 바람직스러울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겠지만, 유태인 어머니들은 자녀들이 친구를 집으로 데려오는 것을 환영한다. 그러나 만약 그가 바람직스럽지 못한 친구일 경우에는 '엄마는 그 친구와 교제하는 것을 반대한다'고 분명히 의사표시를 한다. 그것은 곧 '한 단계 올라서는' 것이 아니라 '한 단계 내려가는'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 단계 올라서서 친구를 선택하라'는 것으로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공부를 잘하고 못하는 것을 친구를 선택하는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 유태인은 철저한 개인주의자들이다. 무어보다도 자기는 남과 다르다는 것을 중요시한다. 예를 들어, 비록 식사 때 포크와 나이프를 쓰는 솜씨가 서툴다 하더라도 남보다 여러 나라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더 높게 평가받는다. 즉, 포크를 맵시 있게 사용하는 것보다는 한 나라 말이라도 외국어를 마스터하는 편이 훨씬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공부를 잘하느냐 못하느냐는 극히 단면적인 기준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공부는 잘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개성이나 가능성을 이끌어줄 상대라면 역시 '한 계단 올라선' 친구를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부모의 시각으로 자녀의 친구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유태인 부모들은 자녀들이 친구에게서 자극을 받아 개성이 연마될 수 있다고 판단되면, 아무리 싫어하는 타입이라도 반대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자녀 중심으로 판단을 내린다.
좋은 친구가 위인을 만든다
유태인이 성장한 다음에도 친구를 잘 선택하고 무엇보다 친구를 중요시하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 향상'을 위해 친구를 선택했던 습관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 예로, 유태계 음악가인 다리우스 미요가 청년 시절에 만난 두 친구의 우정에 자극을 받아 수많은 명곡을 작곡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시인 하이네 역시 유태계 철학자 칼 마르크스와 교제할 때, 그 우정에 영향을 받아 산문시의 걸작이라고 일컬어지는 <독일의 겨울 이야기>를 썼다고 한다. 특히 하이네는 마르크스보다 스물 한 살이나 위로, 나이로 따진다면 하이네가 마르크스에게 영향을 주어야 하겠지만, 오히려 하이네가 마르크스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처럼 나이 차이는 친구를 선택하는 데 있어 지엽적인 문제일 뿐이다. 또한 천재적인 음악가 구스타프 마라도는 36년 연상의 작곡가 브루크너와 사제지간이었으면서도 마치 친구처럼 지냈다고 한다. <탈무드>에 '애매한 친구보다는 분명한 적이 되라'말이 있다. 이 말은 친구를 사귀려면 '분명한 친구'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비록 공부는 잘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개성이나 가능성을 이끌어줄 친구라면 얼마든지 사귀도록 하라. 자녀의 친구를 선택하는 데 있어 특히 주의해야 할 점은 부모의 시각으로 자녀의 친구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27.아이들끼리 친구라고 해서 그 부모들까지 친구일 수는 없다
아이들끼리의 우정은 부모와는 무관하다
동양, 그중에서도 특히 일본에서는 아이가 없을 때는 이웃과 서로 내왕이 없다가도 아이가 태어나면 차츰 그 아이들로 인해 이웃과 친하게 지내는 부부가 많다고 한다. 일본에 사는 내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그녀의 딸이 두어 살 정도가 되어 집밖에서 놀면서부터 이웃집 아이들과 친해지게 되었는데, 그러던 중 딸아이의 가장 친한 여자 친구가 매일 아침 현관으로 딸아이를 데리러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까지는 괜찮았으나, 어느 날인가부터는 아이를 따랄 그 아이의 어머니가 함께 놀러오는 것이었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아직 인사를 나눈 적이 없는데도 마치 친한 사이처럼 말을 걸어오더니, 마침내는 집안에까지 들어와서는 한 시간 이상이나 수다를 떨다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자꾸 반복되자 그 친구는, '정말 곤란해. 나는 친구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데, 그녀는 마치 나와 오랜 친구나 되는 것처럼 시장이나 하이킹을 가자는 것 아니겠어'라면 내게 하소연을 했다. 우리 유태인 사회에서는 이와 같은 교제란 절대 있을 수 없다. 더구나 자녀들을 통해 부모들이 가까워지는 일은 없다. 부모들은 서로 얼굴만 알고 지낼 뿐, 그 한계를 넘어선 '친구'관계로 발전시키지는 않는다.
친구가 채소를 가지고 있으면 고기를 주어라
유태인의 격언 중에 '남의 백 마디 중상보다 친구의 무분별한 한마디의 말에 큰 상처를 입게 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친구는 중요한 존재이며, 또한 마치 자기 자신의 일부분과도 같다는 뜻이다. 자녀들끼리 친하다고 해서 부모들까지 쉽사리 친구가 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일단 친구로 생각하면 '친구가 채소를 가지고 있으면 고기를 줄 정도로' 친하게 지낸다. 한편, 부모들끼리 친구 사이라고 해서 자녀들끼리 친구가 되라는 법 또한 없다. 나의 경우, 친한 친구를 집으로 초대한다고 해도 대개 저녁식사 후에 하므로 아이들은 이미 잠자리에 들어간 다음이다. 혹시 아이들이 나와 친구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방에 들어오는 일이 있어도 '안녕하세요'라고 가볍게 인사만 할 뿐, 어른들의 대화에 끼어들거나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내가 아이들 친구의 부모에게 대하듯이, 우리 아이들도 나의 친구를 대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녀들은 자녀끼리, 부모는 부모끼리 각각 우정을 나누는 것이 우리 유태인들의 '교제방법'의 기본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내 친구와 친해진다고 해서 무슨 지장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요는 서로가 인격적으로 신뢰하며 교제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지, '자녀들이 친구라서' 또는 '부모들이 친구라서'라는 조건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이것이 포인트!
아이들끼리의 우정 때문에 그 부모가 서로 친구가 될 필요는 없다. 부모들끼리 친구 사이라고 해서 자녀들끼리 친구가 되라는 법 또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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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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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9 - 시오노 나나미
제2부 하드리아누스 황제
(재위 : 서기 117년 8월 9일 ~ 138년 7월 10일)
황제로의 길
다키아 전쟁에서 완승을 거둔 트라야누스를 따라 로마에 개선한 하드리아누스는 법무관에 출마하여 당선했다. 명예로운 경력'의 두 번째 단계에 도달한 셈인데, 지위가 높아진 만큼 '혜택받은 자의 사회 봉사'가 요구된다. 로마에서는 검투시합이나 경기대회를 개최하는 것이다. 거기에 드는 400만 세스테르티우스는 트라야누스가 대신 내주었다. 하드리아누스가 유복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트라야누스로서는 대부의 의무를 다한 것이다. 로마 사회에서 후견인인 대부는 모든 의미에서 아버지를 대신하는 사람이었다. 하드리아누스에게는 트라야누스 외에도 아티아누스라는 대부가 또 하나 있었는데, 트라야누스는 제위에 올랐을 당시 이 아티아누스를 근위대장에 임명했다. 하드리아누스는 황제와 근위대장이라는 두 실력자를 대부로 가진 몸이 되어 있었다.
법무관 임기를 마치면 '전직 법무관' (프로프라이토르)이라는 관명으로 속주 총독에 취임할 자격을 갖게 된다. 다만 법무관 경험만으로 총독에 취임할 수 있는 속주는 황제가 총독 임명권을 갖고 있는 황제속주뿐이었다. 원로원 속주 총독에는 집정관 경험자만 취임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하드리아누스가 부임한 곳은 도나우강 전선의 먼 판노니아속주였다. '주홍색 띠를 두른 대대장으로 처음 근무한 속주다. 총독관저가 있는 도읍도 군단기지가 있는 아퀸쿰(오늘날 헝가리의 수도인 부다페스트)이다 하지만 총독이 되면 군단을 이끌고 속주를 방위하는 임무만이 아니라, 민간인을 포함한 속주 전체의 통치를 책임져야 한다 게다가 시기는 다키아가 속주화된 직후다. 다키아의 바로 서쪽에서 다키아를 감시하는 부다페스트는 그 중요성이 더욱 높아져 있었다. 먼 판노니아 속주에 파견되었다는 것은 곧 트라야누스 황제의 신임이 두텁다는 증거였다.
서른한 살이 된 하드리아누스도 황제의 신뢰에 완벽하게 부응한다. 다키아족이 멸망하자 이제 도나우강 북쪽에서 가장 큰 세력은 자기들이라고 과신하고 도나우강을 건너 로마 영토로 침입해온 사르마티아족을 격퇴한 것은 하드리아누스가 이끄는 제2군단이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이듬해에 먼 판노니아에서 귀국한다. 집정관에 출마하여 당선했기 때문이다. 집정관은 원로원에서 선거로 선출하지만, 황제가 추천하면 출마는 곧 당선이나 마찬가지였다. 서른 두 살에 집정관이라면 발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에게 인정받은 트라야누스도 상당히 일찍 첫 번째 집정관을 경험했지만, 그래도 서른 여덟 살 때였다. 서른 두 살은 이례적인 발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트라야누스와는 동향에다 동년배이고 측근 제1호인데다 절친한 친구였던 리키니우스 술라가 강력하게 추천한 결과라고 한다. 술라는 하드리아누스가 같은 에스파냐 태생인데도 트라야누스나 자기와는 기질이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트라야누스의 후계자로는 가장 적합하다는 것을 일찍부터 꿰뚫어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례적으로 젊은 나이에 집정관을 경험한 하드리아누스가 그 후 4년 동안은 불우함을 한탄하게 된다. 첫 번째 이유는 그가 집정관에 취임하기 직전에 그를 인정해준 술라가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하드리아누스의 이례적인 출세를 달갑게 생각지 않은 장군들 때문이었다. 트라야누스의 '사천왕'이라고 불러도 좋은 이 장군들은 술라의 죽음으로 기세가 올랐고, 트라야누스도 하드리아누스에 대한 그들의 반감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거나, 그 자신이 하드리아누스를 지나치게 우대한 것을 반성한 모양이다. 어쨌든 트라야누스는 공평무사함이 제일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사람들 눈에 육친이라서 우대한 것처럼 비치는 것은 특히 싫어했다. 덕분에 하드리아누스는 30대 중반의 4년 동안 '전직 집정관'의 자격을 갖고서도 속주 총독이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트라야누스가 그를 싫어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직업이 없는 하드리아누스에게 자신의 연설문 초고를 쓰는 일 따위를 맡겼다.
이 4년 동안 하드리아누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회고록>이 남아 있다해도, 그런 생각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불우한 4년의 마지막 해가 된 서기 112년, 하드리아누스는 그리스의 아테네 시에서 '아르곤 (archon)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것은 전성기 아테네의 최고 관직으로, 솔론이나 테미스토클레스도 지냈다는 명예로운 직함이다. 하지만 이 직책도 도시국가 아테네의 성쇠와 운명을 같이하여, 로마 시대의 '아르곤은 단순한 명예직에 불과했다. 그것을 하드리아누스에게 준 아테네 쪽의 의도는 황족인 하드리아누스를 아테네의 후견인으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소년 시절에 '그리스 아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하드리아누스에게는 기쁜 선물이었을 게 분명하다. 하드리아누스는 불우해도 빛을 잃지 않는 사나이였다. 나이도 젊었다. 이 무렵 하드리아누스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반대파와 그를 인정하는 지지파의 대립이 분명해진 모양이다. 반대파는 트라야누스를 도와서 황제 자리에 앉혔다고 자처하는 장군들. 지지파는 트라야누스에게 등용되었다는 점에서는 반대파에 속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지만, 아직 군단장급에 머물러 있는 젊은 세대다. 이 시기에 하드리아누스에 대한 트라야누스의 태도가 애매했던 것은 이 두 파벌의 대립을 걱정하는 트라야누스의 심사를 반영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트라야누스는 이런 걱정만으로 인사를 결정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서기 113년 가을, 파르티아 원정을 떠나는 트라야누스 일행 중에는 하드리아누스의 모습도 끼어 있었다.
연상의 여인
서른 일곱 살에 제일선으로 복귀한 것은 황후 플로티나가 추천했기 때문이라고 황제열전의 저자는 말하고 있다 플로티나는 하드리아누스한테 약했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약했다'는 말은 '홀딱 반해 있었다'거나 '귀여워하고 있었다'는 의미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어떠했을까. 우선 플로티나의 나이인데, 그녀가 죽은 해는 알려져 있지만 태어난 해는 알 수 없다. 그래도 트라야누스 주변에 있는 부부들의 연령 차이로 보아, 남편 트라야누스보다는 열 두어 살 젊고 하드리아누스보다는 열 살쯤 위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덧붙여 말하면, 하드리아누스와 아내 사비나의 나이 차이는 열두 살이었다. 그러면 연상의 여자가 '약해지 된 연하의 남자는 어떤 조건을 갖추고 있는가. 첫째는 아름다움이다. 단순히 용모가 준수하다기보다, 아름답구나! 하고 느끼게 하는 '아름다움' 이다. 둘째는 젊음이다. 이것도 나이만 젊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신선함이 피어오르는 풋풋한 젊음을 가리킨다. 이런 싱그러운 젊음을 전혀 느끼게 하지 않는 젊은이도 많은 반면, 생기발랄한 중년 남녀를 만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세 번째 조건은 명석한 두뇌다 지식보다 지력(인텔리전스)이 중요시되는 것은 당연하다 연상의 여인은 다음 세대의 승자가 될 수 있는 젊은이를 사랑하는 법이다. 네 번째 조건은 풍부한 감수성이다 자칫하면 감수성을 잃어버리기 쉬운 남편이나 동년배 남자들한테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마음이 격렬하게 흔들리고 그 마음을 자제하려고 애쓰는 남자를 좋아하게 된다. 마지막 조건은 야심이다. 세상 물정을 잘 아는 여자의 마음까지 자극하려면, 출세하고 싶다거나 부자가 되고 싶다는 따위의 시시한 야심이 아니라, 야심을 품고 있는 본인이 누구보다도 그 야심의 실현에 불안을 느낄 만큼 커다란 야망이어야 한다. 하드리아누스는 이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여자가 남편에게 요구하는 조건은 또 다르다 위의 다섯 가지 조건은 갖추지 않아도 전혀 불편할 게 없다. 대신 아내는 남편에게 물질적 심리적 안정을 요구할 것이다. 플로티나나 트라야누스의 누나인 마르키아나, 생질녀인 마티디아 같은 연상의 여인들과는 아주 사이가 좋았던 하드리아누스지만, 아내인 사비나와는 늘 삐걱거렸다. 사비나는 연하의 여인이고, 게다가 아내였기 때문이다. 하드리아누스는 무엇보다도 가까운 사람들한테 안정감을 주는 데 서툴렀다. 로마 시대의 역사가나 연대기 작가들은 플로티나와 하드리아누스의 실제 관계가 어떠했는가를 밝혀내려고 애썼지만, 결국 실패했다. 두 사람 사이에 섹스가 개재했는지 아닌지만 문제삼았기 때문이다 플로티나는 교양있고 긍지도 높은 여자였다. 이런 여자에게는 사랑이 반드시 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불륜이 드러나면 여자는 외딴 섬에 유배되고 남자는 사형당하는데, 그런 처벌이 두려웠기 때문은 아니다. 성이 개재됨으로써 평범한 남녀관계로 전락해버리는 것을 꺼렸을 뿐이다. 게다가 트라야누스는 좋은 남편이었고, 하드리아누스는 젊은 야심가였다. 그런데 왜 평범한 남녀관계로 전락해버릴 필요가 있겠는가. 플로티나는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인 파이드라가 아니었다. 자신의 감정을 소중히 여긴다는 점에서는 이기적이라 해도 좋은 여자였다. 그리고 하드리아누스도 한마디로 평가하라면 철저한 자기중심주의자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남자였다. 나는 이 두 사람 사이에 섹스가 개재하지는 않았다고 확신한다. 섹스가 개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드리아누스의 가슴속에는 플로티나가계속 살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황후가 천거한 결과인지 어떤지는 별문제로 하고, 하드리아누스는 파르티아 원정에 참가하게 되긴 했지만, 제2차 다키아 전쟁 때처럼 군단을 이끌고 실전에 참가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트라야누스가 그를 시리아 속주 총독에 임명했기 때문이다.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전선기지가 되는 안티오키아를 지키는 역할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전시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오리엔트 최대의 도시인 안티오키아에서 호화로운 관저 생활을 즐기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병참을 중시하는 로마에서 전선기지는 곧 보급기지이고, 군수물자를 보급하는 책임은 총독인 하드리아누스에게 지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트라야누스가 데려온 플로티나와 마티디아의 안전을 지키는 역할도 그에게 맡겨졌다. 시리아 속주 총독은 제국 동방에 주둔하는 모든 군단을 관할하는 지위이고, 따라서 제국 동방의 방위 책임자이기도 하다. '명목'은 높았다. 하지만 직접 군단을 이끌고 참전하는 '내실'은 파르티아 전쟁 당시의 하드리아누스에게는 없었다. 트라야누스는 다키아 전쟁 때부터 그와 함께 싸운 노련한 장수들한테 실전 지휘를 맡겼다. 긍지 높고 재능에 자신감을 갖고 있던 하드리아누스는 37세부터 41세까지의 이 시기를 어떤 심정으로 보냈을까. 편지 한 장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야심가인 하드리아누스는 후방에 있으면서도 눈을 크게 뜨고 파르티아전쟁의 전개 상황을 지켜보지 않았을까.
앞에서도 상세히 설명했듯이, 트라야누스가 기대를 걸었던 파르티아전쟁은 그가 꿈꾸었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로 끝났다. 그로 인한 마음 고생 때문인지 황제는 병으로 쓰러졌고, 아내와 질녀의 간곡한 부탁을 받아들여 수도 로마로 돌아갈 것을 승낙했다 트라야누스는 시리아 속주 총독 하드리아누스를 원정군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전쟁을 계속하라고 명령한 뒤, 안티오키아에서 배를 타고 서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소아시아 남해안을 항해하는 동안 병세가 급변했다. 가까운 항구 셀리누스에 배를 대고 병세가 진정되기를 기다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서기 117년 8월 9일, 제국 전체로부터 '지고의 황제'로 칭송받은 트라야누스는64년의 생애를 마쳤다. 숨을 거두기 직전에 하드리아누스를 양자로 맞이하여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한다. 이것이 하드리아누스의 즉위를 둘러싼 수수께끼의 발단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이 문제를 다룬 연구 논문이 끊이지 않을 정도다.
즉위의 수수께끼
트라야누스는 정말로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한 뒤에 죽었을까. 황제의 죽음을 확인한 플로티나 황후가 그 사실을 잠시나마 덮어둔 채, 서둘러 안티오키아에 있는 하드리아누스에게 사람을 보내 알리고, 하드리아누스가 휘하 군단의 충성 서약을 받아 즉위를 기정사실로만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황제의 죽음을 공표한 것은 아닐까. 당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의심을 품은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빈사상태의 황제 옆에서 시중을 든 것은 아내인 플로티나와 생질녀 마티디아, 근위대장 아티아누스와 황제의 시의다. 트라야누스가 귀여워한 생질녀 마티디아는 플로티나보다 두세 살 아래였던 모양이지만, 거의 동년배인 이 외숙모와 아주 사이가 좋았다. 마치 자매 같아서, 플로티나의 말에 맨 먼저 거들고 나서는 것은 언제나 마티디아였다고 한다. 딸 사비나의 남편인 하드리아누스한테도 이상적인 장모였다. 사위라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그 재능을 인정하고, 딸이 남편에 대해 이런저런 불만을 털어놓아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한다. 근위대에는 대장이 두 명 있었는데, 그중 하나인 아티아누스는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가 트라야누스와 함께 아들의 후견인으로 지명한 사람으로, 하드리아누스가열 살 때부터 아버지 역할을 대신해왔다. 그리고 황제의 시의는 무엇 때문인지 그로부터 며칠 뒤에 원인불명으로 죽었다.
트라야누스가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고 죽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다음 세 가지를 근거로 든다.
(1)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제국을 통치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자'라는 말을 남겼을 뿐, 구체적으로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죽었다.
(2) 트라야누스가 생전에 법률학자인 네라티우스 프리스쿠스에게 자기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제국을 당신한테 맡기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는 소문.
(3) 파르티아 전쟁을 치르고 있던 트라야누스가 원로원에 편지를 보내, 자기한테 무슨 일이 생길 경우 통치의 공백을 피하기 위해 후계자로 적합한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한 명단을 보낼 테니까 원로원이 그 중에서 후계자를 고르라고 말했다는 소문.
(1)은 당시에도 항간의 소문이었을 뿐이다. 책임감이 강한 트라야누스가 오직 알렉산드로스를 흉내내고 싶은 일념으로 이런 무책임한 행동을 할 리는 없다. 알렉산드로스의 경우는 이렇다 할 후계자가 없었지만, 트라야누스에게는 있었기 때문이다.
(2)도 사실일 가능성이 희박하다 실제적인 트라야누스가 법률학자한테 제국을 맡길 리가 없다. 법률 전문가일수록 현실에 존재하는 법률에 묶이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정치가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법률이라도 필요하면 새로 만들어야 하는 입장에 있다. 트라야누스라면 법무장관'을 총리 자리에 앉히지는 않았을 게 분명하다.
문제는 (3)이었다. 트라야누스는 공평무사를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계속 원로원을 존중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런 사람이라면 원로원에 선택을 맡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로원은 그런 편지를 받지 않았다. 과연 명단이 작성되었는지도 확실치 않다. 하지만 당시 로마인은 후세의 연구자들만큼 이 수수께끼의 해명에 집착하지 않았다. 냉철한 눈으로 보면 제위를 물려받기에 하드리아누스보다 더 적절한 인재가 당시 지도층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첫째, 마흔 한 살이라는 나이가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둘째, 하드리아누스의 경력이 불평할 여지가 없을 만큼 여러 분야를 망라하고 있어서, 제국 통치의 최고책임자가 될 자격은 충분하다고 여17졌다.
셋째, 그의 명석한 두뇌는 원로원 의원들도 다 알고 있을 정도였다
넷째, 군단 장병들한테도 인망이 두터웠다.
8월 9일, 하드리아누스의 <회고록>에 따르면 양자로 맞아들여졌다는 통고를 안티오키아에서 받는다. 8월 9일, 셀리누스에서 황제가 죽었다. 8월 11일, 동방 군단의 장병들이 새 황제 하드리아누스를 '임페라토르1' 라는 환호로 에워싸고,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셀리누스에서 안티오키아까지는 바닷길로400킬로미터의 거리다. 빠른 배로 이틀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황제의 죽음을 확인한 사람들이 그 사실을 잠시 덮어두기로 결정했다 해도, 이틀 동안만 공표를 미루면 된다 그리고 트라야누스의 평생을 장식한 강한 책임감과 많은 사람들이 하드리아누스를 적절한 인재로 인정하고 있던 사실 때문에, 빈사 상태의 황제가 죽기 직전에 후계자를 지명하기로 결정했다 해도하드리아누스가 제위를 물려받는 것은 트라야누스가 원한 일이었다고 사람들은 납득했다. 그런데 트라야누스는 왜 죽기 직전까지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았을까. 열 살 때 후견인이 된 이후 30년 동안, 이따금 떨어져 지내기는 했지만 대부와 아들 사이로 지내왔으니까 하드리아누스의 성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또한 하드리아누스가 그때까지 얼마나 훌륭하게 직책을 완수해왔는 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책임감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하드리아누스의 경력을 통해 드러난 통치자로서의 자질도 널 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트라야누스 혼자 불안을 느꼈다는 것도 수긍할 수 없다. 그리스 문화나 사냥에 대한 취미도 도를 넘지 않는 한 로마인에게는 오히려 미덕' (비르투스)의 일부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런데 예순 네 살이 될 때까지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았다 일부 장수들 사이에 퍼져 있던 하드리아누스에 대한 반감을 걱정해서 지명을 망설였을까. 하지만 트라야누스의 성격으로 보아 그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내 상상이지만,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한테서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낀 게 아닐까. 그것은 기질 차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질 차이는 싫어할 이유는 안되지만 불안을 느낄 이유는 된다 이것이 여자인 플로티나에게는 자극적인 매력으로 비쳤겠지만, 남자인 트라야누스한테는 이성적으로는 납득할 수 있어도 막상 실행하려면 망설여지는 원인이 되었다. 라틴어에 '인 엑스트레미스' (in extremis)라는 말이 있다. 오늘날에도 영어나 프랑스어나 이탈리아어에서 라틴어 그대로 쓰이는 말인데,'마지막 순간에'라는 뜻이다. 하드리아누스의 제위 계승은 그야말로'인 엑스트레미스'로 이루어졌다.
하드리아누스는 안티오키아에서 로마 원로원에 황제로서는 최초의 친서를 보냈다. 이 편지에서 그는 우선 원로원의 승인을 기다리지 않고 군단의 충성서약을 받은 것을 사과하고, 제국 통치를 잠시라도 공백 상태에 두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변명하고 있다. 사실 안티오키아와 로마 사이를 왕복하는 데에는 최소한 두 달이 걸렸다. 여 기에는 원로원도 동감이었는지, 하드리아누스의 즉위를 간단히 승인했다. 몇 번이나 되풀이하지만, 로마 황제는 원로원의 승인을 얻어야만 비로소 공식적인 지위를 얻을 수 있다. 또한 친서에는 표면상으로는 당연하지만 이면에는 상당히 깊은 의미가 숨어 있는 사항을 의결해달라는 요청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선제 트라야누스의 신격화였는데, 이것도 새 황제의 요청을 원로원이 승인해야만 비로소 실현되는 일이었다 치세가 1년 반에 불과한 네르바가 로마의 신이 될 수 있었던 것도 트라야누스가 신격화를 요청하고 원로원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제의 신격화를 요청하는 것은 새 황제가 맨 먼저 하는 일에 불과했지만, 로마에서 후계자는 양자 결연이라는 형태를 취한다. 따라서 트라야누스가신이 되면, 그 양자인 하드리아누스는 신의 아들이 된다. 카이사르가 신격화된 뒤, 카이사르의 양자였던 아우구스투스가 살아 있는 몸으로 '신의 아들·이 된 것과 같은 이치다. 30만이나 되는 신을 가진 로마인은 죽은 황제를 신격화하는 데에는 조금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신의 아들'은 정치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갖게 된다. 그때까지는 로마 제국의 엘리트를 망라한 원로원의 일원에 불과했지만, 신의 아들이 되면 그들을 능가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아우구스투스가 신격화의 이런 효용성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활용했기 때문에, 제2의 아우구스투스를 꿈꾸는 하드리아누스도 똑같이 생각했다고 상상할 수 있다. 안티오키아에 있으면서도 하드리아누스는 이미 자신의 기반을 굳히기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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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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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론(讀書論) - 미끼 기요시(三木淸)/이영조(李英朝) 옮김
만일 독서의 정신이란 말을 할 수 있다면 독서의 정신은 대화의 정신이라고 말하고 싶다. 정신이란 것은 그 일의 순수한 형태, 본질적인 자세라는 뜻이다. 정신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동시에 방법이기도 하다. 독서는 대화의 방법에 의해야 한다. 그런데 대화의 정신은 또 철학의 정신이라고도 할 수가 있다. 소크라테스가, 그리고 플라톤이 대화를 철학의 형식으로 삼은 것은 철학적 정신의 근원적인 발현이었다. 그 이후 모든 창조적인 철학은 소크라테스적 혹은 플라톤적대화로 제각기 돌아가는 것이다, 대화는 철학적 생명 운동의 근본적 형태이다. 여기에서 다시 독서의 순수한 모습은 철학적이라고 할 수가 있으리라. 그런데 이 철학의 정신은 과학의 정신과 별로 다른 것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그런 것 같고, 본질을 살펴보아도 그렇다. 철학적 정신은 과학적 정신의 근원적인 형태이고 혹은 그 도식이다. 소크라테스적 대화란 무엇이냐, 결코 끝나는 일이 없는 탐구이다. 그리고 과학이란 이것 이외의 다른 무엇이겠는가. 따라서, 독서의 정신은 과학적인 것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
도대체 독서란 어떻게 시작되는 것인가. 말할 것도 없이 어떤 서적을 만남으로써 시작되는 것이다. 마치 대화가 어떤 인간을 만남으로써 시작되는 것처럼 독서는 하나의 해후이다. 사실 누구나 자기의 독서 경력을 되돌아보면 틀림없이 독서가 제각기 해후이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칠 것이다. 적어도 자기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독서는 항상 해후이었다. <중략> 우리는 우연히 어느 서적과 마주치고 그리고 읽기 시작한다. 그 책을 우리는 서점의 신간 서적의 줄에서 찾아 낼 때도 있다. 혹은 그것을 헌 책의 퇴적 속에서 발견할 때도 있다. 혹은 그것을 도서관의 카드 속에서 만날 때도 있다. 마치 소크라테스가 시장이나 거리나 체육장에서 우연히 만난 이 사람 저 사람을 붙들고 대화를 시작한 것 같이, 우리는 우연히 마주친 책을 잡고 읽기 시작한다. 물론 계획적인 독서란 것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필요한 독서이다. 그러나 계획적인 독서는 독서의 정신에서 보면 차리리 제2적인 것―뒤에서 나는 독서의 제2의 형식으로서 이것을 이야기할 참이다―으로 생각된다. 적어도 독서의 즐거움은 계획적인 독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어느 쪽이든 중요한 일은 계획적인 독서도 그 근원에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항상 해후라는 사실이 있음을 알게 된다. 가령, 계획적인 독서는 교사나 누구에게 지시된 대로 읽는 독서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의 교사라는 사실은 이미 하나의 해후가 아닌가. 또, 계획적인 독서는 무슨 책에 추천되고 있는 문헌을 읽는 독서이다. 그런데 그 처음 한 권의 책을 내가 보았다는 것은 이미 해후가 아닌가. 다시 자기 자신이 계획을 세워서 독서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우리가 안내로 삼는 것은 연구라든가 도서관 같은 곳의 카탈로그이다. 그런데 거기서 우리가 그런 책을 발견한다는 것도 벌써 하나의 해후가 아닌가. 이것은 모든 서적이 우리 인간이나 한 가지로 역사적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면 아무 이상한 일도 아니다.
책과 마주친다는 것은 인간과 마주친다는 것과 똑같은 기쁨이 있다. 독서의 기쁨은 이런 해후의 기쁨이다. 그런데 모든 역사적 사건이 단순한 우연이 아닌 것 같이 독서에 있어서의 해후도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해후란 말은 한편으로 어느 필연성을 의미해야 한다. 전혀 우연히 마주친 것 같지만 그것이 역시 필연이었다고 끄덕일 수 있는 것이 해후이기도 하다. 그것은 단순한 외적인 필연성이 아니라 오히려 내적인 필연성이다. 이리하여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사이에는 해후가 있었다. 괴테와 쉴러 사이에도 해후가 있었다. 독서에 있어서도 똑같이, 혹은 스승으로서의 혹은 친구로서의 책에 대한 해후가 있을 것이다. 일생 이런 해후를 경험하지 못한 자는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결국 아무것도 안 읽은 것과 똑같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우리는 이런 해후를 경험할 수 있을까. 스스로 구함으로서이다. 구하는 것이 없는 자는 마주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가량 마주친다 해도 그것임을 모르고 지나칠 것이다. 무엇인가를 구하면서 독서하는 자만이 그런 해후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전혀 알지도 못하는 것을 어떻게 우리는 구할 것인가. 구한다고 할 때는 이미 무언가 그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이미 그것에 무언가 만난 일이 있어야 한다. 이리하여 이미 탐구 이전에 해후가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플라톤의 아나무네시스설[想起說]의 진리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리라. (상기도 하나의 해후이다.) 그러나 인식은 상기라고 하는 플라톤에 있어서 거기(인식)에 이르기까지는 긴 탐구의 대화가 있다.
해후는 대화를 불필요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필연적인 조건으로 삼는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아무하고나 붙들고 서서 대화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말없이 그를 지나가게 한다. 또,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간단한 인사만 하고 지나갈 것이다. 우리가 마주치는 책 가운데에도 이런 종류의 것이 많다. 제각기의 책은 그것이 마땅히 다루어져야 하는 대로 다루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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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사회/문화/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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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마카아벨리 평전 - 제13장 (비탄에 잠긴 마키아벨리)
7월 12일, 대사 친구는 주제의 성격 자체는 여전히 늘 보던 것이지만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꺼냈다. (난 자네와 함께 이 세계를 뜯어고치고 싶네. 전부가 안 된다면 일부라도 말일세. 물론 이는 머릿속으로 하기도 힘든 일이라, 설사 그것이 실현된다고 해도 나는 믿지 못할걸세.) 서두를 이렇게 뗀 그는 열강드리 처한 상황과 그들의 의도에 관해 얘기한 뒤에, 전 서기장에게 (펜으로 평화를 만들어내 보라)고 권유하면서 글을 끝맺었다. 이렇게 해서 두 친구는 7월과 8월 내내 서로 편지를 교환하면서 각자의 방식대로 머릿속에서 평화 조약 안을 구상하였다. 마키아벨리의 생각은 이러했다. 마음이 선해서가 아니라 의심이나 어떤 술책의 일환이겠지만 어쨌든 계속 중립을 지키고 있는 교황이 프랑스 왕과 연합하고 대신 왕은 밀라노 공국을 반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생각을 가진 베토리는 8월 20일자 편지에서, 먼저 세상 소식으로 이 추방객의 가슴을 후련하게 해준 뒤, 마키아벨리와는 반대의 입장에서 자신의 평화 안을 뒷받침하는 논증을 펼쳐나갔다. 니콜로는 다시 8월 26일자 편지에서 마치 친구를 놀리는 듯한 어조로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 편지를 보고 처음에 그는 논증이 질서가 있고 복잡다단한 데 놀랐으나, 다시금 자세히 들여다보니 (자신이 여우로 본 것을 그는 사자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어서, (처음에는 깜짝 놀라죽을 뻔했고, 그 다음에는 걸음을 멈추고는 덤불 뒤에서 그를 지켜보다가, 결국 말을 걸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친구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곧 (프랑스 왕을 바보로 여기고 반면 영국 왕은 대단한 인물쯤으로 착각하는) 실수를 범한 그를 책망하는 셈이었다. 또다시 마키아벨리의 판단은 옳았다. 물론 그는 나라가 자신의 군대를 가져야만 강해질 수 있다는 지론으로 주제를 벗어나기도 하고,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공화국에 대해 말했던 것들은 무시하기도 함으로써, 베토리가 투르크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스위스에 대한 환상 속에 바지는 실수를 범하기도 하였다.
여우의 우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또는 응담 거리가 없어서인지 알 수 없지만, 군주 제후들이 백성들의 희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간의 그 쓸데없는 경쟁을 계속함으로써 연일 새로운 생각 거리를 만들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베토리는 이 편지에 답하지 않은 채 몇 달 간이나 소식을 뚝 끊었다. 마키아벨리 역시 그를 자극하거나 도발하려는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 편지를 쓰지 않았다. 이제 그는 자신의 여가와 생각을 다른 일에다 쏟아붓고 있었다. 그는 결국 자신만의 길, (지금까지 아무도 밟지 않을 길)을 찾았던 것이다. 그리고는 지체없이 그쪽으로 나아갔다. 그는 이미 오랫동안, 아마 발렌티노 진영에 사절로 가 있던 당시쯤부터, 짧지만 가끔 생기는 (일 사이사이의 짬 otia inter nogotia)(otium=ozio(짬, 여가, 나태, 무위도식)와 nogotium=negozio(일, 바쁜 행동)는 서로 대립 개념으로, 르네상스 정치철학에서는 각각 명상적, 관조적 생활 vita contemplativa과 활동적, 행동적 생활 vita activa로 대변되는 두 개의 대립적 세계관을 뜻하기도 한다-옮긴이)을 이용하여 인간 행위에 대한 자신의 잊지 못할 경험들을 기술하고 그것을 고대인의 경우와 비교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그의 천재성은 때로는 경험을 통해 또 때로는 직관을 통해, 스스로를 과거사에 깃들인 (역사의 풍미)를 음미하고 그로부터 신과학의 일반적 원리와 규칙들을 이끌어낸 최초의 인물로 만들어갔다. 그의 주장이 기반하는 제일 원리는 인간 본성이란 그 속에 담긴 욕망과 악덕, 약점이나 미덕과 함께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과거의 모든 혁신자들이 주장한 것들이 거의 그랬듯이 수정되어야 할 여지가 있는 이론이라는 점은 인정되지만, 그 자체로서 어떤 진실의 일면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오류를 범한 바로 그 부분조차도 진실로 향하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
이러한 주장의 제일 명제가 그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은, 그가 과거사를 재독 삼독하면서 이러한 역사에 대한 (끊임없는 독서)를 자신의 (오랜 경험)과 비교하여 (역사의 풍미)를 발견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리비우스의 로마사에 대한 주석 작업에도 힘입은 바 있었다. 이 주석들은 원래 인쇄업자인 니콜로 델라 마냐가 마키아벨리의 아버지 메쎄르 베르나르도에게 주었던 리비우스의 같은 책, 어린 니콜로가 아버지의 서재에서 일찍부터 보아왔던 바로 그 책의 넓은 여백에 씌어져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불운에 처한 그는 (시골집으로 물러나 사람의 얼굴을 멀리한 채), 나태와 불행과 필요성의 느낌이 뒤섞인 속에서 그 책을 다시금 뒤적거리게 되었을 것이고, 앞서 써놓은 위에다가 이제는 갖가지 생각으로 가득 찬 자신의 심중을 덧붙여 나갔으리라. 그리하여 그는 리비우스의 로마사 첫 10권에 대한 주석의 형식을 빌려 공화국에 대한 노고에 착수하였던 것이다. 비록 첫 발상부터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초지일관 주석의 형태를 유지하였지만 말이다.
이 저술은 여러 해에 걸쳐 띄엄띄엄 진행되어 나갔지만 결코 포기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여가 초기에 느낀 집필 충동 속에서 이미 그 일부를 완성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가 발간자의 열성으로 글에 매진하는 모습을 본다. 고대나 현대의 역사적 사실이 스스로 제시했던 이론, 그러리라 예건했던 진실을 확증하는 새로운 보기가 되었을 때, 저술에 대한 그의 열기와 희열은 더욱 커졌으리라. 그는 자신이 착수한 작업의 위대함과 새로움을 깨닫고 무한한 흥분을 느꼈다. 그리고 (미지의 바다와 땅을 탐색하는) 사람에게 으레 닥치는 위험을 스스로 예견한 그의 마음은 거의 두려움 같은 것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러나, 그가 새로운 이론들과 사상적 논리성으로 엮여 있는 이 책의 저술에 몰입해 있는 동안, 자신이 접하고 있었던 역시 마찬가지로 모호한 재료로부터 다른 또 하나의 저작이 싹을 틔우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 물병처럼 매우 구체적이고도 짜임새 있는 모양에다, 칼처럼 직설적이고도 날카롭다. 그의 마음은 자신의 시대와 나라와 혈통과 신분 때문에 언제나 평시민 국가에 쏠리고 있었고, 이러한 경향은 로마 세게에서도 그가 애호하는 유일한 존재인 로마 공화정의 행적을 좇아 오래도록 키워온 것이었다. 그러나 앞을 내다보는 그의 지성은 이탈리아가 자신의 이러한 마음과는 달리 군주국의 시대로 옮아가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가 군주국에 대해 논해야 할 이유는 충분했던 셈이다. 바로 그 당시, 그가 리비우스에 대한 (논고)의 집필에서, 자신의 눈을 고대 로마로부터 당대의 이탈리아 도시들로 돌려 (부패한 민족은 설사 자유를 얻는다 해도 그것을 보존하기란 극히 어렵다)라고 말한 장에 다다랐을 무렵, 그는 (그 사지가 모두 부패앴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무력이나 군대와 같은 비상 수단에 호소하고, 나아가서 스스로를 군주국으로 변신케 하는 일)이었다. 오직 어떤 (신국주)만이 그 썩은 사지를 되살려낼 수 있을 것이다. 필시 그러한 군주에게서만이 힘 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만의 구원자)를 찾아내게 될 것이다. 10년 전, 발렌티노는 운세와 한 교황의 도움으로 그 일에 거의 성공할 뻔하였다. 보르자 가가 사라진 후, 줄리오 2세는 교회가 이탈리아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를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지금 교회는 교회의 힘에다가 피렌체국의 힘까지 더한 한 피렌체인의 손에 놓이게 되었다. 그에게는 아직 젊은 나이지만 권력을 쥐고 싶어하는 남동생과 조카가 있으며, 그 자신 역시 (하늘과 운세의 비호)를 비할 바 없이 누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산탄드레아의 은둔객은 마음속으로 공화국에 관한 앞의 책을 일단 제쳐두고 (군주국에 관한) 책, 즉 (군주론)을 쓸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오직 하나, 비르투만을 제외하고는 (신군주)로서 기대되는 다른 모든 조건들을 다 같춘 것으로 보이는 인물에게 바치려고 작정하였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는 자신의 책에서 세습 군주국에 대해서는 휙 지나쳐 버리고 비르투에 의해 얻은 군주국의 경우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좋은 운세 덕분으로 얻은 군주국에 관해서는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발렌티노의 경우에서 또다시 되풀이된 사실이었다. 이탈리아의 운명은 그때마다 이들의 어깨에 달려 있었을 법하며 마키아벨리 자신의 운명 또한 그러하였을 것이다. 이탈리아! 당시로서 그것은 단지 시인에게만 바쳐진 이름이었다. 이를 하나의 정치적 개념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시인이면서 동시에 정치가인 한 인물이 필요하였다.
마키아벨리가 줄리아노 앞에 펼쳐 보이려 하는 군주의 전범은, 그가 (역사의 풍미)를 맛보고 있다고 볼 때, (칭송될 만하다고 누구나가 생각하는) 신적, 인간적 교의들을 같춘 인물이 아니라 시대 상황에 따라 바람직한 결과를 이룩할 수 있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는 이 구원자를 어떤 구원의 난제로 이끌어, 사악함과 싸우고 사악한 자들과 겨루며 찬탈자를 다시 찬탈하는 과업에 착수하였다. 장군은 단지 군사적 측면에서만, 과학자는 단지 과학적 측면에서만 생각하는 것처럼, 그 역시 자신의 이론이 전개되어 나가는 데 이절적인 도덕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다. 그를 인도하는 것은 오직 강철 같은 논리뿐이었다. 그가 국가의 승리에 대해 고찰할 때, 그에게 문제되는 것은 오직 국가뿐이며, 종교조차도 국가에 의해 조직되고 또 그 아래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일 그의 과제가 사보나롤라의 경우처럼 사람들의 복음속에 신앙의 승리를 심는 것이라면, 똑같이 냉혹한 논리가 그를 와전히 반대의 방향으로 이끌어갈 것이었다. 전쟁이 꼭 필요하다면 그것은 정당한 것이며, 어떤 군주가 자신의 잔혹함으로 백성들에게 닥칠 더 큰 잔혹함을 막을 수 있다면, 그의 행위는 자비로운 것이다. 무릇 행위란 그 성격이 어떠하든간에 신성한 결과로 이끌어진다면 신성한 법이다. 그 유명한 마지막 권고가 마키아벨리의 책을 불경하고도 잔혹한 교의들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것처럼, 결과는 그것을 있게 한 행위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탈리아가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온 구원자와 이제 막 만나게 된 이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서는 안됩니다. 이들 외적의 침입으로 고통받던 모든 지방 사람들이 어떤 사랑의 마음으로 그를 맞을지, 또 얼마나 복수심에 목말라하면서 굳건한 믿음과 경건함과 눈물로써 그를 대할지는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어떤 문이 그의 앞을 가로막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이 그를 경재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질시의 감정이 그를 방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탈리아인이라면 그를 경모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 야만족의 지배가 방방곡곡에 뿌려대는 그 고약한 냄새란! 그러므로, 부디 대인의 고명한 가문이 정당한 일을 한다는 기백과 희망을 가지고 이 과업을 압장서 맡아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여, 대인의 깃발 아래 이 나라가 고격함을 되찾고, 대인의 영도 아래 일찍이 페트라르카가 읊조린 다음과 같은 희망이 실현되도록 이끌어주옵소서.
광포함에 맞선 덕성이
이제 무기를 잡으매, 싸움은 곧 끝나리니.
옛날의 용맹함이
이탈리아 사람들의 가슴속에 아직 살아 있으므로.
꿈의 피륙 위에 다시 짜인 마키아벨리의 새로운 정치 교의들은 이렇게 마지막의 감정적인 호소 속에서 시의 세계로 들어온다. 몽테스키외는 마키아벨 리가 발렌티노라는 우상에 홀딱 빠져 있었다고 말했지만(법의 정신 29권 19장-옮긴이), 사실 (군주론)에서나 그 이전부터나 그가 빠져 있었던 것은 발렌티노가 아니라 자신의 (신군주) 개념이었다. 그가 메디치 가와 보르자 가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했다고 그를 비난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차이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이탈리아의 구원이라는 자신의 원대한 꿈을 가로막지는 못했으리라. 물론 그도 인간이기에 스스로도 구원받기를 바랐겠지만 말이다. 이러한 꿈속에서 그의 저작은 매우 짧은 시간 안에 완결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마키아벨 리가 등불 아래서 자신이 간직해 온 에 생각들과 이제 새로이 가지게 된 교의들의 아직은 형제 없는 덩어리로부터 끌을 힘차게 움직여 (군주론)에 담긴 개념들을 조각해 냈던 저녁의 나날들이 있었다. 아마 불운의 깊은 나락에 바진 어느 누구도 그 저녁의 마키아벨리만큼 행복감에 젖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의 일에 푹 빠져 다른 아무것도 생각지 않았다. 그가 피렌체로 나갈 때는 무슨 보릴이 있거나 책을 구하려는 경우뿐이었다. 베토리에게는 더 이상 편지를 쓰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11월 23일, 오랜 침묵을 깨뜨리고 편지를 보내옴으로써 둘 사이에 다시 편지를 오가게 한 것은 그의 친구 쪽이었다. 마키아벨리의 주저들 모두가 사람들의 악의와 냉담함과 이기심 덕분이라는 것은 그의 운명이었다. 메디치 가는 그를 관직에서 내쫓고 감금했을 뿐 아니라 오랫동안 무관심과 궁핍 속에 내팽개쳤으나, 그는 (군주론), 리비우스 논고), 그리고 그 밖에 영원히 기억될 다른 많은 글들이 나온 것은 바로 이 메디치 가 때문이었다. (흔히 말하듯이) (단테가 망명의 길을 떠나지 않았다면 (신곡)은 있을 수 없었을 것처럼, 마키아벨리도 역시 정치로부터 추방되지 않았다면... (그의 저작들을)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베토리의 덕도 많이 본 셈이었다. 그는 자신이라면 분명히 줄 수 있었을 법한 도움을 주지 않음으로써, 마키아벨리로 하여금 불행 속에서도 풍성한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하였고, 더욱이 그에게 그렇게 할 일없는 편지를 보냄으로써 그로 하여금 답장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중 일부는 조소와 탄식 사이에 놓인 최고의 명품들이었다. 그러나 베토리는 무엇보다도 앞서 이미 언급된 자신의 11월 23일자 편지를 통해, 마키아벨리로 하여금 이탈리아 문학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편지를 쓸 기회를 주었고, 나아가서는 그 내용의 윤곽까지도 제시해주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그 대사 친구는 언제나처럼 나태하고 할 일없다는 식으로 자신의 로마 생활이 편안하기는 하지만 아무 쓸모도 없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 보냈다. 마키아벨리는 이에 답한 12월 10일자 편지에서 이번에는 스스로의 생활 모습을 적고 있다. 지난 몇 달 동안, 그는 자신이 직접 덫을 놓아 개똥지빠귀를 잡았다. 해돋기 전에 일어나 올가미를 만든 다음, 등에다 한 무더기의 새장들을 걸치고는 마치 (암피트리온의 책을 가지고 항구에서 돌아오는 제타) (이 비유는 15, 6세기에 유행했던 8행시 형식의 노벨라 (제타와 비리아 Gete e Birria)에서 따온 듯하다. 이 이야기는 플라우투스의 (암피트루오 Amphitruo)에 근거하고 있는데, 여기서 암피트리온 Amphitryon은 그의 하인인 제타에게 책을 지워 보내면서 아내인 알쿠메나 Alcumena에게 자신이 곧 돌아간다는 소식을 알리도록 했다. 하지만 몰래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려는 주피터의 계획은 알지 못한채였다. 플라우투스의 작품에 나오는 하인의 이름은 소시아이지만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테렌티우스의 작품 (포르미오 Phormio)에서는 제타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마키아벨 리가 자신을 제타에 비유한 데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를 볼 것. John M. Najemy, "Machiavelli and Geta:Men of Letters" in Machiavelli and the Discourse of Literature, eds. Albert Ascoli & Victoria Kahn (Ithaca:Cornell Univ. Pr., 1993); Najemy, Between Friends: Discourses of Power and Desire in the Machiavelli-Vettori Letters of 1513-1515 (Princeton: Princeton Univ. Pr., 1993), pp. 221-230-옮긴이)처럼 떠나곤 했던 것이다. 11월은 내내 그렇게 흘러갔다(원문에 대한 나의 새로운 해석에 따르면 이렇게 생각된ㄷ). 하지만 개똥지빠귀의 이동이 끝나자 유감스럽게도 (좀 궂고 이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에게는 소일 거리였던 이 일마저도 함께 끝나고 말았다. 그 뒤의 생활은 이 위대한 작가 그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말로는 내가 도저히 그릴 수 없는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나는 아침에 해가 뜨자마자 일어나 요즘 베어내고 있는 내 소유의 숲으로 가네. 그곳에서 두어 시간 머물면서 전날은 얼마나 일을 했는지도 살펴보고 벌목꾼들과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네. 그 축들이란 자기들끼리든 주변 사람들고든 언제나 무슨 말썽 거리라도 만들어내는 사람들 아닌가. 숲을 나와서는 약수터에 들었다가 내가 새를 잡는 것으로 가지. 나는 책을 한 권씩 끼고 다니는데, 단테나 페트라르카, 아니면 그보다는 조금 아래의 시인들일세. 왜 티불루스나 오비디우스 등속과 같은 사람들 있잖은가. 난 그들의 감미로운 정념과 그들의 사랑을 읽고 느끼지. 그리고 나의 정념과 사랑도 되새겨보지. 한동안은 이러한 달콤한 상념들 속에 잠긴다네. 그 다음엔 길로 나와 술집에 들르지. 그곳에서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과 말을 나누면서, 그쪽 소식을 묻기도 하고 이런저런 온갖 이야기를 들으며 사람들의 잡다한 풍취와 다양한 생각들을 접하게 된다네. 그러다보면 식사할 시간이 오고, 나는 가족들과 함께 이 초라한 시골집과 보잘것없는 땅뙈기에서 나오는 소출로 배를 채운다네. 식사를 한 뒤엔 다시 그 술집으로 가지. 그곳엔 나를 반길 사람들이 있지. 보통은 푸줏간집 한 사람, 방앗간집 한 사람, 그리고 가마 rnq는 일을 하는 사람 둘이 바로 그들이라네. 나는 이들과 아무렇게나 어울려 딱딱 소리를 내며 카드놀이를 하지. 이 와중에 수없이 오가는 말다툼과 욕석들. 그뿐인가. 돈 한 푼을 두고 종종 드잡이 판을 벌이는 바람에 그 고함소리가 멀리 산 카쉬아노에서도 들릴 정도라네. 이 기생충 같은 인간들 틈에 끼어 나는 곰팡내 나는 머리를 씻고 내가 처한 이 불운을 잠시나마 잊어버리려 하지. 운명의 여신은 나를 이처럼 짓밟고 있지만, 그래도 그녀 스스로는 이를 부끄러워하리라 생각하는 것으로 자위하면서 말일세.
저녁이 오면 난 집으로 돌아와 서재로 들어가네. 문 앞에서 온통 흙먼지로 뒤덮인 일상의 옷을 벗고 왕궁과 궁중의 의상으로 갈아입지. 우아하게 성장을 하고는 날 따뜻이 반겨주는 고대인의 옛 궁전으로 들어가, 나를 이 세상에 나오게 하는 이유이자 오직 나만을 위해 차려진 음식을 맛보면서, 그들과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고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했던가를 물어본다네. 물론 그들도 친절히 답해 주지. 이 네 시간 동안만은 나에게 아무런 고민도 없다네. 모든 근심 건정을 잊어버린다는 말일세. 쪼들리는 생활도 나아가 주금까지도 나를 두렵게 하지는 못하네. 나 자신이 온통 그 시간 속에 빠져 들어가는 셈이지. 하지만 단테도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어떤 것을 듣고 이해하더라도 기억 속에 넣어놓지 않으면 지식이 되지 못한다고 말일세. 그래서 나는 그들과의 이야기에서 배운 바를 일일이 써놓았다가 그것으로 (군주국에 대하여 de Principatibus)란 조그만 책자를 쓰게 되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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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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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4.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법
공인의 자세
이러한 시저의 고사에서 기원하여‘above suspicion'이란 말이 사용된다. 이 말은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철저한 관리를 하여야 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장관(입헌군주제의 나라, 즉 영국이나 일본의 경우 행정부의 장관은 국회의원만이 가능하다. 이들은 국민에 의해 장관에 임명되는 절차를 밟기 때문에 장관을 Ministers of crown이라고 한다. Minister는 목사 또는 대사관의 공사란 뜻도 있다)은 오얏나무 아래에서는 갓을 고쳐 쓰지 말아야 한다. 만약 그것이 개인적인 스캔들이라 할지라도 그는 그 직위에서 사임하여야 한다. 그래서 영국이나 미국에서‘혐의’를 받는 고위 공직자는 일단 그 직책에서‘휴직’을 당한다. 중국 고대 악부고사에,‘군자는 재앙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여야 하나니, 절대로 혐의를 받을 상황에 몸과 마음을 두지 말라. 참외밭에서 신을 고쳐 신으면 멀리서 보는 사람이 참외를 훔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고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을 고쳐 쓰면 오얏을 훔치는 것으로 의심받게 되므로 삼가 조심해야 한다‘고 하였다.
동서양을 박론하고 공인의 생활은 어렵다. 남의 앞에 서서 이끌어 가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일 수 있겠는가? 가장 작은 단위인 가정도 잘 이끌어 가려면 대단히 어렵다. 그러므로 공인은 아예 의심받은 짓을 하지 말아야 모든 뜻이 이루어진다. ‘무슨 일이나 명분을 바르게 세워야 한다’고 논어는 말하고 있다. 명분이 서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좋은 방향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참외밭에서 신발 끈을 고쳐 매지 마라.
(Caesar's wife must be above suspicion.)
물에 빠진 사람
물에 빠진 사람을 보라.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든다. 분초를 다투는 위급한 상황이면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것에도 구원의 손을 뻗치는 것이 사람의 심정이다. 누구나 평소에는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줄 것같이 말해도 실제 상황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자신이 어려울 때에는 남에게 손을 내밀어 도움을 요청하지만 반대로 남아 어려울때에는 별반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공자는‘군자는 곤궁한 사람이 도움을 청하면 도와주어야 한다’고 가르쳤고, 예수 역시‘네에게 요구하는 사람에게 주고,꿔달라는 사람에게 거절하지 말아라’고 하였다. 영국 작가 스톱파드(STOPPARD)는 “우리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에게 왜 벽돌을 던지는가?”라고 말했다. 동냥은 못 주더라도 쪽박은 깨지말라는 말이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자는다.(A drowning man clutch at a straw)영어에서‘지푸라기를 잡다(to clutch at a straw)’란 말은 숙어로도 사용된다.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기대하지 않더라도‘한번 해본다’는 뜻이다. ‘바로 그 곳에 가서 만나봐야겠군’하고 필립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외쳤다.('I'll shoot round and see him now!' cried philip, clutching at a straw.) 예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여러가지 방법을 다 동원했으나 실패하고 마지막 남은 방법 하나를 시도하여 본다는 뜻이다.
소크라테스
그리스 철인 이오게네스(Diogenes, 412~332 B.C.)는 소크라테스를 가리켜,“대부분의 사람들은 먹기 위해서 살지만 소크라테스는 살기 위해 먹는 사람이다“고 했다. 소크라테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혼란한 시기에 길거리, 시장 그리고 짐나시아라고 부르는 토론자에서 재기가 뛰어난 청년, 정치인, 시인 등과 어울리며 지냈다. 남녀간의 성관계가 없는 사람을 ‘플라토니 러브(Platonic love)'라고 하는데, 이는 소크라테스가 재기발랄한 청년과 나눈 우정과 사랑을 그의 제자 플라톤(Plato)이 표현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399년 두가지 죄목으로 재판을 받았다. 첫째는‘젊은이 선동죄’,둘째는‘신에 대한 불경죄’였다. 그는 유죄 선고를 받아 독약을 먹거 일생을 마쳤다. 예수나 공자,석가모니 등과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기록하여 남긴 것이 없다. 그의 사상은 플라톤의 (대화록)과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의 추억)에서 밖에 유추하여 볼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생각과 플라톤의 생각은 원리면에서 서로 분리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악처로 소문난 부인 크산티페와 아들 셋을 두었다. 남편이‘돈이 생기지 않는 엉뚱한 소리’‘세계에서 가장 철학적인 소리’만 하면서 길거리와 시장바닥을 쏘다닌다면‘악처’안될 여자가 있겠는가? '곧은 낚시’의 강태공이 백수 건달로 있을때, 고생을 참지 못한 부인 마씨가 도망을 갔다. 세월이 흐른 후 강태공이 입신양명하여 큰 벼슬을 하자 그녀는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다시 결합할 것을 간청하였다. 하지만 강태공은‘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엎지른 물은 퍼담을 수 없다’며 매정히 거절했다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소크라테스의 부인 크산티페가 강태공 부인보다 낫다. 못 살겠다고‘고무신 거꾸로 신고’도망은 가지 않았으니 말이다. 소크라테스를 두고 말한 디오게네스에게서 힌트를 얻었는지는 몰라도, 이후에 시세로(Ciecero,106~43 B.C.도‘사람은 먹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 살기 위해서 먹어야 한다’고 하였다. 공자가‘군자는 도를 찾기 위해서 먹어야 한다’고 하였다. 공자가‘군자는 도를 찾기 위해서 노력하지 먹는 것에 매달리지 않는다’고 했듯 말이다. 살기 위해서 먹지 먹기 위해서 살지 않는다.(Eat to live, not live to eat.) 살기 위해 먹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고, 먹기 위해 사는 사람은‘저질’의 사람인가?
옷과 날개
깃털이 아름다운 새는 보기에 예쁘다. 사람 역시 옷이 날개이기 때문에 옷을 잘 입으면 인물이 훨씬 돋보이게 마련이다. 눈을 한 번 찡끗하여 웃으면 백 가지 교태가 자지러지는 미녀나 옥 같은 얼굴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고 연분홍 배꽃 한 송이가 봄비를 머금은 듯한 양귀비 같은 절세미녀도 몸이 더럽고 불결한 누더기를 쓰고 있으면 보는 사람마다 코를 막고 도망을 갈것이다. 진흙 속에서 진주를 알아내는 것은 현명한 사람만이 할 수 있고, 옷차림이 남루하더라도 진실한 사람인가 아닌가를 알아내는것은 성자의 눈빛으로만 가능하지만, 일반 대중은 현자도 성자도 아닌 어중이 떠중이들인 장삼이사인바, 이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면 우선 옷차림을 깨끗이 하여야 한다.“옷을 잘 차려 입으면 누구나 마음이 뿌듯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고 찰스 디킨스가 말했다. 아름다운 옷은 입은 사람의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누더기를 입거나 아름다운 옷을 입거나 입은 사람은 같은 사람인데 보는 사람에 따라 달리 생각되어진다면 그것은 보는 사람의 미망이다. 그러나 남에게 호감을 주는 깨끗한 옷차림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 중요하다. 왜냐하면 개도 누더기를 입은 사람만 골라서 짖는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선 개에서라도 대접을 받으려면 옷을 깨끗하고 단정하게 입어야 한다.
옷이 날개다.(Fine feathers make fine birds.)
불만족
현재 처해 있는 상황에 만족하는 사람은 없다. 과거에 대한 향수나 미련을 갖고‘그때가 좋았었지’하며 아쉬워하거나, 다가올 미래의 장미빛 환상에 들떠있기가 쉽다.‘가장 좋은 때는 결코 현재일 수 없다’는 말처럼, 현실에 만족하면서 사는 사람이 별로 없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자. 오늘은 오늘의 기존으로 보면 오늘이지만, 어제의 기준으로 보면 어제의 미래요, 내일의 입장에서는 과거이다. 그러므로 오늘 일어나는 일, 과거에 일어난 일, 미래에 일어날 일 가운데서‘보라, 이것이 새 것이다’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전에 있던 것이 현재에 디시 있고, 이미 했던 일도 다시 할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거와 미래만 좋은 것이 아니라 현재도 좋은 때인 것이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어째서 지금이 옛날보다 못한가 하고 묻지를 말라, 그것은 현명한 질문이 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진실로 오늘 하루룰 새롭개 할 수 있다면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고 대학은 전한다. 날마다 마음에 기쁨을 채워 살아간다면 그림자같이 덧없이 지나가는 인생이 짧다는 것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현실에 불만을 갖지 않는 사람은 없다.(Jam tomorrow and jam yesterday,but never jam today).
중용의 길
로마의 극작가 플라우투스(Plautus,251~184 B.C.)는 “중용을 지키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였다. 중이란 모자람이나 남음이 없고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는 천하의 정도를 말하고 용은 항상 변함없는 하늘과 땅의 정한 이치를 뜻한다. 그래서 중용이란 모든 일에 모자람이나 남음이 없음을 말한다. 동양 철학에서 중용은 성선설에 바탕을 둔 천일합일(天一合一:하늘과 사람은 하나이다)사상을 주제로 삼고 있고, 우주나 인간의 모든 것을 성에 귀결시키고 있다. 중도의 길을 걸으면 허물이 없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지혜로운 사람은 너무 과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모자라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스의 철학자 헤시오드는 “무슨 일이든지 자제하라. 중용을 지키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며, 남고 모자람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세익스피어 역시 중용지도를 강조한 사람이다. 그는 ‘만약 권력자를 잘 보필하려면 그들에게 중용지도가 최고하고 충고하여야 한다’고〈태산 명동에 쥐꼬리 하나(Much ado about nothing)〉에서 말했고 호레이스도‘모든 일에 중용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중용의 덕이야말로 극치의 것이다’고 한다. 그러므로‘너무 가까이도 하지 말고 너무 멀리도 하지 말라’는 말과 같이 항상 편안한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중용의 길이란 오른쪽에는 눈이 내리고 왼쪽에는 햇빛이 비추는 길이다. 따뜻함과 시원함이 서로 적절하게 섞여진 길이다. 걷기에 편하고 안전한 길이다.
중용의 길을 지키자.(Moderation in all things.)
눈 가리고 아웅
중국의 진시황은 전국을 시찰하다가 사구(砂丘)라는 곳에서 죽었다. 때는 기원전 209년이었다. 그는 큰아들인 부소에게‘급히 수도로 가서 나의 장례식을 행하라’는 조서를 남겼으나 이를 환관 조고가 가로챘다. 그는 진시황을 수행한 아들 호해를 설복하고 승상인 이사를 협박하여, 진시황의 시신을 숨긴 채 수도로 돌아와서 거짓 조서를 꾸며 시황의 장자인 부소에게 죽음을 내리고 호해를 황제에 즉위시켰다. 조고는 점차 호해를 정사에서 멀리하게 하고 승상 이사를 죄를 씌워 죽이고는 자신이 중승상이 되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하늘같이 높아진 조고는 자신이 황제를 대신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그는 모반을 일으키기 전에 대신들의 마음을 떠보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사슴을 데리고 황제인 호해에게 가서 “이것이 말입니다.”라고 말했다. 황제가 웃으면서 “승상이 잘못 본 것이요. 어떻게 사슴을 말이라고 하십니까?”라고 말하면서 좌우에 있는 중신에게 물었다. 좌우에 있던 중신 중에 어던 사람들은 ‘말이다’하고 대답했다. 조고는 ‘사슴이다’고 말한 사람은 모두 죄를 씨워 가두어 버리자 모두 조고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새들이 보는 앞에서 새 그물을 치는 사람이 바로 조고와 같은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은 남에게 잘못을 강요하고 함정에 빠뜨리려는 사람이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잣을 말아라.(In vain the net is spread is the sight of the bird) 새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새 그물을 치느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짓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하는 사람이 많다. 이러한 사람은 스스로 덫을 놓고 자기들이 빠져 죽을 함정을 파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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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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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구름 - 서오근
하얀
구름아
비 한 보시락
내려 봐라
비도
하얀가
하아얀가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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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 이병기
짐을 매어 놓고 떠나려 하시는 이 날,
어둔 새벽부터 시름없이 내리는 비,
내일도 내리오소서, 연일 두고 오소서.
부디 머나먼 길 떠나지 마오시라,
날이 저물도록 시름없이 내리는 비,
저으기 말리는 정은 나보다도 더하오.
잡았던 그 소매를 뿌리치고 떠나신다.
갑자기 꿈을 깨니 반가운 빗소리라.
매어 둔 짐을 보고는 눈을 도로 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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