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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0호 - 2024.9.24. 화요일(음력 : 8.22.)
angelo@nownforever.co.kr / 風文 윤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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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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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너무 바빠 근심이 없고, 밤에는 너무 졸려 걱정할 겨를이 없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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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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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우다, 끼이다, 끼다
‘끼우다, 끼이다, 끼다’는 뜻과 용법이 조금 복잡하다. 찬찬히 살펴보자.
‘끼우다’는 타동사, 즉 목적어가 필요한 동사이다. ‘무엇을 비교적 좁은 틈에 넣거나 꽂거나 하여 빠지지 않게 하다’ 또는 ‘누구를 한 무리에 섞거나 덧붙여 들게 하다’라는 뜻을 나타낸다. ‘끼우다’는 ‘끼우어(끼워), 끼우니, 끼운’과 같은 방식으로 활용을 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술추렴에 나를 끼워 주었고, 따뜻한 아랫목을 기꺼이 내게 양보했다.”(이문열, 그해 겨울)
‘끼이다’는 자동사, 즉 목적어가 필요 없는 동사이다. ‘무엇이 비교적 좁은 틈에 넣어지거나 꽂혀서 빠지지 않게 되다’ 또는 ‘누가 한 무리에 섞여 들거나 어떤 일에 관여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끼이다’는 ‘끼이어(끼여), 끼이니, 끼인’과 같은 방식으로 활용을 한다. “그의 튼튼한 누런 이빨 사이에 끼인 고춧가루가 눈에 띄었다.”(김원일, 어둠의 축제)
‘끼우다’와 ‘끼이다’는 모두 ‘끼다’로 줄여 쓸 수 있다. 이때의 ‘끼다’는 ‘끼어(껴), 끼니, 낀’과 같은 방식으로 활용을 한다. “형님이 나를 어떤 단위조합에라도 끼어 넣어 주십시오.”(이병주, 지리산) 이 문장에 쓰인 ‘끼어’는 ‘끼우어(끼워)’로 바꿔 쓸 수 있다. 반면에, “두령들도 변복한 뒤에 금구에서 일단 모이기로 약속한 후 군사들 틈에 끼어 뿔뿔이 흩어졌다.”(유현종, 들불) 이 문장에 쓰인 ‘끼어’는 ‘끼이어(끼여)’로 바꿔 쓸 수 있다.
‘끼다’에는 ‘끼우다’나 ‘끼이다’의 준말이 아닌 것도 있다. ‘팔짱을 끼고 걷다’ ‘학교 건물을 끼고 골목으로 들어가다’ ‘구름이 낀 하늘’ ‘창문에 먼지가 잔뜩 끼어 있다’ 등과 같은 용례에서는 ‘끼다’를 ‘끼이다’나 ‘끼우다’로 바꿔 쓸 수 없다.
이대성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에 대하여’를 어찌할까요
우리말에서 ‘-에 대하여’란 표현이 많이 쓰이는데, 그중 적잖은 예들이 ‘-을’이나 ‘-에, -에게’ 등으로 고쳐 쓸 만한 것들이다. 법령문에서 특히 이러한 표현을 많이 쓰는데, 예를 들어 “직원에 대하여 협박하거나”는 “직원을 협박하거나”로, “관계인에 대하여 질문할 수 있다”는 “관계인에게 질문할 수 있다”로 간결하게 표현할 수 있다.
그동안 법제처는 이처럼 남용되는 ‘-에 대하여’를 바로잡아 왔는데, 최근 교육부도 앞으로 이 ‘-에 대하여’를 교과서에서 쓰지 않겠다는 방침을 발표하였다. 이를테면 “삶의 자세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를 “삶의 자세를 생각해 봅시다.”로 고쳐 쓰는 식이다. 이렇게 교육 현장에서 국어를 갈고 닦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다만 ‘-에 대하여’를 쓰지 말아야 할 이유가 어렵거나 어색해서가 아니라 일본어투 표현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말의 기원을 장담하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 자칫 이러한 태도는 우리말 표현을 옥죄는 결과를 빚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올바른 운동법에 대하여 토론해 봅시다’를 ‘올바른 운동법을 토론해 봅시다’라고 할 수는 없지는 않겠는가. 물론 ‘올바른 운동법이 무엇인지 토론해 봅시다’처럼 쓸 수는 있지만, 이렇게 다양한 표현의 갈래를 제약하는 자체가 국어의 힘을 떨어뜨리게 된다.
더 쉽고 고운 말로 교과서 문장을 가다듬는 것은 백번 찬성할 일이다. 방침에서도 제시하듯이 가능하면 ‘이유, 의미’보다는 ‘까닭, 뜻’처럼 쉬운 말을 살려 쓰는 것이 좋고, ‘소감’보다는 ‘느낀 점’이라고 하는 것이 좋다. 다만 ‘이유, 의미’ ‘-에 대하여’가 자연스러울 때가 있으므로 상황에 맞게 가려 쓰는 지혜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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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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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 - 천상병
저 조그마한 불길 속에
누가 타오른다.
아프다고 한다. 뜨겁다고 한다. 탄다고 한다.
허리가 다리가 뼈가 가죽이 재가 된다.
저 사람은 내가 모르는 사람이다.
아 나의 얼굴
코도 입도 속의 살도
패가, 돌 모두가
재가 되어진다.
∼∼∼∼∼∼∼∼∼∼∼∼∼∼~~~~~~~~~~~~~~~~~~~~~~~~~~~~~~~~
비 - 정지용
돌에
그늘이 차고,
따로 몰리는
소소리 바람.
앞 섰거니 하야
꼬리 치날리여 세우고,
죵죵 다리 까칠한
산새 걸음걸이.
여울 지여
수척한 흰 물살,
갈갈히
손가락 펴고,
멎은듯
새삼 듣는비ㅅ낯
붉은 닢 닢
소란히 밟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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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밭 가에서 - 김수영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
강바람은 소리도 고웁다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
달리아가 움직이지 않게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
무성하는 채소밭가에서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
돌아오는 채소밭가에서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
바람이 너를 마시기 전에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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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집에서 - 이해인
"어느 꽃을 사겠니?"
"..............."
"어느 꽃을 사겠냐니까?."
"..............."
꽃집에서 들어 가서
꽃을 사는 일은
정말 어려워요
꽃들은 다
저마다의 모양과 빛깔이
너무 아름답거든요
향기가 좋거든요
모두 다
내 마음에 들거든요
꼭 한 가지만
골라서 산다는 일은
어쩐지 미안하고
어쩐지 슬퍼 집니다
그래서
꽃집을 슬며시
그냥 나와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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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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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53가지 지혜 - 루스 실로
제1장. 지를 기른다
17.잠들기 전에 책을 읽어주거나 얘기를 들려준다
얘기를 들려주면 편안하게 잠든다
유태인 엄마들의 하루 생활 중 가장 중요한 시간은 자녀들을 침대에 눕히고 그 곁에서 잠들 때까지 함께 있는 시간이다. 이는 자녀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시간이다. 어린이들이 낮에 잘못을 저질러서 꾸중을 했더라도, 또 저녁 식사 시간 때 버릇이 나쁘다고 엄한 주의를 주었더라도 일단 침대에 들게 되면 가능한 한 다정하게 토닥거려 주는 것이다. 아이들이 덮고 있는 이불 위에 손을 얹고, '내일은 좋은 날이 될 거야, 모든 걱정이 사라질 것이고 ...'라는 식으로 아이들의 마음에 안도감을 심어준다. 이것은 어린이가 잠들 때까지 낮에 있었던 일로 인해 불안해하거나 근심할까 봐서이다. 이처럼 자녀들이 하루 이로가 중 그 마무리를 같이하고, 내일도 평온할 것을 빌어주는 것은 옛부터 내려오는 습관이다.
보통 어린이가 깊이 잠들 때까지의 짧은 시간을 이용하여, 엄마들은 짧고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주거나 책을 읽어주거나 한다. 이는 유태인 엄마들이 자녀들에게 직접 전달하는 지적 교육방법의 한 가사라고 할 수 있다. 유태민족의 전통에 따라 엄마가 읽어주는 이야기는 대개의 경우 구약성서 중에서 골라낸다. 그러나 성서에는 어린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많기 때문에, 아이가 쉽도록 풀이를 해서 얘기해 주어야 한다. 이때, 어린이들이 가장 재미있어 하는 것은 주로 영웅들의 이야기이다. 모세가 애굽에서 탈출한 얘기나 다윗 왕과 거인 골리앗의 이야기 등, 아이들은 수천 년의 역사를 단숨에 거슬러 올라가서 마치 자신이 그곳에 있는 것처럼 마음껏 상상력을 펼친다. 한편 가정에서뿐 아니라 유치원에서도 성서 이야기를 곧잘 들려주는데, 이것은 엄마가 침대 곁에서 들려주는 이야기와 함께, 어린이들에게 풍부한 상상력과 지혜를 심어주고 길러주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러시아 혁명가로 유명한 유태인계 아이자크 도이치는 유치원에 다닐 때, 붉은 수염의 선생님으로부터 '출애굽기'를 여러 번 들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그 선생님은 자기 나름의 수식어를 섞어가며 이야기를 했는데, 그가 '홍해의 대가와 바다의 향기가 산들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우리는 구름기둥을 움직이게 하는 산들바람의 부드러운 감촉을 느꼈다'라고 말하면, 교실 안에 있는 학생들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숨을 죽이며 앉아 있었다고 한다.
엄마들이 들려주는 성서 이야기는 작가를 낳는 계기가 된다
엄마들이 들려주는 성서 이야기 중 영웅담에 대한 흥분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상상력이 풍부한 시인과 작가를 낳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유태인 중 영웅 나폴레옹을 찬미한 것이 동기가 되어 걸작을 쓰게 된 시인 하이네를 비롯하여 프란츠 카프카, 토커스 만 등 상상력을 구사하는 타입의 인물이 많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토머스 만은 성서의 단 몇 구절에서 테마를 얻어 장편소설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이렇듯 엄마들이 잠들기 전에 들려주는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풍부한 상상력을 갖게 하는 동기가 되기도 하지만, 정해진 시간에 잠자리에 들게 하는 습관을 기르는 데도 좋은 효과가 있다. 특히 텔레비전에 매혹되어 잠을 자려 하지 않는 어린이의 나쁜 버릇을 고치는 데는 더없이 좋은 방법이다. 그뿐 아니라 책을 통하여 엄마와 어린이가 대화를 나누는 습관을 붙여주면, 성장한 후에 모자나 모녀가 시간이 적더라고 긴밀한 가족 관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부모와 자식간의 신뢰관계의 기반이 침대 곁에서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싹트는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엄마가 잠들기 전에 들려주는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풍부한 상상력을 갖게 하는 동기가 된다. 뿐만 아니라 보모와 자식간의 신뢰관계를 쌓는 기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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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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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9 - 시오노 나나미
사인으로서의 트라야누스
트라야누스 황제의 사생활은 전혀 언급하지 않느냐는 말을 들을 것 같지만, 사실은 쓸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도 입장에서 보면 로마 황제야말로 사악하고 타락한 로마 사회의 상징이겠지만, 트라야누스한테서는 사악이나 타락을 털끝만큼도 찾아낼 수 없다. 입신출세한 인물에게는 거기에 빌붙어 단물을 빨아먹는 것밖에 생각지 않는 육친이나 친족이 몰려들게 마련이지만, 트라야누스에게는 그런 사람이 하나도 없다. 자식을 얻지 못한 트라야누스에게는 다섯 살 위인 누나 마르키아나가 있었다 남매는 무척 사이가 좋았다. 동생이 황제가 된 뒤에는 누나도 황궁에서 함께 살게 되지만, 신분을 과시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주제넘게 나서지 않는 것이다. 생활도 수수해서 집안을 관리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누나의 걱정은 동생의 건강뿐이었다. 하지만 트라야누스는 병을 모르는 건강한 체질이어서, 이것도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동생은 누나가 죽은 뒤에 신격화하지만, 죽은 뒤라면 신들의 반열에 끼어도 로마인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패자의 신들한테까지'로마 시민권'을 준 결과, 30만이나 되는 신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독교 쪽의 속설이지만, 로마에는 기독교의 신도 자기네 신들의 반열에 추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기독교 쪽의 거부로 실현되지 않았다지만, 거부하는 게 당연하다. 그것을 받아들이면 일신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르키아나한테는 마티디아라는 딸이 하나 있었다. 트라야누스는 열다섯 살 아래인이 조카를 무척 귀여워했다. 하지만 이 여자도 어머니와 비슷한 성격이라, 연대기 작가에게 화제를 제공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화제가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트라야누스의 아내 플로티나도 마찬가지였다 황궁에 동거하고 있던 시누이 모녀와 사이좋게 지냈다는 것만으로도 어질고 현명한 아내지만, 플로티나는 에스파냐 속주의 작은 도시에 불과한 이탈리카에서 자란 마르키아나나 마티디아와는 달리, 남프랑스 속주의 주요 도시 님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자랐다. 그리스철학도 화제로 삼을 수 있을만큼 교양이 있었고, 교양에서는 남편인트라야누스를 훨씬 능가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여인도 주제넘게 나서지 않는 여자의 전형이었다. 트라야누스는 아내에게 황후로 번역할 수 있는 '아우구스타' (Augusta)라는 칭호를 주지 않았지만, 거기에 불만을 품은 흔적도 없다. 트라야누스는 누나 마르키아나한테는 비록 죽은 뒤이긴 했지만 '아우구스타'라는 칭호를 주었다. 황제를 둘러싼 세 여인이 이렇게 수수하면, 그녀들을 무시할 수 없는 로마의 상류층 부인들도 수수해지는 게 당연하다 도미티아누스 시대의 부인들처럼 높이 땋아 올린 화려한 머리모양은 자취를 감추었다. 트라야누스는 누나와 질녀의 남편이나 아내의 친척들에게 전혀 특별대우를 해주지 않았다. 그가 대부 같은 입장에 있었던 친족인 하드리아누스에게 질녀의 딸인 사비나를 시집보냈지만, 하드리아누스의 출세는 그 자신의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지 트라야누스가 특별 대우한 결과는 아니었다. 트라야누스는 남의 청탁을 들어주는 데에는 열심이었지만, 자기 일에서는 공명정대함을 철저히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로마 시대 역사가들이 트라야누스의 결점으로 든 것은 술꾼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반 로마인처럼 서녘 하늘에 아직 별이 깜박이고있을 때 잠자리에서 일어나 온종일 세세한 데까지 두루 마음을 쓰면서 격무를 수행한 다음, 목욕과 마사지를 끝내고 저녁 식탁에 앉아 포도주를 마시는 낙도 없다면 어떻게 살겠는가. 포도주에 물을 타서 마시는 게 습관이었던 그리스인이나 로마인들 사이에서 아무것도 타지 않고 스트레이트로 마시면 술꾼이라는 말을 들었다. 또 한 가지 결점은 저녁식사 때 미청년들을 옆에 앉히기를 좋아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것을 사악하고 타락한 취향으로 단정할 수 있을까. 노을빛으로 물든 저녁 하늘을 바라보고 나뭇잎이 살랑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하루를 끝내는 것을 최상의 즐거움으로 여기는 플리니우스 같은 사람도 있다. 트라야누스에게 최상의 즐거움은 미청년들이었다. 그리스 시대의 작품이든 그것을 본떠 만든 로마 시대의 모작이든, 젊은이의 멋진 조각상은 숨막힐 만큼 아름답다. 이런 감정은 동성애가 아니다. 성년이 되기 전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사랑했을 뿐이다. 요컨대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증거로 트라야누스의 '풍경'은 한 사람도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사생활이 지극히 건전하고 결점도 이 정도밖에 안되면, 전기작가는 곤란해진다. 덕분에 이 '지고의 황제'는 전기가 씌어지는 행운만은 누리지 못했다. 지고의 황제로 칭송 받는 것도 칭송 받는 쪽에서 보면 쉬운 일이 아니다. 트라야누스는 원로원이 만장일치로 결의안을 채택했는데도 '지고의 황제'라는 칭호를 거부했다. 그런 칭호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다. 정말로 그런 칭호를 받을 만하게 되었을 때 받으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런 칭호를 받을 만한 때는 언제일까. 다키아 전쟁에 승리하여 로마 제국의 영토를 최대로 넓힌 트라야누스에게 그것은 과거의 어떤 황제도 실현하지 못한 일을 해냈을 때를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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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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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 - 솔제니친(Aleksandr Isaevich Solzhenitsin)
산 소나기
칠흑같이 어두운 어느 날 밤 우리는 고개에 미처 이르기도 전에 느닷없이 폭풍우를 만났다. 우리는 천막에서 기어 나와 한 군데에 움츠리고 모여 앉았다. 소나기는 산등성이를 넘어 우리에게 들이닥쳤다. 온통 어둠뿐이었다. 위도 아래도 옆도 없다. 번개가 번뜩이는 찰나에 어둠과 빛이 서로 갈라진다. 그때마다 벨롤라카야와 추구투룰류찻 태산, 그리고 우리 옆에 산같이 높은, 솟은 전나무들이 어둠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순간 순간이지만 디딜 땅이 있는가 싶으면 도로 어두움뿐이고 심연(深淵)뿐이다. 천둥소리가 골짜기를 메우고 계곡의 요란한 물소리를 뒤덮는다. 번개는 쎄바올의 화살처럼 능선을 때리고 그 때마다 마치 바위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나듯이 거기 무언가 살아 있는 것을 치고 쪼개는 듯이, 여러 갈래 뱀혀처럼 날카로운 빛으로 찢어진다. 이 장관에 휩쓸린 우리는 바다 속의 한방울 물이 풍랑을 두려워하지 않듯 번개와 천둥과 몰아치는 비를 두려워할 것을 잊어버렸다. 우리는 이 세상의, 오늘 처음으로 우리 눈 앞에서 창조된 이 세상의 하찮은 고마운 한 부분이 되었던 것이다.
...... 숨
간밤에는 비가 왔었다. 아직도 하늘을 지나는 구름이 때때로 빗방울을 뿌린다. 막 꽃이 피기 시작한 사과나무뿐만 아니라 둘레의 잔디도 빗물을 담뿍 빨아들였다. 대기에 가득 피어 오르는 그 감미로운 훈기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다. 나는 허파가 터지도록 훈기를 들이마신다. 그리고 가슴으로 온통 느껴 본다. 나는 숨을 쉰다. 이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또 무엇이 있으랴? 이것은 감옥이 우리에게서 박탈하는 저 비길 데 없는, 무엇보다도 값진 자유일 것이다. ……이렇게 여기서 숨을 쉰다는 일. 이 세상의 그 어느 음식도 그 어느 술도, 아니 여인의 입술마저도 이 공기보다 더 맛스러울 수는 없으리라. 꽃과 물기와 싱그러움에 젖은 이 공기보다는. 설령 5층씩 되는 건물의 울안에 갇혀 있는 조그마한 마당일지라도. 오토바이의 소음도 축음기의 시끄러운 소리도 확성기의 쉴새없는 잡음도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비가 오고 난 뒤 사과나무 밑에서 숨을 쉴 수 있는 동안은, 아직은 살 수 있는 것이다.
느릅나무 둥치
우리는 통나무 톱질을 하던 중 느릅나무 둥치를 하나 썰려고 들었다가 그만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지난 해 그 나무를 켜서 쓰러뜨린 다음 트랙터로 끌어내어 통으로 있던 것을 토막을 내고 토막을 다시 끌 것과 트럭에 싣기도 하고 떼로 엮어 물에 띄우고 해서 여기까지 운반해 온 이래 아무렇게나 땅에 굴러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이 느릅나무는 항복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줄기에서 싱싱한 푸른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언젠가는 제대로 생긴 느릅나무가 되거나 아니면 적어도 바람 소리가 나도록 우거진 가지가 될 싹이었다. 우리는 이 나무 토막을 사형대에 걸 듯이 벌써 모탕 위에 얹었었다. 그러나 톱으로 그 목을 켤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대로 켜버린단 말인가? 그렇게도 살려고 하는데. 우리보다도 더 강하게.
<‘현대 세계 수필 문학 63선’, 이어령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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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사회/문화/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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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마카아벨리 평전 - 제12장 12시 정오 (1/2)
마키아벨리가 프랑스로부터 보고한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점이었다. 즉 교황과 왕 사이에 대규모 전쟁이 있으리라는 것과 피렌체는 어쩔 수 없이 그 전쟁에 휘말리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가 먼저 군사적 측면을 고려했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못 된다. 그의 기본 신념을 결국 보병이 전투를 마무리 짓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이 기병과 맞싸울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반면 자신이 만든 민병대에는 기병이 없었기 때문에, 곤팔로니에레와 10인위원회를 설득하여 민병대 편제 안에 새 기병이 아니라 석궁과 총을 휴대한 경기병으로 토스카나의 농촌 사람들로 채워질 수 있었다. 그들을 설득하는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1510년 11월 7일 10인위원회는 서기장에게 (경기병 분견대를 만드는) 임무를 맡겼다 분명히 이는 법으로 그 제도를 확정하기 전에 저번 보병의 경우처럼 일단 시험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발디키아나에서 첫 모병이 있었고 마키아벨리는 이를 위해 11월 13일에서 29일 사이, 12월 3일에서 19일 사이에 두 번에 걸쳐 그곳에 갔다.
두 번째 방문 초입에 그는 시에나로 가서 얼마 전 시효가 끝난 시에나 공화국과 피렌체간의 휴전 협정을 철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화성궁의 영향 아래(화성은 그리스 신화에서 군신(군신) 마르스의 별을 가리킴 - 옮긴이) 한 해를 마감한 마키아벨리는 1511년 새해를 들어 군사에 관한 일에 더욱 많이 관여하게 되었다. 1월 5일, 그는 줄리아노 다 산 갈로와 함께 피사의 성채를 둘러보고 그 상태를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곳으로 가서 6일 간 머물렀다. 14일에는 같은 이로 아레초로 갔으며, 2월 15일에는 시에나의 공격을 막은 피렌체의 요충지인 포초 임페리알레로 향했다. 이제 그는 서기장에서 공화국의 군사 전문가로 바뀌어 있었다! 3월 14일 그는 경기병 100명을 모집하기 위해서 다시 한번 발디키아나로 가서 그 달 내내 그곳에 머물렀다. 모병된 사람들에게는 (4월 한달 동안 기병으로 복무하는 대가로 일인당 10인두카의 금화가 지급되었다. )21일에는 그곳으로 되돌아와 100명의 졍기병을 피렌체로 인솔해 왔으며, 그 첫 사열식으 백야의 주일 la dominica in Alvis(부활철 이후 첫 일요이를 일컬음 - 옮긴이)에 실시 되었다. 민병대는 이런 식으로 점점 발전되어 나갔다. 그것은 훌륭하고 좋은 제도였으나 너무 새로운 것이었기 때문에 뿌리룰 내리기 위해서는 장기간의 평화가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자유 피렌체 공화국의 시간은12시 정오를 향하고 있었다. 그 동안 소데리니 정부라는 솜씨 있는 키잡이 밑에서 평온한 바다 위를 순항해 왔으나, 교황 줄리오 2세의 격한 성품으로 인해 파도가 거칠게 일어나면서 항해는 어려워졌다. 외부로부터 오는 이 같은 압력은 곤팔로니에레의 적과 메디치 간의 지지자들에게 용기와 힘을 더해 주었다. 그들은 근 들어 수적으로나 자신감으로 부쩍 세력이 커지고 있었다. 피에로가 죽은 후 메디치 가는 그 생전의 통치 방식과 귀양으로 잃었던 만큼의 지지자들을 다시 규합할 수 있었다. 조반니 추기경과 점잖은 줄리아노처럼 잔존한 동생들이 보여준 인간다움과 관대함도 지지자를 늘리는데 적지 않게 도움이 되었다. 특히 추기경은 로마에 사럭나 그곳에 들르는 피렌체 사람들엑 호의와 친절을 베풀고 무엇이든 아낌없이 도와주었는데, 그이 이러한 모습은 (지독히 인색하고 오직 자신만 아는) 소데리니 추기경과 큰 대조를 이루었기 때문에 피렌체에선 그와 그의 가문은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곤팔로니에레는 이런 일들로 마음이 크게 상했으나, 달리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다만, 조반니 추기경이 자신의 우호적인 이미지를 드높일 생각에서 거액의 지참금을 미끼로 피에로의 딸 클라리체와 명망 있던 청년 필리포 스트로치를 피렌체 시내에서 결혼시키려고 하자, 곤팔로니에레가 크게 화를 니며 필리포를 어떻게든 벌주려고 애쓴 일 정도가 있었을 뿐이었다. 사실 그의 분노는 극도로 치달아, 마키아벨리에게 법에 따라 8인감찰위원회에 비밀리에 제출될 고소장을 (솜씨와 논리를 초대로 발휘하여) 작성하라고 지시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스트로치 가의 세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벌은 미미한 정도에서 그치고 말았다. 양가문 사이의 이러한 경쟁이 절정에 달했던 것은 이미 1508년초였다. 그러다가 1510년말, 필리포가 자신의 열성과 술책에 제 스스로 말려드는 바람에 곤팔로니에레를 살해하려 한 음모가 발각되었다. 그 주모자인 프린치발레 델라 스투파는 자신이 메디치 추기경으로부터 그 임무를 부여받았으며, 뒤에는 아마 교황이 있을 것이라고 뽐내듯이 말을 뱉어내었다. 이를 통해 소데리니는 어떤 조치를 취할 기회를 잡았다. 1511년 1월 3일, 8인감찰위윈회는 누구든지 메디치 추기경 또는 그의 동생 집에 머루거나, 혹은 그들과 어떤 거래를 하는 것만으로도 반역자로 간주 될 것이라고 포고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로마냐에서는 프랑스 군이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1511년초 줄리오 2세는 미란돌라를 빼앗는 놀랄 만한 업적을 이룩하였다. 하지만, 이 일이 놀랍다는 것은 그곳의 위치가 전략상 중요해서라기보다는 나이든 교황이 전쟁터에서 보여준 개인적 용기 때문이었으므로, 이로 인한 영예는 교황청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 직후 그는 페라라에서 패배했으며, 급기야는 5월 21일 에 가서는 로마 다음으로 교회의 주도(주도)인 볼로냐까지 잃고 말았다. 게다가 교황 자신이 당연히 의지해 왔고 또 불패로 생각해 왔던 교권이라는 무기조차 오히려 그에게 창 끝을 들이대고 있었다. 교회령 국가내의 도시들에는 9월1일 피사에서 공의회가 소집되니 교황은 그곳에 직접 출두하라는 내용의 파발이 돌았던 것이다. 그는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 찬 채, 라벤나로, 이어서 리미니로 물러 났으며, 난생 처음으로 그 불굴의 정신이 평화에 대한 마음으로 꺽이는 듯이 보였다.
만일 왕이 승기의 이점을 잘 살리기만 했어도 전쟁은 교황의 완전한 패배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왕은 존중의 뜻에서건 신중을 기하기 위해서건 군대를 뒤로 물려버렸다. 그로서는 스스로가 공격받은 쪽이 아니라 마치 공격한 쪽인 양, 승리자가 아니라 마치 패배자인 양, 교황 앞에서 겸손함을 보여주려 한 셈이었다. 하지만 왕의 바로 이러한 유약성이 교황의 마음을 다잡게 만들었다. 더욱이 그는 프랑스의 승리를 질시한 아라곤 왕이 슬쩍 그를 자극하여 희망의 여지를 불어넣자, 곧 이전의 호전성을 되찾았다. 그가 취한 첫 조치는 자신의 군대가 패배한 이후에도 여전히 스스로의 수중에 남아 있던 교권의 무기를 쓰는 것이었다. 그는 이로써 앞서 적이 열겠다던 공의뢰를 무산시키고, 적어도 이 측면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되자 분리파 추기경들의 대리인이 자신들의 공의회에 관한 문서들을 피사에서 간행하였다. 교황은 이에 격노하여 피렌체 상인들을 벌주고 도시를 금령에 처하겠다고 위협하였다(당시 피사는 피렌체령이었음-옮긴이). 피렌체인들에게는 첫 번째 위협이 더 무서운 것이었다. 그들이 피사에서 공의회를 열어야 한다는 왕의 압력을 받아들인 것은 줄리오가 나락에 떨어져 있있던 반면 황제는 피사 공의회 개최에 열성적이었던 시점이었고, 프랑스와 독일의 사제들이 그 곳에서 대규모로 만나리라 예상되던 때였기 때문이었다. 그들도 보고 있듯이, 이제 줄리오는 그토록 많은 패배를 겪고 병이 들어 죽는다고까지 소문이 났으면서도 몸과 마음이 다시 되살아나고 있었다. 반면 황제는 으레 그렇듯이 이런저런 생각 속에서 머뭇거리고 있었고, 공의회는 겨우 세 사람이라는 소수의 대리인들에 의해 아무런 위용도 갖추지 못한 채 열릴 예정으로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피렌체인들은 자신들이 커다란 위험에 노출되어 었으며 교황의 분노에 손쉬운 목표물이 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대리인들에게 추기경들이 도착할 때까지 더 이상 공의회를 진행시키지 말라고 명한 뒤, 사람을 보내 추기경들을 오지 못하게 하고 프랑스 궁정에는 제발 이 문제의 공의회를 자신들의 영토 바깥 멀리로 내보내 주도록 간청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마키아벨리가 선임되었는데, 이번 일에는 솜씨 있고 믿을 만한 데다 무엇보다도 기민하고 민첩한 인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이미 앞서의 내용으로 독자들은 눈치 챘을지 모르지만, 서기장이라고 그때까지 마냥 손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5월 5일에는 그는 모나코의 군주인 루차노 그리말디를 만났다. 그의 행위를 응징하고 다시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마키아벨 리가 그곳으로 가는 중에 받았던 조약에 관한 훈령 때문에, 그 임무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왜냐하면 공화국은 해적 행위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조약 상대국의 일연의 행동들에 대해 도저히 점잖게 묵과할 수 없다고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화국으로서 모나코에서 서명된 문서가 거의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었고, 마키아벨리의 경력에서 볼때는 (자신이 (대사)라고 불리는 것을 듣는 작은 만족감을 제외하고!), 그것에 쏟은 적지않은 시간과 고생스러웠던 여정의 기억만이 남았을 따름이었다. 6월 5일 피렌체로 돌아온 그는 곧 시에나와의 새 조약 체결에 뛰어들었다. 이 거래는 페트루치가 자신의 이익을 노리고 교황을 사이에 넣어 진행시킨 것인데, 시에나로서는 조약의 대가로 몬테풀차노를 반환해야 했기 때문에 손해를 보는 셈이었다. 이 후 그는 8월 24일부터 9월 7일까지 새 민병대에 배치할 백 명의 기병을 더 뽑기 위해 발다르노 위쪽 지역과 발디키아나, 카센티노 등지를 돌아다녔다. 그는 이 일에서 돌아오자마자 곧 프랑스로 가는 네 번째 사절 임무를 준비하였다. 그는 9월 10일 길을 떠나 12일에는 파르마와 피아첸차 사이에 위치한 보르고 산 돈니노에 도착했다. 카르바할, 산 말로, 코센차, 산세 베리노 등 교황에 대항한 6명의 추기경들 중 4명이 이곳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먼저 가장 중요한 인물인 카르바할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어서 코센차와 산세베리노가 합류하였고, 결국에는 그들 모두가 산말로를 만나러 갔다. 서기장은 이 세 번의 회합에서 시종일관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되풀이하였다. 즉 교황이 화를 내는 바람에 피렌체인들은 곤경에 처해 있으니 피렌체 가까이로 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더불어 (아직 공의회에 필요한 준비들이 갖추어지지 않았을뿐더러 교속 양쪽으로 힘을 가지지 못한 상태에 있으므로, 공의회를 동요시키지 않도록 행동해 달라)는 요청도 있엇다. 추기경들은 마키아벨리를 문 밖에 세워놓고 두 번에 걸쳐 장시간 토론한 끝에, 그들이 피렌체로 가지는 않겠지만 대신 열흘에서 열이틀 안에 폴트레몰리를 경유하여 피사로 갈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하지만 서기장은 그들의 말에서 이미 공의회에 대한 열기가 많이 사그라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밀나로까지 가서 그곳 프랑스 총독에게 자신의 임무를 설명하였는데, 공의회에 대해 자신이 왕에게 말할 내용을 빼고 단 지 피렌체인들에게 닥친 위험에 관해서만 언급하였다. 그리고 난 뒤, 15일 느지막한 시간에 다시 프랑스를 향애 길을 떠났다. 그는 말을 재촉해서 22일 왕이 머물고 있는 블로아에 도착하였다. 그곳에는 작년 마키아벨리와 교체해서 부임해 왔던 로베프토 아차이우올리가 여전히 대사로서 피렌체를 대표하고 있었다 서기장은 다음날 그와 함께 왕을 알현하였다. 그날은 교황이 피렌체에 금령을 선포한 날이기도 했다. (마키아벨리의 정중한 인사가 있은 후), 두 피렌체인은 내용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왕을 설득할 수 있을 만한 모든 논점들을 압축한) 문서를 왕 앞에서 낭독하였다. 그는 먼저 공의회 시도를 끝내고 합리적인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피하라고 권유하면서, 피렌체가 중재 역할을 맡겠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왕은 평화에 애착을 보이면서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신께 바라건대, 당신들이 그렇게 할 수 있기를!)), 공의회가 교황을 조약에 끌어들이려는 의도로 계획된 것이라는 반론을 폈다. 따라서 그것을 지금에 와서 취소한다면 그에게 물린 재갈을 도로 풀어주슨 셈이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제기한 두 번째 논점은 공의회를 피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열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왕은 즉시 그리고 단호하게 대답하기를, 공의회를 그곳에서 연다고 이미 선포한 상황에서 장소를 옮긴다면 명분에 손상이 갈것이므로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앞의 두 논점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를 대비하여 작성된 마지막 세 번째 논점은, 공의회 개최를 두세 달 연기하여 공화국이 스스로를 강화할 시간적 여유를 달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말한 그렇게 했으나, 이는 사실 (시간을 벌겠다)는 피렌체의 통상적인 정책의 일환이었다. 혹시 교황이 죽는다든가 또는 다른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그들이 처한 위험이 해소될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왕은 이 마지막 논점은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왕의 명으로 공의회를 만성절까지 연기하라는 편지가 추기경들에게 보내졌다.
그러므로 피렌체인들이 얻은 유일한 이점은 시간인 셈이었다. 그것은 대단한 것은 못 됐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피렌체인들은 그 힘든 여정을 무릅쓴 그들의 서기장에게 고마움을 표했어야 했다. 그는 더 이상 처리할 일이 남아 있진 않았지만, 되돌아가는 어려움을 겪기 전에 여독을 풀기 위하여 궁에서 약 3주를 더 머룰렀다. 이동안 그는 1-인위원회에다 직접 간략한 내용의 편지 한 통을 썼다. 우리에게는 왕과의 토론 내용을 길게 설명한 원본 편지 두통이 남아있은데, 둘 다 서명은 아차이우올리가 했지만, 한 통은 마키아벨 리가 쓴 것이고 또 한 통은 다른 한 서기가 작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설사 우리가 그 중 한 통만 가지고 있다 해도, 문체로 보아 누가 쓴 것인지를 쉽게 알 수가 있다. 10월 중순경, 그는 10인위원회로부터 귀환 허락을 받고, 다시 길을 되짚어와 11월 2일 피렌체에 닿았다. 그는 이번에도 미처 말에세 내릴 틈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도착하는 바론 그날 새로운 임무가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날 아침 일찍 이미 피사로 말을 몰고 있었다.
그곳에는 11월 5일 시작되는 공의회 첫 회기에 참석하기 위해 분리파 추기경들이 벌써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교황에 의해 추기경의 직위를 몰수당하고, 사람들로부터는 미움을 받는 데다, 사제들의 복종도 얻어내지 못하는 상태에서, 신명은 적고 위험은 큰 처지에 놓여있었다. 왜냐하면, 로트넥의 군주와 50명의 프랑스 궁사들로 이루어진 호위대가 고작일 뿐, 더 이상의 호위가 갑작스럽게 거부되었기 때문이다. 그곳의 피렌체인들은 그 소수의 인원조차 싫어했으며, 호위받는 사람들 못지않게 호위대에도 곱지 않은 눈길을 보냈다. 그리하여 피렌체 정부는 급히 마키아벨리르 파견하여, 자신의 민병대로부터 뽑아온 삼백 명의 병사로 50명의 프랑스 군을 다시 에워싸고는 추기경들을 설득하여 그들 자신과 그들의 논쟁과 그들의 야심을 모두 함께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하는 임무르 맡겼던 것이다.
그가 떠나고 몇 시간후, 10인 위원회는 피사 감독관 로쏘 라돌피와 안토니오 포르티나리로부터 모든 것이 평온하다는 보고를 받고는 가능한 한 군대를 개입시키지 말고 일을 처리하라는 편지를 뒤따라 보냈다. 그래서 그는 곧장 피사로 가서 공의회의 첫 회기에 참석한 다음, 카르바할 추기경을 만났다. 그는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마치 정부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죄송하다는 식의 어조로 피사에서는 모든 것이 부족하고 어렵다는 말을 꺼냈다. 추기경은 이에 대해, 물론 그곳이 풍족하지도 안락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그들은 불평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하지만 자신들이 장소를 옮기는 것이 피렌체인들의 원하는 바라면 서로 의논해 보자고 말하였다. 마키아벨리는 그가 자신의 말뜻을 알아챘음을 느끼고, 그들이 (토스카나에서보다 훨씬 더 복종적인 사람들이 있는) 프랑스나 독일로 옮ㄱ니는 편이 그들에게도 백번 낫다는 등등의 이야기를 해나갔다. 추기경은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 말을 전하겠으며 프랑스 왕과 독일의 황제에게 편지를 써야할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마키아벨리는 한술 더 떠 앞서 산 논니노에서 추기경과 동료들이 두세 회기 후에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있다고 한 말을 다시 상기시켰다. 카르바할은 지겹다는 듯이 그것도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하였다. 서기장은 그들이 이 문제를 진지하게 숙고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이 행여나 피렌체 정부로부터 어떤 도움이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말 것이며, 복종하려 들지 않는 피사의 사제들에게 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라도(그들 자신이 이 문제에 신경을 써야 할 것임)을 주지시켰다.
마키아벨리의 이러한 말에다 사제들의 적의,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동요로 마음이 움직인 추기경들은 7일의 두 번째 회기를 끝으로 공의회란 유령을 밀라노로 옮겨가기로 작정하였다. 마키아벨리는 11일 피렌체오 돌아왔고, 추기경은 일행은 12일에 떠났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그 도시에 대한 교황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그는 피렌체가 소데리니 정부 아래에 있는 한 결코 조용하게 놔두지 않으리라 결심한 터였다. 그는 12월 1일에 금령을 일시 철회했다가 15일에는 그것을 원상복구시켰다. 물론 사람들은 그 소식을 무관심하게 받아들였다. 이는 아무 효용성도 없는 무기였으나, 그는 그 동안 다른 무기를 준비해 오고 있었다. 이는 자신의 편에서는 회심의 일착이었지만, 장차로는 확전으로의 길을 열어놓고 스스로를 다시 한번 (이탈리아의 우환을 매개하는 숙명적 존재)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금령보다 더 효과적일 분 아니라 프랑스가 이탈리아에 대해 그랬던 것만큼이나 프랑스에 대해서 재앙과 같은 존재인 에스파냐의 그 무시무시한 보병을 등에 업고, 그는 앞으로 볼로냐를 탈환하게 될 것이었다. 이어서 피렌체를 굴복시킨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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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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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1.사물을 바로 보는 눈
생각 두번 하기
그리스의 유리피데스는 “두 번째 생각이 첫 번 생각보다 더 현명하다”고 하며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을 그대로 시행에 옮기느니보다 다시 한 번 더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생각을 가다듬지 않고 감정이 내키는 대로 곧바로 행하는 것은 야만스러운 일이다’고 예기는 전한다. 또 길거리에서 들은 말을 길거리에서 이야기하면 덕을 버린다고 한다. 무슨 일이나 깊이 생각할수록 실수가 적은 법이다. 그러나 너무 깊이 생각만 하는 것도 좋지 않다. 사기는 ‘아무리 현명한 사람도 너무 깊이 생각하면 실수할 수 있다‘고 하였고 천려일실이란 말이 여기서 연원하였다. 그러므로 두 번 정도면 좋다는 논어의 말에 따라 재고를 하여 보고 시행하는 것이 좋다. 중국 당나라 시인 가도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새는 연못가지 위에서 졸고, 중은 달 아래 문을 두드려 연다.
그는 시를 짓고서 문을 두드린다로 하느냐, 만다로 하느냐를 골똘히 생각하며 가다 도읍장 한유의 행차길을 막아, 그 죄로 그 앞으로 끌려 갔다. 전후 사정을 들은 한유는 두번 생각하고는 민다보다 두드린다가 더 좋다고 조언해 주었다. 원고를 다듬는다는 뜻의 퇴고란 말은 여기서 유래되었다. 필자도 새까지 잠든 산사가 너무 조용하므로 파격의 아름다움을 주기 위해 정적을 깨지 않으면서 부드럽게 두드리는 소리가 더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이다. 가도처럼 여러번 깊게 생각하기보다 한유와 같이 두번만에 명쾌한 답을 내리는 것이 좋다.
두번 생각하는 것이 좋다. (Second thoughts are best.)
스승과 제자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1595~1650)는 ‘담쟁이 넝쿨은 그 버팀대보다 높아지지 못한다’는 표현으로‘비평가가 아무리 뛰어나도 그들이 비평하는 작가의 능력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하였다. ‘제자가 스승보다 높지 못하고, 종이 주인보다 높지 못하다‘는 예수의 말씀처럼. 이와 달리 순자는 권학편에서‘푸름은 쪽에서 취하였지만 쪽보다 푸르고, 얼음은 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물보다 차다‘고 하여 제자가 열심히 노력하면 오히려 스승보다 훌륭해 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남을 ‘청출어람 이어람’이라고 표현한다. 공자의 제자 안연은 공자를 평하길 “우러러보면 더욱 높고, 들으려 하면 더욱 좋으시다‘고 하여 자신이 스승의 뛰어남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뒤따라오는 젊은이들이 두렵다’고 하면서 젊은이들이 열심히 하면 무한한 가능성을 갖는다고 말했다.
스승이 훌륭하면 흘륭할수록 제자가 그를 능가하기가 힘이 든다. 그것은 시냇물이 그 원천보다 높아질 수 없는 이치와 같다. 그러나 예수는 ‘학생이 선생보다 낫다고 할 수 없으나 완전히 다 배우고 나면 그때는 선생과 같이 될 것이다‘고 하였다. 열심히 노력하여 스승과 같이 되도록 노력하자.
스승보다 나은 제자 없다. ( A stream cannot rise above its sources.)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므로 시냇물은 그 원천이 되는 샘물보다 높은 곳에 있을 수 없다. 비록 노자가 강과 바다가 모든 계곡의 왕자가 될 수 있는 것은 항상 낮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지만 말이다.
3. 제대로 된 가르침은 삶을 바꾼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반듯한 널판지에 휘어진 널판지를 얹으면 휘어진 널판지가 반듯해진다고 논어는 말한다. 아이들의 버릇을 들일 때는 어른이 솔선수범해야 한다.
아비만한 자식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의 자식치고 그 부모만큼 훌륭한 아들, 딸들은 많지 않다고 한다. 소나무나 잣나무 아래서는 풀이 번식하지 못하듯이 큰 부모의 그늘에 가려 자식들이 기를 펴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훌륭한 지위와 사회적 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자식 중에 부모의 인품이나 인격에 걸맞지 않는 행동을 하다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훌륭한 아버지가 불철주야 노력하여 만들어 준 재산을 ‘서로 더 많이 먹겠다’고 형제간데 이전투구하는 사람이나, 또 아버지는 ‘칼국수’로만 식사를 하는데 아들은 ‘룸살롱’을 헤매고 다니면서 하룻밤에 천만원을 쓴 사람이 그러하다. 자식 겉 낳지 속은 못 낳는다고 한다. 특히 서양에서는 성직자의 자식 중에 ‘망나니’들이 많이 나왔던 모양이다. 아마도 부모에게 너무나 많은 종교적 스트레스를 받고 자랐기 때문인 것 같다.
동양에서는 자식이 부모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 ‘불초’라고 한다. 부모를 닮지 않아 어리석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러한 불초들은 중국의 훌륭한 임금의 대명사로 쓰이는 요나 순 임금에게도 있었다. 요 임금에게는 단주라는 어리석은 아들이 있었고 순 임금에겐 상균이라는 불초가 있었다. 이들 단주나 상균은 자기 겸사를 위한 불초가 아니라 진짜 ‘망나니’로서, 부모의 속을 태운 못난 자식들이었다. 공자의 아들 백어는 “당신은 아버지로부터 특별한 가르침을 받았느냐?”는 물음에, “달리 배운 바가 없다“고 답하였다 한다. ‘재주가 있건 없건 부모는 항상 제 자식이 제일 잘났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라고 말한 공자가 자기 자식에게 무관심했던 게 아니라, 그는 자식마저도 편애하지 않는 엄격한 도덕주의였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아울러 아무리 훌륭한 성현이라도 자식을 올바로 키우기가 힘이 든다는 것을 반증한다. 맹자는 ‘자식의 잘나고 못남은 다 하늘의 뜻이다’라고 하였다. 자식에게 잘 되라고 강요하거나 호통만 치지 말고 부모가 솔선수범하여 자식이 자연히 따르게 하라는 말이다.
호부견자
‘호랑이 아비에 개 아들’란 말이 있다. 아버지는 큰 인물인데 아들이 아버지가 이루어놓은 업적을 받들어 계승하지 못 한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부모는 ‘개 아비라도 호랑이 자식’을 원한다. 그래서 자식이 잘 되게 하려고 갖은 방법을 동원한다. 하지만 자식만큼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자식은 부모에 못 미치는 경우가 많다. 아비만한 자식이 없기 때문이다. 훌륭한 자식을 키워내려면 부모의 끊임없는 솔선수범이 앞서야 한다.
아비만한 자식은 없다(Ciergymen's sons always turn out badly.)
맨손으로 시작하여 세계적인 대재벌을 이루고 죽은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한다.
“지금까지 하고 싶은 일은 마음먹은 대로 다 이루었지만 딱 두가지는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골프공을 마음먹은 방향으로 쳐내는 것과 자식을 내 뜻대로 키우는 것’이 그것이다.”
세 살 버릇
어린아리 때 형성된 습관은 그 사람의 일생을 좌우한다. 그 때 버릇이 나쁘게 들면 어른이 되서도 고치기 힘이 들기 때문이다. <실락원>과 <복락원>의 작가 밀턴(1608~1674년)은 “아침에 그날의 날씨를 알아 볼 수 있듯이 어린 시절을 보면 그 사람의 장래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잘 될 나무는 떡잎부터 알 수 있다는 말이다.
노자는 “하늘의 원기를 두텁게 받은 인간의 모습은 욕심없는 갓난아이와 같다. 성인이란 알고 보면 갓난아이처럼 순수하고 소박한 사람이다.”고 말했다. 맹자도 “훌륭한 사람은 어릴 때의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어른이 되면 어릴 때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을 지니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수 역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나니, 너희가 변화되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고 단언했다. 인격 형성은 어릴 때 하여야 한다. 그릇을 만들 때 초기에 모양을 잘 만들고 불로 충분히 구워내야 완전한 형태를 이루듯이 어릴 때에 좋은 성격을 형성하도록 부모들이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영국 시인 알렉산더 포프(1688~1744년)도 어렸을 적의 교육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백지에 글을 쓰는 것과 같고, 노인을 가르치는 것은 이미 쓰여진 종이의 여백에 글을 써 넣는 것과 같다. 어릴 때 교육을 단단히 시키고 나쁜 버릇이 들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어린아이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라. 그러면 늙어서도 그 길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은 미련한 짓을 하기 일쑤이므로 징계의 채찍을 통해서 이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성경은 전한다. 반듯한 널판지에 휘어진 널판지를 얹으면 휘어진 널판지가 반듯해진다고 논어는 말한다.
영국의 서정시인 워드워즈는 다으뫄 같이 읊었다.
무지개를 볼 적마다 나의 가슴은 생의 환희로 가득 차나니
내가 어릴 적에도 이와 똑같았고
어름이 된 지금도 그렇고, 늙어서도 그럴 것이니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죽느니만 못하느니라!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나니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원컨대 생애의 나날이
자연을 숭앙하는 이 마음으로 이어져 갔으면 하노라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가고(The child is the father of the man)
원인 없는 결과 없다(As the twig is bent, so is the tree inclined.)
어린 나뭇가지가 휘어지면, 그 나무가 성장하여도 휘어진다. 어릴 때 버릇을 고쳐놓지 않으면 자라서도 그 버릇을 그대로 갖게 된다. 또, 한번 굳어진 버릇은 고치기 힘이 든다.
버릇 길들이기
바늘 도둑이 소 도둑된다. 어릴 때 잘못된 일을 단단히 고쳐놓지 않으면 자라서 큰 화근을 만들어 낸다. 불이 타오르기 시작할 때 끄지 않으면 마침내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춘추에도‘풀이 무성하게 자라도록 버려두지 말라’는 말이 있다. 하찮은 풀이라도 무성하게 자라 덩굴지면 뽑아낼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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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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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일기 - 이해인
늘 푸르게 살라 한다.
수평선을 바라보며
내 굽은 마음을 곧게
흰 모래를 밟으며
내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바위를 바라보며
내 약한 마음을 든든하게
그리고
파도처럼 출렁이는 마음
갈매기처럼 춤추는 마음
늘 기쁘게 살라 한다.
이해인 : 성 베네딕도 수녀회 수녀이자 시인으로 어릴 적부터 책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하였습니다. 스무 살부터 수녀원세서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펴낸 책으로는 [민들레 영토][내 혼에 불을 놓아][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두레박][꽃삽][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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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 박병엽
비가
그렇게 내리고
눈이
그렇게 내리고
또, 강물이
그렇게 흘러들어가도
바다가
넘치지 않는 건
물고기들이
먹어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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